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제문(吊義帝文)


무오사화 사적(戊午史禍事蹟)

-점필재집 문집 부록

[참고]

조의제문 [弔義帝文]

조선 전기의 학자 김종직(金宗直)이 세조(世祖)의 찬탈(纂奪)을 비난한 글.

김종직은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이 글을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편찬책임자는 이극돈(李克墩)으로 이른바 훈구파(勳舊派)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일손의 사초 중에 이극돈의 비행(非行)이 기록되어 있어 김일손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던 중, 김종직의 ‘
조의제문’을 사초 중에서 발견한 이극돈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기화(奇貨)로 하여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는 사림파(士林派)를 숙청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 일파를 세조에 대한 불충(不忠)의 무리로 몰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움직여, 큰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인데, 그 결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이 참수(斬首)되었다.

[은자주] 영남사림의 대표주자로 중앙관계에 진출하여 문장으로 서거정과 상벽을 이루었던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집에 넣은 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음미해 본다. 성종실록 편찬이 계기가 되어 영남사림은 중앙정계에서 훈고파에게 된서리를 맞는다. 그런 바른 소리를 하고도 태연했었던 김종직의 의리관을 다시금 생각한다.



홍치 11년 무오(1498) 연산군(燕山君) 4년.


7월에 사화가 일어났다. 유자광(柳子光)이 연산군에게 아뢰어 대역(大逆)으로 논죄(論罪)함으로써 즉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게 하였고, 집은 적몰(籍沒)되어 정부인(貞夫人) 문씨(文氏)는 운봉현(雲峯縣)에 정속(定屬)되었다. 부인은 즉시 머리를 깎고 복상(服喪)하였다. 그는 적중(謫中)에 있으면서 항상 탄식하여 말하기를 “가옹(家翁)의 평생의 지절(志節)은 천일(天日)이 밝게 비추어 아는 바인데, 죽은 뒤에 잘못된 화를 입으니, 이 또한 세운(世運)에 관계된 것이고 보면 의당 순종하여 받을 뿐이다.” 하고, 더 이상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9년 동안 적중에 있으면서 절조(節操)를 더욱 힘써 한 번도 이를 드러내어 웃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복(敬服)하였다.


아들 숭년(嵩年)은 이 때 나이 13세로 합천군(陜川郡)에 안치(安置)되었는데, 나이가 차지 못했다는 이유로 형화(刑禍)를 면하였다.
이 달 17일에 내린 전지(傳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종직(金宗直)은 초야의 천사(賤士)로 세조조(世祖朝)에 등제(登第)하고 성종조(成宗朝)에는 경연(經筵)에 발탁되어 오랫동안 시종(侍從)의 지위에 있다가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러서는 총은(寵恩)이 조정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가 병으로 물러감에 미쳐서는 성종께서 오히려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특별히 미곡(米穀)을 내려서 그 여생을 잘 마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수찬한 사초(史草) 안에서 부도(不道)한 말로 선왕조(先王朝)의 일을 속여 기록하고, 또 자기 스승인 종직의 조의제문(吊義帝文)을 기재하였다.


조의제문에 이르기를


‘정축년 10월 일에 내가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을 경유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한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헌걸찬 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적(項籍)에게 시해되어 침강(郴江)에 빠뜨려졌다.」 하고는, 언뜻 보이다가 이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꿈을 깨고 나서 깜짝 놀라 말하기를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 사람이니, 지역의 거리는 만여 리뿐만이 아니요 세대의 선후 또한 천여 년이나 되는데, 꿈자리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 얼마나 상서로운 일인가. 또 사서(史書)를 상고해 보면 강(江)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혹시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 비밀히 격살(擊殺)하여 그 시체를 물에다 던져버렸던가. 이것을 알 수가 없다.」 하고, 마침내 글을 지어서 조문하기를,


惟天賦物則以予人兮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부여해 사람에게 주었으니

孰不知其遵四大與五常 그 누가 사대오상을 준행할 줄을 모르리오


[주D-001]사대 : 세상 만물을 이루는 근본이 되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네 가지를 말한다.
[주D-002]오상 :
인간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오륜(五倫)의 뜻으로 쓰인다.


