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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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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1]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1]

1 삼종질(三從姪) 종악(宗岳) 이 정승에 제수됨을 축하하고 이어 시노(寺奴) 문제를 논한 편지

2 김 우상(金右相) 이소(履素) 에게 축하하는 편지

3 현풍현(玄風縣) 살옥(殺獄)의 원범을 잘못 기록한 데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4 밀양(密陽) 김귀삼(金貴三)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5 함양(咸陽) 장수원(張水元)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6 밀양(密陽)의 의옥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7 진정(賑政)에 대해 단성 현감(丹城縣監) 이후(李侯)에게 답함

8 진정에 대해 대구 판관(大邱判官) 이후(李侯) 단형(端亨) 에게 답함

9 남 직각(南直閣) 공철(公轍) 에게 답함

10 족형(族兄) 윤원(胤源)씨에게 답함

11 원도(原道)에 대해 임형오(任亨五)에게 답함

 

[2]

12 함양 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에게 보냄

13 족제(族弟) 이원(彜源)에게 보냄

14 공주 판관(公州判官) 김응지(金應之)에게 답함

15 응지에게 답함

16 응지에게 답함

17 응지에게 답함

18 응지에게 답함

19 응지에게 보냄

20 이중존(李仲存)에게 답함

21 이중존에게 답함

22 이중존에게 답함

23 진정(賑政)에 대해 순찰사(巡察使)에게 답함

24 진정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25 순찰사에게 올림

26 순찰사에게 답함

27 순찰사에게 답함

 

[3]

28 족손(族孫) ()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박군(朴君) 묘지명

29 맏누님 증() 정부인(貞夫人) 박씨 묘지명

30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 묘지명

31 홍덕보(洪德保) 묘지명

32 치암(癡庵) 최옹(崔翁) 묘갈명

33 이 처사(李處士) 묘갈명

34 () 사헌부 지평 예군(芮君) 묘갈명

35 참봉(參奉) 왕군(王君) 묘갈명

36 가의대부(嘉義大夫) 행 삼도통제사(行三道統制使) 증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 충강(忠剛)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37 주공탑명(麈公塔銘)

 

 

 

삼종질(三從姪) 종악(宗岳) 이 정승에 제수됨을 축하하고 이어 시노(寺奴) 문제를 논한 편지

 

 

지원(趾源)이 젊었을 때 심병(心病)을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불현듯, 온 세상 부인들이 첫아이를 낳으면서 너무도 지쳐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만일 잠결에라도 젖이 아이의 입을 눌러 대면 어찌할 것인가 걱정이 되어 밤중에 일어나 방황하며 몸 둘 곳을 몰라 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늘그막에 한 고을 원이 되어 5000호의 중남중녀(衆男衆女)를 맡아 기르게 되니, 이들은 맹자(孟子)의 이른바 적자(赤子)’, 노자(老子)의 일컬은 바 영아(嬰兒)’인 셈입니다. 영아란 한번 떼가 나면 손으로 제 머리칼을 쥐어뜯고, 한번 울음을 터뜨리면 누워서 발을 버둥거리는데, 남들이 아무리 온갖 방법으로 달래 보아도 그 옹알대는 소리가 무슨 말이며 제 의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하지만, 자상한 제 어미만은 능히 이를 잘 살펴서 알아듣고 미리 짐작해서 그 뜻을 알아맞힙니다. 이에, 처음 해산한 어미는 자나 깨나 하는 생각이 오로지 안절부절 젖을 물리는 데에 있기 때문에 소리도 냄새도 없는 속에서도 묵묵히 듣고 꿈속에서도 거기에 마음을 쓰고 있는 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야말로 지성(至誠)이 아니고야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원이 된 첫솜씨치고는 그다지 심한 허물은 없었다 여겼는데, 시노(寺奴) 300()에 이르러서는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배가 끓고 등이 후끈거려서 30년 전의 심병이 되살아난 듯합니다.

일찍이 들으니 노비를 추가로 찾아내어 정해진 액수(額數)를 채울 적에 단지 두목(頭目)이 밀봉해서 바치는 공초(供招)에만 의거하고 있는데, 그가 추가로 찾아내어 채운 자는 모두 외손의 외손들이며 그 노비에게 보증을 서 준 자 또한 모두 외가의 외가 쪽 사람들이라 합니다. 대대로 벼슬하는 가문들도 팔세보(八世譜)를 만들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 대개 씨족이 자주 바뀌고 고거(攷壉)가 자상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시골구석의 무지한 백성들이야 허다히 제 아비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리저리 외가 쪽으로 뻗어 나간 소생의 근원을 알겠습니까. 이런 정도의 친인척은 비록 사대부의 경우일지라도 마상(馬上)에서 서로 한 번 읍()이나 하는 정도로 충분한 관계인데, 종신토록 그에 얽매여 가산을 탕진하고야 말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로 이자들을 이 고을에 정착하게 했다면 사실인지 아닌지 명단을 조사해서 검열한다는 것이 그래도 말이 되겠지만, 다른 고장으로 종적을 감추어 몰래 공포(貢布)를 바치고, 일찍이 본명을 숨겨 생사 여부도 정확하지 않으니, 아무리 장부를 점검하여 끝까지 조사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형편입니다. 혹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계집이 사내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시집도 안 갔는데 그 소생을 따지고, 가짜로 이름을 만들었는데 진짜로 현신(現身)하라 독촉하기도 하니, 두목이 당도하는 곳마다 사람들을 꼬이고 협박해서 그로 인연하여 농간을 부리게 됨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입니다.

이 폐단이 백골징포(白骨徵布), 황구첨정(黃口簽丁)보다 더 심하건만 그래도 억울함을 드러내 호소하지 못하고, 고통이 뼛속에 사무쳐도 오히려 남이 알까 두려워 아무도 모르게 뇌물을 바치고 이웃에게도 스스로 숨기는 터입니다. 속담에 이른바 동무 몰래 양식 낸다’, ‘병 숨기고 약 구한다’, ‘가려운 데는 안 가리키고 남더러 긁어 달란다는 격입니다. 이 어찌 절박하여 부득이하고 지극히 난처한 사정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조금이라도 노비안(奴婢案)에 관련되기만 하면 딸 다섯을 두었더라도 사위로 들겠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머리가 하얗도록 생과부로 한을 품은 채 일생을 마치니 천지 음양의 화기(和氣)를 손상함이 또한 어떻다 하겠습니까. 수령이 이 문제로 죄를 얻는 경우가 전후로 종종 있었지만 이는 덮어 두고라도, 다만 국가를 위하여 천지의 화기를 맞아들이고 임금의 은택을 펴자면 빨리 이 폐단을 바로잡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저는 단지 안의(安義) 한 고을만 특히 심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을이 이와 같을진댄 다른 고을도 알 만하며, 한 도()가 이와 같을진댄 팔도에 대해서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명공(明公)께서 감사(監司) 자리로부터 들어와 새로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니 응당 이 일을 반드시 눈으로 겪어 본 바라, 그것이 폐단의 근원이 됨을 반드시 익히 살핀 바 있으리니 곧 임금을 연석(筵席)에서 뵈올 때의 첫 진언(陳言)은 이보다 중요한 문제가 없을 줄로 압니다.

구구한 마음에 오로지 천하의 근심을 남보다 먼저 근심해 주기를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 아무개는 두 번 절하고 올립니다.

 

 

[C-001]삼종질(三從姪) …… 편지 : 박종악(朴宗岳 : 1735~1795)은 자가 여오(汝五), 호는 창암(蒼巖)이다. 항렬로는 연암의 9촌 조카뻘이나 나이는 2세 연상이다. 영조(英祖)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주로 청현직(淸顯職)을 지냈으며, 정조(正祖) 즉위 초에는 홍국영(洪國榮)을 비판하다 파직되어 오랫동안 관직에서 떠나 있었다. 179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경기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792년 음력 1월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이 글은 이때 보낸 편지이다. 시노(寺奴)는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를 이른다. 이 글의 제목이 하풍죽로당집(荷風竹露堂集)에는 하족질종악입상인론시노비서(賀族姪宗岳入相因論寺奴婢書)’, 백척오동각집(百尺梧桐閣集), 운산만첩당집(雲山萬疊堂集), 동문집성(東文集成)에는 하족질배상인론시노서(賀族姪拜相因論寺奴書)’ 등으로 조금 다르게 되어 있다.

[D-001]심병(心病) : 마음속의 근심 걱정으로 인해 생긴 병을 말한다. 주역 설괘전(說卦傳) 감괘(坎卦) …… 사람에 대해서는 근심을 더함이 되고, 심병이 된다. …… 其於人也 爲加憂 爲心病고 하였다.

[D-002]5000 : 백척오동각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4000호로 되어 있다.

[D-003]맹자(孟子) …… 셈입니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 대인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大人者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고 했는데 그 주에 대인은 임금을 말한다. 임금이 백성을 응당 적자처럼 대한다면 민심을 잃지 않게 됨을 말한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노자(老子)  49 장에 성인(聖人)은 항상 사심이 없다,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는다.…… 성인은 모든 백성을 갓난아이처럼 여긴다.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聖人皆孩之고 하였다.

[D-004]꿈속에서도 : 원문은 夢魂之中인데, 백척오동각집에는 慌愡之中으로, 하풍죽로당집에는 蒙寐之中으로, 운산만첩당집에는 夢囈之中으로 되어 있다.

[D-005]두목(頭目) : 관청의 노비를 통솔하는 두목 노비를 이른다. 노비 10()마다 1구를 택하여 두목으로 정했다.

[D-006]팔세보(八世譜) : 8대의 조상까지 기록한 족보를 이른다.

[D-007]공포(貢布) : 지방에 거주하는 공노비가 신역(身役) 대신 나라에 바치던 베를 말한다. 영조 때 노()는 베 1, ()는 반 필로 공포를 삭감하였으며, 나아가 비의 공포를 폐지하였다. 1801(순조 1) 공노비가 해방되면서 공포의 징수도 완전 폐지되었다.

[D-008]일찍이 본명을 숨겨 : 원문은 嘗隱本名인데, 여러 이본들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09]백골징포(白骨徵布) : 조선 시대에 이미 죽은 사람을 생존해 있는 것처럼 명부에 등록해 놓고 강제로 군포(軍布)를 징수하던 일을 이른다.

[D-010]황구첨정(黃口簽丁) : 조선 시대에 다섯 살 미만의 젖내 나는 사내아이를 군적(軍籍)에 올려 군포를 징수하던 일을 이른다.

[D-011]동무 몰래 양식 낸다隱旅添粮 : 여행 비용으로 양식을 추렴하는데 길동무 모르게 내어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는 뜻으로, 힘만 들고 생색이 나지 않는 경우를 비유한 것이다. 송남잡지(松南雜識)에도 諱伴出糧이라 하여 같은 속담이 소개되어 있다. 정약용(丁若鏞) 이담속찬(耳談續纂)에도 동무 몰래 양식 내면서 제 양식은 계산 않는다.諱伴出粻 不算其糧는 속담이 소개되어 있다.

[D-012]노비안(奴婢案) : 노비의 호적으로, 20년마다 대추쇄(大推刷)하여 정안(正案)을 작성하고, 3년마다 소추쇄(小推刷)하여 속안(續案)을 만들었다.

[D-013]명공(明公) : 명성과 지위를 갖춘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D-014]그것이 폐단의 근원이 됨 : 원문은 其爲弊源인데, 백척오동각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諸般弊源으로 되어 있다.

[D-015]연석(筵席) : 임금이 학문을 닦는 경연(經筵)을 말한다. 정승은 경연의 영사(領事)를 겸하였으며, 경연이 끝난 뒤 그 자리에서 임금과 정치 문제를 협의하였다.

[D-016]천하의 …… 근심해 주기 : 원문은 先天下之憂而憂인데, () 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D-017]아무개 : 원문은 인데, 자신을 가리키는 겸칭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김 우상(金右相) 이소(履素) 에게 축하하는 편지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분이라 임금께서도 실로 그에 부응하시니 정승에 제수되던 날 저녁에 온 조정이 모두 감동하였거니와, 유독 이 백열(柏悅)의 소회로서는 더욱더 이마에 두 손을 얹고 축하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합하(閤下 정승에 대한 존칭)의 집안에 4()에 걸쳐 정승이 다섯 분 나오셨습니다. 정승의 지위와 중임은 일찍이 예전이라서 더 높고 오늘이라서 손색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멀리 역사책에서 찾을 것 없이 가까이 가정의 모범을 본받는다면 이야말로 백성들의 복이 될 것입니다.

화폐의 가치에 대해서 제 나름의 견해가 있기에 별지(別紙)에 기록하오니, 직위를 벗어난 참람되고 망녕된 말이라 책하지 말아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별지(別紙)

 

오늘날 백성의 근심과 국가의 계책은 오로지 재부(財賦 재화와 부세)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는 배가 외국과 통하지 않고 수레가 국내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생산된 재부는 항상 일정한 수량이 있어, 관에 있지 않으면 민간에 있게 된다. 그런데 공사간(公私間)에 다 고갈이 되고 상하가 모두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재(理財)하는 방법이 제 길을 얻지 못한 까닭이다.

대저 화폐의 가치가 높아지면 물건의 가치는 떨어지고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 물건의 가치는 높아진다. 물가가 오르면 백성과 나라가 함께 병들고 물가가 떨어지면 농민과 상인이 함께 해를 입는 것이다.

역대 조정에서 화폐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전에 엽전을 주조했으나 그나마 잠시 시행하다 이내 중지되었다. 진실로 포화(布貨 )와 저화(楮貨 지폐)는 비록 싸지만 다시 비싼 은화(銀貨)가 있어서 비싸고 싼 것 사이에 절충할 수 있었다.

무릇 위의 세 가지 화폐는 모두 백성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빨리만 만들어 내면 넉넉히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엽전은 사사로이 만드는 화폐가 아니고 관의 공급에 의존하고 있다. 당시 만든 양이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민간에 보급된 것도 미처 두루 퍼지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이 엽전의 사용을 불편하게 여긴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재부를 잘 다스리는 데에는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폐의 가치를 헤아려 물가를 조절하며, 막힌 것은 소통시키고 넘치는 것은 막아서, 화폐의 가치가 너무 오르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물건이 지나치게 비싸지거나 지나치게 싸지는 경우를 막는 것이다.

엽전이 세상에 통행된 지 113년이 지났다. 중앙에서는 호조(戶曹), 진휼청(賑恤廳), 오군영(五軍營)과 지방에서는 팔도(八道), 양도(兩都), 통영(統營)에서 대체로 각기 재차 혹은 3, 4차 주전(鑄錢)하였다. 그 만든 연도 및 수효는 해당 관청에 비치되어 있으므로 한번 조사하면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엽전이 관에 비축된 것이 얼마인지 파악하면 민간에 있는 것을 그에 따라 추정해 낼 수 있다. 백 년 사이에 마멸되거나 파손된 것, 물과 불에 손실된 것 등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대강 따져서 이를 제해도 관과 민간에 있는 현재 엽전의 총계는 적어도 수백만 냥이 될 것이다. 이를 엽전이 처음 사용되었을 때와 비교하면 아마 10배도 더 되는 양이다. 그럼에도 대소간에 황급해하면서 모두 돈 걱정을 않는 자 없으며, 심지어는 나라 안에 돈이 없다고도 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 엽전의 이름을 상평통보(常平通寶)’라 부른 것은 항상 물건과 균형을 유지하고자 함이다. 백성이 엽전을 사용한 지 오래되매 늘 보고 늘 써 왔기 때문에 다른 화폐는 무시하고 아울러 은화까지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엽전만 날마다 늘어나 물가는 날마다 오르게 되었고 모든 거래에 있어 엽전이 아니면 안 되게 되었다. 화폐의 흐름이란 기울어진 데로 쏟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물가가 오르면 돈이 어찌 거기에 쏠리지 않겠는가! 예전에 한푼 두푼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 혹은 서푼 너푼으로도 부족한 실정이다. 지금 엽전으로 물건과 균형을 유지하려면 몇 배가 들게 되었으니 이 어찌 엽전이 천해지고 화폐가 값싸진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국내의 재부에 대해 논하는 자들은 모두 돈이 귀하기 때문에 물가도 따라서 오른다 하니 어찌 생각을 못 함이 이다지도 심한가!

또한 은은 재부로서 으뜸가는 화폐이며 세상에서 모두 보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 민간 습속이 엽전에만 익숙하고 은화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은이 드디어 한낱 물건으로만 취급되고 화폐에는 들지 않게 되었다. 북경(北京)의 시장에서 팔지 않으면 곧 무용지물과 같은 것이다. 하정(賀正), 동지(冬至), 재력(䝴曆), 재자(䝴咨) 등의 사신 행차에 휴대하는 포은(包銀)이 매년 적어도 10만 냥은 될 것이니, 10년을 합계하면 100만 냥이나 되는 것이다. 이로써 조달하여 실어서 돌아오는 것이란 한갓 털모자일 뿐이다. 털모자는 한 해 겨울만 지나도 해져 못 쓰는 것이다. 천 년이 가도 부서지지 않는 보물을 들고 가서 한 해 겨울에 해져 못 쓰는 것을 바꿔 오고, 산천에서 캐내는 한정이 있는 재화를 실어서 한번 가면 다시 못 올 땅으로 보내 버리니 천하의 졸렬한 계책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하겠다.

간접적으로 듣건대 국내에 당전(唐錢 청 나라 동전)을 통용시켜 전황(錢荒 화폐 부족 현상)을 구제하기로 하고 이번 동지사 편에 들여오도록 허락하였다 하는데, 이는 결코 옳은 계책이 아니다. 엽전은 바람, 서리, 홍수, 가뭄 등의 재해를 받는 것도 아닌데, 어찌 곡식이 큰 흉년을 만난 것처럼 ()’이라 일컫는가. ‘이라 일컫는 까닭은 돈길이 너무도 혼잡해져서 마치 벼논에 우거진 잡초를 제거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뜻이다.

중국의 산해관(山海關) 바깥 지역에서 문은(紋銀) 1냥으로 동전 7()를 교환해 준다고 한다. 1초는 163푼으로 한 꿰미가 되니, 우리나라 엽전으로 기준을 삼아 보면 1냥의 은이면 대개 엽전 11 4 1푼을 얻을 수 있으니 거의 10배의 이익을 보는 것이다. 모든 운반비를 제하더라도 5, 6배의 이익은 된다. 저 역관들은 한갓 자기들의 목전의 이익만 탐하고 국가의 장구한 계책은 알지 못하여, 수십 년 이래 밤낮 오직 당전의 통용을 소원하고 있다. 이는 그야말로 화살 가는 데 따라 과녁 세우기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의 화폐가치가 하락함에 따라 온갖 물가가 뛰어오르고 있는데, 어찌 외국의 조악한 화폐를 들여다가 통화의 유통을 스스로 흐리게 한단 말인가. 털모자는 오히려 서민들의 방한의 용구인데도 은으로 바꾸어 오는 것이 불가하거늘, 하물며 역관배들의 일시적인 조그만 이익을 위해서 팔도에서 산출되는 귀중한 은을 쓸어다가 북경의 시장에다 밑 빠진 독을 만들어 쏟아 붓는단 말인가. 그 이해득실은 환히 알기 쉬워 굳이 지혜 있는 자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명백한 것이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먼저 돈길을 맑게 하고 우선 은화가 북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막는 것밖에 없다.

어떻게 돈길을 맑힐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엽전을 사용한 이래로 구전(舊錢)보다 좋은 것이 없다. 구전은 모두 견고하고 중후하며 글자체도 분명하였는데, 임신 · 계유 연간에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동시에 엽전을 주조하면서 느닷없이 옛 방식을 바꾸어 납과 철을 많이 섞은 데다 두께가 너무 얄팍해서 손만 대면 쉬이 부서질 정도였다. 그리하여 엽전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으로 간주되어 맨 먼저 돈의 재앙을 만들었으니, 물가가 치솟은 것은 실로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그 후 계속 만들 때마다 그 크기가 갈수록 줄어들어, 지금의 신전(新錢)과 함께 섞어서 꿰미를 만들면 신전은 구전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서 돈을 세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돈의 난잡함이 이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지금 옛날의 오수전(五銖錢)과 삼수전(三銖錢)의 제도를 모방해서 어디서든 현재 있는 구전 한 닢을 신전 두 닢에 해당하도록 하고, 일제히 돈꿰미를 바꾸면 대소가 즉시 구분될 것이니 새로 돈을 주조하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고도 앉아서 백만 냥을 얻을 수 있다. 비록 크고 작은 돈을 함께 통행시키더라도 가치의 경중에 따라 달리 쓰면 민심을 거스르지 않고 화폐가 잘 유통될 것이다. 임신 · 계유 연간에 세 영문(營門)에서 주조한 엽전은 큰 것도 구전만 못하고 작은 것은 신전과 맞지 않아 이미 격식에 어긋나고 형체마저 너무 얇고 졸렬하니 모두 통용을 정지시켜 저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돈길이 맑아질 것이다.

