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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품의 주석번호는 순서대로 1), 2), 3)....으로 볼 것.
長恨歌
-백거이 [白居易, 772~846]字 낙천(樂天).
장한가는 120구 840자.
구섭우편저, 한역당시삼백수, 안병렬역, 계명대출판부, 1991.
김희보 편저, 中國의 名詩(증보판), 종로서적.
헌종 원화 원년(806) 12월이나 이듬해 봄으로 추정. 35-36세 작.
제1단:당 明皇과 楊貴妃의 사랑의 경과.
제2단:궁정의 향락하고 사치한 생활과 안록산의 난으로 양귀비 목매어 죽임.
제3단:전란 후 양귀비를 잊지 못하는 현종의 슬픔과 아픔.
제4단:사천의 한 도사가 서울로 와 그 법술로 양귀비의 꽃다운 혼을 찾을 수 있다며 선산에 들어가 그녀와 만난 이야기.
제1단:당 明皇과 楊貴妃의 사랑의 경과
漢皇重色思傾國
한나라 황제는 미인을 탐하여 絶世 미녀를 그리워하나 1)
御宇多年求不得
황제 자리에 오르고 나서 오랫동안 구하지 못하였네. 2)
❙ 注 疏
1)漢皇(한실) 한 무제(실제로는 당의 현종 712~765 재위) [傾國]미인을 가리킴. 한무제가 사랑했던 李夫人에 관해 노래한 李 延年의 노래에 의하면 “한 번 돌아다보면 사람의 城을 기울게 하고, 다시금 돌아다보면 사람의 나라를 기울게 한다”고 미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데서 유래한 말임. 2)御宇(어우)우주를 통치하는 천자의 位에 오르는 것.
楊家有女初長成
그 때 양씨 가문의 한 아가씨가 갓 장성하였는데1)
養在深閨人未識
깊은 규방에서 자랐기에 남들은 몰랐다네.2)
天成麗質難自棄
하늘이 주신 아름다움 저버리기 어렵나니3)
一朝選在君王側
하루아침에 선발되어 천자를 모시게 되었다네.
❙ 注 疏
1)楊家(양가):양현염의 집이며, 그 딸은 어렸을 때 이름을 玉環이라 하였다. 처음엔 현종 황제의 18번째 아들인 壽王의 妃였으나, 황제 측근인 高力士에게 발견되어 궁중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고역사는 옥환으로 하여금 한번 出家하여 수왕과의 인연을 끊게 하고, 太眞이라는 여자 도사로 궁중에 들어와 황제를 모시게 하였다. 이가 바로 훗날의 양귀비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楊家의 딸이 직접 궁중의 부름을 받은 것으로 노래하고 있다. 2)深閨(심규):깊숙한 여자의 방. 3)天生麗質(천생려질):하늘이 만든 아름다운 모습. 自棄(자기):스스로 버리다.
廻眸一笑百媚生
눈동자를 굴려 한번 웃으면 백 가지 교태 생겨나1)
六宮粉黛無顔色
육궁의 화장한 미인들이 무색해졌다네.2)
春寒賜浴華淸池
봄 추위에 천자는 화청궁 온천에 목욕하기를 허락하셔3)
溫泉水滑洗凝脂
온천의 매끄러운 물로 그녀의 통통한 몸을 씻었다.4)
❙ 注 疏
1)廻眸(회모):뒤돌아 봄. 百媚生(백미셍):넘쳐흐를 듯한 매력이 생김. 2)六宮(육궁):궁중의 내전. 천자에게는 6개의 후궁이 있음. 粉黛(분대):분과 연지. 곧 화장한 미인. 無顔色(무안색):얼굴의 아름다움이 무색해짐. 3)華淸池(화청지):매해 겨울 황제가 추위를 피하는 아주 사치스러운 궁인 화청궁에 있는 온천. 4)凝脂:피부가 희고 매끈매끈한 것을 형용한 말. 詩經이래의 표현 방식이다.