匪華豐而夷嗇兮 중화엔 풍부하고 이적엔 인색한 게 아니거니

曷古有而今亡 어찌 옛날에만 있었고 지금엔 없으랴

故吾夷人又後千祀兮 그러므로 나는 동이 사람이요 또 천 년 뒤의 오늘에

恭吊楚之懷王 삼가 초 나라의 회왕을 조문하노라


昔祖龍之弄牙角兮 옛날 진 시황이 포학을 자행하여

四海之波殷爲衁 사해의 물결이 검붉은 피바다를 이루니

雖鱣鮪鰍鯢曷自保兮 상어나 미꾸라지도 어찌 스스로 보전하랴

思網漏以營營 그물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네

時六國之遺祚兮 이 때 산동 육국의 후사가 된 사람들은

沈淪播越僅媲夫編氓 침몰하고 방랑하는 고작 필부 편맹들뿐이었네

梁也南國之將種兮 항량은 남쪽 초 나라 장수의 후예로서

踵魚狐而起事 어호를 뒤따라 대사를 일으키어

求得王而從民望兮 임금을 찾아 얻어서 백성의 소망을 따르니

存熊繹於不祀 웅역에게 끊어진 제사를 다시 보존했도다


[주D-003]항량은……후예로서 : 항량은 곧 초(楚) 나라의 명장(名將)인 항연(項燕)의 아들이며 항우(項羽)의 숙부(叔父)이기도 한데, 그가 진(秦) 나라 이세(二世) 초기에 진섭(陳涉) 다음으로 항우와 함께 군대를 일으키어 진군(秦軍)과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을 민간에서 찾아다가 초 회왕으로 삼았었는데, 초 회왕은 뒤에 다시 항우에 의해 의제(義帝)로 추대(推戴)되었다가 끝내는 항우에 의해 시해되고 말았다.
[주D-004]어호 :
어백 호구(魚帛狐篝)의 준말로, 즉 진(秦) 나라 이세(二世) 초기에 가장 먼저 거사(擧事)하였던 진섭(陳涉)을 가리킴. 진섭이 거사하기 직전에 대중을 유혹시키기 위하여 비단에다 붉은 글씨로 ‘진승왕(陳勝王: 승〈勝〉은 이름이고, 자가 섭〈涉〉임)’ 이라 써서 몰래 남의 그물에 든 고기의 뱃속에 넣어두고 그 고기를 사다가 삶아 먹은 군졸이 그것을 보고 매우 괴이하게 여긴 일과, 또는 총사(叢祠) 안에 밤중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여우의 울음 소리로 울면서 외치기를 “대초가 일어나고 진승이 왕이 되리라.[大楚興 陳勝王]”고 하여, 대중의 여론을 조성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5]웅역 :
주 성왕(周成王) 때 사람으로, 초(楚) 나라 시봉조(始封祖)이다.


握乾符而面陽兮 제왕의 상서를 쥐고 왕위에 오르니

天下固無尊於芊氏 천하에 진실로 천씨보다 더 높은 이 없었고

遣長者以入關兮 장자를 보내어 관중을 들어가게 하였으니

亦有足覩其仁義 또한 족히 인의로운 마음을 볼 수 있었네

羊狠狼貪擅夷冠軍兮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여 멋대로 관군을 멸족시켰는데

胡不收以膏齊斧 어찌 그를 잡아다가 처형하지 않았던가


[주D-006]천씨 : 초(楚) 나라의 성(姓)이다.

[주D-007]장자를……하였으니 : 장자는 관후장자(寬厚長者)의 준말로, 즉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가리키는데, 그가 처음 초 회왕으로부터 먼저 관중(關中)에 들어간 사람을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고 항우(項羽)와 길을 나누어서 진(秦) 나라를 공략하여, 항우보다 먼저 관중에 들어가 진왕 자영(秦王子嬰)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관중을 조용히 평정하였던 일을 이른 말이다.
[주D-008]관군 :
초 회왕의 상장군(上將軍)인 경자관군(卿子冠軍) 송의(宋義)를 가리키는데, 그는 항우에게 기습 살해당하고 멸족(滅族)까지 당하였다.


