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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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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

12 함양 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에게 보냄

13 족제(族弟) 이원(彜源)에게 보냄

14 공주 판관(公州判官) 김응지(金應之)에게 답함

15 응지에게 답함

16 응지에게 답함

17 응지에게 답함

18 응지에게 답함

19 응지에게 보냄

20 이중존(李仲存)에게 답함

21 이중존에게 답함

22 이중존에게 답함

23 진정(賑政)에 대해 순찰사(巡察使)에게 답함

24 진정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25 순찰사에게 올림

26 순찰사에게 답함

27 순찰사에게 답함

 

 

 

함양 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에게 보냄

 

 

나는 그대와 본래 가부(葭莩)의 친분도 없고, 또 티끌만 한 혐의도 없는 처지였사외다. 급기야 안의(安義)에 있게 되니, 함양(咸陽)과 안의는 본래 정해진 겸관(兼官)이어서, 4년 동안 서로 이웃이 되어 피차의 한계를 두지 아니하고, 한 달에 세 번 옥사(獄事)를 동추(同推)하는 모임이나 이웃 고을 원님들과 틈을 내어 만난 자리에서 흡족히 담소를 나누어 흉금의 간격이 없었으니, 아무리 한마을의 옛 친구라 할지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었겠소?

하당(荷堂 연꽃이 피어 있는 집)과 죽관(竹館 대숲이 있는 집)에서 베개를 나란히 베기도 했고, 풍헌(風軒 창이 있는 작은 집)과 월사(月榭 달구경하는 정자)에서 술잔을 나누기도 했으며, 물놀이와 산놀이에도 서로 빠진 적이 없었지요. 백성의 근심이나 고을의 폐막(弊瘼)을 잠깐 사이에도 같이 상의했고, 공문이나 사신(私信)도 주고받지 않은 날이 없었소. 이른바 머리가 희도록 서로 만나도 낯선 사람 같고, 초면 인사만 나누어도 옛 친구 같다는 것이 어찌 헛말이겠소? 진실로 큰 허물이 없는 한, 어려움을 만나도 변치 않도록 함께 기약하기를 바랐던 것이외다.

그런데 지난번에 보내온 후촌집(後村集)을 지금 보니, 우리 선조 금계군(錦溪君)을 모함하여 욕보인 것이 한이 없었소. 이제 나와 그대는 하루아침에 백세(百世)의 원수가 되었구려. 이렇다면 나는 백세의 원수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고 베개를 나란히 베며, 담소를 나누고 서로 추종하면서도 4년 동안이나 까맣게 몰랐던 셈이오.

무릇 우리 선조의 후손된 자라면 누구나 원통하고 분해서 피로써 얼굴을 적시고 눈물을 삼키는 이와 같은 감정을 똑같이 품지 않으리오마는, 나는 그대에게 더욱더 원통하고 한스러운 것이 있소. 지난해 동추의 모임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그대가 초책(草冊 초벌로 쓴 책) 하나를 꺼내며,

 

우리 집안에는 본시 문헌이 없는데 선조 후촌공이 두어 편 남긴 글이 있어, 장차 인쇄에 부칠 생각으로 묘도문자(墓道文字)와 연보(年譜) 및 유사(遺事)를 주워 모아 겨우 한 책을 이루었소. 범례만이라도 대강 열람해 주기 바라오.”

하면서, 손수 종이에 싸 나의 하인(下人)에게 넘겨주었소. 돌아와서 잠깐 펴 보니, 표시하려고 붙여 놓은 쪽지가 하도 번잡하고 새까맣게 지우고 고쳐 쓴 자국이 몹시 어지러웠소. 나는 번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성미라 우선 책을 접어 둘 수밖에 없었고, 뒤미쳐 번고(飜庫)의 행차가 있어 마침내 한 번도 훑어보지 못했는데, 그대가 서울로 보내 정서(淨書)하는 일이 급하다 하며 불시에 찾아가고 말았으니, 그 속에 무슨 말이 들었는지 실로 알지 못했소.

그 후에 배신전(陪臣傳)에서 뽑아 싣게 한 것도 내가 지시한 바요, 각수승(刻手僧)을 빌려 가게 된 것도 내가 보낸 것이지 않았소? 그리고 또 내가 동추하러 갔을 때 그대와 함께 함양군의 학사루(學士樓)에 올랐는데, 이때 누 가운데에서 각자(刻字)하는 일이 한창이었지요. 나는 우리 고을 중이 새긴 목판 두어 개를 가져다 보고 솜씨가 정교함을 자랑하고 나서, 인쇄한 뒤에 한 벌을 선사해 달라고까지 하였지요.

내가 이렇게 즐거이 남의 아름다운 일을 도와서 완성하는 데에 참여하게 된 까닭은, 진실로 강화도에서 순절한 일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감동시킬 뿐더러 고가(故家)의 남겨진 가승(家乘)이니만큼 그 한 벌을 보관하고 싶어서였지요. 어찌 그 속의 모함과 패설(悖說)이 이 지경까지 이를 줄이야 생각인들 했겠소?

전번에 그대가 갑자기 와서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실수였다고 사과하고, 또 이렇게 말하였소.

 

나는 봉급의 여유가 좀 있어서 비록 인쇄하는 역사(役事)를 맡기는 했지만, 글을 삭제하거나 그대로 살리는 일은 할 사람이 따로 있으며, 더욱이 나는 그때 병이 심하여 미처 자상히 열람하지 못했소이다. 만약 이 한 단락이 들어 있는 것을 과연 알고서 일부러 보내어 보게 했다면, 세상에 어찌 이러한 심술이 있겠소? 이 일이 사실과 어긋남이 이미 이와 같으니, 마땅히 훼판(毁板)하고 고쳐 넣도록 빨리 서둘 따름이오. 떠들썩하게 절교를 통고하는 일은 오히려 나중 일이오.”  ()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그 이야기가 분명 진정에서 나온 것 같았는데, 급기야 그대가 윤신수(尹莘叟)에게 답한 편지를 얻어 본즉 박 아무개가 안의에 있을 적에 여러 번 열람해 보고 아주 잘 되었다고 칭찬했다.’고 하였소. 나는 이에 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떨리고 쓸개가 뒤틀리는 듯싶었사외다. 사람이 효경(梟獍)이 아닌 이상, 무슨 심보로 남이 제 선조를 욕했는데 도리어 잘 되었다 칭찬했겠으며, 사람이 귀역(鬼蜮)이 아닌 이상 무슨 억하심정으로 남의 선조를 욕하고서 그 책을 그 자손에게 보내 준단 말이오? 이 일을 참을 수 있다면, 참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소?

그대가 이미 이러한 간계를 품은 이상, 무슨 까닭으로 와서 바야흐로 눈에 핏발이 설 이 사람을 만나 보았으며, 무엇 때문에 종전에 살피지 못한 잘못을 사과했으며 또 훼판을 빨리 서둘겠다고 말했소? 무엇 때문에 이제부터 방향을 바꾸어 능주(綾州) 족형(族兄)의 집으로 가야겠다고 말했소?

아아, 원통하도다! 예전에 칠신(七臣)이 고발을 당할 때에 우리 선조는 특히나 흉악한 무리들의 원수가 되어, 그들이 칼을 숨기고 그림자를 엿본 적이 여러 해였소. 나중에 고성(高成) · 김응벽(金應璧)의 옥사를 날조함에 미쳐, 우리 선조의 공초를 구실 거리로 삼은 것은 나라를 해치려는 이이첨(李爾瞻)의 짓이었고, 앞뒤로 상관없는 일을 끌어들여 왕명을 포고하는 글에 덧붙인 것은 유감을 풀려는 기자헌(奇自獻)의 짓이었소. 급기야 계해년(1623, 인조 1)에 반정(反正)이 있은 뒤로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본래 사실을 잘 모르고 어름어름 들추어내니 비방하는 물의가 드높아지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따라서 옛 원한을 갚으려는 자, 남의 화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 선조가 마침내 죄를 얻어 10여 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로 떠돌아다녔던 것이오.

그 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명(遺命)으로 사면 조치가 내렸고 선왕(先王 인조)의 밝으신 통찰이 일월같이 높이 비쳤으며, 당시 조신(朝臣)들이 죄의 경중을 심의한 기록이 의금부에 모두 남아 있고, 조정에서 같이 벼슬한 뭇 어진 이의 변론은 천지신명과 대질할 만했던 것이오. 그러기에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貞公 김상헌(金尙憲))은 비()에 명()하기를,

 

근세 사림(士林)에서 믿고 의지하며 중히 여기는 이로는 이오리(李梧里 이원익(李元翼)) · 이백사(李白沙 이항복(李恒福)) · 신현헌(申玄軒 신흠(申欽)) · 오추탄(吳楸灘 오윤겸(吳允謙)) · 정수몽(鄭守夢 정엽(鄭曄)) 같은 분들이 있는데, 이 몇 분들은 절대로 자기 사정(私情)에 치우쳐 공론(公論)을 폐기할 분들이 아니었다. 이때 공을 비난하는 입들이 마치 남기성(南箕星)처럼 크게 벌려 있었으나, 공은 스스로 변명하지 않았으며, 이 몇 분들이 나서서 밝혀 주었다. ‘중인(衆人)들은 헐뜯었으나 군자는 완인(完人)으로 여겼다.衆人所毁 君子所完 하였으니, 그 말을 증명하기에 족하며 백세에 길이 거울이 될 것이다.”  ()의 글은 여기까지이다. 

하였다오. 우암(尤菴) 송 문정공(宋文貞公 송시열(宋時烈))이 쓴 묘표(墓表)에는,

 

당시 국구(國舅)의 옥사가 여러 분에게 미쳐 갔다. 공은 다만 평소에 국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실을 원사(爰辭)에서 밝혔고, 또한 그 일은 증거도 없이 유야무야되었으니 국구에게는 아무런 손상이 없음을 보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앞의 원사를 나중에 집어넣어 왕명을 포고하는 글에서 공을 욕보일 줄은 더욱 당초에 우려했던 바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노선생(老先生)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금계(錦溪)는 절대로 다른 의도가 없었는데, 불행히도 무고(巫蠱)의 옥사가 잇달아 일어나서 드디어 오늘날의 억울한 죄안(罪案)이 되었다.’ 하셨다.”  묘표의 글은 여기까지이다. 

하였소.

! 이것은 모두가 선현들의 정론(定論)이오. 신도비에 분명히 새겨져 있고 여러 문집 속에 환히 알려지고 널리 나열되어 있어, 온 나라의 비방이 깨끗이 풀리고 백세의 공론이 이미 결정되었는데도, 새까만 후배들이 나중에 악담을 가하고 수백 년 뒤에 함부로 모함하는 붓을 휘두르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술이오? 말뜻이 참혹하고 표독하여, 우리 선조를 모함하고도 부족해서 곧장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을 무고에 몰아넣은 것은 도대체 또 무슨 심술이오?

존가(尊家)의 후촌공(後村公)이 한패거리가 되어 스스로 부화뇌동하고자 한 자가 누군지 나는 모르겠소. 원사를 주워 모아서는 흉악한 무리들이 구실로 삼은 것이 저와 같고, 억울한 죄를 애통히 여기어 뭇 어진 이들이 확실한 결론을 내린 것이 이와 같소이다. 설령 당시에는 사실을 자상히 모르고 술자리에서 떠들며 이야기하다가 혹시 함께한 사람들의 말을 따랐다 하더라도, 그 뒤에 사건의 근원이 분명하게 밝혀졌으니 필시 전에 한 말의 실수를 후회하여 기꺼이 다른 어진 분들과 생각을 같이하였을 것이오. 또 설령 당시에는 떠도는 비방을 단단히 믿고서 이전의 의혹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하더라도, 세상의 장고가(掌故家 고사(故事)에 해박한 사람) 입장에서 보면 길거리에서 주워듣고 함부로 거론하는 것도 오히려 놀라운 일이거늘, 하물며 당시에 직접 기록한 글도 아니고 오로지 뒷사람이 나중에 부연한 것에서 나온 경우이리오? 이는 자기 선조의 공적을 드러내고자 하다가 먼저 스스로 선조를 속인 죄목에 빠진 것이며, 이름은 실기(實記)라 해 놓고 도리어 실제 사실과 어긋나는 처지에 놓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오.

설사 또 당시에 대간(臺諫)으로 나갈 길이 막히어 억측으로 외쳐 댈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 후 십수 년 동안 간관(諫官)으로 출입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무엇을 돌아보고 꺼려서 마침내 한 번도 평소 가슴에 쌓인 말을 털어놓지 않았소? 설사 또 당시에 품은 원한이 이미 깊어서 손수 기록해 두었다면 그 뜻이 출세길에 간절하여 원한을 보류했다가 집안에 전한 것을 마침 드러내 보인 셈이니, 어찌 후촌(後村) 같은 어진 이로서 과연 이런 일이 있었겠소?

더구나 우리 집안의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선생은 금계군의 손자요, 존가의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는 바로 후촌공의 조카요. 존가에서 남에게 화를 끼칠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이와 같다면 이는 반드시 그 가정에서 들은 바가 있을 터이니, 어찌하여 그 원한을 숨기고 그 집안사람을 벗하려는 것이오? 지금 일로 미루어 보면, 그 원한을 숨기는 것이 본래부터 물려받은 가법(家法)이었는지? 이도 알 수 없겠구려.

! 성이 함락되어 풀 베듯이 목숨이 잘리던 날에 적의 칼날에 순절한 것만으로도 족히 한 세상에 드날리고 뒷자손에게 영광이 될 수 있으며, 구구한 대간의 자리에서 한 번 처진 것이 이미 세워 놓은 큰 절개에는 진실로 영향을 끼칠 것이 없는데, 하필 남의 조상을 지독하게 모함한 연후에야 비로소 그 시대에 환히 드러난단 말이오? 뒷사람들이 어름어름 포착하여 추후에 서술한 것은 역시 교묘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치졸함만 드러내 보인 것이라 하겠소.

근자에 들려온 소문에 더욱더 놀랄 것이 있었소. 그대가 황당한 말을 꺼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장황히 떠들어 대며, ‘아무개와 왕래를 끊지 않고 술자리에서 단란히 정을 나누기를 예전이나 다를 바 없이 한다.’ 한다니, 그 말이 도리에 어긋남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소!

영남의 고을을 왕래하던 때를 돌이켜 생각하면 상기도 몹시 가슴속이 아프고 한스러운데, 심장이 쑤시고 뼈에 사무치는 이날을 당하여 차마 다시 단란하게 만나리오? 오늘날 그대의 언행은 번번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의 밖으로 벗어난 것이니, 옛사람이 일컬은 사람 알기란 쉽지 않다.’란 말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른 것이오. 지난날 마주 대했을 때, 그대가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말을 머뭇거리며 요컨대는 고쳐 새기겠다는 한 가지 사항에서 벗어나지 않았었소. 그러기에 내가 참고 견디며 차분히 기다리면서 문중의 여론이 하늘을 찌를 듯이 분노로 치닫지 않도록 한 까닭은, 진실로 훼판(毁板)하겠다는 한마디 말에 성실할 것을 바랐을 뿐만 아니라 또 우리 선조가 모함당한 본말을 낱낱이 들어서 개운하게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던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할지라도, 이를 일러 술자리에서 단란히 정을 나누기를 예전이나 다를 바 없이 한다고 한다면 되겠소? 우리 종중(宗中)에서도 역시 나를 허물하며, 원수와 상대할 것도 없고 또한 굳이 원수와 대화를 나누며 변론할 것도 없다고 하였소. 이와 아울러 분명히 말하건대, 이제부터는 다만 상정(常情)에서 벗어나는 말을 꾸미려고 말고 분분한 입씨름을 끊기로 합시다. 지금 나는 그대에게 원한이 이미 깊어졌고 사귐도 이미 끊어졌소. 그래도 속마음을 다시 털어놓는 것은 절교는 해도 악평은 하지 말라는 그 뜻을 삼가 스스로 따르고자 하는 때문이오.

 

 

[D-001]가부(葭莩)의 친분 : 가부란 갈대 줄기 속에 있는 엷은 막으로, 두텁지 않은 친인척 관계를 이른다.

[D-002]겸관(兼官) : 수령의 자리가 비었을 때 바로 이웃 고을 수령이 임시로 그 사무를 겸임하는 것을 말한다.

[D-003]동추(同推) : 사죄(死罪)를 저지른 경우에는 30일 안에 옥사를 판결해야 하는데, 그 경우 수령들이 추관(推官)으로 회동하여 죄인을 신문(訊問)하는 것을 말한다. 옥사를 시급히 판결해야 하므로 열흘에 한 번 동추하는 것이다.

[D-004]머리가 …… 같다 : 원문은 白頭如新 傾蓋如舊이다. 고대 중국의 속담으로 추양(鄒陽)의 옥중상서자명(獄中上書自明) 등에 인용되어 있다. 文選 卷39

[D-005]후촌집(後村集) : 후촌은 윤전(尹烇 : 1575~1636)의 호이다. 윤전은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의 숙부이며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613년 유생 이위경(李偉卿) 등이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상소하자 이들의 처벌을 주장하다 파직당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복직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필선(弼善)으로 강화도에 들어가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후촌집은 함양 군수 윤광석이 1795년에 간행한 후촌실기(後村實記)  윤충헌공실기(尹忠憲公實記)를 가리킨다. 이 책은 세계도(世系圖)와 연보(年譜)를 실은 상권, 윤전의 유문(遺文)과 유묵(遺墨)을 실은 중권, 행장(行狀 : 윤증尹拯 ) · 묘지명(墓誌銘 : 조익趙翼 ) · 시장(諡狀 : 박세당朴世堂 ) · 제문(祭文)과 부록을 실은 하권으로 되어 있으며,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서문과 윤전의 5대손인 윤광안(尹光顔)의 발문이 있다. 여기에 실린 행장에, 인목대비 폐위 반대에 공이 컸던 윤전이 인조반정 이후 대간(臺諫)으로 기용되지 못하고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나가게 된 것은, 그가 전에 어느 술자리에서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이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변명한 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여 미움을 산 때문이라고 했다. 묘지명과 시장에도 구체적 인명은 거론하지 않은 채 그 사실이 진술되어 있다. 부록에서도, 윤증이 지은 행장은 박세채(朴世采)의 처지를 생각해서 그 사실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하면서, 워낙 사실이 현저하므로 박동량의 종손(從孫)인 박세당조차 시장에서 이를 은폐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D-006]금계군(錦溪君) :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봉호이다. 박동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금계군에 봉해졌다. 1613년 계축옥사 때에 투옥되어, 자신이 칠신(七臣)의 한 사람으로서 인목대비의 아비인 김제남(金悌男)과 반역을 모의했다는 죄목을 부인하면서, 유릉(裕陵)의 저주 사건에 대해 발설함으로써 대북파(大北派)에게 폐모론(廢母論)의 구실을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부안(扶安)에 유배되었다. 1635년 아들 박미(朴瀰)의 상소로 복관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D-007]피로써 …… 삼키는 : 원문은 沬飮인데 沬血飮泣의 준말이다.

[D-008]번고(飜庫) : 창고의 물건을 일일이 뒤적이며 장부와 대조하여 검사하는 일을 말한다.

[D-009]배신전(陪臣傳) : 황경원(黃景源)이 지은 명배신전(明陪臣傳)을 가리킨다. 강한집(江漢集) 28 명배신전 2에 윤전의 사적을 기록한 항목이 있는데, 후촌실기 하권 부록에 채록되어 있다.

[D-010]남의 …… 데에 : 원문은 成美인데,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남의 아름다운 일을 도와서 완성한다.君子成人之美고 하였다.

[D-011]윤신수(尹莘叟) : 신수(莘叟)가 누구의 호인지 알 수 없다.

[D-012]효경(梟獍) : 효파경(梟破獍)이라고도 하며, 악인(惡人)을 비유할 때 쓰인다. ()는 제 어미를 잡아먹는 올빼미이고, 파경(破獍)은 제 아비를 잡아먹는다는 짐승이다.

[D-013]귀역(鬼蜮) : 보이지 않게 사람을 해치는 귀신과 물여우를 이른다.

[D-014]이 일을 …… 있겠소 : 원문은 是可忍也 孰不可忍也이다. 논어 팔일(八佾)에서 공자가 노() 나라 대부 계손씨(季孫氏)가 감히 천자의 예악인 팔일무(八佾舞)를 추게 한 것에 분노하여 한 말이다.

[D-015]능주(綾州) : 전라도에 속한 현()으로, 현재는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에 속한 면이다.

[D-016]칠신(七臣) : 선조(宣祖)가 임종에 앞서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부탁한 유영경(柳永慶), 한응인(韓應寅), 박동량(朴東亮), 서성(徐渻), 신흠(申欽), 허성(許筬), 한준겸(韓浚謙) 등 일곱 신하를 일컫는다. 이들은 1613년 계축옥사 때에 국구(國舅)인 김제남(金悌男)과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D-017]고성(高成) · 김응벽(金應璧)의 옥사 : 선조 말년에 영창대군의 궁방(宮房)에서 선조가 병에 시달리게 된 원인을 원비(元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 돌리고 고성, 김응벽 등을 시켜 그 능()인 유릉(裕陵)에 가서 저주를 하게 했다고 하여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D-018]기자헌(奇自獻) : 1562~1624. 선조가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데 극력 반대하여 광해군의 즉위에 공로가 컸으므로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러나 폐모론(廢母論)에는 소극적이어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고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인조 즉위 후 이괄의 난 때 사사(賜死)되었다. ‘왕명을 포고하는 글播告之文이란 광해군 5(1613) 7 15일 계축옥사의 주모자로 김제남 등을 처형하고 나머지 관련자들을 사면하는 일로 내린 교서(敎書)를 가리킨다. 그 교서에서 김제남의 죄상을 논하는 대목에 유릉 저주 사건에 대한 박동량 형제의 증언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기자헌이 광해군에게 교서 중에 첨가하기를 거듭 요청한 결과였다. 光海君日記 5 7 10 · 13 · 15

[D-019]사면 조치가 내렸고 : 원문은 渙發雷雨인데, 주역 해괘(解卦) 상전(象傳) 천둥치고 비 내리는 것이 해()이니, 군자가 이로써 허물을 용서하고 죄를 관대히 보아준다.雷雨作解 君子以赦過宥罪고 하였다. 인조 10 6월 박동량의 죄를 용서하여 유배지를 가까운 곳으로 옮겨 주었는데, 이는 인목대비가 승하하기 직전에 내린 하교를 따른 조치였다. 仁祖實錄 10 6 25

[D-020]마치 …… 있었으나 : 남기성(南箕星)은 곧 기성(箕星)으로, 남방 하늘에 나타나므로 남기성이라고도 한다. 기성은 구설(口舌)을 주관하는 별로 간주되었으며, 참언(讒言)의 비유로 즐겨 쓰였다. 시경 소아(小雅) 항백(巷伯) 입을 크게 벌려 이 남기성을 이루었도다, 남을 헐뜯는 저자들은 누구와 더불어 음모를 꾸미나.哆兮侈兮 成是南箕 彼讒人者 誰適與謀라고 하였다.

[D-021]근세 …… 것이다 : 청음선생문집(淸陰先生文集) 24 ‘금계군 겸판의금부사 박공 신도비명 병서(錦溪君兼判義禁府事朴公神道碑銘幷序)’의 명()을 인용한 것이다. 단 글자에 약간 차이가 있다.

[D-022]국구(國舅) :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가리킨다.

[D-023]원사(爰辭) : 죄인이 자신의 죄상을 말한 진술서를 이른다.

[D-024]그 일 : 유릉(裕陵) 저주 사건을 말한다. 선조 말년에 영창대군의 궁방(宮房)에서 선조가 병에 시달리게 된 원인을 원비(元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 돌리고 고성, 김응벽 등을 시켜 그 능()인 유릉(裕陵)에 가서 저주를 하게 했다고 하여 옥사가 일어났다.

[D-025]앞의 …… 집어넣어 : 원문은 追人前爰인데, 추인(追人)은 고대 중국의 백희(百戱)의 일종이므로, 여기서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追入前爰의 오류임이 분명하다. 송시열이 지은 묘표 중 그에 상응하는 구절은 追引爰辭라 하여 나중에 끌어넣었다는 뜻의 追引으로 되어 있다.

[D-026]무고(巫蠱) : 무술(巫術)로 사람을 호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유릉에 저주를 행한 사건을 가리킨다. 박동량은 공초에서 이는 영창대군 궁방의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김제남에게 감히 따지지는 못하였다고만 말했던 것인데, 나중에 김제남이 유릉에 저주를 하도록 사주한 사실을 증언한 것으로 이용되었다.

[D-027]당시 …… 하셨다 : 송자대전(宋子大全) 191 ‘금계군 박공 묘표(錦溪君朴公墓表)’에서 인용하였다. 단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고, 취사선택하면서 고쳐 인용하였다.

[D-028]한패거리가 ……  : 원문은 所欲比而自同인데, 논어 위정(爲政) 군자는 두루 사귀되 패거리를 짓지 않고, 소인은 패거리를 짓되 두루 사귀지 않는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고 하였고, 자로(子路) 군자는 남과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되 남과 화합하지 않는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고 하였다.

[D-029]사람 …… 않다 : 원문은 知人未易인데, 반악(潘岳) 마견독뢰(馬汧督誄)’에 나오는 말로, 사기 범수열전(范睢列傳)에서 후영(侯瀛) 사람은 원래 자기를 알기 쉽지 않으나 남을 아는 것 역시 쉽지 않다.人固未易知 知人亦未易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D-030]절교는 …… 말라 : 사기 80 악의열전(樂毅列傳), “옛날의 군자는 절교는 해도 악평은 하지 않았다.古之君子 交絶不出惡聲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족제(族弟) 이원(彜源)에게 보냄

 

엊그제 극히 어수선한 때 귀하의 심부름꾼이 마침 왔다가 아울러 윤( 윤광석)의 편지를 달라고 했으나, 윤의 편지는 딴 곳에 빌려 주고 찾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보내 드리지 못했으니 상기도 몹시 마음에 걸리외다. 이 편지가 왔을 적에 본래는 여러 일가 분들에게 두루 돌려 보이려 했으나, 그 사이에 성묘길을 떠나 달이 지나서 막 돌아왔고, 요즘도 역시 직소(直所)에 몸이 매어 있지 않으면 자잘한 공무에 분주하여 이제껏 뜻을 이루지 못했던 거요.

연일 서설(瑞雪)이 내리는데 지내시기가 더욱 좋으신지, 그리운 마음 그지없소이다.

지난번에 거창 현령(居昌縣令) 김맹강(金孟剛)이 차원(差員 업무차 차출된 관원)으로서 상경할 적에 듣자니 윤()이 이 편지를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맹강에게 보였는데, 손님들이 좌석에 가득하여 그와 응수하기가 자못 번거로웠으므로 그 첫머리 몇 줄만을 대략 보고는 그대로 말아서 돌려주면서

 

이러한 긴 편지는 하루내 보아도 볼 둥 말 둥 하겠고, 또 지금 내가 자네에 대해 지키는 의리가 비록 박군과는 잠시 다르기는 하지만 실인즉 이 일로 편지가 오고 가는 일에는 간섭하고 싶지 않네.”

하자, 윤은 바로 소매에 도로 집어넣고 허둥지둥 작별하고 떠났다는 거요. 그런데 지금 이 편지를 살펴보면 그 말미에 안의(安義)에 모였을 때 맹강과 함께 책을 보았다.’는 말이 있으니 그의 속셈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구려!

인본(印本)을 보내왔을 때 나는 과연 그 이면에 무슨 말이 들었는지 알지 못하고 한 부 보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인데, 급기야 원문 두어 편을 잠깐 열람해 보니 볼 만한 것이 별로 없어서 그대로 다른 책들 속에 뒤섞어 두고 말았던 거요. 편지에서 말한 맹강이 와서 모였다고 한 때는 바로 윤이 임기가 만료되어 하직하고 떠나던 날이었소. 이때에 기생과 풍악이 앞에 가득하고 술과 음식이 상에 널리어 저녁 모임이 아침에야 흩어졌고 실컷 즐기다 파했으니, 어느 겨를에 어지러운 책더미 속에서 밤낮으로 애써 찾아내어 부질없이 펼쳐 보는 짓을 했겠소?

가령 내가 전일에는 뒷부분을 생략하고 지나쳐 보았을망정, 이와 같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책을 보는 마당에야 어찌 깨닫지 못할 이치가 있겠소? 더더구나 맹강 집안의 선조를 모함하고 핍박한 일도 이와 조목을 같이하여 두 줄로 나란히 열거되어 있으니, 맹강도 어찌 기꺼이 편안히 셋이 함께 앉았겠으며 그 때문에 놀라 원통해하지 않았겠소?

전일에는 진실로 성의 있게 고쳐 인쇄하려고 꾀했던 것이 지금 와서 이미 그렇게 하지 못할 형세가 되자, 도리어 우선 이런 말을 만들어 증거를 세워 자신을 해명하자는 것이니, 어찌 자기 속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소? 또 그 편지 중에서 높이 추켜들어 존중하고 있는 사람이라야 송교(松郊) 한 사람뿐인데, 송교란 호를 가진 이가 누구인지 모르겠소만, 반드시 여러 선현(先賢)들과 반대로 어긋나고자 하면서 억지로 송교 한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더욱 놀랍고 한탄스러운 것은 우리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을 여지없이 조롱한 점이니 현배(賢輩)들이 지키는 의리는 장차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소. 또 새로 인출(印出)한 책이 어떤 글들인지도 모르겠소이다. 나의 원래 편지까지 아울러 보내니 종이 상단에 붙여 놓은 것을 행여 빠뜨리지 말고, 본 뒤에 즉시 돌려주기 바라오.

 

 

[C-001]이원(彜源) : 박이원(朴彜源 : 1743~1801)은 박사고(朴師古)의 아들로 박사눌(朴師訥)의 양자가 되었으며, 1777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형조 정랑을 지냈다.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문경 현감(聞慶縣監)으로서 합천 화양동에 있던 야천(冶川) 박소(朴紹)의 묘소 정비 사업에 성금을 보태기도 했다.

[D-001]김맹강(金孟剛) : 맹강(孟剛)은 김유(金鍒)의 자()이다.

[D-002]내가 …… 하지만 : 김유가 윤광석과 같은 소론(少論)이어서 노론인 연암과는 당파적 의리가 다르다는 뜻이다.

[D-003]인본(印本) : 윤광석의 선조 윤전(尹烇)의 문집인 후촌실기(後村實記)  윤충헌공실기(尹忠憲公實記)의 인쇄본을 말한다.

[D-004]송교(松郊) : 이목(李楘 : 1572~1646)의 호이다. 이목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으로 성혼(成渾)과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었다. 1612년 문과 급제 후 병조 좌랑 등을 지냈으며 대북파(大北派)의 무고로 파직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복직하였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했고, 1636년 형조 참판이 되어 병자호란을 당하자 척화를 주장했다. 사후(死後)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D-005]현배(賢輩)들이 …… 모르겠소 : 현배는 후배(後輩)를 높여 부른 말이다. 박세채는 박동량의 손자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초기 지도자가 된 인물인데, 소론의 후배 세대인 윤광석 등이 그를 조롱한다면 당파의 의리가 제대로 지켜져 나가겠느냐고 힐난한 것이다.

[D-006]나의 원래 편지 : 바로 앞에 수록된 함양 군수 윤광석에게 보냄與尹咸陽光碩書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공주 판관(公州判官) 김응지(金應之)에게 답함

 

 

얼마 전 조사에 참여한 일은, 여러 죄수들이 이미 다 문초를 받았고 재차 공초(供招)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옥사의 실정에 있어서는 별로 의혹될 단서도 없으니 문안(文案)은 이미 갖추어졌다고 하겠으며, 다만 미처 작성되지 못한 것은 언사(讞辭 판결문)뿐이었소.

저의 병은 졸지에 극심해져 잠시도 머물러 있기 어려울 때가 있음을 비단 형만이 잘 아는 게 아니라 감사께서도 이미 양찰하고 계신 터입니다. 또 임금께 장계를 올릴 일자가 대단히 촉박한 것도 아니니, 발미(跋尾)를 얽어서 내는 일은 형이 만약 혼자 하기 어렵다면 비록 귀임한 뒤에 서면 왕복으로 상의한다 해도 여유가 작작할 것 같았소. 그러므로 감히 물러간다고 알렸던 것은 이 때문이었소.

영문(營門 감사를 가리킴)이 이미 귀임하여 조리하도록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도중에서 증세가 더할까 몹시 염려하여 타고 가는 것까지 내밀히 물으며 편한 대로 하라고 허락하기까지 했으니, 병을 핑계 대고 사무를 피하여 하직도 아니 하고 바로 돌아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지 않소. 그런데 지금 그때 따라갔던 아전을 뒤늦게 잡아다가 대신 형신(刑訊)을 받게 하니, 이 어찌 꿈엔들 감히 생각했던 일이겠소!

사관(査官 검사관)을 다시 청하자고 한 점에서는 형도 역시 주선을 잘못했다고 할 수 있소. 이미 번안(飜案 조사 결과를 번복함)을 하지 않을진대 하필 사관을 고쳐 정하여 허다한 말썽을 초래할 것이 있겠소? 이러니저러니를 막론하고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만 하나의 돌아갈 ()’ 자가 있을 따름이오. 사직서를 써 보내니 찾아서 읽어 보기 바라오. 노년에 서로 만나 머리가 희도록 사귀어도 낯선 사람 같더니, 갑자기 이렇게 낭패를 보게 되어 도리어 몹시도 서글픔만 맺힐 따름이외다.

 

귀하의 관아에 있을 때 처음에는 아무런 병이 없어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며칠을 편안히 지냈는데, 하루는 밥을 먹고 나서 형과 마주하여 졸다가 저는 가슴과 배 사이에 마치 물건이 걸려 있는 듯한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 급히 따뜻한 물을 가져오라 하여 마셨더니, 층층으로 빙빙 돌아서 나뉘어 세 덩이가 되었소. 짐작에 그 크기가 우()  민간에서 말하는 토란이다. 만 하고 수레바퀴가 소리 내듯이 호흡할 때마다 서로 치받으며, 또 간혹 다섯 손가락으로 후벼 대는 것도 같아서 온갖 맥이 다 풀려 만사가 귀찮다가 잠깐 사이에 곧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소.

이때부터는 그 증세가 생기려면 연기처럼 슬며시 오는데, 밥이라곤 한 숟갈도 뜰 수 없고 마시는 것이라곤 찻물뿐이오. 형도 역시 그 꼴을 보고는 걱정하였지요. 또 그 뒤로는 물이나 술을 막론하고 들이마셔 입에 있으면 문득 삼킬 것을 잊어버리니 생각에 목젖이 없어진 듯싶었소. 수십 년 전에 어느 한 사람이 이 증세가 있음을 보았는데 의원의 말로는 심병(心病)이라는 거요. 심장의 피가 바싹 마르면 으레 이 증세가 생긴다고 했소. 저의 지금 증상이 갑자기 전에 들은 말과 비슷해서 마음이 편치 못하고 풀이 꺾이고 스스로 의심이 나더니, 저녁 사이에 가슴이 크게 두근거리고 배 안에서 쭈루룩 흘러내리는 것이 마치 병 속에서 흔들리는 물 같아서, 비록 그 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치밀어 올라 두근거리는 증상과 호응하므로 더욱 혼자서 이상히 여겼지만 실지로 꼭 집어 말할 것도 없었소.

또한 온몸이 둥둥 떠 공중에 있는 것 같아서 걸음을 걸어도 발이 헛놓여서 땅을 밟지 않은 듯하여 너무도 풀이 꺾이고 기분이 나빴소. 형과 종일토록 한담을 나누었을지라도 그 말소리가 제 입에서 나오는 것을 갑자기 잊었으며, 형의 말소리 역시 귀에 들어온 적이 없음을 깨닫고는 이 몸이 내 것인지 아닌지 더욱 의심이 났소. 이와 같은 이상한 증세는 하나뿐이 아니오.

돌아오던 날 저녁, 새벽잠에서 막 깨자 왼쪽 머리와 안면이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으며 갑자기 멍청해진 듯하고 입가와 눈꼬리가 땅기고 씰룩거려 경련이 일므로 크게 놀라 일어나 앉아 급히 병풍 건너편에서 자는 자를 불렀지요. 촛불을 켜는 동안 이 증세는 바로 그쳤으나 안면 마비의 증세는 손으로 만져도 남의 살 같았소.

지금 이 모든 증세가 형과 마주 앉은 며칠 사이에 나타난 것이니, 비록 저절로 싫은 마음이 났으나 억지로 세수하고 머리 빗고 했던 거요. 이 같은 증세는 다른 사람으로서는 세세히 살필 수도 없는 것이고, 형에게도 늘어놓은 적이 없었던 것은 듣기 좋은 얘기도 아닐 뿐더러 으레 위로하여 병자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나 할 뿐이었기 때문이오.

그러나 객지에 머물기가 한시도 어려워서 급급히 하직하고 물러난 것은 이 때문이었소. 이로써 죄를 얻은 것은 실로 본의가 아니었으나 부끄러운 마음이야 어찌하겠소? 귀하의 고을의 의원은 이미 홍주(洪州) 관아로 떠나서 진찰을 받지 못했소. 이 편지에 기록된 모든 증세를 들어 그가 돌아오면 자세히 의논해 봐 주기 바라오. 만일 형이 가기를 권하여 의원의 승낙을 얻는다면, 나중 인편에 자세히 알려 주시오. 그러면 인마(人馬)에 관한 모든 것은 응당 제가 준비해서 보내겠소이다.

 

 

[C-001]김응지(金應之) : 김기응(金箕應 : 1744~1808)의 자가 응지(應之)이다. 그는 본관이 광산(光山)이고, 사계(沙溪) 김장생의 후손이다. 연암이 젊은 시절 교유했던 선배인 석당(石堂) 김상정(金相定)의 아들로, 연암과 교분이 있었다. 생원시에 급제한 후 음보로 황간 현감(黃澗縣監), 공주 판관, 황주 목사(黃州牧使) 등을 지냈다.

[D-001]얼마 전 ……  : 연암이 정조 21(1797) 7월 충청도 면천 군수(沔川郡守)로 부임하자, 당시 충청 감사 한용화(韓用和 : 1732~1799)가 공주 판관 김기응의 천거에 따라 연암에게 연분(年分) 가청(加請) 장계(狀啓)’(연암집 9)를 대신 지어 주기를 부탁한 데 이어, 연암을 도내의 옥사를 재심하는 심리관(審理官)으로 단독 차임(差任)하였다. 이에 연암은 감영으로 가서 며칠간 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감사가 도내 수령들의 고과(考課)를 함께 논의하자고 은근히 끌어들이는 것을 거부했더니, 이를 괘씸히 여긴 감사가 연암을 수행한 아전을 잡아다 벌주고 연암에 대한 고과를 깎아내렸다. 연암은 이에 분개하여 감사에게 여러 차례 사직서를 올렸으나 반려되고 말았다. 공주 판관 김기응은 자신이 중간에서 주선을 잘못하여 연암과 충청 감사 사이에 갈등을 초래하지 않았나 하여 변명조의 편지들을 보냈는데, 연암집에 실린 김기응에게 보낸 답서들은 그로 인한 것이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3

[D-002]발미(跋尾) : 발사(跋辭)라고도 하는데, 조사와 관련하여 장계의 뒤에 붙이는 건의서를 말한다.

[D-003]형신(刑訊) : 죄인을 형장(刑杖)으로 치며 캐묻는 것을 말한다.

[D-004]주선을 잘못했다 : 김기응이 연암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책한 말인 듯하다.

[D-005]노년에 …… 같더니 : 한용화와 연암은 환갑이 지난 나이에 각각 충청 감사와 면천 군수가 되어 외지에서 서로 만났는데, 두 사람의 교분이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용화가 관직에 연연하지 않는 연암의 사람됨을 알지 못하고 회유하려 들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답함

 

 

편지에서 하신 많은 말씀의 뜻은 잘 납득하였소만 저도 모르게 큰 웃음을 한 번 터뜨렸소. 제가 언제 형에게 분노를 품은 적이 있다고 형은 어찌 지레짐작하여 늘 이와 같은 변명을 하는 거요? 이야말로 나를 아는 것이 너무도 얕다 하겠소. 저를 이해하건 저를 책망하건 모두가 제 병이 빌미가 된 것이오. 이 재앙은 스스로 만든 것인데 다른 사람이 무슨 관계이겠소? 다만 그 정세는 잠시 제쳐 두고, 병세로 인해 갈수록 지쳐서 위태로운 증상과 악화될 조짐이 겹쳐서 나타나고 있소.

중존(仲存 이재성(李在誠))마저 엊그제 또다시 가 버리고, 빈 관아에 홀로 누워 곁에는 한 사람도 없으니 이야말로 고기 먹는 정승(定僧)이요, 병부(兵符)를 찬 귀양객이라 이르겠소. 돌아갈 행장(行裝)을 점검해 보니 다만 가지고 온 하나의 해진 책상자뿐인데, 두어 질의 낡은 서적이 가득 들었고, 책갈피에 두서없이 잔뜩 끼워 넣어진 것은 모두가 앙엽(盎葉)의 기록이오. 우연히 그 한 조각을 펴 보고 저도 모르게 서글퍼지면서 가슴이 쓰라렸소. 그것은 나이 젊었을 때 눈이 밝아 깨알 같은 글자도 꺼리지 않고 써서 어떤 것은 종이가 나비 날개처럼 얇고 어떤 것은 글자가 파리 대가리만 하게 작았소. 이미 순서도 없이 된 것이라 종당에는 버리고 말 것이니, 비하자면 꿰지 못한 야광주(夜光珠)요 구멍 없는 강철 바늘인 거요.

바쁘게 지나가는 게 인생이지만 내일은 항상 있었는데, 지금 갑자기 시력이 아득아득 글자 획이 가물가물하여, 잠시 개미 떼가 모였다가 잠깐 사이에 흰 바탕만 남아 보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소. 이는 다 내 평생의 경륜을 기록한 것으로 당대(當代)의 문헌으로 갖추어 둘 만한 것인데, 만약 지금에 이르러 손수 곰곰이 따져 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은 편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이번에 바닷가의 외로운 성읍에 오니 고을도 궁벽하고 일도 적어서 잎이 지고 꽃이 필 때 공무에 겨를이 나면 몇 종의 기서(奇書)를 거의 엮어 낼 수 있었소. 그런데 지금 이처럼 좌절하고 보니 속절없이 다시 끌고 돌아가는 수밖에는 없소. 좀 오줌, 쥐 똥과 함께 진흙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니, 이것이 상심거리일 뿐, 다른 거야 무엇을 연연하겠소? 이 밖에 공사간(公私間)에 으레 있는 걱정거리에 대해서는 별로 낭패될 것이 없소. 대개 도임한 지 겨우 다섯 달밖에 되지 않아 찬지 뜨거운지도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옛 친구에게 염려를 끼치지는 않은 듯하오.

 

 

[D-001]저를 …… 책망하건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공자가 나를 알아줄 것도 오직 춘추(春秋)이며 나를 책망할 것도 오직 춘추로다.知我者其惟春秋乎 罪我者其惟春秋乎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D-002]이 재앙은 …… 것인데 : 서경 태갑 중(太甲中) 하늘이 내린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어도 스스로 만든 재앙은 피할 수가 없다.天作孼猶可違 自作孼不可逭고 하였다.

[D-003]정승(定僧) : 좌선(坐禪)에 들어간 승려를 이른다.

[D-004]병부(兵符)를 찬 귀양객 : 병부는 군대를 동원할 때 쓰던 부신(符信)으로, 감사와 병사(兵使) · 수사(水使)뿐 아니라 수령도 차고 다녔다.

