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三代

상대 -上古, 中古

22대 지증마립간 /이상 上古, 이하 中古

28대 진덕여왕 /이상 中古,

삼국사기》에 의해서 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BC 57년이 건국연대로 되어 있으나 사로국이 성립된 것은 이보다 빠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혁거세는 양산() 기슭의 나정() 곁에 있던 알[] 속에서 나온 아이인데, 고허촌장인 소벌공()이 데려다 길렀다. 혁거세의 나이 13세가 되자 6부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왕호를 거서간(西:),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 혁거세는 즉위 후에 알영()을 왕비로 맞았는데, 알영은 사량리()의 알영정()에 나타난 용의 오른쪽 갈빗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지증왕 때에는 왕권강화와 내물왕계의 혈족결합을 전제로 왕위의 세습제를 확립하였고,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통치자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개칭하였고, 지방에 주 ·군 ·현()과 2소경()을 두어 전제군주제()의 기반을 굳혔다. 또한 처음으로 지방에 군주()를 두어 실직주()의 군주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 울릉도)을 정벌하게 하여 이를 신라영토에 편입시켰다(512).

중대 28대 진덕여왕 /이상 中古, 성골 이하 下古- 진골

중대 29대 태종무열왕

신라 진덕여왕 때 정권을 주도하였던 진골() 출신의 김춘추가 상대등 알천()의 양보로 왕에 추대되어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자 성골() 출신의 왕계는 진덕여왕으로 끝나고 이로부터 진골출신의 왕계가 비롯되었다. 무열왕은 당나라에 청원하여 나 ·당 연합군을 편성, 백제를 멸망시켰고(660), 문무왕은 백제의 부흥항쟁을 진압하는 한편 역시 당나라에 원군을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

하대 37대 선덕왕, 金氏, 名 亮相. 父 孝方海干,

하대 진골 귀족들의 왕권도전이 표면화하여 768년(혜공왕 4) 김대공()의 난을 시발로 96각간()에 의한 반란이 3년간 계속되다가 내물왕의 10대손 김양상()이 혜공왕을 살해하고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이가 신라 하대의 첫 왕이다.

신라 왕의 성씨& 왕의 명칭 변화

1.신라 왕의 성씨

朴: 북방계, 1-3대. 5-7대, 53대-55대.

昔: 해상계, 4대 탈해(아랍계?) 8-12대, 14-16대.

金: 유라시아 기마민족, 13대 미추닛금, 17대 내물마립간~52대, 56대 경순왕.

󰋬고구려; 북방에서 독립, 백제; 고구려에서 파생.

1-3, 4, 5-7, 8-12, 13, 14-16, 17-52, 53-55, 56

박 석 박석 김 석 김 박 김


2.왕의 명칭 변화 [삼국유사 왕력]


신라시대 여러 왕호에 대한 설명

거서간(居西干.박혁거세 BC 57~AD 4)

차차웅/자충(次次雄.慈充. 남해차차웅 AD 4~24)

이사금(尼師今.유리이사금~흘해이사금 AD 24~356)

마립간(麻立干.내물마립간~지증마립간 4년 356~513)

(王,지증왕4년 513~)으로 변천했다.

*지증마립간/지증왕 4년 10월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뀜

이후 왕이란 호칭이 일반화됐다.

지증왕 4년 10월

[은자주]왕호(王號)의 변화는 역할의 변화를 의미한다. <삼국사기>를 면밀히 분석해 볼 일이다. 예컨대 지증왕 4년 중국의 문화를 수입함으로써 '王'의 보편적 역할에 도달하였다.



삼국사기


○ 智證麻立干(지증마립간)이 즉위하니, 성은 金(김)씨, 諱(휘)는 智大路[지대로:혹은 智度路(지도로) 또는 智哲老(지철로)라고도 함]다. 奈勿王(내물왕)의 曾孫(증손)이요, 習寶(습보) 葛文王(갈문왕)의 아들이요 炤知王(소지왕)의 再從弟(재종제)다. 어머니는 金(김)씨, 鳥生(조생)부인이니 訥祇王(눌지왕)의 딸이요, 妃(비)는 朴(박)씨, 延帝(연제)부인이니, 登欣(등흔) 伊飡(이찬)의 딸이다. 王(왕)은 몸이 크고 膽力(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前王(전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므로 그 位(위)를 이어 선 것이니 이 때 왕의 나이는 64세였다.

