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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3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3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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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3]

24 주금책(酒禁策)

25 유사경(兪士京 유언호 )에게 답함

26 황윤지(黃允之)에게 감사함

27 어떤 이에게 보냄

28 홍덕보(洪德保 홍대용 )에게 답함

29 두 번째 편지

30 세 번째 편지

31 네 번째 편지

32 유수(留守)가 대궐에서 하사받은 귤 두 개를 보내 준 데 감사한 편지

33 족손(族孫) 홍수(弘壽) 에게 답함

34 함양 군수(咸陽郡守)에게 답함

35 순찰사에게 답함

36 어떤 이에게 보냄

37 순찰사에게 올림

38 김 우상(金右相)에게 올림

39 김계근(金季謹)에게 답함

40 전라 감사에게 답함

 

 

 

주금책(酒禁策)

 

선친의 글은 유실된 것이 많다. 백이론(伯夷論) 등과 같은 작품은 남의 집 묵은 종이 속에서 발견하였다. 지금도 여전히 제목만 있고 글이 없는 작품이 10여 종이어서 그것을 일일이 수집하리라 기약할 수는 없으나, 주금책 3편의 경우는 동년배나 장로(長老)들 중에 그 구어(句語)를 외어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세상에 널리 퍼져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삼가 그 권()을 비워 두어 훗날 써서 메꾸기를 기다리노니, 혹시 동호자(同好者)가 본다면 수고를 아끼지 말고 등사하여 돌려주기를 바란다. 이는 당세의 대아 군자(大雅君子)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종간(宗侃 박종채)이 삼가 쓰다.

 

[D-001]주금책 …… 있다 :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이 태호(太湖) 홍원섭(洪元燮)에게 연암의 글 중 어느 작품이 가장 낫더냐고 물었더니, 홍원섭은 주금책을 몹시 애호하여 서산(書算)으로 글 읽은 횟수를 세어가며 여러 번 읽은 적이 있었노라고 답했다고 한다. 過庭錄 卷4

[D-002]() : 한지를 묶어서 세는 단위로, 한 권은 한지 스무 장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유사경(兪士京 유언호)에게 답함

 

 

어제 수레 타고 사람들 거느리고 위의를 갖추어 왕림하셨는데 마침 더위를 피하여 교외로 나가는 바람에 맞이하여 얘기할 기회를 잃어버렸으므로 못내 아쉬움이 배나 더하던 차에 바로 또 편지가 이르니 자못 깊이 위로가 됩니다.

창문 밖에 수레와 말을 타고 지나가는 자가 하루에도 수십 명인데, 종자(從者)들의 발소리가 우레와 같아 지붕 모퉁이가 무너질 듯합니다. 처음 이사왔을 적에는 아이가 문득 책을 읽다가도 걷어치우고 먹던 밥도 내뱉고는 허둥지둥 나가 구경하더니만, 차츰 시일이 지나자 잘 나가 보지를 않더군요. 비단 우리 집 아이만 이런 것이 아니라 이 동네의 길에서 노는 아이들도 다 심상하게 보아 넘기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고 단지 날마다 보아 온 까닭이지요.

이로 말미암아 보면, 몇 자쯤 되는 외바퀴 수레에 몸을 싣고 하인배가 벽제(辟除)하는 소리를 빌리는 것 정도로는 길에서 노는 아이들을 부러워서 허둥지둥 뛰쳐나오게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갑자기 잔뜩 거드름을 부려 목을 석 자나 뽑고 기세가 산처럼 솟구친다면, 과연 그 모습을 어떻다 해야 할지요.

전날에 안성(安城)의 유 응교(兪應敎)는 아무리 좀먹은 안장에 여윈 망아지를 타더라도 진실로 자기 본성에 손상됨이 없었고, 오늘 송도(松都)의 신임 유수(留守)는 비록 아기(牙旗 대장의 기)를 앞세우더라도 진실로 평소 행동과 달라질 것이 없겠지요. 서경(西京 개경)의 호수는 줄잡아 9000호에 밑돌지 않으니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호걸이 없다고는 못 할 뿐더러, 더더구나 그들의 지혜가 사대부의 어질고 어리석음을 분별하고도 남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하하하!

 

 

[D-001]수십 명 : 원문은 數十輩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數百輩로 되어 있다.

[D-002]외바퀴 수레 : 조선 시대에 종 2 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초헌(軺軒)을 가리킨다. 개성 유수는 종 2 품의 관직이었다.

[D-003]안성(安城)의 유 응교(兪應敎) : 유언호는 포의(布衣) 시절에 안성에서 살았다. 그는 1772(영조 48)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었으나, 곧 청류(淸流)로 지목되어 흑산도에 유배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으며, 그해 10월 탕척(蕩滌)되어 안성의 선영 아래로 돌아왔다. 閔鍾顯 兪文忠公行狀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황윤지(黃允之)에게 감사함

 

 

( 나의 겸칭)는 머리를 조아려 인사드립니다. 얼마 전 청지기 김가(金哥)가 형의 친필 서한을 가지고 와, 여러 형제분들이 친상 중에 신령의 가호에 힘입어 건강을 지탱하고 계심을 자세히 알았습니다. 온 가족을 이끌고 시골로 가서 선영에 의지하고 사는 것은 바로 이 아우가 지난가을에 미처 이루지 못했던 계획입니다. 작별할 때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으니, 어찌 나의 마음을 이다지도 슬프게 하는지요. 긴 장마가 걷히기 바쁘게 가을철이 하마 반이 지났는데, 여러 형제분들 기력은 어떠신지요? 군자의 효심에서 우러난 그리움은 계절의 변화에 감개하여 더욱 새로워지겠지만, 새로 거처한 곳의 갖가지 일들은 자못 정돈되어 두서가 잡히셨는지요? 마음에 걸리고 자꾸 생각나면서, 서글프고 암담한 심정을 누를 길 없습니다.

이 아우는 모진 목숨을 연명하여 어느덧 상기(喪期)를 마치게 되니, 천지가 텅 빈 듯하고 신세는 외로워 너무도 애통하기 그지없습니다. 평생에 자식 구실을 한 적이 얼마 없었으므로 삼년상의 기간에나 모든 심력을 바쳐볼까 했는데, 오랫동안 고질을 앓느라고 몸소 상식(上食)을 받든 것도 며칠이 안 되건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궤연(几筵)을 걷게 되니, 소리 내어 울자 해도 울 곳이 없어 너무도 통탄스럽습니다.

원발(元發)은 박봉의 관직에 종사하느라 너무 바빠 겨를이 없고, 유구(悠久 이영원(李英遠))는 아마 벌써 남으로 내려갔을 게고, 여중(汝中)은 가끔 서로 보기는 하나 대개 1년 중에 두서너 차례에 지나지 않는데, 형 또한 상중에 있는 외로운 신세라 만나지 못한 지가 대략 3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무덤 곁에 여막을 이미 지었으니 초췌해진 모습을 뵐 날이 까마득합니다. 인생에서 만남과 이별, 슬픔과 기쁨이 다 성쇠를 벗어나지 못하는군요. 아득히 생각하면 대릉(大陵)과 소릉(小陵) 사이에서 서로 붙어 다니던 일이 한바탕 꿈과 같으니 어찌 감개스럽지 않으리까.

장례를 치른 이래로 외모는 매미 허물 같고 멍청하기는 흙으로 빚은 사람의 형상과 같아, 염부계(閻浮界 이승)에 잠시 묵으며 오직 꿈에만 몰두하니, 잠잘 때는 즐겁지만 깨고 나면 슬퍼집니다. 30년 사이에 이리저리 이사다닌 것이 서너 번이지만, 어느 밤이고 꿈을 꾸면 넋이 떠돌다가 항상 도성(都城) 서쪽의 옛집에 머뭅니다. 몸소 살구 ·  · 복숭아 나무 밑에 노닐면서, 혹은 참새 새끼를 잡고 혹은 매미도 잡고 나비도 쫓으며, 동쪽 정원에는 온갖 꽃이 활짝 피어 있어 또 잘 익은 과일을 따기도 합니다. ()의 양세(兩世 조부와 부친)께서 다 무양(無恙)하게 살아 계시고 중부(仲父)와 계부(季父) 및 나의 종형도 완연히 평소와 같았습니다. 그러다 꿈에서 깨고 나면 마치 무엇을 잃은 것 같고 쫓아가다가 되돌아온 듯하며, 다시 볼 듯하면서도 못 보게 되니, 슬피 울고 가슴을 치며 깬 것을 후회한답니다.

이 세상에 살아 계셨던 때를 가만히 헤아려 보면, 또한 꿈속에서처럼 많이 뫼시고 친밀하지 못했으니 꿈속이 즐거울 수밖에요. 비록 또한 이 때문에 편안히 누워 영영 잠들어 버린들 그 즐거움이 또 꿈속보다 더할 수 있을는지요?

네 살짜리 어린 자식은 이제 조금 분별이 생겨 다른 사람을 아비 어미라 부르지는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노상 품속에서 떠나려 들지 않으므로 수십 글자를 입으로 가르쳐 주었는데, 갑자기 묻기를,

 

나는 아버지가 계신데 아버지는 왜 유독 아버지가 없나요? 우리 아버지의 어머니는 어디 계시나요? 아버지도 일찍이 젖을 먹고 크셨나요?”

하여, 나도 모르게 무릎에서 밀쳐 버리고 엉겁결에 목 놓아 한참 울었답니다. 이는 다 이 아우가 상을 당한 뒤에 겪은 슬프고 쓰라린 심정을 말한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것까지는 없겠습니다. 지금 애형(哀兄)께서 새로 비통한 일을 당해 근심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일 텐데, 아마도 필시 나 때문에도 한바탕 눈물을 흘리겠군요.

예서(禮書)를 읽는 여가에 다시 무슨 책을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의 생활 방편은 다만 경서를 몸에서 떼지 않으면서 몸소 밭을 가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시경 빈풍(豳風)과 당풍(唐風)의 시들은 농삿집의 시력(時曆)이요, 논어(論語) 한 질은 시골에 사는 비결이요, 중용(中庸) 30()은 섭생(攝生)의 좋은 방법이니, 늘그막까지 힘써 할 일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아우는 9월 보름경에 북쪽으로 올라가 돌아다니면서 단양(丹陽)과 영동(永同)의 사이에서 농지를 찾아볼까 하는데, 생각대로 잘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총총하여 할 말을 다 못 하오며, 다만 슬픔을 절제하고 스스로 몸을 보호하여 상중에 건강을 손상하지 말기를 바랄 뿐입니다. 서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윤지(允之) 대형(大兄)의 예석(禮席)

8월 초이틀 담제인(禫制人) 아우 모()가 절하며 올림.

 

 

[C-001]황윤지(黃允之) : 황승원(黃昇源 : 1732~1807)으로 윤지는 그의 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뒤 이조 판서를 지냈다. 연암과는 20세 전후에 산사(山寺)에서 과거 공부를 같이 한 절친한 사이이다.

[D-001]친필 서한 : 원문은 手書인데 手疏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부모상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는 편지나 부모상을 당한 사람이 위로 편지를 받고 보내는 답장을 소()라고 한다.

[D-002]군자의 …… 새로워지겠지만 : 예기 제의(祭義)에 군자가 계절이 바뀌는 봄과 가을에 각각 제사를 지내는 것은, 가을이 되어 서리나 이슬 내린 땅을 밟게 되면 반드시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리워 서글픈 마음이 들고, 봄이 되어 비나 이슬 내린 땅을 밟게 되면 반드시 부모님을 장차 뵐 것처럼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D-003] …… 되니 : 부친상을 마친 사실을 말한다. 연암의 부친 박사유(朴師愈) 1767년 향년 65세로 별세하였다.

[D-004]삼년상의 …… 했는데 : 원문은 庶其自致於喪紀之間인데, ‘자치(自致)’ 논어에 나오는 말로 자신의 심력을 다 쏟는다는 뜻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나는 선생님에게서 들었다. ‘사람 중에 자신의 심력을 다 쏟지 않는 자가 있으나 그런 자도 부모의 상에는 반드시 심력을 다 쏟는구나!人未有自致者也 必也親喪乎라고 하신 것을.” 하였다.

[D-005]소리 …… 없어 : 원문은 攀號無地인데, 원래 반호(攀號)’는 옛날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승천할 때 땅에 떨어진 용의 수염을 지상에 남은 신하들이 부여잡고 호곡(號哭)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왕의 죽음을 애도할 때 쓰는 말이다.

[D-006]원발(元發) : 신광온(申光蘊 : 1735~1785)의 자이다. 1762(영조 38) 진사시 급제 후 벼슬은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을 지냈다. 연암과 젊은 시절부터 절친하여 1765(영조 41) 금강산 유람을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연암집 4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叢石亭觀日出’, 7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 참조.

[D-007]여중(汝中) : 이심전(李心傳)의 자이다. 그의 생년이 사마방목에는 1738, 문과방목에는 1739년으로 되어 있다. 이심전은 본관이 전주(全州), 대사간을 지낸 이성수(李性遂)의 아들이다. 유무(柳懋)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황승원과 동서(同壻)간이다. 1773(영조 49) 정시(庭試) 급제 후 정자(正字)에 제수되었으나 세손(世孫) 즉위 반대파로 몰려 파직되었다가 1784(정조 8) 사면된 이후 사헌부 장령,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다.

[D-008]대릉(大陵)과 소릉(小陵) : 대정동(大貞洞)과 소정동(小貞洞)을 말한다.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 일대이다.

[D-009]오직 꿈에만 몰두하니 : 원문은 惟是大翫於夢인데, 한유(韓愈)의 정요선생묘지명(貞曜先生墓誌銘)에 맹교(孟郊) 오직 시에만 몰두하였다.唯其大翫於詞고 하였다.

[D-010]잘 익은 과일 : 원문은 黃熟으로, 잎이 누렇게 되어 떨어질 정도로 과일이 잘 익은 상태를 말한다.

[D-011]() :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그러면 又摘黃熟梅로 앞구에 붙여 구두를 끊어야 하는데, 또한 兩世 앞에는 문의상  자가 있어야 할 듯하다.

[D-012]중부(仲父) …… 종형 : 중부는 박사헌(朴師憲)으로 자식이 없었고, 계부(季父)는 박사근(朴師近)으로 박필주(朴弼周)의 양자가 되었는데 진원(進源)과 유원(綏源) 두 아들을 두었다. 연암이 말한 종형은 진원으로, 요절하였다.

[D-013]깨고 나면 : 원문은 及旣悟로 되어 있으나, 이본들에는 及旣寤 또는 及其寤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 자는 잘못인 듯하다.

[D-014]편안히 …… 잠들어 버린들 : 원문은 偃然大寢인데, 장자 지락(至樂)에서 장자가 제 처가 죽었는데도 곡을 하지 않고 오히려 노래를 부른 이유를 해명하면서 사람들이 장차 큰 집에서 편안히 쉴 터인데人且偃然寢於居室, 내가 아이고아이고 하면서 덩달아 곡을 한다면 천명에 통달하지 못한 것을 자인하는 셈이라, 그래서 곡을 그쳤노라.”고 하였다.

[D-015]네 살짜리 어린 자식 : 연암의 장남 종의(宗儀)를 가리킨다. 종의는 1766년에 태어났다.

[D-016]애형(哀兄) : 친상을 당한 황승원을 지칭한 말이다.

[D-017]시경》 …… 시력(時曆)이요 : 시력은 당대에 통용되는 책력(冊曆)을 말한다. 시경 빈풍(豳風)과 당풍(唐風)의 시들을 읽으면 농사철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빈풍의 칠월(七月)은 농사에 관한 월령가(月令歌)였다.

[D-018]중용(中庸) 30() : 중용은 모두 33개의 장()인데, 여기서는 대략의 숫자를 들어 말한 것이다.

[D-019]서식을 …… 못하였습니다 : 원문은 不備疏例인데, 소례(疏例)는 서식을 뜻하는 서례(書例)와 비슷한 말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不備疏禮로 되어 있는데, 이는 편지의 예의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둘 다 편지를 끝맺을 때 공손하게 말하는 관례적인 표현이다.

[D-020]윤지(允之) 대형(大兄)의 예석(禮席) : 수신인을 밝힌 것이다. 상례(喪禮)를 지키고 있는 황승원에게 보낸다는 뜻이다.

[D-021]담제인(禫制人) : 삼년상을 마친 그 다음다음 달 하순에 탈상(脫喪)하면서 지내는 제사인 담제(禫祭)를 지낼 때까지 상중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어떤 이에게 보냄

 

 

요즘 자네는 친상 중에 기력이 어떠한가? 이 몸은 차츰 병이 깊어져 기동할 수 있는 날이 요원함을 고려하면, 피차간에 서로 면대하기란 당장에는 기약하기 어렵겠네. 알려주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방법이 없네그려. 지금 자네가 약관(弱冠)의 나이로 상을 당했는데, 다른 도와줄 만한 벗도 없고 또 아주 가까운 친척도 없는 처지이니, 매양 그 점을 생각하면 어찌 기가 막히도록 슬프지 않겠는가. 이미 마음을 깊이 터놓은 사이가 되었고, 외람되게 내가 나이도 몇 살 더 먹었으니, 어리석은 소견이나마 일러줄 수 있는 사람은 나만 한 이가 없을 걸세. 그러므로 이처럼 병중에 되는대로 적어 보내니, 양해하기를 간절히 바라네.

 

자네와 같은 재능으로 이미 얌전하고 부드러운 기질을 지닌 데다, 총명하면서도 신중한 바탕을 겸하였고 게다가 나이도 젊고 기력도 왕성하니, 어찌 심력을 문장과 같은 말단에만 낭비하고 실득(實得)이 없는 곳에 시간을 허비해서야 되겠는가. ‘독서궁리(讀書窮理)’ 네 글자는 늙은 서생(書生)의 진부한 말이요 남을 권면하는 의례적인 말이네. 그러나 대저 지금에 이르러 실지(實地)에 공력을 쏟고 본령(本領)을 추구한다면 자연히 마음이 진정되고 기()가 귀착할 곳이 있을 걸세. 인의(仁義)에 정통하는 것은 잠깐 사이에 되는 것이 아니고, 신중히 생각하고 분명히 분변하는 것도 스스로 차례가 있는 것이므로, 효과와 득실을 먼저 논할 수는 없으나, 양생(養生)하여 장수하고 가도(家道)를 온전히 하는 점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것독서궁리이 중요한 실마리가 되지 않는다고는 못 할 것일세.

 

평소 문학에 있어서는 비평소품(批評小品)을 보기 좋아하여 애써 찾는 것은 오직 오묘한 지혜의 깨달음이요, 자세히 음미하는 것은 모두 신랄하기 짝이 없는 어휘들인데, 이런 것들은 비록 젊은 시절 한때의 기호(嗜好)이기는 하지만 차츰 노숙해지면 저절로 없어지게 마련이므로, 심각하게 말할 것까지는 없네.

그러나 대체로 이런 문체는 전혀 법칙이 없고 그다지 고상하지 못한 것이네. 명 나라 말의 문식(文飾)만 성행하고 실질(實質)은 피폐해진 시대에 오() · () 지역의 잔재주는 있으나 덕이 부족한 문사들이 기괴한 설을 짓기에 힘써, 한 문단의 풍치(風致)나 한 글자의 참신한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용이 빈곤하고 자질구레해서 원기라고는 찾아볼 곳이 없는 것이네. 그런즉 예부터 내려오는 오 · 초 지역 촌뜨기들의 괴벽스러운 짓거리요 추잡스러운 말투이니, 어찌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지금 자네는 아직 혈기가 안정되지 않은 나이에 거듭 상례를 당하여, 돌아보아도 한 몸을 의지하고 도움받을 곳이 없어, 외롭고 허약하며 천지가 텅 빈 것 같을 것이니, 슬픔과 괴로움과 근심 걱정으로 심정이 과연 어떻겠는가. 이는 인간 세상의 일대 궁민(窮民)인 동시에 인생에서의 일대 전환점이기도 하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은 혹 심기가 약하여 몹시 놀라고 기가 꺾여 그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 못해 생명을 잃은 자도 있으며, 혹은 상례를 치르고 난 뒤 달관하고 마음을 비워 심령(心靈)이 툭 트이게 되면, 백년 인생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온갖 일이 공()으로 돌아가는 것을 슬퍼하여, 아무 것도 아끼는 것이 없고 제 몸도 돌아보지 않아 그로 인해서 본래의 심성을 잃어버리는 자도 있네. 혹 군자인 경우에는 예()로써 자신을 보전하며, 경각심을 가지고 시련을 견디어 더욱 큰 일을 해내니 비유하자면 초목이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더욱 굳건해지고 바람과 서리가 매서워지는 즈음에 열매를 거두는 것과 같네. 지금 자네는 나이 비록 약관이나, 뜻이 일찌감치 정해지고 재능이 일찍부터 성숙했으니, 진실로 능히 뜻을 굳게 세우고 이런 가운데 조금만 더 스스로 분발하여 매사를 다 옛사람처럼 하기로 스스로 기약한다면, 어찌 역량이 크지 못하며 재기(才氣)가 미치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

 

사람이 매양 부모님 봉양을 할 수 없게 된 뒤에 가서 옛일을 추억해 보면, 자식 구실을 했다고 할 만한 이가 거의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특히 뼈가 저리고 심장이 찔리는 경우라네. 부모님 사후에 효성을 바치는 것이 단지 궤연을 모시고 제물을 받드는 데에 있는 것만은 아니네. 이러한즉 부모에 대한 자네의 다함 없는 그리움은 갈수록 무궁할 줄 아네만, 이 몸은 여막을 지키면서 질병에 시달리느라 심상한 예절도 모두 폐하고 말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부끄럽고 송구하여 심장이 끓고 뼈가 후끈거린다네. 그러므로 뒤늦게야 뉘우치며 언급하는 바이네.

 

옛사람은 거상(居喪)할 때 읽는 것은 예서(禮書)일 따름이며, 그 나머지 허황하고 당장에 필요치 않은 책은 덮어 두고 보지 않았으니, 이것은 일념으로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잠깐이라도 잊어버린 적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네. 그러나 옛 성인의 경전(經傳)에 이르러서는, 어찌 일각인들 폐한 적이 있었던가.

 

가례(家禮)는 비록 주자(朱子)가 내용을 미처 확정하지는 못한 책이지만 먼저 익히 보아두는 것이 좋으니, 무릇 생전에 봉양하고 돌아가신 뒤 장례 치르는 때에 차례와 절목(節目)을 절충하여 취할 수 있네.

 

어찌 꼭 예기(禮記)라야만 예서를 읽는다 하겠는가. 지금 자네는 이미 대인(大人)의 학문에 입문하였으니 소학(小學)에 힘을 쏟을 것까지는 없겠지만, 옛사람 중에 노년이 되어서도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한 이가 있었다네. 학문을 하는 차례는 함부로 등급을 뛰어넘어 버리면 안 되네. 곧장 먼저 소학에다 기초를 세우면, 학문의 방향이 올바르게 되는 법일세.

 

 

[C-001]어떤 이에게 보냄 :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제목 아래에 이 글은 정리되지 않은 원고에서 발견했는데 누구에게 준 것인지 모르겠다. 후고(後考)를 기다린다.此篇得於亂藁 未知與何人 容俟後考는 주가 있다.

[D-001]자네는 …… 어떠한가 : 원문은 哀侍奠氣力何似인데 ()’는 부모의 상중에 있는 상대방을 지칭한 말이고 시전(侍奠)’은 제물(祭物)을 시봉(侍奉)한다는 뜻이다. 이하 ()’를 문맥에 맞추어 모두 자네로 의역하였다.

[D-002]독서궁리(讀書窮理) : 궁리는 천지 만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으로, 거경궁리(居敬窮理)라 하여 성리학에서 중시하는 수양 방법이다.

[D-003]신중히 ……  : 원문은 愼思明辨인데 중용장구  20 장에서 군자가 성()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으로 박학(博學) · 심문(審問) · 신사(愼思) · 명변(明辨) · 독행(篤行)의 다섯 가지를 들었다.

[D-004]가도(家道) : 가정의 도덕을 말한다. 주역 가인괘(家人卦) 단사(彖辭) 아비가 아비답고 아들이 아들답고 형이 형답고 아우가 아우답고 남편이 남편답고 아내가 아내다워야 가도(家道)가 바르게 되니, 가정이 바르게 되어야 천하가 안정되리라.” 하였다.

[D-005]비평소품(批評小品) : 비점(批點)과 평주(評注)를 가한 짧은 산문이란 뜻이다.

[D-006]() · () 지역 : 춘추 시대 오 나라와 초 나라의 영토였던 지역으로, 지금의 양자강(揚子江) 중류와 하류 일대를 말한다. 중국에서 특히 문학 예술이 발달한 지역이다.

