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경주시 경주터널 진입 직전 왼쪽 오봉산 기슭에 위치한 여근곡 사진 모음.

맨아래 사진은 융기된 부분에 서 있는 소나무가 곱게 물든 갈잎을 배경으로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과거보러 가는 사람들은 오봉산 반대편으로 고개를 외면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 아래 마을 사람들은 유사음으로 '이근곡'에 산다고 말하고, 구멍가게 간판에도 '이근곡' 표기가 보였었다.

10여 년 전엔 여근곡이 화재를 만나 홀랑 불타버려 검은 재에 덮인 적도 있었다.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출전]삼국유사 권2.


제 27대 덕만의 시호는 선덕왕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년(632년)에 왕위를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가지 있었다.

그 첫째가 당 태종이 홍색,자색,백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석되를 보내왔다.

왕이 그 그림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씨를 뜰에 심도록 하였는데 과연 꽃이 피었따가 떨어질 때까지 왕의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둘째는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인대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3-4일 동안이나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의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생각하여 왕께 고한 즉 왕은 급히 각간 알천, 필탄 등을 시켜

정병 2천을 뽑아 속히 서교로 나아가 여근곡을 수색하면 필히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명씩을 거느리고 서교에 가서 물으니 부산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의 군사 5백명이 거기에 와서 숨어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백제의 장군 오소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밑에 숨어 있으므로 이를 포위하고 활로 쏘아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셋째는 왕이 아무런 병도 없는데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인즉,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를 지내도록 하여라."

여러 신하들이 그 곳의 위치를 몰라 물으니 왕이 말하기를

"낭산 남쪽이다." 하였다.

그 달의 그 날에 이르니 과연 죽었으므로 신하가 낭산의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이 사천왕사를 왕의 무덤아래에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당시에 여러 신하가 왕이 죽기 전에 어떻게 모란꽃과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일이 그렇게

될 줄을 알았는가를 묻자, 왕이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당나라의 임금이

나의 배우자가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그리고 개구리가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이란 곧 여자의 음부를 말하는 것이다.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니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말함이다.

또한 남근이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죽게 되므로 잡기가 쉬운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러 신하가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감복을 하였다.

꽃을 삼색으로 보냄은 선덕, 진덕, 진성으로 당제(唐帝)도 헤아림의 밝음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이 영묘사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별기에서 이르기를

이 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한다.


[원문]

#三國遺事1卷-1紀異-善德王知幾三事-00

善德王知幾三事.

#三國遺事1卷-1紀異-善德王知幾三事-01

第二十七, 德曼[一作萬], 諡善德女大王, 姓金氏, 父眞平王. 以貞觀六年壬辰卽位, 御國十六年, 凡知幾有三事.

#三國遺事1卷-1紀異-善德王知幾三事-02

初, 唐*<大,太>宗送畵牧丹, 三色紅紫白, 以其實三升, 王見畵花曰: “此花定無香.” 仍命種於庭, 待其開落. 果如其言. 二, 於靈廟寺玉門池, 冬月衆蛙集鳴三四日, 國人怪之, 問於*<旺,王>. *<王>急命角干閼川弼呑等, 鍊*{揀}精兵二千人, 速去西郊, 問女根, 谷必有賊兵, 掩取殺之. 二角干旣受命, 各率千人問西郊, 富山下果有女根谷, 百濟兵五百人, 來藏於彼, *<幷,並>取殺之, 百濟將軍*<于,亐>召者, 藏於南山嶺石上, 又圍而射之殪. 又有後兵一千二百人來, 亦擊而殺之, 一無孑遺. 三, 王無恙時, 謂*<群,羣>臣曰: “朕死於*其{某}年某月日, 葬我於忉利天中.” 群臣罔知其處, 奏云: “何所?” 王曰: “狼山南也.” 至其月日, 王果崩, 群臣葬於狼山之陽. 後十餘年, 文*虎{武}大王創, 四天王寺於王墳之下. 佛經云: 四天王天之上, 有忉利天, 乃知大王之靈聖也.

#三國遺事1卷-1紀異-善德王知幾三事-03

當時群臣啓於王曰: “何知花蛙二事之然乎?” 王曰: “*<畵,畫>花而無蝶, 知其無香, 斯乃唐帝欺*{譏}寡人之無耦也. 蛙有怒形, 兵士之像, 玉門者, 女根也, 女爲陰也, 其色白, 白西方也, 故知兵在西方, 男根入於女根, 則必死矣, 以是知其易捉.” 於是群臣皆服其聖智. 送花三色者, 蓋知新羅有三女王而然耶, 謂善德, 眞德, 眞聖是也, 唐帝以有懸解之明. 善德之創靈廟寺, 具載良志師傳, 詳之. 別記云: 是王代, 鍊石築瞻星臺.

