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나는 새가 먼 곳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장자』는 그 전편에 흐르는 유유자적하고 광활한 관점을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이론과 사상뿐만 아니라 모든 현실적 존재도 그것은 드높은 차원에서 조감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조감자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물 속의 개구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장자』에 대한 올바른 독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논어』와 『맹자』의 세계는 지극히 상식적인 세계입니다. 이 상식의 세계란 본질에 있어서 기존의 논리를 승인하는 구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은 답습의 논리이며, 기득권의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당 부분 복고적이기까지 하지요. 장자는 이 상식적 세계와 세속적 가치를 일갈一喝하고 일소一笑하고 초월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이러한 초월적 시각은 대단히 귀중한 것입니다.
내편(內篇) 「소요유」에서 초월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초월이 바로 장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관한 것입니다. 장자는 초월의 경지를 네 가지 단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극히 현실적인 상식인(常識人)이며 메추라기와 같이 국량(局量)이 좁은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 단계는 송영자(宋榮子) 같은 사람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송영자는 송나라 사상가로서 반전 평화주의자이며 특히 칭찬이나 모욕에 개의치 않고 초연했다고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칭찬받으려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초월하지 못한 단계에 있습니다.
세번째 단계로는 열자列子와 같은 사람입니다.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비행하다가 15일이면 돌아왔는데 그것은 보름마다 불어오는 바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열자도 자유롭기는 하지만 아직도 바람이라는 외적 조건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유유소대자’(猶有所待者), 즉 아직도 의지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지요.
넷째 단계가 장자가 절대 자유의 단계로 상정하고 있는, 도와 함께 노니는 소요유의 단계입니다. 소요유의 단계에 이른 사람을 성인(聖人)·신인(神人)·지인(至人)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신인·지인은 『장자』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한마디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기(無己)·무공(無功)·무명(無名)의 경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단계가 장자의 이른바 ‘절대 자유’의 경지입니다.
장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도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無待),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無碍) 경지가 장자의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 이론의 가장 큰 공헌은 자본주의 체제를 과도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역사적 관점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란 이전의 다른 모든 체제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질 과도적인 체제라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것이지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종말’이란 그 어감과는 반대로 최고 단계를 의미합니다. 궁극적 귀착점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가 최후의 체제라는 것이지요. 역사의 방황이 끝나는 지점이지요. 뿐만 아니라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여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체제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입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높은 관점에서 그것을 조감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인식을 조감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과제이지요.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상 투쟁으로 끝나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지요.
『사기』 「노장신한 열전」(老莊申韓列傳)에 장자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몽蒙(하남성 상구현商丘縣 동북부) 출신으로 이름은 주(周)이며, 양혜왕(梁惠王)·제선왕(齊宣王)·맹자와 동시대인으로서 박학하였고, 근본은 『노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몽이란 곳은 장자 당시에는 송(宋)이라는 작은 나라에 속했습니다. 송나라에 대해서는 앞선 『논어』 강의에서 이야기했지요. 은殷나라 유민들의 나라입니다. 송나라는 옛날부터 사전지지(四戰之地)라고 불릴 정도로 사방으로 적을 맞아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수많은 전화(戰禍)를 입었던 불행한 나라였습니다. 전국시대를 통하여 이 지역만큼 전란의 도가니에 휩싸인 곳도 달리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약소국의 비애와 고통, 기아(飢餓)와 유망(流茫) 등 이 지역의 백성들이 겪은 모진 역사가 바로 장자 사상의 묘판(苗板)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자가 칠원리(漆園吏)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장자는 약소국의 가혹한 현실에서 자신의 사상을 키워낸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부자유와 억압의 극한 상황에서 그의 사상 세계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가 생각한 1차적 가치는 ‘생명(生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 없는 질서’보다는 ‘생명 있는 무질서’를 존중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반(反)생명적인, 반자연적인 그리고 반인간적인 모든 구축적(construct) 질서를 해체(deconstruct)하려는 것이 장자 사상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신의 자유입니다.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장자는 제자백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논리가 상대의 허점을 예리하게 찔러 사람들이 그와의 논쟁을 기피할 정도였다고 하였습니다. 유유자적한 장자 사상으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킬러의 이미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로 ‘공자의 무리’ 즉 유가(儒家)와 묵가(墨家)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장이 교묘하고 세상과 인정을 추찰(推察)함이 뛰어나 당시의 석학들도 그 예봉을 꺾지 못했다고 전할 만큼 그의 수사학과 논리는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읽는 『장자』는 4세기 서진(西晉) 때의 곽상(郭象)이 그때까지 전해오던 여러 『장자』본들을 정리하여 6만 5천여 자 33편으로 편집하고 주를 단 것입니다. 그 이전에 아마 다른 『장자』라는 서책이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금본(今本) 『장자』는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雜篇) 11편 모두 33편으로 묶여 있는데, 내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장자 사상의 정수입니다. 「소요유」(逍遙遊), 「제물론」(齊物論), 「양생주」(養生主) 등 일곱 편입니다. 이 일곱 편은 장자 자신의 저술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외편과 잡편은 내편에 대한 해석으로 후인들에 의한 2차 저작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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