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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산장잡기(山莊雜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산장잡기(山莊雜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산장잡기(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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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산장잡기(山莊雜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산장잡기(山莊雜記)

1.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2. 야출고북구기후지(夜出古北口記後識)

3.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4. 만국진공기(萬國進貢記)

5. 만국진공기후지(萬國進貢記後識)

6. 상기(象記)

7. 승귀선인행우기(乘龜仙人行雨記)

8. 만년춘등기(萬年春燈記)

9. 매화포기(梅花砲記)

10. 납취조기(蠟嘴鳥記)

11. 희본명목기(戲本名目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연경(燕京)으로부터 열하에 이르는 데는 창평(昌平)으로 돌면 서북쪽으로는 거용관(居庸關)으로 나오게 되고, 밀운(密雲)을 거치면 동북으로 고북구(古北口)로 나오게 된다. 고북구로부터 장성(長城)으로 돌아 동으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는 7백 리요, 서쪽으로 거용관에 이르기는 2 80리로서 거용관과 산해관의 중간에 있어 장성의 험요(險要)로서는 고북구 만한 곳이 없다. 몽고가 출입하는 데는 항상 그 인후가 되는데 겹으로 된 관문을 만들어 그 요새를 누르고 있다. 나벽(羅壁)의 지유(識遺)에 말하기를,

 

연경 북쪽 8백 리 밖에는 거용관이 있고, 관의 동쪽 2백 리 밖에는 호북구(虎北口)가 있는데, 호북구가 곧 고북구이다.”

하였다. ()의 시초부터 이름을 고북구라 해서 중원 사람들은 장성 밖을 모두 구외(口外)라고 부르는데, 구외는 모두 당의 시절 해왕(奚王 오랑캐의 추장)의 근거지로 되어 있었다. 금사(金史)를 상고해 보면,

 

그 나라 말로 유알령(留斡嶺)이 곧 고북구이다.”

했으니, 대개 장성을 둘러서 구()라고 일컫는 데가 백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 산을 의지해서 성을 쌓았는데, 끊어진 구렁과 깊은 시내는 입을 벌린 듯이 구멍이 뚫린 듯이 흐르는 물이 부딪쳐 뚫어지면 성을 쌓을 수 없어 정장(亭鄣)을 만들었다. 황명(皇明) 홍무(洪武) 시절에 수어(守禦) 천호(千戶)를 두어 오중관(五重關)을 지키게 했다. 나는 무령산(霧靈山)을 돌아 배로 광형하(廣硎河)를 건너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 나가는데, 때는 밤이 이미 삼경(三更)이 되었다. 중관(重關)을 나와서 말을 장성 아래 세우고 그 높이를 헤아려 보니 10여 길이나 되었다. 필연(筆硯)을 끄집어내어 술을 부어 먹을 갈고 성을 어루만지면서 글을 쓰되,

 

건륭 45년 경자 8 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朴趾源)이 이곳을 지나다.”

하고는, 이내 크게 웃으면서,

 

나는 서생(書生)으로서 머리가 희어서야 한 번 장성 밖을 나가는구나.”

했다.

옛적에 몽 장군(蒙將軍 몽염(蒙恬))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임조(臨洮)로부터 일어나서 요동에 이르기까지 성을 만여 리나 쌓는데, 그 중에는 지맥(地脈)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으니, 이제 그가 보니 그가 산을 헤치고 골짜기를 메운 것이 사실이었다. 슬프다. 여기는 옛날부터 백 번이나 싸운 전쟁터이다.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이 유수광(劉守光)을 잡자 별장(別將) 유광준(劉光濬)은 고북구에서 이겼고, 거란의 태종(太宗)이 산 남쪽을 취할 적에 먼저 고북구로 내려 왔다는 데가 곧 이곳이요, 여진(女眞)이 요()를 멸망시킬 때 희윤(希尹 여진의 장수)이 요의 군사를 크게 파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요, 또 연경을 취할 때 포현(蒲莧 여진의 장수)이 송의 군사를 패한 곳도 여기요, 원 문종(元文宗)이 즉위하자 당기세(唐其勢 여진의 장수)가 군사를 여기에 주둔했고, 산돈(撒敦 여진의 장수)이 상도(上都) 군사를 추격한 것도 여기였다. 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가 쳐들어 올 때 원의 태자는 이 관으로 도망하여 흥송(興松)으로 달아났고, 명의 가정(嘉靖) 연간에는 암답(俺答 미상)이 경사(京師)를 침범할 때도 그 출입이 모두 이 관을 경유했다. 그 성 아래는 모두 날고 뛰고 치고 베던 싸움터로서 지금은 사해가 군사를 쓰지 않지만 오히려 사방에 산이 둘러 싸이고 만학(萬壑)이 음삼(陰森)하였다. 때마침 달이 상현(上弦)이라 고개에 걸려 떨어지려 하는데, 그 빛이 싸늘하기가 갈아 세운 칼날 같았다. 조금 있다가 달이 더욱 고개 너머로 기울어지자 오히려 뾰족한 두 끝을 드러내어 졸지에 불빛처럼 붉게 변하면서 횃불 두 개가 산 위에 나오는 것 같았다. 북두(北斗)는 반 남아 관 안에 꽂혀졌는데, 벌레 소리는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은 숙연(肅然)한데, 숲과 골짜기가 함께 운다. 그 짐승 같은 언덕과 귀신 같은 바위들은 창을 세우고 방패를 벌여 놓은 것 같고, 큰 물이 산 틈에서 쏟아져 흐르는 소리는 마치 군사가 싸우는 소리나 말이 뛰고 북을 치는 소리와 같다. 하늘 밖에 학이 우는 소리가 대여섯 번 들리는데, 맑고 긴 것이 피리소리 같아 혹은 이것을 거위소리라 했다.

 

 

[C-001]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 ‘다백운루본(多白雲樓本)’에는 도고북구하기(渡古北口河記)로 되어 있다.

[D-001]나벽(羅壁) : 송의 학자. 자는 자창(子蒼).

[D-002]정장(亭鄣) : 요새(要塞)같이 만들어 사람의 출입을 검열하는 곳.

[D-003]유수광(劉守光) : 후량(後梁)의 장수로서 뒤에 연()의 황제라 자칭하였다.

[D-004]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 : 몽고 사람. 원실(元室)의 지예(支裔).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야출고북구기후지(夜出古北口記後識)

 

 

우리나라 선비들은 생장하고 늙고 병들고 죽을 때까지 강역(疆域)을 떠나지 못했으나, 근세의 선배로서 오직 김가재(金稼齋)와 내 친구 홍담헌(洪湛軒)이 중원의 한 모퉁이를 밟았다. 전국(戰國) 시대 일곱 나라에서 연()이 그 중의 하나인데 우공(禹貢)의 구주(九州 서경(書經)의 편명)에는 기()가 이 하나이다. 천하로써 본다면 가위 한 구석의 땅이지만 원과 명을 거쳐 지금의 청에 이르기까지 통일한 천자들의 도읍터로 되어 옛날의 장안(長安)이나 낙양(洛陽)과 같다. 소자유(蘇子由)는 중국 선비지만 경사(京師)에 이르러 천자의 궁궐이 웅장함과 창름(倉廩)부고(府庫)와 성지(城池)원유(苑囿)가 크고 넓은 것을 우러러 보고 나서 천하의 크고 화려한 것을 알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거늘, 하물며 우리 동방 사람으로서야 한번 그 크고 화려한 것을 보았다면 그 다행으로 여김이 어떠했으리요. 지금 내가 이 걸음을 더욱 다행으로 생각한 것은 장성을 나와서 막북(漠北)에 이른 것은 선배들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깊은 밤에 노정(路程)을 따라 소경같이 행하고 꿈속같이 지나다 보니 그 산천의 형승(形勝)과 관방(關防)의 웅장하고 기이한 것을 두루 보지 못했다. 때는 가을 달이 비끼어 비치고, 관내(關內)의 양쪽 언덕은 벼랑으로 깎아 섰는데, 길이 그 가운데로 나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담()이 작고 겁이 많아서 혹 낮에도 빈 방에 들어가거나 밤에 조그만 등불을 만나더라도 미상불 머리털이 움직이고 혈맥이 뛰는 터인데, 금년 내 나이 44세건만 그 무서움을 타는 성질이 어릴 때나 같다. 이제 밤중에 홀로 만리장성 밑에 섰는데, 달은 떨어지고 하수(河水)는 울며, 바람은 처량하고 반딧불이 날아서 만나는 모든 경개가 놀랍고 두려우며 기이하고 이상하였건만 홀연히 두려운 마음은 없어지고 기흥(奇興)이 발발(勃勃)하여 공산(公山)의 초병(草兵)이나 북평(北平)의 호석(虎石)도 나를 놀라게 하지 못하니, 이는 더욱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이다. 한스러운 바는, 붓이 가늘고 먹이 말라 글자를 서까래만큼 크게 쓰지 못하고, 또 장성의 고사(故事)를 시로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에 동리에서 다투어 병술로 위로하며, 또 열하의 행정(行程)을 물을 때에는, 이 기록을 내 보여서 머리를 모아 한 번 읽고 책상을 치면서 기이하다고 떠들어 보리라.

 

 

[C-001]야출고북구기후지(夜出古北口記後識)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이에서는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D-001]김가재(金稼齋) : 조선 문학가 김창업(金昌業). 가재는 그의 별호인 노가재(老稼齋)의 준말.

[D-002]소자유(蘇子由) : 송의 문학가 소철(蘇轍). 자유는 그의 자.

[D-003]초병(草兵) : 팔공산(八公山)에 서 있는 풀까지도 군사로 보였다는 부견(符堅)의 고사.

[D-004]호석(虎石) : ()의 이광(李廣)이 우북평(右北平)의 바위를 범으로 보고서 활을 쏘았다는 고사.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하수는 두 산 틈에서 나와 돌과 부딪쳐 싸우며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머리와 우는 여울과 노한 물결과 슬픈 곡조와 원망하는 소리가 굽이쳐 돌면서, 우는 듯, 소리치는 듯, 바쁘게 호령하는 듯, 항상 장성을 깨뜨릴 형세가 있어, 전차(戰車) 만 승(萬乘)과 전기(戰騎) 만 대(萬隊)나 전포(戰砲) 만 가(萬架)와 전고(戰鼓) 만 좌(萬座)로서는 그 무너뜨리고 내뿜는 소리를 족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모래 위에 큰 돌은 흘연(屹然)히 떨어져 섰고, 강 언덕에 버드나무는 어둡고 컴컴하여 물지킴과 하수 귀신이 다투어 나와서 사람을 놀리는 듯한데 좌우의 교리(蛟螭)가 붙들려고 애쓰는 듯싶었다. 혹은 말하기를,

 

여기는 옛 전쟁터이므로 강물이 저같이 우는 거야.”

하지만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니, 강물 소리는 듣기 여하에 달렸을 것이다. 산중의 내집 문 앞에는 큰 시내가 있어 매양 여름철이 되어 큰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항상 거기(車騎)와 포고(砲鼓)의 소리를 듣게 되어 드디어 귀에 젖어 버렸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서 소리 종류를 비교해 보니, 깊은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것은 듣는 이가 청아한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분노한 탓이요,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교만한 탓이요, 대피리가 수없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노한 탓이요, 천둥과 우레가 급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놀란 탓이요, 찻물이 끓는 듯이 문무(文武)가 겸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취미로운 탓이요, 거문고가 궁()과 우()에 맞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슬픈 탓이요, 종이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의심나는 탓이니, 모두 바르게 듣지 못하고 특히 흉중에 먹은 뜻을 가지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만든 것이다. 지금 나는 밤중에 한 강을 아홉 번 건넜다. 강은 새외(塞外)로부터 나와서 장성을 뚫고 유하(楡河)와 조하(潮河)황화(黃花)진천(鎭川) 등 모든 물과 합쳐 밀운성 밑을 거쳐 백하(白河)가 되었다. 나는 어제 두 번째 배로 백하를 건넜는데, 이것은 하류(下流)였다. 내가 아직 요동에 들어오지 못했을 때 바야흐로 한 여름이라, 뜨거운 볕 밑을 가노라니 홀연 큰 강이 앞에 당하는데 붉은 물결이 산같이 일어나 끝을 볼 수 없으니, 이것은 대개 천리 밖에서 폭우(暴雨)가 온 것이다. 물을 건널 때는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우러러 하늘을 보는데, 나는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머리를 들고 쳐다 보는 것은 하늘에 묵도(黙禱)하는 것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물이 돌아 탕탕히 흐르는 것을 보면, 자기 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고, 눈은 강물과 함께 따라 내려가는 것 같아서 갑자기 현기가 나면서 물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머리를 우러러 보는 것은 하늘에 비는 것이 아니라, 물을 피하여 보지 않으려 함이다. 또한 어느 겨를에 잠깐 동안의 목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랴. 그 위험함이 이와 같으니, 물소리도 듣지 못하고 모두 말하기를,

 

요동 들은 평평하고 넓기 때문에 물소리가 크게 울지 않는 거야.”

하지만 이것은 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요하(遼河)가 일찍이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히 밤에 건너보지 않은 때문이니,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이 오로지 위험한 데만 보느라고 도리어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하는 판인데, 다시 들리는 소리가 있을 것인가. 지금 나는 밤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데만 있어 바야흐로 귀가 무서워하여 걱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도다. 마음이 어두운 자는 귀와 눈이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혀져서 병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내 마부가 발을 말굽에 밟혀서 뒷차에 실리었으므로, 나는 드디어 혼자 고삐를 늦추어 강에 띄우고 무릎을 구부려 발을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았으니, 한 번 떨어지면 강이나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으며,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을 삼으니, 이제야 내 마음은 한 번 떨어질 것을 판단한 터이므로 내 귓속에 강물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 건너는데도 걱정이 없어 의자 위에서 좌와(坐臥)하고 기거(起居)하는 것 같았다. 옛날 우()는 강을 건너는데, 황룡(黃龍)이 배를 등으로 떠받치니 지극히 위험했으나 사생의 판단이 먼저 마음속에 밝고 보니, 용이거나 지렁이거나 크거나 작거나가 족히 관계될 바 없었다.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니 외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 이 같거늘, 하물며 인생이 세상을 지나는데 그 험하고 위태로운 것이 강물보다 심하고,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이 되는 것임에랴. 나는 또 우리 산중으로 돌아가 다시 앞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이것을 증험해 보고 몸 가지는데 교묘하고 스스로 총명한 것을 자신하는 자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만국진공기(萬國進貢記)

 

 

건륭(乾隆) 45년 경자에는 황제의 수()가 일흔인데 남방으로부터 바로 북으로 열하까지 돌아 왔다. 가을 8 13일은 곧 황제의 천추절(千秋節)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신을 불러 행재소(行在所)까지 와서 뜰에 참여하여 하례하도록 했다. 나는 사신을 따라 북으로 장성을 빠져 주야로 달렸다. 길에서 보니 사방으로부터 공헌(貢獻)하는 수레가 만 대는 될 것 같고, 또 사람은 지고, 약대에는 싣고, 가마에 태우고 가는데, 형세가 풍우와 같았으며 들것에 메고 가는 것은 물건 중에서 더욱 정하고 다치기 쉬운 것들이라 하였다. 수레마다 말이나 노새를 예닐곱 마리씩 끌리고, 가마는 혹 노새 네 마리에 끌려 위에는 누른빛 작은 깃발에 진공(進貢)이란 글자를 써서 꽂았다. 진공물들은 모두 거죽은 붉은 빛 탄자와 여러 빛 모직 옷감과 대 삿자리나 등자리로 쌌는데, 모두 옥으로 만든 기물(器物)들이라 한다. 수레 하나가 길에 넘어져 바야흐로 고쳐 싣는데, 거죽을 싼 등자리가 조금 떨어진 틈으로 보니, 궤짝은 누른 칠을 하여 작은 정자 한 칸만 했다. 가운데는 자유리 보일좌(紫琉璃普一座)라고 썼는데, () 자 아래와 일() 자 위에는 글자가 두서너 자 있어 보였으나 자리 끝이 덮여져서 무슨 글자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유리 그릇의 크기가 이만큼 할 적에는 다른 여러 수레에 실은 짐을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었다. 날이 이미 황혼이 되니 더욱 수레들이 길을 다투어 재촉해 달리는데, 횃불이 마주 비치고 방울 소리가 땅을 흔들며 채찍 소리가 벌판을 울리는 가운데 범과 표범을 우리에 집어 넣은 것이 10여 수레나 되는데, 우리에는 모두 창문이 있고 범 한 마리를 넣을 만큼 만들었다. 범들은 모두 쇠사슬로 목을 매어 눈은 누르고 독스러웠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몸뚱이는 늑대같이 나지막하고 텁수룩한 털과 꼬리는 삽살개 같았다. 이 밖에 곰과 여우와 사슴 등속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사슴 중에도 붉은 굴레를 씌워 말 몰듯 몰고 가는 것은 길들인 사슴이다. 악라사(鄂羅斯)라는 개는 높이가 거의 말만 하고, 온 몸의 뼈는 가늘고 털이 짧고 날씬한 것이 우뚝 서니 여윈 정강이는 학같이 보이고, 꼬리는 뱀같이 놀며, 허리와 배는 가느다랗고, 귀로부터 주둥이까지는 한 자나 되는데 이것이 모두 입이었다. 능히 범이나 표범도 죽인다고 한다. 훨씬 큰 닭이 있는데, 모양은 약대와 같고 높이는 서너너댓 자나 되고 발은 약대 발같이 되어 날개를 치면서 하루 3백 리는 간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름을 타계(駝雞)라 한다. 낮에 본 것은 모두 이런 종류로서 상하가 길 가기에 바빠서 무심코 지나가다가 날이 저물자, 마침 하인들 중에 표범 우는 것을 들은 자가 있어 드디어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과 함께 범 실은 수레를 가 보고서야 비로소 하루에 수없는 수레를 지나 보낸 것이 비단 옥기(玉器)나 보물뿐이 아니라, 역시 사해 만국의 기금(奇禽)과 괴수(怪獸)도 많았던 것을 알았다. 연극 구경을 할 때에 지극히 작은 말 두 마리가 산호수(珊瑚樹)를 싣고 전각 속으로부터 똑똑히 나왔다. 말의 크기는 겨우 두 자에 몸빛은 황백색(黃白色)인데, 갈기머리는 땅에 솔솔 끌리고 울음을 울고 뛰고 달리는 것이 준마(駿馬)의 체통을 갖추었다. 산호수의 가지는 엉성한 것이 말보다 컸다. 아침에 행재소 문 밖으로부터 혼자 걸어서 여관으로 돌아오다가 보니, 부인 하나가 태평차(太平車)를 타고 가는데 얼굴에는 분을 희게 바르고 수놓은 비단 옷을 입었으며, 차 옆에는 한 사람이 맨발로 채찍질을 하면서 차를 모는데 몹시 빨리 갔다. 머리털은 짧아 어깨를 덮었고, 머리털 끝은 모두 말려 들어 양털처럼 되었는데, 금고리로 이마를 둘렀다. 얼굴은 붉고 살찌고 눈은 고양이처럼 둥근데, 수레를 따르면서 구경하는 자들이 복잡하고, 검은 먼지가 날려서 하늘을 덮었다. 처음에는 차를 모는 자의 모양이 이상하므로 미처 차 속에 있는 부인을 살펴 보지 못했는데,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 보니, 이는 부인이 아니라 사람 형상을 한 짐승 종류였다. 털손은 원숭이처럼 생겼고, 가진 물건은 접는 부채 같은데, 잠깐 보건대 얼굴은 아주 예쁜 것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보니 노구(老嫗)와 같고 요괴스럽고 사납게 생겼으며 키는 겨우 두 자 남짓한데, 수레의 휘장을 걷어 올려서 좌우를 돌아보는 눈이 잠자리 눈같이 보였다. 대체로 이것은 남방에서 나는 것으로 능히 사람의 뜻을 안다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이것은 산도(山都 원숭이의 일종)이다.”