 

 

[사진](상)런던 대영박물관 전경(前景). (하)대영박불관의 대리석 여인상

 

[주]최치원 설화 또는 쌍녀분 설화로 일컬어지는 이 설화는 해괴망측( )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곧, 최치원(崔致遠)이 무덤에서 나온 두 여자와 시를 주고받고 하룻밤 정을 나눈 인귀교환설화(人鬼交歡說話)가 기이함의 특징이다. 인귀교환설화란 살아 있는 사람과 환생한 혼령이 육체적 관계를 맺는 기이한 이야기다. 명 구우의 전등신화, 김시습의 금오신화(현존5편)에는 이 설화 유형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수이전>(소실), <태평통재(太平通載)> 권68 등에 전하는데 <대동운부군옥>에는 <선녀홍대>로 요약하여 실었다.

김현양 외, <수이전일문>, 박이정, 1996.

위의 책은 수이전 작품으로 확인된 설화들을 수집하여 번역하였다.

 

 

[설화] 최치원 [쌍녀분] 설화 요약

최치원은 12세에 당에 유학하여 과거에 장원하고 율수현위(凓水縣尉)가 되었다. 어느 날 율수현 남계에 있는 초현관에 놀러갔다가 쌍녀분이라는 무덤이 석문시(石門詩)를 지어주고 외로운 혼백을 위로했다. 시를 짓고 관에 돌아오니 달이 맑고 바람이 좋은데 문득 아름다운 여자가 손에 붉은 주머니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는 시를 지어준 무덤에 살고 있는 팔낭자(八娘子)와 구낭자(九娘子)가 보답하는 선물이라며 글귀가 쓰인 글에 그와 가까이 심사를 터놓고자 하는 뜻을 전했으므로 기뻐하여 취금이라는 그 여자에게 답시를 써보냈다.

취금이 시를 가지고 사라지자 잠시 후 문득 향내가 나며 두 여자가 손에 연꽃을 들고 들어왔다. 그가 꿈인가 놀라고 기뻐하며 시를 짓고 어디 사는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들은 율수현 초성의 향호(鄕豪)인 장씨의 딸로서 언니가 18세, 아우가 16세였을 때 각각 소금장수와 차장수에게 정혼하였는데 두 낭자는 이 혼처가 불만스러워 우울하게 보내다가 요절하였다 하며 오늘 최치원을 만나 심오한 이치를 논하게 되어 다행이라 하였다.

그가 무덤에 묻힌 지 오래인데 어찌 지나는 영웅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붉은 소매의 여인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비루한 사람들뿐이었는데 오늘 다행히 수재(秀才)를 만나 기쁘다 하였다. 세 사람은 서로 술을 권하며 달과 바람을 시제 삼아 시를 짓고 시비 취금의 노래를 들으며 즐겼다. 최치원이 좋은 짝을 만났으니 인연을 이룸이 어떠하냐고 하여 세 사람은 한 이불 아 래 견권지정(繾綣之情)을 나누었다. 날이 새자 두 낭자가 놀라며 천년의 한을 풀었다고 사례하며 시를 지어주는 바람에 최치원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뒷날 이곳에 오게 되면 거친 무덤을 살펴 달라 부탁한 후 두 낭자가 사라졌다. 그는 무덤에 돌아와 두 사람을 애도하는 장시를 지었다.

뒤에 우리나라에 돌아와서는 여러 곳을 주유하다가 마지막에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였다.

 

 

[국역]최치원(崔致遠) 설화 /쌍녀분(雙女墳) 설화

최치원은 자(字)가 고운(孤雲)으로 12살에 서쪽으로 당나라에 가서 유학했다. 건부(乾符) 갑오년(874)에 학사 배찬(裵瓚)이 주관한 시험에서 단번에 괴과(魁科)에 합격해 율수현위를 제수받았다, 일찍이 현 남쪽에 있는 초현관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관 앞의 언덕에는 오래된 무덤이 있어 쌍녀분(雙女墳)이라 일컬었는데 고금의 명현(名賢)들이 유람하던 곳이었다. 치원이 무덤 앞에 있는 석문에다 시를 썼다.

 

어느 집 두 처자 이 버려진 무덤에 깃들어 쓸쓸한 지하에서 몇 번이나 봄을 원망했나. 그 모습 시냇가 달에 부질없이 남아있으나

이름을 무덤앞 먼지에게 묻기 어려워라.

고운 그대들 그윽한 꿈에서 만날 수 있다면

긴긴 밤 나그네 위로함이 무슨 허물이 되리오.

고관(孤館)에서 운우(雲雨)를 즐긴다면

함께 낙천신(洛川神)을 이어 부르리.

 

쓰기를 마치고 관(館)으로 돌아왔다. 이 때 달이 밝고 바람이 맑아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거닐다 홀연 한 여자를 보았다. 작약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의 그 여인은 손에 붉은 주머니를 쥐고 앞으로 와서 말하였다.

