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김종직 문집에 부록으로 수록된 무오사화 사적을 옮겨본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글의 진정성을 논의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되리라 본다.

김종직은 '문이재도론'으로 조정의 문학인 관각파 서거정 등과 대등한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영남사림의 선봉을 차지하고

도학파의 자리를 공고히했다.

김종직은 이 <조의제문>으로 인해 사후 부관참시 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이 블로그의 앞에서 탑재한 바 있는 무오사화의 실록기록을 다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김종직 - 조의제문

http://blog.paran.com/kydong/46329339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왕의 전교와 신하들의 논의

http://blog.paran.com/kydong/27634381

무오사화 사적[점필재집 부록]

홍치 11년 무오(1498)연산군(연산군) 4년.

7월에 사화가 일어났다.

유자광(류자광)이 연산군에게 아뢰어 대역(대역)으로 논죄(론죄)함으로써 즉시 부관참시(부관참시)하게 하였고, 집은 적몰(적몰)되어 정부인(정부인) 문씨(문씨)는 운봉현(운봉현)에 정속(정속)되었다.부인은 즉시 머리를 깎고 복상(복상)하였다.

그는 적중(적중)에 있으면서 항상 탄식하여 말하기를

“가옹(가옹)의 평생의 지절(지절)은 천일(천일)이 밝게 비추어 아는 바인데,

죽은 뒤에 잘못된 화를 입으니, 이 또한 세운(세운)에 관계된 것이고 보면

의당 순종하여 받을 뿐이다.” 하고,

더 이상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9년 동안 적중에 있으면서 절조(절조)를 더욱 힘써 한 번도 이를 드러내어 웃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복(경복)하였다.

아들 숭년(숭년)은 이 때 나이 13세로 합천군(합천군)에 안치(안치)되었는데,

나이가 차지 못했다는 이유로 형화(형화)를 면하였다.

이 달 17일에 내린 전지(전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종직(금종직)은 초야의 천사(천사)로 세조조(세조조)에 등제(등제)하고 성종조(성종조)에는 경연(경연)에 발탁되어 오랫동안 시종(시종)의 지위에 있다가 형조 판서(형조판서)에 이르러서는 총은(총은)이 조정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가 병으로 물러감에 미쳐서는 성종께서 오히려 소재관(소재관)으로 하여금 특별히 미곡(미곡)을 내려서 그 여생을 잘 마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제자인 김일손(금일손)이 수찬한 사초(사초) 안에서 부도(불도)한 말로 선왕조(선왕조)의 일을 속여 기록하고, 또 자기 스승인 종직의 조의제문(적의제문)을 기재하였다.

그 조의제문에 이르기를

丁丑十月日

余自密城道京山

宿踏溪驛

‘정축년 10월 모일에

내가 밀성(밀성)으로부터

경산(경산)을 경유하여

답계역(답계역)에서 자는데,

夢有神披七章之服

頎然而來 自言

꿈에 한 신인(신인)이 칠장복(칠장복)을 입고

헌걸찬 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楚懷王孫心爲

西楚霸王所弑

沈之郴江

因忽不見

「나는 초 회왕(초회왕)의 손자 심(심)인데,

서초패왕(서초패왕) 항적(항적)에게 시해되어

침강(침강)에 빠뜨려졌다.」 하고는,

언뜻 보이다가 이내 보이지 않았다.

余覺之 愕然曰

懷王南楚之人也

余則東夷之人也

地之相距 不啻萬有餘里

而世之先後 亦千有餘載 :

나는 그 꿈을 깨고 나서 깜짝 놀라 말하기를

「회왕은 남초(남초) 사람이고,

나는 동이(동이) 사람이니,

지역의 거리는 만여 리뿐만이 아니요

세대의 선후 또한 천여 년이나 되는데,

來感于夢寐

玆何祥也

꿈자리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 얼마나 상서로운 일인가.

