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821년 8월 21일  조선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솔뫼

선종    1846년 9월 16일(25세)    조선 한성부 새남터

교파  로마 가톨릭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1HSZB2fkg1o 

 

 

https://www.youtube.com/watch?v=nGzGpWXjOPU 

 

 

https://www.youtube.com/watch?v=7cGtkVbBsgs 

 

https://www.youtube.com/watch?v=MmP6z-qrHQ4 

 

 

 

익산 나바위성당(益山 나바위聖堂)은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에 있는 대한제국 시대의 성당이다. 1987년 7월 1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이 성당은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중국에서 조선 헌종(憲宗) 11년 1845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황산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6년에 지은 건물이다. 1906년 베르모렐 신부가 감독과 설계를 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동원해 지었다. 당시에는 목조건축으로 앞면 5칸·옆면 13칸이었는데, 1916년 건물을 고치면서 일부분을 벽돌로 바꿨으며, 그 뒤 다시 2차례 수리를 하였다. 2층 건물과 비슷하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에 천장은 판자로 처리했고 바닥에 널판지를 깔았다.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지은 건물이며 한국전통양식과 서양양식이 합쳐진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베르모렐 신부와 김대건 신부의 기념비가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8C%80%EA%B1%B4

 

김대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대건(金大建, 1821년 8월 21일 ~ 1846년 9월 16일)은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순교자, 여행가로,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다.[1][2]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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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임금이 희정당(熙政堂) 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학 죄인(邪學罪人)[24] 김대건(金大建)을 효수(梟首)하라고 명하였다. 김대건은 용인(龍仁)사람으로서 나이 15세에 달아나 광동(廣東) 에 들어가서 양교(洋敎)[25]를 배우고, 계묘년(1843년, 헌종 9년)에 현석문(玄錫文)등과 결탁하여 몰래 돌아와 도하(都下)에서 교주(敎主)가 되었다. 이 해 에 해서(海西)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당선(唐船)[26]을 만나 광동에 있는 양한(洋漢)[27]에게 글을 부치려 하다가 그 지방 사람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중국 사람이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본말(本末)을 사실대로 고하였다. 포청(捕廳)에서 한 달에 걸쳐 힐문하였는데, 그 말하는 것이 교활하여 양박(洋舶)[28]의 강한 것을 믿고 협박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마침내 그 교(敎)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은전(銀錢)[29]을 흩어서 경외(京外)에서 흔하게 쓰는 재화는 다 양한이 책중에서 실어 보낸 것이다.'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양외[30]의 제번[31]의 말에 능통하므로, 천주교 신부로서 각국을 위하여 통사[32] 한다.'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현석문과 아울러 같이 주벌[33] 하였는데, 현석문은 신유년(1801년, 순조 원년)의 사도[24] 로 처형된 현계흠의 아들이다.

헌종실록》 13권 12년(1846년음력 7월 25일 (무신) 1번째 기사, 《헌종실록》 헌종 대왕 행장
 

교세 확장 보다도 더 시급한 것이 외국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駐淸)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항로 개척이었다.[34]

김대건은 1845년 10월에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항로를 알아보았다. 김대건은 경기도 연평도 앞바다에 선교사가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1846년 6월 5일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으로 가는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중국어선을 관헌에서 징발하는 것에 항의하다가 신분이 드러났다고 한다.

학식이 출중하여 옥중에서 몇몇 대신의 부탁으로 세계 지리에 관한 을 만들었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라틴어 실력을 발휘하여 우리말로 옮김과 함께 색칠하기도 했다. 김대건이 옮긴 지도는 헌종에게 바쳐졌다.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의 박학다식함을 아깝게 생각하여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김대건이 신학공부와 사목을 위해 외국인들과 접촉한 사실로 처벌해야 한다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에 따라 그해 9월 15일 조선에서 금하던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천주교 사제로 참수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35] 양심수의 시체는 3일이내 가족이 찾아갈 수 있는데, 김대건의 시체는 새남터 모래밭에 가매장되었다. 이민식이라는 천주교 신자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안성에서 장례를 치렀다. 프랑스 해군의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은 김대건을 구하기 위해 조선으로 항해해 왔으나, 김대건이 순교하기 전까지 조선에 도착하지 못하였다.[36]

당시 그의 유언은 "주교님,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였다.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어머니의 안위를 부탁한 것이었다. 또한 순교하기 전 하느님을 경외하고 죄를 짓지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박해받는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김대건, 참수형을 당하기 전에 한 말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37]

