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아래는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서 뒷분분을 발췌했다. 설총이 아버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안치하고 예배하니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껏 그대로 있다고 일연은 적었는데,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 분황사 경내를 서성이다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탈해왕도 해골로 소상을 만들었다는데, 신라인들은 참으로 기이한 문화를 지녔다.

보광전 뒷벽 오른쪽에는 원효성사의 영정 하나가 걸려 있었다.

위는 설총과 원효 부자의 사진이다.

 

처음에 유성이 어머니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더니 태기가 있었으며, 해산할 때는 오색구름이 온 땅을 덮었다. 때는 진평왕 39년 대업 13년 정축(617)이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스승이 없이 혼자 공부했다. 그의 유방(遊方:중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수행함)의 시말과 불교를 널리 편 큰 자취들은 당승전과 그의 행장에 자세히 올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다 쓰지 않고, 다만 향전에 실린 한두 가지 이상한 일만 기록한다.

 

스님은 어느날 풍전(風顚:상례를 벗아난 행동)을 하여 거리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어느날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려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사람들은 누구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 때 태종이 이노래를 듣고,

"이 스님은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으려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이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지내고 있었으므로 궁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이미 그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오고 있어 만나게 되엇다. 원효는 이때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적셨다. 궁리가 스님을 궁으로 데리고 그 곳에서 묵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와 역사에 두루 통달하여 신라 10현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방언으로 중국과 외이의 각 지방 풍속, 물건이름등에도 통달하고 이회하여 6경과 학문을 훈해하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명경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이를 전수하여 이어 오고 있다.

원효는 이미 계를 범하여 총을 낳은 후에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를 소성거사라고 하였다. 우연히 그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스님은 그 모양에 따른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한 구절인 '일체의 無애人(부처를 이름)은 한 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는 문귀를 따서 이름을 무애라 하고 계속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하게 했다.

이 도구를 가지고 일찍이 수많은 마을을 돌며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교화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로 말미암아 상추․옹유(가난한사람의 집),확후(몽매한 사람)의 무리들도 다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일컫게 하였으니 원효의 교화는 참으로 커다란 것이었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라 하였으며, 스스로의 이름을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이고, 원효란 이름도 역시 방언이며 당사 사람들은 모두 향언으로 원효를 일러 새벽이라고 했다.

그는 일찍이 분항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지었는데 제4권 십회향품을 끝으로 마침내 붓을 놓았다. 또 일찍이 訟事로 말미암아 몸을 百松(몸이 백개의 소나무로 나뉨)으로 나누었으므로 모든사람들은 이를 位階의 初地라고 말했다. 또한 바다용의 권

유로 하여 노상에서 조서를 받아 삼매경소를 지었으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위에 놓은 연유로 각승이라했다. 이것은 또한 本始二覺(본각과 이각)의 숨어 있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가 와서 종이를 붙였는데, 이것 또한 知音하여 서로 唱和한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총이 그 유해를 부수어 소상으로 진용을 만들고 분황사에 안치하여 공경하고 사모하여 終天(한평생 슬픔을 품음)의 뜻을 표했다. 설총이 곁에서 예배할 때,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본 그대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거하던 穴寺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했다.

각승이 삼매경의 축을 처음으로 폈고,

무호는 종내 1만거리를 바람으로 걸었네

달 밝던 봄 요석궁에 잠이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다보는 모습만 비었네.













[은자주]설화의 세계에는 금기가 없다. 현대판으로 고치면 이 설화는 대물왕 강쇠와 대물왕비 옹녀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 무엄하게도 왕의 음경 길이를 기록하고 왕비의 똥자루 크기를 기록하다니. 그것도 지증왕이라면 4년 10월에 '王'이라는 왕호를 최초로 사용하고, 나라 이름도 국제표준어를 사용하여‘新羅’로 고치고 시호도 처음으로 쓴 국제화, 세계화를 표방한 신라의 위대한 왕인데...

시호 지증은 “지절로” 내지 "지대로"의 한자 표기로 추정된다. 한자로 표기한 "지철로"도 역시 고유어 "지절로"의 음사로 보인다.

현대어로는 부사 "저절로 " 또는 “제대로”인데 그 말뜻은 아래와 같다.


