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 한글의 초성은 오행에 따라 아설순치후음 오음으로 나누었고 그 발음기관을 형상화하여 ㄱ, ㄴ, ㅁ, ㅅ, ㅇ를 기본글자로 하여 17자를 만들었으며. 중성(모음)체계는 천지인 삼재(삼재)를 기본글자로 하여 11자를 만들고 아래아의 위치에 따라 음양의 소리를 구분했다.

1. 훈민정음 이름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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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훈민정음(訓民正音)

-우리 글자를 창제할 때 붙인 이름(1443년)
-정음: 정인지 서문에서 사용
보기> - 정인지 서문:
癸亥冬,我殿下創製正音二十八字,略揭例義,以示之,名曰訓民正音
- 세종실록(권102) 28년(1446) 丙寅 9월:
是月訓民正音成,御製曰,國之語音異乎中國
- 월인석보의 머리글에 있던 어제훈민정음:
百姓을 가르치시논 正(졍)한 소리라

나. 언문(諺文)

-한자가 아닌 우리말로 적은 글이란 뜻.
보기> - 세종실록 계해(세종 25년) 12월조: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其字倣古篆,分爲初中終聲,合之然後
- 세종실록 병신(26년) 2월 20일 상소문: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今之諺文不亦便民乎
- 세종 28년 새로운 문자의 보급과 실천을 위해서 諺文聽 설치

-한문과 언문의 쓰임 비교

중국말: 言語 /중국글: 漢文, 眞書
우리말: 方言, 俚語, 俗語, 諺語 /우리글: 諺文, 諺書, 諺字

다. 반절(反切)

[은자주]반절은 한자의 발음기호로한자사전에는 지금도 반절표기법이 적혀 있다
한자의 발음을 표시할 때,두 개의한자를 이용하는데, 앞글자는성(聲)을 뒷글자는운(韻)을 나타낸다.

한자에서 성운이 발달한 것은 유미주의문장론이 지배하던 육조시대이다.그 계기는 불경이 수입되어 중국어에 없는 산스크리트어를 번역, 표기하는 데서 출발되었는데이 성운의 발달로 당나라 시대에는 근체시가 확립되었고, 중국시의 최고봉인 이백과 두보는 성당기의 시인들이었다.


-한글은 음소문자(낱소리 글자)라서 소리를 나타내는 방법이 반절과 비슷하다하여 생겨난 이름
보기> 최세진의 訓蒙字會: 諺文字母,俗所謂反切二十七字

-반절: 한자의 음을 표시할 때, 쉬운 한자를 이용하여 성과 운으로 나타내는 법.
보기> 天: 他前切[ㅌ + ㅕㄴ > 텬] 東: 德紅切[ㄷ + 옹 > 동]

라. 기타: 암클, 창살글자, 중글, 상말글 등

마. 근대의 우리글 이름

-갑오경장(1894) 이후: 國語, 國文
보기> 주시경의 저서: 국문론(1897), 국어문법(1898), 국문문법(1905)
주시경의 단체: 국문동식회(1896), 국어연구회(1907)

-한(韓)나라말:한국어, 한나라글:한국문
보기> {보중친목회보} 1호(1910)에 실린 주시경의 글

-경술국치(1910) 이후:조선어
보기> 조선어문법(1911), 조선어전(1911), 조선어강습원(1911)

-한말
보기> 국어연구회 강습소 제2회 수료 증서(1911.4.1)의 문구
[한말익힘곳침]

-배달말
보기> [국어연구회]를 '배달말글몯음(조선어문회)로 바꿈.(1911.9.17)

-한글: 주시경이 지은 우리글 이름으로 `한`은 `큰`이란 뜻이다.
보기> [배달말글몯음](조선어문회)를 [한글모]로 개칭
최남선 [아이들보이]지(1913.9)의 '한글풀이'
[한글배곳](1914.4)(조선어강습원)
김두봉의 [조선말본](1915) 머리말
-> '한글모임자 한샘'이라는 말
이규영: 한글모죽보기(1916~1919)
1927년 2월 8일 [조선어연구회]에서 기관지 [한글] 간행
훈민정음 반포일 [한글날(1928,가갸날)]


2. 훈민정음을 만든 학자들

성삼문, 신숙주등 집현전 학자들

http://www.hangeul.or.kr/59.htm

강희안

1417(태종 17)~1464(세조 10).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고,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함.

박팽년

1417(태종 17)~1456(세조 2). 1456년 형조 참판으로서 성삼문, 하위지, 이개 , 유성원, 유응부, 김질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체포된 후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고 사형당함.

성삼문
1418(태종 18)~1456(세조 2). 정음청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강희안, 이개 등과 함께 한글의 창제를 앞두고 당시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 학사 황찬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여러 번 건너가서 음운과 교장의 제도를 연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년 9월 29일에 훈민정음을 반포하게 함.

신숙주
1417(태종 17)~1475(성종 6).집현전의 수찬을 지내면서 여러 번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 한림 학사 황찬을 찾아가 음운에 관한 지식을 듣고 와서 세종을 도와 성삼문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가장 큰 공을 세움.

이개
1417(태종 17)~1456(세조 2). 1441년 저작랑으로 "명황계감"의 편찬에 참여,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참여함.

이선로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함.

정인지
1396(태조 5)~1478(성종 9). 세종을 도와 성삼문, 신숙자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컸으며, 권제, 안지 등과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최항
1409(태종 9)~1474(성종 5). 1445년 집현전 응교로서 "용비어천가" 창제에 참여, 이어 "동국정운",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보수" 등을 찬진함.

1461년 양성지의 "잠서"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간행, 이 해 다시 왕명으로 "경국대전"의 편찬에 착수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법률, 제도를 집대성함. 1464년 어음이 정확하지 못하고 구두가 불명하던 "사서오경"에 구결을 달았고, 1466년(세조 12) 판병조사를 거쳐 좌찬성을 역임, 다음해 우의정이 됨.

3. 훈민정음의 배경


〈훈민정음의 이론적 배경〉
훈민정음의 제자(制字) 및 그 결합의 철학적 배경은 성리학적(性理學的) 이론인 삼극지의(三極之義)와 이기지묘(二氣之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삼극은 천 ·지 ·인 삼재를 말하고, 이기(二氣)는 음(陰) ·양(陽)을 말한다. 성리학적으로 이 삼재와 이기로 우주일체의 사상(事象)을 주재하는 기본이념으로 이해되고, 이 삼재와 음양을 떠나서는 우주일체의 사상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성음(聲音)도 그것이 개념을 표상(表象)하는 그릇이므로, 근본적으로 삼재와 음양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말소리의 체계는 삼재 ·음양의 체계와 반드시 합치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언어관(言語觀)이었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그 음(音)의 분류에 있어서나 제자 원리에 있어서 그 철학적 이론은 모두 이러한 언어관에 입각하고 있다. 성리학에 따르면 모든 사상은 음양(陰陽) ·오행(五行) ·방위(方位)의 수(數)가 있으므로 음의 분류도 오행의 수에 맞추었다. 오행 ·방위, 그리고 초성에 있어서의 춘하추동,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중성에 있어서의 천 ·지 ·인, 일 ·이 ·삼…(一 二 三…)의 수와 같은 것은 모두 성리학적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음의 특징은 음성적 특징과 성리학적 특징의 양면에서 기술되어 있다.


[언해본 초성해 중성해를 다음 꼭지까지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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