[D-005]앙엽(盎葉) : 옛사람들은 농사를 짓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감나무 잎에다 적어 밭 가운데에 묻어 둔 항아리에 넣었다고 한다. 이를 본떠서, 독서하다가 깨달은 고금의 고거(考據)와 변증(辨證)에 관한 내용을 쪽지에 기록하여 모아 두는 것을 말한다. 이덕무(李德懋)에게 앙엽기(盎葉記)란 저술이 있고, 연암의 열하일기에도 앙엽기란 편()이 있다. 雅亭遺稿 卷8 附錄 朴趾源撰 行狀》 《熱河日記 盎葉記 序

[D-006]찬지 …… 때문이오 : 원문은 其爲冷煖 亦不自知인데, 물을 직접 마셔 본 사람만이 그 물이 찬지 뜨거운지를 안다는 뜻의 냉난자지(冷暖自知)’란 말이 있다. 면천에서 군수 노릇을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D-007]옛 친구에게 …… 듯하오 : 충청 감사가 된 옛 친구 한용화가 도내 고을을 잘 다스리려고 애쓰는데, 하관(下官)으로서 걱정을 끼치지는 않았다는 뜻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답함

 

 

이번의 시끄러웠던 일은 단지 묵은 병이 객지에서 돌발했던 까닭인데, 잠깐 사이에 도리어 화단(禍端)을 이루었으니, 재앙이 나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라 뉘를 원망하고 뉘를 허물하겠소?

사가(使家 사또. 감사를 가리킴)의 한결같은 고심(苦心)은 실로 문장을 너무도 사랑한 까닭으로 반드시 언사(讞辭)가 내 손에서만 나오게 하려는 것이었고, 비직(卑職 연암을 가리킴)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은 결국 불쌍히 여겨 허락해 주리라 경망스레 믿은 때문으로, 돌아온 뒤에 수행했던 아전을 뒤미쳐 잡아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데 기인한 것이오. 따져 보면 애초에는 교제가 아직도 옅은데 흠모가 지나치게 깊었고, 끝내는 마음이 아직 미덥지 못한 상태에서 의심과 노여움이 마구 생겨났으며, 병이 이미 뜻밖에 생겼으나 대접이 처음만 못했고, 의심한 것은 본심이 아니었지만 연슬(淵膝)이 너무도 갑작스러웠던 거요.

저 의서(醫書)에 이른바 각궁반장(角弓反張)이 불행히도 이와 가깝다 하겠소. 각궁(角弓 무소뿔로 장식한 활)은 굳센 데다 쇠심줄과 부레풀이 새로 되게 엉겨 붙었는데, 힘에 겹게 당기면 시위와 활 끝부분이 한계를 넘어 쥔 손을 미처 놓기도 전에 양쪽 활고자가 먼저 바깥으로 뒤집혀지게 되는 거요. 무릇 위아래가 통하지 않는 것을 바로 관격(關格)이라 하는데, 의가(醫家)에서는 뇌()와 발꿈치가 서로 접근하고, 배와 등이 서로 뒤틀리는 것을 활의 뒤집힘反張에 비유한 거지요. 지금의 증세를 살펴보면 어찌 이와 유사한 것이 아니겠소?

어젯밤 관의 하인이 약을 올리다가, 실수하여 떨어뜨려 책상과 자리를 흥건히 적시었소. 만약 이것을 누가 팔뚝을 당겼거나 팔꿈치를 비틀어서 그리 되었다고 하자니 곁에 딴 사람이 없었고, ‘삽시간에 태만해서 그리 되었다고 하자니 가득 찬 그릇을 조심스럽게 들었을 텐데 그럴 리가 없고,  일부러 발을 헛디뎌 엎질렀다 하자니 이것은 너무도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다시 담을 수는 없겠으니, 다만 닦아 내어 조촐하게 할 따름이겠지요.

사직서가 기각됨으로써 또 한 가지 병의 조짐이 더해졌소이다. 이 마음이 조급하고 답답함이 어찌 한이 있겠소? 그러나 관인(官印)을 내던지고 돌아가는 것은 비단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엄중히 타이를 뿐 아니라, 고과(考課)가 눈앞에 있으니 어찌 스스로 혐의를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발끈 성내어 행동할 수 있겠소?

이울어진 매화가 한 해를 또 전송하는데, 도리어 가시 돋친 말만 하고 있으니 더욱더 저도 모르게 몹시 서글프기만 하오.

 

 

[C-001]응지에게 답함 : 내용으로 보아, 이 다음에 실린 응지에게 답함 직후에 작성된 편지로 판단된다.

[D-001]병이 …… 못했고 : 원문은 疾旣無妄而權輿不承인데, 무망(無妄)은 곧 무망(无妄)으로, 아무런 까닭이 없이 걸린 뜻밖의 병을 말한다. 주역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의 효사(爻辭) 아무런 까닭이 없이 걸린 병이니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낫는 희소식이 있으리라.无妄之病 勿藥有喜 하였다. 권여(權輿)는 처음이란 뜻으로, 시경 진풍(秦風) 권여(權輿) 나에게 잘 차린 음식이 가득하더니, 지금은 매 끼니조차 빠듯하네. 아아, 처음과 다르도다.於我乎 夏屋渠渠 今也每食無餘 于嗟乎 不承權輿라고 하였다. 이 시는 진() 나라 임금이 선비들을 대우하기를 시종일관하지 못함을 풍자한 노래이다.

[D-002]연슬(淵膝) : ‘고우면 무릎에 앉히고 미우면 못에 떨어뜨린다墜淵加膝는 말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지나치게 변덕스러움을 뜻한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서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군주는 사람을 기용하기를 마치 무릎에라도 앉힐 듯이 하고, 사람을 물리치기를 마치 못에 떨어뜨릴 듯이 한다.今之君子 進人若將加諸膝 退人若將墜諸淵고 하였다.

[D-003]각궁반장(角弓反張) : 온몸이 뻣뻣해지면서 등이 활처럼 뒤로 젖혀지는 증상을 말한다.

[D-004]양쪽 …… 거요 : 활 양끝의 시위를 매게 된 곳을 활고자라 이른다. 원문은 兩彄先臾인데, 바깥으로 많이 뒤집히는 활을 유궁(臾弓)이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답함

 

 

무망(无妄)의 병과 본의 아닌 의심은 이미 다 지난 일에 속하니 다시금 변명할 필요가 없으나, 이른바 어느 정도 성의가 부족했다.’고 한 것은 자못 이해가 가지 않사외다. 자기를 두남두고 남을 책하는 그 사이에도 역시 할 말은 있소이다.

영문(營門 감사)은 주심(主審)이고 수령(守令)은 배심(陪審)이오. 때마저 극심한 추위를 당했는데 주심의 처지에서 한 번도 자리를 만들지 않았으니, 배심을 하자 해도 할 곳이 없었소. 그렁저렁 열흘이 지나게 되니 오래 지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마침내 이아(貳衙)에서 종일토록 동추(同推)하여 여러 죄수들이 재차 공초(拱招)했고 조사의 문안도 갖추어졌으니, 가위 내 할 일은 끝났다.’ 할 수 있소. 영문은 어찌 그리 심문하는 일은 느리면서 판결문 만드는 데는 급하오? 성의가 부족했다는 책망은 반드시 전적으로 이 몸에게만 돌릴 일은 아닌 듯싶소.

이른바 공격(公格 공직에 관한 격식)에 크게 관계된다.’ 한 것도 역시 할 말이 있소. 대체 막중한 계문(啓聞 장계를 올림)을 수령이 하는 거요, 영문이 하는 거요? 더구나 공격이 존재하는 데는 수령된 자로서는 감히 한마디도 사연을 덧붙이지 못할 것 같소. 발미(跋尾)를 대신 짓는 것도 이것이 어찌 전례(前例) 있는 공격이겠소? 또 하물며 오너라 하면 오고 돌아가거라 하면 돌아가며 감히 털끝만큼도 어긴 일이 없는데. 도리어 공격을 들어 책망을 하니 자못 이해가 안 가는 일이오.

비록 그렇지만 조사하는 일을 모두 맡겼으며 언사(讞辭)마저 전담케 했으니 신임이 과연 두터웠다고 하겠고, 이미 명령을 들었으니 글도 마땅히 지었어야 할 터요. 또 그 옥사의 실정에 특별히 의심스러운 것도 없어 초검(初檢)과 복검의 문안은 실인(實因 사망 원인)이 다 같았으며, 전임 관찰사의 제지(題旨 판결)가 엄중하고 명확하여 원범은 저절로 상명(償命)의 죄목에 들게 되어 있소.

지금 이 조사는 바로 사중구생(死中求生)의 꾀로 그 자식을 시켜 억울함을 호소한 때문인데, 그 억울함을 호소한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거짓이니, 다만 그 원사(爰辭 진술서)에 대해 조목조목 사실을 남김없이 밝혀 줄 따름이오. 이와 같이 사리를 분명히 한다면 원범의 죄는 더욱 도피할 길이 없을 것이오. 완성된 옥안(獄案)의 발미도 십여 줄에 지나지 않는 문장인데 내가 무엇이 괴로워 만들지 않겠소?

뜻밖에 밤사이 병이 갑자기 심해져 숨도 쉬기 어려웠소. 요전 편지에 말한 바와 같이, 가슴과 배 사이를 마치 다섯 손가락으로 후벼 파는 것 같아서, 온갖 맥이 다 풀어지며 온갖 생각이 모두 식어 버려 객지에 머물기가 한시도 어려웠소.

스스로 생각건대 나이는 늙고 병은 잦으니 죽을 날이 머지않은 듯한데, 타향의 벼슬살이로 신세가 외로운 중과 같으니 어찌 깜짝 놀라며 스스로 위태로움을 느끼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소? 이른바 사람이 한 세상에 사는 것이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 같네.人生一世間 忽如遠行客라는 옛 시구(詩句)가 아마도 헛말이 아니구려. 더더구나 여관의 긴긴 밤에 고향 생각이 무척 괴롭고, 음식도 솜씨가 바뀌고 침석도 전에 눕던 자리가 아니라서, 옛사람의 병주(幷州)를 그리워하는 정이 아스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거요.

형도 또한 사관(査官)으로서 의견이 나와 대략 동일하니, 발미를 지어 내는 일은 다른 사람 손을 빌릴 필요가 없소. 순석(旬席 감사가 있는 자리)에서 아뢰고, 곁에 있던 형에게 부탁했던 것은 이 때문이오.

그런데 일이 불행하여 이리저리하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다만 입 다물고 피할 따름이지 어찌 홀로 자기 명분만 깨끗이 할 수 있겠소? 지금 이미 행장(行裝)을 정돈하고 있는데, 돌아갈 시기가 이를지 더딜지도 내 손에 달려 있지 않으니 이것이 괴롭고 답답하오.

 

 

[C-001]응지에게 답함 : 내용으로 보아 연암집 2에 수록된 공주 판관 김응지에게 답함答公州判官金應之書을 쓴 직후에 작성된 편지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 편지 바로 다음에 수록되어야 마땅한데 편집상의 실수로 현재와 같이 배치된 듯하다.

[D-001]무망(无妄)의 병 : 아무런 까닭이 없이 걸린 뜻밖의 병을 말한다. 주역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의 효사(爻辭) 아무런 까닭이 없이 걸린 병이니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낫는 희소식이 있으리라.无妄之病 勿藥有喜 하였다.

[D-002]이아(貳衙) : 감영이 있는 고을의 관아를 말한다. 공주(公州)의 목사(牧使)는 충청 감사가 겸임하고 판관 1인이 고을 실무를 관장했으므로, 여기서는 김기응이 집무를 보던 공주 관아를 가리킨다.

[D-003]상명(償命) : 살인죄로 인해 사형을 받는 것을 말한다.

[D-004]가슴과 …… 어려웠소 : 앞서 보낸 공주 판관 김응지에게 답함答公州判官金應之書 중의 일부 구절들을 인용한 것이다.

[D-005]사람이 …… 같네 : 문선(文選) 29에 실린 고시(古詩) 19() 중의 제 3 수에 사람이 천지 사이에 태어나니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 같네.人生天地間 忽如遠行客라고 하였다.

[D-006]병주(幷州)를 그리워하는 정 : 오래 살다 떠나온 타향을 고향처럼 그리워하는 정을 말하는데, () 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시 도상건(渡桑乾)’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 시에서 가도는 병주에서 10년이나 객지 생활을 하며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으나, 갑자기 그곳을 떠나 고향에서 더욱 먼 곳으로 떠나게 되니 병주가 오히려 고향처럼 그리워지노라고 노래하였다. 병주는 중국 고대 12()의 하나로, 당 나라 때에는 산서(山西) 태원부(太原府)였다. 여기서는 공주에서 불편하게 지내자니 면천에서 지낼 때가 그리워지더라는 뜻으로 쓴 것이다.

[D-007]돌아갈 …… 않으니 : 감사가 사직서를 받아 주어야만 귀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답함

 

 

일전에는 공무(公務)와 사사(私事)가 너무도 복잡하여 미처 편지를 올리지 못하다가, 막 장리(狀吏)의 출발 여부를 묻자 잠깐 사이에 벌써 떠나버렸다 하니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 그지없었소. 필시 나더러 편지 쓰기에 뜻이 없어서 답장을 생략해 버렸다 생각했을 거요. 급기야 먼저 보내신 짧은 편지를 받아 보니 과연 내 짐작과 같았소. 송구스럽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사외다. 이 아우가 어찌 이렇게 졸장부같이 굴겠소? 한 번 뜻대로 안 되었다 해서 멍하니 멍청스레 앉아 공중에 대고 글자나 쓰고 있겠소? 어쩌자고 더욱 사람을 부끄러워 죽게 만드시오?

보름날 아침에 각 고을의 아전들이 포사문(布司門) 밖에 떼로 모여 얼어붙은 붓을 호호 불어 녹이며 어깨를 서로 밀치고 발등을 서로 밟고 서서, 마치 과거 시험장에서 글 제목을 내걸면 응시자들이 베껴 써서 풀이하듯이 수수께끼 같은 말을 서로 외치기를,

 

기주(冀州)의 전부(田賦)인가?”

단공(亶公)이 말을 달려간 곳인가?”

변자(卞子)가 상투가 없는가?”

복씨(卜氏)가 일() 자를 머리에 얹었는가?”

정일(精一)을 잡았느냐?”

자막(子莫)이 잡았느냐?”

어떤 장리(贓吏 뇌물을 받거나 횡령한 관리)를 잡았는고?”

하자,

 

수배(隨陪)를 잡았다네.”

라는 대답이 나왔소. 그러자 온 장내가 떠들썩하게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네 원님이 음관(蔭官)인 줄 아는데, 지금 교묘하게 발사하여 신기하게 맞혔으니 이야말로 활을 잘 쏜다고 이를 만하다. 네 원님은 혹시 찬밥 신세의 무반(武班)이 아니냐?”

하여, 면천(沔川) 고을의 이졸(吏卒)들이 크게 부끄러움을 띠고 돌아왔었더라오.

이 아우는 막 이불을 끼고 식전 미음을 마시다가 이 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큰 웃음이 터져 배를 틀어잡고 킥킥거리니 갓끈이 썩은 나무 꺾어지듯 끊어지고, 입에 머금은 밥알이 나는 벌떼같이 튀어나오며, 마치 독한 종기가 한창 심하게 곪았는데 긴 침으로 찔러 터트리니 고름이 튀어 의복은 비록 더러워졌지만 기분만은 갑자기 상쾌한 것과 같았소.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것이 있지요.

 

삼정승 사귀려 말고 제 몸 잘 가지라.’

했으니 이는 스스로 힘쓰라는 말이고,

 

네 집 쇠뿔이 아니면 우리 집 담장이 왜 무너지나?’

했으니 이는 남을 허물하는 말이고,

 

밤에는 흰 것을 밟지 말라. 물 아니면 돌이다.’

했으니 이는 밤길 가는 사람에게 경계한 말이고,

 

나고 들 때 고개 숙임은 문을 공경해서가 아니다.’

했으니 이는 남과 충돌할까 경고해 주는 것이고,

 

주인집에 장() 떨어지자 손님이 국 마다한다.’

했으니 이는 주객이 모두 편리한 것을 이른 말이오. 형의 충고는 이 몇 가지 속담을 보자면, 나를 어느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인지 모르겠소이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뒷갈망 잘하는 것이 나으니, 뒷갈망을 잘하자면 그 떠나고 머물기를 잘하는 것이 낫소. 떠나기를 속히 하거나 머물기를 오래 하기를 비록 감히 성인(聖人)의 시중(時中)에 견주지는 못하지만, 또한 어찌 허겁지겁 떠나 버림으로써 더욱 남의 비웃음을 사서야 되겠소?

 

 

[D-001]장리(狀吏) : 지방 관아들 사이에서 공문을 전달하던 지자(持字)를 가리키는 듯하다.

[D-002]한 번 …… 해서 : 정사년 12(양력 1798 1)의 고과(考課)에서 상()이 아니라 중()을 받은 사실을 가리킨다. 過庭錄 卷3

[D-003]공중에 …… 있겠소 : 원문은 咄咄書空耶인데, () 나라 때 중군(中軍) 은호(殷浩)가 무능하다 하여 먼 지방으로 쫓겨나자 온종일 어허! 괴상한 일이로고.咄咄怪事라는 네 글자만 공중에 대고 쓰며 지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크게 실망하거나 유감을 품은 경우를 비유할 때 쓰인다.

[D-004]포사문(布司門) : 포정문(布政門)을 가리키는 듯하다. 감영(監營)을 명() 나라 식으로 포정사(布政司)라고도 부르며, 영문(營門)을 포정문이라고도 부른다. 牧民心書 吏典 束吏

[D-005]기주(冀州)의 전부(田賦)인가 : 고과(考課)가 상()이냐고 물은 것이다. 서경 우공(禹貢)에 기주(冀州) 그 부세(賦稅)가 상상(上上)인데 간혹 차상(次上)이 섞였다.厥賦惟上上錯고 하였다. 기주는 고대 중국의 구주(九州)의 하나로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전부와 하북성(河北省) · 하남성(河南省) · 요령성(遼寧省)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전부(田賦)는 토지에서 생산된 곡물로 바치던 세금을 말하는데, 구등법(九等法)이라 하여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 차등을 두었다.

[D-006]단공(亶公) …… 곳인가 : 고과가 하()냐고 물은 것이다. 단공은 오랑캐의 침략을 피해 주() 나라의 수도를 기산(岐山)으로 천도한 고공단보(古公亶父)를 가리킨다. 시경 대아(大雅) () 고공단보가 이른 새벽에 말을 달려,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岐山) 아래에 이르셨네.古公亶父 來朝走馬 率西水滸 至于岐下라고 하였으므로, 기하(岐下)의 하() 자를 암시한 것이다.

[D-007]변자(卞子)가 상투가 없는가 : 고과가 하()냐고 물은 것이다. ()는 남자의 통칭(通稱)인데 자() 자와 음이 같으므로, 여기서는 변() ()를 암시한다. ‘ 자 상단의 점이 없으면 하() 자가 된다.

[D-008]복씨(卜氏) …… 얹었는가 : 고과가 하()냐고 물은 것이다. () 자에 일() 자를 가획(加劃)하면 하() 자가 된다.

[D-009]정일(精一)을 잡았느냐 : 고과가 중()이냐고 물은 것이다. 서경 대우모(大禹謨)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그 중정(中正)을 잡으리라.惟精惟一 允執厥中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D-010]자막(子莫)이 잡았느냐 : 고과가 중()이냐고 물은 것이다. 자막은 노() 나라의 현자(賢者)인데,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 양주(楊朱)나 묵적(墨翟)과 달리 자막은 중도(中道)를 취했다.子莫執中고 하였다.

[D-011]수배(隨陪)를 잡았다네 : 고과가 하()라는 뜻이다. 수배는 수령의 시중을 들던 하인을 말한다.

[D-012]교묘하게 …… 맞혔으니 : 원문은 巧發奇中인데, 연암에 대한 고과(考課) 제목(題目) 중의 표현을 이용한 풍자적 표현이다. 충청 감사 한용화는 연암에 대해 다스림은 구차스럽지 않으나 병이 간혹 교묘하게 발동한다.治則不苟 病或巧發라고 제목을 쓰고 고과를 상()에서 중()으로 깎아내렸다. 이는 자신과 불화한 연암이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서를 올린 것을 불만스럽게 여긴 때문이라 한다. 過庭錄 卷3 위의 제목 중의 교발(巧發)’을 교묘하게 활을 쏜다는 뜻으로, 고과에서 중()을 받은 것을 과녁을 명중했다는 뜻으로 바꾸어 조롱한 것이다.

[D-013]이는 …… 것이고 : 원문은 此警人所抵觸也인데, ‘ 자가 몇몇 이본들에는 其有로 되어 있다.

[D-014]성인(聖人)의 시중(時中) : 공자가 때의 변화에 맞추어 합당하게 처신한 것을 말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서 떠나기를 속히 할 만하면 속히 하고, 오래 있을 만하면 오래 있고, 머무를 만하면 머무르며, 벼슬할 만하면 벼슬을 한 분이 공자이다.可以速則速 可以久則久 可以處則處 可以仕則仕 孔子也라고 하면서 공자를 시중의 성인聖之時者이라고 칭송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보냄

 

 

현재 사직할 만한 사정과 질병 외에도 더욱더 절박한 슬픔이 있으니, 선산(先山)을 면례(緬禮)하는 일이오. 이전부터 계획하기는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일은 크고 힘은 모자라서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하다 보니 그렁저렁 삼십 년 넘게 지체되었소. 언제고 두려운 건 일찍 죽게 되어 이 일이 곧 중지되고 마는 것이오.

영남 고을에서 돌아온 이래로 역량이 대략 모여져서, 몇 해 동안 벼르고 벼른 것이 지난가을로 정해져 있었소. 그래서 이장(移葬)할 때 쓰는 도구도 갖추어졌고 날짜도 잡아 놓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남쪽으로 오게 되니, 실로 낭패가 되었던 거요. 더더구나 이 몸의 나이가 환갑이 넘었으니 앞길이 매우 바쁜데 지금 또 직함에 얽매여 세월을 끈다면, 비단 풍수지리에서는 꺼리는 것도 많을 뿐만 아니라 길한 해를 만나기가 어려우며, 빈 산에 치표(置標)만 해 두면 남에게 뺏기기가 쉽소. 지난날 감사께서 이 간곡한 심정을 깊이 마음 아파하시어, 새해가 되기를 조금 기다려 말미를 청하겠노라고 하니 면전에서 틀림없이 승낙을 하셨소. 그런데 지금 이와 같이 인정상으로나 도리상으로나 위급하게 되었으니, 말미를 청하는 일은 감히 다시 논할 문제가 아니오. 내심 서로 버티다가 앉아서 절기만 놓쳤으니, 사람된 도리뿐만 아니라 사체(事體)에도 손상이 가고 말았소.

바라건대 이 사정을 들어 감사에게 낱낱이 자세히 아뢰어, 그만두고 돌아가는 길을 빨리 만들어 주는 것이 어떻겠소? 이만 줄이오.

 

 

[D-001]선산(先山)을 면례(緬禮)하는 일 : 연암은 1767년에 별세한 부친의 장지(葬地) 문제로 녹천(鹿川) 이유(李濡 : 1645~1721)의 후손가와 소송이 빚어지자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으나, 남과 원한을 맺고 싶지 않아 부친의 유해를 딴 곳에 임시 매장한 뒤 장차 길지(吉地)를 얻어 이장할 계획을 줄곧 품고 있었다. 過庭錄 卷1

[D-002]일찍 죽게 되어 : 원문은 溘先朝露인데, 아침 이슬보다도 빠르게 사라진다는 뜻으로 일찍 죽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중존(李仲存)에게 답함

 

 

편지에서 알려 준 어떤 사람의 말에 대해서는 한 번 웃음을 터뜨릴 만하오. 속담에 중 꿈꾸고 문둥이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무엇을 이름이냐 하면, 중은 절에 살고, 절은 산에 있고, 산에는 옻나무가 있고, 옻의 독기는 사람을 문둥이처럼 만들므로, 꿈에 서로 연결되어 나타난 때문이오. 내가 예전에 중국에 들어갔었는데, 중국은 현재 되놈이 웅거하고 있는 곳이 되었소. 나는 일찍이 그들과 더불어 함께 놀고 자고 술 마시고 밥 먹곤 하였으니, 꿈속에서 중을 본 것과 같을 정도만이 아니었소.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이 나더러 문둥이라 해도 이상히 여길 것이 없소.

파피리를 불고 대말을 타고 놀던 옛날의 동무들로 늙도록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끼리, 침관(寢冠)을 놀려 대어 털모자毳帽라 하고 해어진 털배자를 비웃어 전구(氈裘)라 하지만 이는 어찌 참으로 붉은 실로 된 고깔을 쓰고 말굽형 소매의 옷을 입어서겠소? 대개 되놈이라 하여 비웃으면 아이들도 부끄러이 여기는 바이기 때문에 비슷한 사물을 끌어들여 서로 농담한 것이니, 마치 함께 목욕하면서 벌거벗었다고 희롱하는 격이라, 누가 그 말에 성을 내겠소? 수십 년의 길고 긴 세월을 거쳐 오는 동안 옛날의 떼 지어 노닐던 친구들이 거의 다 죽어 아무리 하룻밤 우스개를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그런데 지금 평소에 전혀 모르던 사람이 갑자기 되놈의 의복이란 따위의 말로 곧장 남에게 덮어씌우는 것도 안 될 일인데, 더구나 글로 만들어서 욕지거리를 늘어놓는단 말이오? 정신 이상으로 실성한 사람이 아닌 바에야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제 스스로 되놈이 되어 남의 비웃음과 욕을 받겠소? 상식으로 따져 보아도 거의 이치에 가깝지 않은 일이 아니겠소? 하인들도 보기가 부끄러울 지경인데, 더더구나 아전과 백성을 거느리는 자리에 부끄러워하는 낯짝을 하고 있겠소? 그자가 지어낸 말이 몹시도 조잡하여 비록 길에서 노는 아이들이나 저자의 심부름꾼들이라도 누가 다시 믿어 주겠소? 한 번의 웃음거리로 넘기고 말 일이오.

바라건대 우리 집 아이들에게 훈계하여 결코 남들에게 이러니저러니 변명을 말라 함이 어떻겠소? 설령 오유선생(烏有先生)의 성명을 묻는 자가 있다면 얼굴이 해맑고 눈썹이 또렷한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될 거요.

 

 

[C-001]이중존(李仲存) : 중존은 이재성(李在誠 : 1751~1809)의 자이다. 이재성은 계양군(桂陽君 :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의 후손으로 호를 지계(芝溪)라고 하였다. 연암의 처남이자 평생지기였으며, 이서구 · 이덕무 · 박제가 등과도 절친하여 북학파(北學派)의 일원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형제에게 글을 가르쳤다. 노년에 진사(進士) 급제 후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고, 문집으로 지계집(芝溪集) 7권이 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D-001]내가 …… 들어갔었는데 : 정조 4(1780) 진하 별사(進賀別使)의 일원으로 중국에 다녀온 사실을 가리킨다. 당시 연암은 열하(熱河)에서는 윤가전(尹嘉銓) · 왕민호(王民皥) 등과, 북경에서는 초팽령(初彭齡) · 유세기(兪世琦) 등 청 나라 문사들과 두루 사귀었다.

[D-002]파피리를 …… 동무 : 원문은 葱篠舊交인데, 총소(葱篠)는 총적(葱笛)과 소참(篠驂), 즉 파의 잎으로 만든 피리와 대나무로 만든 말竹馬을 가리킨다.

[D-003]침관(寢冠) : 잠잘 때에 쓰는 모자를 말한다.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옛날에는 잠잘 때에 이미 침의(寢衣)가 있었으니 응당 침관(寢冠)이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지금은 두풍(頭風)을 앓는 사람에게만 침관이 있다.”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53 耳目口心書6

[D-004]털모자毳帽 : 당시에 털모자를 청 나라에서 대량 수입해다 썼다. 연암집 2 ‘김 우상에게 축하하는 편지賀金右相書의 별지(別紙) 참조.

[D-005]전구(氈裘) : 북방 오랑캐들이 입던, 털과 가죽으로 된 옷을 말한다.

[D-006]붉은 실로 된 고깔 : 청 나라 때 남자의 예모(禮帽)는 모정(帽頂)의 중간 부분을 붉은 실로 짠 모위(帽緯)로 장식하였다.

[D-007]말굽형 소매 : 청 나라 때 남자 예복의 말굽형 소매인 마제수(馬蹄袖)를 가리킨다.

[D-008]그런데 …… 말이오 : 안의 현감 시절에 연암이 고을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자자해지자 이를 시기한 함양 군수 윤광석(尹光碩), 연암이 가끔 옛 의복인 학창의(鶴氅衣)를 입어 보곤 한 사실을 과장 · 왜곡하여 되놈의 의복을 입고 백성들을 대한다.胡服臨民는 설을 지어내어 서울에 전파하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2

[D-009]길에서 …… 심부름꾼들 : 원문은 街童市卒인데, 시졸(市卒)은 원래 시문(市門)의 문지기를 가리키는 말이나, 여기서는 식견이 가장 부족한 사람을 뜻하는 아동주졸(兒童走卒), 가동주졸(街童走卒)이란 성어와 같은 뜻으로 쓴 것으로 보았다.

[D-010]오유선생(烏有先生) : ()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에 나오는 허구적인 인물을 말한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되놈의 의복을 입었다는 사람을 가리킨다.

[D-011]얼굴이 …… 사람 : 한 나라 대장군 곽광(霍光)은 훤칠한 키에 얼굴이 해맑고 눈썹이 또렷하며 멋진 수염을 지녔다고 한다. 연암집 5 ‘대호에게 답함答大瓠 참조. 여기서는 되놈의 의복을 입은 것으로 의심받은 연암 자신의 용모를 농담으로 곽광에 비겨 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중존에게 답함

 

 

세상 사람들이 하도 바쁜 탓인지 남의 말을 흐리멍덩하게 듣고, 전하는 말도 어물어물하니 이 때문에 근일 말하는 자들이 더욱 조리가 없게 되는 것이오. 나는 자세히 말을 할 터인데, 그대 역시 너무 길게 끈다고 싫증 냄이 없을는지요.

내가 처음 영남 고을에 부임했을 때, 용소(龍沼)에서 비를 빌게 되어, 유 선생(劉先生)  이름은 처일(處一)이다.  이라는 이가 축관(祝官)으로 와서 용소 위에 있는 절에서 재()를 지냈는데, 수염과 눈썹이 하얗고 의복이 예스럽고 특이해 보였지요. 그래서

 

선생이 입고 계신 것이 무슨 의복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대답이

 

학창의(鶴氅衣)입니다.”

하더군요. 이는 대개 벼슬아치의 사복을 창의(氅衣)’라 칭하므로 ()’ 자 하나를 더 얹어 그와 구별하게 한 것이오. 그 제도는 옷깃은 모나고 양 섶은 곧으며, 흰 바탕에 검은 선〕 - 음은 ()’이다.  을 둘렀으며, 세 자락이 옆으로 터지고 양 옷깃이 맞닿아서 몹시 점잖아 보이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소.

 

선생은 부디 산에는 놀러 가지 마시오.”

그가 그 까닭을 묻기에, 나는 웃으며 말했지요.

 

예전에 밤에 모였던 때가 기억나는데, 좌중에 조경암(趙敬庵)  이름은 연귀(衍龜)이다.  이라는 이가 있었으니 옛것을 좋아하여 성실히 실행하는 사람이었소. 그가 일찍이 두 학동을 거느리고 구월산(九月山)을 노닐면서 치관(緇冠)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고 다녔는데, 산성(山城)의 별장(別將)이 졸개 두어 명을 거느리고 뒤를 밟았던 거요.

()는 사뭇 그런 줄도 모르고 제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산 이름이 구월산인데 본래 이름은 아사달산(阿斯達山)이다.’ 했더라오. 그러자 성장(城將)이 별안간 호통을 치며 과연 오랑캐兀良哈로다!’ 하며 좌우에게 눈짓을 주어 포박을 하려 드는 것이었소. 조는 성을 내며 너는 어찌 남을 되놈이라 욕하느냐?’ 하니, 성장 역시 꾸짖으며 네가 되놈 옷을 입고 되놈 말을 하니 되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였소. 조는 하도 다급하여 정수리를 드러내 보이며 너는 언제 상투 지닌 오랑캐를 본 적이 있느냐?’라 했소.

잠시 후에 절 중이 와서 알아보고 이분은 여주(驪州) 조 생원(趙生員)이오.’ 하자, 성장은 그래도 의심이 안 풀려 중에게 당부하기를 이 손님은 밥도 주지 말고 산 밖으로 내쫓아라.’ 했더라오. 그래서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등에서 땀이 난다고 하여, 온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더라오.

나는 조에게 말하기를 군자란 평상시에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삼가는 법이오.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심의를 증정했어도 소 강절(邵康節)은 늘 입지는 않았으니 이 어찌 평상시에 행동을 삼가는 군자가 아니겠소?’ 하니, 조의 말이 그렇다마다요. 내가 한참 곤욕을 볼 때에 머리털이 있어 덕을 보았소. 지금처럼 연로하여 대머리였더라면 무엇으로써 해명했겠소?’ 하여 온 좌중이 더욱 크게 웃으며 그칠 줄을 몰랐다오. 지금 선생이 입고 있는 그 의복도 성장에게 의심 살 것이 아니겠소?”

() 역시 크게 웃고 나서는,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말하기를,

이 옷은 우리 고장 임갈천(林葛川)과 노옥계(盧玉溪)가 물려준 제도입니다. 감히 묻자온대 성주(城主 사또)께서 입고 계신 것은 무슨 의복입니까?”

하기에,

 

이 역시 이른바 창의라는 거요.”

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유는 말하기를,

 

명칭과 실상이 다 근거가 없습니다. 새 깃을 갈라서 옷을 만든 것을 창()이라 이르는데, 창이란 본래 학의 날개로, 그 날개를 펴면 까만 선을 두른 것 같으니 이른바 호의현상(縞衣玄裳)이란 것이 이것이요, 옛날의 의복이란 검은 선을 두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창의라 이름 지은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이른바 창의라는 것은 선을 둘러 가장자리를 구별하지 않고 소매는 중의 장삼 같으며, 더구나 옷깃을 여미는 부분督袵이 항상 열려 있고 현무(玄武)는 엄정하지 않지 않습니까? 이는 단지 습속으로 그렇게 된 것뿐이니, 옛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성장의 의혹을 사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고 나서, 곁에 있던 통인(通引)을 가리키며 강개한 어조로 말하였소.

 

총각이란 관을 아직 쓰지 않은 동자의 호칭이니 이른바 총각관혜(總角丱兮)’가 이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땋은 머리가 발뒤꿈치까지 드리워져도 오히려 총각이라고 이르면 되겠습니까? 아이를 가르침이 바르지 못하고 명칭과 의리가 모두 어긋났으니, 이 역시 등솔이 터진 창의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고장의 정동계(鄭桐溪)가 물러나 산중에서 살 적에 그 밑에 있는 동자들은 모두 땋은 머리를 풀어 쌍상투로 틀어 올렸지요. 이것은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한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우리 일가 두어 사람들이 삼동(三洞)에 놀러 가기 위하여 기생과 악공(樂工)을 빌려 달라 하기에, 나는 사절하며,

 

그대들이 지금 찾아가는 그 산 전체가 바로 기생인걸요.”

했더니, 모두 놀라며 어째서냐고 물었소. 나는 웃으며,

 

적상산(赤裳山)이 아니요.”

하였소. 그리고 농 삼아 앞에서 한 말을 들려 주며, 함부로 산에 놀러 가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이 고을에는 어진 이가 많소이다.”

하였더니, 그 손들이 발끈하여 일어나면서

 

백성으로서 제 원님이 되놈 옷 입었다고 조롱하는 법이 어디 있소?”

합디다.

그 뒤 이웃 고을 원님들 4, 5명이 모였을 때, 영남 풍속이 거세어 원 노릇하기 어려움을 근심하였지요. 그때 누군가가

 

되놈 옷과 심의에 대한 풍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고 묻기에, 나는

 

이는 잘못 전해진 말이오. 그런데 또 어디서 들었소?”

했더니, 대답이

 

그대 집안의 족형(族兄)과 친분이 있어 근간에 찾아갔더니, 이상한 소문을 파다하게 전해 줍디다.”

하는 것이었소.

! 그 전하는 말이 비록 몹시 해괴했지만 굳이 변명할 가치도 없었소. 게다가 쟁반에 담은 음식이 계속 들어오고 거문고와 노래가 다투어 연주되었으므로 그 곡절을 자세히 알지도 못했고, 남들도 자세히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지요. 이때 큰 눈이 갓 개고 초승달이 누르스름하여, 서로 손을 잡고 동산에 들어가서 뭇 기생을 시켜 촛불을 잡히고 수만 그루의 긴 대나무를 구경하였지요. 그 김에 부러진 대나무 가지를 다투어 주워서 술을 덥히고 고기를 구우니, 좌우에서 대나무 토막 터지는 소리가 대포처럼 번갈아 터져 나오고, 갈대숲 까마귀와 산비둘기가 날개가 얼어붙어 어지러이 떨어졌소.

술이 얼큰하자 서로 바라보며 말을 주고받기를,

 

음산(陰山)에서 밤사냥할 제 초라함을 면치 못해, 초피 갖옷은 낡아빠져 뒤가 터진 것은 여전한데, 비파 소리 쓸쓸하고 줄 퉁기는 손가락은 추위로 떨어져 나갈 듯하네.”

하였지요. 한바탕 웃음과 해학이 흐드러졌으니 모두 다 한때 즐거움을 얻자는 것이었는데, 농담거리가 굴러다니다가 남을 해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소? 그대는 어찌 잊었소? 밤에 말 탄 이교(吏校) 수십 명을 거느리고 눈 속에 한껏 사냥을 했다는 말들은 모두 이런 따위가 번복되어 구실로 된 것임을 말이오. 그대는 왜 나를 위해 변명해 주지 않았소? 매란 밤에 풀어놓는 동물이 아니고, 산협(山峽) 고을 이교들이 어디로부터 그 많은 마필(馬匹)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말이오.

 

 

[D-001]조경암(趙敬庵) : 조연귀(趙衍龜)는 자가 경구(景九), 호가 경암(敬庵)이며,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임배후(林配垕) · 이희경(李喜經) · 이덕무 · 박제가 등과 교분이 깊었다. 靑莊館全書 卷19 雅亭遺稿11 5 趙敬庵》 《貞蕤詩集 卷1 戱倣王漁洋歲暮懷人詩六十首 편저로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가 있으며, 이에 대한 연암의 발문이 연암집 3에 수록되어 있다. 조연귀가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유람 다니다가 봉변당할 뻔한 일화는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1 사전(士典)1 복식조(服食條)에도 소개되어 있다. 단 구월산(九月山)이 수양산(首陽山)으로 되어 있다.

[D-002]치관(緇冠) : 선비들이 평상시에 쓰는 검은 베로 만든 관을 이른다.

[D-003]심의(深衣) : 상의와 하상(下裳)이 연결된 옷으로 대개 흰 베로 만들고 가장자리를 검은 선으로 둘렀다. 주자(朱子) 가례(家禮)에서 천거한 이래로 조선 시대 유학자 간에 이를 숭상하여 착용하게 되었으며, 그 제도에 대한 변증(辨證)이 이어져 왔다.

[D-004]아사달산(阿斯達山) : 황해도 구월산은 옛날 단군이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수천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며, 옛 이름을 아사달산이라 하였다. 고려 시대 이래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로 산성을 쌓고 별장(別將)을 두었다.

[D-005]오랑캐兀良哈 : ‘兀良介로도 표기하며, 오량해(烏梁海)라고도 부른다. () 나라 때 몽골 동부와 조선의 두만강 일대에 살던 여진(女眞) 오랑캐를 가리킨다.

[D-006]사마 온공(司馬溫公) …… 않았으니 : 사마 온공은 송() 나라 때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진 사마광(司馬光), 소 강절(邵康節)은 강절(康節)이란 시호를 받은 소옹(邵雍)을 말한다. 사마광은 예기에 의거해서 심의(深衣)를 만들어 입어 보곤 했는데, 소옹에게도 이를 입기를 권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소옹은 나는 지금 사람이니 지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라고 하니, 사마광이 그 말이 이치에 맞음을 탄복했다고 한다. 宋名臣言行錄 外集 卷5

[D-007]임갈천(林葛川)과 노옥계(盧玉溪) : 갈천(葛川)은 임훈(林薰 : 1500~1584)의 호이고, 옥계(玉溪)는 노진(盧禛 : 1518~1578)의 호이다. 임훈은 생원시 급제 후 참봉을 거쳐 목사까지 지냈으나 주로 고향에 은거했으며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효간(孝簡)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안의(安義)의 용문서원(龍門書院)에 제향되었다. 노진은 문과 급제 후 현달하여 판서까지 지냈고 청백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기대승(奇大升) · 김인후(金麟厚) 등과 교분이 깊었으며,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다.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받았고 함양(咸陽)의 당주서원(溏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D-008]까만 …… 같으니 : 원문은 如玄緣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勝溪文庫)와 연세대 소장 필사본에는 如玄端으로 되어 있다. 현단(玄端)은 고대 중국의 예복의 일종으로, 역시 옷 가장자리를 까만 선으로 둘렀다. 居家雜服攷 外服圖 玄端

[D-009]호의현상(縞衣玄裳) : 흰 비단 상의와 검은색 치마를 입었다는 뜻으로, ()의 모습을 형용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D-010]현무(玄武) : ()의 검은색으로 된 테두리 장식을 말한다. 예기 옥조(玉藻) 흰 비단 관에 검은 테두리 장식을 한 것은 상중(喪中)의 자손들이 쓰는 관이다.縞冠玄武 子姓之冠라고 하였다.

[D-011]총각관혜(總角丱兮) : 시경 제풍(齊風) 보전(甫田), “예쁘고 아름다워라 머리털을 묶어 쌍상투를 틀었네. 얼마 안 있다 만나 보면 불쑥 관을 쓰고 있으리.婉兮孌兮 總角丱兮 未幾見兮 突而弁兮라 하였다.

[D-012]정동계(鄭桐溪) : 동계(桐溪)는 정온(鄭蘊 : 1569~1641)의 호이다. 정온은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으로,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중용되었다.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며 그 이후 관직을 버리고 덕유산(德裕山)에 은거하다 죽었다. 문간(文簡)이란 시호가 내렸으며,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생가가 현재 거창군(居昌郡)에 보존되어 있다.

[D-013]혐의 : 조선 시대 동자들의 땋은 머리는 원() 나라의 지배를 받은 고려 시대에 몽골의 변발(辮髮) 풍습을 모방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오랑캐의 풍습이라 비판되었던 사실을 말한다.

[D-014]삼동(三洞) :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 하여 안의현의 명승지인 세 곳의 동천(洞天), 즉 화림동(花林洞) · 심진동(尋眞洞) · 원학동(猿鶴洞)을 말한다.

[D-015]적상산(赤裳山) : 전라도 무주(茂朱)에 있는 산으로 경상도 안의에서 가까운데, 가을 단풍이 여인네의 붉은 치마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D-016]음산(陰山)에서 …… 못해 : 음산은 내몽골 이남에서 내흥안령(內興安嶺)에 이르는 일대의 산들을 일컫는다. 이 대목은 흉노(匈奴) 정벌에서 패한 죄로 서민으로 강등되어 재야에서 사냥을 하며 지냈던 한() 나라 장군 이광(李廣)의 불우한 시절을 소재로 한 듯하다.

[D-017]농담거리가 ……  : 원문은 善謔之轉而爲虐인데, 시경 위풍(衛風) 기욱(淇奧)에서 농담을 잘하시되 남을 해치지 않도다.善戱謔兮 不爲虐兮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선학(善謔)’은 농담을 잘한다는 뜻과 함께, 농담거리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중존에게 답함

 

 

그네들이 떠들어 대는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虜號之藁란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소. 연호(年號)를 말한 것이오, 지명(地名)을 말한 것이오? 이 책은 잡다한 여행 기록에 불과한 것이라, 있건 없건 잘 되었건 못 되었건 간에 본래 세도(世道)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거늘, 애초부터 어찌 춘추대의(春秋大義)에 견주어 논한 적이 있었으리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 현자(賢者)에게 완전무결함을 요구하듯이 한다면 이는 지나친 일이오.

! 청 나라의 연호가 천하에 처음 시행되었을 때 우리나라의 선정(先正)이 고신(告身 임명장)에다 쓰지 말아 달라 청한 일이 있었고, 사대부 집안의 묘에 비()를 새겨서 세울 적에도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라 추가하여 쓴 사례도 있기는 하오. 그러나 공사(公私) 문서에 이르러서는 청 나라 연호 사용을 피하지 못할 경우가 있었으니, 이는 대개 부득이한 까닭이오. 그러므로 토지나 가옥이란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어 아니하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그 증서를 만들 때 당대의 연호를 갖추어 쓰지 아니하면 매매가 성립이 되지 않는 법이오. 세상에서 유독 춘추대의를 엄수하는 자는 장차 이 가옥을 오랑캐의 칭호가 붙었다 하여 살지도 않으며, 이 토지를 오랑캐의 칭호가 붙었다 하여 거기서 수확되는 곡식으로는 밥도 지어 먹지 않을 것인지 나는 모르겠소.