且考之史

無沈江之語

豈羽使人密擊

而投其屍于水歟

是未可知也

遂爲文以弔之

또 사서(사서)를 상고해 보면

강(강)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혹시 항우(항우)가 사람을 시켜

비밀히 격살(격살)하여

그 시체를 물에다 던져버렸던가.

이것을 알 수가 없다.」 하고,

마침내 글을 지어서 조문한다.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부여해 사람에게 주었으니

惟天賦物則以予人兮

유천부물칙이여인혜

그 누가 사대와 오상을 준행할 줄을 모르리오

孰不知尊四大與五常

숙불지기준사대여오상

중화엔 풍부하고 이적엔 인색한 게 아니거니

匪華豐而夷嗇

비화풍이이색혜

어찌 옛날에만 있었고 지금엔 없으랴

曷古有而今亡

갈고유이금망

그러므로 나는 동이 사람이요 또 천 년 뒤의 오늘에

故吾夷人 又後千載兮

고오이인우후천재혜

삼가 초 나라의 회왕을 조문하노라

恭弔楚之懷王

공조초지회왕

옛날 진 시황이 포학을 자행하여

昔祖龍之弄牙角兮

석조룡지롱아각혜

사해의 물결이 검붉은 피바다를 이루니

四海之波殷爲衁

사해지파은위황

상어나 미꾸라지도 어찌 스스로 보전하랴

雖鱣鮪鰍鯢 曷自保兮

수전유추예 갈자보혜

그물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네

思網漏而營營

사망루이영영

이 때 산동 육국의 후사가 된 사람들은

時六國之遺祚兮

시륙국지유조혜

침몰하고 방랑하는 고작 필부 편맹들뿐이었네

沈淪播越 僅媲夫編氓

침륜파월 근비부편맹

항량은 남쪽 초 나라 장수의 후예로서

梁也南國之將種兮

량야남국지장종혜

어호를 뒤따라 대사를 일으키어

踵魚狐而起事

종어호이기사

임금을 찾아 얻어서 백성의 소망을 따르니

求得王而從民望兮

구득왕이종민망혜

웅역에게 끊어진 제사를 다시 보존했도다

存熊繹於不祀

존웅역어불사

제왕의 상서를 쥐고 왕위에 오르니

握乾符而面陽兮

악건부이면양혜

천하에 진실로 천씨보다 더 높은 이 없었고

天下固無大於芉氏

천하고무존어천씨

장자를 보내어 관중을 들어가게 하였으니

遣長者而入關兮

견장자이입관혜

또한 족히 인의로운 마음을 볼 수 있었네

亦有足覩其仁義

역유족도기인의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여 멋대로 관군을 멸족시켰는데

羊狠狼貪 擅夷冠軍兮

양한랑탐 천이관군혜

어찌 그를 잡아다가 처형하지 않았던가

胡不收而膏齊斧

호불수이고제부

아 형세가 대단히 어긋난 것이 있었으니

嗚呼 勢有大不然者兮

오호 세유대불연자

나는 회왕을 위하여 더욱 두려웁도다

吾於王而益懼

오어왕이익구

끝내 배신한 자에게 시해를 당하였어라

爲醢腊於反噬兮

위해초어반서혜

과연 천운이 크게 어긋났도다

果天運之蹠盭

과천운지척려

침강 가의 산은 우뚝이 하늘에 치솟았는데

郴之山磝以觸天兮

침지산오이촉천혜

햇빛은 침침하여 저물녘을 향하였고

景晻愛以向晏

경엄애이향안

침강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데

郴之水流以日夜兮

침지수류이일야혜

물결은 넘쳐 흘러 되돌아오지 않도다

波淫泆而不返

파음일이불반

한스러워라 천지는 장구하여 언제 다하랴마는

天長地久 恨其可旣兮

천장지구 한기갈기혜

그 넋은 지금까지도 떠돌아다니리라

魂至今猶飄蕩

혼지금유표탕

나의 충심은 금석을 뚫을 만하기에

余之心貫于金石兮

여지심관우금석혜

왕께서 갑자기 몽상에 나타났도다

王忽臨乎夢想

왕홀림호몽상

자양의 노련한 필법을 따라

循紫陽之老筆兮

순자양지로필혜

마음 설레며 공경히 사모하여

思螴蜳以欽欽

사진윤이흠흠

술잔 들어 땅에 부어서 제사지내니

擧雲罍以酹地兮

거운뢰이뢰지혜

바라건대 영령은 내려와 흠향하소서

冀英靈之來歆

기영령지래흠

했다.’ 하였다.