은화가 빠져나가는 것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관과 민간에 소장되어 있는 토산의 은괴를 그냥 부숴서 화폐로 삼지 말고, 모두 호조로 바치게 해서 일률로 닷 냥, 열 냥으로 크고 작은 덩어리를 만들어 천마(天馬)나 주안(朱雁)의 모양을 박아서 원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10분의 1의 세를 받는다. 그리고 교역한 당전은 국내에 들이지 못하게 하고 의주(義州)에 유치시켜 두었다가, 뒤에 나가는 사행의 노자에 충당시킬 것이다.

무릇 사행의 수행원도 마땅히 긴요치 않은 인원은 감해야 할 것이다. 서장관(書狀官)의 경우에 그 소임이 외교의 임무를 맡은 것도 아니요 직분이 종사(從事)와도 다른데, 그 식량이며 마부와 말 등 일체 번다한 비용은 따로 사신 한 사람의 몫이 들며 잡심부름하는 하인들을 많이 대동하고 양방(兩房)에 의존하여 취사를 해결한다. 그가 가고 오는 것은 본래 중국 측에서 알 바 아닌데도 무릇 잔치를 베풀고 상을 하사하는 자리에서 전례에 따라 염치없이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매우 부당한 일이요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구차스럽기 짝이 없다. 세 명의 대통관(大通官 벼슬이 높은 역관) 이외에 무릇 압물종사(押物從事)는 모두 감원함이 옳고, 사자(寫字), 도화(圖畵), 의관(醫官)의 직임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의 수행 비장(裨將)들에 분배시키며, 기타 무상종인(無賞從人)과 의주 상인은 일체 엄금하고, 무역하는 데 있어서는 약재 이외에는 일체 함부로 내가지 못하게 한다면 변경의 관문이 엄중해지고 국내에 은화가 저절로 풍족하게 될 것이다.

 

 

 

시국에 절실한 말로서 한() 나라 가산(賈山)과 당() 나라 육지(陸贄)와 같은데, 문장을 지은 것은 도리어 더욱 고아(古雅)하고 간결하다.

 

[C-001]김 우상(金右相)에게 축하하는 편지 : 김이소(金履素 : 1735~1798)는 자가 백안(伯安), 호는 용암(庸庵),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김창집(金昌集)의 증손이다. 연암과는 약관 시절부터 친구였다. 영조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이조 판서를 거쳐 정조 대에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이 글은 그가 1792년 음력 10월 우의정에 제수되었을 때 보낸 편지인데, 하풍죽로당집에는 하김우상인론전폐경중서(賀金右相因論錢幣輕重書)’, 동문집성에는 하김우상이소인론천폐서(賀金右相履素因論泉幣書)’로 되어 있다.

[D-001]백열(柏悅) : 가까운 친구의 좋은 일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육기(陸機)의 탄서부(歎逝賦)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뻐하고, ! 지초가 불에 타니 혜초가 탄식하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文選 卷16

[D-002]별지(別紙) : 김택영(金澤榮) 연암집 중편연암집에는 천폐의(泉幣議)’ 또는 상김우상이소천폐의(上金右相履素泉幣議)’라는 제목으로 별도로 수록되어 있다.

[D-003]엽전이 …… 지났다 : 숙종 4(1678)에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한 일을 두고 한 말이다.

[D-004]오군영(五軍營) : 훈련도감(訓鍊都監),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을 말한다.

[D-005]양도(兩都) : 강도(江都)와 송도(松都), 즉 강화부(江華府)와 개성부(開城府)를 가리킨다.

[D-006]대소간에 : 원문은 大小인데, ‘小大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7]하정(賀正), 동지(冬至), 재력(䝴曆), 재자(䝴咨) : 하정은 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하러 중국으로 가는 사행이고, 동지는 동짓날을 축하하러 가는 사행이며, 재력은 중국으로부터 역서를 받아 오는 것이고, 재자는 중국과의 외교문서인 자문(咨文)을 가지고 왕래하는 것을 이른다.

[D-008]포은(包銀) : 사행(使行)의 여비 조달을 위해 인삼 열 근씩 담은 꾸러미 여덟 개 즉 팔포(八包)를 가져가도록 하다가 인삼 대신 그 값에 상당하는 은()을 가져가도록 했는데, 이를 포은이라 한다.

[D-009]이로써 …… 뿐이다 : 열하일기 일신수필(馹汛隨筆) 7 22일 조를 보면, 영원위(寧遠衛) 지나 산해관(山海關) 조금 못 미쳐 중후소(中後所)란 곳에 대규모 털모자 공장이 셋이나 있으며 사신 행차에 동행한 우리나라 의주(義州) 상인들이 그곳의 생산품을 대량 수입해 간다고 하면서, 그로 인한 은화 유출을 비판하였다. 중후소의 털모자 공장에 관해서는 김창업(金昌業)과 홍대용(洪大容) 등의 연행록에도 소개되어 있다.

[D-010]산천에서 …… 실어서 : 원문은 載採山有盡之貨인데, 국립중앙도서관 필사본에는 載採山川有盡之貨로 되어 있다. 이어지는 대구(對句) ‘輸之一往不返之地를 감안하면 후자처럼 1구가 8자로 되어야 옳다. 또한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은조(銀條)에도 이와 유사한 以山川有限之材 輸一往不返之地라는 구절이 있어 이를 참조하여 번역하였다.  열하일기 일신수필 7 22일 조에는 以採山有限之物 輸一往不返之地라 하여 山川이 아니라 으로 되어 있다.

[D-011]국내에 …… 허락하였다 : 정조 16(1792) 10월 은() 부족에 따라 포은을 채우지 못하게 된 역관들의 생계 대책과 전황(錢荒) 해소를 위해 청 나라 동전을 수입하기로 하자 평안 감사 홍양호(洪良浩)가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가 우려한 대로 청 나라가 대청회전(大靑會典)에 동철(銅鐵)의 외국 유출을 금한다는 규정을 들어 불허함에 따라 동전 수입이 실현되지는 못했다. 正祖實錄 16 10 6 · 19, 17 2 22

[D-012]문은(紋銀) : 청 나라에서 화폐로 쓰이던 은을 이른다. 말굽 모양이라 하여 마제은(馬蹄銀)이라고도 부른다.

[D-013]임신 · 계유 연간 : 각 군영의 경비 조달을 이유로 중앙의 세 영문(營門)으로 하여금 전년부터 주조하게 한 상평통보 44 4000냥의 주조가 임신년(1752, 영조 28) 7 1일 완료되었다. 당시 주조된 동전은 원료 부족 때문에 크기가 약간 축소된 중형(中型) 상평통보였다.

[D-014]지금의 신전(新錢) : 정조 9(1785) 7월 정언 이민채(李敏采)가 상소하여 전황(錢荒) 대책을 건의한 것을 계기로 호조에서 주관하여 상평통보 67만 냥을 새로 주조하게 하였다.

[D-015]오수전(五銖錢)과 삼수전(三銖錢)의 제도 : 오수전이 처음 통행될 때 이전에 있던 삼수전과 차등을 두고 교환되었던 사실을 말한다. 오수전은 무게가 5()로서 한() 나라 무제(武帝) 원수(元狩) 5(기원전 118)에 처음으로 주조되어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 나라 때까지 통용되다 당() 나라 건국 초에 폐지되었다. 삼수전은 오수전에 앞서 한 나라 무제 건원(建元) 1(기원전 140)에 처음으로 주조되었으나 무게가 너무 가벼워 위조하기 쉬웠으므로 4년 뒤에 주조가 정지되었다.

[D-016]너무 얇고 졸렬하니 : 원문은 薄劣인데, ‘劣薄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7]주안(朱雁) : 붉은색의 기러기로 서조(瑞鳥)의 하나이다.

[D-018]종사(從事) : 원래 여러 가지 직책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사행의 실무를 맡은 관원을 말한다. 예컨대 방물 호송을 맡은 관원을 압물종사(押物從事)라 한다.

[D-019]양방(兩房) :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가리킨다. 부사를 부방(副房), 서장관을 삼방(三房)이라 한다.

[D-020]무상종인(無賞從人) : 응상종인(應賞從人)과 달리, 청 나라 황제로부터 상을 하사받는 명단에 들지 못하는 비공식 수행원을 가리킨다.

[D-021]가산(賈山) : 전한(前漢) 때의 인물로, 문제(文帝)가 백성들이 사사로이 돈을 주조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인 도주전령(盜鑄錢令)을 폐지하자 가산이 글을 올려 강력히 반대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격절(激切)하여 문제가 끝내 처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D-022]육지(陸贄) : 754~805. () 나라 때의 인물로, 덕종(德宗) 초에 한림학사가 되어 주자(朱泚)의 반란이 일어나자 황제의 조서를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이 간절하여 무인들조차 조서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고 한다. 그 후 재상이 되어 폐정(弊政)을 논하고 가혹한 조세제도를 혁파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그가 황제에게 올린 글들이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라는 책으로 남아 있는데 그 글이 대부분 시국에 절실한 내용들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현풍현(玄風縣) 살옥(殺獄)의 원범을 잘못 기록한 데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사람이 급소를 맞으면 주먹 한 방, 발길질 한 번으로도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법률 조문에서 논한 바 있거니와, 이번에 김복련(金福連)이 유복재(兪福才)를 치사(致死)한 사건은, 그 뇌후(腦後), 인후(咽喉), 양과(兩胯) 등 여러 곳에 다친 흔적이 극히 낭자하여, 상처의 치수를 재어서 합쳐 보면 거의 두어 자에 이르니 시장(屍帳 검시 기록)을 살펴보건대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그 정범(正犯)의 확정에 있어, 초검(初檢)에서는 삭손(朔孫)에게 무게를 두었으나, 복검(覆檢)에서는 복련으로 논단하였으니, 간증(看證)이 앞뒤로 진술을 달리한 점을 보면 임기응변으로 잘못을 감싸려는 의도가 없지 않습니다.

복련은 곧 삭손의 아비요, 삭손은 바로 복련의 자식입니다. 아무리 살인죄수라 할지라도 윤리는 있는 법인데 부자간에 그 죄를 서로 떠넘기다니 과연 어떤 인간들입니까? 판정 자체의 경중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바야흐로 죽기 살기로 싸우면서 주먹과 발길이 마구 오가면 비록 이웃 사람이라도 당연히 머리를 풀어뜨린 채로 달려와서 싸움을 말릴 터인데, 그 자식된 자가 아무리 배가 아파 아랫목에 드러누워 있었다.’고 말하지만 어찌 방문을 굳게 닫고 있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일의 곡직(曲直)과 싸우게 된 연유를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분김에 몸을 돌보지 않고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 나가서 제 힘껏 협공하여 아비를 위험에서 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성난 주먹 아래 비록 당장 상대가 죽어 넘어지더라도 제 몸을 스스로 묶고 관청에 자수하여 살인범이 되기를 청하기에도 겨를이 없겠거늘, 어찌 부자가 죽음을 다투는 마당에 이같이 느긋하게 있었겠습니까?

시골구석의 어리석은 백성이 망녕되이 부자가 함께 살아날 꾀를 내어 이같이 이랬다저랬다 하고 진술한 것이니, 정상을 참작하여 죄를 판정할진대 우발적인 살인의 죄는 작고, 꾸며서 둘러댄 죄는 크다 하겠습니다. 과연 가까운 이웃이 증언한 바와 같다면, 싸움터에 나아가 용기가 없는 것도 오히려 효도가 아니라고 일컬었거늘 하물며 불반병(不反兵)의 원수와 만나 싸움에 있어서겠습니까.

복검에서 원범(元犯 주범)이 뒤바뀐 것은 풍속과 교화에 크게 관계되는 일이니 삭손이 사실을 자백하기 전에는 이 옥사가 바로될 수 없습니다. 각별히 조사해서 다시 주범과 종범을 가려내야만 실로 옥사를 신중히 다루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가히 편언절옥(片言折獄)이라 하겠다.

 

[C-001]현풍현(玄風縣) …… 답함 : 1792(정조 16) 연암은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는 길에 감영에 들렀다가 당시 경상 감사 정대용(鄭大容)의 부탁으로 도내의 의심스러운 옥사들을 심리하는 일을 맡아 이를 공정하게 처리했다고 한다. 이 편지를 비롯하여 연암집 2에 수록된 옥사에 관한 편지 4통은 모두 이 일로 경상 감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글들이다. 過庭錄 卷2

[D-001]뇌후(腦後) : 정수리의 숨구멍 자리인 백회(百會)의 뒤쪽을 말한다.

[D-002]양과(兩胯) : 두 넓적다리 사이 부분, 즉 샅을 말한다.

[D-003]상처의 …… 합쳐 보면 : 원문은 分寸之地인데, 검시할 때 영조척(營造尺)이나 관척(官尺)으로 상처의 길이와 깊이가 몇 푼() 몇 촌()인지 재는 것을 말한다. 10푼이 1촌이고, 10촌이 1()이다.

[D-004]간증(看證) : 간증(干證), 즉 범죄에 관련된 증인을 말한다.

[D-005]싸움터에 …… 일컬었거늘 : 예기(禮記) 제의(祭義)에서 증자(曾子)가 효()에 대하여 제자인 공명의(公明儀)에게 말하기를, “몸이라는 것은 부모가 남겨주신 유체(遺體)이니, 부모의 유체를 움직임에 어찌 감히 신중하지 않겠는가. 행동거지를 장중하게 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관직에 나아가 신중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붕우 사이에 신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싸움터에 나아가 용맹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다. 이 다섯 가지를 실천하지 못하면 그 비난이 부모에게 미칠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겠는가.身也者 父母之遺體也 行父母之遺體 敢不敬乎 居處不莊 非孝也 事君不忠 非孝也 莅官不敬 非孝也 朋友不信 非孝也 戰陳無勇 非孝也 五者不遂 灾及其親 敢不敬乎 하였다. 원문에서 전진무용(戰陣無勇)’  자가 예기에는 으로 되어 있으나, 뜻은 같다.

[D-006]불반병(不反兵)의 원수 : 불반병은 집으로 돌아가서 병기를 찾지 않는다는 말로서, 언제나 병기를 몸에 지니고 있다가 상대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죽이려 든다는 뜻이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 아버지의 원수는 한 하늘을 함께 이지 않고 반드시 죽이며, 형제의 원수는 집으로 돌아가서 병기를 찾지 않으며, 벗의 원수와는 같은 나라 안에서 살지 않는다.父之讐 弗與共戴天 兄弟之讐 不反兵 交遊之讐 不同國 하였다.

[D-007]편언절옥(片言折獄) : 한마디 말로 판정을 내림을 말한다.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자로(子路)에 대하여 한마디 말로 옥사를 판정할 수 있는 자는 아마도 자로일 것이다.片言可以折獄者 其由也與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밀양(密陽) 김귀삼(金貴三)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예로부터 의옥이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밀양 사람 김귀삼이 그 사위 황장손(黃長孫)을 치사케 했다는 사건은 의혹이 극심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초검에서는 실인(實因 사망 원인)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것이라 하였고, 복검에서의 실인도 역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것이라 했는데, 이번의 삼검(三檢)에서는 갑자기 강요당했다는 뜻의 피핍(被逼)’ 두 글자를 덧붙여 실인을 삼았으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별다른 본 것이 있어서 이 같은 단안을 내린 것입니까?

대저 이 옥사는 이미 세 차례 검험(檢驗 검시)을 거쳤으나 내내 어림짐작이어서, 상처난 자국의 치수에 가감된 것이 많았을 뿐 아니라 활투두(活套頭)인지 사투두(死套頭)인지조차도 분명치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논단하면서 검안(檢案)에 자상하고 소략함이 심하게 차이 난다 하여 초검과 복검을 모조리 의심하고 삼검에만 무게를 두어서는 물론 안 될 것입니다.

대개 장손이 목을 맨 것은 딴 여자를 얻어 들인 데서 발단하였고, 소를 두고 다툰 데서 결과한 것이니 저 길 가는 사람이 사연을 듣더라도 당연히 그 장인에게 의심을 많이 둘 것입니다. 하물며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검관(檢官 검시관)의 도리로서 혹시 숨은 무엇이 있을까 끝까지 캐 보려고 한 것은 필연적인 형세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때에 목매달아 죽은 나무에 대해 가까운 곳을 피하고 먼 곳을 대는 등 진술이 여러 번 뒤바뀌니, 묵은 의심 새 의심이 무진무진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삼검의 실인에 있어 갑자기 피핍이란 단안이 덧붙여진 까닭입니다.

이른바 피핍이란 말은 겉으로 얼핏 보기에는 긴요하고 무게 있는 말인 듯 보이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따져 보면 이렇다 할 형적이 없는 것입니다. 혹 뜻밖에 의심을 받거나 일이 당초 마음먹은 것과 어긋날 경우에, 빈정대는 것도 아니요 나무라는 것도 아니나 오는 말이 가시가 돋쳐, 낯이 뜨거워지고 속이 타서 더더욱 답답하고 원통할 때가 있습니다. 이 쓰라리고 괴로운 심경을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이겠습니까마는, 조급하고 경망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자살하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른바 피핍이란 것은 왕왕 이와 같은 것으로서, 원인이야 비록 남 때문이지만 죽음은 스스로 자행한 것이니, 지금 비록 피핍이란 두 글자를 덧붙인다 해도 옥사의 진상에는 별로 가중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의심 갈 만한 자취를 들어 용서할 만한 정상을 참작해 본다면, 남편과 아내, 장인과 사위 사이에 일찍이 눈 부라리고 말다툼한 적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무슨 소 찾는 일로 인하여 어찌 암암리에 살해할 리가 있겠습니까? 또 그 의복을 망가뜨리고 문기(文記)를 찢어 버린 것을 보면 비록 정을 아예 끊어 버린 듯도 하지만, 상놈들이란 분이 나면 들이받고 치고 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일인지라 조금 지나 술을 받아 함께 취토록 마시고 한이불 속에 자고 나면 묵은 감정은 하마 풀리고 옛 정이 되살아나는 법인데, 졸지에 스스로 목매달았다는 것은 실로 상정이 아닌 것입니다.

대저 장손의 자결은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새로 사들일 논값은 얼마이며, 전에 기르던 소값은 얼마인가, 딴 여자에게 장가가던 첫날밤부터 온갖 계획이 이 소 한 마리에 달려 있었는데, 급기야 소를 찾으러 와서는 비단 당초의 계획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무한한 비웃음과 꾸지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속담에 이른바 내 칼도 남의 칼집에 들어가면 빼기 어렵다는 격이라, 분김에 멍청한 꾀를 내어 죽어 버리겠다는 말로 남을 위협하겠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농지거리한 것이 마침내 참말로 되어 버린 것일 수가 있습니다. 둘째, 남의 권고를 받아들여 애써 딴 여자를 보았으나 소까지 몰고 이 집을 아주 떠난다는 것은 제 본심이 아니었으며, 전에 살던 곳을 잊기가 어려워 옛집을 다시 찾아갔으나 두루 질책만 쏟아져 몸 둘 곳이 없었으며, 옛날을 그리는 정은 심중에 간절했지만 성깔 사납고 투정 많은 계집은 돌아보는 척도 않아서 한밤중에 서성대고 기다려도 그림자도 발자국 소리도 영영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속담에 이른바 게도 잃고 구럭도 잃었다는 격이어서, 떠나기도 어렵고 있기도 어려워 원망과 후회가 한꺼번에 몰려드니 술김에 슬픈 생각이 일어나서 차라리 죽어 버리고 만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정상을 헤아려 보면 반드시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또한 정세를 들어 말하더라도 귀삼은 늙고 잔약한 몸이요, 장손은 힘 있는 장정이니, 설사 귀삼이 정말로 몰래 해칠 계획을 지녔더라도 장손이 어찌 남에게 제 목을 매라고 내맡기고 손 하나 까딱 않으며 그대로 얽어매였겠습니까. 설혹 늑살(勒殺 목 졸라 죽임)이라 한다면 어찌하여 빨리 구렁에 밀어넣어 그 흔적을 없애 버리지 않고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시친(屍親 피살자의 친척)에게 급급히 통부(通訃 부고)를 했겠으며, 기필코 검험하고 말 관가에 허둥지둥 알리어 자진해서 원범이 되어 스스로 죽을 땅에 들어갔겠습니까? 통탄할 바는 목매단 장소를 끝내 곧이곧대로 말하지 아니하여 옥사의 진상에 의혹을 자아내게 한 것인데, 오직 저 어리석은 백성이 헛되이 사중구생(死中求生)의 꾀를 내어 이와 같이 어물어물한 것이요, 장손이 제 손으로 목 매어 제가 죽은 것만은 매한가지입니다. 등유목(燈油木)에 목을 매었건 도리목(都里木)에 목을 매었건 간에 그 죄에는 그다지 경중의 차이가 있지 않은 것인데, 즉시 장소를 바른대로 대지 않은 것은 그 행동을 따져 보면 비록 교활하고 흉악한 듯하나 그 정상을 헤아려 보면 그다지 괴이히 여길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건은 오직 가볍게 처벌하는 것이 진실로 옥사를 신중히 하는 도리가 되는 것이니, 재량하여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C-001]의옥(疑獄) : 죄상이 뚜렷하지 아니하여 죄의 유무를 판명하기 어려운 사건을 이른다.

