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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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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2]

15 만휴당기(晩休堂記)

16 명론(名論)

17 백이론(伯夷論) ()

18 백이론(伯夷論) ()

19 형암(炯菴) 행장(行狀)

20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 발문

21 회성원집(繪聲園集) 발문

22 필세설(筆洗說)

23 서얼 소통(疏通)을 청하는 의소(擬疏)

 

 

 

만휴당기(晩休堂記)

 

내가 예전에 작고한 대부(大夫) 김공 술부(金公述夫) 씨와 함께 눈 내리던 날 화로를 마주하고 고기를 구우며 난회(煖會)를 했는데, 속칭 철립위(鐵笠圍)라 부른다. 온 방안이 연기로 후끈하고,  · 마늘 냄새와 고기 누린내가 몸에 배었다. 공이 먼저 일어나 나를 이끌고 물러 나와, 북쪽 창문 가로 나아가서는 부채를 부치며,

 

그래도 맑고 시원한 곳이 있으니, ‘신선이 사는 곳과 그다지 멀지 않다 할 만하구먼.”

하였다.

조금 있다가 보니 뭇 종들이 심부름을 하느라 처마 아래 서서는 추위를 못 견디어 발을 구르고 있었는데도, 공의 자제들은 떼 지어 소란을 피우다가 국물을 쏟아 손을 데는 등 왁자지껄 장난치는 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공은 크게 웃으며,

 

더운 곳에서 일찌감치 물러 나오니 당장에 효험을 보네만, 눈 속에서 발을 구르는 자들이 국물 한 방울도 얻어먹지 못하는 것이 안됐구먼.”

하기에, 나 역시 젊은이들이 국물을 쏟은 일을 들어 공에게 넌지시 충고하고, 그 김에 옛날과 지금 사람들의 진퇴(進退)와 영욕(榮辱)에 대해서 역설하였다. 그랬더니 공은 정색을 하고서,

 

부귀를 누릴 만큼 누린 뒤에야 만족할 줄을 알고, 다 늙고 나서야 휴식을 생각한다면 역시 너무 늦은 것이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개 공은 반드시 벼슬길에서 일찌감치 물러나는 일에 용단할 수 있었다고는 못 하겠으나, 공이 이 말을 한 것은 역시 속으로 느낀 바가 있어서가 아니었던가 싶다.

내가 서쪽으로 개성에 와서 노닐게 되면서, 양씨(梁氏)의 자제인 정맹(廷孟)과 몹시 친해졌다. 그 부친의 학동(鶴洞) 별장에서 노닌 적이 있는데, 꽃과 나무가 가지런히 늘어서고 뜰과 당()이 깨끗이 다듬어졌으며, 그 당을 이름하여 늘그막에 쉰다는 뜻의 만휴(晩休)’라 했다. 양옹(梁翁 양정맹의 부친)은 너그럽고 도량이 커서 옛날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었다. 날마다 동네 노인들과 함께 활 쏘고 바둑 두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거문고와 술로써 스스로 즐겼으니, 대개 명성과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기를 일찌감치 그칠 수 있어서 늘그막에 오래 즐거움을 누린 것이었다. 이 어찌 참으로 만휴의 즐거움을 얻은 분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양정맹이 나에게 기()를 지어 달라고 청했었다. , 김공이 이 도읍의 유수(留守)를 지낸 적이 있는데, 김공이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공을 그리워하였다. 그래서 화로에 둘러앉아 고기 구워 먹던 옛일을 말하여 양옹의 만휴(晩休)의 즐거움을 치하하고, 아울러 이를 글로 적어서 떼 지어 소란을 피우다가 손을 데는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D-001]대부(大夫) 김공 술부(金公述夫) : 술부는 김선행(金善行 : 1716~1768)의 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김선행은 1739(영조 15) 문과 급제 후 옥당(玉堂), 황해 감사, 대사헌, 한성부 좌윤, 도승지 등을 거쳐 1765 년부터 1766년까지 동지사(冬至使)의 부사(副使)로 연행을 다녀왔다. 당시 연행에는 서장관 홍억(洪檍)의 조카인 홍대용도 참여하였다. 귀국 직후인 1766년 음력 5월 개성 유수로 임명되어 1768 2월까지 재임하였다. 그 후 대사헌, 좌윤을 지내다가 곧 사망했다. () 나라의 제도에 국군(國君) 아래 경() · 대부(大夫) · ()의 세 등급이 있었으므로, 후대에 관직에 임명된 자를 대부라 하였다. 조선 시대의 품계에서도 4품 이상의 문관에게는 ‘~대부라 하였다.

[D-002]난회(煖會) : 난로회(煖爐會)를 말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서울 풍속에 숯불을 화로에 피워 번철(燔鐵)을 올려 놓고 쇠고기에 갖은 양념을 하여 구우면서 둘러앉아 먹는 것을 난로회라 한다고 하였다. 번철은 전을 부치거나 고기를 볶는 데 쓰는 무쇠 그릇으로 전철(煎鐵)이라고도 한다. 삿갓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번철 주위에 둘러앉는다고 하여, 난로회를 철립위(鐵笠圍)’라고 한 듯하다.

[D-003]더운 곳 : 원문은 열처(熱處)’인데, 이는 권세 있는 벼슬자리라는 뜻도 있다.

[D-004]진퇴(進退)와 영욕(榮辱) : 진퇴는 벼슬길에 나서는 것과 은퇴하는 것을 가리킨다. 벼슬할 때와 은퇴할 때를 잘 분별해야 영예를 누리고 치욕을 면할 수 있다.

[D-005]학동(鶴洞) : 금학동(琴鶴洞)으로 개성에 있던 동명(洞名)이다. 그곳에 개성의 선비로서 연암을 종유(從遊)하던 양호맹(梁浩孟) · 양정맹(梁廷孟) 형제의 별장이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명론(名論)

 

 

천하라는 것은 텅 비어 있는 거대한 그릇이다. 그 그릇을 무엇으로써 유지하는가? ‘이름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써 이름을 유도할 것인가? 그것은 욕심이다. 무엇으로써 욕심을 양성할 것인가? 그것은 부끄러움이다.

만물은 흩어지기 십상이어서 아무것도 연속할 수 없는데 이름으로써 붙잡아 둔 것이요, 오륜(五倫)은 어그러지기 쉬워서 아무도 서로 친할 수 없는데 이름명분으로써 묶어 놓은 것이다. 무릇 이렇게 한 뒤라야 저 큰 그릇이 아마도 충실하고 완전할 수 있어, 기울어지거나 엎어지거나 무너지거나 이지러질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다. 온 세상의 작록(爵祿)으로도 선()을 행하는 자에게 두루 다 상을 줄 수는 없으니, 군자는 이름명예으로써 선을 행하도록 권장할 수가 있다. 온 세상의 형벌로도 악()을 행하는 자를 두루 다 징계할 수는 없으니, 소인은 이름명예으로써 부끄럽게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 한밤중에 야광주(夜光珠)를 던지면, 칼을 쥐고 적을 기다리지 않을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은 왜인가? 이는 아무런 까닭도 없이 주어진 이름명예이라 기뻐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천하라는 큰 그릇임에랴. 조정에 갖옷을 모셔 놓으면, 옷섶을 여미고 예법에 따라 종종걸음을 하지 않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은 왜인가? 이름명분이 건재하여 한계를 넘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참으로 충효(忠孝)를 다하여 비통해할 때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주() 나라의 쇠퇴기에 빈 그릇을 끼고 강대한 제후들의 위에 군림해도 아무도 감히 먼저 무례한 짓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래도 여전히 그 빈 이름명분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사슴과 말의 생김새가 서로 비슷하지만, 한번 그 이름이 어지러워져 버리자 천하에 제 임금을 죽이는 자가 나오게 되었다. , 저 사슴과 말의 이름이 천하의 존망(存亡)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만 그래도 하루도 구별이 없어서는 아니 되는데, 더구나 선과 악처럼 서로 같지 아니하고 명예와 치욕처럼 분명히 갈라지는 경우에 있어서랴.

무릇 천하의 재앙 중에 담담하여 욕심이 없는 것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선왕(先王)은 사람들이 장차 태만하고 해이하여 한결같이 물러나기만 하고 나아감이 없게 될 것을 알고, 그들을 위해 보불(黼黻)과 조회(藻繪)와 치수(絺繡)로써 그들의 눈을 유도하고, 종고(鍾鼓)와 금슬(琴瑟)과 생용(笙鏞 생황과 큰 종)으로써 그들의 귀를 유도하고, 인수(印綬 관직을 상징함)와 거마(車馬)로써 그들의 몸을 유도하고, 남다른 선행을 표창하고 비석에 새기고 노래로 지어 찬탄함으로써 그들의 기개를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천하의 대중들로 하여금 그 누구도 분발하고 단련해서, 의욕을 내야 할 일에 힘차게 나서고, 물러나 남에게 미루거나 제풀에 꺾이고 마는 마음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결같이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날 줄 모른다면, 천하의 재앙 중에 또한 태연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것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선왕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속백(束帛)에다 벽옥(璧玉)을 추가함으로써 고상한 품성을 양성하고, 위로하고 타이르며 힘써 노력하도록 함으로써 사양하고 물러나는 미덕을 양성하였다. 위엄과 무력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는 것은 절개를 양성한 때문이요, 형벌이 위로 대부(大夫)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는 것은 염치를 기르고자 한 때문이다. 신체에 형벌을 가하거나 유배의 형을 내린 뒤에 또한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뜻을 표시하는 것은, 천하의 대중들로 하여금 곧은 절개로써 자신을 지키고, 장차 아무 짓이나 다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욕심 내기로는 부귀보다 더 심한 것이 없지만, 그가 욕심 내는 대상이 도리어 부귀보다 더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작록(爵祿)도 사양할 수 있다.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기로는 형벌보다 더 큰 것이 없지만, 부끄러이 여기는 대상이 도리어 형벌보다 클 경우에는 시퍼런 칼날도 밟고 갈 수 있는 법이다. 이는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이른바 이름명예이 아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형벌과 포상으로써 정치를 하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는 방법이요, 이름명예을 장려하여 정치를 하는 것은 어디서든 제한이 없는 방법이다. 왜 그런가? 사람 중에 혹 선행을 하면서도 포상을 기다리지 않는 자가 있으니, 이는 작록이 그가 한 선행을 능가하기에 부족한 때문이다. 또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형벌을 꺼리지 않는 자가 있으니, 이는 매질과 회초리로는 그가 저지르는 악행을 억제하기에 부족한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람 중에는 반드시 포상을 할 필요 없이 권장하기만 하고, 형벌을 가할 필요 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게만 하면, 힘차게 의욕을 내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자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라는 이름은 공평하고 정대(正大)하나, ()이라는 이름은 이기적이고 천박한 것이다. 그대의 논법대로 한다면 장차 천하 사람을 다 몰아서 위선을 행하게 만들 것이다.”

하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이른바 이름을 혐오한다는 것은 한 개인이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경우를 가리킨 것이다. 그 폐단은 어리석은 점이지만, 그래도 근엄하고 자중하여 세속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지경까지 타락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아무리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에게 갑자기 실정보다 지나친 칭찬을 가한다면, 그 역시 뒤로 물러서 겸손히 사양하고 불안해하며 그렇다고 자처하지 못할 터이다. 어찌 사람들을 몰아다 위선을 행하게 만들 것을 걱정할 게 있겠는가.

만약 천하 사람들이 모두가 다 군자라면, 또한 무엇 때문에 이름명예에 대해 힘쓰겠는가. 만약 천하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 성취하려고만 한다면, 인의(仁義)의 행실을 욕심으로써 인도할 수 있고, 불의(不義)의 일을 이름명예으로써 부끄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천하의 대중들이 무관심하여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면, 선왕이 백성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계책과 충효 인의(忠孝仁義)의 행실이 모두 다 텅텅 비어서 빈 그릇이 되고 말 터이니, 장차 어디에 의탁하여 스스로 행해지겠는가?”

 

[D-001]이름 : 명칭이라는 뜻 외에도 명분(名分)이나 명예(名譽)라는 뜻을 포함하므로 문맥에 따라 그 뜻을 변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용어의 통일성은 유지해야 하므로, 부득이 변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괄호 안에 별도의 표기를 하였다.

[D-002]한밤중에 …… 왜인가 : 추양(鄒陽)의 옥중서(獄中書)에 출처를 둔 말이다. 추양은 참소로 인해 하옥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양 효왕(梁孝王)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편지에서 ()은 듣자온대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을 어둠 속에서 노상에 있는 사람을 향해 던지면, 칼을 쥐고 서로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까닭 없이 제 앞에 이르러 왔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鄒陽列傳》 《文選 卷39 獄中上書自明 명월주와 야광벽은 둘 다 야광주(夜光珠)를 뜻한다.

[D-003]조정에 …… 놓으면 : 천자가 승하하고 새 천자가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천자의 보좌(寶座)에 선왕(先王)의 갖옷을 모셔 놓았던 것을 가리킨다. 새 천자가 즉위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이렇게 보좌에 선왕의 갖옷을 모셔 놓고서 조하(朝賀)를 올렸다고 한다. 원문의 朝堂은 몇몇 이본들에는 廟堂으로 되어 있는데, 뜻은 같다.

[D-004]사슴과 …… 되었다 : 진 시황(秦始皇)이 죽은 뒤 환관 조고(趙高)가 국권(國權)을 독차지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세(二世)인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하였다. 이세가 말을 가지고 왜 사슴이라 하느냐고 묻자, 조고를 두려워하는 신하들은 대부분 말이라고 답하였다. 그 뒤 조고는 사슴이라고 답했던 사람을 죄를 씌워 죽여 버렸으므로,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D-005]보불(黼黻)과 조회(藻繪)와 치수(絺繡) : ()는 도끼 무늬이고, ()은 기() 자 둘이 서로 등진 모양의 무늬이다. 조회는 수초(水草) 무늬를 그린 것이고, 치수는 자수(刺繡)를 뜻한다. 서경(書經) 익직(益稷)에서 순() 임금은 우()에게 일() · () · 성신(星辰) · () · () · 화충(華蟲 : )을 그리고, 종이(宗彛 : 종묘宗廟의 주기酒器) · () · () · 분미(粉米 : 백미白米) · () · ()을 수놓아 예복(禮服)을 만듦으로써 존비(尊卑)의 질서를 분명히 밝히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천자는 일() · () 이하 열두 가지 무늬로 장식한 12장복(章服)을 입었고, 왕은 산() · () 이하 아홉 가지 무늬로 장식한 9장복을 입었고, 신하들은 계급에 따라 7장복 · 5장복 · 3장복 · 1장복 · 무장복(無章服)을 입었다.

[D-006]속백(束帛)에다 벽옥(璧玉)을 추가함으로써 : 속백은 비단 다섯 필을 한 묶음으로 만든 것으로 귀중한 예물로 쓰였다. 예기 예기(禮器)에 제후가 천자를 조회할 때 속백에다 벽옥을 추가하는 것은 천자의 덕을 옥에 비겨 존경을 표한 것이다.束帛加璧 尊之라고 하였고, 교특생(郊特牲)에서도 속백에다 벽옥을 추가한 것은 천자의 덕을 옥에 비겨 덕 있는 천자에게 귀의함을 표한 것이다.束帛加璧 往德也라고 하였다. 후대에는 왕이나 천자가 덕 있는 군자를 초빙할 때에도 속백가벽(束帛加璧)의 예를 갖추었다.

[D-007]위엄과 ……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부귀도 그를 방탕하게 할 수 없고, 빈천도 그를 변절하게 할 수 없으며, 위엄과 무력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으니, 이를 일러 대장부라 한다.”고 하였다.

[D-008]형벌이 ……  : 예기 곡례 상(曲禮上) 예절은 아래로 서민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으며, 형벌은 위로 대부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형벌이 대부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부가 범죄를 저지른 경우의 형벌을 별도로 정해 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대부를 이처럼 예우함으로써 스스로 염치를 알도록 장려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D-009]또한 …… 것은 : 원문은 又從而示其傷慘矜恤之意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자가 옳다.

[D-010]시퍼런 …… 법이다 : 보통 사람으로는 행하기 힘든 용기를 발휘한다는 뜻이다. 중용장구  9 장에서 공자는 천하와 나라와 집안도 고루게 다스릴 수 있고, 작록(爵祿)도 사양할 수 있고, 시퍼런 칼날도 밟고 갈 수 있으되, 중용(中庸)을 행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D-011]만약 …… 한다면 : 중용에 출처를 둔 말이다. 중용장구  20 장에 어떤 이는 편안히 실행하고, 어떤 이는 민첩하게 실행하고, 어떤 이는 있는 힘을 다해 실행하나니, 공을 이루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一也라고 하였다.

[D-012]세상을 다스리는 계책 : 원문은 禦世之策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백이론(伯夷論) ()

 

 

사기(史記), 무왕(武王)이 주()를 치러 나서자 백이가 말고삐를 끌어당겨 못 가도록 하며 충고했고, 무왕이 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자 백이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굶어 죽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논한다.

백이가 무왕에게 충고한 사실은 경서(經書)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제() 나라 동쪽 시골 사람들의 말인데 사마천(司馬遷)이 취하여 역사적인 사실로 만들었으니 이는 믿을 것이 못 된다. 비록 그렇지만, 이 책을 믿을진댄 논의할 거리가 있을 수 있다.

백이는 이른바 천하의 대로(大老)요 현인(賢人)이므로 서백(西伯)이 일찍이 예의를 갖추어 그를 봉양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무왕의 측근 신하들이 백이를 무기로 치려고 했던 것이다. , 선왕이 예의를 갖추어 봉양했던 신하이자 천하의 이른바 대로요 현인인데도, 측근의 신하들이 곧장 그 앞에서 무기로 치려고 했더니, 무왕은 오히려 내가 아니라 무기가 그렇게 한 것이다.”라는 식이었다. 그러니 접때 태공(太公)이 아니었던들 백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옛날에 이윤(伊尹)은 한 사람의 필부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치 자기가 그를 떠밀어 도랑 속으로 처넣은 것같이 여겼으며,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이를 죽여 천하의 왕이 될 수 있다 해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또한 무왕의 뜻이기도 하다. 무왕은 아마도 천하를 향해,

 

은 나라 백성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했다.”

하고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주 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제자리를 얻지 못했으니, 무왕이 천하를 얻은 것은 아마도 백성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또 무왕은 천하를 향해 외치기를,

 

은 나라가 노성(老成)한 사람의 말을 저버렸다.”

하였다. 그러나 주 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불의를 충고했으니, 무왕이 천하를 얻은 것은 아마도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또 천하를 향해 외치기를,

 

은 나라가 죄 없는 이를 죽였다.”

하였다. 그러나 주 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온전히 죽음을 맞지 못했으니, 주 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것은 아마도 죄 없는 이를 죽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무릇 이 세 가지는 무왕이 남을 정벌한 명분이었는데도, 난폭하게 거리낌 없이 행동했단 말인가?

