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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해제(解題)
-이가원
운영자 주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1917년 6월 1일 ~ 2000년 11월 9일)
《연암소설연구(燕巖小說硏究)》(1966)로 박사학위 받음. 연암연구의 개척자.
이 열하일기(熱河日記) 26편은, 조선 정조왕(正祖王) 때 수많은 실학파(實學派) 학자 중에서 특히 북학파(北學派)의 거성(鉅星)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1737~1805)의 명저이다.
그는 정조왕 4년, 곧 1780년에 그의 삼종형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隨行員)으로, 청(淸) 고종(高宗)의 70수를 축하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가, 성경(盛京)ㆍ북평(北平)ㆍ열하(熱河) 등지를 역람(歷覽)하고 돌아와서 이 책을 엮은 것이다.
그는 일찍이 당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일계(一系)의 학자들이 존명사상(尊明思想)에 얽혀서 아무런 실천이 없는 유명무실한 북벌책(北伐策)을 부르짖음에 반하여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 중국의 산천(山川)ㆍ풍토(風土)와 문물(文物)ㆍ제도(制度)에 대하여 오랫동안 염모(艶慕)하였는데, 급기야 그 숙원(宿願)이 이루어져 그들의 통도(通都)ㆍ요새(要塞)를 신력(身歷)하고는 더욱 자신이 만만하여, 모든 역사(歷史)ㆍ지리(地理)ㆍ풍속(風俗)ㆍ습상(習尙)ㆍ고거(攷據)ㆍ건설(建設)ㆍ인물ㆍ정치ㆍ경제ㆍ사회ㆍ종교ㆍ문학ㆍ예술ㆍ고동(古董) 등에 이르기까지 이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관상(觀賞)은 오로지 승지(勝地)ㆍ명찰(名刹)에 그친 것이 아니었고, 특히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면에 중점을 두어, 그 호화찬란한 재료의 구사와 웅려동탕한 문장의 표현이 실로 조선의 일대를 통틀어 수많은 연행문학(燕行文學) 중에서 백미적(白眉的)인 위치를 독점하였으며, 그 가치로서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수록(隨錄)》,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사설(僿說)》,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 등과 함께 추숭(推崇)되었으나, 특히 문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결코 삼가(三家)의 추급(追及)할 바 아니었다.
그리고 본서는 애초부터 명확한 정본(定本)이 없는 동시에 당시의 판본(版本)이 없었으며, 다만 수많은 전사본(傳寫本)이 유행되었으므로, 그 편제(編制)의 이동(異同)이 없지 않음도 사실이었다. 이제 이 역주본(譯註本)은 연암의 수사본(手寫本), 또는 수택본(手澤本)을 근거로 삼고, 그 중의 누락된 부분은 몇십 종의 제본(諸本)을 상세히 대조하여 보충하되, 일일이 주석(註釋)에서 표시하였고, 또 최근에 발견된 원저(原著)의 세 편 중에서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와 양매시화(楊梅詩話) 두 편은 적소(適所)에 추가하였으며, 다만 열하일기 보유(補遺) 한 편은 편질이 너무나 방대하여 뒷날에 정리 추가하기로 하였다.
1.도강록(渡江錄)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는 책문(柵門) 안을 들어서자 곧, 그들의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건설에 심취(心醉)하였다. 주로 성제(城制)와 벽돌을 쓰는 것이 실리임을 역설했다.
2.성경잡지(盛京雜識)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기까지 5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 중에는 특히 속재필담(粟齋筆談)ㆍ상루필담(商樓筆談)ㆍ고동록(古董錄) 등이 가장 재미로운 기사이다.
3.일신수필(馹迅隨筆)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의 병참지(兵站地)를 달리는 9일 동안의 기록이다. 거제(車制)ㆍ희대(戲臺)ㆍ시사(市肆)ㆍ점사(店舍)ㆍ교량(橋梁) 등에 대한 서술이다. 특히 그 서문 가운데의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에 대한 논평이 독자의 흥미를 이끌었다.
