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六十五

孫子吳起列傳第五

5-2.吳起(오기)열전

2. 吳起(오기)

吳起者,衛人也,好用兵。

오기라는 사람은 위나라 사람으로

용병에 능했다.

嘗學於曾子,事魯君。

일찍이 증자에게 배워

노나라 임금을 섬긴 일이 있다.

齊人攻魯,魯欲將吳起,

吳起取齊女為妻,而魯疑之。

그때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해 왔다.

노나라에서는 오기를 대장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오기가 제나라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므로

의심을 품고 주저하였다.

吳起於是欲就名,遂殺其妻,以明不與齊也。

그러자 오기는 이에 공명심에 불타

마침내 자기 아내를 죽여

자기와 제나라와의 관계하지 않음을 분명히 밝혔다.

魯卒以為將。將而攻齊,大破之。

노나라는 마침내 오기를 장군에 임명했고

오기는 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魯人或惡吳起曰:

「起之為人,猜忍人也。

其少時,家累千金,

游仕不遂,遂破其家,

그러나 노나라 어떤 사람들은 오기를 악평하여 이르기를

“오기의 사람됨이 시기심이 강하고 잔인하다.

젊었을 때도 천 금이나 되는 가산을

벼슬을 구해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그 집을 탕진했습니다.

鄉黨笑之,吳起殺其謗己者三十餘人,

而東出衛郭門。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조소하였다 하여

오기는 자기를 비방한 사람을 죽인 것이 30이 넘어

동으로 위나라에서 도망쳤었다.

與其母訣,齧臂而盟曰:

『起不為卿相,不復入衛。』

遂事曾子。

그때 오기는 어머니와 이별하면서

자기 팔을 물어뜯으며 맹세하였다.

‘저 오기는 대신이나 재상이 되기 전에는

다시 고향 위나라에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더니

마침내 증자를 섬기었다.

居頃之,其母死,起終不歸。

증자를 모시던 중에

그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오기는 끝내 귀국하지 않았다.

曾子薄之,而與起絕。

起乃之魯,學兵法以事魯君。

증자는 그를 박정하게 여겨

오기와 관계를 끊었다.

오기는 이 때문에 노나라에 왔다.

노나라에서 병법을 배우고 노나라 임금을 섬겼다.

魯君疑之,起殺妻以求將。

夫魯小國,而有戰勝之名,則諸侯圖魯矣。

노라나 임금이 그를 의심하니

제 아내를 죽이면서까지 장군 자리를 구하였다.

무릇 노나라는 작은 나라라

조그만 싸움에 이겼다는 공명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제후들의 표적이 되었다.

且魯衛兄弟之國也,而君用起,

則是弃衛。」

더군나 노나라와 위나라는 형제의 나라다.

그래서 임금이 그 위나라에서 도망쳐 온 오기를

계속 중용한다는 것은

위나라와의 친교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魯君疑之,謝吳起。

노나라 임금 역시 심중에 의혹이 생겨

오기를 해임했다.

吳起於是聞魏文侯賢,欲事之。

文侯問李克曰:「吳起何如人哉?」

오기는 찾아갈 곳을 궁리하다가

당시에 현군이라고 칭송받던

위문후를 섬기려 했다.

문후는 중신인 이극에게 오기의 사람됨을 묻기를

“오기는 어떤 사람입니까?”하니

李克曰:

「起貪而好色,[一]然用兵司馬穰苴不能過也。」

이극이 이르기를

“오기는 재물을 탐내고 여자를 좋아하기는 하나

용병에 있어서는 사마양저와 겨룰 수 있을 정도입니다.”하였다.

於是魏文候以為將,擊秦,拔五城。

그리하여 문후는 오기를 장군에 임명했다.

과연 오기는 진나라를 쳐서

5개 성을 함락시켰다.

注[一]索隱按:王劭云:「此李克言吳起貪。下文云『魏文侯知起廉,盡能得士

心』,又公叔之僕稱起『為人節廉』,豈前貪而後廉,何言之相反也?」今按:

李克言起貪者,起本家累千金,破產求仕,非實貪也;蓋言貪者,是貪榮名耳,

故母死不赴,殺妻將魯是也。或者起未委質於魏,猶有貪W,及其見用,則盡

廉能,亦何異乎陳平之為人也。

起之為將,與士卒最下者同衣食。

臥不設席,行不騎乘,

오기는 장군이 되어

언제나 하급 병졸들과 의식을 같이 했고

누울 때도 자리를 까는 법이 없었으며

행군할 때도 수레에 타지 않았다.