 
 

https://www.youtube.com/watch?v=Yye0Vrwp7XI

 
 

1840년 경에 제작된 〈수선전도〉에 사남기라고 적혀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3%88%EB%82%A8%ED%84%B0

 

새남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새남터(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로 80-8)는 한강의 모래사장으로, 풀과 나무를 의미하는 새나무터에서 유래한다. 1801년 주문모, 1846년 김대건 등의 로마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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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념에 따른 죽음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었다. 이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곳은 1456년(세조 2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死六臣)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즉, 정치적 신념에 따른 양심수들이 처형당한 곳이라고 볼 수 있겠다.

천주교 사제들의 죽음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다.

주문모 신부의 죽음

주문모 신부의 입국

새남터를 순교의 성혈로 물들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부터이다. 목자 없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천주교 북경 교구는 1795년에 주문모 신부를 조선 땅에 파견한다. 이 땅에서 맞이한 첫 천주교 사제이자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 최인길의 집에 여장을 푼 이래 6개월 만에 한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쫓기는 몸이 된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여교우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지만 그의 영입에 주역을 담당했던 윤유일, 지황은 각각 36세, 29세의 나이에 곤장을 받아 치명하고, 거처를 제공했던 최인길 역시 장살(杖殺)로 순교한다.

신유박해

박해의 와중에서도 6천여 명의 신자가 새로 탄생하는 등 조선 교회의 교세는 크게 신장됐다. 하지만 주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명도회 회장인 정약종을 비롯해 선구적인 이 땅의 지식인들은 칼 앞에서도 주문모 신부의 소재를 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주문모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려고 북행길을 나섰다. 하지만 자기 양 떼들과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하는 각오로 도중에 발길을 돌려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그의 시체는 닷새 동안 형리들이 지켰다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기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피에르 모방과 자크 샤스탕, 주교 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 이들 세 명의 외국인 사제를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교우들은 포졸들의 엄중한 감시를 뚫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노고산에 매장했다가 4년 후 삼성산에 안장했다.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의 순교

그로부터 7년 뒤인 병오년(1846년)에는 한국교회 처음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동안의 순교를 기해 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된다.

병인박해

그리고 20년 후, 병인박해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천주교 사제들과 우세영, 정의배 두 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린다.

순교기념지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됐고, 1956년에는 여기에 '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1981년에는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본당이 분리 독립했고 1987년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현재의 기념성당을 건립해 봉헌했다. 2006년 9월 3일에는 성당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새남터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축복식을 거행하고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2]

 

https://kydong77.tistory.com/21193?category=486747 

 

성(聖)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김대건을 만나다

출생 1821년 8월 21일  조선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솔뫼 선종 1846년 9월 16일(25세)   조선 한성부 새남터 교파  로마 가톨릭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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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A8VurXg7V1A 

 

 

https://ko.wikipedia.org/wiki/%EC%9D%B5%EC%82%B0_%EB%AF%B8%EB%A5%B5%EC%82%AC%EC%A7%80_%EC%84%9D%ED%83%91

 

익산 미륵사지 석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익산 미륵사지 석탑(益山 彌勒寺址 石塔)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에 있으며, 한국에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 무왕의 재위기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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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석탑(益山 彌勒寺址 石塔)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에 있으며, 한국에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 무왕의 재위기간 중인 639년에 만들어진[1] 이 석탑은 백제 석탑의 시원 형식(始原形式)이라고 불리며, 여러 면에서 한국 석탑 전체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해체 당시 높이는 14.2 m로,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는 한국 최대의 석탑이다. 이 석탑은 목조 건물을 석재로 구현하여 백제의 목탑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한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석탑이자 가장 큰 석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이 석탑은 백제 석탑의 시원 형식(始原形式)이라고 불리며, 여러 면에서 한국 석탑 전체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화강암을 사용한 이 석탑은 신라식 석탑의 상하기단과 달리, 지복석(地覆石)으로 구획된 사각형의 기단에 사방 3간(間)의 다층탑을 쌓아올린 것이다.