라고 한다.

 

 

[C-001]만국진공기(萬國進貢記) : ‘다백운루본에는 진공만차기(進貢萬車記)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만국진공기후지(萬國進貢記後識)

 

 

내가 몽고 사람 박명(博明)에게 이것이 무슨 짐승이냐고 물었더니 박명은 말하기를,

 

옛날에 장군 풍공(豐公) 승액(昇額)을 따라서 옥문관(玉門關)을 나서서 돈황(燉煌)으로부터 4천 리를 떨어진 골짜기에 가서 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장막 속에 두었던 목갑(木匣)과 가죽 상자가 없어졌습니다. 당시 같이 간 막려(幕侶)들이 차차 알아보니 잃은 것이 분명했답니다. 군중에서 말이 있기를, ‘이것은 야파(野婆)가 절도해 간 것이라 하므로 군사를 내어 야파를 포위했더니 모두 나무를 타는데, 나는 원숭이처럼 빨랐다.’고 합니다. 야파는 형세가 궁하매 슬피 울면서 즐겨 붙들리지 않고 모두 나무 가지에 목을 매어 죽으니 이래서 잃었던 물건을 모두 찾았는데, 상자나 목갑은 잠가 놓은 그대로 있었고 잠근 것을 열고 보니 속에 기물들도 역시 버리고 다친 것이 없었답니다. 상자 속에는 붉은 분과 목걸이와 머리꽂이 패물들을 많이 넣어 두었고, 아름다운 거울도 있었으며 또 침선(針線)과 가위와 자까지 있었는데, 야파는 대개 짐승으로서 여자를 본떠 치장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은 것이라 합니다.”

한다. 유황포(兪黃圃 유세기(兪世琦). 황포는 호)가 나에게 막북(漠北)의 기이한 구경을 묻기에 나는 타계(駝雞)를 말했더니, 황포는 하례해 말하기를,

 

이것은 먼 서쪽 지방에 사는 기이한 새로서 중국 사람들도 말만 들었을 뿐 그 형상을 보지 못했는데, ()은 외국 사람으로서 능히 보았습니다.”

한다. 산도(山都)를 말했으나 이것은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열하로부터 돌아올 때에 청하(淸河)에 이르러 거리에서 난장이 하나를 보았는데, 키는 겨우 두 자 남짓하고 배는 크기가 북만 하여 불쑥 내밀어서 그림에 있는 포대화상(布袋和尙) 같고, 입과 눈이 모두 낮게 붙었고 팔뚝과 다리도 없이 손과 발이 몸뚱이에 그대로 달렸고 담배를 물고 뽐내면서 걷는데, 손을 펴서 흔들면서 춤을 추었다. 사람을 보면 문득 크게 웃고 홀로 머리를 깎지 않고 뒤통수에 상투를 했으며 선도건(仙桃巾)을 걸쳤다. 무명 도포에 소매가 넓고 배를 통째 들어 내놓고 모양이 옹종한 것이 말로 그 형용이 기괴함을 다할 수 없으니 조물주(造物主)는 가위 장난을 퍽 좋아하는 모양이다. 내가 이것을 황포에게 이야기했더니, 황포와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그의 이름은 천생이물인(天生異物人)으로서 자라의 놀음을 하는 것인데, 지금 거리에서는 이런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한다. 나의 평생에 괴이한 구경은 열하에 있을 때만 한 것이 없었으나 그 이름조차 모르는 것이 많고, 문자로써는 능히 형용할 수 없어서 모두 빼놓고 기록하지 못하니 가히 한스러운 일이다. 평계(平溪 연암서당(燕巖書堂) 앞 시내 이름)의 비 내리는 집에서 연암은 쓰다.

 

 

[C-001]만국진공기후지(萬國進貢記後識)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이에서는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D-001]승액(昇額) : 만주 사람. 풍신액(豐申額)인 듯하나 미상.

[D-002]포대화상(布袋和尙) : 불교에서 말하는 일곱 복신(福神) 중의 하나.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상기(象記)

 

 

만일 괴상스럽고 잡스럽고 우습고 기이하며 거룩한 것을 구경하려면 먼저 선무문(宣武門) 안에 있는 상방(象房)에 가 봐야 할 것이다. 내가 북경에서 코끼리를 본 것이 열여섯 마리인데, 모두 쇠사슬로 발을 묶어서 움직이는 모양을 보지 못했는데, 여기서는 코끼리 두 마리를 열하 행궁(行宮) 서쪽에서 보았던 바 온 몸을 꿈틀거리면서 걸어 가는 것이 풍우(風雨)가 움직이는 듯 몹시 거창스러웠다. 내가 언젠가 동해(東海)에 나갔을 때 파도 위에 말처럼 우뚝우뚝 선 것이 수없이 많으며 집채같이 큰 것이 물고기인지 짐승인지 해돋기를 기다려 자세히 보려고 했는데, 해가 돋기도 전에 그것들은 바닷속으로 숨어 버렸었다. 이번에 코끼리를 십보 밖에서 보았는데 그때 동해에서 보았던 것과 방불할 만큼 크게 생겼다. 몸뚱이는 소 같고 꼬리는 나귀와 같으며, 약대 무릎에, 범의 발톱에, 털은 짧고 잿빛이며 성질은 어질게 보이고, 소리는 처량하고 귀는 구름장같이 드리웠으며, 눈은 초생달 같고, 두 어금니는 크기가 두 아름은 되고, 길이는 한 장() 남짓 되겠으며, 코는 어금니보다 길어서 구부리고 펴는 것이 자벌레 같고, 코의 부리는 굼벵이 같으며, 코끝은 누에 등 같은데, 물건을 끼우는 것이 족집게 같아서 두루루 말아 입에 집어 넣는다. 때로는 코를 입부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다시 코 있는 데를 따로 찾아보기도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코 생긴 모양이 이럴 줄이야 누가 뜻했으랴. 혹은 코끼리 다리가 다섯이라고도 하고, 혹은 눈이 쥐눈 같다고 하는 것은 대개 코끼리를 볼 때는 코와 어금니 사이를 주목하는 까닭이니, 그 몸뚱이를 통틀어서 제일 작은 놈을 집어가지고 보면 이렇게 엉뚱한 추측이 생길 만하다. 대체로 코끼리는 눈이 몹시 가늘어서 간사한 사람이 아양을 부리는 눈 같으나 그의 어진 성품은 역시 이 눈에 있는 것이다. 강희 시대에 남해자(南海子)에 사나운 범 두 마리가 있었는데, 길을 들일 수 없어서 황제가 노하여 범을 코끼리 우리로 몰아 넣게 했더니, 코끼리가 몹시 겁을 내어 코를 한 번 휘두르자 범 두 마리가 제 자리에서 넘어져 죽었다고 한다. 코끼리가 범을 죽이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범의 냄새를 싫어하여 코를 휘두른 것이 잘못 부딪쳤던 것이다. 아아, 세간 사물(事物) 중에 털끝같이 작은 것이라도 하늘이 내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이 어찌 다 명령해서 냈을까보냐. 하늘은 형체로 말한다면 천()이요, 성질로 말한다면 건()이요, 주재(主宰)하는 이는 상제(上帝), 행동하는 것은 신()이라 하여 그 이름이 여러 가지요, 또 일컫는 명색이 너무 친밀하다. 허물이 없이 말하자면 이()와 기()로서 화로와 풀무로 삼고, 생장과 품부를 조물(造物)이라 하여 하늘을 마치 재주 있는 공장이에 비유하여 망치도끼칼 같은 것으로 쉬지 않고 일을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역경(易經)에 말하기를,

 

하늘이 초매(草昧)를 지은 것이다.”

하였는데, 초매란 것은 그 빛이 검고 그 형태는 안개가 낀 듯하여 마치 동이 틀 무렵 같아서 사람이나 물건을 똑바로 분간할 수 없다 하니, 나는 알지 못하겠다. 하늘이 캄캄하고 안개 낀 듯 자욱한 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라면 무엇일까. 맷돌에 밀을 갈 때에 작고 크거나 가늘고 굵거나 할 것 없이 뒤섞여 바닥에 쏟아지는 것이니 무릇 맷돌의 작용이란 도는 것 뿐인데, 가루가 가늘고 굵은 데야 무슨 마음을 먹었겠는가. 그런데 설자(說者)들은 말하기를,

 

뿔이 있는 놈에게는 이를 주지 않았다.”

하여 만물을 창조하는 데 무슨 결함이라도 있는 듯이 생각하나 이것은 잘못이다. 감히 묻노니,

 

이를 준 자는 누구일 것인가.”

한다면, 사람들은,

 

하늘이 주었지요.”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하늘이 이를 준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다면, 사람들은,

 

하늘이 이것으로 먹이를 씹으라고 주었지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다시,

 

이를 가지고 물건을 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면, 사람들은,

 

이는 하늘이 낸 이치랍니다. 금수는 손이 없으므로 반드시 그 입을 땅에 구부려 먹을 것을 찾게 된 것이요, 그러므로 학의 정강이가 높고 보니, 부득이 목이 길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래도 입이 땅에 닿지 않을까 하여 입부리를 길게 해준 것이요, 만일 닭의 다리가 학과 같았다면 할 수 없이 마당에서 굶어 죽었을 것이라오.”

하고 말하리라. 나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면서 말한다.

 

그대들이 말하는 이치란 것은 소개 같은 것에나 맞는 이치다. 하늘이 이를 준 것이 반드시 구부려서 무엇을 씹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면 코끼리에게는 쓸데없는 어금니를 주어서 입을 땅에 닿으려고 하면 이가 먼저 땅에 걸리니 물건을 씹는 데도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는가.”

혹은 말하기를,

 

그것은 코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리라. 그러나 나는 다시,

 

긴 어금니를 주고서 코를 빙자하려면 차라리 어금니를 없애고 코를 짧게 한 것만 못할 것이 아닌가.”

했더니, 이때에야 말하는 자는 자기의 주장을 우겨대지 못하고 수그러졌다. 이는 언제나 생각이 미친다는 것이 소개뿐이요, 거북기린 같은 짐승에게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까닭이다. 코끼리는 범을 만나면 코로 때려 눕히니, 그 코는 천하에 상대가 없으나 쥐를 만나면 코를 가지고도 쓸모가 없어 하늘을 쳐다보고 멍하니 섰다니, 이렇다고 쥐가 범보다 무섭다고 하면 아까 말한 소위 하늘이 낸 이치에 맞다고는 못할 것이다. 대체로 코끼리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인데도 그 이치에 있어 모를 것이 이 같거늘, 하물며 천하 사물이 코끼리보다도 만 배나 복잡함에랴. 그러므로 성인이 역경을 지을 때 코끼리 상() 자를 따서 지은 것도 이 코끼리 같은 형상을 보고 만물이 변화하는 이치를 연구하게 하려는 것이다.

 

 

[C-001]상기(象記) : ‘박영철본에는 이 편이 희본명목기(戲本名目記) 밑에 있었으나, 이제 수택본을 따라 여기에 옮겼다.

[D-001]남해자(南海子) : 북경 숭문문(崇文門) 남쪽에 있는 동산.

[D-002]초매(草昧) : 천지가 개벽되면서 만물이 혼돈한 현상.

[D-003]역경》 …… 것이다 : 역경에 사상(四象)이 팔괘(八卦)를 낳고 팔괘가 육십사괘를 낳는다는 사물 변화의 이치를 말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승귀선인행우기(乘龜仙人行雨記)

 

 

14일에 피서산장(避暑山莊)에 들어가서 바라다 보니 황제는 누런 휘장을 늘인 전각 속에 깊이 들어 앉았다. 뜰 밑 반열에는 사람도 드문데, 홀로 노인 하나가 상투에 선도건(仙桃巾)을 걸고 누른 장삼에 검고 모난 직령을 달아 입었는데, 모두 검은 선을 둘렀고, 허리에는 붉은 비단 띠를 띠며, 붉은 신을 신고, 반백(半白) 수염이 가슴을 지났으며, 지팡이 끝에는 금호로(金葫蘆)와 비단 축()이 달렸고, 오른손에는 파초선(芭蕉扇)을 쥐고, 큰 거북 위에 서서 두루 뜰을 도는데, 거북은 머리를 위로 젖히고 무지개처럼 물을 뿜는다. 거북은 검푸른 빛에 크기가 맷방석만 하고 처음에는 가는 비를 뿜어 전각의 처마와 기와를 적시고 물방울이 튀어서 안개처럼 자욱하다. 혹은 화분을 향하여 뿜기도 하고 혹은 가산(假山)을 향해서 뿌리기도 한다. 조금 있더니 비가 더욱 커져서 처마 물은 폭우처럼 쏟아져 햇빛이 비낀 전각 모퉁이는 수정 주렴을 드리운 듯하고, 전각 위의 누른 기와는 흘러내릴 듯이 물이 많다. 동산의 동쪽 나무 잎은 더욱 밝고 화려하며 물은 한 뜰에 가득하여 흡족하게 축인 뒤에 오른쪽 장막 속으로 들어갔다. 황문(黃門) 수십 명이 각각 대비를 들고 마당에 물을 쓰는데, 거북의 배에 비록 물을 백 섬이나 간직하더라도 이같이 뿌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 사람이 입은 옷은 적시지 않았으니, 그 비를 오도록 하는 공로가 가위 귀신이라 하겠다. 만일 사해에 비를 바라는 것이 이렇게 한 뜰을 적시는 것에 그친다면 역시 일은 다 되었다 하리라.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만년춘등기(萬年春燈記)

 

 

황제가 동산 동쪽에 있는 별전(別殿)으로 옮겨 거둥하는데, 1천 관리들이 피서산장을 나와서 모두 말을 타고 궁장(宮墻)을 따라 5리나 가서 원문(苑門)으로 들어갔다. 좌우에는 부도(浮圖)가 있어 높이 예닐곱 길이요, 불당과 패루(牌樓)가 몇 리를 뻗쳤으며 전각 앞에는 누른 장막이 하늘에 연했는데, 장막 앞에는 모두 흰 천막을 침침하게 둘러쳤고, 천백 개의 채색 등불이 걸려 있다. 앞에는 붉은 빛 궐문이 세 곳이나 섰는데, 높이가 모두 팔구 길은 되었다. 풍악을 아뢰고 잡희(雜戲)를 시작하자 해는 이미 저물었는데, 누른 빛 큰 궤짝을 붉은 궐문에 다니 갑자기 궤 밑으로부터 크기가 북만 한 등불 하나가 떨어지자 등불은 노끈에 이어져서 그 끝에서는 저절로 불이 붙어 탄다. 노끈을 따라 타 올라가서 궤짝 밑에 닿으니 궤짝 밑으로부터 또 한 개 둥근 등불이 매달리고 노끈에 붙은 불은 그 등불을 태워 땅에 떨어뜨린다. 궤짝 속으로부터 또 쇠로 만든 채롱 주렴이 드리워지는데 주렴 면에는 모두 전자(篆字)로 수()() 글자를 썼고, 불은 글자에 붙어 새파란 불에 한동안 타다가 수복 자 불은 스스로 꺼져 땅에 떨어진다. 또 궤짝 속으로부터 연주등(聯珠燈) 백여 줄이 드리우는데, 한 줄에 450등씩 되었고 등불 속은 차례대로 저절로 타면서 일시에 환하게 밝았다.  1천여 명의 미모의 남자들이 있어 수염은 없고 비단 도포에 수놓은 비단 모자를 쓰고 각각 정() 자 지팡이 양쪽 끝에 모두 조그만 붉은 등불을 달고, 나갔다 물러섰다 하여 군진(軍陣) 모양을 하더니 졸지에 삼좌(三座) 오산(鼇山)으로 변했다가 졸지에 변해서 누각(樓閣)이 되고, 졸지에 네모진 진형(陣形)으로 변한다. 이미 황혼이 되자 등불 빛은 더욱 밝아지더니 갑자기 만년춘(萬年春)이란 석 자로 변했다가 또 갑자기 천하태평(天下太平)의 네 글자로 변하고 졸지에 변하여 두 마리 용이 되었는데, 비늘과 뿔과 발톱과 꼬리가 공중에서 꿈틀거린다. 경각(頃刻) 사이에 변환하고 이합(離合)하되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글자 획이 완연(宛然)한데, 다만 수천 명의 발자국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것은 잠시 동안의 놀음이지만 그 기율(紀律)의 엄한 것이 이와 같은데, 더욱이 이 법으로 군진에 임한다면 천하에 누가 감히 다칠 것이랴. 그러나 덕에 있는 것이요, 법에 있는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놀음으로 천하에 뵈일 것이랴.

 

 

[D-001]오산(鼇山) : 자라 등 위에 썼다는 삼신산(三神山)의 가장.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매화포기(梅花砲記)

 

 

날이 이미 황혼이 되자 만포(萬砲)가 동산 안에서 나오는데,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매화꽃이 사방으로 흩어져 마치 숯불을 부채질하면 불꽃이 튀어 흐르는 것 같았다. 거울을 들여다 보면서 웃음을 짓는 듯 바람을 맞이하여 춤을 추는 듯도 하려니와 마치 노포(魯褒)의 돈이 이지러진 듯 토끼 주둥이가 살아나지 못한 채(이지러진 달을 말함) 이어져서, 온갖 화병(花甁)을 진열하고는 여사(女士)가 그 품위의 상하를 평정하는데, 화방(花房)에 드리운 술이 분명하고 봉오리에 찍힌 검은 점이 가느다란 듯이 된 것들이 모두 불꽃으로 화하여 난다. 조수(鳥獸)와 충어(蟲魚)의 족속이 날아가고 뛰놀고 하는 것이 모두 정상(情狀)을 갖추었는데, 새는 혹 날개를 벌리기도 하고, 입부리로 깃을 문지르기도 하며, 혹 발톱으로 눈깔을 비집기도 하고 혹 벌과 나비를 쫓기도 하여 혹 꽃과 과실을 쪼아 먹기도 한다. 짐승은 모두 뛰놀고 버티며 입을 벌리고 꼬리를 펴서 천태와 만상이 모두 꽃불로 펄펄 날아 가서 반공에 이르러서는 시름시름 꺼지곤 한다. 대포 소리는 더욱 커지고, 불빛은 더욱 밝아지면서 1백 신선과 1만 부처가 날아 올라가 혹은 뗏목을 타고, 혹은 연잎 배를 타며, 혹은 고래와 학을 타고, 혹은 호로병(葫蘆甁)을 들고, 혹은 보검(寶劍)을 차며, 혹은 석장(錫杖)을 짚고, 혹은 맨발로 갈대를 밟기도 하며, 혹은 손으로 범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허공에 떠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없는데, 눈으로 다 볼 새가 없이 번득번득 눈이 어른거렸다.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매화포(梅花砲)가 좌우로 벌여 있는 것은 그 통이 혹은 크고, 혹은 작아서 긴 놈은 서너 길이 되고, 짧은 놈은 서너 자가 되어 우리나라 삼혈총(三穴銃)같이 만들었고, 불꽃이 반공에서 가로 퍼지는 것이 우리나라 신기전(神機箭)과 같데그려.”