무왕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 주고, 비간(比干)의 무덤에 봉분을 해 주고, 상용(商容)의 마을을 지나갈 때 수레에서 경의를 표했으면서, 유독 백이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 살았을 때는 예의를 갖추어 봉양하기를 문왕(文王)과 같이 하고, 그가 떠날 적에는 신하로 대하지 않기를 기자와 같이 하고, 의롭게 여겨 표창하기를 상용과 같이 하고, 그가 죽었을 적에는 봉분하기를 비간과 같이 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 백이와 무왕은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천하와 후세를 위해 염려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탕 임금이 걸()을 내쳤는데도 천하 사람들이 흡족해하며 아무도 괴이하게 여기는 자가 없자, 탕 임금은 진실로 이미 염려하기를,

 

나는 후세 사람들이 나를 구실로 삼을까 걱정이다.”

하였다. 그런데 무왕이 마침내 그 뒤를 따라 그와 같은 일을 행했으니, 천하 사람들이 또 흡족해하며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후세를 위하여 염려됨이 진실로 클 것이다. 그러므로 백이가 무왕을 비난한 것은 그의 거사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리를 밝혔을 따름이며, 무왕이 백이의 봉분을 만들어 주지 않은 것은 그를 잊은 것이 아니라 그의 의리를 밝게 드러냈을 따름이니, 천하와 후세를 염려한 점은 똑같았다.

, 예의를 갖추어 봉양한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표창한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신하로 대하지 않은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봉분을 만들어 준들 백이를 후대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D-001]사기(史記) …… 했다 : 사기 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의하면 백이와 숙제(叔齊)는 은 나라의 제후(諸侯)인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숙제에게 지위를 물려주려 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숙제가 형인 백이에게 양보하려 하였다. 백이는 아버지의 명이다.”라고 하고는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숙제도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달아나 버리니, 나라 사람들이 다른 형제를 왕으로 세웠다. 백이와 숙제가 서백(西伯 : 뒷날의 문왕文王)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로 갔는데, 도착해 보니 서백은 이미 죽었고, 그 아들 무왕이 아비의 신주(神主)를 수레에 싣고서 동쪽으로 은 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려 하였다. 백이와 숙제가 말고삐를 부여잡고 충고하기를, “아버지가 죽었는데 장사도 지내지 않고 전쟁을 하는 것을 효()라고 하겠습니까?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는 것을 인()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무왕의 측근 신하들이 무기로 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강 태공(姜太公) 이들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고는 부축하여 나갔다. 무왕이 은 나라를 평정하고 나자 천하가 모두 주() 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었으나, 백이와 숙제는 수치스럽게 여겨 의리상 주 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며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며 고사리를 캐 먹고 살다가 굶주려 죽었다.

[D-002]() 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자 : 원문은 旣改殷命인데, 서경 소고(召誥)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무왕이 하늘을 대신해서, 은 나라가 받은 천명을 교체해 버렸다는 뜻이다.

[D-003]경서(經書) : 여기에서는 서경을 가리킨다.

[D-004]() 나라 ……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오는바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가리킨다.

[D-005]천하의 대로(大老)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백이는 폭군 주()를 피하여 북쪽 바닷가에 살다가 문왕이 정벌에 나섰다는 말을 듣고 어찌 그에게 귀의하지 않으리오. 나는 서백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고 들었다.’ 하였으며, 강 태공이 폭군 주를 피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다가 문왕이 정벌에 나섰다는 말을 듣고 어찌 그에게 귀의하지 않으리오. 나는 서백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고 들었다.’고 하였다. 이 두 노인은 천하의 대로(大老)인데 문왕에게 귀의하였으니, 이는 천하 사람들의 아버지가 귀의한 셈이다. 천하 사람들의 아버지가 귀의했는데, 그 아들 되는 자들이 어찌 문왕에게 귀의하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대로는 덕망 높은 노인이란 뜻이다.

[D-006]내가 …… 것이다 :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서 맹자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지 않고 흉년만 핑계 대는 위() 나라 왕에게 이것은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서도 내가 아니라 무기가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비난하였다.

[D-007]이윤(伊尹) …… 않았으니 : 이윤은 은 나라 탕왕(湯王)의 재상으로 이름은 지()이다. 탕왕의 부름을 받아 하() 나라의 무도한 걸()을 치고 은 나라를 세우는 일을 도왔다. 맹자 만장(萬章), 이윤은 천하의 백성 중에 필부(匹夫)와 필부(匹婦)라도 요순(堯舜)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를 밀어 도랑 속으로 처넣은 것과 같이 생각하였다.” 하였고, 공손추 상(公孫丑上), 공손추가 백이와 이윤이 공자(孔子)와 같은 점을 묻자, 맹자가 답하기를, “백리(百里) 되는 땅을 얻어서 임금 노릇을 하면 모두 제후들에게 조회 받고 천하를 소유할 수 있거니와, 한 가지라도 불의를 행하며,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이를 죽이고 천하를 얻는 것은 모두 하시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같은 점이다.” 하였다. 또한 서경 열명 하(說命下), 이윤은 한 사람의 필부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이는 나의 허물이다.’ 하였다.”고 한다.

[D-008]노성(老成)한 사람 : 덕망 높은 노인이라는 뜻과 함께, 노련한 옛 신하라는 뜻도 있다.

[D-009]난폭하게 : 대본은 놀라고 두려워한다는 뜻의 恤然으로 되어 있으나, 이본에 따라 悍然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또 어리석다는 뜻의 懜然으로 된 이본도 있다. 거리낌 없이 난폭하게 구는 것을 한연불고(悍然不顧)’라 한다.

[D-010]무왕이 …… 표했으면서 : 서경 무성(武成)에 나온다. 상용(商容)은 은 나라 주왕 때 대부가 되어 직언을 하다가 내쫓긴 현인(賢人)이다. 사기 61 백이열전에는 무왕이 상용의 마을에 정표(旌表)를 내렸다고 하였다.

[D-011]나는 …… 걱정이다 :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나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백이론(伯夷論) ()

 

 

공자(孔子)가 옛날의 인자(仁者)를 칭송했으니, 기자(箕子), 미자(微子), 비간(比干)이 이들이다. 이 세 분의 행실이 각기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두 인()이라는 명칭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맹자가 옛날의 성인(聖人)을 칭송했으니, 이윤(伊尹), 유하혜(柳下惠), 백이(伯夷)가 이들이다. 이 세 분의 행실이 각기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두 성()이라는 칭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저 태공(太公)은 옛날의 이른바 대로(大老)요 현인(賢人)이었으니, 그 행실은 백이와 똑같고 도()는 이윤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자는 그의 인()을 칭송하며 세 분의 인자와 함께 나열하지는 않았으며, 맹자도 그의 성()을 칭송하며 세 분의 성인과 함께 나열하지는 않았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 내가 은 나라를 살펴보건대 그 나라에는 다섯 분의 인자가 있지 않았을까? 어째서 다섯 분의 인자라고 말하는 것인가? 백이와 태공을 합해서 하는 말이다. 저 다섯 분의 인자들은 소행은 역시 각자 달랐지만, 모두 절실하고 간곡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기다려야만 인()이 되고, 서로 기다리지 않을 경우 불인(不仁)이 되는 처지였다.

미자는 속으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충고할 수도 없는데 충고하려고 애쓰느니 차라리 은 나라의 종사(宗祀 조종(祖宗)에 대한 제사)를 보존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나라를 떠났으니, 미자는 비간이 왕에게 충고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비간은 속으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충고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해서 충고하지 않느니 차라리 낱낱이 충고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충고하고 죽었으니, 비간은 기자가 도()를 전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기자는 속으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도를 전하지 않으면 누가 도를 전하랴.’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잡혀서 종이 되었으니, 기자에게는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비록 그러하나 인자의 마음은 하루라도 천하를 잊지 못하는 법이니, 기자는 태공이 백성들을 구제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태공은 속으로 자신을 은 나라의 유민(遺民)으로 생각하면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인데, 소사(少師)는 떠났고, 왕자(王子)는 죽었고, 태사(太師)는 구금되었으니, 내가 은 나라의 백성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장차 천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서 마침내 주()를 쳤으니, 태공 역시 서로 기다릴 사람이 없는 듯하다. 비록 그러하나 인자의 마음은 하루라도 후세를 잊지 못하는 것이니, 태공은 백이가 의리를 밝혀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백이는 속으로 자신을 은 나라의 유민으로 생각하면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인데, 소사는 떠났고, 왕자는 죽었고, 태사는 구금되었으니, 내가 그 의리를 밝혀 놓지 않는다면 장차 후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서, 마침내 주() 나라를 받들지 않았다. 무릇 이 다섯 분의 군자가 어찌 좋아서 그렇게 했겠는가. 모두 마지못해서 한 일이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만약 서로 기다려서 인()이 된다 할 것 같으면, 태공이 없었을 경우 기자가 목야(牧野)의 대사(大事)를 치렀어야 하고, 백이가 아니었다면 태공이 말고삐를 끌어당겨 못 가도록 충고했어야 한단 말인가?”

하기에, 이렇게 답하였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해서 인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리를 기다릴 따름이니, 신포서(申包胥)와 오자서(伍子胥)가 서로에게 고지(告知)한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왕자가 없었다면, 소사가 반드시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떠날 필요가 없었는데도 떠났다면, 소사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소사가 떠나지 않았는데도 왕자가 홀로 죽었다면, 왕자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왕자가 이미 죽고 소사가 이미 떠났는데도 태사가 거짓으로 미친 척하지 않았다면, 태사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태공이 천하 백성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백이가 후세 사람을 염려하지 않았다면 백이와 태공은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자가 주 나라로 달아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비간이 충고하다가 죽은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기자가 도를 전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태공이 주()를 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백이가 주 나라를 받들지 않은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다.

나는 그러기에 백이와 태공의 도()를 은 나라의 세 분의 인()에 합친 것이다. 이는 또한 공자의 뜻이었다. 공자가 태공을 칭송하지 않은 것은 아마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백이의 경우에는 자주 그 덕을 칭송하고,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감히 그를 세 분의 인자와 연계시키지 않은 것은 아마 무왕에게 누가 될까봐 말하기를 꺼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만약에 다섯 분의 인자가 합해야 온전한 인()이 된다면, 어찌 수고스럽지 않은가?”

하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일로써도 인이 되기로 말하자면, 편협하거나 공손하지 못한 점이, 어찌 백이가 청렴해서 성인이 되고 유하혜가 화합을 잘해서 성인이 된 사실을 가릴 수 있겠는가.”

 

[D-001]공자(孔子) …… 이들이다 : 논어 미자(微子) 미자(微子)는 나라를 떠났고, 기자(箕子)는 잡혀서 종이 되었으며, 비간(比干)은 충고하다가 죽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 나라에 세 사람의 인자(仁者)가 있었다.’고 하였다.”고 한 것을 가리킨다.

[D-002]맹자가 …… 이들이다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실린 말로, 맹자가, “백이(伯夷)는 성인(聖人) 중의 청()한 자요, 이윤(伊尹)은 성인 중의 자임(自任)한 자요, 유하혜(柳下惠)는 성인 중의 화()한 자요, 공자(孔子)는 성인 중의 시중(時中)한 자이시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D-003]태공(太公) …… 때문이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서 맹자는 태공을 백이와 함께 대로(大老)라고 불렀다. 태공은 백이와 마찬가지로 폭군 주()를 피해 은거하다가 서백(西伯) 즉 주 나라 문왕에게 귀의하였다. 또한 태공은 이윤이 탕왕(湯王)을 도와 은 나라를 세웠듯이, 무왕을 도와 주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도()가 흡사했다고 한 것이다. ()가 똑같다고 하지 않은 것은, 이윤이 천하를 얻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정의를 지키고자 한 데 비해, 태공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병법과 기계(奇計)를 즐겨 구사한 때문인 듯하다. 史記 卷31 齊太公世家 태공이 지었다는 육도(六韜)라는 병서가 전한다.

[D-004]소사(少師) …… 구금되었으니 : 문맥으로 보면 소사는 미자, 왕자(王子)는 비간, 태사(太師)는 기자라야 하지만, 서경 미자(微子)에는 왕자인 미자가 부사(父師) 즉 태사인 기자와 소사인 비간과 상의하여 망명을 결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기 3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도 태사는 기자, 소사는 비간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소사는 죽었고, 왕자는 떠났고, 태자는 구금되었으니로 되어야 옳다. 비간 역시 왕자였으므로, 약간 착오가 빚어진 듯하다. 소사는 제왕의 스승으로, 태사 다음가는 직책이다.

[D-005]목야(牧野)의 대사(大事) : 목야는 무왕이 주()와 결전을 벌였던 전쟁터이다. 목야에서 은 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피가 내를 이루어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다 한다. 書經 武成

[D-006]신포서(申包胥) ……  : 신포서와 오자서(伍子胥)는 모두 초() 나라 사람이다. 오자서는 부형이 초 나라 평왕(平王)에게 살해당하자 복수하려고 오() 나라로 망명하였다. 9년 후 오왕 합려(闔閭)를 도와 초 나라의 도읍 영()으로 쳐들어가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에 매질을 가하여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신포서는 초 나라의 대부이다. 오 나라 군사가 침입하여 왕이 피난하는 국난이 있자 진()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진 나라가 구원을 허락하지 않자 그는 대궐의 뜰에서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울면서 이레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않았다. 진 나라 애공(哀公)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구원병을 내어 오 나라를 물리쳤다. 처음에 신포서와 오자서는 친구 사이였는데, 오자서가 망명하면서 나는 반드시 초 나라를 멸망시키고 말겠다.” 하니, 신포서가 나는 반드시 초 나라를 보존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므로,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D-007]떠날 …… 것이다 : 이 대목이 원문에는 없으나,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과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 不必行而行 微子爲不足仁矣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微子는 문맥에 맞추어 少師로 바꿔 번역하였다.

[D-008]인을 …… 있겠는가 : 논어 술이(述而)에 나온다.

[D-009]편협하거나 …… 있겠는가 : 맹자 공손추 상에 백이는 편협하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못하니, 편협함과 공손하지 못함은 군자(君子)가 따르지 않는다.” 하고, 만장 하(萬章下) 백이는 성인(聖人) 중의 청()한 자요, 이윤은 성인 중의 자임(自任)한 자요, 유하혜는 성인 중의 화()한 자요, 공자는 성인 중의 시중(時中)한 자이시다.” 하였다. 여기서 말한 뜻은, 백이와 유하혜가 모든 미덕을 갖춘 공자와는 다르지만 한 가지 미덕만으로도 ()’이 되는 데는 문제가 없듯이, 백이와 태공 또한 ()’이라는 범주에 넣어도 손상이 없다는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형암(炯菴) 행장(行狀)

 

 

우리 정종 공정대왕(定宗恭靖大王)의 열다섯째 아들 무림군(茂林君) 시호(諡號) 소이공(昭夷公)은 휘가 선생(善生)이다. 그로부터 10세를 내려와, 휘 정형(廷衡)은 감찰로서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휘 상함(尙馠)을 낳았다. 상함공이 휘 필익(必益)을 낳으니 강계 부사(江界府使), 부사공이 휘 성호(聖浩)를 낳으니 이분이 형암의 선친이다. 모친은 반남 박씨(潘南朴氏)로 토산 현감(兎山縣監) 휘 사렴(師濂)의 따님이요, 금평위(錦平尉)로서 시호가 효정공(孝靖公)인 휘 필성(弼成)의 손녀이다.

형암은 휘가 덕무(德懋)요 자는 무관(懋官)이니, 형암은 그의 호이다. 영종(英宗) 신유년(1741, 영조 17)에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지녔고 성품이 단정하고 엄격하였다. 세 살 때 이웃에 사는 창기(娼妓)가 엽전 한푼을 가지라고 주자, 즉시 더러워. 더러워.” 하며 땅에 던졌고, 그 돈이 빗나가서 신고 있는 신 위에 떨어지자 수건으로 그 신을 닦았다. 겨우 6, 7세밖에 되지 않아서는 능히 글을 지었고 책 보기를 좋아했다. 한번은 집안사람들이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가, 저녁 무렵에야 대청 벽 뒤의 풀더미 사이에서 발견했으니, 대개 벽에 도배지로 바른 고서(古書)를 보는 데 빠져서 날이 저문 줄도 몰랐던 때문이었다.

차츰 장성하자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에 힘썼다. 앉거나 눕거나 거동하는 것이 일정한 법도가 있어 한자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종일토록 여럿이 있을 적에도 정중하되 뻐기지 않고, 잘 어울리되 허물없이 굴지 않았다. 그리고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두어 칸의 허물어진 가옥에 거친 음식도 건너뛰는 때가 많았지만 편안하게 받아들여, 남들은 그가 근심하는 빛을 보지 못했다. 무릇 세간의 재화와 이익, 가무와 여색, 애완물, 잡기(雜技) 따위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문장을 지을 때는 반드시 옛사람의 취지를 구하되 답습하거나 거짓으로 꾸며서 표현하지 않았다. 한 글자 한 구절도 다 정리(情理)에 핍근(逼近)하고 진경(眞境)을 묘사하여, 편마다 그 묘미가 곡진해서 읽어 볼 만하였다. 뜻을 같이하는 두어 사람과 학문을 강론하는 외에는, 지은 시나 산문을 남에게 잘 보여 주려 하지 않았다. 교유도 함부로 하지 않아서, 현달한 벼슬아치들은 한 사람도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나이가 약관이 넘도록 명성이 마을 골목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책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보면서 초록(抄錄)했는데, 본 책이 거의 수만 권을 넘었으며, 초록한 책도 거의 수백 권이었다. 비록 여행할 때라도 반드시 책을 소매 속에 넣어 갔으며, 심지어는 붓과 벼루까지 함께 가지고 다녔다. 여관에서 묵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책을 덮은 적이 없었다. 만약 기이한 말이나 특이한 소문을 듣기라도 하면 곧바로 기록하였다. 책을 저술함에 있어서는 고거(攷據)와 변증(辨證)을 잘하였다. 일찍이 동식물과 명물도수(名物度數), 나라를 경영하는 방략과 금석비판(金石碑板)으로부터 우리 왕조의 법제와 외국의 풍토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젊어서는 부친의 명령으로 과거 공부를 하였다. 시에 뛰어나, 당세에 과시(科詩)로써 이름난 자들도 스스로 미치지 못할 것으로 여겼다. 간간이 과거를 본 적도 있었으나 즐겁게 여기진 않았으며, 마침내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했어도 불평하지 않았다.

을유년(1765, 영조 41)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3년 동안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풀지 않았으며 조석으로 슬피 울부짖어, 이웃 사람들이 그 때문에 귀를 막았을 정도였다. 성묘하는 일이 아니라면 비록 종자(宗子)의 집이라도 간 적이 없었다.

무술년(1778, 정조 2)에 사신 행차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면서 산천과 풍물을 관광하였으며, 당시의 이름난 유학자들과 담론하고 시를 지어 주고받은 일이 많았다. 항주(杭州) 사람 반정균(潘庭筠)이 그를 만나 보고 탄복하며,

 

눈빛이 번쩍번쩍하니 이야말로 비범한 사람이다.”

하였다.