서쪽면 전체와 남쪽면 대부분, 북쪽면의 절반 정도가 무너지고 층수도 6층까지 밖에 남지 않아 2013년 보수를 시작하여[2] 2019년 4월 30일 완료하였다.[3]

 

 

https://www.youtube.com/watch?v=tzg6JhukJJA 

 

 

 

소원성취진언 (所願成就眞言) 

  소원하는 바가 원만히 성취되기를 바라는 진언(眞言}     
  「옴 아모까 살바다라 사다야 시베 훔」 (세번)
 

 

www.youtube.com/watch?v=XIByVbOGnpw  

 

 

https://www.youtube.com/watch?v=ju0Xx5yTnwQ 

 

 

https://www.youtube.com/watch?v=A3UY0cd-m7I 

 

 

https://kydong77.tistory.com/20585

 

경주 남산, 천년의 佛國土& 석굴암& 불국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七佛(사면석불+ 삼존불) www.youtube.com/watch?v=E22dMNrh-S0&t=87s www.youtube.com/watch?v=XIByVbOGnpw www.youtube.com/watch?v=hlTtHDTAOHM kydong77.tistory.com/19658 석굴암, 불국사 www.youtube.com/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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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_3fF40cDmCQ 

 

 

https://www.youtube.com/watch?v=8M7hXP9CEcg 

 

https://kydong77.tistory.com/17949

 

문무대왕 수중릉 & 만파식적

소프라노 김순영 - 아름다운 나라 https://www.youtube.com/watch?v=fMZxF5BXSGA 소프라노 김순영 - Amazing grace https://www.youtube.com/watch?v=pDKekXL5oxE Nana Mouskouri - Amazing Grace (1983) htt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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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뿔고래의 뿔.

신문왕 때 "움직이는 섬 위의 한 그루 대나무"를 베었던 바로 그 외뿔고래의 뿔도

피리를 만들 수가 있는 속이 빈 뿔이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1064

 

만파식적

국태민안을 비는 문무대왕의 아들 신문왕의 기록도 함께 싣는다. *외뿔고래의 뿔. 신문왕 때 "움직이는 섬 위의 한 그루 대나무"를 베었던 바로 그 외뿔고래의 뿔도 피리를 만들 수가 있는 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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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波息笛 만파식적

-삼국유사 권2

第三十一<神文大王>, 諱<政明>, <金>氏, <開耀>元年辛巳七月七日卽位,

제 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이고 성은 김씨이다. 개요 원년 신사(681) 7월7일 왕위에 올랐다.

爲聖考<文武大王>創<感恩寺>於東海邊.(寺中記云, <文武王>欲鎭<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立, <開耀>二年畢排. 金堂砌下東向開一穴, 乃龍之入寺旋繞之備. 蓋遺詔之藏骨處, 名<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見臺>.)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 - 경북 월성군 양북면 용당리에 사지가 있다.- 를 세웠는데 (절의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이 절을 처음 지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바다의 용이 되었다고 한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개요 2년(682)에 역사를 마치고 금당 뜰 아래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는데 이는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은 대왕암이라고 하고 절 이름은 감은사라고 하였는데 후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

明年壬午五月朔(一本云, <天授>元年, 誤矣), 海官波珍喰<朴夙淸>奏曰:

「東海中有小山, 浮來向<感恩寺>隨波往來.」

이듬해인 임오 5월 초하루(다른 책에는 천수 원년이라 했으나 잘못이다.)에

해관(海官)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었다.

"동해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바다에 떠서 감은사를 향하여 왔다갔다 합니다."

王異之, 命日官<金春質>(一作<春日>)占之,

왕이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여 일관 김춘질(또는 춘일이라고 한다)에게 점을 치게 하였다.

曰: 「聖考今爲海龍, 鎭護<三韓>. 抑又<金>公<庾信>乃三十三天之一子, 今降爲大臣, 二聖同德, 欲出守城之寶. 若陛下行幸海邊, 必得無價大寶.」

일관이 말하기를,

"대왕의 아버지께서 지금 해룡이 되어서 삼한을 진호(鎭護)하시고 또한 김유신공도

삼십 삼천의 한 아들이 되어 지금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동덕(同德)하여 성을 지키는 보물을 내려 주려 하니 만약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게 되면 반드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王喜, 以其月七日, 駕幸<利見臺>, 望其山, 遣使審之, 山勢如龜頭, 上有一竿竹, 晝爲二, 夜合一.(一云, 山亦晝夜開合如竹.) 使來奏之, 王御<感恩寺>宿,

왕은 기뻐하여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산세는 거북의 머리 형상이었다. 그 윗켠에 한간(一竿)의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합해져서 하나가 되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대나무와 같이 낮에는 벌어지고 밤에는 합해졌다고 한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니 왕은 감은사에 나아가 머물렀다.

