司馬穰苴列傳第四
4.사마양저열전
司馬穰苴者,田完之苗裔也。
사마양저(司馬穰苴)는 전완(田完)의 먼 후예이다.
齊景公時,晉伐阿、甄,
而燕侵河上,齊師敗績。
景公患之。
제경공(齊景公) 시절에 진(晉)나라가 아(阿)와 견(甄)을 정벌하자
연(燕)나라가 황하 상류를 침략하여 제나라 병사가 계속 패배했다.
경공이 이를 근심했다.
晏嬰乃薦田穰苴曰:
안영(晏嬰)이 이에 전양저(田穰苴)를 추천하며 말했다.
「穰苴雖田氏庶孽,
然其人文能附眾,武能威敵,願君試之。」
“양저가 비록 전씨의 서얼(庶孽)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의 문(文)은 대중들을 따르게 할 수 있고,
무(武)는 적을 위협할 수 있으니
군주께서 그를 시험해 보시길 원하옵니다.”
景公召穰苴,與語兵事,大說之,
以為將軍,將兵扞燕晉之師。
경공은 양저를 불러
함께 병사(兵事)를 이야기 하며 크게 기뻐하고
장군을 삼아
병사들을 이끌고 연과 진의 군대를 막아내게 했다.
穰苴曰:
「臣素卑賤,君擢之閭伍之中,
加之大夫之上,
양저가 대답했다.
“신은 바탕이 비천한데
군주께서 여오(閭伍)속에서 발탁하셔서
대부의 윗자리에 있게 했으니,
士卒未附,百姓不信,
人微權輕,願得君之寵臣,
國之所尊,以監軍,乃可。」
사졸들은 따르지 않고 백성들은 불신하고
사람은 왜소해 권위가 가벼우니, 군주가 총애하고
나라가 존경하는 신을 얻으셔서 군사를 살피게 하면 좋겠습니다.”
於是景公許之,使莊賈往。
穰苴既辭,與莊賈約曰:
「旦日日中會於軍門。」
이에 경공은 이를 허락하고 장고(莊賈)로 하여금 가게 했다.
양저는 물러나와 장고와 함께 약조하며 말했다.
“내일 정오에 군문(軍門)에서 만납시다.”
穰苴先馳至軍,立表下漏待賈。
양저가 먼저 군에 도착하여
해시계기둥을 세우고 물시계를 내리고 장고를 기다렸다.
賈素驕貴,以為將己之軍而己為監,不甚急;
장고는 본바탕이 교만하고 고귀하여
장차 자기의 군대라서 자기가 감독하게 될 거라고 여기고
조급해하지 않았다.
親戚左右送之,留飲。
日中而賈不至。
친척이 좌우에서 그를 위해 송별회를 열었고
그는 지체하며 술을 마셨다.
정오에 장고는 도착하지 않았다.
穰苴則仆表決漏,
入,行軍勒兵,申明約束。
約束既定,夕時,莊賈乃至。
양저는 해시계기둥을 뒤집어 버리고 물시계를 터놓고
들어와서 군에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정돈하며
약속을 밝히어 펼쳤다.
약속이 정해지고, 저녁때가 되서야 장고가 도착했다.
穰苴曰:「何後期為?」
양저가 물었다.
“어찌해서 늦었소?”
賈謝曰:「不佞大夫親戚送之,故留。」
장고가 사과하며 대답했다.
“재주없는 사람에게 대부친척들이 송별회를 열어주어 지체했습니다.”
穰苴曰:
「將受命之日則忘其家,
臨軍約束則忘其親,
援枹鼓之急則忘其身。
양저가 말했다.
“장군은 명령을 받은 날 집을 잊어야 하고
군의 약속을 임해서는 그 가족을 잊어야 하며
북과 북채를 잡아 급할 때는 자기 몸을 잊어야 합니다.
今敵國深侵,邦內騷動,
士卒暴露於境,
君寢不安席,食不甘味,
百姓之命皆懸於君,何謂相送乎!」
지금 적국이 깊숙이 침입해서
나라 안은 소동이 일어나고
사졸(士卒)들은 국경에서 비바람에 직접 노출되어 있으며
군주는 잠자리도 불안해하고 음식도 달게 못 먹으며,
백성들의 운명은 그대에게 매달려 있는데
어찌 송별회를 한단 말이요!”
召軍正問曰:「軍法期而後至者云何?」
양저는 군정(軍正)을 불러 물었다.
“군법에 기한 이후에 도착한 자는 어찌하오?”
對曰:「當斬。」
대답했다.
“당연히 참형입니다.”
莊賈懼,使人馳報景公,請救。
장고는 두려웠다.
심부름꾼이 말을 타고 경공에게 보고하여 구원을 요청했다.
既往,未及反,
於是遂斬莊賈以徇三軍。
그가 떠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이에 장고는 참형을 당해 삼군(三軍)에게 돌려졌다.