나는 예전에 멀리 중국을 유람했을 적에 그 노정, 숙박지, 날씨, 일시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러므로 압록강을 건너던 날부터 첫머리에서 범례를 만들어 후삼경자(後三庚子)’라 했고, 다시 스스로 해설을 붙이기를,

 

어째서 ()’라 칭했는가? 숭정 기원후라는 뜻이다. 어째서 ()’이라 했는가? 기원후 세 번째 돌아온 경자년(庚子年)이라는 뜻이다. 숭정이란 연호는 어째서 숨겼는가? 장차 압록강을 건너게 된 때문이다.”

하였소. 그러고 나서 붓을 던지고 허허 웃으며,

 

옛날에는 피리춘추(皮裏春秋)가 있더니, 지금은 곽외공양(鞹外公羊)이 되었구나.”

했었소. 이는 미상불 공양전의 문체를 구차스레 빌린 것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지요.

그러나 만약 날씨의 기록 위에다 반드시 대서특서(大書特書)하여 () 황정월(皇正月)’이라 한다면 진실로 아니되기 때문에, 불가불 말해야 할 경우에는 왕왕 강희(康熙)라 건륭(乾隆)이라 써서 그 시대를 구별했던 것인데, 도리어 역사서의 기준으로 질책한다면 어찌 황당하지 않겠소? 이는 과연 그 원고를 보지도 않고서 억지로 말을 만든 것이오. 반드시 되놈 오랑캐 황제라 배척해야만 비로소 춘추대의를 엄수하는 것이 된단 말이오?

또 만약 오랑캐 땅이라 부끄럽다고 해서 책에다 열하(熱河)’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이는 더욱 당황스러운 일이지요. 고대 중원(中原)의 제후국들이 불행히도 오랑캐에게 먹힌 적은 비단 오늘날에만 그런 것이 아니었소. 그렇다면 장차 모두 다 오랑캐로 여겨서 그 지명들을 책 이름으로 삼지 말아야 된단 말이오? () 임금은 동이(東夷) 지역 사람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 지역 사람이었소. 오늘날 춘추를 배우는 자를 따르자면 장차 순 임금과 문왕을 위하여 그 출생지를 기어이 숨겨야 한다는 말이오?

춘추란 중화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배척한 책임에는 틀림없지요. 그렇지만 공자도 일찍이 구이(九夷) 지역에 살고 싶다고 했소. 지금의 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성인이 무엇 때문에 그가 배척하는 땅에 살고 싶어 했겠소? 이와 같은 사람이 춘추를 배운다면, 장차 호전(胡傳)은 되놈 호() 자가 들었다고 폐기해 버리고 익히지 않을 것인가요? 나를 알아줄지 나를 책망할지 시비를 가려 줄 사람이 응당 있을 터요.

대저 나는 과거를 폐한 것이 자못 일렀던 까닭에 마음이 여유롭고 활달하여, 속세를 벗어나 유유자적하면서 숙원을 이루기를 바랐던 거요. 때문에 멀리로는 목은(牧隱)을 사모하고 가까이로는 노가재(老稼齋)를 본받아, 말 채찍 하나에 단출한 보따리로 만리 길을 나섰던 것이오. 다만 생각건대, 신분은 비록 백도(白徒)이지만 명색은 유생(儒生)이라, 역관도 아니요 의원도 아니어서 행동하기 불편하였고, 몰래 갔다 몰래 와도 호칭만은 가리기가 어려웠으니, 진실로 몸을 단정히 갖는 군자로서 따진다면 스스로 마음속에 부끄럽지 않은 적이 없었소.

매양 이른 새벽에 말고삐를 잡고 나서면 마음속으로 독백하기를,

 

용문(龍門)의 장유(壯遊)가 무슨 대단한 일인가? 묵자(墨子)는 조가(朝歌)에서 수레를 돌렸단 말을 듣지도 못하였는가?’

하다가, 이윽고 고운 아침 해가 붉은빛을 펼치며 요동(遼東) 벌을 가득 채우면 공중에 솟아 밝게 빛나는 탑이 아스라이 말머리를 맞아 주고, 수은빛 안개가 나무숲에 자욱하며 황금빛 기와지붕은 구름 속에 솟아났었소.

나는 이 가운데에서 왼편으로 푸른 바다를 돌고 오른편으로 태항산(太行山)을 끼고 가고 또 갔었소. 마음과 안목이 날로 새로워지니 예전의 보잘것없던 포부를 비웃게 됨과 동시에, 이 기상이 호연(浩然)해짐을 깨달았던 거요. 마침내 만리장성을 벗어나 북으로 대막(大漠)에 다다랐소. 이것이 바로 열하까지 여행하게 된 연유요.

귀국한 뒤에는 물의(物議)라곤 조금도 있지 않았으며, 도리어 나의 이 여행을 부러워하는 자까지 있었소. 산중살이가 심심하고 지루해서 묵혀 둔 원고들을 모아 몇 권의 책자를 편성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열하일기를 짓게 된 연유요.

안 본 것 없이 다 살펴보아 하나도 놓친 사물이 없다고 스스로 여겼으나, 문자로 옮겨 놓은 것은 구우일모(九牛一毛)에 지나지 않고, 필치도 쇠퇴하고 말았소. 잠이 깬 뒤 베개 고이고 읽어 보니, 당초 여행에 나설 때의 마음과는 너무도 멀어졌소.

지난 발자취를 돌이켜 생각하면 구름도 물도 모두 사라지고, 이따금 낡은 초고를 펴 보면 우수마발(牛溲馬勃)이 함께 나타나니, 스스로 즐길 것도 못 되는데 누가 다시 보아 주겠소? 더욱이 중간에는 우환과 초상으로 간수해 둘 겨를조차 없었고, 또 벼슬길에 나선 이후로는 더욱더 유실되어, 겨우 그 이름만 남아 있었으니 도올(檮杌)과 같은 가증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소. 이것이 이른바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라는 거지요.

기나긴 20년 사이에 초록(蕉鹿)의 갈무리를 한바탕의 꿈으로 치부한 지 오래였는데, 시호(市虎)의 선전이 갑자기 또 날개를 달았으니 이 어찌 지나친 일이 아니겠소?

그대는 나를 대신하여 지금 춘추를 배우는 이들에게 말 좀 해 주지 않겠소? 왜 나를 이렇게 책하지 않느냐고 말이오.

 

그대가 전번에 유람한 곳은 바로 삼대(三代) 이래의 성스럽고 영명하신 제왕들과 한() · () · () · ()이 영토로 삼은 땅이오. 지금 비록 불행하여 되놈들이 차지하기는 했지만, 그 성곽과 궁실과 인민들은 물론 그대로 남아 있고, 정덕(正德) · 이용(利用) · 후생(厚生)의 도구들도 물론 그대로 있고, () · () · () · ()의 명문 씨족들도 물론 그대로 있고, () · () · 민건(閩建)의 학문도 물론 사라지지 않았소. 저 되놈들이 진실로 중국이란 땅을 손아귀에 집어넣으면 이만큼 이익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빼앗아 차지하기에 이른 것이오.

그렇다면 그대는 왜, 예로부터 본래 지녀 온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 중국의 존숭할 만한 관례와 업적을 모조리 터득해 가지고, 돌아와서는 책자로 모조리 저술하여 온 나라에 쓰이게 하지 않소? 그대는 이런 일은 아니 하고서 한갓 피폐(皮幣)의 사신만 따라다녔단 말이오? 지금 그 기술한 내용은 모두 잡다하고 실속 없는 말로서, 한때 방랑한 자취에 불과하니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남에게 자랑할 만하다 한단 말이오? 단지 스스로 의지만 상실하고 덕만 손상할 따름이오.”

이런다면 듣는 사람이 어찌 등골이 써늘하고 입이 벌어지며 부끄럼을 못견디어 죽고 싶지 않겠소?

제후들을 끌어다가 다른 제후를 쳤기 때문에 춘추가 지어진 것인데, 지금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춘추를 끌어다가 남을 욕하는 자료로 삼는다면 되겠소? 춘추가 어찌 겉으로 꾸민 언동만으로 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소이다.

 

 

[C-001]이중존에게 답함 : 연암이 안의현에서 되놈의 의복을 입고 백성들을 대한다.胡服臨民는 설이 서울로 전파되자, 여기에 가세하여 연암과 경쟁 관계에 있던 문인 유한준(兪漢雋) 열하일기의 문체로 인해 연암이 정조(正祖)의 견책을 받은 것을 기화로 열하일기에 대해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虜號之稿라고 비방하는 여론을 선동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1798년에서 1799년 사이에 호복임민(胡服臨民)’ 노호지고(虜號之稿)’라는 비방이 번갈아 일어나 큰일이 날 뻔했으나, 연암은 남들에게 해명한 적이 없었으며 오직 이재성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만 그 같은 비방을 초래한 연유를 밝혔을 뿐이라고 한다. 過庭錄 卷2

[D-001]현자(賢者)에게 …… 한다면 : 신당서(新唐書) 2 태종본기(太宗本紀)의 찬()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은 항상 현자(賢者)에게 완전무결함을 요구하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D-002]선정(先正) : 선대(先代)의 어진 신하를 이른다. 효종실록 즉위년 8 23일 조에 응교(應敎) 조빈(趙贇)이 정축년(1637) 이래 종묘의 축문(祝文)과 조신(朝臣)의 고신(告身)에 연월(年月)만 쓰고 일절 연호를 쓰지 않은 관례를 들어 인조(仁祖)의 옥책(玉冊)과 지석(誌石)에도 연호를 쓰지 말도록 상소하자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이를 지지하는 의견을 올린 사실을 두고 말한 듯하다.

[D-003]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 숭정은 명 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1628년부터 1644년까지 사용되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존명배청(尊明排淸) 사상에 따라 명 나라가 망한 뒤에도 청 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숭정이란 연호를 그대로 썼다.

[D-004]다시 …… 하였소 :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의 서문(序文)에 나오는 대목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의 기사에 대해 자문자답(自問自答)의 형식으로 해설한 것이 한 특징인데, 연암은 그 독특한 문체를 본떠서, 열하일기 도강록의 첫머리에 후삼경자(後三庚子)”라고 연도를 기록한 이유를 해설하였다.

[D-005]피리춘추(皮裏春秋) : 속으로 감춘 춘추라는 말로,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 평론(評論)하는 것을 이른다. () 나라 강제(康帝)의 장인인 저보(褚裒)가 젊은 시절에 오만하고 고상한 기풍을 지녀 속에 춘추를 감추었다.”는 칭송을 들었다고 한다. 晉書 卷93 褚裒傳

[D-006]곽외공양(鞹外公羊) : 거죽으로 드러난 공양전이란 말로, 공양전의 문체를 본뜬 것을 스스로 풍자한 것이다.

[D-007]() 황정월(皇正月) : 춘추에서는 노()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일 년의 첫 달을 반드시 () 왕정월(王正月)’이라 적어 주() 나라 왕실의 역법(曆法)을 따르고 있음을 나타냈다. 연암이 중국 여행을 한 조선 후기 당시는 청 나라 황실의 역법을 따랐으므로, 춘추의 필법을 준수하자면 () 황정월(皇正月)’이라 적어야 한다는 뜻이다.

[D-008]강희(康熙) : 청 나라 성조(聖祖)의 연호로 1662년부터 1722년까지 사용되었다.

[D-009]건륭(乾隆) : 청 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1736년부터 1795년까지 사용되었다.

[D-010]() 임금은 …… 사람이었소 : 맹자 이루 하(離婁下) 순 임금은 저풍(諸馮)에서 태어나서 부하(負夏)로 옮겨 갔다가 명조(鳴條)에서 돌아가셨으니 동이(東夷) 지역 사람이다. 문왕은 기주(岐周)에서 태어나서 필영(畢郢)에서 돌아가셨으니 서이(西夷) 지역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D-011]공자도 …… 했소 : 논어 자한(子罕), 공자가 구이(九夷) 지역에 살고 싶다고 하자 어떤 이가 누추한 곳에 어떻게 사시렵니까?” 물었다. 이에 공자가 군자가 살게 된다면 무엇이 누추하겠는가.” 하였다. 구이는 동이(東夷)를 가리킨다. 동이에 9종이 있으므로 구이라고 한다.

[D-012]지금의 …… 사람이라면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서 지금의 이른바 훌륭한 신하란 부국강병(富國强兵)만 추구하고 임금이 왕도(王道)와 인정(仁政)을 지향하게 하지 않으니 옛날의 이른바 백성을 해치는 도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와 같이 지금의 도를 따르고 지금의 습속을 고치지 않으면, 비록 천하를 준들 하루도 편히 지내지 못할 것이다.由今之道 無變今之俗 雖與之天下 不能一朝居也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맹자의 원래 문맥에서 지금의 도는 패도(覇道) 정치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시대착오적인 존명배청(尊明排淸) 사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D-013]호전(胡傳) : () 나라 때 호안국(胡安國 : 1074~1138)이 지은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을 말한다. 좌전(左傳) · 공양전(公羊傳) · 곡량전(穀梁傳)과 함께 춘추 4()의 하나로, () · ()의 주자학파에 의해 존숭되었다.

[D-014]나를 …… 터요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공자가 나를 알아줄 것도 오직 춘추이며 나를 책망할 것도 오직 춘추로다.”라고 한 말을 이용하여, 열하일기에 대해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라고 한 비방이 근거 없음을 주장한 것이다.

[D-015]목은(牧隱) : 이색(李穡 : 1328~1396)의 호이다. 이색은 1348(충목왕 4)에 원() 나라의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1353년에는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 나라에 가는 등 여러 차례 원 나라를 드나들며 그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D-016]노가재(老稼齋) : 김창업(金昌業 : 1658~1721)의 호이다. 김창업은 1712(숙종 38)에 큰형 김창집(金昌集)이 사은사로 청 나라에 갈 때 따라갔으며 연행록(燕行錄)을 남겼다.

[D-017]백도(白徒) : 벼슬하지 못한 유생이나, 훈련을 받지 못한 채 징집된 병졸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썼다. 연암은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는 자제군관(子弟軍官)이란 신분으로 연행에 참여하였다.

[D-018]용문(龍門)의 장유(壯遊) : 용문은 사마천(司馬遷)을 말한다. 그의 고향이 섬서성(陝西省) 한성현(韓城縣) 부근에 있으며 등용문(登龍門)의 고사로 유명한 용문이었다. 사마천은 20세부터 수년간 역사 유적을 탐방하기 위한 큰 뜻을 품고 오늘날의 호북(湖北) · 호남(湖南) · 절강(浙江) · 산동(山東) · 안휘(安徽) · 하남(河南) 등 각 성()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들을 여행하였다. 史記 卷70 太史公自序

[D-019]묵자(墨子) ……  : 증자(曾子)는 지극한 효자였기 때문에 승모(勝母)라는 마을의 이름을 꺼려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고, 묵자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가(朝歌)라는 고을의 이름을 꺼려 그곳에서 수레를 돌렸다고 한다. 淮南子 卷16 說山訓 소신을 지키기 위해 사소한 행동도 근신한 경우를 말한다. 또한 조가는 은() 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이 세운 도읍지이기도 하다. 이 대목은 춘추대의를 엄격히 지키자면 오랑캐 황제가 통치하는 중국 땅을 아예 여행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라는 취지로 말한 것이다.

[D-020]공중에 ……  : 요동의 백탑(白塔)을 말한다. 이 탑은 구요양(舊遼陽) 교외에 있는 13층 벽돌탑으로, () 나라 이후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만주(滿洲) 동부에서 가장 크고 높은 탑이다. 열하일기 도강록에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가 있다.

[D-021]수은빛 …… 자욱하며 : 열하일기 성경잡지(盛京雜識) 7 13일자 기사에, 새벽의 짙은 안개로 인해 요동 벌이 수은 바다水銀海처럼 보인다고 묘사하였다.

[D-022]태항산(太行山) :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 사이에 뻗어 있는 거대한 산맥이다.

[D-023]대막(大漠) : 내몽골과 외몽골의 경계를 이루는 고비사막을 말한다.

[D-024]이것이 …… 연유요 : 원문은 此其所以爲熱河之游也인데, 일부 이본들에  자가  자로 되어 있으나 그 아래의 대응하는 구절 此其所以爲熱河日記也로 미루어  자가 옳다고 판단된다.

[D-025]산중살이가 …… 편성하였으니 : 중국 여행을 마친 연암은 황해도 금천군 연암협(燕巖峽)으로 되돌아가 열하일기의 저술에 전념했다. 현재 전하는 열하일기는 도강록 이하 모두 2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D-026] …… 살펴보아 : 원문은 燃犀之觀인데, () 나라 때 온교(溫嶠)가 무소뿔을 태워 물속을 비추어 보았더니 괴물들이 모조리 정체를 드러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異苑 卷7

[D-027]우수마발(牛溲馬勃) : 우수는 질경이車前草의 별명이고 마발은 담자균류(擔子菌類)에 속하는 식물로, 매우 흔해 빠지고 값싼 약재이다. 그러나 훌륭한 의사는 이런 것들도 빠뜨리지 않고 함께 거두어 두었다가 나중에 활용하는 법이다. 韓愈 進學解 여기서는 열하일기가 별 쓸모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다.

[D-028]우환과 초상 : 1787년 처 전주 이씨(全州李氏)와 형 박희원(朴喜源)이 사망하고, 그 이듬해에는 일가족이 전염병에 걸려 맏며느리 덕수 이씨(德水李氏)가 사망하고 맏아들 종의(宗儀)도 죽다 살아났다. 過庭錄 卷1

[D-029]도올(檮杌) …… 말았소 : 도올은 전설 속의 가증스러운 악수(惡獸)인데, () 나라에서 악을 징계하기 위해 이로써 국사(國史)의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초 나라의 국사인 도올 역시 이름만 전하고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D-030]초록(蕉鹿) …… 오래였는데 : () 나라 사람이 들에서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사슴을 때려잡은 다음 아무도 보지 못하게 땔나무로 덮어 갈무리를 해 두었는데, 나중에 갈무리 해 둔 곳을 찾지 못하자 꿈을 꾼 것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찾지 않았다고 한다. 列子 周穆王》 《열하일기를 쓴 사실조차 잊어버렸다는 뜻이다.

[D-031]시호(市虎)의 선전 : 시장에는 호랑이가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두 사람이 말할 때에는 믿지 않다가 세 사람이 말하게 되면 믿게 된다는 것이니, 참소하는 자가 많으면 믿게 된다는 뜻이다. 韓非子 內儲說上

[D-032]삼대(三代) : 중국 역사에서 이상적인 시대로 숭상하는 하() · () · ()의 세 왕조 시대를 가리킨다.

[D-033]정덕(正德) · 이용(利用) · 후생(厚生)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말로, 삼사(三事)라고 하여 국정(國政)의 세 가지 중대사를 이른다. 정덕은 백성들의 도덕을 바르게 하는 것, 이용은 백성들이 일상생활에서 기구나 재화를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 후생은 옷과 음식 등으로 백성들의 복지를 돌보는 것을 뜻한다.

[D-034]() …… 학문 : 관은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 민건(閩建)은 복건(福建)의 주희(朱熹)를 지칭한 것으로, 송대 성리학을 통칭한 것이다.

[D-035]그대가 …… 것이오 : 열하일기 일신수필(馹汛隨筆) 7 15일자에서 중국 제일 장관론(中國第一壯觀論)을 피력하면서 한 말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다. 연암집 1 회우록서(會友錄序), 7 북학의서(北學議序)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D-036]피폐(皮幣)의 사신 :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따라 청 나라에 예물을 바치러 가는 조공(朝貢) 사신을 말한다. 피폐는 가죽과 비단 같은 예물이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 옛날 태왕(大王 : 고공단보古公亶父)이 빈()에 계실 제 적인(狄人)이 침략하거늘, 가죽과 비단으로 그들을 섬겼을지라도 침략을 면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D-037]제후들을 …… 것인데 : 맹자 고자 하(告子下) 오패(五覇)란 제후들을 끌어다가 다른 제후를 친 자들이다. 그러므로 오패란 삼왕(三王)의 죄인이다.”라고 하였다. 제 환공(齊桓公) 등 춘추(春秋) 시대의 5대 패자(覇者)들은 주() 나라 천자의 명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정벌을 일삼았으므로, 춘추는 이를 징계하기 위해 저술되었다는 뜻이다.

[D-038]어찌 …… 것인지 : 원문은 豈可以聲音笑貌爲哉인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오는 구절이다. “공손함과 검소함은 어찌 부드러운 말씨와 웃는 낯빛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춘추대의가 가식적인 언동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인용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진정(賑政)에 대해 순찰사(巡察使)에게 답함

 

 

편지로 지시하신 일은 받들어 잘 살폈습니다. 무릇 구휼정책에 있어서 가장 공명정대한 원칙으로는 공진(公賑)보다 나은 것이 없지만, 공곡(公穀 관곡)이 나뉘어 사진(私賑)으로 되는 것이 근자의 관례입니다. 그러나 공진과 사진, 명분과 실상 사이에는 모두 크게 황공하고 크게 불편한 점들이 남아 있습니다.

굶주리는 가구를 선정할 때 아무리 줄인다고 해도 매번 부풀린다는 의심을 받게 되고, 목초(牧草)를 부지런히 구했을 뿐인데 도리어 남상(濫觴)의 혐의를 받게 됩니다. 이 때문에 굶주린 가구 숫자가 많이 줄어들어 굶어 죽어 가는 자를 구휼할 수 없게 되고, 괵량(斛量)을 줄여도 이를 잘 살피지 못해 곡식의 품질이 좋기 어려우니, 이것이 공진을 시행할 때 고려해야 할 점입니다.

명색은 사진이라 해도 실상은 공곡에 의지하게 되면, 의심과 염려가 가일층 깊어지는 동시에 관리와 단속도 더욱 까다로울 것이니, 대개 명분과 실상이 맞지 않고 공과 사는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진을 급작스레 논의할 수는 없는 점입니다.

이른바 스스로 비축하여 급한 일을 막는다.’는 것은 더욱 성실치 못한 것이 되니, 만약 말을 세내고 소를 고용하여 자기 농장의 곡식을 실어온 것이 아니라면 장차 어느 곳에서 그 많은 곡식을 스스로 비축할 수 있겠습니까? 앞서 입본(立本)하고 남은 액수를 취한 것도 흔히 담당자에게 발각되어 수의(繡衣 암행어사)나 도백(道伯 관찰사)의 조사가 물밀듯이 먼저 미쳐 오니 어느 누가 감히 범하겠습니까? 원납전(願納錢)을 도로 돌려줄 것과 권분(勸分)을 엄금할 것은 신구(新舊)의 법령이 명백히 선포되어 있으나, 이 두어 가지 방법을 제외하고는 곡식을 갖출 길이 없으니 그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연름(捐廩)하는 한 가지 일만이 가장 폐단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관에서 쓰는 것이라 명분도 바를 뿐더러 본시 이 땅에서 나온 것이니, 이 땅에서 나온 것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바로 내 직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마음에 개운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남 보기에는 명예를 구하는 것같이 되고, 물자를 실로 다 나누어 주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지방관이 된 자는 안팎 곱사등이가 한 몸에 모인 형편입니다. 지난번에 여러 고을에 감결(甘結)을 돌려서 물으신 데 대해, 어디로 정할지 몰라 우선 중론을 따르겠다고 아뢴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찮은 이 몸은 절하(節下 순찰사)의 처분을 바랄 뿐입니다만, 그래도 역시 그 일이 크게 잘 풀리리라고는 감히 스스로 보증하지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심읍(尤甚邑)으로 등급을 분류한 곳을 지차읍(之次邑)으로 옮겨다 놓고, 만이(晩移)를 표재(俵災) 대상에서 억지로 절반만 인정한 것이 지금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백성 구제에 있어서는 우심읍으로 시행하고, 굶주린 가구에 대한 구호 물자는 넉넉한 쪽으로 나누어 지급하라.’고 신신당부하는 편지를 하사하시니 이를 금석(金石)과 같이 받들고 있습니다만, 어찌 마음속으로 요량한 바야 없겠습니까?

그러기에 이미 지난여름 유월 초열흘께부터 가만히 비상 대비책을 마련하여, 영문(營門)에서 수고스럽게 공곡을 분배하도록 괴롭히지 않으려고 했으니 이것이 본래 의도한 바였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오래도록 서성대며 확실히 정규(定規)를 마련하지 못한 것은, 바로 굶주린 가구의 수효를 우선 미리 예측하기 어렵고, 정조(正租)를 판매하는 일을 아직도 손을 대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대저 기근을 구제하는 정책에서 굶주린 가구를 선정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으니, 이 어찌 이교(吏校)나 면강(面綱)이 가가호호 방문한다 하여 그 실정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는 자지 않으면 우는데, 무슨 말을 할 줄 안다고 그 사연을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의지가 있다고 그 소원을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 소리만 듣고도 젖을 줄 줄 아는 것은 오직 자애로운 어미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가슴만 쓰다듬어도 울음을 뚝 그치게 하니, 이는 반드시 먹여 줄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따스하게 쓰다듬고 부드럽게 다독거리는 것은 그로써 체득하자는 것이요, 가만히 기다리고 몰래 듣는 것은 그로써 때를 맞추자는 것이니, 이 어찌 이웃집 사람이나 길 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지금 영문에 서약을 올리노니, 굶주린 가구 선정을 물을 필요도 없고, 공곡(公穀)이라 이름한 것은 줄 필요도 없고, 열흘마다 으레 보고하는 일을 요구할 필요도 없고, 구휼을 감시하는 감영의 비장(裨將)을 보낼 필요도 없고, 사또가 순찰할 때 왕림하실 필요도 없고, 황해도의 좁쌀을 나누어 줄 필요도 없습니다. 백성을 따뜻하게 사랑하는 이 늙은 수령에게 이 4000호의 많은 남녀를 맡기고 잊어 주신다면, 노둔함을 스스로 채찍질하여 위로는 백성에 대한 근심을 분담하게 하신 임금의 지극한 뜻과 아래로는 먹여 주기를 기다리는 민심을 거의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구휼사업이 효과가 없고 정상적인 법식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생각하건대 환히 비추어 보시는 사또의 눈을 벗어날 길이 없을 터이니, 또한 어찌 감히 제멋대로 옛날의 정분만 믿고서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사진(私賑)으로 정하오니, 뒤에 기록한 쪽지도 아울러 보아 주심이 어떠하옵니까?

 

 

[C-001]진정(賑政) …… 답함 : 연암은 충청도 면천(沔川)의 군수로 재임 중이던 1799년 봄 흉년으로 인해 구휼 정책을 실시했는데, 역시 경상도 안의 고을에서 이미 행했던 예에 따라 사진(私賑)으로 시행하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3 이 글은 당시 충청 감사 이태영(李泰永)이 면천군에 공진(公賑)을 시행하려고 하자 이를 사양하고 사진을 시행하겠노라고 하면서 감사에게 허락을 청한 편지이다.

[D-001]목초(牧草) …… 뿐인데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서 맹자가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한 제() 나라 대부 공거심(孔距心)에게 지금 남에게서 소와 양을 받아 대신해서 기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목지(牧地)와 목초(牧草)를 구할 것이다. 목지와 목초를 구하나 얻지 못하면 소와 양을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소와 양이 죽어 가는 것을 서서 볼 것인가?” 하고 질책하니, 공거심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쳤다고 한다. 여기서는 백성들에 대한 구휼 사업을 부지런히 했다는 뜻이다.

[D-002]남상(濫觴)의 혐의 : 남상은 술잔에 넘칠 정도의 적은 물, 또는 술잔을 띄울 정도의 적은 물이라는 뜻이다. 공자가 화려한 복장을 하고 오만한 낯빛을 한 제자 자로(子路)를 나무라면서 양자강(揚子江)도 그 시원(始源)은 남상에 불과하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荀子 子道 여기서는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한다는 혐의를 뜻한다.

[D-003]괵량(斛量) …… 어려우니 : 로 곡식의 분량을 재는 것을 괵량이라 한다. 진휼미(賑恤米)를 나누어 줄 때 알곡만이 아니라 껍질이나 쭉정이와 겨 따위를 섞어서 괵량을 하는 경우를 지적한 것이다. 牧民心書 賑荒 設施

[D-004]이른바 …… 되니 : 수령이 흉년에 대비하여 스스로 비축한 곡식을 자비곡(自備穀)이라 부른다. 목민심서에서는 수령이 자비곡으로써 사진을 실시했다고 허위 과장 보고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수령에게 어찌 스스로 비축한 곡식이 있겠는가? 만약 제 집 식량을 운반해 오거나 자기 농장의 곡식을 실어 온 것이 아니라면, 모두 이 고을에서 나온 것이다. 진짜로 월봉(月俸)에서 덜어 냈다 해도 자비곡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부족한데, 하물며 교묘히 스스로 요령껏 환곡을 매매하고 함부로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서는 외람되어 자비곡이라 일컬어 임금을 속이니, 어찌 큰 죄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牧民心書 賑荒 竣事

[D-005]앞서 ……  : 입본은 장부상의 환곡의 숫자를 채우는 것을 말한다. 환곡을 운영하면서 지역별 또는 계절별 곡가(穀價) 차이를 이용하여, 쌀값이 비싼 지역에, 또는 쌀값이 비쌀 때 환곡을 팔아 돈으로 만들어 두었다가, 그 돈의 일부만으로써 쌀값이 싼 지역에서, 또는 쌀값이 쌀 때 쌀을 도로 사들여 환곡의 숫자를 채우고, 남는 돈을 딴 데 돌려쓰는 수법을 말한다.

[D-006]권분(勸分) : 수령이 기민 구제의 명목으로 자기 관하의 부자들에게 곡식을 바치도록 권유하는 것을 이른다.

[D-007]연름(捐廩) : 공적인 일을 위하여 관리들이 녹봉의 일부를 덜어 내어서 보태는 일을 이른다.

[D-008]감결(甘結) :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내리는 공문을 이른다.

[D-009]만이(晩移) : 만이앙(晩移秧)이라고도 하며 모내기가 늦어 재해를 입은 경우를 말한다.

[D-010]우심읍(尤甚邑)으로 …… 때문입니다 : 흉년을 만난 고을의 원이 감사에게 재해(災害)를 보고하면, 감사는 재해의 정도가 심한 순서대로 각 고을을 우심(尤甚) · 지차(之次) · 초실(稍實)로 등급을 판정한 뒤, 조정에 보고하여 조세 감면 대상으로 배정받은 급재결수(給災結數)를 다시 각 고을에 할당하는데 이를 표재(俵災)라 한다. 고을 원이 감사에게 보고할 때 흔히 재해를 과장하기 때문에 감사는 이를 감안하여 등급을 낮추어 판정하고 급재결수를 삭감하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연암은 안의현의 극심한 재해를 실상대로 보고했으나, 감사가 우심 판정 대신 지차로 강등하고 만이를 표재 대상에서 절반 삭감하는 조치를 내렸던 듯하다.

[D-011]정조(正租) : 정규의 조세로 받은 벼를 이른다.

[D-012]면강(面綱) : 면임(面任)과 집강(執綱)을 이른다. 지금의 면장과 이장에 해당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진정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추수하는 날에 살펴본바 굶주린 가구가 이웃 고을보다 조금 적었으니, 진실로 처음에는 생각조차 못 했던 일이었습니다. 굶주린 가구를 선정할 즈음에 이르자 그중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가을에 이미 보리를 파종했으니 색갈이를 받아 농사짓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고, 나무를 해다 파는 자들은 짚신 삼는 자도 있습니다.” 하고, 길쌈하는 자는 삯방아 찧는 자도 있습니다.” 하며 사양하기에, 소원에 따라 책자를 만드니 심히 다투는 일이 없었습니다. 대개 지난가을 서리가 아주 늦게 내려 대신 파종한 곡식도 꽤 많이 그 결실을 먹을 수 있었고, 타작을 끝낸 뒤로도 일기가 매우 온난하여 모두 다 가을갈이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럭저럭 지낼 뿐 아니라 앞으로 살아 나가는 것도 믿을 데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소를 사육하는 집이나 술장사로 살아가는 부류들은 애당초 기록에 넣지 않았으므로, 지금 하문(下問)하시면서 굶주린 가구를 선정한 것이 너무 깐깐하지 않느냐고 도리어 염려하신 것도 당연한 일로 생각됩니다.

오늘에야 두 번째 순회하여 진곡(賑穀)을 나누어 주었는데, 아직 억울하게 누락되었다고 와서 호소하는 자가 없으니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경계(庚癸)의 외침이 날마다 관청 뜰에 가득 차서, 장차 간후(乾餱)의 허물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한탄스러운 것은 위로는 국가의 정책을 빛나게 함이 없고 아래로는 힘들게 농사일을 하지도 않으며, 풍년 들어 즐거운 해에도 태평시대를 글로써 화려하게 꾸미지도 못하면서, 한번 흉년만 만났다 하면 자기 생계만 도모하는 자들이 어찌 그리 많은가 하는 점입니다.

백 가마니의 곡식을 보조해 주신다니 어찌 극진하신 염려에 감격하지 않으오리까? 다만 생각하건대 전번에 마련한 것이 풍족하다고 말할 것은 못 되지만, 지난번에 하감(下鑑)하신 편지의 뒤에 기록한 정도면 될 듯합니다. 앞으로 추가로 들 것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이 숫자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듯합니다. 관청 뜰 앞의 조제(租堤)가 비록 상() 나라 도읍의 조제(糟堤)에는 못 미치지만 오히려 망오리(望五里) 정도는 됨직하니, 망오리는 바로 망우리(忘憂里)입니다.

뿐만 아니라 벼를 이무(移貿)하고 남은 밑천이 아직도 오백 냥이 있다는 것은 아전이나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비축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유물도 아닌, 바로 관에서 사용하는 것인즉, 호칭은 비록 다를망정 백성에게서 나온 것은 마찬가지이니 어느 것인들 공곡(公穀)이 아니겠습니까? ‘비용을 절약하여 비축이 있다 한다면 옳거니와, 만약 제 주머니 돈과 같이 보면서 스스로 비축한 것이 있는 양한다면 그런 조치를 취한 본뜻이 전혀 아닙니다. 하물며 분수에 넘치는 구휼 물자를 추가로 많이 주어 이미 마음이 안정된 백성들이 구차스럽게 요행을 바라도록 한단 말입니까? 전날 체가(帖加)를 돌려보낸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백 가마니의 곡식을 보조해 주신다는 조치를 특별히 중지하여 이 몸의 하찮은 포부나마 펴게 함으로써 직분을 다할 수 있게 함이 어떠하신지요?

 

 

[D-001]책자를 만드니 : 굶주린 가구를 선정하여 그 명단을 책자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D-002]경계(庚癸)의 외침 : 본디 군대의 은어(隱語)로 군량(軍糧)을 달라는 뜻이다. ()은 서방(西方)으로, 곡식을 주관하고, ()는 북방으로, 물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春秋左氏傳 哀公 13 여기서는 굶주린 백성들이 양식을 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이른다.

[D-003]간후(乾餱)의 허물 : 간후는 말린 밥을 말하며, 하찮은 먹을 것 때문에 생긴 허물을 이른다. 시경 소아(小雅) 벌목(伐木), “사람들이 덕을 잃는 것은 말린 밥 때문에 생긴 허물이다.民之失德 乾餱以愆 하였다. 여기서는 진곡을 서로 먼저 타려고 하다가 친한 사람들끼리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말한다.

[D-004]관청 …… 미치지만 : 조제(租堤)는 벼가 둑처럼 많이 쌓였다는 뜻이다. 조제(糟堤)는 술지게미가 둑처럼 많이 쌓였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조구(糟丘)라고도 한다. 태공육도(太公六韜)에 의하면, () 나라의 폭군 주()는 도읍에 술로 채운 못酒池을 만들고 술지게미로 된 언덕糟丘을 따라 배를 돌리니 소처럼 몸을 수그려 술을 마시는 자가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는 하() 나라의 폭군 걸()의 고사와 흡사한데, 걸 역시 술로 못을 만드니 배가 다닐 만했으며 술지게미로 된 언덕이 족히 십 리까지 바라다보였다.糟丘足以望十里고 한다. 韓詩外傳 卷4

[D-005]망오리는 바로 망우리(忘憂里)입니다 : 발음이 비슷한 어구(語句)를 이용한 해학적 표현이다. 기민 구제를 위한 벼가 오 리나 길게 쌓여 있으니 곧 근심을 잊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D-006]이무(移貿) : 지역별 곡가(穀價) 차이를 이용하여 환곡을 사고 팔아 차액을 챙기는 것을 말한다.

[D-007]체가(帖加) : 벼슬을 주면서 정식 발령은 내지 않고 임명장인 체지(帖紙)만 주는 체가자(帖加資)의 준말로, 공명첩(空名帖)을 이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올림

 

 

지난번에 본군 범천면(泛川面) 주민 김필군(金必軍)이 바친 책자를 영문(營門)에 보고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써 병영(兵營)이 노발대발하여 심지어 그 죄를 형리(刑吏)에게 전가한 일까지 있었으니 너무도 불안스럽습니다.

김가는 본시 천주교도의 한 사람으로 지난겨울 동안에 집을 비우고 도망 중이었습니다. 금년 9월 중에 그자의 호()가 속한 오가통(五家統) 내의 주민 중에서 김가가 도로 제집에서 지내고 있다고 고발했으므로, 우선 늦춰 주어 그가 안착하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색갈이를 독촉하는 창졸(倉卒)을 시켜 부르면서 패자(牌子)도 쓰지 않고 관차(官差)도 시키지 않은 것은, 그 뜻이 실로 알 듯 모를 듯 긴가민가하는 사이에 처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자가 과연 크게 의구심을 내어 즉시 와서 현신(現身)하고, 소매 속에 든 책자를 바치며 아울러 소지(所志)까지 올려, 자수하여 죄를 면하는 거리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자는 본시 어리석고 무식한 자라 책자가 있건 없건 본시 염려할 것이 없으며, 더구나 제가 이미 자진해서 바친 이상 기왕지사를 추궁하여 바야흐로 고쳐먹으려는 마음을 저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장날을 골라 공개리에 불에 태워 버리라는 뜻으로 그 소지에 제사(題辭)하고는, 자못 위로하고 격려하는 뜻을 보이고서 즉시 물러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 후 병영의 하리(下吏)가 지나는 길에 본군 이청(吏廳)을 들러 경내에 천주교도가 있는지 없는지 자세히 물었으므로, 여러 아전들이 말하기를,

 

전날 천주교를 배우고 익히던 자들이 저절로 사라져 모두 평민이 되었는데, 그중에 김필군이란 자가 가장 교화하기 어려웠으나 일전에 또 그 책자를 자진하여 바쳤으니, 이제는 이 고을 안에 다시 의심할 만한 일이 없소.”

하자, 병영의 하리는 여러 고을을 정탐하러 나왔다는 뜻을 슬쩍 비치면서 바로 다른 곳으로 향해 갔으니, 본 사건의 우여곡절 또한 이와 같을 따름이었습니다.

당초 생각에는 장날을 기하여 불태워 버리게 할 작정이었는데, 그날 마침 비가 내려 백성들이 많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한 바 이런 일은 혼자 함부로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순영(巡營 감영)에 보고를 올린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여러 고을은 병영과는 군사 업무가 아니면 본래 상관이 없는데, 어찌 병영에서 졸지에 와 그 책자를 찾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 지난날 순영으로 올려 보냈다는 뜻으로 논보(論報)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영을 경유하지 아니하고 바로 순영으로 보고했다고 하면서 크게 유감의 뜻을 나타냈을 뿐더러, 다시 비밀 관문(關文)을 만들어 김가를 고을 옥에 잡아 가두고 그가 종전에 책자를 감추었던 이유를 캐고 들며, 반드시 병영에서 잡은 것으로 강요하여 조서를 꾸미게 했으니, 이게 무슨 거조입니까? 도대체 병영이 누구를 보내서 잡았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몰래 수색해 냈다면 어찌 바로 붙잡아 가지 않고 이렇게 추후에 와서 찾아가는 일이 있겠습니까?

일찍이 듣자니, 이자들은 여러 해를 두고 타일러도 듣지 아니하며, 무릇암행어사가 출도할 때나 감사가 순시할 때에 누차 잡아다가 곤장과 형장(刑杖)을 치고 옥으로 옮겨 가두곤 했으나 자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후 수령들이 그놈들을 도례(徒隸 관하인(官下人))의 천역에 충당하고 그 처자식까지 잡아다가 구속하곤 했으며, 혹은 교졸(校卒)들을 많이 풀어 불시에 집을 에워싸고 수색하여 심지어는 항아리 속까지 다 뒤지고 상자까지 다 털었어도 일찍이 종이 한 조각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깊이깊이 감춰둔 것은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데, 제가 자진해서 바치지 않았으면 어떻게 관청의 뜰에 그 물건이 굴러와 있겠습니까?

백성을 감화시켜 좋은 풍속을 만드는 방법이란 아무리 그 지극한 정성과 거짓 없음을 힘써 보여 준다 해도, 그들을 깊이 믿음으로 감동시키지 못할까 늘 걱정인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이와는 정반대로, 사납게 금단(禁斷)시킴으로써 공적을 세우고자 하여, 먼저 스스로 어리석은 백성에게 위신을 손상당한다면 그 사리와 체면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자가 과연 미혹을 깨닫고 마음을 고쳐 책자를 바치고 양민으로 돌아온다면, 국가로 보자면 평민 한 명을 얻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에 죽여 없애 이 고을에서 착한 사람들이 물들어 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옛날 형정(刑政)의 한 가지 일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 죄상을 찾아냈다면 이른바 불쌍히 여겨야지 기뻐하지 말라.’고 할 따름입니다.

지금 백성들이 천주교도가 되는 것을 금단하려고 하면서, 먼저 불성실을 내보인다면 될 법이나 한 일이겠습니까? 이른바 형리(詗吏)란 놈이 전해들은 말을 가지고 돌아가 애매모호하게 고한 것인데, 이런 짓은 으레 서리(胥吏)와 같은 하류들의 본색입니다. 그래서 자질구레하게 해명하고 드러내는 것을 실로 피하고자 하여, 죄수의 진술을 보고할 때 대략 본말을 거론했던 것입니다.

필경에 조치한 것은 당초 소지(所志)의 제사(題辭)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한 번 뜻에 맞지 않았다고 해서 대신 하리(下吏)를 잡아다 다스리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도입니까? 하관(下官 연암 자신을 가리킴)이 아무리 늙고 용렬하지만 어찌 이런 수치를 참아 가며 편안히 직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직서를 써서 올리오니 바라건대 빨리 파직을 시켜 제 분수에 안주하게 하여 주십시오. 병영에 올린 보첩(報牒 보고서)을 아울러 기록해 올리오니, 한 번 훑어보시면 당연히 그 일의 전모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 병영에 올린 보첩의 초본(草本)

 

 

상기 조항의 김필군을 비밀 관문에 의거하여 잡아와 엄밀히 조사하고 자세히 캐물은 결과, 필군의 진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몸은 농사짓는 어리석은 백성으로서 글자라곤 한 자도 모릅니다. 이 몸의 자식이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천성이 글 읽기를 좋아하더니, 급기야 조금 장성해서는 유업(儒業)을 부지런히 익혔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서울로 배우러 다니면서 과장(科場)에도 출입했습니다. 집안에 있을 땐 효도하고 공경할 뿐더러 글공부를 그치지 않았으며, 이따금 이 몸을 위하여 제가 읽은 책의 뜻도 풀어서 이야기했고, 또한 중이나 무당을 몹시 미워하여 간사하고 요망한 무리라 하였습니다.

그 아이의 평일 언동을 보면 절대로 패륜을 저지르거나 남을 속이는 일이 없어, 시골구석의 어리석은 백성으로 제 몸을 잘못 가져 제 부모를 욕보이는 자와는 너무도 달랐으므로, 이 몸이 과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마다 다 들어주고 하는 일마다 다 따랐습니다. 그가 배운 것이 반드시 좋은 책이라 생각하고 그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으며, 자식을 스승으로 삼아 오직 스스로 받들어 믿으면서 남이 몰라주는 것을 답답하게 여겼던 것일 뿐입니다.