한다. 불이 다 꺼지기 전에 황제는 일어나 반선(班禪)을 돌아다 보고 잠깐 이야기를 하더니 가마를 타고 안으로 들어갔다. 때는 바야흐로 어두웠는데, 앞에서 인도하는 등불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로 여든한 가지 놀음에 매화포로써 끝을 맺는 바 이것을 구구대경회(九九大慶會)라고 불렀다.

 

 

[D-001]노포(魯褒) : ()의 학자. 자는 원도(元道). 전신론(錢神論)을 지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납취조기(蠟嘴鳥記)

 

 

납취조(蠟嘴鳥)는 비둘기보다는 작고, 메추리보다는 큰데, 회색빛에 푸른 날개요, 큰 입부리가 납초와 같으므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또 오동조(梧桐鳥)라고도 하는데, 능히 사람의 말을 알아들어 무릇 가르치고 시키면 소리를 응해 시행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길들여 거리에서 놀리는 자가 골패 서른두 개를 그릇 속에 담고 손바닥으로 비벼서 섞어 놓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골패 한 개를 잡아서 무슨 골패인지 알고 난 연후에 그 골패를 새 놀리는 자에게 주면 새 놀리는 자는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보인 뒤에 다시 그릇 속에 넣고 손으로 바삐 흩어지도록 섞은 다음 새를 불러 그 골패를 가져 오라고 하면, 새는 즉시로 그릇 속에 들어가 입부리로 그 골패 쪽을 물고 날아 나와 나무 가름대 위에 올라 앉는데, 그것을 취해 보면 과연 알아 두었던 그 골패 쪽이었다. 또 오색기(五色旗)를 세워놓고 새로 하여금 아무 빛 깃대를 뽑아 오라고 하면 역시 대답을 하고, 그 깃대를 뽑아 사람에게 준다. 종이로 만든 겹 처마의 누른 집을 실은 수레를 코끼리에게 메우고, 새로 하여금 수레를 몰라 하면 새는 머리를 수그리고 코끼리 배 밑으로 들어가 입부리로 코끼리 두 다리 틈을 물고 이것을 민다. 무릇 맷돌을 갈고 말타고 활쏘고 범춤사자춤을 추어 사람의 지휘에 따르는데, 하나도 착오가 없었다. 또 종이로 구중(九重) 합문(闔門)이 있는 조그만 전각을 만들고 새로 하여금 전각 속에 들어가 무슨 물건을 가져 오라 하면, 새는 즉시 날아 들어가 호령에 따라 물고 나와서 탁자 위에 벌여 놓는다. 비록 언어는 앵무(鸚鵡)만은 못하나 그 교묘한 꾀는 오히려 나은 것 같았다. 얼마 동안 부리고 나니 새는 열을 이기지 못하여 입을 버리고 혀를 빼물고 털과 깃이 땀에 젖었다. 매양 한 번 놀릴 때마다 희롱으로 깨 한 알씩을 먹이는데, 새 놀리는 자는 매양 자기 입에서 꺼내 주는 것이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희본명목기(戲本名目記)

 

구여가송(九如歌頌)광피사표(光被四表)복록천장(福祿天長)선자효령(仙子效靈)해옥첨주(海屋添籌)서정화무(瑞呈花舞)만희천상(萬喜千祥)산령응서(山靈應瑞)나한도해(羅漢渡海)권농관(勸農官)담폭서향(薝蔔舒香)헌야서(獻野瑞)연지헌서(蓮池獻瑞)수산공서(壽山拱瑞)팔일무우정(八佾舞虞庭)금전무선도(金殿舞仙桃)황건유극(皇建有極)오방정 인수(五方呈仁壽)함곡기우(函谷騎牛)사림가락사(士林歌樂社)팔순분의권(八旬焚義券)이제공당(以躋公堂)사해안란(四海安瀾)삼황헌세(三皇獻歲)진만년상(晉萬年觴)학무정서(鶴舞呈瑞)복조재중(復朝再中)화봉삼축(華封三祝)중역내조(重譯來朝)성세숭유(盛歲崇儒)가객소요(嘉客逍遙)성수면장(聖壽綿長)오악가상(五岳嘉祥)길성첨요(吉星添耀)후산공학(緱山控鶴)명선동(命仙童)수성기취(壽星旣醉)낙도도(樂陶陶)인봉정상(麟鳳呈祥)활발발지(活潑潑地)봉호근해(蓬壺近海)복록병진(福祿幷臻)보합대화(保合大和)구순이취헌(九旬移翠巘)여서구가(黎庶謳歌)동자상요(童子祥謠)도서성칙(圖書聖則)여환전(如環轉)광한법곡(廣寒法曲)협화만방(協和萬邦)수자개복(受玆介福)신풍사선(神風四扇)휴징첩무(休徵疊舞)회섬궁(會蟾宮)사화정서과(司花呈瑞菓)칠요회(七曜會)오운롱(五雲籠)용각요첨(龍閣遙瞻)응월령(應月令)보감대광명(寶鑑大光明)무사삼천(武士三千)어가환음(漁家歡飮)홍교현대해(虹橋現大海)지용금련(池湧金蓮)법륜유구(法輪悠久)풍년천강(豐年天降)백세상수(百歲上壽)강설점년(降雪占年)서지헌서(西池獻瑞)옥녀헌분(玉女獻盆)요지향세계(瑤池香世界)황운부일(黃雲扶日)흔상수(欣上壽)조제경(朝帝京)대명년(待明年)도왕회(圖王會)문상성문(文象成文)태평유상(太平有象)두신기취(杜神旣醉)만수무강(萬壽無疆).

8 13일은 곧 황제의 만수절(萬壽節)이다. 이때 전 3일 후 3일에도 한가지로 연극놀이를 했는데, 모든 관리들은 오경(五更)에 대궐로 들어가 황제에게 문후(問候)하고 묘시(卯時 오전 6) 정각에 반열에 참여하여 연극을 구경하고 미시(未時 오후 2) 정각에 파하고 나온다. 희본(戲本)은 모두 조신(朝臣)들이 황제에게 바친 시와 부()와 가사(歌辭) 같은 것으로 연극을 만들어 하는 것이다. 따로 무대를 행궁(行宮) 동쪽 누각(樓閣)에 설치했는데, 처마 높이는 다섯 길이 넘는 기를 세울 만하고, 넓이는 수만 명이 들어설 만했다. 이 무대를 세웠다가 허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이 쉽게 된다. 무대의 좌우에는 나무로 가산(假山)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전각과 같고 이상한 나무 숲이 그 위에 얽혀 비단을 오려서 꽃을 만들고 술을 달아서 과실을 만들었다. 연극 한 막()씩을 할 때마다 배우들이 무려 수백 명씩 나오는데, 모두 비단에 수놓은 옷을 입었고 연극이 바뀔 때마다 옷도 바꾸어 입는데, 모두 한족(漢族)들의 의관이다. 연극을 장치할 때는 잠시 비단 막으로 무대를 가리면 무대 위는 조용하여 인기척이 없고, 다만 신소리만 들리다가 조금 지나서 막이 열리면 무대에는 산이 생기고,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소나무가 서고 햇빛이 나는 듯이 되는데 이것은 소위 구여가송(九如歌頌)이다. 노래는 모두 우조(羽調)의 높은 음으로서 악률(樂律)이 높아 마치 하늘 위에서 나는 소리 같아 청탁(淸濁)과 서로 화()하는 음이 없었다. 악기는 모두 생황피리경쇠거문고비파 등의 소리로서 다만 북소리만 들리지 않고, 간간이 바다 소리가 들렸다. 삽시간에 산이 옮겨지고 바다가 없어지는데 한 가지도 복잡한 것이 없이 정연하였다. 황제와 요순의 시대로부터 시작해서 본을 뜨지 않은 의관이 없이 제목에 따라 연극을 했다. 왕양명(王陽明)은 말하기를,

 

()는 순의 한 편 연극이요, ()는 무왕의 한 편 연극일진대 걸()()()() 같은 폭군들에게도 한 편씩의 희본이 있을 것이다.”

했는데, 오늘 노는 연극은 곧 오랑캐의 한 편 희본일지도 모를 일이다. 내 이미 계찰(季札 ()의 명신)과 같은 지식이 없으니, 그들의 도덕과 정치를 무엇이라 논할 수 없으나 대체로 음악의 성률이 높고 외로움이 극도에 달하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귀지 못할 것이요, 노래가 맑으면서도 너무 격하면 아랫사람이 숨을 곳이 없을 것인즉, 중국에 전래하던 선왕(先王)의 음악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겠다.

 

 

[D-001]왕양명(王陽明) : 명의 학자 왕수인(王守仁). 양명은 호.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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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환희기(幻戲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환희기(幻戲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환희기(幻戲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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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환희기(幻戲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환희기(幻戲記)

1. 환희기서(幻戲記序)

2. 환희기(幻戲記)

3. 환희기후지(幻戲記後識)

 

 

 

환희기서(幻戲記序)

아침에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를 지나는데 패루 아래 만인이 거리에 둘러서서 웃음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웬 사람이 싸우다가 졸지에 죽어서 길에 가로 넘어진 것을 보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걸음을 재촉해서 지나노라니, 종자(從者)가 뒤에서 갑자기 쫓아오면서 부르기를, 괴이한 구경거리가 있다고 한다. 나는 멀리서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종자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하늘 위에 가서 복숭아를 훔치려다가 지키는 자에게 얻어맞고서 땅에 툭 떨어졌답니다.”

한다. 나는 해괴스럽다고 꾸짖고 돌아다보지도 않고 왔더니, 그 이튿날 또 그곳을 가는데 대체로 천하의 기이한 재주와 음란한 장난과 잡스러운 연극 패들이, 모두 천추절에 열하로 가려고 기다리면서 날마다 패루에 나와 백 가지 노름을 연습하고 있었다. 비로소 어제 종자가 본 것이 곧 요술(妖術)의 한 가지인 것을 알았다. 대개 상세(上世)로부터 이런 데 능한 자가 있어 소귀(小鬼)를 부려 사람의 눈을 속였으므로 이것을 요술이라 한다. ()의 시절에 유루(劉累 술사의 이름)는 용을 길들여 공갑(孔甲 하의 임금)을 섬겼고, 주 목왕(周穆王) 때에 언사(偃師 술사의 이름)란 자가 있었고, 묵적(墨翟)은 군자인데 능히 목연(木鳶)을 날렸으며, 후세에도 좌자(左慈)비장방(費長房 동한(東漢) 때의 요술사)의 무리는 이런 술법을 가지고 사람을 놀렸고, ()()의 오괴(迂怪)스러운 선비들은 신선 이야기로써 당시 임금들을 의혹시켰으니 이것은 모두 요술이다. 당시에 능히 이것을 깨닫지 못한 자는 그 술법이 서역(西域)에서 나왔으므로, 구라마십(鳩羅摩什)과 불도징(佛圖澄), 달마(達摩) 같은 자들이 더욱 요술을 잘할 줄 알았을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이런 술법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자는 스스로 왕법(王法) 밖에 두어서 이를 주절(誅絶)시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답하기를, “이는 중국 땅이 커서 한없이 넓으며 끝이 없어 이런 것도 같이 길러내므로 정치에 병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만일 천자가 좀스러워서 이런 것을 자로 계교하고 깊게 추궁한다면, 도리어 깊숙한 곳에 잘 보이지 않게 살다가 때로 나와서 세상을 흐려 놓을 것이니, 천하의 근심이 클 것 이므로 날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장난삼아 구경하게 하면 비록 부인이나 어린이라도 이것을 묘술로 알게 되어, 족히 마음을 놀래고 눈을 현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임금된 자로서 세상을 어거하는 방법이 아니겠소.”

하고는, 드디어 그 구경한 바 여러 가지 요술 스무 가지를 기록하여 장차 우리나라의 이 노름을 못 본 자에게 보이고자 한다.

 

 

[C-001]환희기서(幻戲記序)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D-001]언사(偃師) : 산 사람과 다름없는 인형을 만들었다.

[D-002]묵적(墨翟) : 전국 때 공자와 병칭하던 학자로서 겸애설(兼愛說)을 주창한 철인.

[D-003]구라마십(鳩羅摩什) : 구마라십(鳩摩羅什)의 오기(誤記). 서역 귀자(龜玆)의 명승.

[D-004]불도징(佛圖澄) : () 때 천축(天竺)의 명승. 어떤 본에는 불국증(佛國證)으로 되었으나 잘못되었다.

[D-005]달마(達摩) : 양 무제(梁武帝) 때 인도로부터 들어온 명승. 선종(禪宗)의 시조.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환희기(幻戲記)

 

 

요술쟁이가 대야에 손을 씻고 수건으로 정하게 닦은 뒤에 얼굴을 정제하고 사방을 돌아보면서, 손바닥을 치고 이리저리 뒤집어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 뒤에, 왼손 엄지손가락과 둘째 손가락은 환약을 만지고 이나 벼룩을 잡듯이 마주 비비니, 갑자기 가느다란 물건이 생겨 겨우 좁쌀낱만 했다. 연거푸 이것을 비비니 점점 커져서 녹두알만 해지고 차차 앵두알만 하다가 다시 빈랑(檳榔)만 하더니 차츰 달걀만 해졌다. 두 손바닥으로 재빨리 비벼 굴리니 둥근 것이 더 커져서 노랗고 흰 것이 거위알만 해졌다. 조금 있더니 이번에는 차차로 커지지 않고 별안간 수박만 하게 된다. 요술쟁이는 두 무릎을 꿇고 가슴을 벌리고 더 빨리 비벼 장고를 끌어안은 듯 팔뚝이 아플 만하여 그치더니, 이내 탁자 위에 놓는데 그 몸뚱이는 둥글고 빛은 샛노랗고, 크기는 동이만 한 것이 다섯 말 들이는 되어 보이며, 무게는 들 수가 없고 단단하여 깨뜨릴 수가 없어 돌도 아니요 쇠도 아니며, 나무도 아니요 가죽도 아니며 흙도 아니요, 둥근 것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냄새도 없고 향기도 없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만치 제공(帝工) 같았다. 요술쟁이는 천천히 일어나 손뼉을 치면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다시 그 물건을 만지는데, 부드럽게 굴리고 가만히 쓰다듬으니 물건은 부드러워지고, 손을 슬며시 대니 가볍기가 물거품 같아 점점 줄어들고 사라져서, 잠깐 사이에 다시 손바닥 속으로 들어가는데 다시 두 손가락으로 집어서 비비다가 한 번 튀기니 즉시 사라져 버린다.

요술쟁이는 사람을 시켜 종이 몇 권을 길게 찢어서 큰 통에 있는 물 속에 집어 넣고 손으로 그 종이를 빨래하듯 저으니, 종이는 풀어지고 흐트러져서 흙을 물 속에 넣은 것과 같았다. 여러 사람들을 두루 불러 통 속에 있는 종이가 물과 섞인 것을 보이니 가위 한심한 일이다. 이때 요술쟁이는 손뼉을 치고 한 번 웃더니 두 소매를 걷고 두 손으로 통에 있는 종이를 건져 내는데, 마치 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듯이 하니, 종이는 서로 이어져 나오는데 처음에 길게 찢을 때와 같고 이은 흔적이 없었다. 어느 사람이 풀로 발랐는지 띠와 같이 수백 발이나 되는 것을 땅바닥에 풀어놓아 바람에 펄럭거렸다. 다시 통 속을 보니 맑고 깨끗하여 찌꺼기 하나 없이 새로 길은 물과 같았다.

요술쟁이는 기둥을 등지고 서서 사람을 시켜 손을 뒤로 젖혀 붙이고 두 엄지손가락을 묶으라 했다. 기둥은 두 팔 사이에 있고 두 엄지손가락은 검푸르게 되어 아픔을 참지 못하니, 여러 사람들이 둘러서서 보다가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금 있더니 요술쟁이는 기둥에서 떨어져 서는데 손은 가슴 앞에 있고 묶은 데는 전이나 다름없이 아직 풀리지 못했다. 손가락의 피는 한 곳으로 모여서 빛은 더욱 검붉어 몹시 아픈 것을 견디지 못했다. 여러 사람이 이에 노끈을 풀어주니 혈기가 점점 통하고 노끈 자리는 오히려 붉었다. 우리 일행인 역부(驛夫)가 눈을 모아 자세히 보다가 심중으로 노하여, 얼굴빛을 변해 의분을 내고는 주머니를 털어 돈을 내어 큰 목소리로 요술쟁이를 불러 먼저 돈을 주고는, 다시 한 번 자세히 보기를 요구했다. 요술쟁이는 원망하는 듯이,

 

내가 너를 속이지도 않았는데 너는 나를 못 믿으니 네가 맘대로 나를 묶어 보려무나.”

한다. 역부는 분기를 내어 먼저 노끈은 던져버리고 자기가 가진 채찍을 끌러 입에 물어 축인 다음 요술쟁이를 붙들어 등에 기둥을 지우고 뒷 손을 젖혀서 묶는데 먼젓번보다 훨씬 세게 묶었다. 요술쟁이는 아프다고 소리를 치는데 뼛속까지 아파서 콩알만 한 눈물이 떨어진다. 역부가 크게 웃으니 구경꾼들이 더욱 많아졌는데, 벗는 것을 볼 사이도 없이 요술쟁이는 벌써 기둥을 떠나 서 있고 묶은 데는 아직도 풀어지지 않았다. 이런 신통한 것을 세 번이나 보였으니 할 수 없는 일이다.

