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명 나라 사람 등계달(滕季達)의 자는 진생(晉生)인데 오인(吳人)으로 글과 시를 잘하고, 글씨를 잘 쓰며, 또한 천하의 명산 대천을 두루 돌아다녔고 스스로 북해(北海)라 호하였다.

소재(小宰) 한세능(韓世能)이 계유년(1573, 선조6)에 우리나라에 조서를 반포할 때 북해(北海)가 따라왔는데, 그때 습재(習齋) 권벽(權擘)ㆍ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ㆍ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종사관(從事官)이 되고,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수행하였었다.

북해가 네 분과 서로 몹시 좋아하여 여러 번 시문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때, 나의 중형은 태사(太史 사관(史官)의 별칭)로 임금을 모시고 거침없이 일을 기록하자 조사(詔使)가 누구냐고 물으니 재상인 김계휘(金繼輝)가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이름은 모요, 자는 모라 대답하였다. 북해가 만나고자 하였으나 기회가 닿지 않았다.

갑술년(1574, 선조7)에 나의 중형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조천궁(朝天宮)에서 서로 만나보고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러워하였고, 중형이 우리나라로 돌아온 뒤에도 북해는 여러 번 사신 편에 편지를 보내어 문안하였다.

첨사(詹事) 황홍헌(黃洪憲)ㆍ도헌(都憲) 왕경민(王敬民)이 임오년(1582, 선조15)에 조서를 반포하러 올 때 북해가 나의 중형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 부탁하고, 또 그들에게,

“모의 벼슬이 선위사(宣尉使)가 되지 않았으면 반드시 도감(都監)이 됐을 것이오. 당신들은 그를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오.”

하였다.

첨사가 의순관(義順館)에 이르러, 역관 곽지원(郭之元)에게 물어보고 중형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자, 편지를 보이고 한편 쥘부채[手扇]를 선사하였다. 나의 중형도 율시를 지어 두 사신에게 인사하자, 서로 돌아보며 감탄하기를,

“번국(藩國 우리나라를 말함)에도 또한 인재가 있구려.” 하였다.

귀국하자 첨사가 북해에게,

“노형은 참으로 사람을 볼 줄 아십니다그려.” 하였다.

이것은 당성군(唐城君) 홍순언(洪純彦)에게 들은 말이다.

권벽(權擘)의 자는 대수(大手), 안동인(安東人)이며 벼슬은 감사(監司)이다.

정유일(鄭惟一)의 자는 자중(子中), 동래인(東萊人)이며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이다.

한호(韓濩)의 자는 경호(景浩), 삼화인(三和人)이며 진사(進士)로 벼슬은 호군(護軍)이다.

김계휘(金繼輝)의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 광주인(光州人)이며,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이다.

홍순언(洪純彦)은 역관(譯官), 남양인(南陽人)이며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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