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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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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

12 함양 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에게 보냄

13 족제(族弟) 이원(彜源)에게 보냄

14 공주 판관(公州判官) 김응지(金應之)에게 답함

15 응지에게 답함

16 응지에게 답함

17 응지에게 답함

18 응지에게 답함

19 응지에게 보냄

20 이중존(李仲存)에게 답함

21 이중존에게 답함

22 이중존에게 답함

23 진정(賑政)에 대해 순찰사(巡察使)에게 답함

24 진정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25 순찰사에게 올림

26 순찰사에게 답함

27 순찰사에게 답함

 

 

 

함양 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에게 보냄

 

 

나는 그대와 본래 가부(葭莩)의 친분도 없고, 또 티끌만 한 혐의도 없는 처지였사외다. 급기야 안의(安義)에 있게 되니, 함양(咸陽)과 안의는 본래 정해진 겸관(兼官)이어서, 4년 동안 서로 이웃이 되어 피차의 한계를 두지 아니하고, 한 달에 세 번 옥사(獄事)를 동추(同推)하는 모임이나 이웃 고을 원님들과 틈을 내어 만난 자리에서 흡족히 담소를 나누어 흉금의 간격이 없었으니, 아무리 한마을의 옛 친구라 할지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었겠소?

하당(荷堂 연꽃이 피어 있는 집)과 죽관(竹館 대숲이 있는 집)에서 베개를 나란히 베기도 했고, 풍헌(風軒 창이 있는 작은 집)과 월사(月榭 달구경하는 정자)에서 술잔을 나누기도 했으며, 물놀이와 산놀이에도 서로 빠진 적이 없었지요. 백성의 근심이나 고을의 폐막(弊瘼)을 잠깐 사이에도 같이 상의했고, 공문이나 사신(私信)도 주고받지 않은 날이 없었소. 이른바 머리가 희도록 서로 만나도 낯선 사람 같고, 초면 인사만 나누어도 옛 친구 같다는 것이 어찌 헛말이겠소? 진실로 큰 허물이 없는 한, 어려움을 만나도 변치 않도록 함께 기약하기를 바랐던 것이외다.

그런데 지난번에 보내온 후촌집(後村集)을 지금 보니, 우리 선조 금계군(錦溪君)을 모함하여 욕보인 것이 한이 없었소. 이제 나와 그대는 하루아침에 백세(百世)의 원수가 되었구려. 이렇다면 나는 백세의 원수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고 베개를 나란히 베며, 담소를 나누고 서로 추종하면서도 4년 동안이나 까맣게 몰랐던 셈이오.

무릇 우리 선조의 후손된 자라면 누구나 원통하고 분해서 피로써 얼굴을 적시고 눈물을 삼키는 이와 같은 감정을 똑같이 품지 않으리오마는, 나는 그대에게 더욱더 원통하고 한스러운 것이 있소. 지난해 동추의 모임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그대가 초책(草冊 초벌로 쓴 책) 하나를 꺼내며,

 

우리 집안에는 본시 문헌이 없는데 선조 후촌공이 두어 편 남긴 글이 있어, 장차 인쇄에 부칠 생각으로 묘도문자(墓道文字)와 연보(年譜) 및 유사(遺事)를 주워 모아 겨우 한 책을 이루었소. 범례만이라도 대강 열람해 주기 바라오.”

하면서, 손수 종이에 싸 나의 하인(下人)에게 넘겨주었소. 돌아와서 잠깐 펴 보니, 표시하려고 붙여 놓은 쪽지가 하도 번잡하고 새까맣게 지우고 고쳐 쓴 자국이 몹시 어지러웠소. 나는 번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성미라 우선 책을 접어 둘 수밖에 없었고, 뒤미쳐 번고(飜庫)의 행차가 있어 마침내 한 번도 훑어보지 못했는데, 그대가 서울로 보내 정서(淨書)하는 일이 급하다 하며 불시에 찾아가고 말았으니, 그 속에 무슨 말이 들었는지 실로 알지 못했소.

그 후에 배신전(陪臣傳)에서 뽑아 싣게 한 것도 내가 지시한 바요, 각수승(刻手僧)을 빌려 가게 된 것도 내가 보낸 것이지 않았소? 그리고 또 내가 동추하러 갔을 때 그대와 함께 함양군의 학사루(學士樓)에 올랐는데, 이때 누 가운데에서 각자(刻字)하는 일이 한창이었지요. 나는 우리 고을 중이 새긴 목판 두어 개를 가져다 보고 솜씨가 정교함을 자랑하고 나서, 인쇄한 뒤에 한 벌을 선사해 달라고까지 하였지요.

내가 이렇게 즐거이 남의 아름다운 일을 도와서 완성하는 데에 참여하게 된 까닭은, 진실로 강화도에서 순절한 일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감동시킬 뿐더러 고가(故家)의 남겨진 가승(家乘)이니만큼 그 한 벌을 보관하고 싶어서였지요. 어찌 그 속의 모함과 패설(悖說)이 이 지경까지 이를 줄이야 생각인들 했겠소?

전번에 그대가 갑자기 와서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실수였다고 사과하고, 또 이렇게 말하였소.

 

나는 봉급의 여유가 좀 있어서 비록 인쇄하는 역사(役事)를 맡기는 했지만, 글을 삭제하거나 그대로 살리는 일은 할 사람이 따로 있으며, 더욱이 나는 그때 병이 심하여 미처 자상히 열람하지 못했소이다. 만약 이 한 단락이 들어 있는 것을 과연 알고서 일부러 보내어 보게 했다면, 세상에 어찌 이러한 심술이 있겠소? 이 일이 사실과 어긋남이 이미 이와 같으니, 마땅히 훼판(毁板)하고 고쳐 넣도록 빨리 서둘 따름이오. 떠들썩하게 절교를 통고하는 일은 오히려 나중 일이오.”  ()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그 이야기가 분명 진정에서 나온 것 같았는데, 급기야 그대가 윤신수(尹莘叟)에게 답한 편지를 얻어 본즉 박 아무개가 안의에 있을 적에 여러 번 열람해 보고 아주 잘 되었다고 칭찬했다.’고 하였소. 나는 이에 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떨리고 쓸개가 뒤틀리는 듯싶었사외다. 사람이 효경(梟獍)이 아닌 이상, 무슨 심보로 남이 제 선조를 욕했는데 도리어 잘 되었다 칭찬했겠으며, 사람이 귀역(鬼蜮)이 아닌 이상 무슨 억하심정으로 남의 선조를 욕하고서 그 책을 그 자손에게 보내 준단 말이오? 이 일을 참을 수 있다면, 참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소?

그대가 이미 이러한 간계를 품은 이상, 무슨 까닭으로 와서 바야흐로 눈에 핏발이 설 이 사람을 만나 보았으며, 무엇 때문에 종전에 살피지 못한 잘못을 사과했으며 또 훼판을 빨리 서둘겠다고 말했소? 무엇 때문에 이제부터 방향을 바꾸어 능주(綾州) 족형(族兄)의 집으로 가야겠다고 말했소?

아아, 원통하도다! 예전에 칠신(七臣)이 고발을 당할 때에 우리 선조는 특히나 흉악한 무리들의 원수가 되어, 그들이 칼을 숨기고 그림자를 엿본 적이 여러 해였소. 나중에 고성(高成) · 김응벽(金應璧)의 옥사를 날조함에 미쳐, 우리 선조의 공초를 구실 거리로 삼은 것은 나라를 해치려는 이이첨(李爾瞻)의 짓이었고, 앞뒤로 상관없는 일을 끌어들여 왕명을 포고하는 글에 덧붙인 것은 유감을 풀려는 기자헌(奇自獻)의 짓이었소. 급기야 계해년(1623, 인조 1)에 반정(反正)이 있은 뒤로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본래 사실을 잘 모르고 어름어름 들추어내니 비방하는 물의가 드높아지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따라서 옛 원한을 갚으려는 자, 남의 화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 선조가 마침내 죄를 얻어 10여 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로 떠돌아다녔던 것이오.

그 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명(遺命)으로 사면 조치가 내렸고 선왕(先王 인조)의 밝으신 통찰이 일월같이 높이 비쳤으며, 당시 조신(朝臣)들이 죄의 경중을 심의한 기록이 의금부에 모두 남아 있고, 조정에서 같이 벼슬한 뭇 어진 이의 변론은 천지신명과 대질할 만했던 것이오. 그러기에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貞公 김상헌(金尙憲))은 비()에 명()하기를,

 

근세 사림(士林)에서 믿고 의지하며 중히 여기는 이로는 이오리(李梧里 이원익(李元翼)) · 이백사(李白沙 이항복(李恒福)) · 신현헌(申玄軒 신흠(申欽)) · 오추탄(吳楸灘 오윤겸(吳允謙)) · 정수몽(鄭守夢 정엽(鄭曄)) 같은 분들이 있는데, 이 몇 분들은 절대로 자기 사정(私情)에 치우쳐 공론(公論)을 폐기할 분들이 아니었다. 이때 공을 비난하는 입들이 마치 남기성(南箕星)처럼 크게 벌려 있었으나, 공은 스스로 변명하지 않았으며, 이 몇 분들이 나서서 밝혀 주었다. ‘중인(衆人)들은 헐뜯었으나 군자는 완인(完人)으로 여겼다.衆人所毁 君子所完 하였으니, 그 말을 증명하기에 족하며 백세에 길이 거울이 될 것이다.”  ()의 글은 여기까지이다. 

하였다오. 우암(尤菴) 송 문정공(宋文貞公 송시열(宋時烈))이 쓴 묘표(墓表)에는,

 

당시 국구(國舅)의 옥사가 여러 분에게 미쳐 갔다. 공은 다만 평소에 국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실을 원사(爰辭)에서 밝혔고, 또한 그 일은 증거도 없이 유야무야되었으니 국구에게는 아무런 손상이 없음을 보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앞의 원사를 나중에 집어넣어 왕명을 포고하는 글에서 공을 욕보일 줄은 더욱 당초에 우려했던 바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노선생(老先生)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금계(錦溪)는 절대로 다른 의도가 없었는데, 불행히도 무고(巫蠱)의 옥사가 잇달아 일어나서 드디어 오늘날의 억울한 죄안(罪案)이 되었다.’ 하셨다.”  묘표의 글은 여기까지이다. 

하였소.

! 이것은 모두가 선현들의 정론(定論)이오. 신도비에 분명히 새겨져 있고 여러 문집 속에 환히 알려지고 널리 나열되어 있어, 온 나라의 비방이 깨끗이 풀리고 백세의 공론이 이미 결정되었는데도, 새까만 후배들이 나중에 악담을 가하고 수백 년 뒤에 함부로 모함하는 붓을 휘두르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술이오? 말뜻이 참혹하고 표독하여, 우리 선조를 모함하고도 부족해서 곧장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을 무고에 몰아넣은 것은 도대체 또 무슨 심술이오?

존가(尊家)의 후촌공(後村公)이 한패거리가 되어 스스로 부화뇌동하고자 한 자가 누군지 나는 모르겠소. 원사를 주워 모아서는 흉악한 무리들이 구실로 삼은 것이 저와 같고, 억울한 죄를 애통히 여기어 뭇 어진 이들이 확실한 결론을 내린 것이 이와 같소이다. 설령 당시에는 사실을 자상히 모르고 술자리에서 떠들며 이야기하다가 혹시 함께한 사람들의 말을 따랐다 하더라도, 그 뒤에 사건의 근원이 분명하게 밝혀졌으니 필시 전에 한 말의 실수를 후회하여 기꺼이 다른 어진 분들과 생각을 같이하였을 것이오. 또 설령 당시에는 떠도는 비방을 단단히 믿고서 이전의 의혹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하더라도, 세상의 장고가(掌故家 고사(故事)에 해박한 사람) 입장에서 보면 길거리에서 주워듣고 함부로 거론하는 것도 오히려 놀라운 일이거늘, 하물며 당시에 직접 기록한 글도 아니고 오로지 뒷사람이 나중에 부연한 것에서 나온 경우이리오? 이는 자기 선조의 공적을 드러내고자 하다가 먼저 스스로 선조를 속인 죄목에 빠진 것이며, 이름은 실기(實記)라 해 놓고 도리어 실제 사실과 어긋나는 처지에 놓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오.

설사 또 당시에 대간(臺諫)으로 나갈 길이 막히어 억측으로 외쳐 댈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 후 십수 년 동안 간관(諫官)으로 출입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무엇을 돌아보고 꺼려서 마침내 한 번도 평소 가슴에 쌓인 말을 털어놓지 않았소? 설사 또 당시에 품은 원한이 이미 깊어서 손수 기록해 두었다면 그 뜻이 출세길에 간절하여 원한을 보류했다가 집안에 전한 것을 마침 드러내 보인 셈이니, 어찌 후촌(後村) 같은 어진 이로서 과연 이런 일이 있었겠소?

더구나 우리 집안의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선생은 금계군의 손자요, 존가의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는 바로 후촌공의 조카요. 존가에서 남에게 화를 끼칠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이와 같다면 이는 반드시 그 가정에서 들은 바가 있을 터이니, 어찌하여 그 원한을 숨기고 그 집안사람을 벗하려는 것이오? 지금 일로 미루어 보면, 그 원한을 숨기는 것이 본래부터 물려받은 가법(家法)이었는지? 이도 알 수 없겠구려.

! 성이 함락되어 풀 베듯이 목숨이 잘리던 날에 적의 칼날에 순절한 것만으로도 족히 한 세상에 드날리고 뒷자손에게 영광이 될 수 있으며, 구구한 대간의 자리에서 한 번 처진 것이 이미 세워 놓은 큰 절개에는 진실로 영향을 끼칠 것이 없는데, 하필 남의 조상을 지독하게 모함한 연후에야 비로소 그 시대에 환히 드러난단 말이오? 뒷사람들이 어름어름 포착하여 추후에 서술한 것은 역시 교묘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치졸함만 드러내 보인 것이라 하겠소.

근자에 들려온 소문에 더욱더 놀랄 것이 있었소. 그대가 황당한 말을 꺼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장황히 떠들어 대며, ‘아무개와 왕래를 끊지 않고 술자리에서 단란히 정을 나누기를 예전이나 다를 바 없이 한다.’ 한다니, 그 말이 도리에 어긋남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소!

영남의 고을을 왕래하던 때를 돌이켜 생각하면 상기도 몹시 가슴속이 아프고 한스러운데, 심장이 쑤시고 뼈에 사무치는 이날을 당하여 차마 다시 단란하게 만나리오? 오늘날 그대의 언행은 번번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의 밖으로 벗어난 것이니, 옛사람이 일컬은 사람 알기란 쉽지 않다.’란 말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른 것이오. 지난날 마주 대했을 때, 그대가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말을 머뭇거리며 요컨대는 고쳐 새기겠다는 한 가지 사항에서 벗어나지 않았었소. 그러기에 내가 참고 견디며 차분히 기다리면서 문중의 여론이 하늘을 찌를 듯이 분노로 치닫지 않도록 한 까닭은, 진실로 훼판(毁板)하겠다는 한마디 말에 성실할 것을 바랐을 뿐만 아니라 또 우리 선조가 모함당한 본말을 낱낱이 들어서 개운하게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던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할지라도, 이를 일러 술자리에서 단란히 정을 나누기를 예전이나 다를 바 없이 한다고 한다면 되겠소? 우리 종중(宗中)에서도 역시 나를 허물하며, 원수와 상대할 것도 없고 또한 굳이 원수와 대화를 나누며 변론할 것도 없다고 하였소. 이와 아울러 분명히 말하건대, 이제부터는 다만 상정(常情)에서 벗어나는 말을 꾸미려고 말고 분분한 입씨름을 끊기로 합시다. 지금 나는 그대에게 원한이 이미 깊어졌고 사귐도 이미 끊어졌소. 그래도 속마음을 다시 털어놓는 것은 절교는 해도 악평은 하지 말라는 그 뜻을 삼가 스스로 따르고자 하는 때문이오.

 

 

[D-001]가부(葭莩)의 친분 : 가부란 갈대 줄기 속에 있는 엷은 막으로, 두텁지 않은 친인척 관계를 이른다.

[D-002]겸관(兼官) : 수령의 자리가 비었을 때 바로 이웃 고을 수령이 임시로 그 사무를 겸임하는 것을 말한다.

[D-003]동추(同推) : 사죄(死罪)를 저지른 경우에는 30일 안에 옥사를 판결해야 하는데, 그 경우 수령들이 추관(推官)으로 회동하여 죄인을 신문(訊問)하는 것을 말한다. 옥사를 시급히 판결해야 하므로 열흘에 한 번 동추하는 것이다.

[D-004]머리가 …… 같다 : 원문은 白頭如新 傾蓋如舊이다. 고대 중국의 속담으로 추양(鄒陽)의 옥중상서자명(獄中上書自明) 등에 인용되어 있다. 文選 卷39

[D-005]후촌집(後村集) : 후촌은 윤전(尹烇 : 1575~1636)의 호이다. 윤전은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의 숙부이며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613년 유생 이위경(李偉卿) 등이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상소하자 이들의 처벌을 주장하다 파직당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복직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필선(弼善)으로 강화도에 들어가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후촌집은 함양 군수 윤광석이 1795년에 간행한 후촌실기(後村實記)  윤충헌공실기(尹忠憲公實記)를 가리킨다. 이 책은 세계도(世系圖)와 연보(年譜)를 실은 상권, 윤전의 유문(遺文)과 유묵(遺墨)을 실은 중권, 행장(行狀 : 윤증尹拯 ) · 묘지명(墓誌銘 : 조익趙翼 ) · 시장(諡狀 : 박세당朴世堂 ) · 제문(祭文)과 부록을 실은 하권으로 되어 있으며,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서문과 윤전의 5대손인 윤광안(尹光顔)의 발문이 있다. 여기에 실린 행장에, 인목대비 폐위 반대에 공이 컸던 윤전이 인조반정 이후 대간(臺諫)으로 기용되지 못하고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나가게 된 것은, 그가 전에 어느 술자리에서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이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변명한 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여 미움을 산 때문이라고 했다. 묘지명과 시장에도 구체적 인명은 거론하지 않은 채 그 사실이 진술되어 있다. 부록에서도, 윤증이 지은 행장은 박세채(朴世采)의 처지를 생각해서 그 사실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하면서, 워낙 사실이 현저하므로 박동량의 종손(從孫)인 박세당조차 시장에서 이를 은폐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D-006]금계군(錦溪君) :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봉호이다. 박동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금계군에 봉해졌다. 1613년 계축옥사 때에 투옥되어, 자신이 칠신(七臣)의 한 사람으로서 인목대비의 아비인 김제남(金悌男)과 반역을 모의했다는 죄목을 부인하면서, 유릉(裕陵)의 저주 사건에 대해 발설함으로써 대북파(大北派)에게 폐모론(廢母論)의 구실을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부안(扶安)에 유배되었다. 1635년 아들 박미(朴瀰)의 상소로 복관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D-007]피로써 …… 삼키는 : 원문은 沬飮인데 沬血飮泣의 준말이다.

[D-008]번고(飜庫) : 창고의 물건을 일일이 뒤적이며 장부와 대조하여 검사하는 일을 말한다.

[D-009]배신전(陪臣傳) : 황경원(黃景源)이 지은 명배신전(明陪臣傳)을 가리킨다. 강한집(江漢集) 28 명배신전 2에 윤전의 사적을 기록한 항목이 있는데, 후촌실기 하권 부록에 채록되어 있다.

[D-010]남의 …… 데에 : 원문은 成美인데,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남의 아름다운 일을 도와서 완성한다.君子成人之美고 하였다.

[D-011]윤신수(尹莘叟) : 신수(莘叟)가 누구의 호인지 알 수 없다.

[D-012]효경(梟獍) : 효파경(梟破獍)이라고도 하며, 악인(惡人)을 비유할 때 쓰인다. ()는 제 어미를 잡아먹는 올빼미이고, 파경(破獍)은 제 아비를 잡아먹는다는 짐승이다.

[D-013]귀역(鬼蜮) : 보이지 않게 사람을 해치는 귀신과 물여우를 이른다.

[D-014]이 일을 …… 있겠소 : 원문은 是可忍也 孰不可忍也이다. 논어 팔일(八佾)에서 공자가 노() 나라 대부 계손씨(季孫氏)가 감히 천자의 예악인 팔일무(八佾舞)를 추게 한 것에 분노하여 한 말이다.

[D-015]능주(綾州) : 전라도에 속한 현()으로, 현재는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에 속한 면이다.

[D-016]칠신(七臣) : 선조(宣祖)가 임종에 앞서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부탁한 유영경(柳永慶), 한응인(韓應寅), 박동량(朴東亮), 서성(徐渻), 신흠(申欽), 허성(許筬), 한준겸(韓浚謙) 등 일곱 신하를 일컫는다. 이들은 1613년 계축옥사 때에 국구(國舅)인 김제남(金悌男)과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D-017]고성(高成) · 김응벽(金應璧)의 옥사 : 선조 말년에 영창대군의 궁방(宮房)에서 선조가 병에 시달리게 된 원인을 원비(元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 돌리고 고성, 김응벽 등을 시켜 그 능()인 유릉(裕陵)에 가서 저주를 하게 했다고 하여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D-018]기자헌(奇自獻) : 1562~1624. 선조가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데 극력 반대하여 광해군의 즉위에 공로가 컸으므로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러나 폐모론(廢母論)에는 소극적이어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고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인조 즉위 후 이괄의 난 때 사사(賜死)되었다. ‘왕명을 포고하는 글播告之文이란 광해군 5(1613) 7 15일 계축옥사의 주모자로 김제남 등을 처형하고 나머지 관련자들을 사면하는 일로 내린 교서(敎書)를 가리킨다. 그 교서에서 김제남의 죄상을 논하는 대목에 유릉 저주 사건에 대한 박동량 형제의 증언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기자헌이 광해군에게 교서 중에 첨가하기를 거듭 요청한 결과였다. 光海君日記 5 7 10 · 13 · 15

[D-019]사면 조치가 내렸고 : 원문은 渙發雷雨인데, 주역 해괘(解卦) 상전(象傳) 천둥치고 비 내리는 것이 해()이니, 군자가 이로써 허물을 용서하고 죄를 관대히 보아준다.雷雨作解 君子以赦過宥罪고 하였다. 인조 10 6월 박동량의 죄를 용서하여 유배지를 가까운 곳으로 옮겨 주었는데, 이는 인목대비가 승하하기 직전에 내린 하교를 따른 조치였다. 仁祖實錄 10 6 25

[D-020]마치 …… 있었으나 : 남기성(南箕星)은 곧 기성(箕星)으로, 남방 하늘에 나타나므로 남기성이라고도 한다. 기성은 구설(口舌)을 주관하는 별로 간주되었으며, 참언(讒言)의 비유로 즐겨 쓰였다. 시경 소아(小雅) 항백(巷伯) 입을 크게 벌려 이 남기성을 이루었도다, 남을 헐뜯는 저자들은 누구와 더불어 음모를 꾸미나.哆兮侈兮 成是南箕 彼讒人者 誰適與謀라고 하였다.

[D-021]근세 …… 것이다 : 청음선생문집(淸陰先生文集) 24 ‘금계군 겸판의금부사 박공 신도비명 병서(錦溪君兼判義禁府事朴公神道碑銘幷序)’의 명()을 인용한 것이다. 단 글자에 약간 차이가 있다.

[D-022]국구(國舅) :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가리킨다.

[D-023]원사(爰辭) : 죄인이 자신의 죄상을 말한 진술서를 이른다.

[D-024]그 일 : 유릉(裕陵) 저주 사건을 말한다. 선조 말년에 영창대군의 궁방(宮房)에서 선조가 병에 시달리게 된 원인을 원비(元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 돌리고 고성, 김응벽 등을 시켜 그 능()인 유릉(裕陵)에 가서 저주를 하게 했다고 하여 옥사가 일어났다.