요술쟁이는 둥근 수정 구슬 두 개를 탁자 위에 놓았는데 구슬을 계란보다 조금 작았다. 한 개를 입을 벌리고 집어 넣으니 목구멍은 좁고 구슬은 커서 삼키지 못하고 구슬을 토해 내어 도로 탁자 위에 놓았다. 다시 광주리 속에서 계란 두 개를 내어 눈을 부릅뜨고 목을 늘이고서 알 하나를 삼키는데, 마치 닭이 지렁이를 삼키는 것 같고 뱀이 두꺼비 알을 삼키는 것 같아 목 속에 걸려서 거죽으로 혹이 달린 것 같았다. 다시 알 하나를 삼키니 과연 인후를 틀어막아 재채기하고 구역질하며, 목에 핏대가 서자 요술쟁이는 후회하고 살고 싶지 않은 듯이 대 젓가락으로 목구멍을 쑤시니 젓가락이 꺾어져 땅에 떨어진다. 이제 어쩔 수가 없어 입을 벌리고 사람들에게 보이는데 목구멍 속에는 조금 흰 것이 드러난다. 가슴을 치고 목을 두드리며, 답답하고 쩔쩔매는 꼴을 보고 사람들은,

 

조그만 재주를 경솔히 자랑하다가 아아, 이제는 죽는구나.”

하였다. 요술쟁이는 가만히 귀가 가려운 듯이 듣더니 귀를 기울이고 긁는 것이 무슨 의심이 있는 것처럼 손가락 끝으로 귓구멍을 후벼 흰 물건을 끄집어 내니 과연 계란이었다. 이때에 요술쟁이는 오른손으로 계란을 쥐고 여러 사람 앞에 두루 보이더니, 왼쪽 눈에 넣었다가 오른편 귀에서 뽑아내고 오른편 눈에 넣었다가 왼편 귀에서 뽑아내며, 콧구멍에 넣었다가 뒤통수로 뽑아내는데 목에는 아직도 계란 한 개가 남아 있었다.

요술쟁이는 흰 흙 한 덩이로 땅에 큰 동그라미를 그어 여러 사람들을 동그라미 밖에 둘러앉게 했다. 요술쟁이는 이때 모자를 벗고 옷을 끄르고 시퍼렇게 간 칼을 내어 땅 위에 꽂아 놓고 다시 댓가지로 목을 쑤셔 계란을 깨뜨리려 했다. 땅을 버티고 서서 한 번 토해도 알은 종내 나오지 않아 이에 그 칼을 빼어 좌에서 우로 휘두르고 우에서 좌로 휘두르다가, 공중을 쳐다보고 한 번 던져 이것을 손바닥으로 받더니, 또 한 번 높이 던지고는 하늘을 향하여 입을 벌리니 칼 끝이 바로 떨어져 입 속에 꽂힌다. 이때에 여러 사람들은 얼굴빛을 변하여 모두 벌떡 일어나고 깜짝 놀라 말이 없는데, 요술쟁이는 고개를 젖히고 두 팔을 늘이고 뻣뻣이 한참 선 채,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한참 있다가 칼을 삼키는데, 병을 기울여 무엇을 마시듯 목과 배가 서로 마주 응하는 것이 성난 두꺼비 배처럼 불룩거렸다. 칼고리가 이에 걸려 칼자루만 넘어가지 않고 남아 있다. 요술쟁이는 네 발로 기듯이 칼자루를 땅에 쿡쿡 다져 이와 고리가 맞부딪쳐 딱딱 소리가 났다. 또 다시 일어나서 주먹으로 칼자루 머리를 치고서 한 손으로 배를 만지고 한 손으로는 칼자루를 잡고 내두르니, 배 속에서 칼이 오르내리는 것이 살가죽 밑에서 붓으로 종이에 줄을 긋는 것 같았다. 여러 사람들은 가슴이 섬뜩하여 똑바로 보지 못하고 어린애들은 무서워서 울면서 안 보려고 엎어지고 기어서 달아났다. 이때에 요술쟁이는 손뼉을 치고 사방을 돌아보고 늠름하게 바로 서서 이내 천천히 칼을 뽑아 두 손으로 받들어 들며, 여러 사람들의 바로 눈 앞에 두루 보이면서 인사를 하는데, 칼 끝에 붙은 핏방울에는 아직도 더운 기운이 무럭무럭 났다.

요술쟁이는 종이를 나비 날개처럼 수십 장을 오리고 손바닥 속에서 비벼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고는, 여러 사람들 중에서 한 어린이에게 눈을 감고 입을 벌리라 하고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니, 그 어린이는 발을 구르면서 울었다. 요술쟁이는 웃으면서 손을 떼니 어린이는 울다가 토()하고 또 울다가는 토하는데, 청개구리를 연달아 수십 마리를 토하여 모두 땅바닥에서 뛰놀곤 하였다.

요술쟁이는 탁자 위를 정하게 닦더니 붉은 탄자 보자기를 툭툭 털어 탁자 위에 펴놓고 사방을 돌아보면서 손뼉을 쳐서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보였다. 요술쟁이는 천천히 탁자 앞으로 와서 한 손으로 보자기 복판을 누르고 한 손으로는 보자기 귀퉁이를 집어 올려 젖히니, 붉은 새 한 마리가 한 번 울면서 남쪽을 향해서 날아갔다. 또 한 번 손을 동쪽으로 쳐드니 푸른 새가 동쪽을 향해서 날아갔다. 손을 보자기 밑에 집어 넣어 가만히 참새 한 마리를 집어내는데 빛은 희고 입부리는 붉었다. 두 발로 허공을 허우적거리다가 요술쟁이의 수염을 움켜잡았다. 요술쟁이가 수염을 쓰다듬으니 새는 다시 요술쟁이의 왼쪽 눈을 쪼았다. 요술쟁이는 새를 버리고 눈을 문지르니 새는 서쪽을 향해서 날아갔다. 요술쟁이는 분해서 한숨을 쉬면서 다시 가만히 손을 넣어 검정 참새 한 마리를 잡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하다가, 잘못해 놓쳐서 참새가 땅에 떨어져 돌아서 탁자 밑으로 들어가니, 어린이들이 서로 참새를 붙잡으려고 하자 새는 일어나 북쪽을 향하여 날아갔다. 요술쟁이는 분이 나서 보자기를 집어 치우니, 수없는 집비둘기들이 한꺼번에 날개를 치면서 나와 빙빙 돌다가 지붕 처마 위에 모여 앉았다.

요술쟁이는 작은 주석병을 가지고 오른손으로 물 한 대접을 떠서 병 주둥이에 철철 넘도록 붓더니, 대접을 탁자 위에 놓고 대젓가락을 가지고 병 밑을 찌르니, 물이 병 밑으로 방울져 흐르는데 조금 있다가 낙숫물처럼 줄줄 흘렀다. 요술쟁이는 고개를 젖히고 병 밑을 입으로 부니 새던 물이 뚝 그쳤다. 요술쟁이는 공중을 향해서 옆으로 흘겨보면서 입 속으로 주문(呪文)을 외니, 물은 병 주둥이로부터 몇 자 높이나 솟아 땅바닥에 가득히 쏟아졌다. 요술쟁이는 소리를 지르면서 솟아오르는 물 중간을 움켜 잡으니, 물은 중간이 끊어지면서 꾸부러져 병 속으로 들어갔다. 요술쟁이는 다시 대접을 가져다가 물을 도로 따르니, 병에 든 물의 분량은 처음과 같고 땅바닥에 물이 흐른 자국은 몇 동이나 쏟은 것 같았다.

요술쟁이는 금고리 두 개를 내어 탁자 위에 놓더니 여러 사람들을 두루 불러서 이 고리를 보였다. 크기는 두 뼘이나 되는데 밑도 끝도 없이 둥글둥글 한 것이 천작(天作)으로 되었다. 요술쟁이는 이때 두 손을 쫙 벌리고 각각 고리 하나씩을 쥐고는 내둘러 춤을 추면서 공중을 향하여 고리를 던졌다가 고리로 고리를 받으니, 두 고리는 서로 이어져서 이어진 고리를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데, 끊어진 데도 없고 틈자리도 없으니 누가 이을 때를 보았으랴. 요술쟁이는 이때 두 손을 쫙 벌리고 두 손으로 고리 하나씩을 잡고 한 번 떼었다 한 번 붙였다 하고, 한 번 이었다 한 번 끊었다 하며, 끊고 잇고 떼고 붙이곤 했다.

요술쟁이는 수놓은 모직물 보자기를 탁자 위에 펴놓고 보자기 한 구석을 약간 들어 주먹만한 자줏빛 돌 한 개를 집어내어, 칼 끝으로 조금 찌르고 돌 밑에 잔을 바치니 소주가 조금씩 흘러 내렸다. 잔이 차면 그치는데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돈을 내어 술을 사 먹는다. 사괴공(史蒯公)을 청하면 돌에서 사괴공이 흘러나오고, 불수로(佛手露)를 청하면 돌에서 불수로가 흘러나오며, 장원홍(壯元紅)을 청하면 장원홍이 흘러나온다. 사괴공불수로장원홍은 모두 술의 이름이다. 한 가지만 능한 것이 아니라 청하는 대로 문득 응하여 한 줄기 매운 향기는 위()에 들어가면 볼이 붉어진다. 연거푸 수십 배를 쏟더니 홀연히 돌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 요술쟁이는 놀라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으며, 멀리 백운(白雲)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돌이 하늘 위로 올라갔소이다.”

하였다.

요술쟁이는 손을 보자기 밑에 넣어 빈과(蘋果) 빈과는 곧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사과(沙果), 중국의 이른바 사과는 곧 우리나라의 임금(林檎 능금)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없었는데, 동평위(東平尉) 정공(鄭公) 재륜(載崙)이 사신으로 갔을 때에, 가지에 접을 붙여 동쪽으로 돌아온 뒤로 우리나라에 비로소 많이 퍼졌으며, 그 이름이 잘못 전한 것이라고 한다. 세 개를 끄집어냈다. 가지가 연하고 잎이 붙은 것을 한 개 가지고 우리나라 사람에게 사라고 청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머리를 흔들고 즐겨 사지 않으면서,

 

네가 전일에 항상 말똥으로 사람을 희롱한단 말을 들었거든.”

한다. 요술쟁이는 웃으면서 이것을 변명하지 않는데 여러 사람들은 다투어 사서 먹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비로소 사자고 청하니 요술쟁이는 처음에는 아끼는 듯하다가, 얼마 뒤에 한 개를 집어 주니 우리나라 사람이 한 입 베어 먹고는 바로 토하는데, 말똥이 한 입 가득 차서 온 저자 사람이 모두 웃었다.

요술쟁이는 바늘 한 줌을 입에 넣고 삼켰는데 근지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말하는 것이나, 웃는 것이 평상과 다름없이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천천히 일어나서 배를 문지르고 붉은 실을 비벼서 귓구멍에 넣고 한참 동안 섰더니, 재채기를 몇 번 하고는 코를 쥐어 콧물을 내고 수건을 내어 코를 씻고 나서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코털을 뽑는 것 같더니, 얼마 만에 붉은 실이 콧구멍에서 조금 보였다. 요술쟁이는 손톱으로 그 실 끝을 집어 당기니 실이 한 자 넘게 나오면서 갑자기 바늘 한 개가 콧구멍에서 누워 나오는데 실에 꿰어져 있었다. 가느다랗게 질질 끌려 빠지는 실은 자꾸 길어져서 백 개 천 개 바늘이 실 한 끝에 꿰어졌고, 혹은 밥알이 바늘 끝에 붙어 있었다.

요술쟁이는 흰 빛 대접 하나를 내어 여러 사람들에게 엎어 보이더니 땅바닥에 놓았는데 아무 물건도 없었다. 요술쟁이는 사방을 돌아보면서 손뼉을 쳐 보이고는 접시 한 개를 가져다가 대접을 덮고 사방을 향하여 노래처럼 부르더니, 얼마 있다가 열어 보니 은 다섯 쪽이 있는데 모양은 흰 마름처럼 생겼다. 요술쟁이는 사방을 돌아보고 손뼉을 쳐 여러 사람에게 보이고는 다시 접시로 대접을 덮고서 공중을 향하여 옆으로 흘겨보고 진언(眞言)을 외는 소리가 욕하는 것 같더니, 얼마 있다가 열어 보니 은()은 돈으로 화하여 그 수효는 역시 다섯 개였다.

요술쟁이는 은행 한 소반을 땅 위에 놓고 큰 항아리로 이것을 덮고 공중을 향하여 주문을 외우다가 한참 만에 열어보니, 은행은 보이지 않고 모두 산사(山査 한약재의 일종)가 되었다. 다시 그 항아리로 덮고 공중을 향하여 주문을 외우다가 한참 만에 열어 보니, 산사는 보이지 않고 모두 두구(荳蔲 한약재의 일종)가 되었다. 다시 항아리를 덮고 공중을 향하여 주문을 외우다가 한참 만에 열고 보니, 두구는 보이지 않고 모두 붉은 오얏이 되었다. 다시 항아리를 덮고 공중을 향하여 주문을 외우다가 한참 만에 열고 보니 붉은 오얏은 보이지 않고 모두 염주(念珠)가 되었다. 전단(栴檀)으로 여러 개의 포대(布袋) 목상(木像)을 조각하였는데 하나하나가 웃음을 머금고 낱낱이 뚱뚱하여 한 줄에 1 8개를 꿴 것이, 처음도 끝도 없이 가지런했다.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때 요술쟁이는 사방을 돌아보면서 손뼉을 쳐 여러 사람들을 두루 불러 용한 술법을 자랑했다. 다시 그 항아리를 덮어서 땅 위에 엎었다가 뒤집어 놓으니, 항아리는 밑으로 가고 소반은 위에 있게 되었다. 옆눈으로 보면서 화가 난 듯이 소리를 치고 한참 만에 열어 보니, 염주는 하나도 없고 맑은 물이 철철 넘치며, 한 쌍의 금붕어가 항아리 속에서 활발히 노는데 물을 먹고 진흙을 토하고 한 번 뛰고 한 번 헤엄치곤 했다.

요술쟁이는 한 자 넓이나 되는 꽃 자기 쟁반 다섯 개를 탁자 위에 놓고 다시 가는 댓개비 수십 개를 탁자 아래 놓았는데, 댓개비의 대소와 장단은 화살과 비슷하고 모두 끝을 뾰죽하게 깎았다. 댓개비 한 개를 가지고 그 끝에 쟁반을 얹고 대를 돌리니, 쟁반은 기울지도 않고 삐뚤어지지도 않으며, 도는데 조금 느리게 돌면 다시 손으로 쳐서 빨리 돌게 한다. 쟁반은 빨리 도는 바람에 미처 떨어질 사이도 없었다. 쟁반이 조금 기울 때는 다시 댓가지로 질러 올리면 쟁반이 한 자 넘어 높이 솟았다가 똑바로 댓개비에 그대로 내려 앉아 팽팽 돌았다. 요술쟁이는 이것을 오른쪽 신 속에 꽂아 놓으니 쟁반은 저절로 돌고 있었다. 다시 한 개비로 쟁반을 처음처럼 돌리다가 왼편 신 속에 꽂고 또 한 개비로 돌리다가 오른편 옷깃에 꽂고 다른 한 개비는 왼편 옷깃에 꽂으며, 또 다른 한 개비는 끝에 쟁반을 얹어 흔들고 치밀고 핑핑 돌리니 손으로 칠 때마다 쟁쟁 소리가 났다. 이때 요술쟁이는 댓개비에 댓개비를 잇달아 꽂는데 쟁반은 무겁고 댓개비는 길어지니 댓가지 중동이 절로 구부러지는데, 쟁반은 떨어져 부서질 생각도 않고 돌리기를 그치지 않는다. 댓개비 10여 개를 이은즉 높이가 지붕 위에까지 올라갔다. 요술쟁이는 이었던 댓개비를 천천히 하나씩 빼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주어 탁자 위에 도로 놓았다. 이때 요술쟁이는 입에 댓개비 하나를 담뱃대처럼 물고 입에 문 댓개비 끝에 높은 댓개비를 세우며, 두 팔을 늘어뜨리고 뻣뻣이 한참 동안 서니 이때 구경꾼들은 뼈가 자릿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는 쟁반을 아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상 목격하기가 너무 위험해서였다. 별안간 바람이 일어 댓개비는 과연 중동이 부러지면서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놀라 소리를 치자, 요술쟁이는 역시 재빨리 쫓아가 쟁반을 슬며시 받아서, 다시 공중으로 높이 1백 척이나 되게 던져 놓고 사방 구경꾼을 돌아보면서 편안한 듯 쟁반을 받는데, 자랑하는 빛도 없고 뽐내는 기색도 없이 옆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했다.

요술쟁이는 벼알 네댓 말을 앞에 놓고 두 손으로 다투듯이 움켜쥐고 짐승 고기처럼 잠깐 사이에 다 먹어 버리니 땅바닥은 핥은 듯했다. 이때 요술쟁이는 땅바닥을 버티고 겨를 토하는데, 침이 뭉쳐서 덩어리가 되어 나왔다. 겨가 다 나오더니 계속해서 연기가 입술과 이 사이에 어리어 손으로 수염을 씻고 물을 찾아 양치질을 해도 연기는 끝내 그치지 않았다. 답답함을 참지 못하여 가슴을 치고 입술을 쥐어 뜯으며 연거푸 물을 몇 그릇 마셨으나, 연기의 형세는 더욱 심하여 입을 벌리고 한 번 토하니 붉은 불이 입에 찼다. 젓가락으로 집어내니 반은 숯이요 반은 타고 있었다.

요술쟁이는 금호로병(金葫蘆甁)을 탁자 위에 놓고 또 녹동(綠銅) 화병을 내놓는데 공작의 깃이 꽂혀 있더니, 조금 있다 보니 금호로병이 간 곳이 없다. 요술쟁이는 구경꾼들 중의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노야(老爺)가 감추었어.”

하니, 그 사람은 노하여 얼굴빛이 변해 가지고,

 

어찌 이렇게 무례하단 말야.”

했다. 요술쟁이는 웃으면서,

 

노야께서는 정말 거짓말을 하십니다. 호로병은 노야의 주머니 속에 있습니다.”

하니, 그 사람은 크게 노하여 입 속으로 욕을 하면서 옷을 한 번 털어 보이니, 홀연 품속에서 땡그랑 소리가 나면서 호로병이 떨어졌다. 온 저자가 일제히 웃으니 그 사람은 묵묵히 있다가 딴 사람 등 뒤에 가서 섰다.

요술쟁이는 탁자 위를 깨끗이 닦고 도서(圖書)를 진열하고 조그만 향로에 향불을 피우고 흰 유리 접시에 복숭아 세 개를 담아 두었는데 복숭아는 모두 큰 대접만 했다. 탁자 앞에 바둑판과 검고 흰 바둑알을 담은 통을 놓고 초석을 단정하게 깔아놓았다. 잠깐 휘장으로 탁자를 가렸다가 조금 후에 걷으니, 구슬 관에 연잎 옷을 입은 자도 있고, 신선의 옷과 신 차림을 한 자도 있으며,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고 맨발로 있는 자도 있고, 혹은 마주 앉아 바둑을 두기도 하며, 혹은 지팡이를 짚은 채 옆에 서 있기도 하고, 혹은 턱을 고이고 앉아서 조는 자도 있어 모두가 수염이 아름답고 얼굴들이 고기(古奇)했다. 접시에 있던 복숭아 세 개가 갑자기 가지가 돋고 잎이 붙고 가지 끝에 꽃이 피니, 구슬관을 쓴 자가 복숭아 한 개를 따서 서로 베어 먹고, 그 씨를 땅에 심고 나서 또 다른 복숭아 한 개를 절반도 못 먹었는데 땅에 심은 복숭아나무는 벌써 몇 자를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바둑 두던 자들이 갑자기 머리가 반백(斑白)이 되더니 이윽고 하얗게 세어 버렸다.