그런데 조룡(조룡)이란 진 시황(진시황)을 가리킨 말로서, 종직(종직)이 진 시황을 세묘(세묘)에 비유한 것이고, ‘왕(왕)을 찾아 얻어서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는 데의 왕은 바로 초 회왕(초회왕)의 손자 심(심)을 가리키는데, 처음에 항량(항량)이 진(진)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손자 심을 찾아서 의제(의제)로 삼았으므로, 종직이 의제를 노산(로산,노산군 곧 단종;운영자注)에게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종직이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여 제멋대로 관군(관군)을 멸족시켰다.’고 하였는데,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다.’는 것은 세묘를 가리킨 말이고, ‘멋대로 관군을 멸족시켰다.’는 것은 곧 세묘가 김종서(금종서) 죽인 것을 가리킨 말이다. 그 ‘어찌 그를 잡아다가 처형하지 않았던가.’라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어찌하여 세묘를 잡아 죽이지 않았던가.’의 뜻으로 말한 것이고, 그 ‘배신한 자에게 시해되었다.’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묘를 죽이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세묘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 ‘자양(자양)의 노련한 필법을 따라서 마음 설레며 공경히 사모한다.’는 것은 종직이 주자(주자)로 자처하여 그의 마음에 이 부(부)를 지어서 주자의 《강목(강목)》에 비긴 것이었다.

그런데 김일손(금일손)이 그 글을 찬양하여 말하기를 ‘이것으로 충분(충분)을 부쳤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는 국가가 위의(위의)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간신)이 난(란)을 획책함으로써 화기(화기)가 거의 일어날 무렵에 역도(역도)들을 죽여 제거함으로 인하여 종사(종사)가 위태로웠다가 다시 편안해져서,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업(공업)이 높고 높으며 그 덕(덕)이 백왕(백왕)에 으뜸가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종직이 자기 문도(문도)와 더불어 성덕(성덕)을 비난하고, 심지어는 일손으로 하여금 그런 글을 사서(사서)에다 속여 기록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조일석(일조일석)에 생긴 일이겠는가. 남몰래 불신(불신)의 마음을 품고서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내가 지금 생각하매 나도 모르게 참혹하고 두렵구나. 그 형명(형명)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그리하여 7월 27일에 반사(반사)하였다. 그 반사의 교지(교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세조 혜장 대왕(세조혜장대왕)께서는 신무(신무)의 자용(자용)으로 국가가 위의(위의)스럽고 뭇 간신(간신)들이 굳게 자리잡고 있는 때를 당하여 침착한 살핌과 슬기로운 결단으로 화란(화란)을 평정함으로써 천명(천명)과 인심(인심)이 절로 붙일 곳이 있게 되었으니, 그 성신(성신)한 공덕(공덕)은 백왕(백왕)에 으뜸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종(조종)의 간대(간대)한 사업에 광채를 더하고, 자손(자손)들을 도와서 편안하게 하는 계책을 끼쳐줌으로 인하여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날의 태평 성대에 이르렀다.

그런데 뜻밖에 간신 김종직이 화심(화심)을 품고 은밀히 당류(당류)를 결합하여 흉악한 꾀를 부리려고 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래서 항적(항적)이 의제(의제)를 시해한 일에 가탁하여 이를 문자(문자)로 드러내서 선왕(선왕)을 헐뜯었으니, 그 하늘에 닿는 죄악을 용서할 수 없으므로, 대역(대역)으로 논죄하여 그를 부관참시(부관참시)하라.

