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지식

雖然有患 夫知有所待而後當 其所待者 特未定也

庸詎知吾所謂天之非人乎 所謂人之非天乎 ―「大宗師」

위의 예시문은 생략하기가 마음에 걸려서 늦게라도 소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지식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간단하게나마 함께 읽으려고 합니다.

지식이란 의거하는 표준이 있은 연후에 그 정당성이 검증되는 법인데 (문제는) 그 의거해야 하는 표준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인위적인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인위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자연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장자는 물론 이 구절에서 하늘이 하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나누고, 결국 하늘에 비추어보아야 한다(照之於天)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자의 결론은 물론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과 이 구절을 읽으려고 하는 까닭은 이 구절에서 ‘지식’에 대한 몇 가지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입니다.

첫째는 ‘조지어천’(照之於天)의 입장에 관한 것입니다. 장자의 체계에서는 진인(眞人)의 입장입니다만 이것은 객관적 입장을 의미합니다. 지식에 있어서 과연 객관적 입장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바로 이 점이 장자가 관념론자로 비판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가치 중립성과 지식의 당파성 문제로 논의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는 ‘소대 이후 당’(所待而後當) 즉 지식의 진리성은 소대(所待) 이후에 검증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소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소대는 다음 구절에서 반복됩니다. ‘소대자(所待者) 특미정(特未定)’이 그것입니다. 소대가 아직 미정이라는 것입니다. 특(特)은 ‘다만’ 또는 ‘아직’이란 의미로 읽습니다. 소대는 글자 그대로 ‘기다려야 할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 ‘지 유소대 이후 당’(知有所待而後當)이란 의미는 지식이란 어떤 것을 기다린 연후에 그 진리성 여부가 판명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기다려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이란 한마디로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명名입니다. 그 명의 실체가 되고 있는 실(實)과 비교하여 명실(名實)이 부합할 때에 지식은 합당(合當)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소대자(所待者)는 실(實)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소대자 특미정’이란 이 실(實)이 아직 정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상 그 자체가 변화한다는 것이지요. 변증법에서 이론은 실천에 의하여 그 진리성이 검증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천의 조건이 변화하고, 실천의 주체가 변화하는 경우 검증은 매우 복잡한 것이 됩니다.

장자는 물론 이러한 논의를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강의에서 논의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지식과 진리성에 관한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입니다. 변화를 담아내는 구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사회 변동기에는 이러한 요구가 더욱 절실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최대한의 변화를 포용할 수 있는 구조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장자의 천(天)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자의 천은 진리가 수많은 진리들로 해체되는 것을 막아주고 진리가 재(材), 부재(不材)의 차원으로 격하되지 않도록 해주는 최후의 보루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인人이며, 어느 것이 천天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것은 장자의 고민이기도 하고 우리의 고민이기도 할 것입니다.

너무 딱딱한 이야기로 끝내는 것 같습니다. 지식론이 아닌 장자의 지혜론(?)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지혜란 무엇인가?”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를 여는 도둑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은 끈으로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러나 큰 도적은 궤를 훔칠 때 통째로 둘러메고 가거나 주머니째 들고 가면서 끈이나 자물쇠가 튼튼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속의 지혜란 이처럼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것이다.”

오늘날의 지식이 하는 일이란 대체로 이런 역할에 지나지 않지요. 정권을 유지하게 하거나, 돈을 벌게 하거나, 나쁜 짓을 하고도 그것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을 대행하는 일이지요.

도척(盜跖)은 도둑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데, 실은 공자 당시의 노나라 현인 유하계(柳下季)의 동생으로 무리 9천을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침략한 대도(大盜)였습니다.

장자가 도척에게 “도적질에도 도가 있습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도척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추어진 것을 알아내는 것이 성(聖)입니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勇)입니다.

늦게 나오는 것이 의(義)이며,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지(知)입니다.

도둑질한 물건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 인(仁)입니다.

『장자』에는 노자의 죽음과 장자 아내의 죽음 그리고 장자 자신의 죽음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물론 사실이라기보다는 장자 사상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지만 간단히 소개하지요.

노자가 죽었을 때 진일(秦佚)이 조상(弔喪)을 하는데 세 번 곡하고는 그냥 나와버렸습니다.

이를 본 진일의 제자가 물었습니다.

“그분은 선생님의 친구가 아니십니까?”

“그렇다네.”

“그렇다면 조상을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나도 처음에는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가 않네. 늙은이는 자식을 잃은 듯 곡을 하고, 젊은이는 어머니를 잃은 듯 곡을 하고 있구먼. 그가 사람의 정을 이렇듯 모은 까닭은 비록 그가 칭찬을 해달라고 요구는 아니하였을망정 그렇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며, 비록 곡을 해달라고 요구는 아니하였을망정 그렇게 하도록 작용했기 때문일세. 이것은 천도(天道)에 벗어나고 자연의 정을 배반하는 것이며 타고난 본분을 망각하는 것일세. 예부터 이러한 것을 둔천(遁天;천을 피함)의 형벌이라고 한다네. 자연에 순응하면 슬픔이든 기쁨이든 스며들지 못하네. 옛날에는 이를 천제(天帝)의 현해(縣解;속박으로부터 벗어남)라 하였네. 손으로 땔나무를 계속 밀어넣으면 불길이 꺼질 줄을 모르는 법이라네.”

장자가 바야흐로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제자들이 장례를 후히 치르고 싶다고 했습니다.

장자가 그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널(棺)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玉으로 알며, 별을 구슬로 삼고, 세상 만물을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네. 이처럼 내 장례를 위하여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또 더한단 말이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의 시신을 파먹을까 봐 염려됩니다.”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 것이고, 땅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될 것이다. (장례를 후히 지내는 것은) 한쪽 것을 빼앗아 다른 쪽에다 주어 편을 드는 것일 뿐이다. 인지(人知)라는 불공평한 측도로 사물을 공평하게 하려고 한들 그것은 결코 진정한 공평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상으로 『노자』와 『장자』를 끝내자니 어쩐지 너무 소홀하게 대접했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계속 공부하기를 물론 바랍니다. 그리고 특히 『노자』와 『장자』의 차이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하는 태도를 갖기 바랍니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를 묶어서 하나의 사회 변동 과정으로 이해하듯이, 『노자』와 『장자』도 하나로 통합하여 서로가 서로를 도와서 완성하게끔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새삼스레 『노자』와 『장자』가 어떻게 서로 보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과제로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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