明日午時, 竹合爲一, 天地震動, 風雨晦暗七日, 至其月十六日風霽波平.

王泛海入其山, 有龍奉黑玉帶來獻,

다음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하여져서 하나가 되니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과 비가 일어나며 7일동안이나 계속 캄캄하였다.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자고 파도는 평온하여졌다.

왕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그 산으로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들어서 왕에게 바치었다.

迎接共坐,

問曰: 「此山與竹, 或判或合, 如何?」

자리를 같이하여 왕이 물었다.

"이 산에 있는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는데 이는 무슨 까닭인가?"

龍曰: 「比如一手拍之無聲, 二手拍則有聲. 此竹之爲物, 合之然後有聲, 聖王以聲理天下之瑞也. 王取此竹, 作笛吹之, 天下和平.

今王考爲海中大龍, <庾信>復爲天神, 二聖同心, 出此無價大寶, 令我獻之.」

용이 대답했다.

"비유를 하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것은 합해진 연후라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께서 는 소리로써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는 아주 좋은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취하여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문무왕]께서는 바다 속의 용이 되셨고 유신공은 다시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물을 저에게 주어 저로 하여금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

王驚喜, 以五色錦彩金玉酬賽之. 勅使斫竹出海時, 山與龍忽隱不現.

왕은 놀랍고 기쁘기 그지없었다. 5색 비단과 금, 옥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보내어 그 대나무를 베게 한 다음 바다에서 나오니 산과 용은 홀연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王宿<感恩寺>, 十七日, 到<祗林寺>西溪邊, 留駕晝饍.

왕은 감은사에 유숙하고 17일에 지림사의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어가를 멈추고 점심을 드셨다.

太子<理恭>(卽<孝昭大王>)守闕, 聞此事, 走馬來賀, 徐察奏曰:

「此玉帶諸窠皆眞龍也.」

태자 이공(즉 효소대왕)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내려와서 경하하며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의 모든 눈금이 진짜 용입니다."

王曰: 「汝何知之?」

왕이 물었다.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太子曰: 「摘一窠沈水示之.」

태자가 아뢰었다.

"눈금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 보이겠습니다."

乃摘左邊第二窠沈溪, 卽成龍上天,

其地成淵, 因號<龍淵>.

이리하여 왼편의 둘째 눈금을 떼어 물에 넣으니 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은 곧 못이 되니 이러한 이유로 하여 용연이라고 불렀다.

駕還, 以其竹作笛, 藏於<月城><天尊庫>.

왕이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서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하여 두었다.

吹此笛則兵退病愈, 旱雨雨晴, 風定波平, 號<萬波息笛>, 稱爲國寶.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오고, 비가 올때는 맑아지고, 바람은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하였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至<孝昭大王>代, <天授>四年癸巳, 因<失禮郞>生還之異, 更封號曰<萬萬波波息笛>, 詳見彼傳.

효소대왕 때에 이르러 천수 4년 계사(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기이한 연유로 하여 다시 봉하여 말하기를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에 나타나 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7750

 

만파식적설화(萬波息笛說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감은사지가 있던 내에서 종소리 또는 물 끓는 소리가 난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하는데, 이로 보아 만파식적의 소리로 왜적을 물리쳤다는 등의 이야기는 이러한 지형적 특수성과 기상 변화에

encykorea.aks.ac.kr



https://www.youtube.com/watch?v=gZuYLCynPa8 

 

https://www.youtube.com/watch?v=ei_0af1GSVc 

 

소프라노 김순영 - 아름다운 나라

https://www.youtube.com/watch?v=fMZxF5BXSGA



https://www.youtube.com/watch?v=MjA7XHdcQ7g 

 

 

https://www.youtube.com/watch?v=Sy6VH5SpKOQ

 

 

https://kydong77.tistory.com/19420 

 

삼척 준경묘(濬慶墓)와 적송/ 道의 10가지 특징

https://www.youtube.com/watch?v=BLlVLJlQ64Y 모든 가치관의 기준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은 사실성에 바탕합니다. 허구로 규정짓는 소설조차도 그 바탕은 현실이고 사실성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연에 바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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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GoSQD-Glmuk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C%B2%99_%EC%A4%80%EA%B2%BD%EB%AC%98%C2%B7%EC%98%81%EA%B2%BD%EB%AC%98#%EC%A4%80%EA%B2%BD%EB%AC%98%EC%9D%98_%ED%92%8D%EC%88%98%EC%84%A4%ED%99%94

