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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1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1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공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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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1]

1 자서(自序)

2 계우(季雨)에게 증정한 서문

3 낭천(狼川) 수령으로 나가는 심백수(沈伯修)를 송별하는 서문

4 은산(殷山) 수령으로 나가는 서원덕(徐元德)을 송별하는 서문

5 대은암(大隱菴)에서 창수(唱酬)한 시의 서문

6 자소집서(自笑集序)

7 유구(悠久)에게 증정한 서문

8 여름날 밤잔치의 기록

9 초구(貂裘)에 대한 기록

10 조부께서 손수 쓰신 한림(翰林) 추천서에 대한 기록

11 소완정(素玩亭)의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에 화답하다

12 불이당기(不移堂記)

13 소완정기(素玩亭記)

14 금학동(琴鶴洞) 별장에 조촐하게 모인 기록

 

[2]

15 만휴당기(晩休堂記)

16 명론(名論)

17 백이론(伯夷論) ()

18 백이론(伯夷論) ()

19 형암(炯菴) 행장(行狀)

20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 발문

21 회성원집(繪聲園集) 발문

22 필세설(筆洗說)

23 서얼 소통(疏通)을 청하는 의소(擬疏)

 

[3]

24 주금책(酒禁策)

25 유사경(兪士京 유언호 )에게 답함

26 황윤지(黃允之)에게 감사함

27 어떤 이에게 보냄

28 홍덕보(洪德保 홍대용 )에게 답함

29 두 번째 편지

30 세 번째 편지

31 네 번째 편지

32 유수(留守)가 대궐에서 하사받은 귤 두 개를 보내 준 데 감사한 편지

33 족손(族孫) 홍수(弘壽) 에게 답함

34 함양 군수(咸陽郡守)에게 답함

35 순찰사에게 답함

36 어떤 이에게 보냄

37 순찰사에게 올림

38 김 우상(金右相)에게 올림

39 김계근(金季謹)에게 답함

40 전라 감사에게 답함

 

[4]

41 이 감사(李監司) 서구(書九) 가 귀양 중에 보낸 편지에 답함

42 순찰사에게 답함

43 순찰사에게 올림

44 순찰사에게 답함

45 순찰사에게 올림

46 순찰사에게 올림

47 영목당(榮木堂)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祭文)

48 장인 처사(處士) 유안재(遺安齋)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

49 오천(梧川) 처사 이장(李丈)에 대한 제문

50 이몽직(李夢直)에 대한 애사(哀辭)

51 유경집(兪景集)에 대한 애사

52 재종숙부 예조 참판 증 영의정공(領議政公) 묘갈명(墓碣銘)

53 삼종형(三從兄) 수록대부(綏祿大夫) 금성위(錦城尉)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贈諡) 충희공(忠僖公) 묘지명(墓誌銘)

 

 

 

 

자서(自序)

글이란 뜻을 그려내는 데 그칠 따름이다. 글제를 앞에 놓고 붓을 쥐고서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거나, 억지로 경서(經書)의 뜻을 찾아내어 일부러 근엄한 척하고 글자마다 정중하게 하는 사람은, 비유하자면 화공(畫工)을 불러서 초상을 그리게 할 적에 용모를 가다듬고 그 앞에 나서는 것과 같다.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옷은 주름살 하나 없이 펴서 평상시의 태도를 잃어버린다면, 아무리 훌륭한 화공이라도 그 참모습을그려내기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사람도 어찌 이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

말이란 거창할 필요가 없으며, ()는 털끝만한 차이로도 나뉘는 법이니, 말로써 도를 표현할 수 있다면 부서진 기와나 벽돌인들 어찌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도올(檮杌)은 사악한 짐승이지만 초() 나라의 국사(國史)는 그 이름을 취하였고,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몰래 매장하는 것은 극악한 도적이지만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니, 글을 짓는 사람은 오직 그 참을 그릴 따름이다.

이로써 보자면 글이 잘되고 못되고는 내게 달려 있고 비방과 칭찬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귀가 울리고 코를 고는 것과 같다. 한 아이가 뜰에서 놀다가 제 귀가 갑자기 울리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기뻐하며, 가만히 이웃집 아이더러 말하기를,

 

너 이 소리 좀 들어 봐라. 내 귀에서 앵앵 하며 피리 불고 생황 부는 소리가 나는데 별같이 동글동글하다!”

하였다. 이웃집 아이가 귀를 기울여 맞대어 보았으나 끝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자, 안타깝게 소리치며 남이 몰라주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일찍이 어떤 촌사람과 동숙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의 코 고는 소리가 우람하여 마치 토하는 것도 같고, 휘파람 부는 것도 같고, 한탄하는 것도 같고, 숨을 크게 내쉬는 것도 같고, 후후 불을 부는 것도 같고, 솥의 물이 끓는 것도 같고, 빈 수레가 덜커덩거리며 구르는 것도 같았으며, 들이쉴 땐 톱질하는 소리가 나고, 내뿜을 때는 돼지처럼 씩씩대었다. 그러다가 남이 일깨워 주자 발끈 성을 내며 난 그런 일이 없소.” 하였다.

, 자기만이 홀로 아는 사람은 남이 몰라줄까 봐 항상 근심하고, 자기가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먼저 깨닫는 것을 싫어하나니, 어찌 코와 귀에만 이런 병이 있겠는가? 문장에도 있는데 더욱 심할 따름이다. 귀가 울리는 것은 병인데도 남이 몰라줄까 봐 걱정하는데, 하물며 병이 아닌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코 고는 것은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 주면 성내는데, 하물며 병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을 보는 사람이 부서진 기와나 벽돌도 버리지 않는다면, 화공의 선염법(渲染法)으로 극악한 도적의 돌출한 귀밑털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요, 남의 귀 울리는 소리를 들으려 말고 나의 코 고는 소리를 깨닫는다면 거의 작자의 뜻에 가까울 것이다.

 

 

[D-001] …… 것이다 : 원문은 難得其眞인데, 종북소선(鍾北小選) 병세집(幷世集)에는  로 되어 있다.

[D-002]말이란 …… 버리겠는가 : 부서진 기와나 벽돌처럼 쓸모없는 것들에도 도()가 존재하므로, 이를 소재로 삼아 말로 표현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서 동곽자(東郭子) 이른바 도()란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장자는 없는 데가 없다.無所不在고 하면서, 땅강아지나 개미에도 있고, 稊稗에도 있고, 기와나 벽돌瓦甓에도 있고, 똥이나 오줌에도 있다고 하였다. 시경(詩經) 용풍(鄘風) 장유자(墻有茨)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말하면 추해진다네.所可道也 言之醜也라고 하였다. 원문의 瓦礫 종북소선 병세집 糞壤으로 되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不棄瓦礫 瓦礫도 같다.

[D-003]도올(檮杌) …… 취하였고 :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 () 나라의 ()과 초() 나라의 도올과 노() 나라의 춘추(春秋)가 똑같은 것이다.” 하였다. 도올은 원래 전설에 나오는 사악한 짐승이었는데, 초 나라에서 악을 징계하기 위해 이로써 국사의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원문의 楚史取名에서  자는 종북소선 로 되어 있다.

[D-004]몽둥이로 …… 남겼으니 : 극도로 흉악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라 할지라도 역사책에 남겨 후세 사람들이 교훈으로 삼게 한다는 뜻이다. () 나라 무제(武帝) 때 왕온서(王溫舒)라는 혹리(酷吏)가 젊은 시절 사람을 죽이고 암매장하는 악행을 자행했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사기(史記) 한서(漢書)의 혹리전(酷吏傳)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다. 원문의 劇盜 종북소선 병세집 狗屠로 되어 있고, ‘遷固是敍 是敍 종북소선 生色으로 되어 있다.

[D-005]이로써 보자면 : 원문은 以是觀之인데, ‘以是 종북소선에는 由是, 병세집에는 是以로 되어 있다.

[D-006]귀가 울리고 : 병으로 인해 귀에 이상한 잡음이 들리는 이명증(耳鳴症)을 말한다.

[D-007]놀라서 …… 기뻐하며 : 원문은 啞然而喜인데, 종북소선에는  로 되어 있다.

[D-008]내 귀에서 …… 동글동글하다 : 이와 비슷한 비유가 이덕무(李德懋)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1에 나온다. 이덕무가, 어린 동생이 갑자기 귀가 쟁쟁 울린다고 하여 그 소리가 무엇과 비슷하냐고 물었더니, “그 소리가 별같이 동글동글해서 빤히 보고 주울 수 있을 듯해요.其聲也 團然如星 若可覩而拾也라고 답했다. 이에 이덕무는 형상을 가지고 소리를 비유하다니, 이는 어린애가 무언 중에 타고난 지혜이다. 옛날에 한 어린애가 별을 보고 저것은 달의 부스러기이다.’라고 했다. 이런 따위의 말들은 몹시 곱고 속기를 벗어났으니, 케케묵은 식견으로는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라고 평하였다.

[D-009]마치 …… 같고 : 원문은 如哇如嘯如嘆如噓인데, 종북소선에는 如歎如哇로만 되어 있다.

[D-010]톱질하는 소리가 나고 : 원문은 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鉅鍛으로 되어 있다.

[D-011]남이 일깨워 주자 : 원문은 被人提醒인데, 종북소선에는 提醒 搖惺으로 되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怒人之提醒 提醒도 같다.

[D-012]자기가 …… 사람은 : 원문은 己所未悟者인데, 종북소선에는  로 되어 있다.

[D-013]남이 …… 싫어하나니 : 원문은 惡人先覺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4]문장에도 …… 따름이다 : 원문은 文章亦有甚焉耳인데, 종북소선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5]하물며 : 원문은 인데, 종북소선에는 이 앞에  자가 더 있다.

[D-016]선염법(渲染法) : 동양화에서 먹을 축축하게 번지듯이 칠하여 붓 자국이 보이지 않게 하는 수법을 이른다.

[D-017]극악한 도적 : 원문은 劇盜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狗屠로 되어 있다.

[D-018]돌출한 귀밑털 : 원문은 突鬢인데, 즉 봉두돌빈(蓬頭突鬢), 쑥대머리에다 돌출한 귀밑털이란 뜻으로, 거칠고 단정치 못한 모습을 말한다.

[D-019]들으려 말고 : 원문은 毋聽인데, 종북소선에는 不問으로, 병세집에는 無聽으로 되어 있다.

[D-020]깨닫는다면 : 원문 인데, 종북소선에는 으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계우(季雨)에게 증정한 서문

 

 

스승의 도()가 폐기된 지 오래되었다. 중니(仲尼 공자)가 돌아가신 때로부터 맹자(孟子) 이하는 모두 스승의 도로써 자처할 수 없었다.  스승이니 제자니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그 스승의 어짊을 참으로 안다고는 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도를 믿는 것이 반드시 돈독하다고는 할 수 없다. 도가 이미 반드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면, 스승도 존숭할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공자(孔子)는 문하의 제자를 부를 적에 반드시 삼(), (), (), (), (), (), ()이라고 이름을 부르면서 너나들이하였으니, 무릇 이름을 바로 부르면서 너나들이하는 것은 자제(子弟)로부터 더 아래로 부리는 종이나 하인들에게까지도 모두 쓰는 말이다.

공자가 돌아가셨을 때 문인(門人)들이 복()을 어떻게 입을지를 정하지 못하자, 자공(子貢)이 이르기를,

 

옛날에 부자(夫子)께서 안연(顔淵)의 상()을 당했을 때 아들의 상을 당한 것같이 하였으나 복은 입지 않았으니, 지금 문인들도 부친의 상을 당한 것같이 하되 복은 입지 말도록 하자.”

하였다. 문인이 스승에 대해서 아비와 자식 관계같이 했으니 어찌 도를 믿지 않고서 그렇게 되겠는가. 수레를 팔 것을 청하자 허락지 아니하고, 후히 장사를 치르자 탄식하였으니, 이는 문인을 아들과 똑같이 대하려는 것이었고, ()와 예() 외에 특별히 들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아들을 문인과 똑같이 대하려는 것이었다.

맹자는 일찍이 문하의 제자에 대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 그대)’라 칭했다. ‘라는 것은 상대를 높이는 언사로서, 자기와 대등한 사람으로부터 그 위로 군공(君公 제후)과 아버지나 스승에게까지 쓸 수 있는 말이니, 문인에게 이 말을 쓴다면, 이는 친구가 친구를 대하는 도리이다.

공자의 70명의 제자들 중에 제 스승을 요순(堯舜)보다 어질다고 칭송하는 자가 있어도, 참람되이 여기지 않았다. 그가 스승의 어짊을 참으로 알고 그 도를 깊이 믿었다면, 해와 달도 크다고 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고, 태산(泰山)도 높다고 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며, 강과 바다도 깊다고 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맹자의 제자인 만장(萬章)과 공손추(公孫丑)의 무리는 재주와 식견이 낮아서, 스승의 어짊을 참으로 알지 못했고 그 도를 깊이 믿지 못했기 때문에 기껏 그 스승을 높인다는 것이 관중(管仲)과 안자(晏子)의 부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맹자는 문인에 대하여, 그들이 물으면 대답하였지 자신의 포부를 말한 적이 없었다. 이미 스승의 어짊을 알지 못하고 그 도를 믿지 못한다면, 길에 지나가는 사람과 다를 바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길에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서 너나들이하는 것도 안 될 말인데, 더구나 감히 스승의 도로써 자처하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맹자는 일찍이 스승의 도에 엄하여 진상(陳相)을 책망하고, 조교(曹交)를 거절했으니, 아마도 그는 70명의 제자들이 공자에게 심복한 것에 대해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맹자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할 것을 생각했지만, 또 사람들이 남의 스승되기를 좋아하는 것을 근심하였으니, 그가 경솔하게 남에 대해 스승 노릇을 하고자 아니 한 것 역시 분명하다.

지금 계우(季雨)는 나이 겨우 약관인데, 험한 길을 멀다 아니 하고 대추와 육포를 품고 책상자를 짊어지고 그의 스승을 찾아가 따르려고 한다. 나는 그 선생님이 반드시 영재를 얻어 교육할 것을 생각하시고, 또 경솔하게 아무에게나 스승 노릇을 하고자 아니 하실 줄을 안다. 아마도 틀림없이 나의 이 말로써 먼저 그 선생님께 예물 삼아 올릴 터인데 선생님께서도 의당 답이 있으실 것이다. 그래서 글로 써서 계우에게 증정하는 바이다.

 

 

공자와 맹자는 100여 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사제간의 친분이 치수(淄水)와 승수(澠水)같이 판이하였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세상의 도의가 날로 하락한 것을 한탄하지 않은 적이 없다.

 

[C-001]계우(季雨) : 누구의 자()인지 알 수 없다. 연암집 5에 수록된 중관에게 보냄與仲觀이란 편지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D-001]() : 성명은 증삼(曾參), ()는 자여(子輿)이다.

[D-002]() : 성명은 안회(顔回), 자는 자연(子淵)이다.

[D-003]() : 성명은 단목사(端木賜), 자는 자공(子貢)이다.

[D-004]() : 성명은 복상(卜商), 자는 자하(子夏)이다.

[D-005]() : 성명은 공서적(公西赤), 자는 자화(子華)이다.

[D-006]() : 성명은 중유(仲由), 자는 자로(子路)이다.

[D-007]() : 성명은 염옹(冉雍), 자는 중궁(仲弓)이다.

[D-008]너나들이하였으니 …… 말이다 : 이 부분이 병세집에는 爾汝之也者 魯之方音 此待子弟之道 弟子者子弟也 故로 되어 있다.

[D-009]공자가 …… 하였다 :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D-010]수레를 …… 탄식하였으니 : 안회가 죽었을 때 안회의 아버지 안로(顔路)가 공자의 수레를 팔아 외관(外棺)인 곽()을 장만하기를 청하였는데, 공자는 자신의 아들 이()가 죽었을 때도 관()만 있었고 곽은 없었다고 대답하면서 승낙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인들이 후히 장사 지내려 하자 공자는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결국 후히 장사 지내자, “안회는 나를 아버지처럼 여겼는데 나는 그를 자식처럼 대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저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하고 탄식하였다. 論語 先進

[D-011]() …… 없었으니 : 공자가 문하의 제자와 자신의 아들을 가르치는 데 차별을 두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고사(故事)이다. 진항(陳亢)이 백어(伯魚 : 공자의 아들 이)에게 그대도 뭔가 좀 특별히 들은 것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묻자, 백어가 대답하기를, “그런 것은 없었다. 언젠가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는데, ‘()를 배웠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아직 못 배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 하시므로 내가 물러 나와 시를 배웠다. 그 후에 또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는데, ‘()를 배웠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아직 못 배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예를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 없다.’ 하시므로 내가 물러 나와 예를 배웠다. 이 두 가지를 들었노라.” 하였다. 論語 季氏

[D-012]공자의 70명의 제자들 : 공자 문하의 제자 약 3000명 중에서 재주와 덕이 출중한 제자로 72명 또는 77명을 꼽는데, 史記 卷47 孔子世家, 67 仲尼弟子列傳 대충하여 70명이라고도 한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 덕으로써 사람을 복종시키는 자는 마음이 즐거워서 진실로 복종하게 하나니,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복종하는 경우와 같다.”고 하였다.