[D-007]기괴한 설을 짓기에 힘써 : 원문은 務爲弔詭인데, ‘조궤(弔詭)’ 장자에 나오는 말로, 기이한 말이라는 뜻이다. 즉 제물론(齊物論)에 인생을 한바탕의 꿈으로 여기는 이런 언설을 일컬어 조궤라고 한다.是其言也 其名爲弔詭고 하였다.

[D-008] · 초 지역 촌뜨기들 : 원문은 吳傖楚儂인데, 중국의 중원(中原) 사람들이 오 지역 사람들이 간드러진 말투를 구사한다고 해서 오농연어(吳儂軟語)’ 오농세타(吳儂細唾)’라고 비하하였다. 또한 오 지역 출신 문사인 육기(陸機)가 중원 출신인 좌사(左思)를 촌뜨기란 뜻의 창부(傖夫)’라고 비웃은 적이 있다.

[D-009]궁민(窮民) : 의지할 데가 없는 백성을 말한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 늙어서 아내가 없는 이를 환()이라 하고, 늙어서 지아비가 없는 이를 과()라 하고, 늙어서 자식이 없는 이를 독()이라 하고, 어려서 아비가 없는 이를 고()라 한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천하의 궁민이요 호소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D-010]경각심을 …… 해내니 : 원문은 動忍增益인데,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큰 소임을 맡긴 사람에게 혹독한 시련과 좌절을 겪게 하는 것은 경각심을 일깨우고 참을성 있는 기질로 만들어 그가 해내지 못했던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라고 하였다.

[D-011]부끄럽고 송구하여 : 원문은 慚悚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慚惶으로 되어 있다.

[D-012]그러므로 …… 바이네 : 원문은 故乃追訟而及之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3]대인(大人)의 학문 : 대학(大學) 공부를 가리킨다. 대학은 대인군자(大人君子)의 학문을 가르치는 책이라고 하였다.

[D-014]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한 이 : 성종(成宗) · 연산군(燕山君) 연간의 유학자 김굉필(金宏弼 : 1454~1504)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홍덕보(洪德保 홍대용)에게 답함

 

 

천리 밖에서 편지 전하기를 낭정(朗亭)과 문헌(汶軒)이 하듯이 하여, 얼어붙은 비탈, 눈 쌓인 골짝 속에서 이를 얻어보게 되니, 어찌 위로가 되고 기뻐서 펄쩍 뛰지 않으리오. 청수하신 모습을 잠깐 접했다가 곧 이별의 회포를 자아내는 것보다는 이 편이 도리어 낫겠지요. 더구나 심한 추위에 부모님을 모시면서 관직 생활도 신령의 가호에 힘입어 잘하고 계시며, 아드님 또한 탈 없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말입니다.

우리들이 작별한 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으니, 얼굴이며 수염과 모발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나를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다만 알지 못하겠는 것은, 스스로 점검하기에 정력과 기개가 쇠퇴하거나 왕성한 정도가 어떠하신지 하는 점입니다.

성인(聖人)의 수천 마디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객기(客氣)를 없애게 하려는 것입니다. 객기와 정기(正氣)는 마치 음()과 양()이 서로 반대로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과 같지요. 비유하자면 큰 풀무에서 쇠를 녹여 두들기는 것과 같아서, 객기가 겨우 조금만 없어져도 정기가 저절로 서지요. 그러나 정기란 더듬어 볼 수 있는 형체가 없으며, 오직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매 부끄럼이 없는 경지에서만 찾을 수 있지요.

성인이 제 한 몸을 다스릴 뿐인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큰 도적이나 큰 악당처럼 여겨서, 성급히 하나의 이길 ()’ 자를 썼겠습니까? ‘이라는 말은, 백방으로 성을 공격하여 날짜를 다그쳐서 기필코 이기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서경 목서(牧誓)에는

 

상 나라를 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戎商必克

하였고, 주역에는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정벌하여 3년 만에 이겼다.高宗伐鬼方 三年克之

했으니, 이른바 ()과 적()은 양립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 아우는 평소 늘 객기가 병통이 되어 왔는데, 이를 이겨내고 다스리는 수단으로는 이미 구용(九容)의 방어도 없고 사물(四勿)의 무기도 없으니, 귀며 눈이며 입이며 코가 도둑떼의 소굴이 아님이 없고, 지의(志意)와 언동은 모두 객기의 성사(城社)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평소의 병의 근원이 다스리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졌으나, 이른바 정기(正氣)까지도 함께 사라져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궁지에 몰린 도적이 험한 지세를 믿고 스스로 방자하게 날뛰다가, 급기야 군사가 흩어지고 식량이 다 떨어지자 그대로 앉아서 곤욕을 받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리하여 포부와 사업이 도리어 객기가 득세할 때만 못하니, 어떻게 정기를 함양하며, 어떻게 집의(集義)하며, 어떻게 스승으로 삼고 본받으며, 어떻게 유익한 벗을 사귀어야 마침내 예()를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바로 내가 본래 지닌 천상(天常 천부적 윤리)인데 노상 객기에 눌려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객기가 이미 제거되면 모든 일이 다 이치에 들어맞아, 정기가 서지 않는 것은 걱정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른하게 지쳐 버리고 스러지듯 까라지며 닳고 닳아 버린 탓에 감정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맞부닥치니, 다시는 옛날의 기개를 찾아볼 길 없고 무기력한 일개 늙은 농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격려해 주신 별지(別紙)를 받고 보니,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 땀이 얼굴을 뒤덮었으므로 잠시 이와 같이 늘어놓습니다. 아마도 반드시 이 편지를 보시고는 한 번 웃으며,

 

이는 필시 늙어가고 곤궁함이 날로 심해진 것뿐일세. 만약 객기를 제거할 수 있다면 하늘을 떠받치고 땅위에 우뚝 설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나른하게 처져 있는 것인가? 나른하게 처지도록 만든 것이야말로 객기일세.”

하실 테지요.

대개 제가 평소에 비록 장중하고 공손함이 부족하지만, 날로 더욱 노력하는 공부 역시 그와 같이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학문을 쌓아나가는 것도 기운에 따라 쇠퇴하거나 왕성한 법이지요. 그래서 형의 정력과 기개가 스스로 점검하기에 어떠하신지를 물은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자세한 답을 주시고, 또 가슴에 절실히 와 닿는 몇 마디 말씀을 기록하여 주신다면, 이 몸을 일깨워 주고 분발시켜 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D-001]낭정(朗亭)과 문헌(汶軒) : 낭정은 서광정(徐光庭)의 호이다. 서광정은 항주(杭州) 출신의 거인(擧人)으로, 홍대용과 결교한 반정균(潘庭筠)의 외사촌형이다. 북경의 매시가(煤市街)에서 점포를 열고 있었으므로, 홍대용은 그를 만나 본 적은 없으나 그에게 편지를 보내 반정균과의 서신 교류를 중개해 줄 것을 부탁했으며, 이를 계기로 홍대용과 서광정 사이에도 서신 교류가 있었다. 문헌은 등사민(鄧師閔 : 1731~?)의 호이다. 등사민은 산서(山西) 태원(太原) 출신의 거인(擧人)으로 삼하현(三河縣)에서 소금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북경에서 귀환하던 홍대용과 만나 교분을 맺었다. 그 후 홍대용과 꾸준히 서신 교류를 했으며, 자신의 벗 곽집환(郭執桓)을 위해 연암 등 조선의 명사들에게 담원 팔영(澹園八詠)’ 시를 지어주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D-002]심한 …… 말입니다 : 홍대용은 1780(정조 4) 음력 1월 경상도 영천(榮川)의 군수로 부임하였다.

[D-003]성인이 …… 썼겠습니까 :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제 자신을 이기고 예의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라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D-004]서경》 …… 하였고 : 인용상 약간 착오가 있는 듯하다. 인용된 구절은 목서(牧誓)가 아니라 태서 중(泰誓中)에 나온다. 목서는 주() 나라 무왕(武王)이 은() 나라 주왕(紂王)과 목야(牧野)에서 싸우기 전에 훈시한 내용이고, 태서는 역시 주 나라 무왕이 맹진(孟津)에서 훈시한 내용이다.

[D-005]주역에는 …… 했으니 : 주역 기제괘(旣濟卦) 구삼(九三)의 효사(爻辭)에 나오는 내용이다. 고종(高宗)은 은 나라의 임금 무정(武丁)이고, 귀방(鬼方)은 지금의 귀주(貴州) 지역에 살았던 서융(西戎)의 하나이다.

[D-006]() …… 못한다 :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 ()은 촉()을 가리키고, ()은 조조(曹操)의 위()를 가리킨다.

[D-007]구용(九容) : 구용은 군자의 아홉 가지 자태로, “발은 무겁고 손은 공손하며, 눈은 단정하고 입은 다물며, 목소리는 조용하고 머리는 곧게 세우며, 기색은 엄숙하고 선 자세는 덕스러우며, 낯빛은 씩씩하여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고 하였다. 禮記 玉藻

[D-008]사물(四勿) :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 말라는 ()’ 자가 네 번 나왔으므로 이를 사물(四勿)이라 한다. 論語 顔淵

[D-009]성사(城社) : 안전한 은신처를 말한다. 성안의 여우나 사당의 쥐처럼 권세의 비호 아래 몰래 나쁜 짓을 하는 자를 성호사서(城狐社鼠)라 한다.

[D-010]집의(集義) :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을 뜻한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호연지기를 설명하면서 이것은 의리를 속으로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지 의리가 밖에서 엄습하여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하였다.

[D-011]유익한 벗을 사귀어야 : 논어 계씨(季氏) 유익한 벗이 셋이요 유해한 벗이 셋이니, 곧은 사람을 벗하며, 진실한 사람을 벗하며, 들은 것이 많은 사람을 벗하면 유익하다.” 하였다.

[D-012]나른하게 : 원문은 苶然인데, ‘薾然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뜻은 비슷하다. 뒤에 나오는  자도 같다.

[D-013]늙어가고 : 원문은 朽落인데, 나이가 늙어 이가 빠진다年朽齒落는 뜻이다.

[D-014]하늘을 …… 텐데 : 원문은 頂天立地인데, 이는 대장부의 기개를 형용하는 말이다.

[D-015]장중하고 …… 공부 : 예기 표기(表記)에서 공자는 군자가 장중하고 공손하면 날로 더욱 노력하게 되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구차해진다.君子莊敬日强 安肆日偸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이 아우의 평소 교유가 넓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덕을 헤아리고 지체를 비교하여 모두 벗으로 허여한 터이지요. 그러나 벗으로 허여한 자 중에는 명성을 추구하고 권세에 붙좇는 혐의가 없지 않았으니, 눈에 벗은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는 것은 다만 명성과 이익과 권세였을 따름이외다. 그런데 지금 나는 스스로 풀숲 사이로 도피해 있으니, ‘머리를 깎지 않은 비구승이요 아내를 둔 행각승이라 하겠습니다. 산 높고 물이 깊으니, 명성 따위를 어디에 쓰겠는지요? 옛사람의 이른바 걸핏하면 곧 비방을 당하지만, 명성 또한 따라온다.”는 것 또한 헛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겨우 한 치의 명성만 얻어도 벌써 한 자의 비방이 이르곤 합니다. 명성 좋아하는 자는 늙어가면 저절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과연 나도 허황된 명성을 연모하여, 문장을 표절하고 화려하게 꾸며서 예찬을 잠시 받고는 했지요. 그렇게 해서 얻은 명성이란 겨우 송곳 끝만 한데 쌓인 비방은 산더미 같았으니, 매양 한밤중에 스스로 반성하면 입에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지요. 명성과 실정의 사이에서 스스로 깎아내리기에도 겨를이 없거늘 더구나 감히 다시 명성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그러니 명성을 구하기 위한 벗은 이미 나의 안중에서 떠나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른바 이익과 권세라는 것도 일찍이 이 길에 발을 들여놓아 보았으나, 대개 사람들이 모두 남의 것을 가져다 제 것으로 만들 생각만 하지 제 것을 덜어내서 남에게 보태주는 일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명성이란 본시 허무한 것이요 사람들이 값을 지불하는 것도 아니어서, 혹은 쉽게 서로 주어 버리는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이익과 실질적인 권세에 이르면 어찌 선뜻 자기 것을 양보해서 남에게 주려 하겠습니까. 그 길로 바삐 달려가는 자들은 흔히 앞으로 엎어지고 뒤로 자빠지는 꼴을 보기 마련이니, 한갓 스스로 기름을 가까이 했다가 옷만 더럽힌 셈입니다. 이 역시 이해(利害)를 따지는 비열한 논의라 하겠지만, 사실은 분명히 이와 같습니다. 또한 진작 형에게 이런 경계를 받은 바 있어, 이익과 권세의 이 두 길을 피한 지가 하마 10년이나 됩니다.

내가 명성 · 이익 · 권세를 좇는 이 세 가지 벗을 버리고 나서, 비로소 눈을 밝게 뜨고 이른바 참다운 벗을 찾아보니 대개 한 사람도 없습디다. 벗 사귀는 도리를 다하고자 할진댄, 벗을 사귀기란 확실히 어려운가 봅니다. 그러나 어찌 정말 과연 한 사람도 없기야 하겠습니까.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잘 깨우쳐 준다면 비록 돼지 치는 종놈이라도 진실로 나의 어진 벗이요, 의로운 일을 보고 충고해 준다면 비록 나무하는 아이라도 역시 나의 좋은 벗인 것이니, 이를 들어 생각하면 내 과연 이 세상에서 벗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돼지 치는 벗은 경서(經書)를 논하는 자리에 함께 참여하기 어렵고, 나무하는 벗은 빈주(賓主)가 만나 읍양(揖讓)하는 대열에 둘 수는 없는 것인즉, 고금을 더듬어 볼 때 어찌 마음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산속으로 들어온 이래 이런 생각마저 끊어 버렸지만, 매양 덕조(德操)가 기장밥을 지으라고 재촉할 적에 아름다운 정취가 유유하였고,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 짝지어 밭을 갈 적에 참다운 즐거움이 애틋하였던 것을 생각하면서, 산에 오르고 물에 다다를 적마다 형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답니다.

생각하건대 형은 벗 사이의 교제에 열렬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줄 잘 알지만, 심지어 구봉(九峯) 등 여러 사람들이 하늘가와 땅 끝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러 사람을 거쳐 힘들게도 편지를 부쳐오는 것은 천고의 기이한 일이라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전,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으니, 곧 꿈속과 다를 바 없어 실로 진정한 정취는 드물 것입니다. 혹시 우리나라 안에서 한 번 만나 보아 서로 거리낌 없이 회포를 털어놓을 수 있다면 천리를 멀다 아니 하고 찾아가고 말겠는데, 형도 이런 벗을 아직 만나 본 적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영영 이런 생각을 가슴속에서 끊어 버렸는지요? 지난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이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었으므로, 지금 마침 한 가닥의 울적한 마음이 들어 우선 여쭙는 바입니다.

 

 

[D-001]교유 :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교유의  자가 로 되어 있다.

[D-002]나는 …… 있으니 : 1778(정조 2) 연암이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주한 사실을 말한다.

[D-003]걸핏하면 …… 따라온다 : 한유의 진학해(進學解)에 나오는 말이다. 단 진학해에는 動而得謗 ……으로 되어 있는데, 원문은 動輒得謗 ……으로 되어 있다. 이는 진학해의 앞부분에 動輒得咎라고 한 표현과 혼동한 결과인 듯하다.

[D-004]명성과 실정의 사이에서 : 원문은 名實之際인데,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서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침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聲聞過情 君子恥之고 하였다.

[D-005]덕조(德操) …… 적에 : 덕조는 사마휘(司馬徽)의 자이다. 사마휘는 후한(後漢) 말의 인물로 인재를 잘 알아보았는데, 유비(劉備)에게 제갈량과 방통(龐統)을 천거하였다. 사마휘와 제갈량 등은 양양(襄陽) 현산(峴山)에 사는 은사 방덕공(龐德公)을 존모하여 섬겼다. 제갈량은 방덕공의 집에 갈 때마다 상() 아래에서 절을 하곤 했다. 그러나사마휘는 방덕공의 집에 갔을 때 방덕공이 출타하고 없자, 그 부인에게 빨리 기장밥을 지으라고 재촉하여 방덕공의 처자들이 분주히 상을 차렸는데, 잠시 뒤 방덕공이 돌아오더니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서 누가 주인인지 손님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격의 없는 사이였다고 한다. 三國志 卷37 蜀書 龐統傳 裴松之註

[D-006]장저(長沮) …… 적에 : 장저와 걸닉(桀溺)은 춘추 시대의 은자이다. 장저와 걸닉이 밭을 갈고 있을 때 그 앞을 지나가던 공자(孔子)가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를 물었으나 가리켜 주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 하는 공자를 비웃었던 사람들이다. 論語 微子

[D-007]구봉(九峯) : 홍대용과 결교한 엄성(嚴誠)의 형인 엄과(嚴果)의 호이다. 북경에서 귀국한 뒤 홍대용은 편지를 보내 그와도 결교를 청하였고, 엄성의 부음(訃音)을 접하고 애도하는 편지도 보냈다. 연암집 2 ‘홍덕보(洪德保) 묘지명 참조.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D-008]그러나 : 원문은 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然而로 되어 있다.

[D-009]천리를 …… 말겠는데 : 원문은 不難千里命駕인데, 천리명가(千里命駕)는 멀리 벗을 찾아간다는 뜻이다. () 나라 때 여안(呂安)이 혜강(嵇康)의 고상한 취미에 탄복하여 그를 보고 싶은 생각이 날 적마다 즉시 천리 밖이라도 수레를 준비시켜 그를 만나러 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D-010]끊임없이 …… 때에도 : 원문은 談屑之際인데, 담설(談屑)은 톱으로 나무를 썰 때 톱밥이 술술 나오듯이 말이 막히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두 사람이 만나 대화할 때 의기투합하여 화제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형암(炯菴 이덕무) · 초정(楚亭 박제가) 등이 관직에 발탁된 것은 가히 특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태평성대에 진기한 재주를 지니고 있으니 자연히 버림받는 일이 없겠지요. 이제부터 하찮은 녹이나마 얻게 되어 굶어 죽지는 않을 터입니다. 어찌 사람에게 허물 벗은 매미가 나무에 달라붙어 있거나 구멍 속의 지렁이가 지하수만 마시듯이 살라고 요구할 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은 귀국한 이래로 안목이 더욱 높아져서 한 가지도 뜻에 맞는 것이 없으며, 표정에까지 간혹 재기(才氣)를 드러내곤 합니다. 중국인과의 특이한 교유에 대해서는 이미 간정록(乾淨錄)을 통해서 귀에 젖고 눈이 익어 실로 제 자신이 답사한 것과 다름 없으니, 다시 야단스럽게 탐문하고 토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밖에 기이한 일이 없다고 보지는 않지만, 잠시 억눌러두고 일부러 노구교(蘆溝橋) 서쪽의 일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이를 자못 괴이히 여겨 답답한 생각이 없지 않은 모양이니, 아마 나의 이런 의중을 깨닫지 못한 듯합니다.

혜풍(惠風 유득공)이 길에서 천자를 본 것은 참으로 장관이었답디다. 왼쪽에 천자기(天子旗)를 세우고 누런 비단덮개를 씌운 수레에다 수천 대의 수레와 수만 명의 기병이 뒤따르는 광경은 마치 벼락이 치는 듯 귀신이 조화를 부리는 듯 으리번쩍하더랍니다. 그런데 천자가 친히 말을 멈추고 고삐를 당긴 채, 손짓하여 우리 조선 사람을 불러 대등하게 서서 우러러보도록 했다는군요. 그의 콧날은 우뚝 솟아 두 눈썹 사이까지 쭉 뻗었고, 눈꼬리는 몹시 길어 귀밑머리 부분까지 옆으로 뻗쳤으며, 턱수염은 덤불 같고 광대뼈는 불끈 튀어나왔더랍니다.

그래서 내가 대꾸하기를,

 

이는 바로 진 시황(秦始皇)의 복사판일세.”

했지요. 혜풍이 묻기를,

 

어찌 그런 줄 아십니까?”

하기에, 내가

 

이미 삼재도회(三才圖會)의 제왕상(帝王像)을 보고 알았네.”

했더니, 형암 · 초정 · 혜풍 이 세 사람이 모두 크게 웃으며 내 앞에서 다시는 남달리 중국의 장관을 본 것을 자랑하지 않더군요.

형암이 향조(香祖)가 쓴 연암산거(燕巖山居)’ 넉 자를 얻어 와서 주기에, 이미 새겨 산중의 서재에 걸고 그 진본은 형에게 드리니, 고항첩(古杭帖)에 함께 붙여 넣어서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그 수인(首印 서화의 앞 부분에 찍는 도장) 무더운 여름철에도 서리 내린 듯 서늘하다.暑月亦霜氣고 하였고, 낙관(落款) 및 말미에 덕원(德園)’이라 칭했는데 그것이 그의 자인지 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 사람의 현재 직함이 모두 검서로 공교롭게도 한데 뭉치게 된 데다가, 그들이 평소 함께 지내며 교유하고 지취(志趣)도 같기 때문에, 저절로 시기와 원망을 당하는 일이 자못 많았는데 요새 와서는 더욱 심하다 합니다. 이는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됩니다. 비록 시기와 질투가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 경계하고 삼가야 할 텐데, 하물며 신분은 낮으면서 벼슬길은 영화롭고 직책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일은 어려우니, 더욱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술도 조심하면서 오로지 서적의 교열에만 전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허황된 영화를 좇는 자들이 날로 그 곁에서 법석을 떨어 피하려 해도 피할 길이 없다 하니, 형세가 그럴 듯도 합니다. 이미 서한으로 이러한 나의 뜻을 알려주긴 하였는데, 형암은 물론 세심한지라 스스로 조심할 터이지만, 초정은 너무도 재기(才氣)를 드러내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니 어찌 능히 그 뜻을 알겠습니까.

나는 지금 시골 오두막집에 영락(零落)해 있으니, 산 밖의 일은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묻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일에 상관할 바 없으나, 다만 평소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기는 형과 사뭇 같기 때문에 편지를 쓰면서 자연히 언급하게 된 것입니다. 그 사이에 서신 왕래가 있었으며, 그 친구들이 중국 다녀온 일기를 이미 완성하여 보여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D-001]형암(炯菴) …… 하겠습니다 : 1779(정조 3) 6월 이덕무(李德懋) · 박제가(朴齊家)가 유득공(柳得恭) ·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서얼 출신으로 처음 규장각의 외각(外閣)인 교서관(校書館)의 검서(檢書)로 임명된 사실을 말한다. 1781 1월 규장각으로 소속을 옮겼다.

[D-002]구멍 …… 마시듯이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맹자는 오릉중자(於陵仲子)가 청렴을 지키기 위해 인륜마저 저버림을 비판하면서, “오릉중자의 지조를 충족시키자면 지렁이가 된 뒤라야 가능할 것이다. 지렁이는 위로는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는 지하수만을 마시고 산다.”고 하였다.

[D-003]다만 …… 높아져서 : 이덕무와 박제가는 1778(정조 2) 음력 3월부터 7월까지 사은진주사(謝恩陳奏使)의 일원으로 북경을 다녀왔다. 귀국 이후 이덕무는 입연기(入燕記),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였다.

[D-004]간정록(乾淨錄) : 간정동 회우록(乾淨衕會友錄)을 말한다. 홍대용이 중국에 갔을 때 북경의 간정동에서 중국의 문사들과 만나 필담을 나눈 것을 기록한 내용이다. 연암집 1 회우록서(會友錄序) 참조.

[D-005]눈이 익어 : 원문은 目擩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뜻은 같다.

[D-006]노구교(蘆溝橋) 서쪽의 일 : 북경에서 보고 들었던 일을 가리키는 듯하다. 노구교는 북경 광안문(廣安門) 밖 영정하(永定河)에 있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다리로서 노구효월(蘆溝曉月)이라 하여 북경 팔경(八景)의 하나로 일컬어졌다. 단 노구교는 지금의 북경시 서남쪽 풍대구(豐臺區)에 속해 있어 엄격히 따지면 노구교 서쪽은 북경 서쪽의 외곽지역을 가리키는 셈이 된다. 노구교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약간 착오가 있었던 듯하다.

[D-007]혜풍(惠風) …… 장관이었답디다 : 유득공은 1778년 가을 문안사(問安使)의 일원으로 중국의 심양(瀋陽)을 다녀왔다. 건륭(乾隆) 황제는 그해 7월에 성경(盛京) 즉 심양에 순행(巡幸)하여 9월에 북경으로 돌아왔는데, 그 행차를 목격한 듯하다.

[D-008]삼재도회(三才圖會) : 명 나라 때 왕기(王圻)가 편찬한 책으로 모두 106권이다. 천문 · 지리 · 인물 · 시령(時令) · 궁실 등 14()으로 나누어 그림으로 설명하였다.