지난 을묘년(1795) 2월 어느 날 그 자식놈이 불행히도 죽자, 이 몸은 원통하고 슬퍼 날마다 하루라도 빨리 죽어 지하에서 서로 만나기를 소원했습니다. 매일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전날의 일러 주던 말이 귓전에 역력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손때 묻은 자취라고는 단지 이 한 책뿐이었므로, 이 몸은 혹시 그 책을 유실하거나 더럽힐까 두려워서 열 겹으로 싸 간직하고, 움직이게 되면 반드시 몸에 지니고, 때로는 혹 열어 보기도 하여 그 얼굴을 다시 보는 듯이 여겼던 것입니다.

다만 이 몸은 진서(眞書 한문)를 모를 뿐 아니라 언문(諺文) 역시 한 자도 모르기 때문에 실로 그 가운데에 어떠한 요사스러운 책이 들어 있는지 몰랐는데, 이웃들이 이 몸을 지목한 것도 대개 이것 때문이었으며, 이 몸이 여러 번 심문을 겪은 것도 역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자식놈이 죽은 뒤에는 듣고 익힐 길이 없을 뿐더러 해가 오래되니 자연히 잊혀져서, 다시는 이런 일로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작년 가을에 사또께서 도임하신 이후로 천주교를 금단하는 일로 각 면에 명령을 전하기를 극히 엄중히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몸은 지레 겁에 질려 다른 곳으로 도망가 있었던 것입니다. ‘조정의 덕화가 하늘 같으시어 가급적 형벌을 가하지 않으시니 본군 경내의 이런 무리들이 차차로 미혹을 깨닫고 각기 제 생업에 안착한다더라.’ 하기에 이 몸도 역시 지난달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감추어 두었던 책자를 당장 관에 바쳐야 했으나, 비단 이 몸의 실정이 위에 아뢴 바와 같을 뿐 아니라, 사또께서 확실한 증거물로 우겨서 이것으로 죄를 더할까 두려워하면서 몰래 물이나 불에 던져 그 흔적을 없애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혹시 뒷날 사단(事端)이 다시 일어나면 진위를 밝히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이와 같이 머뭇거리던 즈음에, 과연 외창(外倉 외촌(外村)에 있는 창고)으로부터 패지(牌旨)를 전해 왔으나, 이 몸을 나오라 할 뿐 원래 책자를 바치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이 몸이 스스로 생각하기로는, 지난해에 숨어 피한 것은 죄를 벗어날 길이 없기에 지금 이 책자를 바치면 스스로 속죄가 될 듯도 하였으므로, 옛날 싸 둔 것을 끌러 보지도 아니하고 몽땅 손수 들고 창리(倉吏)와 함께 허둥지둥 달려왔습니다. 읍내에 당도하자 이 몸이 우선 사람을 찾아 소지를 쓰는 사이에 창리는 곧장 먼저 관에 고발하여 마치 제가 스스로 수색해 낸 것처럼 공을 세우려고 들었습니다. 만일 제 놈이 수색해 냈다면 끌고 가지 빈손으로 관에 고발했겠습니까? 그 거짓말로 자랑해 대는 꼴은 사또께서 이미 통촉하신 바이니 지금 다시 변명을 아니 하겠습니다.

책자의 출처는 이 몸도 그 소종래(所從來)를 알 수 없으며, 열두 권이랬자 모두 어린아이 손바닥만 하였으니, 필시 제 자식놈이 생전에 지어 만들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화폭(畵幅)에 대해서는 매번 서울에서 사 왔다고 말했는데, 처음에는 수놓은 것으로 잘못 알았다가 오래 뒤에 수놓은 것이 아니고 그림이란 것을 깨달았사온대, 200여 냥의 비싼 값으로 사 온 것은 실로 정도가 지나친 것이었지만, 당시에 이 몸은 죽은 자식을 깊이 믿어서 아무리 가산이 탕진되어도 어리석게도 아까운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식놈이 나이 어린 소치로 반드시 남에게 속임을 당했던 것일 겁니다.

더구나 그놈이 죽은 뒤로 4년 동안은 간혹 꿈에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에 관한 일로써 문답한 적도 없고, 또한 천당에 가서 있다고 아뢰지도 아니하니, 생시와 죽은 뒤가 판이하게 다르므로 기대와 소망이 전혀 어그러졌습니다. 이로써 스스로 증험해 보면, 몇 해 동안 공을 쌓은 것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오리까?”

지금 이 필군이 전에는 비록 미혹되었지만, 뉘우치고 깨달은 것이 전에 올린 소지에 이미 입증되었으며, 흉금을 드러내어 진심으로 복종하는 품이 조금도 숨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되풀이하여 심문하고 추궁하였으나, 그 진술이 전날의 진술과 한결같고, 완전히 마음을 고쳐먹은 형상이 자못 말과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삼가 엎드려 생각하건대, 조정이 이런 어리석은 백성들에 대해 본시 바라는 것은 미혹과 잘못을 깨닫게 하여 형정(刑政)을 번거로이 아니 하고도 성상의 교화에 복종하게 만들자는 것이니, 태양이 막 솟으면 도깨비가 재주를 못 부리고, 훈풍이 잠시만 불어도 얼음과 눈이 저절로 녹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필공(必恭)같이 미혹된 놈이라도 하루아침에 잘못을 느끼고 깨닫자 곧 적당한 벼슬자리로 보답해 주었고, 존창(存昌)같이 흉악한 놈도 7년 동안을 완강히 항거하고 있으나 아직도 참형(斬刑)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와 같이 감옥에 가둔 자는 특히나 먼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인 데다, 그 두려워하여 자복한 바가 앞뒤로 한결같으며 속마음과 말이 다르지 않습니다. 만일 진위를 알기 어렵고 번복할 것이 염려스럽다 하여, 기왕지사를 깊이 캐어 들어가고 기어이 소굴을 찾아내려 든다면, 비단 전날 자복한 무리들이 의구심을 일으키게 될 뿐 아니라 또한 뒷날에 감화될 무리들도 당연히 주저하는 생각을 품게 될 터입니다. 이것이 한 지방을 맡아 지키는 자의 처지로서 밤낮으로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정에서 기대하는 풍속 교화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그가 바친 책자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 자리에서 불태워 없애야 할 일이나, 그래도 마음대로 처단하기 어려웠으니, 바로 순영(巡營)에 올려 처분을 기다린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또한 더구나 순영에서 이 사건을 들어 타이르며 전후로 엄중히 경계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또한 더구나 책자를 올려 보낸 것은 지난달 17일이었고, 비밀 감결을 받아 본 것은 그로부터 열흘 조금 뒤였으니, 책자를 순영에 먼저 보냈다는 질책에 대하여는 아마도 양해하실 줄 믿습니다. 설령 통지가 올 것을 미리 짐작하고 바로 병영으로 올려 보냈더라도, 순영에서 다시 사리와 체면을 들어 질책한다면 장차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의아스럽다는 말씀을 듣고 보니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 김필군은 여전히 단단히 가두어 두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순영에서 회답한 제사도 뒤에 등서하여 첩보(牒報 서면 보고)하는 바입니다.

 

[C-001]순찰사에게 올림 : 1798년경 연암이 면천 군내의 자수한 천주교도 김필군(金必軍)을 선처한 일로 병영(兵營)과 마찰을 빚고, 당시 충청 감사 이태영(李泰永)에게 병영의 처사를 항의하며 사의를 표명한 편지이다.

[D-001]범천면(泛川面) : 지금의 당진군(唐津郡) 우강면(牛江面)이다.

[D-002]오가통(五家統) : 다섯 가구五戶를 한 단위로 묶어 통()이라 하고, 통마다 우두머리를 두어 관할 호구의 동태를 파악 · 감시하고 수상한 자를 관에 고발하게 한 제도를 말한다.

[D-003]창졸(倉卒) : 환곡 창고를 지키는 군졸을 이른다.

[D-004]패자(牌子) : 존귀한 신분의 사람이 비천한 신분의 사람에게 써서, 서리나 노복을 시켜 보내는 편지를 이른다. 패지(牌旨)라고도 한다.

[D-005]관차(官差) : 관아에서 파견하는 군뢰(軍牢)나 사령(使令)을 이른다.

[D-006]제사(題辭) : 하급 관청에서 올린 공문서나 백성들이 올린 소지(所志)에 대해 지령이나 판결을 내린 글을 말한다.

[D-007]논보(論報) : 상급 관청에 자기 의견을 달아 보고하는 것을 이른다.

[D-008]관문(關文) : 동급 또는 하급 관청에 보내는 공문서를 이른다.

[D-009]이 고을에서 ……  : 원문은 無俾易種於玆邑인데, 서경에서 따온 표현이다. 반경 중(盤庚中) 이 새로운 도읍으로 악의 씨앗이 옮겨 가지 않도록 하리라.無俾易種于玆新邑라고 하였다.

[D-010]불쌍히 …… 말라 : () 나라의 대부 맹씨(孟氏)가 증자(曾子)의 제자 양부(陽膚)를 법관으로 임명하니 양부가 증자에게 자문을 구하자, 증자는 윗사람이 도리를 잃어 백성들이 이반된 지가 오래되었다. 만일 백성들의 죄상을 찾아냈다면 불쌍히 여겨야지 기뻐하지 말라.” 하였다. 論語 子張

[D-011]형리(詗吏) : 염탐하러 다니는 아전을 이른다.

[D-012]가급적 …… 않으시니 : 원문은 刑期無刑인데,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말로, 형벌의 목적은 형벌을 쓰지 않아도 되게 하는 데에 있다는 뜻이다.

[D-013]필공(必恭) : 최필공(崔必恭 : 1745~1801)을 이른다. 그는 혜민서(惠民署)의 의원(醫員)으로 1790년 천주교에 입교했다가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배교(背敎)한 뒤 관서(關西)의 심약(審藥)으로 차송(差送)되었다. 그러나 다시 천주교를 믿다가 1799년 체포되었으며,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처형되었다.

[D-014]존창(存昌) : 이존창(李存昌 : 1759~1801)을 이른다. 그는 본래 충청도의 관교(官校)로서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 등에게서 천주교를 배웠다고 한다. 충청도 내포(內浦) 일대에서 천주교의 지도적 인물로 활동하다가 신해박해 때 배교했다. 그러나 다시 활발한 전도 활동을 벌이다가 1791년 체포되었으나 배교를 서약하고 풀려났으며, 그 뒤 전도 활동을 재개하다가 1795년 다시 체포되어 감영에 구금되었다. 1797년 정조(正祖)는 이존창이 개과천선하면 방면하도록 명하였다. 1799년 이존창은 충청 감사 이태영에게 배교를 서약하고 석방되어, 연금(軟禁) 생활을 하면서 장교(將校)로 복무하던 중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다. 한국 초기 천주교사에서 그는 충청도 지역에 처음 복음을 전파한 내포의 사도(使徒)’로 추앙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답함

 

 

병영의 취지는 알기 어렵지 않았으므로, 그 감결의 사연에 의거하여 공초(供招 범인의 진술)를 받으면서 신신당부하며 타일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자(김필군(金必軍))는 제가 자수한 본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도리어 의구심을 내어, 제 딴은 이렇게 공초를 올리고 보면 영원히 해명하기 어려운 진짜 증거들이 된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보첩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자신이 한 쪽을 갖겠다고 청하였습니다. 그 스스로 후일을 염려하는 것이 이와 같이 심각하고 절실한데, 관에서 도리어 불성실을 보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병영에서 유감을 품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사소한 일이라 시비를 가릴 가치도 없지만, 풍속 교화에 중대한 관건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세상의 도의를 위하여 한 번 공언(公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예로부터 이단(異端)이란 그 시초에는 어찌 자처하여 사학(邪學)이 된 적이 있었겠습니까? 백성은 천부적인 양심이 있어 선행을 즐기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누구나 다 있는데, 오직 가리기를 정확히 못 하고 분변하기를 일찍 못 한 까닭으로, 인의(仁義)가 살짝 어긋나 양주(楊朱) · 묵적(墨翟)의 무리가 되었으며, 그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는 재앙은 이미 불교에서 증험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소위 사교(邪敎 천주교)를 금단하는 자들이 이런 어리석은 백성들 을 잡아 묶어다가 관청 뜰 아래 꿇리고 곧장 차꼬를 채우고 내려다보면서, “네가 왜 사학(邪學)을 했느냐?” 하면, 그자는 한마디로 가로막아 말하기를, “소인은 사학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요. 그런데 명색이 관장이 된 자가 이미 그 학()이 어째서 사()가 되는지도 모르니, 추궁하는 것이 조리가 없어서 먼저 스스로 알쏭달쏭하게 말하게 되며, 그들이 대답하는 바에 따라 우선 복종한 줄로 인정하고 억지로 다짐을 받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중 교활한 놈은 성실치 못하다고 도리어 비웃고, 어리석은 놈은 더욱 의혹이 불어나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즐기는 것은 선행이요 공경하는 바는 하늘인데, 어떤 까닭으로 나의 선행을 막으며 나의 공경을 금하는가?’ 하게 됩니다. 이는 다름 아니라, 근원을 타파하지 못하고서 말류(末流)를 맑게 하고자 하며, 소굴만 찾을 뿐이지 스스로 길을 잃은 격입니다.

그래서 혹은 강제로 굴복받기에 급하여 지레 태형(笞刑)을 가하고, 혹은 엄포를 놓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고 알아듣게 타이른다는 것이 방법상 잘못되었으며, 혹은 윽박질러 야소(耶蘇 예수)를 저주하고 천주(天主)를 배척하게 하여 그 배반을 시험하고 그 진위를 관찰합니다. 저들이 하늘을 사칭하여 천주라는 이름을 만든 것은, 비록 그렇게 함으로써 입막음과 방패막이의 수단으로 삼자는 것이었으나, 마침내 어떤 우매한 백성들은 마치 그를 위한 절개를 지키는 것이 의()를 위해 죽는 것인 양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속아서 현혹됨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면, 제압하는 요령을 얻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은 이 점을 경시하고 형벌로 굴복시키려 들 뿐 아니라 또 언어까지 실수하고 맙니다. 이 어찌 성세(聖世)의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도탑게 하려는 지극한 뜻과 부합된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그들을 죽여 없애고자 해도 그 무리가 실로 많으니, 이는 물건을 싣지 못할 물 새는 배를 호수나 바다에 띄운 격이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릇 임금의 통치를 돕고 백성을 키우는 반열에 있는 자는 어느 누군들 임금의 교화를 받들어 선포하는 직분을 맡고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 몸을 바르게 하여 백성을 인도함으로써 스스로 지주(砥柱)가 되어, 임금이 질() · () · () · ()하게 된 까닭과 천주교의 피() · () · () · ()의 말이 진실과 다른 바를 빨리 밝히어, 전부터 물들었거나 새로 퍼져 가는 나쁜 풍속이 금고옥촉(金膏玉燭) 같은 임금의 교화 아래 저절로 사라지고, 허공을 거쳐 간 구름인 양 자취가 없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입니다. 공리(功利)만을 헤아려 나라의 위엄을 함부로 사용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반신반의하게 하고 관과 민이 서로 각축한다면, 비록 한때의 승리는 거둘망정 상처 입은 것은 더욱 많아, 주역(周易) 사괘(師卦)에서 이기든 지든 모두 흉하다고 한 것과 같이 되는 것은 하책(下策)입니다.

비록 서벽(徐辟)이 이자(夷子)에게 전해 알려 주고, 한창려(韓昌黎)가 서()를 지어 문창(文暢)에게 주었던 것을 본받지는 못할망정, 어찌 스스로 위신을 손상하여, 남이 스스로 속죄하려는 자료를 이용해서 이미 항복한 자에 대해 공을 세우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러기에 금하면 금할수록 더욱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관(下官 연암의 자칭)은 밤낮으로 조마조마하며 우려가 깊어지면서 흉년으로 인한 한 해의 재난을 구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하건대 명공(明公 순찰사의 경칭)께서는 세상에 드물게 총명하시고 도량이 무리에서 뛰어나서, 무릇 세간의 인심과 세태에 대해 눈빛이나 안색만 보고도 간파하시니, 하찮은 이 몸이 절하(節下)의 처분을 바라는 바가 어찌 한 도()에서 표재(俵災)를 공정히 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노고를 하는 데에 그치오리까? 이것은 다만 담당 관리의 한 직책에 불과합니다.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남보다 나중에 즐거워하며 특이한 공과 빠른 효험을 자랑으로 삼지 않을 것은 반드시 평소에 마음속으로 기약한 바 있으실 터이니, 저로서는 이 문제를 절하에게 고하지 아니하고 뉘와 더불어 말하오리까?

 

예로부터 이단이 천하를 어지럽힌 지 오래였다.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은 인의(仁義)를 배운 자라서 처사(處士)들이 그들의 학설에 귀의하였고 노자(老子)와 석가(釋迦)는 더욱 이치에 가까웠기 때문에 고명한 자들이 그리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맹자, 정자, 주자가 반드시 논파하여 시원스레 물리쳐 버린 것은, 특히 본원(本源)에 털끝만 한 차이가 있음으로써 말류(末流)의 폐해가 장차 아비도 임금도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때문이다. 하물며 지금 이른바 서양의 학술이란, 양주도 아니요, 묵적도 아니요, 도가도 아니요, 불교도 아니요, 전혀 의리를 갖추지 못한 요사스러운 패설(悖說)에 불과한 것이니, 말류에 이르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그 폐단이 화를 이룰 것은 홍수나 맹수보다 더 심한 데 그칠 뿐만이 아니다.

대개 저들의 화기수토(火氣水土)의 설이나 영혼제방(靈魂帝旁)의 설은 이야말로 불교의 찌꺼기 중의 찌꺼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저들의 이른바 부모모질(父母模質)’ 등의 어구와 같은 것은 너무도 패륜이 심해 강상(綱常)의 죄를 벗어날 수 없다. 비록 어린아이들에게 이를 따르라 할지라도 오히려 수치스러움을 알아 꾸짖고 배척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유독 그 학설로 삼은 것이 새것을 지어내고 기이하기를 힘쓰며, ()로 삼은 것이 얄팍하여 알기 쉽고, 수행으로 삼은 것이 음란하고 패악하여 거리낌이 없으며, 법으로 삼은 것이 재물을 소홀히 하고 교도(敎徒)를 귀히 여긴다. 이런 까닭에, 일종의 덜렁꾼들로 신기한 것을 숭상하고 구속받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흐뭇하게 여기며 좋아하고, 어리석은 남녀들로 빈궁을 괴로워하고 재리(財利)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휩쓸리듯이 따라가서, 심지어는 자식이 그 아비를 등지고 도망하고, 계집이 그 남편을 버리고 달아나며, 위로는 벼슬아치와 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 노예와 천한 백성까지 짐승이 광야를 달리듯이 하여, 하마 그 무리들이 나라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정의 금령(禁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금령이 너무도 관대하여 참형이 한두 사람의 비천한 부류에 가해졌을 뿐이며, 외보(外補)는 마침 열배 백배로 넝쿨처럼 불어나는 기회가 되기에 충분하여, 물이 더욱 깊어지고 불이 더욱 치성해지듯이 되니, 두어 해를 못 가서 온 나라가 다 그리 쏠리고 말 것이며, 그때 가서는 금지하려야 금지할 길이 없을 것이다.

 

! 저 사학(邪學)의 무리들은 본래 거칠고 패악한 성질로서, 오래된 상도(常道)를 싫어하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며, 방종을 즐기고 구속을 꺼린다. 음란하고 더럽고 탐욕스럽고 야비한 것이 바로 저들의 장기요, 학문이나 의리와는 본래 배치되는 바라, 오늘날 이 사학을 존숭하는 것은 그들의 천성이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연원에 유래가 있음이리오.

 

야사(野史)에 의하면 구라파(仇羅婆 유럽)란 나라에 기리단(伎利但)이란 도()가 있는데, 그 나라 말로 하느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12()의 게( 찬송가)가 있는데, 허균(許筠)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적에 그 게를 얻어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학이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은 아마도 허균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재 사학을 배우는 무리들은 자동적으로 허균의 잔당이다. 그 언론과 습관이 한 꿰미에 꿴 듯이 전해 내려왔으니, 그들이 사설(邪說)을 유달리 좋아하고 지나치게 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또 듣자니, 그 법이 삼강오륜을 무너뜨리고 명교(名敎)를 돌아보지 않으며, 남녀가 섞여 앉고 위아래도 구별이 없으며, 삶을 가벼이 여기고 죽기를 즐거워하여 칼에 죽거나 형()에 죽어 들판에 시신이 버려지는 것을 천당에 갈 수 있는 첫째가는 인과(因果)로 삼는다. 또 한 사람이 열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을 큰 공으로 삼는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한 사람이 열 사람을 전도하고, 열 사람이 백 사람을, 백 사람이 천 사람을, 천 사람이 만 사람을 전도하면 그 도당의 수효는 몇 억에 이를지 알 수 없다.

 

또 이른바 홍미(紅米) 요술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능히 주문으로 환술을 부려 없던 것도 있게 함으로써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시키니, 장각(張角)이 부적을 태워 물에 타서 마시게 함으로써 병을 낫게 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즉 실로 많은 무리들이 백성을 현혹하는 술수를 믿고 날뛰며, 죽기를 즐거워하는 마음으로써 윤리를 무너뜨리는 일을 하고 있으니, 필경에는 그 화가 미치지 않을 곳이 없을 텐데, 한 사람도 깊이 염려하는 자가 없는 것은 웬일인가? 슬프도다!

 

한 무제(漢武帝) 원광(元光) 2(기원전 133)에 한 나라가 섭일(聶壹)을 첩자로 삼아서 선우(單于 흉노의 왕)를 요새로 들어오도록 약속한 일이 있었다. 선우가 정( 국경 초소)을 공격하여 안문(鴈門)의 위사(尉史)를 잡아 죽이려고 하니, 위사는 한 나라 군사가 잠복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선우는 크게 놀라 군사를 끌고 돌아가 요새를 벗어나서 말하기를 내가 위사를 사로잡은 것은 천행(天幸)이다.” 하고서 위사를 천주(天主)로 삼았다. ‘천주라는 두 글자는 여기서 처음 나타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 중국에 있는 천주당(天主堂)의 서양 사람들은 비록 역법(曆法)에는 정통하지만 모두 요술쟁이이다. 서남이전(西南夷傳) 요술쟁이가 능히 변화하여, 불을 뱉어 내고, 스스로 사지를 묶었다가 풀어 버리며, 소와 말의 머리를 옮겨다 바꾸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해서인(海西人)이다.’라 하였다. 해서는 바로 대진(大秦)이다.” 했고, ()에는 지금 살펴보면 대진은 바로 무제(武帝) 때 이간국(犂靬國)으로 지금은 불림(拂菻)이라 이른다.”라고 하였다. 또 한 나라 안제(安帝) 때인 영녕(永寧) 원년(기원후 120) 영창군(永昌郡)의 변새 밖에 있는 탄국왕(撣國王) 옹유조(雍由調)가 사자를 보내어 풍악과 요술쟁이를 바쳤다.” 했다.

 

사학의 이른바 기리시단(伎離施端 크리스천)’이란 네 글자는 사람의 이름인지 법호인지 모르겠으나, 대저 극히 요망하고 괴이한 것이다. 처음에 일본 시마바라島原에 살면서 야소(耶蘇 예수)의 학으로써 선교하였다. 이에 일본 민중들이 그 설을 한 번 듣고서 염세적인 생각에 휩쓸리어 제 몸뚱이 보기를 표류하는 뗏목이나 부러진 갈대 줄기처럼 여겨, 세상일에 구애받지 않고, 사는 것이 즐거운 줄도 모르며, 칼에 죽거나 형()에 죽는 것을 도리어 자신의 영화로 여겼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기리시단이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호칭이다.’라고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그 술법을 배워 관백(關白) 미나모또 이에야스源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죽음을 당했다. 유키나가의 가신(家臣) 다섯 사람도 유키나가의 죄에 연좌되어 시마바라로 귀양을 갔는데 다시 사교(邪敎)를 선동하여 그 도당이 수만 명에 달하자, 히젠주肥田州를 습격하여 태수를 죽이니, 이에야스가 토벌하고 체포하여 다 죽여 버리고, 우리나라에 서계(書契)를 보내 통고하였다. 그래서 바닷가를 순시하여 잔당을 염탐해 체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후에 가또오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이에야스가 기요마사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기요마사가 마다하며 스스로 야소교를 받드는 자가 자살한다면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니 원컨대 칼날에 죽여 달라.’ 하므로, 마침내 베어 죽였다. 유키나가와 기요마사는 모두 왜놈의 날랜 장수로서, 임진년에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을 적에 가장 흉악하고 잔인하였다. 실로 우리나라로서는 자손 만대의 원수인데도 마침내 천벌을 모면하게 되어 죽은 원혼이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원한과 분노를 씻을 수 없었는데, 끝내 스스로 사교에 빠져 모두 참형을 당했으니, 신령의 이치가 너무도 밝아서 속일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대신(臺臣 사헌부 관원)의 상소 중에 저 가환(家煥)도 역시 성군(聖君)이 다스리시는 세상에 사는 일개 인물인데, 감히 천륜을 허물어뜨리고 임금의 교화를 가로막음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를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대개 가환이 이와 같은 지목을 받은 지가 오래였다. 치우치게 성은을 입은 것이 어떠했는가? 그런데도 묵은 버릇을 고치지 아니하니, 진실로 대신의 상소대로라면, 삼묘(三苗)와 같은 처형을 어찌 모면할 수 있으랴!

 

사학은 본시 천당에 올라간다는 설을 가지고서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꾀었는데, 이 근본은 유연(柔然)에서 나왔다.

유연의 타한가한(他汗可汗)이 복고돈(伏古敦)의 아내 후려릉씨(候呂陵氏)를 맞아들여 복발가한(伏跋可汗)과 아나괴(阿那瓌) 등 여섯 아들을 낳았다. 복발이 즉위한 뒤 갑자기 그 어린 아들 조혜(祖惠)를 잃어버렸는데, 무당 지만(地萬)이 말하기를,

 

조혜가 지금 천상에 있으니, 제가 불러올 수 있습니다.”

하고, 드디어 큰 늪 속에다 장막을 치고서 천신(天神)에게 제사하니, 조혜가 갑자기 장막 속에 나타나서 항시 천상에 있었다고 말했다. 복발은 크게 기뻐하여, 지만을 이름하여 성녀(聖女)라 하고 가하돈(可賀敦)으로 삼았다.

조혜가 차츰 장성하자, 제 어미에게 말하기를,

 

나는 항시 지만의 집에 있었고, 천상에 있었다는 말은 지만이가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입니다.”

하니, 그 어미가 복발에게 고했으나 복발은 믿지 않았다. 이윽고 지만이 조혜를 참소하여 죽이니, 후려릉씨가 대신(大臣) 이구열(李具列) 등을 보내어 지만을 죽였다. 이것이 유연이 내란으로 망하게 된 시초였다.

 

부모모질(父母模質)’ 등의 어구와 같은 것은 흉하고 더럽고 패악스러워서 붓끝에 올리고 싶지 않다. 그 근원은 한서(漢書) 예형전(禰衡傳)에 처음 나타났는데, 이것은 대개 심하게 날조한 말이다. 사람을 속이는 데 한이 있으리오만, 주저하지 않고 이처럼 몹시도 패악스럽더니, 마침내 사학의 나쁜 선례가 된 것이다.

 

 

부군(府君)이 면천(沔川)에 계실 적에 감사와 더불어 왕복한 편지에 사학을 성토하는 글이 있었으며, 그 기회에 다시 사학의 본말을 논했는데 무릇 몇 조문이다. 그것을 아울러 여기에 부록한다.

당시 면천은 사학에 물든 자가 많았으므로, 부군이 우려하여 듣는 대로 적발해서 관하인(官下人)의 천역에 붙들어 매고, 매양 공무가 파하면 한두 놈을 불러 놓고 반복하여 타이르니, 형벌을 쓰지 않고도 다 감복하여 깨달아 바른길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중에는 후회하고 한탄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급기야 신유년(1801)에 큰 옥사가 일어났지만, 면천 경내에는 아무 일이 없었다. 그 당시 깨우치도록 타이른 여러 조문들은 친필로 일기 중에 그때마다 기록하였는데, 명백하고 깊이 깨달은 내용이라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깨우치기 쉽게 되었다. 지금 유실되어 부록으로 싣지 못하니 몹시 애석하다. 아들 종간(宗侃)이 삼가 쓰다.

 

[D-001]저들이……  :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천주실의(天主實義) 상권 제 2 편에 우리나라의 천주(天主)는 중국 말로 상제(上帝)이며” “옛날 경서들을 두루 살펴보면, 상제와 천주는 단지 호칭만 다를 뿐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D-002]방패막이 : 원문은 忌器인데 쥐 잡다 그릇 깰라라는 뜻인 投鼠忌器의 준말이다. 천주교를 공격하지 못하게 유교의 설을 끌어 왔다는 뜻이다.

[D-003] …… 많으니 : 원문은 其徒寔繁인데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 어진 이를 홀대하고 권세가에게 붙는 무리가 실로 많다.簡賢附勢 寔繁有徒고 한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D-004]임금의 …… 키우는 : 원문은 輔世長民인데,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서 천하의 삼달존(三達尊)으로 작() · () · ()을 들고 임금의 통치를 돕고 백성을 키우는 데에는 덕보다 나은 것이 없다.輔世長民莫如德고 하였다.

[D-005]지주(砥柱) : 황하 한가운데 우뚝이 솟아 있는 돌산으로, 의지가 확고하여 남들의 지주(支柱) 역할을 하는 사람을 비유할 때 쓰인다.

[D-006]() · () · () · ()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천서(天敍), 천질(天秩), 천명(天命), 천토(天討)를 이른다. 백성들을 전례(典禮)로써 교화하고 신하들에게 상벌을 공정하게 시행하는 것을 뜻한다.

[D-007]() · () · () · () : 맹자 공손추 상에 나오는 피사(詖辭), 음사(淫辭), 사사(邪辭), 둔사(遁辭)를 이른다. 각각 편벽된 말, 음탕한 말, 간사한 말, 회피하는 말을 뜻하며, 정사(政事)에 해를 끼치는 이단사설(異端邪說)을 가리킨다.

[D-008]금고옥촉(金膏玉燭) : 밝은 등불과 촛불을 이른다.

[D-009]이기든 지든 모두 흉하다 : 주역 사괘 초육(初六)의 효사(爻辭) 군사의 출동은 군율을 따를지니, 그렇지 않으면 이기든 지든 흉하다.師出以律 否臧凶고 하였다. 연암은 이를 인용하면서 否臧皆凶이라 했으나, 주역 원문에는 모두라는  자가 없고 왕필(王弼)의 주에만 師出不以律 否臧皆凶이라 하였다. 따라서 효사의 해석도 정자(程子)나 주자(朱子)의 주가 아니라 왕필의 주를 따랐을 것으로 보고, 여기서도 그와 같이 번역하였다.

[D-010]서벽(徐辟) …… 알려 주고 : 서벽은 맹자(孟子)의 제자이고, 이자(夷子)는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에 해당하는 묵가(墨家)를 추종한 인물이다. 이자가 서벽을 통해 맹자를 만나 보고 싶어 하자 서벽이 그 사이에서 맹자의 말을 전달하여 이자를 깨우쳐 주었다. 孟子 滕文公上

[D-011]한창려(韓昌黎) ……  : 한창려는 당 나라 문장가 한유(韓愈)이고, 문창(文暢)은 한유와 동시대의 승려 이름이다. 한유는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에서 문창에게 유가의 도가 아니라 불교의 설로써 서()를 써 준 사람들을 비판하고, 유가의 도의 훌륭함을 설파하였다.

[D-012]남보다 …… 즐거워하며 : () 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옛날의 인자(仁者) 천하의 근심을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나중에 즐거워했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하였다.

[D-013]양주(楊朱) …… 귀의하였고 : 회남자(淮南子) 요략(要略) 묵자는 유자(儒者)의 업()을 배우고 공자의 술()을 전수받았다.”고 하였고, 논어집주(論語集註) 학이(學而)  14 장의 주에 윤돈(尹焞)의 말을 인용하여 양주 · 묵적과 같은 경우는 인의를 배웠으나 어긋난 자이다.”라고 하였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성인(聖人)이 나타나지 아니하니 제후들이 방자하게 굴고 처사들이 함부로 논의를 벌여 양주와 묵적의 말이 천하에 가득 찼다.”고 하였다.

[D-014]노자(老子) …… 도피하였다 : 정자(程子)는 도가와 불교가 옛날의 양주 · 묵적의 학설보다 더욱 이치에 가까워 그 피해가 더 크다고 비판하였다. 주자(朱子) 중용장구(中庸章句)의 서()에서 이단의 학설이 나날이 새롭고 다달이 성행하여, 노자와 석가의 추종자들이 나옴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치에 가까워 크게 진리를 어지럽혔다.”고 개탄하면서, 그러한 풍조에 맞서 정자(程子) 중용을 매우 중시한 공로를 예찬하였다.

[D-015]화기수토(火氣水土)의 설 : 천주실의 상권 제 3 편에 무릇 천하의 사물은 모두 불 · 공기 ·  · 흙이라는 사행(四行)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사행설(四行說)은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 플라톤의 저작을 통해 천주교 신학에 수용되었다. 불교의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설(四大說)과 흡사하며, 유교의 오행설(五行說)과 배치된다.

[D-016]영혼제방(靈魂帝旁)의 설 : 영혼의 사후 불멸과 승천설(昇天說)을 가리키는 듯하다. 천주실의 하권 제 6 편에 선한 사람은 죽은 뒤 그 영혼이 천당에 올라가서 하느님上帝의 곁에서 지내게 된다고 하였다.

[D-017]부모모질(父母模質) : 인류의 원조(原祖)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자손손 그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다는 원죄설(原罪說)을 가리키는 듯하다. 천주실의 하권 제 8 편에도 세속 인간의 조상이 이미 인류의 근성(根性)을 망쳐 놓아 그 자손된 자들은 물려받은 잘못으로 인해 온전한 본성을 계승하지 못하고 나면서부터 하자(瑕疵)를 지닌다.”고 하였다.

[D-018]짐승이 …… 하여 : 원문은 如獸走壙인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 백성이 인정(仁政)에 귀순하는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나아가고 짐승이 광야를 달리는 것과 같다.民之歸仁也 猶水之就下 獸之走壙也고 하였다.

[D-019] …… 관대하여 : 원문은 其柰失之太寬인데 柰失의 의미가 분명치 않다. 초서로 흘려 쓴 禁令을 잘못 판독한 것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D-020]외보(外補) : 지방 관직에 임명하는 것을 이른다. 여기서는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의 밀입국 사건에 편승하여 공조 판서 이가환(李家煥)을 천주교도로 몰아 공격한 박장설(朴長卨)의 상소가 파문을 일으키자, 정조(正祖)가 이가환을 특별히 충주 목사로 보임한 사실을 가리킨다. 당시 충청도 대부분이 천주교에 물들었는데 충주가 그중 가장 심했으므로, 정조는 이가환을 특별히 그곳의 수령으로 보내 천주교를 금하게 함으로써 사태를 무마하고자 했다. 그때 이가환의 무리로 지목된 정약용(丁若鏞)도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내쫓기었다. 正祖實錄 19 7 25 그러나 연암은 이러한 조치가 지나치게 관대할 뿐 아니라, 천주교의 소굴에 천주교를 비호하는 수령을 임명함으로써 더욱 이를 조장할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D-021]야사(野史) : 유몽인(柳夢寅) 어우야담(於于野談)을 가리킨다.

[D-022]기리단(伎利但) : 어우야담에는 기례달(伎禮怛)’로 표기되어 있다. ‘기리시단(伎離施端)’, ‘길리시단(吉利施端)’, ‘길리지단(吉利支丹)’ 등으로도 표기되었는데, 포르투갈어 ‘cristao’가 와전되어 음역(音譯)된 것으로, 기독교인(christian)을 뜻한다.

[D-023]명교(名敎) : 군신(君臣), 부자(父子)의 관계와 같이 유교에서 정한 상하 질서의 예법을 가리킨다.

[D-024]홍미(紅米) : 오래 묵어서 붉게 변색한 쌀을 이른다.

[D-025]장각(張角) : 후한 때의 인물로 태평도(太平道)란 종교의 창시자이다. 영제(靈帝) 때에 부적과 물로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통해 종교를 전파하여 10여 년 사이에 그 신도가 수십만이 되었다. 이들은 중국 각지에 분포하여 영제 중평(中平) 원년(184)에 기의(起義)하여 이른바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일으키고,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이 되어 이를 지휘하였으나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D-026]섭일(聶壹) :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북부에 있던 안문군(鴈門郡) 마읍현(馬邑縣)의 토호였다고 한다. 資治通鑑 卷18 漢紀10 世宗孝武皇帝 上之下 元光 2

[D-027]위사(尉史) : 요새와 가까운 군() 100리마다 위() 1인과 사사(士史) 및 위사(尉史)  2인을 두었다고 한다.

[D-028]한 무제(漢武帝) …… 삼았다 : 이는 자치통감(資治通鑑) 18 한기(漢紀) 10 세종 효무황제(世宗孝武皇帝) 원광(元光) 2년 조의 기사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뿐만 아니라 그 전거가 된 사기 한장유열전(韓長儒列傳), 흉노열전(匈奴列傳)이나 전한서(前漢書) 흉노전(匈奴傳) 등에는 모두 선우가 안문의 위사를 천왕(天王)’으로 삼았다고 하였지, ‘천주로 삼았다고는 하지 않았다.

[D-029]불을 …… 바꾸는데 : 원문은 吐火 自支解 易牛馬頭인데, 각각 마술의 일종이다. 御定子史精華 卷106 樂部2 俗樂》 《위략(魏略) 대진전(大秦傳)에 의하면 自支解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묶은 몸을 푸는 마술을 말한다.

[D-030]서남이전(西南夷傳) …… 했고 : 자치통감 50 한기(漢紀) 42 효안황제 중(孝安皇帝中) 영녕(永寧) 원년 12월 조 기사에 대한 호삼성(胡三省)의 주()를 인용한 것이다. 서남이전은 후한서(後漢書) 86에 편차되어 있고, 대진(大秦)은 로마 제국을 가리킨다.

[D-031]이간국(犂靬國) :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 소개되어 있다. 사기 대원열전(大宛列傳)에는 여헌(黎軒)’, 한서 장건전(張騫傳)에는 이간(犛靬)’, 후한서 서남이전에는 이건(犁鞬)’이라 표기되어 있다.

[D-032]()에는 …… 하였다 : 역시 자치통감 50 한기(漢紀) 42 효안황제 중 영녕 원년 12월 조 기사에 대한 호삼성의 주를 이어서 인용한 것이다. 불림(拂菻)은 동로마 제국을 말한다.

[D-033]영창군(永昌郡) …… 바쳤다 : 역시 자치통감 50 한기 42 효안황제 중 영녕 원년 12월 조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 영창군은 안제(安帝) 때 익주(益州)에 설치한 군으로 지금의 운남성(雲南省) 지역에 있었다. 탄국(撣國) 1~2세기경 후한(後漢)에 조공을 바쳤던 서남이(西南夷)의 한 국가였다.

[D-034]시마바라島原 : 일본 큐슈九州 나가사키현長崎縣 남동부에 있는 반도(半島)이다. 1637년 천주교도의 소굴이었던 이곳에서 압정에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을 함락했으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정벌군에 의해 몰살당했다. 이를 시마바라의 난()’이라 한다.

[D-035]표류하는 …… 갈대 줄기 : 원문은 浮査斷梗인데,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단경부평(斷梗浮萍)’, ‘단경표봉(斷梗飄蓬)’ 등 비슷한 성어(成語)들이 있다.

[D-036]관백(關白) : 천황을 대신하여 섭정(攝政)한다는 뜻으로, 막부의 최고 실력자인 쇼군將軍을 가리킨다.

[D-037]히젠주肥田州 : 큐슈에 있던 주(), 지금의 사가현佐賀縣과 나가사키현의 일부를 포함한다.

[D-038]이에야스가 …… 약속하였다 : 인조실록(仁祖實錄) 16(1638) 3 13일 동래 부사의 치계(馳啓)에 관련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D-039]원컨대 칼날에 죽여 달라 : 원문은 願得劒解인데, ‘劒解는 곧 刃解로 칼날에 잘게 썰린다는 뜻이다. ‘인영누해(刃迎縷解)’, ‘영인이해(迎刃而解)’라는 성어가 있다.

[D-040]대신(臺臣) …… 하였다 : 1795년 행 부사직(行副司直) 박장설(朴長卨)이 이가환(李家煥)을 천주교도로 공격한 상소 중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이 상소로 인해 박장설은 정조의 노여움을 사서 조적(朝籍)에서 삭제되고 시골로 쫓겨났다. 正祖實錄 19 7 7

[D-041]가환이 …… 오래였다 : 1792년 부교리(副校理) 이동직(李東稷)이 당시 성균관 대사성이던 이가환의 삭직을 요청한 상소에서 그의 학식은 이단사설(異端邪說)에서 나온 것이라고 공격한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조는 이가환을 비호하는 장문의 비답(批答)을 내렸다. 正祖實錄 16 11 6

[D-042]삼묘(三苗)와 같은 처형 : 삼묘는 요순 시대 사흉(四凶)의 하나로, 이는 악인이 처형을 받는 것을 이른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 “() 임금이 공공(共工)을 유주(幽州)에 유배 보내고, 환도(驩兜)를 숭산(崇山)으로 추방하고, 삼묘를 삼위(三危)에서 죽이고, ()을 우산(羽山)에서 죽여, 이 넷을 처벌하자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다. 이는 어질지 않은 자를 처벌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D-043]유연(柔然) :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몽골을 지배한 유목민족으로 연연(蠕蠕), 예예(芮芮) 등으로도 불렸다. 그 지도자 사륜(社倫)이 처음 왕이라는 뜻의 가한(可汗)을 칭하면서부터 강성하여 북위(北魏)와 자주 충돌하였으나, 두륜(豆崙)이 가한이 된 5세기 말 이후 내란으로 점차 쇠퇴하여 결국 돌궐(突厥)에게 멸망되었다. 그들의 종교는 샤머니즘이 중심이었으며, 불교도 행해졌다.

[D-044]유연의 …… 죽였다 : 자치통감 149 양기(梁紀) 5 고조 무황제(高祖武皇帝) 5의 기사를 조금 줄여서 인용한 것이다. 인용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실수가 있었던 것을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타한가한(他汗可汗)은 유연의 제 9 대 왕으로 이름이 복도(伏圖)이고,  7 대 왕인 복고돈가한(伏古敦可汗) 두륜(豆崙)과 종형제간이다. 복발가한(伏跋可汗)은 제 10 대 왕으로 이름은 추노(醜奴)였다. 가하돈(可賀敦)은 왕의 정실 부인을 뜻하는 몽골어로 가돈(可敦)이라고도 한다.

[D-045]예형전(禰衡傳) : 후한서 110 ()에 수록되어 있다. 예형은 후한 말의 광사(狂士)로 재주가 빼어났으나 몹시 오만하여 조조(曹操), 유표(劉表), 황조(黃祖)의 문객(門客)으로 전전하다가 끝내 황조의 비위를 거슬러 피살되었다. 그가 지은 앵무부(鸚鵡賦) 문선(文選)에 전한다. 그런데 후한서 예형전에는 연암이 개탄한 바와 같은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연암의 처조카인 이정관(李正觀 : 1792~1854) 역시 천학고변(天學考辨)’이란 글에서, 천주교도 정약종(丁若鍾) 영혼의 부모인 천주에 비해 친부모는 잠시 그 몸을 가탁한 육신의 부모일 뿐이라고 차별하면서 모자(母子) 관계를 독() 속의 물에 비유하여 물이 독 밖으로 나오면 물은 물이고 독은 독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을 두고 이는 곧 한서 예형전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극도로 패악한 설이라고 비난하였다. 闢衛新編 卷1 諸家論辨 연암이 부모모질(父母模質)’ 운운한 것은 원죄설이 아니라 그러한 육신부모설을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유사한 내용 역시 후한서 예형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답함

 

 

상소의 초안은 근근이 얽어 내어 소략함을 면치 못했으니, 쓰시기에 합당치 못하며 때에 맞추지 못한 한탄이나 없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날을 두고 구상하여 절로 지체된 것은 비단 필력이 고갈되어 술술 표현할 수 없어서만이 아니라, 사정이 이리저리 꼬여 말 만들기가 심히 어려워서였습니다.