[D-025]앞의 …… 집어넣어 : 원문은 追人前爰인데, 추인(追人)은 고대 중국의 백희(百戱)의 일종이므로, 여기서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追入前爰의 오류임이 분명하다. 송시열이 지은 묘표 중 그에 상응하는 구절은 追引爰辭라 하여 나중에 끌어넣었다는 뜻의 追引으로 되어 있다.

[D-026]무고(巫蠱) : 무술(巫術)로 사람을 호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유릉에 저주를 행한 사건을 가리킨다. 박동량은 공초에서 이는 영창대군 궁방의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김제남에게 감히 따지지는 못하였다고만 말했던 것인데, 나중에 김제남이 유릉에 저주를 하도록 사주한 사실을 증언한 것으로 이용되었다.

[D-027]당시 …… 하셨다 : 송자대전(宋子大全) 191 ‘금계군 박공 묘표(錦溪君朴公墓表)’에서 인용하였다. 단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고, 취사선택하면서 고쳐 인용하였다.

[D-028]한패거리가 ……  : 원문은 所欲比而自同인데, 논어 위정(爲政) 군자는 두루 사귀되 패거리를 짓지 않고, 소인은 패거리를 짓되 두루 사귀지 않는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고 하였고, 자로(子路) 군자는 남과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되 남과 화합하지 않는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고 하였다.

[D-029]사람 …… 않다 : 원문은 知人未易인데, 반악(潘岳) 마견독뢰(馬汧督誄)’에 나오는 말로, 사기 범수열전(范睢列傳)에서 후영(侯瀛) 사람은 원래 자기를 알기 쉽지 않으나 남을 아는 것 역시 쉽지 않다.人固未易知 知人亦未易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D-030]절교는 …… 말라 : 사기 80 악의열전(樂毅列傳), “옛날의 군자는 절교는 해도 악평은 하지 않았다.古之君子 交絶不出惡聲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족제(族弟) 이원(彜源)에게 보냄

 

엊그제 극히 어수선한 때 귀하의 심부름꾼이 마침 왔다가 아울러 윤( 윤광석)의 편지를 달라고 했으나, 윤의 편지는 딴 곳에 빌려 주고 찾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보내 드리지 못했으니 상기도 몹시 마음에 걸리외다. 이 편지가 왔을 적에 본래는 여러 일가 분들에게 두루 돌려 보이려 했으나, 그 사이에 성묘길을 떠나 달이 지나서 막 돌아왔고, 요즘도 역시 직소(直所)에 몸이 매어 있지 않으면 자잘한 공무에 분주하여 이제껏 뜻을 이루지 못했던 거요.

연일 서설(瑞雪)이 내리는데 지내시기가 더욱 좋으신지, 그리운 마음 그지없소이다.

지난번에 거창 현령(居昌縣令) 김맹강(金孟剛)이 차원(差員 업무차 차출된 관원)으로서 상경할 적에 듣자니 윤()이 이 편지를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맹강에게 보였는데, 손님들이 좌석에 가득하여 그와 응수하기가 자못 번거로웠으므로 그 첫머리 몇 줄만을 대략 보고는 그대로 말아서 돌려주면서

 

이러한 긴 편지는 하루내 보아도 볼 둥 말 둥 하겠고, 또 지금 내가 자네에 대해 지키는 의리가 비록 박군과는 잠시 다르기는 하지만 실인즉 이 일로 편지가 오고 가는 일에는 간섭하고 싶지 않네.”

하자, 윤은 바로 소매에 도로 집어넣고 허둥지둥 작별하고 떠났다는 거요. 그런데 지금 이 편지를 살펴보면 그 말미에 안의(安義)에 모였을 때 맹강과 함께 책을 보았다.’는 말이 있으니 그의 속셈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구려!

인본(印本)을 보내왔을 때 나는 과연 그 이면에 무슨 말이 들었는지 알지 못하고 한 부 보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인데, 급기야 원문 두어 편을 잠깐 열람해 보니 볼 만한 것이 별로 없어서 그대로 다른 책들 속에 뒤섞어 두고 말았던 거요. 편지에서 말한 맹강이 와서 모였다고 한 때는 바로 윤이 임기가 만료되어 하직하고 떠나던 날이었소. 이때에 기생과 풍악이 앞에 가득하고 술과 음식이 상에 널리어 저녁 모임이 아침에야 흩어졌고 실컷 즐기다 파했으니, 어느 겨를에 어지러운 책더미 속에서 밤낮으로 애써 찾아내어 부질없이 펼쳐 보는 짓을 했겠소?

가령 내가 전일에는 뒷부분을 생략하고 지나쳐 보았을망정, 이와 같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책을 보는 마당에야 어찌 깨닫지 못할 이치가 있겠소? 더더구나 맹강 집안의 선조를 모함하고 핍박한 일도 이와 조목을 같이하여 두 줄로 나란히 열거되어 있으니, 맹강도 어찌 기꺼이 편안히 셋이 함께 앉았겠으며 그 때문에 놀라 원통해하지 않았겠소?

전일에는 진실로 성의 있게 고쳐 인쇄하려고 꾀했던 것이 지금 와서 이미 그렇게 하지 못할 형세가 되자, 도리어 우선 이런 말을 만들어 증거를 세워 자신을 해명하자는 것이니, 어찌 자기 속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소? 또 그 편지 중에서 높이 추켜들어 존중하고 있는 사람이라야 송교(松郊) 한 사람뿐인데, 송교란 호를 가진 이가 누구인지 모르겠소만, 반드시 여러 선현(先賢)들과 반대로 어긋나고자 하면서 억지로 송교 한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더욱 놀랍고 한탄스러운 것은 우리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을 여지없이 조롱한 점이니 현배(賢輩)들이 지키는 의리는 장차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소. 또 새로 인출(印出)한 책이 어떤 글들인지도 모르겠소이다. 나의 원래 편지까지 아울러 보내니 종이 상단에 붙여 놓은 것을 행여 빠뜨리지 말고, 본 뒤에 즉시 돌려주기 바라오.

 

 

[C-001]이원(彜源) : 박이원(朴彜源 : 1743~1801)은 박사고(朴師古)의 아들로 박사눌(朴師訥)의 양자가 되었으며, 1777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형조 정랑을 지냈다.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문경 현감(聞慶縣監)으로서 합천 화양동에 있던 야천(冶川) 박소(朴紹)의 묘소 정비 사업에 성금을 보태기도 했다.

[D-001]김맹강(金孟剛) : 맹강(孟剛)은 김유(金鍒)의 자()이다.

[D-002]내가 …… 하지만 : 김유가 윤광석과 같은 소론(少論)이어서 노론인 연암과는 당파적 의리가 다르다는 뜻이다.

[D-003]인본(印本) : 윤광석의 선조 윤전(尹烇)의 문집인 후촌실기(後村實記)  윤충헌공실기(尹忠憲公實記)의 인쇄본을 말한다.

[D-004]송교(松郊) : 이목(李楘 : 1572~1646)의 호이다. 이목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으로 성혼(成渾)과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었다. 1612년 문과 급제 후 병조 좌랑 등을 지냈으며 대북파(大北派)의 무고로 파직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복직하였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했고, 1636년 형조 참판이 되어 병자호란을 당하자 척화를 주장했다. 사후(死後)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D-005]현배(賢輩)들이 …… 모르겠소 : 현배는 후배(後輩)를 높여 부른 말이다. 박세채는 박동량의 손자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초기 지도자가 된 인물인데, 소론의 후배 세대인 윤광석 등이 그를 조롱한다면 당파의 의리가 제대로 지켜져 나가겠느냐고 힐난한 것이다.

[D-006]나의 원래 편지 : 바로 앞에 수록된 함양 군수 윤광석에게 보냄與尹咸陽光碩書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공주 판관(公州判官) 김응지(金應之)에게 답함

 

 

얼마 전 조사에 참여한 일은, 여러 죄수들이 이미 다 문초를 받았고 재차 공초(供招)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옥사의 실정에 있어서는 별로 의혹될 단서도 없으니 문안(文案)은 이미 갖추어졌다고 하겠으며, 다만 미처 작성되지 못한 것은 언사(讞辭 판결문)뿐이었소.

저의 병은 졸지에 극심해져 잠시도 머물러 있기 어려울 때가 있음을 비단 형만이 잘 아는 게 아니라 감사께서도 이미 양찰하고 계신 터입니다. 또 임금께 장계를 올릴 일자가 대단히 촉박한 것도 아니니, 발미(跋尾)를 얽어서 내는 일은 형이 만약 혼자 하기 어렵다면 비록 귀임한 뒤에 서면 왕복으로 상의한다 해도 여유가 작작할 것 같았소. 그러므로 감히 물러간다고 알렸던 것은 이 때문이었소.

영문(營門 감사를 가리킴)이 이미 귀임하여 조리하도록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도중에서 증세가 더할까 몹시 염려하여 타고 가는 것까지 내밀히 물으며 편한 대로 하라고 허락하기까지 했으니, 병을 핑계 대고 사무를 피하여 하직도 아니 하고 바로 돌아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지 않소. 그런데 지금 그때 따라갔던 아전을 뒤늦게 잡아다가 대신 형신(刑訊)을 받게 하니, 이 어찌 꿈엔들 감히 생각했던 일이겠소!

사관(査官 검사관)을 다시 청하자고 한 점에서는 형도 역시 주선을 잘못했다고 할 수 있소. 이미 번안(飜案 조사 결과를 번복함)을 하지 않을진대 하필 사관을 고쳐 정하여 허다한 말썽을 초래할 것이 있겠소? 이러니저러니를 막론하고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만 하나의 돌아갈 ()’ 자가 있을 따름이오. 사직서를 써 보내니 찾아서 읽어 보기 바라오. 노년에 서로 만나 머리가 희도록 사귀어도 낯선 사람 같더니, 갑자기 이렇게 낭패를 보게 되어 도리어 몹시도 서글픔만 맺힐 따름이외다.

 

귀하의 관아에 있을 때 처음에는 아무런 병이 없어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며칠을 편안히 지냈는데, 하루는 밥을 먹고 나서 형과 마주하여 졸다가 저는 가슴과 배 사이에 마치 물건이 걸려 있는 듯한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 급히 따뜻한 물을 가져오라 하여 마셨더니, 층층으로 빙빙 돌아서 나뉘어 세 덩이가 되었소. 짐작에 그 크기가 우()  민간에서 말하는 토란이다. 만 하고 수레바퀴가 소리 내듯이 호흡할 때마다 서로 치받으며, 또 간혹 다섯 손가락으로 후벼 대는 것도 같아서 온갖 맥이 다 풀려 만사가 귀찮다가 잠깐 사이에 곧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소.

이때부터는 그 증세가 생기려면 연기처럼 슬며시 오는데, 밥이라곤 한 숟갈도 뜰 수 없고 마시는 것이라곤 찻물뿐이오. 형도 역시 그 꼴을 보고는 걱정하였지요. 또 그 뒤로는 물이나 술을 막론하고 들이마셔 입에 있으면 문득 삼킬 것을 잊어버리니 생각에 목젖이 없어진 듯싶었소. 수십 년 전에 어느 한 사람이 이 증세가 있음을 보았는데 의원의 말로는 심병(心病)이라는 거요. 심장의 피가 바싹 마르면 으레 이 증세가 생긴다고 했소. 저의 지금 증상이 갑자기 전에 들은 말과 비슷해서 마음이 편치 못하고 풀이 꺾이고 스스로 의심이 나더니, 저녁 사이에 가슴이 크게 두근거리고 배 안에서 쭈루룩 흘러내리는 것이 마치 병 속에서 흔들리는 물 같아서, 비록 그 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치밀어 올라 두근거리는 증상과 호응하므로 더욱 혼자서 이상히 여겼지만 실지로 꼭 집어 말할 것도 없었소.

또한 온몸이 둥둥 떠 공중에 있는 것 같아서 걸음을 걸어도 발이 헛놓여서 땅을 밟지 않은 듯하여 너무도 풀이 꺾이고 기분이 나빴소. 형과 종일토록 한담을 나누었을지라도 그 말소리가 제 입에서 나오는 것을 갑자기 잊었으며, 형의 말소리 역시 귀에 들어온 적이 없음을 깨닫고는 이 몸이 내 것인지 아닌지 더욱 의심이 났소. 이와 같은 이상한 증세는 하나뿐이 아니오.

돌아오던 날 저녁, 새벽잠에서 막 깨자 왼쪽 머리와 안면이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으며 갑자기 멍청해진 듯하고 입가와 눈꼬리가 땅기고 씰룩거려 경련이 일므로 크게 놀라 일어나 앉아 급히 병풍 건너편에서 자는 자를 불렀지요. 촛불을 켜는 동안 이 증세는 바로 그쳤으나 안면 마비의 증세는 손으로 만져도 남의 살 같았소.

지금 이 모든 증세가 형과 마주 앉은 며칠 사이에 나타난 것이니, 비록 저절로 싫은 마음이 났으나 억지로 세수하고 머리 빗고 했던 거요. 이 같은 증세는 다른 사람으로서는 세세히 살필 수도 없는 것이고, 형에게도 늘어놓은 적이 없었던 것은 듣기 좋은 얘기도 아닐 뿐더러 으레 위로하여 병자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나 할 뿐이었기 때문이오.

그러나 객지에 머물기가 한시도 어려워서 급급히 하직하고 물러난 것은 이 때문이었소. 이로써 죄를 얻은 것은 실로 본의가 아니었으나 부끄러운 마음이야 어찌하겠소? 귀하의 고을의 의원은 이미 홍주(洪州) 관아로 떠나서 진찰을 받지 못했소. 이 편지에 기록된 모든 증세를 들어 그가 돌아오면 자세히 의논해 봐 주기 바라오. 만일 형이 가기를 권하여 의원의 승낙을 얻는다면, 나중 인편에 자세히 알려 주시오. 그러면 인마(人馬)에 관한 모든 것은 응당 제가 준비해서 보내겠소이다.

 

 

[C-001]김응지(金應之) : 김기응(金箕應 : 1744~1808)의 자가 응지(應之)이다. 그는 본관이 광산(光山)이고, 사계(沙溪) 김장생의 후손이다. 연암이 젊은 시절 교유했던 선배인 석당(石堂) 김상정(金相定)의 아들로, 연암과 교분이 있었다. 생원시에 급제한 후 음보로 황간 현감(黃澗縣監), 공주 판관, 황주 목사(黃州牧使) 등을 지냈다.

[D-001]얼마 전 ……  : 연암이 정조 21(1797) 7월 충청도 면천 군수(沔川郡守)로 부임하자, 당시 충청 감사 한용화(韓用和 : 1732~1799)가 공주 판관 김기응의 천거에 따라 연암에게 연분(年分) 가청(加請) 장계(狀啓)’(연암집 9)를 대신 지어 주기를 부탁한 데 이어, 연암을 도내의 옥사를 재심하는 심리관(審理官)으로 단독 차임(差任)하였다. 이에 연암은 감영으로 가서 며칠간 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감사가 도내 수령들의 고과(考課)를 함께 논의하자고 은근히 끌어들이는 것을 거부했더니, 이를 괘씸히 여긴 감사가 연암을 수행한 아전을 잡아다 벌주고 연암에 대한 고과를 깎아내렸다. 연암은 이에 분개하여 감사에게 여러 차례 사직서를 올렸으나 반려되고 말았다. 공주 판관 김기응은 자신이 중간에서 주선을 잘못하여 연암과 충청 감사 사이에 갈등을 초래하지 않았나 하여 변명조의 편지들을 보냈는데, 연암집에 실린 김기응에게 보낸 답서들은 그로 인한 것이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3

[D-002]발미(跋尾) : 발사(跋辭)라고도 하는데, 조사와 관련하여 장계의 뒤에 붙이는 건의서를 말한다.

[D-003]형신(刑訊) : 죄인을 형장(刑杖)으로 치며 캐묻는 것을 말한다.

[D-004]주선을 잘못했다 : 김기응이 연암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책한 말인 듯하다.

[D-005]노년에 …… 같더니 : 한용화와 연암은 환갑이 지난 나이에 각각 충청 감사와 면천 군수가 되어 외지에서 서로 만났는데, 두 사람의 교분이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용화가 관직에 연연하지 않는 연암의 사람됨을 알지 못하고 회유하려 들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답함

 

 

편지에서 하신 많은 말씀의 뜻은 잘 납득하였소만 저도 모르게 큰 웃음을 한 번 터뜨렸소. 제가 언제 형에게 분노를 품은 적이 있다고 형은 어찌 지레짐작하여 늘 이와 같은 변명을 하는 거요? 이야말로 나를 아는 것이 너무도 얕다 하겠소. 저를 이해하건 저를 책망하건 모두가 제 병이 빌미가 된 것이오. 이 재앙은 스스로 만든 것인데 다른 사람이 무슨 관계이겠소? 다만 그 정세는 잠시 제쳐 두고, 병세로 인해 갈수록 지쳐서 위태로운 증상과 악화될 조짐이 겹쳐서 나타나고 있소.

중존(仲存 이재성(李在誠))마저 엊그제 또다시 가 버리고, 빈 관아에 홀로 누워 곁에는 한 사람도 없으니 이야말로 고기 먹는 정승(定僧)이요, 병부(兵符)를 찬 귀양객이라 이르겠소. 돌아갈 행장(行裝)을 점검해 보니 다만 가지고 온 하나의 해진 책상자뿐인데, 두어 질의 낡은 서적이 가득 들었고, 책갈피에 두서없이 잔뜩 끼워 넣어진 것은 모두가 앙엽(盎葉)의 기록이오. 우연히 그 한 조각을 펴 보고 저도 모르게 서글퍼지면서 가슴이 쓰라렸소. 그것은 나이 젊었을 때 눈이 밝아 깨알 같은 글자도 꺼리지 않고 써서 어떤 것은 종이가 나비 날개처럼 얇고 어떤 것은 글자가 파리 대가리만 하게 작았소. 이미 순서도 없이 된 것이라 종당에는 버리고 말 것이니, 비하자면 꿰지 못한 야광주(夜光珠)요 구멍 없는 강철 바늘인 거요.

바쁘게 지나가는 게 인생이지만 내일은 항상 있었는데, 지금 갑자기 시력이 아득아득 글자 획이 가물가물하여, 잠시 개미 떼가 모였다가 잠깐 사이에 흰 바탕만 남아 보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소. 이는 다 내 평생의 경륜을 기록한 것으로 당대(當代)의 문헌으로 갖추어 둘 만한 것인데, 만약 지금에 이르러 손수 곰곰이 따져 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은 편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이번에 바닷가의 외로운 성읍에 오니 고을도 궁벽하고 일도 적어서 잎이 지고 꽃이 필 때 공무에 겨를이 나면 몇 종의 기서(奇書)를 거의 엮어 낼 수 있었소. 그런데 지금 이처럼 좌절하고 보니 속절없이 다시 끌고 돌아가는 수밖에는 없소. 좀 오줌, 쥐 똥과 함께 진흙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니, 이것이 상심거리일 뿐, 다른 거야 무엇을 연연하겠소? 이 밖에 공사간(公私間)에 으레 있는 걱정거리에 대해서는 별로 낭패될 것이 없소. 대개 도임한 지 겨우 다섯 달밖에 되지 않아 찬지 뜨거운지도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옛 친구에게 염려를 끼치지는 않은 듯하오.

 

 

[D-001]저를 …… 책망하건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공자가 나를 알아줄 것도 오직 춘추(春秋)이며 나를 책망할 것도 오직 춘추로다.知我者其惟春秋乎 罪我者其惟春秋乎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D-002]이 재앙은 …… 것인데 : 서경 태갑 중(太甲中) 하늘이 내린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어도 스스로 만든 재앙은 피할 수가 없다.天作孼猶可違 自作孼不可逭고 하였다.

[D-003]정승(定僧) : 좌선(坐禪)에 들어간 승려를 이른다.

[D-004]병부(兵符)를 찬 귀양객 : 병부는 군대를 동원할 때 쓰던 부신(符信)으로, 감사와 병사(兵使) · 수사(水使)뿐 아니라 수령도 차고 다녔다.

[D-005]앙엽(盎葉) : 옛사람들은 농사를 짓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감나무 잎에다 적어 밭 가운데에 묻어 둔 항아리에 넣었다고 한다. 이를 본떠서, 독서하다가 깨달은 고금의 고거(考據)와 변증(辨證)에 관한 내용을 쪽지에 기록하여 모아 두는 것을 말한다. 이덕무(李德懋)에게 앙엽기(盎葉記)란 저술이 있고, 연암의 열하일기에도 앙엽기란 편()이 있다. 雅亭遺稿 卷8 附錄 朴趾源撰 行狀》 《熱河日記 盎葉記 序

[D-006]찬지 …… 때문이오 : 원문은 其爲冷煖 亦不自知인데, 물을 직접 마셔 본 사람만이 그 물이 찬지 뜨거운지를 안다는 뜻의 냉난자지(冷暖自知)’란 말이 있다. 면천에서 군수 노릇을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D-007]옛 친구에게 …… 듯하오 : 충청 감사가 된 옛 친구 한용화가 도내 고을을 잘 다스리려고 애쓰는데, 하관(下官)으로서 걱정을 끼치지는 않았다는 뜻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답함

 

 

이번의 시끄러웠던 일은 단지 묵은 병이 객지에서 돌발했던 까닭인데, 잠깐 사이에 도리어 화단(禍端)을 이루었으니, 재앙이 나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라 뉘를 원망하고 뉘를 허물하겠소?

사가(使家 사또. 감사를 가리킴)의 한결같은 고심(苦心)은 실로 문장을 너무도 사랑한 까닭으로 반드시 언사(讞辭)가 내 손에서만 나오게 하려는 것이었고, 비직(卑職 연암을 가리킴)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은 결국 불쌍히 여겨 허락해 주리라 경망스레 믿은 때문으로, 돌아온 뒤에 수행했던 아전을 뒤미쳐 잡아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데 기인한 것이오. 따져 보면 애초에는 교제가 아직도 옅은데 흠모가 지나치게 깊었고, 끝내는 마음이 아직 미덥지 못한 상태에서 의심과 노여움이 마구 생겨났으며, 병이 이미 뜻밖에 생겼으나 대접이 처음만 못했고, 의심한 것은 본심이 아니었지만 연슬(淵膝)이 너무도 갑작스러웠던 거요.

저 의서(醫書)에 이른바 각궁반장(角弓反張)이 불행히도 이와 가깝다 하겠소. 각궁(角弓 무소뿔로 장식한 활)은 굳센 데다 쇠심줄과 부레풀이 새로 되게 엉겨 붙었는데, 힘에 겹게 당기면 시위와 활 끝부분이 한계를 넘어 쥔 손을 미처 놓기도 전에 양쪽 활고자가 먼저 바깥으로 뒤집혀지게 되는 거요. 무릇 위아래가 통하지 않는 것을 바로 관격(關格)이라 하는데, 의가(醫家)에서는 뇌()와 발꿈치가 서로 접근하고, 배와 등이 서로 뒤틀리는 것을 활의 뒤집힘反張에 비유한 거지요. 지금의 증세를 살펴보면 어찌 이와 유사한 것이 아니겠소?

어젯밤 관의 하인이 약을 올리다가, 실수하여 떨어뜨려 책상과 자리를 흥건히 적시었소. 만약 이것을 누가 팔뚝을 당겼거나 팔꿈치를 비틀어서 그리 되었다고 하자니 곁에 딴 사람이 없었고, ‘삽시간에 태만해서 그리 되었다고 하자니 가득 찬 그릇을 조심스럽게 들었을 텐데 그럴 리가 없고,  일부러 발을 헛디뎌 엎질렀다 하자니 이것은 너무도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다시 담을 수는 없겠으니, 다만 닦아 내어 조촐하게 할 따름이겠지요.

사직서가 기각됨으로써 또 한 가지 병의 조짐이 더해졌소이다. 이 마음이 조급하고 답답함이 어찌 한이 있겠소? 그러나 관인(官印)을 내던지고 돌아가는 것은 비단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엄중히 타이를 뿐 아니라, 고과(考課)가 눈앞에 있으니 어찌 스스로 혐의를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발끈 성내어 행동할 수 있겠소?

