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세종대왕기념관에는 소헌왕후의 무덤 석물이 눈길을 끄는데 이 석물은 광주의 것을 세종 사후 여주 영릉으로 천장하면서 땅에 묻었다가 발굴하여 이곳으로 옮겼다 한다. 주시경 선생의 무덤을 이곳에 이장한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여겼다. 목련은 아직 꽃잎을 열까말까 생각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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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고의 걸작품

547-5호/ 金正喜 影幀 조선정조 絹本設彩. 국립중앙박물관
중요민속자료 17호/國師堂의巫神圖, 조선시대
국보 300호/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화, 조선 현종, 불화
국보 240호/ 윤두서상尹斗緖像, 조선 숙종, 초상화
국보 217호/ 금강전도金剛全圖, 산수화, 조선 영조, 호암미술관
국보 239호/ 송시열상, 조선 효종, 초상화,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49호/ 동궐도, 조선 순조, 고려대박물관/동아대박물관
보물 744호/ 正祖大王筆菊花圖, 정조, 조선시대, 동국대학교

보물 782호/ 檀園畵帖 중 산수도, 김홍도, 조선 정조, 호암미술관
명 칭 : 보물 782호/ 檀園畵帖 중 산수 부분도-2첩
보물 527호/檀園風俗圖帖二十五幅, 김홍도,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180호/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 산수화, 조선 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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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땅 차지할 목적으로 으로 조작”

稿 등 1700년대 초 ‘토문’ 기록

1800년대 발간된 책엔 ‘도문강’으로

출처: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12310148


중국이 간도(間島) 땅을 차지하기 위해 역사기록에서 백두산정계비에 새겨진 ‘토문(土門)강’의 이름을 장기간에 걸쳐 ‘도문(圖們)강’으로 조작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박선영(43) 교수는 31일 발간되는 학술지 ‘중국근현대사 연구’ 제40호에 게재한 ‘토문강을 둘러싼 중국의 역사조작 혐의’라는 논문에서 이같이 밝혔다.

중국이 토문강을 도문강(한국명 두만강·豆滿江)으로 날조해 왔다는 주장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중국 역사기록을 근거로 밝혀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과 청은 1712년 ‘서쪽으로는 압록(鴨綠), 동쪽으로는 토문(土門)을 경계로 정한다’는 내용에 합의하고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다. 그런데 후일 토문 강의 위치를 놓고 조선은 쑹화(松花) 강의 지류로, 청은 두만강으로 서로 다르게 주장해왔다.

정계비의 토문강이 도문강으로 인정받게 되면 네덜란드와 스위스보다도 큰 면적 4만2700km²의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등 간도 지역이 모두 중국 땅이 되고, 토문강이 송화강의 지류로 인정되면 한국 땅이 되는 것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던 1700년대 초만 해도 중국의 역사책에 백두산 정상에서 발원하는 강은 ‘토문강’으로 기록된 데 반해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분쟁이 점차 격화된 18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토문강’과 ‘도문강’이 혼재돼 쓰이다가 1900년대 들어서는 완전히 ‘도문강’으로 정착됐다는 것.

박 교수는 이 근거로 청강희실록(淸康熙實錄)과 청사고(淸史稿) 등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1712년을 전후해 발간된 청 왕조의 역사기록에서는 백두산 정상에서 발원하는 강의 이름을 토문강으로 기록했지만, 1880년대에 발간된 같은 역사책에는 도문강으로 바꿔 기재한 사실을 들었다.

특히 1736년에 청 왕조가 발간한 지리지 성경통지(盛京通志)에 실린 ‘장백산도(長白山圖)’의 토문강이 뒤늦게 성경통지를 수록한 문연각사고전서(文淵閣四庫全書)에서는 갑자기 도문강으로 둔갑했다는 것.