[D-013]제 스승을 …… 있어도 : 공자의 제자 재아(宰我) 내가 보기에 부자(夫子 : 공자孔子)는 요순(堯舜)보다 훨씬 뛰어나시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孟子 公孫丑上

[D-014]깊이 믿었다면 : 원문은 深信인데, 병세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5]해와 …… 것이다 :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를 헐뜯자 공자의 제자 자공은, 다른 현자들이 언덕과 같아 넘을 수 있는 존재라면 공자는 해와 달 같아 도저히 넘을 수 없다.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고 옹호하였다. 論語 子張 또한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은 스승을 예찬하여, 언덕과 개밋둑에 비교하면 태산과 비슷하고, 길바닥에 괸 물과 비교하면 강과 바다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이 부분이 병세집에는 天地不足以爲大 日月不足以爲高 河海不足以爲深矣로 되어 있다.

[D-016]만장(萬章) …… 않았다 : 관중(管仲)과 안자(晏子)는 춘추 시대 제() 나라 사람이다. 관중은 이름이 이오(夷吾), 자가 중()인데, 환공(桓公)을 섬겨 부국강병에 힘쓰고 제후를 규합하여 환공을 오패(五覇)의 으뜸이 되게 하였다. 안자는 이름이 영(), 자가 평중(平仲)인데, 영공(靈公) · 장공(莊公) · 경공(景公)의 재상이 되어 절검 역행(節儉力行)하여 국력 배양에 힘썼다. 공손추가 맹자에게 부자(夫子)께서 만일 제() 나라에서 요직을 맡으신다면 관중과 안자의 공적을 다시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맹자는 그대는 참으로 제 나라 사람이구나, 관중과 안자밖에 모르는 것을 보니!”라고 못마땅해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D-017]진상(陳相)을 책망하고 : 등문공(滕文公)이 맹자의 가르침을 따라 인정(仁政)을 펴자, 이 소문을 듣고 초() 나라의 유자(儒者) 진량(陳良)의 문도인 진상이 등 나라로 와서 그 백성이 되기를 자원하였다. 이때 신농씨(神農氏)의 설()을 따르는 허행(許行)도 등 나라로 옮겨와 직접 신을 삼고 자리를 짜서 생활하였는데, 진상이 허행을 보고는 자신이 그동안 해 온 학문을 버리고 허행을 추종하였다. 진상이 맹자를 만나 등 나라 군주는 현군(賢君)이기는 하지만 도()는 듣지 못했습니다. 현자(賢者)는 백성들과 함께 밭갈이해서 먹고 손수 밥을 지어 가며 다스려야 하는데, 지금 등 나라에는 창름(倉廩)과 부고(府庫)가 있으니, 이는 백성들을 해쳐서 자신을 봉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맹자는 허행의 학설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설명하고, 진상이 스승의 학문을 배반한 것을 호되게 꾸짖었다. 孟子 滕文公上

[D-018]조교(曹交)를 거절했으니 : 조교는 조군(曹君)의 동생이다. 조교가 맹자에게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조교가 다시 문왕(文王)은 키가 10척이고 탕() 임금은 9척이라고 했는데, 지금 저는 9 4촌이나 되는데도 밥만 축낼 뿐이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든 노력만 하면 요순처럼 될 수 있다.”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조교가 제가 추군(鄒君)을 만나면 관사(館舍)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머물면서 문하(門下)에서 배웠으면 합니다.” 하므로, 맹자는 도()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뜻이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는 대로(大路)와도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의 병통은 구하지 않는 데 있을 뿐이니, 그대가 돌아가서 찾는다면 스승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면서 거절하였다. 孟子 告子下

[D-019]천하의 …… 생각했지만 : 맹자가 군자(君子)의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하면서,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세 번째 즐거움으로 들었던 것을 두고 한 말이다. 孟子 盡心上

[D-020]사람들이 …… 근심하였으니 : 맹자가 사람들의 병통은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함에 있다.”고 했던 것을 두고 한 말이다. 孟子 離婁上

[D-021]험한 …… 하고 : 원문은 不遠道路之險인데, 병세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22]대추와 …… 짊어지고 : 원문은 抱棗脯 負書笈인데, 병세집에는 負書笈 抱棗脯로 되어 있다. 대추와 육포는 스승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바치는 예물로 쓰인다.

[D-023]그의 …… 한다 : 이 대목이 병세집에는 운평(雲坪)으로 찾아가 따르려 한다. 장차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서이다.往從于雲坪 蓋將以師之也라고 되어 있다. 운평은 곧 송능상(宋能相 : 1710~1758)인 듯하다. 송능상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현손(玄孫)이자 한원진(韓元震)의 제자로 저명한 성리학자인데, 1751년부터 충청도 회덕(懷德) 운평에 살면서 운평을 호로 삼고 학문과 교육에 전념했다. 저서로 운평문집(雲坪文集)이 있다.

[D-024]치수(淄水)와 승수(澠水) : 현재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두 강의 이름이다. 두 강의 물맛이 서로 달랐던 데서 유래하여, 두 가지 사물의 성격이 판이한 경우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낭천(狼川) 수령으로 나가는 심백수(沈伯修)를 송별하는 서문

 

 

낭천(狼川)은 고대의 맥국(貊國)으로, 땅은 외지고 백성은 가난한 지역이다. 벗인 심군 백수(沈君伯修)가 이곳에 수령으로 부임하게 되자 의기가 충만하였으며, 날을 정해서 행장을 꾸려 가족을 이끌고 떠나는데, 뜻을 이룬 사람과 몹시 흡사하였다.

심군은 겨우 약관일 적에 용모와 자태가 단정하고 수려하며 학문과 창작이 걸출하고 정민(精敏)할 뿐더러, 논의를 펴면 바람이 이는 듯하고 붓을 잡으면 나는 듯하여 명성과 예찬이 마침내 당대에 떨쳐졌다. 그래서 그가 교유한 사람들은 모두 그보다 연배나 지위가 높았는데도 그와 교유하기를 원했던 것이며, 우리 왕조 개국 이래로 조달(早達)한 이를 낱낱이 헤아려 볼 때 이한음(李漢陰 이덕형(李德馨))이나 김문곡(金文谷 김수항(金壽恒))만큼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임금께서 일찍이 진사(進士)들을 불러 정시(庭試)를 보일 적에 친림(親臨)하여 시험지를 하사하셨다. 때마침 비가 내려 선비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시험지를 하사받고 비를 피하여 행랑 아래로 들어갔으나, 군은 공수(拱手)하고 홀로 비를 맞으며 뜰 가운데 서 있었다. 임금께서 바라보고 기특하게 여겨 돌아보며,

 

저기 홀로 섰는 자가 누구냐?”

하고 묻자, 측근 신하가 군()의 이름을 아뢰었다. 임금은 감탄하며,

 

어떻게 하면 분주히 이익을 다투지 않고 홀로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셨다. 그래서 그가 과거에 합격하기를 권면하고 장차 크게 쓰려는 뜻이 매우 성대하였다. 군 역시 발탁되었다가 공교롭게도 면직을 당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임금은 그의 이름을 들을 적마다 늘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오랫동안 군도 과거 답안 쓰는 공부를 그만두고 더욱 글을 읽어, 문장의 수준이 날로 높아갔다. 그러나 도리어 낭서(郞署)에 머물면서 승진되거나 좌천되거나 하였다. 지금 그를 옛사람에 비교해 보면 문형(文衡 대제학)을 맡고 정승에 제수될 나이인데, 마침내 산간 벽지의 한 작은 고을에 벼슬자리를 얻었으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군을 송별하는 사람들은 바야흐로 입을 모아 군이 뜻을 펴지 못했노라고 읊었지만, 군으로 말하자면 장차 밤낮으로 장부와 문서를 정리하고 부지런히 백성의 고통을 조사하며, 청사(廳舍)는 어떻게 보수해야 하며 고을의 폐단은 어떻게 개혁해야 하나 생각하여, 마치 평생토록 평소에 뜻을 둔 사람같이 할 것이다. 그리고 군의 불우함을 거론하며 근심스럽게 여겨 슬퍼한 사람들은 모두 장차 겸연쩍어하면서 자신을 폄하(貶下)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

군이야말로 진정 내면의 만족을 얻어 외적인 영화를 잊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선비가 성공과 실패, 영예와 치욕의 갈림길에서 자주 운명을 뇌까린다면 참으로 운명을 모르는 자가 아니겠는가. 군은 일찍이 밭을 팔아 책을 사서 몸소 만 권을 이루고 날마다 서루(書樓)에서 강독하였으니, 방법에 대해서는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조그마한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C-001]낭천(狼川) …… 서문 : 낭천은 강원도에 있던 현()으로 지금의 화천군(華川郡)인데, 현감(縣監)이 다스렸다. 백수(伯修)는 심염조(沈念祖 : 1734~1783)의 자이다. 심염조는 연암의 젊은 시절 절친한 벗으로, 음관(蔭官)으로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거쳐 낭천 현감으로 나갔다. 1776년 문과에 급제하고, 1778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이덕무(李德懋)를 대동하고 연행(燕行)을 다녀왔으며, 정조의 총애를 받아 규장각 직제학, 홍문관 부제학,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D-001]맥국(貊國) : 지금의 강원도 춘천 지역에 맥족(貊族)이 세웠다는 소국(小國)이다.

[D-002]조달(早達) …… 있었다 : 이덕형(李德馨 : 1561~1613) 21세에 문과 급제하고 31세에 대제학이 되었으며 42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김수항(金壽恒 : 1629~1689) 23세에 문과 급제하고 34세에 예조 판서가 되었으며 44세에 우의정과 좌의정이 되었다.

[D-003]낭서(郞署) : 낭관(郞官)이라고도 하며, 주로 육조(六曹)의 정 5 품 벼슬인 정랑(正郞)이나 정 6 품 벼슬인 좌랑(佐郞)을 이른다.

[D-004]군을 …… 읊었지만 : 심염조와 송별할 때 사람들이 그의 불우함을 위로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는 뜻이다. 벗인 김기장(金基長)이 지은 송별시가 전한다. 在山集 卷7 送沈員外伯修出守狼川

[D-005]서루(書樓) : 김기장의 송별시에 설향루(雪香樓)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은산(殷山) 수령으로 나가는 서원덕(徐元德)을 송별하는 서문

 

 

옛날에는 사대부들이 내직(內職 중앙관직)을 중히 여기고 외직(外職 지방관직)은 가볍게 여겼다. 그래서 임금 측근의 친밀한 신하들은 정세상 조정에 있기 거북하거나 특명으로 견책을 당해 외직에 보임된 자가 아니면, 아무도 선뜻 고을살이로 자기 몸을 얽어매려 아니 하였으며, 재능과 지혜를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명예와 절조를 근엄하게 갖추었다. 대개 그 명망이 매우 높아서 스스로 처신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과 현격히 달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명성이 클수록 관직은 더욱 맑으며, 관직이 맑을수록 그 녹봉으로 받는 것이 더욱 청렴했다.

간혹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은 경우에는 관례적으로 걸군(乞郡)을 할 수 있지만, 웅장하게 큰 고을은 아무리 가득 찬 고을 창고를 차지하고 있고 어업과 소금 판매의 이익을 마음대로 한다 할지라도,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자신을 기름지게 하는 데 사용하여 명예와 절조를 훼손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번화하고 비옥한 지방을 다스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며, 반드시 산수가 뛰어난 지역을 선택하였다. 산에 오르고 물을 찾아가는 즐거움과 한적하고 후미진 정취가 있어야만 기꺼이 잠깐 외직으로 나가 휴식을 취하려고 하였다. 노계(露雞 야생 닭)와 석봉(石蜂)으로 몸을 보양할 만하고 기생의 춤과 노래로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지라, 날마다 나가 놀며 잔치를 열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살피지 않지만, 항상 위엄과 무게를 갖추고, 관직을 맡게 되느냐 그만두게 되느냐에 대해서는 하찮게 여겼다.

그러므로 관찰사도 그를 공경하면서 두려워하여, 공문(公文)으로 아뢰고 청하면 곡진히 들어주지 않음이 없으며, 늘 암행어사가 옆에서 감시하는 것같이 쉬지 않고 부지런히 근무하고 삼가고 경계하여 스스로 행실을 닦아나갔으며, 무관(武官)이나 음관(蔭官)으로 수령이 된 사람들은 이를 본받음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공을 거두었다. 백성들은 그의 간략함을 사모하고, 아전들은 그의 청렴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공적을 평가할 때는 노상 모든 고을 중에서 으뜸이었으니, 유독 위엄과 명망이 특별하고 명성과 위세를 과시해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청렴한 지조와 간략한 정사(政事)로 문치(文治)가 저절로 넉넉하여 조치를 번거롭게 시행하지 아니해도 효과가 착실히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근세에 와서 명환(名宦 명예롭게 여기는 벼슬)이 무너져 버리고 나자, 사대부들이 날로 더욱 태만하고 방자하여 조금도 명예를 소중히 여기지 않아, 염방(廉防)과 명론(名論)이 날로 따라서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처신함도 유품(流品)과 다름이 없으므로, 전택(田宅)이나 재산 마련을 일삼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일단 가산(家産)에 마음을 둔 이상에는 비옥한 고을의 수령 자리가 하나 나오면, 수만 명이 눈독을 들여 청탁이 어지럽게 쏟아지므로 세력이 강하고 민첩한 자가 아니면 마침내 한 번도 얻지 못하니, 그 자리를 얻기가 본디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밤낮으로 부서기회(簿書期會)하는 사이에 이익을 탐하게 된다. 그래서 예전에 위엄과 무게를 근엄하게 갖추었던 자들도 애써 자신을 억누르며, 대개는 단련되어 익숙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비단 감사나 병사(兵使)가 걸핏하면 군무(軍務)나 이사(吏事 관리의 사무)로써 서로 감찰하고 견책할 뿐만 아니라, 진사(鎭司)나 방영(防營)에서도 모두 상관(上官)으로서 탄압할 수 있으니, 호령을 따르고 받들 겨를도 없는데 설마 어찌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 잔치하며 여유 있게 즐길 수 있겠는가. 아아, 내직이 경시되고 외직이 중시됨으로써 사대부들이 비로소 재능과 지혜를 말하게 되었으니, 임금 측근의 친밀한 신하들이 진실로 휴식할 곳이 없게 된 셈이다.

벗 서군 원덕(徐君元德)이 홍문관 교리로서 은산 수령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가 떠나면서 굳이 나에게 한마디 말을 요구하므로, 나는 자중(自重)하여 상관에게 굽히지 말 것을 굳이 권면했다.

무릇 내직과 외직에 경중(輕重)을 두어 차별하는 것은 역시 외물(外物)에 기대하는 것이다. 군자가 이에 처하면서, 어찌 경중을 분별하며, 지금과 예전에 차이가 있으랴. 그러므로 군자는 밝은 때라 해서 자신의 절의를 드러내 보이려 하지 않고, 어두운 때라 해서 자신의 행실을 태만하게 하지 않는다.” 하였다. ‘자중하라고 말한 것은 그 지체와 명망으로 위엄 있고 무게 있게 굴라는 것이 아니요, ‘굽히지 말라고 한 것은 오만불손하라는 말이 아니다. 청렴하고 간략하며 깨끗하고 신중하면, 백성은 편안하고 아전은 두려워하며, 관직을 맡느냐 못 맡느냐를 하찮게 여긴다면, 상관이 하기 어려운 일로써 책임 지우지 아니하는 법이다. 이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외직을 중시하는 것이 재물이나 이득으로 인한 혜택 때문에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서군(徐君)으로부터 깨끗하고 명예로운 관직이 되었기 때문이라면, 은산은 진실로 장차 다른 고을에 솔선하여 우뚝이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바가 될 것이다. 무릇 이와 같이 된다면 지방에 있는 고을을 중시하는 데 대해 내가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직과 외직의 경중을 말한 것이 도도하면서도 근거가 있으니, 사대부의 관잠(官箴)이 될 만하다.