저절로

"다른 힘을 빌리지 아니하고 제 스스로. 또는 인공의 힘을 더하지 아니하고 자연적으로."

제대로

1 제 격식이나 규격대로. 2 마음먹은 대로. 3 알맞은 정도로. 4 본래 상태 그대로.


보통 사람들의 음경은 해면체에 혈액이 충혈되어 있어야 발기하지만 이 지절로왕은 한 자 다섯 치 되는 대물이 언제나 그 모양이 그 모양인 모양이다.

이 설화 서술자의 위대성 표현방법 또한 기이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긴 성기숭배가 오로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이니, 성기라면 오로지 쾌락만을 연상하는 편협한 사고를 강요하는 현대인의 안목 으로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서술자의 태도에는 경탄과 찬사와 희열과 진지함으로 충만해 있었을 것이다. 신라 삼대 중 국가의 표준을 갖춘 중대의 문을 열고보니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 또한 높았을 것이다 이에 호응하여 왕과 왕비의 성기가 월등하게 크다는 점을 강조하여-사실은 알 수 없음- 성기신앙에 기대어 국가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한 신라인들의 발상은 특기할 만하다.


중국에서는 사천성 단샤[단하]산의 양원석(陽元石)과 음원석(陰元石)

을 관광자원화하였는데, 양원석은 높이 28m, 직경이 7m 되는 암석

이고, 음원석은 길이 10m, 너비 4m 되는 암벽인데, 음원석 동굴의

길이는 4.8m, 가장 넓은 틈이 74cm, 동굴의 깊이는 4m라고 한다.

 

 아래 주소창 참고.

http://blog.naver.com/khlee1959/50109372022

 

지철로왕 智哲老王

 

第二十二智哲老王, 姓金氏,

제 22대 지철로왕의 성은 김씨이며

名智大路, 又智度路,

이름은 지대로 또는 지도로라 하였다.

諡曰智證, 諡號始于此.

시호는 지증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시호를 쓰는 법은 이 때부터 시작하였다.

又鄕稱王爲麻立干者, 自此王始.

우리말로 왕을 마립간이라고 한 것은 이 왕 때부터 시작하였다.

[은자주]

마립간을 처음 사용한 왕은 第十七奈勿麻立干이다. 왕통이 김씨로 자리잡고 새시대를

연 것을 공포한 것이다.지증마립간/지증왕 4년 10월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뀐 것을 설화[역사]

기술자가 착각한 듯하다. 일연이 주석을 달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麻立干과 王의 위치를 맞바꾸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王以永元二年庚辰卽位.(或云辛巳則三年也.)

왕은 영원 2년(500년)에 왕위에 올랐다.

王陰長一尺五寸, 難於嘉耦,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가 되어 배필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發使三道求之, 使至牟梁部 冬老樹下,

그래서 사자를 三道에 보내어 배필을 구하였는데, 사자가 모량부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니

見二狗嚙一屎塊如鼓大, 爭嚙其兩端.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 한덩어리 하나를 물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개들은 양끝을 물고 싸웠다.

訪於里人, 有一小女告云: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한 소녀가 말했다.

「此部相公之女子洗澣于此, 隱林而所遺也.」

"이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누고 간것입니다."

其家檢之, 身長七尺五寸.

사자가 그 집을 찾아가보니 그녀의 신장이 일곱자 다섯치나 되었다.

具事奏聞, 王遣車邀入宮中,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어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封爲皇后, 群臣皆賀.

책봉하여 황후로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경하했다.

又阿瑟羅州(今溟州)東海中, 便風二日程有于陵島(今作羽陵),

또 아슬라주 동쪽 바다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가 있었다.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

이 섬은 둘레가 2만6천7백30보였다.

島夷恃其水深, 驕傲不臣,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여 조공하지 아니했다.

王命伊喰朴伊宗將兵討之,

왕은 이찬 박이종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박이종(신라장군 이사부)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서 그들을 위협했다.

「不降則放此獸」,

"너희가 항복을 하지 않으면 이 사자를 놓아 버리겠다."

島夷畏降. 賞伊宗爲州伯.