기해년(1779)에 외각(外閣 교서관(校書館))의 검서관(檢書官)에 제수되었는데, 이때는 성상이 등극한 지 3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임금께서는 문풍(文風)이 점차 쇠퇴하고 인재(人材)가 묻혀 버림을 염려하여 문풍을 진작하고 인재를 발탁할 방법을 생각한 끝에, 영릉(英陵)의 옛일을 모방하여 규장각을 세우고 각신(閣臣)을 두었으며, 교서관을 창덕궁 단봉문(丹鳳門) 밖으로 옮겨 설치하고 규장각의 외각을 삼았다. 그리고는 각신들에게 물어서 벼슬하지 못한 선비들 중에 학문과 지식이 있는 자들로 외각의 관원을 채우게 하고, 처음으로 검서라는 관명을 하사하였는데, 무관이 첫 번째로 선발되었다. 임금께서 검서들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는, ‘규장각 팔경(奎章閣八景)’이라는 제목의 근체시(近體詩) 8편을 짓게 했는데 무관이 장원을 차지했고, 이튿날 다시 영주에 오르다登瀛州라는 제목으로 20()의 시를 짓게 했는데 또 장원을 차지하니, 두 번 모두 임금께서 상을 내리되 차등있게 내리셨다. 이렇게 해서 남들에게 받지 못했던 인정을 비로소 임금에게서 받게 된 것이다.

신축년(1781) 정월에 외각의 관직을 옮겨서 내각(內閣 규장각)의 관직으로 만들도록 명하였으니, 무관이 규장각 검서관이 된 것은 대개 이때부터였다. 3월에 사도시 주부(司䆃寺主簿)로 승진되었는데, 이로부터는 매양 본래의 관직에 검서의 관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해 12월에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으로 제수되었는데, 사근역(沙斤驛)에는 해묵은 공채(公債)가 있어 매년 그 이자를 받아 공비(公費)로 삼는 관계로, 가난에 지친 백성들을 날마다 들볶아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일을 상관(上官 경상 감사)에게 보고하여 혁파하였는데, 이 덕분에 역민(驛民)들이 지금까지도 그 혜택을 입고 있다.

계묘년(1783) 11월에 내직으로 들어와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에 제수되고, 갑진년(1784) 2월엔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로 옮겼다. 6월에는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다. 적성에 있는 5년 동안 10번의 인사 고과에서 다 최우수를 받았다.

적성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청렴하면 위엄이 생기고, 공평하면 혜택이 두루 미치게 된다.”

하였고, 남들이 간혹 녹봉이 박하지 않느냐고 하면, 문득 정색을 하고,

 

내가 한낱 서생(書生)으로서 성상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벼슬이 현감에 이른 덕분에, 위로는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하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고 있으니 영광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다만 임금님의 은혜를 찬송할 뿐이지 어찌 감히 가난을 말할 수 있으랴!”

하였다. 고을 남쪽에 청학동(靑鶴洞)이 있었는데 고송(古松)과 백석(白石)이 그윽하여 사랑스러웠다. 예전에 정자가 있었으나 다 허물어졌으므로 다시 두어 칸을 얽고 우취옹정(又醉翁亭)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두 바퀴 달린 작은 수레를 손수 만들어 여가 있을 때면 홀로 그곳에 가서 유유자적하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기유년(1789) 6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내직인 와서 별제(瓦署別提)로 옮기고, 경술년(1790) 7월에 사도시 주부로 옮기고, 신해년(1791) 2월에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로 옮기고, 3월에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로 옮기고, 5월에 사옹원 주부로 옮겼다.

무관은 젊은 시절부터 가난을 편안히 여겼다. 더러는 해가 저물도록 식사가 준비되지 못한 적도 있고, 더러는 추운 겨울에도 온돌에 불을 때지 못하기도 했다. 벼슬을 하게 되어서도 제 몸을 돌보는 데는 매우 검소하여, 거처와 의복이 벼슬하기 전과 다를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기한(饑寒)’이라는 두 글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기질이 본래 부녀자나 어린아이처럼 연약하였는데, 나이가 거의 노년에 접어들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이 손상된 지 오래였다. 겨울에 날씨가 몹시 추우면 나무 판자 하나를 벽에 괴고 그 위에서 자곤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병이 나자 병중에도 앉고 눕고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태연자약하였다. 임종에 이르러서는 의관을 다시 정제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으니, 때는 계축년(1793) 1 25일이요, 향년은 겨우 53세였다. 2월에 광주(廣州) 낙생면(樂生面) 판교(板橋)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일찍이 저서 12종이 있었다. 영처고(嬰處稿)는 바로 젊은 시절에 지은 시와 산문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처신하는 것과 행동을 조심하기를 어린아이나 처녀처럼 해야 한다.”

했는데, 그래서 원고의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 청장관고(靑莊館稿) 청장은 바로 해오라기의 별명인데, 강이나 호수에 살면서 먹이를 뒤쫓지 아니하고 제 앞을 지나가는 고기만 쪼아 먹기 때문에 신천옹(信天翁)이라고도 부른다. 무관이 이로써 스스로 호를 삼은 것은 까닭이 있어서였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는 곧 귀로 들은 것과 눈으로 본 것과 입으로 말한 것과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은 것이다. 사소절(士小節)은 옛날의 어진 이들이 남긴 교훈을 인용하여 훈계의 말씀으로 삼고, 지금 사람들의 요새 일들을 기록하여 보고 느끼는 바가 있도록 한 것이다.

청비록(淸脾錄)은 옛날과 지금 사람들의 시화(詩話)를 실은 것이요, 기년아람(紀年兒覽)은 상고부터 시작하여 명() · () 및 춘추 시대의 소국(小國)들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데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명확히 구별하였다. 청정국지(蜻蜓國志)는 일본의 세계(世系) · 지도 · 풍속 · 언어 · 물산을 기록한 것이다. 앙엽기(盎葉記)는 곧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일에 대해 고증하고 변증한 말들을 모은 것이다.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은 경상도에서 역승(驛丞 찰방)으로 재직할 때에 듣고 본 것을 기록한 것이다.

예기억(禮記臆) 예기의 어려운 글자나 의심나는 뜻에 대해 풀이한 것이다. 송사보전(宋史補傳)은 곧 하교를 받들어 어정송사전(御定宋史筌)을 편집 · 교열한 것으로서, 유민열전(遺民列傳)과 고려열전(高麗列傳) · 요열전(遼列傳) · 금열전(金列傳) · 몽고열전(蒙古列傳)을 보완하여 편찬한 것이다.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는 많은 서적들을 열람하면서 명 나라 말의 유민(遺民)들의 행적을 편집한 것인데, 미처 원고를 정리하지 못하였다.

매번 문헌을 편찬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무관이 참여하였으니, 국조보감(國朝寶鑑) · 갱장록(羹墻錄) · 문원보불(文苑黼黻) · 대전통편(大典通編) 같은 종류가 그것이다. 또 일찍이 어명을 받들어 운서(韻書)를 편찬하여 진상하였으니, 이름을 규장전운(奎章全韻)이라 하였다. 자획(字畫)은 모두 육서(六書)를 쓰고, 주석은 제가(諸家)의 운서를 참고하여 협운(叶韻)과 통운(通韻)까지 자상히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관은 이 일을 마치고 죽었다.

갑인년(1794) 겨울에 임금은 책을 간행하도록 명하고, 그 아우 공무(功懋)와 아들 광규(光葵)에게 명하여 함께 교정하고 그 일을 감독하게 했다. 삼년상을 마치고 담제(禫祭)를 지내자, 임금께서 하교하기를,

 

오늘 운서를 인쇄하는 일로 인하여 생각하건대, 작고한 검서관 이 아무의 재주와 학식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아들이 이미 탈상했다고 아뢰니, 그를 검서관에 특별히 임명하라.”

하고, 또 돈 500냥을 하사하시어 유고를 출간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이어서 규장각의 각신과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서 현재 장임(將任 대장이나 장수), 지방 관직, 관찰사, 큰 고을 수령을 맡은 자에게 명하여 각자 능력껏 출간 비용을 돕도록 하고, 가까운 친척인 훈련대장 이경무(李敬懋)에게도 일체가 되어 출간 비용을 대는 것을 돕도록 하교하였다.

이날 임금께서 광규에게 입시토록 명하였으며, 은혜로운 하교가 정중하였다. 일족과 친구들이 서로 돌아보며 축하하기를,

 

무관이 평소에 제 몸을 깨끗이 지키고 학업에 부지런하며 편찬하는 일로 수고가 많았는데, 죽은 뒤에 지존(至尊)께서 그 재주를 생각하고 그 가난을 염려하여 마침내 그의 아들을 등용하고 유고를 출판하라는 명을 내리셨구나! 이렇게 큰 은혜와 영광이 내린 것은 구천(九泉)에 간 망인을 깊이 감격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장차 온 세상 사람들을 분발하게 할 터이니, 어찌 거룩하지 않으랴!”

하였다.

무관은 수성 백씨(隋城白氏 수성은 수원(水原))에게 장가들었으니, 동지중추부사 사굉(師宏)의 따님이요, () 호조 판서 행 평안 병사(行平安兵使)로 시호가 충장공(忠莊公)인 시구(時耈)의 증손녀이다. 1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바로 광규요, 두 딸은 전주(全州) 유선(柳烍)과 광산(光山) 김사황(金思黃)에게 시집갔다. 광규의 자녀는 아직 어리다.

, 무관은 품행이 독실하여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고,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서 만물을 정밀히 연구하기에 넉넉하였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내면의 수양에 독실하여 외부의 유혹을 물리쳐 끊었고, 본체(本體 마음의 본바탕)가 맑고 투철하며 그 용( 마음의 활동)은 섬세하고 빈틈이 없었다. 안자(顔子)의 사물(四勿)과 증자(曾子)의 삼성(三省)은 모두 그가 부지런히 힘을 쏟던 것이다.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에서 널리 취재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독창적인 경지를 홀로 추구하고 진부한 것은 따라 배우지 않았다. 기이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진실되고 절실함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으며, 순박하고 성실하면서도 졸렬하거나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았으니, 수백 수천 년이 지난 뒤라도 한번 읽어 보기만 하면 완연히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고금의 일에 해박하고 명물(名物)을 명백히 분석하기로 말하자면, 전무후무(前無後無)하다 해도 좋을 것이다.

무관은 가난한 선비 시절부터 민생이 곤궁하고 인재가 묻히고 마는 데 깊은 관심을 쏟아서, 개연(慨然)히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그의 논설과 기록은 법령과 제도에 특히 치중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았다. 그런즉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뜻을 잠깐 사이도 잊은 적이 없었으니, 진실로 그를 기용하여 능력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면, 장차 어디건 안 될 곳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도도하게 유행하는 풍속을 싫어하고 마음의 본바탕이 자유롭고 트인 것을 좋아하여, 뜻을 굳건히 지키고 운명을 믿어 담담히 욕심이 없으며, 쓸쓸한 오두막집에 살면서 빈천을 감수하였다. 권세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않아, 지위 높고 요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남들이 몰라주어도 불평하지 않는 내실을 갖추었고, 혼자 실행하게 되어도 두려워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지녀, 하마터면 불우한 채 늙어 죽어 그대로 묻힌 채 이름이 후세에 일컬어지지 못할 뻔했다.

그런데 우리 성상께서 문치(文治)를 숭상하는 정치를 천명하고 인재 뽑는 길을 넓히사, 무관이 궁벽한 여항에 사는 한낱 가난한 선비인데도 날마다 임금을 가까이 모시게 되니, 성상은 이미 그가 오래 쌓아온 학식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는 구중궁궐에 달려나가 문헌의 편찬 사업에 이바지하였으니, 세상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성상이 유독 아셨고,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기지 못한 것을 성상이 유독 기특하게 여기신 것이었다. 그의 처지는 한낱 소원하고 지위 낮은 관원이었으나 그의 소임은 규벽(奎璧)을 맡는 것이었고, 그의 관직은 한낱 유품(流品 잡다한 하급 관직)이로되 그의 일은 성상의 고문(顧問)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전후로 부지런히 장려하시고 후하게 하사하신 은혜는 지위 높은 신하도 얻기 힘든 바였으니, 무관이 성상으로부터 입은 지우(知遇)도 성대하다 하겠다.

벼슬길이 순탄치 못해 관직이 한낱 현감에 그치고, 타고난 수명이 짧아 역량을 당세에 펴지 못하고 뜻을 품은 채 죽은 점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운명이지 때를 만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죽자 성상은 은혜로운 말씀을 내려 그의 재주와 학식을 잊을 수 없다고 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내탕전(內帑錢)으로 유고를 간행하여 오래도록 세상에 전하게 하고, 그의 검서 관직을 그의 아들이 물려받게 하셨으니,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은총을 입은 것이 지극하다 하겠다. 옛사람을 낱낱이 헤아려 보더라도 임금에게 이와 같은 은총을 입을 수 있었던 자가 몇 사람이나 되었겠는가? 이런 점에서 본다면 무관은 유감이 없을 것이다.

규장각의 여러 신하들이 바야흐로 임금의 하교를 받들어 그의 유집을 편찬하면서, 내가 무관의 평생 사적을 잘 안다고 하여 행장을 짓도록 부탁하였다고 한다.

 

 

[C-001]형암(炯菴) 행장(行狀) : 이덕무의 삼년상이 끝난 정조 19(1795) 4, 왕은 그의 유고(遺稿)를 정선(精選)하여 활자로 인쇄하고 그 서문과 발문 및 묘지(墓誌)와 묘갈(墓碣) 등은 글 짓는 소임을 맡은 신하들이 나누어 짓도록 명하면서, 행장은 연암이 지어 바치도록 특별히 명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해 12월부터 간본(刊本) 아정유고(雅亭遺稿)의 인쇄를 시작했으나, 서문과 묘문(墓文) 및 행장이 지어지기를 기다려 정조 21(1797) 2월에야 인쇄를 끝냈다고 한다. 過庭錄 卷2》 《靑莊館全書 卷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下 연암이 지은 행장은 간본 아정유고에 수록된 것과 연암집에 수록된 것이 내용상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연암집에 수록된 행장이 연암의 초고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원문의 炯菴 李懋官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1]그로부터 10세를 내려와 :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李光葵)가 지은 선고 적성 현감 부군 연보(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에는 이덕무가 무림군(茂林君) 10세손이라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0

[D-002]명물도수(名物度數) : 명물은 각종 사물의 명칭과 특징을 가리키고, 도수는 계산을 통해 얻은 각종 수치를 말한다.

[D-003]금석비판(金石碑板) : 금석은 글자가 새겨진 동기(銅器)와 비석을 말하고, 비판은 비석의 탁본인 비첩(碑帖)을 가리킨다. 역사학과 문자학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D-004]마침내 …… 못했어도 : 시관(試官)에게 합격자로 뽑히지 못했음을 뜻한다. 이덕무는 33세 때인 1773(영조 49) 성균시(成均試)에 장원 급제하고 그 이듬해 증광(增廣) 초시(初試)에 합격했다. 1779(정조 3) 규장각 검서(奎章閣檢書)에 임명된 뒤로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D-005]영릉(英陵)의 옛일 : 세종 2(1420)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한 사실을 말한다.

[D-006]임금께서 …… 내리셨다 : ‘규장각 팔경을 짓고는 명의록(明義錄) 1질을 특별히 하사받았고, ‘영주에 오르다를 짓고는 백면지(白綿紙) 다섯 묶음을 하사받았다. 靑莊館全書 卷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上 이 두 시는 모두 청장관전서 20 간본 아정유고 12에 수록되어 있다.

[D-007]사근역(沙斤驛) : 경상도 함양(咸陽)에 있던 역참(驛站)이다.

[D-008]공채(公債) : 백성들이 나라에 진 빚을 말하는데, 대개 환곡을 갚지 못한 경우를 말한다.

[D-009]적성 현감(積城縣監) : 적성은 경기도에 있던 현으로, 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이다.

[D-010]우취옹정(又醉翁亭) : () 나라 때 구양수(歐陽脩)가 저주 지사(滁州知事)로 재임할 적에 취옹정(醉翁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백성들과 함께 즐겁게 잔치를 벌인 일을 기록한 취옹정기(醉翁亭記)를 모방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D-011]영처고(嬰處稿) …… 것이다 : 연암이 영처고에 대해 지은 서문이 연암집 7에 수록되어 있다. 이덕무가 지은 자서(自序)는 그의 나이 20세 때인 1760년에 지은 것이다.

[D-012]청장관고(靑莊館稿) …… 있어서였다 : 청장관고 청장관전서와는 다르다. 간본 아정유고에 실린 행장에 의하면, 이덕무의 첫 번째 문집其初集의 이름이 영처고이고, 두 번째 문집其二集의 이름이 청장관고라고 하였다. 이는 곧 청장관전서 중의 필사본 아정유고를 가리킨다. 청장은 일명 신천옹(信天翁 : 앨버트로스)이라고 하는 해조(海鳥)로서, 해오라기鵁鶄와는 별종이다. 연암집 1 담연정기(澹然亭記) 참조. 연암이 지은 행장은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李光葵)가 지은 선고 부군 유사(先考府君遺事)’에 의거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일부는 이 대목과 같이 오류를 포함한 채 그대로 전재(轉載)하기도 했다.

[D-013]송사보전(宋史補傳) …… 것이다 : 송사보전 청장관전서  편서잡고(編書雜稿)에 수록되어 있다.

[D-014]자획(字畫) …… 쓰고 : 상형(象形) · 지사(指事) · 회의(會意) · 형성(形聲) · 전주(轉注) · 가차(假借) 등 한자(漢字)의 여섯 가지 조자법(造字法)에 따라서 속자(俗字)나 위자(僞字)를 배제하고 정자(正字)만을 썼다는 뜻인 듯하다. 이광규가 지은 선고 부군 유사(先考府君遺事)’에 이덕무가 육서에 능통하여 아무리 바쁘더라도 속자나 위자를 쓰지 않았다고 하며,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자획이 비록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 수 없을지라도, 육서를 좋아한다고 자처하면서 만약 체세(體勢)만 숭상하고 그 자의(字義)를 모른다면 어찌 되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D-015]협운(叶韻)과 통운(通韻) : 당시의 음()으로 고대의 운문을 읽을 경우 운이 맞지 않는 글자의 음을 운에 맞도록 임시로 고쳐 읽는 것을 협운이라 한다. 주자(朱子) 시경이나 초사(楚辭)를 해석할 때 협운을 적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통운은 한시를 지을 때 서로 통용될 수 있는 운부(韻部)를 말한다. 예컨대 평성(平聲) 동운(東韻)과 동운(冬韻)에 속하는 글자들은 서로 운자(韻字)로 통용될 수 있다.

[D-016]담제(禫祭) : 삼년상(25개월)을 마친 그 다음다음 달 하순에 탈상(脫喪)하면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D-017]초계문신(抄啓文臣) : 37세 이하의 당하관(堂下官) 중에서 선발하여 규장각에 소속시켜 40세 이전까지 학문과 문장 연마에 전념하도록 한 문신을 말한다.