侍兒扶起嬌無力
시녀들이 부축하여 일으킬 제 귀엽고 연약한 듯1)
始是新承恩澤時
비로소 이것이 천자의 사랑을 받게 된 때였네.2)
雲鬢花顔金步搖
구름 같은 머리카락, 꽃 같은 얼굴에 금보요는 한 들난들.3)
芙蓉帳暖度春宵
부용꽃 휘장 안은 따뜻한데 봄날 밤을 보낸다.4)
春宵苦短日高起
봄밤은 너무 짧아 천자는 해가 높이 뜬 뒤에야 일어났고5)
從此君王不早朝
그 뒤로 천자는 아침의 조회 불참했네.6)
❙ 注 疏
1)侍兒(시녀):시녀. 扶起(부기):손으로 부축해 일으킴. 嬌9교):야들야들한 상태. 2)恩澤(은택):천자의 애정. 3)雲鬢(운환):구름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 花顔(화안):꽃처럼 아름다운 얼굴. 金步搖(금보요):여자의 머리장식. 4)芙蓉帳(부용장):연꽃 모양을 수놓은 침실 휘장. 度春宵(도춘소):봄날의 하룻밤을 지냄. 5)苦短(고단):무척 짧음. 6)從此(종차):이로부터. 早朝(조조):아침 일찍 조정에 나가 정사를 돌보는 것.
承歡侍宴無閒暇
천자의 기분을 잘 맞춰 잔치 자리 시중에 한가한틈이 없어16)
春從春遊夜專夜
봄이면 봄놀이에, 밤이면 한 밤을 천자와 함께했네.
後宮佳麗三千人
후궁에는 삼천 명이나 되는 미인들이 있었건만
三千寵愛在一身
그 삼천 명이 받아야 할 총애를 그녀 혼자 차지했다.
❙ 注 疏
1)承歡:상대방의 기분을 맞춤.
金屋粧成嬌侍夜
황금 궁전에서 화장하고 교태롭게 모시는 밤17)
玉樓宴罷醉和春
옥루에서의 잔치도 끝나고 취한 마음은 봄날의 화기에 녹아들었다.18)
❙ 注 疏1)金屋(금옥):황금 궁전. 한 무제에 대해 기록한 漢武故事에 나오는 말로 천자의 사랑하는 여인이 사는 곳. 2)玉樓(옥루):玉은 美稱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누각. 醉和春(취화춘):술에 취하여 봄의 분위기 속에 잦아든다는 뜻.
姉妹弟兄皆列土
그녀의 자매 형제는 모두 귀족이 되어 영토를 차지하였고19)
可憐光彩生門戶
눈부신 광채가 온 집안에 생기더라.20)
遂令天下父母心
마침내 천하의 부모들의 마음은
不重生男重生女
아들 낳기 귀하잖고 딸 낳기를 귀중히 여기네.
❙ 注 疏1)列土(열사):중신이 되어 봉토를 받는 것. 사촌오빠인 양국충은 불량배 출신이었으나, 중신이 되고 마침내 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양귀비의 언니 셋은 볼품없는 여자들이었으나 각기 진국부인, 한국부인, 괵국부인이란 칭호가 주어졌고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2)可憐(가련):불쌍하다는 뜻이 아니라 깊이 감정을 움직이는 것은 모두 ‘가련’으로 표현한다. 오늘날의 우리말로 하면 오히려 ‘놀랍다, 예쁘다’의 뜻이 된다. 위기감이 도는 세간의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양귀비 일가의 번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이제 세상은 아들보다 딸을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驪宮高妻入靑雲
이궁은 높이 치솟아 푸른 하늘 구름 속에 닿았고21)
仙樂風飄處處聞
신선의 노래 바람타고 여기 저기서 들려온다.
緩歌慢舞凝絲竹
느릿한 노래와 고요한 춤이 管絃樂에 어울리니22)
盡日君王看不足
하루종일 천자는 그 가무를 구경해도 모자라네.
❙ 注 疏1)驪宮:서울 장안 동쪽 驪山에 있는 궁. 세상의 비난은 아랑곳하지 않았기에 이궁에서의 환락은 세상이 존재하는 한 영원할 것 같았다. 2)緩歌(완가):느릿한 가락의 노래. 慢舞:느릿하고 고요한 춤.
제2단
궁정의 향락하고 사치한 생활은 끝장나고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 도중 양귀비 목매어 죽이고 비탄에 빠짐.
漁陽鞞鼓動地來
어양에서 安祿山의 반란의 북소리가 땅을 울리며들려오고23)
驚破霓裳羽衣曲 예상우의곡은 놀라 중단되었다.24)
❙ 注 疏1)漁陽(어양):북경 근방의 지명. 어양은 반란군의 본거지인 북경 부근의 지명. 鞞鼓(비고):전쟁에서 사용하는 큰 북. 말 위에서 치는 북.