이울어진 매화가 한 해를 또 전송하는데, 도리어 가시 돋친 말만 하고 있으니 더욱더 저도 모르게 몹시 서글프기만 하오.

 

 

[C-001]응지에게 답함 : 내용으로 보아, 이 다음에 실린 응지에게 답함 직후에 작성된 편지로 판단된다.

[D-001]병이 …… 못했고 : 원문은 疾旣無妄而權輿不承인데, 무망(無妄)은 곧 무망(无妄)으로, 아무런 까닭이 없이 걸린 뜻밖의 병을 말한다. 주역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의 효사(爻辭) 아무런 까닭이 없이 걸린 병이니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낫는 희소식이 있으리라.无妄之病 勿藥有喜 하였다. 권여(權輿)는 처음이란 뜻으로, 시경 진풍(秦風) 권여(權輿) 나에게 잘 차린 음식이 가득하더니, 지금은 매 끼니조차 빠듯하네. 아아, 처음과 다르도다.於我乎 夏屋渠渠 今也每食無餘 于嗟乎 不承權輿라고 하였다. 이 시는 진() 나라 임금이 선비들을 대우하기를 시종일관하지 못함을 풍자한 노래이다.

[D-002]연슬(淵膝) : ‘고우면 무릎에 앉히고 미우면 못에 떨어뜨린다墜淵加膝는 말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지나치게 변덕스러움을 뜻한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서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군주는 사람을 기용하기를 마치 무릎에라도 앉힐 듯이 하고, 사람을 물리치기를 마치 못에 떨어뜨릴 듯이 한다.今之君子 進人若將加諸膝 退人若將墜諸淵고 하였다.

[D-003]각궁반장(角弓反張) : 온몸이 뻣뻣해지면서 등이 활처럼 뒤로 젖혀지는 증상을 말한다.

[D-004]양쪽 …… 거요 : 활 양끝의 시위를 매게 된 곳을 활고자라 이른다. 원문은 兩彄先臾인데, 바깥으로 많이 뒤집히는 활을 유궁(臾弓)이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답함

 

 

무망(无妄)의 병과 본의 아닌 의심은 이미 다 지난 일에 속하니 다시금 변명할 필요가 없으나, 이른바 어느 정도 성의가 부족했다.’고 한 것은 자못 이해가 가지 않사외다. 자기를 두남두고 남을 책하는 그 사이에도 역시 할 말은 있소이다.

영문(營門 감사)은 주심(主審)이고 수령(守令)은 배심(陪審)이오. 때마저 극심한 추위를 당했는데 주심의 처지에서 한 번도 자리를 만들지 않았으니, 배심을 하자 해도 할 곳이 없었소. 그렁저렁 열흘이 지나게 되니 오래 지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마침내 이아(貳衙)에서 종일토록 동추(同推)하여 여러 죄수들이 재차 공초(拱招)했고 조사의 문안도 갖추어졌으니, 가위 내 할 일은 끝났다.’ 할 수 있소. 영문은 어찌 그리 심문하는 일은 느리면서 판결문 만드는 데는 급하오? 성의가 부족했다는 책망은 반드시 전적으로 이 몸에게만 돌릴 일은 아닌 듯싶소.

이른바 공격(公格 공직에 관한 격식)에 크게 관계된다.’ 한 것도 역시 할 말이 있소. 대체 막중한 계문(啓聞 장계를 올림)을 수령이 하는 거요, 영문이 하는 거요? 더구나 공격이 존재하는 데는 수령된 자로서는 감히 한마디도 사연을 덧붙이지 못할 것 같소. 발미(跋尾)를 대신 짓는 것도 이것이 어찌 전례(前例) 있는 공격이겠소? 또 하물며 오너라 하면 오고 돌아가거라 하면 돌아가며 감히 털끝만큼도 어긴 일이 없는데. 도리어 공격을 들어 책망을 하니 자못 이해가 안 가는 일이오.

비록 그렇지만 조사하는 일을 모두 맡겼으며 언사(讞辭)마저 전담케 했으니 신임이 과연 두터웠다고 하겠고, 이미 명령을 들었으니 글도 마땅히 지었어야 할 터요. 또 그 옥사의 실정에 특별히 의심스러운 것도 없어 초검(初檢)과 복검의 문안은 실인(實因 사망 원인)이 다 같았으며, 전임 관찰사의 제지(題旨 판결)가 엄중하고 명확하여 원범은 저절로 상명(償命)의 죄목에 들게 되어 있소.

지금 이 조사는 바로 사중구생(死中求生)의 꾀로 그 자식을 시켜 억울함을 호소한 때문인데, 그 억울함을 호소한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거짓이니, 다만 그 원사(爰辭 진술서)에 대해 조목조목 사실을 남김없이 밝혀 줄 따름이오. 이와 같이 사리를 분명히 한다면 원범의 죄는 더욱 도피할 길이 없을 것이오. 완성된 옥안(獄案)의 발미도 십여 줄에 지나지 않는 문장인데 내가 무엇이 괴로워 만들지 않겠소?

뜻밖에 밤사이 병이 갑자기 심해져 숨도 쉬기 어려웠소. 요전 편지에 말한 바와 같이, 가슴과 배 사이를 마치 다섯 손가락으로 후벼 파는 것 같아서, 온갖 맥이 다 풀어지며 온갖 생각이 모두 식어 버려 객지에 머물기가 한시도 어려웠소.

스스로 생각건대 나이는 늙고 병은 잦으니 죽을 날이 머지않은 듯한데, 타향의 벼슬살이로 신세가 외로운 중과 같으니 어찌 깜짝 놀라며 스스로 위태로움을 느끼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소? 이른바 사람이 한 세상에 사는 것이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 같네.人生一世間 忽如遠行客라는 옛 시구(詩句)가 아마도 헛말이 아니구려. 더더구나 여관의 긴긴 밤에 고향 생각이 무척 괴롭고, 음식도 솜씨가 바뀌고 침석도 전에 눕던 자리가 아니라서, 옛사람의 병주(幷州)를 그리워하는 정이 아스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거요.

형도 또한 사관(査官)으로서 의견이 나와 대략 동일하니, 발미를 지어 내는 일은 다른 사람 손을 빌릴 필요가 없소. 순석(旬席 감사가 있는 자리)에서 아뢰고, 곁에 있던 형에게 부탁했던 것은 이 때문이오.

그런데 일이 불행하여 이리저리하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다만 입 다물고 피할 따름이지 어찌 홀로 자기 명분만 깨끗이 할 수 있겠소? 지금 이미 행장(行裝)을 정돈하고 있는데, 돌아갈 시기가 이를지 더딜지도 내 손에 달려 있지 않으니 이것이 괴롭고 답답하오.

 

 

[C-001]응지에게 답함 : 내용으로 보아 연암집 2에 수록된 공주 판관 김응지에게 답함答公州判官金應之書을 쓴 직후에 작성된 편지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 편지 바로 다음에 수록되어야 마땅한데 편집상의 실수로 현재와 같이 배치된 듯하다.

[D-001]무망(无妄)의 병 : 아무런 까닭이 없이 걸린 뜻밖의 병을 말한다. 주역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의 효사(爻辭) 아무런 까닭이 없이 걸린 병이니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낫는 희소식이 있으리라.无妄之病 勿藥有喜 하였다.

[D-002]이아(貳衙) : 감영이 있는 고을의 관아를 말한다. 공주(公州)의 목사(牧使)는 충청 감사가 겸임하고 판관 1인이 고을 실무를 관장했으므로, 여기서는 김기응이 집무를 보던 공주 관아를 가리킨다.

[D-003]상명(償命) : 살인죄로 인해 사형을 받는 것을 말한다.

[D-004]가슴과 …… 어려웠소 : 앞서 보낸 공주 판관 김응지에게 답함答公州判官金應之書 중의 일부 구절들을 인용한 것이다.

[D-005]사람이 …… 같네 : 문선(文選) 29에 실린 고시(古詩) 19() 중의 제 3 수에 사람이 천지 사이에 태어나니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 같네.人生天地間 忽如遠行客라고 하였다.

[D-006]병주(幷州)를 그리워하는 정 : 오래 살다 떠나온 타향을 고향처럼 그리워하는 정을 말하는데, () 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시 도상건(渡桑乾)’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 시에서 가도는 병주에서 10년이나 객지 생활을 하며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으나, 갑자기 그곳을 떠나 고향에서 더욱 먼 곳으로 떠나게 되니 병주가 오히려 고향처럼 그리워지노라고 노래하였다. 병주는 중국 고대 12()의 하나로, 당 나라 때에는 산서(山西) 태원부(太原府)였다. 여기서는 공주에서 불편하게 지내자니 면천에서 지낼 때가 그리워지더라는 뜻으로 쓴 것이다.

[D-007]돌아갈 …… 않으니 : 감사가 사직서를 받아 주어야만 귀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답함

 

 

일전에는 공무(公務)와 사사(私事)가 너무도 복잡하여 미처 편지를 올리지 못하다가, 막 장리(狀吏)의 출발 여부를 묻자 잠깐 사이에 벌써 떠나버렸다 하니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 그지없었소. 필시 나더러 편지 쓰기에 뜻이 없어서 답장을 생략해 버렸다 생각했을 거요. 급기야 먼저 보내신 짧은 편지를 받아 보니 과연 내 짐작과 같았소. 송구스럽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사외다. 이 아우가 어찌 이렇게 졸장부같이 굴겠소? 한 번 뜻대로 안 되었다 해서 멍하니 멍청스레 앉아 공중에 대고 글자나 쓰고 있겠소? 어쩌자고 더욱 사람을 부끄러워 죽게 만드시오?

보름날 아침에 각 고을의 아전들이 포사문(布司門) 밖에 떼로 모여 얼어붙은 붓을 호호 불어 녹이며 어깨를 서로 밀치고 발등을 서로 밟고 서서, 마치 과거 시험장에서 글 제목을 내걸면 응시자들이 베껴 써서 풀이하듯이 수수께끼 같은 말을 서로 외치기를,

 

기주(冀州)의 전부(田賦)인가?”

단공(亶公)이 말을 달려간 곳인가?”

변자(卞子)가 상투가 없는가?”

복씨(卜氏)가 일() 자를 머리에 얹었는가?”

정일(精一)을 잡았느냐?”

자막(子莫)이 잡았느냐?”

어떤 장리(贓吏 뇌물을 받거나 횡령한 관리)를 잡았는고?”

하자,

 

수배(隨陪)를 잡았다네.”

라는 대답이 나왔소. 그러자 온 장내가 떠들썩하게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네 원님이 음관(蔭官)인 줄 아는데, 지금 교묘하게 발사하여 신기하게 맞혔으니 이야말로 활을 잘 쏜다고 이를 만하다. 네 원님은 혹시 찬밥 신세의 무반(武班)이 아니냐?”

하여, 면천(沔川) 고을의 이졸(吏卒)들이 크게 부끄러움을 띠고 돌아왔었더라오.

이 아우는 막 이불을 끼고 식전 미음을 마시다가 이 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큰 웃음이 터져 배를 틀어잡고 킥킥거리니 갓끈이 썩은 나무 꺾어지듯 끊어지고, 입에 머금은 밥알이 나는 벌떼같이 튀어나오며, 마치 독한 종기가 한창 심하게 곪았는데 긴 침으로 찔러 터트리니 고름이 튀어 의복은 비록 더러워졌지만 기분만은 갑자기 상쾌한 것과 같았소.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것이 있지요.

 

삼정승 사귀려 말고 제 몸 잘 가지라.’

했으니 이는 스스로 힘쓰라는 말이고,

 

네 집 쇠뿔이 아니면 우리 집 담장이 왜 무너지나?’

했으니 이는 남을 허물하는 말이고,

 

밤에는 흰 것을 밟지 말라. 물 아니면 돌이다.’

했으니 이는 밤길 가는 사람에게 경계한 말이고,

 

나고 들 때 고개 숙임은 문을 공경해서가 아니다.’

했으니 이는 남과 충돌할까 경고해 주는 것이고,

 

주인집에 장() 떨어지자 손님이 국 마다한다.’

했으니 이는 주객이 모두 편리한 것을 이른 말이오. 형의 충고는 이 몇 가지 속담을 보자면, 나를 어느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인지 모르겠소이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뒷갈망 잘하는 것이 나으니, 뒷갈망을 잘하자면 그 떠나고 머물기를 잘하는 것이 낫소. 떠나기를 속히 하거나 머물기를 오래 하기를 비록 감히 성인(聖人)의 시중(時中)에 견주지는 못하지만, 또한 어찌 허겁지겁 떠나 버림으로써 더욱 남의 비웃음을 사서야 되겠소?

 

 

[D-001]장리(狀吏) : 지방 관아들 사이에서 공문을 전달하던 지자(持字)를 가리키는 듯하다.

[D-002]한 번 …… 해서 : 정사년 12(양력 1798 1)의 고과(考課)에서 상()이 아니라 중()을 받은 사실을 가리킨다. 過庭錄 卷3

[D-003]공중에 …… 있겠소 : 원문은 咄咄書空耶인데, () 나라 때 중군(中軍) 은호(殷浩)가 무능하다 하여 먼 지방으로 쫓겨나자 온종일 어허! 괴상한 일이로고.咄咄怪事라는 네 글자만 공중에 대고 쓰며 지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크게 실망하거나 유감을 품은 경우를 비유할 때 쓰인다.

[D-004]포사문(布司門) : 포정문(布政門)을 가리키는 듯하다. 감영(監營)을 명() 나라 식으로 포정사(布政司)라고도 부르며, 영문(營門)을 포정문이라고도 부른다. 牧民心書 吏典 束吏

[D-005]기주(冀州)의 전부(田賦)인가 : 고과(考課)가 상()이냐고 물은 것이다. 서경 우공(禹貢)에 기주(冀州) 그 부세(賦稅)가 상상(上上)인데 간혹 차상(次上)이 섞였다.厥賦惟上上錯고 하였다. 기주는 고대 중국의 구주(九州)의 하나로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전부와 하북성(河北省) · 하남성(河南省) · 요령성(遼寧省)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전부(田賦)는 토지에서 생산된 곡물로 바치던 세금을 말하는데, 구등법(九等法)이라 하여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 차등을 두었다.

[D-006]단공(亶公) …… 곳인가 : 고과가 하()냐고 물은 것이다. 단공은 오랑캐의 침략을 피해 주() 나라의 수도를 기산(岐山)으로 천도한 고공단보(古公亶父)를 가리킨다. 시경 대아(大雅) () 고공단보가 이른 새벽에 말을 달려,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岐山) 아래에 이르셨네.古公亶父 來朝走馬 率西水滸 至于岐下라고 하였으므로, 기하(岐下)의 하() 자를 암시한 것이다.

[D-007]변자(卞子)가 상투가 없는가 : 고과가 하()냐고 물은 것이다. ()는 남자의 통칭(通稱)인데 자() 자와 음이 같으므로, 여기서는 변() ()를 암시한다. ‘ 자 상단의 점이 없으면 하() 자가 된다.

[D-008]복씨(卜氏) …… 얹었는가 : 고과가 하()냐고 물은 것이다. () 자에 일() 자를 가획(加劃)하면 하() 자가 된다.

[D-009]정일(精一)을 잡았느냐 : 고과가 중()이냐고 물은 것이다. 서경 대우모(大禹謨)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그 중정(中正)을 잡으리라.惟精惟一 允執厥中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D-010]자막(子莫)이 잡았느냐 : 고과가 중()이냐고 물은 것이다. 자막은 노() 나라의 현자(賢者)인데,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 양주(楊朱)나 묵적(墨翟)과 달리 자막은 중도(中道)를 취했다.子莫執中고 하였다.

[D-011]수배(隨陪)를 잡았다네 : 고과가 하()라는 뜻이다. 수배는 수령의 시중을 들던 하인을 말한다.

[D-012]교묘하게 …… 맞혔으니 : 원문은 巧發奇中인데, 연암에 대한 고과(考課) 제목(題目) 중의 표현을 이용한 풍자적 표현이다. 충청 감사 한용화는 연암에 대해 다스림은 구차스럽지 않으나 병이 간혹 교묘하게 발동한다.治則不苟 病或巧發라고 제목을 쓰고 고과를 상()에서 중()으로 깎아내렸다. 이는 자신과 불화한 연암이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서를 올린 것을 불만스럽게 여긴 때문이라 한다. 過庭錄 卷3 위의 제목 중의 교발(巧發)’을 교묘하게 활을 쏜다는 뜻으로, 고과에서 중()을 받은 것을 과녁을 명중했다는 뜻으로 바꾸어 조롱한 것이다.

[D-013]이는 …… 것이고 : 원문은 此警人所抵觸也인데, ‘ 자가 몇몇 이본들에는 其有로 되어 있다.

[D-014]성인(聖人)의 시중(時中) : 공자가 때의 변화에 맞추어 합당하게 처신한 것을 말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서 떠나기를 속히 할 만하면 속히 하고, 오래 있을 만하면 오래 있고, 머무를 만하면 머무르며, 벼슬할 만하면 벼슬을 한 분이 공자이다.可以速則速 可以久則久 可以處則處 可以仕則仕 孔子也라고 하면서 공자를 시중의 성인聖之時者이라고 칭송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보냄

 

 

현재 사직할 만한 사정과 질병 외에도 더욱더 절박한 슬픔이 있으니, 선산(先山)을 면례(緬禮)하는 일이오. 이전부터 계획하기는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일은 크고 힘은 모자라서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하다 보니 그렁저렁 삼십 년 넘게 지체되었소. 언제고 두려운 건 일찍 죽게 되어 이 일이 곧 중지되고 마는 것이오.

영남 고을에서 돌아온 이래로 역량이 대략 모여져서, 몇 해 동안 벼르고 벼른 것이 지난가을로 정해져 있었소. 그래서 이장(移葬)할 때 쓰는 도구도 갖추어졌고 날짜도 잡아 놓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남쪽으로 오게 되니, 실로 낭패가 되었던 거요. 더더구나 이 몸의 나이가 환갑이 넘었으니 앞길이 매우 바쁜데 지금 또 직함에 얽매여 세월을 끈다면, 비단 풍수지리에서는 꺼리는 것도 많을 뿐만 아니라 길한 해를 만나기가 어려우며, 빈 산에 치표(置標)만 해 두면 남에게 뺏기기가 쉽소. 지난날 감사께서 이 간곡한 심정을 깊이 마음 아파하시어, 새해가 되기를 조금 기다려 말미를 청하겠노라고 하니 면전에서 틀림없이 승낙을 하셨소. 그런데 지금 이와 같이 인정상으로나 도리상으로나 위급하게 되었으니, 말미를 청하는 일은 감히 다시 논할 문제가 아니오. 내심 서로 버티다가 앉아서 절기만 놓쳤으니, 사람된 도리뿐만 아니라 사체(事體)에도 손상이 가고 말았소.

바라건대 이 사정을 들어 감사에게 낱낱이 자세히 아뢰어, 그만두고 돌아가는 길을 빨리 만들어 주는 것이 어떻겠소? 이만 줄이오.

 

 

[D-001]선산(先山)을 면례(緬禮)하는 일 : 연암은 1767년에 별세한 부친의 장지(葬地) 문제로 녹천(鹿川) 이유(李濡 : 1645~1721)의 후손가와 소송이 빚어지자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으나, 남과 원한을 맺고 싶지 않아 부친의 유해를 딴 곳에 임시 매장한 뒤 장차 길지(吉地)를 얻어 이장할 계획을 줄곧 품고 있었다. 過庭錄 卷1

[D-002]일찍 죽게 되어 : 원문은 溘先朝露인데, 아침 이슬보다도 빠르게 사라진다는 뜻으로 일찍 죽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중존(李仲存)에게 답함

 

 

편지에서 알려 준 어떤 사람의 말에 대해서는 한 번 웃음을 터뜨릴 만하오. 속담에 중 꿈꾸고 문둥이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무엇을 이름이냐 하면, 중은 절에 살고, 절은 산에 있고, 산에는 옻나무가 있고, 옻의 독기는 사람을 문둥이처럼 만들므로, 꿈에 서로 연결되어 나타난 때문이오. 내가 예전에 중국에 들어갔었는데, 중국은 현재 되놈이 웅거하고 있는 곳이 되었소. 나는 일찍이 그들과 더불어 함께 놀고 자고 술 마시고 밥 먹곤 하였으니, 꿈속에서 중을 본 것과 같을 정도만이 아니었소.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이 나더러 문둥이라 해도 이상히 여길 것이 없소.

파피리를 불고 대말을 타고 놀던 옛날의 동무들로 늙도록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끼리, 침관(寢冠)을 놀려 대어 털모자毳帽라 하고 해어진 털배자를 비웃어 전구(氈裘)라 하지만 이는 어찌 참으로 붉은 실로 된 고깔을 쓰고 말굽형 소매의 옷을 입어서겠소? 대개 되놈이라 하여 비웃으면 아이들도 부끄러이 여기는 바이기 때문에 비슷한 사물을 끌어들여 서로 농담한 것이니, 마치 함께 목욕하면서 벌거벗었다고 희롱하는 격이라, 누가 그 말에 성을 내겠소? 수십 년의 길고 긴 세월을 거쳐 오는 동안 옛날의 떼 지어 노닐던 친구들이 거의 다 죽어 아무리 하룻밤 우스개를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그런데 지금 평소에 전혀 모르던 사람이 갑자기 되놈의 의복이란 따위의 말로 곧장 남에게 덮어씌우는 것도 안 될 일인데, 더구나 글로 만들어서 욕지거리를 늘어놓는단 말이오? 정신 이상으로 실성한 사람이 아닌 바에야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제 스스로 되놈이 되어 남의 비웃음과 욕을 받겠소? 상식으로 따져 보아도 거의 이치에 가깝지 않은 일이 아니겠소? 하인들도 보기가 부끄러울 지경인데, 더더구나 아전과 백성을 거느리는 자리에 부끄러워하는 낯짝을 하고 있겠소? 그자가 지어낸 말이 몹시도 조잡하여 비록 길에서 노는 아이들이나 저자의 심부름꾼들이라도 누가 다시 믿어 주겠소? 한 번의 웃음거리로 넘기고 말 일이오.

바라건대 우리 집 아이들에게 훈계하여 결코 남들에게 이러니저러니 변명을 말라 함이 어떻겠소? 설령 오유선생(烏有先生)의 성명을 묻는 자가 있다면 얼굴이 해맑고 눈썹이 또렷한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될 거요.

 

 

[C-001]이중존(李仲存) : 중존은 이재성(李在誠 : 1751~1809)의 자이다. 이재성은 계양군(桂陽君 :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의 후손으로 호를 지계(芝溪)라고 하였다. 연암의 처남이자 평생지기였으며, 이서구 · 이덕무 · 박제가 등과도 절친하여 북학파(北學派)의 일원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형제에게 글을 가르쳤다. 노년에 진사(進士) 급제 후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고, 문집으로 지계집(芝溪集) 7권이 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D-001]내가 …… 들어갔었는데 : 정조 4(1780) 진하 별사(進賀別使)의 일원으로 중국에 다녀온 사실을 가리킨다. 당시 연암은 열하(熱河)에서는 윤가전(尹嘉銓) · 왕민호(王民皥) 등과, 북경에서는 초팽령(初彭齡) · 유세기(兪世琦) 등 청 나라 문사들과 두루 사귀었다.

[D-002]파피리를 …… 동무 : 원문은 葱篠舊交인데, 총소(葱篠)는 총적(葱笛)과 소참(篠驂), 즉 파의 잎으로 만든 피리와 대나무로 만든 말竹馬을 가리킨다.

[D-003]침관(寢冠) : 잠잘 때에 쓰는 모자를 말한다.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옛날에는 잠잘 때에 이미 침의(寢衣)가 있었으니 응당 침관(寢冠)이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지금은 두풍(頭風)을 앓는 사람에게만 침관이 있다.”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53 耳目口心書6

[D-004]털모자毳帽 : 당시에 털모자를 청 나라에서 대량 수입해다 썼다. 연암집 2 ‘김 우상에게 축하하는 편지賀金右相書의 별지(別紙) 참조.