 

삼척 준경묘·영경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척 준경묘·영경묘(三陟 濬慶墓·永慶墓)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 장군의 묘인 준경묘와 장군의 부인 평창 이씨의 묘인 영경묘의 묘역으로,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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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경묘의 풍수설화

잘 알려진 명당자리에는 그에 따른 전설과 설화가 많이 있듯이 이곳 준경묘도 조선왕조 건국과 관련된 유명한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로 피신와 자리를 잡고 산 지 1년 만에 아버지(이양무)의 상(喪)을 당하게 된다.

이안사는 아버지 묘 자리를 구하려고 이산 저산 산등성이를 넘어 사방으로 헤매고 돌아다녔으나 마땅한 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마침 활기리 노동(盧洞) 산마루에 이르러 몹시 고단하여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한 도승이 동자승과 함께 나타나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한 곳을 가리키면서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하는 것이었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도승은 이어서 말하기를, "이곳이 제대로 발복하려면 개토제(開土祭)에 소 백(百)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시신을 금관(金棺)에 안장하여 장사를 지내야 한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바로 잡고 창업주가 될 것이다. 또한 이 땅은 천하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하는 것이었다. 동자승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더 있다가 그들은 다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 마리를 어디서 구하며, 더구나 금으로 만든 관은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부친의 묏자리를 명당에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형편상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안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궁여지책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소 백(百) 마리는 흰 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았다.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백 백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百牛)가 될 수 있고, 귀리짚은 같은 황금색이므로 금관과 의미가 통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마침 처가에 흰 얼룩소가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 처가에 간 이안사는 밭갈이 할 일이 있다며 흰 소를 잠시만 빌려 달라고 하여 소를 끌고 노동(盧洞) 산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처가에서 빌린 흰 소를 잡아서 제물로 사용하고, 부친을 넣을 관은 귀리짚으로 대신하여 아버지의 장사를 치루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8UPRSuv534 

 

 

삼척 준경묘·영경묘와 황장목

https://www.youtube.com/watch?v=Og-ag6_Mb7g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8%81%EA%B2%BD%EB%AC%98(%E6%B0%B8%E6%85%B6%E5%A2%93) 

 

영경묘(永慶墓) - sillokwiki

조선 태조의 5대조 이양무(李陽茂)의 부인 삼척이씨(三陟李氏)의 묘. 개설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에는 조선초기부터 태조의 5대조인 이양무와 그의 부인 삼척이씨의 묘로 알려진 두 기의 묘가 있

dh.aks.ac.kr

 

조선 태조의 5대조 이양무(李陽茂)의 부인 삼척이씨(三陟李氏)의 묘.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daichung&logNo=220249807915&categoryNo=41&parentCategoryNo=0 

 

삼척시 가볼만한 곳, 태조 이성계 5대 조모의 묘 영경묘 와 준경묘, 영경묘 재실

삼척 준경묘, 영경묘 재실 준경묘, 영경묘 재실은 이성계 5대조의 두 분께 올리는 제사를 모시는 곳이며 준...

blog.naver.com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56295?no=156295#0DKU

 

삼척시, ‘준경묘·영경묘’ 봉심 재현

국가사적 제524호인 강원 삼척시 준경묘·영경묘 봉심 재현 및 대제 문화체험이 오는 20일 오전 10시 미로면 활기리 일원에서 열린다. 준경묘·영경묘 봉향회가 주관하고 전주...

www.pressian.com

 

인물 평가는 후손이 결정한당게.

 

 

김두규, 한국의 풍수와 권력

https://www.youtube.com/watch?v=IRfqSBk_p5o 

 

 

https://www.youtube.com/watch?v=rEREXwJ2P9Q

 

 

https://cafe.daum.net/mj13h/QnS6/15971

 

Re: 준경묘(이태조 5대조) 영경묘(그 부인)/ 삼척 활기리

    https://www.youtube.com/watch?v=Sy6VH5SpKOQ  https://kydong77.tistory.com/19420 삼척 준경묘(濬慶墓)와 적송/ 道의 10가지 특징https://www.youtube.com/watch?v=BLlVLJlQ64Y 모든 가치관의 기준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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