2)霓裳羽衣曲(예상우의곡):현종은 여러 악기를 뛰어나게 다루었다. 양귀비 역시 비파와 경에서는 내노라 하는 기생들을 무안케 했다. 특히 현종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자신이 직접 작곡한 이 예상우의곡이었다. 무지개의 치마와 날개깃의 저고리라는 뜻의 제목인 이 곡은 젊은 날의 현종이 여궤산이라는 명산을 보고 얻은 감흥을 작곡한 것이라고도 하고, 팔월 한가위에 나공원 이라는 도사의 인도로 달나라에 가서 노닐다가 들은 천상의 음악을 기억해 다시 작곡한 곡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마침내 파국은 오게 되었다. 북경을 중심으로 한 하북 일대의 군정 장관인 안녹산이 양국충의 폭정을 탓하는 명목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현종은 이 외국인 장군을 아주 신임하고 있었다. 안녹산도 현종이 죽을 때까지 모반을 보류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에 불만을 품은 혁명가들이 모여 들게 되고 혁명을 요구하자 마침내 755년 11월에 반란을 일으켜 동쪽 서울인 낙양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九重城闕煙塵生
구중궁궐에도 연기와 먼지가 피어오르고
千乘萬騎西南行
천만의 수레와 기병(천자 일행)은 촉나라를 향해서남쪽으로 피난간다.
翠華搖搖行復止
황제의 기는 흔들흔들 가다가 멎고 또 천천히 움직여25)
西出都門百餘里
장안 서쪽 백여 리 되는 마외(馬嵬)에 이르렀다.26)
六軍不發無奈何
호위병들 소란 피우며 출발하지 않으니 천자로서도 어쩔 수 없었고27)
宛轉蛾眉馬前死
갸름한 눈썹의 양귀비는 천자의 말 앞에서 죽임을당했다.28)
❙ 注 疏1)翠華(취화):물총새 깃털을 장식한 천자의 수레덮개와 깃발. 搖搖(요요):흔들흔들 바람에 나부낌. 2)都門(도문):장안성의 성문으로 연추문을 말함. 3)六軍(육군):천자의 근위병 여섯 부대. 4)宛轉蛾眉(완전아미):부나방 날개처럼 길고 동그란 눈썹.
반란군과 관군은 반년 가까이 대치했으나, 다음해인 756년 6월에는 수도 장안도 위험하게 되었다. 궁궐 주위에도 화재로 인한 연기와 재가 휘날리고, 성내에는 폭동이 일어나 약탈이 자행되며 약탈의 무리들이 궁중에도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종은 양귀비와 그 자매, 양국충, 그리고 황태자, 여러 명의 황자와 후손, 측근 장관 몇 명만을 데리고 서남쪽 성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천승만기라는 시인의 표현은 시적 표현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현종 일행이 비를 맞으며 장안을 탈출한 것은 6월 13일 새벽이었고, 그 날 밤은 금성현 광청에 도착하여 새우잠을 잤다고 ' 자치통감'과 기타 여러 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다음 날 금성현을 출발하여 장안 서쪽 50km 지점인 마외역이란 곳에 도착했을 때 이 장시 전반의 클라이막스인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마외역에 이르렀을 때 병사들이 갑자기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총리 대신 양국충의 책임이라며 반항의 기세를 보였다. 그들은 말 위에서 대화를 나누던 양국충을 참살하여 몸둥이를 여덟 갈래로 찢어 버리고, 그의 머리는 문에 매달았다. 병사들은 그 누이인 한국 부인과 진국 부인도 살해한 뒤, 함성을 지르면서 황제의 거처를 포위하였다.
현종은 이미 일흔 한 살의 나이었으나 침착함을 잃지 않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역문까지 가서 병사들을 타일렀다. 병사들의 책임자인 진현례가 나아와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귀비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야겠습니다’ 하니 황제는 귀비가 있는 건물로 걸어가다가 지팡이에 몸을 기대어 머리를 숙이고 서 있는데, 병사들의 함성소리는 더욱 높아가기만 했다. 힘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황제는 잠시 뒤 귀비와 함께 나와 전송하고 고역사로 하여금 데리고 가게 했다. 거기서 과히 멀지 않은 이름조차 모르는 절간, 그 앞 배나무에 걸려진 명주천이 양귀비의 목숨을 앗아갔다. 나이 서른 여덟.(719 - 7 5 6 년)현종과 함께 한 지 열 여섯 해 만이었다.
병사들의 고함소리는 그래도 멈출 줄을 몰랐다. 현종은 귀비의 시체를 안마당에 가져오게 하였다. 사례관 진현례는 가렸던 헝겊을 제치고 시체의 머리를 쳐들며 양귀비임을 확인했다. 이것은 <자치통감>과 <양태진 외전>에 기록되어 있다.