○ [史臣(사신)이] 논하여 말하기를, 新羅王(신라왕)으로 居西干(거서간)이라 칭한 이가 하나요, 次次雄(차차웅)이라 한 이가 하나요, 이사금[尼師今(이사금)]이라 한 이가 열 여섯, 麻立干(마립간)이라 한 이가 넷이다. 신라 말의 名儒(명유) 崔致遠(최치원)은 帝王年代曆(제왕년대력)을 지을 때, 다 무슨 왕, 무슨 왕이라 칭하고 거서간 등의 칭호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 말이 야비하여 족히 칭할 것이 못 된다는 까닭일까. 左漢(좌한:左傳(좌전)과 漢書(한서)은 중국의 史書(사서)로, 오히려 楚語(초어)의 穀於(곡어토)와 흉노어의 犁孤塗(탱리고도) 등의 말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지금 신라의 事實(사실)을 기록함에 있어 그 方言(방언)을 그대로 두는 것도 좋은 것이다.


○ 4년 10월에 群臣(군신)이 말하기를, "시조께서 創業[창업:開國(개국)]한 이래로 國名(국명)이 일정치 아니하여 혹은 斯羅(사라)라 하고 혹은 斯盧(사로)라 하고 혹은 新羅(신라)라 하였으나, 臣(신)들은 생각건대 '신'[新(신)]은 德業(덕업)이 날로 새로운 뜻이요, '라'[羅(나)]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그것으로 國號(국호)를 삼는 것이 좋을 듯하오며, 또 생각건대 自古(자고)로 국가를 가진 이가 다 帝王(제왕)이라 칭하였는데 우리 始祖(시조)가 건국한 지 지금 제22대에 이르도록 단지 邦言(방언)으로 칭하여 尊號(존호)를 정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 群臣(군신)은 한뜻으로 삼가 新羅國王(신라국왕)이란 존호를 올리옵니다"고 하니, 왕이 거기에 좇았다.

[참고 1]

왕의 명칭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제2대 남해왕’와 ‘제3대 노례왕’조에 자세히 나온다. 이를 살펴본다.


제2대 남해왕 <삼국유사>


남해거서간을 일명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존장이란 칭호로 오직 이 왕만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요,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며, 비는 운제부인이다. 전한 평제원시 4년 갑자(A.D.4년)에 왕위에 올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지황 4년 갑신(A.D.2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왕이 삼황의 첫째라고 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 일컬었는데, 이는 곧 진한의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것을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 한다. 혹 차차웅 또는 자충(慈充)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김대문이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원래 무당을 일컫는 방언으로 세상 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하게 되므로 마침내 존장이 되는 이를 불러 자충(慈充)이라고 하였다고 했다. 이사금(尼師今)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잇결[齒理]를 이른 말이라고 한다.


처음 남해왕이 세상을 뜨자 아들 노례가 탈해에게 왕위를 사양하자 탈해가 말하기를,

"나는 거룩하고 슬기로운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들었다."

하고서 서로 시험하기를 청하였다. 두 사람은 떡을 물어 시험을 하였다. 옛날부터 이와 같이 해서 왕을 정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임금을 일러 마립간이라고 했다.

이를 김대문이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立一作袖)] 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으로 궐표(橛標)는 위에 따라 설치하고 임금의 궐은 그 주가 되고 신하의 궐은 그 아래가 되니 그래서 이렇게 이름을 한 것이라고 하였다.

사론(史論)에 이르길, 신라의 왕으로서 거서간과 차차웅(次次雄)이라 부른 이가 한분이고, 이사금(尼師今)이라 부르는 이는 열 여섯분이고, 마립간(麻立干)이라고 부르는 이는 모두 네 분이다.

신라 말기의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이 제왕연대력을 지을 때 모두를 모왕(某王)이라고만 부르고 거서간(居西干) 등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 말 자체가 혹 야비해서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함인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사실(史實)을 기록함에 있어서 방언을 그대로 두는 것도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모든 사람을 갈문왕(葛文王)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자세하게 알 수 없다.


제3대 노례왕(또는 유례왕) <삼국유사>


박노례임금이 처음에 매부인 탈해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탈해가 말했다.

"대개 덕이 있는 사람은 이(齒)가 많은 법이어서 닛결[닛금, 齒理]을 가지고 시험을 하여 봅시다."

이에 떡을 물어 시험을 하여 보니 왕이 이가 많았으므로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로 인하여 왕을 니질금(尼叱今)이라고 한 것이다. 이 니질금(尼叱今)의 칭호는 이 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참고2]

新羅의 왕력

第一赫居世 [거서간]

第二南解次次雄


第三弩禮一作弩尼叱今, 尼叱今 或作尼師今.

第四脫解一作吐解尼叱今, 昔氏.

第五婆娑尼叱今, 姓朴氏.

第六祗磨尼叱今 一作祗味, 姓朴氏.

第七逸聖尼叱今, 父弩禮王之兄, 姓朴氏.

第八阿達羅尼叱今

第九伐休尼叱今

第十奈(解)尼叱今

第十一助(賁)尼叱今

第十二理解尼叱今, 一作詁解王. 昔氏.