 

[C-001]은산(殷山) …… 서문 : 은산은 평안도에 속한 현()으로, 현감이 다스렸다. 원덕(元德)은 서유린(徐有隣 : 1738~1802)의 자이다. 서유린은 아우 서유방(徐有防)과 함께 약관 시절부터 연암과 절친한 사이로, 1766년 문과 급제 후 1769년 홍문관 수찬 · 교리 등을 거쳐 1770년경 은산 현감으로 나갔던 듯하다. 정조 즉위 후 관찰사, 참판, 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D-001]관직은 더욱 맑으며 : 비록 지위나 봉록은 높지 않으나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만이 임명될 수 있는 명예로운 관직을 청환(淸宦)이라 한다. 주로 홍문관 · 예문관 · 규장각 등의 당하관(堂下官)을 이른다.

[D-002]걸군(乞郡) : 지방 수령은 본인이나 처의 고향에는 부임하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나, 문과 급제자에 한하여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이나 고향 가까운 곳의 수령직을 청할 수 있는데 이를 걸군(乞郡)이라 한다.

[D-003]석봉(石蜂) : 바위틈에 집을 짓고 사는 석벌을 이른다. 석벌에서 얻는 꿀이 석청(石淸)이다.

[D-004]문치(文治) : 원문은 文理인데, 이는 문교(文敎)와 예악(禮樂)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문치와 같은 말이다.

[D-005]염방(廉防)과 명론(名論) : 염방은 염치와 예방(禮防) 즉 예법을 말하고, 명론은 사대부로서의 명망을 말한다.

[D-006]유품(流品) : 유품잡직(流品雜織)이라 하여, 문무 양반만이 맡는 정직(正職) 이외의 여러 가지 잡다한 벼슬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D-007]부서기회(簿書期會) : 1년 동안의 회계를 장부에 기입하여 기일 내에 조정에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D-008]감사나 병사(兵使) : 원문은 方伯連帥인데, 원래 방백(方伯)은 다섯 나라 제후들의 우두머리, 연수(連帥)는 열 나라 제후들의 우두머리를 뜻한다. 천자의 다음이며 제후보다 상위이다. 柳宗元 封建論 조선 시대에는 고을 수령을 천자국의 제후에 비겼으므로, 방백과 연수를 감사와 병사로 번역하였다.

[D-009]진사(鎭司)나 방영(防營) : 진사는 곧 진영(鎭營)으로, 여기서는 진영장(鎭營將)을 가리킨다. 각 도의 병영이나 수영에 소속된 정 3 품 무관 벼슬이다. 방영은 곧 방어영(防禦營)으로, 여기서는 방어사(防禦使)를 가리킨다.  2 품 무관 벼슬이다.

[D-010]군자는 …… 않는다 : () 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이 한 말로, 소학(小學) 계고(稽古)에 나온다. 그녀는 한밤중에 궁궐에 출입할 때 나는 수레바퀴의 소리만 듣고도, 그 수레를 탄 사람이 위 나라의 어진 대부(大夫) 거원(蘧瑗)임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거원은 어두운 밤일지라도 대궐 문 앞에서 반드시 하마례(下馬禮)를 행하고 어가(御駕)를 끄는 말에게 경례를 표하는 예의를 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릇 충신과 효자는夫忠臣與孝子으로 되어 있는 원문을 연암은 군자는君子으로 조금 고쳐 인용하였다.

[D-011]관잠(官箴) : 관리로서 지켜야 할 계율이라는 뜻이다. ()은 원래 문체의 하나로, 스스로 경계(警戒)하기 위해 짓는 글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대은암(大隱菴)에서 창수(唱酬)한 시의 서문

 

 

무인년 섣달 열나흗날 국지(國之 이구영(李耈永)), 의지(誼之 이서영(李舒永)), 원례(元禮 한문홍(韓文洪))와 함께 밤에 백악(白岳 북악산(北岳山)) 동쪽 기슭에 올라 대은암(大隱巖) 아래 줄지어 앉았노라니, 시냇물 언 것이 똑똑 떨어져 새어나오면서 층층이 얼어서 쌓여 있고, 얼음 밑의 그윽한 샘에서는 옥이 부딪듯 맑은 소리가 쓸쓸하게 들렸다. 달은 몹시 차고 눈은 가무스름하여, 지경은 고요하고 정신은 차분하였다. 서로 바라보며 웃고, 농담하면서 즐겁게 시를 주고받다가, 이윽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옛날 남곤 사화(南袞士華)가 살던 곳이다. 박은 중열(朴誾仲說)은 온 나라에 이름난 선비였는데 중열이 술을 마시려면 반드시 이 대은암으로 왔으며, 그가 시를 지을 적에는 사화와 더불어 짓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당시에 문장과 교유가 융성하여, 관리로 선발된 그 시대의 우수한 인재들을 망라하였다고 할 만했으나, 수백 년이 지나는 사이에 앞사람들의 명승고적은 모두 이미 묻히고 사라져서 알 수 없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더군다나 남곤 같은 자에 있어서랴.

지금 그 무너진 담장과 황폐해진 집터 사이에서 감개하여 서성대는 것은, 성쇠(盛衰)가 때가 있음을 슬피 여김과 동시에 선악(善惡)은 민멸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원례가 이곳에 잠시 거처하여 시를 노래하며 즐겁게 놀면서 흉금을 털어놓는 것이 거의 장차 중열과 맞먹을 정도인 데다, 시냇물과 솔바람에는 상기도 여운이 남아 있다.

아아, 그 두 사람이 여기에서 노닐 적에 그들의 의기(意氣)의 융성함이 또한 어떠했겠는가. 실컷 마시고 한껏 취하여 둘이 서로 속내를 다 털어놓고는 손을 맞잡고 길게 한숨지을 적에, 그 기개는 산악을 무너뜨릴 듯하고 그 언변은 황하나 한수(漢水 양자강의 지류)의 둑이 터진 듯하였을 것이니, 또한 천고(千古)의 인물들을 논평할 적에도 어찌 군자와 소인의 구별에 엄하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중열은 연산군의 조정에서 간()하다 죽었는데, 그의 시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적다고 한스럽게 여기게 된다. 지금도 그의 시를 읽어보면 늠름하여 확고히 설 수 있었음을 상상케 한다. 남곤은 북문(北門)의 화()를 열어 바른 사람들을 참살하였는데, 남곤이 바야흐로 죽을 적에 자신의 글을 다 불태우면서 말하기를, ‘이 글을 후세에 전한다 하더라도 누가 보려 하겠는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문장과 특별한 교유도 진실로 하나의 여사(餘事)일 따름이니, 그것이 어찌 그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관계되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군자인 경우에는 뒷사람이 그 자취를 사모하고 후세에까지도 그 전하는 시가 많지 않음을 한스러워하며, 소인인 경우에는 오히려 자기 손으로 글을 없애 버리기에 바빴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에 있어서랴.”

창수한 시는 대략 몇 편이다. 중미(仲美 연암)가 서문을 썼다.

 

[C-001]대은암(大隱菴)에서 …… 서문 : 영조 34년 무인년 12 14(양력 1759 1 12) 서울 북악(北岳) 동쪽 기슭의 대은암에서 연암이 벗들과 시를 창수한 사실은 이희천(李羲天 : 1738~1771) 석루유고(石樓遺稿) 화백록시서(和白麓詩序)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당시 함께한 사람들은 이희천의 당숙부(堂叔父)인 이구영(李耈永 : 1736~1787), 이희천의 족숙부(族叔父)인 이서영(李舒永 : 1736~1800), 연암과 과거(科擧) 공부를 같이 하던 한문홍(韓文洪 : 1736~1792)이었다. 김윤조, 역주 과정록, 태학사, 1997.

[D-001]남곤 사화(南袞士華) : 사화는 남곤(1471~1527)의 자이다. 남곤은 중종(中宗)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림파를 숙청하고 영의정까지 지냈다. 죽은 뒤에 사림파의 탄핵을 받아 시호와 관작을 삭탈당했다. 대은암(大隱巖)은 남곤의 집 뒤에 있던 바위였는데 그 밑을 흐르는 여울을 만리뢰(萬里瀨)라 하였다. 젊은 시절 남곤의 벗이었던 박은(朴誾)이 각각 그와 같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D-002]박은 중열(朴誾仲說) : 중열은 박은(1479~1504)의 자이다. 박은은 조선 중기의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연산군 때 직언(直言)으로 인해 파직되었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에 걸려 요절하였다.

[D-003]북문(北門)의 화() :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말한다. 기묘사화 때 남곤이 훈구 대신(勳舊大臣)들과 함께 승지와 사관들이 모르도록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와서 중종에게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죄를 청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자소집서(自笑集序)

 

 

아아, “예가 상실되면 재야에서 구한다.禮失而求諸野고 하더니 그 말이 틀림없지 않은가! 지금 중국 천하가 모두 머리 깎고 오랑캐 옷을 입어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알지 못한 지 이미 100여 년인데, 유독 연희(演戱) 마당에서만 오모(烏帽)와 단령(團領)과 옥대(玉帶)와 상홀(象笏 상아로 만든 홀)을 본떠서 장난과 웃음거리로 삼고 있다. 아아, 중원(中原)의 유로(遺老)들이 다 세상을 떠났지만, 그래도 혹시 낯을 가리지 않고는 차마 보지 못할 이가 있겠는가? 아니면 혹시 이 연희 마당에서 그것들을 즐겁게 구경하면서 예로부터 전해 온 제도를 상상하는 이라도 있겠는가?

세폐사(歲幣使 동지사)가 북경에 들어갔을 때 오() 지방 출신 인사와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고장에 머리 깎는 점방이 있는데 성세낙사(盛世樂事 태평성세의 즐거운 일)’라고 편액을 써 걸었소.”

하므로, 서로 보며 크게 웃다가 이윽고 눈물이 주르르 흐르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슬퍼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습관이 오래되면 본성이 되는 법이다. 세속에서 습관이 되었으니 어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부인들의 의복이 이 일과 매우 비슷하다. 옛 제도에는 띠가 있으며 모두 소매가 넓고 치마 길이가 길었는데, 고려 말에 이르러 원() 나라 공주에게 장가든 왕이 많아지면서 궁중의 수식(首飾)이나 복색이 모두 몽골의 오랑캐 제도가 되었다. 그러자 사대부들이 다투어 궁중의 양식을 숭모하여 마침내 풍속이 되어 버려, 3, 4백 년 된 지금까지도 그 제도가 변하지 않고 있다.

저고리 길이는 겨우 어깨를 덮을 정도이고 소매는 동여놓은 듯이 좁아 경망스럽고 단정치 못한 것이 너무도 한심스러운데, 여러 고을 기생들의 옷은 도리어 고아(古雅)한 제도를 간직하여 비녀를 꽂아 쪽을 찌고 원삼(圓衫)에 선을 둘렀다. 지금 그 옷의 넓은 소매가 여유 있고 긴 띠가 죽 드리워진 것을 보면 유달리 멋져 만족스럽다. 그런데 지금 비록 예()를 아는 집안이 있어서 그 경망스러운 습관을 고쳐 옛 제도를 회복하고자 하더라도, 세속의 습관이 오래되어 넓은 소매와 긴 띠를 기생의 의복과 흡사하다고 여기니, 그렇다면 그 옷을 찢어 버리고 제 남편을 꾸짖지 않을 여자가 있겠는가.”

이군 홍재(李君弘載)는 약관 시절부터 나에게 배웠으나 장성해서는 한역(漢譯 중국어 통역)을 익혔으니, 그 집안이 대대로 역관인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다시 문학을 권면하지 않았었다. 이군이 한역을 익히고 나서 관복을 갖추고 본원(本院 사역원(司譯院))에 출사(出仕)하였으므로, 나 역시 속으로 이군이 전에 글을 읽을 적에 자못 총명하여 문장의 도를 알았는데 지금은 거의 다 잊어버렸을 터이니, 재능이 사라지고 말 것이 한탄스럽다.’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이군이 자기가 지은 글들이라고 말하면서 자소집(自笑集)’이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 () 및 서(), (), (), ()  100여 편이 모두 해박한 내용에다 웅변을 토하고 있어 특색 있는 저작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처음에 의아해하며,

 

자신의 본업을 버리고 이런 쓸데없는 일에 종사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물었더니, 이군은 사과하기를,

 

이것이 바로 본업이며 과연 쓸데가 있습니다. 대개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외교에 있어서는 글을 잘 짓고 장고(掌故)에 익숙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원의 관리들이 밤낮으로 익히는 것은 모두 옛날의 문장이며, 글제를 주고 재주를 시험하는 것도 다 이것에서 취합니다.”

하였다. 나는 이에 낯빛을 고치고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대부가 태어나 어렸을 적에는 제법 글을 읽지만, 자라서는 공령(功令 과거 시험 문장)을 배워 화려하게 꾸미는 변려체(騈儷體)의 문장을 익숙하게 짓는다. 과거에 합격하고 나면 이를 변모(弁髦)나 전제(筌蹄)처럼 여기고, 합격하지 못하면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거기에 매달린다. 그러니 어찌 다시 이른바 옛날의 문장이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역관의 직업은 사대부들이 얕잡아 보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훌륭한 글을 남기는 참된 학문을도리어 서리들의 하찮은 기예로 간주하게 될까 두렵다. 그렇게 되면 연희 마당의 오모나 고을 기생들의 긴 치마처럼 여기지 않을 자가 거의 드물것이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이 점을 두려워하여 이 문집에 대해 특별히 쓰고 나서, 다음과 같이 서문을 붙인다.

아아, “예가 상실되면 재야에서 구한다.”고 하였다. 중국 고유의 예로부터 전해 온 제도를 보려면 마땅히 배우들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요, 부인 옷의 고아(古雅)함을 찾으려면 마땅히 고을 기생들에게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장의 융성함을 알고 싶다면 나는 실로 미천한 관리인 역관들에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D-001]예가 …… 구한다 : 한서 30 예문지(藝文志)에 인용된 공자(孔子)의 말이다. 안사고(顔師古)는 주()에서 도읍(都邑)에서 예가 사라졌을 경우 재야에서 구하면 역시 장차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였다.

[D-002]한관(漢官)의 위의(威儀) : () 나라 관리들의 위엄 있는 복식과 전례(典禮) 제도라는 말로, 중화(中華)의 예의 제도를 뜻한다.

[D-003]중원(中原)의 유로(遺老) : 한족(漢族) 왕조인 망한 명() 나라에 대해 여전히 신민(臣民)으로서 충성을 다하는 노인 세대를 가리킨다.

[D-004]() 지방 출신 인사 : () 지방은 중국의 동남쪽 강소성(江蘇省) · 절강성(浙江省) 일대를 가리킨다. 이 지역 사람들은 학문과 예술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명 나라 말에 최후까지 만주족의 침략에 저항하여 유달리 반청(反淸) 사상이 강하였다.

[D-005]소매 : 원문은 인데, ‘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6]()를 아는 집안 :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과 예의 범절을 대대로 전승해 오는 명문가를 시례지가(詩禮之家)’라고 한다. 연암의 집안에서는 5대조 박미(朴瀰)의 부인 정안옹주(貞安翁主)가 중국식의 상복(上服)을 착용한 이후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이를 집안의 예()로 확정했으며, 조부 박필균(朴弼均)도 집안 부인네에게 이를 따르게 했다고 한다. 居家雜服攷 內服

[D-007]이군 홍재(李君弘載) : 홍재는 이양재(李亮載 : 1751~?)의 초명(初名)이다. 이양재는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이언용(李彦容)의 아들이다. 1771(영조 48) 역과(譯科)에 급제하고 사역원(司譯院)에 재직하였다. 譯科榜目 원문은 李君인데, ‘弘載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아래에 나오는 李君은 모두 같다.

[D-008] …… 때문이었다 : 원문은 乃其家世舌官인데, ‘ 자가 추가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9]재능이 …… 한탄스럽다 : 원문은 乾沒可歎인데 간몰(乾沒)’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여기에서는 물속으로 침몰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D-010]특색 있는 …… 있었다 : 원문은 勒成一家인데, 글을 엮어 책을 만드는 것을 늑위성서(勒爲成書)’  늑성(勒成)’이라 하고, 특색 있는 저작을 일가서(一家書)’라고 한다.