親裹贏糧,與士卒分勞苦。

卒有病疽者,起為吮之。[一]

또한 자기가 먹을 양식은 자기가 가지고 다니는 등

사졸들과 노고를 나누었다.

언젠가 병졸들 가운데 종기를 앓는 사람이 생기자

오기는 그를 위하여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었다.

卒母聞而哭之。人曰:

「子卒也,而將,軍自吮其疽,何哭為?」

병졸의 어머니는 그 소문을 듣고 소리 내어 우니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당신 아들은 병졸에 지나지 않는데

장군께서 친절하게도 종기를 발아 주기까지 하지 않았소.

어찌 우는 것입니까?”

母曰:「非然也。往年吳公吮其父,

其父戰不旋踵,遂死於敵。

그 어머니는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난해에도 오기 장군께서 그 애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 주었습니다.

그 아비는 감격한 나머지 끝가지 도망하지 않고 싸우다가

마침내 적에게 죽고 말았습니다.

吳公今又吮其子,妾不知其死所矣。是以哭之。」

오공께서 지금 또 자식의 종기를 빨아 주셨으니

첩은 그 자식도 싸우다가 죽는 곳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하였다.

注[一]索隱吮,鄒氏音弋軟反,又才軟反。

文侯以吳起善用兵,廉平,盡能得士心,

乃以為西河守,以拒秦、韓。

문후는 오기가 용병술에 뛰어날 뿐 아니라

청렴하고 공평하여

사졸의 인망을 얻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를 서하 태수로 임명하여

진나라와 한나라 군사를 막게 했다.

魏文侯既卒,起事其子武侯。

武侯浮西河而下,中流,顧而謂吳起曰:

위 문후가 죽자

오기는 계속해서 문후의 아들 무후를 섬겼다.

무후는 어젠가 배를 서하에 띄우고 물을 따라 내려가다

중간 지점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며 오기에게 말하기를

「美哉乎山河之固,此魏國之寶也!」

“참으로 아름답구려, 산하의 견고함이여

이것들이 우리 위나라의 보배입니다.”하니

起對曰:

「在德不在險。

昔三苗氏左洞庭,右彭蠡,

德義不修,禹滅之。

이에 오기가 답하기를

“임금의 덕일 뿐 험난한 지형은 아닙니다.

옛날 삼묘씨는 동정호를 왼쪽에 끼고

팽려호를 오른 쪽에 두었으나

덕의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라의 우왕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夏桀之居,左河濟,右泰華,

伊闕在其南,羊腸在其北,[一]

修政不仁,湯放之。

하나라의 걸왕이 도읍한 곳은

하수와 제수를 왼쪽에 끼고

태산과 화산을 오른쪽에 두었으며

이궐이 그 남쪽에 있고

양양이 그 북쪽에 있었으나

정사가 어질지 못한 나머지

상나라 탕왕에게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殷紂之國,左孟門,[二]右太行,

常山在其北,大河經其南,

修政不德,武王殺之。

은나라 주왕은 맹문산을 왼쪽으로 하고

태행산을 오른쪽으로 하고

상산이 그 북쪽에 있고

하수가 그 남쪽에 둘렀으나

주왕이 덕으로써 정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나라 무왕이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由此觀之,在德不在險。

若君不修德,舟中之人盡為敵國也。」[三]

武侯曰:「善。」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문제는 임금의 덕에 있지 지형의 험난함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임금님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이 배 안의 사람들도 모두 적으로 변할 것입니다.”

무후는 이르기를 ‘과연 옳은 말이로다.“ 했다.

注[一]集解瓚曰:「今河南城為直之。」皇甫謐曰:「壺關有羊腸阪,在太原晉

陽西北九十里。」

注[二]索隱劉氏按:紂都朝歌,今孟山在其西。今言左,則東邊別有孟門也。

注[三]集解楊子法言曰:「美哉言乎!使起之用兵每若斯,則太公何以加諸!」

*(即封)*吳起為西河守,甚有聲名。

魏置相,相田文。[一]

오기에게 계속 서하 태수를 맡겼다.