[D-001]활투두(活套頭)인지 사투두(死套頭)인지 : 투두(套頭)는 자살할 때 쓰는 올가미를 말한다. 활투두는 올가미의 고를 움직여 죄었다 늦추었다 할 수 있어 살아날 수 있는 것이고, 사투두는 고를 단단히 매어 옴짝달싹할 수 없으므로 죽게 되는 것이다.

[D-002]문기(文記) : 소유권이나 기타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로, 문권(文券)이라고도 한다.

[D-003]등유목(燈油木) : 나무로 만든 등잔걸이를 가리키는 듯하다.

[D-004]도리목(都里木) : 서까래를 받치는 도리로 쓰이는 재목을 말한다.

[D-005]옥사를 …… 도리 : 원문은 審恤之道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에는 審愼之道로 되어 있다. 앞의 편지에서도 審愼之道라 하였을 뿐 아니라 이는 재판과 관련하여 흔히 쓰는 표현이므로, 이에 따라 고쳐서 번역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함양(咸陽) 장수원(張水元)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함양 사람 장수원이 한조롱(韓鳥籠)이란 계집을 치사한 사건에 있어 초검과 복검이 모두 스스로 물에 빠진 것으로 실인을 삼았으나, 조서를 반복하여 살펴보고 그 정실(情實)을 참작해 보면, 조롱이 수원에게 위협과 핍박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처녀의 몸으로 남의 곁방살이를 하는 처지라, 비록 몹시 부끄럽고 분하지만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고 형편이 너무나 궁하여 어디 갈 곳조차 없는지라 저 맑고 깨끗한 못만이 그녀의 몸을 깨끗이 보존할 만한 곳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비록 수원이 드잡이하여 밀어 넣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순결을 지키는 처녀로 하여금 이렇게 물에 빠져 죽는 원한을 품게 만든 것이 그놈이 아니고 누구란 말입니까! 그 정상을 추궁해 가면 그놈이 어떻게 제 목숨을 내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후 진술에서 그 말이 여러 번 변했으니 이는 교활하고 완악한 습성이 그 강포한 자취를 은폐하려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강간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곁방의 처녀가 무엇 때문에 끌려갔겠으며, 제 놈이 끌어가지 않았으면 조롱의 머리털이 어찌하여 뽑혔겠으며, 지극히 분통한 일이 아니라면 뽑힌 머리털을 무엇 때문에 꼭 간직해 두었겠습니까. 이 한 줌의 머리털을 남겨 어린 남동생에게 울며 부탁한 것은 한편으로는 그날에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증거로 삼자는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죽은 뒤에라도 원한을 씻을 자료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이른바 이를 잡다가 유혹하고, 길쌈을 하다 말고 유혹했다거나 호미를 전해 주러 왔다가 싸우고, 버선을 잃어 버려 싸웠다고 한 진술들은 이 옥사에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수원이 강포한 짓을 한 증거물은 오직 이 머리털이요, 조롱이 죽도록 항거한 자취도 오직 이 머리털이니, 몸은 비록 골백번 으깨지더라도 이 머리털이 남아 있는 이상 보잘것없는 이 머리카락 하나로도 옥사의 전체를 단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심하는 자리에서 형적만을 가지고 따져, 죽게 된 책임을 본인에게 돌리고 상대에게는 그저 위협과 핍박을 한 죄율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로써 판결을 끝낸다면 어찌 죽은 자의 울분을 조금이나마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정상을 참작하고 행동을 헤아려 보면 위협과 핍박을 했다는 죄율은 마침내 너무도 경한 편이니, 중한 편을 따라 논하여 강간미수의 죄율로 처벌하는 것이 아마도 적절할 듯합니다.

 

 

두 편의 글 모두 진상을 깊이 파고들었으며 문장을 지은 것이 시원스럽고 유창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밀양(密陽)의 의옥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밀양부(密陽府)의 통인(通引) 윤양준(尹良俊)이 중 돈수(頓守)를 치사한 사건에 대하여 초검 및 복검이 모두 매를 맞은 것으로 실인을 삼았는데, 이 옥사는 시친(屍親)의 고발이 없는 이상, 법리로 따져 보면 관에서 지레 검시한 것은 벌써 옥사의 체통에 어긋난 것입니다. 다만 절의 중이 유리(由吏)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두서없이 돈수의 일을 언급했는데 거기에,

 

지난번 돈수가 통인청(通引廳)에서 형벌로부터 풀려날 때 절곤(折困)을 당하여 그로 인해 병사했으니 이런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시오.”

라고 했다는 말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 말이 아주 모호하기는 하지만 절곤(折困)’이란 두 글자는 극히 수상합니다. 더구나 그 사단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관속(官屬)에게서 일어난 일이므로, ‘병사했다는 대목은 미처 자상히 살펴보지도 않고 먼저 절곤이란 말에만 마음이 동요했던 것입니다. 뒤이어, 혐의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바로 가서 초검을 시행한 것인데, 급기야 본 사건을 규명해 보니 몇 대의 태형(笞刑)으로 위엄을 보인 데 지나지 않았은즉, ‘절곤 두 글자는 저절로 허망한 고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초에 이 절곤이란 말로 인해서 검험을 했던 것이나 끝내 그 말뜻을 알 수 없었으며, 매 맞은 자국밖에 다른 상처나 병환의 증거를 찾아보았으나 늘 실상에 들어맞지 않은 듯하였으며, 끝까지 조사하려고 해도 더 이상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왕좌왕 옥사가 이루어지고 꼭 맺혀 풀리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무릇 타박상을 입어 목숨을 잃은 경우는 반드시 행흉(行凶)한 기장(器仗 도구)이 있기 마련이니, 행흉한 기장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내면 이 옥사가 당장에 해결될 것입니다. 하관(下官 연암 자신을 가리킴)의 얕은 소견으로는 절곤 두 글자는 바로 결곤(決棍)’의 오기인 듯합니다. 결곤이건 결태(決笞)건 볼기를 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그다지 용처(用處)의 경중을 따질 것이 못 됩니다. ‘()’ ()’로 바꾸어 발음하는 것은 상놈들의 통폐요, ‘()’ ()’으로 잘못 기록한 것은 무식한 소치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보는 자의 선입견이 절납(折拉 부러뜨림) ()’ 자에 놀라고, 곤박(困迫 곤욕을 보임) ()’ 자에 더욱 현혹된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 통인들이 다 같이 했다고 나서자 주범과 종범을 분별하기 어렵게 되니, 마치 힘을 모아 함께 두들겨 패서 낭자하게 상처를 입힌 일이 있는 것처럼 되었으며, 뭇 중놈들이 일제히 병을 앓았다고 칭하여 증언들이 덩달아 똑같고 보면, 그들이 관속을 두려워하여 숙의한 끝에 입을 맞춘 것이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러기에 전후의 검관들이 감히 그 정상을 경솔히 논하지 못한 것이요, 여러 해를 두고 결말을 못 지은 것도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다만 옥사의 진상을 들어 판단한다면 15대의 태형으로 어찌 목숨을 잃을 리가 있으며, 더욱이 두서너 곳의 상처도 급소가 아니지 않습니까? 대개 각 고을의 통인들이 종이 자르는 판자를 장척(長尺)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그놈들 두목이 항용 쓰는 볼기 치는 막대인즉, 통인들이 이것으로써 벌을 시행하는데 더러는 속여서 ()’라고도 합니다. 중들이 이 장척을 잘못 보고서 혹시 ()’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는 것이니, 상식적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검관이 된 사람들은 마땅히 먼저 그 절곤이 무슨 말인가를 신문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결곤의 오기였다면, 또한 마땅히 그것이 과연 곤장(棍杖)이었는지 태장(笞杖)이었는지를 자상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 아니고 라 말한다면, 또한 마땅히 그 크기가 어떤 종류인가를 자상히 분별하여, 매를 맞은 자국과 대조해 본다면 판자에 맞은 흔적인지 태를 맞은 흔적인지를 그 자리에서 저절로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야 태형의 여부와 병환의 진위(眞僞)도 따라서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진술들을 참조하고 검증해 보면, ‘조갈증이 나서 물을 찾다가 계단에서 떨어져 돌에 부딪쳤다느니 방을 되게 달구어 땀을 내느라 이렇게 짓무르게 되었다느니 하였는데, 열병으로 미친 증상이 생기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요, 달군 구들에 살이 데어 부풀어 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지금 이 실인으로 단지 매 맞은 것만을 장부에 기록한다면 옥사의 체통이 서지 못할 것이며, 원범을 유독 수번(首番)에게만 뒤집어씌운다면 더욱 원통한 죄가 될 것입니다. 재량하소서.

 

 

진상을 깊이 파고들었다.

 

[C-001]밀양(密陽) …… 답함 :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 이전(吏典) 어중조(馭衆條)에 이 편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지통통인(紙筒通引)이 절에서 매달 만들어 바치는 지물(紙物)을 퇴짜 놓는 것으로 위세를 부리니 불가불 단속해야 한다면서, 산청현(山淸縣)의 수통인(首通引)이 지장(紙匠) 승려를 곤장 쳐 죽였으나 검안(檢案) 결곤(決棍)’ 절곤(折困)’으로 잘못 기록되는 바람에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옥사를 연암이 마침내 해결했다고 하였다.

[D-001]유리(由吏) : 수령의 해유(解由)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아전, 즉 지방 고을의 이방 아전을 이른다.

[D-002]결곤이건 결태(決笞) : 조선 시대의 형()에는 죄의 경중과 형구(刑具)에 따라 태형(笞刑), 장형(杖刑), 곤형(棍刑)의 세 종류가 있었다. 결곤은 가장 가혹한 곤형을 가하는 것이고 결태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태형을 가하는 것이다.

[D-003]() …… 소치입니다 : 원문은 折決易音 常漢之通患 困棍誤書 無識之所致인데, 목민심서 이전 어중조(馭衆條)에 인용된 구절은 決折通音 常漢之依例 棍困誤讀 無識之所致로 되어 있다.

[D-004]수번(首番) : 목민심서 이전 어중조의 내용으로 미루어, 통인의 우두머리인 수통인(首通引)을 가리키는 듯하다. 통인의 임무 중의 하나는 당직을 서는 수번(守番)이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진정(賑政)에 대해 단성 현감(丹城縣監) 이후(李侯)에게 답함

 

 

보내 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봄날이 쌀쌀한데 정무에 분망하신 몸이 더욱 안중(安重)하시다니 우러르고 그리던 마음이 매우 흐뭇합니다.

그런데 보내 주신 편지에,

 

()라 예라 이르지만, 기민(飢民) 구제를 이른 것이겠는가?”

라는 대문이 있으니, 말이 어긋날 뿐더러 생각지 못함이 어찌 그리도 심합니까! 지난번에 갈 길이 바빠서 긴 이야기는 못 하고, 다만 예()를 진정에도 적용할 만하다고 말했지요. 말이 비록 두서를 갖추지 못했지만 스스로 짐작이 있어서 한 말이었는데, 밑도 끝도 없을 뿐더러 갑자기 한꺼번에 끄집어내었으니 그대는 본래의 사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갑자기 해괴하게 듣고는 도리어 그 말을 구실로 삼아 나를 오활하고 괴벽스러워 실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비웃었습니다. 오활한 점이 진실로 나에게 있으니 마음에 달게 받겠습니다마는, 만약 기민 구제가 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이르신다면 어찌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 군자가 정치를 하면 어디에 가도 예 아닌 것이 없는데, 하물며 진정은 국가를 다스리는 큰 정사요 많은 목숨이 매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비록 운한(雲漢)’을 상고해도 관련 예의를 상고할 길 없고, 향음주례(鄕飮酒禮)가 화락한 데 비해 비참한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먹이는 것을 ()’라 하고 노인에게 잔치 베푸는 것을 ()’이라 하여 모두가 의식(儀式)이 있으니, 백성이 주리다 못해 달려들면 그 빈궁을 구해 주는 것을 진휼(賑恤)이라 하는데 유독 여기에만 규칙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온 고을 백성들을 모아 놓고서 먹이기로 하면 와 같고, ‘이라는 점에서는 잔치와도 같은데, 남녀가 섞여 앉고 어른 아이가 자리를 다투니 어찌 이렇게 분별이 없고 질서가 없습니까?

지난번에 이러고저러고 말한 것은 주린 백성에게 읍양(揖讓)을 행하자는 말도 아니요, 진휼하는 마당에서 여수(旅酬)를 본받자는 것도 아닙니다. 쪽박으로 조두(俎豆 제기(祭器))를 익히자는 말도 아니요, 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사하(肆夏)에 맞추어 걸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에게 섭자(攝齊)를 힘쓰라는 것도 아니요, 부황 난 사람에게 유철(流歠)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개 예의란 일이 생기기 전에 방지하자는 것이요, 법률이란 일이 생긴 뒤에 금하자는 것인데, 저 기민들이 얼굴빛은 부어터지고 의복은 남루하며 바른손에는 쪽박을 들고 왼손에는 전대를 들고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모양으로 허리 굽혀 관정(官庭)에 나아오고 있으니, 그들이 아무리 불법적인 행동을 한다 해도 누가 능히 금지하겠습니까.

지난번 진주(晉州)를 가는 길에 귀하의 고을을 경유하였습니다. 마침 진휼하는 날이라 수천 수백 명의 주린 백성들이 문 부근에 모여들었는데, 관아의 문은 안으로 닫히고 문지기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말을 세우고 한참 동안 기다렸으나 통과할 길이 없었습니다. 뭇 사내 뭇 계집들은 늙은이를 부축하거나 어린애를 이끌고, 혹은 관문을 두들기며 크게 외치기도 하고 혹은 이러니저러니 떠들어 대며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 외모를 보면 모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숨넘어가는 형상이었으나 그 뜻을 살피면 모두 다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둠을 믿고 당당한 기세가 있었습니다.

얼마 후 하찮은 교졸(校卒)이 와서 뭇 백성에게 타이르기를, “새벽부터 죽을 끓이는데 솥은 크고 쌀은 많고 하여 무르익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우선 잠깐만 기다려 주면 곧 불러들이겠다.”고 하자, 군중이 성을 내며 일제히 일어나 떼로 덤벼들어 그 교졸을 두드려 대어 옷을 찢고 갓을 부수고 머리칼을 잡아당기고 수염을 뽑는 등 못 하는 짓이 없었으며, 한 사람은 갑자기 제가 제 코를 쳐서 피를 내어 낯에 바르고 큰소리로 사람 죽인다!” 외치니 뭇 백성들이 모두 함께 외치기를, “아전이 주린 백성을 친다!” 했습니다.

저들이 비록 사정이 급하여 진휼을 받자고 문 열기를 재촉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나, 그 야료 꾸미는 것을 보면 이만저만 놀랍고 두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후에 손님 연암을 가리킴을 맞기 위해 문이 드디어 열리자 군중들이 뒤죽박죽으로 한꺼번에 관정에 밀어닥쳤으며, 이어서 음식을 제공하니 그 시끄러움은 저절로 사라졌습니다.

이날 광경은 문밖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대는 듣도 보도 못 했을 것입니다. 피차 인사를 차린 뒤에, 그대가 먼저 아까 문을 닫은 이유에 대해,

 

백성들 사는 곳이 각각 멀고 가까움이 있으므로 여기 오는 것도 선후가 있어서, 먼저 온 자는 부엌을 에워싸고 불을 쪼이며 끓이는 죽이 절반도 안 익어서 뭇 쪽박으로 지레 휘저어 대니 온 솥이 무너질 지경이므로, 부득불 문을 잠그고 백성을 못 들어오게 하여 일제히 모이기를 기다린 것이지 감히 손님을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라고 말하여, 마침내 주인과 손님이 서로 한바탕 웃었지요. 그런데 아까 목도한 광경을 거론하지 않았던 것은, 비단 이야기가 장황한 데다 좌중에 진정을 감찰하는 감영(監營)의 비장(裨將)이 있어 처음 보는 그 사람에게까지 번거롭게 알릴 필요가 없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굶주린 백성은 비유컨대 오랜 병에 시달린 아이와 같아서,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리면 그 부모된 자는 아무쪼록 잘 타일러서 그 뜻을 순순히 받아 줄 따름이지, 어찌 그때마다 꾸짖고 나무라기를 평소와 같이 할 수야 있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자(孔子)는 말씀하기를 정령(政令)으로써 이끌고 형법으로써 단속하면 백성은 죄를 면하기는 하나 염치가 없어지고, 도덕으로써 이끌고 예의로써 단속하면 염치도 가지려니와 바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법률로 백성을 이기기보다 차라리 예의로 굴복시키는 것이 낫다 하겠으니, 왜 그렇겠습니까? 법률로 강요하자면 형벌과 위엄이 뒤를 따르게 되고, 예의를 사용하게 되면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앞을 서게 됩니다. 백성 중에 만약 위엄과 형벌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내가 법률을 무서워하는 자에게는 이길 수가 있지만 무서워하지 않는 자에겐 도리어 지게 되는 것인데, 더더구나 주림을 빙자하고서 마구 대드는 자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

무릇 인지상정으로 부끄러이 여기는 것은 가난과 굶주림보다 더함이 없고 잠시 동안은 한 사발 국물에도 염치를 차리는 법입니다. 이래서 내가 그들의 고유한 본성을 따라서, 그들을 위해 혐의를 사지 않게 남녀를 가르고 어른 아이의 순서에 따라 줄을 만들고 사족(士族)과 서민의 명분을 구별하여, 질서 정연하게 서로 넘어서지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있는 힘을 다해 양식을 달라고 부르짖지만 그것이 제 본심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무섭게 하는 것은 부끄럽게 만드는 것만 못하고, 억눌러 이기는 것은 순순히 굴복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른바 죄는 면하되 염치가 없어진다는 것은 이김을 두고 이름이요, ‘염치도 가지려니와 바르게 된다는 것은 굴복시킴을 두고 이름입니다.

지금 영남은 온 도가 불행히도 대흉년을 만나서 대대적인 진휼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고을 수령된 자는 힘을 다해 곡식을 마련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민을 가려 뽑는 마당에, 어느 누가 감히 백성을 어린아이 돌보듯이 하는 조정의 성대한 마음을 본받고 우리 임금의 근심 걱정하시는 마음의 만의 하나나마 보답하려 아니 하오리까! 더더구나 잘잘못을 가려 승진시키고 벌주는 일이 이 한 번의 거행에 달렸으니, 두려워하고 삼가고 경계하고 독려하다 보면, 명예를 구하는 겉치레로 돌아가기도 쉽고, 위로하고 구호하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다가 도리어 감사할 줄 모른다는 한탄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공진(公賑)이든 사진(私賑)이든 뒷날에 계속하기 어려움을 생각지도 아니하고, 공이 되든 죄가 되든 대부분 목전의 미봉책만 힘씁니다. 준비한 곡물도 많고 구제한 민중도 많으며 모든 진정에서 잘못한 고을이 없다 할지라도, 다만 두려운 것은 진정을 철회한 뒤입니다. 겨우 연명해 가던 남은 목숨을 무슨 수로 구제하며, 은혜만 바라고 사는 안이한 풍속을 장차 무슨 법률로 억누른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말한 예의란 것은 통상적인 진휼 방식을 버리고 별도로 다른 법식을 마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쌍히 여기고 어루만져 주는 속에서도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나눠 주고 먹여 주기 전에 먼저 그 염치부터 길러서, 반드시 남녀는 자리를 구분하고 어른 아이는 자리를 따로 하고 사족은 앞에 앉히고 서민은 그 아래에 자리 잡게 하여 각각 제자리를 찾고 서로 차례를 어지럽히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 되면 죽을 나눠 줄 때 남자는 왼편으로 여자는 바른편으로 되어 요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질서 정연할 것이며, 늙은이는 앞서고 젊은이는 뒤로 서서 요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양하게 될 것이며, 곡식을 나눠 줄 때에 앞에 있는 자가 먼저 받는다 해서 시새우지 않으며 아래에 있는 자가 차례를 기다려도 다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말한 저 예의란 것이요 기민 구제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선생이 평소에 육 선공(陸宣公 육지(陸贄))의 글을 몹시 즐기셨는데, 지금 이 글을 읽어 보니 특히 자양(紫陽 주자(朱子))의 글과도 닮았다. 자양 부자(紫陽夫子)도 역시 선공(宣公)의 글을 좋아하셨던가?