花鈿委地無人收
그녀의 꽃비녀가 땅에 버려져도 줍는 사람이 없었다.29)
翠翹金雀玉搔頭 물총새 날개깃,
공작 모양의 황금 머리장식, 옥비녀까지도.30)
君王俺面救不得
천자는 얼굴을 가리고 그녀를 구출하려해도 구하지 못하니
回看血淚相和流
돌아보는 얼굴에는 피눈물이 뒤섞여 흐른다.
黃埃散漫風蕭索
황색먼지 뽀얗고 바람은 쓸쓸히 부는데31)
雲棧縈紆登劍閣
구름까지 닿을 듯 높고 구불구불한 잔도로 검각산을 오른다.32)
❙ 注 疏1)花鈿:정교한 장식이 달린 머리 노리개. 委地(위지):땅에 버려진 채 버려져 있음. 2)翠翹(취교):물총새 날개를 본 딴 머리 노리개. 金雀(금작):황금으로 만든 공작모양의 노리개. 玉搔頭(옥소두):옥비녀. 3)黃埃(황애):황토먼지. 散漫(산만):풀썩 풀썩 흩어짐. 蕭索(소삭):쓸쓸한 상태. 4)雲棧: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에 놓은 나무다리를 棧道라고 함. 雲棧은 높은 곳에 놓아 마치 구름 속에 들어간 것 같은 잔도. 縈紆(영우):구불구불함. 劍閣(검각):사천성 북쪽에 있는 검문산. 이 산에 잔도가 있으며 험난하기로 유명하다.
이렇게 그 날 밤은 마외역에서 하룻밤을 지새고, 다시 서남쪽을 향하여 피난길에 올랐다. 목적지에 이르자면 험준하기로 유명한 검각산을 넘어야 했다. 거기는 구름까지 닿을 듯한 사다리(棧道)로 넘어야 했다. 때는 이미 초가을이어서 바람은 쓸쓸하게 불고 황사는 하늘을 뿌옇게 뒤덮고 있었다.
양귀비를 잃고서 마흔 닷새째 되는 날 현종 일행은 목적지 성도에 도착하여 그곳을 임시 궁전으로 삼았다.
峨眉山下少人行
아미산 기슭에는 지나는 사람도 거의 없고33)
旌旗無光日色薄
천자의 깃발도 빛이 바래고 햇빛도 흐릿하다.34)
蜀江水碧蜀山靑
촉나라 강물은 초록빛이요, 촉나라 산빛은 푸르른데35)
聖主朝朝暮暮情
천자는 아침마다 저녁마다 양귀비 그리는 정으로 가득하다.
行宮見月傷心色
임시 궁전에서 달을 바라보면 달빛으로 슬픔을 느 끼고36)
夜雨聞鈴腸斷聲 밤 비 속에서 단장의 슬픈 방울 소리를 듣는다.37)
❙ 注 疏1)峨眉山(아미산):성도 서남쪽에 있는 산이름. 2)旌旗(정기):천자의 거처에 세우는 깃발. 3)蜀(촉):성도가 있는 사천성. 그 색깔은 두 보가 노래했듯이 江은 푸르고(碧) 山도 푸르다(靑). 그러나 현종에게는 모든 것이 슬픔일 따름이다. 아침에는 아침의 슬픔이, 저녁에는 저녁의 추억이 있어 무엇을 보아도 그저 눈에 어리는 것은 양귀비의 모습뿐이었다. 4)行宮(행궁):천자가 피난가서 있는 임시 궁전. 5)夜雨聞鈴(야우문령):<양태진 외전>에 의하면 검문의 잔도를 건널 때 있었던 일로서, 빗속에 여기 저기에서 방울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때 역시 생각나는 것은 죽어 버린 양귀비 생각이었다. 현종은 방울소리를 모티브로 하여 양귀비를 애도하는 우림령곡(雨霖鈴曲)이라는 새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이 때 이미 현종은 황제의 지위에 있지 않았다. 양귀비가 자살한 다음날 거기까지 수행해 온 황태자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 현종은 자신을 상황(上皇)이라 칭하니, 이제 현종에게는 죽은 애인에 대한 그리움과 실패한 정치가로서의 회한, 그리고 권력마저 없어진 적막한 상실감에 빠져 하루하루 지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천지의 정세는 다시 뒤집히기 시작했다. 마외역에서 부친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황제가 된 황태자는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북쪽의 강대한 부족인 위구르 족과 협정을 맺고 원병을 청하니 각지의 관군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반란군의 수장인 안녹산이 그 아들에게 살해되었다. 757년 10월, 새 황제는 서울인 장안을 회복하고 성도에 있는 현종에게 사자를 보내니 1년 2개월 만에 현종은 다시금 장안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다시금 검각산의 잔도를 넘고 강을 건너고 양귀비가 죽은 마외역을 지나야 했는데, 현종은 차마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백거이 [白居易, 772~846]
중국 중당 기(中唐期)의 시인. 작품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 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一代)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했다. 주요 저서에는《장한가(長恨歌)》,《비파행(琵琶行)》등이 있다.