이 죄수는 여러 해를 두고 교화되지 않고 버티던 끝에 다 죽어 가는 제 목숨을 구걸하려고 지금 자백했습니다. 비록 마음을 고친 것 같기도 하나 후일에 번복하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 보증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가뭄을 걱정한 끝에 죄수를 풀어 주는 것과는 사체(事體)가 같지 않사온즉, 갑자기 완전 석방을 요청하신 것은 민심을 놀라게 할 뿐더러, 정원(政院)과 언관(言官)의 입장에서 그에 대해 준절히 나무랄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입니다. 해당되는 자는 그저 깊이 자신을 인책할 따름이지, 어찌 감히 변명하기를 대질하여 따지듯 할 수 있습니까?

절하(節下 순찰사)의 뜻은 어찌 다음과 같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사학의 무리는 총명하고 경술(經術)에 밝은 사람들 속에서 많이 나왔으며, 그 괴수된 자는 대대로 벼슬하는 문벌의 사이에 건재해 있어서, 가벼운 처벌은 겨우 외보(外補)로 마감되고 금서(禁書)는 감춰진 채 드러남이 없으며, 높은 벼슬이 금방 제수됨으로써 진장(眞贓)이 암암리에 전수되고, 화려한 직함이 그전대로 있음으로써 사설(邪說)은 더욱 치성한 형편입니다. 달아난 죄인들이 숨어 있는 소굴로 이보다 큰 것이 어디 있으며, 징계와 토벌이 엄하지 못한 것으로 이보다 더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면에 저 먼 시골 백성들은 지극히 미욱하여 눈을 뜨고도 글자 한 자 볼 줄 모르며, 배운 것이라고는 모두 언문으로 풀이한 것이요, 애매모호하게 입으로 전하다가 도중에 잘못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는 실로 사학의 찌꺼기요 이단의 말류인데도, 어리석은 백성 한 놈만 잡으면 선뜻 괴수로 지목하고, 조금 수상한 자취 하나만 염탐해 내게 되면 바로 소굴로 일컬어, 눈을 부릅뜨고 기염을 토하며 성토를 먼저 가하니, 이른바 본말이 거꾸로 되고 논의 판결이 정당성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지난날 장계를 올려 석방을 청한 것도 과연 여기에서 나왔는데, 뜻은 비록 엄준하지만 행동은 너그럽게 풀어 주는 것이 되니, 이와 같은 본뜻을 누가 다시 양찰하여 알아내리이까? 이러기에 말 만들기가 어려운 것이었으며, 스스로 인책하는 가운데도 슬며시 이 뜻을 비친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 감사의 자핵소(自劾疏) 초본

 

 

()은 지난번에 사학의 무리로 오랫동안 수감되었던 이존창(李存昌)을 석방하는 일로써 장계를 올려 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성군(聖君)의 덕은 생명을 살리기를 좋아하고 신묘한 무위(武威)는 죽이지 않는지라, 신은 바야흐로 손 모아 우러르며 공경하고 칭송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어렴풋이 듣자니 물의가 비등하여, 신이 벌주어 다스리기를 느슨히 하고 미연에 방지하는 것마저 엄하지 못하여 법이 마침내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말세의 풍속이 정화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은 진실로 놀랍고 부끄럽고 두렵고 떨리어 몸 둘 바를 모르겠으며, 소홀하고 경솔한 죄는 신에게 실로 있으므로 책망하고 처벌하시기를 공손히 기다릴 뿐 어찌 감히 스스로 해명하오리까?

신은 외람되게도 변변치 못한 주제에 한 도()를 황공하게 맡았으나 그 직분을 생각하면 임금의 교화를 받들어 선포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무릇 만에 하나라도 왕명을 선양해야 할 몸으로서 형벌이 한결같지 못하여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이 역시 제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조정이 이런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본시 바라는 것은 미혹과 잘못을 깨닫게 하여 형정(刑政)을 번거롭게 아니 하고도 성상의 교화에 복종하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윤상(倫常)을 무시하고 무너뜨린 권가(權哥)와 윤가(尹哥) 같은 놈은 서슴없이 사형을 가하였으나, 마음을 잡고 허물을 고친 필공(必恭) 같은 놈은 곧 적당한 벼슬자리로 보답을 주었습니다. 봄철에 살려 주고 가을에 처형하는 것은 모두 성상의 권능이니, 정말로 도깨비가 태양을 피해 숨고 얼음과 눈이 훈풍을 만난 것과 같을 터입니다. 그런데 존창은 어떤 놈이기에 감히 시골 구석에서 숨바꼭질하며 처박혀서 옛 버릇을 고치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천지 사이에 용납한단 말입니까?

지난번 조정에서 신하들의 의견을 수합하던 날에, 충청도의 괴수로 지목하고 사학의 소굴이라 지칭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법을 집행하기로 논하자면 누구인들 그자를 죽여야 한다고 아니 하리까? 신 역시 일찍이, ‘그자의 사람됨은 필시 지극히 흉악하고 참람하지만 약간의 지체와 문벌이 있어 한 고을에서 걸출하게 명망이 높든지, 그렇지 않으면 필시 언어와 외모가 사람을 움직일 만하고 식견과 지혜가 대중을 현혹시킬 만하리라.’ 추측했습니다.

또한 듣건대 그 무리가 실로 많아서, 서로 번갈아 방문하며 술과 음식을 가득 차려 내오고 양식도 넉넉히 대 주었다 합니다. 이를 근심하고 분해하는 것은 실로 여론과 같으니, 이런 놈을 공공연히 처단하지 않는다면 국법이 어찌 되며 민속이 어찌 되겠습니까?

급기야 신이 이 도를 맡은 이래로 엄밀히 조사하고 물샐틈없이 염탐했더니 직접 본 것이 전해 들은 것과 사뭇 달랐으며, 지난날 멀리서 추측했던 것은 대개 지나친 염려였습니다. 그자의 말을 들어 보고 얼굴을 살펴보았더니 바로 무식한 일개 평민이고, 괴수라는 지목은 너무도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5년을 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아무도 뒷바라지하는 자가 없었으며, 실낱같은 목숨을 여전히 이어 가면서 딴 죄수가 먹다 남은 찌꺼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소굴이란 지칭은 그놈에게는 곧 과분한 말입니다.

자세히 그 실정을 추구해 보면, 그는 곧 곤궁한 백성 중에 조금 교활한 자입니다. 추측건대 선비가 되기에는 일족이 미약하여 그 축에 끼이지 못하고, 농민이 되자니 농사지을 힘이 없고, 바치가 되자니 솜씨가 모자라고, 장사치가 되자니 밑천이 없고 해서, 사민(四民) 가운데 어디고 몸을 붙일 곳이 없었으며, 설령 중을 부러워한들 처자가 거추장스럽고, 차라리 도둑질을 배우자니 양심은 그래도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글자를 좀 안다는 것이 그놈에게는 재앙이요, 좌도(左道)와 사경(邪徑)이 지름길인즉, 요행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서 속이고 꾀는 것으로 일을 삼았습니다. 본죄를 제외하고 이것만으로도 확실히 용서할 수 없으나, 이와 같은 부류가 또한 어찌 이놈뿐이겠습니까? 그런데 금령이 내린 뒤에 제일 먼저 잡혀 왔기 때문에 마침내 괴수로 만들어져, 혹은 강제로 굴복받기에 급하여 지레 태형을 가하고, 혹은 엄포를 놓는 것이 적절치 못하고 알아듣게 타이른다는 것이 방법상 잘못되었으며, 혹은 윽박질러 야소를 저주하고 천주를 배척하게 하여 그 향배(向背)와 진위를 시험해 왔던 것입니다.

저들이 하늘을 사칭해서 천주라는 이름을 만든 것은 너무도 불경스러우나, 이따위 어리석은 백성들로서는 더욱 저들의 마음에 의혹이 생기기를 내가 즐기는 것은 선행이요 공경하는 바는 하늘인데, 어찌하여 나의 선행을 막으며 나의 공경을 금한단 말인가?’ 하여, 드디어 그 사심(邪心)을 더욱더 굳히며, 마치 그를 위하여 제 몸을 바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속고 혹함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면, 차꼬나 오랏줄 따위는 한갓 헛된 물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명리(命吏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된 자로서는 마땅히 성세(聖世)의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도탑게 하려는 지극한 뜻을 공경히 받들어, 임금이 질() · () · () · ()하게 된 까닭과 피() · () · () · ()의 말이 진실과 다른 바를 빨리 밝혀, 전부터 물들었거나 새로 퍼져 가는 나쁜 풍속이 밝은 등불과 촛불 같은 임금의 교화 아래 저절로 사라지고, 허공을 거쳐 간 구름인 양 자취가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한 놈의 거렁뱅이 같은 놈을 붙잡으면 마치 대적(大敵)이 우뚝 마주 선 것같이 여겨, 나라의 위엄을 함부로 사용하여 힘으로 억제하려 들다가, 급기야 일이 난처한 지경에 다다르면 곧 조정에 떠넘기며 이와 같이 당황한단 말입니까?

신이 지난번에 요청한 일은 과연 제 마음대로 곧바로 실행한 것이나, 그 천심(淺深)과 경중(輕重)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요량한 바 있었던 것입니다. 전후로 사학을 배우고 익힌 자들이 비록 한 꿰미에 꿴 듯하지만, 사족(士族)과 천민은 차등이 없을 수 없고, 전문적으로 한 자와 그에 의해 오도된 자도 역시 등분이 있습니다. 저 존창은 권가와 윤가 두 역적에 비하면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 흔적이 없을 뿐더러, 필공에 비하면 미혹을 깨친 마음이 상당히 있사옵니다. 전자로 따지면 차등의 형률을 적용함이 합당하고, 후자로 따지면 마땅히 참작하여 용서하는 죄목에 해당됩니다. 그가 써서 바친 자술서를 보면 비록 문리는 제대로 통하지 않으나 뉘우침이 뼈에 사무쳐, 성세(聖世)의 평민이 되기를 소원하는 말뜻이 너무도 애절하여 사람을 족히 감동시키고도 남습니다. 국가가 이런 오도된 자들에 대해서도 잡히는 대로 바로 처단한다면 그만이겠으나, 만약 그 미혹을 깨닫는다면 죽이지 않을 것을 허락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만약 그자의 쓰라린 뉘우침이 진실로 그 말과 같다면, 국가로 보자면 평민 한 명을 얻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에 죽여 없애 착한 사람들이 물들어 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형정(刑政)의 한 가지 일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 죄상을 찾아냈다면 이른바 불쌍히 여겨야지 기뻐하지 말라고 할 따름입니다.

만일 진위를 알기 어렵고 번복할 것이 염려스럽다 하여, 기왕지사를 깊이 캐어 들어가고 기어이 소굴을 찾아내어, 사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닌 처지에 몰아넣고 사람 세상도 귀신 세상도 아닌 경계 지대에 길이 가두어 둔다면, 이는 지난번 신이 말한 형벌이 한결같지 못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경우이니,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된다면 비단 전날에 자복한 무리들이 의구심을 일으키게 될 뿐 아니라, 또한 뒷날에 감화될 무리들도 당연히 주저하는 생각을 품게 될 터입니다. 이것이 신이 밤낮으로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정에서 기대하는 풍속 교화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반신반의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일개 존창에 대해 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실수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니, 신의 구구한 어리석은 소견은 과연 후자에 있었던 것이지 전자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D-001]이 죄수 : 충청도 천주교도의 지도자로 체포되어 수감 중인 이존창(李存昌)을 가리킨다.

[D-002]진장(眞贓) : 범행의 확실한 증거물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천주교 책자나 그림 같은 것을 가리킨다.

[D-003]그 괴수된 …… 형편입니다 : 1795년 공조 판서 이가환(李家煥)을 천주교도로 공격한 박장설(朴長卨)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정조(正祖)가 이가환을 특별히 충주 목사로 보임한 사실을 거론한 것이다.

[D-004]자핵소(自劾疏) :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탄핵하는 상소를 이른다.

[D-005]신묘한 …… 않는지라 : 원문은 神武不殺인데,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나오는 말이다. 옛날의 총명하며 슬기로운 임금은 형살(刑殺)을 사용하지 않고도 신묘한 무위(武威)로 만민을 복종시켰다고 하였다.

[D-006]윤상(倫常) ……  :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에 살던 양반이자 천주교도로서 조상의 제사를 폐하고 위패를 불살라 버린 윤지충(尹持忠)과 그의 외종형인 권상연(權尙然)을 가리킨다.

[D-007]좌도(左道)와 사경(邪徑) : 둘 다 사교(邪敎)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천주교를 가리킨다.

[D-008]임금이 …… 것입니다 : 연암집 2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書)’ 첫 번째 편지에 동일한 구절이 나온다. () · () · () ·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천서(天敍), 천질(天秩), 천명(天命), 천토(天討)를 이른다. 백성들을 전례(典禮)로써 교화하고 신하들에게 상벌을 공정하게 시행하는 것을 뜻한다. () · () · () · () 맹자 공손추 상에 나오는 피사(詖辭), 음사(淫辭), 사사(邪辭), 둔사(遁辭)를 이른다. 각각 편벽된 말, 음탕한 말, 간사한 말, 회피하는 말을 뜻하며, 정사(政事)에 해를 끼치는 이단사설(異端邪說)을 가리킨다.

[D-009]차라리 …… 것이니 : 원문은 寧失不經於一存昌인데,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고요(皐陶) 죄 없는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한 실수를 하는 편이 낫다.與其殺不辜 寧失不經고 하였다. 사형을 가하지 않고 경솔히 풀어 주는 실책을 범하는 편이 낫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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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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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1]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1]

1 삼종질(三從姪) 종악(宗岳) 이 정승에 제수됨을 축하하고 이어 시노(寺奴) 문제를 논한 편지

2 김 우상(金右相) 이소(履素) 에게 축하하는 편지

3 현풍현(玄風縣) 살옥(殺獄)의 원범을 잘못 기록한 데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4 밀양(密陽) 김귀삼(金貴三)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5 함양(咸陽) 장수원(張水元)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6 밀양(密陽)의 의옥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7 진정(賑政)에 대해 단성 현감(丹城縣監) 이후(李侯)에게 답함

8 진정에 대해 대구 판관(大邱判官) 이후(李侯) 단형(端亨) 에게 답함

9 남 직각(南直閣) 공철(公轍) 에게 답함

10 족형(族兄) 윤원(胤源)씨에게 답함

11 원도(原道)에 대해 임형오(任亨五)에게 답함

 

[2]

12 함양 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에게 보냄

13 족제(族弟) 이원(彜源)에게 보냄

14 공주 판관(公州判官) 김응지(金應之)에게 답함

15 응지에게 답함

16 응지에게 답함

17 응지에게 답함

18 응지에게 답함

19 응지에게 보냄

20 이중존(李仲存)에게 답함

21 이중존에게 답함

22 이중존에게 답함

23 진정(賑政)에 대해 순찰사(巡察使)에게 답함

24 진정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25 순찰사에게 올림

26 순찰사에게 답함

27 순찰사에게 답함

 

[3]

28 족손(族孫) ()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박군(朴君) 묘지명

29 맏누님 증() 정부인(貞夫人) 박씨 묘지명

30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 묘지명

31 홍덕보(洪德保) 묘지명

32 치암(癡庵) 최옹(崔翁) 묘갈명

33 이 처사(李處士) 묘갈명

34 () 사헌부 지평 예군(芮君) 묘갈명

35 참봉(參奉) 왕군(王君) 묘갈명

36 가의대부(嘉義大夫) 행 삼도통제사(行三道統制使) 증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 충강(忠剛)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37 주공탑명(麈公塔銘)

 

 

 

삼종질(三從姪) 종악(宗岳) 이 정승에 제수됨을 축하하고 이어 시노(寺奴) 문제를 논한 편지

 

 

지원(趾源)이 젊었을 때 심병(心病)을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불현듯, 온 세상 부인들이 첫아이를 낳으면서 너무도 지쳐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만일 잠결에라도 젖이 아이의 입을 눌러 대면 어찌할 것인가 걱정이 되어 밤중에 일어나 방황하며 몸 둘 곳을 몰라 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늘그막에 한 고을 원이 되어 5000호의 중남중녀(衆男衆女)를 맡아 기르게 되니, 이들은 맹자(孟子)의 이른바 적자(赤子)’, 노자(老子)의 일컬은 바 영아(嬰兒)’인 셈입니다. 영아란 한번 떼가 나면 손으로 제 머리칼을 쥐어뜯고, 한번 울음을 터뜨리면 누워서 발을 버둥거리는데, 남들이 아무리 온갖 방법으로 달래 보아도 그 옹알대는 소리가 무슨 말이며 제 의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하지만, 자상한 제 어미만은 능히 이를 잘 살펴서 알아듣고 미리 짐작해서 그 뜻을 알아맞힙니다. 이에, 처음 해산한 어미는 자나 깨나 하는 생각이 오로지 안절부절 젖을 물리는 데에 있기 때문에 소리도 냄새도 없는 속에서도 묵묵히 듣고 꿈속에서도 거기에 마음을 쓰고 있는 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야말로 지성(至誠)이 아니고야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원이 된 첫솜씨치고는 그다지 심한 허물은 없었다 여겼는데, 시노(寺奴) 300()에 이르러서는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배가 끓고 등이 후끈거려서 30년 전의 심병이 되살아난 듯합니다.

일찍이 들으니 노비를 추가로 찾아내어 정해진 액수(額數)를 채울 적에 단지 두목(頭目)이 밀봉해서 바치는 공초(供招)에만 의거하고 있는데, 그가 추가로 찾아내어 채운 자는 모두 외손의 외손들이며 그 노비에게 보증을 서 준 자 또한 모두 외가의 외가 쪽 사람들이라 합니다. 대대로 벼슬하는 가문들도 팔세보(八世譜)를 만들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 대개 씨족이 자주 바뀌고 고거(攷壉)가 자상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시골구석의 무지한 백성들이야 허다히 제 아비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리저리 외가 쪽으로 뻗어 나간 소생의 근원을 알겠습니까. 이런 정도의 친인척은 비록 사대부의 경우일지라도 마상(馬上)에서 서로 한 번 읍()이나 하는 정도로 충분한 관계인데, 종신토록 그에 얽매여 가산을 탕진하고야 말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로 이자들을 이 고을에 정착하게 했다면 사실인지 아닌지 명단을 조사해서 검열한다는 것이 그래도 말이 되겠지만, 다른 고장으로 종적을 감추어 몰래 공포(貢布)를 바치고, 일찍이 본명을 숨겨 생사 여부도 정확하지 않으니, 아무리 장부를 점검하여 끝까지 조사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형편입니다. 혹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계집이 사내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시집도 안 갔는데 그 소생을 따지고, 가짜로 이름을 만들었는데 진짜로 현신(現身)하라 독촉하기도 하니, 두목이 당도하는 곳마다 사람들을 꼬이고 협박해서 그로 인연하여 농간을 부리게 됨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입니다.

이 폐단이 백골징포(白骨徵布), 황구첨정(黃口簽丁)보다 더 심하건만 그래도 억울함을 드러내 호소하지 못하고, 고통이 뼛속에 사무쳐도 오히려 남이 알까 두려워 아무도 모르게 뇌물을 바치고 이웃에게도 스스로 숨기는 터입니다. 속담에 이른바 동무 몰래 양식 낸다’, ‘병 숨기고 약 구한다’, ‘가려운 데는 안 가리키고 남더러 긁어 달란다는 격입니다. 이 어찌 절박하여 부득이하고 지극히 난처한 사정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조금이라도 노비안(奴婢案)에 관련되기만 하면 딸 다섯을 두었더라도 사위로 들겠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머리가 하얗도록 생과부로 한을 품은 채 일생을 마치니 천지 음양의 화기(和氣)를 손상함이 또한 어떻다 하겠습니까. 수령이 이 문제로 죄를 얻는 경우가 전후로 종종 있었지만 이는 덮어 두고라도, 다만 국가를 위하여 천지의 화기를 맞아들이고 임금의 은택을 펴자면 빨리 이 폐단을 바로잡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저는 단지 안의(安義) 한 고을만 특히 심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을이 이와 같을진댄 다른 고을도 알 만하며, 한 도()가 이와 같을진댄 팔도에 대해서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명공(明公)께서 감사(監司) 자리로부터 들어와 새로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니 응당 이 일을 반드시 눈으로 겪어 본 바라, 그것이 폐단의 근원이 됨을 반드시 익히 살핀 바 있으리니 곧 임금을 연석(筵席)에서 뵈올 때의 첫 진언(陳言)은 이보다 중요한 문제가 없을 줄로 압니다.

구구한 마음에 오로지 천하의 근심을 남보다 먼저 근심해 주기를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 아무개는 두 번 절하고 올립니다.

 

 

[C-001]삼종질(三從姪) …… 편지 : 박종악(朴宗岳 : 1735~1795)은 자가 여오(汝五), 호는 창암(蒼巖)이다. 항렬로는 연암의 9촌 조카뻘이나 나이는 2세 연상이다. 영조(英祖)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주로 청현직(淸顯職)을 지냈으며, 정조(正祖) 즉위 초에는 홍국영(洪國榮)을 비판하다 파직되어 오랫동안 관직에서 떠나 있었다. 179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경기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792년 음력 1월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이 글은 이때 보낸 편지이다. 시노(寺奴)는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를 이른다. 이 글의 제목이 하풍죽로당집(荷風竹露堂集)에는 하족질종악입상인론시노비서(賀族姪宗岳入相因論寺奴婢書)’, 백척오동각집(百尺梧桐閣集), 운산만첩당집(雲山萬疊堂集), 동문집성(東文集成)에는 하족질배상인론시노서(賀族姪拜相因論寺奴書)’ 등으로 조금 다르게 되어 있다.

[D-001]심병(心病) : 마음속의 근심 걱정으로 인해 생긴 병을 말한다. 주역 설괘전(說卦傳) 감괘(坎卦) …… 사람에 대해서는 근심을 더함이 되고, 심병이 된다. …… 其於人也 爲加憂 爲心病고 하였다.

[D-002]5000 : 백척오동각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4000호로 되어 있다.

[D-003]맹자(孟子) …… 셈입니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 대인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大人者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고 했는데 그 주에 대인은 임금을 말한다. 임금이 백성을 응당 적자처럼 대한다면 민심을 잃지 않게 됨을 말한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노자(老子)  49 장에 성인(聖人)은 항상 사심이 없다,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는다.…… 성인은 모든 백성을 갓난아이처럼 여긴다.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聖人皆孩之고 하였다.

[D-004]꿈속에서도 : 원문은 夢魂之中인데, 백척오동각집에는 慌愡之中으로, 하풍죽로당집에는 蒙寐之中으로, 운산만첩당집에는 夢囈之中으로 되어 있다.

[D-005]두목(頭目) : 관청의 노비를 통솔하는 두목 노비를 이른다. 노비 10()마다 1구를 택하여 두목으로 정했다.

[D-006]팔세보(八世譜) : 8대의 조상까지 기록한 족보를 이른다.

[D-007]공포(貢布) : 지방에 거주하는 공노비가 신역(身役) 대신 나라에 바치던 베를 말한다. 영조 때 노()는 베 1, ()는 반 필로 공포를 삭감하였으며, 나아가 비의 공포를 폐지하였다. 1801(순조 1) 공노비가 해방되면서 공포의 징수도 완전 폐지되었다.

[D-008]일찍이 본명을 숨겨 : 원문은 嘗隱本名인데, 여러 이본들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09]백골징포(白骨徵布) : 조선 시대에 이미 죽은 사람을 생존해 있는 것처럼 명부에 등록해 놓고 강제로 군포(軍布)를 징수하던 일을 이른다.

[D-010]황구첨정(黃口簽丁) : 조선 시대에 다섯 살 미만의 젖내 나는 사내아이를 군적(軍籍)에 올려 군포를 징수하던 일을 이른다.

[D-011]동무 몰래 양식 낸다隱旅添粮 : 여행 비용으로 양식을 추렴하는데 길동무 모르게 내어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는 뜻으로, 힘만 들고 생색이 나지 않는 경우를 비유한 것이다. 송남잡지(松南雜識)에도 諱伴出糧이라 하여 같은 속담이 소개되어 있다. 정약용(丁若鏞) 이담속찬(耳談續纂)에도 동무 몰래 양식 내면서 제 양식은 계산 않는다.諱伴出粻 不算其糧는 속담이 소개되어 있다.

[D-012]노비안(奴婢案) : 노비의 호적으로, 20년마다 대추쇄(大推刷)하여 정안(正案)을 작성하고, 3년마다 소추쇄(小推刷)하여 속안(續案)을 만들었다.

[D-013]명공(明公) : 명성과 지위를 갖춘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D-014]그것이 폐단의 근원이 됨 : 원문은 其爲弊源인데, 백척오동각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諸般弊源으로 되어 있다.

[D-015]연석(筵席) : 임금이 학문을 닦는 경연(經筵)을 말한다. 정승은 경연의 영사(領事)를 겸하였으며, 경연이 끝난 뒤 그 자리에서 임금과 정치 문제를 협의하였다.

[D-016]천하의 …… 근심해 주기 : 원문은 先天下之憂而憂인데, () 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D-017]아무개 : 원문은 인데, 자신을 가리키는 겸칭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김 우상(金右相) 이소(履素) 에게 축하하는 편지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분이라 임금께서도 실로 그에 부응하시니 정승에 제수되던 날 저녁에 온 조정이 모두 감동하였거니와, 유독 이 백열(柏悅)의 소회로서는 더욱더 이마에 두 손을 얹고 축하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합하(閤下 정승에 대한 존칭)의 집안에 4()에 걸쳐 정승이 다섯 분 나오셨습니다. 정승의 지위와 중임은 일찍이 예전이라서 더 높고 오늘이라서 손색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멀리 역사책에서 찾을 것 없이 가까이 가정의 모범을 본받는다면 이야말로 백성들의 복이 될 것입니다.

화폐의 가치에 대해서 제 나름의 견해가 있기에 별지(別紙)에 기록하오니, 직위를 벗어난 참람되고 망녕된 말이라 책하지 말아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별지(別紙)

 

오늘날 백성의 근심과 국가의 계책은 오로지 재부(財賦 재화와 부세)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는 배가 외국과 통하지 않고 수레가 국내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생산된 재부는 항상 일정한 수량이 있어, 관에 있지 않으면 민간에 있게 된다. 그런데 공사간(公私間)에 다 고갈이 되고 상하가 모두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재(理財)하는 방법이 제 길을 얻지 못한 까닭이다.

대저 화폐의 가치가 높아지면 물건의 가치는 떨어지고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 물건의 가치는 높아진다. 물가가 오르면 백성과 나라가 함께 병들고 물가가 떨어지면 농민과 상인이 함께 해를 입는 것이다.

역대 조정에서 화폐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전에 엽전을 주조했으나 그나마 잠시 시행하다 이내 중지되었다. 진실로 포화(布貨 )와 저화(楮貨 지폐)는 비록 싸지만 다시 비싼 은화(銀貨)가 있어서 비싸고 싼 것 사이에 절충할 수 있었다.

무릇 위의 세 가지 화폐는 모두 백성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빨리만 만들어 내면 넉넉히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엽전은 사사로이 만드는 화폐가 아니고 관의 공급에 의존하고 있다. 당시 만든 양이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민간에 보급된 것도 미처 두루 퍼지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이 엽전의 사용을 불편하게 여긴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재부를 잘 다스리는 데에는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폐의 가치를 헤아려 물가를 조절하며, 막힌 것은 소통시키고 넘치는 것은 막아서, 화폐의 가치가 너무 오르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물건이 지나치게 비싸지거나 지나치게 싸지는 경우를 막는 것이다.

엽전이 세상에 통행된 지 113년이 지났다. 중앙에서는 호조(戶曹), 진휼청(賑恤廳), 오군영(五軍營)과 지방에서는 팔도(八道), 양도(兩都), 통영(統營)에서 대체로 각기 재차 혹은 3, 4차 주전(鑄錢)하였다. 그 만든 연도 및 수효는 해당 관청에 비치되어 있으므로 한번 조사하면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엽전이 관에 비축된 것이 얼마인지 파악하면 민간에 있는 것을 그에 따라 추정해 낼 수 있다. 백 년 사이에 마멸되거나 파손된 것, 물과 불에 손실된 것 등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대강 따져서 이를 제해도 관과 민간에 있는 현재 엽전의 총계는 적어도 수백만 냥이 될 것이다. 이를 엽전이 처음 사용되었을 때와 비교하면 아마 10배도 더 되는 양이다. 그럼에도 대소간에 황급해하면서 모두 돈 걱정을 않는 자 없으며, 심지어는 나라 안에 돈이 없다고도 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 엽전의 이름을 상평통보(常平通寶)’라 부른 것은 항상 물건과 균형을 유지하고자 함이다. 백성이 엽전을 사용한 지 오래되매 늘 보고 늘 써 왔기 때문에 다른 화폐는 무시하고 아울러 은화까지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엽전만 날마다 늘어나 물가는 날마다 오르게 되었고 모든 거래에 있어 엽전이 아니면 안 되게 되었다. 화폐의 흐름이란 기울어진 데로 쏟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물가가 오르면 돈이 어찌 거기에 쏠리지 않겠는가! 예전에 한푼 두푼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 혹은 서푼 너푼으로도 부족한 실정이다. 지금 엽전으로 물건과 균형을 유지하려면 몇 배가 들게 되었으니 이 어찌 엽전이 천해지고 화폐가 값싸진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국내의 재부에 대해 논하는 자들은 모두 돈이 귀하기 때문에 물가도 따라서 오른다 하니 어찌 생각을 못 함이 이다지도 심한가!

또한 은은 재부로서 으뜸가는 화폐이며 세상에서 모두 보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 민간 습속이 엽전에만 익숙하고 은화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은이 드디어 한낱 물건으로만 취급되고 화폐에는 들지 않게 되었다. 북경(北京)의 시장에서 팔지 않으면 곧 무용지물과 같은 것이다. 하정(賀正), 동지(冬至), 재력(䝴曆), 재자(䝴咨) 등의 사신 행차에 휴대하는 포은(包銀)이 매년 적어도 10만 냥은 될 것이니, 10년을 합계하면 100만 냥이나 되는 것이다. 이로써 조달하여 실어서 돌아오는 것이란 한갓 털모자일 뿐이다. 털모자는 한 해 겨울만 지나도 해져 못 쓰는 것이다. 천 년이 가도 부서지지 않는 보물을 들고 가서 한 해 겨울에 해져 못 쓰는 것을 바꿔 오고, 산천에서 캐내는 한정이 있는 재화를 실어서 한번 가면 다시 못 올 땅으로 보내 버리니 천하의 졸렬한 계책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하겠다.

간접적으로 듣건대 국내에 당전(唐錢 청 나라 동전)을 통용시켜 전황(錢荒 화폐 부족 현상)을 구제하기로 하고 이번 동지사 편에 들여오도록 허락하였다 하는데, 이는 결코 옳은 계책이 아니다. 엽전은 바람, 서리, 홍수, 가뭄 등의 재해를 받는 것도 아닌데, 어찌 곡식이 큰 흉년을 만난 것처럼 ()’이라 일컫는가. ‘이라 일컫는 까닭은 돈길이 너무도 혼잡해져서 마치 벼논에 우거진 잡초를 제거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뜻이다.

중국의 산해관(山海關) 바깥 지역에서 문은(紋銀) 1냥으로 동전 7()를 교환해 준다고 한다. 1초는 163푼으로 한 꿰미가 되니, 우리나라 엽전으로 기준을 삼아 보면 1냥의 은이면 대개 엽전 11 4 1푼을 얻을 수 있으니 거의 10배의 이익을 보는 것이다. 모든 운반비를 제하더라도 5, 6배의 이익은 된다. 저 역관들은 한갓 자기들의 목전의 이익만 탐하고 국가의 장구한 계책은 알지 못하여, 수십 년 이래 밤낮 오직 당전의 통용을 소원하고 있다. 이는 그야말로 화살 가는 데 따라 과녁 세우기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의 화폐가치가 하락함에 따라 온갖 물가가 뛰어오르고 있는데, 어찌 외국의 조악한 화폐를 들여다가 통화의 유통을 스스로 흐리게 한단 말인가. 털모자는 오히려 서민들의 방한의 용구인데도 은으로 바꾸어 오는 것이 불가하거늘, 하물며 역관배들의 일시적인 조그만 이익을 위해서 팔도에서 산출되는 귀중한 은을 쓸어다가 북경의 시장에다 밑 빠진 독을 만들어 쏟아 붓는단 말인가. 그 이해득실은 환히 알기 쉬워 굳이 지혜 있는 자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명백한 것이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먼저 돈길을 맑게 하고 우선 은화가 북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막는 것밖에 없다.

어떻게 돈길을 맑힐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엽전을 사용한 이래로 구전(舊錢)보다 좋은 것이 없다. 구전은 모두 견고하고 중후하며 글자체도 분명하였는데, 임신 · 계유 연간에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동시에 엽전을 주조하면서 느닷없이 옛 방식을 바꾸어 납과 철을 많이 섞은 데다 두께가 너무 얄팍해서 손만 대면 쉬이 부서질 정도였다. 그리하여 엽전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으로 간주되어 맨 먼저 돈의 재앙을 만들었으니, 물가가 치솟은 것은 실로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그 후 계속 만들 때마다 그 크기가 갈수록 줄어들어, 지금의 신전(新錢)과 함께 섞어서 꿰미를 만들면 신전은 구전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서 돈을 세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돈의 난잡함이 이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지금 옛날의 오수전(五銖錢)과 삼수전(三銖錢)의 제도를 모방해서 어디서든 현재 있는 구전 한 닢을 신전 두 닢에 해당하도록 하고, 일제히 돈꿰미를 바꾸면 대소가 즉시 구분될 것이니 새로 돈을 주조하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고도 앉아서 백만 냥을 얻을 수 있다. 비록 크고 작은 돈을 함께 통행시키더라도 가치의 경중에 따라 달리 쓰면 민심을 거스르지 않고 화폐가 잘 유통될 것이다. 임신 · 계유 연간에 세 영문(營門)에서 주조한 엽전은 큰 것도 구전만 못하고 작은 것은 신전과 맞지 않아 이미 격식에 어긋나고 형체마저 너무 얇고 졸렬하니 모두 통용을 정지시켜 저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돈길이 맑아질 것이다.

은화가 빠져나가는 것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관과 민간에 소장되어 있는 토산의 은괴를 그냥 부숴서 화폐로 삼지 말고, 모두 호조로 바치게 해서 일률로 닷 냥, 열 냥으로 크고 작은 덩어리를 만들어 천마(天馬)나 주안(朱雁)의 모양을 박아서 원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10분의 1의 세를 받는다. 그리고 교역한 당전은 국내에 들이지 못하게 하고 의주(義州)에 유치시켜 두었다가, 뒤에 나가는 사행의 노자에 충당시킬 것이다.

무릇 사행의 수행원도 마땅히 긴요치 않은 인원은 감해야 할 것이다. 서장관(書狀官)의 경우에 그 소임이 외교의 임무를 맡은 것도 아니요 직분이 종사(從事)와도 다른데, 그 식량이며 마부와 말 등 일체 번다한 비용은 따로 사신 한 사람의 몫이 들며 잡심부름하는 하인들을 많이 대동하고 양방(兩房)에 의존하여 취사를 해결한다. 그가 가고 오는 것은 본래 중국 측에서 알 바 아닌데도 무릇 잔치를 베풀고 상을 하사하는 자리에서 전례에 따라 염치없이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매우 부당한 일이요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구차스럽기 짝이 없다. 세 명의 대통관(大通官 벼슬이 높은 역관) 이외에 무릇 압물종사(押物從事)는 모두 감원함이 옳고, 사자(寫字), 도화(圖畵), 의관(醫官)의 직임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의 수행 비장(裨將)들에 분배시키며, 기타 무상종인(無賞從人)과 의주 상인은 일체 엄금하고, 무역하는 데 있어서는 약재 이외에는 일체 함부로 내가지 못하게 한다면 변경의 관문이 엄중해지고 국내에 은화가 저절로 풍족하게 될 것이다.

 

 

 

시국에 절실한 말로서 한() 나라 가산(賈山)과 당() 나라 육지(陸贄)와 같은데, 문장을 지은 것은 도리어 더욱 고아(古雅)하고 간결하다.

 

[C-001]김 우상(金右相)에게 축하하는 편지 : 김이소(金履素 : 1735~1798)는 자가 백안(伯安), 호는 용암(庸庵),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김창집(金昌集)의 증손이다. 연암과는 약관 시절부터 친구였다. 영조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이조 판서를 거쳐 정조 대에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이 글은 그가 1792년 음력 10월 우의정에 제수되었을 때 보낸 편지인데, 하풍죽로당집에는 하김우상인론전폐경중서(賀金右相因論錢幣輕重書)’, 동문집성에는 하김우상이소인론천폐서(賀金右相履素因論泉幣書)’로 되어 있다.

[D-001]백열(柏悅) : 가까운 친구의 좋은 일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육기(陸機)의 탄서부(歎逝賦)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뻐하고, ! 지초가 불에 타니 혜초가 탄식하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文選 卷16

[D-002]별지(別紙) : 김택영(金澤榮) 연암집 중편연암집에는 천폐의(泉幣議)’ 또는 상김우상이소천폐의(上金右相履素泉幣議)’라는 제목으로 별도로 수록되어 있다.

[D-003]엽전이 …… 지났다 : 숙종 4(1678)에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한 일을 두고 한 말이다.

[D-004]오군영(五軍營) : 훈련도감(訓鍊都監),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을 말한다.

[D-005]양도(兩都) : 강도(江都)와 송도(松都), 즉 강화부(江華府)와 개성부(開城府)를 가리킨다.

[D-006]대소간에 : 원문은 大小인데, ‘小大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7]하정(賀正), 동지(冬至), 재력(䝴曆), 재자(䝴咨) : 하정은 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하러 중국으로 가는 사행이고, 동지는 동짓날을 축하하러 가는 사행이며, 재력은 중국으로부터 역서를 받아 오는 것이고, 재자는 중국과의 외교문서인 자문(咨文)을 가지고 왕래하는 것을 이른다.

[D-008]포은(包銀) : 사행(使行)의 여비 조달을 위해 인삼 열 근씩 담은 꾸러미 여덟 개 즉 팔포(八包)를 가져가도록 하다가 인삼 대신 그 값에 상당하는 은()을 가져가도록 했는데, 이를 포은이라 한다.

[D-009]이로써 …… 뿐이다 : 열하일기 일신수필(馹汛隨筆) 7 22일 조를 보면, 영원위(寧遠衛) 지나 산해관(山海關) 조금 못 미쳐 중후소(中後所)란 곳에 대규모 털모자 공장이 셋이나 있으며 사신 행차에 동행한 우리나라 의주(義州) 상인들이 그곳의 생산품을 대량 수입해 간다고 하면서, 그로 인한 은화 유출을 비판하였다. 중후소의 털모자 공장에 관해서는 김창업(金昌業)과 홍대용(洪大容) 등의 연행록에도 소개되어 있다.

[D-010]산천에서 …… 실어서 : 원문은 載採山有盡之貨인데, 국립중앙도서관 필사본에는 載採山川有盡之貨로 되어 있다. 이어지는 대구(對句) ‘輸之一往不返之地를 감안하면 후자처럼 1구가 8자로 되어야 옳다. 또한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은조(銀條)에도 이와 유사한 以山川有限之材 輸一往不返之地라는 구절이 있어 이를 참조하여 번역하였다.  열하일기 일신수필 7 22일 조에는 以採山有限之物 輸一往不返之地라 하여 山川이 아니라 으로 되어 있다.

[D-011]국내에 …… 허락하였다 : 정조 16(1792) 10월 은() 부족에 따라 포은을 채우지 못하게 된 역관들의 생계 대책과 전황(錢荒) 해소를 위해 청 나라 동전을 수입하기로 하자 평안 감사 홍양호(洪良浩)가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가 우려한 대로 청 나라가 대청회전(大靑會典)에 동철(銅鐵)의 외국 유출을 금한다는 규정을 들어 불허함에 따라 동전 수입이 실현되지는 못했다. 正祖實錄 16 10 6 · 19, 17 2 22

[D-012]문은(紋銀) : 청 나라에서 화폐로 쓰이던 은을 이른다. 말굽 모양이라 하여 마제은(馬蹄銀)이라고도 부른다.

[D-013]임신 · 계유 연간 : 각 군영의 경비 조달을 이유로 중앙의 세 영문(營門)으로 하여금 전년부터 주조하게 한 상평통보 44 4000냥의 주조가 임신년(1752, 영조 28) 7 1일 완료되었다. 당시 주조된 동전은 원료 부족 때문에 크기가 약간 축소된 중형(中型) 상평통보였다.

[D-014]지금의 신전(新錢) : 정조 9(1785) 7월 정언 이민채(李敏采)가 상소하여 전황(錢荒) 대책을 건의한 것을 계기로 호조에서 주관하여 상평통보 67만 냥을 새로 주조하게 하였다.

[D-015]오수전(五銖錢)과 삼수전(三銖錢)의 제도 : 오수전이 처음 통행될 때 이전에 있던 삼수전과 차등을 두고 교환되었던 사실을 말한다. 오수전은 무게가 5()로서 한() 나라 무제(武帝) 원수(元狩) 5(기원전 118)에 처음으로 주조되어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 나라 때까지 통용되다 당() 나라 건국 초에 폐지되었다. 삼수전은 오수전에 앞서 한 나라 무제 건원(建元) 1(기원전 140)에 처음으로 주조되었으나 무게가 너무 가벼워 위조하기 쉬웠으므로 4년 뒤에 주조가 정지되었다.

[D-016]너무 얇고 졸렬하니 : 원문은 薄劣인데, ‘劣薄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7]주안(朱雁) : 붉은색의 기러기로 서조(瑞鳥)의 하나이다.

[D-018]종사(從事) : 원래 여러 가지 직책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사행의 실무를 맡은 관원을 말한다. 예컨대 방물 호송을 맡은 관원을 압물종사(押物從事)라 한다.

[D-019]양방(兩房) :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가리킨다. 부사를 부방(副房), 서장관을 삼방(三房)이라 한다.

[D-020]무상종인(無賞從人) : 응상종인(應賞從人)과 달리, 청 나라 황제로부터 상을 하사받는 명단에 들지 못하는 비공식 수행원을 가리킨다.

[D-021]가산(賈山) : 전한(前漢) 때의 인물로, 문제(文帝)가 백성들이 사사로이 돈을 주조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인 도주전령(盜鑄錢令)을 폐지하자 가산이 글을 올려 강력히 반대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격절(激切)하여 문제가 끝내 처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D-022]육지(陸贄) : 754~805. () 나라 때의 인물로, 덕종(德宗) 초에 한림학사가 되어 주자(朱泚)의 반란이 일어나자 황제의 조서를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이 간절하여 무인들조차 조서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고 한다. 그 후 재상이 되어 폐정(弊政)을 논하고 가혹한 조세제도를 혁파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그가 황제에게 올린 글들이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라는 책으로 남아 있는데 그 글이 대부분 시국에 절실한 내용들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현풍현(玄風縣) 살옥(殺獄)의 원범을 잘못 기록한 데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사람이 급소를 맞으면 주먹 한 방, 발길질 한 번으로도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법률 조문에서 논한 바 있거니와, 이번에 김복련(金福連)이 유복재(兪福才)를 치사(致死)한 사건은, 그 뇌후(腦後), 인후(咽喉), 양과(兩胯) 등 여러 곳에 다친 흔적이 극히 낭자하여, 상처의 치수를 재어서 합쳐 보면 거의 두어 자에 이르니 시장(屍帳 검시 기록)을 살펴보건대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그 정범(正犯)의 확정에 있어, 초검(初檢)에서는 삭손(朔孫)에게 무게를 두었으나, 복검(覆檢)에서는 복련으로 논단하였으니, 간증(看證)이 앞뒤로 진술을 달리한 점을 보면 임기응변으로 잘못을 감싸려는 의도가 없지 않습니다.