박 교수는 이런 사실로 미뤄 볼 때 중국이 간도 땅을 차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기록을 조작한 혐의가 짙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중국이 토문강을 집중적으로 도문강으로 바꾼 시점이 조선과 청 왕조가 토문강의 위치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던 1880년대라는 점이 의혹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이 같은 지명 조작은 현대에 들어와서도 계속되고 있다. 중국은 한국의 두만강이 중국이 말하는 투먼 강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1933년 옌지(延吉) 현 산하의 후이무둥(灰幕洞) 촌을 투먼(圖們)으로 고친 데 이어 이듬해엔 투먼 시로 승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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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오딧세이]

조선족 간도 정착이 불법 이주였다고?

2008 07/01 뉴스메이커 781호

지리부도 교과서에 실린 간도 개척 관련 지도.

중국은 간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오래전부터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 측 입장에서 무조건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만 한다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일 수 있다. 중국이 과연 간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점에서 주장이 그른지 잘 살펴봐야 한다.

중국은 간도에 조선족들이 유입된 시점을 1860년대로 보고 있다. 연변일보(2004년 2월 20일자)에 실린 간도 관련 기사를 보면 중국이 어떻게 간도를 바라보고 있는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19세기 60년대, 조선 종성군 하산봉에 사는 농사군 리영수 형제가 끝내 죽음을 자초하는 기아와 맞서 도발적인 행동을 감행한다. 떼목을 타고 용감히 강을 건넌 것이다. 그리고 버드나무를 찍어내고 풀을 베여내여 밭을 일구었다. 그때를 선구촌 제1촌민소조의 농민 시인 심정호씨는 이렇게 말한다. ‘로인들한테서 들은 얘긴데 130년 전에 종성 하산봉의 리영수 형제가 떼목을 타고 강을 건너와 이 천평벌에 첫 괭이를 박았다고 그럽니다. 그 먼저 종성 사람들은 저 뚝 너머 사이섬에서 농사질을 했다는군요. 리영수 형제는 월강죄가 무서워 사이섬에 가 농사를 지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다음부터 저기 산 너머 마늘골이랑, 애끼골이랑에 가 밭을 일구었고 석정골이며 연집골까지 들어가 화전을 일구면서도 사이섬에 가 농사 짓는다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더군요.”

1860년대 무인지대 조선인이 선점
이 사이섬이 간도가 됐다는 이야기다. 이 기사 내용에서 ‘도발적인 행동’ ‘농사질’ ‘월강죄(강을 넘은 죄)’ ‘거짓말’이란 표현만 보아도 중국 측이 간도 이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즉 조선족이 불법으로 남의 땅으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서는 1880년대에 이르러 조선족이 대거 넘어왔다는 것을 싣고 있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는 몇 가지 사실이 왜곡돼 있다. 1860년 경작이 있기 전, 조선인들은 삼을 채취하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조선과 청,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는 무인지대였다. 그래서 이곳에 사람들이 정착할 경우 조선과 청나라, 양측에서 문제 삼았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많은 조선인이 그 지역에 농사를 지으며 정착했다. 정착을 먼저 한 사람은 모두 조선인이다. 그렇다면 이 땅은 과연 누구의 땅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에 두만강을 넘어간 것을 불법이라고 해석하는 조선족은 물론 이들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불법을 공공연히 저질렀고, 그 결과 자신이 중국 땅에 남겨졌다고 해석하는 우를 범하는 셈이다. 이 기사는 간도 땅이 조선의 영토라는 주장이 있게 된 것에 대해 일본 탓으로 돌리며 마무리하고 있다.

“간도는 조선 땅” 주장은 일본 탓?
“결국 일제는 력사문헌과 실지조사를 통하여 ‘간도는 조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두만강 변계 문제를 리용하여 저들의 대륙 침략 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연변에 침입했던 것이다. 조선 사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연변에 들어온 일제는 그후 조선족을 탄압하고 략탈하는 야수의 무리가 되었다.” (연변일보 2004년 2월 20일자)

모든 것을 일본의 탓으로 돌리고 싶겠지만, 20세기 초반 일본의 야욕과는 상관없이 간도는 이미 1885년 을유감계담판(국경 협상)에서도 양측 간에 논란이 되었다. 당시 감계사인 이중하는 청나라 측 대표와 함께 백두산 정계비 인근 물줄기를 직접 찾아가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강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잘못된 역사가 거짓말을 할 뿐이다.

<윤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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