자 낙천(樂天). 호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본적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 출생.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유명하다.
807년 36세로 한림학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좌습유(左拾遺)가 되어 유교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정치 ·사회의 결함을 비판하는 일군의 작품을 계속 써냈다. 《신악부(新樂府) 50수》(805)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811년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814년 태자 좌찬선태부(左贊善太夫)에 임용되었으나, 이듬해에 일찍이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시가의 대상이 되었던 고급관료들의 반감을 사서 주장[九江]의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다. 그 곳에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문학에 대한 반성을 거쳐 명시 《비파행(琵琶行)》(816)을 지었다. 818년 중저우자사[忠州刺史]가 되었으며, 임기를 마치고 장안(長安)에 돌아오자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하여 822년 자진해서 항저우자사[杭州刺史]가 되었다. 항저우의 아름다운 풍광(風光)에 촉발되어 시작(詩作)은 계속되었고, 문학적 지기(知己)로서 트고 지내던 원진(元拂)과 만나게 되어 그것을 계기로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50권, 824)을 편집하였다. 825년 쑤저우자사[蘇州刺史]로 전임하였으나 827년에는 중앙으로 불리어 비서감(秘書監)에 임명되었다.
829년 58세가 되던 해 뤄양에 영주하기로 결심, 허난부[河南府]의 장관이 되었던 때도 있었으나 대개 태자보도관(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만의 직책에 자족하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하는 나날을 보냈다. 831년 원진 등 옛친구들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황혼을 의식하고 뤄양 교외의 룽먼[龍門]의 여러 절을 자주 찾았고 그 곳 향산사(香山寺)를 보수 복원하여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불교로 기울어졌다. 이에, 문학에 대한 충동도 번뇌로 보여서 참회하는 입장에서 ‘광언기어(狂言綺語)’의 문집인 《유백창화집(劉白唱和集)》 5권, 《백씨문집(白氏文集)》 60권을, 다시 65권, 67권을 834∼839년에 걸쳐 마음의 증표로서 연고 있는 사찰에 봉납하였다. 842년 71세 때 형부상서(刑部尙書)의 대우로 퇴직하였는데, 《백씨문집》은 70권에 이르렀다. 그 뒤로도 ‘광영(狂詠)’은 계속되었고 정부의 불교탄압정책을 풍자하는 작품을 통해서 자기 시대의 종말을 예감하고 인생의 마무리로서 75권의 전집을 편정(編定), 그것이 완성된 이듬해 그 생애를 마쳤다. 이 밖에 시문(詩文)을 짓는 편의를 위해서 고사성어를 모은 《백씨육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 30권도 있다.
그 긴 생애 동안에 그의 문학은 자주 변모하였다. 즉, 젊은 날의 낭만주의적인 경향은 지적인 빛을 띠며 이상주의적 입장으로 옮겨갔고, 문학의 존재의의를 주장하며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다가 이윽고 정치나 사회 가운데서 개인을 발견하여 자기의 내면을 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다시 개인에 비추어 널리 인간의 생활 자세를 추구하여 인생의 지혜를 표상하는 문학을 지향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정형(定型)의 한계적 조건하에서 언어의 온갖 기능을 다 구사하는 ‘창화(唱和)’라는 새로운 형태의 창조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 속에 일관하고 있던 것은, 문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며 생활의식이나 생활감정이 뒷밤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었다. 따라서 제재는 경험적이고 언어는 일상성을 띠며, 발상은 심리의 자연에 따르고,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一代)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하였다.
그의 생존시에 이미 그의 시는 민중 속에 파고들어, 소치는 아이나 말몰이꾼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고, 배나 절의 기둥이나 벽에 써붙여지기도 하였으며, 멀리 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는 한국에도 일찍부터 전해져 널리 애송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백씨장경집》 75권 가운데 71권이 있고, 《백향산시집》 40권도 있다. 현존하는 작품수는 3,800여 수이고, 그 중에서 《비파행》 《장한가》 《유오진사시(遊悟眞寺詩)》는 불멸의 걸작이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72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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