第十三未鄒尼叱今, 姓金氏, 始立

第十四儒禮尼叱今, 一作世里智王. 昔氏

第十五基臨尼叱今, 一作基立王. 昔氏

第十六乞解尼叱今, 昔氏.


第十七奈勿麻立干, 金氏.

第十八實聖麻立干

第十九訥祗麻立干

第二十慈悲麻立干, 金氏

第二十一毗處麻立干, (一)作(炤)知王. 金氏

第二十二智訂麻立干, 一作智哲(老), 又知度路王. 金氏.

*[사기]智證麻立干. 智證王(四年 冬十月,505) 이후 ‘王’을 사용.

第二十三法興王, 名原宗. 金氏

第二十四眞興王, 名彡麥宗, 一作深□. 金氏.

第二十五眞智王, 名舍輪, 一作金輪. 金氏.

第二十六眞平王, 名白淨.

第二十七善德女王, 名德曼. 父眞平王,

第二十八眞德女王, 名勝曼, 金氏.

第二十九太宗武烈王, 名春秋, 金氏 眞智王子龍春卓文興葛文王之子也.

第三十文武王; 名法敏. 太宗之子也,

第三十一神文王, 金氏, 名政明,

第三十二孝昭王, 名理恭, 一作洪, 金氏

第三十三聖德王, 名興光, 本名隆基, 孝昭之母弟也.

第三十四孝成王, 金氏, 名承慶. 父聖德王

第三十五景德王, 金氏, 名憲英. 父聖德,

第三十六惠恭王, 金氏, 名乾運. 父景德,

第三十七宣德王, 金氏, 名亮相. 父孝方海干,

第三十八元聖王, 金氏, 名敬愼, 一作敬信,

第三十九昭聖王, 一作昭成王. 金氏, 名俊邕. 父惠忠大子

第四十哀莊王, 金氏, 名重熙, 一云淸明. 父昭聖, 母桂花王后.

第四十一憲德王, 金氏, 名彦升. 昭聖之母弟.

第四十二興德王, 金氏, 名景暉. 憲德母弟.

第四十三僖康王, 金氏, 名愷隆, 一作悌顒. 父憲貞角干,

第四十四閔一作敏哀王, 金氏, 名明. 父忠恭角干,

第四十五神虎王, 金氏, 名佑(徵). 父均貞角干, *神虎王은 神武王임.

第四十六文聖王, 金氏, 名慶膺. 父神虎王

第四十七憲安王, 金氏, 名誼靖, 神虎王之弟.

第四十八景文王, 金氏, 名膺廉. 父啓明角干

第四十九憲康王, 金氏, 名晸. 父景文王,

第五十定康王, 金氏, 名晃. 閔哀王之母弟.

第五十一眞聖女王, 金氏, 名曼憲, 卽定康王之同母妹也.

第五十二孝恭王, 金氏, 名嶢. 父憲康王,

第五十三神德王, 朴氏, 名景徽, 本名秀宗. 母貞花夫人, 夫人之父順弘角干

第五十四景明王, 朴氏, 名昇英. 父神德, 母資成. 妃長沙宅, 大尊角干‧追封聖僖大王之子.

第五十五景哀王, 朴氏, 名魏膺. 景明之母弟也


第五十六敬順王, 金氏, (名)傅. 父孝宗伊干‧追封神興大王.



신라의 문화


1.신라사의 시대구분[삼국유사 ‘왕력’]

第二十二智訂麻立干/ 王(505년 이후) [500-513]

已上爲上古.

已下爲中古.


第二十八眞德女王[647-653]

已上中古‧聖骨.

已下下古‧眞骨.


上古. 中古 下古

BC.57 ---- 513 ----653 ----935

聖骨 眞骨


2. 신라의 왕통 성씨 & 묘제의 변화

朴: 북방계, 1-3대. 53대-55대.

昔:해상계, 4대 탈해(아랍계?)-12대, 14-16대.

金:유라시아 기마민족, 13대 미추닛금, 17대 내물마립간~52대, 56대 경순왕.

󰋬고구려; 북방에서 독립, 백제; 고구려에서 파생.


3.묘제의 변화 & 금관

◇金氏의 뿌리는 유라시아의 초원을 지배하고 동서교역을 담당했던 기마민족[훈족(흉노), 투루크족, 몽고족]으로 스키타이 문화를 형성함.

󰋬적석․목곽분의 묘제: 유라시아의 유목민족들 평야에 봉분. 미추왕, 대능원의 주인공들은 13대 미추왕, 17대 내물왕-22대 지증왕 일곱 왕.


13대 미추 263-283. 평야에 봉분. 23년 冬十月. 王薨 葬大陵(一云 竹長陵)

17대 내물356-401. 적석․목곽분. 황남대총.