요술쟁이는 큰 유리 거울을 탁자 위에 놓고 시렁을 만들어 세웠다. 이때 요술쟁이는 여러 사람들을 두루 불러서 거울을 열어 구경시키는데, 여러 층 누각과 몇 겹 전각이 아름다운 단청을 곱게 했는데, 관원 한 사람이 손에 파리채를 잡고 난간을 따라 서서히 걸어갔다. 아름다운 계집들이 서넛씩 짝을 지어 보검을 가지고 혹은 금병을 받들고, 혹은 봉생(鳳笙)을 불고 혹은 비단 공도 차며, 구름 같은 머리와 아름다운 귀고리가 묘하고 곱기 비할 바 없었다. 방 안에는 백 가지 물건과 수없는 보물들이 참으로 세상에서 부귀가 지극한 사람 같았다. 이때 여러 사람들은 부러움을 참지 못하여 서로 구경하기에 바빠서 이것이 거울인 줄도 잊어버리고 바로 뚫고 들어가려 했다. 이때에 요술쟁이는 구경꾼들을 꾸짖어 물리치고 즉시 거울 문을 닫아 더 오래 보지 못하도록 했다. 요술쟁이는 한가로이 걸어서 사방을 향하여 무슨 노래를 부르다가 또 거울 문을 열어 여러 사람을 불러 와 보라고 했다. 전각은 적막하고 누사(樓榭)는 황량한데 일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아름다운 계집들은 어디로 가고 한 사람이 침상 위에서 옆으로 누워 자는데, 옆에는 아무 물건도 없고 손으로 귀를 받치고 이마 밑으로 김 같은 것이 연기처럼 떠오르는데, 처음은 가늘고 끝은 둥그렇게 늘어진 젖통 같았다. 종규(鐘馗)가 누이를 시집보내고 올빼미가 장가를 드는데, 버들 귀신이 앞을 서고 박쥐가 기를 들고 이마에서 나오는 김을 타고 올라가서 안개 속에서 논다. 잠자던 자는 기지개를 켜면서 깨려다가 또 잠이 드는데, 갑자기 두 다리가 두 수레바퀴로 바뀌면서 바퀴살이 아직 덜 되었는데, 이때에 구경꾼들은 징그러워 하지 않는 자 없어 거울을 가리고 등을 돌리고 달아났다. 세계의 몽환(夢幻)이 본래 이와 같아서 오히려 거울 속의 염량(炎凉) 변천도 현저히 달랐다. 일체 인간의 가지가지 일들이 아침에 무성했다가 저녁에 시들고, 어제 부자가 오늘은 가난하고 잠깐 젊었다가 갑자기 늙는 것이 꿈속에 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슬쩍 죽었다가 바야흐로 살고,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으며, 무엇이 참이요 무엇이 거짓인지 모를 일이다. 세상에 착한 마음을 지닌 착한 사내와 보살(菩薩)의 형제들에게 말하노니, 헛 세상에 꿈 같은 몸과 거품 같은 금과 번개 같은 비단으로 큰 인연을 맺어서, 기운에 따라 잠시 머무를 뿐이니 원컨대, 이 거울을 표준삼아 덥다고 나아가지 말고, 차다고 물러서지 말며, 있는 돈을 흩어서 이 가난한 자를 구제할지어다.

요술쟁이는 큰 동이 하나를 탁자 위에 놓고 수건으로 정하게 닦고 붉은 옷감으로 위를 덮으며, 장차 무슨 요술을 하려고 주선할 즈음에 품속에서 접시 하나가 쨍그렁하고 땅에 떨어지면서 붉은 대추가 흩어지니,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웃고 요술쟁이도 역시 웃었다. 그릇과 도구를 주워 담아 이내 놀음을 파하니, 이것은 재주가 없어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날이 저물어 바로 파하려 했으므로 일부러 파탄(破綻)을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본래 이것이 거짓인 것을 보여 준 것이다.

 

 

[D-001]제공(帝工) : 눈도 코도 없이 누른 주머니처럼 생긴 귀신 새 이름. 산해경(山海經)에 나온다.

[D-002]전단(栴檀) : 남양 지방에서 나는 명향(名香).

[D-003]포대(布袋) : 불경에서 이르는 칠복신(七福神)의 하나로서 미륵보살이라고도 하는 중.

[D-004]종규(鍾馗) : ()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귀신의 이름. 무과(武科)에 응시하여 불합격한 귀신이라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환희기후지(幻戲記後識)

 

 

이날 홍려시 소경(鴻臚寺少卿) 조광련(趙光連)과 의자를 나란히 하고 요술을 구경했는데, 나는 조경(趙卿)에게 말하기를,

 

눈으로 시비를 분별 못하고 참과 거짓을 살피지 못한다면, 비록 눈이 없다고 한대도 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요술쟁이에게 속는 것은 눈이 일찍이 헛되게 보여 그런 것이 아니라 눈으로써 밝게 본다는 것이 도리어 탈입니다.”

하였더니, 조경은,

 

비록 요술을 잘하는 자가 있더라도 소경에게는 눈속임을 할 수 없을 것이니 눈이란 과연 떳떳한 것일까요.”

한다. 나는,

 

저의 나라에 서화담 선생(徐花潭先生)이란 분이 있는데, 그분이 길에서 우는 자를 만나 네 어찌 우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세 살에 소경이 되어 이제 40년이 되었는데, 전일에는 걸음을 걸을 때는 발을 의지해서 보고, 물건을 잡을 때는 손을 의지해서 보고 성음(聲音)을 들어 누구인지 분별하니 귀를 의지해서 보고, 냄새를 맡아 무슨 물건인지 살피니 코를 의지해서 보았습니다. 딴 사람들은 두 눈만 가졌지만 나는 손과 발과 코와 귀가 모두 눈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한 하필이면 수족과 귀와 코뿐이겠습니까. 해가 이르고 늦은 것을 낮에 피로한 것으로 보고, 물건의 형용과 빛깔을 밤에 꿈으로 봅니다. 아무런 장애도 없고 일찍이 의심과 혼란이 없었는데, 이제 길을 걸어오다가 홀연히 두 눈이 맑아지고 동자가 스스르 열려 천지가 넓고 크며, 산천이 요란하게 엉켰고, 만물이 눈을 가리고 모든 의심이 가슴을 막아서, 수족과 귀와 코는 착각을 일으키고 전도(顚倒)되어서 모두 떳떳한 것을 잃고 보니, 묘연(渺然)히 우리 집조차 잊어버려서 돌아갈 수가 없으므로 웁니다.’ 하더랍니다. 화담 선생은 말하기를, ‘네가 네 길잡이에게 물어보면 길잡이가 응당 스스로 알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그는 말하기를, ‘내 눈이 이미 밝았으니 길잡이에게 물으면 무엇하겠습니까.’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도로 네 눈을 감으면 너가 서 있는 곳이 곧 네 집일 것이다.’ 했으니, 이로써 논한다면, 눈이란 그 밝은 것을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오늘 요술을 구경하는 데도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해서 속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는 자가 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했더니 조경은,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비연(飛燕 () 조 황후(趙皇后)의 별호)은 너무 파리하고 옥환(玉環 () 양태진(楊太眞)의 별호)은 너무 살쪘다고 하는데, 무릇 너무라고 하는 말은 지나치게 심하다는 말로서 이미 그 살찌고 파리한 것을 의논하면서 경솔히 심하다는 말을 더 붙였은즉, 이것은 이미 절세(絶世)의 가인(佳人)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두 임금(한 성제(漢成帝)당 현종(唐玄宗))의 눈은 살찌고 파리한 데 홀렸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광명한 눈과 진정한 소견이 없어진 지 오랩니다. 태백(太伯)이 몸에 먹으로 문양을 그리고 약을 캔 것은 효도로써 요술을 부린 것이요, 예양(豫讓)이 몸에 옻칠을 하고 숯을 먹은 것은 의리로써 요술을 부린 것이요, 기신(紀信 한 고조(漢高祖) 때의 장수)의 누렁 뚜껑에 털로 왼편을 꾸민 수레는 충성으로써 요술을 부린 것이요, 패공(沛公 () 고조가 천자가 되기 전의 봉호)의 요술은 깃발로 부렸고(기신에게 주어 투항을 가장하게 함을 말함), 장량(張良)의 요술은 돌로 부렸으며, 전단(田單 전국 때 제()의 장수)은 소로써, 초평(初平 미상)은 약으로써, 조고(趙高 ()의 승상)는 사슴으로써, 황패(黃覇 한 선제(漢宣帝) 때의 승상)는 참새로써, 맹상군(孟甞君)은 닭으로써 요술을 부렸고, 치우(蚩尤 황제(黃帝) 때 제후의 하나)의 요술은 동두(銅頭)와 철액(鐵額)으로 부렸으며 (머리는 구리 이마는 쇠), 제갈량(諸葛亮)의 요술은 목우유마(木牛流馬)로 부렸고, 왕망(王莽)의 금등(金縢)에서 명을 청한 것은 요술이 되다가 만 것이요, 조조(曹操)가 동작대(銅雀臺)에서 향을 나눈 것은 요술의 파탄이요, 안녹산(安祿山)의 적심(赤心) 과 노기(盧杞 당 덕종(唐德宗) 때의 간신)의 남면(藍面 얼굴이 귀신의 얼굴처럼 생김)은 모두 요술의 졸한 것이었습니다. 예로부터 부인들이 더욱 요술을 잘 부려 포사(褒姒 () 유왕(幽王)의 애희)의 봉화(烽火)와 여희(驪姬 () 헌공(獻公)의 애희)의 벌이 그러한 것이었으나, 성인(聖人)이 신성한 도로써 교화를 베푸는 데도 역시 그런 것이 있으니, 나는 비록 뜰에 난 풀이 아첨쟁이를 가리키고 소악(韶樂)을 듣고 봉황이 날아왔다(()의 고사)는 것은 감히 의심 못한다 하더라도 황룡(黃龍)이 배를 등에 졌다(()의 고사)는 것과 붉은 까마귀가 집에 들어왔다는 것은 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신성(神聖)한 자나 우범(愚凡)한 자는 누구나 한 가지 알지 못할 일이 있는데, 혹은 헌데 딱지를 즐기는 자가 있고, 혹은 노새 울음소리를 즐기는 자가 있으니, 이것은 비록 요술이라 해도 가할 것이요, 비록 천성이라 해도 또한 가할 것입니다. 요술의 술법은 비록 천변만화를 하더라도 족히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가히 두려워할 만한 요술이 있으니, 그것은 크게 간사한 자가 충성스러운 체하는 것과 향원(鄕愿)이면서도 덕행이 있는 체하는 것일 겁니다.”

한다. 나는,

 

호광(胡廣 동한 말 여섯 임금을 역사한 신하) 같은 삼공(三公)은 중용(中庸)으로 요술을 하고 풍도(馮道)와 같이 오대(五代)를 정승 살이한 것은 명철(明哲)한 것으로 요술을 부렸으니, 웃음 속에 칼이 있는 것이 입 속으로 칼을 삼키는 것보다 더 혹독하지 않을까요.”

하고는 서로 크게 웃으면서 일어났다.

 

 

[C-001]환희기후지(幻戲記後識)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서 추록하였다.

[D-001]홍려시 소경(鴻臚寺少卿) : 홍려시는 손님을 접대하는 관청. 소경은 차관(次官).

[D-002]서화담 선생(徐花潭先生) : 조선 명종(明宗) 때의 학자 서경덕(徐敬德). 자는 가구(可久). 물질불변론(物質不變論)을 주장하였다.

[D-003]태백(太伯) …… 것이요 : ()의 태백이 그 아버지의 뜻을 살펴서 왕위를 아우에게 양보하고 머리를 깎고 몸에 무늬를 그려 형만(荊蠻)으로 피신하였음을 말한다.

[D-004]예양(豫讓) …… 것이요 : 전국 때 사람. 그의 임금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거짓 벙어리가 되어서 조양자(趙襄子)를 죽이려 하였음을 말한다.

[D-005]기신(紀信) …… 수레는 : 한 고조가 항적(項籍)에게 포위되었을 때에 평복으로 도망치게 하고, 기신이 대신하여 누른빛 휘장을 씌운 천자가 타는 수레를 타고 항적의 진중에 들어가 항복을 가장했다가 잡혀 죽었음을 말한다.

[D-006]장량(張良) …… 부렸으며 : 장량이 황석공(黃石公)이라는 이인으로부터 병서(兵書)를 얻었는데, 황석공은 장량에게 말하기를, “이 뒤에 나를 찾으려거든 이 산 밑에 누른 돌이 곧 나다.”라고 한 고사.

[D-007]전단(田單) …… 소로써 : 전단이 오채 용문(龍文)을 입힌 소의 뿔에 불을 붙여 적진으로 몰아넣어 승전하였다.

[D-008]조고(趙高) …… 사슴으로써 : 조고가 권세를 독차지하여 반대자를 없애기 위한 시험으로, 사슴을 이세(二世) 호해(胡亥)에게 바치면서 말이라고 해도 아무도 반박하는 자 없었음을 말한다.

[D-009]맹상군(孟甞君) …… 부렸고 : 맹상군이 진()에서 구금당하여 도망치는데, 함곡관(函谷關)에 닿았으나, 닭이 울기 전에는 문을 열지 못하므로 그 부하로 있는 자가 닭울음을 잘하여 관문을 열게 하였음을 말한다.

[D-010]제갈량(諸葛亮) …… 부렸고 : 제갈량이 목우유마를 발명하여 산악 지대에 군량을 수송하였음을 말한다.

[D-011]왕망(王莽) …… 것이요 : 왕망이, 주공(周公)이 금등에 글을 넣었던 옛 일을 본떠서 자기에게 황제의 위()를 전하라는 금등 문건을 꾸며서 나라를 빼앗았음을 말한다.

[D-012]조조(曹操) …… 것은 : 조조가 위공(魏公)으로 있을 때 동작대를 짓고 죽을 때에 궁녀(宮女)들에게 향()을 나누어 주며, 사후라도 동작대에 와서 자기에게 제사하라 하였음을 말한다.

[D-013]안녹산(安祿山)의 적심(赤心) : 안녹산이 특히 배가 부르매 당 현종이 농으로 뱃속에 무엇이 들었느냐고 물었을 때, 대답하기를 언제나 붉은 정성이 들어 있다 하였음을 말한다.

[D-014]포사(褒姒)의 봉화(烽火) : 포사의 성질이 잘 웃지를 않아 유왕은 포사를 웃기기 위하여 일없이 봉화를 들어, 제후들이 속아 군사를 몰고 모여들었다가 헛걸음함을 보고 비로소 웃었다.

[D-015]여희(驪姬)의 벌 : 태자 신생(申生)을 미워하여 신생이 벌을 자기의 속옷에 일부러 집어 넣었다고 모함하여 신생을 죽게한 것을 말한다.

[D-016]뜰에 난 풀 : ()의 대궐 뜰에 났던 풀로 아첨하는 신하를 가리킨 지영초(指佞草).

[D-017]붉은 ……  : 주 무왕(周武王)이 제후들과 동맹하고자 가는 길에 강을 건너니 붉은 까마귀가 날아들었다 한다.

[D-018]향원(鄕愿) : 시골 사람으로 아무런 특색이 없이 겸손하고 삼가는 체하는 사람. 논어에 나오는 말.

[D-019]풍도(馮道) : 오대가 혼란할 때 요령 있게 벼슬자리를 지켜 오대 사성(四姓)을 역사한 사람.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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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금료소초(金蓼小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금료소초(金蓼小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금료소초(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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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금료소초(金蓼小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금료소초(金蓼小抄)

1. 금료소초서(金蓼小抄序)

2. 금료소초(金蓼小抄)

 

 

금료소초서(金蓼小抄序)

우리나라 의학(醫學) 지식은 그다지 넓지 못하고 약 재료도 그다지 많지 못하므로, 모두 중국의 약재를 수입해다 쓰면서도, 항시 그것이 진품이 아닌 것을 걱정하였다. 이와 같은 넓지 못한 의학 지식을 가지고, 또 진품이 아닌 약재를 쓰고 있으니, 병은 으레 낫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열하에 있을 때에 대리시경(大理寺卿) 윤가전(尹嘉銓)에게,

 

요즘 의서(醫書)들 중에, 새로운 경험방(經驗方)으로 사서 갈 만한 책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윤경(尹卿),

 

근세의 일본(日本) 판각 소아경험방(小兒經驗方)이 가장 좋은 책인데, 이 책은 서남 해양 중에 있는 하란원(荷蘭院)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또 서양의 수로방(收露方)이란 책이 극히 정미로우나, 시험해 보니 그다지 효력이 없었는데, 이는 대체로 사방의 기후와 풍토가 다르고, 옛날과 지금 사람들의 기품과 성질이 다른 까닭입니다. 방문만 따라서 약을 준다는 것은, 조괄(趙括)의 병법(兵法) 이야기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정속금릉쇄사(正續金陵瑣事)에는 역시 근세의 경험들을 많이 수록하였고,  요주만록(蓼洲漫錄)이란 책이 있고,  초비초목주(苕翡草木注)》ㆍ《귤옹초사략(橘翁草史略)》ㆍ《한계태교(寒溪胎敎)》ㆍ《영추외경(靈樞外經)》ㆍ《금석동이고(金石同異考)》ㆍ《기백후청(岐伯侯鯖)》ㆍ《의학감주(醫學紺珠)》ㆍ《백화정영(百華精英)》ㆍ《소아진치방(小兒診治方) 등은 모두 근세의 저명한 학자들이 지은 책이어서, 북경 책사에서는 무엇이나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연경으로 돌아와 하란(荷蘭) 소아방(小兒方)과 서양의 수로방을 구해 보았으나 모두 얻지 못하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책들도 더러는 광동(廣東) 지방 각본(刻本)들이라 말했으나, 책사들에서도 모두 그 명목조차 몰랐다. 우연히 향조필기(香祖筆記 청의 왕사진(王士稹) )를 들추다가 그 중에서 금릉쇄사(金陵瑣事) 요주만록의 기록을 발견했으나, 그 원서(元書)는 모두가 의학 관계의 내용은 아니었고, 이상(貽上 왕사진 저)의 기록은 전부가 경험에 관계되는 기록이었으므로, 나는 수십 종의 법을 따서 베끼고, 이 밖의 잡지와 필기 중에 실린 옛날 방문과 잡록들을 아울러 초록하여, 금료소초라 이름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산중에는 의서도 없고 약제도 없으므로, 가다가 이질이나 학질에 걸리면 무엇이든 가늠으로 대중하여 치료를 하는데, 때로는 맞히는 것도 있기에 역시 아래에 붙여 산골 속에서 쓰는 경험방을 삼으려 한다. 연암(燕巖)은 쓰다.