[D-009]향조(香祖) : 반정균(潘庭筠 : 1742~?)의 자이다. 반정균은 절강성(浙江省) 전당(錢塘) 사람으로 호는 추루()이다. () · () · ()에 모두 능했으며, 과거 급제 후 벼슬은 어사(御使)까지 지냈다. 이덕무는 1778(정조 2) 연행 당시 북경의 종인부(宗人府) 근처에 있던 반정균의 자택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D-010]고항첩(古杭帖) : 홍대용은 연행에서 돌아온 직후인 1766(영조 42) 음력 5 15일 반정균 · 엄성(嚴誠) · 육비(陸飛) 등 중국 항주(杭州) 출신 문사들의 편지를 모두 4개의 서첩(書帖)으로 장정하고 고항문헌(古杭文獻)이란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與潘秋庭筠書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네 번째 편지

 

 

이 아우가 산골짜기로 들어와 살려고 마음먹은 지가 벌써 9년이나 되었습니다. 물가에서도 잠자고 바람도 피하지 않고 밥지어 먹으며, 아무것도 없이 두 주먹만 꽉 쥐었을 뿐이라, 마음은 지치고 재간은 서투르니 무엇을 이루어 놓았겠습니까. 겨우 돌밭 두어 이랑에 초가삼간을 마련했을 뿐이지요. 그 가파른 비탈과 비좁은 골짜기에는 초목만 무성하여 애초부터 오솔길도 없었지만, 골짜기 입구를 들어서고 나면 산기슭이 다 숨어 버리고 문득 형세가 바뀌어 언덕은 평평하고 기슭은 부드러우며 흙은 희고 모래는 곱고 깨끗합니다. 평탄하면서 툭 트인 곳에다 남쪽을 향해 집터의 형국(形局)을 완전히 갖추었는데, 그 집터가 지극히 작기는 하지만 서성대며 노닐고 안식할 공간이 그 가운데 모두 갖추어졌지요.

전면의 왼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푸른 벼랑이 병풍처럼 벌여 있고, 바위틈은 깊숙이 텅 비어 저절로 동굴을 이루매 제비가 그 속에 둥지를 쳤으니, 이것이 바로 연암(燕巖 제비 바위)이라는 거지요. 집 앞으로 100여 걸음 되는 곳에 평평한 대()가 있는데, 대는 모두 바위가 겹겹이 쌓여 우뚝 솟은 것으로 시내가 그 밑을 휘감아 도니 이것을 조대(釣臺 낚시터)라 하지요.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면 울퉁불퉁한 하얀 바위가 마치 먹줄을 대고 깎은 듯하며, 혹은 잔잔한 호수를 이루기도 하고 혹은 맑은 못을 이루기도 하는데 노는 고기들이 몹시 많지요. 매양 석양이 비치면 그림자가 바위 위까지 어른거리는데 이를 엄화계(罨畫溪)라 하지요. 산이 휘돌고 물이 겹겹이 감싸 사방으로 촌락과 두절되니 한길을 나가 7, 8리를 거닐어야만 비로소 개짖는 소리와 닭 울음 소리를 듣게 된답니다.

지난가을부터 불러 모은 이웃도 현재 서너 가구에 지나지 않는데, 모두 해진 옷에 귀신 같은 몰골로 무슨 소리인지 지절지절하며 오로지 숯 굽는 일에만 종사하고 농사는 짓지 않으니, 깊은 계곡에 사는 오랑캐가 호랑이나 표범을 이웃 삼고 족제비나 다람쥐를 벗 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험하고 동떨어짐이 이와 같은데도, 마음속으로 한번 이곳을 좋아하게 되자 어떤 곳과도 바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집 뒤에다 형수님의 묘까지 썼으니 영영 옮기지 못할 땅이 되었지요.

띠 지붕 소나무 처마로 된 집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서늘하며, 조와 보리로 한 해를 무사히 넘길 수가 있고 채소와 고사리가 매우 왕성하게 자라 한번 캤다 하면 대바구니에 가득 찹니다. 더러는 눈 오는 날  이하 원문 빠짐 

 

이 편지가 모두 여덟 편이라고 예전에 들었으나, 지금 상자를 뒤져 겨우 네 편을 얻었는데 그나마도 완전하지 못하다.

 

[D-001]이 아우가 …… 되었습니다 : 연암은 1771(영조 47) 과거를 포기한 뒤 백동수(白東修)와 함께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을 답사하고 나서 장차 이곳에 은둔할 뜻을 굳히고 자신의 호를 연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연암집 1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증정한 서문贈白永叔入麒麟峽序 참조.

[D-002]엄화계(罨畫溪) : 엄화는 채색화(彩色畫)란 뜻이다. 연암집 10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이란 표제가 붙어 있다.

[D-003]이미 …… 썼으니 : 연암의 형수 이씨(李氏) 1778년 음력 7월 향년 55세로 별세하였다. 그해 9월 연암은 형수의 유해를 연암협으로 옮겨 집 뒤뜰에 장사 지냈다. 연암집 2 ‘맏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 참조.

[D-004]이 편지가 …… 못하다 :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기록한 것이다. 홍기문(洪起文) 선생은, 연암이 홍대용에게 답한 네 번째 편지는 연암집에 그 내용이 반 이상 결락된 채 수록되어 있는데, “연암 친필의 바로 그 결락된 편지를 내가 전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 편지에는 산거경제(山居經濟)를 기초한다고 한마디가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으니 이 산거경제가 발전되어 만년의 과농소초를 이루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 박지원 작품선집1 연암집에 대한 해제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유수(留守)가 대궐에서 하사받은 귤 두 개를 보내 준 데 감사한 편지

 

 

금란(金蘭)과 같이 절친한 사이라 바야흐로 백열(柏悅)이 몹시 깊었는데, 오두막집에 향기가 진동하니 감사하게도 목노(木奴)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이 임금님의 은사(恩賜)임을 아는데, 또한 저까지 넘치는 은혜를 입었군요.

저는 어디에서나 즐겁게 지내려 하지만, 객지를 떠돌며 쓰라림만 많이 맛보았지요. 산속에 은거하여 욕심 없이 지내니 어찌 회수(淮水)를 건넌 티가 나는 것을 꺼려하겠습니까만, 경거(璚琚)로써 갚고자 해도 송() 짓는 재주가 모자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연암(燕巖) 한 지역은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려는 뒤늦은 계획에서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유하혜(柳下惠)와 같은 자가 이곳에 이끌려 머물러 있으니 어찌 공손하지 못한 혐의가 없으리오만, 방덕공(龐德公)처럼 밭을 갈면서 남몰래 유안(遺安)의 술책을 본받고 있지요. 주읍(晝邑)에서 느긋하게 걸어다니고 늦게나마 허기진 배를 채우는 삶을 택했다고 하지만, 수레와 육식을 잊기 어려워했던 점을 비루하게 여기고, 고산(孤山)에서 학을 자식 삼고 매화를 아내 삼아 살았다고 하지만, 처자식이 여전히 딸려 있는 셈인 것을 가소롭게 여깁니다.

유상(留相) 합하(閤下)는 문장은 수호(綉虎)와 같다고 일컬어지고 도()는 용과 같기를 바라는 분으로서, 직제학이란 화려한 직함으로 새로 세운 규장각의 직무를 오래도록 겸임하고, 웅부(雄府 개성부를 가리킴)를 관할하여 고려의 옛 수도의 장()이 잠시 되셨습니다. 도성(都城)을 나고 들 때마다 사람들이 다투어 구경하니 의연히 낙양(洛陽)을 지키던 군실(君實)과 같고, 청정(淸靜)함은 누구에 비할 건가 하면 완연히 제 나라를 다스렸던 개공(蓋公)과 같지요. 촛불 아래에서 시를 쓸 제 몇 번이나 산공(山公)처럼 거마(車馬)로 왕림하셨으며, 반쯤 이지러진 화로에 술을 데울 제 해당(亥唐)의 나물국도 배불리 드셨습니다.  이하 원문 빠짐 

 

 

[D-001]금란(金蘭) : 금란지교(金蘭之交)의 줄임말로, 매우 두터운 친교를 뜻한다.

[D-002]백열(柏悅) : 가까운 친구의 좋은 일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유언호(兪彦鎬)가 개성 유수로 부임하게 된 일을 기뻐한다는 뜻이다.

[D-003]목노(木奴) : 감귤의 별칭이다. 삼국 시대 오() 나라의 단양 태수(丹陽太守) 이형(李衡)이 감귤 1000그루를 심어 두고는 죽을 때에 아들에게, ‘1000명의 목노(木奴)를 남겼으니 해마다 비단 1000필을 바칠 것이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三國志 卷48 吳書 孫休傳 裴松之註

[D-004]회수(淮水) …… 꺼려하겠습니까만 : 회수는 중국 사대강(四大江)의 하나인데, 회수 이남 지역의 귤나무가 회수를 건너 그 이북 지역에 심겨지면 탱자나무가 된다는 설이 있다. 좋지 못한 환경을 만나면 타고난 좋은 자질도 발휘할 수 없다는 뜻이다.

[D-005]경거(璚琚)로써 갚고자 해도 : 경거는 아름다운 옥과 패옥(佩玉)으로, 상대방의 선물을 받고 답례를 후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시경 위풍(衛風) 목과(木瓜) 나에게 모과를 던져주니, 경거로써 보답하였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라고 하였다.

[D-006]() 짓는 재주 : 송은 대상을 찬송하기 위해 짓는 운문의 한 종류이다. 굴원(屈原)이 자신의 재주와 덕을 귤나무에 비유하여 노래한 귤송(橘頌 : 초사 구장九章의 한 편)이 있다.

[D-007]녹문산(鹿門山) : 은사(隱士)가 거처하는 곳을 뜻한다. 후한 때 방덕공(龐德公)이 처자를 거느리고 녹문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D-008]유하혜(柳下惠) …… 없으리오만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는 노() 나라의 대부 유하혜의 처신을 공손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연암은 유하혜의 처신 중에서 특히 재야에 버려져도 원망하지 않고, 곤궁을 겪어도 근심 걱정하지 않으며 …… 자신을 끌어당겨 머물러 있게 하면 머물러 있었으니援而止之而止, 끌어당겨 머물러 있게 하면 머물러 있었던 것은 또한 떠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때문이었다.”라고 한 점에 공감하여 그와 같은 표현을 한 듯하다.

[D-009]유안(遺安)의 술책 : 유안은 자손에게 편안함을 남겨 준다는 뜻이다. 방덕공이 현산(峴山) 남쪽에서 밭을 갈고 살면서 성시(城市)를 가까이 하지 않자,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찾아와서 선생은 시골에서 고생하며 지내면서도 벼슬해서 녹봉을 받으려 하지 않으니, 무엇을 자손에게 남겨 주려오?” 하였다. 그러자 방덕공은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태로움을 남겨 주는데 나는 유독 편안함을 남겨 주니, 비록 남겨 주는 것이 똑같지는 않으나, 남겨 주는 것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龐公

[D-010]주읍(晝邑)에서 …… 여기고 : ( : ‘으로도 읽음)는 전국 시대 제() 나라 도읍 서남쪽에 있는 가까운 고을이다. 孟子集註 公孫丑下 제 나라 선왕(宣王)이 은사(隱士) 안촉(顔斶)을 접견했을 때, 안촉은 선비가 왕보다 존귀하다고 주장하며 선비를 잘 대우하도록 선왕을 설득하였다. 이에 공감한 선왕이 안촉을 스승으로 모시고자 최고의 의식(衣食)과 수레 제공을 약속하니, 안촉은 이를 사절하면서 재야로 돌아가 늦게나마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을 육식과 맞먹는 것으로 여기고, 느긋하게 걷는 것을 수레와 맞먹는 것으로 여기면서晩食以當肉 安步以當車 살겠노라고 하였다. 戰國策 齊策 안촉은 다른 문헌에는 왕촉(王蠋)’으로 되어 있는데, 사기 82 전단열전(田單列傳)에 왕촉은 주읍(晝邑)에 사는 어진 선비로 소개되어 있다.

[D-011]고산(孤山)에서 …… 하지만 : () 나라 때 임포(林逋)는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여, 장가도 들지 않고 자식도 없이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평생을 살았으므로, 그를 가리켜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았다梅妻鶴子고 하였다.

[D-012]유상(留相) 합하(閤下) : 개성 유수 유언호를 존대하여 부른 말이다. 유상은 유수(留守)를 달리 부른 말이고, 합하는 편지에서 존귀한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D-013]수호(綉虎) : 화려한 시문(詩文)을 민첩하게 짓는 것을 말한다. 삼국 시대 위() 나라 조식(曹植)이 일곱 걸음을 걸을 동안 시를 지어냈으므로 사람들이 수호라 불렀던 데서 나온 말로, ‘는 수를 놓은 것처럼 화려한 글을, ‘는 호랑이처럼 민첩한 솜씨를 뜻한다.

[D-014]용과 같기를 : 원문은 유룡(猶龍)’인데,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용과 같이 도()의 경지가 심오하다는 뜻이다. 공자가 노자를 만나 보고 나서 용과 같다猶龍고 감탄했다고 한다. 史記 卷63 老子列傳

[D-015]낙양(洛陽)을 지키던 군실(君實) : 군실은 송 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자이다. 사마광이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다가 뜻이 맞지 않자 판서경어사대(判西京御史臺)를 자청하여 낙양으로 돌아가서 15년간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천하 사람들이 모두 진재상(眞宰相)’이라 하였고, 촌로들도 모두 사마 상공(司馬相公)’이라 불렀으며, 부녀자들도 그가 군실인 줄을 알았다 한다. 宋史 卷336 司馬光傳

[D-016]청정(淸靜)함은 …… 같지요 : 청정은 청정무위(淸靜無爲)라 하여 도가(道家)에서 주장하는 통치술을 말한다. 백성들을 들볶지 않고 정치를 간편하게 행하는 것이다. () 나라 혜제(惠帝) 때 제 나라 승상 조참(曹參)이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고자 도가의 학설에 밝다는 개공(蓋公)을 초빙하니, 개공이 치도(治道)란 청정함을 귀하게 여기는 법이며,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저절로 안정된다.”고 하므로, 그의 말을 따라 제 나라를 다스린 결과 나라가 안집되어 어진 승상이라는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54 曹相國世家

[D-017]촛불 …… 왕림하셨으며 : 산공(山公)은 진() 나라 때 산도(山濤)의 아들로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정남장군(征南將軍)을 지낸 산간(山簡)을 가리킨다. 산간은 술을 몹시 좋아하여, 정남장군으로 양양(襄陽)을 지킬 때 항상 고양지(高陽池)로 놀러가 배에 실은 술을 다 마신 다음에야 돌아왔다고 한다. 晉書 卷43 山濤傳 附

[D-018]반쯤 …… 드셨습니다 : 백거이(白居易)의 시 화자권(和自勸) 해 저무니 반쯤 이지러진 화로에 뜬숯이 타네.日暮半罏麩炭火 하였다. 해당(亥唐)은 춘추 시대 진() 나라의 현인(賢人)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 “진 나라 평공(平公)이 해당을 몹시 존경하여 그가 집에 들어오라 하면 들어가고, 앉으라고 하면 앉고, 먹으라고 하면 먹어, 비록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배불리 먹지 않은 적이 없으니, 아마도 감히 배불리 먹지 않을 수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족손(族孫) 홍수(弘壽) 에게 답함

 

 

뜻밖에 종놈이 왔기에 그가 가져온 편지를 뜯어 반도 채 읽지 않아서 글자 한 자마다 눈물이 한 번 흘러 천 마디 말이 모두 눈물로 변하니 종이가 다 젖어 버렸구나. 이런 일들은 내가 지난날에 두루 겪었던 일들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려 팥알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 세상의 가난한 선비들 중에는 천 가지 원통함과 만 가지 억울함을 품고도 끝내 그 한을 풀지 못하는 자가 있다. 무릇 성() 하나를 맡아 국가의 보루가 되었는데, 불행히도 강성한 이웃나라의 오만한 적군이 번갈아 침략하여, 운제(雲梯)와 충거(衝車) 등으로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서 공격해 오는데도, 밖으로는 개미만큼의 미미한 원조도 끊어지고 안으로는 참새나 쥐, 말 고기와 첩의 인육까지 다 떨어져 필경에는 간과 뇌가 성과 함께 으스러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뜻을 꺾고 몸을 굽히지 않은 것은 지켜야 할 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서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의로운 귀신이 되었으며, 아내는 봉작(封爵)되고 자손들은 음직(蔭職)을 얻어 만대에 길이 부귀를 누렸으며, 이름이 역사에 남겨지고 제사가 끊어지지 않았다.

가난한 선비가 굳은 절조를 지킨 경우, 그가 겪은 곤란과 우환이 어찌 열사(烈士)가 고립된 성을 지킨 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적이 있었겠는가. 그 또한 오직 나에게는 지켜야 할 바가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평생을 헤아려 보면,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는 씻은 듯이 찾아볼 수 없고, 종국에 성취한 것이란 작은 신의를 위하여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 죽는 것을 흉내낸 데 불과하다. 그리하여 살아서는 못난 사내요 죽어서는 궁한 귀신이 되며, 종들은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고 처자는 보존되지 못하며, 제 이름자는 묻혀 없어지고 무덤은 적막할 뿐이다.

, 슬프다! 하늘이 백성들에게 선()을 부여하실 때 어찌 그토록 다르게 했겠으며, 뜻의 독실함 또한 어찌 남과 같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들이 원통함과 억울함을 끝내 풀어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세상의 논자들은 선뜻 한마디 말로 마감하여 말하기를, “가난이란 선비에게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 말이 어느 책에서 나왔는지 전혀 모르겠어서 마침내 옛 성현들이 남긴 교훈을 뒤적여 보았더니, 공자는 군자는 본디 곤궁하다.君子固窮 했고, 맹자는 선비는 뜻을 높이 가진다.士尙志 하였다. 천하에서 본디 곤궁하고 뜻을 높이 가지는 선비 중에 이 사람若人 가난한 선비보다 더 심한 사람이 없는데도, 성인은 이 사람을 위해서 이와 같은 말을 준비하여 거듭 훈계하신 듯하니, 어찌 지극히 원통하고 지극히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소계(蘇季)는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가며 글을 읽고 곤궁한 매고(枚皐)는 독서에 더욱 매진했으니 이는 바로 그들이 원통함을 씻고 억울함을 푸는 밑천이 되었지.

종놈을 붙잡아 두어 무엇 하리오마는, 부득불 장날을 기다려 베도 사와야 하고, 겸하여 솜도 타야 하겠기에 자못 날짜를 허비하게 되었고, 또 비와 눈이 연달아 내려 즉시 떠나보내지 못했을 뿐이다. 둘째 아이 혼사는 아직 정한 곳도 없는데 미리 준비하는 것을 어찌 논할 수 있겠느냐. 아마도 내가 평소에 물정에 어두운 줄을 잘 알 텐데, 오히려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도리어 절로 웃음이 난다.

누이의 편지가 비록 위로가 되지만, 내행(內行)을 다 보내고 홀로 빈 관아를 지키고 있자니, 곁에서 대신 글을 읽게 하고 필사(筆寫)를 시킬 사람이 없어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 내 평생 언문이라고는 한 글자도 모르기에, 50년 동안 해로한 아내에게도 끝내 편지 한 글자도 서로 주고받은 일 없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한이 될 따름이다. 이 일은 아마도 들어서 알고 있을 터이니, 나를 대신해서 이 말을 전해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현수(玄壽)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약간의 물자를 보내어 도와주고 싶지만 애닯게도 인편이 없어서, 지금까지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마치 무엇이 목구멍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이 종놈에게 주어 보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이놈의 생김새가 신실치 못한 것 같기에 우선 그만두고 다른 인편을 기다릴 따름이다. 장부 정리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으니 환곡을 다 받아들이면 결단코 돌아가려 한다.

이제 막 안경을 걸치고 이 편지 쓰기를 다 못 마쳤는데, 통진(通津)에서 편지 두 통이 또 왔구나. 아직 편지를 뜯어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사연은 보나마나 뻔한 일이다. 이만 줄인다.

 

 

[C-001]홍수(弘壽) : 박홍수(1751~1808)는 자가 사능(士能)으로, 박상로(朴相魯)의 아들이다. 벼슬은 현감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연암의 4대조 박세교(朴世橋) 이후 갈라진 집안이다. 그의 부인 함종 어씨(咸從魚氏)의 외조부가 바로 연암의 고조 박필균(朴弼均)이었다.

[D-001]운제(雲梯)와 충거(衝車) : 성을 공격하는 무기들로, 운제는 높은 사다리이고, 충거는 충돌하여 성을 무너뜨리는 병거(兵車)이다.

[D-002]참새나 …… 말았지만 : 당 나라 안사(安史)의 난 때 어사중승(御史中丞) 장순(張巡)은 태수(太守) 허원(許遠)과 함께 수양(睢陽)을 지키고 있었는데, 반란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곡식이 다 떨어져 많은 병사들이 굶어 죽자 장순은 자신의 애첩을 죽여 군사들에게 먹였고, 허원은 종을 죽여서 군사들을 먹였다. 또 참새나 쥐 등도 모조리 잡아서 먹도록 하고 갑옷, 쇠뇌 등도 삶아서 먹게 했다. 이렇게 해서까지 성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끝내 함락되면서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新唐書 卷192 張巡傳

[D-003]작은 ……  : 논어 헌문(憲問)에서 공자는 관중(管仲)이 환공(桓公)을 도와 제후(諸侯)의 패자가 되어 한 번 천하를 바로잡게 한 덕분에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작은 신의를 위하여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 죽되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과 같이 행동하겠는가.” 하였다.

[D-004]군자는 본디 궁하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가 진() 나라에서 양식이 떨어져 종자(從子)들이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 되자, 자로(子路)가 성난 얼굴로 공자에게 군자(君子)도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군자는 본디 곤궁하다. 소인(小人)은 곤궁하면 외람된 짓을 한다.” 하였다.

[D-005]선비는 …… 가진다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 제 나라 왕자(王子) () 선비는 무엇을 일삼는가?” 하고 묻자, 맹자는 뜻을 높이 가진다.”라고 답하였다.

[D-006]소계(蘇季) …… 읽고 : 소계는 전국 시대의 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으로, 그의 자가 계자(季子)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소진은 글을 읽다가 졸음이 오면 자신의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 잠을 쫓아, 피가 발까지 흘러내리곤 했다 한다. 戰國策 秦策

[D-007]곤궁한 …… 매진했으니 : 매고(枚皐)는 한() 나라 경제(景帝) 때의 저명한 문인 매승(枚乘)의 서자이다. 어려서 아버지와 헤어져 어머니와 함께 곤궁하게 살다가, 나중에 대궐에 글을 올려 자신이 무제(武帝)가 초빙하고 싶어했으나 작고한 매승의 아들임을 밝힘으로써 벼슬을 얻게 되었다. 부송(賦頌)에 뛰어나고 또 글을 빨리 지었기 때문에 무제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漢書 卷51 枚皐傳 단 그가 독서에 매진했다는 고사는 출전을 알 수 없다.

[D-008]둘째 아이 …… 없는데 : 연암의 차남 종채(宗采) 1795(정조 19) 가을에 처사 유영(柳詠)의 딸인 전주 유씨(全州柳氏)와 결혼하였다.

[D-009]내행(內行) : 먼 길을 나들이한 집안의 부녀자들을 가리킨다.

[D-010]50년 동안 해로한 아내 : 연암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연암과 동갑으로, 16세 되던 1752(영조 28)에 시집 와서 1787(정조 11) 향년 51세로 별세하였다. 그러므로 부부로서 해로한 햇수는 35년인데, 아마 부인의 향년을 들어 대략 ‘50이라 말한 듯하다.

[D-011]현수(玄壽) : 박현수(1754~1816)는 자가 사문(士門)으로, 박상규(朴相圭)의 아들이고 박홍수의 사촌 동생이다. 벼슬은 하지 못했다.

[D-012]신실치 못한 것 같기에 : 원문은 若不信實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苦不信實  몹시 신실하지 않기에로 되어 있다. 이 역시 문리는 통한다.

[D-013]장부 …… 끝났으니 : 1792(정조 16) 연암은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부임하자 아전들에게 그간 환곡을 횡령한 사실을 자수하도록 권하고, 처벌을 가하는 대신 자진하여 변상하게 하니, 아전들이 몇 년 안에 완납하여 장부가 완전히 정리되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2

[D-014]통진(通津)에서 …… 왔구나 : 통진은 경기도 김포(金浦)의 한강 입구에 있던 현()이다. 그곳에 사는 연암의 친척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함양 군수(咸陽郡守)에게 답함

 

 

인편에 서한을 보내 주시어 자못 위로가 됩니다.