[D-018]이날 …… 정중하였다 : 정조 19(1795) 4 3, 왕은 이광규에게 부친 이덕무의 유고가 모두 얼마나 되는지를 묻고, 유고를 간행할 비용이 곧 조처될 것인데 집이 가난하다 하니 유고를 간행하고 남는 것은 생활비로 쓰도록 하라고 하였으며, 유고를 정선(精選)하는 일은 각신 윤행임(尹行恁)에게 맡겼노라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下

[D-019]품행이 독실하여 : 원문은 行義敦篤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20]안자(顔子) …… 삼성(三省) :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 말라는 ()’ 자가 네 번 나왔으므로 이를 사물(四勿)이라 한다. 論語 顔淵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 나는 날마다 세 가지 일로 나 자신을 돌아본다.吾日三省吾身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 마음을 다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친구들과의 교우 관계에서 성실하지 못한 점은 없었는가, 스승에게 배운 것을 복습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였다. 論語 學而

[D-021]권세 …… 않아 : 원문에는 足不到 다음에 두 글자가 결락되었는데, ‘권문(權門)’과 같은 단어가 아닌가 한다. 문맥에 비추어 번역하였다.

[D-022]남들이 …… 않으려는 : 논어 학이(學而) 남들이 몰라주어도 불평하지 않으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고, 주역 대과(大過) 군자는 대과(大過)의 괘를 얻으면 혼자 실행하게 되어도 두려워하지 않고獨立無懼 숨어 살게 되어도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D-023]규벽(奎璧) : 임금의 친필과 인장(印章)을 가리킨다. 규장각은 임금의 친필과 인장을 관리하는 곳으로 세워졌다.

[D-024]후하게 하사하신 은혜 : 이덕무가 벼슬한 지 15년 동안 왕으로부터 책 · 옷감 · 음식 · 채소 · 과일 · 생선 · 약 등 모두 139종의 물품을 총 520여 번이나 하사받았다고 한다. 刊本雅亭遺稿 卷8 先考府君遺事

[D-025]순탄치 못해 : 원문은 崚嶒인데, ‘ 자가 ‘’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뜻은 같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 발문

 

 

위학지방도는 상하 2권이고, 그림이 모두 몇 편, 그림에 대한 설( 설명)과 지( 기록)가 모두 몇 편인데, 호가 경암(敬菴)인 조군 연귀(趙君衍龜)가 수집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 이야말로 명계(冥界)의 지남거(指南車)요 미계(迷界)의 보벌(寶筏)인 셈이니, 어찌 여러 가지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 규사(圭駟)의 탄식을 자아낼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사양하다 못하여 마침내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도()란 길과 같으니, 청컨대 길을 들어 비유해 보겠다. 동서남북 각처로 가는 나그네는 반드시 먼저 목적지까지 노정이 몇 리나 되고, 필요한 양식이 얼마나 되며, 거쳐가는 정자 · 나루 · 역참 · 봉후(烽堠)의 거리와 차례를 자세히 물어 눈으로 보듯 훤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다리로 실지(實地)를 밟고 평소의 발걸음으로 평탄한 길을 가는 법이다. 먼저 분명히 알고 있었으므로, 바르지 못한 샛길로 달려가거나 엉뚱한 갈림길에서 방황하게 되지 않으며, 또 지름길로 가다가 가시덤불을 만날 위험이나 중도에 포기해 버릴 걱정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지()와 행()이 겸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행하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헤엄쳐서 물속의 달을 건지거나 북을 치면서 자식을 찾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끝내는 완적(阮籍)처럼 통곡하고 양주(楊朱)처럼 울지 않을 자가 드물 것이다. 비유하면 서울 방내(坊內)의 자제들이 힘써 농사짓는 것이 귀하다는 말만 듣고서, 역서(曆書)가 반포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한겨울에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얼굴에 땀이 나도록 한다면, ()은 비록 힘썼다고 하겠지만 지()에 있어서는 어떻다 하겠는가? 이는 행을 먼저하고 지를 뒤로하여 끝내 수확을 얻지 못한 것이니, 바로 조군이 두려워하는 점이다.

만약 배우는 사람들이 이 그림들에 의거하여 방법을 삼는다면, 밤에 등불이 걸린 것과 같고 소경에게 지팡이가 있는 것과 같으며, 진도(陣圖)에 의거하여 진을 치는 것과 같고 처방에 따라 약을 쓰는 것과 같아, 한편으로는 농가(農家)의 역서(曆書)가 되고 한편으로는 나그네의 정후(亭堠 이정표)가 될 것이다. 모든 군자들이 어찌 이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C-001]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 : 조연귀(趙衍龜 : 1726~?)가 편찬한 책이다. 조연귀는 본관이 배천(白川)이고, 자는 경구(景九)이다. 우암 송시열계의 저명한 성리학자인 윤봉구(尹鳳九)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평생 은거하여 저술에 힘썼다. 그의 저술로 대학 중용의 내용을 알기 쉽게 대학도(大學圖) 중용도(中庸圖)로 도식화(圖式化)하고 해설을 덧붙인 학용도설(學庸圖說)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위학지방도 역시 성리학을 공부하는 방법을 여러 편의 그림들과 그에 대한 해설로써 알기 쉽게 소개한 계몽적 저술로 짐작된다. 이덕무가 지은 숙강규약도발(塾講規約圖跋) 금년 겨울에 조경암(趙敬菴) 위학지방도설(爲學之方圖說)을 편찬했다.”고 하면서, 그의 요청으로 청초(淸初)의 성리학자인 시황(施璜)이 지은 숙강규약(塾講規約)의 내용을 9편의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림에 대한 해설을 덧붙인 숙강규약도를 지어 그 책에 실었다고 했으며, 똑같은 사실이 이덕무의 연보(年譜) 중 신묘년(1771) 11 8일 조에 기록되어 있다. 靑莊館全書 卷19 雅亭遺稿11 5 趙敬菴, 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上》 《刊本雅亭遺稿 卷3 塾講規約圖跋 또한 이서구(李書九)의 성인가문유도지(聖人家門喩圖識)에는 계사년(1773, 영조 49) 겨울에 조연귀의 요청으로, 청초의 문인인 위상추(魏象樞)의 성인가문유(聖人家門喩)를 그림으로 그리고 그 사실을 적어 위학지방도에 보태었다고 한다. 自問是何人言

[D-001]명계(冥界) …… 보벌(寶筏) : 원문의 명도(冥道)’는 곧 명계(冥界)로 염라대왕이 있다는 지옥의 저승 세계를 말한다. 지남거(指南車)는 옛날에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싸울 때 치우가 피운 짙은 안개로 병사들이 방향을 잃자 황제가 방향을 지시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수레이다. 원문의 미진(迷津)’은 곧 미계(迷界), 번뇌로 미혹에 빠진 중생들의 세계를 가리킨다. 보벌은 보석으로 만든 뗏목이란 뜻으로, 미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게 해 주는 불법(佛法)을 비유한 것이다.

[D-002]규사(圭駟)의 탄식 : 쓸데없는 말을 한 데 대한 후회를 뜻한다. 시경 대아(大雅) () 백규의 흠은 오히려 갈아 없앨 수 있거니와, 이 말의 결함은 다스릴 수가 없다.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하였고, 논어 안연(顔淵) 말이 혀에서 나오면 사마(駟馬)도 따라잡을 수 없다.駟不及舌 하였다.

[D-003]평소의 …… 법이다 : 주역 이괘(履卦) 초구(初九)의 효사(爻辭) 평소의 발걸음으로 가면 허물이 없다.素履往无咎고 하였고, 구이(九二)의 효사에 밟아가는 길이 평탄하나, 욕심 없고 차분한 사람이라야 정조를 지키고 길하다.履道坦坦 幽人貞吉고 하였다.

[D-004]북을 ……  : 장자 천운(天運)에서 노자(老子)가 공자에게 인의 도덕(仁義道德)을 외쳐 오히려 인심을 크게 혼란시킨다고 비판하면서, 사람들이 본래의 순박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하지 않고 어찌하여 인의 도덕을 표방하기에 급급하기를 마치 큰 북을 치면서 잃어버린 아이를 찾듯이 하는가?”라고 하였다.

[D-005]완적(阮籍)처럼 ……  : 중국 진() 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은 때때로 마음껏 혼자 수레를 타고 달리다가 길이 끊어진 곳에 이르면 문득 통곡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또 전국 시대 때 양주(楊朱), 이웃 사람이 잃어버린 양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으므로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사람은 갈림길이 갈수록 더욱 갈라져서 찾을 수 없었다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양주는 침통해져서 한참 동안 말문을 열지 않고 며칠간 웃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길을 잃고 곤경에 빠지게 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D-006]역서(曆書) …… 않고 : 원문은 不待人時之敬授인데, 서경 요전(堯典)에 요 임금이 천문역법(天文曆法)을 맡은 관원들에게, “해와 달과 별들을 관측하고 기록하여 인민들에게 절기(節氣)를 삼가 가르쳐 주라.敬授人時고 명하였다고 한다. 예전에 농사를 지을 때에는 농사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24절기를 표시한 역서(曆書)를 반드시 살펴보았다.

[D-007]수확 : 원문은 인데, ‘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회성원집(繪聲園集) 발문

 

 

옛날에 붕우(朋友)를 말하는 사람들은 붕우를  2 의 나라 일컫기도 했고, ‘주선인(周旋人)’이라 일컫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자를 만드는 자가 날개 우() 자를 빌려 벗 붕() 자를 만들었고, 손 수() 자와 또 우() 자를 합쳐서 벗 우() 자를 만들었으니, 붕우란 마치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도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는다.尙友千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너무도 답답한 말이다. 천고의 옛사람은 이미 휘날리는 먼지와 싸늘한 바람으로 변해 버렸으니, 그 누가 장차  2 의 나가 될 것이며, 누가 나를 위해 주선인이 되겠는가. 양자운(揚子雲)은 당세의 지기(知己)를 얻지 못하자 개탄하면서 천년 뒤의 자운(子雲)을 기다리려고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 조보여(趙寶汝)가 이를 비웃으며,

 

내가 지은 태현경(太玄經)을 내가 읽으면서, 눈으로 그 책을 보면 눈이 자운(子雲)이 되고, 귀로 들으면 귀가 자운이 되고, 손으로 춤추고 발로 구르면 각각 하나의 자운이 되는데, 어찌 굳이 천년의 먼 세월을 기다릴 게 있겠는가.”

하였다. 나는 이런 말에 또다시 답답해져서, 곧바로 미칠 것만 같아 이렇게 말하였다.

 

눈도 때로는 못 볼 수가 있고 귀도 때로는 못 들을 수가 있을진대, 이른바 춤추고 발 구르는 자운(子雲)을 장차 누구로 하여금 듣게 하고 누구로 하여금 보게 한단 말인가. , 귀와 눈과 손과 발은 나면서부터 한몸에 함께 붙어 있으니 나에게는 이보다 더 가까운 것이 없다. 그런데도 오히려 믿지 못할 것이 이와 같은데, 누가 답답하게시리 천고의 앞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어리석게시리 천세의 뒤 시대를 굼뜨게 기다릴 수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벗이란 반드시 지금 이 세상에서 구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 나는 회성원집을 읽고서 나도 몰래 속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눈물을 마구 흘리면서 속으로 이렇게 자문자답했다.

 

나는 봉규() 씨와 더불어 이미 이 세상에 같이 태어났으니, 이른바 나이도 서로 같고 도()도 서로 비슷하다 하겠는데, 어찌 서로 벗이 될 수 없단 말인가. 기필코 장차 서로 벗을 삼을진대 어찌 서로 만나볼 수 없단 말인가. 두 지역의 거리가 만리(萬里)인즉, 지역이 멀어서 그런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아아, 이미 서로 만나 볼 수 없는 처지라면 그래도 벗이라 이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봉규 씨의 키가 몇 자인지, 수염과 눈썹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용모도 알 수 없다면 한세상에 같이 사는 사람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장차 어찌해야 할 것인가? 나는 장차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는 식으로 벗을 삼을 것인가?”

봉규의 시는 성대하도다! 장편의 시는 소호(韶頀) 풍악이 일어나듯 하고, 짧은 시들은 옥이 부딪치듯 맑게 울린다. 시가 차분하고 기품이 있으며 따뜻하고 우아함은 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를 보는 것 같고, 깊이 있고 쓸쓸함은 동정호(洞庭湖)의 낙엽 지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그러니 나는 또 이 시를 지은 이가 자운(子雲)인지, 읽는 이가 자운인지 모르겠다.

, 언어는 비록 다르나 문자는 똑같으니, 그가 시에서 즐거워하고 웃고 슬퍼하고 우는 것은 통역을 안 해도 바로 통한다. 왜냐하면 감정을 겉으로 꾸미지 않고, 소리가 충심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장차 봉규 씨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후세의 자운을 기다리는 이를 비웃고, 한편으로는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는 이를 위문할 것이다.

 

 

[C-001]회성원집(繪聲園集) : 청 나라 산서인(山西人) 곽집환(郭執桓 : 1746~1775)의 문집이다. 곽집환은 자가 봉규() · 근정(勤庭)이며, 호가 반오(半迂) · 동산(東山) · 회성원(繪聲園)으로, 시를 잘 지었으며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곽집환은, 홍대용이 1766년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분을 맺게 된 그의 친구 등사민(鄧師閔)을 통해, 자신의 시고(詩稿) 회성원집에 대해 조선 명사들의 서문을 요청하였다. 이에 홍대용과 아울러 연암이 회성원집의 발문을 짓게 되었다. 熱河日記 避暑錄》 《湛軒燕記 鄧汶軒》 《湛軒書 內集 卷3 繪聲園詩跋

[D-001]붕우를 …… 했다 :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交友論)의 첫머리에 나의 벗은 타인이 아니라 곧 나의 반쪽이요 바로 제 2 의 나이다.吾友非他 卽我之半 乃第二我也라고 하였다. 주선인(周旋人)은 보통 시중드는 사람이나 문객(門客)을 뜻하는데, () 나라 이전에는 한때 붕우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晉書 卷99 陶潛傳》 《宋書 卷89 袁粲傳

[D-002]날개 우() …… 것이다 : 마테오 리치의 설을 취한 것이다. 교우론의 원주(原註) () 자는 전서(篆書)로는 로 쓰니 이는 곧 두 손으로서, 꼭 있어야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자는 전서로는 로 쓰니 이는 곧 양 날개로서, 새가 이를 갖추어야 바야흐로 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자에 대해서는 붕() 자의 가차자(假借字)라는 설, ()의 옛글자라는 설, 두 개의 월() , 또는 육() , 또는 패() 자를 합친 것이라는 설 등 정설이 없다. () 자는 손을 뜻하는 우()  2개가 합쳐진 회의자(會意字)이다.

[D-003]싸늘한 바람 : 대본은 영풍(泠風)’인데 이는 표풍(飄風)의 반대말로, 부드러운 미풍(微風)을 뜻한다. 莊子 齊物論 그러나 문맥과 잘 어울리지 않으므로,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 등에 의거하여 냉풍(冷風)’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D-004]양자운(揚子雲) …… 했는데 : 자운(子雲)은 양웅(揚雄)의 자이다. 자신이 저술한 태현경(太玄經)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비웃자, 양웅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후세에 다시 양자운이 나와 반드시 이 저술을 애호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서 87 양웅전(揚雄傳)에는 보이지 않으며, 한유(韓愈)의 여풍숙논문서(與馮宿論文書)에만 나온다. 이어서 한유는, “양웅이 죽은 지 거의 천년이 되었으나 끝내 아직도 양웅이 나오지 않았으니 한탄스럽다.”고 했다.

[D-005]조보여(趙寶汝) : 조귀명(趙龜命 : 1694~1737)으로, 보여(寶汝)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풍양(豐壤)이고 호는 동계(東谿)이다. 재종형(再從兄)인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과 절친하였다. 생원시에 합격한 뒤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에 제수되고, 공조 좌랑(工曹佐郞)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말년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시직(侍直) · 익위(翊衛) 등을 지냈다. 황경원(黃景源)과 함께 당대의 문장가로손꼽힐 만큼 문장에 뛰어났다. 문집으로 동계집(東谿集)이 있다.

[D-006]내가 …… 있겠는가 : 조귀명의 조성언시집서(趙聖言詩集敍) 나로 말하자면 세상에 나를 알아줄 자운이 없는 사람이다. 자운이 없으니 자신의 글을 스스로 보면서 나의 눈으로 하나의 자운을 삼고, 스스로 읊으면서 나의 귀로 하나의 자운을 삼고, 스스로 춤추고 발을 구르면서 나의 손과 발로 각각 하나의 자운을 삼는다.余則無子雲於世者也 無已則自覽以吾目爲一子雲 自諷而以吾耳爲一子雲 自舞自蹈而以吾手足各爲一子雲고 하였다. 東谿集 卷7

[D-007]봉규() : 청장관전서에는 ‘’ 자가  자로 되어 있는데, 같은 글자이다.

[D-008]나이도 …… 비슷하다 : 한유의 사설(師說)에 나오는 말이다. 이 글에서 한유는 당시 사대부들이 사제(師弟)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저 사람과 저 사람은 나이가 서로 같고 도()도 서로 비슷하다.”는 이유로 비웃는 세태를 개탄하였다.

[D-009]소호(韶頀) : () 나라 탕() 임금 때의 궁중음악이라는 설도 있고, ()는 순() 임금 때의 궁중음악, ()는 탕 임금 때의 궁중음악이라는 설도 있다. 옛날 태평성대의 음악을 가리킨다.

[D-010]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 : 낙수는 지금의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하(洛河)를 말한다. 삼국 시대 위() 나라 조식(曹植)의 낙신부(洛神賦)에서 하수(河水)의 여신(女神)을 묘사하기를 경쾌한 모습이 마치 놀라서 날아오르는 기러기 같다.翩若驚鴻고 하였다.

[D-011]동정호(洞庭湖)의 낙엽 지는 소리 : 남북조 시대 북주(北周) 유신(庾信)의 애강남부(哀江南賦) 낙엽 지는 동정호를 떠난다.辭洞庭兮落木고 하였다. 이는 굴원(屈原)의 구가(九歌)  상부인(湘夫人)’ 동정호에 파도 일고 낙엽이 지네.洞庭波兮木葉下라고 한 구절에 전고(典故)를 둔 것이다.

[D-012]문자는 똑같으니 : 원문은 書軌攸同이다. 중용장구  28 장에 지금 천하에 수레는 궤도가 똑같고 서적은 문자가 똑같다.今天下車同軌 書同文고 하였다. 그러므로 원래는 천하가 통일되었다는 뜻이나, 여기서는 중국인과 조선인이 비록 언어는 다르나 같은 문자를 쓴다는 점에 치중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D-013]그가 …… 것은 : 원문은 惟其歡笑悲啼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필세설(筆洗說)

 

 

오래된 그릇을 팔려고 하나 3년 동안이나 팔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그릇의 재질은 투박스러운 돌이었다. 술잔이라고 보기에는 겉이 틀어지고 안으로 말려들었으며, 기름때가 끼어 광택을 가리고 있었다. 온 장안을 다 돌아다녀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다시 부귀한 집안을 다 찾아갔지만 값이 더욱 떨어져 수백에 이르고 말았다.

하루는 누군가가 이것을 가지고서 서군 여오(徐君汝五)에게 보였다. 그러자 여오가 말하기를,

 

이것은 필세(筆洗 붓 씻는 그릇)이다. 이 돌은 복주(福州) 수산(壽山)의 오화석갱(五花石坑)에서 나는 것인데, 옥에 버금가는 것으로 옥돌과도 같다.”