복련은 곧 삭손의 아비요, 삭손은 바로 복련의 자식입니다. 아무리 살인죄수라 할지라도 윤리는 있는 법인데 부자간에 그 죄를 서로 떠넘기다니 과연 어떤 인간들입니까? 판정 자체의 경중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바야흐로 죽기 살기로 싸우면서 주먹과 발길이 마구 오가면 비록 이웃 사람이라도 당연히 머리를 풀어뜨린 채로 달려와서 싸움을 말릴 터인데, 그 자식된 자가 아무리 배가 아파 아랫목에 드러누워 있었다.’고 말하지만 어찌 방문을 굳게 닫고 있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일의 곡직(曲直)과 싸우게 된 연유를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분김에 몸을 돌보지 않고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 나가서 제 힘껏 협공하여 아비를 위험에서 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성난 주먹 아래 비록 당장 상대가 죽어 넘어지더라도 제 몸을 스스로 묶고 관청에 자수하여 살인범이 되기를 청하기에도 겨를이 없겠거늘, 어찌 부자가 죽음을 다투는 마당에 이같이 느긋하게 있었겠습니까?

시골구석의 어리석은 백성이 망녕되이 부자가 함께 살아날 꾀를 내어 이같이 이랬다저랬다 하고 진술한 것이니, 정상을 참작하여 죄를 판정할진대 우발적인 살인의 죄는 작고, 꾸며서 둘러댄 죄는 크다 하겠습니다. 과연 가까운 이웃이 증언한 바와 같다면, 싸움터에 나아가 용기가 없는 것도 오히려 효도가 아니라고 일컬었거늘 하물며 불반병(不反兵)의 원수와 만나 싸움에 있어서겠습니까.

복검에서 원범(元犯 주범)이 뒤바뀐 것은 풍속과 교화에 크게 관계되는 일이니 삭손이 사실을 자백하기 전에는 이 옥사가 바로될 수 없습니다. 각별히 조사해서 다시 주범과 종범을 가려내야만 실로 옥사를 신중히 다루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가히 편언절옥(片言折獄)이라 하겠다.

 

[C-001]현풍현(玄風縣) …… 답함 : 1792(정조 16) 연암은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는 길에 감영에 들렀다가 당시 경상 감사 정대용(鄭大容)의 부탁으로 도내의 의심스러운 옥사들을 심리하는 일을 맡아 이를 공정하게 처리했다고 한다. 이 편지를 비롯하여 연암집 2에 수록된 옥사에 관한 편지 4통은 모두 이 일로 경상 감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글들이다. 過庭錄 卷2

[D-001]뇌후(腦後) : 정수리의 숨구멍 자리인 백회(百會)의 뒤쪽을 말한다.

[D-002]양과(兩胯) : 두 넓적다리 사이 부분, 즉 샅을 말한다.

[D-003]상처의 …… 합쳐 보면 : 원문은 分寸之地인데, 검시할 때 영조척(營造尺)이나 관척(官尺)으로 상처의 길이와 깊이가 몇 푼() 몇 촌()인지 재는 것을 말한다. 10푼이 1촌이고, 10촌이 1()이다.

[D-004]간증(看證) : 간증(干證), 즉 범죄에 관련된 증인을 말한다.

[D-005]싸움터에 …… 일컬었거늘 : 예기(禮記) 제의(祭義)에서 증자(曾子)가 효()에 대하여 제자인 공명의(公明儀)에게 말하기를, “몸이라는 것은 부모가 남겨주신 유체(遺體)이니, 부모의 유체를 움직임에 어찌 감히 신중하지 않겠는가. 행동거지를 장중하게 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관직에 나아가 신중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붕우 사이에 신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싸움터에 나아가 용맹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다. 이 다섯 가지를 실천하지 못하면 그 비난이 부모에게 미칠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겠는가.身也者 父母之遺體也 行父母之遺體 敢不敬乎 居處不莊 非孝也 事君不忠 非孝也 莅官不敬 非孝也 朋友不信 非孝也 戰陳無勇 非孝也 五者不遂 灾及其親 敢不敬乎 하였다. 원문에서 전진무용(戰陣無勇)’  자가 예기에는 으로 되어 있으나, 뜻은 같다.

[D-006]불반병(不反兵)의 원수 : 불반병은 집으로 돌아가서 병기를 찾지 않는다는 말로서, 언제나 병기를 몸에 지니고 있다가 상대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죽이려 든다는 뜻이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 아버지의 원수는 한 하늘을 함께 이지 않고 반드시 죽이며, 형제의 원수는 집으로 돌아가서 병기를 찾지 않으며, 벗의 원수와는 같은 나라 안에서 살지 않는다.父之讐 弗與共戴天 兄弟之讐 不反兵 交遊之讐 不同國 하였다.

[D-007]편언절옥(片言折獄) : 한마디 말로 판정을 내림을 말한다.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자로(子路)에 대하여 한마디 말로 옥사를 판정할 수 있는 자는 아마도 자로일 것이다.片言可以折獄者 其由也與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밀양(密陽) 김귀삼(金貴三)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예로부터 의옥이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밀양 사람 김귀삼이 그 사위 황장손(黃長孫)을 치사케 했다는 사건은 의혹이 극심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초검에서는 실인(實因 사망 원인)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것이라 하였고, 복검에서의 실인도 역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것이라 했는데, 이번의 삼검(三檢)에서는 갑자기 강요당했다는 뜻의 피핍(被逼)’ 두 글자를 덧붙여 실인을 삼았으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별다른 본 것이 있어서 이 같은 단안을 내린 것입니까?

대저 이 옥사는 이미 세 차례 검험(檢驗 검시)을 거쳤으나 내내 어림짐작이어서, 상처난 자국의 치수에 가감된 것이 많았을 뿐 아니라 활투두(活套頭)인지 사투두(死套頭)인지조차도 분명치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논단하면서 검안(檢案)에 자상하고 소략함이 심하게 차이 난다 하여 초검과 복검을 모조리 의심하고 삼검에만 무게를 두어서는 물론 안 될 것입니다.

대개 장손이 목을 맨 것은 딴 여자를 얻어 들인 데서 발단하였고, 소를 두고 다툰 데서 결과한 것이니 저 길 가는 사람이 사연을 듣더라도 당연히 그 장인에게 의심을 많이 둘 것입니다. 하물며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검관(檢官 검시관)의 도리로서 혹시 숨은 무엇이 있을까 끝까지 캐 보려고 한 것은 필연적인 형세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때에 목매달아 죽은 나무에 대해 가까운 곳을 피하고 먼 곳을 대는 등 진술이 여러 번 뒤바뀌니, 묵은 의심 새 의심이 무진무진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삼검의 실인에 있어 갑자기 피핍이란 단안이 덧붙여진 까닭입니다.

이른바 피핍이란 말은 겉으로 얼핏 보기에는 긴요하고 무게 있는 말인 듯 보이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따져 보면 이렇다 할 형적이 없는 것입니다. 혹 뜻밖에 의심을 받거나 일이 당초 마음먹은 것과 어긋날 경우에, 빈정대는 것도 아니요 나무라는 것도 아니나 오는 말이 가시가 돋쳐, 낯이 뜨거워지고 속이 타서 더더욱 답답하고 원통할 때가 있습니다. 이 쓰라리고 괴로운 심경을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이겠습니까마는, 조급하고 경망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자살하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른바 피핍이란 것은 왕왕 이와 같은 것으로서, 원인이야 비록 남 때문이지만 죽음은 스스로 자행한 것이니, 지금 비록 피핍이란 두 글자를 덧붙인다 해도 옥사의 진상에는 별로 가중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의심 갈 만한 자취를 들어 용서할 만한 정상을 참작해 본다면, 남편과 아내, 장인과 사위 사이에 일찍이 눈 부라리고 말다툼한 적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무슨 소 찾는 일로 인하여 어찌 암암리에 살해할 리가 있겠습니까? 또 그 의복을 망가뜨리고 문기(文記)를 찢어 버린 것을 보면 비록 정을 아예 끊어 버린 듯도 하지만, 상놈들이란 분이 나면 들이받고 치고 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일인지라 조금 지나 술을 받아 함께 취토록 마시고 한이불 속에 자고 나면 묵은 감정은 하마 풀리고 옛 정이 되살아나는 법인데, 졸지에 스스로 목매달았다는 것은 실로 상정이 아닌 것입니다.

대저 장손의 자결은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새로 사들일 논값은 얼마이며, 전에 기르던 소값은 얼마인가, 딴 여자에게 장가가던 첫날밤부터 온갖 계획이 이 소 한 마리에 달려 있었는데, 급기야 소를 찾으러 와서는 비단 당초의 계획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무한한 비웃음과 꾸지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속담에 이른바 내 칼도 남의 칼집에 들어가면 빼기 어렵다는 격이라, 분김에 멍청한 꾀를 내어 죽어 버리겠다는 말로 남을 위협하겠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농지거리한 것이 마침내 참말로 되어 버린 것일 수가 있습니다. 둘째, 남의 권고를 받아들여 애써 딴 여자를 보았으나 소까지 몰고 이 집을 아주 떠난다는 것은 제 본심이 아니었으며, 전에 살던 곳을 잊기가 어려워 옛집을 다시 찾아갔으나 두루 질책만 쏟아져 몸 둘 곳이 없었으며, 옛날을 그리는 정은 심중에 간절했지만 성깔 사납고 투정 많은 계집은 돌아보는 척도 않아서 한밤중에 서성대고 기다려도 그림자도 발자국 소리도 영영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속담에 이른바 게도 잃고 구럭도 잃었다는 격이어서, 떠나기도 어렵고 있기도 어려워 원망과 후회가 한꺼번에 몰려드니 술김에 슬픈 생각이 일어나서 차라리 죽어 버리고 만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정상을 헤아려 보면 반드시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또한 정세를 들어 말하더라도 귀삼은 늙고 잔약한 몸이요, 장손은 힘 있는 장정이니, 설사 귀삼이 정말로 몰래 해칠 계획을 지녔더라도 장손이 어찌 남에게 제 목을 매라고 내맡기고 손 하나 까딱 않으며 그대로 얽어매였겠습니까. 설혹 늑살(勒殺 목 졸라 죽임)이라 한다면 어찌하여 빨리 구렁에 밀어넣어 그 흔적을 없애 버리지 않고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시친(屍親 피살자의 친척)에게 급급히 통부(通訃 부고)를 했겠으며, 기필코 검험하고 말 관가에 허둥지둥 알리어 자진해서 원범이 되어 스스로 죽을 땅에 들어갔겠습니까? 통탄할 바는 목매단 장소를 끝내 곧이곧대로 말하지 아니하여 옥사의 진상에 의혹을 자아내게 한 것인데, 오직 저 어리석은 백성이 헛되이 사중구생(死中求生)의 꾀를 내어 이와 같이 어물어물한 것이요, 장손이 제 손으로 목 매어 제가 죽은 것만은 매한가지입니다. 등유목(燈油木)에 목을 매었건 도리목(都里木)에 목을 매었건 간에 그 죄에는 그다지 경중의 차이가 있지 않은 것인데, 즉시 장소를 바른대로 대지 않은 것은 그 행동을 따져 보면 비록 교활하고 흉악한 듯하나 그 정상을 헤아려 보면 그다지 괴이히 여길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건은 오직 가볍게 처벌하는 것이 진실로 옥사를 신중히 하는 도리가 되는 것이니, 재량하여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C-001]의옥(疑獄) : 죄상이 뚜렷하지 아니하여 죄의 유무를 판명하기 어려운 사건을 이른다.

[D-001]활투두(活套頭)인지 사투두(死套頭)인지 : 투두(套頭)는 자살할 때 쓰는 올가미를 말한다. 활투두는 올가미의 고를 움직여 죄었다 늦추었다 할 수 있어 살아날 수 있는 것이고, 사투두는 고를 단단히 매어 옴짝달싹할 수 없으므로 죽게 되는 것이다.

[D-002]문기(文記) : 소유권이나 기타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로, 문권(文券)이라고도 한다.

[D-003]등유목(燈油木) : 나무로 만든 등잔걸이를 가리키는 듯하다.

[D-004]도리목(都里木) : 서까래를 받치는 도리로 쓰이는 재목을 말한다.

[D-005]옥사를 …… 도리 : 원문은 審恤之道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에는 審愼之道로 되어 있다. 앞의 편지에서도 審愼之道라 하였을 뿐 아니라 이는 재판과 관련하여 흔히 쓰는 표현이므로, 이에 따라 고쳐서 번역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함양(咸陽) 장수원(張水元)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함양 사람 장수원이 한조롱(韓鳥籠)이란 계집을 치사한 사건에 있어 초검과 복검이 모두 스스로 물에 빠진 것으로 실인을 삼았으나, 조서를 반복하여 살펴보고 그 정실(情實)을 참작해 보면, 조롱이 수원에게 위협과 핍박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처녀의 몸으로 남의 곁방살이를 하는 처지라, 비록 몹시 부끄럽고 분하지만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고 형편이 너무나 궁하여 어디 갈 곳조차 없는지라 저 맑고 깨끗한 못만이 그녀의 몸을 깨끗이 보존할 만한 곳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비록 수원이 드잡이하여 밀어 넣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순결을 지키는 처녀로 하여금 이렇게 물에 빠져 죽는 원한을 품게 만든 것이 그놈이 아니고 누구란 말입니까! 그 정상을 추궁해 가면 그놈이 어떻게 제 목숨을 내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후 진술에서 그 말이 여러 번 변했으니 이는 교활하고 완악한 습성이 그 강포한 자취를 은폐하려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강간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곁방의 처녀가 무엇 때문에 끌려갔겠으며, 제 놈이 끌어가지 않았으면 조롱의 머리털이 어찌하여 뽑혔겠으며, 지극히 분통한 일이 아니라면 뽑힌 머리털을 무엇 때문에 꼭 간직해 두었겠습니까. 이 한 줌의 머리털을 남겨 어린 남동생에게 울며 부탁한 것은 한편으로는 그날에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증거로 삼자는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죽은 뒤에라도 원한을 씻을 자료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이른바 이를 잡다가 유혹하고, 길쌈을 하다 말고 유혹했다거나 호미를 전해 주러 왔다가 싸우고, 버선을 잃어 버려 싸웠다고 한 진술들은 이 옥사에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수원이 강포한 짓을 한 증거물은 오직 이 머리털이요, 조롱이 죽도록 항거한 자취도 오직 이 머리털이니, 몸은 비록 골백번 으깨지더라도 이 머리털이 남아 있는 이상 보잘것없는 이 머리카락 하나로도 옥사의 전체를 단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심하는 자리에서 형적만을 가지고 따져, 죽게 된 책임을 본인에게 돌리고 상대에게는 그저 위협과 핍박을 한 죄율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로써 판결을 끝낸다면 어찌 죽은 자의 울분을 조금이나마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정상을 참작하고 행동을 헤아려 보면 위협과 핍박을 했다는 죄율은 마침내 너무도 경한 편이니, 중한 편을 따라 논하여 강간미수의 죄율로 처벌하는 것이 아마도 적절할 듯합니다.

 

 

두 편의 글 모두 진상을 깊이 파고들었으며 문장을 지은 것이 시원스럽고 유창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밀양(密陽)의 의옥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밀양부(密陽府)의 통인(通引) 윤양준(尹良俊)이 중 돈수(頓守)를 치사한 사건에 대하여 초검 및 복검이 모두 매를 맞은 것으로 실인을 삼았는데, 이 옥사는 시친(屍親)의 고발이 없는 이상, 법리로 따져 보면 관에서 지레 검시한 것은 벌써 옥사의 체통에 어긋난 것입니다. 다만 절의 중이 유리(由吏)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두서없이 돈수의 일을 언급했는데 거기에,

 

지난번 돈수가 통인청(通引廳)에서 형벌로부터 풀려날 때 절곤(折困)을 당하여 그로 인해 병사했으니 이런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시오.”

라고 했다는 말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 말이 아주 모호하기는 하지만 절곤(折困)’이란 두 글자는 극히 수상합니다. 더구나 그 사단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관속(官屬)에게서 일어난 일이므로, ‘병사했다는 대목은 미처 자상히 살펴보지도 않고 먼저 절곤이란 말에만 마음이 동요했던 것입니다. 뒤이어, 혐의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바로 가서 초검을 시행한 것인데, 급기야 본 사건을 규명해 보니 몇 대의 태형(笞刑)으로 위엄을 보인 데 지나지 않았은즉, ‘절곤 두 글자는 저절로 허망한 고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초에 이 절곤이란 말로 인해서 검험을 했던 것이나 끝내 그 말뜻을 알 수 없었으며, 매 맞은 자국밖에 다른 상처나 병환의 증거를 찾아보았으나 늘 실상에 들어맞지 않은 듯하였으며, 끝까지 조사하려고 해도 더 이상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왕좌왕 옥사가 이루어지고 꼭 맺혀 풀리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무릇 타박상을 입어 목숨을 잃은 경우는 반드시 행흉(行凶)한 기장(器仗 도구)이 있기 마련이니, 행흉한 기장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내면 이 옥사가 당장에 해결될 것입니다. 하관(下官 연암 자신을 가리킴)의 얕은 소견으로는 절곤 두 글자는 바로 결곤(決棍)’의 오기인 듯합니다. 결곤이건 결태(決笞)건 볼기를 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그다지 용처(用處)의 경중을 따질 것이 못 됩니다. ‘()’ ()’로 바꾸어 발음하는 것은 상놈들의 통폐요, ‘()’ ()’으로 잘못 기록한 것은 무식한 소치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보는 자의 선입견이 절납(折拉 부러뜨림) ()’ 자에 놀라고, 곤박(困迫 곤욕을 보임) ()’ 자에 더욱 현혹된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 통인들이 다 같이 했다고 나서자 주범과 종범을 분별하기 어렵게 되니, 마치 힘을 모아 함께 두들겨 패서 낭자하게 상처를 입힌 일이 있는 것처럼 되었으며, 뭇 중놈들이 일제히 병을 앓았다고 칭하여 증언들이 덩달아 똑같고 보면, 그들이 관속을 두려워하여 숙의한 끝에 입을 맞춘 것이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러기에 전후의 검관들이 감히 그 정상을 경솔히 논하지 못한 것이요, 여러 해를 두고 결말을 못 지은 것도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다만 옥사의 진상을 들어 판단한다면 15대의 태형으로 어찌 목숨을 잃을 리가 있으며, 더욱이 두서너 곳의 상처도 급소가 아니지 않습니까? 대개 각 고을의 통인들이 종이 자르는 판자를 장척(長尺)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그놈들 두목이 항용 쓰는 볼기 치는 막대인즉, 통인들이 이것으로써 벌을 시행하는데 더러는 속여서 ()’라고도 합니다. 중들이 이 장척을 잘못 보고서 혹시 ()’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는 것이니, 상식적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검관이 된 사람들은 마땅히 먼저 그 절곤이 무슨 말인가를 신문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결곤의 오기였다면, 또한 마땅히 그것이 과연 곤장(棍杖)이었는지 태장(笞杖)이었는지를 자상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 아니고 라 말한다면, 또한 마땅히 그 크기가 어떤 종류인가를 자상히 분별하여, 매를 맞은 자국과 대조해 본다면 판자에 맞은 흔적인지 태를 맞은 흔적인지를 그 자리에서 저절로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야 태형의 여부와 병환의 진위(眞僞)도 따라서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진술들을 참조하고 검증해 보면, ‘조갈증이 나서 물을 찾다가 계단에서 떨어져 돌에 부딪쳤다느니 방을 되게 달구어 땀을 내느라 이렇게 짓무르게 되었다느니 하였는데, 열병으로 미친 증상이 생기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요, 달군 구들에 살이 데어 부풀어 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지금 이 실인으로 단지 매 맞은 것만을 장부에 기록한다면 옥사의 체통이 서지 못할 것이며, 원범을 유독 수번(首番)에게만 뒤집어씌운다면 더욱 원통한 죄가 될 것입니다. 재량하소서.

 

 

진상을 깊이 파고들었다.

 

[C-001]밀양(密陽) …… 답함 :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 이전(吏典) 어중조(馭衆條)에 이 편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지통통인(紙筒通引)이 절에서 매달 만들어 바치는 지물(紙物)을 퇴짜 놓는 것으로 위세를 부리니 불가불 단속해야 한다면서, 산청현(山淸縣)의 수통인(首通引)이 지장(紙匠) 승려를 곤장 쳐 죽였으나 검안(檢案) 결곤(決棍)’ 절곤(折困)’으로 잘못 기록되는 바람에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옥사를 연암이 마침내 해결했다고 하였다.

[D-001]유리(由吏) : 수령의 해유(解由)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아전, 즉 지방 고을의 이방 아전을 이른다.

[D-002]결곤이건 결태(決笞) : 조선 시대의 형()에는 죄의 경중과 형구(刑具)에 따라 태형(笞刑), 장형(杖刑), 곤형(棍刑)의 세 종류가 있었다. 결곤은 가장 가혹한 곤형을 가하는 것이고 결태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태형을 가하는 것이다.

[D-003]() …… 소치입니다 : 원문은 折決易音 常漢之通患 困棍誤書 無識之所致인데, 목민심서 이전 어중조(馭衆條)에 인용된 구절은 決折通音 常漢之依例 棍困誤讀 無識之所致로 되어 있다.

[D-004]수번(首番) : 목민심서 이전 어중조의 내용으로 미루어, 통인의 우두머리인 수통인(首通引)을 가리키는 듯하다. 통인의 임무 중의 하나는 당직을 서는 수번(守番)이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진정(賑政)에 대해 단성 현감(丹城縣監) 이후(李侯)에게 답함

 

 

보내 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봄날이 쌀쌀한데 정무에 분망하신 몸이 더욱 안중(安重)하시다니 우러르고 그리던 마음이 매우 흐뭇합니다.

그런데 보내 주신 편지에,

 

()라 예라 이르지만, 기민(飢民) 구제를 이른 것이겠는가?”

라는 대문이 있으니, 말이 어긋날 뿐더러 생각지 못함이 어찌 그리도 심합니까! 지난번에 갈 길이 바빠서 긴 이야기는 못 하고, 다만 예()를 진정에도 적용할 만하다고 말했지요. 말이 비록 두서를 갖추지 못했지만 스스로 짐작이 있어서 한 말이었는데, 밑도 끝도 없을 뿐더러 갑자기 한꺼번에 끄집어내었으니 그대는 본래의 사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갑자기 해괴하게 듣고는 도리어 그 말을 구실로 삼아 나를 오활하고 괴벽스러워 실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비웃었습니다. 오활한 점이 진실로 나에게 있으니 마음에 달게 받겠습니다마는, 만약 기민 구제가 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이르신다면 어찌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 군자가 정치를 하면 어디에 가도 예 아닌 것이 없는데, 하물며 진정은 국가를 다스리는 큰 정사요 많은 목숨이 매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비록 운한(雲漢)’을 상고해도 관련 예의를 상고할 길 없고, 향음주례(鄕飮酒禮)가 화락한 데 비해 비참한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먹이는 것을 ()’라 하고 노인에게 잔치 베푸는 것을 ()’이라 하여 모두가 의식(儀式)이 있으니, 백성이 주리다 못해 달려들면 그 빈궁을 구해 주는 것을 진휼(賑恤)이라 하는데 유독 여기에만 규칙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온 고을 백성들을 모아 놓고서 먹이기로 하면 와 같고, ‘이라는 점에서는 잔치와도 같은데, 남녀가 섞여 앉고 어른 아이가 자리를 다투니 어찌 이렇게 분별이 없고 질서가 없습니까?

지난번에 이러고저러고 말한 것은 주린 백성에게 읍양(揖讓)을 행하자는 말도 아니요, 진휼하는 마당에서 여수(旅酬)를 본받자는 것도 아닙니다. 쪽박으로 조두(俎豆 제기(祭器))를 익히자는 말도 아니요, 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사하(肆夏)에 맞추어 걸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에게 섭자(攝齊)를 힘쓰라는 것도 아니요, 부황 난 사람에게 유철(流歠)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개 예의란 일이 생기기 전에 방지하자는 것이요, 법률이란 일이 생긴 뒤에 금하자는 것인데, 저 기민들이 얼굴빛은 부어터지고 의복은 남루하며 바른손에는 쪽박을 들고 왼손에는 전대를 들고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모양으로 허리 굽혀 관정(官庭)에 나아오고 있으니, 그들이 아무리 불법적인 행동을 한다 해도 누가 능히 금지하겠습니까.

지난번 진주(晉州)를 가는 길에 귀하의 고을을 경유하였습니다. 마침 진휼하는 날이라 수천 수백 명의 주린 백성들이 문 부근에 모여들었는데, 관아의 문은 안으로 닫히고 문지기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말을 세우고 한참 동안 기다렸으나 통과할 길이 없었습니다. 뭇 사내 뭇 계집들은 늙은이를 부축하거나 어린애를 이끌고, 혹은 관문을 두들기며 크게 외치기도 하고 혹은 이러니저러니 떠들어 대며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 외모를 보면 모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숨넘어가는 형상이었으나 그 뜻을 살피면 모두 다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둠을 믿고 당당한 기세가 있었습니다.

얼마 후 하찮은 교졸(校卒)이 와서 뭇 백성에게 타이르기를, “새벽부터 죽을 끓이는데 솥은 크고 쌀은 많고 하여 무르익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우선 잠깐만 기다려 주면 곧 불러들이겠다.”고 하자, 군중이 성을 내며 일제히 일어나 떼로 덤벼들어 그 교졸을 두드려 대어 옷을 찢고 갓을 부수고 머리칼을 잡아당기고 수염을 뽑는 등 못 하는 짓이 없었으며, 한 사람은 갑자기 제가 제 코를 쳐서 피를 내어 낯에 바르고 큰소리로 사람 죽인다!” 외치니 뭇 백성들이 모두 함께 외치기를, “아전이 주린 백성을 친다!” 했습니다.

저들이 비록 사정이 급하여 진휼을 받자고 문 열기를 재촉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나, 그 야료 꾸미는 것을 보면 이만저만 놀랍고 두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후에 손님 연암을 가리킴을 맞기 위해 문이 드디어 열리자 군중들이 뒤죽박죽으로 한꺼번에 관정에 밀어닥쳤으며, 이어서 음식을 제공하니 그 시끄러움은 저절로 사라졌습니다.

이날 광경은 문밖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대는 듣도 보도 못 했을 것입니다. 피차 인사를 차린 뒤에, 그대가 먼저 아까 문을 닫은 이유에 대해,

 

백성들 사는 곳이 각각 멀고 가까움이 있으므로 여기 오는 것도 선후가 있어서, 먼저 온 자는 부엌을 에워싸고 불을 쪼이며 끓이는 죽이 절반도 안 익어서 뭇 쪽박으로 지레 휘저어 대니 온 솥이 무너질 지경이므로, 부득불 문을 잠그고 백성을 못 들어오게 하여 일제히 모이기를 기다린 것이지 감히 손님을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라고 말하여, 마침내 주인과 손님이 서로 한바탕 웃었지요. 그런데 아까 목도한 광경을 거론하지 않았던 것은, 비단 이야기가 장황한 데다 좌중에 진정을 감찰하는 감영(監營)의 비장(裨將)이 있어 처음 보는 그 사람에게까지 번거롭게 알릴 필요가 없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굶주린 백성은 비유컨대 오랜 병에 시달린 아이와 같아서,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리면 그 부모된 자는 아무쪼록 잘 타일러서 그 뜻을 순순히 받아 줄 따름이지, 어찌 그때마다 꾸짖고 나무라기를 평소와 같이 할 수야 있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자(孔子)는 말씀하기를 정령(政令)으로써 이끌고 형법으로써 단속하면 백성은 죄를 면하기는 하나 염치가 없어지고, 도덕으로써 이끌고 예의로써 단속하면 염치도 가지려니와 바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법률로 백성을 이기기보다 차라리 예의로 굴복시키는 것이 낫다 하겠으니, 왜 그렇겠습니까? 법률로 강요하자면 형벌과 위엄이 뒤를 따르게 되고, 예의를 사용하게 되면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앞을 서게 됩니다. 백성 중에 만약 위엄과 형벌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내가 법률을 무서워하는 자에게는 이길 수가 있지만 무서워하지 않는 자에겐 도리어 지게 되는 것인데, 더더구나 주림을 빙자하고서 마구 대드는 자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

무릇 인지상정으로 부끄러이 여기는 것은 가난과 굶주림보다 더함이 없고 잠시 동안은 한 사발 국물에도 염치를 차리는 법입니다. 이래서 내가 그들의 고유한 본성을 따라서, 그들을 위해 혐의를 사지 않게 남녀를 가르고 어른 아이의 순서에 따라 줄을 만들고 사족(士族)과 서민의 명분을 구별하여, 질서 정연하게 서로 넘어서지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있는 힘을 다해 양식을 달라고 부르짖지만 그것이 제 본심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무섭게 하는 것은 부끄럽게 만드는 것만 못하고, 억눌러 이기는 것은 순순히 굴복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른바 죄는 면하되 염치가 없어진다는 것은 이김을 두고 이름이요, ‘염치도 가지려니와 바르게 된다는 것은 굴복시킴을 두고 이름입니다.

지금 영남은 온 도가 불행히도 대흉년을 만나서 대대적인 진휼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고을 수령된 자는 힘을 다해 곡식을 마련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민을 가려 뽑는 마당에, 어느 누가 감히 백성을 어린아이 돌보듯이 하는 조정의 성대한 마음을 본받고 우리 임금의 근심 걱정하시는 마음의 만의 하나나마 보답하려 아니 하오리까! 더더구나 잘잘못을 가려 승진시키고 벌주는 일이 이 한 번의 거행에 달렸으니, 두려워하고 삼가고 경계하고 독려하다 보면, 명예를 구하는 겉치레로 돌아가기도 쉽고, 위로하고 구호하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다가 도리어 감사할 줄 모른다는 한탄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공진(公賑)이든 사진(私賑)이든 뒷날에 계속하기 어려움을 생각지도 아니하고, 공이 되든 죄가 되든 대부분 목전의 미봉책만 힘씁니다. 준비한 곡물도 많고 구제한 민중도 많으며 모든 진정에서 잘못한 고을이 없다 할지라도, 다만 두려운 것은 진정을 철회한 뒤입니다. 겨우 연명해 가던 남은 목숨을 무슨 수로 구제하며, 은혜만 바라고 사는 안이한 풍속을 장차 무슨 법률로 억누른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말한 예의란 것은 통상적인 진휼 방식을 버리고 별도로 다른 법식을 마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쌍히 여기고 어루만져 주는 속에서도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나눠 주고 먹여 주기 전에 먼저 그 염치부터 길러서, 반드시 남녀는 자리를 구분하고 어른 아이는 자리를 따로 하고 사족은 앞에 앉히고 서민은 그 아래에 자리 잡게 하여 각각 제자리를 찾고 서로 차례를 어지럽히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 되면 죽을 나눠 줄 때 남자는 왼편으로 여자는 바른편으로 되어 요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질서 정연할 것이며, 늙은이는 앞서고 젊은이는 뒤로 서서 요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양하게 될 것이며, 곡식을 나눠 줄 때에 앞에 있는 자가 먼저 받는다 해서 시새우지 않으며 아래에 있는 자가 차례를 기다려도 다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말한 저 예의란 것이요 기민 구제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선생이 평소에 육 선공(陸宣公 육지(陸贄))의 글을 몹시 즐기셨는데, 지금 이 글을 읽어 보니 특히 자양(紫陽 주자(朱子))의 글과도 닮았다. 자양 부자(紫陽夫子)도 역시 선공(宣公)의 글을 좋아하셨던가?

 

[C-001]진정(賑政) …… 답함 : 진정은 흉년을 만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사(政事)를 말한다. 단성은 안의현 이웃에 있던 고을로 현재는 산청군에 속한 면이다.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이후(李侯)’ 다음에 영조(榮祚)’라 하여 단성 현감의 이름을 밝혀 놓았다.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1793(정조 17) 봄에 연암은 자신의 녹봉을 털어 진정을 베풀 때 예법에 맞추어 질서를 유지했으며, 그 뒤에 이웃 고을 수령과 진정을 논한 장문의 편지가 문집에 실려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편지를 가리킨다. 또한 이 편지를 읽은 사람들은 진정을 논한 주자(朱子)의 글과 같은 법도가 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D-001]() …… 것이겠는가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예라 예라 이르지만, 옥백(玉帛)을 이른 것이겠는가?禮云禮云 玉帛云乎哉라고 한 말을 흉내낸 것이다. 공자의 말은 형식적으로 예물만 갖추고 진정한 예가 결여된 경우를 비판한 것이었는데, 단성 현감은 기민 구제의 경우에는 구태여 예를 갖출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D-002]비웃었습니다 :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그다음에 그 형세가 실로 그러하고란 뜻의 其勢固然’ 4자가 더 있다.

[D-003]운한(雲漢) : 시경 대아(大雅) 운한을 가리킨다. 이 시는 주() 나라 때 큰 가뭄을 만나 하늘에 기우제를 올리며 불렀던 노래라 한다.

[D-004]향음주례(鄕飮酒禮) …… 있습니다 : 원문은 視諸鄕飮 而舒慘有間인데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舒慘 舒疾로 되어 있다. 그러면 향음주례가 여유 있는 데 비해 서두르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D-005]먹이기로 …… 같은데 : 원문은 以饋則似犒 以養則同讌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以犒則似 以養則同으로, 하풍죽로당집에는 以犒則似師 以養則同燕으로 되어 있다.

[D-006]읍양(揖讓) : 향음주례에서 주인과 손님이 상견례를 할 때,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하는 읍()을 세 번하고 계단에 먼저 오르기를 세 번 양보하는 예법을 말한다.

[D-007]여수(旅酬) : 향음주례에서 헌작(獻爵)의 예식이 끝난 다음에 손님들이 장유(長幼)의 순서에 따라 돌아가며 술잔을 받는 것을 말한다.

[D-008]사하(肆夏) : () 나라 때의 궁중음악인 구하(九夏) 중의 한 곡으로, 사자(死者) 대신 제사를 받는 시()가 묘문(廟門)에 들어설 때와 나갈 때 이를 연주했다고 한다. 周禮 春官 大司樂 또한 예기 옥조(玉藻)에 옛날의 군자는 채제(采齊)의 곡에 맞추어 달려가고 사하(肆夏)의 곡에 맞추어 걸었다.趨以采齊 行以肆夏고 하였다.

[D-009]섭자(攝齊) : ()에 오를 때 옷자락을 끌어당김으로써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함과 동시에 공경의 뜻을 표하는 예법을 말한다.

[D-010]유철(流歠)하지 말라 : 예기 곡례(曲禮)에 기록된 식사 예법의 하나로, 염치없어 보이므로 죽이나 국물을 단번에 후루룩 들이켜지 말라는 뜻이다.

[D-011]정령(政令)으로써 …… 된다 : 논어 위정(爲政)에 나온다.

[D-012]잠시 …… 법입니다 : 원문은 斯須之廉 在於豆羹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 평상시는 형을 공경하되 잠시 동안은 향리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다.庸敬在兄 斯須之敬 在鄕人라고 하였고, “밥 한 그릇과 국 한 사발을 얻으면 살고 못 얻으면 죽을지라도, 야단치면서 주면 길 가던 사람도 받지 않으며 발로 차서 주면 거지도 더럽다고 여긴다.一簞食 一豆羹 得之則生 弗得則死 嘑爾而與之 行道之人弗受 蹴爾而與之 乞人不屑也 하였다.

[D-013]그들을 위해 : 원문은 爲之인데,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與之로 되어 있다.

[D-014]공진(公賑)이든 사진(私賑)이든 : 원문은 公私之間인데, 공진은 공곡(公穀 : 관곡)으로 기민을 구제하는 것이고 사진은 수령이 자신의 봉급을 털어 기민을 구제하는 것이다.

[D-015]대체(大體) : 맹자 고자 상(告子上) 몸에는 귀한 부분과 천한 부분이 있고 중대한 부분과 사소한 부분이 있다. 사소한 부분으로써 중대한 부분을 해치지 말고 천한 부분으로써 귀한 부분을 해치지 말지니, 사소한 부분을 기르는 자는 소인이 되고 중대한 부분을 기르는 자는 대인이 된다.”고 하였고, “대체(大體)를 따르는 자는 대인이 되고 소체(小體)를 따르는 자는 소인이 된다.”고 하였다. 집주(集註)에 몸에서 천하고 사소한 부분은 입과 배요, 귀하고 중대한 부분은 마음과 뜻이라 하였다. 대체는 천부적인 도덕심, 소체는 눈과 귀 등의 감각기관을 뜻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진정에 대해 대구 판관(大邱判官) 이후(李侯) 단형(端亨) 에게 답함

 

 

지붕에서 비둘기가 울어 비가 내렸다 날이 갰다 하니, 완연히 꽃이 피도록 재촉하는 날씨로구려. 먼 곳의 아지랑이는 눈에 가물거리고 관아 연못의 푸른 물엔 그림자 잠겼는데, 송사(訟事)하는 사람 자취 없고 동헌 뜰에 아전들도 다 물러가서 오늘에야 잠시 한가한 시간을 우연히 얻으니, 비로소 한 돌 만에 태수(太守)의 즐거움을 짐작하겠소. 뒷짐을 지고 난간을 돌면서 딴 사람 아닌 바로 그대를 향해 그리운 생각을 시로 읊었는데 때마침 그대의 편지가 내 앞에 홀연 떨어지니, ‘서로 그리워하는 정이 마음으로 통하매 산천도 그 사이를 떼어 놓진 못한다고 이를 만하외다.

영남 전도(全道) 일흔두 개 고을이 불행히 흉년을 만나서 모두 대대적인 진휼을 시행하고 있으니, 오늘날 목민(牧民)의 관리가 된 자는 기민(飢民)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가려 뽑기를 생각하고 구휼할 양식에 대해서는 널리 모으기에 힘을 쏟자니, 근심은 쌓이고 심신은 고달파서 어찌 억척스레 고생하고 초췌하지 않을 수 있겠소? 더구나 대구는 감영이 있는 업무 많은 고을이라 눈앞에 넘쳐나는 어려움이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 되지 않소. 매양 한 도내 수령들의 편지를 받아 보면, 근심과 번뇌가 너무 지나쳐서 이맛살을 찌푸리는 빛이 지면(紙面)까지 드러나고 신음하는 소리가 붓끝에 끊어지지 아니하므로, 편지를 보고 나서는 미상불 그들을 대신하여 마음이 편안치 못했소. 그런데 그대 같은 낙천적이고 활달한 성격으로도 자기도 모르게 역시 이런 태도를 지을 줄은 몰랐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소?

허허! 우리나라의 인재 등용하는 길은 너무도 좁아서 과거(科擧)를 거치지 아니하면 아무리 학식이 천리(天理)와 인사(人事)를 꿰뚫어 알고, 재주가 문무(文武)를 겸비했다손 치더라도 진실로 출세할 길이 없소. 지금 조정에서 활개를 치며 백성과 나라를 위해 대책을 세우고, 정치와 교화에 참여하고 협찬(協贊)한다는 사람치고 대과(大科)에 급제하지 않고 진출한 자가 누가 있단 말이오? 그다음은 소과(小科)에 급제한 뒤에라야 비로소 음관(蔭官)으로 보직되어 겨우 벼슬아치 명부에 이름이 오르게 되나, 낭서(郞署) 사이를 헤어나지 못하고 그저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오직 수령으로 나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읍황(邑況)의 후박(厚薄)을 계산하고 토산물의 유무나 묻게 되니, 그 스스로 처신하는 것이 하천배나 다름이 없다오. 비록 명색이야 백성을 다스린다 하지만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으며 그저 명을 받들어 행하기에만 분주하여, 인사고과(人事考課)할 때 꼴찌가 될까 두려워할 뿐이고 고을의 폐단이나 백성의 고통 따위는 마음 쓸 겨를이 없지요. 그럴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아무리 그 병폐를 바로잡고자 해도 일이 자기 손을 거치지 않으니 형세상 어쩔 도리가 없지요.

그러므로 능란한 사람은 장부 처리나 조심하고 창고 관리나 엄중히 하여 죄나 안 지으면 다행으로 여길 따름이니, 그 평생의 포부를 한번 펴 볼 기회란 유독 기민을 구휼하는 한 가지 일뿐일 것이오. 나나 그대가 크게는 대과 급제를 못 했을 뿐더러, 작게는 또한 진사(進士)가 되지 못했으니, 둘다 따분한 백도(白徒)요 여항(閭巷)의 미천한 신세라 실없는 얘기나 하고 날을 보내는데, 제 딴에는 그래도 유생 차림으로 거들대지만 그것은 남루해진 지 이미 오래며, 임시변통으로 양반이라 칭하지만 외람된 짓이라 부끄러울 뿐이지요. 머리는 허옇고 얼굴은 누렇게 뜬 채 당세에 대한 희망을 끊었더니, 늙마에 일명(一命)으로 잇달아 동료가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오! 비록 옛사람의 강사(强仕)의 나이는 넘었다 할지라도 그 직책에서 소임을 다하기로 할진댄 아직도 남은 날들이 있소이다. 오륙 년이 다 못 가서 그대는 이미 중요한 고을을 두 번째나 맡게 되었고 나 역시 현감 한 자리를 얻었으니, 이런 대흉년을 만나서 백성을 구제하고 은혜를 베풀려던 포부를 펼 기회가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소? 정사에 마땅히 전력을 다하여 씀바귀도 냉이처럼 달게 여겨야 할 텐데, 어쩌자고 신세를 한탄하고 딱한 꼴을 스스로 짓는단 말이오?

내 신세를 돌이켜 보건대 오십 년 동안 겨우 끼니를 때우고 쌀독도 자주 비어 내 몸도 주체하지 못하던 주제에, 임금의 은혜를 두터이 입어 갑자기 부자 영감이 되어, 뜰에는 수십 개의 가마솥을 벌여 놓고 1400여 명의 못 먹어 부황 들어 쓰러져 가는 동포들을 불러다가 한 달에 세 번씩 먹이는 즐거움을 실컷 누리니, 즐거움치고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또 어디 있겠소?

저 장공예(張公藝)가 구세동거(九世同居)할 때에 애써서 참았다는 것이 무슨 일이었겠소? 공자는 이것을 참을진댄 어느 것인들 못 참으랴?” 하였고, 맹자는 사람이란 다 저마다 남에 대해 차마 못 하는 마음이 있다.”하였소. 성인도 참을 수 없는 일에 대해 참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참을 인()이라는 글자를 한 번만 써도 오히려 심하거늘 그 글자를 백 번이나 썼단 말이오? 그 백 번을 참을 때에 골머리가 아프고 이맛살이 찌푸려져서 온 얼굴에 주름살이 가로세로 곤두서고 모로 잡혔을 테니, 양미간(兩眉間)에는 내 천() 자요, 이마 위에는 북방 임() 자가 그려졌을 것이 뻔한 일이오. 눈으로 보고도 참으면 장님이 되고, 귀로 듣고도 참으면 귀머거리가 되고, 입으로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면 벙어리가 되는 셈이지요. 어질지 못한 일이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싹을 잘라 버리자면 마음 심() 위에 칼날 인() 자 하나면 족하거늘, 무엇 때문에 이 글자를 백 번이나 거푸 썼단 말이오?

이제 나는 즐거울 락() 한 자를 쓰니 무수한 웃음 소() 자가 뒤따릅디다. 이것을 미루어 나갈 것 같으면, 백세(百世)라도 동거(同居)할 수 있을 것이오. 이 편지를 개봉해 보는 날에 그대도 반드시 입 안에 머금은 밥알을 내뿜을 정도로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니, 나를 소소선생(笑笑先生)이라 불러 준대도 역시 마다하지 않겠소.

 

 

[C-001]진정에 …… 답함 : 판관(判官)은 감사(監司)를 보좌하는 종 5 품 벼슬이다. 경상 감영은 대구에 판관 1인을 두었다. 이단형은 자가 사장(士長)으로, 음보(蔭補)로 출사하여지방관을 전전하였다. 그는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의 이종 사촌으로 반남 박씨가의 인척이 되었으므로, 합천 화양동의 야천(冶川) 박소(朴紹)의 묘소를 정비하는 데 성금을 보태기도 했다. 이 편지는 1793년에 지은 글로 과정록 2에 관련 사실과 내용 일부가 언급되어 있다. 燕巖集 卷1 陜川華陽洞丙舍記》 《近齋集 卷13 答外弟李士長端亨

[D-001]지붕에서 …… 하니 : 염주비둘기斑鳩가 울면 비가 내린다고 하여 이를 환우구(喚雨鳩)라고도 부른다. 또한 우기(雨期)를 구우(鳩雨)라고도 한다.