[D-005]전구(氈裘) : 북방 오랑캐들이 입던, 털과 가죽으로 된 옷을 말한다.

[D-006]붉은 실로 된 고깔 : 청 나라 때 남자의 예모(禮帽)는 모정(帽頂)의 중간 부분을 붉은 실로 짠 모위(帽緯)로 장식하였다.

[D-007]말굽형 소매 : 청 나라 때 남자 예복의 말굽형 소매인 마제수(馬蹄袖)를 가리킨다.

[D-008]그런데 …… 말이오 : 안의 현감 시절에 연암이 고을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자자해지자 이를 시기한 함양 군수 윤광석(尹光碩), 연암이 가끔 옛 의복인 학창의(鶴氅衣)를 입어 보곤 한 사실을 과장 · 왜곡하여 되놈의 의복을 입고 백성들을 대한다.胡服臨民는 설을 지어내어 서울에 전파하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2

[D-009]길에서 …… 심부름꾼들 : 원문은 街童市卒인데, 시졸(市卒)은 원래 시문(市門)의 문지기를 가리키는 말이나, 여기서는 식견이 가장 부족한 사람을 뜻하는 아동주졸(兒童走卒), 가동주졸(街童走卒)이란 성어와 같은 뜻으로 쓴 것으로 보았다.

[D-010]오유선생(烏有先生) : ()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에 나오는 허구적인 인물을 말한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되놈의 의복을 입었다는 사람을 가리킨다.

[D-011]얼굴이 …… 사람 : 한 나라 대장군 곽광(霍光)은 훤칠한 키에 얼굴이 해맑고 눈썹이 또렷하며 멋진 수염을 지녔다고 한다. 연암집 5 ‘대호에게 답함答大瓠 참조. 여기서는 되놈의 의복을 입은 것으로 의심받은 연암 자신의 용모를 농담으로 곽광에 비겨 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중존에게 답함

 

 

세상 사람들이 하도 바쁜 탓인지 남의 말을 흐리멍덩하게 듣고, 전하는 말도 어물어물하니 이 때문에 근일 말하는 자들이 더욱 조리가 없게 되는 것이오. 나는 자세히 말을 할 터인데, 그대 역시 너무 길게 끈다고 싫증 냄이 없을는지요.

내가 처음 영남 고을에 부임했을 때, 용소(龍沼)에서 비를 빌게 되어, 유 선생(劉先生)  이름은 처일(處一)이다.  이라는 이가 축관(祝官)으로 와서 용소 위에 있는 절에서 재()를 지냈는데, 수염과 눈썹이 하얗고 의복이 예스럽고 특이해 보였지요. 그래서

 

선생이 입고 계신 것이 무슨 의복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대답이

 

학창의(鶴氅衣)입니다.”

하더군요. 이는 대개 벼슬아치의 사복을 창의(氅衣)’라 칭하므로 ()’ 자 하나를 더 얹어 그와 구별하게 한 것이오. 그 제도는 옷깃은 모나고 양 섶은 곧으며, 흰 바탕에 검은 선〕 - 음은 ()’이다.  을 둘렀으며, 세 자락이 옆으로 터지고 양 옷깃이 맞닿아서 몹시 점잖아 보이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소.

 

선생은 부디 산에는 놀러 가지 마시오.”

그가 그 까닭을 묻기에, 나는 웃으며 말했지요.

 

예전에 밤에 모였던 때가 기억나는데, 좌중에 조경암(趙敬庵)  이름은 연귀(衍龜)이다.  이라는 이가 있었으니 옛것을 좋아하여 성실히 실행하는 사람이었소. 그가 일찍이 두 학동을 거느리고 구월산(九月山)을 노닐면서 치관(緇冠)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고 다녔는데, 산성(山城)의 별장(別將)이 졸개 두어 명을 거느리고 뒤를 밟았던 거요.

()는 사뭇 그런 줄도 모르고 제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산 이름이 구월산인데 본래 이름은 아사달산(阿斯達山)이다.’ 했더라오. 그러자 성장(城將)이 별안간 호통을 치며 과연 오랑캐兀良哈로다!’ 하며 좌우에게 눈짓을 주어 포박을 하려 드는 것이었소. 조는 성을 내며 너는 어찌 남을 되놈이라 욕하느냐?’ 하니, 성장 역시 꾸짖으며 네가 되놈 옷을 입고 되놈 말을 하니 되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였소. 조는 하도 다급하여 정수리를 드러내 보이며 너는 언제 상투 지닌 오랑캐를 본 적이 있느냐?’라 했소.

잠시 후에 절 중이 와서 알아보고 이분은 여주(驪州) 조 생원(趙生員)이오.’ 하자, 성장은 그래도 의심이 안 풀려 중에게 당부하기를 이 손님은 밥도 주지 말고 산 밖으로 내쫓아라.’ 했더라오. 그래서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등에서 땀이 난다고 하여, 온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더라오.

나는 조에게 말하기를 군자란 평상시에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삼가는 법이오.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심의를 증정했어도 소 강절(邵康節)은 늘 입지는 않았으니 이 어찌 평상시에 행동을 삼가는 군자가 아니겠소?’ 하니, 조의 말이 그렇다마다요. 내가 한참 곤욕을 볼 때에 머리털이 있어 덕을 보았소. 지금처럼 연로하여 대머리였더라면 무엇으로써 해명했겠소?’ 하여 온 좌중이 더욱 크게 웃으며 그칠 줄을 몰랐다오. 지금 선생이 입고 있는 그 의복도 성장에게 의심 살 것이 아니겠소?”

() 역시 크게 웃고 나서는,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말하기를,

이 옷은 우리 고장 임갈천(林葛川)과 노옥계(盧玉溪)가 물려준 제도입니다. 감히 묻자온대 성주(城主 사또)께서 입고 계신 것은 무슨 의복입니까?”

하기에,

 

이 역시 이른바 창의라는 거요.”

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유는 말하기를,

 

명칭과 실상이 다 근거가 없습니다. 새 깃을 갈라서 옷을 만든 것을 창()이라 이르는데, 창이란 본래 학의 날개로, 그 날개를 펴면 까만 선을 두른 것 같으니 이른바 호의현상(縞衣玄裳)이란 것이 이것이요, 옛날의 의복이란 검은 선을 두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창의라 이름 지은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이른바 창의라는 것은 선을 둘러 가장자리를 구별하지 않고 소매는 중의 장삼 같으며, 더구나 옷깃을 여미는 부분督袵이 항상 열려 있고 현무(玄武)는 엄정하지 않지 않습니까? 이는 단지 습속으로 그렇게 된 것뿐이니, 옛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성장의 의혹을 사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고 나서, 곁에 있던 통인(通引)을 가리키며 강개한 어조로 말하였소.

 

총각이란 관을 아직 쓰지 않은 동자의 호칭이니 이른바 총각관혜(總角丱兮)’가 이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땋은 머리가 발뒤꿈치까지 드리워져도 오히려 총각이라고 이르면 되겠습니까? 아이를 가르침이 바르지 못하고 명칭과 의리가 모두 어긋났으니, 이 역시 등솔이 터진 창의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고장의 정동계(鄭桐溪)가 물러나 산중에서 살 적에 그 밑에 있는 동자들은 모두 땋은 머리를 풀어 쌍상투로 틀어 올렸지요. 이것은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한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우리 일가 두어 사람들이 삼동(三洞)에 놀러 가기 위하여 기생과 악공(樂工)을 빌려 달라 하기에, 나는 사절하며,

 

그대들이 지금 찾아가는 그 산 전체가 바로 기생인걸요.”

했더니, 모두 놀라며 어째서냐고 물었소. 나는 웃으며,

 

적상산(赤裳山)이 아니요.”

하였소. 그리고 농 삼아 앞에서 한 말을 들려 주며, 함부로 산에 놀러 가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이 고을에는 어진 이가 많소이다.”

하였더니, 그 손들이 발끈하여 일어나면서

 

백성으로서 제 원님이 되놈 옷 입었다고 조롱하는 법이 어디 있소?”

합디다.

그 뒤 이웃 고을 원님들 4, 5명이 모였을 때, 영남 풍속이 거세어 원 노릇하기 어려움을 근심하였지요. 그때 누군가가

 

되놈 옷과 심의에 대한 풍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고 묻기에, 나는

 

이는 잘못 전해진 말이오. 그런데 또 어디서 들었소?”

했더니, 대답이

 

그대 집안의 족형(族兄)과 친분이 있어 근간에 찾아갔더니, 이상한 소문을 파다하게 전해 줍디다.”

하는 것이었소.

! 그 전하는 말이 비록 몹시 해괴했지만 굳이 변명할 가치도 없었소. 게다가 쟁반에 담은 음식이 계속 들어오고 거문고와 노래가 다투어 연주되었으므로 그 곡절을 자세히 알지도 못했고, 남들도 자세히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지요. 이때 큰 눈이 갓 개고 초승달이 누르스름하여, 서로 손을 잡고 동산에 들어가서 뭇 기생을 시켜 촛불을 잡히고 수만 그루의 긴 대나무를 구경하였지요. 그 김에 부러진 대나무 가지를 다투어 주워서 술을 덥히고 고기를 구우니, 좌우에서 대나무 토막 터지는 소리가 대포처럼 번갈아 터져 나오고, 갈대숲 까마귀와 산비둘기가 날개가 얼어붙어 어지러이 떨어졌소.

술이 얼큰하자 서로 바라보며 말을 주고받기를,

 

음산(陰山)에서 밤사냥할 제 초라함을 면치 못해, 초피 갖옷은 낡아빠져 뒤가 터진 것은 여전한데, 비파 소리 쓸쓸하고 줄 퉁기는 손가락은 추위로 떨어져 나갈 듯하네.”

하였지요. 한바탕 웃음과 해학이 흐드러졌으니 모두 다 한때 즐거움을 얻자는 것이었는데, 농담거리가 굴러다니다가 남을 해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소? 그대는 어찌 잊었소? 밤에 말 탄 이교(吏校) 수십 명을 거느리고 눈 속에 한껏 사냥을 했다는 말들은 모두 이런 따위가 번복되어 구실로 된 것임을 말이오. 그대는 왜 나를 위해 변명해 주지 않았소? 매란 밤에 풀어놓는 동물이 아니고, 산협(山峽) 고을 이교들이 어디로부터 그 많은 마필(馬匹)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말이오.

 

 

[D-001]조경암(趙敬庵) : 조연귀(趙衍龜)는 자가 경구(景九), 호가 경암(敬庵)이며,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임배후(林配垕) · 이희경(李喜經) · 이덕무 · 박제가 등과 교분이 깊었다. 靑莊館全書 卷19 雅亭遺稿11 5 趙敬庵》 《貞蕤詩集 卷1 戱倣王漁洋歲暮懷人詩六十首 편저로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가 있으며, 이에 대한 연암의 발문이 연암집 3에 수록되어 있다. 조연귀가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유람 다니다가 봉변당할 뻔한 일화는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1 사전(士典)1 복식조(服食條)에도 소개되어 있다. 단 구월산(九月山)이 수양산(首陽山)으로 되어 있다.

[D-002]치관(緇冠) : 선비들이 평상시에 쓰는 검은 베로 만든 관을 이른다.

[D-003]심의(深衣) : 상의와 하상(下裳)이 연결된 옷으로 대개 흰 베로 만들고 가장자리를 검은 선으로 둘렀다. 주자(朱子) 가례(家禮)에서 천거한 이래로 조선 시대 유학자 간에 이를 숭상하여 착용하게 되었으며, 그 제도에 대한 변증(辨證)이 이어져 왔다.

[D-004]아사달산(阿斯達山) : 황해도 구월산은 옛날 단군이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수천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며, 옛 이름을 아사달산이라 하였다. 고려 시대 이래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로 산성을 쌓고 별장(別將)을 두었다.

[D-005]오랑캐兀良哈 : ‘兀良介로도 표기하며, 오량해(烏梁海)라고도 부른다. () 나라 때 몽골 동부와 조선의 두만강 일대에 살던 여진(女眞) 오랑캐를 가리킨다.

[D-006]사마 온공(司馬溫公) …… 않았으니 : 사마 온공은 송() 나라 때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진 사마광(司馬光), 소 강절(邵康節)은 강절(康節)이란 시호를 받은 소옹(邵雍)을 말한다. 사마광은 예기에 의거해서 심의(深衣)를 만들어 입어 보곤 했는데, 소옹에게도 이를 입기를 권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소옹은 나는 지금 사람이니 지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라고 하니, 사마광이 그 말이 이치에 맞음을 탄복했다고 한다. 宋名臣言行錄 外集 卷5

[D-007]임갈천(林葛川)과 노옥계(盧玉溪) : 갈천(葛川)은 임훈(林薰 : 1500~1584)의 호이고, 옥계(玉溪)는 노진(盧禛 : 1518~1578)의 호이다. 임훈은 생원시 급제 후 참봉을 거쳐 목사까지 지냈으나 주로 고향에 은거했으며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효간(孝簡)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안의(安義)의 용문서원(龍門書院)에 제향되었다. 노진은 문과 급제 후 현달하여 판서까지 지냈고 청백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기대승(奇大升) · 김인후(金麟厚) 등과 교분이 깊었으며,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다.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받았고 함양(咸陽)의 당주서원(溏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D-008]까만 …… 같으니 : 원문은 如玄緣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勝溪文庫)와 연세대 소장 필사본에는 如玄端으로 되어 있다. 현단(玄端)은 고대 중국의 예복의 일종으로, 역시 옷 가장자리를 까만 선으로 둘렀다. 居家雜服攷 外服圖 玄端

[D-009]호의현상(縞衣玄裳) : 흰 비단 상의와 검은색 치마를 입었다는 뜻으로, ()의 모습을 형용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D-010]현무(玄武) : ()의 검은색으로 된 테두리 장식을 말한다. 예기 옥조(玉藻) 흰 비단 관에 검은 테두리 장식을 한 것은 상중(喪中)의 자손들이 쓰는 관이다.縞冠玄武 子姓之冠라고 하였다.

[D-011]총각관혜(總角丱兮) : 시경 제풍(齊風) 보전(甫田), “예쁘고 아름다워라 머리털을 묶어 쌍상투를 틀었네. 얼마 안 있다 만나 보면 불쑥 관을 쓰고 있으리.婉兮孌兮 總角丱兮 未幾見兮 突而弁兮라 하였다.

[D-012]정동계(鄭桐溪) : 동계(桐溪)는 정온(鄭蘊 : 1569~1641)의 호이다. 정온은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으로,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중용되었다.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며 그 이후 관직을 버리고 덕유산(德裕山)에 은거하다 죽었다. 문간(文簡)이란 시호가 내렸으며,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생가가 현재 거창군(居昌郡)에 보존되어 있다.

[D-013]혐의 : 조선 시대 동자들의 땋은 머리는 원() 나라의 지배를 받은 고려 시대에 몽골의 변발(辮髮) 풍습을 모방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오랑캐의 풍습이라 비판되었던 사실을 말한다.

[D-014]삼동(三洞) :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 하여 안의현의 명승지인 세 곳의 동천(洞天), 즉 화림동(花林洞) · 심진동(尋眞洞) · 원학동(猿鶴洞)을 말한다.

[D-015]적상산(赤裳山) : 전라도 무주(茂朱)에 있는 산으로 경상도 안의에서 가까운데, 가을 단풍이 여인네의 붉은 치마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D-016]음산(陰山)에서 …… 못해 : 음산은 내몽골 이남에서 내흥안령(內興安嶺)에 이르는 일대의 산들을 일컫는다. 이 대목은 흉노(匈奴) 정벌에서 패한 죄로 서민으로 강등되어 재야에서 사냥을 하며 지냈던 한() 나라 장군 이광(李廣)의 불우한 시절을 소재로 한 듯하다.

[D-017]농담거리가 ……  : 원문은 善謔之轉而爲虐인데, 시경 위풍(衛風) 기욱(淇奧)에서 농담을 잘하시되 남을 해치지 않도다.善戱謔兮 不爲虐兮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선학(善謔)’은 농담을 잘한다는 뜻과 함께, 농담거리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중존에게 답함

 

 

그네들이 떠들어 대는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虜號之藁란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소. 연호(年號)를 말한 것이오, 지명(地名)을 말한 것이오? 이 책은 잡다한 여행 기록에 불과한 것이라, 있건 없건 잘 되었건 못 되었건 간에 본래 세도(世道)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거늘, 애초부터 어찌 춘추대의(春秋大義)에 견주어 논한 적이 있었으리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 현자(賢者)에게 완전무결함을 요구하듯이 한다면 이는 지나친 일이오.

! 청 나라의 연호가 천하에 처음 시행되었을 때 우리나라의 선정(先正)이 고신(告身 임명장)에다 쓰지 말아 달라 청한 일이 있었고, 사대부 집안의 묘에 비()를 새겨서 세울 적에도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라 추가하여 쓴 사례도 있기는 하오. 그러나 공사(公私) 문서에 이르러서는 청 나라 연호 사용을 피하지 못할 경우가 있었으니, 이는 대개 부득이한 까닭이오. 그러므로 토지나 가옥이란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어 아니하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그 증서를 만들 때 당대의 연호를 갖추어 쓰지 아니하면 매매가 성립이 되지 않는 법이오. 세상에서 유독 춘추대의를 엄수하는 자는 장차 이 가옥을 오랑캐의 칭호가 붙었다 하여 살지도 않으며, 이 토지를 오랑캐의 칭호가 붙었다 하여 거기서 수확되는 곡식으로는 밥도 지어 먹지 않을 것인지 나는 모르겠소.

나는 예전에 멀리 중국을 유람했을 적에 그 노정, 숙박지, 날씨, 일시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러므로 압록강을 건너던 날부터 첫머리에서 범례를 만들어 후삼경자(後三庚子)’라 했고, 다시 스스로 해설을 붙이기를,

 

어째서 ()’라 칭했는가? 숭정 기원후라는 뜻이다. 어째서 ()’이라 했는가? 기원후 세 번째 돌아온 경자년(庚子年)이라는 뜻이다. 숭정이란 연호는 어째서 숨겼는가? 장차 압록강을 건너게 된 때문이다.”

하였소. 그러고 나서 붓을 던지고 허허 웃으며,

 

옛날에는 피리춘추(皮裏春秋)가 있더니, 지금은 곽외공양(鞹外公羊)이 되었구나.”

했었소. 이는 미상불 공양전의 문체를 구차스레 빌린 것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지요.

그러나 만약 날씨의 기록 위에다 반드시 대서특서(大書特書)하여 () 황정월(皇正月)’이라 한다면 진실로 아니되기 때문에, 불가불 말해야 할 경우에는 왕왕 강희(康熙)라 건륭(乾隆)이라 써서 그 시대를 구별했던 것인데, 도리어 역사서의 기준으로 질책한다면 어찌 황당하지 않겠소? 이는 과연 그 원고를 보지도 않고서 억지로 말을 만든 것이오. 반드시 되놈 오랑캐 황제라 배척해야만 비로소 춘추대의를 엄수하는 것이 된단 말이오?

또 만약 오랑캐 땅이라 부끄럽다고 해서 책에다 열하(熱河)’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이는 더욱 당황스러운 일이지요. 고대 중원(中原)의 제후국들이 불행히도 오랑캐에게 먹힌 적은 비단 오늘날에만 그런 것이 아니었소. 그렇다면 장차 모두 다 오랑캐로 여겨서 그 지명들을 책 이름으로 삼지 말아야 된단 말이오? () 임금은 동이(東夷) 지역 사람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 지역 사람이었소. 오늘날 춘추를 배우는 자를 따르자면 장차 순 임금과 문왕을 위하여 그 출생지를 기어이 숨겨야 한다는 말이오?

춘추란 중화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배척한 책임에는 틀림없지요. 그렇지만 공자도 일찍이 구이(九夷) 지역에 살고 싶다고 했소. 지금의 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성인이 무엇 때문에 그가 배척하는 땅에 살고 싶어 했겠소? 이와 같은 사람이 춘추를 배운다면, 장차 호전(胡傳)은 되놈 호() 자가 들었다고 폐기해 버리고 익히지 않을 것인가요? 나를 알아줄지 나를 책망할지 시비를 가려 줄 사람이 응당 있을 터요.

대저 나는 과거를 폐한 것이 자못 일렀던 까닭에 마음이 여유롭고 활달하여, 속세를 벗어나 유유자적하면서 숙원을 이루기를 바랐던 거요. 때문에 멀리로는 목은(牧隱)을 사모하고 가까이로는 노가재(老稼齋)를 본받아, 말 채찍 하나에 단출한 보따리로 만리 길을 나섰던 것이오. 다만 생각건대, 신분은 비록 백도(白徒)이지만 명색은 유생(儒生)이라, 역관도 아니요 의원도 아니어서 행동하기 불편하였고, 몰래 갔다 몰래 와도 호칭만은 가리기가 어려웠으니, 진실로 몸을 단정히 갖는 군자로서 따진다면 스스로 마음속에 부끄럽지 않은 적이 없었소.

매양 이른 새벽에 말고삐를 잡고 나서면 마음속으로 독백하기를,

 

용문(龍門)의 장유(壯遊)가 무슨 대단한 일인가? 묵자(墨子)는 조가(朝歌)에서 수레를 돌렸단 말을 듣지도 못하였는가?’

하다가, 이윽고 고운 아침 해가 붉은빛을 펼치며 요동(遼東) 벌을 가득 채우면 공중에 솟아 밝게 빛나는 탑이 아스라이 말머리를 맞아 주고, 수은빛 안개가 나무숲에 자욱하며 황금빛 기와지붕은 구름 속에 솟아났었소.

나는 이 가운데에서 왼편으로 푸른 바다를 돌고 오른편으로 태항산(太行山)을 끼고 가고 또 갔었소. 마음과 안목이 날로 새로워지니 예전의 보잘것없던 포부를 비웃게 됨과 동시에, 이 기상이 호연(浩然)해짐을 깨달았던 거요. 마침내 만리장성을 벗어나 북으로 대막(大漠)에 다다랐소. 이것이 바로 열하까지 여행하게 된 연유요.

귀국한 뒤에는 물의(物議)라곤 조금도 있지 않았으며, 도리어 나의 이 여행을 부러워하는 자까지 있었소. 산중살이가 심심하고 지루해서 묵혀 둔 원고들을 모아 몇 권의 책자를 편성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열하일기를 짓게 된 연유요.

안 본 것 없이 다 살펴보아 하나도 놓친 사물이 없다고 스스로 여겼으나, 문자로 옮겨 놓은 것은 구우일모(九牛一毛)에 지나지 않고, 필치도 쇠퇴하고 말았소. 잠이 깬 뒤 베개 고이고 읽어 보니, 당초 여행에 나설 때의 마음과는 너무도 멀어졌소.

지난 발자취를 돌이켜 생각하면 구름도 물도 모두 사라지고, 이따금 낡은 초고를 펴 보면 우수마발(牛溲馬勃)이 함께 나타나니, 스스로 즐길 것도 못 되는데 누가 다시 보아 주겠소? 더욱이 중간에는 우환과 초상으로 간수해 둘 겨를조차 없었고, 또 벼슬길에 나선 이후로는 더욱더 유실되어, 겨우 그 이름만 남아 있었으니 도올(檮杌)과 같은 가증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소. 이것이 이른바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라는 거지요.

기나긴 20년 사이에 초록(蕉鹿)의 갈무리를 한바탕의 꿈으로 치부한 지 오래였는데, 시호(市虎)의 선전이 갑자기 또 날개를 달았으니 이 어찌 지나친 일이 아니겠소?

그대는 나를 대신하여 지금 춘추를 배우는 이들에게 말 좀 해 주지 않겠소? 왜 나를 이렇게 책하지 않느냐고 말이오.