섬의 오랑캐는 두려워서 항복을 하였다. 이에 왕은 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그 주의 장관인 주백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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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귀설화(志鬼說話)/ 출전: 태평통재& 釋道世, 法苑珠林

지귀설화(志鬼說話) ◇志鬼, 券七十三 志鬼條 亦引新羅殊異傳曰 志鬼新羅活里馹人. *馹일:驛馬.*馹일:驛馬. 지귀는 신라 활리역 사람이다. 慕善德王之端嚴美麗 憂愁涕泣 形容憔悴. 선덕여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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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귀설화(志鬼說話)

◇志鬼, <太平通載>

券七十三 志鬼條 亦引新羅殊異傳曰

 

 

志鬼新羅活里馹人. *馹일:驛馬.*馹일:驛馬.

지귀는 신라 활리역 사람이다.

 

慕善德王之端嚴美麗 憂愁涕泣 形容憔悴.

선덕여왕의 단아하고 미려함을 사모하여 시름에 차서 눈물을 흘려 얼굴이 초췌했다.

 

王聞之 召見曰

왕이 듣고서 불렀다.

 

“朕明日行靈廟寺行香 汝於其寺待朕.”

“짐이 내일 영묘사에 가서 분향하려 한다. 너는 그 절에서 짐을 기다려라.”

 

志鬼翌日歸靈廟寺塔下 待駕行. 忽然睡酣

지귀는 이튿날 영묘사 탑 아래 가서 왕의 행차를 기다리다가 홀연 깊은 잠에 빠졌다.

 

王到寺 行香. 見志鬼方睡著.

왕은 절에 이르러 분향하고는 지귀가 방금 잠든 것을 보았다.

 

王脫臂環 置諸胸 卽還宮.

왕은 팔찌를 빼어 지귀의 가슴에 두고 곧 환궁했다.

 

然後乃□(睡覺?) 御環在胸

그러한 후에 지귀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왕의 팔찌가 가슴에 있었다.

 

恨不得待御. 悶絶良久

그는 왕을 기다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오랜 동안 민망(憫惘)해 했다.

 

心火出燒其□(身).

마음 속에서 불이 나와 그의 몸을 불살랐다. 지귀는

 

志鬼則變爲火鬼.

곧 불귀신으로 변했다.

 

於是王命術士 作呪詞曰
이에 왕이 주술사를 명하여 주술적 노래를 짓게 했다.

 

志鬼心中火 지귀의 마음 속 불길이

燒身變火神 자신의 몸울 불사르고 불귀신이 변했네.

流移滄海外 창해 밖으로 흘러가

不見不相親 만나지도 친하지도 말지어다.

 

時俗 帖此詞於門壁 以鎭火災.

당시 풍속에 이 주문을 출임문이 있는 바람벽에 붙여 화재를 막았다.

 

 

志鬼說話[龍樹의 大智度論]

龍樹의 大智度論(B.C.150-250년경) 권14 初品 24,고려대장경 제14(後秦 鳩摩羅什譯)

 

如說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國王有女 名曰 拘牟頭.

국왕에게 딸이 있었는데 이름은 구모두였다.

有捕魚師 名曰術派伽 隨道而行 遙見王女在高樓上.

고기잡이 이름은 술파가였는데 그가 길을 따라 가다가 멀리서 공주가 높은 누각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窓中見而想像染着 心不暫捨

창으로 보고서 공주 생각이 머리에 달라붙어 마음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彌歷日月 不能飮食.

세월이 지나 그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母問其故 以情答母

어미가 그 까닭을 물으니 실정을 어미에게 말했다.

“我見王女 心不能忘.”

“내가 공주를 보고나서 마음에서 잊을 수 없습니다.”

母喩兒言“汝是小人 王女尊貴 不可得也.”

어미가 아들을 타일렀다.

“너는 소인이고 공주는 존귀하시니 이룰 수 없다.”

兒言“我心願樂 不能暫忘 若不如意 不能活也.”

아이가 말했다.

“내 마음이 즐거움을 원하여 잠시도 잊을 수 없으니 만약 뜻과 같지 아니하면 살 수 없습니다.

母爲子故 入王宮中 常送肥魚鳥肉以遣王女 而不値價

어미는 아들의 연고를 위하여 궁중에 들어가 언제나 살진 물고기 새 고기를 보내어 공주에게 주되 값을 따지지 않았다.