22대 지증왕 500-513.4년 국호 신라. 처음으로 왕의 호칭 사용 및 시호 제정.

23대 법흥왕514-539. 횡혈식․석곽분. 산에 봉분함.

27年 秋七月. 王薨 諡曰法興. 葬於哀公寺北峰.

28대 진덕여왕 647-653. 3년(649)정월. 중국 의관 들여옴. 始服中朝衣冠.

󰋬금관 사용: 흑해 부근의 박물관에선 나무 양쪽에 사슴을 배치한 금관 보관, 사실적 조각.


4.금관은 김씨 왕들 초기에만 사용됨.

17대 내물마립간-28대 진덕여왕 2년.(356?-648)

금관: 나무 세 그루, 사슴뿔 2개. 나무는 하늘과의 통로, 사슴을 신성시함(수렵 대상, 시베리아 유목민의 문화)


[참고1] 한국의 언어

계통상― 알타이어족. 몽고어, 만주어, 한국어, 일본어, 터어키어

형태상― 첨가어[부착어, 교착어]. 의미부[실사]+형태부[허사:조사․어미]


[참고2]한국의 문자

훈민정음 창제 이전까지는 이두 향찰 등의 말문학과 한문문법에 맞는 기록문학의 이중성을 지니다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조선시대 말까지는 한글기록인 말문학과 한문기록인 기록문학의 이중구조가 유지됨.


詩― 漢詩

歌․謠― 우리말문학. 노래의 가사. 鄕歌, 麗謠[俗謠], 時調, 歌辭.

[참고3]한국문학의 대상

(전승방법) (표기문자) (창작시기)

󰋬국문학 ― 구비문학

기록문학 ― 한문문학

국문문학 ― 고전문학

현대문학*

*현대문학은 개화기문학(신문학)과 근대문학을 내포함.

◇김흥규,한국문학의 범위,한국문학연구입문,지식산업사,1982,p.15.





[주] 1905년 을사조약을 통곡한 장지연 선생의 황성신문 사설 "是日也放聲大哭"을 다시 읽어본다. 그 후 백여년이 지난 대명천지에 우째 이런 일이? 쪽발이들의 기획된 꼼수에 세계가 놀아나다니?

是日也放聲大哭 張志淵황성신문 2,101호(1905. 11. 20)
오늘은 목놓아 크게 우노라장지연

http://ruliweb.empas.com/ruliboard/read.htm?table=society_news&num=4430


曩日 伊藤侯가 韓國에 來하매, 愚我人民이 逐逐相謂曰,
侯는 平日東洋三國의 鼎足安寧을 自擔周旋하던 人이라,
今日 來韓함이 必也我國獨立을 鞏固히 扶植할 方略을 勵告하리라 하여,
自港至京에 官民上下가 歡迎함을 不勝하였더니 天下事가 難測者 多하도다
千萬夢外에 五條件이 何로 自하여 提出하였는고, 此條件은, 非旦我韓이라
東洋三國의 分裂하는 兆漸을 釀出함인즉, 藤侯의 原初主意가 何에 在한고.
雖然이나 我大皇帝陛下의 强硬하신 聖意로 拒絶함을 不已하셨으니 該約의
不成立함은 想像컨대 伊藤侯의 自知自破한 바어늘,
噫, 彼豚犬不若한 所謂 我政府大臣者가, 營利를 希覬하고 假嚇를 恇劫하여
逡巡然觳觫然 賣國의 賊을 甘作하여, 四千年疆土와 五百年 宗社를 他人에게 奉獻하고, 二千萬 生靈으로 他人의 奴隸를 敺作하니, 彼等 逐犬不若한
外大 朴齊純及 各大臣은 足히 深責할 것이 無하거니와, 名爲參政大臣者는
政府의 首揆라, 但以不字로 塞責하여, 要名의 資를 圖하였던가. 金淸陰의
裂書哭도 不能하고 鄭桐溪의 刃剚腹도 不能하고,偃然生存하여 世上에
更立하니, 何面目으로 强硬하신 皇上陛下를 更對하며, 何面目으로
二千萬同胞를 更對하리오.
嗚呼痛矣며 嗚呼憤矣라. 我二千萬爲人 奴隸之同胞여, 生乎아 死乎아.
檀旗以來四千年 國民精神이 一夜之間에 猝然滅亡而止乎아. 痛哉痛哉라.
同胞아 同胞아.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 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김청음(金淸陰):김상헌. 김상헌과 최명길 http://blog.naver.com/picazzu/42772446

**정동계(鄭桐溪):이름은 온(蘊). 이덕무/정온 행장http://blog.daum.net/truthonly/12336546

척화파 김상헌이 봉림대군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며 부른 비분가 시조. 3년간 고초.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쟈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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