嗚呼勢有大不然者 아 형세가 대단히 어긋난 것이 있었으니

吾於王而益懼 나는 회왕을 위하여 더욱 두려웁도다

爲醢醋於反噬兮 끝내 배신한 자에게 시해를 당하였어라

果天運之蹠盭 과연 천운이 크게 어긋났도다

郴之山磝以觸天兮 침강 가의 산은 우뚝이 하늘에 치솟았는데

景晻曖而向晏 햇빛은 침침하여 저물녘을 향하였고

郴之水流以日夜兮 침강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데

波淫泆而不返 물결은 넘쳐 흘러 되돌아오지 않도다

天長地久恨其曷旣兮 한스러워라 천지는 장구하여 언제 다하랴마는

魂至今猶飄蕩 그 넋은 지금까지도 떠돌아다니리라


余之心貫于金石兮 나의 충심은 금석을 뚫을 만하기에

王忽臨乎夢想 왕께서 갑자기 몽상에 나타났도다

循紫陽之老筆兮 자양의 노련한 필법을 따라

思螴蜳以欽欽 마음 설레며 공경히 사모하여

擧雲罍以酹地兮 술잔 들어 땅에 부어서 제사지내니

冀英靈之來歆 바라건대 영령은 내려와 흠향하소서


했다.’ 하였다.
그런데 조룡(祖龍)이란 진 시황(秦始皇)을 가리킨 말로서, 종직(宗直)이 진 시황을 세묘(世廟)에 비유한 것이고, ‘왕(王)을 찾아 얻어서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는 데의 왕은 바로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을 가리키는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손자 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로 삼았으므로, 종직이 의제를 노산(魯山)에게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종직이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여 제멋대로 관군(冠軍)을 멸족시켰다.’고 하였는데,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다.’는 것은 세묘를 가리킨 말이고, ‘멋대로 관군을 멸족시켰다.’는 것은 곧 세묘가 김종서(金宗瑞) 죽인 것을 가리킨 말이다. 그 ‘어찌 그를 잡아다가 처형하지 않았던가.’라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어찌하여 세묘를 잡아 죽이지 않았던가.’의 뜻으로 말한 것이고, 그 ‘배신한 자에게 시해되었다.’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묘를 죽이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세묘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 ‘자양(紫陽)의 노련한 필법을 따라서 마음 설레며 공경히 사모한다.’는 것은 종직이 주자(朱子)로 자처하여 그의 마음에 이 부(賦)를 지어서 주자의 《강목(綱目)》에 비긴 것이었다.


그런데 김일손(金馹孫)이 그 글을 찬양하여 말하기를 ‘이것으로 충분(忠憤)을 부쳤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는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奸臣)이 난(亂)을 획책함으로써 화기(禍機)가 거의 일어날 무렵에 역도(逆徒)들을 죽여 제거함으로 인하여 종사(宗社)가 위태로웠다가 다시 편안해져서,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업(功業)이 높고 높으며 그 덕(德)이 백왕(百王)에 으뜸가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종직이 자기 문도(門徒)와 더불어 성덕(聖德)을 비난하고, 심지어는 일손으로 하여금 그런 글을 사서(史書)에다 속여 기록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생긴 일이겠는가. 남몰래 불신(不臣)의 마음을 품고서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내가 지금 생각하매 나도 모르게 참혹하고 두렵구나. 그 형명(刑名)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그리하여 7월 27일에 반사(頒赦)하였다. 그 반사의 교지(敎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는 신무(神武)의 자용(姿容)으로 국가가 위의(危疑)스럽고 뭇 간신(奸臣)들이 굳게 자리잡고 있는 때를 당하여 침착한 살핌과 슬기로운 결단으로 화란(禍亂)을 평정함으로써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절로 붙일 곳이 있게 되었으니, 그 성신(聖神)한 공덕(功德)은 백왕(百王)에 으뜸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종(祖宗)의 간대(艱大)한 사업에 광채를 더하고, 자손(子孫)들을 도와서 편안하게 하는 계책을 끼쳐줌으로 인하여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날의 태평 성대에 이르렀다.


