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꿈
昔者 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齊物論」
어느 날 장주莊周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물화物化라 한다.
장자를 몽접주인(夢蝶主人)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나비 꿈’ 때문입니다. 장자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의 핵심적인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비 꿈’은 인생의 허무함이나 무상함을 이야기하는 일장춘몽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자의 ‘나비 꿈’은 두 개의 사실과 두 개의 꿈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매우 함축적인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장자가 꾸는 꿈이며 둘째는 나비가 꾸는 꿈입니다. 이 두 개의 꿈은 나비와 장자의 실재(實在)가 서로 침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9만 리 장공(長空)을 날고 있는 붕새의 눈으로 보면 장주와 나비는 하나라는 것이지요. 장주와 나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개별적 사물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커다란 전체의 미미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지요. 개별적 사물과 그 개별적 상(相)을 하나로 아우르는 깨달음이 바로 ‘제물론’(齊物論)입니다. ‘나비 꿈’이 들어 있는 제2편 「제물론」에 대하여는 그 ‘제물론’이란 편명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사물(物)을 고르게 하는(齊) 것에 관한 이론(論)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물(物)과 논(論)을 고르게 한다(齊)는 의미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 물(物)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理論), 즉 ‘물론’(物論)을 통일한다(齊)는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편명에 대한 이 세 가지의 의미를 모두 수용하는 태도가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제(齊)란 ‘고르게 한다’, ‘하나로 한다’, ‘가지런히 한다’, ‘같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제(齊)는 하나의 체계 속으로 망라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시비와 진위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넘어서고 망라하는 것이 제(齊)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식이란 분별상(分別相)에 매달리고 있는 분별지(分別智)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과 통일에 관한 것이며 앞서 읽은 방생지설(方生之說)에서 이야기한 모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전 독법인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이야기가 이 구절의 끝에 나옵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물화(物化)라 한다”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많습니다. 장자 사상의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일관된 주제인 관계론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입니다.
꽃과 나비가 비록 제물(齊物)의 관계에 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꽃은 꽃이고 나비는 나비입니다. 장주는 장주이고 나비는 나비입니다. 이 사실을 장자는 물화, 즉 변화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순과 통일을 운동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태적(靜態的) 제물론이 아니라 동태적(動態的) 제물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물(物), 즉 사물은 운동합니다. 정지도 운동의 한 형태입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입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요. 직접적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간접적 원인을 연(緣)이라 한다면, 즉 친인소연(親因疎緣)이라 한다면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이 모든 존재의 정체성(整體性)을 부정하는 해체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존재를 꽃으로 보는 화엄(華嚴)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연기설에 있어서 인(因)과 과(果)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가 아니면서도 둘이 아닌” 즉 서로 다르면서도 둘이 아니며 또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자의 제물과 물화의 관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인과 과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과와 인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배우는 제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또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 서 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물은 이이일(異而一)의 관계, 즉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 침투(interpenetrate)하는 것이지요. 장자의 ‘나비 꿈’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분 중에 별을 보러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모임의 이름이 ‘별 부스러기 회’입니다. 이름이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존재는 별의 부스러기라는 것이지요. 달이든 별이든 북극성이든 은하계든 그리고 돌멩이 한 개,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별의 부스러기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대폭발 이론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나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이 우주의 모든 물物은 별의 부스러기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그 이름에서 매우 무한한 관계성을 느낍니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불이성(不二性)의 세계입니다.
지금도 재미있게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별 부스러기 회’의 나이 많은 분들이 회의 이름을 따로 만들어 ‘성진회’(星塵會)로 하였다고 했어요. 기성세대는 이름이 한자로 되어야, 권위는 아니라 하더라도 상당한 실체감을 느끼는가 보다고 했어요. 그런 낡은 정서를 우습다고 했지요.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진회라는 어감에서 느껴지는 실체감이 사실은 불이성의 세계관과 배치되는 것이기도 하고 또 그 정서에 있어서도 동떨어진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나는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별 부스러기 회’보다는 ‘별똥회’가 낫다고 생각했지요. 아마 농촌 정서가 없는 젊은 사람들은 똥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가 보다고 생각했지요. 물론 ‘별 부스러기 회’의 정서도 이해는 가지요. 이를테면 별똥회라고 했을 경우 자칫 혜성 관찰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 같은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부스러기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는 달관의 정서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을 것입니다. 본론에서 빗나간 이야기였습니다만 크게 보면 관계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예시문은 이 ‘나비 꿈’과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혼돈칠규’(渾沌七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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