 

그대가 전번에 유람한 곳은 바로 삼대(三代) 이래의 성스럽고 영명하신 제왕들과 한() · () · () · ()이 영토로 삼은 땅이오. 지금 비록 불행하여 되놈들이 차지하기는 했지만, 그 성곽과 궁실과 인민들은 물론 그대로 남아 있고, 정덕(正德) · 이용(利用) · 후생(厚生)의 도구들도 물론 그대로 있고, () · () · () · ()의 명문 씨족들도 물론 그대로 있고, () · () · 민건(閩建)의 학문도 물론 사라지지 않았소. 저 되놈들이 진실로 중국이란 땅을 손아귀에 집어넣으면 이만큼 이익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빼앗아 차지하기에 이른 것이오.

그렇다면 그대는 왜, 예로부터 본래 지녀 온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 중국의 존숭할 만한 관례와 업적을 모조리 터득해 가지고, 돌아와서는 책자로 모조리 저술하여 온 나라에 쓰이게 하지 않소? 그대는 이런 일은 아니 하고서 한갓 피폐(皮幣)의 사신만 따라다녔단 말이오? 지금 그 기술한 내용은 모두 잡다하고 실속 없는 말로서, 한때 방랑한 자취에 불과하니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남에게 자랑할 만하다 한단 말이오? 단지 스스로 의지만 상실하고 덕만 손상할 따름이오.”

이런다면 듣는 사람이 어찌 등골이 써늘하고 입이 벌어지며 부끄럼을 못견디어 죽고 싶지 않겠소?

제후들을 끌어다가 다른 제후를 쳤기 때문에 춘추가 지어진 것인데, 지금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춘추를 끌어다가 남을 욕하는 자료로 삼는다면 되겠소? 춘추가 어찌 겉으로 꾸민 언동만으로 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소이다.

 

 

[C-001]이중존에게 답함 : 연암이 안의현에서 되놈의 의복을 입고 백성들을 대한다.胡服臨民는 설이 서울로 전파되자, 여기에 가세하여 연암과 경쟁 관계에 있던 문인 유한준(兪漢雋) 열하일기의 문체로 인해 연암이 정조(正祖)의 견책을 받은 것을 기화로 열하일기에 대해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虜號之稿라고 비방하는 여론을 선동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1798년에서 1799년 사이에 호복임민(胡服臨民)’ 노호지고(虜號之稿)’라는 비방이 번갈아 일어나 큰일이 날 뻔했으나, 연암은 남들에게 해명한 적이 없었으며 오직 이재성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만 그 같은 비방을 초래한 연유를 밝혔을 뿐이라고 한다. 過庭錄 卷2

[D-001]현자(賢者)에게 …… 한다면 : 신당서(新唐書) 2 태종본기(太宗本紀)의 찬()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은 항상 현자(賢者)에게 완전무결함을 요구하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D-002]선정(先正) : 선대(先代)의 어진 신하를 이른다. 효종실록 즉위년 8 23일 조에 응교(應敎) 조빈(趙贇)이 정축년(1637) 이래 종묘의 축문(祝文)과 조신(朝臣)의 고신(告身)에 연월(年月)만 쓰고 일절 연호를 쓰지 않은 관례를 들어 인조(仁祖)의 옥책(玉冊)과 지석(誌石)에도 연호를 쓰지 말도록 상소하자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이를 지지하는 의견을 올린 사실을 두고 말한 듯하다.

[D-003]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 숭정은 명 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1628년부터 1644년까지 사용되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존명배청(尊明排淸) 사상에 따라 명 나라가 망한 뒤에도 청 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숭정이란 연호를 그대로 썼다.

[D-004]다시 …… 하였소 :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의 서문(序文)에 나오는 대목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의 기사에 대해 자문자답(自問自答)의 형식으로 해설한 것이 한 특징인데, 연암은 그 독특한 문체를 본떠서, 열하일기 도강록의 첫머리에 후삼경자(後三庚子)”라고 연도를 기록한 이유를 해설하였다.

[D-005]피리춘추(皮裏春秋) : 속으로 감춘 춘추라는 말로,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 평론(評論)하는 것을 이른다. () 나라 강제(康帝)의 장인인 저보(褚裒)가 젊은 시절에 오만하고 고상한 기풍을 지녀 속에 춘추를 감추었다.”는 칭송을 들었다고 한다. 晉書 卷93 褚裒傳

[D-006]곽외공양(鞹外公羊) : 거죽으로 드러난 공양전이란 말로, 공양전의 문체를 본뜬 것을 스스로 풍자한 것이다.

[D-007]() 황정월(皇正月) : 춘추에서는 노()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일 년의 첫 달을 반드시 () 왕정월(王正月)’이라 적어 주() 나라 왕실의 역법(曆法)을 따르고 있음을 나타냈다. 연암이 중국 여행을 한 조선 후기 당시는 청 나라 황실의 역법을 따랐으므로, 춘추의 필법을 준수하자면 () 황정월(皇正月)’이라 적어야 한다는 뜻이다.

[D-008]강희(康熙) : 청 나라 성조(聖祖)의 연호로 1662년부터 1722년까지 사용되었다.

[D-009]건륭(乾隆) : 청 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1736년부터 1795년까지 사용되었다.

[D-010]() 임금은 …… 사람이었소 : 맹자 이루 하(離婁下) 순 임금은 저풍(諸馮)에서 태어나서 부하(負夏)로 옮겨 갔다가 명조(鳴條)에서 돌아가셨으니 동이(東夷) 지역 사람이다. 문왕은 기주(岐周)에서 태어나서 필영(畢郢)에서 돌아가셨으니 서이(西夷) 지역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D-011]공자도 …… 했소 : 논어 자한(子罕), 공자가 구이(九夷) 지역에 살고 싶다고 하자 어떤 이가 누추한 곳에 어떻게 사시렵니까?” 물었다. 이에 공자가 군자가 살게 된다면 무엇이 누추하겠는가.” 하였다. 구이는 동이(東夷)를 가리킨다. 동이에 9종이 있으므로 구이라고 한다.

[D-012]지금의 …… 사람이라면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서 지금의 이른바 훌륭한 신하란 부국강병(富國强兵)만 추구하고 임금이 왕도(王道)와 인정(仁政)을 지향하게 하지 않으니 옛날의 이른바 백성을 해치는 도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와 같이 지금의 도를 따르고 지금의 습속을 고치지 않으면, 비록 천하를 준들 하루도 편히 지내지 못할 것이다.由今之道 無變今之俗 雖與之天下 不能一朝居也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맹자의 원래 문맥에서 지금의 도는 패도(覇道) 정치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시대착오적인 존명배청(尊明排淸) 사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D-013]호전(胡傳) : () 나라 때 호안국(胡安國 : 1074~1138)이 지은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을 말한다. 좌전(左傳) · 공양전(公羊傳) · 곡량전(穀梁傳)과 함께 춘추 4()의 하나로, () · ()의 주자학파에 의해 존숭되었다.

[D-014]나를 …… 터요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공자가 나를 알아줄 것도 오직 춘추이며 나를 책망할 것도 오직 춘추로다.”라고 한 말을 이용하여, 열하일기에 대해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라고 한 비방이 근거 없음을 주장한 것이다.

[D-015]목은(牧隱) : 이색(李穡 : 1328~1396)의 호이다. 이색은 1348(충목왕 4)에 원() 나라의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1353년에는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 나라에 가는 등 여러 차례 원 나라를 드나들며 그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D-016]노가재(老稼齋) : 김창업(金昌業 : 1658~1721)의 호이다. 김창업은 1712(숙종 38)에 큰형 김창집(金昌集)이 사은사로 청 나라에 갈 때 따라갔으며 연행록(燕行錄)을 남겼다.

[D-017]백도(白徒) : 벼슬하지 못한 유생이나, 훈련을 받지 못한 채 징집된 병졸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썼다. 연암은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는 자제군관(子弟軍官)이란 신분으로 연행에 참여하였다.

[D-018]용문(龍門)의 장유(壯遊) : 용문은 사마천(司馬遷)을 말한다. 그의 고향이 섬서성(陝西省) 한성현(韓城縣) 부근에 있으며 등용문(登龍門)의 고사로 유명한 용문이었다. 사마천은 20세부터 수년간 역사 유적을 탐방하기 위한 큰 뜻을 품고 오늘날의 호북(湖北) · 호남(湖南) · 절강(浙江) · 산동(山東) · 안휘(安徽) · 하남(河南) 등 각 성()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들을 여행하였다. 史記 卷70 太史公自序

[D-019]묵자(墨子) ……  : 증자(曾子)는 지극한 효자였기 때문에 승모(勝母)라는 마을의 이름을 꺼려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고, 묵자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가(朝歌)라는 고을의 이름을 꺼려 그곳에서 수레를 돌렸다고 한다. 淮南子 卷16 說山訓 소신을 지키기 위해 사소한 행동도 근신한 경우를 말한다. 또한 조가는 은() 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이 세운 도읍지이기도 하다. 이 대목은 춘추대의를 엄격히 지키자면 오랑캐 황제가 통치하는 중국 땅을 아예 여행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라는 취지로 말한 것이다.

[D-020]공중에 ……  : 요동의 백탑(白塔)을 말한다. 이 탑은 구요양(舊遼陽) 교외에 있는 13층 벽돌탑으로, () 나라 이후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만주(滿洲) 동부에서 가장 크고 높은 탑이다. 열하일기 도강록에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가 있다.

[D-021]수은빛 …… 자욱하며 : 열하일기 성경잡지(盛京雜識) 7 13일자 기사에, 새벽의 짙은 안개로 인해 요동 벌이 수은 바다水銀海처럼 보인다고 묘사하였다.

[D-022]태항산(太行山) :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 사이에 뻗어 있는 거대한 산맥이다.

[D-023]대막(大漠) : 내몽골과 외몽골의 경계를 이루는 고비사막을 말한다.

[D-024]이것이 …… 연유요 : 원문은 此其所以爲熱河之游也인데, 일부 이본들에  자가  자로 되어 있으나 그 아래의 대응하는 구절 此其所以爲熱河日記也로 미루어  자가 옳다고 판단된다.

[D-025]산중살이가 …… 편성하였으니 : 중국 여행을 마친 연암은 황해도 금천군 연암협(燕巖峽)으로 되돌아가 열하일기의 저술에 전념했다. 현재 전하는 열하일기는 도강록 이하 모두 2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D-026] …… 살펴보아 : 원문은 燃犀之觀인데, () 나라 때 온교(溫嶠)가 무소뿔을 태워 물속을 비추어 보았더니 괴물들이 모조리 정체를 드러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異苑 卷7

[D-027]우수마발(牛溲馬勃) : 우수는 질경이車前草의 별명이고 마발은 담자균류(擔子菌類)에 속하는 식물로, 매우 흔해 빠지고 값싼 약재이다. 그러나 훌륭한 의사는 이런 것들도 빠뜨리지 않고 함께 거두어 두었다가 나중에 활용하는 법이다. 韓愈 進學解 여기서는 열하일기가 별 쓸모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다.

[D-028]우환과 초상 : 1787년 처 전주 이씨(全州李氏)와 형 박희원(朴喜源)이 사망하고, 그 이듬해에는 일가족이 전염병에 걸려 맏며느리 덕수 이씨(德水李氏)가 사망하고 맏아들 종의(宗儀)도 죽다 살아났다. 過庭錄 卷1

[D-029]도올(檮杌) …… 말았소 : 도올은 전설 속의 가증스러운 악수(惡獸)인데, () 나라에서 악을 징계하기 위해 이로써 국사(國史)의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초 나라의 국사인 도올 역시 이름만 전하고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D-030]초록(蕉鹿) …… 오래였는데 : () 나라 사람이 들에서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사슴을 때려잡은 다음 아무도 보지 못하게 땔나무로 덮어 갈무리를 해 두었는데, 나중에 갈무리 해 둔 곳을 찾지 못하자 꿈을 꾼 것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찾지 않았다고 한다. 列子 周穆王》 《열하일기를 쓴 사실조차 잊어버렸다는 뜻이다.

[D-031]시호(市虎)의 선전 : 시장에는 호랑이가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두 사람이 말할 때에는 믿지 않다가 세 사람이 말하게 되면 믿게 된다는 것이니, 참소하는 자가 많으면 믿게 된다는 뜻이다. 韓非子 內儲說上

[D-032]삼대(三代) : 중국 역사에서 이상적인 시대로 숭상하는 하() · () · ()의 세 왕조 시대를 가리킨다.

[D-033]정덕(正德) · 이용(利用) · 후생(厚生)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말로, 삼사(三事)라고 하여 국정(國政)의 세 가지 중대사를 이른다. 정덕은 백성들의 도덕을 바르게 하는 것, 이용은 백성들이 일상생활에서 기구나 재화를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 후생은 옷과 음식 등으로 백성들의 복지를 돌보는 것을 뜻한다.

[D-034]() …… 학문 : 관은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 민건(閩建)은 복건(福建)의 주희(朱熹)를 지칭한 것으로, 송대 성리학을 통칭한 것이다.

[D-035]그대가 …… 것이오 : 열하일기 일신수필(馹汛隨筆) 7 15일자에서 중국 제일 장관론(中國第一壯觀論)을 피력하면서 한 말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다. 연암집 1 회우록서(會友錄序), 7 북학의서(北學議序)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D-036]피폐(皮幣)의 사신 :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따라 청 나라에 예물을 바치러 가는 조공(朝貢) 사신을 말한다. 피폐는 가죽과 비단 같은 예물이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 옛날 태왕(大王 : 고공단보古公亶父)이 빈()에 계실 제 적인(狄人)이 침략하거늘, 가죽과 비단으로 그들을 섬겼을지라도 침략을 면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D-037]제후들을 …… 것인데 : 맹자 고자 하(告子下) 오패(五覇)란 제후들을 끌어다가 다른 제후를 친 자들이다. 그러므로 오패란 삼왕(三王)의 죄인이다.”라고 하였다. 제 환공(齊桓公) 등 춘추(春秋) 시대의 5대 패자(覇者)들은 주() 나라 천자의 명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정벌을 일삼았으므로, 춘추는 이를 징계하기 위해 저술되었다는 뜻이다.

[D-038]어찌 …… 것인지 : 원문은 豈可以聲音笑貌爲哉인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오는 구절이다. “공손함과 검소함은 어찌 부드러운 말씨와 웃는 낯빛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춘추대의가 가식적인 언동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인용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진정(賑政)에 대해 순찰사(巡察使)에게 답함

 

 

편지로 지시하신 일은 받들어 잘 살폈습니다. 무릇 구휼정책에 있어서 가장 공명정대한 원칙으로는 공진(公賑)보다 나은 것이 없지만, 공곡(公穀 관곡)이 나뉘어 사진(私賑)으로 되는 것이 근자의 관례입니다. 그러나 공진과 사진, 명분과 실상 사이에는 모두 크게 황공하고 크게 불편한 점들이 남아 있습니다.

굶주리는 가구를 선정할 때 아무리 줄인다고 해도 매번 부풀린다는 의심을 받게 되고, 목초(牧草)를 부지런히 구했을 뿐인데 도리어 남상(濫觴)의 혐의를 받게 됩니다. 이 때문에 굶주린 가구 숫자가 많이 줄어들어 굶어 죽어 가는 자를 구휼할 수 없게 되고, 괵량(斛量)을 줄여도 이를 잘 살피지 못해 곡식의 품질이 좋기 어려우니, 이것이 공진을 시행할 때 고려해야 할 점입니다.

명색은 사진이라 해도 실상은 공곡에 의지하게 되면, 의심과 염려가 가일층 깊어지는 동시에 관리와 단속도 더욱 까다로울 것이니, 대개 명분과 실상이 맞지 않고 공과 사는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진을 급작스레 논의할 수는 없는 점입니다.

이른바 스스로 비축하여 급한 일을 막는다.’는 것은 더욱 성실치 못한 것이 되니, 만약 말을 세내고 소를 고용하여 자기 농장의 곡식을 실어온 것이 아니라면 장차 어느 곳에서 그 많은 곡식을 스스로 비축할 수 있겠습니까? 앞서 입본(立本)하고 남은 액수를 취한 것도 흔히 담당자에게 발각되어 수의(繡衣 암행어사)나 도백(道伯 관찰사)의 조사가 물밀듯이 먼저 미쳐 오니 어느 누가 감히 범하겠습니까? 원납전(願納錢)을 도로 돌려줄 것과 권분(勸分)을 엄금할 것은 신구(新舊)의 법령이 명백히 선포되어 있으나, 이 두어 가지 방법을 제외하고는 곡식을 갖출 길이 없으니 그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연름(捐廩)하는 한 가지 일만이 가장 폐단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관에서 쓰는 것이라 명분도 바를 뿐더러 본시 이 땅에서 나온 것이니, 이 땅에서 나온 것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바로 내 직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마음에 개운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남 보기에는 명예를 구하는 것같이 되고, 물자를 실로 다 나누어 주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지방관이 된 자는 안팎 곱사등이가 한 몸에 모인 형편입니다. 지난번에 여러 고을에 감결(甘結)을 돌려서 물으신 데 대해, 어디로 정할지 몰라 우선 중론을 따르겠다고 아뢴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찮은 이 몸은 절하(節下 순찰사)의 처분을 바랄 뿐입니다만, 그래도 역시 그 일이 크게 잘 풀리리라고는 감히 스스로 보증하지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심읍(尤甚邑)으로 등급을 분류한 곳을 지차읍(之次邑)으로 옮겨다 놓고, 만이(晩移)를 표재(俵災) 대상에서 억지로 절반만 인정한 것이 지금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백성 구제에 있어서는 우심읍으로 시행하고, 굶주린 가구에 대한 구호 물자는 넉넉한 쪽으로 나누어 지급하라.’고 신신당부하는 편지를 하사하시니 이를 금석(金石)과 같이 받들고 있습니다만, 어찌 마음속으로 요량한 바야 없겠습니까?

그러기에 이미 지난여름 유월 초열흘께부터 가만히 비상 대비책을 마련하여, 영문(營門)에서 수고스럽게 공곡을 분배하도록 괴롭히지 않으려고 했으니 이것이 본래 의도한 바였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오래도록 서성대며 확실히 정규(定規)를 마련하지 못한 것은, 바로 굶주린 가구의 수효를 우선 미리 예측하기 어렵고, 정조(正租)를 판매하는 일을 아직도 손을 대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대저 기근을 구제하는 정책에서 굶주린 가구를 선정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으니, 이 어찌 이교(吏校)나 면강(面綱)이 가가호호 방문한다 하여 그 실정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는 자지 않으면 우는데, 무슨 말을 할 줄 안다고 그 사연을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의지가 있다고 그 소원을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 소리만 듣고도 젖을 줄 줄 아는 것은 오직 자애로운 어미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가슴만 쓰다듬어도 울음을 뚝 그치게 하니, 이는 반드시 먹여 줄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따스하게 쓰다듬고 부드럽게 다독거리는 것은 그로써 체득하자는 것이요, 가만히 기다리고 몰래 듣는 것은 그로써 때를 맞추자는 것이니, 이 어찌 이웃집 사람이나 길 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지금 영문에 서약을 올리노니, 굶주린 가구 선정을 물을 필요도 없고, 공곡(公穀)이라 이름한 것은 줄 필요도 없고, 열흘마다 으레 보고하는 일을 요구할 필요도 없고, 구휼을 감시하는 감영의 비장(裨將)을 보낼 필요도 없고, 사또가 순찰할 때 왕림하실 필요도 없고, 황해도의 좁쌀을 나누어 줄 필요도 없습니다. 백성을 따뜻하게 사랑하는 이 늙은 수령에게 이 4000호의 많은 남녀를 맡기고 잊어 주신다면, 노둔함을 스스로 채찍질하여 위로는 백성에 대한 근심을 분담하게 하신 임금의 지극한 뜻과 아래로는 먹여 주기를 기다리는 민심을 거의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구휼사업이 효과가 없고 정상적인 법식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생각하건대 환히 비추어 보시는 사또의 눈을 벗어날 길이 없을 터이니, 또한 어찌 감히 제멋대로 옛날의 정분만 믿고서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사진(私賑)으로 정하오니, 뒤에 기록한 쪽지도 아울러 보아 주심이 어떠하옵니까?

 

 

[C-001]진정(賑政) …… 답함 : 연암은 충청도 면천(沔川)의 군수로 재임 중이던 1799년 봄 흉년으로 인해 구휼 정책을 실시했는데, 역시 경상도 안의 고을에서 이미 행했던 예에 따라 사진(私賑)으로 시행하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3 이 글은 당시 충청 감사 이태영(李泰永)이 면천군에 공진(公賑)을 시행하려고 하자 이를 사양하고 사진을 시행하겠노라고 하면서 감사에게 허락을 청한 편지이다.

[D-001]목초(牧草) …… 뿐인데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서 맹자가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한 제() 나라 대부 공거심(孔距心)에게 지금 남에게서 소와 양을 받아 대신해서 기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목지(牧地)와 목초(牧草)를 구할 것이다. 목지와 목초를 구하나 얻지 못하면 소와 양을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소와 양이 죽어 가는 것을 서서 볼 것인가?” 하고 질책하니, 공거심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쳤다고 한다. 여기서는 백성들에 대한 구휼 사업을 부지런히 했다는 뜻이다.

[D-002]남상(濫觴)의 혐의 : 남상은 술잔에 넘칠 정도의 적은 물, 또는 술잔을 띄울 정도의 적은 물이라는 뜻이다. 공자가 화려한 복장을 하고 오만한 낯빛을 한 제자 자로(子路)를 나무라면서 양자강(揚子江)도 그 시원(始源)은 남상에 불과하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荀子 子道 여기서는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한다는 혐의를 뜻한다.

[D-003]괵량(斛量) …… 어려우니 : 로 곡식의 분량을 재는 것을 괵량이라 한다. 진휼미(賑恤米)를 나누어 줄 때 알곡만이 아니라 껍질이나 쭉정이와 겨 따위를 섞어서 괵량을 하는 경우를 지적한 것이다. 牧民心書 賑荒 設施

[D-004]이른바 …… 되니 : 수령이 흉년에 대비하여 스스로 비축한 곡식을 자비곡(自備穀)이라 부른다. 목민심서에서는 수령이 자비곡으로써 사진을 실시했다고 허위 과장 보고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수령에게 어찌 스스로 비축한 곡식이 있겠는가? 만약 제 집 식량을 운반해 오거나 자기 농장의 곡식을 실어 온 것이 아니라면, 모두 이 고을에서 나온 것이다. 진짜로 월봉(月俸)에서 덜어 냈다 해도 자비곡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부족한데, 하물며 교묘히 스스로 요령껏 환곡을 매매하고 함부로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서는 외람되어 자비곡이라 일컬어 임금을 속이니, 어찌 큰 죄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牧民心書 賑荒 竣事

[D-005]앞서 ……  : 입본은 장부상의 환곡의 숫자를 채우는 것을 말한다. 환곡을 운영하면서 지역별 또는 계절별 곡가(穀價) 차이를 이용하여, 쌀값이 비싼 지역에, 또는 쌀값이 비쌀 때 환곡을 팔아 돈으로 만들어 두었다가, 그 돈의 일부만으로써 쌀값이 싼 지역에서, 또는 쌀값이 쌀 때 쌀을 도로 사들여 환곡의 숫자를 채우고, 남는 돈을 딴 데 돌려쓰는 수법을 말한다.

[D-006]권분(勸分) : 수령이 기민 구제의 명목으로 자기 관하의 부자들에게 곡식을 바치도록 권유하는 것을 이른다.

[D-007]연름(捐廩) : 공적인 일을 위하여 관리들이 녹봉의 일부를 덜어 내어서 보태는 일을 이른다.

[D-008]감결(甘結) :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내리는 공문을 이른다.

[D-009]만이(晩移) : 만이앙(晩移秧)이라고도 하며 모내기가 늦어 재해를 입은 경우를 말한다.