 

[C-001]진정(賑政) …… 답함 : 진정은 흉년을 만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사(政事)를 말한다. 단성은 안의현 이웃에 있던 고을로 현재는 산청군에 속한 면이다.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이후(李侯)’ 다음에 영조(榮祚)’라 하여 단성 현감의 이름을 밝혀 놓았다.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1793(정조 17) 봄에 연암은 자신의 녹봉을 털어 진정을 베풀 때 예법에 맞추어 질서를 유지했으며, 그 뒤에 이웃 고을 수령과 진정을 논한 장문의 편지가 문집에 실려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편지를 가리킨다. 또한 이 편지를 읽은 사람들은 진정을 논한 주자(朱子)의 글과 같은 법도가 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D-001]() …… 것이겠는가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예라 예라 이르지만, 옥백(玉帛)을 이른 것이겠는가?禮云禮云 玉帛云乎哉라고 한 말을 흉내낸 것이다. 공자의 말은 형식적으로 예물만 갖추고 진정한 예가 결여된 경우를 비판한 것이었는데, 단성 현감은 기민 구제의 경우에는 구태여 예를 갖출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D-002]비웃었습니다 :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그다음에 그 형세가 실로 그러하고란 뜻의 其勢固然’ 4자가 더 있다.

[D-003]운한(雲漢) : 시경 대아(大雅) 운한을 가리킨다. 이 시는 주() 나라 때 큰 가뭄을 만나 하늘에 기우제를 올리며 불렀던 노래라 한다.

[D-004]향음주례(鄕飮酒禮) …… 있습니다 : 원문은 視諸鄕飮 而舒慘有間인데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舒慘 舒疾로 되어 있다. 그러면 향음주례가 여유 있는 데 비해 서두르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D-005]먹이기로 …… 같은데 : 원문은 以饋則似犒 以養則同讌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以犒則似 以養則同으로, 하풍죽로당집에는 以犒則似師 以養則同燕으로 되어 있다.

[D-006]읍양(揖讓) : 향음주례에서 주인과 손님이 상견례를 할 때,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하는 읍()을 세 번하고 계단에 먼저 오르기를 세 번 양보하는 예법을 말한다.

[D-007]여수(旅酬) : 향음주례에서 헌작(獻爵)의 예식이 끝난 다음에 손님들이 장유(長幼)의 순서에 따라 돌아가며 술잔을 받는 것을 말한다.

[D-008]사하(肆夏) : () 나라 때의 궁중음악인 구하(九夏) 중의 한 곡으로, 사자(死者) 대신 제사를 받는 시()가 묘문(廟門)에 들어설 때와 나갈 때 이를 연주했다고 한다. 周禮 春官 大司樂 또한 예기 옥조(玉藻)에 옛날의 군자는 채제(采齊)의 곡에 맞추어 달려가고 사하(肆夏)의 곡에 맞추어 걸었다.趨以采齊 行以肆夏고 하였다.

[D-009]섭자(攝齊) : ()에 오를 때 옷자락을 끌어당김으로써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함과 동시에 공경의 뜻을 표하는 예법을 말한다.

[D-010]유철(流歠)하지 말라 : 예기 곡례(曲禮)에 기록된 식사 예법의 하나로, 염치없어 보이므로 죽이나 국물을 단번에 후루룩 들이켜지 말라는 뜻이다.

[D-011]정령(政令)으로써 …… 된다 : 논어 위정(爲政)에 나온다.

[D-012]잠시 …… 법입니다 : 원문은 斯須之廉 在於豆羹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 평상시는 형을 공경하되 잠시 동안은 향리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다.庸敬在兄 斯須之敬 在鄕人라고 하였고, “밥 한 그릇과 국 한 사발을 얻으면 살고 못 얻으면 죽을지라도, 야단치면서 주면 길 가던 사람도 받지 않으며 발로 차서 주면 거지도 더럽다고 여긴다.一簞食 一豆羹 得之則生 弗得則死 嘑爾而與之 行道之人弗受 蹴爾而與之 乞人不屑也 하였다.

[D-013]그들을 위해 : 원문은 爲之인데,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與之로 되어 있다.

[D-014]공진(公賑)이든 사진(私賑)이든 : 원문은 公私之間인데, 공진은 공곡(公穀 : 관곡)으로 기민을 구제하는 것이고 사진은 수령이 자신의 봉급을 털어 기민을 구제하는 것이다.

[D-015]대체(大體) : 맹자 고자 상(告子上) 몸에는 귀한 부분과 천한 부분이 있고 중대한 부분과 사소한 부분이 있다. 사소한 부분으로써 중대한 부분을 해치지 말고 천한 부분으로써 귀한 부분을 해치지 말지니, 사소한 부분을 기르는 자는 소인이 되고 중대한 부분을 기르는 자는 대인이 된다.”고 하였고, “대체(大體)를 따르는 자는 대인이 되고 소체(小體)를 따르는 자는 소인이 된다.”고 하였다. 집주(集註)에 몸에서 천하고 사소한 부분은 입과 배요, 귀하고 중대한 부분은 마음과 뜻이라 하였다. 대체는 천부적인 도덕심, 소체는 눈과 귀 등의 감각기관을 뜻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진정에 대해 대구 판관(大邱判官) 이후(李侯) 단형(端亨) 에게 답함

 

 

지붕에서 비둘기가 울어 비가 내렸다 날이 갰다 하니, 완연히 꽃이 피도록 재촉하는 날씨로구려. 먼 곳의 아지랑이는 눈에 가물거리고 관아 연못의 푸른 물엔 그림자 잠겼는데, 송사(訟事)하는 사람 자취 없고 동헌 뜰에 아전들도 다 물러가서 오늘에야 잠시 한가한 시간을 우연히 얻으니, 비로소 한 돌 만에 태수(太守)의 즐거움을 짐작하겠소. 뒷짐을 지고 난간을 돌면서 딴 사람 아닌 바로 그대를 향해 그리운 생각을 시로 읊었는데 때마침 그대의 편지가 내 앞에 홀연 떨어지니, ‘서로 그리워하는 정이 마음으로 통하매 산천도 그 사이를 떼어 놓진 못한다고 이를 만하외다.

영남 전도(全道) 일흔두 개 고을이 불행히 흉년을 만나서 모두 대대적인 진휼을 시행하고 있으니, 오늘날 목민(牧民)의 관리가 된 자는 기민(飢民)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가려 뽑기를 생각하고 구휼할 양식에 대해서는 널리 모으기에 힘을 쏟자니, 근심은 쌓이고 심신은 고달파서 어찌 억척스레 고생하고 초췌하지 않을 수 있겠소? 더구나 대구는 감영이 있는 업무 많은 고을이라 눈앞에 넘쳐나는 어려움이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 되지 않소. 매양 한 도내 수령들의 편지를 받아 보면, 근심과 번뇌가 너무 지나쳐서 이맛살을 찌푸리는 빛이 지면(紙面)까지 드러나고 신음하는 소리가 붓끝에 끊어지지 아니하므로, 편지를 보고 나서는 미상불 그들을 대신하여 마음이 편안치 못했소. 그런데 그대 같은 낙천적이고 활달한 성격으로도 자기도 모르게 역시 이런 태도를 지을 줄은 몰랐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소?

허허! 우리나라의 인재 등용하는 길은 너무도 좁아서 과거(科擧)를 거치지 아니하면 아무리 학식이 천리(天理)와 인사(人事)를 꿰뚫어 알고, 재주가 문무(文武)를 겸비했다손 치더라도 진실로 출세할 길이 없소. 지금 조정에서 활개를 치며 백성과 나라를 위해 대책을 세우고, 정치와 교화에 참여하고 협찬(協贊)한다는 사람치고 대과(大科)에 급제하지 않고 진출한 자가 누가 있단 말이오? 그다음은 소과(小科)에 급제한 뒤에라야 비로소 음관(蔭官)으로 보직되어 겨우 벼슬아치 명부에 이름이 오르게 되나, 낭서(郞署) 사이를 헤어나지 못하고 그저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오직 수령으로 나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읍황(邑況)의 후박(厚薄)을 계산하고 토산물의 유무나 묻게 되니, 그 스스로 처신하는 것이 하천배나 다름이 없다오. 비록 명색이야 백성을 다스린다 하지만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으며 그저 명을 받들어 행하기에만 분주하여, 인사고과(人事考課)할 때 꼴찌가 될까 두려워할 뿐이고 고을의 폐단이나 백성의 고통 따위는 마음 쓸 겨를이 없지요. 그럴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아무리 그 병폐를 바로잡고자 해도 일이 자기 손을 거치지 않으니 형세상 어쩔 도리가 없지요.

그러므로 능란한 사람은 장부 처리나 조심하고 창고 관리나 엄중히 하여 죄나 안 지으면 다행으로 여길 따름이니, 그 평생의 포부를 한번 펴 볼 기회란 유독 기민을 구휼하는 한 가지 일뿐일 것이오. 나나 그대가 크게는 대과 급제를 못 했을 뿐더러, 작게는 또한 진사(進士)가 되지 못했으니, 둘다 따분한 백도(白徒)요 여항(閭巷)의 미천한 신세라 실없는 얘기나 하고 날을 보내는데, 제 딴에는 그래도 유생 차림으로 거들대지만 그것은 남루해진 지 이미 오래며, 임시변통으로 양반이라 칭하지만 외람된 짓이라 부끄러울 뿐이지요. 머리는 허옇고 얼굴은 누렇게 뜬 채 당세에 대한 희망을 끊었더니, 늙마에 일명(一命)으로 잇달아 동료가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오! 비록 옛사람의 강사(强仕)의 나이는 넘었다 할지라도 그 직책에서 소임을 다하기로 할진댄 아직도 남은 날들이 있소이다. 오륙 년이 다 못 가서 그대는 이미 중요한 고을을 두 번째나 맡게 되었고 나 역시 현감 한 자리를 얻었으니, 이런 대흉년을 만나서 백성을 구제하고 은혜를 베풀려던 포부를 펼 기회가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소? 정사에 마땅히 전력을 다하여 씀바귀도 냉이처럼 달게 여겨야 할 텐데, 어쩌자고 신세를 한탄하고 딱한 꼴을 스스로 짓는단 말이오?

내 신세를 돌이켜 보건대 오십 년 동안 겨우 끼니를 때우고 쌀독도 자주 비어 내 몸도 주체하지 못하던 주제에, 임금의 은혜를 두터이 입어 갑자기 부자 영감이 되어, 뜰에는 수십 개의 가마솥을 벌여 놓고 1400여 명의 못 먹어 부황 들어 쓰러져 가는 동포들을 불러다가 한 달에 세 번씩 먹이는 즐거움을 실컷 누리니, 즐거움치고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또 어디 있겠소?

저 장공예(張公藝)가 구세동거(九世同居)할 때에 애써서 참았다는 것이 무슨 일이었겠소? 공자는 이것을 참을진댄 어느 것인들 못 참으랴?” 하였고, 맹자는 사람이란 다 저마다 남에 대해 차마 못 하는 마음이 있다.”하였소. 성인도 참을 수 없는 일에 대해 참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참을 인()이라는 글자를 한 번만 써도 오히려 심하거늘 그 글자를 백 번이나 썼단 말이오? 그 백 번을 참을 때에 골머리가 아프고 이맛살이 찌푸려져서 온 얼굴에 주름살이 가로세로 곤두서고 모로 잡혔을 테니, 양미간(兩眉間)에는 내 천() 자요, 이마 위에는 북방 임() 자가 그려졌을 것이 뻔한 일이오. 눈으로 보고도 참으면 장님이 되고, 귀로 듣고도 참으면 귀머거리가 되고, 입으로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면 벙어리가 되는 셈이지요. 어질지 못한 일이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싹을 잘라 버리자면 마음 심() 위에 칼날 인() 자 하나면 족하거늘, 무엇 때문에 이 글자를 백 번이나 거푸 썼단 말이오?

이제 나는 즐거울 락() 한 자를 쓰니 무수한 웃음 소() 자가 뒤따릅디다. 이것을 미루어 나갈 것 같으면, 백세(百世)라도 동거(同居)할 수 있을 것이오. 이 편지를 개봉해 보는 날에 그대도 반드시 입 안에 머금은 밥알을 내뿜을 정도로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니, 나를 소소선생(笑笑先生)이라 불러 준대도 역시 마다하지 않겠소.

 

 

[C-001]진정에 …… 답함 : 판관(判官)은 감사(監司)를 보좌하는 종 5 품 벼슬이다. 경상 감영은 대구에 판관 1인을 두었다. 이단형은 자가 사장(士長)으로, 음보(蔭補)로 출사하여지방관을 전전하였다. 그는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의 이종 사촌으로 반남 박씨가의 인척이 되었으므로, 합천 화양동의 야천(冶川) 박소(朴紹)의 묘소를 정비하는 데 성금을 보태기도 했다. 이 편지는 1793년에 지은 글로 과정록 2에 관련 사실과 내용 일부가 언급되어 있다. 燕巖集 卷1 陜川華陽洞丙舍記》 《近齋集 卷13 答外弟李士長端亨

[D-001]지붕에서 …… 하니 : 염주비둘기斑鳩가 울면 비가 내린다고 하여 이를 환우구(喚雨鳩)라고도 부른다. 또한 우기(雨期)를 구우(鳩雨)라고도 한다.

[D-002]태수(太守)의 즐거움 : 구양수(歐陽修)의 취옹정기(醉翁亭記)에서 여민동락(與民同樂)하는 태수의 즐거움을 서술하였다.

[D-003]낭서(郞署) : 조선 시대에 육조(六曹)의 정랑(正郞 :  5 ) · 좌랑(佐郞 :  6 ), 기타 실무를 담당하는 6품 관원을 이르던 말이다.

[D-004]읍황(邑況) : 읍징(邑徵) 또는 관황(官況)이라고도 한다. 고을의 각종 판공비 명목으로 전세(田稅)에 부가하여 거둬들이던 쌀이나 돈을 가리킨다. 牧民心書 戶典 稅法下》 《壬戌錄 査逋狀啓》 《瓛齋集 卷9 與溫卿

[D-005]백도(白徒) : 벼슬하지 못한 유생(儒生) 즉 유학(幼學)을 말한다.

[D-006]임시변통으로 …… 뿐이지요 : 원래 양반이란 동반(東班)과 서반(西班) 즉 문관과 무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운산만첩당집, 백척오동각집, 하풍죽로당집 등에는 兩班 生員으로 되어 있다.

[D-007]일명(一命) : 처음에 최하위 관등(官等)을 하사받고 정식 관리가 되는 것을 말한다.

[D-008]강사(强仕) : 40세의 별칭으로 예기 곡례 상(曲禮上), “나이 40을 강()이라 하며 벼슬에 나아간다.四十曰强而仕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D-009]씀바귀도 …… 텐데 : 시경 패풍(邶風) 곡풍(谷風) 누가 씀바귀를 쓰다고 했나, 내게는 냉이처럼 달구나.誰謂荼苦 其甘如薺라고 하였다. 버림받은 자신의 고통이 씀바귀보다 더 쓰다는 뜻인데, 이 편지에서는 어떤 고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D-010]내 몸도 주체하지 못하던 : 원문은 不閱我躬인데, 시경 패풍 곡풍에 내 몸도 주체하지 못하는데 나의 후생 자손들을 걱정할 겨를이 있으랴.我躬不閱 遑恤我後라고 하였다.

[D-011]장공예(張公藝) ……  : 장공예는 9대가 함께 동거하여 북제(北齊), (), () 등 세 왕조에서 그 집에 정표(旌表)를 내렸다. 당 고종(唐高宗)이 그 집에 행차하여 친족 간에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이에 장공예가 참을 인() 자 백여 자를 써서 올렸더니, 고종이 훌륭히 여겨 비단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小學 卷6 善行

[D-012]이것을 …… 참으랴 : 논어 팔일(八佾)에서 공자가 계씨(季氏)에 대해 팔일무를 뜰에서 추게 하니 이것을 참을진댄 어느 것인들 못 참으랴?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라고 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D-013]사람이란 …… 있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말이다. 남에 대해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여 주는 예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긴다고 하였다.

[D-014]소소선생(笑笑先生) : 소소(笑笑)는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는 뜻이다. () 나라의 저명한 서화가 문동(文同)의 호()가 소소선생이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남 직각(南直閣) 공철(公轍) 에게 답함

 

 

금년(1793) 정월 16일에 형이 지난 섣달 28일 띄운 서한을 받고서 비로소 형이 내각(內閣 규장각)에 재직하고 있음을 알았으며, 바삐 서한을 펴 보고 또한 평안히 계심을 알았소이다. 그런데 반도 못 읽어서 혼비백산하여 두 손으로 서한을 떠받들고 꿇어 엎드려 머리를 땅에 조아렸소.

대개 사신(私信)이기는 하지만 임금의 명령을 받든 것이라,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두렵더니 뒤따라 눈물이 마구 쏟아졌소. 진실로 위대한 천지는 만물을 기르지 않음이 없고, 광명한 일월은 미물이라도 비추지 않음이 없음을 알게 되었소. 그러나 글방의 버려진 책이 위로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대궐을 더럽힐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소?

이곳은 천 리나 동떨어진 하읍(下邑)이지만 임금의 위엄은 지척(咫尺)이나 다름이 없고, 이 몸은 제멋대로 구는 일개 천신(賤臣)이건만 임금의 말씀은 측근의 신하를 대할 때나 차이가 없으며, 엄한 스승으로서 임하시고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가르치시어 임금의 총명을 현혹시킨 죄로 처형을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한 편의 순수하고 바른 글을 지어 속죄하도록 명하셨으니, 서캐나 이 같은 미천한 신하가 어이하여 군부(君父)께 이런 은애(恩愛)를 입는단 말이오.

! 명색이 선비로 이 세상에 태어난 자가 몸소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이 교화를 펴는 시대를 만나고도,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듯이 화목하고 평온한 음향을 발하고, 서경(書經) · 시경(詩經)과 같은 저작을 본받아 임금의 정책(政策)을 아름답게 표현함으로써 국가의 융성을 드날리지 못하니 이는 진실로 선비의 수치입니다. 더구나 나 같은 자는 중년(中年) 이래로 불우하게 지내다 보니 자중하지 아니하고 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아, 때때로 곤궁한 시름과 따분한 심정을 드러냈으니 모두 조잡하고 실없는 말이요, 스스로 배우와 같이 굴면서 남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했으니 진실로 이미 천박하고 누추하였소이다.

게다가 본성마저 게으르고 산만해서 수습하고 단속할 줄 몰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화로(畵蘆) · 조충(雕蟲) 따위의 잔재주가 이미 자신을 그르치고 또한 남까지 그르쳤으며, 부부(覆瓿) · 호롱(糊籠)에나 알맞은 글로 하여금 혹은 잘못된 내용이 전파됨에 따라 더욱 잘못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차츰차츰 패관소품(稗官小品)으로 빠져 든 것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위항(委巷)에서 흠모를 받게 된 것도 그러길 바라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문풍(文風)이 이로 말미암아 진작되지 못하고 선비의 풍습이 이로 말미암아 날로 퇴폐하여진다면, 이는 진실로 임금의 교화를 해치는 재앙스러운 백성이요 문단의 폐물이라, 현명한 군주가 통치하는 시대에 형벌을 면함만도 다행이라 하겠지요.

제 자신은 웅대하고 전중한 문체를 거역하면서 후생들이 고문(古文)의 법도를 계승하려 하지 않음을 탄식하고, 벌레 울고 새 지저귀는 소리나 좋아하면서 옛사람들은 듣지도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으니, 이로 말하자면 나나 그대나 마찬가지로 죄가 있다 하겠소. 지금에 와서는 도깨비가 요술을 못 부리고 상곡(桑穀)의 재앙이 저절로 소멸되게 되었으니, 그 본심을 따져 보건대 비록 잔재주에 놀아난 결과이기는 하지만 이는 진실로 무슨 심보였던가요? 스스로 종아리를 치며 단단히 기억을 해야겠소.