[D-011]과연 쓸데가 있습니다 : 대본은 果有用 則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이 되면 문리가 잘 통하지 않아, 이본에 따라 고쳐 번역하였다.

[D-012]변모(弁髦)나 전제(筌蹄) : 무용지물을 뜻한다. 변모는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면 쓸데없는 치포관(緇布冠)과 동자(童子)의 다팔머리를 말하고, 전제는 물고기를 잡고 나면 쓸데없는 통발과 토끼를 잡고 나면 쓸데없는 올가미를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유구(悠久)에게 증정한 서문

 

 

이유구(李悠久)가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장차 평안도의 영유현(永柔縣)으로 가게 되었으므로, 그와 더불어 노닐던 이들이 다 그 집에서 전송하였는데, 죄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노닐고 함께 거처하며 글을 읽고 의리를 이야기하곤 했는데, 지금 유구가 벗들을 버리고 학업조차 중단하고, 서울에서 600리나 떨어진 곳으로 떠나가 벗들과 헤어져서 외로이 지내게 되었단 말인가.

평안도는 산수가 아름답고 도회지가 풍요하고 웅대하며, 풍속이 사치스럽고 방탕하였다. 밖에 나가면 누관(樓觀)을 유람하고, 들어앉으면 기악(妓樂)을 즐기며, 편을 나누어 쌍륙(雙陸) 놀이를 하고 무리를 지어 투호(投壺) 놀이를 하며, 맑은 노래와 칼춤이 늘 좌우에 있으니, 그만하면 서울 생각도 잊을 만하고 외로이 지내는 근심을 위로할 만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안색은 우울해하는 것 같고 풀이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과도 같다. 나는 이로써 유구가 오래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며, 벗들과 헤어져 외로이 지내지 않을 것임을 안다. 남아 있는 사람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을 것이 아니요, 떠난 사람은 반드시 속히 돌아올 것임을 안다. 이런 까닭에 나는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어떤 이가,

 

유구가 비록 배움을 위해서라 하지만 장차 혼정신성(昏定晨省 부모님을 보살펴 드리는 예의)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은 어찌하겠는가?”

하기에, 나는,

 

옛사람 중에는 수천 리 먼곳으로 유학하는 사람도 있었네. 하물며 그의 부모님이 아직 늙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을 오래 붙잡아둘 분들이 아님에랴!”

했더니, 모두들

 

그렇겠다.”

고 했다.

 

 

[C-001]유구(悠久) : 이영원(李英遠 : 1739~1799)의 자이다. 이영원은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경상 감사, 대사헌, 한성부 판윤 등을 지낸 이연상(李衍祥)의 아들로서, 1774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그의 부친 이연상은 1759년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한 이후 1771년 문과 급제하기 전까지 신녕 현감(新寧縣監) 등 지방관으로 전전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여름날 밤잔치의 기록

 

 

스무이튿날 국옹(麯翁)과 함께 걸어서 담헌(湛軒)의 집에 이르렀다. 풍무(風舞)가 밤에 왔다. 담헌이 가야금을 타니, 풍무는 거문고로 화답하고, 국옹은 맨상투 바람으로 노래를 불렀다. 밤이 깊어 떠도는 구름이 사방으로 얽히고 더운 기운이 잠깐 물러가자, 줄에서 나는 소리는 더욱 맑게 들렸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하고 있어 마치 단가(丹家)가 장신(臟神)을 내관(內觀)하고 참선하는 승려가 전생(前生)을 돈오(頓悟)하는 것 같았다. 무릇 자신을 돌아보아 올바를 경우에는 삼군(三軍)이라도 반드시 가서 대적한다더니, 국옹은 한창 노래 부를 때는 옷을 훨훨 벗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품이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여겼다.

매탕(梅宕)이 언젠가 처마 사이에서 왕거미가 거미줄 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나에게 말하기를,

 

절묘하더군요! 때로 머뭇거리는 것은 마치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고, 때로 재빨리 움직이는 것은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으며, 파종한 보리를 발로 밟아주는 것과 같고, 거문고 줄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과도 같습디다.”

하더니, 지금 담헌이 풍무와 어우러져 연주하는 것을 보고서 나는 왕거미의 행동을 깨우치게 되었다.

지난해 여름에 내가 담헌의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담헌은 한창 악사(樂師) ()과 함께 거문고에 대해 논하는 중이었다. 때마침 비가 올 듯이 동쪽 하늘가의 구름이 먹빛과 같아, 천둥소리 한 번이면 용이 승천하여 비를 부를 수 있을 듯싶었다. 이윽고 긴 천둥소리가 하늘을 지나가자, 담헌이 연()더러

 

이것은 무슨 성()에 속하겠는가?”

하고서, 마침내 거문고를 당겨 천둥 소리와 곡조를 맞추었다. 이에 나도 천뢰조(天雷操)를 지었다.

 

 

[D-001]국옹(麯翁) : 누구의 호인지 알 수 없다. 홍대용(洪大容)의 벗으로, ()은 이씨(李氏)이며 시와 글씨에 빼어났다고 한다. 湛軒書 內集 卷3 次友人韻却寄李麯翁 국옹은 혹시 이한진(李漢鎭 : 1732~1815. 호 경산京山)의 일호(一號)일지 모른다. 이한진은 명필로서 전서(篆書)를 특히 잘 썼을 뿐 아니라 음률에도 밝았으며, 퉁소의 명수로서 홍대용, 김억(金檍) 등과 즐겨 합주(合奏)하였다고 한다. 만년에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하기도 했다.

[D-002]담헌(湛軒) : 홍대용의 당호이다. 담헌의 집은 서울 남산 기슭 영희전(永禧殿) 북쪽에 있었는데 그 집의 유춘오(留春塢)라는 정원에서 악회(樂會)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D-003]풍무(風舞) : 김억(金檍 : 1746~?)의 호이다. 본관은 청양(靑陽)이고 자는 효직(孝直)이며,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김종택(金宗澤)의 아들이다. 1774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금사(琴師)이자 가객(歌客)으로 유명하였다.

[D-004]떠도는 …… 물러가자 : 원문은 流雲四綴 暑氣乍退인데, 종북소선에는 暑氣乍退 流雲四綴로 되어 있다.

[D-005]줄에서 나는 소리 : 원문은 絃聲인데, 종북소선에는 兩絃으로 되어 있다.

[D-006]단가(丹家)가 장신(臟神)을 내관(內觀)하고 : 단가는 연단술(煉丹術)을 행하는 도사(道士)를 이른다. 연단술은 기공(氣功)으로 정신을 수련하는 내단(內丹)과 약물을 복용하는 외단(外丹)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단에서 오장(五臟)에 깃든 신()을 관조하는 수련법을 내관이라 한다.

[D-007]무릇 …… 대적한다더니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부동심(不動心)의 방법으로 용기(勇氣)에 관해 논한 대목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거기에서 증자(曾子)는 공자로부터 대용(大勇)에 관해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아 올바를 경우에는 비록 수천 수만 명이라도 나는 가서 대적할 것이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고 하였다. 여기서 ()’ 자는 ()’ 자와 뜻이 같다.

[D-008]두 다리를 ……  : 원문은 磅礴인데, 종북소선에는 盤礡으로 되어 있다. 서로 같은 말로, 무례하게 두 다리를 쭉 뻗은 모습을 뜻한다.

[D-009]매탕(梅宕) : 이덕무(李德懋)의 일호(一號)이다. 종북소선에는 炯菴으로 되어 있는데, 이 역시 이덕무의 일호이다.

[D-010]절묘하더군요 …… 같습디다 :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서 이덕무가 거미가 줄을 치는 모습을 관찰하고서 한 말과 같다. 靑莊館全書 卷63

[D-011]지금 …… 보고서 : 원문은 今湛軒與風舞相和也인데, 종북소선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2]() : 연익성(延益成)이다. 담헌서(潭軒書) 내집(內集) 4 연익성에 대한 제문祭延益成文이 실려 있는데, 이에 따르면 연익성은 뛰어난 거문고 연주가로서 장악원(掌樂院)의 악공을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53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홍대용과는 30년 동안 교유하였다고 한다.

[D-013]용이 …… 듯싶었다 : 원문은 可以龍矣인데 문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可以龍이든 可以龍矣이든 글자가 누락된 듯하기에 문맥을 감안하여 의역하였다.

[D-014]이것은 …… 속하겠는가 : 전통음악의 다섯 가지 기본 음률인 궁() · () · () · () · ()의 오성(五聲) 중 어디에 속하느냐고 물은 것이다.

[D-015]나도 …… 지었다 : ()는 금곡(琴曲)에 붙이는 명칭이다. 여기서는 천뢰조라는 금곡의 가사(歌辭)를 지었다는 뜻이다. 종북소선에는 이 구절이 終未得云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마침내 거문고를 당겨 그에 맞추어 조율하였으나, 끝내 조율하지 못하였다.”라고 번역해야 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초구(貂裘)에 대한 기록

 

 

선문왕(宣文王)이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 있다가 돌아와서는 개연히 복수할 뜻을 품었으니, 하루라도 심양에 있던 날을 잊을 수 없어서였다. 이때 명() 나라가 망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 나라가 이미 천하에서 뜻을 이루어 세계만방을 예속시킴에 따라, 중국 천하의 사대부들이 모두 이미 머리 깎고 오랑캐 옷을 입었으며, 그 조정에 나아가 그 임금을 섬기는 자들 역시 이미 있었으니, 천하에 다시 명 나라 왕실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독 선문왕의 뜻만은 언제나 명 나라의 왕실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선문왕이 대통(大統)을 이어받은 뒤 맨 먼저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을 초빙하여 빈사(賓師)의 예로써 대우하고, 위대한 명 나라大明의 원수를 갚고 선왕(先王)의 치욕을 씻을 방법을 도모했으니, 이는 먼저 배우고 난 뒤에 신하로 대하려는 것이었다. 선생은 아침저녁으로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아뢰었는데, 왕이 그 말을 즐겨 들음으로써 산중에 은거하던 선비들이 모두 나와서 왕의 조정에 줄을 잇게 되었다.

하루는 선생이 대궐에서 숙직하고 있었는데 세자가 무릎을 꿇고서 왕이 손수 쓴 편지를 직접 건네주므로, 선생은 달려나아가 조정에 입시(入侍)하였다. 왕이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초구(貂裘)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연계(燕薊)에는 추위가 일찍 오니 이것으로 바람과 눈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이에 선생은 드디어 왕에게 있는 힘을 다할 것을 약속하였으니, 대개 앞으로 10년 동안 인구를 늘리고 물자를 비축한 뒤에 대의(大義)를 천하에 떨쳐, 비록 임금과 신하가 함께 군중(軍中)에서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얼마 안 있어 왕이 승하하고 나자 산중에 은거하던 선비들도 차차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떠나갔다. 선생은 이미 물러나 파곡(葩谷)에 살고 있었는데, 늘 혼자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 가슴을 치고 하늘에 부르짖으며 초구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적신(賊臣)들 중에 음해하고자 하는 자들이 많아 유언비어를 만들어 청 나라에 넌지시 알리니, 청 나라 사람들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 이르렀다.

선생이 안으로는 이미 적신들에게 자주 배척을 당하고 밖으로는 청 나라 사람들에게 협박을 받았지만, 배우는 사람들과 더불어 반드시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하여 선왕(先王 효종(孝宗))의 뜻을 밝히니, 선왕에게서 뜻을 얻지 못한 자들이 선생을 많이 원망하여 선생을 여러 번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선생은 바닷가로 귀양 가서도, 춘추대의를 펴지 못하고 종주국(宗主國 명 나라)이 장차 위태로워질 것을 원통히 여기고, 매양 선왕을 추모하며 초구를 안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침내 죄인들이 다 처벌을 받고 선생은 돌아오게 되었으나, 선왕의 유신(遺臣)들은 이미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에 다시는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일을 말하지 않고, 아득한 40년 세월 동안 조공(朝貢)하는 사신이 해마다 연계(燕薊)의 교외를 달려가게 되었다.

급기야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적신들이 다시 정권을 쥐자, 선생이 선왕에게 불만을 품어 종통(宗統)을 폄하시키고 복()을 낮추었다고 하여 끝내 죽음에 몰아넣고 말았으니, 국내에서는 마침내 초구에 대한 일에 관해 말하기를 꺼렸다. 문인들이 선생의 유명(遺命)에 따라 파곡(葩谷)에 사우(祠宇)를 세워 명 나라 현황제(顯皇帝 신종(神宗))와 열황제(烈皇帝 의종(毅宗))를 제사하였다. 숙종(肅宗) 때 금원(禁苑)에 대보단(大報壇)을 쌓아 두 분 황제를 아울러 제사하면서도, 파곡의 사우를 보존하여 선생의 의리를 잊지 않게 하였다.

지금 임금今上 영조(英祖)32년에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게 되어 선생의 자손이 선생의 유상(遺像)과 초구를 받들어 임금께 올리니, 임금께서 찬()을 지어 내렸다. 3 19일은 열황제가 사직을 위해 순절(殉節)하신 날이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이후 세 번째 돌아오는 갑신년(1764, 영조 40)에 임금께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친히 대보단에 제사를 지냈다.

이에 즈음하여 마을 안의 부형들이 성() 서쪽에 있는 송씨의 우사(寓舍)로 가서, 선생의 초상에 절하고 초구를 꺼내어 대청 가운데에 펼쳐 놓고 서로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모두 나에게 부탁하기를,

 

곡부(曲阜)의 공자 후손들은 공자가 신던 신발을 보배로 여겼고, 정호(鼎湖)의 신하들은 떨어진 황제(黃帝)의 활을 안고 울었다네. 더구나 이 초구는 선왕께서 하사하시고 선생께서 받으신 것이 아닌가. 더더구나 열황제가 순절하신 때가 바로 이해요 이날이 아닌가!”

하기에,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공손히 손 모아 큰절하며 수락하였다. 다음과 같이 시를 덧붙인다.

 

우리 선왕에게도 / 維我先王

위에 임금 있었나니 / 亦維有君

대명의 천자님은 / 大明天子

우리 임금의 임금일레 / 我君之君

선왕에게 신하 있었나니 / 先王有臣

이름은 시열 자는 영보라 / 時烈英甫

천자님께 충성하길 / 忠于天子

제 임금께 충성하듯 했네 / 如忠其主

선왕에게 원수 있었나니 / 先王有仇

저 건주 오랑캐라 / 維彼建州

어찌 단지 사감(私憾) 때문이리 / 豈獨我私

대국의 원수로세 / 大邦之讎

왕께서 복수코자 / 王欲報之

대로 불러 상의하며 / 大老與謀

힘쓸지어다 / 王曰懋哉

초구를 하사하노라 하셨네 / 賜汝貂裘

서리 만난 갖옷은 / 秋毫啣霜

북쪽 변방에서 빛을 발했을 텐데 / 紫塞騰光

큰 공을 못 이룬 채 / 大功未集

왕이 문득 승하하셨네 / 王遽陟方

대로는 상심하여 / 大老其寒

갖옷 안고 눈물 흘리니 / 抱裘而泣

그 눈물 땅에 가득 / 其淚滿地

벽옥으로 변했고야 / 化而爲碧

갖옷 아니면 추워서가 아니라 / 匪裘不溫

미처 입지 못한 때문이요 / 未服是矣

선왕께서 내린 명령 / 先王之命

좌절된 때문일레 / 命獘是矣

오늘 저녁이 어느 땐고 / 今夕何辰

세 번째 돌아온 갑신년이라 / 甲其三申

우리는 망한 명 나라의 백성이요 / 明之遺民

선왕은 성인이셨네 / 先王聖人

 

 

[D-001]선문왕(宣文王) : 효종(孝宗)이다. 효종은 시호(諡號)가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이다.

[D-002]빈사(賓師)의 예로써 대우하고 : 빈사는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군주로부터 귀빈 대접을 받는 사람을 이른다. 대본은 以賓師之禮인데, ‘ 자 다음에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3]선왕(先王) : 청 나라에 항복한 인조(仁祖)를 가리킨다.

[D-004]먼저 ……  : 군주가 현인(賢人)을 초빙할 경우 신하로 삼기 이전에 먼저 스승으로 섬긴다는 뜻이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 탕왕(湯王)은 이윤(伊尹)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들지 않게 왕도(王道)를 행하였고,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들지 않게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하였다.