“팔낭자와 구낭자가 수재께 말을 전하랍니다. 아침에 특별히 어려운 걸음 하시고 거기다 좋은 글까지 주셨으니, 각각 화답하여 받들어 바친다 하셨습니다.” 공이 돌아보고 놀라며 어떤 낭자인지 재차 물었다.

여자가 말했다.

“아침에 덤불을 헤치고 돌을 쓸어내어 시를 쓰신 곳이 바로 두 낭자가 사는 곳입니다.” 공이 그제서야 깨닫고 첫 번째 주머니를 보니, 이는 팔낭자가 수재에게 화답한 시였다. 그 시에.

 

죽은 넋 이별의 한이 외로운 무덤에 부쳤어도 예쁜 뺨 고운 눈썹엔 오히려 봄이 어렸구나. 학 타고 삼도(三島)가는 길 찾기 어려워 봉황비녀 헛되이 구천(九泉)의 먼지로 떨어졌네. 살아있을 당시는 나그네를 몹시 부끄러워 하였는데

오늘은 알지 못하는 이에게 교태를 품도다.

몹시 부끄럽게도 시(詩)의 글귀가 제 마음 알아주시니

한번 고개 늘여 기다리고 한편으론 마음 상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어서 두 번째 주머니를 보니 바로 구낭자의 것이었다. 그 시에.

 

왕래하는 이 그 누가 길가의 무덤 돌아보리 난새거울과 원앙이불엔 먼지만 일어나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고」 꽃 폈다 지니 세상은 봄이로구나. 늘 진녀(秦女)처럼 세상을 버리기 원해 임희(任姬)의 사랑 배우지 않았도다. 양왕(襄王)을 모시고 운우(雲雨)를 나누려 하나 이런 저런 걱정에 마음 상하네.

 

라고 하였다. 또 뒤 폭에.

 

이름을 숨기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외로운 혼백이 세속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본심을 말하려 하니 잠시 가까이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쓰여 있었다. 이미 아름다운 시를 보고 자못 기뻐한 공은 그 여자에게 이름을 물었더니, ‘취금(翠襟)’이라고 했다. 공은 취금이 맘에 들어 추근거렸다. 취금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수재께서는 답장을 주시면 되련만 공연히 귀찮게 하십니다.”

치원이 시를 지어 취금에게 주었다.

 

우연히 경솔한 글을 오래된 무덤에 썼으나 선녀가 세상일 물을 줄 생각이나 했겠소. 취금(翠襟)조차 구슬꽃같은 아름다움을 띠었으니, 붉은 소매 그대들은 응당 옥나무에 어린 봄기운을 품었겠지요. 성명을 숨겨서 세속 나그네 속이시고 공교한 시로 시인을 괴롭히시는군요. 애가 끊어지도록 만나 즐겁게 웃기를 천영(千靈) 만신(萬神)께 기원하나이다.

 

그리고 끝에.

 

파랑새가 뜻밖의 일을 알려주어 그리움에 두 줄기 눈물 흐르네. 오늘 밤 선녀같은 그대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남은 인생 땅 속으로 들어가 구하리.

 

라고 썼다. 취금이 시를 얻고 회오리바람처럼 빠르게 가버리자 치원은 홀로 서서 슬프게 읊조렸다. 오래도록 소식이 없어서 짧은 노래를 읊조렸는데 마칠 때쯤 해서 갑자기 향기가 나더니 한참 후에 두 여자가 나란히 나타났다. 정녕 한 쌍의 투명한 구슬 같았고 두 송이 단아한 연꽃 같았다. 치원은 마치 꿈인 듯 놀라고 기뻐 절하면서 말하였다.

“치원은 섬나라의 미천한 태생이고 속세의 말단 관리라, 어찌 외람되게 선녀들이 범부(凡夫)를 돌아볼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냥 장난으로 쓴 글인데 문득 아름다운 발걸음을 드리우셨군요.”

두 여자가 살짝 웃을 뿐 별 말이 없으니, 치원이 시를 지었다.

 

아름다운 밤 다행히 잠깐 만나뵙건만 어찌하여 말없이 늦은 봄을 마주 대하십니까. 진실부(秦室婦)라 생각했을 뿐 원래 식부인(息夫人)인 줄 몰랐구려.

 

이때 붉은 치마의 여자가 화내며 말하였다. “담소를 나눌 줄 생각했더니 경멸을 당했습니다. 식규(息嬀)는 두 남편을 좇았지만 저희는 아직 한 남자도 섬기지 못했습니다.”

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부인은 말을 잘하지 않지만 말하면 반드시 이치에 맞는군요.”

두 여자가 모두 웃었다.

치원이 물었다.

“낭자들은 어디에 사셨고, 친족은 누구인지요?”