그리고 그의 문도인 김일손(금일손), 권오복(권오복), 권경유(권경유)는 서로 간악한 붕당(붕당)을 지어 같은 무리끼리 서로 도와서 그의 글을 충분(충분)이 격앙된 바라고 칭미(칭미)하여 이를 사초(사초)에 써서 먼 후세에까지 전하려고 하였으니, 그 죄는 종직과 같은 등급이므로, 모두 능지처참(릉지처참)하도록 하라. 김일손은 또 이목(리목), 허반(허반), 강겸(강겸) 등과 함께 선왕께서 하지 않은 일까지 속여 꾸며서 서로서로 말을 전하여 그것을 사초에 기록하였으니, 이목, 허반은 모두 처참(처참)하고, 강겸은 결장일백(결장일백)하고 가산(가산)을 적몰(적몰)하여 극변(극변)으로 보내서 노복으로 삼도록 하라.

표연말(표연말), 홍한(홍한), 정여창(정여창), 무풍부정 총(무풍부정총) 등은 난언죄(란언죄)를 범하였고, 강경서(강경서), 이수공(리수공), 정희량(정희량), 정승조(정승조) 등은 난언(란언)하는 것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으니, 모두 결장일백하여 유삼천리(류삼천리)하도록 하라.

이종준(리종준), 최보(최부), 이원(리원), 이주(리주), 김굉필(금굉필), 박한주(박한주), 임희재(임희재), 강백진(강백진), 이계맹(리계맹), 강혼(강혼)은 모두 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결성하여 서로 칭찬하고, 혹은 국정(국정)을 비난하고 시사(시사)를 비방하기도 하였으니, 임희재는 결장일백하고, 이주는 결장일백하여 극변에 부처(부처)하라. 이종준, 최보, 이원, 김굉필, 박한주,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모두 결장팔십하여 원방(원방)에 부처하되, 이 유배된 사람들에게는 모두 봉수정로간(봉수정로간)의 역(역)을 정하도록 하라.

수사관(수사관) 등은 김일손 등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았으니, 어세겸(어세겸), 이극돈(리극돈), 유순(류순), 윤효손(윤효손) 등은 파직하고, 홍귀달(홍귀달), 조익정(조익정), 허종(허종)허종은 갑인년에 이미 죽었으니, 필시 허침(허침)일 것이다., 안침(안침) 등은 좌천(좌천)하라. 그 죄의 경중(경중)에 따라 모두 이미 처결하고, 삼가 사유(사유)를 가지고 종묘(종묘)와 사직(사직)에 고하였다.

생각건대 나는 과매(과매)한 사람으로 간당(간당)을 제거하고 나니, 두려운 생각이 이미 깊은 한편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그러므로 지금 7월 27일 어둑새벽 이전까지의 강도(강도), 절도(절도) 및 강상죄(강상죄)에 관계된 죄인 이외의 죄수들에 대해서는 형(형)이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은 자를 막론하고 모두 용서하여 석방하라. 이들에 대하여 감히 유지(유지) 이전의 일로써 서로 고어(고어)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죄로써 벌줄 것이다.

아, 인신(인신)은 군왕에 대하여 반역의 뜻도 품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들은 이미 부도(불도)의 죄를 받았으니, 천지(천지)가 풀리어 뇌우(뢰우)가 이르듯이 의당 새로운 은택을 널리 펴야 하겠으므로, 이와 같이 교시(교시)하노니, 자세히 알아서 실천하도록 하라. ……”

홍치 17년 갑자(1504)연산군 10년.

9월에 사화(사화)가 재차 일어나서 김굉필, 박한주 등 여러 사람에게 가죄(가죄)하였다.

정덕(정덕) 2년 정묘(1507)중종 대왕(중종대왕) 2년.