4.관내정사(關內程史)
산해관 안으로부터 연경(燕京)에 이르기까지 11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 중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사당 중에서, “백이 숙채(熟菜)가 사람을 죽이네.”라는 이야기와 우암(尤菴)의 화상에 절하던 이야기 등 기사도 재미있는 일이거니와, 특히 호질(虎叱) 한 편은 연암소설(燕巖小說) 중에서 허생(許生)과 함께 가장 득의작(得意作)이었다. 남주인공 북곽 선생(北郭先生)과 여주인공 동리자(東里子)를 등장시켜서 당시 사회의 부패상을 여지없이 폭로하였다. 그 하나는 유학대가(儒學大家)요, 또 하나는 정절부인(貞節夫人)으로 가장하여, 사회를 속이며 풍기를 문란하게 하였다. 그러한 정상을 알게 된 호랑이는 북곽 선생을 꾸짖었다. 사람이 호랑이를 꾸짖은 것이 아니고, 호랑이가 사람을 꾸짖은 것이다. 이는 곧 호랑이를 인격화함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5.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연경으로부터 열하(熱河)에 이르기까지 5일 동안의 기록이다. 열하의 요해를 역설한 것이 모두 당시 열하의 정세를 잘 관찰한 논평이었고, 열하로 떠날 때의 이별의 한을 서술한 한 토막의 문장은 특히 애처롭기 짝이 없어, 후세의 독자로 하여금 눈물짓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6.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열하의 태학에서 묵은 6일 동안의 기록이다. 중국의 학자 윤가전(尹嘉銓)ㆍ기풍액(奇豐額)ㆍ왕민호(王民皥)ㆍ학성(郝成) 등과 함께 동중(東中) 두 나라의 문물(文物)ㆍ제도(制度)에 대한 논평을 전개하다가, 이내 월세계(月世界)ㆍ지전(地轉) 등의 설을 토론했다. 대체 당시 태서(泰西)의 학자 중에 지구(地球)의 설을 말한 이는 있었으나 지전에 대한 설은 없었는데, 대곡(大谷) 김석문(金錫文)에 이르러서 비로소 삼환부공(三丸浮空)의 설을 주장하였으며, 연암은 그의 지우(摯友)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대곡의 설을 부연하여 지전의 설을 주창하였던 것이었고, 그 말단(末段)에는 또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와 함께 목축(牧畜)에 대한 논평을 삽입하였으니,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7.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열하에서 다시금 연경으로 돌아오는 도중 6일 동안의 기록이다. 주로 교량(橋梁)ㆍ도로(道路)ㆍ방호(防湖)ㆍ방하(防河)ㆍ탁타(槖駝)ㆍ선제(船制) 등에 대한 논평이다.
8.경개록(傾蓋錄)
열하의 태학에서 묵던 6일 동안에 그들의 학자와 응수한 기록이다.
9.심세편(審勢編)
조선 사람의 오망(五妄)과 중국 사람의 삼난(三難)을 역설하였다. 역시 북학(北學)에 대한 예리한 이론이다.
10.망양록(忘羊錄)
윤가전ㆍ왕민호 등과 함께 음악에 대한 모든 견해를 교환한 기록이다. 이 편이 다른 본에는 대체로 행재잡록(行在雜錄)의 다음에 있었고, 또 연암이 비록 이 편을 혹정필담(鵠汀筆談)의다음에 두었으나, 심세편(審勢編)의 말단에 명확히 “망양록과 혹정필담을 열차(閱次)하였다.”는 구절이 있음으로 보아서, 이것이 연암 최후의 수정임을 인정하겠다.
11.혹정필담(鵠汀筆談)
윤가전과 함께 전일 태학유관록 중에서 미진한 이야기를 계속한 것이다. 곧 월세계(月世界)ㆍ지전(地轉)ㆍ역법(曆法)ㆍ천주(天主) 등에 대한 논평이다.
12.찰십륜포(札什倫布)
열하에서 반선(班禪)에 대한 기록이다. 찰십륜포는 서번어(西番語)로 “대승(大僧)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13.반선시말(班禪始末)
청(淸) 황제가 반선에게 대한 정책(政策)을 논하였고, 또 황교(黃敎)와 불교(佛敎)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음을 밝혔었다.