붉은 치마의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와 동생은 율수현의 초성향(楚城鄕) 장씨(張氏)의 두 딸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현의 관리가 되지 못하고 지방의 토호(土豪)가 되어 동산(銅山)처럼 부를 누렸고 금곡(金谷)처럼 사치를 부렸습니다. 저의 나이 18세, 아우의 나이 16세가 되자 부모님은 혼처를 의논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금장사와 정혼하고 아우는 차(茶)장사에게 혼인을 허락하셨습니다. 저희들은 매번 남편감을 바꿔달라고 하고 마음에 차지 않았다가 울적한 마음이 맺혀 풀기 어렵게 되고 급기야 요절하게 되었습니다. 어진 사람 만나기를 바랄 뿐이오니 그대는 혐의를 두지 마십시오.”

치원이 말했다.

“옥같은 소리 뚜렷한데 어찌 혐의를 두겠습니까?”

이어서 두 여자에게 물었다.

“무덤에 깃든 지 오래되었고 초현관에서 멀지 않으니, 영웅과 만나신 일이 있을 터인데 어떤 아름다운 사연이 있었는지요?”

붉은 소매의 여자가 말했다.

“왕래하는 자들이 모두 비루한 사람들뿐이었는데, 오늘 다행히 수재를 만났습니다. 그대의 기상은 오산(鼇山)처럼 빼어나서 함께 오묘한 이치를 말할 만합니다.

치원이 술을 권하며 두 여자에게 말했다.

“세속의 맛을 세상 밖의 사람에게 드릴 수 있는지요?”

붉은 치마의 여자가 말했다.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좋은 술을 먹게 되었는데 어찌 함부로 사양하고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술을 마시고 각각 시를 지었으니 모두 맑고 빼어나 세상에 없는 구절들이었다. 이때 달은 낮과 같이 환하고 바람은 가을날처럼 맑았다. 그 언니가 곡조(曲調)를 바꾸자고 하였다.

“달로 제목을 정하고 풍(風)으로 운(韻)을 삼지요.” 이에 치원이 첫 연을 지었다.

 

금빛 물결 눈에 가득 먼 하늘에 떠있고 천리 떠나온 근심은 곳곳마다 한결 같구나.

 

팔랑이 읊었다.

 

수레바퀴 옛길 잃지 않고 움직이며」 계수나무꽃 봄바람 기다리지 않고 피었네

 

구랑이 읊었다.

 

둥근 빛 삼경(三更) 너머 점점 밝아오는데 한번 바라보니 이별 근심에 가슴만 상하는구나.

 

치원이 읊었다.

 

하얀 빛깔 펼쳐질 때 비단 장막 열리고 홀무늬 비추는 곳 따라 구슬 창 통과하네.

 

팔랑이 읊었다. 인간세상과 멀리 떨어져 애가 끊어질 듯 지하의 외로운 잠에 한(恨)은 끝도 없어라.

 

구랑이 읊었다.

 

늘 부러워했네. 상아가 계교 많아

향각(香閣) 버리고 선궁(仙宮)에 갔음이여.

 

공이 더욱더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러한 때 앞에 연주하는 음악이 없다면 좋은 일을 다 누렸다 할 수 없겠지요.”

이에 붉은 소매의 여자가 하녀 취금을 돌아보고서 치원에게

“현악기가 관악기만 못하고 관악기가 사람 소리만 못하지요. 이 애는 노래를 잘 부른답니다. ”

라 하고 소충정사(訴衷情詞)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취금이 옷깃을 여미고 한 번 노래하니 그 소리가 청아해서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세 사람은 얼큰히 취했다. 치원이 두 여자를 꼬여 말하였다.

“일찍이 노충(盧充)은 사냥을 갔다가 홀연 좋은 짝을 얻었고, 완조(阮肇)는 신선을 찾다가 아름다운 배필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그대들이 허락하신다면 좋은 연분을 맺고 싶습니다.” 두 여자가 모두 허락하며 말하였다. “순(舜)이 임금이 되었을 때 두 여자가 모시었고 주랑(周郞)이 장군이 되었을때도 두 여자가 따랐지요. 옛날에도 그렇게 했는데 오늘은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치원은 뜻밖의 허락에 기뻐하였다. 곧 정갈한 베개 셋을 늘어놓고 새 이불 하나를 펴놓았다. 세 사람이 한 이불 아래 누우니 그 곡진한 사연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치원이 두 여자에게 장난스레 말하였다. “규방에 가서 황공(黃公)의 사위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무덤가에 와서 진씨(陳氏)여자를 껴안았도다. 무슨 인연으로 이런 만남 이루었는지 알지 못하겠구나.” 언니가 시를 지어 읊었다.

 

그대의 말 들으니 어질지 못하군요. 인연이 그렇다면 그 여자와 자야했을 것을

 

시를 마치자마자 동생이 그 뒤를 이었다.

 

뜻밖에 풍광한(風狂漢)과 인연을 맺어

지선(地仙)을 모욕하는 경박한 말을 들었구나.