[D-005]성의 정심(誠意正心)의 학문 : 대학(大學)을 이른다. 여기에서 군주가 자신의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짐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화평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서도 대학의 말을 인용하고 나서 옛날의 이른바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뜻을 성실히 하는 이는 장차 그럼으로써 큰 일을 하려는 것이었다.” 하였다.

[D-006]초구(貂裘) :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갖옷을 말한다. 값비싼 방한복이다.

[D-007]연계(燕薊) : 유계(幽薊)라고도 하며, 옛 연() 나라 땅인 유주(幽州) 계지(薊地), 즉 지금의 북경을 포함한 하북성(河北省) 일대를 가리킨다.

[D-008]10 …… 뒤에 : 원문은 生聚十年인데, 이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원년(元年) 조에 월() 나라가 “10년 동안 인구를 늘리고 물자를 비축하며, 10년 동안 백성을 잘 가르치면十年生聚 而十年敎訓” 20년 뒤에는 오() 나라가 월 나라에게 망할 것이라고 우려한 오자서(伍子胥)의 말에 출처를 둔 것이다. 그러므로 상하가 합심해서 부국강병을 도모하여 원수를 갚는 것을 생취교훈(生聚敎訓)’이라 한다.

[D-009]파곡(葩谷) :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에 있는 화양동(華陽洞) 구곡(九曲) 중의 제 9 곡인 파곶(葩串 : 또는 巴串)을 말한다

[D-010]적신(賊臣) …… 알리니 : 1650(효종 1)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 나라에 조선의 북벌계획을 밀고한 사실을 이른다.

[D-011]춘추대의(春秋大義) : 춘추에서 강조한바 주() 나라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의리를 이른다. 여기서는 명 나라를 존숭하고 청 나라를 배척하는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의리를 이른다.

[D-012]바닷가로 귀양 가서도 : 효종비(孝宗妃)의 상()으로 인한 갑인년(1674)의 예송(禮訟)에서 서인(西人)들이 남인(南人)들에게 패함에 따라 우암도 파직, 삭탈되고 경상도 장기(長鬐)와 거제도(巨濟島) 등지로 귀양 간 사실을 이른다.

[D-013]죄인들이 …… 되었으나 : 1680(숙종 6)의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들이 정계에서 숙청되고 서인들이 복귀한 사건을 이른다. 당시 우암은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고, 이어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D-014]급기야 …… 말았으니 : 1689(숙종 15)의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들이 숙청되고 남인들이 재집권한 사건을 이른다. 당시 숙종이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후궁 장씨(張氏)의 소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해 우암이 상소를 올려 다시 반대론을 제기하자, 이에 격분한 숙종은 우암을 비롯한 서인들을 축출하고 남인들을 불러들였다. 우암은 세자 책봉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기해년(1659)의 예송(禮訟)에서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을 둘로 나누고 효종이 적장자(嫡長子)가 아니라는 이유로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의 복상을 삼년복(三年服)이 아닌 기년복(朞年服)으로 강등시켰다는 공격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D-015]사우(祠宇) : 화양동(華陽洞)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를 가리킨다.

[D-016]() …… 우사(寓舍) : 대본은 宋氏城西之寓舍로 되어 있으나, 이본에 의거하여 宋氏之城西寓舍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D-017]곡부(曲阜) :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공자의 고향이다. 동관한기(東觀漢記) 동평헌왕창(東平憲王蒼) () 나라 공씨(孔氏)들이 아직까지도 중니의 수레, 가마, (), 신발을 간직하고 있으니, 훌륭한 덕을 지녔던 사람은 그 영광이 멀리까지 미침을 밝힌 것이다.” 하였다.

[D-018]정호(鼎湖) …… 울었다네 : 정호는 옛날에 황제(黃帝)가 솥을 만들고 난 뒤 승천(昇天)했다는 곳이다. 사기 28 봉선서(封禪書), 황제가 용을 타고 신하와 후비(后妃) 70여 인도 함께 용에 올라타고 승천하자 남아 있던 신하들이 함께 가려고 용의 수염을 잡았는데, 용의 수염이 빠지면서 신하들은 추락하고 황제의 활과 검도 함께 떨어졌다고 하였다. 제왕(帝王)의 서거를 슬퍼하는 고사로 쓰인다. 화양구곡(華陽九曲)에 읍궁암(泣弓巖)이 있다.

[D-019]건주(建州) : 지금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동남 지역으로, 이곳의 여진족(女眞族)들이 중심이 되어 청 나라를 세웠다.

[D-020]대로(大老) : 덕망 높은 노인이란 뜻으로, 노론에서 송시열을 높여 대로라고 불렀다.

[D-021]벽옥으로 변했고야 : 장자 외물(外物)에 주() 나라 영왕(靈王)의 어진 신하인 장홍(萇弘)이 쫓겨나서 촉() 땅에서 배를 갈라 죽었는데 그 피를 3년 동안 간직해 두었더니 벽옥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충신열사가 흘린 피를 벽혈(碧血)이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조부께서 손수 쓰신 한림(翰林) 추천서에 대한 기록

 

 

아아, 이는 나의 조부께서 한림 추천을 맡았을 때 손수 두 사람의 이름을 쓴 것이다. 그 두 사람이 누군가 하면 영의정 신공 만(申公晩)과 이조 판서 윤공 급(尹公汲)이다.

우리 왕조가 건국한 지 이미 오래되다 보니 사대부들이 전적으로 문벌만을 숭상하는데, 그 문벌의 청환(淸宦)으로는 한림과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이조의 정랑(正郞)과 좌랑은 3품 이하의 관원에 대해서 통색(通塞)을 모두 주관하며 또 자기 후임을 스스로 추천하지만, 그 이름과 지위는 낭서(郞署)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한림의 고사(故事 오래된 규례)에는 회천(回薦)이 대문에 이르러, 예문관에 소속된 하인이 고사에 따라,

 

자리에 계신 분들은 회피하셔야겠습니다.”

하고 아뢰면, 아무리 대관(大官)이라도 전에 검열을 지낸 사람이 아니면 으레 다 자리를 피해야 한다. 선발에 든 사람이 문벌과 재학(才學)에 털끝만큼의 하자도 지적되지 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완천(完薦 추천완료)이 되었다. 완천한 날에는 분향하고 맹세하기를,

 

추천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면 재앙이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것은 사관(史官)의 직무를 중히 여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벼슬은 비록 낮으나 어디에도 통제되고 소속되지 않았으니, 이조의 정랑과 좌랑에 비해서 이름이 더욱 화려하고 돋보였다.

옛날에 종더러 말에게 콩을 더 주라고 훈계한 자가 있었고, 곡식을 말릴 적에 직접 참새를 쫓아 버린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좀스럽다는 비방을 입어 종신토록 청선(淸選)이 막히고 말았다. 말에게 콩을 더 주도록 하고 참새를 쫓아 버린 것이 그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너무도 각박하다는 혐의를 거의 면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대부들이 집에서 생활할 적에도 오히려 모든 일에 친히 관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관직 생활을 할 적에 청렴한 절조를 함양하고 명론(名論 명망)을 중히 여기기를 바라는 것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이로써 본다면, 사소한 부분을 질책하는 것은 너무도 각박한 데 가까운 것이 아니라, 바로 사대부를 특별히 함양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 문벌과 재학이 한림의 선발에 충분히 들 만한 사람이라면, 비록 10년 동안이나 관리로 등용되지 못할지라도 오히려 스스로 기다리며, 등급을 뛰어넘어 승진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로자(當路者)들은 명론이 하급 관원들에게 있는 것을 싫어하여, 마침내 한림의 고사를 일체 파괴해서 한림 추천을 소시(召試)로 바꾸고, 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일반 관리로 만들어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사대부들이 거침없이 날로 부귀영달의 길로 치달려, 한 자급(資級)이나 반 자급이라도 혹시 남에게 뒤질까봐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었으니, 300년 동안 사대부를 특별히 함양했던 제도가 거의 다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아아, 기거주(起居注)는 시정기(時政記)와 일력(日曆)을 맡은 중책인데도 분향하고 맹세하는 말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누가 다시 조부의 이 글이 한림의 고사와 관계된 것인 줄을 알겠는가. 조부께서 한림으로 추천한 두 분은 오히려 사대부들이 관직에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게 하고 명예를 지키도록 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으며, 편지 글씨가 모두 대단히 뛰어나서 당시에 벼슬아치들이 이를 본떴다고 한다.

 

 

[C-001]조부께서 …… 기록 : 연암의 조부 박필균(朴弼均 : 1685~1760) 1729(영조 5)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로서 한림(翰林) 즉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의 후보자 추천을 맡았던 사실을 말한다. 연암집 9에 실린 조부 박필균의 가장(家狀)에도 중요한 사실로 언급되어 있다.

[D-001]신공 만(申公晩) : 신만(1703~1765) 1762(영조 38)에 영의정이 되었다.

[D-002]윤공 급(尹公汲) : 윤급(1697~1770) 1763(영조 39)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D-003]통색(通塞) : 등용과 저지라는 뜻으로, 관원에 대한 추천권을 말한다. 일반 관직의 후보자로 천거하는 것을 통망(通望), 청환(淸宦)의 후보자로 천거하는 것을 통청(通淸)이라 한다.

[D-004]회천(回薦) : 예문관 검열의 후보자를 정한 뒤에 추천서를 가지고 전 · 현직 검열을 지낸 선배들을 두루 찾아가 가부를 묻는 것을 말한다. 그중의 단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추천할 수 없게 된다.

[D-005]청선(淸選) : 청환(淸宦)의 후보자로 선발되는 것을 말한다.

[D-006]당로자(當路者)들은 …… 만들어 버렸다 : 영조 17(1741)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이 영조의 탕평책에 호응하여, 한림에 대해 회천(回薦)하던 규례를 혁파하고 제술(製述)을 시험하여 선발하는 한림소시(翰林召試)의 제도를 만들고, 아울러 이조의 정랑과 좌랑이 통청(通淸)하던 규례도 혁파한 사실을 말한다. 그중 특히 한림 회천은 국초부터 300년 동안 전해 내려온 규례였으므로, 이를 혁파하는 데 대한 반발이 적지 않았다. 英祖實錄 17 4 19, 22, 25

[D-007]파괴해서 : 원문은 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勝溪文庫) 필사본에는 로 되어 있다.

[D-008]기거주(起居注) : 예문관 검열을 말한다. 원래 기거주는 고려 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 5 품 관직으로, 사관직(史官職)을 주로 하고 간쟁(諫爭)과 봉박(封駁)의 임무를 지닌 간관(諫官)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예문관 검열이 사관(史官)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D-009]시정기(時政記) : 임금이 정무를 집행할 때에 있었던 중요 사안들을 훗날 실록(實錄) 편찬의 자료로 삼기 위해서 사관이 추려 적은 기록을 말한다.

[D-010]맹세하는 : 원문은 誓祝인데, ‘祝誓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1]편지 …… 한다 : 특히 윤급의 편지 글씨체는 윤상서체(尹尙書體)’라 하여 사람들이 다투어 모방했다고 한다. 槿域書畫徵 卷5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소완정(素玩亭)의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에 화답하다

 

 

유월 어느날 낙서(洛瑞)가 밤에 나를 찾아왔다가 돌아가서 기()를 지었는데, 그 기에,

 

내가 연암(燕巖) 어른을 방문한즉, 어른은 사흘이나 굶은 채 망건도 쓰지 않고 버선도 신지 않고서, 창문턱에 다리를 걸쳐 놓고 누워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계셨다.”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연암이란 금천(金川)의 협곡에 있는 나의 거처인데, 남들이 이것으로 내 호()를 삼은 것이었다. 나의 식구들은 이때 광릉(廣陵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었다.

나는 본래 몸이 비대하여 더위가 괴로울 뿐더러,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푹푹 찌고 여름이면 모기와 파리가 들끓고 무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을 것을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매양 여름만 되면 늘 서울집에서 더위를 피하는데, 서울집은 비록 지대가 낮고 비좁았지만, 모기 · 개구리 ·  · 나무의 괴로움은 없었다. 여종 하나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문득 눈병이 나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주인을 버리고 나가 버려서, 밥을 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행랑 사람에게 밥을 부쳐 먹다 보니 자연히 친숙해졌으며, 저들 역시 나의 노비인 양 시키는 일 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고요히 지내노라면 마음속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가끔 시골에서 보낸 편지를 받더라도 평안하다는 글자만 훑어볼 뿐이었다. 갈수록 등한하고 게으른 것이 버릇이 되어, 남의 경조사에도 일체 발을 끊어버렸다. 혹은 여러 날 동안 세수도 하지 않고, 혹은 열흘 동안 망건도 쓰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간혹 말없이 차분하게 앉았기도 하였다. 어쩌다 땔나무를 파는 자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서 그와 함께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간곡하게 하는 말이 종종 수백 마디였다. 사람들이 간혹 힐책하기를, 세상 물정에 어둡고 얼토당토아니하며 조리가 없어 지겹다고 해도 이야기를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집에 있어도 손님이요 아내가 있어도 중과 같다고 기롱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느긋해하며, 바야흐로 한 가지도 할 일이 없는 것을 스스로 만족스러워하였다.

새끼 까치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짤뚝거리니 보기에도 우습길래, 밥알을 던져주었더니 더욱 길들여져 날마다 와서 서로 친해졌다. 마침내 그 새를 두고 농담하기를,

 

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하였다. 우리나라의 속어에 엽전을 푼이라 하므로, 돈을 맹상군이라 일컬은 것이다.

자다가 깨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자도 깨워주는 이가 없으므로, 혹은 종일토록 실컷 자기도 하고, 때로는 글을 저술하여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그마한 철현금(鐵絃琴)을 새로 배워, 권태로우면 두어 가락 타기도 하였다. 혹은 친구가 술을 보내주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흔쾌히 술을 따라 마셨다. 술이 취하고 나서 자찬(自贊)하기를,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양주(楊朱)와 같고 / 吾爲我似楊氏

만인을 고루 사랑하는 것은 묵적(墨翟)과 같고 / 兼愛似墨氏

양식이 자주 떨어짐은 안회(顔回)와 같고 / 屢空似顔氏

꼼짝하지 않는 것은 노자(老子)와 같고 / 尸居似老氏

활달한 것은 장자(莊子)와 같고 / 曠達似莊氏

참선하는 것은 석가(釋迦)와 같고 / 參禪似釋氏

공손하지 않은 것은 유하혜(柳下惠)와 같고 / 不恭似柳下惠

술을 마셔대는 것은 유영(劉伶)과 같고 / 飮酒似劉伶

밥을 얻어먹는 것은 한신(韓信)과 같고 / 寄食似韓信

잠을 잘 자는 것은 진단(陳摶)과 같고 / 善睡似陳搏

거문고를 타는 것은 자상(子桑)과 같고 / 皷琴似子桑

글을 저술하는 것은 양웅(揚雄)과 같고 / 著書似揚雄

자신을 옛 인물과 비교함은 공명(孔明)과 같으니 / 自比似孔明

나는 거의 성인에 가까울 것이로다 / 吾殆其聖矣乎

다만 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 但長遜曹交

청렴함은 오릉(於陵)에 못 미치니 / 廉讓於陵

부끄럽기 짝이 없도다 / 慚愧慚愧

 

하고는, 혼자서 껄껄대고 웃기도 했다.

이때 나는 과연 밥을 못 먹은 지 사흘이나 되었다. 행랑아범이 남의 집 지붕을 이어주고서 품삯을 받아, 비로소 밤에야 밥을 지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밥투정을 부려 울며 먹으려 하지 않자, 행랑아범은 성이 나서 사발을 엎어 개에게 주어 버리고는 아이에게 뒈져 버리라고 악담을 하였다. 이때 나는 겨우 밥을 얻어먹고 식곤증이 나서 누웠다가, 그에게 장괴애(張乖崖)가 촉( 사천성(四川省)) 지방을 다스릴 때 어린아이를 베어 죽인 고사를 들어 깨우쳐 주고 나서, 또 말하기를,

 

평소에 가르치지 않고서 도리어 꾸짖기만 하면, 커 갈수록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상하게 되는 법이다.”

하였다. 그러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은하수는 지붕에 드리우고, 별똥별은 서쪽으로 흐르며 흰 빛줄기를 공중에 남겼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낙서(洛瑞)가 와서 묻기를,

 

어른께서는 혼자 누워서 누구와 이야기하십니까?”