허물을 용서하고 죄를 용서하시니 임금의 덕화(德化)에 함께 포용되었음을 확실히 알았으며,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청아(菁莪)에 거의 자포자기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나나 그대나 죽도록 같이 힘쓸 바요. 어찌 감히 지난날의 허물을 고치고 뒤늦게나마 만회할 것을 급히 도모하여 다시는 성세(聖世)의 죄인이 되지 않도록 하지 않으리오

 

() 원서(原書)

 

 

서울에는 한 자가 넘게 눈이 내려 가죽옷을 껴입지 않고는 외출을 못할 지경인데, 남쪽 소식은 어떤지 몰라 애달프게 그리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요즘 정사(政事)에 수고로운 몸 안녕하신지요? 영남(嶺南)은 가뭄의 피해가 이루 다 볼 수 없을 지경인데, 귀하의 고을은 세금 독촉이며 기민 구제 사업으로 정신이 괴롭지나 않으신지 이것저것 삼가 염려되옵니다. 기하생(記下生)은 어지러운 진세(塵世)와 어수선한 몽상 속에서 예전의 저 그대로입니다.

지난번에 문체(文體)가 명() · ()을 배웠다 하여 임금님의 꾸지람을 크게 받았고 치교(穉敎) 등 여러 사람과 함께 함추(緘推)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또 내각(內閣)으로부터 무거운 쪽으로 처벌을 받아 죗값으로 돈을 바쳤습니다. 그 돈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내각에서 북청 부사(北靑府使)로 부임하는 성사집(成士執)의 송별연을 벌였는데, 대개 사집(士執)은 문체가 순수하고 바르기 때문에 이런 어명이 내렸던 것입니다. 낙서(洛瑞) 영공(令公)과 여러 검서(檢書)가 다 이 모임에 참여하였으니, 문원(文苑)의 성사(盛事)요 난파(鑾坡)의 미담이라,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워서 이에 아뢰는 바입니다.

어제 경연(經筵)에서 천신(賤臣 남공철)에게 하교하시기를,

요즈음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박 아무개의 죄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내 이미 익히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이자는 바로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結者解之)하게 해야 한다.”

하시고, 천신에게 이런 뜻으로 집사(執事)에게 편지를 쓰도록 명령하시면서,

신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을 지어 급히 올려 보냄으로써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라. 그러면 비록 남행(南行) 문임(文任)이라도 주기를 어찌 아까워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중죄가 내릴 것이다.”

하시며, 이로써 곧 편지를 보내라는 일로 하교하셨습니다.

이런 임금의 말씀을 들으면 필시 영광으로 여기는 마음과 송구한 마음이 한꺼번에 뒤섞일 줄 상상되오나, 다만 이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은 진실로 졸지에 지어 내기는 어려울 터이니, 어떻게 하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실로 유교를 돈독히 하고 문풍을 진작하며 선비들의 취향을 바로잡으시려는 우리 성상의 고심과 지덕(至德)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감히 그 만에 하나나마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집사는 허물을 자책하고 속죄해야 하는 도리상 더욱이 잠시라도 늦추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처지이나, 그 제목을 정하기가 딱하게도 쉽지 않으니,  · 청의 학술을 배척하는 한두 권 글을 지어서 올려 보냄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영남(嶺南) 산수기(山水記) 한두 권이나 혹은 서너 권을 순수하고 바르게 지어 냄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든 저렇게든 막론하고 두어 달 안에 올려 보내심이 어떨는지요? 편지를 보낸 것은 이 때문이며, 이만 줄입니다.

 

[C-001]남 직각(南直閣)에게 답함 : 남공철(南公轍 : 1760~1840)은 본관이 의령(宜寧)으로, 세손(世孫) 시절 정조(正祖)의 사부였으며 대제학을 지낸 남유용(南有容)의 아들이다. 1792년 전시(殿試) 급제 후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고 규장각 직각,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는 등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순조 때 더욱 현달하여 대제학,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당대의 문장가로 평판이 높았으며 문집으로 금릉집(金陵集) 등이 있다. 젊은 시절부터 연암을 비롯하여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과 교분이 있었다. 직각은 규장각(奎章閣)의 관직으로 정원은 1명인데 홍문관에 속한 정 3 품에서 종 6 품 사이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이 편지는 남공철의 편지와 함께 과정록 2에도 일부 소개되어 있다.

[D-001]글방의 버려진 책 : 원문은 兎園之遺冊이다. 원래 글방에서 아동들에게 가르치던 교재 따위를 토원책(兎園冊)이라 하는데, 자신의 저술을 겸손하게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여기서는 연암이 자신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가리켜 한 말이다.

[D-002]위로 ……  : 원문은 上汚龍墀之淸塵也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上汚 誤玷으로 되어 있다.

[D-003]임금의 …… 처형을 : 원문은 以兩觀熒惑之誅인데, 양관(兩觀)은 원래 궁궐 정문의 좌우에 있는 망루(望樓)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궁궐이란 뜻도 가지게 되었다. 공자는 노() 나라의 재상 직무를 대행하게 되자 난신(亂臣)인 대부(大夫) 소정묘(少正卯)를 노 나라 궁궐의 양관 아래에서 처형했다고 하여 양관지주(兩觀之誅)’란 성어(成語)가 생겼다. 또한 노 나라 임금과 제() 나라 임금이 회합한 자리에서 제 나라 측이 광대와 난쟁이의 유희를 공연하자 공자는 필부로서 임금의 총명을 현혹케 한 죄를 물어 그자들을 처형하도록 했다고 한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D-004]국가의 융성을 드날리지 : 원문은 鳴國家之盛인데, 한유(韓愈)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글에서 한유는 맹교(孟郊)와 같은 그의 벗들을 뛰어난 작가라는 뜻의 선명자(善鳴者)’라고 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노래하지 말고 크게 발탁되어 국가의 융성을 노래할 날이 오기를 염원하였다.

[D-005]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아 : 원문은 以文爲戱인데, 궁귀(窮鬼)와의 가상적인 문답을 통해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한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 같은 작품이 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은 글로 비난을 받았다.

[D-006]화로(畵蘆) · 조충(雕蟲) : 화로는 호로(葫蘆 표주박)를 그대로 따라 그린다는 말로 참신함이 없이 단순하게 남을 모방하는 것을 말하며, 조충은 벌레 모양의 글자蟲書를 새기듯이 자구(字句)를 수식하여 글을 짓는 것을 말한다.

[D-007]남까지 그르쳤으며 : 원문은 人誤로 되어 있으나, 과정록과 김택영(金澤榮) 중편연암집 등에는 誤人으로 되어 있다.

[D-008]부부(覆瓿) · 호롱(糊籠) : 부부는 항아리를 덮는다는 뜻이고 호롱은 종이로 농을 바른다는 뜻으로, 항아리 덮개로 삼거나 농이나 바르기에 족한 시원치 않은 글을 가리킨다.

[D-009]패관소품(稗官小品) : () 나라 말 청() 나라 초에 크게 유행했던 패관소설(稗官小說)과 소품산문(小品散文)을 가리킨다.

[D-010]후생들이 …… 탄식하고 : 원문은 嗟小子之不肯構인데, 서경 대고(大誥)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 나라 무왕(武王)이 이룩한 왕업을 계승하는 일을 집 짓는 데 비유하여, 아버지가 집 짓는 법을 확립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집터를 닦으려 하지 않으니 하물며 기꺼이 집을 얽어 만들겠는가?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고 하였다.

[D-011]벌레 …… 소리 : 자질구레한 소재를 다룬 소품산문을 풍자하여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D-012]나나 …… 하겠소 : 남공철도 패관소품을 즐겨 읽고 그 영향을 받았다. 1792년 음력 10월 그는 초계문신으로서 지어 올린 책문(策文) 중에 패관소품의 문체를 구사했다는 정조의 견책을 받고 지제교(知製敎) 직함을 박탈당했으며, 어명으로 규장각으로부터 죄를 추궁하는 편지를 받고 그에 대한 답서를 지어 올려야 했다. 正祖實錄 16 10 19 · 24 · 25

[D-013]상곡(桑穀) : 뽕나무와 꾸지나무를 말한다. () 나라 태무(太戊) 때 상과 곡이 조정 뜰에 솟아나 하루 만에 한 아름이나 자랐다. 그것을 본 태무가 두려워서 이척(伊陟)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이척의 말이 요얼(妖蘖)은 덕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는데 임금의 정치에 결함이 있는가 봅니다. 그러니 임금께서는 덕을 닦으소서.” 하였다. 태무가 그 말에 따라 덕을 닦자 상과 곡이 말라 죽었다고 한다. 史記 卷3 殷本紀

[D-014]청아(菁莪) :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출처를 둔 말로 인재를 기르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정조가 인재를 발탁 · 기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운산만첩당집에는 膏燭으로 되어 있다.

[D-015]지난날의 …… 것을 : 원문은 黥刖之補인데,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형벌을 받아 훼손된 몸을 온전하게 회복한다는 뜻으로, 개과천선과 같은 말이다. 식경보의(息黥補劓)란 성어가 있다. 또한 원문의 상유지수(桑楡之收)’ 아침에 잃은 물건을 저녁에 되찾는다(失之東隅 收之桑楡)’는 속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처음의 실수를 나중에 만회한다는 뜻이다.

[D-016]어찌 …… 않으리오 : 운산만첩당집에는 그다음에 차츰 순수하고 바르게 되고자 했으나 그래도 맹자에 나오는 풍부(馮婦)처럼 예전 솜씨를 다시 발휘하려는 버릇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 어찌 장자에서 말한 제 그림자를 피하려 하면서 해를 향해 달려가는 자가 아니겠는가?稍欲醇正 而猶不脫攘臂下車習氣 無乃畏影而走日中者耶라는 평어가 있어 글을 감상하는 데 참고가 된다.!

[D-017]기하생(記下生) : ‘기억해 주시는 아랫사람이란 뜻으로, 편지에서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상대방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하는 말이다.

[D-018]치교(穉敎) …… 하였습니다 : 치교는 심상규(沈象奎 : 1766~1838)의 자이다. 함추(緘推)는 함사추고(緘辭推考)의 준말로 6품 이상의 관원이 경미한 죄를 범한 경우 서면(書面)으로 죄를 추궁하고 서면으로 진술을 받는 것을 말한다. 심상규는 정조로부터 그의 이름과 자를 하사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792년 음력 11월 규장각 대교로서 함추를 받아 지어 올린 함답(緘答)이 구두(句讀)가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조의 견책을 받고 그 글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주해(註解)를 달아 올리라는 엄명을 받았다. 당시 심상규뿐만 아니라 패관소설을 즐겨 본 전과가 있던 김조순(金祖淳)과 이상황(李相璜)에게도 함추의 처분이 내렸다. 正祖實錄 16 10 24, 11 3 · 8

[D-019]성사집(成士執) : 사집은 성대중(成大中 : 1732~1809)의 자이다. 성대중은 호가 청성(靑城),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정조의 인정을 받아 규장각의 외각(外閣)인 교서관(校書館)에 오래 재직했으며 어명으로 문신들이 지어 올린 응제(應製)에서도 자주 장원을 차지했다. 정조 16 12월 정조는 성대중이 공령부체(功令賦體)로 지어 올린 글을 칭찬하면서 서얼 출신임에도 특별히 북청 부사에 임명하고 규장각에서 그의 송별연을 베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16 12 18》 《硏經齋全集 卷10 先府君行狀 이와 같이 성대중은 정조의 보수적인 문예 정책에 적극 부응하여 출세한 인물로, 연암과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남공철 등과도 교분이 깊었다.

[D-020]낙서(洛瑞) 영공(令公) : 낙서는 이서구(李書九 : 1754~1825)의 자이다. 이서구는 호가 척재(惕齋) · 강산(薑山)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함께 조선 후기 한시(漢詩) 4대가로 불린다. 승지를 영공(令公)이라고도 부른다.

[D-021]검서(檢書) : 서적의 교정과 서사(書寫)를 담당하는 규장각의 5~7 품 벼슬로 주로 서얼 출신들이 임명되었다. 당시 성대중을 위한 규장각의 송별연에는 승지 이서구, 규장각 직각 남공철, 서영보(徐榮輔)와 함께 검서로 이덕무와 유득공이 참여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1 年譜 壬子 12

[D-022]난파(鑾坡) :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규장각을 가리킨다.

[D-023]집사(執事) : 편지에서 상대방을 가리킬 때 쓰는 경칭이다. 여기서는 연암을 가리킨다.

[D-024]남행(南行) 문임(文任) : 남행은 조상의 공덕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거나 자신의 높은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오르는 벼슬, 즉 음직(蔭職)을 이른다. 문임은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종 2 품 벼슬인 제학(提學)을 이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족형(族兄) 윤원(胤源)씨에게 답함

 

 

새봄에 도()를 닦으시며 조촐하게 보중(保重)하신다는 소식 받잡고 흐뭇함과 동시에 하례를 드립니다. 족제(族弟) 5년 동안 벼슬살이에 지친 가운데 육순이 문득 다가오니, 귀가 순해져야 할 터인데 오히려 점점 막혀 가고 나이는 비록 더해 가나 더욱 쇠퇴해만 갑니다. 사람이 60년을 사는 것도 어찌 쉽게 얻겠습니까마는, ()를 들은 것이 거의 없으니 이것이 한탄스럽고 슬픕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화양동(華陽洞) 선묘(先墓)에 축관(祝官)을 썼다.’는 일은 아마도 아뢴 사람이 잘못 말한 것일 터입니다.

제전(祭田)을 되돌려 받은 것이 계축년(1793) 겨울이고, 그 이듬해인 갑인년에 종중(宗中)으로부터 비로소 의논이 정해져서, 본군(本郡 합천군)의 질청(秩廳)에 맡겨 해마다 한식(寒食)에 한 번 묘제(墓祭)를 지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해엔 한식이 이미 지나서 새로 의논하였던 것이 행해지지 않았으니, 호장(戶長)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말할 거리조차 안 됩니다. 또 다음 해인 을묘년에는 제가 한식날 관아에서 제물을 마련하고 삼가 십여 구의 제문을 지어 몸소 제사를 지냄으로써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을 폈으니, 호장을 쓸데없이 축관으로 덧붙일 까닭이 없었음은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본군의 공형(公兄)이 비로소 제전을 받으러 왔기 때문에 그와 함께 제전 이름과 면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진설(陳設)의 도식(圖式)을 참작하여 정해 주었으니, 대개 다음 해 한식부터 도식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할 작정이었습니다.

지난해의 다음 해는 바로 금년 병진년(1796)이라 호장의 행사는 의당 금년부터 비롯될 터인데, 한식이 다가오지 않아 제사는 아직 멀었으니, 보내신 편지 가운데 축관으로 호장의 이름을 썼다는 것은 과연 누가 보고 누가 전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축관을 쓰는 것이 타당하냐 부당하냐는 고사하고, 3년 동안에 호장이 본시 한 번도 제사를 지낸 적이 없었으니 아무리 축관을 쓰고 싶은들 어디다 썼겠습니까?

사실이 이처럼 판별하기 쉽고 전하는 말이 저토록 근거가 없는데도, 보내신 편지에 널리 예설(禮說)을 인용하여 분명하게 가르침과 꾸지람을 주시고, ‘누가 이런 의논을 주장했으며 누가 이런 일을 꾸몄는가?’ 하고 힐책을 내리셨습니다. 대저 이치에 통달하고 판별에 밝으신 우리 형님께서도 오히려 이러한 의심을 가지셨다면, 뭇사람들이 듣고 놀라 의심할 때 어느 누가 깨우쳐 주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모르는 결에 가슴이 서늘합니다.

무릇 선영을 받드는 일에 관해서는 설사 구구한 한 가지 소견이 있어 예()에 합당하다고 자신할지라도, 오히려 부형이나 일족들이 내가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어렵게 여기고 조심하고 두루 물어서 감히 선뜻 독단하지 못함은 진실로 경우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중론이란 통일시키기 어려운 데다가 사람마다 제각기 정성과 공경을 바침이 나와 똑같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함부로 근거 없는 일을 만들어 경솔히 혼자 시행하여 스스로 일족에게 죄를 짓고 식자에게 기롱을 받겠습니까? 사리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모두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는 아마 산소 아래 사는 여러 윤씨(尹氏)들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유독 원망과 노여움을 산 것은 대개 또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이후(李侯)가 제전을 되돌려 받기로 든 것은 과연 여러 윤씨들이 사실을 알려 줌으로 인해 나온 것인데, 이것을 서울에 있는 여러 박씨들과 멀리서 의논하기는 어렵고 안의와 합천은 거리가 백 리도 못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이후가 전후로 서신을 왕복하여 매양 저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때문에 여러 윤씨들은 마치 제가 이 토지를 주장하여 주고 빼앗는 것이 제 손에 달린 줄 생각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해 묘제를 올릴 때 여러 윤씨들로서 척분(戚分)을 일컫는 자 5, 6명이 번갈아 와서 만나 보니 대개는 모두가 토지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말이,

 

제전이 온데간데 없어진 지 여러 해인데 그것이 아무 곳에 숨어 있음을 적발해 낸 것은 우리들이었고, 그 본래 가격이 얼마인지 알아서 본래 가격을 물고 되돌려 받은 것도 우리들이었고, 서원의 선비들이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관에 소지(所志)를 올려 가로채려는 것을 우리 사또에게 힘껏 부탁하여 영원히 빼앗길 염려가 없도록 만든 것도 바로 우리들이었으니, 사리로 보아 마땅히 우리들에게 넘겨 도지(賭地)를 나누어 맡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저 질청은 일찍이 아무 애도 쓴 일이 없는데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앉아서 받고 있으니 우리들의 심정이 어찌 허탈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은 비록 순박하고 촌스럽지만 오히려 속셈을 내보였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의 공적은 많다 하겠지만, 이번에 질청에 제전을 맡긴 것은 바로 우리 종중의 중론이요 문중 제일 어른의 명령이외다. 내가 이웃 고을에 있기 때문에 나를 시켜 거행하게 한 것이니 나는 오직 받들어 시행할 뿐이오. 어찌 감히 중간에서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는 일이겠소!”

밤에 손님 한 사람이 혼자 왔는데 언사와 태도가 제 딴에는 자못 의젓스러웠습니다. 그는 깊이 탄식하며 한참 있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의 묘소인데 호장이 제사를 지내다니 혹시 고례(古禮)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까?”

저는 웃으면서,

 

그대는 진실로 고례를 아시오? 옛날엔 묘제를 지내지 않았는데 하물며 이미 천묘(遷廟)한 묘이겠소? 진실로 세대가 점점 멀어지면 묘역을 잃을까 두려워서, 옛날에 두었던 토지와 집을 묘지기하는 노속에게 맡기기도 하고 산 아래 사는 그 고장 선비에게 부탁하기도 하여 한 해에 한 번 제사 지내는 것은, 멀리서나마 그 상로지감(霜露之感)을 붙일 뿐만이 아니라 아무 집안의 선산임을 알려 주자는 까닭이지요. 세족(世族)이 토지를 질청에 맡기는 것은 그 의의가 대체로 같소. 노속의 성쇠와 존망은 일정하지 않고, 그 고장 선비나 군의 아전들도 제 족속이 아님은 마찬가지요. 그러나 질청이란 고을이 있는 날까지는 같이 있게 되어 백대를 가도 제사를 폐지하지 않을 수 있고 토지가 도중(都衆)에게 들어가면 한 사람이 마음대로 옮길 수도 없습니다. 이미 토지를 맡겼으면 토지를 받은 자가 제사 지내는 것일 뿐이외다. 어찌 꼭 예()의 고금(古今)과 사람의 귀천을 따지겠소.”

하였더니, 그 사람이 겉으로는 그럴 듯이 수긍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 듣자니 도리어 서원의 선비들과 합세하여 본군의 신임 사또에게 부탁해서 그 토지를 옮겨서 서원에 귀속시키려는 계획을 도모했는데 본 사또가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괴이한 언설이 하나만이 아닙니다.

촌구석의 고루한 소견으로 제사에는 반드시 축관이 있는 줄만 알았지 호장은 절대 축관으로 쓸 수 없다는 것은 알지 못한 것이며, 그자가 배척한 것은 호장의 직품이 낮다는 것이지, 축관을 쓰는 것이 예()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이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거기에 축관이 있으려니 멋대로 생각하고 서슴없이 이런 언설을 퍼뜨린 것입니다.

! 묘에다 제사함도 오히려 슬기롭지 못하다는 기롱이 있을 수 있는데, 이미 마지못할 경우라면 그 고장 선비나 군의 아전 중에서 손을 빌려 향기로운 제물을 진설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어찌 제 족속이 아닌 사람이 축문을 아뢸 수 있겠습니까?