 

공이 화답하여 시를 지었다.

 

오백 년만에 비로소 어진 이 만났고 또 오늘 밤 함께 잠자리를 즐겼네. 고운 그대들 광객(狂客)을 가까이 했노라 한탄하지 말라 일찍이 봄바람에 적선(謫仙)이 되었었으니.

 

잠시 후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자가 모두 놀라며 공에게 말했다. 」 “즐거움이 다하면 슬픔이 오고 이별이 길어지면 만날 날 가까워지지요. 이는 인간세상에서 귀천(貴賤)을 떠나 모두 애달파하는 일인데 하물며 삶과 죽음의 길이 달라 늘 대낮을 부끄러워하고 좋은 시절 헛되이 보냄에랴! 다만 하룻밤의 즐거움을 누리다 이제부터 천년의 길고 긴 한을 품게 되었군요. 처음에 동침의 행운을 기뻐했는데 갑자기 기약없는 이별을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두 여자가 각각 시를 주었다.

 

별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물시계 다하니

이별의 말 하려하나 눈물이 먼저 줄줄 흐르네. 이제부턴 천년의 긴 한만 맺히고 깊은 밤의 즐거움 다시 찾을 기약 없어라.

 

다른 시에 읊었다.

 

지는 달빛 창에 비추자 붉은 뺨 차가와지고

새벽 바람에 옷깃 나부끼자 비취 눈썹 찌푸리네 그대와 이별하는 걸음걸음 애간장만 끊어지고 비 흩어지고 구름 돌아가버려 꿈에 들어가기도 어려워라.

 

치원은 시를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두 여자가 치원에게 말하였다. “혹시라도 다른 날 이곳을 다시 지나가게 되신다면 황폐한 무덤을 다듬어 주십시오.” 말을 마치자 곧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치원은 무덤가로 가서 쓸쓸히 거닐면서 읊조렸다. 깊이 탄식하고 긴 시를 지어 자신을 위로하였다.

 

풀 우거지고 먼지 덮혀 캄캄한 쌍녀분 옛부터 이름난 자취 그 누가 들었으리. 넓은 들판에 변함없이 떠있는 달만 애달프고, 부질없이 무산(巫山)의 두 조각 구름 얽혀있네. 뛰어난 재주 지닌 나 한스럽게 먼 지방의 관리되어 우연 고관(孤館)에 왔다 조용한 곳 찾았네. 장난으로 시귀를 문에다 썼더니 감동한 선녀 밤에 찾아왔도다. 붉은 비단 소매의 여인, 붉은 비단 치마의 여인 앉으니 난초향기 사향향기 스미네 비취 눈썹 붉은 뺨 모두 세속을 벗어났고, 마시는 모습과 시상(詩想)도 뛰어나네. 지고 남은 꽃 마주하여 좋은 술 기울이고 쌍으로 비단 같은 손 내밀며 묘하게 춤을 추네. 미친 내 마음 이미 어지러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름다운 그대들이 허락할지 시험해 보았네. 미인은 얼굴을 오래도록 숙이고 어쩔 줄 몰라 반쯤은 웃는 듯 반쯤은 우는 듯하네. 낯이 익자 자연히 마음은 불같이 타오르고, 뺨은 진흙처럼 발개져 취한 듯하네. 고운 노래 부르다 기쁨 함께 누리니 이 아름다운 밤 좋은 만남은 미리 정해진 것이었으리. 사녀(謝女)가 청담한 것 듣고, 반희(班姬)가 고운 노래 뽑는 것 보았도다. 정이 깊어지고 마음이 살뜰해져 친해지기 시작하니 바로 늦은 봄날 도리꽃 피는 시절이구나. 밝은 달빛 베개맡 생각 곱으로 더하고, 향기로운 바람 비단같은 몸 끌어 당기는구나. 비단 같은 몸 베갯맡 상념이여. 그윽한 즐거움 다하지 않았는데 이별의 근심 왔네. 몇 가락 여운의 노래 외로운 혼 끊고, 한 가닥 스러지는 등잔불 두 줄기 눈물 비추네. 새벽녘 난새와 학은 각각 동서로 흩어지고, 홀로 앉아 꿈인가 여겨보네. 깊이 생각하여 꿈인가 하나 꿈은 아니라, 시름겨워 푸른 하늘에 떠도는 아침 구름 마주 대하네. 말은 길게 울며 가야할 길 바라보나, 광생(狂生)은 오히려 다시 버려진 무덤 찾았도다. 버선 발 고운 먼지 속으로 걸어 나오지 않고, 아침 이슬에 흐느끼는 꽃가지만 보았네. 창자 끊어질 듯 머리 자주 돌리나, 저승 문 적막하니 누가 열리오, 고삐 놓고 바라볼 때 끝없이 눈물 흐르고, 채찍 드리우고 시 읊는 곳 슬픔만 남아있도다. 늦봄 바람 불고 늦봄 햇살 비추는데 버들개지 어지러이 빠른 바람에 나부끼도다. 늘 나그네 시름으로 화창한 봄날 원망할 터인데. 하물며 이렇게 이별의 슬픔 안고 그대들 그리워함에랴. 인간 세상의 일 수심의 끝이 없구나. 비로소 통하는 길을 들었는데 또 나루를 잃었도다.

