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오딧세이]

이 물줄기가 아닌가벼!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8960&pt=nv

2008 12/23 위클리경향 805호

시노다 지사쿠의 <백두산 정계비>에 실린 백두산 인근 약도.

녹색 띠가 압록강-정계비- 울타리-토문강을 연결하는 선이다.

803호에 실린 ‘백두산 정계비는 역사적 해프닝’이라는 글이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단 제목이 주는 의미 때문에 인터넷에서 많은 네티즌이 읽고 댓글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짧은 글 속에 모든 정확한 내용을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백두산 정계비 때의 상황을 세세히 설명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단편적인 대목이 있다. <숙종실록>의 숙종 38년(1712년) 12월 7일자 기사다.

이유가 또 임금에게 아뢰기를,
“김진규의 소가 대체에 있어서 진실로 옳습니다. 직질(職秩)이 높은 관원이 경솔하게 그들의 땅에 들어감은 과연 편리하지 않으니, 차원들을 잡아 오기를 기다렸다가 자세히 물어본 다음에 의논해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 상소에 또 ‘목차에게 사사로이 물어서는 안 되고 마땅히 자문을 보내거나 주문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대신의 의견이 모두 편리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차가 견책(譴責)받는 것은 아직 말할 것이 없고, 만일 저들이 다른 차원을 보내 다시 간심한다면 목차처럼 순편(順便)할지 보장하기 어려운데다가, 혹은 경계를 정하는 곳에 있어서 도리어 변개(變改)하여 감축(減縮)하는 우려가 있다면 득실(得失)에 큰 관계가 있을 것이니, 먼저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그 고장 사람 중에서 일을 잘 아는 사람을 가려 보내 편리한 대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고 계문(啓聞)한 뒤 상의(商議)하여 처리함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다시 그대로 따라, 문신(文臣) 당상관은 아직 차출해 보내지 말고, 먼저 도신으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사람을 보내 자세히 살펴보고 계문하게 하고, 또 차원을 잡아다 추문하기를 기다린 뒤에 상의하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에 차원 허량(許樑) 과 박도상(朴道常) 등은 잡혀 왔으나 사령(赦令)으로 인해 용서받았다.

1712년 5월 백두산 정계가 이뤄진 뒤 백두산 인근 지역의 관리인 거산찰방 허량과 나난만호 박도상은 이해 여름,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인부를 데리고 울타리를 쌓으려 이 지역에 갔다. 하지만 정계비에서 연결된 물줄기는 두만강이 아니라 북쪽으로 흘러갔다.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조선 관리들은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인부들을 동원해 울타리를 쌓으려 올라갔는데, 그냥 내려올 수도 없었다. 잘못 쌓았다가는 조선·청 간에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두 관리는 궁리 끝에 청의 대표였던 목극등(실록에서는 목차로 표현됨)이 지정한 물줄기보다 남쪽 아래에 있는 물줄기를 기준으로 울타리를 쌓았다. 하지만 그 물줄기 역시 두만강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국경 울타리 건축, 조선 관리의 고육지책
울타리를 쌓고 난 뒤 이해 12월, 조정에서는 두 관리의 처벌 문제가 대두됐다. 두만강으로 연결되지 않는 곳에다 울타리를 쌓은 죄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정계가 잘못됐다고 청에게 이야기하면 목극등(목차)이 징계를 받을 수도 있고, 이보다 엄격하게 다시 정계를 하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논의했다. 결국 자세히 알아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여기에 대한 논의는 더 진행되지 않은 채로 유야무야됐다. 이로부터 170여 년이 지난 1885년에야 조선·청 국경선은 문제가 됐다.

잘못된 경계조차 쉬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조선의 상황이었다. 심지어 잘못 이야기하면 병자호란과 같은 피해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애초에 제대로 경계가 됐을 리가 만무했다.


<윤호우 기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