이로부터 오기의 명성은 더욱 높아갔다.

위나라에서는 새로 재상의 직을 설치해

전문을 임영했다.

吳起不悅,謂田文曰:

「請與子論功,可乎?」

오기는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전문에게 말을 걸기를

“당신과 공로를 비교해 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소?”하니

田文曰:「可。」

전문이 이르기를 “좋소.”하였다.

起曰:

「將三軍,使士卒樂死,敵國不敢謀,子孰與起?」

오기가 이르기를

“3군의 장군이 되어

사졸들로 하여금 기꺼이 나라를 위해 죽도록 하며

또 적국이 감히 우리 위나라를 넘볼 수 없게 하는 점에서

당신과 나와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오.”하니

文曰:「不如子。」

전문이 이르기를

“당신에 어찌 미칠 수 있겠소.” 라고 했다.

起曰:「治百官,親萬民,實府庫,

子孰與起」

오기가 이르기를

“백관을 다스리고

백성들의 신뢰를 받으며

나라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점에서

누가 낫겠소?”하니

文曰:「不如子。」

전문이 이르기를

“당신을 따를 수 없소.”했다.

起曰:「守西河而秦兵不敢東鄉,

韓趙賓從,子孰與起?」

오기가 이르기를

“서하를 지켜

진나라 군사가 감시 동쪽을 향해

우리 위나라를 칠 생각을 못하게 하고

한·조 두 나라를 함께 복종하게 만든 점에서

누가 낫겠소.”하니

文曰:「不如子。」

전문이 이르기를

“당신을 따를 수 없소.”했다.

起曰:「此三者,子皆出吾下,

而位加吾上,何也?」

오기가 이르기를

“이 세 가지 점에서 당신은 모두 나만 못한데

지위는 나보다 높으니 무슨 까닭이오?” 하니

文曰:「主少國疑,大臣未附,百姓不信,

方是之時,屬之於子乎?屬之於我乎?」

전문이 이르기를

“지금은 임금님께서 아직 나이가 어려서

온 나라가 불안에 싸였소.

대신들은 아직 왕에게 심복하지 않으며

백성들도 왕을 신뢰하지 못하오.

이런 시기에

당신에게 맡길까요?

나에게 맡길까요?”하니

起默然良久,曰:「屬之子矣。」

오기는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이르기를

“당신에게 맡기겠지요.”하였다.

文曰:「此乃吾所以居子之上也。」

吳起乃自知弗如田文。

전문이 말하기를

“이것이 내가 당신보다 윗자리에 앉게 된 까닭이오.”하였다.

그제야 오기는 자신이 전문만 못하다는 것을 자인했다.

注[一]索隱按:呂氏春秋作「商文」。

田文既死,公叔為相,[一]

尚魏公主,而害吳起。公叔之僕曰:

「起易去也。」

그 뒤 전문이 죽자 공숙이 재상이 되었다.

공숙은 또한 위나라의 부마로 위세를 떨쳤다.

그는 오기를 해치려 했는데

때마침 부하 하나가 진언하기를

“오기를 내쫓기란 쉽습니다.” 하니

公叔曰:「柰何?」

공숙이 이르기를

“어떻게 말이냐?”하니

其僕曰:

「吳起為人節廉而自喜名也。

君因先與武侯言曰:

부하가 이르기를

“오기란 사람은 절조가 굳세고 청렴하지만

이름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니 상공께서 먼저

임금과 말씀하실 기회를 만들어 말씀하기를

『夫吳起賢人也,而侯之國小,

又與彊秦壤界,

臣竊恐起之無留心也。』

‘오기는 현인입니다.

임금께선 나라도 작은데

강한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신은 오기가 우리 나라에 머무를

생각이 없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武侯卽曰:『柰何?』

무후께서는 곧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머무르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물으실 것입니다.

君因謂武侯曰:

『試延以公主,起有留心 則必受之。

無留心則必辭矣。以此卜之。』

그러면 상공께서는 무후님께 이르기를

‘시험사마 공주를 시집보내도록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오기가 머무를 생각이면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고

머무를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사양할 것이니

이것으로 점쳐 보십시오.’ 하였다.