그런데 뜻밖에 간신 김종직이 화심(禍心)을 품고 은밀히 당류(黨類)를 결합하여 흉악한 꾀를 부리려고 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래서 항적(項籍)이 의제(義帝)를 시해한 일에 가탁하여 이를 문자(文字)로 드러내서 선왕(先王)을 헐뜯었으니, 그 하늘에 닿는 죄악을 용서할 수 없으므로,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여 그를 부관참시(剖棺斬屍)하라.


그리고 그의 문도인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는 서로 간악한 붕당(朋黨)을 지어 같은 무리끼리 서로 도와서 그의 글을 충분(忠憤)이 격앙된 바라고 칭미(稱美)하여 이를 사초(史草)에 써서 먼 후세에까지 전하려고 하였으니, 그 죄는 종직과 같은 등급이므로, 모두 능지처참(凌遲處斬)하도록 하라. 김일손은 또 이목(李穆), 허반(許磐), 강겸(姜謙) 등과 함께 선왕께서 하지 않은 일까지 속여 꾸며서 서로서로 말을 전하여 그것을 사초에 기록하였으니, 이목, 허반은 모두 처참(處斬)하고, 강겸은 결장일백(決杖一百)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여 극변(極邊)으로 보내서 노복으로 삼도록 하라.


표연말(表沿末), 홍한(洪翰), 정여창(鄭汝昌), 무풍부정 총(茂豐副正摠) 등은 난언죄(亂言罪)를 범하였고,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언(亂言)하는 것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으니, 모두 결장일백하여 유삼천리(流三千里)하도록 하라.


이종준(李宗準), 최보(崔溥), 이원(李黿), 이주(李胄), 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강백진(康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은 모두 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결성하여 서로 칭찬하고, 혹은 국정(國政)을 비난하고 시사(時事)를 비방하기도 하였으니, 임희재는 결장일백하고, 이주는 결장일백하여 극변에 부처(附處)하라. 이종준, 최보, 이원, 김굉필, 박한주,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모두 결장팔십하여 원방(遠方)에 부처하되, 이 유배된 사람들에게는 모두 봉수정로간(烽燧庭爐干)의 역(役)을 정하도록 하라.


수사관(修史官) 등은 김일손 등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았으니, 어세겸(魚世謙), 이극돈(李克墩), 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 등은 파직하고, 홍귀달(洪貴達), 조익정(趙益貞), 허종(許琮)허종은 갑인년에 이미 죽었으니, 필시 허침(許琛)일 것이다., 안침(安琛) 등은 좌천(左遷)하라. 그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모두 이미 처결하고, 삼가 사유(事由)를 가지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고하였다.


생각건대 나는 과매(寡昧)한 사람으로 간당(奸黨)을 제거하고 나니, 두려운 생각이 이미 깊은 한편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그러므로 지금 7월 27일 어둑새벽 이전까지의 강도(强盜), 절도(竊盜) 및 강상죄(綱常罪)에 관계된 죄인 이외의 죄수들에 대해서는 형(刑)이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은 자를 막론하고 모두 용서하여 석방하라. 이들에 대하여 감히 유지(宥旨) 이전의 일로써 서로 고어(告語)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죄로써 벌줄 것이다.


아, 인신(人臣)은 군왕에 대하여 반역의 뜻도 품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들은 이미 부도(不道)의 죄를 받았으니, 천지(天地)가 풀리어 뇌우(雷雨)가 이르듯이 의당 새로운 은택을 널리 펴야 하겠으므로, 이와 같이 교시(敎示)하노니, 자세히 알아서 실천하도록 하라. ……”



홍치 17년 갑자(1504) 연산군 10년.


9월에 사화(士禍)가 재차 일어나서 김굉필, 박한주 등 여러 사람에게 가죄(加罪)하였다.


정덕(正德) 2년 정묘(1507) 중종 대왕(中宗大王) 2년.