王女怪而問之 “欲求何願? ”

공주가 괴이히 여겨 물었다.

“무슨 소원을 구하느냐?”

母白王女 顧却左右 當以情告

어미가 공중에게 아뢰어 좌우를 물리치고 응당 실정을 아뢰었다.

“我有一子 敬慕王女 情結成病 命不云遠 願垂愍念 賜其生命”

“내게 아들 하나가 있는데 공주님을 공경하고 사모하여 연정(戀情)이 맺혀 병이 되었으니 목숨이 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딱하게 여기는 마음을 드리워 그에게 생명을 주소서.”

王女言“汝去. 至月十五日 於某甲天祠中 住天像後.”

공주가 말했다.

“너는 돌아가라. 이 달 보름에 이르러 모 천갑사에서 사천왕상 뒤에서 기다려라.”

母還語子 “汝願已得.”

어미가 돌아와 아들에게 말했다.

“너의 소원은 이미 이루었다.”

 

告之如上. “沐浴新衣 在天像後住.”

알리기를 위와 같이 했다.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사천왕상 뒤에 머물러라.”

王女至時 白其父王“我有不吉 須至天祠 以求吉福.”

공주는 그때에 이르러 부왕에게 아뢰었다.

“저에게 불길함이 있어 모름지기 천사에 이르러 길한 복을 구하고자 합니다.”

王言“大善.”

왕이 말했다.

“아주 착하다.”

卽嚴車五白乘 出至天祠 旣到. 勅諸從者 齊門而至 獨入天祠.

곧 수레 오백 대를 엄숙히 하여 길을 나서 천사에 이르렀다. 이미 이르러 여러 시종(侍從)을 명하여 일주문에 가지런히 하여 이르게 하고 공주는 홀로 천사에 들어갔다.

天神思惟 此不應爾. 王爲施主 不可令此小人毁辱王女 卽壓此人 令睡不覺.

천신(天神)이 생각하기를, 이것은 호응할 수 없을 따름이다. 왕이 시주이니 이 소인으로 하여금 공주를 헐어 욕되게 할 수 없다. 곧 이 소인을 눌러 잠들어 깨닫지 못하게 했다.

王女旣入 見其睡重 推之不寤 卽以瓔珞直十萬兩金 遺之而去.

공주가 이미 들어가 그가 깊은 잠에 빠진 것을 보고 흔들어도 개어나지 않았다. 곧 값이 십만 량금인 목걸이를 주고서 더났다.

後此人得覺 見有瓔珞 又問衆人 知王女來

후에 이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 목걸이가 있는 것을 보고 또 여러 사람들에게 묻고서 공주가 왔던 것을 알았다.

情願不遂 憂恨懊惱 婬火內發 自燒而死.

사랑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여 시름하고 고뇌하다가 사랑의 불꽃이 안에서 일어나 자신을 불살라 죽었다.

以是證知 女人之心 不擇貴賤 唯欲是從.

이로써 여인의 마음이 귀천을 가림이 없이 중생의 욕구에 따랐음을 증거 삼아 알겠다.

<卷 14>

⃟釋道世의 法苑珠林 (권21 士女篇12 姦僞部2, 670년)에 이 설화가 원문 그대로 인용됨.

 









 

 

[주] 조신설화를 확대재생산한 것이 춘원 이광수의 꿈이다.

 

[출전] 삼국유사 권3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 정취(正趣) 조신(調信)

 

 

調信說話

조신설화;조신의 꿈

 

 

昔, 新羅爲京師時,

옛날 신라(서라벌)가 서울이었을 때

 

有世逵寺(今興敎寺也)之莊舍, 在溟州㮈李郡

세규사(寺)의 농장 집이 명주 날리군에 있었는데

 

(按『地理志』, 溟州無㮈李郡, 唯有㮈城郡, 本㮈生郡, 今寧越.

又牛首州領縣有㮈靈郡, 本㮈已郡, 今剛州.

牛首州今春州, 今言㮈李郡, 未知孰是),

 

(지리지에 의거하면 명주에 날리군은 없고 오직 날성군이 있다. 본디 날생군이고 지금 영월이다.