三軍之士皆振慄。久之,
景公遣使者持節赦賈,馳入軍中。
삼군의 병사들은 두려워 벌벌 떨었다. 한참 후에
경공은 장고를 구원하기위해 부절(符節)을 가진 사자(使者)를 파견하였고,
그 사자는 말을 타고 군중으로 들어왔다.
穰苴曰:「將在軍,君令有所不受。」
양저가 말했다.
“장군은 군에 있으면 군주의 명령도 받지 않는 바가 있소.”
問軍正曰:「馳三軍法何?」
군정에게 물었다.
“삼군에 말을 타고 들어오면 법이 어떠합니까?”
正曰:「當斬。」
군정이 대답했다.
“당연히 참형입니다.”
使者大懼。
穰苴曰:「君之使不可殺之。」
사자가 크게 두려워했다.
양저가 말했다.
“군주의 사자라 죽여서는 안되오.”
乃斬其僕,車之左駙,
馬之左驂,以徇三軍。
遣使者還報,然後行。
이에 그의 종과 수레의 왼쪽 말을 참수하고
왼쪽 곁방나무를 베어 삼군에게 돌렸다.
파견한 사자가 보고하러 되돌아간 후에 군대가 출발했다.
士卒次舍井灶飲食問疾醫藥,
身自拊循之。
悉取將軍之資糧享士卒,
身與士卒平分糧食。
사졸들의 거처, 우물, 아궁이, 음식, 문병, 의약 등을
자신이 어루만지며 돌아다녔다.
장군이 취하는 모든 재물과 양식을 사졸들에게 주고
자신은 사졸들과 함께 양식을 공평하게 나누었다.
最比其羸弱者,三日而後勒兵。
病者皆求行,爭奮出為之赴戰。
어리고 약한 자를 가려서 모아서
3일후에 병을 정비했다.
병자들 모두가 가기를 요청하며
그를 위해 싸움에 나가려고 애를 쓰며 경쟁했다.
晉師聞之,為罷去。
燕師聞之,度水而解。
진나라 군사들이 이 소문을 듣고 물러갔다.
연나라 군사들도 이 소문을 듣고 강을 건너 흩어졌다.
於是追擊之,
遂取所亡封內故境而引兵歸。
이에 그들을 추격하여
드디어 잃었던 예전 국경 내에 있는 봉지(封地)를 빼앗고
병을 이끌고 되돌아왔다.
未至國,釋兵旅,
解約束,誓盟而後入邑。
나라에 도착하기 전 무기와 군대를 해산시키고
약속을 풀고 맹서한 후에 읍으로 들어갔다.
景公與諸大夫郊迎,
勞師成禮,然後反歸寢。
경공과 모든 대부들이 성 밖에서 맞이하여
수고한 병사들에게 예를 갖춘 다음에 침소로 되돌아갔다.
既見穰苴,尊為大司馬。
田氏日以益尊於齊。
경공은 양저를 보고 대사마(大司馬)로 높였다.
전씨는 제나라에서 날로 더욱 존중받았다.
已而大夫鮑氏、高、國之屬害之,譖於景公。
景公退穰苴,苴發疾而死。
얼마 후 대부 포씨(鮑氏), 고(高)씨, 국(國)씨의 무리들이
그를 헤치려고 경공에게 참소(讒訴)하였다.
경공은 양저를 물러나게 했고 양저는 병이 생겨 죽었다.
田乞、田豹之徒由此怨高、國等。
其後及田常殺簡公,盡滅高子、國子之族。
전걸(田乞), 전표(田豹)의 무리들이 이를 이유로
고씨와 국씨 등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 후 전상(田常)에 이르러 간공(簡公)을 살해하고
고씨의 자손과 국씨의 자손을 모두 멸했다.
至常曾孫和,因自立為齊威王,用兵行威,
大放穰苴之法,而諸侯朝齊。
상의 증손자 화(和)에 이르러
스스로 왕위에 올라 제나라 위왕(威王)이 되어
군대를 이용해 위세를 떨치며 크게 양저의 법을 넓히자
제후들은 제나라에 모였다.
齊威王使大夫追論古者司馬兵法
而附穰苴於其中,因號曰司馬穰苴兵法。
제나라 위왕은
대부에게 옛날의 사마병법을 추론(追論)하게 하여
그 속에 양저를 붙이게 하고
이로 인해 사마양저 병법이라 불렀다.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余讀司馬兵法,閎廓深遠,
雖三代征伐,未能竟其義,
如其文也,亦少褒矣。
내가 사마병법을 읽으니 넓고 심원(深遠)하여
비록 3대(하, 은, 주)가 정벌했어도
그 뜻을 두루 미칠 수 없었던 것처럼
그의 문장도 역시 적게 칭찬했을 것이다.
若夫穰苴,區區為小國行師,
何暇及司馬兵法之揖讓乎?
만약 양저가 떳떳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소국을 위하여 군대를 움직였다면
어찌 사마병법의 겸손한 태도를 미치게 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世既多司馬兵法,以故不論,
著穰苴之列傳焉。
세상에 이미 사마병법이 많으니
논하지 않고 양저의 열전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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