[D-002]태수(太守)의 즐거움 : 구양수(歐陽修)의 취옹정기(醉翁亭記)에서 여민동락(與民同樂)하는 태수의 즐거움을 서술하였다.

[D-003]낭서(郞署) : 조선 시대에 육조(六曹)의 정랑(正郞 :  5 ) · 좌랑(佐郞 :  6 ), 기타 실무를 담당하는 6품 관원을 이르던 말이다.

[D-004]읍황(邑況) : 읍징(邑徵) 또는 관황(官況)이라고도 한다. 고을의 각종 판공비 명목으로 전세(田稅)에 부가하여 거둬들이던 쌀이나 돈을 가리킨다. 牧民心書 戶典 稅法下》 《壬戌錄 査逋狀啓》 《瓛齋集 卷9 與溫卿

[D-005]백도(白徒) : 벼슬하지 못한 유생(儒生) 즉 유학(幼學)을 말한다.

[D-006]임시변통으로 …… 뿐이지요 : 원래 양반이란 동반(東班)과 서반(西班) 즉 문관과 무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운산만첩당집, 백척오동각집, 하풍죽로당집 등에는 兩班 生員으로 되어 있다.

[D-007]일명(一命) : 처음에 최하위 관등(官等)을 하사받고 정식 관리가 되는 것을 말한다.

[D-008]강사(强仕) : 40세의 별칭으로 예기 곡례 상(曲禮上), “나이 40을 강()이라 하며 벼슬에 나아간다.四十曰强而仕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D-009]씀바귀도 …… 텐데 : 시경 패풍(邶風) 곡풍(谷風) 누가 씀바귀를 쓰다고 했나, 내게는 냉이처럼 달구나.誰謂荼苦 其甘如薺라고 하였다. 버림받은 자신의 고통이 씀바귀보다 더 쓰다는 뜻인데, 이 편지에서는 어떤 고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D-010]내 몸도 주체하지 못하던 : 원문은 不閱我躬인데, 시경 패풍 곡풍에 내 몸도 주체하지 못하는데 나의 후생 자손들을 걱정할 겨를이 있으랴.我躬不閱 遑恤我後라고 하였다.

[D-011]장공예(張公藝) ……  : 장공예는 9대가 함께 동거하여 북제(北齊), (), () 등 세 왕조에서 그 집에 정표(旌表)를 내렸다. 당 고종(唐高宗)이 그 집에 행차하여 친족 간에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이에 장공예가 참을 인() 자 백여 자를 써서 올렸더니, 고종이 훌륭히 여겨 비단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小學 卷6 善行

[D-012]이것을 …… 참으랴 : 논어 팔일(八佾)에서 공자가 계씨(季氏)에 대해 팔일무를 뜰에서 추게 하니 이것을 참을진댄 어느 것인들 못 참으랴?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라고 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D-013]사람이란 …… 있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말이다. 남에 대해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여 주는 예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긴다고 하였다.

[D-014]소소선생(笑笑先生) : 소소(笑笑)는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는 뜻이다. () 나라의 저명한 서화가 문동(文同)의 호()가 소소선생이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남 직각(南直閣) 공철(公轍) 에게 답함

 

 

금년(1793) 정월 16일에 형이 지난 섣달 28일 띄운 서한을 받고서 비로소 형이 내각(內閣 규장각)에 재직하고 있음을 알았으며, 바삐 서한을 펴 보고 또한 평안히 계심을 알았소이다. 그런데 반도 못 읽어서 혼비백산하여 두 손으로 서한을 떠받들고 꿇어 엎드려 머리를 땅에 조아렸소.

대개 사신(私信)이기는 하지만 임금의 명령을 받든 것이라,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두렵더니 뒤따라 눈물이 마구 쏟아졌소. 진실로 위대한 천지는 만물을 기르지 않음이 없고, 광명한 일월은 미물이라도 비추지 않음이 없음을 알게 되었소. 그러나 글방의 버려진 책이 위로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대궐을 더럽힐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소?

이곳은 천 리나 동떨어진 하읍(下邑)이지만 임금의 위엄은 지척(咫尺)이나 다름이 없고, 이 몸은 제멋대로 구는 일개 천신(賤臣)이건만 임금의 말씀은 측근의 신하를 대할 때나 차이가 없으며, 엄한 스승으로서 임하시고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가르치시어 임금의 총명을 현혹시킨 죄로 처형을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한 편의 순수하고 바른 글을 지어 속죄하도록 명하셨으니, 서캐나 이 같은 미천한 신하가 어이하여 군부(君父)께 이런 은애(恩愛)를 입는단 말이오.

! 명색이 선비로 이 세상에 태어난 자가 몸소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이 교화를 펴는 시대를 만나고도,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듯이 화목하고 평온한 음향을 발하고, 서경(書經) · 시경(詩經)과 같은 저작을 본받아 임금의 정책(政策)을 아름답게 표현함으로써 국가의 융성을 드날리지 못하니 이는 진실로 선비의 수치입니다. 더구나 나 같은 자는 중년(中年) 이래로 불우하게 지내다 보니 자중하지 아니하고 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아, 때때로 곤궁한 시름과 따분한 심정을 드러냈으니 모두 조잡하고 실없는 말이요, 스스로 배우와 같이 굴면서 남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했으니 진실로 이미 천박하고 누추하였소이다.

게다가 본성마저 게으르고 산만해서 수습하고 단속할 줄 몰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화로(畵蘆) · 조충(雕蟲) 따위의 잔재주가 이미 자신을 그르치고 또한 남까지 그르쳤으며, 부부(覆瓿) · 호롱(糊籠)에나 알맞은 글로 하여금 혹은 잘못된 내용이 전파됨에 따라 더욱 잘못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차츰차츰 패관소품(稗官小品)으로 빠져 든 것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위항(委巷)에서 흠모를 받게 된 것도 그러길 바라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문풍(文風)이 이로 말미암아 진작되지 못하고 선비의 풍습이 이로 말미암아 날로 퇴폐하여진다면, 이는 진실로 임금의 교화를 해치는 재앙스러운 백성이요 문단의 폐물이라, 현명한 군주가 통치하는 시대에 형벌을 면함만도 다행이라 하겠지요.

제 자신은 웅대하고 전중한 문체를 거역하면서 후생들이 고문(古文)의 법도를 계승하려 하지 않음을 탄식하고, 벌레 울고 새 지저귀는 소리나 좋아하면서 옛사람들은 듣지도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으니, 이로 말하자면 나나 그대나 마찬가지로 죄가 있다 하겠소. 지금에 와서는 도깨비가 요술을 못 부리고 상곡(桑穀)의 재앙이 저절로 소멸되게 되었으니, 그 본심을 따져 보건대 비록 잔재주에 놀아난 결과이기는 하지만 이는 진실로 무슨 심보였던가요? 스스로 종아리를 치며 단단히 기억을 해야겠소.

허물을 용서하고 죄를 용서하시니 임금의 덕화(德化)에 함께 포용되었음을 확실히 알았으며,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청아(菁莪)에 거의 자포자기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나나 그대나 죽도록 같이 힘쓸 바요. 어찌 감히 지난날의 허물을 고치고 뒤늦게나마 만회할 것을 급히 도모하여 다시는 성세(聖世)의 죄인이 되지 않도록 하지 않으리오

 

() 원서(原書)

 

 

서울에는 한 자가 넘게 눈이 내려 가죽옷을 껴입지 않고는 외출을 못할 지경인데, 남쪽 소식은 어떤지 몰라 애달프게 그리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요즘 정사(政事)에 수고로운 몸 안녕하신지요? 영남(嶺南)은 가뭄의 피해가 이루 다 볼 수 없을 지경인데, 귀하의 고을은 세금 독촉이며 기민 구제 사업으로 정신이 괴롭지나 않으신지 이것저것 삼가 염려되옵니다. 기하생(記下生)은 어지러운 진세(塵世)와 어수선한 몽상 속에서 예전의 저 그대로입니다.

지난번에 문체(文體)가 명() · ()을 배웠다 하여 임금님의 꾸지람을 크게 받았고 치교(穉敎) 등 여러 사람과 함께 함추(緘推)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또 내각(內閣)으로부터 무거운 쪽으로 처벌을 받아 죗값으로 돈을 바쳤습니다. 그 돈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내각에서 북청 부사(北靑府使)로 부임하는 성사집(成士執)의 송별연을 벌였는데, 대개 사집(士執)은 문체가 순수하고 바르기 때문에 이런 어명이 내렸던 것입니다. 낙서(洛瑞) 영공(令公)과 여러 검서(檢書)가 다 이 모임에 참여하였으니, 문원(文苑)의 성사(盛事)요 난파(鑾坡)의 미담이라,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워서 이에 아뢰는 바입니다.

어제 경연(經筵)에서 천신(賤臣 남공철)에게 하교하시기를,

요즈음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박 아무개의 죄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내 이미 익히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이자는 바로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結者解之)하게 해야 한다.”

하시고, 천신에게 이런 뜻으로 집사(執事)에게 편지를 쓰도록 명령하시면서,

신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을 지어 급히 올려 보냄으로써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라. 그러면 비록 남행(南行) 문임(文任)이라도 주기를 어찌 아까워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중죄가 내릴 것이다.”

하시며, 이로써 곧 편지를 보내라는 일로 하교하셨습니다.

이런 임금의 말씀을 들으면 필시 영광으로 여기는 마음과 송구한 마음이 한꺼번에 뒤섞일 줄 상상되오나, 다만 이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은 진실로 졸지에 지어 내기는 어려울 터이니, 어떻게 하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실로 유교를 돈독히 하고 문풍을 진작하며 선비들의 취향을 바로잡으시려는 우리 성상의 고심과 지덕(至德)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감히 그 만에 하나나마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집사는 허물을 자책하고 속죄해야 하는 도리상 더욱이 잠시라도 늦추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처지이나, 그 제목을 정하기가 딱하게도 쉽지 않으니,  · 청의 학술을 배척하는 한두 권 글을 지어서 올려 보냄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영남(嶺南) 산수기(山水記) 한두 권이나 혹은 서너 권을 순수하고 바르게 지어 냄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든 저렇게든 막론하고 두어 달 안에 올려 보내심이 어떨는지요? 편지를 보낸 것은 이 때문이며, 이만 줄입니다.

 

[C-001]남 직각(南直閣)에게 답함 : 남공철(南公轍 : 1760~1840)은 본관이 의령(宜寧)으로, 세손(世孫) 시절 정조(正祖)의 사부였으며 대제학을 지낸 남유용(南有容)의 아들이다. 1792년 전시(殿試) 급제 후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고 규장각 직각,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는 등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순조 때 더욱 현달하여 대제학,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당대의 문장가로 평판이 높았으며 문집으로 금릉집(金陵集) 등이 있다. 젊은 시절부터 연암을 비롯하여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과 교분이 있었다. 직각은 규장각(奎章閣)의 관직으로 정원은 1명인데 홍문관에 속한 정 3 품에서 종 6 품 사이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이 편지는 남공철의 편지와 함께 과정록 2에도 일부 소개되어 있다.

[D-001]글방의 버려진 책 : 원문은 兎園之遺冊이다. 원래 글방에서 아동들에게 가르치던 교재 따위를 토원책(兎園冊)이라 하는데, 자신의 저술을 겸손하게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여기서는 연암이 자신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가리켜 한 말이다.

[D-002]위로 ……  : 원문은 上汚龍墀之淸塵也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上汚 誤玷으로 되어 있다.

[D-003]임금의 …… 처형을 : 원문은 以兩觀熒惑之誅인데, 양관(兩觀)은 원래 궁궐 정문의 좌우에 있는 망루(望樓)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궁궐이란 뜻도 가지게 되었다. 공자는 노() 나라의 재상 직무를 대행하게 되자 난신(亂臣)인 대부(大夫) 소정묘(少正卯)를 노 나라 궁궐의 양관 아래에서 처형했다고 하여 양관지주(兩觀之誅)’란 성어(成語)가 생겼다. 또한 노 나라 임금과 제() 나라 임금이 회합한 자리에서 제 나라 측이 광대와 난쟁이의 유희를 공연하자 공자는 필부로서 임금의 총명을 현혹케 한 죄를 물어 그자들을 처형하도록 했다고 한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D-004]국가의 융성을 드날리지 : 원문은 鳴國家之盛인데, 한유(韓愈)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글에서 한유는 맹교(孟郊)와 같은 그의 벗들을 뛰어난 작가라는 뜻의 선명자(善鳴者)’라고 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노래하지 말고 크게 발탁되어 국가의 융성을 노래할 날이 오기를 염원하였다.

[D-005]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아 : 원문은 以文爲戱인데, 궁귀(窮鬼)와의 가상적인 문답을 통해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한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 같은 작품이 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은 글로 비난을 받았다.

[D-006]화로(畵蘆) · 조충(雕蟲) : 화로는 호로(葫蘆 표주박)를 그대로 따라 그린다는 말로 참신함이 없이 단순하게 남을 모방하는 것을 말하며, 조충은 벌레 모양의 글자蟲書를 새기듯이 자구(字句)를 수식하여 글을 짓는 것을 말한다.

[D-007]남까지 그르쳤으며 : 원문은 人誤로 되어 있으나, 과정록과 김택영(金澤榮) 중편연암집 등에는 誤人으로 되어 있다.

[D-008]부부(覆瓿) · 호롱(糊籠) : 부부는 항아리를 덮는다는 뜻이고 호롱은 종이로 농을 바른다는 뜻으로, 항아리 덮개로 삼거나 농이나 바르기에 족한 시원치 않은 글을 가리킨다.

[D-009]패관소품(稗官小品) : () 나라 말 청() 나라 초에 크게 유행했던 패관소설(稗官小說)과 소품산문(小品散文)을 가리킨다.

[D-010]후생들이 …… 탄식하고 : 원문은 嗟小子之不肯構인데, 서경 대고(大誥)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 나라 무왕(武王)이 이룩한 왕업을 계승하는 일을 집 짓는 데 비유하여, 아버지가 집 짓는 법을 확립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집터를 닦으려 하지 않으니 하물며 기꺼이 집을 얽어 만들겠는가?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고 하였다.

[D-011]벌레 …… 소리 : 자질구레한 소재를 다룬 소품산문을 풍자하여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D-012]나나 …… 하겠소 : 남공철도 패관소품을 즐겨 읽고 그 영향을 받았다. 1792년 음력 10월 그는 초계문신으로서 지어 올린 책문(策文) 중에 패관소품의 문체를 구사했다는 정조의 견책을 받고 지제교(知製敎) 직함을 박탈당했으며, 어명으로 규장각으로부터 죄를 추궁하는 편지를 받고 그에 대한 답서를 지어 올려야 했다. 正祖實錄 16 10 19 · 24 · 25

[D-013]상곡(桑穀) : 뽕나무와 꾸지나무를 말한다. () 나라 태무(太戊) 때 상과 곡이 조정 뜰에 솟아나 하루 만에 한 아름이나 자랐다. 그것을 본 태무가 두려워서 이척(伊陟)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이척의 말이 요얼(妖蘖)은 덕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는데 임금의 정치에 결함이 있는가 봅니다. 그러니 임금께서는 덕을 닦으소서.” 하였다. 태무가 그 말에 따라 덕을 닦자 상과 곡이 말라 죽었다고 한다. 史記 卷3 殷本紀

[D-014]청아(菁莪) :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출처를 둔 말로 인재를 기르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정조가 인재를 발탁 · 기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운산만첩당집에는 膏燭으로 되어 있다.

[D-015]지난날의 …… 것을 : 원문은 黥刖之補인데,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형벌을 받아 훼손된 몸을 온전하게 회복한다는 뜻으로, 개과천선과 같은 말이다. 식경보의(息黥補劓)란 성어가 있다. 또한 원문의 상유지수(桑楡之收)’ 아침에 잃은 물건을 저녁에 되찾는다(失之東隅 收之桑楡)’는 속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처음의 실수를 나중에 만회한다는 뜻이다.

[D-016]어찌 …… 않으리오 : 운산만첩당집에는 그다음에 차츰 순수하고 바르게 되고자 했으나 그래도 맹자에 나오는 풍부(馮婦)처럼 예전 솜씨를 다시 발휘하려는 버릇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 어찌 장자에서 말한 제 그림자를 피하려 하면서 해를 향해 달려가는 자가 아니겠는가?稍欲醇正 而猶不脫攘臂下車習氣 無乃畏影而走日中者耶라는 평어가 있어 글을 감상하는 데 참고가 된다.!

[D-017]기하생(記下生) : ‘기억해 주시는 아랫사람이란 뜻으로, 편지에서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상대방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하는 말이다.

[D-018]치교(穉敎) …… 하였습니다 : 치교는 심상규(沈象奎 : 1766~1838)의 자이다. 함추(緘推)는 함사추고(緘辭推考)의 준말로 6품 이상의 관원이 경미한 죄를 범한 경우 서면(書面)으로 죄를 추궁하고 서면으로 진술을 받는 것을 말한다. 심상규는 정조로부터 그의 이름과 자를 하사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792년 음력 11월 규장각 대교로서 함추를 받아 지어 올린 함답(緘答)이 구두(句讀)가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조의 견책을 받고 그 글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주해(註解)를 달아 올리라는 엄명을 받았다. 당시 심상규뿐만 아니라 패관소설을 즐겨 본 전과가 있던 김조순(金祖淳)과 이상황(李相璜)에게도 함추의 처분이 내렸다. 正祖實錄 16 10 24, 11 3 · 8

[D-019]성사집(成士執) : 사집은 성대중(成大中 : 1732~1809)의 자이다. 성대중은 호가 청성(靑城),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정조의 인정을 받아 규장각의 외각(外閣)인 교서관(校書館)에 오래 재직했으며 어명으로 문신들이 지어 올린 응제(應製)에서도 자주 장원을 차지했다. 정조 16 12월 정조는 성대중이 공령부체(功令賦體)로 지어 올린 글을 칭찬하면서 서얼 출신임에도 특별히 북청 부사에 임명하고 규장각에서 그의 송별연을 베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16 12 18》 《硏經齋全集 卷10 先府君行狀 이와 같이 성대중은 정조의 보수적인 문예 정책에 적극 부응하여 출세한 인물로, 연암과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남공철 등과도 교분이 깊었다.

[D-020]낙서(洛瑞) 영공(令公) : 낙서는 이서구(李書九 : 1754~1825)의 자이다. 이서구는 호가 척재(惕齋) · 강산(薑山)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함께 조선 후기 한시(漢詩) 4대가로 불린다. 승지를 영공(令公)이라고도 부른다.

[D-021]검서(檢書) : 서적의 교정과 서사(書寫)를 담당하는 규장각의 5~7 품 벼슬로 주로 서얼 출신들이 임명되었다. 당시 성대중을 위한 규장각의 송별연에는 승지 이서구, 규장각 직각 남공철, 서영보(徐榮輔)와 함께 검서로 이덕무와 유득공이 참여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1 年譜 壬子 12

[D-022]난파(鑾坡) :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규장각을 가리킨다.

[D-023]집사(執事) : 편지에서 상대방을 가리킬 때 쓰는 경칭이다. 여기서는 연암을 가리킨다.

[D-024]남행(南行) 문임(文任) : 남행은 조상의 공덕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거나 자신의 높은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오르는 벼슬, 즉 음직(蔭職)을 이른다. 문임은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종 2 품 벼슬인 제학(提學)을 이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족형(族兄) 윤원(胤源)씨에게 답함

 

 

새봄에 도()를 닦으시며 조촐하게 보중(保重)하신다는 소식 받잡고 흐뭇함과 동시에 하례를 드립니다. 족제(族弟) 5년 동안 벼슬살이에 지친 가운데 육순이 문득 다가오니, 귀가 순해져야 할 터인데 오히려 점점 막혀 가고 나이는 비록 더해 가나 더욱 쇠퇴해만 갑니다. 사람이 60년을 사는 것도 어찌 쉽게 얻겠습니까마는, ()를 들은 것이 거의 없으니 이것이 한탄스럽고 슬픕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화양동(華陽洞) 선묘(先墓)에 축관(祝官)을 썼다.’는 일은 아마도 아뢴 사람이 잘못 말한 것일 터입니다.

제전(祭田)을 되돌려 받은 것이 계축년(1793) 겨울이고, 그 이듬해인 갑인년에 종중(宗中)으로부터 비로소 의논이 정해져서, 본군(本郡 합천군)의 질청(秩廳)에 맡겨 해마다 한식(寒食)에 한 번 묘제(墓祭)를 지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해엔 한식이 이미 지나서 새로 의논하였던 것이 행해지지 않았으니, 호장(戶長)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말할 거리조차 안 됩니다. 또 다음 해인 을묘년에는 제가 한식날 관아에서 제물을 마련하고 삼가 십여 구의 제문을 지어 몸소 제사를 지냄으로써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을 폈으니, 호장을 쓸데없이 축관으로 덧붙일 까닭이 없었음은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본군의 공형(公兄)이 비로소 제전을 받으러 왔기 때문에 그와 함께 제전 이름과 면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진설(陳設)의 도식(圖式)을 참작하여 정해 주었으니, 대개 다음 해 한식부터 도식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할 작정이었습니다.

지난해의 다음 해는 바로 금년 병진년(1796)이라 호장의 행사는 의당 금년부터 비롯될 터인데, 한식이 다가오지 않아 제사는 아직 멀었으니, 보내신 편지 가운데 축관으로 호장의 이름을 썼다는 것은 과연 누가 보고 누가 전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축관을 쓰는 것이 타당하냐 부당하냐는 고사하고, 3년 동안에 호장이 본시 한 번도 제사를 지낸 적이 없었으니 아무리 축관을 쓰고 싶은들 어디다 썼겠습니까?

사실이 이처럼 판별하기 쉽고 전하는 말이 저토록 근거가 없는데도, 보내신 편지에 널리 예설(禮說)을 인용하여 분명하게 가르침과 꾸지람을 주시고, ‘누가 이런 의논을 주장했으며 누가 이런 일을 꾸몄는가?’ 하고 힐책을 내리셨습니다. 대저 이치에 통달하고 판별에 밝으신 우리 형님께서도 오히려 이러한 의심을 가지셨다면, 뭇사람들이 듣고 놀라 의심할 때 어느 누가 깨우쳐 주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모르는 결에 가슴이 서늘합니다.

무릇 선영을 받드는 일에 관해서는 설사 구구한 한 가지 소견이 있어 예()에 합당하다고 자신할지라도, 오히려 부형이나 일족들이 내가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어렵게 여기고 조심하고 두루 물어서 감히 선뜻 독단하지 못함은 진실로 경우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중론이란 통일시키기 어려운 데다가 사람마다 제각기 정성과 공경을 바침이 나와 똑같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함부로 근거 없는 일을 만들어 경솔히 혼자 시행하여 스스로 일족에게 죄를 짓고 식자에게 기롱을 받겠습니까? 사리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모두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는 아마 산소 아래 사는 여러 윤씨(尹氏)들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유독 원망과 노여움을 산 것은 대개 또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이후(李侯)가 제전을 되돌려 받기로 든 것은 과연 여러 윤씨들이 사실을 알려 줌으로 인해 나온 것인데, 이것을 서울에 있는 여러 박씨들과 멀리서 의논하기는 어렵고 안의와 합천은 거리가 백 리도 못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이후가 전후로 서신을 왕복하여 매양 저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때문에 여러 윤씨들은 마치 제가 이 토지를 주장하여 주고 빼앗는 것이 제 손에 달린 줄 생각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해 묘제를 올릴 때 여러 윤씨들로서 척분(戚分)을 일컫는 자 5, 6명이 번갈아 와서 만나 보니 대개는 모두가 토지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말이,

 

제전이 온데간데 없어진 지 여러 해인데 그것이 아무 곳에 숨어 있음을 적발해 낸 것은 우리들이었고, 그 본래 가격이 얼마인지 알아서 본래 가격을 물고 되돌려 받은 것도 우리들이었고, 서원의 선비들이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관에 소지(所志)를 올려 가로채려는 것을 우리 사또에게 힘껏 부탁하여 영원히 빼앗길 염려가 없도록 만든 것도 바로 우리들이었으니, 사리로 보아 마땅히 우리들에게 넘겨 도지(賭地)를 나누어 맡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저 질청은 일찍이 아무 애도 쓴 일이 없는데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앉아서 받고 있으니 우리들의 심정이 어찌 허탈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은 비록 순박하고 촌스럽지만 오히려 속셈을 내보였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의 공적은 많다 하겠지만, 이번에 질청에 제전을 맡긴 것은 바로 우리 종중의 중론이요 문중 제일 어른의 명령이외다. 내가 이웃 고을에 있기 때문에 나를 시켜 거행하게 한 것이니 나는 오직 받들어 시행할 뿐이오. 어찌 감히 중간에서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는 일이겠소!”

밤에 손님 한 사람이 혼자 왔는데 언사와 태도가 제 딴에는 자못 의젓스러웠습니다. 그는 깊이 탄식하며 한참 있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의 묘소인데 호장이 제사를 지내다니 혹시 고례(古禮)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까?”

저는 웃으면서,

 

그대는 진실로 고례를 아시오? 옛날엔 묘제를 지내지 않았는데 하물며 이미 천묘(遷廟)한 묘이겠소? 진실로 세대가 점점 멀어지면 묘역을 잃을까 두려워서, 옛날에 두었던 토지와 집을 묘지기하는 노속에게 맡기기도 하고 산 아래 사는 그 고장 선비에게 부탁하기도 하여 한 해에 한 번 제사 지내는 것은, 멀리서나마 그 상로지감(霜露之感)을 붙일 뿐만이 아니라 아무 집안의 선산임을 알려 주자는 까닭이지요. 세족(世族)이 토지를 질청에 맡기는 것은 그 의의가 대체로 같소. 노속의 성쇠와 존망은 일정하지 않고, 그 고장 선비나 군의 아전들도 제 족속이 아님은 마찬가지요. 그러나 질청이란 고을이 있는 날까지는 같이 있게 되어 백대를 가도 제사를 폐지하지 않을 수 있고 토지가 도중(都衆)에게 들어가면 한 사람이 마음대로 옮길 수도 없습니다. 이미 토지를 맡겼으면 토지를 받은 자가 제사 지내는 것일 뿐이외다. 어찌 꼭 예()의 고금(古今)과 사람의 귀천을 따지겠소.”

하였더니, 그 사람이 겉으로는 그럴 듯이 수긍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 듣자니 도리어 서원의 선비들과 합세하여 본군의 신임 사또에게 부탁해서 그 토지를 옮겨서 서원에 귀속시키려는 계획을 도모했는데 본 사또가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괴이한 언설이 하나만이 아닙니다.

촌구석의 고루한 소견으로 제사에는 반드시 축관이 있는 줄만 알았지 호장은 절대 축관으로 쓸 수 없다는 것은 알지 못한 것이며, 그자가 배척한 것은 호장의 직품이 낮다는 것이지, 축관을 쓰는 것이 예()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이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거기에 축관이 있으려니 멋대로 생각하고 서슴없이 이런 언설을 퍼뜨린 것입니다.

! 묘에다 제사함도 오히려 슬기롭지 못하다는 기롱이 있을 수 있는데, 이미 마지못할 경우라면 그 고장 선비나 군의 아전 중에서 손을 빌려 향기로운 제물을 진설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어찌 제 족속이 아닌 사람이 축문을 아뢸 수 있겠습니까?

먼 곳이라 풍문의 와전됨이 대개 이와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후에도 괴이한 언설이 이러쿵저러쿵 일어날 터이니, 바라옵건대 저의 이 편지를 일족에게 돌려 보이시어 뭇 의혹을 깨뜨려 주심이 어떠하신지요?

 

() 원서(原書)

 

 

새봄에 정사를 돌보느라 어떻게 지내시는지 몹시 궁금하외다. 족종(族從)은 늙고 병들어 나날이 정신이 혼미해 가니 서글프고 한탄스러우나 어쩌겠소.

듣자니 선조 야천(冶川 박소(朴紹)) 선생의 묘제에 축관으로 호장의 이름을 썼다 하니 놀랍고 괴이함을 이기지 못하겠소. 만약 잘못 전해진 말이 아니라면 이는 실로 예에 어긋나도 너무나 크게 어긋난 것이오. 누가 이 의논을 주장했으며 누가 이 일을 꾸몄는가 모르겠소.

예서(禮書)에 비록 총인이 시가 된다.冢人爲尸는 글귀가 있으나 호장은 총인이 아니고, 예법에 본래 빈객이 제사를 돕는다.賓客助祭는 규정이 있으나 주사자(主祀者)는 조제자(助祭者)가 아니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근거가 없는데 그래도 행한다면 이상한 게 아니겠소.

() ()은 제 족속이 아니면 그 제사에 흠향하지 않는다.神非族類 不歆其祀 했는데, 합천의 호장은 우리 선조에 대해 같은 족속이 아니오. 무릇 우리 선조께서는 평소에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非禮勿動 마음을 가지셨는데, 그 밝으신 혼령이 어찌 족속 아닌 사람이 올리는 제사를 즐겨 와서 받으시겠소.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모르는 결에 마음이 아프고 쓰리오.

무릇 세일제(歲一祭 시제(時祭))란 곧 친진(親盡)한 뒤에 자손이 먼 조상을 추모하는 무궁한 생각을 펴는 것이며, 대수(代數)를 제한하지 않는 것은 대개 묘가 사당과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당이 이미 헐렸기 때문에 모든 지손(支孫)들이 다 제사 지낼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예()이외다.

일찍이 보니 양주(楊州) 홍 부인(洪夫人)의 묘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자손 한 사람을 정해 보내어 제사하게 하는데, 선생의 묘에는 유독 그리 못 하는 것은 그 길이 천 리나 멀기 때문이지요. 뭇 자손이 돌아가며 가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된 이상 할 수 없이 그 고장 사람이나 고을 아전을 시켜 제물을 진설하고 잔을 올리는 것을 묘지기가 집사(執事)하는 예()와 같이 하는 것은 혹 그럴 수도 있겠거니와, 꼭 축문을 써서 호장 아무개는 감히 밝게 아룁니다.戶長某敢昭告 운운한다면 너무도 같잖은 일이 아니겠소. 그 사람을 천히 여겨서가 아니라 족속이 아니기 때문이요, 예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럴 경우에는 축관을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할 따름이오.

세일제에 삼헌(三獻)으로 하자는 것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주장이고, 단헌(單獻)으로 하자는 것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학설이오. 내 생각으로는 사계의 학설을 따라 단헌으로 하고 축관을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며, 비록 삼헌으로 할 경우라도 축관을 없애는 것 또한 무방하다고 생각하오.

일찍이 듣자니 제전이 없어져 제사가 소홀히 되고 말았으나 좌하(座下 연암을 가리킴)가 영남의 원으로 나가면서 옛 전토를 찾아내어 본군의 질청에 맡겨 길이 제사를 잇는 계책을 세웠다기에 잘 처리했다고 자못 다행스레 여겼는데, 뜻밖에도 그 축문 한 구절이 이토록 잘못되어 도리어 향기로운 제사 의식에 누()가 되고 말았구려.

이는 필시 제전을 맡길 때에 미처 축관을 쓸지 여부를 의논하여 지시한 바가 없어서 고을 아전들이 제멋대로 이와 같이 했을 것이요. 그렇지 않고 혹시라도 고명(高明 연암을 가리킴)의 의견에서 나왔다면 아마도 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신 것 같소.

이미 예가 아닌 줄 알았으면 당장에 고쳐야 할 것이니, 금년 한식(寒食)부터는 축문을 쓰지 말라는 뜻을 자세히 밝혀 패()를 만들어 제사를 부탁한 호장에게 훈계하고 단속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그래야만 제사 예법이 바르게 되고 인정과 도리상으로도 편안할 터이니 소홀히 말기를 신신 부탁하오.

선조의 제사를 받드는 일이 되고 보니 잠자코 있는 것은 경우가 아니라 부득불 여러 말을 하게 되었소. 깊이 양찰해 주기 바라오.

 

[C-001]족형 윤원(胤源)씨에게 답함 : 박윤원(朴胤源 : 1734~1799)은 호가 근재(近齋)로 성리학자인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인(門人)이다. 딸이 정조의 후궁이 되어 세자를 낳음으로써 후일 순조(純祖)의 외조부가 된 박준원(朴準源)은 그의 아우이다. 박윤원은 연암에게는 일족에 속하는 형님뻘이 된다. 박윤원의 사후 그의 문집을 간행하려 할 때 연암은 박준원에게 박윤원이 보낸 원서(原書)뿐 아니라 그에 답한 자신의 이 편지도 함께 수록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燕巖集 卷10 與族弟準源書 박윤원의 원서는 근재집(近齋集) 18 여족제미중지원(與族弟美仲趾源)’이라는 제하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어서 연암이 보낸 이 편지를 받고 난 뒤 오해를 푼 박윤원이 연암에게 보낸 사과 편지도 여미중(與美仲)’이란 제하에 수록되어 있다.

[D-001]귀가 순해져야 : 논어 위정(爲政)에서 공자가, “나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스스로 섰고, 40세에 사물의 이치에 의혹됨이 없었고, 50세에 천명을 알았고, 60세에 귀가 순해졌고, 70세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귀가 순해졌다는 것은 무슨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되었으며, 그 말의 미묘한 뜻까지 곧바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D-002]() …… 없으니 : 원문은 其朝聞無幾인데,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D-003]화양동(華陽洞) 선묘(先墓) : 박소(朴紹)의 묘를 가리킨다. 연암집 1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참조.

[D-004]질청(秩廳) : 고을의 아전들이 직무를 보는 곳을 이른다.

[D-005]호장(戶長) : 고을 아전의 우두머리를 이른다.

[D-006]공형(公兄) : 삼공형(三公兄)이라고도 하며 호장(戶長), 이방(吏房), 수형리(首刑吏)를 이른다.

[D-007]여러 윤씨(尹氏) : 박소의 외가인 파평(坡平) 윤씨들이 합천에서 대성(大姓)을 이루고 대대로 살았다. 박소가 합천에서 은둔하다 서거했을 때 윤씨 가문에서 화양동의 묏자리를 제공하였다. 연암집 1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참조.

[D-008]이후(李侯) : 합천 군수 이희일(李羲逸)을 가리킨다.

[D-009]서원 : 화암서원(華巖書院)을 가리킨다.

[D-010]도지(賭地) : 농사짓는 땅을 남에게 빌리면 그 대가로 해마다 일정한 수확을 바쳐야 하는데, 그러한 땅을 도지라고 한다. 그 대가로 바치는 수확을 도지 또는 도조(賭租)라고도 한다.

[D-011]천묘(遷廟) : 가묘(家廟)에서 신주를 모시는 대수(代數)가 지나면 더 이상 합사(合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D-012]상로지감(霜露之感) : 돌아가신 부모나 선조를 서글피 사모함을 이른다. 예기 제의(祭義)에 가을 제사 때에 서리나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퍼지는 마음이 있으니, 이는 추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D-013]도중(都衆) : 어떤 집단이나 그 성원 전체를 가리키는 도중(都中)’이란 한국식 한자어를 조금 달리 표기한 듯하다. 여기서는 아전 집단을 가리킨다.

[D-014]족종(族從) : 편지에서 일족(一族)에 속하는 먼 촌수의 친척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박윤원 자신을 가리킨다.

[D-015]총인(冢人)이 시()가 된다 : 총인은 주() 나라의 관명으로 왕실의 묘가 있는 지역을 관장하는 관리를 이른다. 시는 신주(神主)’라는 뜻으로 죽은 이를 대신하여 제사를 받는 사람을 이른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총인(冢人) 무릇 묘제에 시가 된다.凡祭墓爲尸고 하였다.

[D-016]() …… 했는데 : 전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구절은 희공(僖公) 31년 조에 나온다.

[D-017]예가 …… 않는 :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D-018]친진(親盡) : 제사를 지내는 대수(代數)가 다 된 것을 이르는 것으로 임금은 5, 일반인은 4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낸다.

[D-019]양주(楊州) 홍 부인(洪夫人)의 묘 : 박소의 부인 홍씨는 사섬시 정(司贍寺正)을 지낸 홍사부(洪士俯)의 딸로서 박소보다 44년 뒤에 85세의 나이로 졸했으며, 그 묘가 양주의 풍양현(豐壤縣)에 있었다. 思菴集 卷4 冶川朴公神道碑銘

[D-020]삼헌(三獻) : 제사에서 초헌(初獻) · 아헌(亞獻) · 종헌(終獻) 이렇게 세 번 술을 부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한 번만 술을 부어 올리면 단헌(單獻)이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원도(原道)에 대해 임형오(任亨五)에게 답함

 

 

지난번에 자네가 노생(盧生)과 원도(原道)편을 논하다가 그 글의 주장이 이해되지 않자 나에게 와서 도()의 근원에 이르는 방법을 물었는데, 그렇게 해서 노생에게 답하려는 것이었지. 나 역시 실상은 자네에게 답할 길이 없었으니 우리 속담에 이른바 한 외양간에 암소가 두 마리라는 격이라, ‘뿔 없는 숫양을 내놓으라卑出童羖는 것에 거의 가깝지 않겠는가? 나는 여러 날을 배회하다가 겨우 맹자에서 대저 도란 큰 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라는 한 말씀을 발견하고는, 마침내 그것으로써 원도편의 주장을 부연 설명하고 가상적인 문답을 만들었네. 고명(高明 임형오를 가리킴)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군.

내 시험 삼아 물어보겠네.

 

자네는 올 때 갓을 바르게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며 허리띠를 매고 신발끈을 묶은 뒤에 대문을 나섰네. 이 중 한 가지라도 갖추어지지 않았으면 당연히 대문을 나서려 하지 않았겠지. 또 자네는 길에 나아갈 때 반드시 궁벽진 데를 버리고 험한 데를 피하며 여러 사람들이 함께 다니는 데를 따랐지. 대저 이와 같은 것이 이른바 알기 어렵지 않다는 것이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가시밭길을 헤치고 논밭길을 가로지르다가 갓이 걸리고 신발이 찢어지며 자빠지고 헐떡이며 땀을 흘린다면 자네는 이 같은 사람을 어떻다고 생각하겠는가?”

자네는 이렇게 답하겠지.

 

이는 필시 길을 잃은 사람일 겁니다.”

그렇다면 내 또 묻겠네.

 

걸어가는 것은 똑같은데,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도 하고 갈림길을 찾기도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자네는 이렇게 답하겠지.

 

이는 필시 지름길을 좋아하여 속히 가고자 하는 사람이요, 필시 험한 길을 가면서 요행을 바라는 사람일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필시 남이 가리켜 준 말을 잘못 들은 사람일 겁니다.”

아닐세. 이는 길을 가다가 잘못에 빠진 것이 아니네. 대문을 나서기 전에 이미 사심(私心)이 앞섰던 것이지.”

내 또 묻겠네.

 

길이 진실로 저와 같이 중정(中正)하고 저와 같이 가야 마땅하건만, 자네가 발걸음에 맡겨 편안히 걷지 않는다면 어찌 그런 줄을 스스로 알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가야 마땅할 바를 아는 것은 길에 달려 있다고 하겠는가, 아니면 발에 달려 있다고 하겠는가?”

자네는 이렇게 답하겠지.

 

진실로 아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고, 실제로 밟고 가는 것은 발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발 쓰는 법을 내 알겠노라. 반드시 장차 발을 번갈아 들고 교대로 밟는 것을 ()’라 하고, 발을 옮겼다가 멈추는 것을 ()’이라 하지. 내 모르겠네만, 밟는 곳은 확고하나 발을 드는 곳은 의지할 데가 없으며, 발을 옮길 때는 비록 전진하나 멈출 때에는 가지 못하네. 그렇다면 자네의 두 발에 장차 한 번은 허망(虛妄)함이 있는 셈이니, 진실로 알고 실제로 밟고 간다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 또 모르겠네만, 자네가 올 때 왼발이 먼저였던가 오른발이 먼저였던가? 자네는 장차 고개 들어 생각해 보고는 고개 숙인 채 답을 못할 테지. 대개 이는 발에 대해 잊은 때문이니, 잊은 것이지 망동(妄動)한 것은 아니요 애써 하지 않은 것이지 길과 동떨어진 건 아니라네.

어떤 사람이 조급히 자신을 질책하기를,

 

말과 소가 마구간에서 일어설 때 말은 앞발을 먼저 일으키고 소는 뒷발을 먼저 일으킨다. 사람이 이용하기에는 오른쪽이 왼쪽보다 편하다. 그렇다면 남자는 왼쪽이요 여자는 오른쪽이라는 법이 어디에 있으며, 또한 길사(吉事)와 흉사(凶事)에 절할 때 왼손과 오른손을 위로 하는 법을 달리할 게 뭐 있나?”

하였다네.

껍질을 갓 깨고 나온 병아리도 솔개를 경계하여 숨고, 배고파 울던 어린애도 호랑이를 무서워하여 울음을 그치지. 내 모르겠네만, 무릇 이와 같은 행동은 성()에서 터득한 것인가, ()에서 터득한 것인가? 그러므로 가령 자네가 길을 갈 때 발 둘 데를 생각하여 걸음마다 안배한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몇 리 가지 못할걸세. 그러므로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은 흡사 자연히 그렇게 된 듯하고, ()에 가장 근접한 것이긴 하네. 그러나 이는 독실하기도 하고 소략하기도 하며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니, 도의 근원에 이르는 방법은 아니지.

그렇다면 도()는 장차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는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는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대개 근원은 하나인 때문이지. 그러므로 공자는 하나로써 관철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도라고 했네. 자사(子思)가 그렇게 된 까닭을 다시 설명하기를 분리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라고 했지.

그렇다면 도를 볼 수 있는가? ()가 아니면 이()를 드러낼 길이 없네. 그러므로 기는 도의(道義)와 짝을 이루어서 길러야만 호연(浩然)해지는 것이지. 사람에 대해 인()을 합쳐서 말하면 그것이 곧 도일세. 하늘과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요 도와 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음은 바로 이와 같네.

문왕(文王)이 도를 앙망(仰望)하여 아직 보지 못한 듯이 했다는 것은 도를 힘써 체득한 것이요, 장자(張子)가 뒤늦게 불교와 도가(道家)에서 벗어난 것은 반성한 것이니, 반성하여 도를 구하자면 당연히 제 몸에서 만나게 될 터이지.

그러므로 중()이 아니면 어느 것도 정()을 준적(準的)할 수 없고, ()이 아니면 어느 것도 평()을 확정 지을 수 없으며, ()이 아니면 어느 것도 지()를 안정시킬 수 없네. () 이후에야 그 지()를 보게 되고, () 이후에야 그 행()을 보게 되며, () 이후에야 그 공()을 보게 되고, () 이후에야 그 공()을 보게 되지. 가령 하늘이 텅 비지 않으면不空 천둥과 바람이 어디에서 울겠으며 해와 달이 어디에서 비추겠는가? 가령 하늘이 공평하지 않다면不公 비나 이슬이 대상을 가려서 내려 만물 중에 유감을 품는 것들이 있을 테지. 이른바 곧지 않으면 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 이것이네.

주역에 이르기를 때에 따라 여섯 마리 용을 타고 하늘을 통어한다.”고 하였네. 여기서 여섯 마리 용이란 기()인데 사방을 오르내리며, ‘때에 따라 탄다는 것은 이()인데 어느 때든 기를 타지 않는 적이 없지. 그러므로 고집하지도 않고 기필코 성사하려 들지도 않으며, 어느 것을 특별히 후대하지도 않고 박대하지도 않네. 하늘이 여기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한덩어리가 된 이와 기일 뿐인데.

광명정대하게 통어하되 환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마 하늘의 덕이 아니겠는가? 만물을 낳고 자라게 하되 아집(我執)대로 하지 않는 것이 아마 하늘의 도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늘의 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나타내 보일 뿐이요, 땅의 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드러내 보일 뿐이요, 사람의 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밝히 나타낼 따름이지.

그러나 하늘과 땅의 도가 나타내고 드러내 보이는 그 사이에 명()이 존재하네. 비유하자면 내쉬었다가 들이쉬는 것이 숨이 되는데 맥락(脈絡)이 그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지. 이것은 바로 성()이 하늘의 도를 계승하고 땅의 도와 접한 까닭이니, 씨앗이 생기를 머금고 살아나는 것은 대개 오로지 순수하여 다른 것과 섞이지 않는 성품인 데다, 살기를 좋아하고 즐거이 천명을 따르는 생리(生理) 때문이지.