하며, 값의 고하를 따지지 아니하고 즉석에서 8000냥을 내주었다. 그러고는 때를 긁어내니, 예전에 투박스럽게 보였던 것은 바로 물결 모양의 무늬가 있고 쑥잎처럼 새파란 돌이었다. 비틀어지고 끝이 말려든 모양은 마치 말라서 그 잎이 또르르 말린 가을의 연꽃과 같았다. 그래서 마침내 장안의 이름난 그릇이 되었다.

여오는 말하기를,

 

천하의 물건치고 하나의 그릇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꼭 맞는 곳에 사용할 따름이다. 붓은 먹을 머금은 채 딴딴히 굳어지면 모지라지기 쉽기 때문에, 항상 그 먹을 씻어서 부드럽게 해 둔다. 그러므로 이 그릇이 필세가 된 것이다.”

하였다.

무릇 서화나 골동품에는 수장가가 있고 감상가가 있다. 감상하는 안목이 없으면서 한갓 수장만 하는 자는 돈은 많아도 단지 제 귀만을 믿는 자요, 감상은 잘하면서도 수장을 못 하는 자는 가난해도 제 눈만은 배신하지 않는 자이다. 우리나라에는 더러 수장가가 있기는 하지만, 서적은 건양(建陽)의 방각(坊刻)이고 서화는 금창(金閶 소주(蘇州))의 안본(贋本 위조품)뿐이다. 율피색(栗皮色) 화로를 곰팡이가 피었다고 여겨 긁어내려 하고, 장경지(藏經紙)를 더럽혀졌다고 여겨 씻어서 깨끗이 만들려고 한다. 조잡한 물건을 만나면 높은 값을 쳐주고, 진귀한 물건은 버리고 간직할 줄 모르니, 그 또한 슬픈 일일 따름이다.

신라의 선비들은 당 나라에 가서 국학(國學)에 들어갔으며, 고려의 선비들은 원() 나라에 유학하여 제과(制科)에 급제했으므로 안목이 트이고 흉금을 넓힐 수 있었으니, 그들은 감상학(鑑賞學)에 있어서도 아마 그 시대에 출중했을 터이다. 우리 왕조 이래로 3, 4백 년 동안에 풍속이 갈수록 촌스러워졌으니, 비록 해마다 북경을 내왕하였으나 부패한 약재나 저질의 비단 따위나 사올 뿐이었다. 우하(虞夏) · () · ()의 옛날 그릇이나 종요(鍾繇) · 왕희지(王羲之) · 고개지(顧愷之) · 오도자(吳道子)의 친필이 어찌 한 번이라도 압록강을 건너온 적이 있었으랴.

근세의 감상가로는 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를 일컫는다. 그러나 재사(才思 재기)가 없으니 완미(完美)하다고는 못 할 것이다. 대개 김씨는 감상학을 개창한 공이 있으나, 여오(汝五)는 꿰뚫어보는 식견이 있어 눈에 닿는 모든 사물의 진위를 판별해 내는 데다가, 재사까지 겸비하여 감상을 잘하는 자라 하겠다.

여오는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웠다. 문장을 잘 짓고 해서(楷書)로 소자(小字)를 잘 쓰며, 아울러 소미(小米)의 발묵법(潑墨法)에도 능숙하고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다. 봄가을로 틈나는 날에는 정원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그곳에서 향을 피우고 차를 음미하였다. 일찍이 집이 가난하여 수장하지 못하는 것을 못내 한탄했고, 또 시속의 무리들이 그로 인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할까 걱정하곤 하였다. 그 때문에 답답해하면서 내게 말하기를,

 

나더러 좋아하는 물건에 팔려 큰 뜻을 상실했다玩物喪志고 나무라는 자는 어찌 진정 나를 아는 자이겠는가. 무릇 감상이란 것은 바로 시경(詩經)의 가르침과 같네. 곡부(曲阜)의 신발을 보고서 어찌 감동하여 분발하지 않을 자가 있겠으며, 점대(漸臺)의 위두(威斗)를 보고서 어찌 반성하여 경계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하기에, 나는 그를 위로하기를,

 

감상이란 구품중정(九品中正)의 학문일세. 옛날 허소(許劭)는 인품이 좋고 나쁜 것을 탁한 경수(涇水)와 맑은 위수(渭水)처럼 분명히 판별했으나 당세에 허소를 알아주는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네.”

하였다.

지금 여오는 감상에 뛰어나서, 뭇사람들이 버려둔 가운데서 이 그릇을 능히 알아보았다. 아아, 그러나 여오를 알아주는 자는 그 누구이랴?

 

 

필세를 빌려서 자신의 문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다.

 

[D-001]수백 : 화폐 단위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당시의 물가로 미루어 보면 수백 문(), 즉 너덧 냥이 아닌가 한다. 뒤에 나오는 ‘8000’ 역시 8000,  80냥이 아닌가 한다.

[D-002]서군 여오(徐君汝五) : 서상수(徐常修 : 1735~1793), 여오는 그의 자의 하나이다. 호는 관재(觀齋) · 관헌(觀軒) 등이다. 서얼 출신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은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에 그쳤다.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 백탑(白塔) 서쪽의 관재(觀齋)와 도봉산 서쪽의 별장인 동장(東庄)을 소유하였으며, 이덕무에게도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D-003]복주(福州) 수산(壽山)의 오화석갱(五花石坑) : 복주는 중국의 복건성(福建省)에 속한 부(), 그 동북쪽에 있는 수산은 아름다운 옥돌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수산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오화석갱이 있는데, 돌이 다섯 가지 색을 띠어 그렇게 명명되었다고 한다.

[D-004]값의 …… 아니하고 : 원문은 不問値高下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5]건양(建陽)의 방각(坊刻) : 방각은 방본(坊本)과 같은 말로, 민간의 서점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인쇄한 조잡한 서적을 말한다. 송 나라 때 복건성 건양현에서 인쇄한 방각본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D-006]율피색(栗皮色) …… 한다 : () 나라 선덕(宣德) 연간에 강서성(江西省) 경덕진(景德鎭)의 관요(官窯)에서 만든 유명한 향로인 선덕로(宣德爐)의 빛깔은 밤색栗色, 가지 껍질색茄皮色, 팥배나무색棠梨色, 갈색(褐色), 장경지색(藏經紙色)의 다섯 등급으로 나누는데, 그중 장경지색을 최고로 친다고 한다. 장경지(藏經紙)는 밀납을 먹여 광택이 나는 짙은 황색(黃色)의 견지(繭紙)인데, 장경(藏經)이 많기로 유명한 절강성(浙江省) 금속사(金粟寺)의 장경이 이 종이에 쓰여졌기 때문에 장경지라 부른다.

[D-007]제과(制科) : 제거(制擧)라고도 하며, 황제가 임시로 조령(詔令)을 내려 실시하는 부정기적인 과거(科擧)를 말한다. 고려 말에 최해(崔瀣) · 안축(安軸) · 이곡(李穀) · 이색(李穡) 등이 제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D-008]우하(虞夏) : () 임금의 치세와 하() 나라 왕조를 함께 묶어서 부른 말이다.

[D-009]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 : 김광수(金光遂 : 1696~?), 상고당은 그의 호이다. 조선후기의 화가이자 서화고동(書畫古董) 감식가 및 수장가이다. 그의 자는 성중(成仲)이고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이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의 아들이다. 진사 급제 후 벼슬은 인제 군수를 지냈다. 연암집 7 ‘관재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觀齋所藏淸明上河圖跋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D-010]소미(小米)의 발묵법(潑墨法) : 소미는 북송 때의 유명한 서화가 미불(米芾)의 아들로서 그 역시 뛰어난 서화가였던 미우인(米友仁 : 1086~1165)을 가리킨다. 발묵법은 선을 사용하지 않고 먹을 뿌리듯이 하여 번져나간 먹 자국만으로 산수를 표현하는 수법을 말한다. 미불과 미우인 부자는 화면에 이른바 미점(米點)이라는 횡으로 길고 큰 먹점을 겹쳐 찍는 기법으로 안개 짙은 산수를 표현하는 독특한 화풍을 창시했는데, 이후 문인 화가들이 수묵 산수화를 그릴 때 이 기법을 즐겨 따랐다.

[D-011]시경(詩經)의 가르침 : 시경을 배우면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효과가 있음을 말한다. 주자(朱子) 시집전(詩集傳)의 서문에서, 시경의 시는 감정을 말로 표현한 것인데 감정에는 사()도 있고 정()도 있어 시에도 좋은 시가 있고 나쁜 시가 있으나, 좋은 시를 읽고서 선을 행하고 나쁜 시를 읽고서 악을 경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D-012]곡부(曲阜)의 신발 :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山東省) 곡부에는 후손들이 간직해 온 공자의 신발 등 유품들이 있었다고 한다. 동관한기(東觀漢記) 동평헌왕창(東平憲王蒼) () 나라 공씨(孔氏)들이 아직까지도 중니의 수레, 가마, (), 신발을 간직하고 있으니, 훌륭한 덕을 지녔던 사람은 그 영광이 멀리까지 미침을 밝힌 것이다.” 하였다.

[D-013]점대(漸臺)의 위두(威斗) : 점대는 중국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에 있는 대() 이름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건장궁(建章宮)을 짓고는 태액지(太液池) 안에 점대를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무려 20여 장()이었다. 漢書 卷25 郊祀志下 왕망(王莽)이 유현(劉玄)의 군사에게 쫓겨서 점대에 이르러 살해되었는데, 왕망은 쫓기는 와중에도 부명(符命)과 위두(威斗)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위두는 왕망이 위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만든 기물(器物), () 5()으로 만들었고 길이는 2 5촌이었으며, 모양이 북두칠성과 유사했다고 한다. 漢書 卷99 王莽傳

[D-014]구품중정(九品中正)의 학문 : 구품중정은 위진 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의 관리 선발제도로서, 각 고을에 중정관(中正官)을 두어 그 고을 인사들을 재능에 따라 9품으로 나누어 평가해서 조정에 천거하게 하였다. 여기서는 인재를 엄격히 품평하듯이 골동품과 서화를 품평하는 것도 전문 분야라는 뜻으로 썼다.

[D-015]허소(許劭) …… 판별했으나 : 허소는 후한 때 사람으로, 종형(從兄) 허정(許靖)과 함께 당세에 명성이 있었다. 특히 향리(鄕里)의 인물을 품평하기를 좋아해서 달마다 사람들을 품평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일러 월단평(月旦評)이라 했다 한다. 後漢書 卷68 許劭列傳 경수(涇水)는 위수(渭水)의 지류로 모두 섬서성에 있다. 경수가 맑고 위수가 탁하다는 설도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서얼 소통(疏通)을 청하는 의소(擬疏)

 

 

삼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하늘이 인재를 내린 것이 그토록 다르지 않사옵니다. 그러므로 전얼(顚蘖)과 변지(騈枝)도 고루고루 비와 이슬에 젖고, 썩은 그루터기 나무나 더러운 두엄에서도 영지(靈芝)가 많이 나며, 성인(聖人)이 태평의 치세로 이끄실 적에는 귀하고 천한 선비가 따로 없었습니다. 시경

 

문왕(文王)이 장수를 누리셨으니 어찌 인재를 육성하지 않았으리오.文王壽考 遐不作人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왕국이 안정되었으며, 크나큰 명성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아, 우리 왕조가 서얼의 벼슬길을 막은 지 300여 년이 되었으니, 폐단이 큰 정책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옛날을 상고해도 그러한 법이 없고, 예법과 형률을 살펴봐도 근거가 없습니다. 이는 건국 초기에 간사한 신하들이 기회를 틈타 감정을 푼 것이 대번에 중대한 제한 규정으로 되어 버렸으며, 후대에 요직에 있던 인사들이 공론을 핑계 대어 주장함으로써 명성이 높아지자 오류를 답습하여 하나의 습속을 이루었고, 세대가 차츰차츰 멀어지면서 구습을 따르고 개혁을 하지 못했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는 오로지 문벌만을 숭상하여 인재를 초야에 버려둔다는 탄식을 초래하였으며, 사가(私家)에서는 한갓 명분만을 엄히 하여 마침내 인륜을 무너뜨리는 단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지족(支族 먼 조상 때 갈라진 일족)에게서 양자를 입양하니 대개 임금을 속이는 죄를 범하는 것이요, 모계를 더 중시하는 셈이니 도리어 본종(本宗)을 높이는 도리를 경시하는 것입니다.

아아, 적자와 서자 사이에 비록 차등이 있다 해도 나라의 체통에는 이로울 것이 없으며, 구분과 한계가 너무 각박하여 가족간에 애정이 적어지는 것입니다. 무릇 자기 집안의 서얼이야 비천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온 세상에서 배척받을 이유는 없으며, 한 문중의 명분은 의당 엄히 해야겠지만 온 조정에서까지 논할 바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명분의 논의를 고수하다 보니 벼슬길을 막는 관례는 더욱 심해지고, 조종(祖宗)의 제도라 핑계 대다 보니 갑자기 혁신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까지 안일하게 세월만 보내면서 개혁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옛날에도 상고할 데가 없고 예법에도 근거가 없는데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고질이요 깊은 폐단이 되고 있기에, 정치하는 올바른 방법을 깊이 아는 선정(先正 선대의 유현(儒賢))과 명신(名臣)들은 모두 이를 급선무로 여기고, 공정한 도리를 확대하여 반드시 벼슬길을 터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경연(經筵)에서 아뢰고 차자(箚子)로써 논한 분들이 끊이지 않고 나왔던 것입니다.

역대 임금들께서는 공정한 원칙을 세워 통치의 법도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며, 벼슬자리에는 어진 사람만 임명하고 직무를 나누어 맡기는 데는 능력만을 고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두를 공정하게 대하였으니, 어찌 또 모계의 귀천(貴賤)을 가지고 차별을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조정에 임하여 널리 묻고, 그 처지를 애통해하며 불쌍히 여겨, 변통하여 벼슬길을 열어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세족(世族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의 권세가 막중하고 언론을 아래에서 좌우하는 까닭에, 명예로운 벼슬과 화려한 경력을 본래부터 자기네가 차지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여러 갈래로 갈림길이 생기고 권한이 쪼개질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똑같은 세족의 자손이라도 정밀한 저울로 눈금을 재듯이 따지니 정주(政注)를 한 번 거치고 나면 수치와 분노가 마구 몰려들고 지탄과 알력이 벌떼처럼 일어나는데, 하물며 서얼은 명분이 굳어지고 행동에 구애를 받아 세상에서 천대받은 지 오래이니, 대등하게 인정해 주려 하지 않는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진실로 제 가문만을 오로지 위하고 사욕을 달성하려는 편파적인 의도이지, 공공을 위하는 통치의 보편적 도리는 결코 아닙니다. ()이 그 잘못됨을 남김없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무릇 서얼과 적자(嫡子)는 진실로 차등이 있지만, 그 가문을 따져 보면 그들 역시 선비 집안입니다. 저들이 진실로 국가에 대하여 무슨 잘못이 있다고, 벼슬길을 막고 폐기하여 저들로 하여금 벼슬아치의 대열에 끼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군자가 없으면 야인(野人)을 다스릴 수 없고, 야인이 없으면 군자를 먹여살릴 수 없다.”

하였으니, 대범 군자와 야인은 지위를 들어 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명덕(明德)을 지녔으면서도 비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천거하라고 한 것明明揚側陋은 요() 임금이 관리를 임용한 준칙이요, ‘어진 이를 기용하는 데 출신을 따지지 않은 것立賢無方은 탕() 임금이 정치적 안정을 구한 방도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 · () · () 삼대(三代)의 시대에도 이미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있었지만, 인재를 천거할 때에는 본시 귀천의 차별을 두지 않았고 어떤 부류인지도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왕조의 이른바 서얼은 대대로 벼슬이 끊어지지 않은 혁혁한 문벌인데, 어찌 모계가 비천하다 하여 고귀한 본종(本宗)을 싸잡아 무시해 버릴 수 있겠습니까.

() 나라와 당() 나라 이래로 차츰 벌열을 숭상하였으나, 그런데도 강좌(江左)의 사대부들은 도간(陶侃)을 배척하지 않았고 왕씨(王氏)와 사씨(謝氏) 같은 명문 귀족들도 주의(周顗)를 동류로 끼워 주었으며, 소정(蘇頲)은 바로 소괴(蘇瓌)의 얼자(孼子)이지만 지위는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이소(李愬)는 바로 이성(李晟)의 얼자로되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르렀으며,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은 송 나라의 어진 정승이 되었고, 호인(胡寅) · 진관(陳瓘) · 추호(鄒浩)는 당세의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서얼이라 하여 벼슬길을 막지 않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진실로 남의 문벌을 따질 적에는 단지 그 부계만을 중시하고 그 모계는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계를 중시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본종을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계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부계가 몹시 변변찮을 경우, 현달한 문벌이라고 칭송이 자자할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고려 시대로 말하더라도 정문배(鄭文培)는 예부 상서(禮部尙書)가 되었고, 이세황(李世璜)은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었고, 권중화(權仲和)는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도 도평의사(都評議使)가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왕조의 법으로 따진다면 도간이나 주의 같은 어진 이도 장차 사대부에 끼지 못하고, 소정이나 이소 같은 인재로도 장차 장수와 정승이 될 수 없고, 한기 · 범중엄 · 호인 · 진관 · 추호 같은 사람들도 모두 장차 억눌리고 버림받아, 기껏해야 문관으로는 교서관(校書館), 음직(蔭職)으로는 전옥서(典獄署)에나 자리를 얻어, 지위는 유품(流品 잡다한 하급 관직)을 벗어나지 못하고 녹봉은 승두(升斗 소량의 쌀)에 지나지 않을 터이니, 공훈과 업적, 지조와 절개가 장차 당세에 혁혁히 드러나고 먼 후세까지 아름다운 명성을 남길 수가 없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말씀드린 옛날을 상고해도 그러한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서(經書)에 이르기를,

 

서자는 장자(長子)의 상() 3년의 복()을 입을 수 없다.”

하였고, 정현(鄭玄)의 주()에 이르기를,

 

서자란 아비의 뒤를 잇는 자의 동생이다. ()라 말한 것은 구별하여 거리를 두자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무릇 서자는 비록 적자와 어머니가 같더라도 끊은 듯이 구별하여 거리를 두는 것이 이와 같이 엄했는데, 천한 첩자(妾子)의 경우는 서자보다 더욱 신분이 낮으나 다시 서자와 구별함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란 차례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통(宗統)은 근본을 둘로 나누지 아니하고 차등은 거듭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부모에게 비자(婢子) 및 서자와 서손(庶孫)이 있어 이들을 몹시 사랑했다면, 비록 부모가 돌아가셨을지라도 종신토록 이들을 공경하여 변함이 없어야 한다.”

하였고, 진호(陳澔)의 주에는,

 

비자(婢子)는 천한 자의 소생이다.”

하였습니다. 무릇 부모가 사랑했던 이라면 첩의 자식이라도 오히려 끌어들여 중히 여기고, 감히 소홀히 하거나 도외시하지 못했던 것은 또한 근본을 중히 여기고 종통을 높이는 까닭이었습니다. 회전(會典)에 이르기를,

 

무릇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함에 있어 적자(嫡子)나 적손(嫡孫)이 없을 경우에는 서장자(庶長子)가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한다.”

하였으니, 서장자란 첩자(妾子)를 이른 것입니다.