14.황교문답(黃敎問答)
당시 천하의 정세를 파악하여 오망(五妄)ㆍ육불가(六不可)를 논하였다. 그것은 모두 북학(北學)의 이론이었으며, 또는 황교와 서학자(西學者) 지옥(地獄)의 설에 대한 논평이다. 말단에는 또 세계의 이민종(異民種)을 열거하였으되, 특히 몽고(蒙古)와 아라사(俄羅斯) 종족의 강맹(强猛)함에 대하여 주의하여야 할 것을 논하였다.
15.피서록(避暑錄)
열하 피서산장(避暑山莊)에 있을 때의 기록이다. 주로 동중(東中) 두 나라의 시문(詩文)에 대한 논평이다. 그 말단에는 최근에 연암 후손에 의하여 발견된 피서록 수고본을 추보하였으니, 곧 ‘삼한(三韓) 부인 반발(盤髮)’ 이하의 몇 칙(則)이다.
16.양매시화(楊梅詩話)
양매서가(楊梅書街)에서 중국 학자들과 문답한 한시화(漢詩話)이다. 이 편은 각본(各本)에 모두 일서(逸書)로 되었었는데, 최근 연암의 후손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므로 이에 추보(追補)하였다. 그 책의 첫 장에 ‘원본중낙루등입차(元本中落漏謄入次)’라는 여덟 글자가 적혀 있음으로 보아서, 당시에 옮겨 써 넣으려던 것이 우연히 누락된 것인 듯싶다. 그래서 다만 다른 편 중에 거듭된 부분과 본편과 관련이 없는 부분은 넣지 않았다.
17.동란섭필(銅蘭涉筆)
동란재(銅蘭齋)에 머무를 때의 수필이다. 주로 가사(歌辭)ㆍ향시(鄕試)ㆍ서적(書籍)ㆍ언해(諺解)ㆍ양금(洋琴) 등에 대한 잡록(雜錄)이다.
18.옥갑야화(玉匣夜話)
일재본(一齋本)에는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로 되어 있다. 홍순언(洪純彥)ㆍ정세태(鄭世泰)에 대한 기록도 재미있는 일이거니와, 특히 허생(許生) 한 편은 연암소설(燕巖小說) 중에서 가장 득의작(得意作)이다. 허생이 실존적인 인물인지, 또는 가상적인 인물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서울 묵적골에 살고 있던 한 불우한 서생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속유(俗儒)들의 위학(僞學)과는 달리하여 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서울 재벌로 이름높은 변씨(卞氏)의 돈을 빌려, 바다 가운데 한 빈 섬을 발견하고 떠돌이 도적을 몰아넣어 이상적인국가를 건설한 것은, 곧 수호(水滸)의 양산박(梁山泊)과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율도국(硉島國) 등 천고의 기인(奇人)ㆍ기사(奇事)를 재연출하였다. 그리고 당시 유명무실한 북벌책(北伐策)을 여지없이 풍자하는 동시에, 이완(李浣)에게 세 가지의 당면한 대책(大策)을 제시하였으니, 이는 실로 북벌책의 정반대인 북학(北學)의 이론이었다. 연암은 일생을 통하여 그 소매(笑罵)와 비타(悲咤)의 일체를 모두 이 한 편에 붙여서 유감없이 표현하였던 것이다.
19.행재잡록(行在雜錄)
청(淸)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보고 들은 모든 기록이다. 특히 청(淸)의 친선정책(親鮮政策)의 까닭을 밝혔다.
20.금료소초(金蓼少鈔)
주로 의술(醫術)에 관한 기록이다. 연암집에서는 이 편을 ‘보유’라 하였으나, 열하일기의 제본(諸本)에는 원전의 한 편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여기서는 그를 좇았다.
21.환희기(幻戲記)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밑에서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가지 연기를 구경하고 그 소감을 적은 것이다.
22.산장잡기(山莊雜記)
열하 산장에서 여러 가지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ㆍ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ㆍ상기(象記) 등이 가장 비장(悲壯)하고도 기휼(奇譎)하다.