잡초 우거진 동대(銅臺)1)

엔 천년의 한 서려 있고, 꽃핀 금곡(金谷)은 하루 아침의 봄이로구나. 완조(阮肇)와 유신(劉晨)은 보통사람이고, 진황제(秦皇帝)와 한무제(漢武帝)도 신선이 아니네. 옛날의 아름다운 만남 아득하여 쫓지 못하고, 지금까지 남겨진 이름 헛되이 슬퍼하는구나. 아득히 왔다가 홀연히 가버리니, 비바람 주인 없음을 알겠네.

내가 이곳에서 두 여인을 만난 것은

양왕(襄王)이 운우(雲雨)를 꿈 꾼것과 비슷하도다. 대장부 대장부여! 남아의 기운으로 아녀자의 한을 제거한 것 뿐이니, 마음을 요망스런 여우에게 연연해 하지 말아라.

 

나중에 최치원은 과거에 급제하고 고국으로 돌아오다 길에서 시를 읊었다.

 

뜬 구름 같은 세상의 영화는 꿈 속의 꿈이니, 하얀 구름 자욱한 곳에서 이 한 몸 좋이 깃들리라.

 

이어서 물러가 아주 속세를 떠나 산과 강에 묻힌 스님을 찾아갔다. 작은 서재를 짓고 석대(石臺)를 찾아서 문서를 탐독하고 풍월을 읊조리며 그 사이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남산(南山)의 청량사(淸凉寺). 합포현(合浦縣)의 월영대(月影臺), 지리산의 쌍계사(雙溪寺), 석남사(石南寺), 묵천석대(墨泉石臺)에 모란을 심어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니, 모두 그가 떠돌아 다닌 흔적이다. 최후에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여 그 형인 큰 스님 현준(賢俊) 및 남악사(南岳師) 정현(定玄)과 함께 경론(經論)을 탐구하여 마음을 맑고 아득한 데 노닐다가 세상을 마쳤다.

 

아래 블로그에는 쌍녀분 설화의 전승과정이 소개되었다.

http://blog.yonhapnews.co.kr/789678/post/6404/

 

참고로 다음 내용은 쌍녀분에 대한 설명을 옮긴 것.

 

① 당 天寶년간(747)에 쌍녀분 조성, 율수지역에 쌍녀분 내력 전승


② 최치원이 874년경에 招賢館에 갔다가 쌍녀분을 목격하고 작품 앞의 石門詩와 뒤의 長詩를 지었으리라 추정.


③ 宋, 張敦이 찬(1160), <雙女墓>條 [墳陵門 第十三], {六朝事迹編類}


雙女墳記曰, 有鷄林人崔致遠者, 唐乾符中補율水尉, 嘗憩于招賢館. 前岡有塚, 號曰雙女墳. 詢其事迹, 莫有知者, 因爲詩以弔之. 是夜感二女至, 稱謝曰 “兒本宣城郡開化縣馬陽鄕, 張氏二女, 少親筆硯, 長負才情, 不意爲父母匹于鹽商小竪, 以此憤 而終. 天寶六年 同葬於此.” 宴語至曉而別. 在 溧水縣南一百一十里.


④ 박인량(?-1096)이 문종34년(1080)에 宋使로 浙江에 이르렀고(소흥에서 오자서묘를 시로 읊음), 지금의 남경을 위시하여 강소성 지역을 여행함(최치원이 편력한 지역과 비슷) 쌍녀분 유적 또는 최치원의 시를 접하고 이를 토대로 <최치원>을 지었으리라고 추측.


⑤ 박인량이 {수이전}을 편하면서 여타 설화에 <최치원>을 포함하여 편찬


⑥ 成任(1421-1484)이 {太平通載}에 최치원 전재.


⑦ 權文海(1534-1591)가 <최치원>을 <仙女紅袋>로 축약 {大東韻府群玉}에 수록


⑧ 이인영과 최남선이 {태평통재}의 <최치원>을 활자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인영이 소장하고 있던 {태평통재} 잔권은 한국전쟁 중에 소재 묘연

 

또, 아래 블로그에는

http://blog.daum.net/ansdufrhd/10603101

중국 장쑤현 양저우 항구에 세운 최치원 기념관과 쌍녀분 비석의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1]강화도 고려산 진달래 군락[펌]

[사진2]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의 강남고교 교정의 벚꽃 꽃구름.

[사진3]강남고등학교 홈피에서 퍼옴.

