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오딧세이] 조선족 간도 정착이 불법 이주였다고? |
2008 07/01 뉴스메이커 781호 |
지리부도 교과서에 실린 간도 개척 관련 지도.
중국은 간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오래전부터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 측 입장에서 무조건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만 한다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일 수 있다. 중국이 과연 간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점에서 주장이 그른지 잘 살펴봐야 한다.
중국은 간도에 조선족들이 유입된 시점을 1860년대로 보고 있다. 연변일보(2004년 2월 20일자)에 실린 간도 관련 기사를 보면 중국이 어떻게 간도를 바라보고 있는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19세기 60년대, 조선 종성군 하산봉에 사는 농사군 리영수 형제가 끝내 죽음을 자초하는 기아와 맞서 도발적인 행동을 감행한다. 떼목을 타고 용감히 강을 건넌 것이다. 그리고 버드나무를 찍어내고 풀을 베여내여 밭을 일구었다. 그때를 선구촌 제1촌민소조의 농민 시인 심정호씨는 이렇게 말한다. ‘로인들한테서 들은 얘긴데 130년 전에 종성 하산봉의 리영수 형제가 떼목을 타고 강을 건너와 이 천평벌에 첫 괭이를 박았다고 그럽니다. 그 먼저 종성 사람들은 저 뚝 너머 사이섬에서 농사질을 했다는군요. 리영수 형제는 월강죄가 무서워 사이섬에 가 농사를 지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다음부터 저기 산 너머 마늘골이랑, 애끼골이랑에 가 밭을 일구었고 석정골이며 연집골까지 들어가 화전을 일구면서도 사이섬에 가 농사 짓는다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더군요.”
1860년대 무인지대 조선인이 선점
이 사이섬이 간도가 됐다는 이야기다. 이 기사 내용에서 ‘도발적인 행동’ ‘농사질’ ‘월강죄(강을 넘은 죄)’ ‘거짓말’이란 표현만 보아도 중국 측이 간도 이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즉 조선족이 불법으로 남의 땅으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서는 1880년대에 이르러 조선족이 대거 넘어왔다는 것을 싣고 있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는 몇 가지 사실이 왜곡돼 있다. 1860년 경작이 있기 전, 조선인들은 삼을 채취하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조선과 청,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는 무인지대였다. 그래서 이곳에 사람들이 정착할 경우 조선과 청나라, 양측에서 문제 삼았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많은 조선인이 그 지역에 농사를 지으며 정착했다. 정착을 먼저 한 사람은 모두 조선인이다. 그렇다면 이 땅은 과연 누구의 땅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에 두만강을 넘어간 것을 불법이라고 해석하는 조선족은 물론 이들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불법을 공공연히 저질렀고, 그 결과 자신이 중국 땅에 남겨졌다고 해석하는 우를 범하는 셈이다. 이 기사는 간도 땅이 조선의 영토라는 주장이 있게 된 것에 대해 일본 탓으로 돌리며 마무리하고 있다.
“간도는 조선 땅” 주장은 일본 탓?
“결국 일제는 력사문헌과 실지조사를 통하여 ‘간도는 조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두만강 변계 문제를 리용하여 저들의 대륙 침략 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연변에 침입했던 것이다. 조선 사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연변에 들어온 일제는 그후 조선족을 탄압하고 략탈하는 야수의 무리가 되었다.” (연변일보 2004년 2월 20일자)
모든 것을 일본의 탓으로 돌리고 싶겠지만, 20세기 초반 일본의 야욕과는 상관없이 간도는 이미 1885년 을유감계담판(국경 협상)에서도 양측 간에 논란이 되었다. 당시 감계사인 이중하는 청나라 측 대표와 함께 백두산 정계비 인근 물줄기를 직접 찾아가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강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잘못된 역사가 거짓말을 할 뿐이다.
<윤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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