하였으니, ()에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계셨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낙서는 또 눈 내리는 밤에 떡을 구워 먹던 때의 일을 그 글에 기록했다. 마침 나의 옛집이 낙서의 집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동자(童子) 때부터 그는 나의 집에 손님들이 날마다 가득하고 나도 당세에 뜻이 있었음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나이 40이 채 못 되어 이미 나의 머리가 허옇게 되었다며, 그는 자못 감개한 심정을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병들고 지쳐서 기백이 꺾이고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어, 지난날의 모습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다. 이에 기()를 지어 그에게 화답한다.

 

 

낙서의 기()는 다음과 같다.

 

 

유월 상현(上弦 7~8일경)에 동쪽 이웃 마을로부터 걸어가서 연암 어른을 방문했다. 이때 하늘에는 구름이 옅게 끼고 숲속의 달은 희끄무레했다. 종소리가 처음 울렸는데 시작할 때에는 우레처럼 은은(殷殷)하더니, 끝날 때에는 물거품이 막 흩어지는 것처럼 여운이 감돌았다. 어른이 집에 계시려나 생각하며 골목에 들어서서 먼저 들창을 엿보았더니 등불이 비쳤다. 그래서 대문에 들어섰더니, 어른은 식사를 못한 지가 이미 사흘이나 되셨다. 바야흐로 버선도 신지 않고 망건도 쓰지 않은 채 창문턱에 다리를 걸쳐 놓고 행랑것과 문답하고 있다가, 내가 온 것을 보고서야 드디어 옷을 갖추어 입고 앉아서, 고금의 치란(治亂) 및 당세의 문장과 명론(名論)의 파별(派別) · 동이(同異)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하시므로, 나는 듣고서 몹시 신기하게 여겼다.

이때 밤은 하마 삼경이 지났다. 창밖을 쳐다보니 하늘 빛은 갑자기 밝아졌다 갑자기 어두워졌다 하고, 은하수는 하얗게 뻗쳐 더욱 가볍게 흔들리며 제 자리에 있지 않았다. 내가 놀라서,

저것이 어째서 그러는 거지요?”

했더니, 어른은 빙그레 웃으시며,

자네는 그 곁을 한번 보게나.”

하셨다. 대개 촛불이 꺼지려 하면서 불꽃이 더욱 크게 흔들린 것이었다. 그제서야 조금 전에 본 것은 이것과 서로 어리비쳐 그렇게 된 것임을 알았다. 잠깐 사이에 촛불이 다 되어, 마침내 둘이 어두운 방안에 앉아서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내가 말하기를,

예전에 어른께서 저와 한마을에 사실 적에 눈 내리는 밤에 어른을 찾아뵌 적이 있었지요. 어른께서는 저를 위해 손수 술을 데우셨고, 저 또한 떡을 손으로 집고 질화로에서 구웠는데, 불기운이 훨훨 올라와 손이 몹시 뜨거운 바람에 떡을 잿속에 자주 떨어뜨리곤 하여, 서로 쳐다보며 몹시 즐거워했었지요. 그런데 지금 몇 년 사이에 어른은 머리가 이미 허옇게 되시고 저 역시 수염이 거뭇거뭇 돋았습니다.”

하고는, 한참 동안 서로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이날 밤 이후 13일 만에 이 기()가 완성되었다.

 

[C-001]소완정(素玩亭) : 이서구(李書九 : 1754~1825)의 일호이다. 그 밖에 강산(薑山) · 척재(惕齋) 등의 호가 있다. 자는 낙서(洛瑞 : 또는 洛書)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연암에게 문장을 배웠으며,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자학(文字學)과 전고(典故)에 조예가 깊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1774년 정시(庭試)에 합격한 후 전라도 관찰사, 우의정 등을 지냈다.

[D-001]금천(金川) : 황해도에 속한 군()으로 개성(開城) 근처에 있었다. 박지원이 은거했던 그곳의 한 협곡은 입구에 제비들이 항시 둥지를 틀고 있다고 하여 제비 바위라는 뜻으로 연암(燕巖)이라 불렀다고 한다.

[D-002]여름이면 …… 들끓고 : 원문은 夏夜蚊蠅인데, 문리가 잘 통하지 않아 夏多蚊蠅으로 되어 있는 몇몇 이본들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D-003]시골에서 …… 받더라도 : 당시 연암은 식구들을 경기도 광주의 석마(石馬 : 지금의 분당)에 있던 처가에 보냈다. 그곳에 있는 가족들이 보낸 안부 편지를 받았다는 뜻이다.

[D-004]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 돈이 한푼도 없다는 말이다. 맹상군은 전국(戰國) 시대 제() 나라의 공자(公子)인데, 성은 전()이고 이름은 문()이다. 연암이 아래에 덧붙인 설명을 참조하면, 우리나라에서 엽전을 푼이라고 했기 때문에, 맹상군의 이름 전문(田文)이 엽전 한푼錢文과 같다고 농담을 한 것이다.

[D-005]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 평원군은 전국 시대 조() 나라의 공자인데 문하(門下)에 식객이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평원군의 이웃에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원군의 애첩이 그가 절뚝거리며 물 긷는 것을 보고 깔깔거리며 비웃었으므로, 평원군을 찾아와서 선비들이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는 것은 군께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고 첩을 천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불행히 병을 앓아 불구가 되었는데, 군의 후궁(後宮)이 저를 보고 비웃었으니 목을 베어 주십시오.” 하였다. 평원군이 승낙은 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베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여겨 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다리 저는 이웃 사람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객들이 반 이상이나 떠나가 버렸으므로, 마침내 평원군은 그 애첩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여기에서는 다리를 저는 새끼 까치를 평원군의 식객에다 비유한 것이다.

[D-006]철현금(鐵絃琴) : 금속 줄로 된 양금(洋琴)을 이른다. 유럽에서 들어왔다고 하여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이라고도 한다. 명 나라 말에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 처음 소개하였는데, 조선에는 영조(英祖) 때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의 증언에 의하면, 1772년 홍대용이 국내 최초로 이 철현금을 향악(鄕樂) 음정에 조율하여 연주하는 데 성공한 뒤 그 연주법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熱河日記 銅蘭涉筆

[D-007]자찬(自贊)하기를 : 한문(漢文)의 문체 중에 찬()이 있는데 대개 운문(韻文)이다. 작가가 자신에 대해 지은 찬을 자찬(自贊)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스스로를 칭찬한다는 뜻과 함께, 자찬을 지었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D-008]양식이 …… 같고 : 안회(顔回)는 공자 제자로 도()를 즐거워하고 가난을 편안히 받아들여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論語 先進

[D-009]꼼짝하지 …… 같고 : 장자 천운(天運)에서 공자(孔子)가 노자(老子)를 만나고 와서 용을 만나 본 것과 같다고 감탄하자, 자공(子貢) 그렇다면 정말 꼼짝하지 않으면서도 용이 나타난 것과 같은 사람尸居而竜見이 있다는 말인가?” 하며 노자를 만나러 갔다고 하였다.

[D-010]공손하지 …… 같고 : 유하혜(柳下惠)는 노() 나라 대부(大夫)로 이름은 전금(展禽)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자신의 처신을 백이(伯夷)의 처신과 비교하여 백이는 편협하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않으니, 편협한 것과 공손하지 않은 것은 군자가 따르지 아니한다.” 하였다.

[D-011]술을 …… 같고 : 유영(劉伶)은 진()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이다. 술을 매우 좋아하여 늘 술병을 지니고 다녔으며, 주덕송(酒德頌)을 지어 술을 찬양하였다. 晉書 卷49 劉伶傳

[D-012]밥을 …… 같고 : 한신(韓信)은 한() 나라 고조(高祖)의 명신(名臣)으로, 포의(布衣) 시절에 생계를 꾸려가지 못하여 항상 남에게서 밥을 얻어먹고 지냈다고 한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D-013]잠을 …… 같고 : 진단(陳摶 : ?~989)은 송() 나라 때의 유명한 도사(道士)로 주돈이(周敦頣)의 태극도(太極圖)의 남상이 되는 선천도(先天圖)를 남겼다. 그는 한 번 잠이 들면 100여 일 동안이나 깨지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457 陳摶傳

[D-014]거문고를 …… 같고 : 대본에는 鼓琴似子桑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몇몇 이본들에는 공백 없이 鼓琴似子桑戶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자상호(子桑戶)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인물로, 그가 죽자 막역지우(莫逆之友)인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이 그의 시신을 앞에 두고서 편곡(編曲)하거나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상호가 거문고를 탔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같은 대종사에 나오는 자상(子桑)과 혼동한 듯하다. 즉 자상의 벗 자여(子輿)가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자상은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의 지독한 가난을 한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원문의 鼓琴似子桑를 그 다음 문장과 연결시켜서 鼓琴似子桑 戶著書似揚雄으로 구두를 떼고 누락된 글자를 로 추정하여 鼓琴似子桑 閉戶著書似揚雄으로 판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앞의 문장들이 대개 □□□□ 5자구(字句)를 취하고 있는 점과 어긋난다. 또한 소순(蘇洵) 폐호독서(閉戶讀書)’한 사실은 있어도 양웅이 폐호저서(閉戶著書)’했다는 기록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子桑戶 는 역시 연자(衍字)로 보아야 할 것이다.

[D-015]글을 …… 같고 : 양웅(揚雄 : 기원전 53~기원후 18)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책을 박람(博覽)했으며 사부(辭賦)를 잘 지었고, 빈천(貧賤)하면서도 부귀영달에 급급하지 않았다. 그가 당시 집권자들에게 아부하여 벼슬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며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하고 있음을 보고 조소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조(解謿)’를 지었다. 또한 태현경이 너무 심오하여 사람들이 알기 어렵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난(解難)’을 지었다. 40여 세가 지나서 비로소 상경하여 애제(哀帝) 때 낭()이 되고, 왕망(王莽)이 집권했을 때에도 벼슬이 겨우 대부(大夫)에 머물렀다. 이는 그가 세리(勢利)에 연연하지 않고 호고낙도(好古樂道)하면서 문장으로 후세에 명성을 이룰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로 인해 당시에 홀대를 당했으며 알아주는 이가 적었다. 유흠(劉歆) 태현경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장독 덮개覆醬瓿로나 쓸 것이라고 조롱했다. 漢書 卷87 揚雄傳

[D-016]자신을 …… 같으니 : 공명(孔明)은 삼국 시대 촉()의 재상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킨다. 제갈량이 융중(隆中)에서 농사지으며 은거할 때 양보음(梁甫吟)을 즐겨 부르면서 매양 자신을 제() 나라의 재상 관중(管仲)과 연() 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에게 견주었다고 한다. 世說新語 方正

[D-017]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 조교는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인물로 키가 9 4촌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교가 맹자에게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조교가 다시 문왕(文王)은 키가 10척이고 탕() 임금은 9척이라고 했는데, 지금 저는 9 4촌이나 되는데도 밥만 축낼 뿐이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든 노력만 하면 요순처럼 될 수 있다.”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조교가 제가 추군(鄒君)을 만나면 관사(館舍)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머물면서 문하(門下)에서 배웠으면 합니다.” 하므로, 맹자는 도()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뜻이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는 대로(大路)와도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의 병통은 구하지 않는 데 있을 뿐이니, 그대가 돌아가서 찾는다면 스승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면서 거절하였다. 孟子 告子下

[D-018]청렴함은 …… 미치니 : 오릉(於陵)은 곧 오릉중자(於陵仲子)인 진중자(陳仲子)를 가리킨다. 진중자는 전국 시대 제 나라 사람으로, 형이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을 의롭지 않다고 여겨, () 나라의 오릉에 가서 은거하며 가난하게 살았으므로 오릉중자라 하였다. 당시 그는 3일 동안이나 굶주려 우물가로 기어가서 굼벵이가 반 넘게 파먹은 오얏을 삼키고 나서야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이 보였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D-019]식곤증이 나서 누웠다가 : 원문은 旣困臥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20]장괴애(張乖崖) …… 고사 : 괴애(乖崖)는 북송(北宋) 초의 명신(名臣)인 장영(張詠)의 호이다. 그는 강직함을 자처하고 다스림에 있어서 엄하고 사나움을 숭상하여, 괴팍하고 모가 났다는 뜻의 괴애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고 한다. 그는 태종(太宗) 때 익주 지사(益州知事)로 나가 은위(恩威)를 병용하여 선정(善政)을 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다고 한다. 그 뒤 진종(眞宗)은 이러한 남다른 치적을 알고 그를 거듭 익주 지사로 임명했다. 宋史 卷293 張詠傳 장영이 촉() 지방 즉 익주(益州)를 다스릴 적에 어느 늙은 병졸이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장난삼아 늙은 아비의 뺨을 때리는 것을 보고는 격분한 장영이 그 아이를 죽여 버리게 했다고 한다. 靑莊館全書 卷48 耳目口心書1 원문에는 장괴애가 守蜀했다고 하였는데, 조신(朝臣)으로서 지방관으로 나가 열군(列郡)을 지키는 경우 이를 수신(守臣)이라 부른다.

[D-021]이미 병들고 지쳐서 : 원문은 已病困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2]낙서의 …… 같다 : 이서구의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는 그의 자문시하인언(自問是何人言)에 수록되어 있는데, 연암집에 인용된 것과 조금 차이가 있다. 차이 나는 부분은 각주에 밝혀 두었다.

[D-023]연암 어른 : 원문은 燕岩丈人인데, 이서구의 자문시하인언에는 燕巖朴丈人으로 되어 있다.

[D-024]종소리가 처음 울렸는데 : 서울 종루(鐘樓 : 종각鐘閣)에서 초경(初更 : 저녁 7~9)을 알리는 타종을 했다는 뜻이다.

[D-025]다리를 걸쳐 놓고 : 원문은 加股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加膝로 되어 있다.

[D-026]명론(名論) : 여기서는 노론 · 소론 · 남인 등의 당론(黨論)을 가리킨다.

[D-027]내가 놀라서 : 원문은 余驚曰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余顧謂丈人曰로 되어 있다.

[D-028]대개 : 원문은 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余驚視之로 되어 있다.

[D-029]잠깐 …… 되어 : 원문은 須臾燭盡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그 다음에 余欲歸待僕 卒不至 且檠上無膏燭可以繼者가 추가되어 있다.

[D-030]불기운이 훨훨 올라와 : 원문은 火氣烘騰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31]한참 …… 탄식하였다 : 원문은 因相與悲歎者久之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久之 良久 夜半始歸家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불이당기(不移堂記)

 

 

사함(士涵)이 스스로 호를 죽원옹(竹園翁)이라고 짓고, 거처하는 당() 불이(不移)’라는 편액을 걸고는 나에게 글을 써 달라고 청해 왔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그 마루에 올라 보고 정원을 거닐어 보았어도 한 그루의 대나무도 보지 못했다. 내가 돌아보고 웃으며,

 

이는 이른바 무하향(無何鄕)이요 오유선생(烏有先生)의 집인가? 이름이란 실질(實質)의 손님이니 날더러 장차 손님이 되란 말인가?”

하였더니, 사함이 실망스러워하며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그저 스스로 뜻을 붙인 것뿐일세.”

하였다.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상심할 것 없네. 내 장차 자네를 위해 실질이 있게 만들어 줄 테니.

지난날 학사(學士) 이공보(李功甫)께서 관직에 있지 않고 한가히 지낼 적에 매화시(梅花詩)를 짓고는, 심동현(沈董玄)의 묵매도(墨梅圖)를 얻자 그 시로써 두루마리 그림의 첫머리에 화제(畫題)를 붙이셨지. 그러고 나서 웃으며 나더러 말씀하시기를,

너무하구나, 심씨의 그림이여! 능히 실물을 빼닮았을 뿐이구나!’

하기에, 나는 의혹이 들어서,

그림을 그린 것이 실물을 빼닮았다면 훌륭한 화공인데 학사께서는 어째서 웃으십니까?’

하고 물었네. 그러자 학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럴 일이 있지. 내가 처음에 이원령(李元靈)과 교유할 적에 비단 한 벌을 보내어 제갈공명(諸葛孔明) 사당 앞의 측백나무를 그려 달라고 청했더니, 원령이 한참 있다가 전서(篆書)로 설부(雪賦)를 써서 돌려보냈지. 내가 전서를 얻고는 우선 기뻐하며 더욱 그 그림을 재촉하였더니, 원령이 빙그레 웃으며, 그대는 아직 모르겠는가? 전에 이미 그려 보냈네. 하길래, 내가 놀라서, 전에 보내온 것은 전서로 쓴 설부뿐이었네. 그대는 어찌 잊어버린 겐가? 했더니, 원령은 웃으며, 측백나무가 그 속에 들었다네. 무릇 바람과 서리가 매섭게 몰아치면 변치 않을 것이 어찌 있겠는가. 그대가 측백나무를 보고 싶거든 눈 속에서 찾아보게나. 하였지. 나는 마침내 웃으며 응수하기를,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는데 전서를 써 주고, 눈을 보고서 변치 않는 것을 생각하라고 하다니, 측백나무와는 거리가 너무도 머네그려. 그대가 도()를 행하는 것이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였지.