죄를 입은 제현(諸賢)들의 원통함을 추후하여 신설(伸雪)하였다. 이 때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김흠조(金欽祖)·정충량(鄭忠梁), 대교(待敎) 이희증(李希曾)·김영(金瑛), 검열(檢閱) 권벌(權橃)·이영(李泳)·정웅(鄭熊)·윤인경(尹仁鏡)·윤지형(尹止衡)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무오년에 수사관(修史官)들이 한갓 사적인 혐오 때문에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고 은밀히 대신(大臣)에게 촉탁하여 그의 노염을 돋구고, 유자광(柳子光)이 따라서 이를 창화하여 함께 의논해서 밀계(密啓)함으로써 끝내 대화(大禍)를 불러온 것이니, 이는 곧 은밀히 과실을 가리려다가 끝내는 가리지 못하고 도리어 과실이 당일에 폭양(暴揚)되어 만세 후까지 누가 미치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만세의 사가(史家)의 법칙을 훼손시키고 한편으로는 임금의 사람 죽이기 좋아하는 마음을 열어놓았기에, 그 죄가 의당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인데 상(賞)이 도리어 미쳤으니, 신들은 몹시 분개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요즘에는 모두 무오년의 화(禍)를 경계하여 사기(士氣)가 매우 꺾이었습니다. 신들은 김일손 등을 애석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사가의 법칙이 이로부터 모조리 폐해짐으로써 만세의 공론(公論)이 없어져버릴까 매우 염려하는 바입니다. ……” 하였다.


그러자 전교하기를,

“김종직, 김일손 등 사련(辭連)으로 죄를 입은 사람들은 과연 애매한 점이 있으니, 그들을 복관(復官)시키고, 그 나머지는 모두 추증(追贈)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때의 추관(推官)인 윤필상(尹弼商), 노사신(盧思愼), 유자광(柳子光) 등에게 상사(賞賜)한 물품과 무오년에 사국(史局)의 일을 누설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기청(日記廳)으로 하여금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 해에 밀양(密陽) 대동(大洞)의 구택(舊宅) 뒷산 경좌 갑향(庚坐甲向)의 언덕에 개장(改葬)하였다.
상(上)이 특명으로 그 부인에게 늠료(廩料)를 지급하고, 그 자손들을 찾아서 녹용(錄用)하도록 하여, 아들 숭년(嵩年)이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 동부 참봉(東部參奉)에 연해서 제수되었다. 그러나 숭년은 화를 당한 나머지 명리(名利)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모부인(母夫人)의 명령에 따라 사은(謝恩)을 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모친을 섬기면서 효성을 다하였으므로, 향인(鄕人) 및 사림(士林)들이 지금까지 칭도하고 있다.


참봉은 주부(主簿) 손순무(孫筍茂)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윤(府尹) 손영유(孫永裕)가 바로 그의 조(祖)이다. 아들 3인을 두었는데, 윤(綸)은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요절하였고, 유(維)는 참봉 최필손(崔弼孫)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유(紐)는 지평(持平) 이신(李伸)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선생의 문집(文集) 초본(抄本) 20여 권이 모두 불타버렸으나, 오히려 남은 난고(亂稿)가 들보 위에 쌓여 있었는데, 가인(家人)이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하여 이를 또 불 속에 던져버리자, 곁에 있던 사람이 활활 타는 불 속에서 1, 2편(編)을 꺼냄으로써 겨우 완전히 태워버림은 면하였다. 그래서 지금 보존된 것은 10분에 2, 3도 안 되는데, 선생의 생질 강중진(康仲珍)이 이를 상자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무오년으로부터 22년 뒤인 경진년(1520, 중종15)에 읍재(邑宰)와 상의하여 판각(板刻)하도록 하였고, 남곤(南袞)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그리고 예조(禮曹)에서는 선생이 살았던 고을과 강도(講道)하던 곳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봄, 가을의 중월(仲月)이면 관(官)에서 치제(致祭)할 일로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하니, 의정부가 계청(啓請)하여 상이 윤허했으므로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밀양(密陽)의 예림서원(禮林書院), 선산(善山)의 자양서원(紫陽書院), 함양(咸陽)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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