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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석탑(益山 彌勒寺址 石塔), 국보 제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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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서동요

薯童謠 -武王

-삼국유사 紀異 제2

[은자주]우리는 새로운 자아의 모습을 꿈꾼다. 바보 온달이 장수로 신분상승을 한 것은 확실히 인생역전의 드라마다. 거기에는 조력자로 평강공주가 있었다. 그래서 우린 기댈 언덕을 찾고 줄을 잘 서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는지 모른다. 독불장군은 없다지 않는가?

 

무왕은 적극적 공세로 선화공주와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결혼이야말로 굳이 따지지 않고 니끼 내꺼고 내끼 내꺼인 부(富)를 공유 내지는 분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가진 자들끼리, 또는 부자들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혼인함으로써인류사의 미풍양속을 저해하고 있다. 온달의 잠재능력을 개발한 평강공주의 솔선수범은 시사하는 바 크다.

 

<서동요>와 삼국사기의 <온달전>을 함께 읽어 본다. <서동요>에선 보디가드와 성관계를 가진 후 상대방의 이름을 안 선화공주의 성의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독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정조관념이 한반도에 깊게 뿌리내린 건 조선시대의 열녀운동을 통해서였다. 김유신의 부모님도 야합했고, 무열왕의 누이동생인 문희도 김유신과그러했다.

 

온달 이야기는 남한에서는 러브스토리로만 이해하는 이들이 많으나 북한 국문학사에서는 신분상승도 가능하게 하는‘무예(武藝)’를 강조하는 영웅담으로 소개하고 있다. 정치체제에 맞는 설화의 이해라 하겠다.

 

武王(古本作武康 非也. 百濟無武康)

 

第三十武王名璋.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母寡居 築室於京師南池邊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의 못가에 살았는데

池龍交通而生

그 못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小名薯童. 器量難測

어릴 때의 이름은 서동이라 불렀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도량이 넓어 헤아리기 어려웠다.

常掘薯蕷 賣爲活業

항상 마를 캐어다 팔아 생계를 꾸렸으므로

國人因以爲名.

사람들이 그를 서동이라고 불렀다.

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美艶無雙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가 무척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剃髮來京師

서동은 머리를 깎고 서라벌로 가

以薯蕷餉閭里羣童 羣童親附之.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먹이니 아이들이 그를 따랐다.

乃作謠 誘群童而唱之云,

동요을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하였다.

 

善化公主-主-隱 ※一作善花公主

他-密 -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善化公主님은/ 선화공주님은

남그으지 얼어두고/ 남 그윽히 얼어 두고

맛둥방을/ 맛둥방을

바매 몰 안고가다/ 밤에 몰래 안고 가다.

 

 

 

童謠滿京 達於宮禁

동요가 서울에 널리 퍼져 대궐에까지 알려지니

百官極諫 竄流公主於遠方.

백관들이 임금에게 간곡히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했다.

將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

공주가 떠나려 하자 왕후는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公主將至竄所.

공주가 귀양지에 이르렀을 즈음,

薯童出拜途中. 將欲侍衛而行.

서동이 도중에 나타나 공주에게 절하며 모시고 가고자 했다.

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悅.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는 알지 못했지만, 우연함을 믿고 기뻐하여

因此隨行 潛通焉

이로 인하여 수행하다가 몰래 사통했다.

然後知薯童名

그런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았다.

乃信童謠之驗.

이에 동요의 증험을 믿었다.

 

同至百濟 出王后所贈金 將謀計活.

서동과 함께 백제에 이르러 모후가 준 금을 꺼내놓고 생계를 도모하려 하는데,

薯童大笑曰

서동이 껄껄 웃으며 물었다.

「此何物也?」

“이게 무엇이요?”

主曰: 「此是黃金, 可致百年之富.」

공주:“이것은 황금이니 평생 부를 누릴 수 있습니다.”

薯童曰:“吾自小掘薯之地 委積如泥土.”

서동: “내가 어렸을 적부터 마를 캐던 곳에 쌓인 것이 진흙처럼 있소.”

主聞大驚曰

이에 공주가 크게 놀라서 말했다.

“此是天下至寶. 君今知金之所在

“그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배이니 그대가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

그것을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薯童曰“可.”

서동: “좋소”

於是 聚金 積如丘陵.

이에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는

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 問輸金之計.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 이것을 수송할 방법을 물었다.

師曰“吾以神力可輸. 將金來矣.”

법사: “내가 신통한 힘으로 수송할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

主作書 幷金置於師子前.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옮겨 놓았다.

師以神力 一夜輸置新羅宮中.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그 금을 하룻밤 동안에 신라 궁중으로 보냈다.

眞平王異其神變 尊敬尤甚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그를 더욱 존경했으며,

常馳書問安否.

늘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薯童由此得人心 卽王位.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무왕)

 

一日王與夫人 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닿으니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미륵삼존이 못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夫人謂王曰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이곳에 큰 절을 세우십시요. 진실로 저의 소원입니다.”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왕이 그것을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의논했다.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이에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산을 헐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乃法像彌勒三會(註,尊)殿․塔․廊廡各三所創之.

여기게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額曰彌勒寺(國史云王興寺).

편액을 미륵사라 했다.(國史에는 왕흥사라 했다.)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

진평왕이 여러 工人들을 보내어 그 역사를 돕도록 했는데, 지금껏 그 절은 보존되었다.

(三國史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이 전기에는 홀어미의 아들이라 하니 자세하지 않다.)

 

◇薯童謠 해설

󰋬26대 진평왕(재위 579-632)

󰋬이전부터 있었던 민요를 진평평왕대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선화공주와 결부시킴. 상하층의 신분의 장벽을 무너뜨림.

󰋬(4구)[夕+卩]-乙:(小倉 ․梁柱東)卯乙ㅡ몰. 몰래.

[서재극] 알안겨거다.

[김완진] 알흘 안고 가다.‘알’은 은어 내지 비유적 표현.

[은자주]남녀의 샅에는 '-알'이라 불리우는 외음부가 있다. 여기서는 남자의 것으로 대유법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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