죄를 입은 제현(제현)들의 원통함을 추후하여 신설(신설)하였다. 이 때 예문관 봉교(예문관봉교) 김흠조(금흠조)·정충량(정충량), 대교(대교) 이희증(리희증)·김영(금영), 검열(검열) 권벌(권벌)·이영(리영)·정웅(정웅)·윤인경(윤인경)·윤지형(윤지형)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무오년에 수사관(수사관)들이 한갓 사적인 혐오 때문에 공의(공의)를 돌아보지 않고 은밀히 대신(대신)에게 촉탁하여 그의 노염을 돋구고, 유자광(류자광)이 따라서 이를 창화하여 함께 의논해서 밀계(밀계)함으로써 끝내 대화(대화)를 불러온 것이니, 이는 곧 은밀히 과실을 가리려다가 끝내는 가리지 못하고 도리어 과실이 당일에 폭양(폭양)되어 만세 후까지 누가 미치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만세의 사가(사가)의 법칙을 훼손시키고 한편으로는 임금의 사람 죽이기 좋아하는 마음을 열어놓았기에, 그 죄가 의당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인데 상(상)이 도리어 미쳤으니, 신들은 몹시 분개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요즘에는 모두 무오년의 화(화)를 경계하여 사기(사기)가 매우 꺾이었습니다. 신들은 김일손 등을 애석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사가의 법칙이 이로부터 모조리 폐해짐으로써 만세의 공론(공론)이 없어져버릴까 매우 염려하는 바입니다. ……”

하였다.

그러자 전교하기를,

“김종직, 김일손 등 사련(사련)으로 죄를 입은 사람들은 과연 애매한 점이 있으니, 그들을 복관(부관)시키고, 그 나머지는 모두 추증(추증)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때의 추관(추관)인 윤필상(윤필상), 노사신(로사신), 유자광(류자광) 등에게 상사(상사)한 물품과 무오년에 사국(사국)의 일을 누설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기청(일기청)으로 하여금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 해에 밀양(밀양) 대동(대동)의 구택(구댁) 뒷산 경좌 갑향(경좌갑향)의 언덕에 개장(개장)하였다.

상(상)이 특명으로 그 부인에게 늠료(름료)를 지급하고, 그 자손들을 찾아서 녹용(록용)하도록 하여, 아들 숭년(숭년)이 집경전 참봉(집경전참봉), 동부 참봉(동부참봉)에 연해서 제수되었다. 그러나 숭년은 화를 당한 나머지 명리(명리)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모부인(모부인)의 명령에 따라 사은(사은)을 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모친을 섬기면서 효성을 다하였으므로, 향인(향인) 및 사림(사림)들이 지금까지 칭도하고 있다.

참봉은 주부(주부) 손순무(손순무)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윤(부윤) 손영유(손영유)가 바로 그의 조(조)이다. 아들 3인을 두었는데, 윤(륜)은 문행(문행)이 있었으나 요절하였고, 유(유)는 참봉 최필손(최필손)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유(뉴)는 지평(지평) 이신(리신)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선생의 문집(문집) 초본(초본) 20여 권이 모두 불타버렸으나, 오히려 남은 난고(란고)가 들보 위에 쌓여 있었는데, 가인(가인)이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하여 이를 또 불 속에 던져버리자, 곁에 있던 사람이 활활 타는 불 속에서 1, 2편(편)을 꺼냄으로써 겨우 완전히 태워버림은 면하였다. 그래서 지금 보존된 것은 10분에 2, 3도 안 되는데, 선생의 생질 강중진(강중진)이 이를 상자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무오년으로부터 22년 뒤인 경진년(1520, 중종15)에 읍재(읍재)와 상의하여 판각(판각)하도록 하였고, 남곤(남곤)이 서문(서문)을 지었다.

그리고 예조(례조)에서는 선생이 살았던 고을과 강도(강도)하던 곳에 사우(사우)를 세우고 봄, 가을의 중월(중월)이면 관(관)에서 치제(치제)할 일로 의정부(의정부)에 보고하니, 의정부가 계청(계청)하여 상이 윤허했으므로 금산(금산)의 경렴서원(경렴서원), 밀양(밀양)의 예림서원(례림서원), 선산(선산)의 자양서원(자양서원), 함양(함양)의 백연서원(백연서원), 개령(개녕)의 덕림서원(덕림서원)이 이루어졌다.

점필재집 문집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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