무릇 예란 헷갈려서 의혹스러운 경우를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칭을 바로잡고 신분을 정하는 것이니, 비록 어머니가 같은 적제(嫡弟)라도 오히려 구별하여 거리를 두었던 것입니다. 무릇 예란 남을 후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지(本支)를 중히 여기는 것이니, 천첩의 자식이라도 오히려 끌어안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회전에서 아비의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하는 데 적서(嫡庶)로써 구애를 삼지 않은 까닭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주관(周官 주례(周禮))은 주공(周公)이 정한 관직 제도를 기록한 책이며, 한서(漢書)의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는 모든 관직을 구분해 놓은 것인데, 서얼의 벼슬길을 막는 문구는 대충 보아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말씀드린, ‘예법과 형률을 살펴봐도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듣자온대 예로부터 전해지기를, 서얼의 벼슬길을 막은 데는 대개 유래가 있다고 합니다. 건국 초기의 죄상(罪相) 정도전(鄭道傳)은 서얼의 자손인데,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이 정도전이 총애하던 종에게 욕을 본 일이 있어 그 원수를 갚을 길만 생각하고 있다가, 정도전이 패망하게 되자 서선이 마침내 명분의 논의를 견강부회하여 죽은 뒤에나마 한 번 욕을 본 데 대한 감정풀이를 한 것이었으나, 제 말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그 법이 반드시 행해지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야흐로 이때 정도전이 죄를 지어 막 처형당한 때다 보니, 그 말이 먹혀들기 쉬웠고 그 법이 성립되기 쉬웠던 것입니다. 찬성(贊成) 강희맹(姜希孟), 안위(安瑋) 등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처음 만들면서 조문을 미처 다듬을 겨를이 없어, 서얼에 대한 과거 금지와 관직 진출 금지의 주장이 조문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하면서 유자광(柳子光)에 대한 사림파(士林派)의 원망이 잔뜩 쌓였는데, 분풀이할 곳이 없자 서얼의 벼슬길을 막아야 한다는 논의가 더욱 엄중하고 심각해진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분풀이하게 만든 상황이 참으로 또한 슬프다 하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자고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찌 유자광 같은 무리에게서만 나왔겠습니까. 불행히도 한 번 서얼 가운데서 나온 것인데, 유자광 하나로 인해 서얼의 벼슬길을 모조리 막아 버리고 말았으니, 만약에 불행하게도 양반 자손 중에서 난신적자가 뒤이어 나왔을 경우 또 장차 무슨 법으로 처리하시겠습니까?

아아, 유학과 문장으로 추앙받을 만하고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들이 계속 배출되었는데도, 한 번 전락(轉落)하여 명분의 논의에 제한을 받더니, 거듭 전락하여 문벌 숭상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송익필(宋翼弼) · 이중호(李仲虎) · 김근공(金謹恭)의 도학(道學), 박지화(朴枝華) · 이대순(李大純) · 조신(曺伸)의 행의(行誼 덕행)와 어무적(魚無迹) · 어숙권(魚叔權) · 양사언(楊士彦) · 이달(李達) · 신희계(辛喜季) · 양대박(梁大樸) · 박호(朴淲)의 문장과, 유조인(柳祖認) · 최명룡(崔命龍) · 유시번(柳時蕃)의 재주는 위로 임금의 정책을 보필할 수 있고 아래로 한 시대의 표준이 될 만한데도 끝내 오두막집에서 늙어 죽었으며, 때로는 간혹 하찮은 녹을 받은 사람도 있었으나 보잘것없이 미관말직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비록 분수를 지키고 처지대로 살면서 액운을 편히 여기며 근심하지 않더라도, 성왕(聖王)이 관직을 마련하고 직책을 나누어 어진 이를 예우하고 능력 있는 이를 임용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이산겸(李山謙), 홍계남(洪季男) 같은 경우는 충의로 떨치고 일어나 의병을 규합하여 왜적을 쳐부쉈으며, 권정길(權井吉)은 피를 토하며 군사들에게 훈시하고 남한산성에 지원하러 들어갔으니, 그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뜻은 오히려 뭇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떨치고 일어섬이 저렇듯 우뚝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시대가 평화롭고 세상이 편안해지고 나자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잊어 그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옛사람의 이른바 쓸모 있는 자들은 녹을 주어 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이에 대하여 개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근래의 일로 보더라도, 홍림(洪霖)은 일개 잔약한 서얼로서 늘그막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막료(幕僚)가 되어 처량하게도 호구지책을 삼았는데, 갑자기 국난에 목숨을 바쳐 늠름히 열사(烈士)의 기풍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표창과 증직의 은전을 아끼지 않아 비록 비상한 관직을 추증(追贈)하기는 했으나, 그것보다는 그가 살아서 백부(百夫)의 장()이 되어 우뚝이 성에 임했더라면, 변방을 굳건히 하고 환란을 막아냄이 어찌 막부(幕府)에서 한 번 죽는 것뿐이었겠습니까.

아아, 벼슬길을 막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배척하고 관계를 끊어 버려, 본디 가지고 있는 윤상(倫常 오륜)을 스스로 일반인들 앞에 내세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은애(恩愛)는 부자 사이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의리는 군신 관계보다 큰 것이 없는데 임금에게 가까이 할 길이 없으며, 늙은이가 말석에 앉게 되어 학교에는 장유(長幼)의 차서가 없게 되고, 더불어 동류가 되기를 부끄러워하는 바람에 향당(鄕黨)에서는 붕우(朋友)의 도의가 없어졌습니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을 것인저!”

하였으니, 아들은 아비를 아비로 대하고, 아비는 아들을 아들로 대하며, 형은 형 노릇 하고 아우는 아우 노릇 하는 것이 바로 명분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륜상의 존칭으로는 부형(父兄)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지금의 서얼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들이 아비를, 아우가 형을 오히려 감히 직접 가리켜 제대로 부르지 못하니, 저절로 종이 그 상전을 대하는 것과 같아졌습니다. 이른바 명분이란 적()과 서()를 이름인데, 어찌 서로 부르는 때에 아비라거나 형이라 하지 못하고, 자신을 낮추어 천한 노복들과 같이 해야만 명분을 엄히 하고 적서를 구분한다 하겠습니까.

지금의 서얼들은 낭관(郞官)도 오히려 하지 못하는 처지인데 시종신(侍從臣)을 어찌 감히 바라겠습니까. 아무리 충성을 바칠 마음을 지녔을지라도 임금을 보필하는 직책은 맡을 수 없고, 아무리 국가를 경영할 재주를 품었을지라도 포부를 펼 곳이 없습니다. 인의(引儀)로서 여창(臚唱)할 때에는 잠깐 조신(朝臣)의 대열에 순서대로 서지만 끝내 노복이나 다름 없으며, 해당 관서의 윤대(輪對)를 통해서 간혹 임금을 가까이에서 뵙기도 하지만 서먹서먹함을 면치 못합니다. 그리하여 관직에 나아가도 감히 대부(大夫)가 하는 일은 하지 못하고, 물러나면 차마 평민들의 생업에 종사할 수도 없으니, 이른바 나라의 고신(孤臣)이요 집안의 얼자로 마음에 병이 들어 마음가짐이 늘 조심스러운 자들입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태학(太學)에 들어가면 치() 순서로써 한다.”

하였으니, ‘치 순서로써 한다는 것은 나이를 중시한다는 것이고, ()에 이르기를,

 

잔치 자리에서 모()로써 구별하는 것은 연치(年齒)의 순서를 정하자는 것이다.”

하였으니, ‘()’란 머리털의 흑백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의 서얼들은 태학(太學 성균관)에 들어갈 경우 나이 대접을 받지 못하여, 황발(黃髮)과 태배(鮐背)의 노인이 아래에 앉고, 겨우 관례를 마친 자들이 도리어 윗자리에 앉습니다. 무릇 태학은 인륜을 밝히자고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자의 원자(元子 맏아들)와 중자(衆子 나머지 아들들)로부터 제후의 세자(世子)까지도 오히려 태학에서 나이 순서를 지키는 것은 천하에 공손함을 보이기 위함이며, 천자가 태학을 순시할 적에 조언을 구하고 음식을 대접하는 예의가 있었으니 이는 효도를 천하에 넓히기 위함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서얼들이 태학에서 나이에 따른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옛날 어진 임금의 효제(孝悌)를 넓히는 도리가 아닙니다.

()에 이르기를,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

하였고, 맹자는 말하기를,

 

벗이란 그의 덕을 벗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 많다고 으스대지 않고 신분이 높다고 으스대지 않고 형제를 믿고 으스대지 않고서 벗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귀천이 비록 다를망정 덕이 있으면 스승이 될 수 있고 나이가 같지 않더라도 인()을 도울 경우에는 벗이 될 수 있다는 말인데, 더구나 서얼은 본디 모두 양반의 자제들입니다. 그들이 아름다운 재주나 현명함과 능력이 없다면 그만이겠으나, 만일 그들이 진실하고 곧고 들은 것이 많아 재주와 덕이 나보다 낫다면 또한 어찌 서얼이라 해서 그들과 벗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겠습니까.

그런데도 서얼은 양반과 서로 어울려도 벗은 할 수 없고, 서로 친해도 나이 대접을 받을 수 없으며, 충고하거나 책선(責善)하는 도리도 없고, 탁마(琢磨)하고 절시(切偲)하는 의리도 끊겼으며, 말을 하는 때에는 예절이 너무 까다롭고, 만나서 예의를 차리는 즈음에도 원망과 비방이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서얼들의 경우 오륜(五倫) 가운데 끊어지지 않고 간신히 남아 있는 것은 부부유별(夫婦有別) 한 가지뿐입니다.

아아, 재주 있고 어진 이가 버려져 있어도 근심하지 않고 인륜이 무너져도 구제하지 않으면서도,

 

서얼 중에는 재주 있고 어진 이가 없다.”

하고, 또한

 

이렇게 해야만 명분이 바로잡힌다.”

하니, 이것이 어찌 이치라 하겠습니까. 무릇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이는 것은 할아비를 계승하여 중책(重責)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옛날에 석태중(石鮐仲)이 적자가 없고 서자만 여섯 명이 있어, 뒤를 이을 자를 점쳤을 때 기자(祁子)에게 길조가 나타났으니, 이는 어진 이를 가린 것이었습니다. 당 나라의 법률에,

 

무릇 적자를 세움에 있어 법을 어긴 자는 1년의 도형(徒刑)에 처한다.”

고 되어 있고, 이에 대하여 뜻을 풀이한 자가 말하기를,

 

적처(嫡妻)의 장자가 적자가 되는데, 부인의 나이가 50이 넘어서 다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하게 될 경우에는 서자를 세워 적자로 삼기를 허락하되, 서자 중의 맏이를 세우지 않으면 형률이 또한 같다.”

하였으니, 이는 근본이 어지러워짐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대명률(大明律)에도,

 

무릇 적자를 세움에 있어 법을 어긴 자는 장()으로 다스린다. 적처의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자식이 없는 자는 서장자(庶長子)를 세울 수 있게 하고, 서자 중의 장자를 세우지 않는 자는 죄가 같다.”

하였으며, 경국대전에는,

 

적처와 첩에 모두 아들이 없어야만 같은 종족의 지자(支子 적장자가 아닌 아들)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는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관에서 작성한 문서와 양가(兩家)에서 작성한 문서에 명백한 증거와 근거가 있은 후에 마침내 임금에게 아뢸 수 있는 것은, 조명(造命)을 신중히 여긴 까닭입니다.

세간의 사대부들이 제가 보고 들은 것에만 익숙하다 보니 대다수가 잘못된 규례를 답습하여, 본처에게 아들이 없으면 아무리 첩들의 자식이 많더라도 도리어 가문을 위한 개인적 타산에서 정을 끊고 사랑을 억누르고서, 임금에게 아뢰는 글을 엉터리로 지어 지족(支族) 중에서 양자를 들여오되 촌수가 멀고 가까운 것도 가리지 않는 실정입니다.

, 아비가 전하고 아들이 이어받으니 혈맥(血脈)이 계승되고, 조부의 제사를 손자가 받드니 정기(精氣)가 서로 유사하여 감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갓 적서의 구분에 얽매여, 혹은 촌수가 이미 멀어진 후손을 멀리서 데려다가 조상의 혼령을 받드는 경우도 있으니, 이는 바로 옛사람이 말한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술병을 들고 술을 따라 강신(降神)하게 한다 한들 무슨 황홀(怳惚)이 있겠으며, 신령의 향취가 진동하여 애통한 마음이 생긴다 한들 어찌 정기(精氣)를 교접(交接)할 수 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고 두 분을 그리워한다.”

했으니, ‘두 분이란 부모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을 극진히 하면 마치 존재하시는 듯하고, 정성을 극진히 하면 마치 나타나신 듯하다.” 한 것은 군자가 제사 지내는 법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까운 사람을 두고 먼 데서 구하여 그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어찌 신령이 아련히 나타나 존재하시는 듯할 턱이 있겠습니까. 천리(天理)를 거스르고 인정에 위배되며, 예법으로 따지면 조상을 멀리하는 것이요, 법률로 따지면 임금을 속이는 것이니, 신은 일찍이 이를 통한하여 마지않았습니다.

무릇 명분의 논의가 승세하고 습속이 변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한 집안 안에서도 구별하고 제한하는 법이 거의 남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심지어는 부형(父兄)조차 그 자제(子弟)를 노예처럼 부리고, 종족들은 친척으로 대하기를 부끄러워하여, 족보에서 빼 버리기도 하고 항렬 이름자를 달리하기도 합니다. 이는 단지 외가쪽에만 치중하느라 도리어 본종(本宗)을 가벼이 여기는 일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륜상으로 너무나도 각박하고 몰인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는 조정에 건의하기를,

 

우리 왕조는 인물이 중국에 비하여 적은데, 또 적서를 분별하는 법마저 있습니다. 무릇 신하로서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이 어찌 적자냐 서자냐에 따라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인재를 뽑아 쓰는 길이 너무도 편협하니 신은 그윽이 통탄하는 바입니다. 청하건대 서얼 중에서도 인재를 가려서 등용하되, 직위가 높아진 뒤에 혹 명분을 어지럽히는 죄를 지을 경우에는 엄격히 법률을 적용하소서.”

하였습니다.

선조(宣祖) 때에 미쳐 신분(申濆)  1600명이 소장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자 임금께서 하교하기를,

 

해바라기가 태양을 따라 도는 것은 곁가지라도 다를 바가 없다. 신하로서 충성하고자 하는 뜻이 어찌 적자에게만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선정신 이이(李珥)가 제일 먼저 서얼을 통용할 것을 건의하여 비로소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고, 선정신 성혼(成渾)과 선정신 조헌(趙憲)이 연달아 봉사(封事 밀봉한 상소)를 올려 서얼을 청요직(淸要職)에도 통용할 것을 각기 청하였습니다.

인조 때는 고()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이 부제학으로서 홍문관의 동료 심지원(沈之源) · 김남중(金南重) · 이성신(李省身)과 더불어, 의견을 구하는 성지(聖旨)에 호응하여 연명(聯名)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는데 그 내용이 몹시 절실하였습니다. 또한 고 상신 장유(張維)도 소를 올려 그 일에 대해 논하니, 임금께서는 조정에서 논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고 상신 김상용(金尙容)이 이조 판서로서 회계(回啓)하기를,

 

하늘이 인재를 낸 것은 적자든 서자든 차이가 없는바, 서얼 금고법은 고금의 역사에 없는 것입니다. 옥당(玉堂 홍문관)의 차자(箚子)를 통해서 여론을 알 수 있습니다. 묵은 폐단을 깨끗이 개혁하고자 하여 성지에 호응해 간절히 아뢰었으니,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의견을 수합하게 한 뒤 정탈(定奪 채택)하소서.”

하여, 사안이 비변사로 내려졌습니다. 고 상신 이원익(李元翼) · 윤방(尹昉) 등이 의견을 올리기를,

 

서얼을 박대하는 것은 천하 만고에 없는 법이니, 유신(儒臣 홍문관 관원들)이 아뢴 차자는 대단히 식견이 있습니다.”

하였고, 고 상신 오윤겸(吳允謙)은 의견을 올리기를,

 

서얼의 벼슬길을 막는 것은 고금 천하에 없는 법이니, 조정에서는 어진 이를 등용하고 인재를 거두어 쓸 따름입니다. 직위가 높아진 후에 명분을 문란시킬 경우에는 국법이 본디 엄중하니 염려할 바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호조 판서 심열(沈悅), 순흥군(順興君) 김경징(金慶徵), 공조 판서 정립(鄭岦), 판결사(判決事) 심집(沈諿), 동지중추부사 정두원(鄭斗源), 호군(護軍) 권첩(權怗)은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고, 도승지 정온(鄭蘊)도 상소하여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은 일찍이 의소(擬疏)를 지어 정도전도 오히려 대제학이 되었던 사실을 끌어대면서, 대개 서얼의 벼슬길을 제한하는 법은 중세(中世)에 나온 것이므로 모두 벼슬길을 열어주기를 청하였으니, 이 상소를 끝내 올리지는 못했으나 우암집(尤庵集)에 실려 있습니다. 또 선정신 박세채(朴世采)는 아뢰기를,

 

서얼 중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기재(奇才)가 있을지라도 등용될 길이 없으니, 크게 변통하기를 청합니다. 성상께서는 유행하는 풍속에 구애되지도 마시고 상규(常規)에 얽매이지도 마시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이치를 자각하시고 결단하여 시행하소서.”

하였습니다. () 지돈녕부사 신() 김수홍(金壽弘)은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으나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했고, () 판서 이무(李袤)는 대사헌으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으나, 도승지 신() 김휘(金徽)가 물리쳐서 상소가 임금께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 뒤 고 상신 최석정(崔錫鼎)이 이조 판서로서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논의한 지 오래였는데도 시행되지 못했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 오직 가문만을 위하고 제 이익을 이루려는 계획이 깊어질수록 명분의 논의를 더욱 굳게 지키고, 벼슬에 등용하거나 벼슬을 막는 권한이 커지자 도리어 조종(祖宗)의 법을 핑계 대어, 인정을 억누르고 은애(恩愛)를 저버림으로써 본종을 중히 여기는 것을 멸시하고, 친한 사람을 버리고 소원한 사람을 취함으로써 고의로 임금을 속입니다. 잘못을 답습하는 것이 습속을 이루었는데도 인륜을 무너뜨리는 것인 줄 모르고, 정밀한 저울로 달아 눈금을 재듯이 문벌을 따지면서 인재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도 걱정 하지 않습니다.

명분의 주장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남김없이 변론했으니, 청컨대 옛 제도를 혁신하는 논의에 대해서 다시 남김없이 말씀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무릇 법이란 오래가면 폐단이 생기게 마련이고, 일이란 막히면 통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준수해야 할 때에 준수하는 것이 바로 계술(繼述)이거니와, 변통해야 할 때 변통하는 것도 역시 계술이니, 굳게 지키거나 혁신하는 것을 오직 때에 맞도록 한다면 그 의의는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이 뭇 백성을 낳으시니 너의 극()이 아님이 없다.”

하였고, 서경 대우모(大禹謀)에 이르기를,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그 중()을 잡으리라.”