얼마 있지 않아서 나는 간언(諫言)을 올린 일로 죄를 얻어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지. 그때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700리 길을 달려갔는데, 도로에서 전하는 말들이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장차 이르면 후명(後命)이 있을 것이라 하니, 하인들이 놀라서 떨며 울음을 터뜨렸지. 때마침 날씨는 차고 눈이 내리며, 낙엽진 나무들과 무너진 산비탈이 들쭉날쭉 앞을 가리고 바다는 눈앞에 끝없이 펼쳐졌는데, 바위 앞에 오래된 나무가 거꾸로 드리워져 그 가지가 마른 대나무와 같았지. 나는 바야흐로 말을 세우고 도롱이를 걸치다가, 손으로 멀리 가리키면서 그 기이함을 찬탄하며 이것이야말로 어찌 원령이 전서로 쓴 나무가 아니겠는가! 하였지.

섬에 위리안치되고 나니 장기(瘴氣)를 머금은 안개로 음침하기 짝이 없고 독사와 지네 따위가 베개나 자리에 이리저리 얽혀 언제 해를 끼칠지 알 수 없었지. 어느 날 밤 큰 바람이 바다를 뒤흔들어 벼락이 치는 듯했으므로 종인(從人)들이 다 넋이 달아나고 토하고 어지러워했는데, 나는 노래를 짓기를,

남쪽 바다 산호가 꺾어진들 어쩌리오 / 南海珊瑚折奈何

오늘 밤 옥루가 추울까 그것만 걱정일레 / 秪恐今宵玉樓寒

하였지.

원령이 편지로 답하기를, 근자에 산호곡(珊瑚曲)을 얻어 보니, 말이 완곡하면서 슬픔이 지나치지 않고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뜻이 조금도 없으니, 그만하면 환난에 잘 대처할 수 있겠구려. 지난날에 그대가 측백나무를 그려 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대 역시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할 수 있겠소. 그대가 떠난 후에 측백나무를 그린 그림 수십 본이 서울에 남아 있는데, 모두 조리(曹吏)들이 몽당붓禿筆으로 서로 돌려가며 베껴 그린 것이라오. 그러나 그 굳센 줄기와 꼿꼿한 기상이 늠름하여 범접할 수 없고, 가지와 잎은 촘촘하여 어찌 그리도 무성하던지! 하였으므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원령이야말로 몰골도(沒骨圖)라 이를 만하구나 하였지. 이로 말미암아 보면, 좋은 그림이란 실물을 빼닮은 데 있는 것은 아니야.’

하시기에, 나도 역시 웃었다네.

얼마 있다가 학사께서 세상을 떠났기에 나는 그분을 위하여 그 시문(詩文)을 편집하다가, 그분이 유배지에 있을 적에 형님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네. 그 내용인즉,

근자에 아무개의 편지를 받아 보니, 그가 나를 위하여 당로자(當路者)에게 귀양을 풀어 주기를 청하고자 한다 하였으니, 어찌 나를 이다지도 얕잡아 대하는지요? 비록 바다 한가운데에 갇혀서 병들어 죽을지언정 저는 그런 노릇은 하지 않겠습니다.’

했네. 나는 그 편지를 쥐고 슬피 탄식하며,

이 학사(李學士)야말로 진짜 눈 속에 서 있는 측백나무이다. 선비란 곤궁해진 뒤라야 평소의 지조가 드러난다. 재난을 염려하면서도 그 지조를 변치 않고, 고고하게 굳건히 서서 그 뜻을 굽히지 않으신 것은, 어찌 추운 계절이 되어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함은 성품이 대나무를 사랑한다. 아아, 사함은 참으로 대나무를 아는 사람인가? 추운 계절이 닥친 뒤에 내 장차 자네의 마루에 오르고 자네의 정원을 거닌다면, 눈 속에서 대나무를 볼 수 있겠는가?

 

 

[D-001]사함(士涵) …… 왔다 : 사함이 누구의 자()인지 알 수 없다. ‘불이(不移)’는 사철 내내 푸른 대나무처럼 절조를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빈천이 그의 절조를 변하게 할 수 없는貧賤不能移 사람이라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D-002]거처하는 당 : 원문은 所居之堂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3]무하향(無何鄕) :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준말로,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현실의 제약을 벗어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이상향을 가리킨다. 莊子 逍遙遊

[D-004]오유선생(烏有先生) :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을 뜻한다. ()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자허부(子虛賦)에서 자허(子虛) · 오유선생 · 무시공(亡是公)이라는 가공의 세 인물을 설정하여 문답을 전개하였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D-005]이름이란 …… 말인가 : 장자 소요유에서 요() 임금이 은자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넘겨주려고 하자 허유가 이를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이름과 실질의 관계를 고찰하는 명실론(名實論)은 묵가(墨家) 등 중국 고대 철학의 중요한 주제였다. 이름이 실질의 손님이란 말은, 이름이 실질에 대해 종속적 · 부차적인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D-006]학사(學士) 이공보(李功甫) : 이양천(李亮天 : 1716~1755)으로, 공보는 그의 자이다. 연암의 장인인 이보천(李輔天)의 동생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므로 학사라 칭한 것이다. 이양천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수학 시절의 연암에게 문학을 지도하였다. 연암집 3 ‘영목당 이공에 대한 제문祭榮木堂李公文 참조.

[D-007]심동현(沈董玄) : 화가 심사정(沈師正 : 1707~1769)으로, 동현은 그의 자이다. 명문 사대부 출신이면서도 과거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화업(畫業)에 정진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화훼(花卉) · 초충(草蟲)을 가장 잘 그렸다고 한다.

[D-008]훌륭한 화공 : 원문은 良工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良畫로 되어 있다.

[D-009]어째서 웃으십니까 : 원문은 何笑爲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0]이원령(李元靈) : 화가 이인상(李麟祥 : 1710~1760)으로, 원령은 그의 자이다. 호는 능호(凌壺)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음죽 현감(陰竹縣監) 등을 지냈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은거하며 벗들과 시 ·  · 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D-011]제갈공명(諸葛孔明) …… 측백나무 : 두보(杜甫)의 시 촉상(蜀相) 촉 나라 승상의 사당을 어디서 찾으리. 금관성 밖 측백나무 울창한 곳이라네.丞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柏森森라 하였다. 여기에서 측백나무는 변치 않는 제갈공명의 절조를 상징한다. 이양천은 이인상에게 두보의 이 시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D-012]설부(雪賦) : () 나라 사혜련(謝惠連 : 397~433)이 지은 부()의 제목이다. 서한(西漢)의 양효왕(梁孝王)이 양원(梁園)이라는 호사스러운 원림(園林)에서 당대의 문사인 사마상여(司馬相如) 등과 함께 주연을 벌이다가 눈이 오자 흥에 겨워 시를 주고받았던 고사를 노래하였다. 文選 卷14 雪賦

[D-013]그대가 …… 아닌가 : 중용(中庸)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중용장구  13 장에서 공자는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나니,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도라고 할 수 없다.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고 하였다. 고원(高遠)하여 행하기 힘든 일에서 도를 찾으려는 경향을 경계한 말이다.

[D-014]나는 ……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지 : 실록에 의하면 영조 28(1752) 10월 홍문관 교리 이양천은 소론의 영수인 이종성(李宗城)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조치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분노를 사서 흑산도에 위리안치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 이듬해 6월 위리(圍籬)가 철거되고 육지로 나왔으나, 영조 31(1755)에야 관직에 복귀했다가 이내 사망했다.

[D-015]후명(後命) : 유배형을 받은 죄인에게 다시 사약(賜藥)을 내리는 일을 말한다.

[D-016]들쭉날쭉 : 대본은 嵯砑인데, ‘ 의 오자이다. ‘치아(嵯岈)’는 둘쭉날쭉 뒤섞여 있는 모습을 뜻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차아(嵯峨)’로 되어 있는데, 이는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뜻한다.

[D-017]남쪽 …… 걱정일레 : 옥루(玉樓)는 상제(上帝)가 산다는 곳인데, 여기서는 궁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비참한 운명에는 개의치 않고 오직 임금께서 평안하신지 염려한다는 뜻이다. 이 시는 걸작으로 알려져, 그의 벗 이윤영(李胤永)이 지은 만시(輓詩)에도 인용되었다. 丹陵遺稿 卷10 挽功甫

[D-018]조리(曹吏) : 예조(禮曹)의 도화서(圖畫署)에 소속된 화원(畫員)을 이른다. 이들의 그림을 화원화(畫員畫)라고 하여, 사대부 출신 화가들이 그린 문인화(文人畫)와 차별하고 그 예술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였다.

[D-019]몽당붓禿筆 : 예리하지 못한 붓이라는 뜻으로, 그림 솜씨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경우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D-020]원령이야말로 …… 만하구나 : 몰골도(沒骨圖)는 붓으로 윤곽을 그리지 않고 직접 채색하는 수법으로 그린 그림을 이른다. 몰골도에는 붓 자국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인상이 편지에서, 화원들이 모방한 측백나무 그림이 사이비(似而非)임을 언중유골(言中有骨)로 은근히 풍자했다는 뜻이다.!

[D-021]근자에 …… 하였으니 : 실록에 의하면 영조 29(1753) 3월과 4월에 언관(言官)들이 이양천의 해배(解配)를 건의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이러한 공개적인 노력 말고도, 이양천의 벗들 중에 당시 정계의 실력자들을 찾아다니며 석방운동을 벌이려는 사람이 있었던 듯하다.

[D-022]추운 …… 아니겠는가 : 논어 자한(子罕) 추운 계절이 되어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맨 나중에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소완정기(素玩亭記)

 

 

완산(完山 전주(全州)) 이낙서(李洛瑞 이서구(李書九))가 책을 쌓아둔 그의 서재에 소완(素玩)’이라는 편액을 걸고 나에게 기()를 청하였다. 내가 힐문하기를,

 

무릇 물고기가 물속에서 놀지만 눈에 물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인가? 보이는 것이 모두 물이라서 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낙서 자네의 책이 마룻대까지 가득하고 시렁에도 꽉 차서 앞뒤 좌우가 책 아닌 것이 없으니, 물고기가 물에 노는 거나 마찬가지일세. 아무리 동생(董生)에게서 학문에 전념하는 자세를 본받고 장군(張君)에게서 기억력을 빌리고 동방삭(東方朔)에게서 암송하는 능력을 빌린다 해도, 장차 스스로 깨달을 수는 없을 터이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자, 낙서가 놀라며,

 

그렇다면 장차 어찌해야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자네는 물건 찾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가? 앞을 바라보면 뒤를 놓치고, 왼편을 돌아보면 바른편을 빠뜨리게 되지. 왜냐하면 방 한가운데 앉아 있어 제 몸과 물건이 서로 가리고, 제 눈과 공간이 너무 가까운 때문일세. 차라리 제 몸을 방 밖에 두고 들창에 구멍을 내고 엿보는 것이 나으니, 그렇게 하면 오로지 한쪽 눈만으로도 온 방 물건을 다 취해 볼 수 있네.”

했더니, 낙서가 감사해 하면서,

 

이는 선생님께서 저를 약()으로써 인도하신 것이군요.”

하였다. 내가 또 말하기를,

 

자네가 이미 약()의 도()를 알았으니, 나는 또 자네에게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관조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는가. 저 해라는 것은 가장 왕성한 양기(陽氣)일세. 온 누리를 감싸주고 온갖 생물을 길러주며, 습한 곳이라도 볕을 쪼이면 마르게 되고 어두운 곳이라도 빛을 받으면 밝아지네. 그렇지만 해가 나무를 태우거나 쇠를 녹여내지 못하는 것은 왜인가? 광선이 두루 퍼지고 정기(精氣 양기)가 흩어지기 때문일세. 만약 만리를 두루 비추는 빛을 거두어 아주 작은 틈으로 들어갈 정도의 광선이 되도록 모으고 유리구슬로 받아서 그 정광(精光 양광(陽光))을 콩알만 한 크기로 만들면, 처음에는 불길이 자라면서 반짝반짝 빛나다가 갑자기 불꽃이 일며 활활 타오르는 것은 왜인가? 광선이 한 군데로 집중되어 흩어지지 않고 정기가 모여서 하나가 된 때문일세.”

하니, 낙서가 감사해 하면서,

 

이는 선생님께서 저를 깨달음으로써 깨우쳐 주신 것이군요.”

하였다. 내가 또 말하기를,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있는 것들은 모두가 이 책들의 정기(精氣)이니, 제 눈과 너무 가까운 공간에서 제 몸과 물건이 서로를 가린 채 관찰하고 방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본래 아니지. 그러므로 포희씨(包犧氏)가 문()을 관찰할 적에 위로는 하늘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땅을 관찰했다.’고 하였고, 공자(孔子)는 포희씨가 문을 관찰한 것을 찬미하고 나서 덧붙여 말하기를, ‘가만히 있을 때는 그 말을 완미(玩味)한다.’ 했으니, 무릇 완미한다는 것은 어찌 눈으로만 보고 살피는 것이겠는가. 입으로 맛보면 그 맛을 알 것이요, 귀로 들으면 그 소리를 알 것이요, 마음으로 이해하면 그 핵심을 터득할 것이다.

지금 자네는 들창에 구멍을 뚫어 오로지 한쪽 눈만으로도 다 보며, 유리구슬로 빛을 받아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해도 방의 들창이 비어 있지 않으면 밝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유리알이 투명하게 비어 있지 않으면 정기를 모아들이지 못하지. 무릇 뜻을 분명히 밝히는 방법은 본래 마음을 비우고 외물(外物)을 받아들이며 담담하여 사심이 없는 데 있는 것이니, 이것이 아마도 소완(素玩)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였더니, 낙서가 말하기를,

 

제가 장차 벽에 붙여 두고자 하니 선생님은 그 말씀을 글로 써 주십시오.”

하기에, 마침내 그를 위해 써 주었다.

 

 

[D-001]소완(素玩) : ‘()’는 흰 바탕의 편지나 책을 의미하므로, 이서구는 책들을 완상(玩賞)한다는 뜻으로 이 당호를 지었을 것이다. 또한 ()’에는 텅 비었다는 뜻도 있으므로, 연암은 이 뜻을 취하여 허심(虛心)으로 완상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D-002]동생(董生)에게서 …… 본받고 : 동생은 한() 나라 때 학자 동중서(董仲舒)이다. 춘추를 전공하여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는데, 학문에 전념하여 휘장을 드리우고 강송(講誦)하면서 3년 동안 정원을 한 번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D-003]장군(張君)에게서 기억력을 빌리고 : 장군은 장화(張華 : 232~300)를 이른다. 그는 진() 나라의 유력한 정치가로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문인 · 학자로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기억력이 탁월하기로 당대 제일이었다고 한다.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있을 때 진 무제(晉武帝)가 한() 나라의 궁실 제도와 건장궁(建章宮)에 관해 묻자 장화는 땅에다 지도를 그려가며 청산유수로 응답하여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수레 30대에 실은 책을 읽고 나서 박물지(博物志) 400권을 지었는데, 무제가 번거롭다고 하여 10권으로 줄였다고 한다. 장화를 장군이라 호칭한 것은 그가 광무현후(廣武縣侯)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晉書 卷36 張華傳

[D-004]동방삭(東方朔)에게서……해도 : 동방삭은 한 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관직은 낮았지만 해학(諧謔)과 변설(辯舌), 직언(直言) 등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예로부터 전해 오는 책들을 좋아하고 경술(經術)을 좋아하였으며, 야사 · 전기와 잡서들까지 박람(博覽)하였다. 또한 시() · () · 백가(百家)의 말들을 암송하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東方朔

[D-005]() : 핵심을 취한다는 뜻이다. 소식(蘇軾)의 가설(稼說)에서 학문하는 방도로 책을 널리 보되 핵심을 취하며, 실력을 두텁게 쌓되 조금만 드러내라.博觀而約取 厚積而薄發고 권하였다.

[D-006]유리구슬로 받아서 : 원문은 承玻璃之圓珠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여기서 유리구슬은 곧 돋보기를 말한다.