제방 쌓는 군정(軍丁)을 배정한 날짜를 이렇게 먼저 지시하여 주시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만 귀군(貴郡)에서 부역을 시작한 뒤에, 또한 응당 저희 고을의 백성들 사정에 따라서 그 완급(緩急)과 선후(先後)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게 해야지, 억지로 맨 뒤로 돌리는 것은 부당합니다.

보내 주신 편지를 보면, 매양 거창(居昌) 고을을 들어 그 멀고 가까움을 비교해서 이런 배정이 나온 것 같으나, 저희 현에서 가호(家戶)를 가려 뽑아 징발하는 군정은 모두 서상동(西上洞)과 북상동(北上洞) 두 동에서 나오는데, 이 두 면()과 저희 관아와의 거리가 혹은 80, 혹은 90리가 되니, 부역 장소와의 거리를 헤아려 보면 모두 백수십 리나 되는 먼 거리입니다. 이로써 헤아린다면 거창이 도리어 저희 현보다 가까운 셈입니다. 왜냐하면 거창에서 모집하는 군정은 모두 읍내에서 대신 서 주므로 부역 장소와의 거리를 헤아려 보면 70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부역하는 곳은 마찬가지이니, 특별히 선후에 따른 이해(利害)의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죄송하오나 저의 마음에는 스스로 편안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혹시 뒤질까 두려워하는 일은 있을망정, 무슨 이익이 있다고 빨리 달려 앞을 다투겠습니까. 수십 수백 명의 규율 없는 군정들을 몰아가다 밥은 제가 준비한 밥을 먹으면서 일은 남의 일을 하게 하니, 속담에 이른바 고양(高陽) 밥 먹고 파주(坡州) 구실 하러 간다는 격입니다.

만약 또 군정을 전진 후퇴하게 하는 호령을 본현에서 하지 않아서, 그들로 하여금 우선 천천히 하게 할 경우에는 이미 기약한 날짜가 저절로 다 지나가 버릴 것이요, 좀 기다리게 할 경우에는 저절로 한창 농사지을 때를 빼앗을 것입니다. 비록 11일까지 맞추어 가 억지로 지휘를 따른다 해도, 또 어찌 자기 일처럼 여겨서 허겁지겁 달려가 힘을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농사 형편을 들어 말하더라도 들판과 산골짜기는 현격하게 다릅니다. 산은 높고 물은 차가워 바람과 서리가 자못 이른 편이니, 농토를 경작하는 모든 절차를 다른 어떤 곳보다 먼저 해야 하므로, 귀군의 평탄하고 넓은 지대와는 그 이르고 늦음을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 또 돕는다는 것이 도리어 해를 끼친다.”고 책망하셨는데, 이 또한 어찌 저의 마음에 편안하게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서로 돕는 의리에 있어서 오직 힘을 다할 뿐이거니와, 하물며 조정의 명령이 내렸는데 누가 감히 공사를 방해할 계획을 하겠습니까. 설사 귀군에서 역군(役軍)이 몹시 넉넉하여 이웃 고을을 다시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해서 동원을 중지할 것을 허락한다 하더라도, 이곳에서도 장차 잘된 일이라고 흡족하게 생각하고 머뭇거리다가 주저앉고 말겠습니까? 이 또한 감히 말씀하신 뜻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부역하는 곳이 이미 대단히 큰 데다가 다른 고을 군정까지 아울러 투입하게 되면 실로 감독하기가 어렵고, 모든 일에는 주객(主客)의 구별이 없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진실로 저의 생각도 염려하신 바와 같습니다. 다만 초나흗날에 가마를 타고 병든 이 몸을 이끌고서, 친히 역군을 거느리고 가 몸소 감독하고 독려한다면, 함양군과 안의현 양쪽이 다 무방할 것 같습니다.

저의 우둔함을 채찍질하고 단련해 주신 점은 진실로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만, 바라건대 반드시 양찰하시어 이미 단속해 놓은 군정들로 하여금 중도에 기일을 바꾸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C-001]함양 군수(咸陽郡守)에게 답함 :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부임한 초기에, 함양군의 제방(堤防) 보수를 돕기 위한 부역에 안의 고을 백성들을 동원하는 문제로 함양 군수 윤광석(尹光碩)이 보내온 편지에 답한 것이다. 전에도 제방 보수를 위한 부역에 수차 동원되었으나 공사가 지지부진했으므로, 연암은 함양 군수와 약속하여 담당 구역을 확실히 분담한 다음에, 부역에 징발된 백성들을 몸소 통솔하고 식사도 제공하여 신속히 공사를 마쳤다. 이리하여 연암의 재임 중에 다시는 이런 일로 부역이 없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2

[D-001]군정(軍丁) : 군적(軍籍)에 오른 16세 이상 60세 미만의 성인 남자로, 병역이나 부역에 징발되었다.

[D-002]어찌 …… 받아들여지겠습니까 : 원문은 豈所安於鄙心耶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D-003]부역하는 …… 큰 데다가 : 원문은 旣已役處浩大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이는 같은 의미이지만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을 따를 경우에는 앞서 함양 군수의 편지 내용을 인용한 예에 준하여, ‘役處浩大부터 함양 군수의 편지 내용이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답함

 

 

하교(下敎)하신 뜻은 잘 알았습니다. 부임한 초기에 시노(寺奴)에 관한 사안으로 시끄럽게 말들이 귀에 들려오길래 그 김에 즉시 비밀리에 알아보았습니다. 계묘년(1783, 정조 7) 무렵에 시노의 두목(頭目)들이 신공(身貢)을 방납(防納)한다는 핑계로 돈을 거둬들인 것이 모두 900여 냥이나 되는데 그것을 모두 다 써서 없애버려, 이 때문에 패가망신한 자가 많으므로 원통함이 뼛속까지 사무쳤는데, 지난겨울에 추가로 노비를 찾아내어 신공을 거둘 때에 또다시 때를 타서 농간을 부린 것이었습니다. 시노들이 남몰래 뇌물을 바친 것은 본래 앞으로 있을 신공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10년 후에 마침내 추가로 찾아내어 신공을 거두는 대상에 들고 말았으므로, 이름을 누락시키고 몸을 숨긴 그 밖의 다른 자들도 모두 두려움을 품고, 지난 일을 뒤미쳐 끄집어내어 원망하는 말을 서로 퍼뜨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하교하신 것을 보면 일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아신 듯하나, 두목들이 방납을 빙자하여 침학(侵虐)하는 것은 본래 때가 있으니, 바로 세밑에 추가로 노비를 찾아내는 때입니다. 지금은 추가로 찾아내는 날짜가 아직 멀었으니, 아무리 농간을 부리고자 해도 형세상 될 수 없는 일입니다. 대개 지난겨울에도 이러한 폐단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일을 끌어다 붙여 원망과 비난이 떼지어 일어나고 있어, 엄정하게 조사하여 보고를 드려야 함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일 뿐만 아니라 전임(前任) 수령과 관계된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임 수령으로서 작고한 자가 이미 3()인데, 그중에서도 족숙(族叔)이 가장 곤란한 입장이 되겠기에, 반복해서 깊이 헤아리며 감히 경솔히 발설을 못 하고 사건의 추이를 관망하여 조처할 생각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근원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하나, 다만 이들 무리가 원한이 깊어서, 외람되이 임금에게까지 소원(訴冤)하는 일이 자주 있는 점이 걱정됩니다. 어떤 일을 막론하고, 만약 거둬들인다는 따위의 말로써 두루뭉술하게 원통함을 하소연한다면, 본 고을에 탈이 생기는 것은 놔두고라도 영문(營門 경상 감영)에 근심을 끼치는 것은 응당 또 어떠하겠습니까. 원한이 쌓인 지 이미 오래이고 말이 멀리까지 퍼졌으니, 일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만약 직관(直關)을 보내 엄중히 조사하라고 지시한다면, 또한 어찌 감히 적당히 얼버무리고 발뺌을 하겠으며, 뒤처리를 잘할 방책을 스스로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바치는 별지(別紙)는 바로 저의 족질이 우의정에 제수됨을 축하한 편지입니다. 감영(監營)으로부터 황각(黃閣 의정부)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처음 연석(筵席)에 나갔을 때 임금께 아뢰면 힘써 도와주기가 쉬울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 폐단을 손이 가는 대로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그 부본(副本)입니다. 보시면 짐작하실 것이나, 이는 본디 제가 평소에 고심했던 바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C-001]순찰사에게 답함 : 연암은 안의 현감으로 부임한 직후인 1792(정조 16) 족질(族姪) 박종악(朴宗岳)이 우의정에 제수됨을 축하하면서 그에게 시노(寺奴) 문제에 관해 건의한 편지,  연암집 2에 수록된 삼종질 종악이 정승에 제수됨을 축하하고 이어 시노 문제를 논한 편지賀三從姪宗岳拜相 因論寺奴書를 보낸 뒤에, 역시 시노 문제로 경상 감사의 편지를 받고 그에 답한 것이다.

[D-001]신공(身貢)을 방납(防納)한다는 핑계 : 신공은 지방에 거주하는 시노들이 해당 관아에 가서 신역(身役 : 구실)을 하는 대신 공포(貢布)라고 하여 베를 바치는 것을 말한다. 방납(防納)은 이 공포를 대신하여 납부하고 나중에 그 대가를 받는 것을 말한다. 중간에서 높은 이윤을 취하여 폐단이 심했다.

[D-002]3() : ()은 수령의 임기를 말한다. 수령의 임기 동안을 등내(等內)라고 한다. 여기서는 작고한 수령이 3명이라는 뜻이다.

[D-003]직관(直關) : 중앙의 각 관청에서 순영(巡營)이나 병영(兵營)을 경유하지 않고, 바로 외읍(外邑)으로 보내는 관문(關文)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어떤 이에게 보냄

 

 

정아(政衙 수령이 정무 보는 곳) 서남쪽 100리 밖에 푸른 장막이 드리운 듯한 것은 바로 호남과 영남 아홉 고을에 웅거하여 도사린 산인데 그 이름은 지리산이오. 황여고(皇輿攷)에 이르기를 천하에 신선이 산다는 산이 여덟이 있으며 그중 셋은 외국에 있다고 했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풍악산(楓嶽山)은 봉래산(蓬萊山)이고, 한라산은 영주산(瀛洲山)이고, 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이다.”라고도 하지요. () 나라 때 방사(方士)의 말에 삼신산(三神山)에 불사약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후세의 인삼입니다. 한 줄기에 가장귀가 셋이고, 그 열매는 화제주(火齊珠 보석의 일종)와 같고 그 형상은 동자(童子)와 같은데, 옛날에는 인삼이라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불사약이라 일컬어, 오래 살기를 탐내는 어리석은 천자를 속여 현혹되게 한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내가 돈 수백 냥을 내어서 산에서 캐다가 뒤뜰에다 길렀는데, 얼마 안 가서 갑자기 망양(亡陽)을 앓게 되어 거의 다 캐 먹었답니다. 맛은 몹시 쓰디쓰고 향기가 오래 남으나, 기실은 노상 먹는 당귀나 죽순채(竹筍菜)만도 못하더군요. 그러나 이것을 석 냥쭝 먹고 나자 여러 달 동안 계속해서 목욕하듯 흐르던 식은땀을 능히 막아주었으니, 반드시 사람을 죽지 않게 만든다고는 못 하겠지만, 역시 사람을 현혹하는 요사스러운 풀이 아니겠습니까.

나날이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을 대하고 있노라면, 그 푸르른 장막을 드리운 것이 문득 변하여 푸른 도자기 빛이 되고, 또 얼마 안 가서 문득 파란 쪽빛이 되지요. 석양이 비스듬히 비추면 그 빛이 또 변하여 반짝이는 은빛이 되었다가, 황금빛 구름과 수은빛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 수만 송이 연꽃으로 변하여 하늘거리는 광경이 깃발들이 나부끼는 것 같으니, 신선이나 은군자(隱君子)가 무거(霧裾)를 열어젖히고 하대(霞帶)를 휘날리면서, 단아하게 그 사이를 출몰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였답니다. 나는 우리 팽()이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지요.

 

지금 내가 복용한 인삼 한 줄기가 과연 사람을 죽지 않게 하여, 가벼운 몸으로 멀리 날아 삼신산을 구름처럼 노닌다 하더라도, 만약 가족들을 데리고 있지 않고 또 친구들도 없다면 무슨 좋은 정취가 있겠느냐. 비록 잠시 안기생(安期生)이나 적송자(赤松子)를 만났다 할지라도, 인간세상에서 도끼 자루 썩는 기간이 바로 신선 세상의 하루에 불과할 테니 그곳의 세월은 또 얼마나 촉박하겠느냐. 하루 동안 먹는 음식이 비록 화조(火棗)나 영지(靈芝)라 할지라도 어찌 요사이 먹는 언배氷梨나 홍시만 하겠느냐. 설령 참으로 안기생 · 적송자를 만나서 황정경(黃庭經) 녹자(綠字)를 강독한다 할지라도 또한 어찌  원문 7자 빠짐 현담(玄談)과 묘게(妙偈)만 하겠느냐.

설령 속세를 벗어나 이야기하고 웃고 하는 것이 혹 즐겁다 할지라도, 그와 같이 이야기하고 웃는 동안에 인간 세상에는 후손이 이미 십대(十代)가 지났을 것이다. 사랑스럽고 보고 싶은 마음이 없을 수 없으니, 때로 바람을 타고 돌아와서 그 후손들에게 내가 바로 너의 10대조이다.’라고 하면, 버럭 성을 크게 내며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진 시황과 한 무제(漢武帝)로 하여금 진작 이런 깨달음을 알게 했더라면, 어찌 기꺼이 부귀를 버리고 참즐거움을 놓아 버린 채 곤궁한 삶을 택하여 적막함을 달게 여기며, 만승(萬乘) 천자의 존엄을 집어던지고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 머물려고 했겠느냐.”

바라노니 그대는 흥이 나면 한번 찾아와, 이 동산에 가득 찬 죽순을 나물로 데쳐 먹고 개천에 가득한 은어를 회 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맑은 못의 곡수(曲水) 위에 참말로 술잔을 띄워 흘려 보시지요. 그러면 진() 나라 제현(諸賢)의 풍류만 못하지 않을 것이며, 계축년의 수계(修禊)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C-001]어떤 이에게 보냄 : 연암은 안의 현감으로 재직하던 1793년 봄에 김기무(金箕懋), 처남 이재성(李在誠), 사위 이종목(李鍾穆)과 이겸수(李謙秀), 문하생 이희경(李喜經) · 윤인태(尹仁泰) · 한석호(韓錫祜) · 양상회(梁尙晦) 등을 초청하여, 왕희지(王羲之)의 난정(蘭亭) 고사를 본떠 술잔을 물에 띄워 흐르게 하고 시를 읊조리며 즐거운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過庭錄 卷2 그러므로 이 편지는 1793년 봄의 그 모임에 초청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로 짐작된다.

[D-001]황여고(皇輿攷) : 명 나라 신종(神宗) 때 장천복(張天復)이 편찬한 지리서이다.

[D-002]() 나라 …… 하였으니 : 진 나라 때 방사(方士) 서복(徐福 : 서불徐巿)이 진 시황(秦始皇)에게 글을 올려 봉래 · 방장 · 영주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살고 있다고 하고, 불로초를 구해 오겠다며 동남 동녀(童男童女) 3000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던 일을 가리킨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D-003]망양(亡陽) : 식은땀을 많이 흘림으로 인해 몸 안의 양기가 없어지면서 오한이 나고 손발이 차지며 심한 허탈 상태에 빠지는 병인데, 산삼이 특효약이라고 한다.

[D-004]죽순채(竹筍菜) : 삶은 죽순을 얇게 썰어 육편(肉片)과 함께 양념하여 볶은 나물을 말한다.

[D-005]석양이 비스듬히 비추면 : 원문은 夕陽乍映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夕陽斜映으로 되어 있다. 후자가 문맥과 더 합치한다고 보아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6]무거(霧裾) …… 휘날리면서 : 무거는 옅은 안개처럼 가벼운 비단 옷깃을 말하고, 하대(霞帶) 역시 노을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허리띠를 말한다. 신선은 노을로 옷을 삼는다고 하여 이를 하의(霞衣)라고 한다.

[D-007]우리 팽() : 원문은 阿彭인데, ()는 항렬이나 아명(兒名) 또는 성() 앞에 친밀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 붙이는 말이다. 예컨대 이덕무(李德懋) 16세 연하인 그의 막내 아우 공무(功懋)의 아명이 정대(鼎大)였으므로 그를 아정(阿鼎)’이라 불렀다. 靑莊館全書 卷4 嬰處文稿2 題阿弟所學字卷末 그러므로 아팽(阿彭)은 당시 연암을 시종(侍從)하던 나이 어린 사람을 부른 애칭이었을 것이다. 연암을 따라가 있던, 당시 10대 초반의 둘째 아들 박종채의 아명이 아무였을 가능성이 있다.

[D-008]안기생(安期生) : () 나라 때 사람으로, 하상장인(河上丈人)에게 신선술을 배워 장수하였는데 사람들이 그를 천세옹(千歲翁)이라 불렀다. 진 시황이 금벽(金璧)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봉래산(蓬萊山)으로 떠나갔다 한다.

[D-009]적송자(赤松子) : 중국 고대 전설 속의 신선이다.

[D-010]도끼 자루 썩는 기간 : () 나라 때 왕질(王質)이란 사람이 벌목을 하다가 동자(童子)들이 잠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했는데 그 사이에 보니 자신의 도끼 자루가 다 썩어 버렸으며, 귀가했더니 동시대 사람들이 이미 죽어 아무도 없었더라고 한다. 述異記

[D-011]화조(火棗) : 전설에 나오는 선과(仙果)로 이것을 먹으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한다.

[D-012]황정경(黃庭經) 녹자(綠字) : 황정경은 도가의 경전이다. 녹자 녹문(綠文), 녹도(綠圖)라고도 한다. 황하(黃河)에서 나왔는데 인간 세상의 길흉화복을 예언한 책이라 한다.

[D-013]현담(玄談)과 묘게(妙偈) : 불경을 가리킨다. 현담은 현묘한 담론이란 뜻으로, 불경의 제목과 저자 및 대의를 논술한 것이다. 묘게는 오묘한 게송(偈頌)이란 뜻으로, 운문으로 부처의 덕을 찬송하거나 경전의 내용을 부연 또는 총결한 것이다.

[D-014]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말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가리킨다.

[D-015]이 동산에 …… 데쳐 먹고 : 원문은 喫緊此滿園筍蔬인데, 순소(筍蔬)는 곧 죽순채(竹筍菜)를 가리킨다. ‘끽긴(喫緊)’은 원래 급박하다든가 중요하다는 뜻인데, 문맥으로 보아 여기서는 먹는다는 뜻으로 새길 수밖에 없다.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그런 뜻과 유사한 돈끽(頓喫)’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돈끽도 끼니마다 먹는다든가 단번에 먹는다는 뜻이어서 문맥과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끽긴(喫緊)은 다음 문장의 회초(鱠錯)’와 대응 관계에 있으며, 회초(鱠錯) ()’ 자는 초()와 통하니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긴() 자에는 끓는 물에 데친다는 뜻이 있으므로, 원문을 살려 번역하였다.

[D-016]맑은 못의 곡수(曲水) : 연암은 안의현 관아의 빈터에 공작관(孔雀館)이라는 정각을 짓고 북쪽 연못의 물이 흘러넘쳐 그 앞을 지날 때에는 곡수(曲水)가 되게 만들어 연잎을 따서 그 위에 술잔을 실어 띄워 흐르게 하였다고 한다. 연암집 1 공작관기(孔雀館記) 참조.

[D-017]() 나라 …… 않는다면 : 진 나라 때 왕희지(王羲之)는 회계(會稽)의 산음현(山陰縣)에 있던 난정(蘭亭)에서 계축년(353) 3 3일 수십 명의 명사들과 함께 수계(修禊)하면서 곡수연(曲水宴)을 벌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1 蘭亭記 수계(修禊)란 옛날 중국에서 3월의 첫 번째 사일(巳日)에 냇가에서 몸을 씻고 놀았던 일로, 이렇게 하면 그해의 액운을 면할 수 있었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올림

 

 

김매기 한 뒤로 심한 가뭄이 들어, 갑자기 6월부터 지금까지 줄곧 하늘엔 한 점 구름도 없었습니다. 부채질을 하고 찬물을 마셔 대지만 밤낮없이 활활 타는 화로 속에 앉아 있는 듯하니, 이는 지난 60년 동안 처음 겪는 일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순사또께서는 원기왕성하게 지내시리라 믿습니다. 하관(下官 연암의 자칭)은 갈수록 쇠약하고 병이 깊어지고 있지만, 분주히 달려가 비를 빌었어도 신령의 보응은 한층 더 멀어지기만 하니, 백성들의 일에 대한 걱정으로 목이 타는 듯합니다. 고을살이 3년에 한 가지도 은혜로운 정사가 없었으니, 재앙이 닥쳐오는 것은 이치상 혹시 당연할 듯도 합니다. 다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붉은 도장을 마구 찍어 대는 것이 부정(不正) 아닌 것이 없는데, 오늘도 이렇게 하고 내일도 이렇게 하여 잘못된 전례를 답습하며 바로잡아 고쳐 가는 일이 없으니, 이는 어찌 거심(距心)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원문 74자 빠짐 

지금의 이른바 양반이란 옛날의 이른바 대부(大夫)와 사(), 지금의 이른바 수령이란 옛날의 이른바 도신(盜臣)입니다. 만약 백이(伯夷)나 오릉중자(於陵仲子) 같은 이로 하여금 지금 장리(長吏 고을 수령) 한 자리를 차지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더러운 진흙탕과 잿더미에 앉은 것같이 여길 뿐이겠습니까. 반드시 밖으로 뛰쳐나가 먹은 것을 토해 내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는 관문(關文)이나 가는 첩보(牒報 서면 보고)가 한 가지도 절실한 내용이 없으며, 백성의 근심이나 나라의 장래를 전혀 상관하지 않고 어물어물 넘기고 모호하게 처리할 따름입니다.

지금과 같은 무더위에 걸리는 병은 학질과 이질이요 관격(關格)인데, 이는 풍한서습(風寒暑濕)이 원인이 되거나 허로(虛勞)와 내상(內傷)이 빌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삐 주명신(周命新)을 불러오지만, 애시당초 어찌 맥박이나 증세를 제대로 살펴본 적이 있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이진탕(二陳湯)의 약방문을 받아 적게 하고, 한편으로는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읊어 주고는, 국수에다 돼지고기까지 먹고 총총히 일어나 가 버리지요. 날마다 수백 가지 병을 살펴보지만, 가는 곳마다 이런 식입니다. 나로 말하자면 그 증세를 진단하기를, ‘인순고식(因循姑息)이요 구차미봉(苟且彌縫)이다라고 봅니다. 이렇게 하면서 복의(福醫)로 세상에 행세하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먼저 그 복의부터 처벌해야만, 비로소 백성들의 병이 치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돼지 족발 하나로 풍년을 빌었던 사람은, 바친 것은 비록 보잘것없었으나, 그 뜻은 그래도 진실하고 그 말은 매우 정성스러웠습니다. 지금 비를 비는 제사로써 따져 본다면, 비록 땅을 깨끗이 쓸고 제사를 올린다고 하지만 자리를 깔고 장막을 친 것부터 그다지 평평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릇들은 금 가고 비틀어졌으며 제기(祭器)들은 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시골구석의 집사(執事)들도 예의에 익숙하지 못하여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이 바르지 못하며, 옛 법도에도 지금 법도에도 맞지 않은 관을 쓰고, 평성(平聲)인지 거성(去聲)인지도 분변하기 어려운 성조로 무미건조한 축문을 읽어 대니, 이렇게 하면서 사방 천리에 큰비를 맞이하기를 바란다면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세간의 만사가 모두 다 이런 부류입니다.  이하 원문 빠짐 

 

 

[D-001]거심(距心)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 고을 수령인 연암 자신의 죄라는 뜻이다. 공거심(孔距心)은 제 나라의 평륙(平陸)이란 고을의 수령이었는데, 맹자가, “지금 남에게서 소와 양을 받아 대신해서 기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목장과 꼴을 구할 것이다. 목장과 꼴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소와 양을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또한 소와 양이 죽어 가는 것을 서서 볼 것인가?” 하고 질책하니, “이는 저 거심의 죄입니다.” 하고 뉘우쳤다고 한다. 孟子 公孫丑下

[D-002]도신(盜臣) : 관청 창고의 재물을 도적질하는 관리라는 뜻이다. 대학에서 맹헌자(孟獻子)가 말하기를 백승지가(百乘之家 : 경대부가卿大夫家)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聚斂之臣를 기르지 않는다.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를 두기보다는 차라리 도신(盜臣)을 둘 것이다.”라고 하였다.