君因召吳起而與歸,令公主怒而輕君。

吳起見公主之賤君也,則必辭。」

임금은 오기를 초대하여 함께 댁으로 가신 뒤에

공주로 하여금 성난 얼굴로

상공을 푸대접하는 태도를 보이도록 하십시오.

오기는 공주가 상공를 푸대접하는 태를 보면

반드시 사양할 것입니다.” 하였다.

於是吳起見公主之賤魏相,果辭魏武侯。

武侯疑之而弗信也。吳起懼得罪,

遂去,卽之楚。

이리하여 오기는 공주가 위상을 천대하는 것을 보고 과연

무후에게 부마되기를 사양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무후는 오기를 의심하여

그를 신임하지 않게 되었다.

오기는 죄를 입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마침내 떠나

바로 초나라로 건너갔다.

注[一]索隱韓之公族。

楚悼王素聞起賢,至則相楚。

초도왕은 일직부터 오기가 현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므로

오기가 이르자 곧 초나라 재상에 임명했다.

明法審令,捐不急之官,

廢公族疏遠者,以撫養戰鬪之士。

오기는 법을 밝히고 영을 살펴

필요하지 않은 벼슬을 없애며

또 왕족들 중에서도 이미 멀어진 사람들의 봉록을 폐지시켜

그 비용을 싸음에 종사하는 군인들에게 돌렸다.

要在彊兵,破馳說之言從橫者。

그는 강병책을 적극 추진해

합종이니 연횡이니 하는 유세객의 논리를 무시해 버렸다.

於是南平百越;北并陳蔡,

卻三晉;西伐秦。

於是南平百越(어시남평백월) :

이리하여 남쪽으로 백월을 평정하고

북으로는 진·채를 병합하고

삼진을 물리치고

서쪽으로는 진나라를 쳤다.

諸侯患楚之彊。故楚之貴戚盡欲害吳起。

及悼王死,宗室大臣作亂而攻吳起,

한편 제후들은 초나라가 강성해짐을 우환으로 여겼고

그래서 초나라 귀족들은 모두 오기를 미워하여

죽일 기회를 엿보았다.

마침내 도왕이 죽자

종실의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일제히 오기를 공격하였다.

吳起走之王尸而伏之。

擊起之徒因射刺吳起,并中悼王。[一]

오기는 마침내 쫓기다가

도왕의 영구를 둔 방으로 가서 시신 위에 엎드렸다.

그러나 오기를 쫓던 자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기에게 화살을 소아 붙였다.

화살은 도왕의 시신까지 꿰뚫었다.

悼王既葬,太子立,[二]

乃使令尹盡誅射吳起 而并中王尸者。

坐射起 而夷宗死者七十餘家。

도왕의 장례식이 끝나고

태자가 임금으로 앉자

영윤에게 명해서 오기를 쏘기 위해

왕의 시신에까지 화살을 쏘아 댄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는데

이로 인해 멸족의 화를 입은 집은 70여 세대나 되었다.

注[一]索隱楚系家悼王名疑也。

注[二]索隱肅王臧也。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世俗所稱師旅,皆道孫子十三篇,

吳起兵法,世多有,

“세상에서 군사를 논하는 사람은

모두 손자 13편에 대해서 말하고

오기의 병법도

세상에 많이 유포되어 있다.

故弗論,論其行事所施設者。

그러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사적과 시책에 대해서만 논했다.

語曰:「能行之者未必能言,能言之者未必能行。」

옛말에 이르기를

‘능히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능히 말하는 것은 아니며

능히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능히 행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했다.

孫子籌策龐涓明矣,

然不能蚤救患於被刑。

손빈은 방연을 치는 데에는 그렇게 밝았지만

그에 앞서 그에게 형벌을 당하는 화를 방지하지 못했다.

吳起說武侯以形勢不如德,

然行之於楚,以刻暴少恩亡其軀。悲夫!

오기는 무후에게는 형세가 덕만 못하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러나 자신이 초나라에서 행한 것은

각박하고 몰인정하여 자신의 몸을 망쳤으니

슬픈 일인저 !

【索隱述贊】孫子兵法,一十三篇。美人既斬,良將得焉。其孫臏,籌策龐

涓。吳起相魏,西河稱賢;慘礉事楚,死後留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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