[D-007]불길이 자라면서 : 원문은 亭毒인데, 두 글자 모두 기른다는 뜻이다. 노자(老子)에 도() 만물을 기르고 기른다亭之毒之고 하였다.

[D-008]포희씨(包犧氏) …… 하였고 : 포희씨는 곧 태곳적 중국의 삼황(三皇)의 한 사람인 복희씨(伏羲氏), 팔괘(八卦)와 문자書契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포희씨가 문()을 관찰했다고 할 때의 ()’은 단순히 문자나 문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문(天文)과 지문(地文)과 인문(人文)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일월(日月)은 하늘의 문()이요, 산천(山川)은 땅의 문이요, 언어는 사람의 문이라고 한다.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역() 위로는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지리를 관찰한 것이다.仰以觀於天文 俯而察於地理라고 하였고, 또한 계사전 하(繫辞傳下)에 옛날 포희씨가 왕이 되어 천하를 다스릴 적에 위로는 하늘에서 상()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땅에서 법()을 관찰하여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팔괘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D-009]가만히 …… 완미(玩味)한다 : 원문은 居則玩其辭인데, 김택영(金澤榮) 중편연암집에는 居則觀其象而玩其辭로 되어 있다. 주역 계사전 상에 이런 까닭에 군자는 가만히 있을 때는 그 상을 관찰하고 그 말을 완미한다.是故 君子居則觀其象而玩其辭 하였다. ()은 팔괘와 육효(六爻)를 뜻하고 말은 괘와 효가 나타내는 길흉에 대한 설명을 뜻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금학동(琴鶴洞) 별장에 조촐하게 모인 기록

 

 

연암협(燕巖峽)에 있는 나의 거처는 개성(開城)에서 겨우 30리 거리에 있었으므로 나는 항상 개성으로 나가서 노닐곤 하였다. 금년 겨울에 규장각 직제학 유사경(兪士京)이 막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부임하여 이미 여저(旅邸)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는데, 즐겁게 옛일을 이야기하기를 빈천했던 선비 시절과 똑같이 하였으니, 세속에서 말하는 출세와 몰락 따위는 서로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었다.

하루는 사경(士京)이 추도(趨導)를 단출히 하고 그의 아들을 데리고서 금학동(琴鶴洞)을 찾아주었는데, 그때 나는 양씨(梁氏)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빨리 술을 데우게 하고, 각기 지은 글들을 꺼내어 둘이 서로 평가해 보고는, 마주 보며 웃으면서 말하기를,

 

마하연(摩訶衍)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때에 비하면 어떠한가? 단지 백화암(白華菴)에서 참선하던 비구승 준()만이 없을 뿐이고, 조촐하게 모인 것은 관천(灌泉)의 모임과 비슷한데, 우리들은 어느새 다 같이 머리가 허옇게 되었네그려!”

하였다. 관천은 한양 서소문 밖 나의 옛집이 있던 곳인데, 금강산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조촐한 모임을 가졌다. 나는 이때 나이 스물아홉 살로 사경보다 일곱 살이 적었는데도, 양쪽 귀밑머리에는 하마 대여섯 가닥의 흰머리가 생겼으므로, ()의 재료를 얻었다고 스스로 기뻐했었다. 그런데 지금 하마 13년이 흐르고 보니 이른바 시의 재료는 주체할 수 없이 어지럽게 늘어났고, 사경은 문권(文權)을 겸대(兼帶)하면서 병권(兵權)을 쥐고 큰 부성(府城)을 진무(鎭撫)하고 있느라고 지금 그의 수염이 이처럼 다 희어지고 말았다. 사경은 스스로 귀밑머리 뒤 금관자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스스로 보기에도 겸연쩍은데, 하물며 귀밑머리 뒤편은 스스로 보지도 못함에랴!”

라고 했다.

지난날에 나는 연암협으로부터 마침 성내(城內)로 들어가다가, 군사훈련을 하고 부중(府中)으로 돌아가던 유수와 노상에서 마주쳤다.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갈 무렵이었는데, 말에서 내려 남녀들 틈에 끼어 길 왼쪽에 엎드렸다. 횃불이 휘황하고 깃발들이 펄럭였다.

내가 지난날 길 왼쪽에서 군대의 위용을 구경했던 일을 말하니, 사경은 크게 웃으며,

 

왜 내 자()를 부르지 않았던가?”

하기에,

 

도성 사람들이 놀랄까 두려웠네.”

라고 답하고는, 서로 더불어 크게 웃었다. 사경이,

 

군대의 위용은 어떻던가?”

하기에,

 

원앙대(鴛鴦隊)를 지어 10보 간격으로 세 줄로 선 것이 훈련도감의 군대보다는 조금 못해도 평양의 군대보다는 훨씬 낫더군. 게다가 난후병(攔後兵)은 벙거지를 번듯하게 쓰고 더그레는 앞뒤로 두 치가 짧으니, 한창 의기양양하여 더욱 씩씩하더군.”

하였다. 사경이 묻기를,

 

나는 어떻던가?”

하기에,

 

나는 장군(將軍 유언호를 가리킴)의 초상화만 보았지 장군은 보지 못했네.”

하니, 사경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왼쪽에는 온 원수(溫元帥), 바른쪽에는 마 원수(馬元帥), 앞에는 조현단(趙玄壇)의 깃발이요, 초헌(軺軒) 뒤에만 유독 말 위에서 깃발을 들었는데 검은 바탕에 그려진 별은 구진(句陳)과 흡사하더군. 내 일찍이 화공을 불러 초상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반드시 잠자코 정색을 하고 있어 대체로 평상시의 태도와는 달랐으니, 장군도 접때 틀림없이 기침과 재채기를 참았을 테고, 가려워도 감히 긁지도 못했을 걸세.”

했더니, 사경은 크게 웃으며,

 

과연 또 하나의 내가 길가에서 나를 관찰했구먼!”

하였다. 나도 크게 웃으며,

 

옛날에 조공(曹公)이 스스로 일어나 칼을 쥐고 용상(龍床) 앞에 서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나를 관찰하는 법일세. 그러나 장군은 몸소 말을 타지는 않는 점이 두원개(杜元凱)와 흡사한데 좌전(左傳)에 주()를 붙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느슨한 띠에 선비의 기풍이 있는 것은 양숙자(羊叔子)와 흡사한데 뒷날에 누가 비석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지 모르겠구려.”

하였다. 그러고는 크게 웃고 나서 일어나 문밖으로 가니, 달이 한창 둥글어 달빛이 가득했다. 나는 문에서 전송하면서 말하기를,

 

내일 밤에는 달이 더욱 밝을 터이니 나는 장차 남루(南樓)에서 달을 구경할 생각이네. 장군은 다시 걸어와 주겠는가?”

했더니,

 

그러세.”

하였다.

예전에 관천에서 조촐히 모였을 때에 기()를 지은 바 있다. 사경이 먼저 중경소집기(中京小集記)를 지어 보여 주었기에, 이 기를 지어서 화답한다.

 

 

[D-001]금년 …… 부임하여 : 사경(士京)은 젊은 시절부터 연암과 절친한 사이였던 유언호(兪彦鎬 : 1730~1796)의 자이다. 실록에 의하면 유언호는 정조 1(1777) 6월 이조 참의에서 개성 유수로 특별 발탁되었고, 7월에는 규장각 직제학을 겸임하였다. 9 22일 소대(召對)에 나아간 뒤 10월경에 임지로 떠났던 듯하다. 그 후 정조 3(1779) 3월 이조 참판에 임명될 때까지 개성 유수로 재직했다. 유언호가 개성 유수로 부임하게 된 것은 부모 봉양의 편의를 위해 왕이 특별히 배려한 결과였다. 閔鍾顯 兪文忠公行狀

[D-002]여저(旅邸) : 객지에 임시로 머물러 사는 집을 말한다. 유언호의 서경소집기(西京小集記)에 의하면 당시 연암은 개성 유수의 관아(官衙)로 유언호를 방문했으므로, 여기서는 개성 유수의 거처인 내아(內衙)를 가리키는 듯하다.

[D-003]추도(趨導) : 고관이 행차할 때 앞장 서서 말을 끌고 길을 인도하는 기졸(騎卒)을 이른다.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는데, 뜻은 같다.

[D-004]금학동(琴鶴洞) …… 있었다 : 금학동은 개성에 있던 동명(洞名)이다. 그곳에 개성의 선비로서 연암을 종유(從遊)하던 양호맹(梁浩孟) · 양정맹(梁廷孟) 형제의 별장이 있었다.

[D-005]마하연(摩訶衍)에서 …… 뿐이고 : 마하연은 내금강에 있는 절이고, 백화암(白華菴)은 그에 딸린 암자이다. 1765(영조 41) 연암이 유언호 등 벗들과 함께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다가 백화암에서 승려 준대사(俊大師)를 만났던 사실은 연암집 7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와 관재기(觀齋記) 등에도 언급되어 있다.

[D-006]사경은 …… 있느라고 : 문권(文權)을 지녔다는 것은 당시 유언호가 규장각 직제학의 직함을 띠고 있었던 사실을 말한 것이다. 개성 유수는 행정뿐 아니라 군사업무도 주관하였다. 즉 개성부(開城府)의 군무(軍務)와 대흥산성(大興山城)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된 관리영(管理營)의 우두머리인 관리사(管理使)를 겸하였다.

[D-007]금관자 : 관자(貫子)는 망건을 쓸 때 당줄을 꿰어 졸라매는 작은 고리인데 품계에 따라 그 재료와 새김장식이 달랐다. 당시 유언호는 종 2 품인 개성 유수였으므로, 초룡(草龍) 등을 새긴 금으로 된 관자를 하였다.

[D-008]스스로 보기에도 …… 못함에랴 :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요() 임금이 은사 허유(許由)에게 나는 스스로 겸연쩍게 생각되니, 천하를 그대에게 양도하게 해달라.我自視缺然 請致天下고 하였다. 관자는 망건의 편자下帶 귀 닿는 곳에 달아서, 편자 끝에 달린 좌우의 당줄을 맞바꾸어 걸어 넘기도록 되어 있으므로 제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여기서는 유언호가 친구 앞에서 자신의 출세를 과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한 말이다.

[D-009] …… 않았던가 : ()는 절친한 평교간(平交間)에만 부를 수 있었다.

[D-010]원앙대(鴛鴦隊) : 5인의 병사가 1조를 이루는 것을 오()라 하는데, 1 · 3 · 5 · 7 · 9번째 병사들이 좌오(左伍)가 되고 2 · 4 · 6 · 8 · 10번째 병사들이 우오(右伍)가 되어, 가로로 보면 2인이 하나의 짝을 이루도록 편성한 부대를 말한다. 兵學指南 卷2

[D-011]난후병(攔後兵) : 부대의 후방을 방어하는 부대로 난후군(攔後軍)이라고도 한다.

[D-012]벙거지를 번듯하게 쓰고 : 원문은 不淅巾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不浙巾으로 되어 있다. 어느 경우건 문리가 통하지 않는다. 혹시 不折巾의 오기일지도 모른다. 절건(折巾)은 절각건(折角巾)이라 하여 한 모서리가 꺾여진 두건을 말한다. 또한 목민심서(牧民心書) 병전(兵典) 연졸조(練卒條)에 군사훈련할 때 호의(號衣)와 전립(戰笠)이 하나라도 해지거나 찢어진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호의는 군복인 더그레, 전립은 군모인 벙거지를 가리킨다.

[D-013]온 원수(溫元帥) : 원수(元帥)는 천군(天君)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도교(道敎)에서 숭상하는 무용(武勇)의 신()이다. 온 원수는 마 원수(馬元帥), 조 원수(趙元帥), 관 원수(關元帥 : 관우關羽)와 함께 도교의 호법 사신(護法四神)’의 하나로, 이들을 속칭 사대원수(四大元帥)’라고 한다. 온 원수는 원래 온주(溫州) 사람으로 이름을 경()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청면적발신(靑面赤髮神)으로 변하여 무장을 하고 용맹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동악대제(東岳大帝)가 그를 우악신장(祐岳神將)으로 삼았다고 한다. 三敎源流搜神大全 여기서는 온 원수의 모습를 그리거나 溫元帥라고 쓴 깃발을 뜻한다.

[D-014]마 원수(馬元帥) : 화광대제(華光大帝), 삼안영관마천군(三眼靈官馬天君)이라고도 한다. 전신(前身)이 남두(南斗)  6 성이어서 그 별의 이름을 따서 승()으로 이름을 삼았으며, 머리가 셋에 눈이 아홉 개였다고 한다. 옥황상제로부터 진무대제부장(眞武大帝部將)에 봉해졌다고 한다.

[D-015]조현단(趙玄壇) : 조 원수(趙元帥)를 말한다. 이름은 낭()이나, 공명(公明)이라는 자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조공명은 진() 나라 때 산중으로 피난하여 수련 끝에 옥황상제로부터 신소부수(神宵副帥), 주령뢰정부원수(主領雷霆副元帥) 등에 임명되었으며, 또한 천사(天師) 장도릉(張道陵)이 선단(仙丹)을 수련할 때 옥황상제로부터 현단대원수(玄壇大元帥)에 임명되어 단로(丹爐)를 수호하러 강림했다고 한다. 검은 호랑이를 타고 다닌다고 하였다.

[D-016]구진(句陳)과 흡사하더군 : 구진은 전통 천문학의 이른바 자미원(紫薇垣)에 있는 별의 하나이다. 작은 별 6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곧 현대 천문학에서 말하는 북극성(北極星)이다. 구진은 천자(天子)의 군대를 주관한다고 하며, 금군(禁軍)을 상징한다. 원문은 似句陳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7]옛날에 …… 있었으니 : 조공(曹公)은 조조(曹操)를 이른다. 흉노(匈奴)가 사신을 보내오자, 조조는 자신의 용모가 보잘것없음을 꺼려 위엄 있고 잘생긴 신하 최염(崔琰)을 시켜 대신 용좌(龍座)에 앉아 있게 하고, 자신은 스스로 칼을 쥐고 용상(龍床) 앞에 서 있었다. 나중에 사람을 시켜 조공(曹公)이 어떻더냐?’고 물었더니, 흉노의 사신이 대답하기를 조공이 잘생기기는 했으나, 용상 앞에서 칼을 쥐고 시립(侍立)한 사람이야말로 영웅이더라.’고 했다고 한다. 三國志補注 卷3 魏書 崔琰傳》 《世說新語 容止

[D-018]몸소 …… 못했고 : 두원개(杜元凱)는 진() 나라의 유장(儒將) 두예(杜預 : 222~284), 원개는 그의 자이다. 진 나라 무제(武帝) 때 양호(羊祜)의 천거로 그의 후임으로 대장군이 되어 오()를 정벌하고 무공을 세웠으나, 말을 탄 적이 없었으며 화살이 과녁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스스로 좌전벽(左傳癖)’이 있다고 하였으며 좌전집해(左傳集解)를 저술했는데, 이는 가장 이른 시기의 좌전 주해(注解)였다. 晉書 卷34 杜預傳 규장각 직제학을 겸임한 유언호가 두예와 같은 학문적 업적을 남기기를 기대하며 한 농담이다. 유언호는 말 대신 초헌(軺軒)을 탔다.

[D-019]느슨한 …… 모르겠구려 : 양숙자(羊叔子)는 진 나라 때의 명신(名臣) 양호(羊祜), 숙자는 그의 자이다. 양호는 군진(軍陣)에 있을 때 항상 가벼운 갖옷을 입고 띠를 느슨히 맨 채 갑옷을 걸치지 않아 선비의 기풍이 있었다 한다. 양호가 장수로서 양양현(襄陽縣)을 지키고 있을 때에 이곳 주민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그가 죽자 백성들이 그가 이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다가 인생무상을 느끼고 눈물을 흘렸다는 현산(峴山)에 추모비를 세웠다. 사람들이 이 비석을 보기만 하면 양호를 추념하여 눈물을 흘렸으므로, 두예가 타루비(墮淚碑)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晉書 卷34 羊祜傳 유언호가 양호와 같이 선정을 행하기를 기대하며 한 농담이다.

[D-020]남루(南樓) : 개성 남대문(南大門)의 문루(門樓)를 가리키는 듯하다.

[D-021]중경소집기(中京小集記) : 유언호의 연석(燕石)  2 책에 서경소집기(西京小集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그 밑에 소주로 정유(丁酉)’라 하여 1777년에 지은 것임을 밝혀 두었다. ‘중경 서경은 같은 말로, 개성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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