 

 

[C-001]금료소초서(金蓼小抄序)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D-001]하란원(荷蘭院) : 화란(和蘭)의 교회(敎會).

[D-002]조괄(趙括) : 전국 때에 조()의 장수의 이름. 그는 그의 아버지 조사(趙奢)의 병법(兵法)을 잘 외기는 하나, 이용 변통할 줄은 몰랐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금료소초(金蓼小抄)

 

 

물류상감지(物類相感志 저자 미상)에 이르기를,

 

산길을 가다가 길을 잃을 염려가 있을 때는, 향충(向蟲) 한 마리를 잡아 손에 쥐고 가면 길을 잃지 않는다.”

하였다.

유환기문(遊宦紀聞 () 장세남(張世男) )에는 신경(腎經)이 허하여 허리가 아픈 병을 치료하는 데 정사수(程沙隨)의 방문을 기재하였으되,

 

두충(杜沖 한약재의 일종)을 술에 담갔다가 불에 구워 말린 뒤에, 빻아서 가루를 만들 때 재를 없게 하여 술에 타서 마신다.”

하였고 또,

 

날것이나 찬 것을 먹고서 앙가슴이 아픈 데는, 진수유(陳茱萸 한약재의 일종) 560개를 물 한 잔에 달여, 찌꺼기를 버리고 평위산(平胃散 한약정) 3돈쭝을 넣어서 다시 달여 먹는다.”

하였고, ,

 

사수(沙隨)가 항시 임질(淋疾)을 앓았는데, 날마다 백동과(白東苽 한약재의 일종) 큰 것 세 개씩을 먹고 나았다.”

하였다.

강린기(江隣幾 미상) 잡지(雜志) 후청록(侯鯖錄 송 조영치(趙令畤) ) 중에 모두 적혀 있기를,

 

옛 약방문에 쓰인 한 냥쭝은 지금의 석 냥쭝이 된다. 이는 수() 때에 이르러서 석 냥을 합쳐서 한 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풍창소독(楓窓小牘 일명씨(逸名氏) ), 동파(東坡) 일첩록(一帖錄) 중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이끌었다.

 

발병에는 위령선(葳靈仙 한약재의 일종)과 우슬(牛膝 한약재의 일종) 두 가지를 가루로 만들어 꿀에 버무려서 환을 만들어 공복에 먹으면 신효를 보게 된다.”

수종(水腫)을 다스리는 데는, 논에서 나는 우렁이와 큰 마늘과 차전초(車前草 한약재의 일종)를 한데 갈아, 큼직한 지짐떡만큼씩 고약으로 만들어 배꼽 위에 붙여 두면, 물이 대소변에 따라 나오고 곧 병이 낫는다.

해소를 낫게 하는 경험방으로서는, 향연(香櫞)의 씨를 발라내고 엷게 썰어 가늘게 조각을 내어서 청주(淸酒)와 함께 연하게 간 뒤에 사기 탕관에 넣고는, 저녁 때부터 새벽 오경(五更)까지 흠뻑 익혀 가지고, 다시 꿀에 타서 잘 버무려 두고는, 자다가 일어나서 숟가락으로 떠 먹으면, 매우 효험이 있는 것이다. 또 남쪽으로 뻗은 부드러운 뽕나무 가지 한 묶음을 한 마디씩 잘게 잘라 가마에 넣고, 물 다섯 보시기를 부은 뒤에 한 보시기나 되도록 달여서 목이 마를 때마다 마실 것이다.

송 효종(宋孝宗 조신(趙昚))은 게를 많이 먹고 이질을 앓았다. 때마침 엄방어(嚴防禦)란 자가 있어서, 새로 캔 연뿌리를 잘게 갈아서 더운 술에 섞어 썼더니, 과연 나았다.

붉은 막이 덮인 눈병을 다스리는 데는, 흰 소라[白螺] 한 마리를 까서, 황련(黃連 한약재의 일종) 가루에 버무려서 하룻밤 이슬을 맞혔다가 새벽에 보면, 소라의 살은 녹아서 물이 된다. 이 물을 눈에 떨어뜨리면 붉은 막이 저절로 사라진다.

고기 가시가 목에 걸렸을 때는 개의 침을 먹고, 곡식 가시랭이가 목에 걸렸을 때는 거위의 침을 넘기면 즉차할 것이다.

무릇 물에 빠진 사람이나 쇠부스러기를 먹었을 때는 오리 피를 먹으면 곧 낫는다.

갑자기 귀머거리가 된 자는, 전갈[] 온 마리를 독을 없애고 가루로 장만하여 술에 타서 귓구멍에 방울로 떨어뜨리면, 소리가 들리며 낫는다.

구기자(枸杞子)로 기름을 짜서 등불을 켜고 책을 읽으면, 시력을 더 좋게 할 수 있다.

쇠 연장에 베었거나 다쳤을 때는, 외톨이 밤을 말려 갈아서 가루를 내어 붙이면 곧 낫는다.

후비유아(喉痺乳蛾 편도선 염증)에는 두꺼비 껍질과 봉미초(鳳尾草 한약재)를 잘게 갈아서 상매육(霜梅肉 한약재)과 함께 술에 삶아 각각 조금씩 섞어서는, 다시 갈아 가지고 가는 베로 짜서 즙을 내어 거위깃으로 찍어 환부에 바르면, ()을 토하고 곧 멍울이 사라진다.

악창이나 나쁜 종기가 처음 돋을 때, 당귀(當歸 한약재의 일종)황벽피(黃檗皮 한약재의 일종)강활(羌活 한약재의 일종)을 가늘게 가루로 내어 노사등(鷺鷥藤 한약재의 일종)을 날것 채로 찧어서 즙을 내어 섞어서 종기 자리의 네 변두리에 붙이면, 자연히 독기를 빨아 내거나 한데로 모여 작게 돋치게 되어 터지기도 한다. 그러나 종기머리, 곧 테두리 자체에 붙여서는 아니 된다.

필기(筆記) 중에 이르기를,

 

() 때 경산(徑山)에 살고 있던 중이 동산에 들어갔다가 뱀에게 발을 물렸을 때, 마침 손으로 왔던 어떤 중이 이를 치료하는데, 먼저 맑은 물을 길어 씻고, 또 계속 물 몇 섬이 들도록 바꾸어 씻어서 곪아 썩은 살을 다 없애 버리고, 상처에 흰 힘줄이 보일 때 부드러운 명주에다가 약 가루를 묻혀 상처 속에 집어 넣으니, 더러운 진물이 샘솟듯 솟아났다. 그 이튿날 맑게 씻고는 처음 모양으로 약을 발라 두니, 한 달 만에 독은 다 뽑아지고 살갗은 예전과 다름 없게 되었다. 그 약방문인즉, 향백지(香白芷 한약재의 일종)를 가루로 만들어 오리주둥이담반(膽礬 한약재의 일종)사향(麝香)을 각기 조금씩 넣었다. 이는 담수(談藪 저자 미상)에 실려 있다.”

여자들이 경도로 인하여 출혈이 심할 때는 당귀(當歸) 한 냥쭝과 형개(荊芥 한약재의 일종) 한 냥쭝을 술 한 종지와 물 한 종지에 달여 마시면 곧 그친다.

무주(撫州)에 살고 있던 상인이 이질을 만나 매우 위급하자, 태학생(太學生) 예모(倪某)가 당귀 가루를 아위(阿魏 한약재의 일종)로써 환을 지어 끓인 물에 세 번 복용시켜 곧 낫게 하였다.

또 이질을 다스리는 방법으로는, 황화(黃花 한약재의 일종)와 지정(地丁 한약재의 일종)을 찧어 거기에서 난 즙을 술 한 잔 분량에다 벌꿀을 조금 타서 먹으면 신효를 본다.

습담(濕痰)으로 종기가 나서 걸을 수 없을 때는, 도꼬마리목홍화(木紅花)나복영(蘿葍英)백금봉화(白金鳳花)수룡골(水龍骨)화초(花椒)괴조(槐條)창출(蒼朮)금은화(金銀花)감초(甘草) 등 열 가지를 달여 환부에 김을 쐬도록 하고, 물이 조금 따뜻한 때를 기다려 곧 씻는다.

소장(小腸)의 산기(疝氣)에는, 오약(烏藥 한약재의 일종) 6돈쭝과 천문동(天門冬 한약재의 일종) 5돈쭝을 맹물에 끓여 먹으면 신효가 난다.

소변이 잘 통하지 않을 때는, 망초(芒硝 한약재의 일종) 한 돈쭝을 보드랍게 잘라 용안육(龍眼肉 한약재의 일종)으로 싸서 잘 씹어 넘기면 당장에 효력을 본다.

혹을 다스리는 방법은, 댓가지를 써서 혹 위쪽의 살 껍질을 피가 나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긁어 헤치고는, 구리에 푸른 녹을 헤친 곳에 넣고 고약으로 붙여 둔다.

절골을 잇는 방법으로는, 기왓장을 불에 달구고 잘 말린 자라 반 냥쭝을, 뜨거운 대로 물에 적시어 자연동(自然銅)유향(乳香)몰약(沒藥)채과자인(菜瓜子仁) 등을 각기 등분해서 가늘게 가루를 내어 한 푼 반 쭝씩 술에 타 먹되, 상체가 상했을 때는 밥을 먹은 뒤에 먹고, 하체가 상했을 때는 식전에 먹는다.

온역(瘟疫)으로 머리와 얼굴이 부었을 때 치료하는 방법으로는, 금은화(金銀花) 두 냥쭝을 걸게 달여 한 잔 마시면 곧 사라진다.

바늘이 뱃속에 들어갔을 때는, 참나무 숯가루 서 돈쭝을 우물물에 타서 먹어도 좋고, 또 자석(磁石)을 항문에 대 두면 끌어당겨 나온다.

형개(荊芥) 이삭을 가루로 만들어 3돈쭝을 술에 타서 먹으면, 중풍증이 당장에 낫는다.

주마감(走馬疳)을 다스리는 데는, 또 장이나 소금에 절이지 않은 홍합(紅蛤)보다 조금 작은, 와룡자(瓦壟子 홍합과 비슷함)를 불에 태워 남은 재 덩이를 찬 땅에 두고 잔으로 덮어 씌워 다 식기를 기다렸다가 끄집어내어,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환부에 발라 스며들도록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말 발굽을 태운 재에 소금을 조금 뿌려 환부에 바르기도 한다.

천연두가 내뿜다가 검게 잦아들 때에, 침향(沈香)유향(乳香)단향(檀香 향의 일종) 등을, 다소를 불구하고 화롯불에 태우고, 아이를 안아 그 연기 위에 쬐면 즉시 내뿜는다.

악창을 다스리는 데는, 동과(冬瓜) 한 개를 복판을 쪼개어, 먼저 한 쪽을 헌 데에 엎어 붙인다. 동과가 더워지면 더운 데는 베어 버리고, 다시 가져다 붙여, 열이 식어지면 그만둔다. 또 다른 방문으로는, 마늘을 찧어서 떡처럼 만들어 헌 데에 얹고 불을 당겨 뜬다. 뜨면 아프지 않기도 하고, 또는 아프기도 한데, 아픈 데는 뜨고 아프지 않으면 그만둔다.

어린애들의 귀 뒤에 나는 부스럼을 신감(腎疳)이라 하는데, 지골피(地骨皮 한약재)만을 가루로 내어 굵은 놈은 뜨거운 물에 타서 씻고, 가는 놈은 참기름에 섞어 문지른다.

광동(廣東)광서(廣西) 지방과 운남(雲南)귀주(貴州) 등지에는 벌레 독이 많은데, 음식을 먹은 뒤 당귀를 씹으면 곧 독이 풀린다.

엽포주(葉蒲州 미상) 남암전(南巖傳) 중에, 칼에 다친 상처를 치료하는 방문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단옷날 벤 부추를 찧어 즙을 낸 뒤, 거기다가 석회를 섞고, 다시 찧어 익혀서 떡을 만들어 상처에 붙이면, 피는 곧 멈추고, 뼈까지 상했더라도 아물게 되어 신효를 볼 것이다.”

의이(薏苡 율무)의 일명은 간주(簳珠)라고도 한다.

계신잡지(癸辛雜志)에 이르기를,

 

목이 메었을 때는 장대산(帳帶散 한약재의 일종)을 쓰되, 다만 백반(白礬 한약재의 일종) 한 가지만을 쓰면 낫지 않기도 한다. 남포(南浦) 땅에 늙은 의원이 있어 가르치기를, 오리주둥이와 담반(膽礬)을 부드럽게 갈아 아주 독한 초에 섞어서 마시라고 한다. 어떤 관가의 늙은 호위병의 아내가 이 병을 앓아 이 방문으로 약을 썼더니, 약을 목구멍으로 넘기자마자 뻑뻑한 담을 두어 되나 토하고는 당장에 효험을 보았다.”

하였고, ,

 

눈에 티가 끼었을 때는, 곰의 쓸개를 정한 물에 조금 풀어 타서 눈꼽 먼지와 눈알을 죄다 씻고, 빙뇌(氷腦) 한두 쪽을 쓰되, 근지러울 때는 생강가루를 조금 넣어, 때때로 은 젓가락으로 찍어 눈에 떨어뜨리면 신효를 본다. 눈이 충혈되었을 때도 역시 쓸 수 있다.”

하였다.  민소기(閩小記 저자 미상)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연와(燕窩)에는 검은 것, 흰 것, 붉은 것 등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붉은 것은 제일 구하기가 어렵고, 흰 것은 능히 담()을 고칠 수 있고, 붉은 것은 어린애들의 홍역에 좋은 것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이질을 앓는데, 여러 의원들이 약을 써도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금오(金吾 벼슬 이름) 장사(長史) 장보장(張寶藏)이 방문을 올렸는데, 그에 의하여 필발(蓽茇 한약재)을 젖에 달여 먹였더니 당장에 나았다.

주공근(周公謹)이 괄창(括蒼)에서 나는 진피(陳皮 한약재)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두창(痘瘡)을 치료하는 데 쓴다 하였는데, 환자의 빛이 새까매지고, 뒤틀어지고, 입술이 얼음장처럼 찰 때, 개파리 일곱 마리를 찧어, 거르지 않은 술에 타서 조금씩 먹이면, 얼마 못 되어 붉은 윤기가 전과 같이 돌게 된다. 겨울철에 개파리는 개의 귓속에 있다.”

하였다.

천연두 독 때문에 밖으로는 죄어들고 안으로는 막히고 할 때는, 뱀 허물 한 벌을 정하게 씻어 불에 쬐어 말리고는, 다시 천화분(天花粉 한약재)을 같은 분량으로 부드럽게 가루로 만들어, ()의 간을 따서 속을 쪼개고 약 가루를 집어넣은 뒤, 세 껍질로 동여매고는 뜨물에 삶아 익혀서 썰어 먹으면 열흘이 못 가서 곧 낫는다.

졸지에 더위를 먹어 숨이 막혔을 때는, 큰 마늘 한 줌과 길바닥의 볕에 쬔 뜨거운 흙을 섞어 갈아서 이긴 뒤, 다시 새로 길어 온 물을 부어 걸러서 찌꺼기를 버리고 마시면 낫는다. 이 말은 피서록(避暑錄) 중에 실려 있다.

단풍나무 버섯을 먹으면,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다. 도은거(陶隱居)의 본초주(本草注)에 보면,

 

땅을 파고 냉수를 부어 휘둘러서 흐리도록 만들었다가, 조금 뒤에 이 물을 떠 마신다. 이것을 지장(地醬)이라 부르며, 여러 가지 버섯독을 낫게 할 수 있다.”

하였다.

향조필기(香祖筆記) 에 이르기를,

 

황생(黃生) 아무개는 여주(廬州) 사람으로, 우리 고을로 유람와서 단방(單方)으로 병을 치료하는데, 모두 효험이 있었다. 그 중에서 세 가지만을 적으면, 속결되는 병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깍지 벗긴 대비마(大萆麻 한약재) 1 50낱과 괴화나무 일곱 치[]를 향유(香油) 반 근에 넣어, 사흘 밤낮을 결어 두었다가 타도록 볶은 뒤, 찌꺼기를 버리고 비단(飛丹 한약재) 넉 냥쭝을 넣어 고약을 만들어서 우물 속에 사흘 동안을 담가 두었다가 밤에 끄집어내어, 먼저 피초(皮硝 한약재) 녹인 물로 환부를 씻고 이 고약을 붙인다. 치질을 다스리는 방법으로는, 대변을 본 뒤 감초(甘草) 끓인 물을 뒷물로 하고, 오배자(五棓子 한약재)와 여지초(荔枝草 한약재) 두 가지를 사기 남비에 달인 물로 씻는다. 여지초의 다른 이름은 나하마초(癩蝦蟆草)로서 사철, 언제나 있는데 면은 푸르고 안쪽은 희며, 얽은 구멍이 더덕더덕 있으면서 괴상한 냄새를 피우는 것이 곧 이 풀이다. 또 혈붕(血崩)증에는, 저종초(豬鬃草 한약재) 넉 냥쭝을 동변(童便)과 청주(淸酒) 각 한 종지씩에 섞어 넣어 한 종지가 되도록 달여서 따뜻하게 먹는다. 저종초는 사초(莎草)와 같고 잎은 둥글다. 정하게 잘 씻어서 쓸 것이다.”

하였다.

왕개보(王介甫)는 언제나 편두통을 앓기에, 신종(神宗)이 궁중에서 쓰는 방문을 하사하였는데, 새 나복(蘿葍)의 즙을 내어 생룡뢰(生龍腦 한약재)를 조금 넣고 골고루 잘 섞은 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약 방울을 콧구멍에 떨어뜨린다. 왼쪽 머리가 아플 때는 오른편 콧구멍에 넣고, 오른쪽 머리가 아플 때는 왼편에 넣는다.

원앙초(鴛鴦草)는 덩굴로 자라나서 누른 꽃과 흰 꽃이 마주 쌍으로 핀다. 이 약은 옹저(癰疽 등창과 같은 종기) 같은 독종을 치료하는 데 더욱 신기하다. 먹기도 하고 붙이기도 다 할 수 있다. 심존중(沈存中) 양방(良方 소심양방(蘇沈良方)의 약칭)에 실린 금은화(金銀花)가 곧 그것이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노옹수(老翁鬚)라고도 하는데, 본초주(本草注)에는 그를 인동(忍冬)이라 하였고, 군방보(群芳譜 () 왕상진(王象晉) )에는 노사등(鷺鷥藤)이라 하였으며, 또 금차골(金骨)이라고도 하였다.

사재항(謝在杭 미상) 문해피사(文海披沙) 중에 이르기를,

 

슬가(蝨瘕 이에 물려서 헌데가 된 것)은 황룡연수(黃龍沿水 미상)로 다스리고, 응성충(應聲蟲) 병은 뇌환(雷丸 한약종)과 쪽으로 다스리고, 식폐계충(食肺系蟲 폐를 먹는 벌레)은 달조(獺爪 수달의 발톱)로 다스리고, 격식충(膈食蟲 명치를 먹는 벌레)은 남즙(藍汁)으로 다스리고, 얼굴에 돋은 창은 패모(貝母 한약재)로 다스린다.”