먼 곳이라 풍문의 와전됨이 대개 이와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후에도 괴이한 언설이 이러쿵저러쿵 일어날 터이니, 바라옵건대 저의 이 편지를 일족에게 돌려 보이시어 뭇 의혹을 깨뜨려 주심이 어떠하신지요?

 

() 원서(原書)

 

 

새봄에 정사를 돌보느라 어떻게 지내시는지 몹시 궁금하외다. 족종(族從)은 늙고 병들어 나날이 정신이 혼미해 가니 서글프고 한탄스러우나 어쩌겠소.

듣자니 선조 야천(冶川 박소(朴紹)) 선생의 묘제에 축관으로 호장의 이름을 썼다 하니 놀랍고 괴이함을 이기지 못하겠소. 만약 잘못 전해진 말이 아니라면 이는 실로 예에 어긋나도 너무나 크게 어긋난 것이오. 누가 이 의논을 주장했으며 누가 이 일을 꾸몄는가 모르겠소.

예서(禮書)에 비록 총인이 시가 된다.冢人爲尸는 글귀가 있으나 호장은 총인이 아니고, 예법에 본래 빈객이 제사를 돕는다.賓客助祭는 규정이 있으나 주사자(主祀者)는 조제자(助祭者)가 아니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근거가 없는데 그래도 행한다면 이상한 게 아니겠소.

() ()은 제 족속이 아니면 그 제사에 흠향하지 않는다.神非族類 不歆其祀 했는데, 합천의 호장은 우리 선조에 대해 같은 족속이 아니오. 무릇 우리 선조께서는 평소에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非禮勿動 마음을 가지셨는데, 그 밝으신 혼령이 어찌 족속 아닌 사람이 올리는 제사를 즐겨 와서 받으시겠소.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모르는 결에 마음이 아프고 쓰리오.

무릇 세일제(歲一祭 시제(時祭))란 곧 친진(親盡)한 뒤에 자손이 먼 조상을 추모하는 무궁한 생각을 펴는 것이며, 대수(代數)를 제한하지 않는 것은 대개 묘가 사당과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당이 이미 헐렸기 때문에 모든 지손(支孫)들이 다 제사 지낼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예()이외다.

일찍이 보니 양주(楊州) 홍 부인(洪夫人)의 묘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자손 한 사람을 정해 보내어 제사하게 하는데, 선생의 묘에는 유독 그리 못 하는 것은 그 길이 천 리나 멀기 때문이지요. 뭇 자손이 돌아가며 가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된 이상 할 수 없이 그 고장 사람이나 고을 아전을 시켜 제물을 진설하고 잔을 올리는 것을 묘지기가 집사(執事)하는 예()와 같이 하는 것은 혹 그럴 수도 있겠거니와, 꼭 축문을 써서 호장 아무개는 감히 밝게 아룁니다.戶長某敢昭告 운운한다면 너무도 같잖은 일이 아니겠소. 그 사람을 천히 여겨서가 아니라 족속이 아니기 때문이요, 예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럴 경우에는 축관을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할 따름이오.

세일제에 삼헌(三獻)으로 하자는 것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주장이고, 단헌(單獻)으로 하자는 것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학설이오. 내 생각으로는 사계의 학설을 따라 단헌으로 하고 축관을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며, 비록 삼헌으로 할 경우라도 축관을 없애는 것 또한 무방하다고 생각하오.

일찍이 듣자니 제전이 없어져 제사가 소홀히 되고 말았으나 좌하(座下 연암을 가리킴)가 영남의 원으로 나가면서 옛 전토를 찾아내어 본군의 질청에 맡겨 길이 제사를 잇는 계책을 세웠다기에 잘 처리했다고 자못 다행스레 여겼는데, 뜻밖에도 그 축문 한 구절이 이토록 잘못되어 도리어 향기로운 제사 의식에 누()가 되고 말았구려.

이는 필시 제전을 맡길 때에 미처 축관을 쓸지 여부를 의논하여 지시한 바가 없어서 고을 아전들이 제멋대로 이와 같이 했을 것이요. 그렇지 않고 혹시라도 고명(高明 연암을 가리킴)의 의견에서 나왔다면 아마도 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신 것 같소.

이미 예가 아닌 줄 알았으면 당장에 고쳐야 할 것이니, 금년 한식(寒食)부터는 축문을 쓰지 말라는 뜻을 자세히 밝혀 패()를 만들어 제사를 부탁한 호장에게 훈계하고 단속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그래야만 제사 예법이 바르게 되고 인정과 도리상으로도 편안할 터이니 소홀히 말기를 신신 부탁하오.

선조의 제사를 받드는 일이 되고 보니 잠자코 있는 것은 경우가 아니라 부득불 여러 말을 하게 되었소. 깊이 양찰해 주기 바라오.

 

[C-001]족형 윤원(胤源)씨에게 답함 : 박윤원(朴胤源 : 1734~1799)은 호가 근재(近齋)로 성리학자인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인(門人)이다. 딸이 정조의 후궁이 되어 세자를 낳음으로써 후일 순조(純祖)의 외조부가 된 박준원(朴準源)은 그의 아우이다. 박윤원은 연암에게는 일족에 속하는 형님뻘이 된다. 박윤원의 사후 그의 문집을 간행하려 할 때 연암은 박준원에게 박윤원이 보낸 원서(原書)뿐 아니라 그에 답한 자신의 이 편지도 함께 수록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燕巖集 卷10 與族弟準源書 박윤원의 원서는 근재집(近齋集) 18 여족제미중지원(與族弟美仲趾源)’이라는 제하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어서 연암이 보낸 이 편지를 받고 난 뒤 오해를 푼 박윤원이 연암에게 보낸 사과 편지도 여미중(與美仲)’이란 제하에 수록되어 있다.

[D-001]귀가 순해져야 : 논어 위정(爲政)에서 공자가, “나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스스로 섰고, 40세에 사물의 이치에 의혹됨이 없었고, 50세에 천명을 알았고, 60세에 귀가 순해졌고, 70세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귀가 순해졌다는 것은 무슨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되었으며, 그 말의 미묘한 뜻까지 곧바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D-002]() …… 없으니 : 원문은 其朝聞無幾인데,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D-003]화양동(華陽洞) 선묘(先墓) : 박소(朴紹)의 묘를 가리킨다. 연암집 1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참조.

[D-004]질청(秩廳) : 고을의 아전들이 직무를 보는 곳을 이른다.

[D-005]호장(戶長) : 고을 아전의 우두머리를 이른다.

[D-006]공형(公兄) : 삼공형(三公兄)이라고도 하며 호장(戶長), 이방(吏房), 수형리(首刑吏)를 이른다.

[D-007]여러 윤씨(尹氏) : 박소의 외가인 파평(坡平) 윤씨들이 합천에서 대성(大姓)을 이루고 대대로 살았다. 박소가 합천에서 은둔하다 서거했을 때 윤씨 가문에서 화양동의 묏자리를 제공하였다. 연암집 1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참조.

[D-008]이후(李侯) : 합천 군수 이희일(李羲逸)을 가리킨다.

[D-009]서원 : 화암서원(華巖書院)을 가리킨다.

[D-010]도지(賭地) : 농사짓는 땅을 남에게 빌리면 그 대가로 해마다 일정한 수확을 바쳐야 하는데, 그러한 땅을 도지라고 한다. 그 대가로 바치는 수확을 도지 또는 도조(賭租)라고도 한다.

[D-011]천묘(遷廟) : 가묘(家廟)에서 신주를 모시는 대수(代數)가 지나면 더 이상 합사(合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D-012]상로지감(霜露之感) : 돌아가신 부모나 선조를 서글피 사모함을 이른다. 예기 제의(祭義)에 가을 제사 때에 서리나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퍼지는 마음이 있으니, 이는 추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D-013]도중(都衆) : 어떤 집단이나 그 성원 전체를 가리키는 도중(都中)’이란 한국식 한자어를 조금 달리 표기한 듯하다. 여기서는 아전 집단을 가리킨다.

[D-014]족종(族從) : 편지에서 일족(一族)에 속하는 먼 촌수의 친척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박윤원 자신을 가리킨다.

[D-015]총인(冢人)이 시()가 된다 : 총인은 주() 나라의 관명으로 왕실의 묘가 있는 지역을 관장하는 관리를 이른다. 시는 신주(神主)’라는 뜻으로 죽은 이를 대신하여 제사를 받는 사람을 이른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총인(冢人) 무릇 묘제에 시가 된다.凡祭墓爲尸고 하였다.

[D-016]() …… 했는데 : 전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구절은 희공(僖公) 31년 조에 나온다.

[D-017]예가 …… 않는 :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D-018]친진(親盡) : 제사를 지내는 대수(代數)가 다 된 것을 이르는 것으로 임금은 5, 일반인은 4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낸다.

[D-019]양주(楊州) 홍 부인(洪夫人)의 묘 : 박소의 부인 홍씨는 사섬시 정(司贍寺正)을 지낸 홍사부(洪士俯)의 딸로서 박소보다 44년 뒤에 85세의 나이로 졸했으며, 그 묘가 양주의 풍양현(豐壤縣)에 있었다. 思菴集 卷4 冶川朴公神道碑銘

[D-020]삼헌(三獻) : 제사에서 초헌(初獻) · 아헌(亞獻) · 종헌(終獻) 이렇게 세 번 술을 부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한 번만 술을 부어 올리면 단헌(單獻)이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원도(原道)에 대해 임형오(任亨五)에게 답함

 

 

지난번에 자네가 노생(盧生)과 원도(原道)편을 논하다가 그 글의 주장이 이해되지 않자 나에게 와서 도()의 근원에 이르는 방법을 물었는데, 그렇게 해서 노생에게 답하려는 것이었지. 나 역시 실상은 자네에게 답할 길이 없었으니 우리 속담에 이른바 한 외양간에 암소가 두 마리라는 격이라, ‘뿔 없는 숫양을 내놓으라卑出童羖는 것에 거의 가깝지 않겠는가? 나는 여러 날을 배회하다가 겨우 맹자에서 대저 도란 큰 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라는 한 말씀을 발견하고는, 마침내 그것으로써 원도편의 주장을 부연 설명하고 가상적인 문답을 만들었네. 고명(高明 임형오를 가리킴)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군.

내 시험 삼아 물어보겠네.

 

자네는 올 때 갓을 바르게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며 허리띠를 매고 신발끈을 묶은 뒤에 대문을 나섰네. 이 중 한 가지라도 갖추어지지 않았으면 당연히 대문을 나서려 하지 않았겠지. 또 자네는 길에 나아갈 때 반드시 궁벽진 데를 버리고 험한 데를 피하며 여러 사람들이 함께 다니는 데를 따랐지. 대저 이와 같은 것이 이른바 알기 어렵지 않다는 것이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가시밭길을 헤치고 논밭길을 가로지르다가 갓이 걸리고 신발이 찢어지며 자빠지고 헐떡이며 땀을 흘린다면 자네는 이 같은 사람을 어떻다고 생각하겠는가?”

자네는 이렇게 답하겠지.

 

이는 필시 길을 잃은 사람일 겁니다.”

그렇다면 내 또 묻겠네.

 

걸어가는 것은 똑같은데,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도 하고 갈림길을 찾기도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자네는 이렇게 답하겠지.

 

이는 필시 지름길을 좋아하여 속히 가고자 하는 사람이요, 필시 험한 길을 가면서 요행을 바라는 사람일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필시 남이 가리켜 준 말을 잘못 들은 사람일 겁니다.”

아닐세. 이는 길을 가다가 잘못에 빠진 것이 아니네. 대문을 나서기 전에 이미 사심(私心)이 앞섰던 것이지.”

내 또 묻겠네.

 

길이 진실로 저와 같이 중정(中正)하고 저와 같이 가야 마땅하건만, 자네가 발걸음에 맡겨 편안히 걷지 않는다면 어찌 그런 줄을 스스로 알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가야 마땅할 바를 아는 것은 길에 달려 있다고 하겠는가, 아니면 발에 달려 있다고 하겠는가?”

자네는 이렇게 답하겠지.

 

진실로 아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고, 실제로 밟고 가는 것은 발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발 쓰는 법을 내 알겠노라. 반드시 장차 발을 번갈아 들고 교대로 밟는 것을 ()’라 하고, 발을 옮겼다가 멈추는 것을 ()’이라 하지. 내 모르겠네만, 밟는 곳은 확고하나 발을 드는 곳은 의지할 데가 없으며, 발을 옮길 때는 비록 전진하나 멈출 때에는 가지 못하네. 그렇다면 자네의 두 발에 장차 한 번은 허망(虛妄)함이 있는 셈이니, 진실로 알고 실제로 밟고 간다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 또 모르겠네만, 자네가 올 때 왼발이 먼저였던가 오른발이 먼저였던가? 자네는 장차 고개 들어 생각해 보고는 고개 숙인 채 답을 못할 테지. 대개 이는 발에 대해 잊은 때문이니, 잊은 것이지 망동(妄動)한 것은 아니요 애써 하지 않은 것이지 길과 동떨어진 건 아니라네.

어떤 사람이 조급히 자신을 질책하기를,

 

말과 소가 마구간에서 일어설 때 말은 앞발을 먼저 일으키고 소는 뒷발을 먼저 일으킨다. 사람이 이용하기에는 오른쪽이 왼쪽보다 편하다. 그렇다면 남자는 왼쪽이요 여자는 오른쪽이라는 법이 어디에 있으며, 또한 길사(吉事)와 흉사(凶事)에 절할 때 왼손과 오른손을 위로 하는 법을 달리할 게 뭐 있나?”

하였다네.

껍질을 갓 깨고 나온 병아리도 솔개를 경계하여 숨고, 배고파 울던 어린애도 호랑이를 무서워하여 울음을 그치지. 내 모르겠네만, 무릇 이와 같은 행동은 성()에서 터득한 것인가, ()에서 터득한 것인가? 그러므로 가령 자네가 길을 갈 때 발 둘 데를 생각하여 걸음마다 안배한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몇 리 가지 못할걸세. 그러므로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은 흡사 자연히 그렇게 된 듯하고, ()에 가장 근접한 것이긴 하네. 그러나 이는 독실하기도 하고 소략하기도 하며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니, 도의 근원에 이르는 방법은 아니지.

그렇다면 도()는 장차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는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는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대개 근원은 하나인 때문이지. 그러므로 공자는 하나로써 관철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도라고 했네. 자사(子思)가 그렇게 된 까닭을 다시 설명하기를 분리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라고 했지.

그렇다면 도를 볼 수 있는가? ()가 아니면 이()를 드러낼 길이 없네. 그러므로 기는 도의(道義)와 짝을 이루어서 길러야만 호연(浩然)해지는 것이지. 사람에 대해 인()을 합쳐서 말하면 그것이 곧 도일세. 하늘과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요 도와 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음은 바로 이와 같네.

문왕(文王)이 도를 앙망(仰望)하여 아직 보지 못한 듯이 했다는 것은 도를 힘써 체득한 것이요, 장자(張子)가 뒤늦게 불교와 도가(道家)에서 벗어난 것은 반성한 것이니, 반성하여 도를 구하자면 당연히 제 몸에서 만나게 될 터이지.

그러므로 중()이 아니면 어느 것도 정()을 준적(準的)할 수 없고, ()이 아니면 어느 것도 평()을 확정 지을 수 없으며, ()이 아니면 어느 것도 지()를 안정시킬 수 없네. () 이후에야 그 지()를 보게 되고, () 이후에야 그 행()을 보게 되며, () 이후에야 그 공()을 보게 되고, () 이후에야 그 공()을 보게 되지. 가령 하늘이 텅 비지 않으면不空 천둥과 바람이 어디에서 울겠으며 해와 달이 어디에서 비추겠는가? 가령 하늘이 공평하지 않다면不公 비나 이슬이 대상을 가려서 내려 만물 중에 유감을 품는 것들이 있을 테지. 이른바 곧지 않으면 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 이것이네.

주역에 이르기를 때에 따라 여섯 마리 용을 타고 하늘을 통어한다.”고 하였네. 여기서 여섯 마리 용이란 기()인데 사방을 오르내리며, ‘때에 따라 탄다는 것은 이()인데 어느 때든 기를 타지 않는 적이 없지. 그러므로 고집하지도 않고 기필코 성사하려 들지도 않으며, 어느 것을 특별히 후대하지도 않고 박대하지도 않네. 하늘이 여기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한덩어리가 된 이와 기일 뿐인데.

광명정대하게 통어하되 환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마 하늘의 덕이 아니겠는가? 만물을 낳고 자라게 하되 아집(我執)대로 하지 않는 것이 아마 하늘의 도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늘의 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나타내 보일 뿐이요, 땅의 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드러내 보일 뿐이요, 사람의 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밝히 나타낼 따름이지.

그러나 하늘과 땅의 도가 나타내고 드러내 보이는 그 사이에 명()이 존재하네. 비유하자면 내쉬었다가 들이쉬는 것이 숨이 되는데 맥락(脈絡)이 그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지. 이것은 바로 성()이 하늘의 도를 계승하고 땅의 도와 접한 까닭이니, 씨앗이 생기를 머금고 살아나는 것은 대개 오로지 순수하여 다른 것과 섞이지 않는 성품인 데다, 살기를 좋아하고 즐거이 천명을 따르는 생리(生理) 때문이지.

비로소 이 명()을 받게 되면, 민첩하게 이를 맞이하여 이어 나가는 것이 마치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것과 같고,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고, 구름이 갑자기 피어올라 비가 퍼붓는 것과 같고, 도랑이 트이자 물이 들이닥치는 것과 같네.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명한 성()이지. 그리고 맹자가 명덕(明德)과 지선(至善)이 곧 성()을 따르는 도()임을 변론(辯論)하고, 다시 그 근원을 추구하여 말하기를,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 하늘이요, 부르지 않아도 이르러 오는 것이 명()이다.” 하였지.

하늘의 명이란 충()을 내려 준 것이요, ()을 내려 줌은 중()을 따르는 것이요, 중을 따른다는 것은 허위가 없는 것이네. 허위가 없는 몸으로써 중을 따른 명()을 받자와, 하늘을 이고 땅 위에 서서 공평무사하게 사도(斯道)를 행하는 것이지.

한 번 발을 들어 공()을 잊어버리니 공()을 잊어버림은 천명을 즐거이 따르는 것樂天이요, 한 번 발을 착지(着地)하여 실()로 돌아오니 실()로 돌아옴은 땅을 믿는 것이네. 천명을 즐거이 따르는 것은 형이상(形而上)의 것이요, 땅을 믿는 것은 형이하(形而下)의 것이지. 인의예지(仁義禮智)는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이요, 효제충경(孝悌忠敬)은 땅에 근본을 둔 것일세.

그러므로 지극히 정성스러워야 교화(敎化)할 수 있다는 것은 아래와 친한 것이요, 사물의 이치에 통달해야 지식이 지극해진다는 것은 위와 친한 것이네.덕성(德性)을 존경하고 학문을 준행(遵行)하는 것은 위와 아래를 모두 관통하는 우리의 도, 허무를 숭상하고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은밀한 이치나 찾고 기괴한 짓을 하는 이단(異端)일세.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므로 천명을 스스로 즐거이 따르는 것이요,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으므로 땅을 스스로 믿는 것이네. 타고난 형체를 바르게 지켜 나가는 것이 천명을 아는 것이며, 도를 깨우침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고, 속이기 어려운 것이 귀신이며, 이치를 끝까지 밝히는 것은 도를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요, 길에서 주워들은 말을 전하는 것은 사도(斯道)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일세.

 

의 처지에서 저 물()을 볼 것 같으면, 나나 저나 고루 이 기()를 받아서 하나도 허()하여 빌려 온 것이 없으니 어찌 천리(天理)가 지극히 공평하지 아니한가. ()의 처지에서 나를 볼 것 같으면, 나 역시 물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체()로 삼고 반성하여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으면,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나의 성()을 극진히 발현하면, 물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라는 것은 심()의 덕()이며 생()의 이()이다. 맑고 밝고 순수한 것이 심의 덕이 아닌가. 공정하고 원활한 것이 생의 이가 아닌가.

주역 건도(乾道)가 변화함으로써 제각기 성()과 명()을 바르게 타고난다.乾道變化 各正性命고 하였다. 그러므로 건도란 원형이정(元亨利貞)이요 변화란 이()와 기()이며, 제각기 바르게 타고난다는 것은 사시(四時), 따뜻하고 서늘하고 차갑고 더운 것은 사시의 기()이며,  · 여름 · 가을 · 겨울은 사시의 명()이요, 원형이정은 사시의 덕()이며,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사시의 이()이다.