[은자주]08년도에 어림짐작으로 갔을 땐 찐달래가 졌다는 음식점 주인의 말을 믿고 배를 타고 석모도에 갔었고, 09년도에는 인터넷에 사진이 뜬 것을 보고 달려가 고려산 진달레를사진에 담았다. 아래 주소창 이하 12꼭지의 진달래 사진이 그것이다.

http://blog.paran.com/kydong/31456938

글의 구성 앞의 글 참조

http://blog.paran.com/kydong/24772324

수로부인

水路夫人

- 삼국유사, 기이 제2

[가]

聖德王代 純貞公赴江陵太守(今溟州) 行次海汀晝饍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을 할 때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傍有石障 如屛臨海

그 곁에 있는 바위의 봉우리가 바다를 병풍처럼 둘러쳐서 굽어보고 있었는데

高千丈 上有躑躅花盛開.

그 높이는 천장(千丈)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만발하였다.

公之夫人水路見之 謂左右曰

공의 부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좌우를 둘러보고 말을 하였다.

「折花獻者其誰?」

“어느 누가 저 꽃을 꺾어다 나에게 주겠는가?”

從者曰「非人跡所到.」

시종:“저 곳은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

皆辭不能.

모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傍有老翁牽牸牛而過者

그 때 한 노옹이 암소를 몰고 그 곳을 지나던 이가

聞夫人言 折其花 亦作歌詞獻之.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 가지고 와 노래를 지어 바쳤다.

其翁不知何許人也.

그 노인이 어디 사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설화에서 "不知何許人"은 대개 세속을 초월하여 신성한 경지에 이른 사람을 지시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나]

使行二日程 又有臨海亭.

사자가 이틀을 순행하니 또 임해정이 있었다.

晝饍次 海龍忽攬夫人入海.

점심을 먹을 때, 해룡이 홀연히 부인을 납치하여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公顚倒躃地 計無所出.

공이 땅을 치며 주저앉았으나 아무런 계책이 없었다.

又有一老人告曰

이 때 한 노인이 나타나서 말했다.

「故人有言 『衆口鑠金』

“옛사람이 말하기를 중구삭금(衆口鑠金)이라 하였으니

今海中傍生 何不畏衆口乎?

바다 속의 짐승이 어찌 여러 사람의 염원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宜進界內民 作歌唱之

마땅히 계내(界內)의 사람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以杖打岸 則可見夫人矣.」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公從之. 龍奉夫人出海獻之.

공이 그 말을 좇아 행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바치었다.

公問夫人海中事.

공이 부인에게 바닷속의 일을 물었다.

曰「七寶宮殿 所饍甘滑香潔 非人間煙火.」

부인:“7보(寶)로 장식된 궁전에 음식은 달고 향기로운 것이 인간의 음식은 아니었습니다.”

此夫人衣襲異香 非世所聞.

이 부인의 옷에 기이한 향기가 풍겼는데 세상에서 들어보지 못한 향기였다.


[다]

水路姿容絶代 每經過深山大澤 屢被神物掠攬.

수로부인은 그 용모가 세상에서 견줄 이가 없었으므로 번번히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에는 자주 신물(神物)들에게 납치당했다.


[라]

衆人唱海歌 詞曰

여러 사람들이 <해가(海歌)>를 불렀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 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 남의 부인을 앗아간 죄가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 만약에 거역하여 내놓지 않는다면

入網捕掠燔之喫』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 먹으리.


老人獻花歌曰,

<노인헌화가>는 다음과 같다.

紫-布-岩乎-辺-希

執-音-乎-手-母-牛-放 -敎-遣

吾-肹-不-喩-慚-肹-伊-賜-等

花-肹-折-叱-可-獻-乎-理-音-如


[양주동역]


딛배 바회 가해         자줏빛 바위 끝에

자바온손 암쇼 노해시고 잡으온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흘 안디 붓그리샤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곶흘 것가 받자보리이다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獻花歌 해설

[사진]강화도 고려산 진달래 군락[펌]. 무거운 사진기 메고 나도 이런 사진 찍고 시퍼!



[사진2]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의 강남고교 교정의 벚꽃이 꽃구름을 이루었네요.

<그녀는 예뻤다>


어제는 아차산을 산행했다. 145,000볼트 고압선을 지나 용마산에도 올랐다. 나는 정상에서 용마역쪽으로 하산했다. 하산길엔 온통 가파른 바윗길이어서 발에 한참 동안 흙을 묻히지 않았더니 신선이 되는 게 아닌가,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느낌이었다.

웬지 지난 해 봄날 지천으로 피었던 강화도 고려산의 진달래 군락지가 그리워졌다. 그날은 바다안개가 자욱히 차올라 원거리를 조망할 수 없는데다 선명한 화면을 만들겠다고 자동카메라의 서투른 조작이 화근이 되어 그날 찍은 사진이 몽땅 먼 옛날의 추억처럼 아득하고 희미하기만 했다.