하였다.

무창(武昌)소남문(小南門)의 헌화사(獻花寺)에 있는 늙은 중 자구(自究)란 자는, 음식으로 목이 막히는 병에 걸려 죽으면서 그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내가 불행히 이 병에 걸려 죽기는 하나, 가슴속에는 필시 무슨 물건이 있기 때문일 터이니, 죽은 뒤에 가슴을 갈라 보고 입관(入棺)을 해 달라.”

하였다. 그 제자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 비녀처럼 생긴 뼈 한 개를 끄집어내었다. 이 뼈를 불경 공부하는 책상 위에 두었는데, 오랜 뒷날에 군사를 거느리고 가던 어떤 장교가 이 방을 빌려 썼다. 어느 날, 부하들이 거위를 잡을 때 쉽사리 다 죽이질 못하여 이 뼈로 찔러 죽이자, 거위 피가 뼈에 묻은 즉시 뼈는 당장에 사라져 없어졌다. 뒷날, 그 제자가 역시 목 메는 병이 들었을 때, 전일 일이 생각나서 거위 피로 나을 수 있을 것을 깨닫고, 이를 여러 차례 먹었더니 드디어 나았다. 이내 이 방문을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려서, 누구나 다 낫게 되었다.

난산(難産)을 다스리는 방법으로는, 행인(杏仁 살구씨) 한 알의 껍질을 벗겨서 한 쪽에는 날 일() 자를 쓰고 또 한 쪽에는 달 월() 자를 써서 꿀을 묻혀 붙이고, 볶은 꿀로 환을 만들어 백비탕이나 혹은 술을 마셔서 넘긴다. 이 방문은 어떤 방술(方術)하는 중이 전한 것이다.

손사막(孫思邈 ()의 학자) 천금방(千金方 천금요방(千金要方)의 약칭)에 이르기를,

 

인삼탕(人蔘湯)은 반드시 흐르는 물을 써서 달일 것이요, 괸 물을 쓰면 효험이 없는 법이니, 이는 인삼보(人蔘譜 저자 미상)에 실려 있는 말이다.”

하였다.

담포기(談圃記 저자 미상)에 이르기를,

 

증노공(曾魯公 미상)이 나이 70여 세에 이질에 걸렸는데, 고향 사람 진응지(陳應之)가 수매화(水梅花)를 납차(臘茶)에 복용하도록 하여 곧 나았다.”

하였으나, 수매화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첨사(僉事 벼슬 이름) 장탁(張鐸 ()의 무관(武官))의 말에 의하면,

 

비둘기를 기르면 어린애들의 감질(疳疾)을 다스린다. 비둘기를 많이 기르고, 매일 새벽마다 어린애들로 하여금 방문을 열고 비둘기를 날리게 하면, 비둘기의 기운이 낯에 부딪쳐서 감질이 없어진다.”

하였다.

권유록(倦遊錄 저자 미상)에 쓰여 있기를,

 

신가헌(辛稼軒)이 산질(疝疾)에 걸렸을 때, 어떤 도인(道人)이 가르치기를, 율무알과 황토로 바른 동쪽 벽토를 한데 볶아서, 다시 물에 달여 고약을 만들어 자주 먹었더니 산질이 곧 사라졌고, 정사수(程沙隨)도 이 병에 걸리자, 가헌이 이 방문을 가르쳐 주어서 역시 나았다.”

하였다.

문창잡록(文昌雜錄 송 요원영(廖元英) )에 이르기를,

 

정주 통판(鼎州通判) 유응신(柳應辰)이 생선 뼈에 걸린 병을 다스리는 방문을 전해 왔는데, 역수로 흐르는 물 반 잔을 떠다 놓고, 먼저 환자더러 병의 증세를 묻고 그로 하여금 그 기운을 빨아들인 다음에, 동쪽으로 향하여 원()()()() 넉 자를 일곱 번 외고 공기를 들여마신 다음, 숨을 내쉬지 않은 채 물을 조금 마시면 즉시 낫는다.”

하였다.

수질(水疾 물에서 얻은 병)을 다스리는 법은, 배를 젓는 노()가 서로 마찰하는 데를 조금 긁고 또 배 밑에 묻은 때를 조금 긁어서 환약을 만든 다음, 소금물로써 세 알을 넘기면 신효가 난다.

 

 

붙임[]

 

얼굴에 난 수지(水痣)는 속칭 무사마귀[武射莫爲]라 한다. 그를 다스리는 방법은, 가을의 바닷물로 씻으면 곧 없어진다. 나의 종제(從弟) 유원(綏源)이중(履仲) 89세 때 얼굴에 무사마귀를 함빡 덮어 쓰다시피 하여서 백약이 무효였는데, 어가(魚哥) 성을 가진 늙은 의원이 있어 89월의 바닷물로 자주 씻으면 낫는다고 가르쳐 주어, 당장에 효험을 보았다.

내가 여남은 살 났을 때 얼굴에 함빡 쥐의 젖을 뒤집어 쓰게 되었는데, 눈시울과 귓가가 더욱 심했다. 더덕더덕 밥티가 붙은 것 같아서, 언제나 거울만 들여다보고 울면서 화를 냈지마는 백약이 무효였다. 때가 바로 봄 여름철이어서 가을철까지 바닷물을 기다릴 수 없어, 염정(鹽井)의 물거품을 물에 타서 몇 차례 씻고는 그대로 말렸더니, 아주 신효를 보았다. 나는 이 방법을 널리 전했더니, 효험을 아니 본 자가 없었다.

왕혹정(王鵠汀)의 종인 악가(鄂哥)는 나이 스물 한 살인데, 얼굴이 깨끗하게 생겼었다. 마침 이질에 걸려 많이 앓던 판이라, 혹정은 나에게 우리나라 태의(太醫)를 좀 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의사를 청할 필요가 없소. 촉촉한 땅을 파고 지렁이 수십 마리를 잡아 백비탕에 넣어 끓여 짜서는, 목이 마를 때 이 물을 많이 마시면 효험을 볼 것입니다.”

하였더니, 혹정이 당장에 시험하여 곧 나았다.

목생(穆生)이란 자가 마침 학질을 앓아서, 혹정은 나에게 인도하여 보이고 방문을 청한다. 나는 이슬에 생강즙을 타서 마실 것을 가르쳐 주었더니, 목은 사례를 하면서 가 버렸는데, 그 이튿날 회정(回程)했으므로 이것을 먹고 효험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대체로 이 생강즙은 학질 고치는 데 좋은 방문으로, 생강 한 뿌리를 즙을 내어 하룻밤을 한데 내어 두었다가, 해뜨기 전에 동향(東向)하고 앉아 마신다. 여러 번 시험했으나 다 나았다.

고북구(古北口) 밖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목에 혹이 많이 달렸는데, 여자가 유달리 더하였다. 나는 혹정에게 한 방문을 가르쳐 주면서,

 

혹이 만일 담핵(痰核)이라면, 끼니마다 밥을 먹을 때 먼저 한 술을 떠서 손바닥 위에 놓고 밥을 동글동글하게 비벼 쥐고 있다가, 밥을 마친 뒤에 소금을 밥에 조금 넣고 엄지손가락으로 섞어 개어서 상처에 오랫동안 붙이면 저절로 없어진답니다. 그리고 밥은 멥쌀로 지어서 쓴답니다.”

하였다.

해산을 빨리 시키는 데는, 피마자 한 알을 찧어 발바닥 한복판에 붙이면 순산을 한다. 순산한 뒤엔 곧 떼어 버려야 한다. 만일, 이를 잊어버리고 떼지 않으면 대하증(帶下症)이 생기기 쉽다.

양기를 돕는 데는, 가을 잠자리의 머리와 날개와 다리를 떼어 버리고, 곱게 갈아서 쌀뜨물에 반죽을 하여 환을 만들어 세 홉을 먹으면 아이를 낳을 수 있고, 한 되를 먹으면 늙은이가 젊은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방문은, 기록하여 왕혹정에게 준 것들이다.

 

 

[D-001]정사수(程沙隨) : 송의 장형(張逈). 사수는 호요, 자는 가구(可久).

[D-002]계신잡지(癸辛雜志) : 송 주밀(周密)의 저. ()는 지()가 잘못된 것이다.

[D-003]주공근(周公謹) : 이름은 주밀(周密). 공근(公謹)은 자.

[D-004]괄창(括蒼) : 절강성에 있는 산명(山名).

[D-005]도은거(陶隱居) : 이름은 도홍경(陶弘景). 은거는 그의 호 화양은거(華陽隱居).

[D-006]혈붕(血崩) : 여자의 경도가 과다하게 계속하는 병.

[D-007]심존중(沈存中) : 이름은 심괄(沈括). 존중은 자.

[D-008]신가헌(辛稼軒) : 송의 학자 신기질(辛棄疾). 가헌은 호요, 자는 유안(幼安).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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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행재잡록(行在雜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행재잡록(行在雜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행재잡록(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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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행재잡록(行在雜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행재잡록(行在雜錄)

 

1. 행재잡록서(行在雜錄序)

2. 행재잡록(行在雜錄)

3. 반선사후지(班禪事後識)

4. 동불사후지(銅佛事後識)

5. 행재잡록후지(行在雜錄後識)

6. 중존평어(仲存評語)

 

 

 

행재잡록서(行在雜錄序)

 

 

아아, 황명(皇明)은 우리 상국(上國)이다. 상국이 속국에게 주는 물건은 비록 터럭같이 작은 것일지라도 하늘에서 떨어진 듯이 그 영광이 전국을 움직이고 경사스러움이 만세(萬世)에 끼칠 것이요, 그 따뜻한 말과 몇 줄 되는 편지쪽을 받들더라도 높기는 운한(雲漢)과 같고, 놀랍기는 우레와 같으며, 감격하기는 때를 맞추어 오는 비와 같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상국인 까닭이다. 무엇을 상국이라 하느냐. 중국을 가리켜 하는 말이니, 우리 선왕(先王)들과 여러 조정에서 명()을 받은 바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도읍인 연경(燕京)을 경사(京師)라 하고, 그 순행(巡幸)하는 곳을 행재(行在)라 하며, 우리나라 토물(土物)을 바치는 것을 직공(職貢)이라 하고, 당시의 임금을 천자(天子)라 하며, 그 조정을 천조(天朝)라 하고, 사신이 그 조정에 가는 것을 조천(朝天)이라 하고, 그 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을 천사(天使)라 하여, 우리나라 부인이나 어린애들까지도 상국을 말할 때는 언제나 하늘이라 일컫지 않는 법이 없어 4백 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니, 대개 우리가 명실(明室)의 은혜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 왜인(倭人)이 우리 강역(疆域)을 뒤엎었을 때 신종 황제(神宗皇帝)는 천하의 군사를 몰아 우리나라를 원조해서 자기의 사재까지 말려가면서 군비에 다 써서 우리의 삼도(三都 서울개성평양)를 회복하고 우리의 8()를 도로 찾아 주었으매, 우리 조종(祖宗)은 없어진 나라를 가지게 되었고 우리 백성들은 이마에 문양을 새기고 풀 옷을 입는 오랑캐의 풍속을 면하게 된지라 그 은혜 뼈에 사무쳐 만세(萬世)에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모두 상국의 은혜인 것이다. 지금의 청()은 명()의 구신(舊臣)들을 어루만져 사해(四海)를 통일하고서 여러 대를 두고 우리나라에 은혜를 베풀어 왔었다. 우리가 물건을 바치는데, 금은 토산(土産)이 아니라 해서 이것을 그만두게 하고, 말이 작고 약하다 하여 이를 면제했고, 모시종이자리 같은 폐백도 해마다 그 수를 감했으며, 몇 해 동안 칙사(勅使)를 내보낼 만한 일도 반드시 그냥 처리하고 송영(送迎)하는 폐단을 없애도록 하였다. 이번 우리나라 사신이 열하에 들어오자 특히 군기 대신(軍機大臣)을 보내서 맞게 하고 조정에 있어서는 대신들의 반열 속에 서도록 명령하고 연극을 볼 때에는 조정의 대신들과 나란히 하여 즐기도록 하며, 또 조서를 내려 정공(正貢) 이외에 별사(別使)가 바치는 방물(方物)은 길이 면제하게 했으니, 이는 실로 세상에 없는 성전(盛典)으로서 일찍이 황명(皇明) 시대에도 있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대해 주는 것으로 여길 뿐 이것을 은혜로 생각지 않고, 걱정으로 여길 뿐 영화로 생각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상국이 아닌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황제가 있는 곳을 행재(行在)라 일컬어서 그 사실을 기록하지만 상국이라 이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중국이 아닌 때문이다. 우리가 힘을 굽혀서 저들에게 복종하고 본즉, 그들을 대국이라 하는 것이요, 대국이 능히 힘으로써 우리를 굴복하게 하기는 했으나 우리가 처음 수명(受命)한 바 천자는 아니었다. 이제 그들이 준 여러 가지 우대와 공물을 감면해 주라는 명령은 대국으로서는 작은 것을 돌보아 주고 먼 곳을 회유하자는 정사에 지나지 않고 본즉, 비록 대()마다 한 번씩 공물을 없애주고 해마다 한 번씩 폐백을 면제해 주더라도 이는 우대일 뿐, 우리가 이르는 은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슬프다. 오랑캐의 성질은 깊은 골짜기와 같아서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가죽 폐백이 부족하면 개나 말을 받고, 개나 말이 부족하면 주옥(珠玉)을 받는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사랑하고 이해하며 관대하고 용서해서 번거롭고 까다로운 것을 베풀지 않아도 어기거나 거절하는 것이 없으니, 바로 우리의 사대(事大)하는 정성이 족히 저들을 감동하게 하여 그들의 성질을 부드럽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저들의 뜻은 역시 아직도 하루라도 우리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 하면 저들이 중국에 산 지 백여 년에 아직 한 번도 자기 땅을 객지로 생각지 않은 적이 없었고 아직 한 번도 우리 동방을 이웃으로 생각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오늘과 같이 사해가 승평(昇平)한 날에 와서 가만히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고 대우를 두텁게 하는 것은 그 덕을 팔고자 함이요, 인정을 맺는 것은 진실로 방비를 해이하게 하고자 함이다. 딴 날 자기 땅으로 돌아가 국경을 누르고 앉아서 옛날 군신의 예로써 따져 주린 해에는 구제를 청하고, 전쟁이 날 때에는 도움을 바란다면, 어찌 오늘날의 구구한 종이나 자리 같은 공물을 면제해 주는 것이 딴 날에 견마(犬馬)와 주옥(珠玉)을 청하는 자료가 되지 않으리라고 할 것인가. 그러므로 가히 걱정이 될지언정 영화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지금 황제의 뜻이 반드시 그런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동방이 대국의 후한 대우를 받은 지 여러 해가 되었은즉, 인심이 편안해져서 소홀하기가 쉬운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황제에게 올린 글과 칙유(勅諭)를 아울러 기록해서 천하의 걱정거리를 먼저 걱정할 사람에게 주고자 하는 바이다.

 

 

[C-001]행재잡록서(行在雜錄序)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D-001]8() : 당시 이조의 여덟으로 나눈 행정 구역.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행재잡록(行在雜錄)

 

 

예부(禮部)가 대사(大使) () 회동사역관(會同四譯館)의 대사. 장문금(張文錦)의 자는 환연(煥然)이요, 순천 대흥(大興) 사람이다. 사람됨이 키가 작되 다부지게 생겼다. 에게 분부하기를,

 

이제 황제의 뜻을 받들어 이르노니 조선(朝鮮)으로부터 온 정부사(正副使)가 열하에 와서 예를 행할 것이니 즉시 이 뜻을 조선 사신에게 전하고 열하로 같이 가게 하라. 관원과 종인(從人)들의 성명을 베낀 것을 즉시 정찬사(精饌司 음식을 맡은 관청)로 보내고 내일은 곧 데리고 떠나게 하라. 이것을 특히 분부하는 것이다. 8월 초 4일 초저녁.”

이라 했다.

예부가 대사 장에게 분부하기를,

 

황제의 뜻을 받들어 조선 사신 등을 데리고 열하로 가서 예를 행할 것은 이미 명령했거니와, 즉시 사신의 성명과 수행관들의 성명을 함께 베낀 것을 곧 예부로 보내고 기다리라 했는데 아직도 보고가 이르지 않았으니, 황제의 뜻을 받든 바에 어찌 늦출 수가 있는가. 속히 베껴서 예부로 보낼 것을 서서 기다리노라. 다음으로 수행할 통관(通官)오림포(烏林浦) 사가(四哥)서종현(徐宗顯)이다. 보수(保壽)박보수(朴寶樹)이다. 등 세 사람에게 즉시 이 분부를 전해 알려서 그들로 하여금 내일 사시(巳時)에 조선 사신들을 데리고 임구(林遘)에 가서 잘 것을 특히 분부하노라. 아울러 분부할 것은 대사 장이 내일 묘시에 아문(衙門)에서 기다리면 면대해서 알려 줄 일이 있으니 이것을 특별히 분부하노라. 8월 초 4.”

이라 했다.

조선국 진하 겸 사은사(朝鮮國進賀兼謝恩使)로 먼저 열하 행재소(行在所)로 간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정사(正使)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부사(副使)이조 판서잠시 차함(借啣)이다. 정원시(鄭元始), 서장관 겸 장령(書狀官兼掌令)조정진(趙鼎鎭)과 대통관(大通官)홍명복(洪命福)조달동(趙達東)윤갑종(尹甲宗)과 종관(從官)주명신(周命新)정사의 비장(裨將)이다. 정창후(鄭昌後)이서귀(李瑞龜)부사의 비장이다. 조시학(趙時學)서장관의 비장이다. 과 따르는 사람 64명으로 이상 모두 74명과 말 55.”

() ()와 신() ()은 아뢰나이다.” 만인 상서(尙書)는 덕보(德甫), 한인 상서는 조수선(曹秀先)인데, 육부(六部)가 모두 만인과 한인을 써서상서와 시랑(侍郞)을 두었다.

조선국 사신으로 만수절(萬壽節) 경하차로 온 정사금성위 박과 이조 판서 정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달 초 9일에 열하에 도착시켜 신 등이 별도로 사람을 보내어 잘 보살펴 두었습니다. 이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건륭 45 8월 초 9일에 아뢰고 황제의 아셨다는 뜻을 받들었다.

 

신 조와 신 덕은 사정에 따라 삼가 천은(天恩)을 감사하는 사건에 대하여 아뢰나이다. 조선국 사신 금성위 박과 이조 판서 정 등이 올린 글을 보면, ‘엎드려 아뢰노니 국왕이 황제의 칠순(七旬) 만수절을 당하여 기뻐함을 이기지 못하여 저희들을 시켜 국서를 받들고 경하차 오게 되어 열하에 이르러 예식을 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미 영광과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이요, 또 다시 성지(聖旨)를 입어 소국(小國) 사신으로 하여금 천조(天朝)의 이품(二品)삼품(三品) 대신들의 다음에서 예식을 행하도록 은혜를 베푼 것은 격외(格外)의 일이었고 실로 천고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삼가 마땅히 돌아가서 국왕에게 아뢰어 황은(皇恩)에 감격할 것이요, 저희들의 춤출 듯 기꺼운 정성을 청컨대 예부의 대인(大人)들은 이 뜻을 대신 아뢰어 주십시오.’