23.구외이문(口外異聞)
고북구(古北口) 밖에서의 이문을 적은 것이다. 반양(盤羊)으로부터 천불사(千佛寺)에 이른 60종의 기이한 이야기이다.
24.황도기략(黃圖紀略)
황성(皇城)의 구문(九門)을 비롯하여 화조포(花鳥舖)에 이르기까지 38종의 문관(門館)ㆍ전각(殿閣)ㆍ도지(島池)ㆍ점포(店舖)ㆍ기물(器物) 등의 기록이다.
25.알성퇴술(謁聖退述)
순천부학(順天府學)으로부터 조선관(朝鮮館)에 이르기까지 역람한 기록이다.
26.앙엽기(盎葉記)
홍인사(弘仁寺)로부터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기까지 20개의 명소를 역람한 기록이다.
이는 실로 진고(振古)에 없는 명저이요, 거작이다. 연암이 귀국하던 날 이 책을 내어 남에게 보이니, 모두 책상을 치면서 ‘기재 기재’를 부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그를 싫어하던 도배들은 이를 ‘노호지고(虜號之藁)’라 배격하였으니, 이는 곧 ‘되놈의 연호를 쓴 초고’라는 뜻이다. 이제 남공철(南公轍)이 지은 박산여묘지명(朴山如墓志銘) 중의 한 토막을 소개하기로 한다.
“내 일찍이 연암 박미중(朴美仲)과 함께 산여(山如)의 벽오동관(碧梧桐館)에 모였을 적에, 청장(靑莊) 이무관(李懋官)과 정유(貞蕤) 박차수(朴次修)가 모두 자리에 있었다. 마침 달빛이 밝았다. 연암이 긴 목소리로 자기가 지은 《열하일기》를 읽는다. 무관과 차수는 둘러앉아서 들을 뿐이었으나, 산여는 연암에게, ‘선생의 문장이 비록 잘 되었지마는, 패관기서(稗官奇書)를 좋아하였으니 아마 이제부터 고문(古文)이 진흥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옵니다.’ 한다.
*운영자 주
산여(山如) 박남수(朴南壽)
박차수(朴次修) 박제가(朴齊家)
청장(靑莊) : 이덕무(李德懋)
연암이 취한 어조로, ‘네가 무엇을 안단 말야.’ 하고는, 다시금 계속했다. 산여 역시 취한 기분에 촛불을 잡고 그 초고를 불살라 버리려 하였다. 나는 급히 만류하였다.
연암은 곧 몸을 돌이켜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무관은 거미 그림 한 폭을 그리고, 차수는 병풍에다가 초서로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를 썼다. 나는 연암에게, ‘이 글씨와 그림이 극히 묘하니, 연암이 마땅히 그 밑에 발(跋)을 써서 삼절(三絕)이 되게 하시오.’ 하여 그 노염을 풀려고 하였으나, 연암은 짐짓 노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새자, 연암이 술이 깨어서 옷을 정리하고 꿇어앉더니, ‘산여야 이 앞으로 오라. 내 이 세상에 불우한 지 오랜지라, 문장을 빌려 불평을 토로해서 제멋대로 노니는 것이지, 내 어찌 이를 기뻐서 하겠느냐. 산여와 원평(元平) 같은 이는 모두 나이가 젊고 자질이 아름다우니, 문장을 공부하더라도 아예 나를 본받지 말고 정학(正學)을 진흥시킴으로써 임무를 삼아, 다른 날 국가에 쓸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네. 내 이제 마땅히 제군을 위해서 벌을 받으련다.’ 하고는, 커다란 술잔을 기울여 다시금 마시고 무관과 차수에게도 마시기를 권하여, 드디어 크게 취하고 기뻐하였다.”
이로 보아, 연암은 일시의 후배들에 대하여서도 이 글을 서슴지 않고 자랑하였던 것도 사실이었으며, 그는 또 자기의 모든 저서 중에서 이 《열하일기》만이 후세에 전할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하였던 것이다.
1968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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