[D-003]만약 …… 것입니다 : 백이는 악인(惡人)의 조정(朝廷)에 참여하고 악인과 말하는 것을 마치 의관을 갖추고서 더러운 진흙탕과 잿더미에 앉은 듯이 여겼다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오릉중자(於陵仲子)는 제() 나라에서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 출신으로, 그의 형은 식읍(食邑)인 합()에서 만종의 녹봉을 받고 있었다. 오릉중자는 형의 녹봉을 의롭지 못하다고 여겨 한 집에서 살지 않고 오릉(於陵)에 은둔하였다. 훗날 집에 돌아와 형에게 뇌물로 거위를 바치는 자를 보고 이 꽥꽥거리는 것은 무엇에 쓰자는 거요?”라고 하며 얼굴을 찌푸렸는데, 그 뒤 어머니가 요리한 거위 고기를 먹고 있을 때 형이 보고는 이것이 꽥꽥거리던 고기다.”라고 하자, 밖으로 뛰쳐 나가 먹은 것을 토해 버렸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D-004]풍한서습(風寒暑濕) : 한의학에서 풍 ·  ·  · 습은 병을 일으키는 외부의 사기(邪氣)를 가리킨다. 이 사기가 인체에 들어와 병을 일으키는 것을 각각 중풍(中風), 중한(中寒), 중서(中暑), 중습(中濕)이라 한다.

[D-005]허로(虛勞)와 내상(內傷) : 허로는 한의학에서 오랫동안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과로한 결과 나타난 증상을 총칭한 말이다. 내상은 한의학에서 내인성(內因性) 질환을 말하는데, 음식을 잘못 섭취해 생기는 음식상(飮食傷), 술을 과음해서 생기는 주상(酒傷), 심신을 과도하게 사용해 생기는 노권상(勞倦傷) 등이 있다.

[D-006]주명신(周命新) : 조선 후기의 명의이다. 허준(許浚)의 제자로 동의보감을 참조하여 1724(경종 4) 임상치료학의 명저인 의문보감(醫門寶鑑) 8권을 저술하였다.

[D-007]이진탕(二陳湯) : 반하(半夏), 귤껍질, 붉은 복령(茯笭), 감초 등을 넣어 달인 탕약으로 담()을 다스리는 데 특히 효과가 있다.

[D-008]인순고식(因循姑息)이요 구차미봉(苟且彌縫)이다 : 인순고식은 적당히 얼버무리고 임시방편을 구하는 것을 뜻하고, 구차미봉 역시 비슷한 말로 대충 해치우고 임시변통하여 문제를 은폐하는 것을 뜻한다. 연암은 만년에 병풍에다 큰 글씨로 인순고식 구차미봉 여덟 자를 쓰고는, “천하만사가 모두 이 여덟 자를 따라 무너지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過庭錄 卷4

[D-009]복의(福醫) : 운 좋게도 병을 잘 낫게 하는 의사를 말한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운 좋게도 늘 승리하는 장수를 복장(福將)이라 하며, ‘지장(智將)은 복장(福將)만 못하다는 속담이 있다.

[D-010]옛날에 …… 정성스러웠습니다 : 사기 126 골계열전(滑稽列傳)에 순우곤(淳于髡)이 제 나라 위왕(威王)을 설득하면서 한 이야기에 나온다. 위왕은 초 나라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순우곤을 조() 나라로 구원병을 청하러 보내면서도, 조 나라에 보내는 선물을 매우 인색하게 준비했으므로, 순우곤은 돼지 족발 하나로 풍년을 기원하는 사람의 예를 들면서 그 사람이 바치는 것은 보잘것이 없으면서 바라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여 왕을 깨우치게 했다고 한다.

[D-011]무미건조한 : 대본은 古淡無味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古談無味로 되어 있다. 둘 다 잘못된 것으로, ‘枯淡無味라야 옳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김 우상(金右相)에게 올림

 

 

지난가을에 자녀와 남녀 종들을 다 보내고 나니 관아가 온통 비었고, 몸에 딸린 것은 관인(官印)을 맡아 곁을 지키는 동자 하나뿐인데, 밤이면 문득 꿈결에 잠꼬대를 외치므로 한심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늘 그 아이로 하여금 동헌(東軒)을 지키도록 바꾸어주고, 홀로 매화 화분 하나, 파초 화분 하나를 동반하여 삼동을 났습니다. 옛사람 중에 매화를 아내로 삼은 이가 있었습니다만, 눈 내리는 날 푸른 파초는 마음을 터놓는 벗이 될 만하더군요.

봄이 오자 위쪽의 연못에 물이 넘쳐 섬돌을 따라 졸졸 흐르는데, 그 소리는 마치 거문고를 타는 듯합니다. 대청 앞에 한 그루 하얀 배나무는 활짝 꽃이 피었는데, 땅에 자리 깔고 그 아래 누워서 옥 같은 꽃잎과 구슬 같은 꽃술을 쳐다보니, 위로 달빛을 받아 이슬방울과 서로 어리비쳐 경물(景物)이 너무도 조용하고 쓸쓸하더군요. 그래서 혼자 승천사기(承天寺記)를 읊었더니, 정신이 맑아지고 뼛속까지 싸늘하여 잠이 잘 오지 않았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중존(仲存 처남 이재성(李在誠))이 편지를 보내와 이 고독한 처지를 위로하기를,

 

자고로 가족을 거느린 신선은 없으니, 쓸쓸하다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소. 쓸쓸해야만 신선을 만나 볼 수 있는 법이지요.”

하였답니다. 이 사람은 곧 이번에 급제한 노진사(老進士)이지요. 아마도 그와는 집안끼리 세의(世誼)가 있으실 터이기에, 환한 창 아래에서 글을 쓰면서 손길 가는 대로 그에 관해 언급하였습니다. 길사(吉士)가 이끌어 주실 때는 바로 지금인가 합니다. 다만 세상에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한스러우나, 그의 맑고 깨끗함은 옥수(玉樹 아름다운 나무)와 아름다움을 다툴 만하답니다.

저는 천은(天恩)을 두터이 입어 한 고을의 수령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지 4년 동안에 부엌에는 기름진 고기가 있고 곳간에는 남은 곡식이 있으며, 하당(荷堂)과 죽각(竹閣)에는 맑은 정취가 있어 저절로 만족스럽습니다만, 노쇠로 인한 병이 날로 깊어만 가므로 돌아갈 생각이 갈수록 더하니 어찌하겠습니까. 천리 먼 곳에서 오랫동안 나그네 살이를 하느라고, 도리어 연암(燕巖)에서의 농사일만 제철을 어기고 있으니 이 점이 후회스럽고 안타깝습니다.

일찍이 천고(千古)에 일 좋아하는 사람으로 이윤(伊尹)과 부열(傅說) 같은 이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들은 밭 갈고 고기 낚고 담장 쌓는 일을 스스로 마치지도 못한 채, 남의 잔치에 바삐 달려가서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훈수하고, 신 매실을 넣어라 짠 소금을 쳐라 하면서 귀 따갑게 떠들어 댈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은 본래 이미 자기 신분에 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소위 만냥태수(萬兩太守)란 모두가 멧돼지를 잡으려다 도리어 집돼지까지 잃는 자들임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득실을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낫고 어느 쪽이 못하다 하겠습니까. 더구나 세간에는 원래 천금태수(千金太守)도 없지 않습니까.

어제 두서너 이웃 수령들과 모여 복어를 끓여 먹었는데, 부엌에서 일하던 사람이 복어 알을 우물가에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솔개들이 보고 한참 동안 공중에서 맴돌다가, 차례로 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칼을 뽑아 든 듯이 하다가 발을 오그리고 몸을 돌려 지나가 버리더니, 최후에 한 늙은 솔개가 대담하게 한 번에 채어 가지고 공중에서 배회하다가 마침내 용마루에 떨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까마귀 한 마리가 와서 앉아 한참 동안 곁에서 흘깃대다가 가 버리더군요. 그걸 보고 집이 떠나갈 듯 일제히 웃으면서,

 

지독하구나, 이 사람이여! 먹을 것을 탐내는 솔개나 까마귀도 오히려 저 먹는 것에 조심하여 이와 같이 자상히 살피는데, 동파(東坡) 노인은 오히려 목숨을 걸었구려!”

하였습니다.

조금 있자니 그 까마귀가 다시 검은 색깔의 큰 덩어리 하나를 물고 와서, 득의한 양 머리를 들었다 숙였다 하며 좌우로 번갈아 쪼아 허겁지겁 배불리 먹은 뒤, 부리를 기와 위에 문지르고는 한 번 까악 하며 울고 날아가더군요. 관노비를 시켜 천천히 살피게 했더니 조금 전에 물고 온 것은 바로 똥덩이였습니다. 똥은 해독(解毒) 작용을 하니, 저 까마귀가 해독을 하는 데는 지혜롭지만, 맛은 아직 잘 모르는 놈입니다. 세간에 과연 오유선생(烏有先生)처럼 해독하는 좋은 처방을 지닌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C-001]김 우상(金右相)에게 올림 : 우의정 김이소(金履素)에게 보낸 편지이다. 1792년 그의 우의정 취임을 축하하면서 아울러 화폐 문제를 논한 편지가 연암집 2에 실려 있다.

[D-001]옛사람 …… 있었습니다만 : 송 나라 때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한 임포(林逋)의 고사를 가리킨다. 임포가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여, 장가도 들지 않고 자식도 없이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평생을 살았으므로, 그를 가리켜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았다梅妻鶴子고 하였다.

[D-002]땅에 …… 누워서 : 원문은 地臥其下인데, 문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 앞에  자가 누락된 듯하다.

[D-003]승천사기(承天寺記) : 소식(蘇軾) 동파지림(東坡志林) 중 기승천야유(記承天夜遊)를 가리킨다. 원풍(元豐) 6(1083) 10 12일 달 밝은 밤에 소식이 승천사로 벗을 찾아가 함께 뜰을 거닐었다는 내용으로, 80여 자밖에 안 되는 짧은 산문이다.

[D-004]이 사람은 …… 노진사(老進士)이지요 : 이재성(李在誠) 1795(정조 19) 식년시에 45세로 진사 급제하였다.

[D-005]길사(吉士) …… 합니다 : 원문은 吉士之誘 迨其今乎인데, 시경 소남(召南) 야유사균(野有死麕) 여자가 이성을 그리워하니, 미남자가 유혹하네.有女懷春 吉士誘之라 하였고, 표유매(摽有梅) 나를 찾는 남자들이여, 바로 지금을 놓치지 마오.求我庶士 迨其今兮라고 하였다. 길사(吉士)는 미남자라는 뜻 외에 덕을 갖춘 훌륭한 인물이라는 뜻이 있고, ‘()’ 자에도 교도(敎導)한다는 뜻이 있다. 시경의 시구를 이용하여, 우의정 김이소에게 노진사(老進士) 이재성을 관직으로 이끌어 주도록 은근히 청탁한 말이다.

[D-006]하당(荷堂)과 죽각(竹閣) : 연못과 대숲이 있는 정각을 말한다. 연암은 안의 관아의 서쪽에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을 지었다. 연암집 1 하풍죽로당기(荷風竹露堂記) 참조.

[D-007]일찍이 …… 없었으나 : 이윤(伊尹)은 은() 나라 탕왕(湯王)의 재상이다. 사기 3은본기(殷本紀)에 이윤은 탕왕에게 기용되고 싶었으나 길이 없자, 탕왕의 비()인 유신씨(有薪氏)가 시집올 때 종으로 따라와 요리사가 되어 음식맛으로써 탕왕을 즐겁게 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서는 그러한 설을 부정하고, 이윤은 유신국(有薪國)의 들에서 밭을 갈고 있다가 탕왕이 세 번이나 초빙했으므로 부득이 그에 응했다고 주장하였다. 부열(傅說)은 은 나라 고종(高宗)의 재상이다. 부열은 부암(傅巖)의 들에서 담장 쌓는 노역을 하다가, 꿈에 본 성인을 찾아 나선 고종을 만나 재상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서 고종은 부열에게 자신을 훈계해 주도록 당부하면서, “내가 만약 맛있는 국을 만들거든 그대는 소금과 매실 식초가 되어 주오.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신하가 임금을 도와서 선정을 베풀게 하는 것을 염매(鹽梅)라고 한다.

[D-008]만냥태수(萬兩太守) : 녹봉이 많은 고을 수령을 말한다.

[D-009]천금태수(千金太守) : 녹봉이 만냥은커녕 천냥이 되는 수령 자리도 없다는 뜻으로, 연암이 풍자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다.

[D-010]동파(東坡) …… 걸었구려 : 소식(蘇軾) ‘4 11일에 여지를 처음 먹다四月十一日初食荔支라는 시에 나오는 다시 복어를 씻어 복부의 기름진 고기를 삶누나.更洗河豚烹腹腴라는 구절을 두고 한 말이다. 복어는 독이 있는데도 복어 배 부위의 기름진 고기를 삶아 먹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풍자한 것이다.

[D-011]오유선생(烏有先生) :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와 상림부(上林賦)에 등장하는 가공 인물이다. 오유(烏有)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 자는 이와 같이 어찌라는 뜻과 함께 까마귀라는 뜻도 있으므로, 연암은 익살스럽게 까마귀를 오유선생이라 부른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김계근(金季謹)에게 답함

 

 

지난가을에 중존(仲存 이재성)이 편지 한 통을 손수 가지고 와 전해 주었고, 이어 또 성위(聖緯)가 와서 머물고 오일(五一)도 와서 합류하였지요. 쌍지(雙池)에 물은 맑고 언배와 붉은 대추가 주렁주렁 열려 뜰에 가득하며, 더구나 또 동산에 가득한 고종시(高種柹)는 월중홍(越中紅)에 못지않은데, 운사(雲社)에서 밤낮으로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절반이 송원(松園)에 대한 말이었지요. 이때에 비록 한 글자의 답서도 올리지 못했지만, 그대의 두 귀가 몹시 가려웠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소이다.

그 뒤 중존은 세밑이 임박해서 떠나고, 성위도 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말을 달려 돌아가 버리니, 비로소 이 몸이 갑자기 대령(大嶺 새재) 남쪽800리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삼복더위가 요새 들어 더욱 심한데, 신령의 가호로 벼슬살이를 탈 없이 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대의 사촌 형님 시가(時可)씨가 문득 고인이 되었다니 애통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그런데 원례(元禮)의 부고가 또 이르렀군요. 이 두 사람은 모두 나의 20대 친구로서 기개는 산악을 무너뜨릴 만하고 언변은 황하나 한수(漢水)의 둑을 무너뜨릴 만하여 천지간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는지를 몰랐지요. 신선술을 배울 수도 있고, 장수가 될 수도 있고, 문장과 공훈을 머지않아 성취할 수 있었을 터인데, 40년 세월을 통틀어 결산해 보면 그저 분주하게 평범한 벼슬아치 노릇을 하면서, 겨우 건물 약간을 세운 데 불과했습니다. 인생 백년이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와 같으니 가슴속에 애착을 둘 것은 아니지만, 매양 한번 생각하면 아쉬움으로 마음에 걸릴 뿐이외다.

오늘날의 수령된 자들은 읍황(邑貺)이 후하고 박한 것으로 좋고 나쁜 기준을 삼을 뿐, 산수의 승경(勝景)으로 좋고 나쁜 기준을 삼는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 이른바 후하고 박하다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킨답니까? 저는 고을살이한 지가 벌써 3년이지만, 날마다 책상 머리에서 읍총(邑摠)을 뒤져 보아도  원문 빠짐  도무지 먹을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답니다.

하루는 저의 아들더러 이르기를,

 

너는 예서(禮書)를 읽었느냐? 한 조각 고기가 비뚤게 잘린 것을 먹는다고 입과 배에 무엇이 해로우며, 잠시 쉴 때 한쪽으로 기댄다고 엉덩이와 다리에 무엇이 나쁘겠느냐마는, 성인은 임신했을 때에 대해 간곡히 훈계하시기를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먹지 말고, 자리가 바르지 못하면 앉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양생(養生)하는 데 바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했지요. 이로써 미루어 보면, ()에서 받는 만종(萬鍾)의 녹봉도 반드시 꽥꽥거리는 거위처럼 부정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고, 낙읍(洛邑)의 구정(九鼎)도 어찌 백이(伯夷)로 하여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리게 만든 시골 사람의 갓처럼 바르지 못한 것이 아니겠소이까? 지금의 이른바 양반이란 옛날의 이른바 대부와 사(), 지금 이른바 좋은 태수란 옛날의 이른바 도신(盜臣)이니, 그가 먹고 입는 것에 명색이 부정하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겠소이까? 백이와 오릉중자(於陵仲子)로 하여금 태수로서 처신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더러운 진흙탕과 잿더미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이 여길 뿐이겠소. 반드시 밖으로 뛰쳐나가 먹은 것을 토해 내고 말 것이외다. 하지만 까마귀는 온갖 새가 다 검은 줄로만 믿고, 개구리는 온갖 벌레가 다 같은 소리를 내는 줄로만 의심하는 법이오.

그런데 지금 형은 벼슬길에 나섰소. 벼슬길에 나서는 것은 좋은 태수가 되고 싶어서이고, 좋은 태수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장차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오. 모르겠소만 그대가 스스로 처신하는 바는 백이도 아니고 도척(盜跖)도 아닌, 옳고 그름의 중간쯤인가요?

그렇다면 소 잡는 칼을 한번 시험해 보기로는 이 안의현만 한 데가 없을 거외다.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는 산음(山陰)과 흡사하고, 굽이도는 물에 술잔을 띄우는 것은 난정(蘭亭)에 못지않으며, 지금 한창 죽순이 껍질을 벗고 은어가 그물에 들고 있으니, 비록 백이로 하여금 현감이 되게 하더라도 응당 기뻐하며 배를 한번 불릴 거외다. 깊이 바라건대 그대는 꼭 돈 많이 생기는 좋은 태수를 바라지 말고, 앉아서 이 옛 친구와 임무 교대 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소?

술이 약간 취했길래 남을 시켜 적었소이다. 우선 이만 줄입니다.

 

 

[C-001]김계근(金季謹) : 계근은 김이도(金履度 : 1750~1813)의 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송원(松園)이며, 김창집(金昌集)의 증손으로, 그의 형 김이소(金履素)와 함께 연암과 절친한 사이였다. 1800(정조 24)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경기도 관찰사, 예조 판서, 형조 판서, 한성부 판윤, 의정부 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D-001]성위(聖緯) : 이희경(李喜經 : 1745~?)의 자이다. 그의 부친 이소(李熽)는 서자로, 생원(生員) 급제하였다. 이희경은 아우 이희명(李喜明)과 함께 연암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중국을 다섯 차례나 다녀왔다. 그가 남긴 설수외사(雪岫外史)는 박제가의 북학의에 비견될 만한 저술이다.

[D-002]오일(五一) : 윤인태(尹仁泰)의 자이다. 윤인태는 연암의 문하생으로 전서(篆書)를 잘 썼다.

[D-003]쌍지(雙池) : 연암은 안의 관아 서북쪽에 백척오동각(白尺梧桐閣)을 지으면서 북지(北池)를 만들었고, 그 남쪽에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을 지으면서 남지(南池)를 만들었다고 한다. 연암집 1 백척오동각기(百尺梧桐閣記), 공작관기(孔雀館記), 하풍죽로당기(荷風竹露堂記) 참조.

[D-004]고종시(高種柹) : 알이 다소 작지만 껍질이 얇고 씨가 거의 없으며 당도가 월등히 높으면서 육질이 연한 감이다. 산청 · 함양 · 하동 등지에서 생산되는 지리산 곶감은 모두 이 고종시로 만들어 맛이 뛰어나다고 한다.

[D-005]월중홍(越中紅) : 홍시의 일종인데,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해서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D-006]운사(雲社) : 연암이 이재성 · 이희경 · 윤인태 등과 함께 시주(詩酒)의 모임을 갖고 그 모임의 명칭을 운사라고 붙인 듯하다.

[D-007]시가(時可) : 김이중(金履中 : 1736~1793)의 자이다. 그는 김조순(金祖純)의 부친으로, 1771(영조 47) 36세로 뒤늦게 진사 급제 후 음직으로 중앙의 하위 관직과 지방관을 전전하여 용인 현령, 고양 군수, 평양 서윤, 과천 현감, 서흥 부사를 지냈다. 연암과는 소싯적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1793년 음력 9 29일 사망하였다. 楓皐集 卷12 先府君墓表

[D-008]원례(元禮) : 한문홍(韓文洪)의 자이다. 그는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1736년에 태어났다. 1765년 진사 급제 이후, 벼슬은 1787년에서 1790년까지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재임하는 등 주로 지방관으로 전전한 듯하다. 그의 몰년은 1792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편지로 미루어 보면 1794년이 아닌가 한다. 연암과는 젊은 시절에 같이 과거 공부를 했던 친구였다. 연암집 3 ‘대은암에서 창수한 시의 서문大隱菴唱酬詩序 참조.

[D-009]겨우 …… 불과했습니다 : 예컨대 한문홍은 1789(정조 13) 음력 12월 마전 군수로서 경내에 있는 고려 태조의 사당인 숭의전(崇義殿)을 중건하였다. 그 부근 잠두봉(蠶頭峯)에 그가 지은 중작숭의전(重作崇義殿)’이라는 칠언율시가 새겨져 있다.

[D-010]인생 …… 같으니 : 원문은 人生百歲間 忽如遠行客인데, 문선(文選)의 고시(古詩) 19수 중 제 3 수에 사람이 천지 사이에 살아가는 것이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와 같네.人生天地間 忽如遠行客라는 구절이 있다.

[D-011]읍황(邑貺) : 읍황(邑況)과 같은 말로, 고을의 판공비 명목으로 전세(田稅)에 부가하여 거둬들이던 쌀이나 돈을 가리킨다. ‘邑況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2]읍총(邑摠) : 고을의 재정 현황을 적은 작은 책자이다. 목민심서 부임(赴任) 사조조(辭朝條), 읍총에는 녹봉으로 받는 쌀과 돈의 액수를 기록하고, 농간을 부려 잉여분을 사취하는 방법을 갖가지로 나열하고 있어, 수리(首吏)가 이를 바치면 신임 사또는 조목조목 캐 물어서 그 묘리와 방법을 알아내니, “이는 천하의 큰 수치이다.”라고 하였다.

[D-013]자른 …… 말라 : 논어 향당(鄕黨)에서 공자는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드시지 않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다.”고 하였고, 유향(劉向) 열녀전(列女傳)에 주() 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姙)의 태교(胎敎)를 예찬하면서, “옛날에 부인이 자식을 임신하면 ……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먹지 않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고 하였다. 열녀전의 이 대목은 주자(朱子)가 찬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등 예서(禮書)에 전재(轉載)되어 있다.

[D-014]()에서 …… 없고 : 맹자 등문공 하에 나오는 오릉중자(於陵仲子)의 고사에 출처를 둔 말이다. 오릉중자는 제() 나라에서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 출신으로, 그의 형은 식읍(食邑)인 합()에서 만종의 녹봉을 받고 있었다. 오릉중자는 형의 녹봉을 의롭지 못하다고 여겨 한 집에서 살지 않고 오릉(於陵)에 은둔하였다. 훗날 집에 돌아와 형에게 뇌물로 거위를 바치는 자를 보고 이 꽥꽥거리는 것은 무엇에 쓰자는 거요?”라고 하며 얼굴을 찌푸렸는데, 그 뒤 어머니가 요리한 거위 고기를 먹고 있을 때 형이 보고는 이것이 꽥꽥거리던 고기다.”라고 하자, 밖으로 뛰쳐 나가 먹은 것을 토해 버렸다고 한다.

[D-015]낙읍(洛邑) …… 아니겠소이까 : 낙읍은 주 나라의 수도이고, 구정(九鼎)은 우() 임금 때 중국의 구주(九州)에서 바친 쇠로 만들었다는 귀중한 솥으로, 은 나라 상읍(商邑)에 있던 것을 주 나라 무왕(武王) 때 낙읍으로 옮겼다고 한다. 맹자 공손추 상에서 백이(伯夷) 시골 사람과 함께 서 있을 때 그가 쓴 갓이 바르지 못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기를 마치 제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겼다.與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浼焉고 하였다.

[D-016]도척(盜跖) : 고대 중국의 유명한 도적으로 많은 무리를 이끌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사기 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백이와 같은 선인(善人)과 대비되는 악인의 대표적 인물로 거론되었다.

[D-017]소 잡는 칼 : 지방관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다스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작은 고을의 수령이 되는 것을 뜻한다.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에서 예악(禮樂)으로 다스리는 것을 보고, 공자가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割鷄焉用牛刀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論語 陽貨

[D-018]무성한 …… 못지않으며 : () 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산음현(山陰縣) 난정(蘭亭)에서 수계(修禊)한 일을 기록한 난정기(蘭亭記) 높은 산 험준한 고개와 무성한 숲 긴 대나무가 있다.有崇山峻嶺 茂林脩竹 하고, “물을 끌어다가 술잔을 띄우는 곡수를 만들고 차례로 줄지어 앉는다.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고 한 것을 끌어다 쓴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전라 감사에게 답함

 

 

눈보라 치는 추위에 순사또의 건강이 두루 좋으시다니, 구구한 제 마음도 삼가 위안이 됩니다.