하늘이 하늘로 된 것은 이()와 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것은 이와 기의 형용(形容)과 소리이다. 하늘이 이미 말없이 보여 주면, 사람은 그 형용과 소리를 체()로 삼아 언어로 드러낸다. 사실을 지시하고 물()에 비유하며 이름을 짓고 뜻을 설명하는데, ()과 정()이 서로 뿌리가 되고 체()와 용()이 서로 바탕이 된다. ()도 있고 실()도 있어 그 진위(眞僞)를 드러내며, 어떤 것은 앞으로 하고, 어떤 것은 뒤로 하여 그 처음과 끝을 분별한다. 그러니 천하의 사정(事情)에 통달하고 만물의 실정(實情)을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언어이다.

 

언어라는 것은 분별(分別)이다. 그것을 분별하려면 부득이 형용하지 않을 수 없고, 형용하려면 저것을 끌어다가 이것을 증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언어의 실정이다. 그런데 성()의 경우에는 그 체()가 본래 허()하기 때문에 비유하거나 형용하여 말할 수 없다. 거칠게 말하면 기()를 건드리게 되고, 정밀하게 말하면 허()가 아닌가 의심받게 된다. 또 말하지 않으면 실정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나, 말하려 하면 귀착할 곳이 없다. 그것을 일러 중묘(衆妙)가 깊고 깊다 할 것 같으면 말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그것을 일러 타고난 성을 보존하고 보존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이미 기질(氣質)에 엉겨 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성()을 말한 사람 중에 성을 기()로 인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고자(告子) ()’이라 이른 것과, 순자(荀子) ()’이라 이른 것, 양자(揚子) ()’이라 이른 것, 한자(韓子) 삼품(三品)’이라 이른 것, 그리고 불씨(佛氏) 작용(作用)’이라 이른 것이 모두 기요, 우리 유교에서 말하는 성은 아니다. 공자께서 서로 가깝다相近고 말씀하신 것은 기질이 각기 다름을 설명한 것이다. 때문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설명에 의하면 양자의 한계는 비록 엄격하나 본래 두 마음은 아닌 것이다. 또 맹자가 기()를 기름에 있어 말하기 어렵다難言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오로지 순수하고 다른 것과 섞이지 않은 성품임을 말하면서, 자사(子思)가 명()이라고 이른 것은 자연(自然 자연히 그렇게 됨)을 말한 것이며, 맹자가 선()하다고 말한 것은 그 본연(本然)의 성()을 말한 것이요, 정자(程子)가 이()라고 해석한 것은 그 당연(當然 당위성)을 설명한 것이다.

대저 겸하면 분별(分別)이 없고 합하면 너무 혼잡하고, 둘로 하면 불가(不可)하고 단독으로 행하면 허()에 떨어지니, 어떻게 그것을 밝힐 수 있겠는가? ()이란 글자는 심() 자와 생() 자의 뜻을 따른 것이다.  원문 빠짐 

 

()을 바로 가리키자면 기()로 가득 차 질()이 있는 것이고, ()만을 오로지 말하자면 순전히 이()로 되어 있어 형체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심이 아니면 성이 거처할 곳이 없고, 기가 아니면 이()가 활동할 곳이 없다. 이는 흡사 성()이 심()에 버금가고 이()가 기()의 명령을 듣는 듯하다. 그러나 성이 없으면 심은 빈집이 되고, 이가 없으면 기는 곧 지나가는 나그네이다.

()은 곧 오장(五臟)의 하나이다. 만약 단지 ()’이라고만 말한다면 이는 간() · () · 신장 · 비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만약 건순오상(健順五常)으로 각각 형질(形質)을 이루었다고 할 것 같으면, 성은 비록 가깝지만 습관에 따라 서로 멀어진 것이 분명하니 어떻게 그것을 밝힐 수 있겠는가?  원문 빠짐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이르고 맹자가 성이 선함을 말하되 말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일컬은 것은, 성이 선함을 밝히고자 해서였다. 주역 이어 가는 것은 선()이요, 이루게 하는 것은 성()이다.繼之者 善也 成之者 性也라고 일렀으니, 이 때문에 맹자가 성이 선함을 밝히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요순을 일컬어 증명한 것이다. ()는 비유하면 곧 천()이요, ()은 비유하면 곧 성()이다. 순이 요로부터 이은 것은 선()이요, 요가 순에게 이루어 준 것은 성()이다.

 

심은 비유하면 종()이요, 성은 비유하면 소리요, ()은 비유하면 종치는 막대기이다. 그러므로 종이 꼼짝하지 않으면 소리가 어디에서 나겠으며, 막대기로 치지 않으면 오음(五音  ·  ·  ·  · )이 어떻게 분별되겠으며, 육률(六律)이 어떻게 구분되겠는가.

 

임생(任生 임형오)이 물었다.

 

심이라는 것은 형기(形器 물질), 성이라는 것은 도의(道義)입니까?”

본연(本然)의 성을 볼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공평무사한 천리(天理)는 이따금 갑자기 불쑥하는 사이에 감응하여 나타난다. 대개 이로운 길인지 해로운 길인지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옳으냐 그르냐 여부를 짐작하기도 전에 선()의 실마리가 곧 나타나는 것이다. 만일 우물 옆에서 인()을 논하고 물가에서 예()를 강습한다면, 우물로 기어가는 아이를 구할 날이 장차 없을 것이고 물에 빠진 친형수를 어떻게 손으로 건져 줄 때가 있겠는가. 또 진 시황이 궁궐 기둥을 돌면서 달아날 때에 가령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신하의 대열에 있었다면, 약주머니를 던진 하무저(夏無且)에게 의()를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허물을 뉘우치는 사람이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바꾼다는 말은 들었지만, ()을 고치고 이()를 바꾼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성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이 선한 것은 마치 불이 밝은 것과 같다.

 

임생이 물었다.

 

심은 하나이나 위태함과 은미함으로 길을 달리하고, 성은 같은 것이나 이()와 기()는 근원이 나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명덕(明德)이라는 것은 어떤 형상입니까? 심에 소속시키면 기()에 가릴까 두렵고, 성에 덧붙이면 허()에 떨어질 것 같습니다. 감히 묻자온대 어떻게 해야 이것을 명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말하였다.

 

자네는 불이 켜진 초를 잡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는가? 한 손으로는 촛대를 받들고 한 손으로는 그림자를 가리고, 조심조심 신을 신고 걸으며 숨을 죽이고 앞을 살피지. 비록 미욱스럽고 게으른 종놈일지언정 혹시라도 공경스레 하지 않는 법이 없네. ()이란 초와는 역시 거리가 먼 것이지만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거늘, 하물며 사람이 몸에 대해 서로 가깝기로는 자기 몸 같은 것이 어디 있겠나?

그러므로 초에는 군자(君子)의 도()가 네 가지 있네. 초가 형체를 지켜 나가는 것은 반드시 곧고, 천명을 완수하는 것은 바르며, 마음가짐은 반드시 중()이며, 같은 부류를 좇아가는 것은 반드시 화()하네. 대저 이 네 가지 덕은 촛불이 밝게 된 까닭이지. 그 지향은 활활 타 나아갈 것을 생각하고 그 기개는 밝고 밝아 비출 것을 추구하니, 이는 천하의 보편적인 도인데 초가 이것을 지녔네. 그러므로 촛불이란 통촉(洞燭)하는 것이니, ()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과 꼭 같네.”

 

()이란 심지이니 심지란 말은 주관한다는 뜻이다. ()을 세워서 불을 주관하는 것을 말함이다. 불이 붙은 후에야 그 성을 아는 것이니, 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되게 한 원인所以然之故이다. 대저 촛불이 타지 않을 때에는 밝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원문 빠짐 

 

불은 성()으로 된 물()이다. ()이란 물의 성질은 진실되고 거짓이 없는 점이니, 진실로 지닌 것을 성()이라 이르고, 진실로 얻은 것을 덕()이라 이르고, 거짓이 없는 것을 명()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명덕(明德)이란 것은 성으로 말미암아 밝아진 것自誠明이며, ‘명덕을 밝힌다明明德는 것은 밝음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진 것自明誠이니 이것은 본연(本然)의 성()을 이른 것이다.

 

임생이 말하였다.

 

예전에 삼가 들으니,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은 위와 친()하고, 땅에 근본한 것은 아래와 친하므로형이하(形而下)의 것을 기()라 이르고, 형이상(形而上)의 것을 도()라고 한다 했습니다.”

또 말하였다.

 

()와 기()가 서로 올라타서 만물이 유포되어 형체를 이룹니다. 그런데 지금 촛불로 기()를 비유하고 불로써 성()을 비유하시니, 불 역시 기()요 형이하의 것인데 어떻게 성()이 될 수 있습니까?”

 

나는 말하였다.

 

불이 진실로 기()이기는 하나 어찌 형이상의 것이 없겠는가? 만물이 생겨나는 데 오직 사람과 불만이 직()으로 천명을 완수하는 것이지. 주역 하늘과 불은 동인이다.天與火同人라 한 것이 이것이고, 맹자는 곧지 않으면 도()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곧음으로 기르고 해치지 않으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고 하였네.”

 

대범 물()이 형()을 이루게 되면 반드시 그 질()이 있어서 형은 비록 허물어지더라도 질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나무가 타고 쇠가 녹고 물이 흐르고 흙이 무너지되, 그 질은 없어진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불이란 탈 때에는 빛이 있으나 꺼지면 자취가 없으며, 더듬어 봐도 걸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는 것이 없으나, 그 근본을 찾아보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차 있다. 이는 흡사 성()이 기()를 기다려서야 나타나는 것과 같다.

 

촛불이 이따금 어두워지는 것이 어찌 불의 성()이겠는가? () 중에 촛불을 가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찌끼가 조촐하지 못하거나 형질(形質)이 순수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런데 극히 작은 차이로도 마구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미세한 양으로도 사방으로 불길이 솟아 혹이 난 것 같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것을 보고서 도리어 불을 탓하여 어떤 사람은 불에 맑은 , ()한 빛이 있다느니, 또 어떤 사람은 불에 어두운 덕과 밝은 덕이 있다느니 하지만, 이것이 어찌 불의 이이겠는가? 세상에 차갑거나 따스한 불은 없으니, 불의 성()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물이 생겨나는 데 어느 것이고 기() 아닌 것이 있겠는가. 천지는 큰 그릇이며 거기에 가득 차 있는 것은 기(), 가득 차게 하는 원인은 이()이다. 음과 양이 서로 변하여 가는데 이()는 그 가운데 있고 기()로써 감싸고 있다. 이는 마치 복숭아가 씨를 품고 있어 수만 개의 복숭아가 동일한 형상이요, 마치 엽전이 땅에 흩어져도 수만 개의 엽전을 한데 꿸 수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가 단일한 근원이라 길은 달라도 귀결은 같은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불은 쇠붙이와 돌을 서로 부딪치기를 지성으로 하면 얻거니와, 물에 던지면서 불이 타기를 바라는 것은 올바른 소견이 아니다.

 

불이란 물()의 성질은, 태양(太陽)으로부터 정기(精氣)를 기르고 태음(太陰)으로부터 정기를 지켜 아무리 한여름이라도 그 열이 더해지지 않고 한겨울이라도 그 빛이 줄어들지 않으며, 부귀한 사람이라 해서 남아돌지도 않고 빈천한 사람이라 해서 부족하지도 않아, 백성들은 날마다 쓰되 그 공()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땔나무를 바꾸어도 불이 바뀌지 않는 것은 성() 때문이요, ()이라 칭하고 기()라 칭하지 않는 것은 덕() 때문이다. 나는 들으니, 자기 몸을 닦으려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한다고 했는데, 촛불이 이와 흡사하다.

 

임생이 말하였다.

 

()이 서로 가까운 것 중에 불보다 더 선()한 것이 없으므로, 불을 취하여 성의 비유로 삼으신 가르침은 이미 들었습니다. 그러면 불에도 역시 하늘이 명한 성天命之性 기질의 성氣質之性의 구별이 있습니까?”

 

나는 말하였다.

 

있고말고. 만물은 다 같이 기화(氣化) 속에 있으니 어느 것인들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 무릇 성()이란 심() 자와 생() 자의 뜻을 따른 것이니, ()에 갖추어진 것이요 생()과 같은 족속이지. ()가 없으면 생명이 끊어지는데 성()이 어찌 생()을 따르겠으며, ()이 아니면 성()이 그치는데 선()이 어디에 붙겠는가? 진실로 천명의 본연(本然)을 궁구하면, 어찌 성()만이 선()하리오? () 역시 선하며, 어찌 기()만이 선하리오? 만물 중에 생을 누리는 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니 그 천명을 즐거이 여기고 그 천명을 순순히 따르면 물()과 내가 같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이 명한 성()이라네.”

 

 

원도에 대해 임형오에게 답함에서 편지의 뒤에 덕성이기(德性理氣)에 대하여 잡설(雜說)한 것이 모두 24개 조목인데, 부군(府君)이 만년에 손수 쓰신 것이다. 이 밖에도 성리(性理)에 관하여 언급한 차록(箚錄 메모)이 있으나, 원고가 흩어진 데다 시커멓게 지우고 고쳐 놓아 많은 부분이 미정고(未定稿)에 속하므로, 감히 여기에 부록(附錄)하지 않았다.

아들 종간(宗侃)이 삼가 쓰다.

 

[C-001]원도(原道) …… 답함 : 임형오(任亨五)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박종채(朴宗采) 과정록 4 일찍이 성명(性命)을 논하면서 촛불로써 비유를 삼으시니 지계(芝溪 : 이재성)가 지당한 의론이라 했다. 이 역시 문집 중에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편지를 가리킨다.

[D-001]원도(原道) : 한유(韓愈)가 지은 글로서 유교의 도가 도가(道家)나 불교의 도와 다른 까닭을 논변하였다.

[D-002] …… 마리 : 같은 것끼리 모여 있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를 뜻한다.

[D-003] …… 내놓으라卑出童羖 : 시경 소아(小雅) 빈지초연(賓之初筵)에 나오는 구절로, ‘뿔 없는 숫양이란 결코 있을 리 없는 사물을 비유한 것이다.

[D-004]대저 …… 어렵겠는가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말이다.

[D-005]잘못에 빠진 것 : 원문은 遂迷인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고집하는 것을 뜻한다.

[D-006]길이 …… 마땅하건만 : 중용장구  1 장의 집주(集註) ()란 일상생활에 있어서 행해야 마땅한 도리道者 日用事物當行之理라고 하였다.

[D-007]편안히 걷지 : 원문은 安行인데, 이는 원래 배우지 않고도 알아서 차분하게 행하는 것을 뜻한다. 중용장구  20 장에 혹은 편안히 행하며, 혹은 민첩하게 행하며, 혹은 애써 간신히 행하나, 성공함에 이르러서는 한가지이다.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一也라고 하였다.

[D-008]대개 …… 아니요 : 원문은 蓋妄於足也 妄之非爲妄也인데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 ‘ 자가  자와 상통함을 이용한 어희(語戱)로 볼 수도 있다. 김택영의 연암집 중편연암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 등에는 蓋忘於足也 忘之非爲妄也로 되어 있어 그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9]애써 …… 아니라네 : 원문은 不勉非違道也인데, 중용장구  20 장에 ()이란 하늘의 길이요 성실하고자 함은 사람의 길이니, 성이란 애써 하지 않아도 중정(中正)하며不勉而中 생각지 않아도 저절로 깨달아 여유 있게 길과 합치하나니, 성인(聖人)이 그러하다.”고 하였고, 그 집주에 애써 하지 않아도 중정하다는 것은 편안히 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중용장구  13 장에 충서는 도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忠恕 違道不遠고 하였다.

[D-010]말은 …… 일으킨다 : 원문은 圓蹄先前 耦武先後인데 원제(圓蹄)는 발굽이 둥근 말을 가리키고 우무(耦武)는 발굽이 둘로 갈라진 소를 가리킨다. 조화권여(造化權輿)에 말은 양물(陽物)이라 발굽이 둥글고 일어설 때 앞발을 먼저 일으키며起先前足, 소는 음물(陰物)이라 발굽이 갈라졌고 일어설 때 뒷발을 먼저 일으킨다起先後足고 하였다. 周易玩辭 卷15 馬牛

[D-011]사람이 …… 편하다 : 원문은 人之利用 右便於左인데, 열하일기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8 7일 조에 우리나라의 어마법(御馬法)을 비판하면서 사람이 몸을 쓰기에는 오른쪽이 왼쪽보다 편리하며人之體用 右利於左 그 점에서는 말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D-012]남자는 ……  : 예기 내칙(內則)에 출생 후 3개월이 지난 사내아이는 두 갈래 상투’, 계집아이는 세 갈래 상투를 짜며 그렇지 않으면 남자는 머리 왼쪽, 여자는 머리 오른쪽으로 북상투를 짠다男左女右고 하였다. 그 밖에도,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문 왼쪽에 활을 걸고 계집아이가 태어나면 문 오른쪽에 수건을 걸며, 절할 때 남자는 왼손을 위로 하고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한다고 하였다.

[D-013]길사(吉事) …… 있나 : 노자에서 길사(吉事)에는 왼쪽을 높이고 흉사(凶事)에는 바른쪽을 높인다.吉事尙左 凶事尙右고 하였고,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길사는 양()이라 공수(拱手)할 때 왼손을 위로 하고 흉사는 음이라 오른손을 위로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의례집설(儀禮集說) 12에 남자는 길배(吉拜)에 왼손을 위로 하고 상배(喪拜)에 오른손을 위로 하며, 여자는 그와 반대로 한다고 하였다.

[D-014]()에서 …… 것인가 : 성은 타고난 본성을 말하고, ()은 신체를 말한다. 신체는 기()로 이루어져 지각(知覺)하고 운동할 수 있으므로, ‘형에서 터득한다는 것은 후천적인 체험을 통해 안다는 뜻이다.

[D-015]양지(良知)와 양능(良能) : 맹자 진심 상(盡心上) 사람이 배우지 않고서도 능한 것, 그것이 양능이요 생각하지 않고서도 아는 것, 그것이 양지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부모를 사랑하는 인()과 어른을 공경하는 의()를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선천적 지혜良知 선천적 능력良能을 갖추고 있다고 본 것이다. () 나라 때 왕수인(王守仁)이 이 양지 · 양능을 극히 중시하여, 주자학에 맞서 치양지(致良知)를 종지(宗旨)로 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일으켰다.

[D-016]공자는 …… 했네 :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는 제자 증삼(曾參)에게 삼아, 우리의 도는 하나로써 관철되어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우리의 도吾道는 유교를 말한다.

[D-017]분리될 …… 아니다 : 중용장구  1 장에 도란 잠시라도 분리될 수 없으니, 분리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중용은 자사(子思)의 저술로 간주되고 있다.

[D-018]기는 …… 것이지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하면서 정직함으로써 기르고 해치지 않으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고 하였고, 이어서 호연지기는 도의와 짝을 이루나니 이것이 없으면 기가 궁핍하게 된다.配義與道 無是 餒也고 하였다.

[D-019]사람 …… 도일세 : 맹자 진심 하(盡心下) 인이란 것은 사람이니, 인과 사람을 합쳐서 말하면 도이다.仁也者 人也 合而言之 道也라고 하였다. 인을 행할 수 있어야 사람다운 사람이며, 사람이 인과 합치한 상태를 도라고 한다는 뜻이다.

[D-020]문왕(文王) …… 것이요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주() 나라 문왕은 도를 앙망하여 아직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望道而未之見고 하였고, 진심 상에 () 임금과 순() 임금은 인()을 본성으로 타고났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힘써 체득하였다.堯舜性之 湯武身之고 하였다.

[D-021]장자(張子) ……  : 장자는 북송(北宋)의 저명한 성리학자 장재(張載 : 1020~1077)를 말한다. 그는 한동안 불교와 도가의 서적을 연구했다가 별반 수확이 없다고 여기고 육경(六經)으로 돌아왔으며, 인종(仁宗) 가우(嘉祐) 초년에 정호(程灝) · 정이(程頤) 형제와 교제하면서부터 이단의 학문을 버리고 유교 연구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D-022]반성하여 …… 터이지 : 맹자 이루 상에 행하여 얻지 못한 것이 있거든 모두 반성하여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을지니, 제 몸이 올바르게 되고 천하 사람이 귀의할 것이다.行有不得者 皆反求諸己 其身正而天下歸之라 하였고, 진심 상에 () 임금과 순() 임금은 인()을 본성으로 타고났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힘써 체득하였다.堯舜性之 湯武身之고 하였고, “제 몸을 반성하여 성실히 하면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고, 힘써 제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려 행하면 인을 구하는 데 이보다 더 가까운 길이 없다.反身而誠 樂莫大焉 强恕而行 求仁莫近焉고 하였다. ‘도를 제 몸에서 만난다는 것은 몸소 노력하여야만 도를 체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D-023]() …… 되지 : 원문에는 空而後見其公也’ 7자가 누락되어 있다. 김택영의 연암집 중편연암집에 의거하여 보충 번역하였다.