비로소 이 명()을 받게 되면, 민첩하게 이를 맞이하여 이어 나가는 것이 마치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것과 같고,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고, 구름이 갑자기 피어올라 비가 퍼붓는 것과 같고, 도랑이 트이자 물이 들이닥치는 것과 같네.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명한 성()이지. 그리고 맹자가 명덕(明德)과 지선(至善)이 곧 성()을 따르는 도()임을 변론(辯論)하고, 다시 그 근원을 추구하여 말하기를,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 하늘이요, 부르지 않아도 이르러 오는 것이 명()이다.” 하였지.

하늘의 명이란 충()을 내려 준 것이요, ()을 내려 줌은 중()을 따르는 것이요, 중을 따른다는 것은 허위가 없는 것이네. 허위가 없는 몸으로써 중을 따른 명()을 받자와, 하늘을 이고 땅 위에 서서 공평무사하게 사도(斯道)를 행하는 것이지.

한 번 발을 들어 공()을 잊어버리니 공()을 잊어버림은 천명을 즐거이 따르는 것樂天이요, 한 번 발을 착지(着地)하여 실()로 돌아오니 실()로 돌아옴은 땅을 믿는 것이네. 천명을 즐거이 따르는 것은 형이상(形而上)의 것이요, 땅을 믿는 것은 형이하(形而下)의 것이지. 인의예지(仁義禮智)는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이요, 효제충경(孝悌忠敬)은 땅에 근본을 둔 것일세.

그러므로 지극히 정성스러워야 교화(敎化)할 수 있다는 것은 아래와 친한 것이요, 사물의 이치에 통달해야 지식이 지극해진다는 것은 위와 친한 것이네.덕성(德性)을 존경하고 학문을 준행(遵行)하는 것은 위와 아래를 모두 관통하는 우리의 도, 허무를 숭상하고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은밀한 이치나 찾고 기괴한 짓을 하는 이단(異端)일세.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므로 천명을 스스로 즐거이 따르는 것이요,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으므로 땅을 스스로 믿는 것이네. 타고난 형체를 바르게 지켜 나가는 것이 천명을 아는 것이며, 도를 깨우침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고, 속이기 어려운 것이 귀신이며, 이치를 끝까지 밝히는 것은 도를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요, 길에서 주워들은 말을 전하는 것은 사도(斯道)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일세.

 

의 처지에서 저 물()을 볼 것 같으면, 나나 저나 고루 이 기()를 받아서 하나도 허()하여 빌려 온 것이 없으니 어찌 천리(天理)가 지극히 공평하지 아니한가. ()의 처지에서 나를 볼 것 같으면, 나 역시 물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체()로 삼고 반성하여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으면,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나의 성()을 극진히 발현하면, 물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라는 것은 심()의 덕()이며 생()의 이()이다. 맑고 밝고 순수한 것이 심의 덕이 아닌가. 공정하고 원활한 것이 생의 이가 아닌가.

주역 건도(乾道)가 변화함으로써 제각기 성()과 명()을 바르게 타고난다.乾道變化 各正性命고 하였다. 그러므로 건도란 원형이정(元亨利貞)이요 변화란 이()와 기()이며, 제각기 바르게 타고난다는 것은 사시(四時), 따뜻하고 서늘하고 차갑고 더운 것은 사시의 기()이며,  · 여름 · 가을 · 겨울은 사시의 명()이요, 원형이정은 사시의 덕()이며,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사시의 이()이다.

하늘이 하늘로 된 것은 이()와 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것은 이와 기의 형용(形容)과 소리이다. 하늘이 이미 말없이 보여 주면, 사람은 그 형용과 소리를 체()로 삼아 언어로 드러낸다. 사실을 지시하고 물()에 비유하며 이름을 짓고 뜻을 설명하는데, ()과 정()이 서로 뿌리가 되고 체()와 용()이 서로 바탕이 된다. ()도 있고 실()도 있어 그 진위(眞僞)를 드러내며, 어떤 것은 앞으로 하고, 어떤 것은 뒤로 하여 그 처음과 끝을 분별한다. 그러니 천하의 사정(事情)에 통달하고 만물의 실정(實情)을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언어이다.

 

언어라는 것은 분별(分別)이다. 그것을 분별하려면 부득이 형용하지 않을 수 없고, 형용하려면 저것을 끌어다가 이것을 증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언어의 실정이다. 그런데 성()의 경우에는 그 체()가 본래 허()하기 때문에 비유하거나 형용하여 말할 수 없다. 거칠게 말하면 기()를 건드리게 되고, 정밀하게 말하면 허()가 아닌가 의심받게 된다. 또 말하지 않으면 실정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나, 말하려 하면 귀착할 곳이 없다. 그것을 일러 중묘(衆妙)가 깊고 깊다 할 것 같으면 말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그것을 일러 타고난 성을 보존하고 보존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이미 기질(氣質)에 엉겨 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성()을 말한 사람 중에 성을 기()로 인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고자(告子) ()’이라 이른 것과, 순자(荀子) ()’이라 이른 것, 양자(揚子) ()’이라 이른 것, 한자(韓子) 삼품(三品)’이라 이른 것, 그리고 불씨(佛氏) 작용(作用)’이라 이른 것이 모두 기요, 우리 유교에서 말하는 성은 아니다. 공자께서 서로 가깝다相近고 말씀하신 것은 기질이 각기 다름을 설명한 것이다. 때문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설명에 의하면 양자의 한계는 비록 엄격하나 본래 두 마음은 아닌 것이다. 또 맹자가 기()를 기름에 있어 말하기 어렵다難言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오로지 순수하고 다른 것과 섞이지 않은 성품임을 말하면서, 자사(子思)가 명()이라고 이른 것은 자연(自然 자연히 그렇게 됨)을 말한 것이며, 맹자가 선()하다고 말한 것은 그 본연(本然)의 성()을 말한 것이요, 정자(程子)가 이()라고 해석한 것은 그 당연(當然 당위성)을 설명한 것이다.

대저 겸하면 분별(分別)이 없고 합하면 너무 혼잡하고, 둘로 하면 불가(不可)하고 단독으로 행하면 허()에 떨어지니, 어떻게 그것을 밝힐 수 있겠는가? ()이란 글자는 심() 자와 생() 자의 뜻을 따른 것이다.  원문 빠짐 

 

()을 바로 가리키자면 기()로 가득 차 질()이 있는 것이고, ()만을 오로지 말하자면 순전히 이()로 되어 있어 형체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심이 아니면 성이 거처할 곳이 없고, 기가 아니면 이()가 활동할 곳이 없다. 이는 흡사 성()이 심()에 버금가고 이()가 기()의 명령을 듣는 듯하다. 그러나 성이 없으면 심은 빈집이 되고, 이가 없으면 기는 곧 지나가는 나그네이다.

()은 곧 오장(五臟)의 하나이다. 만약 단지 ()’이라고만 말한다면 이는 간() · () · 신장 · 비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만약 건순오상(健順五常)으로 각각 형질(形質)을 이루었다고 할 것 같으면, 성은 비록 가깝지만 습관에 따라 서로 멀어진 것이 분명하니 어떻게 그것을 밝힐 수 있겠는가?  원문 빠짐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이르고 맹자가 성이 선함을 말하되 말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일컬은 것은, 성이 선함을 밝히고자 해서였다. 주역 이어 가는 것은 선()이요, 이루게 하는 것은 성()이다.繼之者 善也 成之者 性也라고 일렀으니, 이 때문에 맹자가 성이 선함을 밝히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요순을 일컬어 증명한 것이다. ()는 비유하면 곧 천()이요, ()은 비유하면 곧 성()이다. 순이 요로부터 이은 것은 선()이요, 요가 순에게 이루어 준 것은 성()이다.

 

심은 비유하면 종()이요, 성은 비유하면 소리요, ()은 비유하면 종치는 막대기이다. 그러므로 종이 꼼짝하지 않으면 소리가 어디에서 나겠으며, 막대기로 치지 않으면 오음(五音  ·  ·  ·  · )이 어떻게 분별되겠으며, 육률(六律)이 어떻게 구분되겠는가.

 

임생(任生 임형오)이 물었다.

 

심이라는 것은 형기(形器 물질), 성이라는 것은 도의(道義)입니까?”

본연(本然)의 성을 볼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공평무사한 천리(天理)는 이따금 갑자기 불쑥하는 사이에 감응하여 나타난다. 대개 이로운 길인지 해로운 길인지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옳으냐 그르냐 여부를 짐작하기도 전에 선()의 실마리가 곧 나타나는 것이다. 만일 우물 옆에서 인()을 논하고 물가에서 예()를 강습한다면, 우물로 기어가는 아이를 구할 날이 장차 없을 것이고 물에 빠진 친형수를 어떻게 손으로 건져 줄 때가 있겠는가. 또 진 시황이 궁궐 기둥을 돌면서 달아날 때에 가령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신하의 대열에 있었다면, 약주머니를 던진 하무저(夏無且)에게 의()를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허물을 뉘우치는 사람이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바꾼다는 말은 들었지만, ()을 고치고 이()를 바꾼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성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이 선한 것은 마치 불이 밝은 것과 같다.

 

임생이 물었다.

 

심은 하나이나 위태함과 은미함으로 길을 달리하고, 성은 같은 것이나 이()와 기()는 근원이 나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명덕(明德)이라는 것은 어떤 형상입니까? 심에 소속시키면 기()에 가릴까 두렵고, 성에 덧붙이면 허()에 떨어질 것 같습니다. 감히 묻자온대 어떻게 해야 이것을 명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말하였다.

 

자네는 불이 켜진 초를 잡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는가? 한 손으로는 촛대를 받들고 한 손으로는 그림자를 가리고, 조심조심 신을 신고 걸으며 숨을 죽이고 앞을 살피지. 비록 미욱스럽고 게으른 종놈일지언정 혹시라도 공경스레 하지 않는 법이 없네. ()이란 초와는 역시 거리가 먼 것이지만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거늘, 하물며 사람이 몸에 대해 서로 가깝기로는 자기 몸 같은 것이 어디 있겠나?

그러므로 초에는 군자(君子)의 도()가 네 가지 있네. 초가 형체를 지켜 나가는 것은 반드시 곧고, 천명을 완수하는 것은 바르며, 마음가짐은 반드시 중()이며, 같은 부류를 좇아가는 것은 반드시 화()하네. 대저 이 네 가지 덕은 촛불이 밝게 된 까닭이지. 그 지향은 활활 타 나아갈 것을 생각하고 그 기개는 밝고 밝아 비출 것을 추구하니, 이는 천하의 보편적인 도인데 초가 이것을 지녔네. 그러므로 촛불이란 통촉(洞燭)하는 것이니, ()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과 꼭 같네.”

 

()이란 심지이니 심지란 말은 주관한다는 뜻이다. ()을 세워서 불을 주관하는 것을 말함이다. 불이 붙은 후에야 그 성을 아는 것이니, 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되게 한 원인所以然之故이다. 대저 촛불이 타지 않을 때에는 밝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원문 빠짐 

 

불은 성()으로 된 물()이다. ()이란 물의 성질은 진실되고 거짓이 없는 점이니, 진실로 지닌 것을 성()이라 이르고, 진실로 얻은 것을 덕()이라 이르고, 거짓이 없는 것을 명()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명덕(明德)이란 것은 성으로 말미암아 밝아진 것自誠明이며, ‘명덕을 밝힌다明明德는 것은 밝음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진 것自明誠이니 이것은 본연(本然)의 성()을 이른 것이다.

 

임생이 말하였다.

 

예전에 삼가 들으니,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은 위와 친()하고, 땅에 근본한 것은 아래와 친하므로형이하(形而下)의 것을 기()라 이르고, 형이상(形而上)의 것을 도()라고 한다 했습니다.”

또 말하였다.

 

()와 기()가 서로 올라타서 만물이 유포되어 형체를 이룹니다. 그런데 지금 촛불로 기()를 비유하고 불로써 성()을 비유하시니, 불 역시 기()요 형이하의 것인데 어떻게 성()이 될 수 있습니까?”

 

나는 말하였다.

 

불이 진실로 기()이기는 하나 어찌 형이상의 것이 없겠는가? 만물이 생겨나는 데 오직 사람과 불만이 직()으로 천명을 완수하는 것이지. 주역 하늘과 불은 동인이다.天與火同人라 한 것이 이것이고, 맹자는 곧지 않으면 도()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곧음으로 기르고 해치지 않으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고 하였네.”

 

대범 물()이 형()을 이루게 되면 반드시 그 질()이 있어서 형은 비록 허물어지더라도 질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나무가 타고 쇠가 녹고 물이 흐르고 흙이 무너지되, 그 질은 없어진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불이란 탈 때에는 빛이 있으나 꺼지면 자취가 없으며, 더듬어 봐도 걸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는 것이 없으나, 그 근본을 찾아보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차 있다. 이는 흡사 성()이 기()를 기다려서야 나타나는 것과 같다.

 

촛불이 이따금 어두워지는 것이 어찌 불의 성()이겠는가? () 중에 촛불을 가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찌끼가 조촐하지 못하거나 형질(形質)이 순수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런데 극히 작은 차이로도 마구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미세한 양으로도 사방으로 불길이 솟아 혹이 난 것 같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것을 보고서 도리어 불을 탓하여 어떤 사람은 불에 맑은 , ()한 빛이 있다느니, 또 어떤 사람은 불에 어두운 덕과 밝은 덕이 있다느니 하지만, 이것이 어찌 불의 이이겠는가? 세상에 차갑거나 따스한 불은 없으니, 불의 성()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물이 생겨나는 데 어느 것이고 기() 아닌 것이 있겠는가. 천지는 큰 그릇이며 거기에 가득 차 있는 것은 기(), 가득 차게 하는 원인은 이()이다. 음과 양이 서로 변하여 가는데 이()는 그 가운데 있고 기()로써 감싸고 있다. 이는 마치 복숭아가 씨를 품고 있어 수만 개의 복숭아가 동일한 형상이요, 마치 엽전이 땅에 흩어져도 수만 개의 엽전을 한데 꿸 수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가 단일한 근원이라 길은 달라도 귀결은 같은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불은 쇠붙이와 돌을 서로 부딪치기를 지성으로 하면 얻거니와, 물에 던지면서 불이 타기를 바라는 것은 올바른 소견이 아니다.

 

불이란 물()의 성질은, 태양(太陽)으로부터 정기(精氣)를 기르고 태음(太陰)으로부터 정기를 지켜 아무리 한여름이라도 그 열이 더해지지 않고 한겨울이라도 그 빛이 줄어들지 않으며, 부귀한 사람이라 해서 남아돌지도 않고 빈천한 사람이라 해서 부족하지도 않아, 백성들은 날마다 쓰되 그 공()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땔나무를 바꾸어도 불이 바뀌지 않는 것은 성() 때문이요, ()이라 칭하고 기()라 칭하지 않는 것은 덕() 때문이다. 나는 들으니, 자기 몸을 닦으려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한다고 했는데, 촛불이 이와 흡사하다.

 

임생이 말하였다.

 

()이 서로 가까운 것 중에 불보다 더 선()한 것이 없으므로, 불을 취하여 성의 비유로 삼으신 가르침은 이미 들었습니다. 그러면 불에도 역시 하늘이 명한 성天命之性 기질의 성氣質之性의 구별이 있습니까?”

 

나는 말하였다.

 

있고말고. 만물은 다 같이 기화(氣化) 속에 있으니 어느 것인들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 무릇 성()이란 심() 자와 생() 자의 뜻을 따른 것이니, ()에 갖추어진 것이요 생()과 같은 족속이지. ()가 없으면 생명이 끊어지는데 성()이 어찌 생()을 따르겠으며, ()이 아니면 성()이 그치는데 선()이 어디에 붙겠는가? 진실로 천명의 본연(本然)을 궁구하면, 어찌 성()만이 선()하리오? () 역시 선하며, 어찌 기()만이 선하리오? 만물 중에 생을 누리는 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니 그 천명을 즐거이 여기고 그 천명을 순순히 따르면 물()과 내가 같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이 명한 성()이라네.”

 

 

원도에 대해 임형오에게 답함에서 편지의 뒤에 덕성이기(德性理氣)에 대하여 잡설(雜說)한 것이 모두 24개 조목인데, 부군(府君)이 만년에 손수 쓰신 것이다. 이 밖에도 성리(性理)에 관하여 언급한 차록(箚錄 메모)이 있으나, 원고가 흩어진 데다 시커멓게 지우고 고쳐 놓아 많은 부분이 미정고(未定稿)에 속하므로, 감히 여기에 부록(附錄)하지 않았다.

아들 종간(宗侃)이 삼가 쓰다.

 

[C-001]원도(原道) …… 답함 : 임형오(任亨五)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박종채(朴宗采) 과정록 4 일찍이 성명(性命)을 논하면서 촛불로써 비유를 삼으시니 지계(芝溪 : 이재성)가 지당한 의론이라 했다. 이 역시 문집 중에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편지를 가리킨다.

[D-001]원도(原道) : 한유(韓愈)가 지은 글로서 유교의 도가 도가(道家)나 불교의 도와 다른 까닭을 논변하였다.

[D-002] …… 마리 : 같은 것끼리 모여 있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를 뜻한다.

[D-003] …… 내놓으라卑出童羖 : 시경 소아(小雅) 빈지초연(賓之初筵)에 나오는 구절로, ‘뿔 없는 숫양이란 결코 있을 리 없는 사물을 비유한 것이다.

[D-004]대저 …… 어렵겠는가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말이다.

[D-005]잘못에 빠진 것 : 원문은 遂迷인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고집하는 것을 뜻한다.

[D-006]길이 …… 마땅하건만 : 중용장구  1 장의 집주(集註) ()란 일상생활에 있어서 행해야 마땅한 도리道者 日用事物當行之理라고 하였다.

[D-007]편안히 걷지 : 원문은 安行인데, 이는 원래 배우지 않고도 알아서 차분하게 행하는 것을 뜻한다. 중용장구  20 장에 혹은 편안히 행하며, 혹은 민첩하게 행하며, 혹은 애써 간신히 행하나, 성공함에 이르러서는 한가지이다.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一也라고 하였다.

[D-008]대개 …… 아니요 : 원문은 蓋妄於足也 妄之非爲妄也인데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 ‘ 자가  자와 상통함을 이용한 어희(語戱)로 볼 수도 있다. 김택영의 연암집 중편연암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 등에는 蓋忘於足也 忘之非爲妄也로 되어 있어 그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9]애써 …… 아니라네 : 원문은 不勉非違道也인데, 중용장구  20 장에 ()이란 하늘의 길이요 성실하고자 함은 사람의 길이니, 성이란 애써 하지 않아도 중정(中正)하며不勉而中 생각지 않아도 저절로 깨달아 여유 있게 길과 합치하나니, 성인(聖人)이 그러하다.”고 하였고, 그 집주에 애써 하지 않아도 중정하다는 것은 편안히 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중용장구  13 장에 충서는 도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忠恕 違道不遠고 하였다.

[D-010]말은 …… 일으킨다 : 원문은 圓蹄先前 耦武先後인데 원제(圓蹄)는 발굽이 둥근 말을 가리키고 우무(耦武)는 발굽이 둘로 갈라진 소를 가리킨다. 조화권여(造化權輿)에 말은 양물(陽物)이라 발굽이 둥글고 일어설 때 앞발을 먼저 일으키며起先前足, 소는 음물(陰物)이라 발굽이 갈라졌고 일어설 때 뒷발을 먼저 일으킨다起先後足고 하였다. 周易玩辭 卷15 馬牛

[D-011]사람이 …… 편하다 : 원문은 人之利用 右便於左인데, 열하일기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8 7일 조에 우리나라의 어마법(御馬法)을 비판하면서 사람이 몸을 쓰기에는 오른쪽이 왼쪽보다 편리하며人之體用 右利於左 그 점에서는 말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D-012]남자는 ……  : 예기 내칙(內則)에 출생 후 3개월이 지난 사내아이는 두 갈래 상투’, 계집아이는 세 갈래 상투를 짜며 그렇지 않으면 남자는 머리 왼쪽, 여자는 머리 오른쪽으로 북상투를 짠다男左女右고 하였다. 그 밖에도,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문 왼쪽에 활을 걸고 계집아이가 태어나면 문 오른쪽에 수건을 걸며, 절할 때 남자는 왼손을 위로 하고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한다고 하였다.

[D-013]길사(吉事) …… 있나 : 노자에서 길사(吉事)에는 왼쪽을 높이고 흉사(凶事)에는 바른쪽을 높인다.吉事尙左 凶事尙右고 하였고,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길사는 양()이라 공수(拱手)할 때 왼손을 위로 하고 흉사는 음이라 오른손을 위로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의례집설(儀禮集說) 12에 남자는 길배(吉拜)에 왼손을 위로 하고 상배(喪拜)에 오른손을 위로 하며, 여자는 그와 반대로 한다고 하였다.

[D-014]()에서 …… 것인가 : 성은 타고난 본성을 말하고, ()은 신체를 말한다. 신체는 기()로 이루어져 지각(知覺)하고 운동할 수 있으므로, ‘형에서 터득한다는 것은 후천적인 체험을 통해 안다는 뜻이다.

[D-015]양지(良知)와 양능(良能) : 맹자 진심 상(盡心上) 사람이 배우지 않고서도 능한 것, 그것이 양능이요 생각하지 않고서도 아는 것, 그것이 양지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부모를 사랑하는 인()과 어른을 공경하는 의()를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선천적 지혜良知 선천적 능력良能을 갖추고 있다고 본 것이다. () 나라 때 왕수인(王守仁)이 이 양지 · 양능을 극히 중시하여, 주자학에 맞서 치양지(致良知)를 종지(宗旨)로 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일으켰다.

[D-016]공자는 …… 했네 :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는 제자 증삼(曾參)에게 삼아, 우리의 도는 하나로써 관철되어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우리의 도吾道는 유교를 말한다.

[D-017]분리될 …… 아니다 : 중용장구  1 장에 도란 잠시라도 분리될 수 없으니, 분리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중용은 자사(子思)의 저술로 간주되고 있다.

[D-018]기는 …… 것이지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하면서 정직함으로써 기르고 해치지 않으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고 하였고, 이어서 호연지기는 도의와 짝을 이루나니 이것이 없으면 기가 궁핍하게 된다.配義與道 無是 餒也고 하였다.

[D-019]사람 …… 도일세 : 맹자 진심 하(盡心下) 인이란 것은 사람이니, 인과 사람을 합쳐서 말하면 도이다.仁也者 人也 合而言之 道也라고 하였다. 인을 행할 수 있어야 사람다운 사람이며, 사람이 인과 합치한 상태를 도라고 한다는 뜻이다.

[D-020]문왕(文王) …… 것이요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주() 나라 문왕은 도를 앙망하여 아직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望道而未之見고 하였고, 진심 상에 () 임금과 순() 임금은 인()을 본성으로 타고났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힘써 체득하였다.堯舜性之 湯武身之고 하였다.

[D-021]장자(張子) ……  : 장자는 북송(北宋)의 저명한 성리학자 장재(張載 : 1020~1077)를 말한다. 그는 한동안 불교와 도가의 서적을 연구했다가 별반 수확이 없다고 여기고 육경(六經)으로 돌아왔으며, 인종(仁宗) 가우(嘉祐) 초년에 정호(程灝) · 정이(程頤) 형제와 교제하면서부터 이단의 학문을 버리고 유교 연구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D-022]반성하여 …… 터이지 : 맹자 이루 상에 행하여 얻지 못한 것이 있거든 모두 반성하여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을지니, 제 몸이 올바르게 되고 천하 사람이 귀의할 것이다.行有不得者 皆反求諸己 其身正而天下歸之라 하였고, 진심 상에 () 임금과 순() 임금은 인()을 본성으로 타고났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힘써 체득하였다.堯舜性之 湯武身之고 하였고, “제 몸을 반성하여 성실히 하면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고, 힘써 제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려 행하면 인을 구하는 데 이보다 더 가까운 길이 없다.反身而誠 樂莫大焉 强恕而行 求仁莫近焉고 하였다. ‘도를 제 몸에서 만난다는 것은 몸소 노력하여야만 도를 체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D-023]() …… 되지 : 원문에는 空而後見其公也’ 7자가 누락되어 있다. 김택영의 연암집 중편연암집에 의거하여 보충 번역하였다.

[D-024]곧지 …… 않는다 : 원문은 不直則道不見인데,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말로 원래  자는 직언(直言)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연암의 의도와 문맥을 고려하여 곧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D-025]주역 …… 하였네 : 주역 건괘(乾卦)의 단전(彖傳)에 나온다. ‘여섯 마리의 용은 건괘의 여섯 양효(陽爻)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은둔할 때에는 잠룡(潛龍)을 타고 나설 때에는 비룡(飛龍)을 타는 등 때의 변화에 따라 처신함으로써 하늘의 도乾道를 행한다는 뜻이다.

[D-026]고집하지도 …… 않으며 : 원문은 無固無必인데, 논어 자한(子罕) 공자는 네 가지가 전혀 없으시니, 억측하지 않고, 기필코 성사하려 하지 않으며, 고집하지도 않고, 아집을 부리지 않았다.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고 하였다.

[D-027]어느 것을 …… 않네 : 원문은 無適無莫인데,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는 군자는 천하에 대해서 후대함도 없고 박대함도 없으며 의()만을 따른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고 하였다. ‘ 에 대한 종래의 해석은 분분하다. 여기서는 각각  으로 보는 해석을 취했다.

[D-028]하늘의 …… 뿐이요 : 맹자 만장 상(萬章上) 하늘은 말하지 않는다. 행동과 사실로써 나타내 보일 따름이다.天不言 以行與事 示之而已矣라고 하였다.

[D-029]드러내 보일 : ‘ 의 옛 글자로, ‘와 같은 뜻이다. 주역 곤괘(坤卦) 육이(六二)의 상전(象傳) 육이의 움직임은 곧고 바르니, 배우지 않아도 만사가 순조로움은 땅의 도가 환히 빛나기 때문이다.六二之動 直以方也 不習无不利 地道光也라 하였다. 또한 중용장구  12 장에 군자의 도는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하늘과 땅에 환히 드러나니라.及其至也 察乎天地 하였다. 다음 문장의  자 역시 현시(顯示)의 뜻을 지니고 있다.

[D-030]맥락(脈絡) : 한의학에서 경맥(經脈)과 낙맥(絡脈)을 합쳐 부른 말로, 경락(經絡)이라고도 한다. 경맥은 세로로 간선(幹線)을 이루고 낙맥은 가로로 지선(支線)을 이루어 상호 연결되어 온몸에 기혈(氣血)을 전달하는 통로가 된다.

[D-031]씨앗이 ……  : 원문은 實含斯活인데, 시경 주송(周頌) 재삼(載芟) 온갖 곡식을 파종하니 씨앗이 생기를 머금고 살아나네.播厥百穀 實函斯活라고 하였다. 성리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에 보존되어 있는 성()을 종종 씨앗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연암집 1 ‘이자후(李子厚)의 득남(得男)을 축하한 시축(詩軸)의 서문 참조.

[D-032]맞이하여 이어 나가는 것 : 원문은 迓續인데, 서경 반경 중(盤庚中) 나는 하늘로부터 너희들의 명을 맞이하여 이어 나가려 한다.予迓續乃命于天고 하였다.

[D-033]하늘이 명한 성() : 중용장구  1 장에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한다.天命之謂性고 하였다.

[D-034]맹자가 …… 변론(辯論)하고 : 맹자 중 특히 고자 상(告子上)에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대학장구 ()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고 …… 지선(至善)에 이르면 멈추는 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 在止於至善고 하였고, 중용장구  1 장에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率性之謂道고 하였다.

[D-035]하지 …… ()이다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오는 말이다.

[D-036]하늘의 …… 것이요 : 서경 탕고(湯誥) 위대하신 상제가 백성들에게 충()을 내려 주셨도다.惟皇上帝 降衷于下民라고 하였다. ‘()’ 자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 또는 복()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 즉 중도(中道)나 내심(內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D-037]()을 따르는 : 원문은 由中인데 이는 由衷과 같은 말로, 내심(內心)에서 우러나온다는 뜻이다.

[D-038]사도(斯道) : ‘이 도란 뜻으로, 유교 도덕을 가리킨다.

[D-039]땅을 믿는 것 : 땅을 믿는다는 것은 그 위에 만물을 실을 정도로 땅이 넓고 두터움(博厚)을 믿는다는 뜻이다. 중용장구  26 장에 넓고 두터움은 만물을 싣는 바博厚 所以載物也 넓고 두터움은 땅과 합치한다博厚配地고 하였다.

[D-040]형이상(形而上) : 형이상(形以上)과 같은 말로, 형체가 없는 추상적 존재를 말한다. 이와 대립하는 개념이 형이하(形而下)’, 형체가 있는 구체적 존재를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에 형이상의 것을 도라고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라고 한다.” 하였다.

[D-041]지극히 ……것이요 : 중용장구  23 장에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실이라야 인심을 교화할 수 있다.唯天下至誠 爲能化고 하였고, 주역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 땅에 근본을 둔 것은 아래와 친하다.本乎地者 親下고 하였다.

[D-042]사물의 …… 지극해진다 : 원문은 物格而知致인데, ‘物格而至致 또는 物格而致知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대학의 구절을 감안하면 物格而知至라야 한다.

[D-043]사물의 …… 것이네 : 대학장구  1장에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뒤라야 지식이 지극해진다.物格而后 知至고 하였고, 주역 건괘 문언전에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은 위와 친하다.本乎天者 親上고 하였다.

[D-044]덕성(德性) …… : 원문은 尊德性而道問學인데, 중용장구  27 장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D-045]은밀한 …… 하는 : 원문은 索隱行怪인데, 중용장구  11 장에 나오는 말이다.

[D-046]소리도 …… 없으므로 :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 하늘이 하시는 일은 소리도 냄새도 없네.上天之載 無聲無臭라고 하였다. 하늘이 하시는 일은 추측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D-047]사물이 …… 있으므로 : 시경 대아 증민(蒸民) 하늘이 만민을 낳으셨으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나니라.天生蒸民 有物有則 하였다.

[D-048]타고난 …… 것이며 : 맹자 진심 상에 형체와 안색은 타고난 성질이지만 오직 성인이라야 그 형체를 바르게 지켜 나간다.形色 天性也 惟聖人然後 可以踐形고 하였고, 주역 계사전 상에 천명을 즐거이 따르며 자신의 천명을 알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樂天知命 故不憂고 하였다.

[D-049]속이기 …… 귀신이며 : 귀신(鬼神)이란 개념은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중용에서 주장하는, 우주 만물을 생성하는 음양(陰陽) 이기(二氣)의 활동을 가리킨다.

[D-050]이치를 …… 것이요 : 원문은 窮道之自反也인데 뜻이 통하지 않는다. 김택영의 연암집에는 이 구절은 잘못이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를 붙여 놓았고, 다시 중편연암집에는 窮理者 道之自反也로 고쳐 놓았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D-051]길에서 …… 것일세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길에서 주워들은 말을 전하는 것은 덕을 저버리는 것이다.道聽而途說 德之棄也라고 하였다.

[D-052]물을 체()로 삼고 : 중용장구  16 장에서 공자는 귀신의 덕이 성대하도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는 않지만, 물을 체()로 삼으며 어떤 물에든 누락될 수 없다.體物而不可遺라고 하였다. ‘體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중용집주(中庸集註)의 해석을 좇아 번역하였다.

[D-053]나의 ……것이다 : 중용장구  22 장에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실이라야 자신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으니, 자신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으면 인()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고, 인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으면 물()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D-054]건도(乾道) …… 타고난다 : 주역 건괘(乾卦) 단전(彖傳)의 말이다.

[D-055]건도란 …… ()이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68 천도(天道)로 말하자면 원형이정이 되고, 사시로 말하자면 봄 · 여름 · 가을 · 겨울이 되고, 인도(人道)로 말하자면 인의예지가 되고, 기후로 말하자면 따뜻하고 서늘하고 마르고 습한 것溫涼燥濕이 되고, 사방으로 말하자면 동서남북이 된다.”고 하였다.

[D-056]형용(形容)과 소리 : 원문은 容聲인데 예기 제의(祭義)에서 제삿날에 음식을 진설할 때 엄숙하여 반드시 용성을 듣는 듯이 한다.肅然必有聞乎容聲고 하였다. 용성에 대한 해석 역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여기서는 이와 기를 두고 사용했으므로, 형용과 소리로 번역하였다. 중용집주에서 귀신을 음양 이기(二氣)의 활동으로 해석하면서 귀신은 무형무성(無形無聲)이라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D-057]천하의 사정(事情)에 통달하고 : 원문은 通天下之故인데 주역 계사전 상에 나오는 말이다. “()은 사려도 없고 작위도 없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감응하면 드디어 천하의 사정에 통달한다.易 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고 하였다.

[D-058]중묘(衆妙)가 깊고 깊다 : 원문은 衆妙玄玄인데, 노자에 도() 깊고 또 깊으니 중묘(衆妙)의 문이다.玄之又玄 衆妙之門라고 하였다.

[D-059]말로 …… 아니요 : 노자 도는 말로 이를 형용할 수 있으면 영원불변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하였다.

[D-060]타고난 …… 보존한다 : 원문은 性成存存으로 되어 있으나, 주역 계사전 상에 타고난 성을 보존하고 보존함이 도의의 문이다.成性存存 道義之門이라 하였다. ‘成性存存의 해석은 여러 가지인데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역의 이 대목은 노자에서 도() 깊고 또 깊으니 중묘(衆妙)의 문이다.”라고 한 대목과 사상적으로 통한다. 大易通解 卷13

[D-061]고자(告子) ……  : 고자는 맹자와 동시대 사람인 고불해(告不害), ()이 곧 성이며, 성에는 선악(善惡)이 없다고 주장했다. 孟子 告子上

[D-062]순자(荀子) ……  : 순자는 사람의 성이 본래 악하며, 선한 특성은 인위적인 학습과 예의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다. 荀子 性惡

[D-063]양자(揚子) ……  : 양웅(揚雄)은 사람의 성에는 선악이 혼재하며, 그 선한 성을 닦으면 선인이 되고 그 악한 성을 닦으면 악인이 된다고 하여, 서로 대립하는 맹자와 순자의 설을 조화시키고자 했다. 法言 修身

[D-064]한자(韓子) ……  : 한유(韓愈)는 원성(原性)에서 사람의 성을, 선만 있고 악이 없는 상품(上品), 교육 여하에 따라 상품이나 하품이 될 수 있는 중품(中品), 악뿐이어서 교육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하품(下品)으로 나누었다. 이는 맹자, 순자, 양웅의 설을 조화시키려 한 것으로서, 맹자의 성선(性善)은 상품에 해당하고, 순자의 성악(性惡)은 하품에 해당하며, 양자의 성선악혼(性善惡混)은 중품에 해당한다.

[D-065]불씨(佛氏) ……  : 불교에서 심() · () · () 중 식()이 대상을 판별하는 활동을 작용(作用)’이라 한다. 전등록(傳燈錄) 성이 어디에 있는가? 작용에 있다.性在何處 曰在作用고 하였다. 주자나 정도전(鄭道傳)은 안전(眼前)의 작용(作用)이 곧 성이라고 하면서 작용견성(作用見性)’을 주장하는 선가(禪家)의 설을 비판하였다.

[D-066]서로 가깝다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사람의 성()은 서로 가까우나 습관으로 인해 서로 멀어진다.性相近 習相遠고 하였다. 정자(程子)나 주자의 주장에 의하면, 공자가 사람의 성이 똑같다고 하지 않고 서로 가깝다고만 한 것은 본연의 성本然之性이 아니라 기질의 성氣質之性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한다.

[D-067]인심(人心)과 도심(道心)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순() 임금이 우()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隱微)하니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그 중정(中正)을 잡으리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고 훈계하였다. 이 말에 근거하여 정자와 주자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제창했다.

[D-068]말하기 어렵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고 말한 맹자에게 공손추가 호연지기란 무엇이냐고 묻자 맹자는 말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D-069]자사(子思) ……  : 자사의 저술로 간주되는 중용에서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한다.天命之謂性고 하였다.

[D-070]맹자가 ……  : 맹자 등문공 상에 맹자가 성이 선함을 말하되 말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일컬었다.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고 하였다.

[D-071]정자(程子) ……  : 정이(程頤) 성이 곧 이이다.性卽理也라고 하여 성즉리(性卽理)의 설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D-072]겸하면 : 성을 심()과 겸하여 설명한다든가, 이를 기와 겸하여 설명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D-073]원문 빠짐 : ‘性之爲字 從心從生이란 앞 문장과 거의 같은 문장이 이 글의 마지막 조목에 夫性者 從心從生이라고 다시 나온다. 그리고 그에 이어서 心之具而生之族也로 문장이 끝나고 있음을 보면, 원문의 빠진 대목 역시 心之具而生之族也일 가능성이 높다. ‘心直指 ……로 시작하는 그다음 문장은, 이 글 말미의 안설(按說)에서 박종간(朴宗侃) 모두 24개 조목이라 한 점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의 해당 부분을 참조하면, 별개의 조목으로 나뉘어야 한다.

[D-074]건순오상(健順五常) :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의하면 건()은 건()의 성()이고 순()은 곤()의 성이다. 오상(五常)은 곧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인데 이는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곧 오장(五臟)과 상응한다. 즉 인은 목()으로 간과, 의는 금()으로 폐와, 예는 화()로 심장과, 지는 토()로 비장과, 신은 수()로 신장과 서로 상응한다고 본다.

[D-075]이어 가는 …… ()이다 : 주역 계사전 상에 한 번 음이 되었다가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한다. 이를 이어 가는 것은 선이요 이를 이루게 하는 것은 성이다.”라고 하였다.

[D-076]육률(六律) : 동양 음악의 12음계는 음양의 원리에 따라 홀수 음계인 육률과 짝수 음계인 육려(六呂)로 나뉘는데, 육률은 저음부터 차례로 황종(黃鐘 : C) · 태주(太蔟 : D) · 고선(姑洗 : E) · 유빈(蕤賓 : F#) · 이칙(夷則 : G#) · 무역(無射 : A#)을 가리킨다.

[D-077]우물로 …… 있겠는가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우물로 기어가는 아이를 보면 누구나 놀라면서 측은한 마음을 품는다고 하였고, 이루 상에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건져 주는 것은 권도(權道)이다.”라고 하였다.

[D-078]진 시황이 …… 것이다. :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진() 나라 말기에 반란을 일으켜 진 나라가 멸망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며, 하무저(夏無且)는 진 시황의 시의(侍醫)였다. 자객 형가(荊軻)가 진 시황을 죽이려 하자 진 시황이 이를 피해 기둥을 돌면서 달아났는데, 이때 하무저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약주머니를 던져 위험을 모면할 수 있게 하였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이는 진 나라의 멸망을 초래한 진승이나 오광조차도 진 시황의 신하로 있었다면 본성에 따라 당연히 진 시황을 구하기 위해 의로운 행동을 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D-079]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 : 중용장구  1 장에 도란 잠시도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D-080]형체를 지켜 나가는 것 : 원문은 踐形이다. 맹자 진심 상에 형체와 안색은 타고난 성질이지만 오직 성인이라야 그 형체를 바르게 지켜 나간다.形色 天性也 惟聖人然後 可以踐形고 하였고, 주역 계사전 상에 천명을 즐거이 따르며 자신의 천명을 알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樂天知命 故不憂고 하였다.

[D-081]천명을 완수하는 것 : 원문은 立命인데, 맹자 진심 상에 수명의 길고 짦음에 개의하지 않고 제 몸을 닦으며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천명을 완수하는 방법이다.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고 하였다.

[D-082]같은 부류를 좇아가는 것 : 원문은 就類인데, 주역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 물은 습한 데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데를 좇아가니 …… 각각 같은 부류를 따르는 것이다.水流濕 火就燥 …… 則各從其類也라고 하였다.

[D-083]()을 세워서 : 원문은 建中인데,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 임금은 힘써 큰 덕을 밝혀 백성에게 중도(中道)를 세우소서.王懋昭大德 建中于民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촛불 한가운데에 심지를 세운다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다.

[D-084]밝음으로 ……  : 중용장구  21 장에 ()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이라 하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지는 것을 교()라 한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고 하였다.

[D-085]하늘에 …… 친하므로 : 주역 건괘 문언전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D-086]형이하(形而下) …… 한다 : 형체가 있는 구체적 존재를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에 형이상의 것을 도라고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라고 한다.” 하였다.

[D-087]() …… 이룹니다 : 주자(朱子)는 이와 기의 관계를 승마에 비유하여 이가 기에 올라타는 것은 사람이 말에 올라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한 사단(四端)은 이의 발현이요 칠정(七情)은 기의 발현이다.”라고 하였다. 장재(張載) ()이 발현하지 않으면 성()이 되는데, 그 처음에 발현과 미발현未發의 사이에는 기가 이에 올라타고 나온다.氣乘理而出고 하였다. 이황(李滉) 사단은 이가 발현하여 기가 뒤따른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하여 이가 올라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그에 반대하여 이이(李珥) 기가 발현하면 이가 올라탄다.氣發理乘는 한 가지만을 인정하였다. 주역 건괘 단전(彖傳) 구름이 가고 비가 내리니 만물이 유포되어 형체를 이룬다.雲行雨施 品物流形고 하였다. 이는 건()이 형()의 덕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 것이라 한다.

[D-088]하늘과 불은 동인(同人)이다 : 주역 동인괘(同人卦) 상전(象傳) 하늘과 불은 동인이니, 군자는 이로써 족속을 유별하고 사물을 구별한다.天與人同人 君子以類族辨物고 하였다. 하늘은 위에 있고 불의 본성은 불꽃을 일으키며 위로 타오르는 것이므로, 하늘과 불은 동류(同類)라는 뜻이다.

[D-089]곧지〕 …… 않는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말이다.

[D-090]곧음으로 …… 된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D-091]음과 …… 가는데 : 원문은 陰陽相盪인데, 음이 자라면 점차 양이 물러가고 양이 자라면 음이 점차 물러가는 것을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에 ( :양효 陽爻)과 유( : 음효陰爻)가 서로 교감하여 팔괘가 서로 변하여 간다.剛柔相摩 八卦相盪고 하였다.

[D-092]길은 …… 때문이다 : 원문은 殊塗同歸인데, 주역 계사전 하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천하 만사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염려하랴? 천하 만사는 귀결은 같은데 길이 다를 뿐이다.天下何思何慮 天下同歸而殊塗라고 하였다.

[D-093]태양(太陽) : 태양은 해 · 여름 · 남쪽 등을, 태음(太陰)은 달 · 겨울 · 북쪽 등을 뜻한다.

[D-094]백성들은 …… 못한다 : 주역 계사전 상에 백성들은 날마다 쓰되 그 공()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를 체득한 자가 드물다.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고 하였다.

[D-095]()이라 칭하고 : 은 오행(五行)의 하나이고, () 자에는 덕행(德行)이란 뜻이 있다.

[D-096]자기 …… 한다 : 대학장구 () 1장에 나오는 말이다.

[D-097]하늘이 명한 성 : ‘기질의 성氣質之性과 대립하는 성리학의 개념으로, ‘본연의 성本然之性’, ‘천지의 성天地之性’, ‘의리의 성義理之性이라고도 부른다.

[D-098]기화(氣化) : 성리학의 용어로, 음양의 기가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말한다. 만물은 그 시초에는 이러한 기화를 통해 생성된다. 이와 대립하는 것이 형화(形化), 기화에 의해 일단 형체를 갖춘 만물은 종자를 통해 그 형질을 유전한다고 본다.

[D-099]() 역시 선하며 : 성리학에서는 기 자체를 악이라 보지는 않는다. 기가 성의 발현을 저해하거나 억제하는 한에서만 부정적으로 보는데, 그러한 한계를 지니지 않은 청명하고 순수하며 조금도 혼탁이 없는 기도 있다. 사람이 이러한 기를 타고나면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이 된다고 한다.

[D-100]종간(宗侃) : 연암의 둘째 아들인 박종채(朴宗采 : 1780~1835)의 처음 이름이다. 박종채는 1829년 음보(蔭補)로 출사한 뒤 경산 현령(慶山縣令)을 지냈으며, 연암의 언행에 관해 상세히 기록한 과정록을 남겼다. 사후에 아들 박규수(朴珪壽)가 현달하여,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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