전번 서한에 죽은 자는 저승으로 가 버리고, 남아 있는 자는 새벽별처럼 드물다.”고 하신 말씀에는 너무도 깊은 슬픔이 뒤얽혀 있었으니,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인지요?

옛날의 범중엄(范仲淹)과 부필(富弼)도 물정 모르는 유학자요 서투른 선비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평소에 어찌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능력이 있다고 자처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그들은 평일에 진실한 마음으로 옛사람의 글을 읽었고, 급기야 벼슬에 나가 당세에 할 일을 담당하게 되어서는 평탄함과 험난함을 막론하고 다만 옛사람의 글 가운데서 처방을 찾았을 뿐이니, 스스로 힘을 들인 것은 한낱 정성 ()’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서한에서 하신 말씀에, 마치 이 두 분을 보기를 하늘 높이 솟고 땅을 뒤흔드는 특별난 사람으로 여긴 듯하였으니, 이는 어리석은 제가 감사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닙니다. 감사께서는 글 읽은 것이 범중엄과 부필보다 못하지 않을 뿐더러 범중엄과 부필보다 몇 백 년 늦게 태어났으니, 그 좋은 처방이 범중엄과 부필보다 반드시 많을 터입니다. 다만 감히 알지 못할 것은, ‘ 자 한 자에 힘을 들이는 것을 옛사람과 같이 할 수 있는지 하는 점입니다.

옛날의 이른바 도신(盜臣)은 지금의 이른바 수령인데, 옛날의 이른바 재물을 긁어모은다聚歛는 책망 역시 귀속시킬 데가 어찌 없겠습니까.맹자는 말하기를,

 

거실(巨室)에 원망을 사지 말라.”

했는데, 한 고을의 아전들은 곧 한 고을의 거실이요, 각 읍의 수령들은 바로 한 도의 거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법을 지키는 것이요 이와 같이 하면 법을 어기는 것이 됨은 오직 저 관리들이 알고 있을 뿐이니, 저들이 비록 눈앞의 위협적인 형구(刑具)를 무서워할지라도 어찌 마음속으로는 시비를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저 옛 현인들은 거실에 원망을 사지 않았을 터입니다.

지난가을에 태풍 피해가 심한 데도 있고 심하지 않은 데도 있었으니, 이른바 천리까지 같은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다만 대령(大嶺) 이남은 노령(蘆嶺) 이북과는 같지 않아서, 나무가 꺾이고 기왓장이 날아가는 일은 있었지만, 수만 그루의 나무들이 울부짖고 사방팔방이 뒤흔들린 건 어느 곳인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한창 비바람이 몰아칠 때에 영천(永川)에서 경주로 향해 가고 있었는데, 멀리 백리 밖을 바라보니 바다 하늘에는 시커먼 구름이 먹이 번진 것 같았고, 또 무수한 버섯이나 수천수만 개의 수레바퀴와도 같았습니다. 길가는 사람이 멀리 하늘로 오르는 흰 용을 가리키는데, 그 형상은 또한 산언덕 사이에 나무꾼이 다니는 길이 여러 갈래 난 것 같고, 그 색깔은 희지도 검지도 않으며 맑고 밝은 것이 엷은 얼음과 같았습니다. 그러니 비록 이것이 용인지 구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날 풍력이 거세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보내신 편지에 재해를 입지 않은 것을 축하하신 것은 축하가 아닙니다. 바람은 어찌 바람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하읍(下邑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서 1000여 리 밖의 대궐로 달려가 임금님을 가까이에서 뵈었으니, 지극한 영광이었습니다. 본현이 풍년인지 흉년인지를 먼저 물으시고, 다음으로 연로의 농작물 형편 및 도내의 백성들 사정이 어떠한지, 지난번에 태풍 피해가 있었는지를 물으셨는데 말씀을 간곡하게 되풀이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내의 백성들 사정에 대해서는 임자년(1792)과 비교해서 어떠한지 듣고 본 대로 대답하라는 뜻을 간곡하고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전상(殿上)에는 촛불이 휘황하고 좌우에는 다만 승지와 사관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임금께서 천신(賤臣)을 대우하시는 것이 측근의 신하와 다름이 없었으니, 천신의 직분상 의견을 피력할 자리를 잠시 얻은 이상 오직 숨김없이 다 아뢰어야 마땅할 터인데, 가슴속에 글로 쓰지 않은 만언(萬言)의 상소가 등 위에서 한 섬의 땀으로 모조리 변하고 말았습니다. 소원하고 천한 몸이라 속에 있는 생각을 다 못 아뢴 것은 진실로 그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중엄이나 부필과 같은 분들에 비교하면 또 어떻다 하겠습니까.  이하 원문 빠짐 

 

 

[C-001]전라 감사에게 답함 : 이서구(李書九)에게 보낸 답서이다. 이서구는 1793(정조 17) 8월 전라 감사에 제수되었다.

[D-001]범중엄(范仲淹)과 부필(富弼) : 송 나라 인종(仁宗 : 1062~1063 재위) 때의 명재상들이다.

[D-002]옛날의 …… 없겠습니까 : 도신(盜臣)은 관청 창고의 재물을 도적질하는 관리라는 뜻이다. 대학에서 맹헌자(孟獻子)가 말하기를 백승지가(百乘之家 : 경대부가卿大夫家)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聚斂之臣를 기르지 않는다.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를 두기보다는 차라리 도신(盜臣)을 둘 것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중 聚斂之責이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聚斂之臣으로 되어 있다.

[D-003]거실(巨室) …… 말라 : 거실은 명문 대가를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임금이 정치를 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거실(巨室)에 원망을 사지 말아야 한다. 거실이 사모하는 바를 온 나라가 사모하고, 온 나라가 사모하는 바를 천하가 사모한다. 그러므로 덕으로써 교화하는 정치가 성대하게 사해(四海)에 넘치는 것이다.” 하였다.

[D-004]천리까지 …… 않는다 : 왕충(王充) 논형(論衡) 뇌허편(雷虛篇) 천리까지 같은 바람이 불지 않고, 백리까지 같은 우레가 치지 않는다.千里不同風 百里不共雷고 하였다.

[D-005]하읍(下邑)의 수령 : 원문은 下邑小吏인데 小吏는 대개 아전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적절치 않다.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고을 수령邑宰이란 뜻의 小宰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6]저는 …… 영광이었습니다 : 연암은 1794(정조 18) 가을에 차원(差員)으로 상경했을 때 임금의 특명으로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큰 흉년이 들었으므로, 임금은 연암에게도 안의현과 연로의 농사 형편과 도내 백성들의 사정을 간곡하게 물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2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https://blog.naver.com/karamos/222573784012

 

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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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2]

15 만휴당기(晩休堂記)

16 명론(名論)

17 백이론(伯夷論) ()

18 백이론(伯夷論) ()

19 형암(炯菴) 행장(行狀)

20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 발문

21 회성원집(繪聲園集) 발문

22 필세설(筆洗說)

23 서얼 소통(疏通)을 청하는 의소(擬疏)

 

 

 

만휴당기(晩休堂記)

 

내가 예전에 작고한 대부(大夫) 김공 술부(金公述夫) 씨와 함께 눈 내리던 날 화로를 마주하고 고기를 구우며 난회(煖會)를 했는데, 속칭 철립위(鐵笠圍)라 부른다. 온 방안이 연기로 후끈하고,  · 마늘 냄새와 고기 누린내가 몸에 배었다. 공이 먼저 일어나 나를 이끌고 물러 나와, 북쪽 창문 가로 나아가서는 부채를 부치며,

 

그래도 맑고 시원한 곳이 있으니, ‘신선이 사는 곳과 그다지 멀지 않다 할 만하구먼.”

하였다.

조금 있다가 보니 뭇 종들이 심부름을 하느라 처마 아래 서서는 추위를 못 견디어 발을 구르고 있었는데도, 공의 자제들은 떼 지어 소란을 피우다가 국물을 쏟아 손을 데는 등 왁자지껄 장난치는 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공은 크게 웃으며,

 

더운 곳에서 일찌감치 물러 나오니 당장에 효험을 보네만, 눈 속에서 발을 구르는 자들이 국물 한 방울도 얻어먹지 못하는 것이 안됐구먼.”

하기에, 나 역시 젊은이들이 국물을 쏟은 일을 들어 공에게 넌지시 충고하고, 그 김에 옛날과 지금 사람들의 진퇴(進退)와 영욕(榮辱)에 대해서 역설하였다. 그랬더니 공은 정색을 하고서,

 

부귀를 누릴 만큼 누린 뒤에야 만족할 줄을 알고, 다 늙고 나서야 휴식을 생각한다면 역시 너무 늦은 것이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개 공은 반드시 벼슬길에서 일찌감치 물러나는 일에 용단할 수 있었다고는 못 하겠으나, 공이 이 말을 한 것은 역시 속으로 느낀 바가 있어서가 아니었던가 싶다.

내가 서쪽으로 개성에 와서 노닐게 되면서, 양씨(梁氏)의 자제인 정맹(廷孟)과 몹시 친해졌다. 그 부친의 학동(鶴洞) 별장에서 노닌 적이 있는데, 꽃과 나무가 가지런히 늘어서고 뜰과 당()이 깨끗이 다듬어졌으며, 그 당을 이름하여 늘그막에 쉰다는 뜻의 만휴(晩休)’라 했다. 양옹(梁翁 양정맹의 부친)은 너그럽고 도량이 커서 옛날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었다. 날마다 동네 노인들과 함께 활 쏘고 바둑 두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거문고와 술로써 스스로 즐겼으니, 대개 명성과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기를 일찌감치 그칠 수 있어서 늘그막에 오래 즐거움을 누린 것이었다. 이 어찌 참으로 만휴의 즐거움을 얻은 분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양정맹이 나에게 기()를 지어 달라고 청했었다. , 김공이 이 도읍의 유수(留守)를 지낸 적이 있는데, 김공이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공을 그리워하였다. 그래서 화로에 둘러앉아 고기 구워 먹던 옛일을 말하여 양옹의 만휴(晩休)의 즐거움을 치하하고, 아울러 이를 글로 적어서 떼 지어 소란을 피우다가 손을 데는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D-001]대부(大夫) 김공 술부(金公述夫) : 술부는 김선행(金善行 : 1716~1768)의 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김선행은 1739(영조 15) 문과 급제 후 옥당(玉堂), 황해 감사, 대사헌, 한성부 좌윤, 도승지 등을 거쳐 1765 년부터 1766년까지 동지사(冬至使)의 부사(副使)로 연행을 다녀왔다. 당시 연행에는 서장관 홍억(洪檍)의 조카인 홍대용도 참여하였다. 귀국 직후인 1766년 음력 5월 개성 유수로 임명되어 1768 2월까지 재임하였다. 그 후 대사헌, 좌윤을 지내다가 곧 사망했다. () 나라의 제도에 국군(國君) 아래 경() · 대부(大夫) · ()의 세 등급이 있었으므로, 후대에 관직에 임명된 자를 대부라 하였다. 조선 시대의 품계에서도 4품 이상의 문관에게는 ‘~대부라 하였다.

[D-002]난회(煖會) : 난로회(煖爐會)를 말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서울 풍속에 숯불을 화로에 피워 번철(燔鐵)을 올려 놓고 쇠고기에 갖은 양념을 하여 구우면서 둘러앉아 먹는 것을 난로회라 한다고 하였다. 번철은 전을 부치거나 고기를 볶는 데 쓰는 무쇠 그릇으로 전철(煎鐵)이라고도 한다. 삿갓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번철 주위에 둘러앉는다고 하여, 난로회를 철립위(鐵笠圍)’라고 한 듯하다.

[D-003]더운 곳 : 원문은 열처(熱處)’인데, 이는 권세 있는 벼슬자리라는 뜻도 있다.

[D-004]진퇴(進退)와 영욕(榮辱) : 진퇴는 벼슬길에 나서는 것과 은퇴하는 것을 가리킨다. 벼슬할 때와 은퇴할 때를 잘 분별해야 영예를 누리고 치욕을 면할 수 있다.

[D-005]학동(鶴洞) : 금학동(琴鶴洞)으로 개성에 있던 동명(洞名)이다. 그곳에 개성의 선비로서 연암을 종유(從遊)하던 양호맹(梁浩孟) · 양정맹(梁廷孟) 형제의 별장이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명론(名論)

 

 

천하라는 것은 텅 비어 있는 거대한 그릇이다. 그 그릇을 무엇으로써 유지하는가? ‘이름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써 이름을 유도할 것인가? 그것은 욕심이다. 무엇으로써 욕심을 양성할 것인가? 그것은 부끄러움이다.

만물은 흩어지기 십상이어서 아무것도 연속할 수 없는데 이름으로써 붙잡아 둔 것이요, 오륜(五倫)은 어그러지기 쉬워서 아무도 서로 친할 수 없는데 이름명분으로써 묶어 놓은 것이다. 무릇 이렇게 한 뒤라야 저 큰 그릇이 아마도 충실하고 완전할 수 있어, 기울어지거나 엎어지거나 무너지거나 이지러질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다. 온 세상의 작록(爵祿)으로도 선()을 행하는 자에게 두루 다 상을 줄 수는 없으니, 군자는 이름명예으로써 선을 행하도록 권장할 수가 있다. 온 세상의 형벌로도 악()을 행하는 자를 두루 다 징계할 수는 없으니, 소인은 이름명예으로써 부끄럽게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 한밤중에 야광주(夜光珠)를 던지면, 칼을 쥐고 적을 기다리지 않을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은 왜인가? 이는 아무런 까닭도 없이 주어진 이름명예이라 기뻐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천하라는 큰 그릇임에랴. 조정에 갖옷을 모셔 놓으면, 옷섶을 여미고 예법에 따라 종종걸음을 하지 않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은 왜인가? 이름명분이 건재하여 한계를 넘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참으로 충효(忠孝)를 다하여 비통해할 때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주() 나라의 쇠퇴기에 빈 그릇을 끼고 강대한 제후들의 위에 군림해도 아무도 감히 먼저 무례한 짓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래도 여전히 그 빈 이름명분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사슴과 말의 생김새가 서로 비슷하지만, 한번 그 이름이 어지러워져 버리자 천하에 제 임금을 죽이는 자가 나오게 되었다. , 저 사슴과 말의 이름이 천하의 존망(存亡)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만 그래도 하루도 구별이 없어서는 아니 되는데, 더구나 선과 악처럼 서로 같지 아니하고 명예와 치욕처럼 분명히 갈라지는 경우에 있어서랴.

무릇 천하의 재앙 중에 담담하여 욕심이 없는 것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선왕(先王)은 사람들이 장차 태만하고 해이하여 한결같이 물러나기만 하고 나아감이 없게 될 것을 알고, 그들을 위해 보불(黼黻)과 조회(藻繪)와 치수(絺繡)로써 그들의 눈을 유도하고, 종고(鍾鼓)와 금슬(琴瑟)과 생용(笙鏞 생황과 큰 종)으로써 그들의 귀를 유도하고, 인수(印綬 관직을 상징함)와 거마(車馬)로써 그들의 몸을 유도하고, 남다른 선행을 표창하고 비석에 새기고 노래로 지어 찬탄함으로써 그들의 기개를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천하의 대중들로 하여금 그 누구도 분발하고 단련해서, 의욕을 내야 할 일에 힘차게 나서고, 물러나 남에게 미루거나 제풀에 꺾이고 마는 마음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결같이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날 줄 모른다면, 천하의 재앙 중에 또한 태연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것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선왕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속백(束帛)에다 벽옥(璧玉)을 추가함으로써 고상한 품성을 양성하고, 위로하고 타이르며 힘써 노력하도록 함으로써 사양하고 물러나는 미덕을 양성하였다. 위엄과 무력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는 것은 절개를 양성한 때문이요, 형벌이 위로 대부(大夫)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는 것은 염치를 기르고자 한 때문이다. 신체에 형벌을 가하거나 유배의 형을 내린 뒤에 또한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뜻을 표시하는 것은, 천하의 대중들로 하여금 곧은 절개로써 자신을 지키고, 장차 아무 짓이나 다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욕심 내기로는 부귀보다 더 심한 것이 없지만, 그가 욕심 내는 대상이 도리어 부귀보다 더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작록(爵祿)도 사양할 수 있다.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기로는 형벌보다 더 큰 것이 없지만, 부끄러이 여기는 대상이 도리어 형벌보다 클 경우에는 시퍼런 칼날도 밟고 갈 수 있는 법이다. 이는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이른바 이름명예이 아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형벌과 포상으로써 정치를 하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는 방법이요, 이름명예을 장려하여 정치를 하는 것은 어디서든 제한이 없는 방법이다. 왜 그런가? 사람 중에 혹 선행을 하면서도 포상을 기다리지 않는 자가 있으니, 이는 작록이 그가 한 선행을 능가하기에 부족한 때문이다. 또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형벌을 꺼리지 않는 자가 있으니, 이는 매질과 회초리로는 그가 저지르는 악행을 억제하기에 부족한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람 중에는 반드시 포상을 할 필요 없이 권장하기만 하고, 형벌을 가할 필요 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게만 하면, 힘차게 의욕을 내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자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라는 이름은 공평하고 정대(正大)하나, ()이라는 이름은 이기적이고 천박한 것이다. 그대의 논법대로 한다면 장차 천하 사람을 다 몰아서 위선을 행하게 만들 것이다.”

하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이른바 이름을 혐오한다는 것은 한 개인이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경우를 가리킨 것이다. 그 폐단은 어리석은 점이지만, 그래도 근엄하고 자중하여 세속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지경까지 타락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아무리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에게 갑자기 실정보다 지나친 칭찬을 가한다면, 그 역시 뒤로 물러서 겸손히 사양하고 불안해하며 그렇다고 자처하지 못할 터이다. 어찌 사람들을 몰아다 위선을 행하게 만들 것을 걱정할 게 있겠는가.

만약 천하 사람들이 모두가 다 군자라면, 또한 무엇 때문에 이름명예에 대해 힘쓰겠는가. 만약 천하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 성취하려고만 한다면, 인의(仁義)의 행실을 욕심으로써 인도할 수 있고, 불의(不義)의 일을 이름명예으로써 부끄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천하의 대중들이 무관심하여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면, 선왕이 백성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계책과 충효 인의(忠孝仁義)의 행실이 모두 다 텅텅 비어서 빈 그릇이 되고 말 터이니, 장차 어디에 의탁하여 스스로 행해지겠는가?”

 

[D-001]이름 : 명칭이라는 뜻 외에도 명분(名分)이나 명예(名譽)라는 뜻을 포함하므로 문맥에 따라 그 뜻을 변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용어의 통일성은 유지해야 하므로, 부득이 변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괄호 안에 별도의 표기를 하였다.

[D-002]한밤중에 …… 왜인가 : 추양(鄒陽)의 옥중서(獄中書)에 출처를 둔 말이다. 추양은 참소로 인해 하옥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양 효왕(梁孝王)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편지에서 ()은 듣자온대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을 어둠 속에서 노상에 있는 사람을 향해 던지면, 칼을 쥐고 서로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까닭 없이 제 앞에 이르러 왔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鄒陽列傳》 《文選 卷39 獄中上書自明 명월주와 야광벽은 둘 다 야광주(夜光珠)를 뜻한다.

[D-003]조정에 …… 놓으면 : 천자가 승하하고 새 천자가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천자의 보좌(寶座)에 선왕(先王)의 갖옷을 모셔 놓았던 것을 가리킨다. 새 천자가 즉위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이렇게 보좌에 선왕의 갖옷을 모셔 놓고서 조하(朝賀)를 올렸다고 한다. 원문의 朝堂은 몇몇 이본들에는 廟堂으로 되어 있는데, 뜻은 같다.

[D-004]사슴과 …… 되었다 : 진 시황(秦始皇)이 죽은 뒤 환관 조고(趙高)가 국권(國權)을 독차지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세(二世)인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하였다. 이세가 말을 가지고 왜 사슴이라 하느냐고 묻자, 조고를 두려워하는 신하들은 대부분 말이라고 답하였다. 그 뒤 조고는 사슴이라고 답했던 사람을 죄를 씌워 죽여 버렸으므로,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D-005]보불(黼黻)과 조회(藻繪)와 치수(絺繡) : ()는 도끼 무늬이고, ()은 기() 자 둘이 서로 등진 모양의 무늬이다. 조회는 수초(水草) 무늬를 그린 것이고, 치수는 자수(刺繡)를 뜻한다. 서경(書經) 익직(益稷)에서 순() 임금은 우()에게 일() · () · 성신(星辰) · () · () · 화충(華蟲 : )을 그리고, 종이(宗彛 : 종묘宗廟의 주기酒器) · () · () · 분미(粉米 : 백미白米) · () · ()을 수놓아 예복(禮服)을 만듦으로써 존비(尊卑)의 질서를 분명히 밝히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천자는 일() · () 이하 열두 가지 무늬로 장식한 12장복(章服)을 입었고, 왕은 산() · () 이하 아홉 가지 무늬로 장식한 9장복을 입었고, 신하들은 계급에 따라 7장복 · 5장복 · 3장복 · 1장복 · 무장복(無章服)을 입었다.

[D-006]속백(束帛)에다 벽옥(璧玉)을 추가함으로써 : 속백은 비단 다섯 필을 한 묶음으로 만든 것으로 귀중한 예물로 쓰였다. 예기 예기(禮器)에 제후가 천자를 조회할 때 속백에다 벽옥을 추가하는 것은 천자의 덕을 옥에 비겨 존경을 표한 것이다.束帛加璧 尊之라고 하였고, 교특생(郊特牲)에서도 속백에다 벽옥을 추가한 것은 천자의 덕을 옥에 비겨 덕 있는 천자에게 귀의함을 표한 것이다.束帛加璧 往德也라고 하였다. 후대에는 왕이나 천자가 덕 있는 군자를 초빙할 때에도 속백가벽(束帛加璧)의 예를 갖추었다.

[D-007]위엄과 ……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부귀도 그를 방탕하게 할 수 없고, 빈천도 그를 변절하게 할 수 없으며, 위엄과 무력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으니, 이를 일러 대장부라 한다.”고 하였다.

[D-008]형벌이 ……  : 예기 곡례 상(曲禮上) 예절은 아래로 서민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으며, 형벌은 위로 대부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형벌이 대부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부가 범죄를 저지른 경우의 형벌을 별도로 정해 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대부를 이처럼 예우함으로써 스스로 염치를 알도록 장려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D-009]또한 …… 것은 : 원문은 又從而示其傷慘矜恤之意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자가 옳다.

[D-010]시퍼런 …… 법이다 : 보통 사람으로는 행하기 힘든 용기를 발휘한다는 뜻이다. 중용장구  9 장에서 공자는 천하와 나라와 집안도 고루게 다스릴 수 있고, 작록(爵祿)도 사양할 수 있고, 시퍼런 칼날도 밟고 갈 수 있으되, 중용(中庸)을 행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D-011]만약 …… 한다면 : 중용에 출처를 둔 말이다. 중용장구  20 장에 어떤 이는 편안히 실행하고, 어떤 이는 민첩하게 실행하고, 어떤 이는 있는 힘을 다해 실행하나니, 공을 이루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一也라고 하였다.

[D-012]세상을 다스리는 계책 : 원문은 禦世之策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백이론(伯夷論) ()

 

 

사기(史記), 무왕(武王)이 주()를 치러 나서자 백이가 말고삐를 끌어당겨 못 가도록 하며 충고했고, 무왕이 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자 백이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굶어 죽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논한다.

백이가 무왕에게 충고한 사실은 경서(經書)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제() 나라 동쪽 시골 사람들의 말인데 사마천(司馬遷)이 취하여 역사적인 사실로 만들었으니 이는 믿을 것이 못 된다. 비록 그렇지만, 이 책을 믿을진댄 논의할 거리가 있을 수 있다.

백이는 이른바 천하의 대로(大老)요 현인(賢人)이므로 서백(西伯)이 일찍이 예의를 갖추어 그를 봉양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무왕의 측근 신하들이 백이를 무기로 치려고 했던 것이다. , 선왕이 예의를 갖추어 봉양했던 신하이자 천하의 이른바 대로요 현인인데도, 측근의 신하들이 곧장 그 앞에서 무기로 치려고 했더니, 무왕은 오히려 내가 아니라 무기가 그렇게 한 것이다.”라는 식이었다. 그러니 접때 태공(太公)이 아니었던들 백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옛날에 이윤(伊尹)은 한 사람의 필부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치 자기가 그를 떠밀어 도랑 속으로 처넣은 것같이 여겼으며,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이를 죽여 천하의 왕이 될 수 있다 해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또한 무왕의 뜻이기도 하다. 무왕은 아마도 천하를 향해,

 

은 나라 백성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했다.”