[D-024]곧지 …… 않는다 : 원문은 不直則道不見인데,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말로 원래  자는 직언(直言)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연암의 의도와 문맥을 고려하여 곧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D-025]주역 …… 하였네 : 주역 건괘(乾卦)의 단전(彖傳)에 나온다. ‘여섯 마리의 용은 건괘의 여섯 양효(陽爻)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은둔할 때에는 잠룡(潛龍)을 타고 나설 때에는 비룡(飛龍)을 타는 등 때의 변화에 따라 처신함으로써 하늘의 도乾道를 행한다는 뜻이다.

[D-026]고집하지도 …… 않으며 : 원문은 無固無必인데, 논어 자한(子罕) 공자는 네 가지가 전혀 없으시니, 억측하지 않고, 기필코 성사하려 하지 않으며, 고집하지도 않고, 아집을 부리지 않았다.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고 하였다.

[D-027]어느 것을 …… 않네 : 원문은 無適無莫인데,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는 군자는 천하에 대해서 후대함도 없고 박대함도 없으며 의()만을 따른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고 하였다. ‘ 에 대한 종래의 해석은 분분하다. 여기서는 각각  으로 보는 해석을 취했다.

[D-028]하늘의 …… 뿐이요 : 맹자 만장 상(萬章上) 하늘은 말하지 않는다. 행동과 사실로써 나타내 보일 따름이다.天不言 以行與事 示之而已矣라고 하였다.

[D-029]드러내 보일 : ‘ 의 옛 글자로, ‘와 같은 뜻이다. 주역 곤괘(坤卦) 육이(六二)의 상전(象傳) 육이의 움직임은 곧고 바르니, 배우지 않아도 만사가 순조로움은 땅의 도가 환히 빛나기 때문이다.六二之動 直以方也 不習无不利 地道光也라 하였다. 또한 중용장구  12 장에 군자의 도는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하늘과 땅에 환히 드러나니라.及其至也 察乎天地 하였다. 다음 문장의  자 역시 현시(顯示)의 뜻을 지니고 있다.

[D-030]맥락(脈絡) : 한의학에서 경맥(經脈)과 낙맥(絡脈)을 합쳐 부른 말로, 경락(經絡)이라고도 한다. 경맥은 세로로 간선(幹線)을 이루고 낙맥은 가로로 지선(支線)을 이루어 상호 연결되어 온몸에 기혈(氣血)을 전달하는 통로가 된다.

[D-031]씨앗이 ……  : 원문은 實含斯活인데, 시경 주송(周頌) 재삼(載芟) 온갖 곡식을 파종하니 씨앗이 생기를 머금고 살아나네.播厥百穀 實函斯活라고 하였다. 성리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에 보존되어 있는 성()을 종종 씨앗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연암집 1 ‘이자후(李子厚)의 득남(得男)을 축하한 시축(詩軸)의 서문 참조.

[D-032]맞이하여 이어 나가는 것 : 원문은 迓續인데, 서경 반경 중(盤庚中) 나는 하늘로부터 너희들의 명을 맞이하여 이어 나가려 한다.予迓續乃命于天고 하였다.

[D-033]하늘이 명한 성() : 중용장구  1 장에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한다.天命之謂性고 하였다.

[D-034]맹자가 …… 변론(辯論)하고 : 맹자 중 특히 고자 상(告子上)에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대학장구 ()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고 …… 지선(至善)에 이르면 멈추는 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 在止於至善고 하였고, 중용장구  1 장에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率性之謂道고 하였다.

[D-035]하지 …… ()이다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오는 말이다.

[D-036]하늘의 …… 것이요 : 서경 탕고(湯誥) 위대하신 상제가 백성들에게 충()을 내려 주셨도다.惟皇上帝 降衷于下民라고 하였다. ‘()’ 자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 또는 복()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 즉 중도(中道)나 내심(內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D-037]()을 따르는 : 원문은 由中인데 이는 由衷과 같은 말로, 내심(內心)에서 우러나온다는 뜻이다.

[D-038]사도(斯道) : ‘이 도란 뜻으로, 유교 도덕을 가리킨다.

[D-039]땅을 믿는 것 : 땅을 믿는다는 것은 그 위에 만물을 실을 정도로 땅이 넓고 두터움(博厚)을 믿는다는 뜻이다. 중용장구  26 장에 넓고 두터움은 만물을 싣는 바博厚 所以載物也 넓고 두터움은 땅과 합치한다博厚配地고 하였다.

[D-040]형이상(形而上) : 형이상(形以上)과 같은 말로, 형체가 없는 추상적 존재를 말한다. 이와 대립하는 개념이 형이하(形而下)’, 형체가 있는 구체적 존재를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에 형이상의 것을 도라고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라고 한다.” 하였다.

[D-041]지극히 ……것이요 : 중용장구  23 장에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실이라야 인심을 교화할 수 있다.唯天下至誠 爲能化고 하였고, 주역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 땅에 근본을 둔 것은 아래와 친하다.本乎地者 親下고 하였다.

[D-042]사물의 …… 지극해진다 : 원문은 物格而知致인데, ‘物格而至致 또는 物格而致知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대학의 구절을 감안하면 物格而知至라야 한다.

[D-043]사물의 …… 것이네 : 대학장구  1장에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뒤라야 지식이 지극해진다.物格而后 知至고 하였고, 주역 건괘 문언전에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은 위와 친하다.本乎天者 親上고 하였다.

[D-044]덕성(德性) …… : 원문은 尊德性而道問學인데, 중용장구  27 장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D-045]은밀한 …… 하는 : 원문은 索隱行怪인데, 중용장구  11 장에 나오는 말이다.

[D-046]소리도 …… 없으므로 :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 하늘이 하시는 일은 소리도 냄새도 없네.上天之載 無聲無臭라고 하였다. 하늘이 하시는 일은 추측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D-047]사물이 …… 있으므로 : 시경 대아 증민(蒸民) 하늘이 만민을 낳으셨으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나니라.天生蒸民 有物有則 하였다.

[D-048]타고난 …… 것이며 : 맹자 진심 상에 형체와 안색은 타고난 성질이지만 오직 성인이라야 그 형체를 바르게 지켜 나간다.形色 天性也 惟聖人然後 可以踐形고 하였고, 주역 계사전 상에 천명을 즐거이 따르며 자신의 천명을 알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樂天知命 故不憂고 하였다.

[D-049]속이기 …… 귀신이며 : 귀신(鬼神)이란 개념은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중용에서 주장하는, 우주 만물을 생성하는 음양(陰陽) 이기(二氣)의 활동을 가리킨다.

[D-050]이치를 …… 것이요 : 원문은 窮道之自反也인데 뜻이 통하지 않는다. 김택영의 연암집에는 이 구절은 잘못이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를 붙여 놓았고, 다시 중편연암집에는 窮理者 道之自反也로 고쳐 놓았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D-051]길에서 …… 것일세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길에서 주워들은 말을 전하는 것은 덕을 저버리는 것이다.道聽而途說 德之棄也라고 하였다.

[D-052]물을 체()로 삼고 : 중용장구  16 장에서 공자는 귀신의 덕이 성대하도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는 않지만, 물을 체()로 삼으며 어떤 물에든 누락될 수 없다.體物而不可遺라고 하였다. ‘體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중용집주(中庸集註)의 해석을 좇아 번역하였다.

[D-053]나의 ……것이다 : 중용장구  22 장에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실이라야 자신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으니, 자신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으면 인()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고, 인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으면 물()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D-054]건도(乾道) …… 타고난다 : 주역 건괘(乾卦) 단전(彖傳)의 말이다.

[D-055]건도란 …… ()이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68 천도(天道)로 말하자면 원형이정이 되고, 사시로 말하자면 봄 · 여름 · 가을 · 겨울이 되고, 인도(人道)로 말하자면 인의예지가 되고, 기후로 말하자면 따뜻하고 서늘하고 마르고 습한 것溫涼燥濕이 되고, 사방으로 말하자면 동서남북이 된다.”고 하였다.

[D-056]형용(形容)과 소리 : 원문은 容聲인데 예기 제의(祭義)에서 제삿날에 음식을 진설할 때 엄숙하여 반드시 용성을 듣는 듯이 한다.肅然必有聞乎容聲고 하였다. 용성에 대한 해석 역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여기서는 이와 기를 두고 사용했으므로, 형용과 소리로 번역하였다. 중용집주에서 귀신을 음양 이기(二氣)의 활동으로 해석하면서 귀신은 무형무성(無形無聲)이라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D-057]천하의 사정(事情)에 통달하고 : 원문은 通天下之故인데 주역 계사전 상에 나오는 말이다. “()은 사려도 없고 작위도 없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감응하면 드디어 천하의 사정에 통달한다.易 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고 하였다.

[D-058]중묘(衆妙)가 깊고 깊다 : 원문은 衆妙玄玄인데, 노자에 도() 깊고 또 깊으니 중묘(衆妙)의 문이다.玄之又玄 衆妙之門라고 하였다.

[D-059]말로 …… 아니요 : 노자 도는 말로 이를 형용할 수 있으면 영원불변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하였다.

[D-060]타고난 …… 보존한다 : 원문은 性成存存으로 되어 있으나, 주역 계사전 상에 타고난 성을 보존하고 보존함이 도의의 문이다.成性存存 道義之門이라 하였다. ‘成性存存의 해석은 여러 가지인데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역의 이 대목은 노자에서 도() 깊고 또 깊으니 중묘(衆妙)의 문이다.”라고 한 대목과 사상적으로 통한다. 大易通解 卷13

[D-061]고자(告子) ……  : 고자는 맹자와 동시대 사람인 고불해(告不害), ()이 곧 성이며, 성에는 선악(善惡)이 없다고 주장했다. 孟子 告子上

[D-062]순자(荀子) ……  : 순자는 사람의 성이 본래 악하며, 선한 특성은 인위적인 학습과 예의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다. 荀子 性惡

[D-063]양자(揚子) ……  : 양웅(揚雄)은 사람의 성에는 선악이 혼재하며, 그 선한 성을 닦으면 선인이 되고 그 악한 성을 닦으면 악인이 된다고 하여, 서로 대립하는 맹자와 순자의 설을 조화시키고자 했다. 法言 修身

[D-064]한자(韓子) ……  : 한유(韓愈)는 원성(原性)에서 사람의 성을, 선만 있고 악이 없는 상품(上品), 교육 여하에 따라 상품이나 하품이 될 수 있는 중품(中品), 악뿐이어서 교육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하품(下品)으로 나누었다. 이는 맹자, 순자, 양웅의 설을 조화시키려 한 것으로서, 맹자의 성선(性善)은 상품에 해당하고, 순자의 성악(性惡)은 하품에 해당하며, 양자의 성선악혼(性善惡混)은 중품에 해당한다.

[D-065]불씨(佛氏) ……  : 불교에서 심() · () · () 중 식()이 대상을 판별하는 활동을 작용(作用)’이라 한다. 전등록(傳燈錄) 성이 어디에 있는가? 작용에 있다.性在何處 曰在作用고 하였다. 주자나 정도전(鄭道傳)은 안전(眼前)의 작용(作用)이 곧 성이라고 하면서 작용견성(作用見性)’을 주장하는 선가(禪家)의 설을 비판하였다.

[D-066]서로 가깝다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사람의 성()은 서로 가까우나 습관으로 인해 서로 멀어진다.性相近 習相遠고 하였다. 정자(程子)나 주자의 주장에 의하면, 공자가 사람의 성이 똑같다고 하지 않고 서로 가깝다고만 한 것은 본연의 성本然之性이 아니라 기질의 성氣質之性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한다.

[D-067]인심(人心)과 도심(道心)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순() 임금이 우()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隱微)하니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그 중정(中正)을 잡으리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고 훈계하였다. 이 말에 근거하여 정자와 주자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제창했다.

[D-068]말하기 어렵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고 말한 맹자에게 공손추가 호연지기란 무엇이냐고 묻자 맹자는 말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D-069]자사(子思) ……  : 자사의 저술로 간주되는 중용에서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한다.天命之謂性고 하였다.

[D-070]맹자가 ……  : 맹자 등문공 상에 맹자가 성이 선함을 말하되 말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일컬었다.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고 하였다.

[D-071]정자(程子) ……  : 정이(程頤) 성이 곧 이이다.性卽理也라고 하여 성즉리(性卽理)의 설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D-072]겸하면 : 성을 심()과 겸하여 설명한다든가, 이를 기와 겸하여 설명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D-073]원문 빠짐 : ‘性之爲字 從心從生이란 앞 문장과 거의 같은 문장이 이 글의 마지막 조목에 夫性者 從心從生이라고 다시 나온다. 그리고 그에 이어서 心之具而生之族也로 문장이 끝나고 있음을 보면, 원문의 빠진 대목 역시 心之具而生之族也일 가능성이 높다. ‘心直指 ……로 시작하는 그다음 문장은, 이 글 말미의 안설(按說)에서 박종간(朴宗侃) 모두 24개 조목이라 한 점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의 해당 부분을 참조하면, 별개의 조목으로 나뉘어야 한다.

[D-074]건순오상(健順五常) :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의하면 건()은 건()의 성()이고 순()은 곤()의 성이다. 오상(五常)은 곧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인데 이는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곧 오장(五臟)과 상응한다. 즉 인은 목()으로 간과, 의는 금()으로 폐와, 예는 화()로 심장과, 지는 토()로 비장과, 신은 수()로 신장과 서로 상응한다고 본다.

[D-075]이어 가는 …… ()이다 : 주역 계사전 상에 한 번 음이 되었다가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한다. 이를 이어 가는 것은 선이요 이를 이루게 하는 것은 성이다.”라고 하였다.

[D-076]육률(六律) : 동양 음악의 12음계는 음양의 원리에 따라 홀수 음계인 육률과 짝수 음계인 육려(六呂)로 나뉘는데, 육률은 저음부터 차례로 황종(黃鐘 : C) · 태주(太蔟 : D) · 고선(姑洗 : E) · 유빈(蕤賓 : F#) · 이칙(夷則 : G#) · 무역(無射 : A#)을 가리킨다.

[D-077]우물로 …… 있겠는가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우물로 기어가는 아이를 보면 누구나 놀라면서 측은한 마음을 품는다고 하였고, 이루 상에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건져 주는 것은 권도(權道)이다.”라고 하였다.

[D-078]진 시황이 …… 것이다. :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진() 나라 말기에 반란을 일으켜 진 나라가 멸망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며, 하무저(夏無且)는 진 시황의 시의(侍醫)였다. 자객 형가(荊軻)가 진 시황을 죽이려 하자 진 시황이 이를 피해 기둥을 돌면서 달아났는데, 이때 하무저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약주머니를 던져 위험을 모면할 수 있게 하였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이는 진 나라의 멸망을 초래한 진승이나 오광조차도 진 시황의 신하로 있었다면 본성에 따라 당연히 진 시황을 구하기 위해 의로운 행동을 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D-079]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 : 중용장구  1 장에 도란 잠시도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D-080]형체를 지켜 나가는 것 : 원문은 踐形이다. 맹자 진심 상에 형체와 안색은 타고난 성질이지만 오직 성인이라야 그 형체를 바르게 지켜 나간다.形色 天性也 惟聖人然後 可以踐形고 하였고, 주역 계사전 상에 천명을 즐거이 따르며 자신의 천명을 알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樂天知命 故不憂고 하였다.

[D-081]천명을 완수하는 것 : 원문은 立命인데, 맹자 진심 상에 수명의 길고 짦음에 개의하지 않고 제 몸을 닦으며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천명을 완수하는 방법이다.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고 하였다.

[D-082]같은 부류를 좇아가는 것 : 원문은 就類인데, 주역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 물은 습한 데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데를 좇아가니 …… 각각 같은 부류를 따르는 것이다.水流濕 火就燥 …… 則各從其類也라고 하였다.

[D-083]()을 세워서 : 원문은 建中인데,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 임금은 힘써 큰 덕을 밝혀 백성에게 중도(中道)를 세우소서.王懋昭大德 建中于民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촛불 한가운데에 심지를 세운다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다.

[D-084]밝음으로 ……  : 중용장구  21 장에 ()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이라 하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지는 것을 교()라 한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고 하였다.

[D-085]하늘에 …… 친하므로 : 주역 건괘 문언전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D-086]형이하(形而下) …… 한다 : 형체가 있는 구체적 존재를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에 형이상의 것을 도라고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라고 한다.” 하였다.

[D-087]() …… 이룹니다 : 주자(朱子)는 이와 기의 관계를 승마에 비유하여 이가 기에 올라타는 것은 사람이 말에 올라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한 사단(四端)은 이의 발현이요 칠정(七情)은 기의 발현이다.”라고 하였다. 장재(張載) ()이 발현하지 않으면 성()이 되는데, 그 처음에 발현과 미발현未發의 사이에는 기가 이에 올라타고 나온다.氣乘理而出고 하였다. 이황(李滉) 사단은 이가 발현하여 기가 뒤따른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하여 이가 올라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그에 반대하여 이이(李珥) 기가 발현하면 이가 올라탄다.氣發理乘는 한 가지만을 인정하였다. 주역 건괘 단전(彖傳) 구름이 가고 비가 내리니 만물이 유포되어 형체를 이룬다.雲行雨施 品物流形고 하였다. 이는 건()이 형()의 덕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 것이라 한다.

[D-088]하늘과 불은 동인(同人)이다 : 주역 동인괘(同人卦) 상전(象傳) 하늘과 불은 동인이니, 군자는 이로써 족속을 유별하고 사물을 구별한다.天與人同人 君子以類族辨物고 하였다. 하늘은 위에 있고 불의 본성은 불꽃을 일으키며 위로 타오르는 것이므로, 하늘과 불은 동류(同類)라는 뜻이다.

[D-089]곧지〕 …… 않는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말이다.

[D-090]곧음으로 …… 된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D-091]음과 …… 가는데 : 원문은 陰陽相盪인데, 음이 자라면 점차 양이 물러가고 양이 자라면 음이 점차 물러가는 것을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에 ( :양효 陽爻)과 유( : 음효陰爻)가 서로 교감하여 팔괘가 서로 변하여 간다.剛柔相摩 八卦相盪고 하였다.

[D-092]길은 …… 때문이다 : 원문은 殊塗同歸인데, 주역 계사전 하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천하 만사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염려하랴? 천하 만사는 귀결은 같은데 길이 다를 뿐이다.天下何思何慮 天下同歸而殊塗라고 하였다.

[D-093]태양(太陽) : 태양은 해 · 여름 · 남쪽 등을, 태음(太陰)은 달 · 겨울 · 북쪽 등을 뜻한다.

[D-094]백성들은 …… 못한다 : 주역 계사전 상에 백성들은 날마다 쓰되 그 공()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를 체득한 자가 드물다.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고 하였다.

[D-095]()이라 칭하고 : 은 오행(五行)의 하나이고, () 자에는 덕행(德行)이란 뜻이 있다.

[D-096]자기 …… 한다 : 대학장구 () 1장에 나오는 말이다.

[D-097]하늘이 명한 성 : ‘기질의 성氣質之性과 대립하는 성리학의 개념으로, ‘본연의 성本然之性’, ‘천지의 성天地之性’, ‘의리의 성義理之性이라고도 부른다.

[D-098]기화(氣化) : 성리학의 용어로, 음양의 기가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말한다. 만물은 그 시초에는 이러한 기화를 통해 생성된다. 이와 대립하는 것이 형화(形化), 기화에 의해 일단 형체를 갖춘 만물은 종자를 통해 그 형질을 유전한다고 본다.

[D-099]() 역시 선하며 : 성리학에서는 기 자체를 악이라 보지는 않는다. 기가 성의 발현을 저해하거나 억제하는 한에서만 부정적으로 보는데, 그러한 한계를 지니지 않은 청명하고 순수하며 조금도 혼탁이 없는 기도 있다. 사람이 이러한 기를 타고나면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이 된다고 한다.

[D-100]종간(宗侃) : 연암의 둘째 아들인 박종채(朴宗采 : 1780~1835)의 처음 이름이다. 박종채는 1829년 음보(蔭補)로 출사한 뒤 경산 현령(慶山縣令)을 지냈으며, 연암의 언행에 관해 상세히 기록한 과정록을 남겼다. 사후에 아들 박규수(朴珪壽)가 현달하여,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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