하였습니다. 무릇 이란 이치의 극진함이요, ‘이란 의리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서경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치우침도 없고 기울어짐도 없으면 왕도(王道)가 평탄하리라.”

하였으니, 이를 두고 이름입니다.

더구나 서얼 금고법은 옛날을 상고해 봐도 그러한 법이 없고, 예법과 형률을 뒤져봐도 근거가 없습니다. 처음에 한 사람의 감정 풀이에서 나온 것일 뿐 본시 건국 당시 정한 제도가 아니었으며, 100년이 지난 뒤에 선조(宣祖)께서 비로소 과거에 참여하는 길을 터 주었고, 인조(仁祖) 때 미쳐 또 삼조(三曹)의 관직을 허락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면 역대 임금들께서 혁신하고 변통하려 한 성의(聖意)를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아아, 서얼로 태어나면 세상의 큰 치욕이 되어 버리니, 현요직(顯要職 지위가 높고 중요한 벼슬)을 금지하여 조정과 멀어지고, 명칭을 제대로 가리켜 부르지 못하여 가정에서도 핍박을 받습니다. 학교에 가도 나이 대접을 받지 못하고 고향 마을에서는 친구마저 끊어져서, 처지가 위태롭고 신세가 고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때문에 큰 부담을 진 듯이 전전긍긍하면 사람들은 천히 여기니, 궁하여도 귀의할 곳 없어 몸 둘 바를 모릅니다. 혹은 자취를 감추어 조용히 지내고자 무리를 떠나 뜻을 높이 가지면 교만하다 이르며, 혹은 어깨를 움츠리고 가련한 태도를 취하며 무릎을 꿇고 구차히 비위를 맞추면 비루하고 간사하다 합니다.

, 하늘이 인재를 내린 것이 그토록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만 배양 방법이 다르고 진로가 달라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맹자는 이르기를,

 

만약 제대로 배양하면 성장하지 않는 생물이 없고, 만약 제대로 배양하지 않으면 소멸하지 않는 생물이 없다.”

하였으니, 다만 배양하여 성숙시키지 않고서는 어찌 그들 중에 인재가 없다고 질책하겠습니까?

혹은 적전(嫡傳 적자의 지위)을 이어받더라도 서얼이란 이름이 삭제되지 않고, 아무리 세대가 멀어져도 영원히 천속(賤屬)이 되는 것이 실로 노비의 율()과 같습니다. 그들의 친족이 번성하여 거의 나라의 반에 이르렀으나, 귀의할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항산(恒産 생업)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누렇게 야윈 얼굴에 삐쩍 마른 목으로 무기력한 채 피폐하게 살아가고, 가난이 뼈에 사무치되 떨치고 일어날 길이 없습니다.

아아, 옛날의 이윤(伊尹)은 백성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치 자기가 밀어서 웅덩이 속에 집어넣은 것같이 여겼는데, 지금 서얼로서 제자리를 잃고 고생하는 자가 어찌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억눌려 지내온 지 이미 오래라서 울분이 갈수록 쌓였으니, 천지의 화기(和氣)를 손상하여 재해를 부른 것이 반드시 이 때문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을 본받아 민물(民物)을 다스림에 성스러운 업적이 우뚝하고 빛나시니, 온 나라의 생명치고 제자리를 얻어 각기 그 삶을 즐기고 그 생업에 편안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묻혀 있고 버려져 있던 자들을 진작시키고 기용하여 능히 탕평(蕩平)의 정책을 확대하시고, 단점을 고쳐 주고 결점을 덮어 주어 모두 임금의 교화에 감싸이게 하셨습니다. 묵은 폐단과 미비된 법들을 모조리 바로잡으시면서도, 유독 서얼을 통용하는 법에 있어서는 아직 뚜렷한 정책이 서지 못했습니다.

, 지금 신의 이 말씀은 어리석은 신 한 사람의 개인적 발언이 아니라 바로 온 나라 식자들의 공언(公言)이며, 현재의 온 나라 공언일 뿐만 아니라 바로 역대 임금들 이래로 선정(先正)과 명신(名臣)들이 간절히 잊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중 다른 의견을 제시한 자들에 대해서도 신이 이미 낱낱이 거명하여 아뢰었는데, 대개 학식이 천박하고 도량이 좁아서 제가 보고 들은 것만을 굳게 지키고 한갓 유행하는 풍속만을 따르는 자들이니,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명분을 엄히 해야 한다는 것과 혁신하기가 어렵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 세상에도 편들기를 주장하고 상식과 어긋난 주장 펴기를 좋아하는 이런 무리들이 반드시 없다고는 못 하겠는데, 이들은 모두 명신 정온(鄭蘊)의 상소 하나만을 끌어와 구실 삼고 있습니다. 무릇 정온의 순수한 충성과 큰 절개야말로 일월(日月)과 함께 빛을 다툴 만한즉, 신은 감히 이 상소가 무엇에 격발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개 그 요지는 역시 명분과 국가 제도의 두 가지 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 먼 시골 지방의 사람은 그의 내력을 모르더라도 문반으로는 사헌부와 사간원에 통용될 수 있고 무반으로는 병사(兵使) · 수사(水使)를 지낼 수 있는데, 그의 문벌을 묻지 않아 아무런 구애될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서얼들은 가깝게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다 공경대부(公卿大夫)이고 멀리로는 저명한 유학자와 어진 재상이 그 조상이니, 먼 시골 지방 사람에게 비하면 그의 내력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벼슬길을 막는 법은 죄에 연루된 자보다 심하고 차등하는 명분은 종보다 엄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지금 서얼들 중에 누가 어질어 쓸 만하고 누가 재간이 있어 발탁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정이 백성들에게 차별없이 베푸는 은혜를 하늘이 덕을 베풀 듯이 하시고, 천지와 같은 덕화를 만물에게 빈틈없이 미치시어, 단점을 고치고 장점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이미 무너진 인륜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 성숙시키고 배양함으로써 오래 버려 두었던 인재를 다시 거두어들이며, 양자 세우는 법을 경국대전에 위배되지 않게 하고 본종을 높이는 도리를 모조리 고례(古禮)로 돌아가게 하며, 가정에서는 부자간의 호칭을 바로잡고 학교에서는 나이에 따른 질서를 세워서, 300년 동안이나 버려졌던 뒤에 다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한다면, 그들 모두가 스스로 새 출발 할 것을 생각하여 명예를 지키고 품행을 닦고자 노력하며, 충성을 바치고자 하고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여 나라를 위해 죽기를 다투기에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중대한 왕정(王政) 가운데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터이니, 위대하신 성인(聖人 임금)이 장수를 누리면서 인재를 육성하시는 공적 역시 이 일을 버려 두고 어디에서 찾으시겠습니까.

 

 

[C-001]서얼 …… 의소(擬疏) : 원문은 擬請疏通疏로 되어 있으나,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擬請疏通庶孼疏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소통(疏通)’은 곧 허통(許通)으로, 천인(賤人)이나 서얼에게 벼슬길을 터주는 조치를 말한다. ‘의소(擬疏)’는 상소의 초고(草稿)를 말하는데, 대개 기초(起草)만 해두고 실제로 올리지는 않은 상소를 뜻한다. 이 글은 누락된 글자가 많아 이본들을 참작하여 보충 번역하였다.

[D-001]삼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 원문은 云云으로 되어 있으나,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伏以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2]하늘이 …… 않사옵니다 : 맹자 고자 상(告子上) 풍년에는 자제들이 많이 느긋해지고 흉년에는 자제들이 많이 거칠어지는데, 하늘이 인재를 내린 것이 그토록 다른 것이 아니라非天之降才爾殊也, 그들의 마음을 빠져들게 한 원인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D-003]전얼(顚蘖)과 변지(騈枝) : 전얼은 쓰러진 나무에 난 싹을 말한다. 서경 반경 상(盤庚上)에서 若顚木之由蘖을 인용한 것이다. 변지는 변무 지지(騈拇枝指)의 줄임말이다. 변무는 엄지발가락이 검지발가락과 붙어 하나가 된 것을 가리키고, 지지는 엄지손가락 곁에 작은 손가락 하나가 더 생겨 육손이가 된 것을 가리키는데, 모두 쓸모없는 물건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莊子 騈拇 여기서는 한데 붙은 기형적인 나뭇가지라는 뜻으로 쓰였다.

[D-004]성인(聖人) : 성왕(聖王)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5]문왕(文王) …… 않았으리오 : 시경 대아(大雅) 역복(棫樸)에 나온다. 원시(原詩)에는 주왕(周王)’으로 되어 있는 것을 연암은 문왕으로 고쳐 인용하였다. 원시에 따라 文王 周王으로 고친 이본도 있는데 주왕은 곧 문왕을 말한 것이다. 이 시는 주 나라 문왕이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한 것을 예찬한 시이다.

[D-006]인재를 …… 초래하였으며 : 원문은 □□遺才之歎인데, 여러 이본에 致有遺才之歎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07]사가(私家)에서는 …… 마침내 : 원문은 私家□□□인데, 여러 이본에 私家徒嚴名分 遂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08]임금을 …… 것이요 : 조선 시대에 사대부가에서 후사가 없어 양자를 두고자 하는 경우에는, 양가(兩家)가 계후(繼後)하는 데 동의한 뒤 계후를 청원하는 소지(所志)를 작성하여 예조에 올리고, 예조에서는 양가와 관계자로부터 사실을 확인하는 진술서를 받은 다음, 이를 왕에게 보고하여 왕의 허락을 받은 뒤 예조로부터 양자의 허가증명서인 예사(禮斜)를 발급받아야 했다. 단 본처와 첩에게서 모두 자식을 얻지 못했을 경우에 한하여 계후를 허락했으므로, 서자가 있는 사실을 숨기고 계후를 청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D-009]적자와 …… 해도 : 원문은 等威인데, 여러 이본에 等威雖殊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0]공정하게 대하였으니 : 원문은 인데, 여러 이본에 均視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1]어찌 …… 했겠습니까 : 원문에는 豈復差於□□□□인데, 이본에 豈復差別於母族之貴賤哉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2]언론을 아래에서 좌우 : 이조의 정랑과 좌랑은 하급 관원임에도 불구하고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과 같은 청요직(淸要職)에 대한 후보 제청권과 자신의 후임을 추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조정의 언론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영조 17(1741) 한림(翰林)에 대해 회천(回薦)하던 규례를 혁파하면서, 아울러 이조의 정랑과 좌랑의 그와 같은 권한들도 혁파되었다. 연암집 3 ‘조부께서 손수 쓰신 한림 추천서에 대한 기록王考手書翰林薦記 참조.

[D-013]정주(政注) : 관직의 후보자를 복수로 추천하여 올리는 일을 말한다.

[D-014] …… 의도이지 : 원문은 專門濟私之□□인데, 여러 이본에 專門濟私之偏意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5]저들이 …… 있다고 : 원문은 固何負於國家인데,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6]저들로 …… 말입니까 : 원문은 □□不得齒衿紳之列哉인데, 몇몇 이본에는 使不得齒衿紳之列哉,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使之不得齒衿紳之列哉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원문 중의 금신(衿紳)’은 원래 유자(儒者)의 복장을 뜻하며, 나아가 선비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진신(搢紳), 즉 벼슬아치로 번역해야 합당할 듯하다.

[D-017]군자가 …… 없다 : 맹자 등문공 상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군자는 치자(治者) 계급을 뜻하고, 야인은 소인(小人) 즉 일반 백성을 뜻한다.

[D-018]그렇지만 : 원문은 인데, 여러 이본에는 然而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9]명덕(明德) ……  : 서경 요전(堯典)에서 요 임금이 신하들에게 제위(帝位)를 선양할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면서 한 말이다. 이 말에 대한 해석은 상서정의(尙書正義)를 따랐다.

[D-020]어진 이를 ……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집주(孟子集註)에 따라 해석하였다.

[D-021]강좌(江左) : 강동(江東) 즉 양자강(揚子江) 이남의 동쪽 지역으로, 동진(東晉)을 비롯한 남조(南朝)의 국가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D-022]도간(陶侃) : 259~334. 어려서 고아로 가난하였으나, 현리(縣吏)가 되어 공적을 쌓아 자사(刺史)에 이르렀다. 반란을 진압하여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졌으며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다. 도간의 어머니 담씨(湛氏)는 첩이었다. 晉書 卷96 列女傳 陶侃母湛氏

[D-023]주의(周顗) : 269~322. 안동장군(安東將軍) 주준(周浚)의 아들로, 젊은 시절부터 명망이 높았다. 동진(東晉) 원제(元帝)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으며, 왕돈(王敦)의 반란에 저항하다 피살되었다. 주의의 어머니 이씨(李氏)는 쇠잔한 이씨 가문을 일으키고자 명문 귀족인 안동장군 주준을 유혹하여 자진해서 그의 첩이 되었다. 晉書 卷96 列女傳 周顗母李氏

[D-024]소정(蘇頲) : 670~727. 좌복야를 지낸 허국공(許國公) 소괴(蘇瓌)의 아들로,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진사가 되고 습봉(襲封)하여 소허공(小許公)으로 불렸다. 현종(玄宗) 때 자미황문평장사(紫微黃門平章事)가 되었다.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과 함께 문장가로 유명하였다. 소정은 부친 소괴가 천비(賤婢)에게서 얻은 자식으로, 처음에 소괴는 그를 아들로 알지 않고 마구간에 두고 일을 시켰으나, 손님이 그의 시재(詩才)를 알아보고 소괴에게 그대의 종족의 서얼이냐?”고 물었다. 그제야 소괴가 사실을 밝히자 손님은 아들로 거두어 기르기를 청하였다. 그때부터 소괴가 조금씩 그를 가까이하다가 어느날 그의 시재에 놀라 마침내 아들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開天傳信記》 《靑莊館全書 卷24 編書雜稿4 詩觀小傳

[D-025]얼자(孼子) : 원문은 인데, 여러 이본에는 賤産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천산(賤産)은 천첩산(賤妾産) 즉 얼자를 말한다. 양첩산(良妾産)은 서자(庶子)라 하여, 얼자와 구별하였다.

[D-026]이소(李愬) : 773~821. 당 나라 덕종(德宗) 때 반란을 진압하고 수도를 회복한 공으로 서평군왕(西平郡王)에 봉해진 이성(李晟)의 아들로, 헌종(憲宗) 때 오원제(吳元濟)가 회서(淮西)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양국공(涼國公)에 봉해졌다. 벼슬은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이르렀고, 사후에 태위(太尉)에 증직(贈職)되었다.

[D-027]호인(胡寅) · 진관(陳瓘) · 추호(鄒浩) : 호인(1098~1156)은 호안국(胡安國)의 조카로 그의 양자가 되었으며, 양시(楊時)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저서로 논어상설(論語詳說) 등이 있다. 진관은 송 나라 철종(哲宗) · 휘종(徽宗) 연간에 태학박사(太學博士) · 간관(諫官)을 지냈으며 저서로 요옹역설(了翁易說) 등이 있다. 추호는 휘종 때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를 지냈으며 저서로 역계사의(易繫辭義) 등이 있다.

[D-028]정문배(鄭文培) : 미상이다. 영조 즉위년(1724) 서얼 출신 진사(進士) 정진교(鄭震僑) 등이 올린 상소에는 정문측(鄭文則)’으로 되어 있다. 英祖實錄 卽位年 12 17

[D-029]이세황(李世璜) : 미상이다. 영조 즉위년 서얼 출신 진사 정진교 등이 올린 상소에는 이세황(李世黃)’으로 되어 있다. 上同

[D-030]합문지후(閤門祗侯) : 각문지후(閣門祗侯), 고려 때 각종 의식을 담당하던 각문(閣門 : 통례원通禮院)의 정 7 품 벼슬이다.

[D-031]권중화(權仲和) : 1322~1408. 고려 공민왕 때 과거 급제 후 좌부대언(左副代言) · 정당문학(正堂文學), 공양왕 때 삼사좌사(三司左使) ·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역임했으며, 조선조에 들어 태조(太祖) 때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지고 태종 때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의약서(醫藥書) 편찬에도 힘썼다. 도평의사(都評議使)는 나중에 의정부(議政府)로 개칭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속한 관직이다. 권중화는 고려 말의 권신(權臣)인 권한공(權漢功)의 서자였다. 高麗史 卷125 奸臣傳1 權漢功

[D-032] …… 남길 : 원문은 流光於百代인데, 직역하면 먼 후세까지 복택(福澤)을 끼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는 한기 · 범중엄 · 호인 · 진관 · 추호에 대해 지나친 찬사가 되므로, ‘유방백세(流芳百世)’와 비슷한 뜻으로 판단하고 번역하였다.

[D-033]경서(經書) …… 하였습니다 :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원문과 정현의 주를 인용한 것이다.

[D-034]비록 …… 같더라도 : 원문은 雖與□□□인데, 여러 이본에 雖與嫡子同母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35]비자(婢子) : 원문에는 없는데, 예기 원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D-036]비록 부모가 돌아가셨을지라도 : 원문에는 없는데, 예기 원문에 雖父母沒이라 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D-037]비자(婢子) : 원문에는 없는데, () 나라 때 진호(陳澔 : 1261~1341)가 지은 예기집설(禮記集說)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D-038]예기(禮記) …… 하였습니다 : 진호의 예기집설 5 내칙(內則)에서 인용했는데, 인용된 예기 내칙의 원문과 그에 대한 진호의 주석에 모두 빠진 글자들이 있어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비자(婢子)는 대개 천첩(賤妾)으로 해석하는데, 진호는 천첩이 낳은 자식으로 해석하였다.

[D-039]회전(會典) …… 하였으니 : 명 나라 무종(武宗) 4(1509)에 간행된 명회전(明會典) 106 병부(兵部) 습직체직조(襲職替職條) 무릇 군관(軍官)이 사망하거나 연로하거나 원정에서 부상하면 반드시 적장남아(嫡長男兒)가 계승하여 직책을 대체한다. 혹시 적장남아가 죽거나 심한 불구라면 적손(嫡孫)이 세습하여 대체한다. 만약 적자나 적손이 없으면, 서장자(庶長子)나 서장손(庶長孫)이 세습하여 대체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청 나라 서건학(徐乾學) 독례통고(讀禮通考) 53 상의절(喪儀節) 16 입후조(立後條)에 역시 명회전을 인용하여, “무릇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함에 있어 홍무(洪武) 26년에 정하기를, 군관이 사망하거나 연로하거나 원정에서 부상하면 반드시 적장남(嫡長男)이 계승하여 직책을 대체한다. 혹시 적장남이 일찍 죽거나 심한 불구가 되면, 적손으로써 세습하여 대체한다. 만약 적자나 적손이 없으면 서장자가 계승하여 대체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연암은 이 조목을 명회전에서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독례통고를 통해 재인용하면서 축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D-040]본지(本支) : 적계(嫡系)와 서출(庶出)의 자손들을 함께 묶어 부르는 말이다.

[D-041]건국 …… 정도전(鄭道傳) : 원문은 □□□相鄭道傳인데, 여러 이본에 國初罪相鄭道傳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정도전이 후일 태종(太宗)이 되는 왕자 이방원(李芳遠)과 권력 다툼을 벌이다 역모죄로 처단되었기 때문에 죄상(罪相)’이라 한 것이다.