[D-010]우심읍(尤甚邑)으로 …… 때문입니다 : 흉년을 만난 고을의 원이 감사에게 재해(災害)를 보고하면, 감사는 재해의 정도가 심한 순서대로 각 고을을 우심(尤甚) · 지차(之次) · 초실(稍實)로 등급을 판정한 뒤, 조정에 보고하여 조세 감면 대상으로 배정받은 급재결수(給災結數)를 다시 각 고을에 할당하는데 이를 표재(俵災)라 한다. 고을 원이 감사에게 보고할 때 흔히 재해를 과장하기 때문에 감사는 이를 감안하여 등급을 낮추어 판정하고 급재결수를 삭감하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연암은 안의현의 극심한 재해를 실상대로 보고했으나, 감사가 우심 판정 대신 지차로 강등하고 만이를 표재 대상에서 절반 삭감하는 조치를 내렸던 듯하다.

[D-011]정조(正租) : 정규의 조세로 받은 벼를 이른다.

[D-012]면강(面綱) : 면임(面任)과 집강(執綱)을 이른다. 지금의 면장과 이장에 해당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진정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추수하는 날에 살펴본바 굶주린 가구가 이웃 고을보다 조금 적었으니, 진실로 처음에는 생각조차 못 했던 일이었습니다. 굶주린 가구를 선정할 즈음에 이르자 그중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가을에 이미 보리를 파종했으니 색갈이를 받아 농사짓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고, 나무를 해다 파는 자들은 짚신 삼는 자도 있습니다.” 하고, 길쌈하는 자는 삯방아 찧는 자도 있습니다.” 하며 사양하기에, 소원에 따라 책자를 만드니 심히 다투는 일이 없었습니다. 대개 지난가을 서리가 아주 늦게 내려 대신 파종한 곡식도 꽤 많이 그 결실을 먹을 수 있었고, 타작을 끝낸 뒤로도 일기가 매우 온난하여 모두 다 가을갈이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럭저럭 지낼 뿐 아니라 앞으로 살아 나가는 것도 믿을 데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소를 사육하는 집이나 술장사로 살아가는 부류들은 애당초 기록에 넣지 않았으므로, 지금 하문(下問)하시면서 굶주린 가구를 선정한 것이 너무 깐깐하지 않느냐고 도리어 염려하신 것도 당연한 일로 생각됩니다.

오늘에야 두 번째 순회하여 진곡(賑穀)을 나누어 주었는데, 아직 억울하게 누락되었다고 와서 호소하는 자가 없으니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경계(庚癸)의 외침이 날마다 관청 뜰에 가득 차서, 장차 간후(乾餱)의 허물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한탄스러운 것은 위로는 국가의 정책을 빛나게 함이 없고 아래로는 힘들게 농사일을 하지도 않으며, 풍년 들어 즐거운 해에도 태평시대를 글로써 화려하게 꾸미지도 못하면서, 한번 흉년만 만났다 하면 자기 생계만 도모하는 자들이 어찌 그리 많은가 하는 점입니다.

백 가마니의 곡식을 보조해 주신다니 어찌 극진하신 염려에 감격하지 않으오리까? 다만 생각하건대 전번에 마련한 것이 풍족하다고 말할 것은 못 되지만, 지난번에 하감(下鑑)하신 편지의 뒤에 기록한 정도면 될 듯합니다. 앞으로 추가로 들 것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이 숫자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듯합니다. 관청 뜰 앞의 조제(租堤)가 비록 상() 나라 도읍의 조제(糟堤)에는 못 미치지만 오히려 망오리(望五里) 정도는 됨직하니, 망오리는 바로 망우리(忘憂里)입니다.

뿐만 아니라 벼를 이무(移貿)하고 남은 밑천이 아직도 오백 냥이 있다는 것은 아전이나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비축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유물도 아닌, 바로 관에서 사용하는 것인즉, 호칭은 비록 다를망정 백성에게서 나온 것은 마찬가지이니 어느 것인들 공곡(公穀)이 아니겠습니까? ‘비용을 절약하여 비축이 있다 한다면 옳거니와, 만약 제 주머니 돈과 같이 보면서 스스로 비축한 것이 있는 양한다면 그런 조치를 취한 본뜻이 전혀 아닙니다. 하물며 분수에 넘치는 구휼 물자를 추가로 많이 주어 이미 마음이 안정된 백성들이 구차스럽게 요행을 바라도록 한단 말입니까? 전날 체가(帖加)를 돌려보낸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백 가마니의 곡식을 보조해 주신다는 조치를 특별히 중지하여 이 몸의 하찮은 포부나마 펴게 함으로써 직분을 다할 수 있게 함이 어떠하신지요?

 

 

[D-001]책자를 만드니 : 굶주린 가구를 선정하여 그 명단을 책자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D-002]경계(庚癸)의 외침 : 본디 군대의 은어(隱語)로 군량(軍糧)을 달라는 뜻이다. ()은 서방(西方)으로, 곡식을 주관하고, ()는 북방으로, 물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春秋左氏傳 哀公 13 여기서는 굶주린 백성들이 양식을 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이른다.

[D-003]간후(乾餱)의 허물 : 간후는 말린 밥을 말하며, 하찮은 먹을 것 때문에 생긴 허물을 이른다. 시경 소아(小雅) 벌목(伐木), “사람들이 덕을 잃는 것은 말린 밥 때문에 생긴 허물이다.民之失德 乾餱以愆 하였다. 여기서는 진곡을 서로 먼저 타려고 하다가 친한 사람들끼리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말한다.

[D-004]관청 …… 미치지만 : 조제(租堤)는 벼가 둑처럼 많이 쌓였다는 뜻이다. 조제(糟堤)는 술지게미가 둑처럼 많이 쌓였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조구(糟丘)라고도 한다. 태공육도(太公六韜)에 의하면, () 나라의 폭군 주()는 도읍에 술로 채운 못酒池을 만들고 술지게미로 된 언덕糟丘을 따라 배를 돌리니 소처럼 몸을 수그려 술을 마시는 자가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는 하() 나라의 폭군 걸()의 고사와 흡사한데, 걸 역시 술로 못을 만드니 배가 다닐 만했으며 술지게미로 된 언덕이 족히 십 리까지 바라다보였다.糟丘足以望十里고 한다. 韓詩外傳 卷4

[D-005]망오리는 바로 망우리(忘憂里)입니다 : 발음이 비슷한 어구(語句)를 이용한 해학적 표현이다. 기민 구제를 위한 벼가 오 리나 길게 쌓여 있으니 곧 근심을 잊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D-006]이무(移貿) : 지역별 곡가(穀價) 차이를 이용하여 환곡을 사고 팔아 차액을 챙기는 것을 말한다.

[D-007]체가(帖加) : 벼슬을 주면서 정식 발령은 내지 않고 임명장인 체지(帖紙)만 주는 체가자(帖加資)의 준말로, 공명첩(空名帖)을 이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올림

 

 

지난번에 본군 범천면(泛川面) 주민 김필군(金必軍)이 바친 책자를 영문(營門)에 보고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써 병영(兵營)이 노발대발하여 심지어 그 죄를 형리(刑吏)에게 전가한 일까지 있었으니 너무도 불안스럽습니다.

김가는 본시 천주교도의 한 사람으로 지난겨울 동안에 집을 비우고 도망 중이었습니다. 금년 9월 중에 그자의 호()가 속한 오가통(五家統) 내의 주민 중에서 김가가 도로 제집에서 지내고 있다고 고발했으므로, 우선 늦춰 주어 그가 안착하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색갈이를 독촉하는 창졸(倉卒)을 시켜 부르면서 패자(牌子)도 쓰지 않고 관차(官差)도 시키지 않은 것은, 그 뜻이 실로 알 듯 모를 듯 긴가민가하는 사이에 처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자가 과연 크게 의구심을 내어 즉시 와서 현신(現身)하고, 소매 속에 든 책자를 바치며 아울러 소지(所志)까지 올려, 자수하여 죄를 면하는 거리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자는 본시 어리석고 무식한 자라 책자가 있건 없건 본시 염려할 것이 없으며, 더구나 제가 이미 자진해서 바친 이상 기왕지사를 추궁하여 바야흐로 고쳐먹으려는 마음을 저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장날을 골라 공개리에 불에 태워 버리라는 뜻으로 그 소지에 제사(題辭)하고는, 자못 위로하고 격려하는 뜻을 보이고서 즉시 물러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 후 병영의 하리(下吏)가 지나는 길에 본군 이청(吏廳)을 들러 경내에 천주교도가 있는지 없는지 자세히 물었으므로, 여러 아전들이 말하기를,

 

전날 천주교를 배우고 익히던 자들이 저절로 사라져 모두 평민이 되었는데, 그중에 김필군이란 자가 가장 교화하기 어려웠으나 일전에 또 그 책자를 자진하여 바쳤으니, 이제는 이 고을 안에 다시 의심할 만한 일이 없소.”

하자, 병영의 하리는 여러 고을을 정탐하러 나왔다는 뜻을 슬쩍 비치면서 바로 다른 곳으로 향해 갔으니, 본 사건의 우여곡절 또한 이와 같을 따름이었습니다.

당초 생각에는 장날을 기하여 불태워 버리게 할 작정이었는데, 그날 마침 비가 내려 백성들이 많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한 바 이런 일은 혼자 함부로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순영(巡營 감영)에 보고를 올린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여러 고을은 병영과는 군사 업무가 아니면 본래 상관이 없는데, 어찌 병영에서 졸지에 와 그 책자를 찾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 지난날 순영으로 올려 보냈다는 뜻으로 논보(論報)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영을 경유하지 아니하고 바로 순영으로 보고했다고 하면서 크게 유감의 뜻을 나타냈을 뿐더러, 다시 비밀 관문(關文)을 만들어 김가를 고을 옥에 잡아 가두고 그가 종전에 책자를 감추었던 이유를 캐고 들며, 반드시 병영에서 잡은 것으로 강요하여 조서를 꾸미게 했으니, 이게 무슨 거조입니까? 도대체 병영이 누구를 보내서 잡았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몰래 수색해 냈다면 어찌 바로 붙잡아 가지 않고 이렇게 추후에 와서 찾아가는 일이 있겠습니까?

일찍이 듣자니, 이자들은 여러 해를 두고 타일러도 듣지 아니하며, 무릇암행어사가 출도할 때나 감사가 순시할 때에 누차 잡아다가 곤장과 형장(刑杖)을 치고 옥으로 옮겨 가두곤 했으나 자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후 수령들이 그놈들을 도례(徒隸 관하인(官下人))의 천역에 충당하고 그 처자식까지 잡아다가 구속하곤 했으며, 혹은 교졸(校卒)들을 많이 풀어 불시에 집을 에워싸고 수색하여 심지어는 항아리 속까지 다 뒤지고 상자까지 다 털었어도 일찍이 종이 한 조각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깊이깊이 감춰둔 것은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데, 제가 자진해서 바치지 않았으면 어떻게 관청의 뜰에 그 물건이 굴러와 있겠습니까?

백성을 감화시켜 좋은 풍속을 만드는 방법이란 아무리 그 지극한 정성과 거짓 없음을 힘써 보여 준다 해도, 그들을 깊이 믿음으로 감동시키지 못할까 늘 걱정인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이와는 정반대로, 사납게 금단(禁斷)시킴으로써 공적을 세우고자 하여, 먼저 스스로 어리석은 백성에게 위신을 손상당한다면 그 사리와 체면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자가 과연 미혹을 깨닫고 마음을 고쳐 책자를 바치고 양민으로 돌아온다면, 국가로 보자면 평민 한 명을 얻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에 죽여 없애 이 고을에서 착한 사람들이 물들어 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옛날 형정(刑政)의 한 가지 일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 죄상을 찾아냈다면 이른바 불쌍히 여겨야지 기뻐하지 말라.’고 할 따름입니다.

지금 백성들이 천주교도가 되는 것을 금단하려고 하면서, 먼저 불성실을 내보인다면 될 법이나 한 일이겠습니까? 이른바 형리(詗吏)란 놈이 전해들은 말을 가지고 돌아가 애매모호하게 고한 것인데, 이런 짓은 으레 서리(胥吏)와 같은 하류들의 본색입니다. 그래서 자질구레하게 해명하고 드러내는 것을 실로 피하고자 하여, 죄수의 진술을 보고할 때 대략 본말을 거론했던 것입니다.

필경에 조치한 것은 당초 소지(所志)의 제사(題辭)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한 번 뜻에 맞지 않았다고 해서 대신 하리(下吏)를 잡아다 다스리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도입니까? 하관(下官 연암 자신을 가리킴)이 아무리 늙고 용렬하지만 어찌 이런 수치를 참아 가며 편안히 직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직서를 써서 올리오니 바라건대 빨리 파직을 시켜 제 분수에 안주하게 하여 주십시오. 병영에 올린 보첩(報牒 보고서)을 아울러 기록해 올리오니, 한 번 훑어보시면 당연히 그 일의 전모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 병영에 올린 보첩의 초본(草本)

 

 

상기 조항의 김필군을 비밀 관문에 의거하여 잡아와 엄밀히 조사하고 자세히 캐물은 결과, 필군의 진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몸은 농사짓는 어리석은 백성으로서 글자라곤 한 자도 모릅니다. 이 몸의 자식이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천성이 글 읽기를 좋아하더니, 급기야 조금 장성해서는 유업(儒業)을 부지런히 익혔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서울로 배우러 다니면서 과장(科場)에도 출입했습니다. 집안에 있을 땐 효도하고 공경할 뿐더러 글공부를 그치지 않았으며, 이따금 이 몸을 위하여 제가 읽은 책의 뜻도 풀어서 이야기했고, 또한 중이나 무당을 몹시 미워하여 간사하고 요망한 무리라 하였습니다.

그 아이의 평일 언동을 보면 절대로 패륜을 저지르거나 남을 속이는 일이 없어, 시골구석의 어리석은 백성으로 제 몸을 잘못 가져 제 부모를 욕보이는 자와는 너무도 달랐으므로, 이 몸이 과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마다 다 들어주고 하는 일마다 다 따랐습니다. 그가 배운 것이 반드시 좋은 책이라 생각하고 그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으며, 자식을 스승으로 삼아 오직 스스로 받들어 믿으면서 남이 몰라주는 것을 답답하게 여겼던 것일 뿐입니다.

지난 을묘년(1795) 2월 어느 날 그 자식놈이 불행히도 죽자, 이 몸은 원통하고 슬퍼 날마다 하루라도 빨리 죽어 지하에서 서로 만나기를 소원했습니다. 매일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전날의 일러 주던 말이 귓전에 역력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손때 묻은 자취라고는 단지 이 한 책뿐이었므로, 이 몸은 혹시 그 책을 유실하거나 더럽힐까 두려워서 열 겹으로 싸 간직하고, 움직이게 되면 반드시 몸에 지니고, 때로는 혹 열어 보기도 하여 그 얼굴을 다시 보는 듯이 여겼던 것입니다.

다만 이 몸은 진서(眞書 한문)를 모를 뿐 아니라 언문(諺文) 역시 한 자도 모르기 때문에 실로 그 가운데에 어떠한 요사스러운 책이 들어 있는지 몰랐는데, 이웃들이 이 몸을 지목한 것도 대개 이것 때문이었으며, 이 몸이 여러 번 심문을 겪은 것도 역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자식놈이 죽은 뒤에는 듣고 익힐 길이 없을 뿐더러 해가 오래되니 자연히 잊혀져서, 다시는 이런 일로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작년 가을에 사또께서 도임하신 이후로 천주교를 금단하는 일로 각 면에 명령을 전하기를 극히 엄중히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몸은 지레 겁에 질려 다른 곳으로 도망가 있었던 것입니다. ‘조정의 덕화가 하늘 같으시어 가급적 형벌을 가하지 않으시니 본군 경내의 이런 무리들이 차차로 미혹을 깨닫고 각기 제 생업에 안착한다더라.’ 하기에 이 몸도 역시 지난달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감추어 두었던 책자를 당장 관에 바쳐야 했으나, 비단 이 몸의 실정이 위에 아뢴 바와 같을 뿐 아니라, 사또께서 확실한 증거물로 우겨서 이것으로 죄를 더할까 두려워하면서 몰래 물이나 불에 던져 그 흔적을 없애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혹시 뒷날 사단(事端)이 다시 일어나면 진위를 밝히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이와 같이 머뭇거리던 즈음에, 과연 외창(外倉 외촌(外村)에 있는 창고)으로부터 패지(牌旨)를 전해 왔으나, 이 몸을 나오라 할 뿐 원래 책자를 바치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이 몸이 스스로 생각하기로는, 지난해에 숨어 피한 것은 죄를 벗어날 길이 없기에 지금 이 책자를 바치면 스스로 속죄가 될 듯도 하였으므로, 옛날 싸 둔 것을 끌러 보지도 아니하고 몽땅 손수 들고 창리(倉吏)와 함께 허둥지둥 달려왔습니다. 읍내에 당도하자 이 몸이 우선 사람을 찾아 소지를 쓰는 사이에 창리는 곧장 먼저 관에 고발하여 마치 제가 스스로 수색해 낸 것처럼 공을 세우려고 들었습니다. 만일 제 놈이 수색해 냈다면 끌고 가지 빈손으로 관에 고발했겠습니까? 그 거짓말로 자랑해 대는 꼴은 사또께서 이미 통촉하신 바이니 지금 다시 변명을 아니 하겠습니다.

책자의 출처는 이 몸도 그 소종래(所從來)를 알 수 없으며, 열두 권이랬자 모두 어린아이 손바닥만 하였으니, 필시 제 자식놈이 생전에 지어 만들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화폭(畵幅)에 대해서는 매번 서울에서 사 왔다고 말했는데, 처음에는 수놓은 것으로 잘못 알았다가 오래 뒤에 수놓은 것이 아니고 그림이란 것을 깨달았사온대, 200여 냥의 비싼 값으로 사 온 것은 실로 정도가 지나친 것이었지만, 당시에 이 몸은 죽은 자식을 깊이 믿어서 아무리 가산이 탕진되어도 어리석게도 아까운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식놈이 나이 어린 소치로 반드시 남에게 속임을 당했던 것일 겁니다.

더구나 그놈이 죽은 뒤로 4년 동안은 간혹 꿈에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에 관한 일로써 문답한 적도 없고, 또한 천당에 가서 있다고 아뢰지도 아니하니, 생시와 죽은 뒤가 판이하게 다르므로 기대와 소망이 전혀 어그러졌습니다. 이로써 스스로 증험해 보면, 몇 해 동안 공을 쌓은 것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오리까?”

지금 이 필군이 전에는 비록 미혹되었지만, 뉘우치고 깨달은 것이 전에 올린 소지에 이미 입증되었으며, 흉금을 드러내어 진심으로 복종하는 품이 조금도 숨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되풀이하여 심문하고 추궁하였으나, 그 진술이 전날의 진술과 한결같고, 완전히 마음을 고쳐먹은 형상이 자못 말과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삼가 엎드려 생각하건대, 조정이 이런 어리석은 백성들에 대해 본시 바라는 것은 미혹과 잘못을 깨닫게 하여 형정(刑政)을 번거로이 아니 하고도 성상의 교화에 복종하게 만들자는 것이니, 태양이 막 솟으면 도깨비가 재주를 못 부리고, 훈풍이 잠시만 불어도 얼음과 눈이 저절로 녹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필공(必恭)같이 미혹된 놈이라도 하루아침에 잘못을 느끼고 깨닫자 곧 적당한 벼슬자리로 보답해 주었고, 존창(存昌)같이 흉악한 놈도 7년 동안을 완강히 항거하고 있으나 아직도 참형(斬刑)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와 같이 감옥에 가둔 자는 특히나 먼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인 데다, 그 두려워하여 자복한 바가 앞뒤로 한결같으며 속마음과 말이 다르지 않습니다. 만일 진위를 알기 어렵고 번복할 것이 염려스럽다 하여, 기왕지사를 깊이 캐어 들어가고 기어이 소굴을 찾아내려 든다면, 비단 전날 자복한 무리들이 의구심을 일으키게 될 뿐 아니라 또한 뒷날에 감화될 무리들도 당연히 주저하는 생각을 품게 될 터입니다. 이것이 한 지방을 맡아 지키는 자의 처지로서 밤낮으로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정에서 기대하는 풍속 교화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그가 바친 책자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 자리에서 불태워 없애야 할 일이나, 그래도 마음대로 처단하기 어려웠으니, 바로 순영(巡營)에 올려 처분을 기다린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또한 더구나 순영에서 이 사건을 들어 타이르며 전후로 엄중히 경계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또한 더구나 책자를 올려 보낸 것은 지난달 17일이었고, 비밀 감결을 받아 본 것은 그로부터 열흘 조금 뒤였으니, 책자를 순영에 먼저 보냈다는 질책에 대하여는 아마도 양해하실 줄 믿습니다. 설령 통지가 올 것을 미리 짐작하고 바로 병영으로 올려 보냈더라도, 순영에서 다시 사리와 체면을 들어 질책한다면 장차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의아스럽다는 말씀을 듣고 보니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 김필군은 여전히 단단히 가두어 두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순영에서 회답한 제사도 뒤에 등서하여 첩보(牒報 서면 보고)하는 바입니다.

 

[C-001]순찰사에게 올림 : 1798년경 연암이 면천 군내의 자수한 천주교도 김필군(金必軍)을 선처한 일로 병영(兵營)과 마찰을 빚고, 당시 충청 감사 이태영(李泰永)에게 병영의 처사를 항의하며 사의를 표명한 편지이다.

[D-001]범천면(泛川面) : 지금의 당진군(唐津郡) 우강면(牛江面)이다.

[D-002]오가통(五家統) : 다섯 가구五戶를 한 단위로 묶어 통()이라 하고, 통마다 우두머리를 두어 관할 호구의 동태를 파악 · 감시하고 수상한 자를 관에 고발하게 한 제도를 말한다.

[D-003]창졸(倉卒) : 환곡 창고를 지키는 군졸을 이른다.

[D-004]패자(牌子) : 존귀한 신분의 사람이 비천한 신분의 사람에게 써서, 서리나 노복을 시켜 보내는 편지를 이른다. 패지(牌旨)라고도 한다.

[D-005]관차(官差) : 관아에서 파견하는 군뢰(軍牢)나 사령(使令)을 이른다.

[D-006]제사(題辭) : 하급 관청에서 올린 공문서나 백성들이 올린 소지(所志)에 대해 지령이나 판결을 내린 글을 말한다.

[D-007]논보(論報) : 상급 관청에 자기 의견을 달아 보고하는 것을 이른다.

[D-008]관문(關文) : 동급 또는 하급 관청에 보내는 공문서를 이른다.

[D-009]이 고을에서 ……  : 원문은 無俾易種於玆邑인데, 서경에서 따온 표현이다. 반경 중(盤庚中) 이 새로운 도읍으로 악의 씨앗이 옮겨 가지 않도록 하리라.無俾易種于玆新邑라고 하였다.

[D-010]불쌍히 …… 말라 : () 나라의 대부 맹씨(孟氏)가 증자(曾子)의 제자 양부(陽膚)를 법관으로 임명하니 양부가 증자에게 자문을 구하자, 증자는 윗사람이 도리를 잃어 백성들이 이반된 지가 오래되었다. 만일 백성들의 죄상을 찾아냈다면 불쌍히 여겨야지 기뻐하지 말라.” 하였다. 論語 子張

[D-011]형리(詗吏) : 염탐하러 다니는 아전을 이른다.

[D-012]가급적 …… 않으시니 : 원문은 刑期無刑인데,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말로, 형벌의 목적은 형벌을 쓰지 않아도 되게 하는 데에 있다는 뜻이다.

[D-013]필공(必恭) : 최필공(崔必恭 : 1745~1801)을 이른다. 그는 혜민서(惠民署)의 의원(醫員)으로 1790년 천주교에 입교했다가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배교(背敎)한 뒤 관서(關西)의 심약(審藥)으로 차송(差送)되었다. 그러나 다시 천주교를 믿다가 1799년 체포되었으며,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처형되었다.