하고, 진정으로 문서를 갖추어 왔으므로 이로써 삼가 주문(奏聞)합니다.”

건륭 45 8 10일에 아뢰고 다 아셨다는 뜻을 받들었다.

 

예부는 삼가 주문(奏聞)하는 일로써 상주하나이다. 이달 12일에 신 등이 분부를 좇아 회동이번원(會同理藩院)사원(司員)들을 보내서 조선 사신 정사 박과 부사 정과 서장관 조 등을 데리고 찰십륜포(札什倫布)에 가서 액이덕니(額爾德尼)에게 뵙는 예절을 행하였습니다. 예가 끝나자, 앉으라 하고 차를 마시며, 그 나라의 원조와 아울러 입공(入貢)하는 내력을 물으매, 사신들은 대답하기를,

황상의 칠순 되는 큰 경사를 축하하는 표()를 올리고 아울러 천은을 삼가 사례하러 온 것입니다.’

하니, 액이덕니는 듣고 나자 심히 기뻐하여 즉시,

영원하도록 공손하면 자연 복을 얻으리라.’

신칙을 하면서, 사신에게 내리는 동불(銅佛)과 서장향과 모직 옷감을 주니 그들은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습니다. 사신 등에게 준 동불 등 물건의 목록을 적어 황제께 뵈이기 위해서 여기에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건륭 45 8 12일에 아뢰고, 아셨다는 뜻을 삼가 받들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반선사후지(班禪事後識)

 

 

사신이 반선을 본 이야기는 내가 찰십륜포기(札什倫布記)에 갖추어서 실었다. 이제 예부의 주문한 글을 보면, 액이덕니를 절해 뵈었다든가 사신에게 물건을 주었을 때 사신 등이 즉시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를 했다고 운운한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상주한 말에는 사세가 부득이했던 것이다. 다만 내가 목격한 바를 자세히 기록하여 산 속에 돌아가 등을 볕에 쪼이는 날 한 번 웃음거리로 삼을 터인데, 이 글을 보는 자는 마땅히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정사에게 동불(銅佛) 1, 보료 18, 합달(哈達) 1, 합달(哈達)은 폐백(幣帛)과 같은 말이다. 붉은 빛 탄자 2, 서장향 24묶음, 계협편(計夾片) 1주머니. 무슨 물건인지를 모르겠다.

부사에게 동불 1, 보료 14, 합달 1, 붉은빛 탄자 1, 서장향 20묶음.

서장관에게 동불 1틀 보료 10, 합달 1, 붉은빛 탄자 1, 서장향 14묶음.

 

 

[C-001]반선사후지(班禪事後識)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동불사후지(銅佛事後識)

 

 

소위 동불이란 것은 높이가 한 자가 넘으니, 이것은 호신불(護身佛)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으레 멀리 여행하는 자에게 서로 선사하여 반드시 이것을 가지고 조석으로 공양하는 것이요, 서장 풍속에는 연례(年例)로 진공(進貢)하는데, 부처 한 틀로써 방물을 삼는 것이니, 이번 이 동불도 법왕이 우리 사신을 위해서 여행의 무사함을 비는 가장 아름다운 폐백으로 준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 부처와 인연을 가진 일이 있고 보면, 평생에 누()가 되는 것이거늘 하물며 이것을 준 자가 번승(番僧)이었음에랴. 사신이 이미 북경으로 돌아오자, 그 폐백들을 모두 역관들에게 내주었으나 여러 역관들도 역시 똥오줌처럼 더럽다고 보아 은 90냥에 팔아 일행의 마두배(馬頭輩)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으나 마부들도 이것으로는 술 한 잔도 사먹을 수 없다 했으니, 결백하다면 결백하다고 할 것이다. 다른 나라 풍속으로 본다면, 고루한 시골 티를 면치 못할 것이다.

예부는 공무(公務)를 위하여 보낸 조선국 공문 한 통을 병부(兵部)로 보내기 위하여 돌려 발송하는 것이 옳다.

주객사(主客司)는 행재소 예부의 공문에 준하여 아뢴다. 본부에서 상주한 조선 사신이 열하에 도착한 문서 한 통과 또 상주한 조선 사신이 천자의 은혜를 공손히 사례한다는 문서 한 통과 또 반선(班禪) 액이덕니가 조선 사신에게 준 물건의 명목 한 통을 응당 따로 베껴서 알리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각 상주문(上奏文)들은 원문대로 베낄 것은 물론이요, 유지(諭旨)를 받들고 이송(移送)한 글까지도 베껴서 담당한 곳에 보내어 처리하게 할 것이다. 방례과(房禮科)와 절강(浙江 절강의 관원)도 아울러 시행한다.

예부는 삼가 예의(禮儀)에 관한 일을 상주하나이다. 건륭 45 8 13일은 황제의 칠순 만수성절에 경하례(慶賀禮)를 행하겠습니다. 이날 난의위(鑾儀衛 황제의 의례를 맡은 관청)는 미리 황제의 법가로부(法駕鹵簿 황제가 타는 수레)를 담백경성전(淡泊敬誠殿) 뜰에 차려 놓고 중화소악(中和韶樂)을 담박경성전 처마 밑 양편에 베풀고 단폐대악(丹陛大樂)을 이궁(二宮) 문안 양편의 정자 속에 북향하여 차리고 호종(扈從)하는 화석친왕(和碩親王) 이하 여덟 사람과 공작(公爵) 이상과 몽고의 왕공(王公) 토이호특(土爾扈特) 등은 모두 망포보복(蟒袍補服)을 입고 담박경성전 앞에 이르러 벌여 서고 문무 대신과 조선국 정사와 토사(土司)들은 이궁 문 밖에 각각 등급에 따라 벌여 서고 3품 이하 각 관원과 조선의 부사와 번자(番子)두인(頭人)들은 피서산장(避暑山莊) 문 밖에서 각각 품급(品級)에 따라 벌여 설 것입니다. 이때 예부의 당관(堂官)이 황상께서 용포(龍袍)와 곤복(袞服)을 입고 담박경성전 보좌(寶座)에 오르실 것을 주청(奏請)할 것입니다. 중화소악을 지으면 건평지장(乾平之章)을 아뢸 것이요, 황상께서 자리에 오르시면 음악을 그칠 것입니다. 난의위의 관원이 명편(鳴鞭)을 하라고 소리를 지르면 뜰 아래서 세 번 명편을 하고 명찬관(鳴賛官)이 반열을 차립니다. 이때에 단폐대악을 연주하는데, 경평지장(慶平之章 악장 이름)을 아뢰면 홍려시(鴻臚寺)의 관원이 여러 왕들과 문무관을 인도하여 각각 반열을 차려 섭니다. 명찬관이 창을 하는데 무릎을 꿇라고 창하면 왕들 이하 모든 관원들은 모두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다시 머리를 조아리고 일어나라고 창을 하면 왕 이하 모든 관원들은 세 번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합니다. 명찬관이 물러서라는 창을 하면 왕 이하 모든 관원들은 다 함께 제자리에 돌아와 서게 합니다. 이때에 음악은 그치고 난의위의 관원이 계하에서 세 번 명편(鳴鞭)하면 예부의 당관은 예식이 다 끝났음을 아뢰고, 중화소악을 지어 태평지장(太平之章 악장 이름)을 연주합니다. 황상이 타신 수레는 환궁하시게 되고 음악이 그치면서 왕공 이하 모든 관원들은 모두 나오게 됩니다.

내감(內監 환관)은 황상이 내전에서 보좌에 오르시기를 주청하면 비빈(妃嬪)들은 용포와 곤복을 갖추어 황상 앞에 내놓으면서 여섯 번 숙배(肅拜)하고, 세 번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는 예를 행하면 예식이 모두 끝나게 됩니다. 황상께서 자리에서 일어나면 비빈들은 대궐로 돌아가고 황자(皇子)와 황손(皇孫)황증손(皇曾孫)들이 예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이것으로써 삼가 갖추어 주문하나이다.

주객사(主客司)는 행재소 예부의 문서에 의준해서 아래와 같이 알리노라. 건륭 45 8 12일에 내각은 다음과 같은 황상의 유지를 받들었노라.

 

조선은 번봉(藩封)을 대대로 지켜서 본래부터 공손하다고 일컬었고 해가 바뀔 때마다 직공(職貢)을 정성껏 하는 것은 가상한 일이다. 때로 특별한 칙유(勅諭)를 내리고 또 자기 나라로 돌려 보내는 등 일이 있을 때는 유구(琉球) 같은 나라와 같이 역시 글을 갖추어 진사(陳謝)하게 되는데 오직 조선국만은 반드시 토물을 갖추고 나서 표문(表文)을 부쳐서 정성껏 바쳐 왔다. 저번에도 그들의 사신이 멀리 왔는데, 그들이 가지고 온 폐백을 돌려보낸다면, 발섭(跋涉)하는 수고만 더하겠기에 그것을 높이 평가하여 정공(正貢)으로 삼아서 우대하고, 그 나라는 자기들 직분을 분명히 지켜 정공을 보낼 때에는 따로 예물을 갖추어 바쳐서 왕래하기에 더 복잡하고 보니 한 가지 의식이 더 많아진 셈이다. 지금 우리 두 나라는 서로 성의로 맺어지고 한 몸과 같이 되었으니 이러한 번거롭고 헛된 절차가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 올해 짐()의 만수절에도 그 나라에서는 표문을 갖추어 사신을 열하 행재소까지 보내어 우리 조신(朝臣)과 일제히 예를 행했다. 가지고 온 표문과 예물은 그들의 경축하는 정성으로 받으려니와 다음부터는 세시(歲時)나 경절의 정공만을 전례대로 받을 것이며, 그 외의 진사(陳謝)하는 표문이나 예물은 모두 정지시켜 짐의 먼 나라를 생각하여 실상을 주로 하고 허식을 취하지 않는 지극한 뜻에 맞도록 하라.”

신 덕과 신 조는 사정에 의하여 천은을 삼가 사례한다는 일에 대하여 아뢰나이다. 조선국 사신 금성위 박과 이조 판서 정 등이 글을 올렸습니다.

 

삼가 황상의 만수절을 당하여 구역(九域)에 경사가 넘쳐 흘러서 본국으로서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변변치 못하나마 진하(進賀)하는 정성을 본받았던 바 예부에서 성승(聖僧)을 뵈옵고 복을 받았다는 문구를 여기에다 첨가하였다. 이에 격외(格外)의 은상(恩賞)을 특별히 소방(小邦)에 내려 천한 사신에게까지 미쳤으니, 예부에서 이 대문을 고쳐서, “국왕과 사신과 아울러 따라온 사람들에게 비단과 은을 더 주었다.”라고 하였다. 영광의 힘 입은 바는 실로 전후에 없었던 일입니다. 삼가 마땅히 돌아가서 국왕에게 여쭈어서 예부에서 이 대문에다 따로이, “표문을 갖추어 감사의 뜻을 올렸습니다.”라고 첨가하였다. 황은(皇恩)에 감격하게 할지니 예부의 대인들도 대신 전하여 아뢰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이 일을 삼가 갖추어 아뢰나이다. 건륭 45 8 14일에 아뢰고 다 아셨다는 뜻을 받들었다.

 

 

[C-001]동불사후지(銅佛事後識)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D-001]주객사(主客司) : 황제 직속 접빈처(接賓處).

[D-002]토사(土司) : 남방 만족(蠻族)들의 추장.

[D-003]두인(頭人) : 만주의 벼슬 이름.

[D-004]건평지장(乾平之章) : 악장(樂章)의 이름.

[D-005]명편(鳴鞭) : 채찍을 울려 정숙하기를 경고하는 의례.

[D-006]명찬관(鳴賛官) : 창홀(唱笏)하는 집사(執事).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행재잡록후지(行在雜錄後識)

 

 

필첩식(筆帖式)에 있는 문부 가운데는 이러한 뜻으로써 쓴 글이 원본과 많이 달랐으니 대개 예부가 옮겨 상주할 적에 첨개(添改)한 까닭이다. 사신은 크게 놀라 일 맡은 역관을 시켜 먼저 예부의 조방(朝房)으로 가서 그 이유를 묻기를,

 

무슨 까닭으로 바치는 글을 몰래 고쳐서 우리가 모르게 하였느냐.”

했더니, 낭중(郎中)은 크게 노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바친 글이 사실을 전부 빼놓았기 때문에 예부의 대인들이 너희 나라를 위해서 주선하여 이미 품()해서 바친 것인데, 너희들은 덕 되는 것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기를 쓰고 와서 질문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고 하였다.

6() 가운데 예부가 가장 거행하는 일이 많아서 천지(天地) 교묘(郊廟)와 산천의 제사를 비롯하여 황제의 기거와 사해 만국의 일이 관계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내가 열하에 있을 때 예부가 거행하는 일에 우리나라에 관계되는 것을 보아서 천하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가 사신에게 특별한 은혜가 있은즉, 예부는 여기 따라서 즉시 글을 올려 전주(轉奏)하겠다고 협박하여 명령했다. 이것은 사신의 의리에 해당하는 일이라 사례를 하고 않는 것은 사신의 자유일 것이다. 사신이 대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비록 외국 사신이 제 스스로 사례를 하여 상주할 것을 요구하더라도 번거롭고 시끄러운 폐단이라고 물리치는 것이 마땅할 것인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서 오직 글을 제때에 올리지 못하여 전주(轉奏)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심지어는 사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맘대로 글귀를 고쳐서 대체(大體)를 돌아보지 않고 다만 한때 황제를 기쁘게 할 자료만 필요로 하여 스스로 위를 속이는 죄를 범하고 외국의 멸시를 달게 취하고 있다. 예부가 이와 같으니 다른 여러 부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사신은 며칠이 안 되어 응당 돌아가야 할 처지여서 자문(咨文)도 절로 받아 갈 만한 터인데, 먼저 서둘러서 발송을 하여 자기 공로를 세우기에 눈이 어두워 마치 위항(委巷) 소인의 행세를 한다. 대국의 일이 어찌 그리 천박하니 이것으로서는 족히 천하의 법도를 삼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심히 걱정되는 것이 우리 일에 분주히 서두르는 것이 우리를 두려워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만 황제의 명령이 엄하고 급한 것을 두려워해서 그러는 것이다. 사신은 앉은 채로 예부의 독촉만 받고 어렵고 쉬운 일 할 것 없이 오직 속히 이루어지기만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저들도 모르게 대우를 후하게 해준다는 것으로써 세도를 부리는 것이다. 몇 해 이래로 이미 이러한 규례(規例)가 생겨 통관(通官)과 서반(序班 벼슬 이름)도 그 사이에 조종할 바가 없어 우리 사신에게 불평을 쌓은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만일 황제가 일조에 조회를 보지 않고 예부의 거행이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다면, 서반 한 사람으로써 넉넉히 우리 사신의 진퇴를 제약할 수 있었고, 더욱더 예부가 분주하게 구는 것은 본래 황제의 기쁨을 사는 미봉(彌縫)의 일이었음에랴. 사신 된 자는 이를 살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릇 사신의 진퇴에 관한 일은 전혀 예부에 관계되는 것이니, 사신이 독촉해서 이루는 일은 담당 역관을 상대할 따름이요, 담당 역관은 통관에게 부탁할 뿐이요, 통관은 아문(衙門)에 부탁할 뿐이어서 소위 아문이란 것은 곧 사역(四譯)의 제독(提督)과 대사(大使)를 말함이다. 제독과 대사가 예부의 당관(堂官) 사이에는 엄격한 등차가 있어서 쉽게 청탁을 못할 처지이다. 그러므로 사신의 의심과 노여움은 항상 역관에게 있으니, 이것은 대개 자신이 언어를 능히 통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다만 피차에 역관의 혀만 믿기 때문이다. 사신은 이미 속는다고 의심하고 역관은 항상 해명하기 어려움을 원망하여 상하의 사정과 처지가 간격이 생기어 서로 통하지 못하니, 역관에 대한 사신의 독촉이 더할수록 서반(序班)과 통관(通官)의 조종은 더욱 심해진다. 진퇴와 완급(緩急)이 비로소 손아귀에 들어 얼핏하면 뇌물을 찾는 것이 해마다 더하고 늘어 드디어 하나의 전례가 되었다. 이제 그들의 조종을 받는 일이란 돌아갈 기한의 연기나 문서의 접수 여부에 불과할 뿐이지만, 만일 급한 일이 생겨서 대국에서 사신을 접대하는 것이 전일과 달라서 정상을 보전하지 못하고 보면, 여관 속에 깊이 앉아 있는 자는 외국의 배신(陪臣)에 불과할 뿐이니 장차 누구를 믿을 것인가. 오직 서반에게 목을 달아매어 예부에 관한 모든 일은 비로소 패연(沛然)함을 얻어서 공공연히 조종을 부리게 될 것이니 사신된 자는 가히 근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일어난 지 백 40여 년에 우리나라 사대부들은 중국을 오랑캐라고 하여 부끄러워하고 비록 사신의 내왕은 힘써 하면서도, 문서의 거래라든지 사정의 허실은 일체 역관에게 맡겨 두고, 강을 건너 연경에 이르기까지 거쳐 오는 2천 리 사이에 각 주()()의 관원과 관액의 장수들은 그 얼굴을 접해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통관(通官)이 공공연히 뇌물을 찾는데, 우리 사신은 그들의 조종을 달게 받고 역관은 황황히 받들어 행하기에 겨를이 없어서 항상 무슨 큰 기밀이나 숨겨둔 것 같은 것은 이야말로 사신들이 망령되이 자기 편을 높은 체하는 데 허물이 있는 것이다. 사신이 담당 역관에 대하여 너무 의심을 하는 것은 정리가 아니요, 지나치게 믿는 것도 또한 옳지 않으니, 만일 일조에 걱정이 생기면 세 사신은 장차 말 없이 서로 쳐다보고 한갓 담당 역관의 입에만 의존할 것이니, 사신된 자는 힘써 연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연암은 쓰다.

 

 

[C-001]행재잡록후지(行在雜錄後識) : 여러 본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가하였다.

[D-001]필첩식(筆帖式) : () 때 각 관청에서 만주어로 문서를 만드는 서기(書記)의 벼슬 이름.

[D-002]전주(轉奏) : 남을 대신하여 어떤 일의 내용을 임금에게 상주하여 전함.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중존평어(仲存評語)

 

 

중존씨(仲存氏)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이는 모두들 깊은 걱정과 먼 생각이다. 이 편은 원집(原集) 중에 실려 있는 은화(銀貨)를 의논한 한 단락(段落)과 함께 정치를 맡은 자는 마땅히 익숙히 연구하여야 하겠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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