[D-042]서선(徐選) : 1367~1433. 원천석(元天錫)의 문인으로, 태조 때 과거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415(태종 15) 우부대언(右副代言 : 우부승지)이 되자 서얼의 차별대우를 진언하였다. 그 뒤 예조 우참의, 우대언(右代言 : 우승지)을 거쳐 관찰사, 참판, 판서 등을 지냈다.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D-043]찬성(贊成) 강희맹(姜希孟), 안위(安瑋) : 사실 관계에 약간 착오가 있는 듯하다. 강희맹(1424~1483)과 안위(1491~1563)는 동시대 사람이 아니다. 강희맹은 세조(世祖) 때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崔恒), 호조판서 겸 대제학 서거정(徐居正), 우찬성(右贊成) 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형조 판서로서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하였다. 안위는 1550(명종 5)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서 봉상시 정(奉常寺正) 민전(閔荃)과 함께 경국대전의 주해관(註解官)에 임명되어 주해 작업을 맡았으며, 1554(명종 9) 청홍도 관찰사(淸洪道觀察使)로 부임하여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를 간행하였다.

[D-044]송익필(宋翼弼) …… 도학(道學) : 송익필(1534  1599)은 조모가 천첩의 소생이어서 본래의 신분은 미천하였다. 과거를 포기하고 성리학에 전념하여 이이(李珥) · 성혼(成渾) 등과 학문적 교유가 깊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김장생(金長生)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중호(李仲虎 : 1512~1554)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현손(玄孫)으로, 호는 이소재(履素齋)이다. 일찍부터 시로써 명성이 높았다. 성리학에 전념하여 성리명감(性理明鑑) 등의 저술을 남기는 한편으로 제자들을 많이 길러 그의 문하에서 김근공(金謹恭) · 유조인(柳祖認) 등이 배출되었다. 김근공(1526~1568)은 본관이 강릉(江陵)이고 호는 척암(惕菴)이다. 목사(牧使) 김모(金瑁)의 서자이다. 동몽훈도(童蒙訓導)에 천거되었으며,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D-045]박지화(朴枝華) …… 행의(行誼) : 박지화(1513~1592)는 본관이 정선(旌善)이고 호는 수암(守庵)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이문학관(吏文學官)이 되었으나 곧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 때 춘천으로 피란갔다가 자살하였다. 사례집설(四禮集說) 등의 저술이 있다. 이대순(李大純 : 1602~?)은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호는 남포(南浦)이다.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주살(誅殺)된 정준(鄭遵)의 사위였으므로, 1624(인조 2) 문과에 급제하고도 오래동안 벼슬길이 막혔다가 강서 현령(江西縣令), 서윤(庶尹)을 지냈다. 조신(曺伸)은 본관이 창녕(昌寧)이고 호는 적암(適庵)이며, 조위(曺偉 : 1454~1503)의 서형(庶兄)이다. 사역원 정(司譯院正)에 발탁되었고 명 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여러 차례 다녀왔다. 중종 때 어명으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했다.

[D-046]어무적(魚無迹) …… 문장 : 어무적은 본관이 함종(咸從)이고 호는 낭선(浪仙)이다. 모친이 관비(官婢)였으므로 김해(金海)의 관노(官奴)가 되었다. 성종 · 연산군 연간에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대변한 한시들을 남겼다. 어숙권(魚叔權)은 본관이 함종이고 호가 야족당(也足堂)이며, 어세겸(魚世謙)의 서손(庶孫)이다. 이문(吏文)에 능통하였으며 중종 · 명종 연간에 중국 사신을 수행하거나 중국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저술로 패관잡기(稗官雜記) 등이 있다. 양사언(楊士彦 : 1517~1584)은 호가 봉래(蓬萊)이고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평안도 안변(安邊)의 시골 여자인데 자진하여 첩이 되었다고 한다. 이달(李達 : 1539~1618)은 호가 손곡(蓀谷)이다. 허균(許筠)에게 시를 가르쳤다고 하며,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관기(官妓)였다. 신희계(辛喜季 : 1606~1669)는 본관이 영월(寧越)이고 호가 송서(松西)이며, 부제학을 지낸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의 손자이다. 1633(인조 11)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고 이후 문신 중시(文臣重試)에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으로서 장원을 차지했는데 이처럼 서얼이 장원을 차지하기로는 개국 이래 처음이었다고 한다. 1660(현종 1) 조부 신응시와 부친 신경진(辛慶晉)의 시문집인 백록유고(白麓遺稿)를 간행하였다. 벼슬은 낭청을 거쳐 군수를 지냈다. 양대박(梁大樸 : 1544~1592)은 본관이 남원(南原)이고 호가 청계(淸溪)이며, 목사 양의(梁艤)의 서자이다. 임진왜란 때 가산을 털어 모병(募兵) 활동을 벌이다가 과로로 죽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글씨를 잘 썼고 시를 잘 지었다. 박호(朴淲)는 박호(朴箎 : 1567~1592)의 오류인 듯하다. 박호는 본관이 밀양(密陽)이고 자가 대건(大建)이다. 1584(선조 17) 18세로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수찬, 교리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상주(尙州)에서 전사하였다.

[D-047]유조인(柳祖認) …… 재주 : 유조인(1533~1599)은 본관이 문화(文化)이고 호가 범애(泛愛)이며, 서봉(西峰) 유우(柳藕)의 서자이다. 1583(선조 16) 충효와 절의로 천거되어 이천 현감(伊川縣監)과 우봉 현감(牛峰縣監)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고, 임진왜란 때 임금과 세자를 호종하여 형조 참의에 제수되고 공신으로 녹훈되었다. 최명룡(崔命龍 : 1567~1621)은 본관이 전주이고 호가 석계(石溪)이며, 현감 최위(崔渭)의 서자이다. 성혼(成渾)으로부터 도학(道學)으로 인정받았으며, 김장생(金長生)을 종유(從遊)하였다. 주역과 상수학(象數學)에 정통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유시번(柳時蕃 : 1616~1692)은 본관이 문화이고 호는 사월당(沙月堂)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저명한 학자 손처눌(孫處訥)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657(효종 8) 문과 급제 후 봉상시 주부, 교서관 교리 등을 거쳐 여러 고을의 군수를 역임했으며, 태상시 첨정에 이르렀다.

[D-048]그들이 …… 살면서 : 원문은 雖其守分行素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49]과연 …… 하겠습니까 : 원문은 果安在也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50]이산겸(李山謙), 홍계남(洪季男) : 이산겸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서자로, 임진왜란 때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조헌(趙憲)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조헌이 전사한 뒤 잔여 병력을 이끌고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1594(선조 27) 송유진(宋儒眞)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처형되었다. 홍계남은 본관이 남양(南陽)이다. 1590(선조 23)부터 1591년에 걸쳐 통신사의 군관(軍官)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때 부친 홍언수(洪彦秀)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공으로 수원 판관(水原判官)이 되었을 때 홍계남도 첨지로 승진했다. 부친이 전사하자 적진에 돌입하여 부친의 시신을 찾아왔으며 왜적을 추적하여 다수 참살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D-051]권정길(權井吉) : 무관으로 임진왜란 때 상주 판관(尙州判官)이었고, 정묘호란 때 연평부원군 이귀(李貴)의 군관으로 전쟁터에 자원하여 포상을 받았다. 병자호란 때 원주 영장(原州營將)으로 강원도의 근왕병(勤王兵)을 지휘하여 남한산성을 향하다가 부근 검단산(黔丹山)에서 청 나라 군대와 격전 끝에 패퇴하였다. 그 뒤 회양 부사(淮陽府使), 춘천 부사, 인동 부사(仁同府使) 등을 지냈다.

[D-052]피를 …… 훈시하고 : 원문은 沬血誓衆인데, ‘회혈(沬血)’은 피로 얼굴을 씻다시피한다는 뜻이다. 문맥상으로는 구혈서중(嘔血誓衆)’이나 역혈서중(瀝血誓衆)’이라야 적합할 듯하다. 전자로 판단하고 번역하였다.

[D-053]쓸모 있는 …… 않는다 : 한비자(韓非子) 현학(顯學) 녹을 주어 기르는 자들은 쓸모가 없고, 쓸모 있는 자들은 녹을 주어 기르지 않는다. 이것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원인이다.所養者非所用 所用者非所養 此所以亂也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사기 63 한비열전(韓非列傳)에도 인용되어 있는데, 연암은 이를 재인용하였다.

[D-054]홍림(洪霖) : 1685~1728. 본관은 남양이고 부친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홍수명(洪受命)이다. 1727(영조 3)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李鳳祥)의 막료가 되었는데 그 이듬해 이인좌(李麟左)의 난 때 청주성이 함락되자 이봉상과 함께 반란군에 저항하다 죽었다. 나중에 호조 참판에 증직되고 정려가 내렸다.

[D-055]비록 : 원문은 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56]백부(百夫)의 장() : 서경 목서(牧誓)에 나오는 말로, 1000명의 병졸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천부장(千夫長), 100명의 병졸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백부장(百夫長)이라 한다.

[D-057]반드시 …… 것인저 : 논어 자로(子路)에서 정치의 급선무가 무엇이냐고 물은 자로의 질문에 공자가 답한 말이다.

[D-058]아들은 …… 것입니다 : 논어 안연(顔淵)에서 제() 나라 임금이 정치란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임금이 임금 노릇을 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하며, 아비가 아비 노릇을 하며 아들이 아들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D-059]낭관(郞官) …… 바라겠습니까 : 낭관은 육조(六曹) 5 · 6품 하급 관원을 말하고, 시종신은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홍문관 · 예문관 · 승정원 등의 관원을 가리킨다.

[D-060]인의(引儀) : 궁중 의식을 담당하는 통례원의 종 6 품 벼슬이다. 조회(朝會)나 기타 의례에서 여창(臚唱), 즉 식순에 따라 구령을 외치는 일을 맡았다. 업무가 과다하고 빈번하여 종 9 품의 겸인의(兼引儀), 가인의(假引儀)를 증설하였다.

[D-061]윤대(輪對) : 윤번(輪番)으로 궁중에 들어가서 임금의 질문에 응대(應對)하거나 정사(政事)의 득실을 아뢰는 일을 말한다.

[D-062]나라의 …… 자들입니다 : 맹자 진심 상(盡心上) 덕행과 지혜와 학술과 재지(才智)가 있는 사람은 항상 마음의 병이 떠나지 않는다. 오직 고신(孤臣 : 외로운 신하)과 얼자(孼子)만이 그 마음가짐이 늘 조심스럽고 환난을 염려함이 깊기 때문에 사리(事理)에 통달하게 된다.”고 하였다. 원문의 疹疾 맹자의 원문대로 疢疾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으나 뜻은 마찬가지이다.

[D-063]예기 …… 하였으니 : 예기 왕제(王制)에 나오는 말이다.

[D-064]() …… 하였으니 : 중용집주(中庸集註)  19 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D-065]황발(黃髮)과 태배(鮐背) : 황발은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가 다시 누런 빛을 띠는 것이고, 태배는 등에 복어처럼 검은 반점이 생긴 것을 말한다.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의 특징이다.

[D-066]천자가 …… 있었으니 :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 등에 나오는 내용이다.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이라는 직위를 두어 벼슬에서 물러난 연로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을 임명하고, 천자가 그들에게 태학에서 음식을 대접하면서 조언을 구하였다고 한다.

[D-067]() …… 하였고 : 논어 안연(顔淵)에 나오는 말이다.

[D-068]벗이란 …… 것이다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나오는 말인데, 앞뒤 순서를 바꾸어 인용하였다.

[D-069]진실하고 …… 많아 : 논어 계씨(季氏) 유익한 벗이 셋이요 유해한 벗이 셋이니, 곧은 사람을 벗하며, 진실한 사람을 벗하며, 들은 것이 많은 사람을 벗하면 유익하다.” 하였다.

[D-070]충고하거나 …… 없고 : 맹자 이루 하(離婁下) 책선(責善)은 붕우간의 도리이다.” 하였다.

[D-071]탁마(琢磨)하고 …… 끊겼으며 : 붕우들이 함께 강학(講學)하는 것을 뜻한다. 절시(切偲)는 절절시시(切切偲偲)의 준말이다. 논어 자로(子路) 붕우간에는 간절하고 자상히 권면하여야 한다.朋友切切偲偲고 하였다.

[D-072]구제하지 않으면서도 : 원문은 莫之救인데, ‘莫之救而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73]할아비를 …… 것입니다 : 고대의 종법(宗法)에 적자(嫡子)가 죽으면, 혹시 서자가 있더라도 적손(嫡孫)에게 할아비를 계승해서 상제(喪祭)나 가묘(家廟)의 중책을 맡도록 했다. 할아비가 적손에게 중책을 전한다고 하여 전중(傳重)’이라 하고, 적손이 중책을 계승한다 하여 승중(承重)’이라 하였다.

[D-074]석태중(石鮐仲) …… 나타났으니 :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나오는 내용이다. 석태중은 위() 나라의 대부였는데, 그가 죽자 여섯 명의 서자 중에 누구를 양자로 정할 것인가를 점치게 되었다. 점치는 사람이 목욕하고 옥()을 찬 다음에 점을 치도록 하겠다고 하자, 다른 서자들은 모두 그 말을 따랐으나 석기자(石祁子)만은 부친상 중에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부했는데 점을 쳐 보니 석기자의 점괘가 길조를 보였다고 한다.

[D-075]당 나라의 …… 하였으니 : 당률소의(唐律疏義) 12 입적위법조(立嫡違法條)에 나오는 내용이다.

[D-076]대명률(大明律)에도 …… 하였으며 : 대명률 호율(戶律) 입적자위법조(立嫡子違法條)에 나오는 내용이다.  ()’으로가 아니라 () 80로 다스린다고 하였다.

[D-077]경국대전에는 …… 하였습니다 : 경국대전 예전(禮典) 입후조(立後條)에 나오는 내용이다.

[D-078]조명(造命) : 사람의 화복(禍福)을 좌우하는 것을 뜻한다. 임금은 이러한 조명의 권능을 지녔다고 보았다. 여기서는 양자(養子)로 인정함으로써 그의 운명을 바꾸어 주는 조치를 가리킨다.

[D-079]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 : 사기 75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맹상군 전문(田文)은 제() 나라의 재상인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이 천첩에게서 얻은 자식이었다. 그는 불길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여 태어나면서부터 버림을 받았으나, 장성한 뒤 부친을 만나 설득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자식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마침내 부친의 후계자가 되어 맹상군이 되었다. 맹상군이 부친을 만나 설득할 때 묻기를, “아들의 아들은 무엇입니까?” 하니, 부친은 손자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손자의 손자는 무엇입니까?” 하니, 부친은 현손(玄孫)이다.” 하였다. 또다시 묻기를, “현손의 현손은 무엇입니까?” 하니, 부친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맹상군은, 부친이 나라 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몹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탐욕스럽게 재산을 모아, 그와 같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所不知何人에게 남겨 주려 한다고 비판하였다.

[D-080]황홀(怳惚) : 후손이 정성껏 제사를 받들면 조상의 혼령이 내려와 어렴풋이 직접 그 모습을 뵙게 되는 듯한 경지를 말한다. 禮記 祭義 원문의  자는 예기 으로 되어 있는데, 서로 통하는 글자이다.

[D-081]신령의 …… 한들 : 원문은 焄蒿凄愴인데, 예기 제의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의  자는 예기 로 되어 있는데, 뜻은 같다.

[D-082]날이 …… 그리워한다 :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나오는 구절이다.

[D-083]사랑을 …… 듯하다 : 예기 제의에 나오는 말이다.

[D-084]신령이 …… 듯할 : 원문은 僾然著存인데, ‘애연(僾然)’ 저존(著存)’ 모두 예기 제의에 나오는 말이다.

[D-085]종족들은 …… 부끄러워하여 : 원문은 宗族恥於爲類인데, ‘宗族而恥於爲類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86]선정신(先正臣) : 문묘(文廟)에 배향된 선대(先代)의 유현(儒賢)을 임금 앞에서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이다.

[D-087]판결사(判決事) : 노비 문서와 노비 문제 소송 사건을 처리하는 장례원(掌隷院)의 우두머리로 정 3 품 벼슬이다.

[D-088]송시열(宋時烈) …… 있습니다 : 이 의소(擬疏) 송자대전(宋子大全) 13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시대순으로 상소를 배열한 점으로 미루어 1670(현종 11)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에서 송시열은 서얼 방한(防限) 제도의 경우는 애초 조종(祖宗)이 확정한 제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국초에 정도전은 그 어미가 실은 사비(私婢)였지만 마침내 대제학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방한으로 된 것은 혹시 중간 시대에 나온 것인 듯합니다.”라고 하면서, 서얼이 기용되지 못함을 애석해하였다.

[D-089]반드시 …… 자각하시고 : 원문은 自見必然之理인데, 여러 이본에는自見其必然之理로 되어 있다.

[D-090]다시 ……  : 원문은 復得而極言之인데, 여러 이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91]하늘이 …… 없다 : 인용상에 약간 착오가 있는 듯하다. 시경 주송(周頌) 사문(思文)에는 곡식으로 우리 뭇 백성을 기르시니 너의 극()이 아님이 없다.立我蒸民 莫非爾極고 하였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으시니天生蒸民 시경 대아(大雅) ()과 증민(蒸民)에 나오는 구절이다. 또한 너의 극()이 아님이 없다에서 ()’은 대개 시중(時中)’ 또는 중정(中正)’의 도()나 지극한 덕()으로 풀이하는데, 연암은 그와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D-092]치우침도 …… 평탄하리라 : 인용상에 약간 착오가 있는 듯하다. 원문은 無偏無陂 王道平平이라 하였으나, 홍범에는 無偏無陂 遵王之義라 하고 無黨無偏 王道平平이라 하였다.

[D-093]인조(仁祖) …… 허락하였으니 : 삼조(三曹)의 관직은 호조(戶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의 낭관(郞官)이다. 인조 3년 옥당의 차자로 인해서 서얼을 허통(許通)하는 사목(事目)을 만들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조 11년에 이를 준행하기를 왕에게 다시 청하였다. 仁祖實錄 11 10 15

[D-094]만약 …… 없다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D-095]옛날의 …… 여겼는데 : 서경 열명 하(說命下) 맹자 만장(萬章)에 거듭 나오는 내용이다.

[D-096]능히 …… 확대하시고 : 정조(正祖)가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을 계승한 사실을 말한다.

[D-097]이 상소가 …… 것인지는 : 원문은 此疏卽何所激인데,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고,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자가 누락되어 있다.

[D-098]단점을 …… 함으로써 : 원문은 洗濯磨礪인데, 앞에서 나온 단점을 고쳐 주고 결점을 덮어 주다刮垢掩瑕와 호응하는 표현으로, ‘괄구마광(刮垢磨光)’과 같은 뜻이다.

[D-099]죽기를 다투기에 : 원문은 爭死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爭先死로 되어 있다.

[D-100]이보다 …… 터이니 : 원문은 無過於此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無過於此而로 되어 있다.

[D-101]위대하신 …… 공적 : 시경 대아(大雅) 역복(棫樸)에 전거를 둔 표현이다. 이 글 첫머리에도 인용되었다.

[D-102]역시 …… 찾으시겠습니까 : 원문은 云云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其亦捨此而奚求哉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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