[D-014]존창(存昌) : 이존창(李存昌 : 1759~1801)을 이른다. 그는 본래 충청도의 관교(官校)로서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 등에게서 천주교를 배웠다고 한다. 충청도 내포(內浦) 일대에서 천주교의 지도적 인물로 활동하다가 신해박해 때 배교했다. 그러나 다시 활발한 전도 활동을 벌이다가 1791년 체포되었으나 배교를 서약하고 풀려났으며, 그 뒤 전도 활동을 재개하다가 1795년 다시 체포되어 감영에 구금되었다. 1797년 정조(正祖)는 이존창이 개과천선하면 방면하도록 명하였다. 1799년 이존창은 충청 감사 이태영에게 배교를 서약하고 석방되어, 연금(軟禁) 생활을 하면서 장교(將校)로 복무하던 중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다. 한국 초기 천주교사에서 그는 충청도 지역에 처음 복음을 전파한 내포의 사도(使徒)’로 추앙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답함

 

 

병영의 취지는 알기 어렵지 않았으므로, 그 감결의 사연에 의거하여 공초(供招 범인의 진술)를 받으면서 신신당부하며 타일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자(김필군(金必軍))는 제가 자수한 본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도리어 의구심을 내어, 제 딴은 이렇게 공초를 올리고 보면 영원히 해명하기 어려운 진짜 증거들이 된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보첩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자신이 한 쪽을 갖겠다고 청하였습니다. 그 스스로 후일을 염려하는 것이 이와 같이 심각하고 절실한데, 관에서 도리어 불성실을 보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병영에서 유감을 품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사소한 일이라 시비를 가릴 가치도 없지만, 풍속 교화에 중대한 관건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세상의 도의를 위하여 한 번 공언(公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예로부터 이단(異端)이란 그 시초에는 어찌 자처하여 사학(邪學)이 된 적이 있었겠습니까? 백성은 천부적인 양심이 있어 선행을 즐기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누구나 다 있는데, 오직 가리기를 정확히 못 하고 분변하기를 일찍 못 한 까닭으로, 인의(仁義)가 살짝 어긋나 양주(楊朱) · 묵적(墨翟)의 무리가 되었으며, 그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는 재앙은 이미 불교에서 증험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소위 사교(邪敎 천주교)를 금단하는 자들이 이런 어리석은 백성들 을 잡아 묶어다가 관청 뜰 아래 꿇리고 곧장 차꼬를 채우고 내려다보면서, “네가 왜 사학(邪學)을 했느냐?” 하면, 그자는 한마디로 가로막아 말하기를, “소인은 사학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요. 그런데 명색이 관장이 된 자가 이미 그 학()이 어째서 사()가 되는지도 모르니, 추궁하는 것이 조리가 없어서 먼저 스스로 알쏭달쏭하게 말하게 되며, 그들이 대답하는 바에 따라 우선 복종한 줄로 인정하고 억지로 다짐을 받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중 교활한 놈은 성실치 못하다고 도리어 비웃고, 어리석은 놈은 더욱 의혹이 불어나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즐기는 것은 선행이요 공경하는 바는 하늘인데, 어떤 까닭으로 나의 선행을 막으며 나의 공경을 금하는가?’ 하게 됩니다. 이는 다름 아니라, 근원을 타파하지 못하고서 말류(末流)를 맑게 하고자 하며, 소굴만 찾을 뿐이지 스스로 길을 잃은 격입니다.

그래서 혹은 강제로 굴복받기에 급하여 지레 태형(笞刑)을 가하고, 혹은 엄포를 놓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고 알아듣게 타이른다는 것이 방법상 잘못되었으며, 혹은 윽박질러 야소(耶蘇 예수)를 저주하고 천주(天主)를 배척하게 하여 그 배반을 시험하고 그 진위를 관찰합니다. 저들이 하늘을 사칭하여 천주라는 이름을 만든 것은, 비록 그렇게 함으로써 입막음과 방패막이의 수단으로 삼자는 것이었으나, 마침내 어떤 우매한 백성들은 마치 그를 위한 절개를 지키는 것이 의()를 위해 죽는 것인 양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속아서 현혹됨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면, 제압하는 요령을 얻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은 이 점을 경시하고 형벌로 굴복시키려 들 뿐 아니라 또 언어까지 실수하고 맙니다. 이 어찌 성세(聖世)의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도탑게 하려는 지극한 뜻과 부합된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그들을 죽여 없애고자 해도 그 무리가 실로 많으니, 이는 물건을 싣지 못할 물 새는 배를 호수나 바다에 띄운 격이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릇 임금의 통치를 돕고 백성을 키우는 반열에 있는 자는 어느 누군들 임금의 교화를 받들어 선포하는 직분을 맡고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 몸을 바르게 하여 백성을 인도함으로써 스스로 지주(砥柱)가 되어, 임금이 질() · () · () · ()하게 된 까닭과 천주교의 피() · () · () · ()의 말이 진실과 다른 바를 빨리 밝히어, 전부터 물들었거나 새로 퍼져 가는 나쁜 풍속이 금고옥촉(金膏玉燭) 같은 임금의 교화 아래 저절로 사라지고, 허공을 거쳐 간 구름인 양 자취가 없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입니다. 공리(功利)만을 헤아려 나라의 위엄을 함부로 사용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반신반의하게 하고 관과 민이 서로 각축한다면, 비록 한때의 승리는 거둘망정 상처 입은 것은 더욱 많아, 주역(周易) 사괘(師卦)에서 이기든 지든 모두 흉하다고 한 것과 같이 되는 것은 하책(下策)입니다.

비록 서벽(徐辟)이 이자(夷子)에게 전해 알려 주고, 한창려(韓昌黎)가 서()를 지어 문창(文暢)에게 주었던 것을 본받지는 못할망정, 어찌 스스로 위신을 손상하여, 남이 스스로 속죄하려는 자료를 이용해서 이미 항복한 자에 대해 공을 세우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러기에 금하면 금할수록 더욱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관(下官 연암의 자칭)은 밤낮으로 조마조마하며 우려가 깊어지면서 흉년으로 인한 한 해의 재난을 구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하건대 명공(明公 순찰사의 경칭)께서는 세상에 드물게 총명하시고 도량이 무리에서 뛰어나서, 무릇 세간의 인심과 세태에 대해 눈빛이나 안색만 보고도 간파하시니, 하찮은 이 몸이 절하(節下)의 처분을 바라는 바가 어찌 한 도()에서 표재(俵災)를 공정히 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노고를 하는 데에 그치오리까? 이것은 다만 담당 관리의 한 직책에 불과합니다.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남보다 나중에 즐거워하며 특이한 공과 빠른 효험을 자랑으로 삼지 않을 것은 반드시 평소에 마음속으로 기약한 바 있으실 터이니, 저로서는 이 문제를 절하에게 고하지 아니하고 뉘와 더불어 말하오리까?

 

예로부터 이단이 천하를 어지럽힌 지 오래였다.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은 인의(仁義)를 배운 자라서 처사(處士)들이 그들의 학설에 귀의하였고 노자(老子)와 석가(釋迦)는 더욱 이치에 가까웠기 때문에 고명한 자들이 그리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맹자, 정자, 주자가 반드시 논파하여 시원스레 물리쳐 버린 것은, 특히 본원(本源)에 털끝만 한 차이가 있음으로써 말류(末流)의 폐해가 장차 아비도 임금도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때문이다. 하물며 지금 이른바 서양의 학술이란, 양주도 아니요, 묵적도 아니요, 도가도 아니요, 불교도 아니요, 전혀 의리를 갖추지 못한 요사스러운 패설(悖說)에 불과한 것이니, 말류에 이르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그 폐단이 화를 이룰 것은 홍수나 맹수보다 더 심한 데 그칠 뿐만이 아니다.

대개 저들의 화기수토(火氣水土)의 설이나 영혼제방(靈魂帝旁)의 설은 이야말로 불교의 찌꺼기 중의 찌꺼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저들의 이른바 부모모질(父母模質)’ 등의 어구와 같은 것은 너무도 패륜이 심해 강상(綱常)의 죄를 벗어날 수 없다. 비록 어린아이들에게 이를 따르라 할지라도 오히려 수치스러움을 알아 꾸짖고 배척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유독 그 학설로 삼은 것이 새것을 지어내고 기이하기를 힘쓰며, ()로 삼은 것이 얄팍하여 알기 쉽고, 수행으로 삼은 것이 음란하고 패악하여 거리낌이 없으며, 법으로 삼은 것이 재물을 소홀히 하고 교도(敎徒)를 귀히 여긴다. 이런 까닭에, 일종의 덜렁꾼들로 신기한 것을 숭상하고 구속받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흐뭇하게 여기며 좋아하고, 어리석은 남녀들로 빈궁을 괴로워하고 재리(財利)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휩쓸리듯이 따라가서, 심지어는 자식이 그 아비를 등지고 도망하고, 계집이 그 남편을 버리고 달아나며, 위로는 벼슬아치와 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 노예와 천한 백성까지 짐승이 광야를 달리듯이 하여, 하마 그 무리들이 나라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정의 금령(禁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금령이 너무도 관대하여 참형이 한두 사람의 비천한 부류에 가해졌을 뿐이며, 외보(外補)는 마침 열배 백배로 넝쿨처럼 불어나는 기회가 되기에 충분하여, 물이 더욱 깊어지고 불이 더욱 치성해지듯이 되니, 두어 해를 못 가서 온 나라가 다 그리 쏠리고 말 것이며, 그때 가서는 금지하려야 금지할 길이 없을 것이다.

 

! 저 사학(邪學)의 무리들은 본래 거칠고 패악한 성질로서, 오래된 상도(常道)를 싫어하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며, 방종을 즐기고 구속을 꺼린다. 음란하고 더럽고 탐욕스럽고 야비한 것이 바로 저들의 장기요, 학문이나 의리와는 본래 배치되는 바라, 오늘날 이 사학을 존숭하는 것은 그들의 천성이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연원에 유래가 있음이리오.

 

야사(野史)에 의하면 구라파(仇羅婆 유럽)란 나라에 기리단(伎利但)이란 도()가 있는데, 그 나라 말로 하느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12()의 게( 찬송가)가 있는데, 허균(許筠)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적에 그 게를 얻어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학이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은 아마도 허균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재 사학을 배우는 무리들은 자동적으로 허균의 잔당이다. 그 언론과 습관이 한 꿰미에 꿴 듯이 전해 내려왔으니, 그들이 사설(邪說)을 유달리 좋아하고 지나치게 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또 듣자니, 그 법이 삼강오륜을 무너뜨리고 명교(名敎)를 돌아보지 않으며, 남녀가 섞여 앉고 위아래도 구별이 없으며, 삶을 가벼이 여기고 죽기를 즐거워하여 칼에 죽거나 형()에 죽어 들판에 시신이 버려지는 것을 천당에 갈 수 있는 첫째가는 인과(因果)로 삼는다. 또 한 사람이 열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을 큰 공으로 삼는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한 사람이 열 사람을 전도하고, 열 사람이 백 사람을, 백 사람이 천 사람을, 천 사람이 만 사람을 전도하면 그 도당의 수효는 몇 억에 이를지 알 수 없다.

 

또 이른바 홍미(紅米) 요술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능히 주문으로 환술을 부려 없던 것도 있게 함으로써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시키니, 장각(張角)이 부적을 태워 물에 타서 마시게 함으로써 병을 낫게 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즉 실로 많은 무리들이 백성을 현혹하는 술수를 믿고 날뛰며, 죽기를 즐거워하는 마음으로써 윤리를 무너뜨리는 일을 하고 있으니, 필경에는 그 화가 미치지 않을 곳이 없을 텐데, 한 사람도 깊이 염려하는 자가 없는 것은 웬일인가? 슬프도다!

 

한 무제(漢武帝) 원광(元光) 2(기원전 133)에 한 나라가 섭일(聶壹)을 첩자로 삼아서 선우(單于 흉노의 왕)를 요새로 들어오도록 약속한 일이 있었다. 선우가 정( 국경 초소)을 공격하여 안문(鴈門)의 위사(尉史)를 잡아 죽이려고 하니, 위사는 한 나라 군사가 잠복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선우는 크게 놀라 군사를 끌고 돌아가 요새를 벗어나서 말하기를 내가 위사를 사로잡은 것은 천행(天幸)이다.” 하고서 위사를 천주(天主)로 삼았다. ‘천주라는 두 글자는 여기서 처음 나타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 중국에 있는 천주당(天主堂)의 서양 사람들은 비록 역법(曆法)에는 정통하지만 모두 요술쟁이이다. 서남이전(西南夷傳) 요술쟁이가 능히 변화하여, 불을 뱉어 내고, 스스로 사지를 묶었다가 풀어 버리며, 소와 말의 머리를 옮겨다 바꾸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해서인(海西人)이다.’라 하였다. 해서는 바로 대진(大秦)이다.” 했고, ()에는 지금 살펴보면 대진은 바로 무제(武帝) 때 이간국(犂靬國)으로 지금은 불림(拂菻)이라 이른다.”라고 하였다. 또 한 나라 안제(安帝) 때인 영녕(永寧) 원년(기원후 120) 영창군(永昌郡)의 변새 밖에 있는 탄국왕(撣國王) 옹유조(雍由調)가 사자를 보내어 풍악과 요술쟁이를 바쳤다.” 했다.

 

사학의 이른바 기리시단(伎離施端 크리스천)’이란 네 글자는 사람의 이름인지 법호인지 모르겠으나, 대저 극히 요망하고 괴이한 것이다. 처음에 일본 시마바라島原에 살면서 야소(耶蘇 예수)의 학으로써 선교하였다. 이에 일본 민중들이 그 설을 한 번 듣고서 염세적인 생각에 휩쓸리어 제 몸뚱이 보기를 표류하는 뗏목이나 부러진 갈대 줄기처럼 여겨, 세상일에 구애받지 않고, 사는 것이 즐거운 줄도 모르며, 칼에 죽거나 형()에 죽는 것을 도리어 자신의 영화로 여겼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기리시단이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호칭이다.’라고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그 술법을 배워 관백(關白) 미나모또 이에야스源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죽음을 당했다. 유키나가의 가신(家臣) 다섯 사람도 유키나가의 죄에 연좌되어 시마바라로 귀양을 갔는데 다시 사교(邪敎)를 선동하여 그 도당이 수만 명에 달하자, 히젠주肥田州를 습격하여 태수를 죽이니, 이에야스가 토벌하고 체포하여 다 죽여 버리고, 우리나라에 서계(書契)를 보내 통고하였다. 그래서 바닷가를 순시하여 잔당을 염탐해 체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후에 가또오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이에야스가 기요마사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기요마사가 마다하며 스스로 야소교를 받드는 자가 자살한다면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니 원컨대 칼날에 죽여 달라.’ 하므로, 마침내 베어 죽였다. 유키나가와 기요마사는 모두 왜놈의 날랜 장수로서, 임진년에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을 적에 가장 흉악하고 잔인하였다. 실로 우리나라로서는 자손 만대의 원수인데도 마침내 천벌을 모면하게 되어 죽은 원혼이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원한과 분노를 씻을 수 없었는데, 끝내 스스로 사교에 빠져 모두 참형을 당했으니, 신령의 이치가 너무도 밝아서 속일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대신(臺臣 사헌부 관원)의 상소 중에 저 가환(家煥)도 역시 성군(聖君)이 다스리시는 세상에 사는 일개 인물인데, 감히 천륜을 허물어뜨리고 임금의 교화를 가로막음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를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대개 가환이 이와 같은 지목을 받은 지가 오래였다. 치우치게 성은을 입은 것이 어떠했는가? 그런데도 묵은 버릇을 고치지 아니하니, 진실로 대신의 상소대로라면, 삼묘(三苗)와 같은 처형을 어찌 모면할 수 있으랴!

 

사학은 본시 천당에 올라간다는 설을 가지고서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꾀었는데, 이 근본은 유연(柔然)에서 나왔다.

유연의 타한가한(他汗可汗)이 복고돈(伏古敦)의 아내 후려릉씨(候呂陵氏)를 맞아들여 복발가한(伏跋可汗)과 아나괴(阿那瓌) 등 여섯 아들을 낳았다. 복발이 즉위한 뒤 갑자기 그 어린 아들 조혜(祖惠)를 잃어버렸는데, 무당 지만(地萬)이 말하기를,

 

조혜가 지금 천상에 있으니, 제가 불러올 수 있습니다.”

하고, 드디어 큰 늪 속에다 장막을 치고서 천신(天神)에게 제사하니, 조혜가 갑자기 장막 속에 나타나서 항시 천상에 있었다고 말했다. 복발은 크게 기뻐하여, 지만을 이름하여 성녀(聖女)라 하고 가하돈(可賀敦)으로 삼았다.

조혜가 차츰 장성하자, 제 어미에게 말하기를,

 

나는 항시 지만의 집에 있었고, 천상에 있었다는 말은 지만이가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입니다.”

하니, 그 어미가 복발에게 고했으나 복발은 믿지 않았다. 이윽고 지만이 조혜를 참소하여 죽이니, 후려릉씨가 대신(大臣) 이구열(李具列) 등을 보내어 지만을 죽였다. 이것이 유연이 내란으로 망하게 된 시초였다.

 

부모모질(父母模質)’ 등의 어구와 같은 것은 흉하고 더럽고 패악스러워서 붓끝에 올리고 싶지 않다. 그 근원은 한서(漢書) 예형전(禰衡傳)에 처음 나타났는데, 이것은 대개 심하게 날조한 말이다. 사람을 속이는 데 한이 있으리오만, 주저하지 않고 이처럼 몹시도 패악스럽더니, 마침내 사학의 나쁜 선례가 된 것이다.

 

 

부군(府君)이 면천(沔川)에 계실 적에 감사와 더불어 왕복한 편지에 사학을 성토하는 글이 있었으며, 그 기회에 다시 사학의 본말을 논했는데 무릇 몇 조문이다. 그것을 아울러 여기에 부록한다.

당시 면천은 사학에 물든 자가 많았으므로, 부군이 우려하여 듣는 대로 적발해서 관하인(官下人)의 천역에 붙들어 매고, 매양 공무가 파하면 한두 놈을 불러 놓고 반복하여 타이르니, 형벌을 쓰지 않고도 다 감복하여 깨달아 바른길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중에는 후회하고 한탄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급기야 신유년(1801)에 큰 옥사가 일어났지만, 면천 경내에는 아무 일이 없었다. 그 당시 깨우치도록 타이른 여러 조문들은 친필로 일기 중에 그때마다 기록하였는데, 명백하고 깊이 깨달은 내용이라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깨우치기 쉽게 되었다. 지금 유실되어 부록으로 싣지 못하니 몹시 애석하다. 아들 종간(宗侃)이 삼가 쓰다.

 

[D-001]저들이……  :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천주실의(天主實義) 상권 제 2 편에 우리나라의 천주(天主)는 중국 말로 상제(上帝)이며” “옛날 경서들을 두루 살펴보면, 상제와 천주는 단지 호칭만 다를 뿐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D-002]방패막이 : 원문은 忌器인데 쥐 잡다 그릇 깰라라는 뜻인 投鼠忌器의 준말이다. 천주교를 공격하지 못하게 유교의 설을 끌어 왔다는 뜻이다.

[D-003] …… 많으니 : 원문은 其徒寔繁인데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 어진 이를 홀대하고 권세가에게 붙는 무리가 실로 많다.簡賢附勢 寔繁有徒고 한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D-004]임금의 …… 키우는 : 원문은 輔世長民인데,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서 천하의 삼달존(三達尊)으로 작() · () · ()을 들고 임금의 통치를 돕고 백성을 키우는 데에는 덕보다 나은 것이 없다.輔世長民莫如德고 하였다.

[D-005]지주(砥柱) : 황하 한가운데 우뚝이 솟아 있는 돌산으로, 의지가 확고하여 남들의 지주(支柱) 역할을 하는 사람을 비유할 때 쓰인다.

[D-006]() · () · () · ()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천서(天敍), 천질(天秩), 천명(天命), 천토(天討)를 이른다. 백성들을 전례(典禮)로써 교화하고 신하들에게 상벌을 공정하게 시행하는 것을 뜻한다.

[D-007]() · () · () · () : 맹자 공손추 상에 나오는 피사(詖辭), 음사(淫辭), 사사(邪辭), 둔사(遁辭)를 이른다. 각각 편벽된 말, 음탕한 말, 간사한 말, 회피하는 말을 뜻하며, 정사(政事)에 해를 끼치는 이단사설(異端邪說)을 가리킨다.

[D-008]금고옥촉(金膏玉燭) : 밝은 등불과 촛불을 이른다.

[D-009]이기든 지든 모두 흉하다 : 주역 사괘 초육(初六)의 효사(爻辭) 군사의 출동은 군율을 따를지니, 그렇지 않으면 이기든 지든 흉하다.師出以律 否臧凶고 하였다. 연암은 이를 인용하면서 否臧皆凶이라 했으나, 주역 원문에는 모두라는  자가 없고 왕필(王弼)의 주에만 師出不以律 否臧皆凶이라 하였다. 따라서 효사의 해석도 정자(程子)나 주자(朱子)의 주가 아니라 왕필의 주를 따랐을 것으로 보고, 여기서도 그와 같이 번역하였다.

[D-010]서벽(徐辟) …… 알려 주고 : 서벽은 맹자(孟子)의 제자이고, 이자(夷子)는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에 해당하는 묵가(墨家)를 추종한 인물이다. 이자가 서벽을 통해 맹자를 만나 보고 싶어 하자 서벽이 그 사이에서 맹자의 말을 전달하여 이자를 깨우쳐 주었다. 孟子 滕文公上

[D-011]한창려(韓昌黎) ……  : 한창려는 당 나라 문장가 한유(韓愈)이고, 문창(文暢)은 한유와 동시대의 승려 이름이다. 한유는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에서 문창에게 유가의 도가 아니라 불교의 설로써 서()를 써 준 사람들을 비판하고, 유가의 도의 훌륭함을 설파하였다.

[D-012]남보다 …… 즐거워하며 : () 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옛날의 인자(仁者) 천하의 근심을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나중에 즐거워했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하였다.

[D-013]양주(楊朱) …… 귀의하였고 : 회남자(淮南子) 요략(要略) 묵자는 유자(儒者)의 업()을 배우고 공자의 술()을 전수받았다.”고 하였고, 논어집주(論語集註) 학이(學而)  14 장의 주에 윤돈(尹焞)의 말을 인용하여 양주 · 묵적과 같은 경우는 인의를 배웠으나 어긋난 자이다.”라고 하였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성인(聖人)이 나타나지 아니하니 제후들이 방자하게 굴고 처사들이 함부로 논의를 벌여 양주와 묵적의 말이 천하에 가득 찼다.”고 하였다.

[D-014]노자(老子) …… 도피하였다 : 정자(程子)는 도가와 불교가 옛날의 양주 · 묵적의 학설보다 더욱 이치에 가까워 그 피해가 더 크다고 비판하였다. 주자(朱子) 중용장구(中庸章句)의 서()에서 이단의 학설이 나날이 새롭고 다달이 성행하여, 노자와 석가의 추종자들이 나옴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치에 가까워 크게 진리를 어지럽혔다.”고 개탄하면서, 그러한 풍조에 맞서 정자(程子) 중용을 매우 중시한 공로를 예찬하였다.

[D-015]화기수토(火氣水土)의 설 : 천주실의 상권 제 3 편에 무릇 천하의 사물은 모두 불 · 공기 ·  · 흙이라는 사행(四行)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사행설(四行說)은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 플라톤의 저작을 통해 천주교 신학에 수용되었다. 불교의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설(四大說)과 흡사하며, 유교의 오행설(五行說)과 배치된다.

[D-016]영혼제방(靈魂帝旁)의 설 : 영혼의 사후 불멸과 승천설(昇天說)을 가리키는 듯하다. 천주실의 하권 제 6 편에 선한 사람은 죽은 뒤 그 영혼이 천당에 올라가서 하느님上帝의 곁에서 지내게 된다고 하였다.

[D-017]부모모질(父母模質) : 인류의 원조(原祖)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자손손 그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다는 원죄설(原罪說)을 가리키는 듯하다. 천주실의 하권 제 8 편에도 세속 인간의 조상이 이미 인류의 근성(根性)을 망쳐 놓아 그 자손된 자들은 물려받은 잘못으로 인해 온전한 본성을 계승하지 못하고 나면서부터 하자(瑕疵)를 지닌다.”고 하였다.