하고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주 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제자리를 얻지 못했으니, 무왕이 천하를 얻은 것은 아마도 백성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또 무왕은 천하를 향해 외치기를,

 

은 나라가 노성(老成)한 사람의 말을 저버렸다.”

하였다. 그러나 주 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불의를 충고했으니, 무왕이 천하를 얻은 것은 아마도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또 천하를 향해 외치기를,

 

은 나라가 죄 없는 이를 죽였다.”

하였다. 그러나 주 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온전히 죽음을 맞지 못했으니, 주 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것은 아마도 죄 없는 이를 죽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무릇 이 세 가지는 무왕이 남을 정벌한 명분이었는데도, 난폭하게 거리낌 없이 행동했단 말인가?

무왕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 주고, 비간(比干)의 무덤에 봉분을 해 주고, 상용(商容)의 마을을 지나갈 때 수레에서 경의를 표했으면서, 유독 백이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 살았을 때는 예의를 갖추어 봉양하기를 문왕(文王)과 같이 하고, 그가 떠날 적에는 신하로 대하지 않기를 기자와 같이 하고, 의롭게 여겨 표창하기를 상용과 같이 하고, 그가 죽었을 적에는 봉분하기를 비간과 같이 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 백이와 무왕은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천하와 후세를 위해 염려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탕 임금이 걸()을 내쳤는데도 천하 사람들이 흡족해하며 아무도 괴이하게 여기는 자가 없자, 탕 임금은 진실로 이미 염려하기를,

 

나는 후세 사람들이 나를 구실로 삼을까 걱정이다.”

하였다. 그런데 무왕이 마침내 그 뒤를 따라 그와 같은 일을 행했으니, 천하 사람들이 또 흡족해하며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후세를 위하여 염려됨이 진실로 클 것이다. 그러므로 백이가 무왕을 비난한 것은 그의 거사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리를 밝혔을 따름이며, 무왕이 백이의 봉분을 만들어 주지 않은 것은 그를 잊은 것이 아니라 그의 의리를 밝게 드러냈을 따름이니, 천하와 후세를 염려한 점은 똑같았다.

, 예의를 갖추어 봉양한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표창한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신하로 대하지 않은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봉분을 만들어 준들 백이를 후대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D-001]사기(史記) …… 했다 : 사기 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의하면 백이와 숙제(叔齊)는 은 나라의 제후(諸侯)인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숙제에게 지위를 물려주려 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숙제가 형인 백이에게 양보하려 하였다. 백이는 아버지의 명이다.”라고 하고는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숙제도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달아나 버리니, 나라 사람들이 다른 형제를 왕으로 세웠다. 백이와 숙제가 서백(西伯 : 뒷날의 문왕文王)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로 갔는데, 도착해 보니 서백은 이미 죽었고, 그 아들 무왕이 아비의 신주(神主)를 수레에 싣고서 동쪽으로 은 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려 하였다. 백이와 숙제가 말고삐를 부여잡고 충고하기를, “아버지가 죽었는데 장사도 지내지 않고 전쟁을 하는 것을 효()라고 하겠습니까?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는 것을 인()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무왕의 측근 신하들이 무기로 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강 태공(姜太公) 이들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고는 부축하여 나갔다. 무왕이 은 나라를 평정하고 나자 천하가 모두 주() 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었으나, 백이와 숙제는 수치스럽게 여겨 의리상 주 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며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며 고사리를 캐 먹고 살다가 굶주려 죽었다.

[D-002]() 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자 : 원문은 旣改殷命인데, 서경 소고(召誥)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무왕이 하늘을 대신해서, 은 나라가 받은 천명을 교체해 버렸다는 뜻이다.

[D-003]경서(經書) : 여기에서는 서경을 가리킨다.

[D-004]() 나라 ……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오는바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가리킨다.

[D-005]천하의 대로(大老)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백이는 폭군 주()를 피하여 북쪽 바닷가에 살다가 문왕이 정벌에 나섰다는 말을 듣고 어찌 그에게 귀의하지 않으리오. 나는 서백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고 들었다.’ 하였으며, 강 태공이 폭군 주를 피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다가 문왕이 정벌에 나섰다는 말을 듣고 어찌 그에게 귀의하지 않으리오. 나는 서백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고 들었다.’고 하였다. 이 두 노인은 천하의 대로(大老)인데 문왕에게 귀의하였으니, 이는 천하 사람들의 아버지가 귀의한 셈이다. 천하 사람들의 아버지가 귀의했는데, 그 아들 되는 자들이 어찌 문왕에게 귀의하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대로는 덕망 높은 노인이란 뜻이다.

[D-006]내가 …… 것이다 :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서 맹자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지 않고 흉년만 핑계 대는 위() 나라 왕에게 이것은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서도 내가 아니라 무기가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비난하였다.

[D-007]이윤(伊尹) …… 않았으니 : 이윤은 은 나라 탕왕(湯王)의 재상으로 이름은 지()이다. 탕왕의 부름을 받아 하() 나라의 무도한 걸()을 치고 은 나라를 세우는 일을 도왔다. 맹자 만장(萬章), 이윤은 천하의 백성 중에 필부(匹夫)와 필부(匹婦)라도 요순(堯舜)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를 밀어 도랑 속으로 처넣은 것과 같이 생각하였다.” 하였고, 공손추 상(公孫丑上), 공손추가 백이와 이윤이 공자(孔子)와 같은 점을 묻자, 맹자가 답하기를, “백리(百里) 되는 땅을 얻어서 임금 노릇을 하면 모두 제후들에게 조회 받고 천하를 소유할 수 있거니와, 한 가지라도 불의를 행하며,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이를 죽이고 천하를 얻는 것은 모두 하시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같은 점이다.” 하였다. 또한 서경 열명 하(說命下), 이윤은 한 사람의 필부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이는 나의 허물이다.’ 하였다.”고 한다.

[D-008]노성(老成)한 사람 : 덕망 높은 노인이라는 뜻과 함께, 노련한 옛 신하라는 뜻도 있다.

[D-009]난폭하게 : 대본은 놀라고 두려워한다는 뜻의 恤然으로 되어 있으나, 이본에 따라 悍然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또 어리석다는 뜻의 懜然으로 된 이본도 있다. 거리낌 없이 난폭하게 구는 것을 한연불고(悍然不顧)’라 한다.

[D-010]무왕이 …… 표했으면서 : 서경 무성(武成)에 나온다. 상용(商容)은 은 나라 주왕 때 대부가 되어 직언을 하다가 내쫓긴 현인(賢人)이다. 사기 61 백이열전에는 무왕이 상용의 마을에 정표(旌表)를 내렸다고 하였다.

[D-011]나는 …… 걱정이다 :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나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백이론(伯夷論) ()

 

 

공자(孔子)가 옛날의 인자(仁者)를 칭송했으니, 기자(箕子), 미자(微子), 비간(比干)이 이들이다. 이 세 분의 행실이 각기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두 인()이라는 명칭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맹자가 옛날의 성인(聖人)을 칭송했으니, 이윤(伊尹), 유하혜(柳下惠), 백이(伯夷)가 이들이다. 이 세 분의 행실이 각기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두 성()이라는 칭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저 태공(太公)은 옛날의 이른바 대로(大老)요 현인(賢人)이었으니, 그 행실은 백이와 똑같고 도()는 이윤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자는 그의 인()을 칭송하며 세 분의 인자와 함께 나열하지는 않았으며, 맹자도 그의 성()을 칭송하며 세 분의 성인과 함께 나열하지는 않았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 내가 은 나라를 살펴보건대 그 나라에는 다섯 분의 인자가 있지 않았을까? 어째서 다섯 분의 인자라고 말하는 것인가? 백이와 태공을 합해서 하는 말이다. 저 다섯 분의 인자들은 소행은 역시 각자 달랐지만, 모두 절실하고 간곡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기다려야만 인()이 되고, 서로 기다리지 않을 경우 불인(不仁)이 되는 처지였다.

미자는 속으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충고할 수도 없는데 충고하려고 애쓰느니 차라리 은 나라의 종사(宗祀 조종(祖宗)에 대한 제사)를 보존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나라를 떠났으니, 미자는 비간이 왕에게 충고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비간은 속으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충고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해서 충고하지 않느니 차라리 낱낱이 충고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충고하고 죽었으니, 비간은 기자가 도()를 전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기자는 속으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도를 전하지 않으면 누가 도를 전하랴.’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잡혀서 종이 되었으니, 기자에게는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비록 그러하나 인자의 마음은 하루라도 천하를 잊지 못하는 법이니, 기자는 태공이 백성들을 구제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태공은 속으로 자신을 은 나라의 유민(遺民)으로 생각하면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인데, 소사(少師)는 떠났고, 왕자(王子)는 죽었고, 태사(太師)는 구금되었으니, 내가 은 나라의 백성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장차 천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서 마침내 주()를 쳤으니, 태공 역시 서로 기다릴 사람이 없는 듯하다. 비록 그러하나 인자의 마음은 하루라도 후세를 잊지 못하는 것이니, 태공은 백이가 의리를 밝혀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백이는 속으로 자신을 은 나라의 유민으로 생각하면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인데, 소사는 떠났고, 왕자는 죽었고, 태사는 구금되었으니, 내가 그 의리를 밝혀 놓지 않는다면 장차 후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서, 마침내 주() 나라를 받들지 않았다. 무릇 이 다섯 분의 군자가 어찌 좋아서 그렇게 했겠는가. 모두 마지못해서 한 일이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만약 서로 기다려서 인()이 된다 할 것 같으면, 태공이 없었을 경우 기자가 목야(牧野)의 대사(大事)를 치렀어야 하고, 백이가 아니었다면 태공이 말고삐를 끌어당겨 못 가도록 충고했어야 한단 말인가?”

하기에, 이렇게 답하였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해서 인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리를 기다릴 따름이니, 신포서(申包胥)와 오자서(伍子胥)가 서로에게 고지(告知)한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왕자가 없었다면, 소사가 반드시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떠날 필요가 없었는데도 떠났다면, 소사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소사가 떠나지 않았는데도 왕자가 홀로 죽었다면, 왕자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왕자가 이미 죽고 소사가 이미 떠났는데도 태사가 거짓으로 미친 척하지 않았다면, 태사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태공이 천하 백성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백이가 후세 사람을 염려하지 않았다면 백이와 태공은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자가 주 나라로 달아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비간이 충고하다가 죽은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기자가 도를 전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태공이 주()를 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백이가 주 나라를 받들지 않은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다.

나는 그러기에 백이와 태공의 도()를 은 나라의 세 분의 인()에 합친 것이다. 이는 또한 공자의 뜻이었다. 공자가 태공을 칭송하지 않은 것은 아마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백이의 경우에는 자주 그 덕을 칭송하고,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감히 그를 세 분의 인자와 연계시키지 않은 것은 아마 무왕에게 누가 될까봐 말하기를 꺼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만약에 다섯 분의 인자가 합해야 온전한 인()이 된다면, 어찌 수고스럽지 않은가?”

하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일로써도 인이 되기로 말하자면, 편협하거나 공손하지 못한 점이, 어찌 백이가 청렴해서 성인이 되고 유하혜가 화합을 잘해서 성인이 된 사실을 가릴 수 있겠는가.”

 

[D-001]공자(孔子) …… 이들이다 : 논어 미자(微子) 미자(微子)는 나라를 떠났고, 기자(箕子)는 잡혀서 종이 되었으며, 비간(比干)은 충고하다가 죽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 나라에 세 사람의 인자(仁者)가 있었다.’고 하였다.”고 한 것을 가리킨다.

[D-002]맹자가 …… 이들이다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실린 말로, 맹자가, “백이(伯夷)는 성인(聖人) 중의 청()한 자요, 이윤(伊尹)은 성인 중의 자임(自任)한 자요, 유하혜(柳下惠)는 성인 중의 화()한 자요, 공자(孔子)는 성인 중의 시중(時中)한 자이시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D-003]태공(太公) …… 때문이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서 맹자는 태공을 백이와 함께 대로(大老)라고 불렀다. 태공은 백이와 마찬가지로 폭군 주()를 피해 은거하다가 서백(西伯) 즉 주 나라 문왕에게 귀의하였다. 또한 태공은 이윤이 탕왕(湯王)을 도와 은 나라를 세웠듯이, 무왕을 도와 주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도()가 흡사했다고 한 것이다. ()가 똑같다고 하지 않은 것은, 이윤이 천하를 얻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정의를 지키고자 한 데 비해, 태공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병법과 기계(奇計)를 즐겨 구사한 때문인 듯하다. 史記 卷31 齊太公世家 태공이 지었다는 육도(六韜)라는 병서가 전한다.

[D-004]소사(少師) …… 구금되었으니 : 문맥으로 보면 소사는 미자, 왕자(王子)는 비간, 태사(太師)는 기자라야 하지만, 서경 미자(微子)에는 왕자인 미자가 부사(父師) 즉 태사인 기자와 소사인 비간과 상의하여 망명을 결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기 3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도 태사는 기자, 소사는 비간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소사는 죽었고, 왕자는 떠났고, 태자는 구금되었으니로 되어야 옳다. 비간 역시 왕자였으므로, 약간 착오가 빚어진 듯하다. 소사는 제왕의 스승으로, 태사 다음가는 직책이다.

[D-005]목야(牧野)의 대사(大事) : 목야는 무왕이 주()와 결전을 벌였던 전쟁터이다. 목야에서 은 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피가 내를 이루어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다 한다. 書經 武成

[D-006]신포서(申包胥) ……  : 신포서와 오자서(伍子胥)는 모두 초() 나라 사람이다. 오자서는 부형이 초 나라 평왕(平王)에게 살해당하자 복수하려고 오() 나라로 망명하였다. 9년 후 오왕 합려(闔閭)를 도와 초 나라의 도읍 영()으로 쳐들어가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에 매질을 가하여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신포서는 초 나라의 대부이다. 오 나라 군사가 침입하여 왕이 피난하는 국난이 있자 진()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진 나라가 구원을 허락하지 않자 그는 대궐의 뜰에서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울면서 이레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않았다. 진 나라 애공(哀公)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구원병을 내어 오 나라를 물리쳤다. 처음에 신포서와 오자서는 친구 사이였는데, 오자서가 망명하면서 나는 반드시 초 나라를 멸망시키고 말겠다.” 하니, 신포서가 나는 반드시 초 나라를 보존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므로,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D-007]떠날 …… 것이다 : 이 대목이 원문에는 없으나,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과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 不必行而行 微子爲不足仁矣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微子는 문맥에 맞추어 少師로 바꿔 번역하였다.

[D-008]인을 …… 있겠는가 : 논어 술이(述而)에 나온다.

[D-009]편협하거나 …… 있겠는가 : 맹자 공손추 상에 백이는 편협하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못하니, 편협함과 공손하지 못함은 군자(君子)가 따르지 않는다.” 하고, 만장 하(萬章下) 백이는 성인(聖人) 중의 청()한 자요, 이윤은 성인 중의 자임(自任)한 자요, 유하혜는 성인 중의 화()한 자요, 공자는 성인 중의 시중(時中)한 자이시다.” 하였다. 여기서 말한 뜻은, 백이와 유하혜가 모든 미덕을 갖춘 공자와는 다르지만 한 가지 미덕만으로도 ()’이 되는 데는 문제가 없듯이, 백이와 태공 또한 ()’이라는 범주에 넣어도 손상이 없다는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형암(炯菴) 행장(行狀)

 

 

우리 정종 공정대왕(定宗恭靖大王)의 열다섯째 아들 무림군(茂林君) 시호(諡號) 소이공(昭夷公)은 휘가 선생(善生)이다. 그로부터 10세를 내려와, 휘 정형(廷衡)은 감찰로서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휘 상함(尙馠)을 낳았다. 상함공이 휘 필익(必益)을 낳으니 강계 부사(江界府使), 부사공이 휘 성호(聖浩)를 낳으니 이분이 형암의 선친이다. 모친은 반남 박씨(潘南朴氏)로 토산 현감(兎山縣監) 휘 사렴(師濂)의 따님이요, 금평위(錦平尉)로서 시호가 효정공(孝靖公)인 휘 필성(弼成)의 손녀이다.

형암은 휘가 덕무(德懋)요 자는 무관(懋官)이니, 형암은 그의 호이다. 영종(英宗) 신유년(1741, 영조 17)에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지녔고 성품이 단정하고 엄격하였다. 세 살 때 이웃에 사는 창기(娼妓)가 엽전 한푼을 가지라고 주자, 즉시 더러워. 더러워.” 하며 땅에 던졌고, 그 돈이 빗나가서 신고 있는 신 위에 떨어지자 수건으로 그 신을 닦았다. 겨우 6, 7세밖에 되지 않아서는 능히 글을 지었고 책 보기를 좋아했다. 한번은 집안사람들이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가, 저녁 무렵에야 대청 벽 뒤의 풀더미 사이에서 발견했으니, 대개 벽에 도배지로 바른 고서(古書)를 보는 데 빠져서 날이 저문 줄도 몰랐던 때문이었다.

차츰 장성하자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에 힘썼다. 앉거나 눕거나 거동하는 것이 일정한 법도가 있어 한자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종일토록 여럿이 있을 적에도 정중하되 뻐기지 않고, 잘 어울리되 허물없이 굴지 않았다. 그리고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두어 칸의 허물어진 가옥에 거친 음식도 건너뛰는 때가 많았지만 편안하게 받아들여, 남들은 그가 근심하는 빛을 보지 못했다. 무릇 세간의 재화와 이익, 가무와 여색, 애완물, 잡기(雜技) 따위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문장을 지을 때는 반드시 옛사람의 취지를 구하되 답습하거나 거짓으로 꾸며서 표현하지 않았다. 한 글자 한 구절도 다 정리(情理)에 핍근(逼近)하고 진경(眞境)을 묘사하여, 편마다 그 묘미가 곡진해서 읽어 볼 만하였다. 뜻을 같이하는 두어 사람과 학문을 강론하는 외에는, 지은 시나 산문을 남에게 잘 보여 주려 하지 않았다. 교유도 함부로 하지 않아서, 현달한 벼슬아치들은 한 사람도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나이가 약관이 넘도록 명성이 마을 골목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책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보면서 초록(抄錄)했는데, 본 책이 거의 수만 권을 넘었으며, 초록한 책도 거의 수백 권이었다. 비록 여행할 때라도 반드시 책을 소매 속에 넣어 갔으며, 심지어는 붓과 벼루까지 함께 가지고 다녔다. 여관에서 묵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책을 덮은 적이 없었다. 만약 기이한 말이나 특이한 소문을 듣기라도 하면 곧바로 기록하였다. 책을 저술함에 있어서는 고거(攷據)와 변증(辨證)을 잘하였다. 일찍이 동식물과 명물도수(名物度數), 나라를 경영하는 방략과 금석비판(金石碑板)으로부터 우리 왕조의 법제와 외국의 풍토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젊어서는 부친의 명령으로 과거 공부를 하였다. 시에 뛰어나, 당세에 과시(科詩)로써 이름난 자들도 스스로 미치지 못할 것으로 여겼다. 간간이 과거를 본 적도 있었으나 즐겁게 여기진 않았으며, 마침내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했어도 불평하지 않았다.

을유년(1765, 영조 41)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3년 동안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풀지 않았으며 조석으로 슬피 울부짖어, 이웃 사람들이 그 때문에 귀를 막았을 정도였다. 성묘하는 일이 아니라면 비록 종자(宗子)의 집이라도 간 적이 없었다.

무술년(1778, 정조 2)에 사신 행차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면서 산천과 풍물을 관광하였으며, 당시의 이름난 유학자들과 담론하고 시를 지어 주고받은 일이 많았다. 항주(杭州) 사람 반정균(潘庭筠)이 그를 만나 보고 탄복하며,

 

눈빛이 번쩍번쩍하니 이야말로 비범한 사람이다.”

하였다.

기해년(1779)에 외각(外閣 교서관(校書館))의 검서관(檢書官)에 제수되었는데, 이때는 성상이 등극한 지 3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임금께서는 문풍(文風)이 점차 쇠퇴하고 인재(人材)가 묻혀 버림을 염려하여 문풍을 진작하고 인재를 발탁할 방법을 생각한 끝에, 영릉(英陵)의 옛일을 모방하여 규장각을 세우고 각신(閣臣)을 두었으며, 교서관을 창덕궁 단봉문(丹鳳門) 밖으로 옮겨 설치하고 규장각의 외각을 삼았다. 그리고는 각신들에게 물어서 벼슬하지 못한 선비들 중에 학문과 지식이 있는 자들로 외각의 관원을 채우게 하고, 처음으로 검서라는 관명을 하사하였는데, 무관이 첫 번째로 선발되었다. 임금께서 검서들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는, ‘규장각 팔경(奎章閣八景)’이라는 제목의 근체시(近體詩) 8편을 짓게 했는데 무관이 장원을 차지했고, 이튿날 다시 영주에 오르다登瀛州라는 제목으로 20()의 시를 짓게 했는데 또 장원을 차지하니, 두 번 모두 임금께서 상을 내리되 차등있게 내리셨다. 이렇게 해서 남들에게 받지 못했던 인정을 비로소 임금에게서 받게 된 것이다.

신축년(1781) 정월에 외각의 관직을 옮겨서 내각(內閣 규장각)의 관직으로 만들도록 명하였으니, 무관이 규장각 검서관이 된 것은 대개 이때부터였다. 3월에 사도시 주부(司䆃寺主簿)로 승진되었는데, 이로부터는 매양 본래의 관직에 검서의 관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해 12월에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으로 제수되었는데, 사근역(沙斤驛)에는 해묵은 공채(公債)가 있어 매년 그 이자를 받아 공비(公費)로 삼는 관계로, 가난에 지친 백성들을 날마다 들볶아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일을 상관(上官 경상 감사)에게 보고하여 혁파하였는데, 이 덕분에 역민(驛民)들이 지금까지도 그 혜택을 입고 있다.

계묘년(1783) 11월에 내직으로 들어와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에 제수되고, 갑진년(1784) 2월엔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로 옮겼다. 6월에는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다. 적성에 있는 5년 동안 10번의 인사 고과에서 다 최우수를 받았다.

적성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청렴하면 위엄이 생기고, 공평하면 혜택이 두루 미치게 된다.”

하였고, 남들이 간혹 녹봉이 박하지 않느냐고 하면, 문득 정색을 하고,

 

내가 한낱 서생(書生)으로서 성상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벼슬이 현감에 이른 덕분에, 위로는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하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고 있으니 영광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다만 임금님의 은혜를 찬송할 뿐이지 어찌 감히 가난을 말할 수 있으랴!”

하였다. 고을 남쪽에 청학동(靑鶴洞)이 있었는데 고송(古松)과 백석(白石)이 그윽하여 사랑스러웠다. 예전에 정자가 있었으나 다 허물어졌으므로 다시 두어 칸을 얽고 우취옹정(又醉翁亭)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두 바퀴 달린 작은 수레를 손수 만들어 여가 있을 때면 홀로 그곳에 가서 유유자적하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기유년(1789) 6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내직인 와서 별제(瓦署別提)로 옮기고, 경술년(1790) 7월에 사도시 주부로 옮기고, 신해년(1791) 2월에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로 옮기고, 3월에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로 옮기고, 5월에 사옹원 주부로 옮겼다.

무관은 젊은 시절부터 가난을 편안히 여겼다. 더러는 해가 저물도록 식사가 준비되지 못한 적도 있고, 더러는 추운 겨울에도 온돌에 불을 때지 못하기도 했다. 벼슬을 하게 되어서도 제 몸을 돌보는 데는 매우 검소하여, 거처와 의복이 벼슬하기 전과 다를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기한(饑寒)’이라는 두 글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기질이 본래 부녀자나 어린아이처럼 연약하였는데, 나이가 거의 노년에 접어들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이 손상된 지 오래였다. 겨울에 날씨가 몹시 추우면 나무 판자 하나를 벽에 괴고 그 위에서 자곤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병이 나자 병중에도 앉고 눕고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태연자약하였다. 임종에 이르러서는 의관을 다시 정제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으니, 때는 계축년(1793) 1 25일이요, 향년은 겨우 53세였다. 2월에 광주(廣州) 낙생면(樂生面) 판교(板橋)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일찍이 저서 12종이 있었다. 영처고(嬰處稿)는 바로 젊은 시절에 지은 시와 산문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처신하는 것과 행동을 조심하기를 어린아이나 처녀처럼 해야 한다.”