새로난 대명포구앞 다리를 빠져나오기 직전에, 길상면 온수리의 강남고등학교의 교정 둘레를 가득 메운 벚꽃 군락을 만난 건 뜻밖의 수확이었다. 낭만, 몽환,환상 등 감상적 단어들로 뇌리를 채우게 하는 풍경이었다. 벚꽃나무 띠가 운동장 둘레를 온통 빼곡히 감싸 안았는데, 학교 건물 앞 야트막하게 경사진 언덕에줄지어 서 있는 십여그루남짓한 나무들과 운동장 주위의 십여 그루는 수령이 거의 50년은 넘어 보였다. 검은 나무둥치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하이얀 벚꽃 꽃잎의 무리가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오월 햇살을 받아 화사하게 빛났다.

금년 진달래 축제땐 위의 사진 같은 그림을 몇 장 남기고 싶다.

교정의 환상적 벚꽃도....


진달래 하면 소월의 <진달래꽃>에 나오는 약산 동대지만 나는 본 적이 없으니
유사이래 가장 예뻤던 신라 성덕왕대의 수로 부인을 생각한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대잖아요.---


삼국유사의 수로부인(水路夫人)조 강독을 마치고, "이 글의 주제는?" 하고 물으면 별 반응이 없다가 내가“그녀는 예뻤다”고 하면, 학생들은 그제야 감을 잡았는지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린다.

이 글의 핵심어인‘자용절대(姿容絶代)’를 풀이하면

“그녀는 지금껏이 세상에서 젤로 예뻤다.”이다.


이 작품은 글쓰기 구성의 전형으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다.

[라]의 <해가(海歌)>는 ‘公從之.’ 다음에, <헌화가>는 “亦作歌詞獻之.” 다음에 위치한 것이어야 하나 삼국유사 작품 전체의 균형에 맞추어 끝으로 뺐다.

불경의 기본구성이 강창(講唱), 곧 형식적으로는 ‘산문+운문’이므로 산문을 요약한 운문은 구성상 맨 뒤에 위치한다. 이러한 구성방식은 고려조 각훈의 <해동고승전>은 물론, 가장 오래된 <梁고승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일연의 인물 찬(讚)도 예외없이 이런 구성을 취하고 있다.


[가]에서는 강릉태수 부임길에 천 길 낭떠러지 위에 핀 철쭉꽃을 수로부인이 갖고 싶어하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암소를 몰고 지나가던 한 노인이 그녀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설화에서 "不知何許人"은 대개 세속을 초월하여 신성한 경지에 이른 사람을 지시할 때사용하는 표현이다.---

노인에게 그런 초능력을 발휘하게 한 힘이 무엇일까요?

시인 고 미당 서정주 선생은 이 대목에서 신바람이 나서 본문에도 없는

“다람쥐처럼 기어올랐다.”는 표현을 기워 넣으셨다.


[나] 이틀 뒤 임해정에서 점심 먹는데 느닷없이바다의 용이 수로부인을 납치해 갔다.

한 노인이 화엄경에 나오는 중구삭금(衆口鑠金)의 지혜를 일러주었다.

---삼국유사 <南白月二聖 努肹不得 달달朴朴>조에는 ‘수순중생(隨順衆生

亦菩薩行之一也)이라는 표현도 나온다.누구도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요.

성인군자도 시속을 따르는데 누가 감히 민초들의 꿈을 짓밟을 수있나요?---

민초들의 동의를 얻은 태수와 용왕과의 대결에서 용왕은 백기를 들고 수로부인을 지상으로 되돌려 주었다.


[다]

수로부인은 지금껏 세상에 둘도 없는 미인이어서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신물(神物)들에게 납치당했다.


요약하면,

[가]에서는 노인이 초능력을 발휘하다. 극적 장면의 확대이다.

[나]에서는 이상향인 용궁에도 그런 미인은 없었다.

지상과 용궁의 역동적 줄다리기에서지상의 승리였다.

---지상이 불국토(佛國土,부처님 나라)고 낙원이라 카이!---

 

[다]에서는 그 뒤로도 번번히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신물(神物)들에게 납치당했던 것이다. 흔한 일이어서 굳이 예시가 필요없다.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신들도 못 가진 자용절대(姿容絶代)

水路부인을 인간 세상 사람들은 소유한 거라요.

맞습니다. 지상이 낙원 맞고요.

수로부인과 동시대에 살았던 신라 성덕왕대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잉?

그녀의 몸에서 세상에는 없는 기이한 향기가 풍겼대잖아요.

아래 포스트 <꽃구름 속에>에는 조수미의 탄력있는 목소리에 실려나오네요.

 

조수미 - "꽃구름 속에" /박두진 작사, 이흥렬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NsF-3Rrpz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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