[D-018]짐승이 …… 하여 : 원문은 如獸走壙인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 백성이 인정(仁政)에 귀순하는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나아가고 짐승이 광야를 달리는 것과 같다.民之歸仁也 猶水之就下 獸之走壙也고 하였다.

[D-019] …… 관대하여 : 원문은 其柰失之太寬인데 柰失의 의미가 분명치 않다. 초서로 흘려 쓴 禁令을 잘못 판독한 것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D-020]외보(外補) : 지방 관직에 임명하는 것을 이른다. 여기서는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의 밀입국 사건에 편승하여 공조 판서 이가환(李家煥)을 천주교도로 몰아 공격한 박장설(朴長卨)의 상소가 파문을 일으키자, 정조(正祖)가 이가환을 특별히 충주 목사로 보임한 사실을 가리킨다. 당시 충청도 대부분이 천주교에 물들었는데 충주가 그중 가장 심했으므로, 정조는 이가환을 특별히 그곳의 수령으로 보내 천주교를 금하게 함으로써 사태를 무마하고자 했다. 그때 이가환의 무리로 지목된 정약용(丁若鏞)도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내쫓기었다. 正祖實錄 19 7 25 그러나 연암은 이러한 조치가 지나치게 관대할 뿐 아니라, 천주교의 소굴에 천주교를 비호하는 수령을 임명함으로써 더욱 이를 조장할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D-021]야사(野史) : 유몽인(柳夢寅) 어우야담(於于野談)을 가리킨다.

[D-022]기리단(伎利但) : 어우야담에는 기례달(伎禮怛)’로 표기되어 있다. ‘기리시단(伎離施端)’, ‘길리시단(吉利施端)’, ‘길리지단(吉利支丹)’ 등으로도 표기되었는데, 포르투갈어 ‘cristao’가 와전되어 음역(音譯)된 것으로, 기독교인(christian)을 뜻한다.

[D-023]명교(名敎) : 군신(君臣), 부자(父子)의 관계와 같이 유교에서 정한 상하 질서의 예법을 가리킨다.

[D-024]홍미(紅米) : 오래 묵어서 붉게 변색한 쌀을 이른다.

[D-025]장각(張角) : 후한 때의 인물로 태평도(太平道)란 종교의 창시자이다. 영제(靈帝) 때에 부적과 물로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통해 종교를 전파하여 10여 년 사이에 그 신도가 수십만이 되었다. 이들은 중국 각지에 분포하여 영제 중평(中平) 원년(184)에 기의(起義)하여 이른바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일으키고,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이 되어 이를 지휘하였으나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D-026]섭일(聶壹) :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북부에 있던 안문군(鴈門郡) 마읍현(馬邑縣)의 토호였다고 한다. 資治通鑑 卷18 漢紀10 世宗孝武皇帝 上之下 元光 2

[D-027]위사(尉史) : 요새와 가까운 군() 100리마다 위() 1인과 사사(士史) 및 위사(尉史)  2인을 두었다고 한다.

[D-028]한 무제(漢武帝) …… 삼았다 : 이는 자치통감(資治通鑑) 18 한기(漢紀) 10 세종 효무황제(世宗孝武皇帝) 원광(元光) 2년 조의 기사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뿐만 아니라 그 전거가 된 사기 한장유열전(韓長儒列傳), 흉노열전(匈奴列傳)이나 전한서(前漢書) 흉노전(匈奴傳) 등에는 모두 선우가 안문의 위사를 천왕(天王)’으로 삼았다고 하였지, ‘천주로 삼았다고는 하지 않았다.

[D-029]불을 …… 바꾸는데 : 원문은 吐火 自支解 易牛馬頭인데, 각각 마술의 일종이다. 御定子史精華 卷106 樂部2 俗樂》 《위략(魏略) 대진전(大秦傳)에 의하면 自支解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묶은 몸을 푸는 마술을 말한다.

[D-030]서남이전(西南夷傳) …… 했고 : 자치통감 50 한기(漢紀) 42 효안황제 중(孝安皇帝中) 영녕(永寧) 원년 12월 조 기사에 대한 호삼성(胡三省)의 주()를 인용한 것이다. 서남이전은 후한서(後漢書) 86에 편차되어 있고, 대진(大秦)은 로마 제국을 가리킨다.

[D-031]이간국(犂靬國) :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 소개되어 있다. 사기 대원열전(大宛列傳)에는 여헌(黎軒)’, 한서 장건전(張騫傳)에는 이간(犛靬)’, 후한서 서남이전에는 이건(犁鞬)’이라 표기되어 있다.

[D-032]()에는 …… 하였다 : 역시 자치통감 50 한기(漢紀) 42 효안황제 중 영녕 원년 12월 조 기사에 대한 호삼성의 주를 이어서 인용한 것이다. 불림(拂菻)은 동로마 제국을 말한다.

[D-033]영창군(永昌郡) …… 바쳤다 : 역시 자치통감 50 한기 42 효안황제 중 영녕 원년 12월 조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 영창군은 안제(安帝) 때 익주(益州)에 설치한 군으로 지금의 운남성(雲南省) 지역에 있었다. 탄국(撣國) 1~2세기경 후한(後漢)에 조공을 바쳤던 서남이(西南夷)의 한 국가였다.

[D-034]시마바라島原 : 일본 큐슈九州 나가사키현長崎縣 남동부에 있는 반도(半島)이다. 1637년 천주교도의 소굴이었던 이곳에서 압정에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을 함락했으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정벌군에 의해 몰살당했다. 이를 시마바라의 난()’이라 한다.

[D-035]표류하는 …… 갈대 줄기 : 원문은 浮査斷梗인데,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단경부평(斷梗浮萍)’, ‘단경표봉(斷梗飄蓬)’ 등 비슷한 성어(成語)들이 있다.

[D-036]관백(關白) : 천황을 대신하여 섭정(攝政)한다는 뜻으로, 막부의 최고 실력자인 쇼군將軍을 가리킨다.

[D-037]히젠주肥田州 : 큐슈에 있던 주(), 지금의 사가현佐賀縣과 나가사키현의 일부를 포함한다.

[D-038]이에야스가 …… 약속하였다 : 인조실록(仁祖實錄) 16(1638) 3 13일 동래 부사의 치계(馳啓)에 관련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D-039]원컨대 칼날에 죽여 달라 : 원문은 願得劒解인데, ‘劒解는 곧 刃解로 칼날에 잘게 썰린다는 뜻이다. ‘인영누해(刃迎縷解)’, ‘영인이해(迎刃而解)’라는 성어가 있다.

[D-040]대신(臺臣) …… 하였다 : 1795년 행 부사직(行副司直) 박장설(朴長卨)이 이가환(李家煥)을 천주교도로 공격한 상소 중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이 상소로 인해 박장설은 정조의 노여움을 사서 조적(朝籍)에서 삭제되고 시골로 쫓겨났다. 正祖實錄 19 7 7

[D-041]가환이 …… 오래였다 : 1792년 부교리(副校理) 이동직(李東稷)이 당시 성균관 대사성이던 이가환의 삭직을 요청한 상소에서 그의 학식은 이단사설(異端邪說)에서 나온 것이라고 공격한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조는 이가환을 비호하는 장문의 비답(批答)을 내렸다. 正祖實錄 16 11 6

[D-042]삼묘(三苗)와 같은 처형 : 삼묘는 요순 시대 사흉(四凶)의 하나로, 이는 악인이 처형을 받는 것을 이른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 “() 임금이 공공(共工)을 유주(幽州)에 유배 보내고, 환도(驩兜)를 숭산(崇山)으로 추방하고, 삼묘를 삼위(三危)에서 죽이고, ()을 우산(羽山)에서 죽여, 이 넷을 처벌하자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다. 이는 어질지 않은 자를 처벌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D-043]유연(柔然) :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몽골을 지배한 유목민족으로 연연(蠕蠕), 예예(芮芮) 등으로도 불렸다. 그 지도자 사륜(社倫)이 처음 왕이라는 뜻의 가한(可汗)을 칭하면서부터 강성하여 북위(北魏)와 자주 충돌하였으나, 두륜(豆崙)이 가한이 된 5세기 말 이후 내란으로 점차 쇠퇴하여 결국 돌궐(突厥)에게 멸망되었다. 그들의 종교는 샤머니즘이 중심이었으며, 불교도 행해졌다.

[D-044]유연의 …… 죽였다 : 자치통감 149 양기(梁紀) 5 고조 무황제(高祖武皇帝) 5의 기사를 조금 줄여서 인용한 것이다. 인용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실수가 있었던 것을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타한가한(他汗可汗)은 유연의 제 9 대 왕으로 이름이 복도(伏圖)이고,  7 대 왕인 복고돈가한(伏古敦可汗) 두륜(豆崙)과 종형제간이다. 복발가한(伏跋可汗)은 제 10 대 왕으로 이름은 추노(醜奴)였다. 가하돈(可賀敦)은 왕의 정실 부인을 뜻하는 몽골어로 가돈(可敦)이라고도 한다.

[D-045]예형전(禰衡傳) : 후한서 110 ()에 수록되어 있다. 예형은 후한 말의 광사(狂士)로 재주가 빼어났으나 몹시 오만하여 조조(曹操), 유표(劉表), 황조(黃祖)의 문객(門客)으로 전전하다가 끝내 황조의 비위를 거슬러 피살되었다. 그가 지은 앵무부(鸚鵡賦) 문선(文選)에 전한다. 그런데 후한서 예형전에는 연암이 개탄한 바와 같은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연암의 처조카인 이정관(李正觀 : 1792~1854) 역시 천학고변(天學考辨)’이란 글에서, 천주교도 정약종(丁若鍾) 영혼의 부모인 천주에 비해 친부모는 잠시 그 몸을 가탁한 육신의 부모일 뿐이라고 차별하면서 모자(母子) 관계를 독() 속의 물에 비유하여 물이 독 밖으로 나오면 물은 물이고 독은 독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을 두고 이는 곧 한서 예형전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극도로 패악한 설이라고 비난하였다. 闢衛新編 卷1 諸家論辨 연암이 부모모질(父母模質)’ 운운한 것은 원죄설이 아니라 그러한 육신부모설을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유사한 내용 역시 후한서 예형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답함

 

 

상소의 초안은 근근이 얽어 내어 소략함을 면치 못했으니, 쓰시기에 합당치 못하며 때에 맞추지 못한 한탄이나 없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날을 두고 구상하여 절로 지체된 것은 비단 필력이 고갈되어 술술 표현할 수 없어서만이 아니라, 사정이 이리저리 꼬여 말 만들기가 심히 어려워서였습니다.

이 죄수는 여러 해를 두고 교화되지 않고 버티던 끝에 다 죽어 가는 제 목숨을 구걸하려고 지금 자백했습니다. 비록 마음을 고친 것 같기도 하나 후일에 번복하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 보증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가뭄을 걱정한 끝에 죄수를 풀어 주는 것과는 사체(事體)가 같지 않사온즉, 갑자기 완전 석방을 요청하신 것은 민심을 놀라게 할 뿐더러, 정원(政院)과 언관(言官)의 입장에서 그에 대해 준절히 나무랄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입니다. 해당되는 자는 그저 깊이 자신을 인책할 따름이지, 어찌 감히 변명하기를 대질하여 따지듯 할 수 있습니까?

절하(節下 순찰사)의 뜻은 어찌 다음과 같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사학의 무리는 총명하고 경술(經術)에 밝은 사람들 속에서 많이 나왔으며, 그 괴수된 자는 대대로 벼슬하는 문벌의 사이에 건재해 있어서, 가벼운 처벌은 겨우 외보(外補)로 마감되고 금서(禁書)는 감춰진 채 드러남이 없으며, 높은 벼슬이 금방 제수됨으로써 진장(眞贓)이 암암리에 전수되고, 화려한 직함이 그전대로 있음으로써 사설(邪說)은 더욱 치성한 형편입니다. 달아난 죄인들이 숨어 있는 소굴로 이보다 큰 것이 어디 있으며, 징계와 토벌이 엄하지 못한 것으로 이보다 더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면에 저 먼 시골 백성들은 지극히 미욱하여 눈을 뜨고도 글자 한 자 볼 줄 모르며, 배운 것이라고는 모두 언문으로 풀이한 것이요, 애매모호하게 입으로 전하다가 도중에 잘못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는 실로 사학의 찌꺼기요 이단의 말류인데도, 어리석은 백성 한 놈만 잡으면 선뜻 괴수로 지목하고, 조금 수상한 자취 하나만 염탐해 내게 되면 바로 소굴로 일컬어, 눈을 부릅뜨고 기염을 토하며 성토를 먼저 가하니, 이른바 본말이 거꾸로 되고 논의 판결이 정당성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지난날 장계를 올려 석방을 청한 것도 과연 여기에서 나왔는데, 뜻은 비록 엄준하지만 행동은 너그럽게 풀어 주는 것이 되니, 이와 같은 본뜻을 누가 다시 양찰하여 알아내리이까? 이러기에 말 만들기가 어려운 것이었으며, 스스로 인책하는 가운데도 슬며시 이 뜻을 비친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 감사의 자핵소(自劾疏) 초본

 

 

()은 지난번에 사학의 무리로 오랫동안 수감되었던 이존창(李存昌)을 석방하는 일로써 장계를 올려 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성군(聖君)의 덕은 생명을 살리기를 좋아하고 신묘한 무위(武威)는 죽이지 않는지라, 신은 바야흐로 손 모아 우러르며 공경하고 칭송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어렴풋이 듣자니 물의가 비등하여, 신이 벌주어 다스리기를 느슨히 하고 미연에 방지하는 것마저 엄하지 못하여 법이 마침내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말세의 풍속이 정화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은 진실로 놀랍고 부끄럽고 두렵고 떨리어 몸 둘 바를 모르겠으며, 소홀하고 경솔한 죄는 신에게 실로 있으므로 책망하고 처벌하시기를 공손히 기다릴 뿐 어찌 감히 스스로 해명하오리까?

신은 외람되게도 변변치 못한 주제에 한 도()를 황공하게 맡았으나 그 직분을 생각하면 임금의 교화를 받들어 선포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무릇 만에 하나라도 왕명을 선양해야 할 몸으로서 형벌이 한결같지 못하여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이 역시 제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조정이 이런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본시 바라는 것은 미혹과 잘못을 깨닫게 하여 형정(刑政)을 번거롭게 아니 하고도 성상의 교화에 복종하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윤상(倫常)을 무시하고 무너뜨린 권가(權哥)와 윤가(尹哥) 같은 놈은 서슴없이 사형을 가하였으나, 마음을 잡고 허물을 고친 필공(必恭) 같은 놈은 곧 적당한 벼슬자리로 보답을 주었습니다. 봄철에 살려 주고 가을에 처형하는 것은 모두 성상의 권능이니, 정말로 도깨비가 태양을 피해 숨고 얼음과 눈이 훈풍을 만난 것과 같을 터입니다. 그런데 존창은 어떤 놈이기에 감히 시골 구석에서 숨바꼭질하며 처박혀서 옛 버릇을 고치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천지 사이에 용납한단 말입니까?

지난번 조정에서 신하들의 의견을 수합하던 날에, 충청도의 괴수로 지목하고 사학의 소굴이라 지칭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법을 집행하기로 논하자면 누구인들 그자를 죽여야 한다고 아니 하리까? 신 역시 일찍이, ‘그자의 사람됨은 필시 지극히 흉악하고 참람하지만 약간의 지체와 문벌이 있어 한 고을에서 걸출하게 명망이 높든지, 그렇지 않으면 필시 언어와 외모가 사람을 움직일 만하고 식견과 지혜가 대중을 현혹시킬 만하리라.’ 추측했습니다.

또한 듣건대 그 무리가 실로 많아서, 서로 번갈아 방문하며 술과 음식을 가득 차려 내오고 양식도 넉넉히 대 주었다 합니다. 이를 근심하고 분해하는 것은 실로 여론과 같으니, 이런 놈을 공공연히 처단하지 않는다면 국법이 어찌 되며 민속이 어찌 되겠습니까?

급기야 신이 이 도를 맡은 이래로 엄밀히 조사하고 물샐틈없이 염탐했더니 직접 본 것이 전해 들은 것과 사뭇 달랐으며, 지난날 멀리서 추측했던 것은 대개 지나친 염려였습니다. 그자의 말을 들어 보고 얼굴을 살펴보았더니 바로 무식한 일개 평민이고, 괴수라는 지목은 너무도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5년을 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아무도 뒷바라지하는 자가 없었으며, 실낱같은 목숨을 여전히 이어 가면서 딴 죄수가 먹다 남은 찌꺼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소굴이란 지칭은 그놈에게는 곧 과분한 말입니다.

자세히 그 실정을 추구해 보면, 그는 곧 곤궁한 백성 중에 조금 교활한 자입니다. 추측건대 선비가 되기에는 일족이 미약하여 그 축에 끼이지 못하고, 농민이 되자니 농사지을 힘이 없고, 바치가 되자니 솜씨가 모자라고, 장사치가 되자니 밑천이 없고 해서, 사민(四民) 가운데 어디고 몸을 붙일 곳이 없었으며, 설령 중을 부러워한들 처자가 거추장스럽고, 차라리 도둑질을 배우자니 양심은 그래도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글자를 좀 안다는 것이 그놈에게는 재앙이요, 좌도(左道)와 사경(邪徑)이 지름길인즉, 요행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서 속이고 꾀는 것으로 일을 삼았습니다. 본죄를 제외하고 이것만으로도 확실히 용서할 수 없으나, 이와 같은 부류가 또한 어찌 이놈뿐이겠습니까? 그런데 금령이 내린 뒤에 제일 먼저 잡혀 왔기 때문에 마침내 괴수로 만들어져, 혹은 강제로 굴복받기에 급하여 지레 태형을 가하고, 혹은 엄포를 놓는 것이 적절치 못하고 알아듣게 타이른다는 것이 방법상 잘못되었으며, 혹은 윽박질러 야소를 저주하고 천주를 배척하게 하여 그 향배(向背)와 진위를 시험해 왔던 것입니다.

저들이 하늘을 사칭해서 천주라는 이름을 만든 것은 너무도 불경스러우나, 이따위 어리석은 백성들로서는 더욱 저들의 마음에 의혹이 생기기를 내가 즐기는 것은 선행이요 공경하는 바는 하늘인데, 어찌하여 나의 선행을 막으며 나의 공경을 금한단 말인가?’ 하여, 드디어 그 사심(邪心)을 더욱더 굳히며, 마치 그를 위하여 제 몸을 바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속고 혹함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면, 차꼬나 오랏줄 따위는 한갓 헛된 물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명리(命吏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된 자로서는 마땅히 성세(聖世)의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도탑게 하려는 지극한 뜻을 공경히 받들어, 임금이 질() · () · () · ()하게 된 까닭과 피() · () · () · ()의 말이 진실과 다른 바를 빨리 밝혀, 전부터 물들었거나 새로 퍼져 가는 나쁜 풍속이 밝은 등불과 촛불 같은 임금의 교화 아래 저절로 사라지고, 허공을 거쳐 간 구름인 양 자취가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한 놈의 거렁뱅이 같은 놈을 붙잡으면 마치 대적(大敵)이 우뚝 마주 선 것같이 여겨, 나라의 위엄을 함부로 사용하여 힘으로 억제하려 들다가, 급기야 일이 난처한 지경에 다다르면 곧 조정에 떠넘기며 이와 같이 당황한단 말입니까?

신이 지난번에 요청한 일은 과연 제 마음대로 곧바로 실행한 것이나, 그 천심(淺深)과 경중(輕重)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요량한 바 있었던 것입니다. 전후로 사학을 배우고 익힌 자들이 비록 한 꿰미에 꿴 듯하지만, 사족(士族)과 천민은 차등이 없을 수 없고, 전문적으로 한 자와 그에 의해 오도된 자도 역시 등분이 있습니다. 저 존창은 권가와 윤가 두 역적에 비하면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 흔적이 없을 뿐더러, 필공에 비하면 미혹을 깨친 마음이 상당히 있사옵니다. 전자로 따지면 차등의 형률을 적용함이 합당하고, 후자로 따지면 마땅히 참작하여 용서하는 죄목에 해당됩니다. 그가 써서 바친 자술서를 보면 비록 문리는 제대로 통하지 않으나 뉘우침이 뼈에 사무쳐, 성세(聖世)의 평민이 되기를 소원하는 말뜻이 너무도 애절하여 사람을 족히 감동시키고도 남습니다. 국가가 이런 오도된 자들에 대해서도 잡히는 대로 바로 처단한다면 그만이겠으나, 만약 그 미혹을 깨닫는다면 죽이지 않을 것을 허락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만약 그자의 쓰라린 뉘우침이 진실로 그 말과 같다면, 국가로 보자면 평민 한 명을 얻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에 죽여 없애 착한 사람들이 물들어 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형정(刑政)의 한 가지 일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 죄상을 찾아냈다면 이른바 불쌍히 여겨야지 기뻐하지 말라고 할 따름입니다.

만일 진위를 알기 어렵고 번복할 것이 염려스럽다 하여, 기왕지사를 깊이 캐어 들어가고 기어이 소굴을 찾아내어, 사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닌 처지에 몰아넣고 사람 세상도 귀신 세상도 아닌 경계 지대에 길이 가두어 둔다면, 이는 지난번 신이 말한 형벌이 한결같지 못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경우이니,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된다면 비단 전날에 자복한 무리들이 의구심을 일으키게 될 뿐 아니라, 또한 뒷날에 감화될 무리들도 당연히 주저하는 생각을 품게 될 터입니다. 이것이 신이 밤낮으로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정에서 기대하는 풍속 교화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반신반의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일개 존창에 대해 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실수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니, 신의 구구한 어리석은 소견은 과연 후자에 있었던 것이지 전자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D-001]이 죄수 : 충청도 천주교도의 지도자로 체포되어 수감 중인 이존창(李存昌)을 가리킨다.

[D-002]진장(眞贓) : 범행의 확실한 증거물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천주교 책자나 그림 같은 것을 가리킨다.

[D-003]그 괴수된 …… 형편입니다 : 1795년 공조 판서 이가환(李家煥)을 천주교도로 공격한 박장설(朴長卨)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정조(正祖)가 이가환을 특별히 충주 목사로 보임한 사실을 거론한 것이다.

[D-004]자핵소(自劾疏) :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탄핵하는 상소를 이른다.

[D-005]신묘한 …… 않는지라 : 원문은 神武不殺인데,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나오는 말이다. 옛날의 총명하며 슬기로운 임금은 형살(刑殺)을 사용하지 않고도 신묘한 무위(武威)로 만민을 복종시켰다고 하였다.

[D-006]윤상(倫常) ……  :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에 살던 양반이자 천주교도로서 조상의 제사를 폐하고 위패를 불살라 버린 윤지충(尹持忠)과 그의 외종형인 권상연(權尙然)을 가리킨다.

[D-007]좌도(左道)와 사경(邪徑) : 둘 다 사교(邪敎)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천주교를 가리킨다.

[D-008]임금이 …… 것입니다 : 연암집 2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書)’ 첫 번째 편지에 동일한 구절이 나온다. () · () · () ·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천서(天敍), 천질(天秩), 천명(天命), 천토(天討)를 이른다. 백성들을 전례(典禮)로써 교화하고 신하들에게 상벌을 공정하게 시행하는 것을 뜻한다. () · () · () · () 맹자 공손추 상에 나오는 피사(詖辭), 음사(淫辭), 사사(邪辭), 둔사(遁辭)를 이른다. 각각 편벽된 말, 음탕한 말, 간사한 말, 회피하는 말을 뜻하며, 정사(政事)에 해를 끼치는 이단사설(異端邪說)을 가리킨다.

[D-009]차라리 …… 것이니 : 원문은 寧失不經於一存昌인데,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고요(皐陶) 죄 없는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한 실수를 하는 편이 낫다.與其殺不辜 寧失不經고 하였다. 사형을 가하지 않고 경솔히 풀어 주는 실책을 범하는 편이 낫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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