또 우수주 령현에 날령군이 있으니  본디 날이군이고 지금은 강주이다.

우수주는 지금 춘주인데 여기서 말하는 날리군은 어느 것인지 모르겠다.)

 

本寺遺僧調信爲知莊.

본사에서 중 조신을 보내어 장원을 맡아 관리하도록 했다.

 

信到莊, 上悅□守金昕公之女, 惑之深,

조신이 장원에 와서 김혼공의 딸을 좋아하여 그녀에게 아주 반했다.

 

屢就洛山大悲前, 潛祈得幸,

그는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그녀와 살게 해달라고 남몰래 기도했다.

 

方數年間, 其女已有配矣.

바야흐로 수년 사이에 그녀에게 이미 배필이 생겼다.

 

又往堂前怨大悲之不遂己,

이에 그는 또 불당에 나가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哀泣至日暮, 情思倦憊, 俄成假寢,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지쳐서 잠깐 새에 잠이 들었다.

 

忽夢金氏娘, 容豫入門, 粲然啓齒而謂曰:

꿈 속에서 문득 김씨 낭자가 기쁜 얼굴로 문에 들어와 입을 활짝 벌리고 웃음 지으며 말했다.

 

「兒早識上人於半面,

"저도 일찍이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 되어

 

心乎愛矣, 未嘗暫忘,

마음 속으로 사랑하며 잠시도 잊지 못했습니다.

 

迫於父母之命, 强從人矣.

그러나 부모님의 명령에 못 이겨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 갔었습니다.

 

今願爲同穴之友, 故來爾.」

이제 동혈지우(同穴之友-부부)가 되고자 하여 왔사옵니다."

 

信乃顚喜, 同歸鄕里,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며 그녀와 같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計活四十餘霜, 有兒息五,

그녀와 40여년간 같이 살며 자녀 다섯을 두었다.

 

家徒四壁, 藜藿不給,

집은 단지 네 벽뿐인데 거친 음식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遂乃落魄扶攜, 糊其口於四方.

마침내 영락하여 식구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냈다.

 

如是十年, 周流草野,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를 두루 헤매이니

 

懸鶉百結, 亦不掩體.

갈갈이 찢어진 옷은 몸뚱이도 가리지 못했다.

 

適過溟州蟹縣嶺,

때마침 명주 해현령을 지날 때

 

大兒十五歲者忽餧死, 痛哭收瘞於道,

15세 되는 큰 아이가 갑자기 굶어 죽으매 통곡하며 길가에 묻었다.

 

從率餘四口, 到羽曲縣(今羽縣也), 結茅於路傍而舍.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그들 내외는 우곡현에 이르러 길 가에 모옥을 짓고 살았다.

 

夫婦老且病, 飢不能興,

그들 부부는 늙고 병들었으며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十歲女兒巡乞,

10세된 계집아이가 이릉 보다 못해 밥을 얻으러 다니다가

 

乃爲里獒所噬, 號痛臥於前.

마을 개에게 물려 아픔을 부르짖으며 앞에 와서 눕자

 

父母爲之歔欷, 泣下數行,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이 흘러내렸다.

 

婦乃□澁拭涕, 倉卒而語曰:

부인은 눈물을 씻으며 창졸히 말했다.

 

「予之始遇君也,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色美年芳, 衣袴稠鮮,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습니다.

 

一味之甘, 得與子分之,

한가지 음식이라도 당신과 나누어 먹었으며,

 

數尺之煖, 得與子共之, 出處五十年,

작은 의복이나마 당신과 나누어 입으면서 함께 살아온 것이 어언 50년입니다.

 

情鍾莫逆, 恩愛綢繆, 可謂厚緣.

그동안 정은 깊어졌고, 사랑도 굳게 얽혔으니 참으로 두터운 인연이라 하겟습니다.

 

自比年來, 衰病日益深, 飢寒日益迫,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 쇠약하여 생기는 병이 날로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가 날로 더욱 심해지니

 

傍舍壺漿, 人不容乞,

남의 집 곁방살이나 보잘것 없는 음식조차도 빌어 얻을 수가 없게 되었으며,

 

千門之恥, 重似丘山.

천문 만호에 걸식하는 부끄러움은 무겁기가 산더미 같습니다.

 

兒寒兒飢, 未遑計補,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이것도 미처 돌보지 못하였는데,

 

何暇有愛悅夫婦之心哉,

어느 겨를에 부부의 정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紅顔巧笑, 草上之露,

꽃다운 얼굴과 어여쁜 웃음도 풀잎에 이슬이요,

 

約束芝蘭, 柳絮飄風.

지란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君有我而爲累, 我爲君而足憂,

이제 당신은 내가 있어 누가 되고 내게는 그대를 위하여 더욱 근심합니다.

 

細思昔日之歡, 適爲憂患所階.

조용히 옛날의 기쁨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君乎予乎, 奚至此極,

당신과 내가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까지 왔을까요?

 

與其衆鳥之同餧, 焉知隻鸞之有鏡,

뭇 새가 다 함께 굶어 죽는 것보다는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이 낫습니다.

 

寒棄炎附, 情所不堪,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하는 것은 인정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然而行止非人,

행하고 그침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離合有數, 請從此辭.」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있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헤어지기로 합시다."

 

信聞之大喜, 各分二兒將行,

조신이 이말을 듣자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나누어 데리고 장차 떠나려 하니

 

女曰: 「我向桑梓, 君其南矣.」

부인이 말했다."저는 고향으로 가겠으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方分手進途而形開,

이리하여 서로 작별하여 길을 떠나려 하는데 꿈에서 깨었다.

 

殘燈翳吐, 夜色將闌.

타다 남은 등잔불은 하늘거리고 어느덧 희뿌옇게 날이 밝기 시작했다.

 

及旦鬚髮盡白,

아침이 되어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하얗게 세고

 

惘惘然殊無人世意,

망연히 세상일에 뜻이 없어졌다.

 

已厭勞生, 如飫百年苦,

이미 괴롭게 살아감도 싫어지고, 마치 한평생의 고생을 다 겪고 난 듯하여

 

貪染之心, 洒然氷釋.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 깨끗이 사라졌다.

 

於是, 慚對聖容, 懺滌無已.

이에 관음보살의 상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도 누를 길이 없었다.

 

歸撥蟹峴所埋兒, 乃石彌勒也.

그는 돌아와 해현에 묻는 아이를 파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석미륵이었다.

 

灌洗奉安于隣寺, 還京師, 免莊任,

물로 씻어서 근처의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서 장원을 맡은 소임을 내놓고

 

傾私財, 創淨土寺, 懃修白業,

사재를 기울여 정토사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後莫知所終.

그 후에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알 수 없다.

 

議曰:

사론(史論)해 보건대,

 

讀此『傳』, 掩卷而追繹之,

'이 전기를 읽고서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하니

 

何必信師之夢爲然!

어찌 조신사의 꿈만 그렇겠느냐?

 

今皆知其人世之爲樂, 欣欣然役役然,

지금 모든 사람들이 속세의 즐거움만을 알고서 기뻐하며 애쓰고 있으나

 

特未覺爾.

이것은 단지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乃作詞誡之曰:

이에 시를 지어 경계한다.

 

快滴須臾意已閑,

쾌적수유의이한, 잠시 즐거운 일 마음에 맞아 한가롭더니

暗從愁裏老蒼顔.

암종수리노창안. 근심 속에 어느덧 남 모르게 늙어졌네

須更待黃粱熟,

부수갱대황량숙, 모름지기 황량이 다 익길 기다릴 새도 없이

方悟勞生一夢間.

방오노생일몽간. 인생이 한바탕 꿈임을 깨달을 것을.

治身臧否先誠意

치신장부선성의 修身의 잘잘못은 먼저 성의에 달린 것

鰥夢蛾眉賊夢藏.

환몽아미적몽장. 홀아비는 미인을, 도둑은 창고를 꿈꾸네.

何以秋來淸夜夢,

하이추내청야몽, 어찌하여 가을날 밤 맑은 꿈으로

時時合眼到淸凉.

시시합안도청량. 때때로 눈감아 청량경(이상향)에 이를거나?

 

 

조신설화(調信說話),

(최남선본 삼국유사,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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