했는데, 그래서 원고의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 청장관고(靑莊館稿) 청장은 바로 해오라기의 별명인데, 강이나 호수에 살면서 먹이를 뒤쫓지 아니하고 제 앞을 지나가는 고기만 쪼아 먹기 때문에 신천옹(信天翁)이라고도 부른다. 무관이 이로써 스스로 호를 삼은 것은 까닭이 있어서였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는 곧 귀로 들은 것과 눈으로 본 것과 입으로 말한 것과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은 것이다. 사소절(士小節)은 옛날의 어진 이들이 남긴 교훈을 인용하여 훈계의 말씀으로 삼고, 지금 사람들의 요새 일들을 기록하여 보고 느끼는 바가 있도록 한 것이다.

청비록(淸脾錄)은 옛날과 지금 사람들의 시화(詩話)를 실은 것이요, 기년아람(紀年兒覽)은 상고부터 시작하여 명() · () 및 춘추 시대의 소국(小國)들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데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명확히 구별하였다. 청정국지(蜻蜓國志)는 일본의 세계(世系) · 지도 · 풍속 · 언어 · 물산을 기록한 것이다. 앙엽기(盎葉記)는 곧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일에 대해 고증하고 변증한 말들을 모은 것이다.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은 경상도에서 역승(驛丞 찰방)으로 재직할 때에 듣고 본 것을 기록한 것이다.

예기억(禮記臆) 예기의 어려운 글자나 의심나는 뜻에 대해 풀이한 것이다. 송사보전(宋史補傳)은 곧 하교를 받들어 어정송사전(御定宋史筌)을 편집 · 교열한 것으로서, 유민열전(遺民列傳)과 고려열전(高麗列傳) · 요열전(遼列傳) · 금열전(金列傳) · 몽고열전(蒙古列傳)을 보완하여 편찬한 것이다.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는 많은 서적들을 열람하면서 명 나라 말의 유민(遺民)들의 행적을 편집한 것인데, 미처 원고를 정리하지 못하였다.

매번 문헌을 편찬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무관이 참여하였으니, 국조보감(國朝寶鑑) · 갱장록(羹墻錄) · 문원보불(文苑黼黻) · 대전통편(大典通編) 같은 종류가 그것이다. 또 일찍이 어명을 받들어 운서(韻書)를 편찬하여 진상하였으니, 이름을 규장전운(奎章全韻)이라 하였다. 자획(字畫)은 모두 육서(六書)를 쓰고, 주석은 제가(諸家)의 운서를 참고하여 협운(叶韻)과 통운(通韻)까지 자상히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관은 이 일을 마치고 죽었다.

갑인년(1794) 겨울에 임금은 책을 간행하도록 명하고, 그 아우 공무(功懋)와 아들 광규(光葵)에게 명하여 함께 교정하고 그 일을 감독하게 했다. 삼년상을 마치고 담제(禫祭)를 지내자, 임금께서 하교하기를,

 

오늘 운서를 인쇄하는 일로 인하여 생각하건대, 작고한 검서관 이 아무의 재주와 학식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아들이 이미 탈상했다고 아뢰니, 그를 검서관에 특별히 임명하라.”

하고, 또 돈 500냥을 하사하시어 유고를 출간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이어서 규장각의 각신과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서 현재 장임(將任 대장이나 장수), 지방 관직, 관찰사, 큰 고을 수령을 맡은 자에게 명하여 각자 능력껏 출간 비용을 돕도록 하고, 가까운 친척인 훈련대장 이경무(李敬懋)에게도 일체가 되어 출간 비용을 대는 것을 돕도록 하교하였다.

이날 임금께서 광규에게 입시토록 명하였으며, 은혜로운 하교가 정중하였다. 일족과 친구들이 서로 돌아보며 축하하기를,

 

무관이 평소에 제 몸을 깨끗이 지키고 학업에 부지런하며 편찬하는 일로 수고가 많았는데, 죽은 뒤에 지존(至尊)께서 그 재주를 생각하고 그 가난을 염려하여 마침내 그의 아들을 등용하고 유고를 출판하라는 명을 내리셨구나! 이렇게 큰 은혜와 영광이 내린 것은 구천(九泉)에 간 망인을 깊이 감격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장차 온 세상 사람들을 분발하게 할 터이니, 어찌 거룩하지 않으랴!”

하였다.

무관은 수성 백씨(隋城白氏 수성은 수원(水原))에게 장가들었으니, 동지중추부사 사굉(師宏)의 따님이요, () 호조 판서 행 평안 병사(行平安兵使)로 시호가 충장공(忠莊公)인 시구(時耈)의 증손녀이다. 1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바로 광규요, 두 딸은 전주(全州) 유선(柳烍)과 광산(光山) 김사황(金思黃)에게 시집갔다. 광규의 자녀는 아직 어리다.

, 무관은 품행이 독실하여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고,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서 만물을 정밀히 연구하기에 넉넉하였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내면의 수양에 독실하여 외부의 유혹을 물리쳐 끊었고, 본체(本體 마음의 본바탕)가 맑고 투철하며 그 용( 마음의 활동)은 섬세하고 빈틈이 없었다. 안자(顔子)의 사물(四勿)과 증자(曾子)의 삼성(三省)은 모두 그가 부지런히 힘을 쏟던 것이다.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에서 널리 취재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독창적인 경지를 홀로 추구하고 진부한 것은 따라 배우지 않았다. 기이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진실되고 절실함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으며, 순박하고 성실하면서도 졸렬하거나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았으니, 수백 수천 년이 지난 뒤라도 한번 읽어 보기만 하면 완연히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고금의 일에 해박하고 명물(名物)을 명백히 분석하기로 말하자면, 전무후무(前無後無)하다 해도 좋을 것이다.

무관은 가난한 선비 시절부터 민생이 곤궁하고 인재가 묻히고 마는 데 깊은 관심을 쏟아서, 개연(慨然)히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그의 논설과 기록은 법령과 제도에 특히 치중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았다. 그런즉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뜻을 잠깐 사이도 잊은 적이 없었으니, 진실로 그를 기용하여 능력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면, 장차 어디건 안 될 곳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도도하게 유행하는 풍속을 싫어하고 마음의 본바탕이 자유롭고 트인 것을 좋아하여, 뜻을 굳건히 지키고 운명을 믿어 담담히 욕심이 없으며, 쓸쓸한 오두막집에 살면서 빈천을 감수하였다. 권세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않아, 지위 높고 요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남들이 몰라주어도 불평하지 않는 내실을 갖추었고, 혼자 실행하게 되어도 두려워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지녀, 하마터면 불우한 채 늙어 죽어 그대로 묻힌 채 이름이 후세에 일컬어지지 못할 뻔했다.

그런데 우리 성상께서 문치(文治)를 숭상하는 정치를 천명하고 인재 뽑는 길을 넓히사, 무관이 궁벽한 여항에 사는 한낱 가난한 선비인데도 날마다 임금을 가까이 모시게 되니, 성상은 이미 그가 오래 쌓아온 학식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는 구중궁궐에 달려나가 문헌의 편찬 사업에 이바지하였으니, 세상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성상이 유독 아셨고,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기지 못한 것을 성상이 유독 기특하게 여기신 것이었다. 그의 처지는 한낱 소원하고 지위 낮은 관원이었으나 그의 소임은 규벽(奎璧)을 맡는 것이었고, 그의 관직은 한낱 유품(流品 잡다한 하급 관직)이로되 그의 일은 성상의 고문(顧問)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전후로 부지런히 장려하시고 후하게 하사하신 은혜는 지위 높은 신하도 얻기 힘든 바였으니, 무관이 성상으로부터 입은 지우(知遇)도 성대하다 하겠다.

벼슬길이 순탄치 못해 관직이 한낱 현감에 그치고, 타고난 수명이 짧아 역량을 당세에 펴지 못하고 뜻을 품은 채 죽은 점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운명이지 때를 만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죽자 성상은 은혜로운 말씀을 내려 그의 재주와 학식을 잊을 수 없다고 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내탕전(內帑錢)으로 유고를 간행하여 오래도록 세상에 전하게 하고, 그의 검서 관직을 그의 아들이 물려받게 하셨으니,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은총을 입은 것이 지극하다 하겠다. 옛사람을 낱낱이 헤아려 보더라도 임금에게 이와 같은 은총을 입을 수 있었던 자가 몇 사람이나 되었겠는가? 이런 점에서 본다면 무관은 유감이 없을 것이다.

규장각의 여러 신하들이 바야흐로 임금의 하교를 받들어 그의 유집을 편찬하면서, 내가 무관의 평생 사적을 잘 안다고 하여 행장을 짓도록 부탁하였다고 한다.

 

 

[C-001]형암(炯菴) 행장(行狀) : 이덕무의 삼년상이 끝난 정조 19(1795) 4, 왕은 그의 유고(遺稿)를 정선(精選)하여 활자로 인쇄하고 그 서문과 발문 및 묘지(墓誌)와 묘갈(墓碣) 등은 글 짓는 소임을 맡은 신하들이 나누어 짓도록 명하면서, 행장은 연암이 지어 바치도록 특별히 명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해 12월부터 간본(刊本) 아정유고(雅亭遺稿)의 인쇄를 시작했으나, 서문과 묘문(墓文) 및 행장이 지어지기를 기다려 정조 21(1797) 2월에야 인쇄를 끝냈다고 한다. 過庭錄 卷2》 《靑莊館全書 卷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下 연암이 지은 행장은 간본 아정유고에 수록된 것과 연암집에 수록된 것이 내용상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연암집에 수록된 행장이 연암의 초고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원문의 炯菴 李懋官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1]그로부터 10세를 내려와 :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李光葵)가 지은 선고 적성 현감 부군 연보(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에는 이덕무가 무림군(茂林君) 10세손이라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0

[D-002]명물도수(名物度數) : 명물은 각종 사물의 명칭과 특징을 가리키고, 도수는 계산을 통해 얻은 각종 수치를 말한다.

[D-003]금석비판(金石碑板) : 금석은 글자가 새겨진 동기(銅器)와 비석을 말하고, 비판은 비석의 탁본인 비첩(碑帖)을 가리킨다. 역사학과 문자학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D-004]마침내 …… 못했어도 : 시관(試官)에게 합격자로 뽑히지 못했음을 뜻한다. 이덕무는 33세 때인 1773(영조 49) 성균시(成均試)에 장원 급제하고 그 이듬해 증광(增廣) 초시(初試)에 합격했다. 1779(정조 3) 규장각 검서(奎章閣檢書)에 임명된 뒤로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D-005]영릉(英陵)의 옛일 : 세종 2(1420)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한 사실을 말한다.

[D-006]임금께서 …… 내리셨다 : ‘규장각 팔경을 짓고는 명의록(明義錄) 1질을 특별히 하사받았고, ‘영주에 오르다를 짓고는 백면지(白綿紙) 다섯 묶음을 하사받았다. 靑莊館全書 卷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上 이 두 시는 모두 청장관전서 20 간본 아정유고 12에 수록되어 있다.

[D-007]사근역(沙斤驛) : 경상도 함양(咸陽)에 있던 역참(驛站)이다.

[D-008]공채(公債) : 백성들이 나라에 진 빚을 말하는데, 대개 환곡을 갚지 못한 경우를 말한다.

[D-009]적성 현감(積城縣監) : 적성은 경기도에 있던 현으로, 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이다.

[D-010]우취옹정(又醉翁亭) : () 나라 때 구양수(歐陽脩)가 저주 지사(滁州知事)로 재임할 적에 취옹정(醉翁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백성들과 함께 즐겁게 잔치를 벌인 일을 기록한 취옹정기(醉翁亭記)를 모방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D-011]영처고(嬰處稿) …… 것이다 : 연암이 영처고에 대해 지은 서문이 연암집 7에 수록되어 있다. 이덕무가 지은 자서(自序)는 그의 나이 20세 때인 1760년에 지은 것이다.

[D-012]청장관고(靑莊館稿) …… 있어서였다 : 청장관고 청장관전서와는 다르다. 간본 아정유고에 실린 행장에 의하면, 이덕무의 첫 번째 문집其初集의 이름이 영처고이고, 두 번째 문집其二集의 이름이 청장관고라고 하였다. 이는 곧 청장관전서 중의 필사본 아정유고를 가리킨다. 청장은 일명 신천옹(信天翁 : 앨버트로스)이라고 하는 해조(海鳥)로서, 해오라기鵁鶄와는 별종이다. 연암집 1 담연정기(澹然亭記) 참조. 연암이 지은 행장은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李光葵)가 지은 선고 부군 유사(先考府君遺事)’에 의거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일부는 이 대목과 같이 오류를 포함한 채 그대로 전재(轉載)하기도 했다.

[D-013]송사보전(宋史補傳) …… 것이다 : 송사보전 청장관전서  편서잡고(編書雜稿)에 수록되어 있다.

[D-014]자획(字畫) …… 쓰고 : 상형(象形) · 지사(指事) · 회의(會意) · 형성(形聲) · 전주(轉注) · 가차(假借) 등 한자(漢字)의 여섯 가지 조자법(造字法)에 따라서 속자(俗字)나 위자(僞字)를 배제하고 정자(正字)만을 썼다는 뜻인 듯하다. 이광규가 지은 선고 부군 유사(先考府君遺事)’에 이덕무가 육서에 능통하여 아무리 바쁘더라도 속자나 위자를 쓰지 않았다고 하며,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자획이 비록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 수 없을지라도, 육서를 좋아한다고 자처하면서 만약 체세(體勢)만 숭상하고 그 자의(字義)를 모른다면 어찌 되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D-015]협운(叶韻)과 통운(通韻) : 당시의 음()으로 고대의 운문을 읽을 경우 운이 맞지 않는 글자의 음을 운에 맞도록 임시로 고쳐 읽는 것을 협운이라 한다. 주자(朱子) 시경이나 초사(楚辭)를 해석할 때 협운을 적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통운은 한시를 지을 때 서로 통용될 수 있는 운부(韻部)를 말한다. 예컨대 평성(平聲) 동운(東韻)과 동운(冬韻)에 속하는 글자들은 서로 운자(韻字)로 통용될 수 있다.

[D-016]담제(禫祭) : 삼년상(25개월)을 마친 그 다음다음 달 하순에 탈상(脫喪)하면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D-017]초계문신(抄啓文臣) : 37세 이하의 당하관(堂下官) 중에서 선발하여 규장각에 소속시켜 40세 이전까지 학문과 문장 연마에 전념하도록 한 문신을 말한다.

[D-018]이날 …… 정중하였다 : 정조 19(1795) 4 3, 왕은 이광규에게 부친 이덕무의 유고가 모두 얼마나 되는지를 묻고, 유고를 간행할 비용이 곧 조처될 것인데 집이 가난하다 하니 유고를 간행하고 남는 것은 생활비로 쓰도록 하라고 하였으며, 유고를 정선(精選)하는 일은 각신 윤행임(尹行恁)에게 맡겼노라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下

[D-019]품행이 독실하여 : 원문은 行義敦篤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20]안자(顔子) …… 삼성(三省) :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 말라는 ()’ 자가 네 번 나왔으므로 이를 사물(四勿)이라 한다. 論語 顔淵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 나는 날마다 세 가지 일로 나 자신을 돌아본다.吾日三省吾身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 마음을 다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친구들과의 교우 관계에서 성실하지 못한 점은 없었는가, 스승에게 배운 것을 복습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였다. 論語 學而

[D-021]권세 …… 않아 : 원문에는 足不到 다음에 두 글자가 결락되었는데, ‘권문(權門)’과 같은 단어가 아닌가 한다. 문맥에 비추어 번역하였다.

[D-022]남들이 …… 않으려는 : 논어 학이(學而) 남들이 몰라주어도 불평하지 않으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고, 주역 대과(大過) 군자는 대과(大過)의 괘를 얻으면 혼자 실행하게 되어도 두려워하지 않고獨立無懼 숨어 살게 되어도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D-023]규벽(奎璧) : 임금의 친필과 인장(印章)을 가리킨다. 규장각은 임금의 친필과 인장을 관리하는 곳으로 세워졌다.

[D-024]후하게 하사하신 은혜 : 이덕무가 벼슬한 지 15년 동안 왕으로부터 책 · 옷감 · 음식 · 채소 · 과일 · 생선 · 약 등 모두 139종의 물품을 총 520여 번이나 하사받았다고 한다. 刊本雅亭遺稿 卷8 先考府君遺事

[D-025]순탄치 못해 : 원문은 崚嶒인데, ‘ 자가 ‘’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뜻은 같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 발문

 

 

위학지방도는 상하 2권이고, 그림이 모두 몇 편, 그림에 대한 설( 설명)과 지( 기록)가 모두 몇 편인데, 호가 경암(敬菴)인 조군 연귀(趙君衍龜)가 수집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 이야말로 명계(冥界)의 지남거(指南車)요 미계(迷界)의 보벌(寶筏)인 셈이니, 어찌 여러 가지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 규사(圭駟)의 탄식을 자아낼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사양하다 못하여 마침내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도()란 길과 같으니, 청컨대 길을 들어 비유해 보겠다. 동서남북 각처로 가는 나그네는 반드시 먼저 목적지까지 노정이 몇 리나 되고, 필요한 양식이 얼마나 되며, 거쳐가는 정자 · 나루 · 역참 · 봉후(烽堠)의 거리와 차례를 자세히 물어 눈으로 보듯 훤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다리로 실지(實地)를 밟고 평소의 발걸음으로 평탄한 길을 가는 법이다. 먼저 분명히 알고 있었으므로, 바르지 못한 샛길로 달려가거나 엉뚱한 갈림길에서 방황하게 되지 않으며, 또 지름길로 가다가 가시덤불을 만날 위험이나 중도에 포기해 버릴 걱정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지()와 행()이 겸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행하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헤엄쳐서 물속의 달을 건지거나 북을 치면서 자식을 찾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끝내는 완적(阮籍)처럼 통곡하고 양주(楊朱)처럼 울지 않을 자가 드물 것이다. 비유하면 서울 방내(坊內)의 자제들이 힘써 농사짓는 것이 귀하다는 말만 듣고서, 역서(曆書)가 반포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한겨울에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얼굴에 땀이 나도록 한다면, ()은 비록 힘썼다고 하겠지만 지()에 있어서는 어떻다 하겠는가? 이는 행을 먼저하고 지를 뒤로하여 끝내 수확을 얻지 못한 것이니, 바로 조군이 두려워하는 점이다.

만약 배우는 사람들이 이 그림들에 의거하여 방법을 삼는다면, 밤에 등불이 걸린 것과 같고 소경에게 지팡이가 있는 것과 같으며, 진도(陣圖)에 의거하여 진을 치는 것과 같고 처방에 따라 약을 쓰는 것과 같아, 한편으로는 농가(農家)의 역서(曆書)가 되고 한편으로는 나그네의 정후(亭堠 이정표)가 될 것이다. 모든 군자들이 어찌 이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C-001]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 : 조연귀(趙衍龜 : 1726~?)가 편찬한 책이다. 조연귀는 본관이 배천(白川)이고, 자는 경구(景九)이다. 우암 송시열계의 저명한 성리학자인 윤봉구(尹鳳九)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평생 은거하여 저술에 힘썼다. 그의 저술로 대학 중용의 내용을 알기 쉽게 대학도(大學圖) 중용도(中庸圖)로 도식화(圖式化)하고 해설을 덧붙인 학용도설(學庸圖說)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위학지방도 역시 성리학을 공부하는 방법을 여러 편의 그림들과 그에 대한 해설로써 알기 쉽게 소개한 계몽적 저술로 짐작된다. 이덕무가 지은 숙강규약도발(塾講規約圖跋) 금년 겨울에 조경암(趙敬菴) 위학지방도설(爲學之方圖說)을 편찬했다.”고 하면서, 그의 요청으로 청초(淸初)의 성리학자인 시황(施璜)이 지은 숙강규약(塾講規約)의 내용을 9편의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림에 대한 해설을 덧붙인 숙강규약도를 지어 그 책에 실었다고 했으며, 똑같은 사실이 이덕무의 연보(年譜) 중 신묘년(1771) 11 8일 조에 기록되어 있다. 靑莊館全書 卷19 雅亭遺稿11 5 趙敬菴, 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上》 《刊本雅亭遺稿 卷3 塾講規約圖跋 또한 이서구(李書九)의 성인가문유도지(聖人家門喩圖識)에는 계사년(1773, 영조 49) 겨울에 조연귀의 요청으로, 청초의 문인인 위상추(魏象樞)의 성인가문유(聖人家門喩)를 그림으로 그리고 그 사실을 적어 위학지방도에 보태었다고 한다. 自問是何人言

[D-001]명계(冥界) …… 보벌(寶筏) : 원문의 명도(冥道)’는 곧 명계(冥界)로 염라대왕이 있다는 지옥의 저승 세계를 말한다. 지남거(指南車)는 옛날에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싸울 때 치우가 피운 짙은 안개로 병사들이 방향을 잃자 황제가 방향을 지시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수레이다. 원문의 미진(迷津)’은 곧 미계(迷界), 번뇌로 미혹에 빠진 중생들의 세계를 가리킨다. 보벌은 보석으로 만든 뗏목이란 뜻으로, 미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게 해 주는 불법(佛法)을 비유한 것이다.

[D-002]규사(圭駟)의 탄식 : 쓸데없는 말을 한 데 대한 후회를 뜻한다. 시경 대아(大雅) () 백규의 흠은 오히려 갈아 없앨 수 있거니와, 이 말의 결함은 다스릴 수가 없다.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하였고, 논어 안연(顔淵) 말이 혀에서 나오면 사마(駟馬)도 따라잡을 수 없다.駟不及舌 하였다.

[D-003]평소의 …… 법이다 : 주역 이괘(履卦) 초구(初九)의 효사(爻辭) 평소의 발걸음으로 가면 허물이 없다.素履往无咎고 하였고, 구이(九二)의 효사에 밟아가는 길이 평탄하나, 욕심 없고 차분한 사람이라야 정조를 지키고 길하다.履道坦坦 幽人貞吉고 하였다.

[D-004]북을 ……  : 장자 천운(天運)에서 노자(老子)가 공자에게 인의 도덕(仁義道德)을 외쳐 오히려 인심을 크게 혼란시킨다고 비판하면서, 사람들이 본래의 순박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하지 않고 어찌하여 인의 도덕을 표방하기에 급급하기를 마치 큰 북을 치면서 잃어버린 아이를 찾듯이 하는가?”라고 하였다.

[D-005]완적(阮籍)처럼 ……  : 중국 진() 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은 때때로 마음껏 혼자 수레를 타고 달리다가 길이 끊어진 곳에 이르면 문득 통곡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또 전국 시대 때 양주(楊朱), 이웃 사람이 잃어버린 양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으므로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사람은 갈림길이 갈수록 더욱 갈라져서 찾을 수 없었다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양주는 침통해져서 한참 동안 말문을 열지 않고 며칠간 웃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길을 잃고 곤경에 빠지게 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D-006]역서(曆書) …… 않고 : 원문은 不待人時之敬授인데, 서경 요전(堯典)에 요 임금이 천문역법(天文曆法)을 맡은 관원들에게, “해와 달과 별들을 관측하고 기록하여 인민들에게 절기(節氣)를 삼가 가르쳐 주라.敬授人時고 명하였다고 한다. 예전에 농사를 지을 때에는 농사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24절기를 표시한 역서(曆書)를 반드시 살펴보았다.

[D-007]수확 : 원문은 인데, ‘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회성원집(繪聲園集) 발문

 

 

옛날에 붕우(朋友)를 말하는 사람들은 붕우를  2 의 나라 일컫기도 했고, ‘주선인(周旋人)’이라 일컫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자를 만드는 자가 날개 우() 자를 빌려 벗 붕() 자를 만들었고, 손 수() 자와 또 우() 자를 합쳐서 벗 우() 자를 만들었으니, 붕우란 마치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도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는다.尙友千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너무도 답답한 말이다. 천고의 옛사람은 이미 휘날리는 먼지와 싸늘한 바람으로 변해 버렸으니, 그 누가 장차  2 의 나가 될 것이며, 누가 나를 위해 주선인이 되겠는가. 양자운(揚子雲)은 당세의 지기(知己)를 얻지 못하자 개탄하면서 천년 뒤의 자운(子雲)을 기다리려고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 조보여(趙寶汝)가 이를 비웃으며,

 

내가 지은 태현경(太玄經)을 내가 읽으면서, 눈으로 그 책을 보면 눈이 자운(子雲)이 되고, 귀로 들으면 귀가 자운이 되고, 손으로 춤추고 발로 구르면 각각 하나의 자운이 되는데, 어찌 굳이 천년의 먼 세월을 기다릴 게 있겠는가.”

하였다. 나는 이런 말에 또다시 답답해져서, 곧바로 미칠 것만 같아 이렇게 말하였다.

 

눈도 때로는 못 볼 수가 있고 귀도 때로는 못 들을 수가 있을진대, 이른바 춤추고 발 구르는 자운(子雲)을 장차 누구로 하여금 듣게 하고 누구로 하여금 보게 한단 말인가. , 귀와 눈과 손과 발은 나면서부터 한몸에 함께 붙어 있으니 나에게는 이보다 더 가까운 것이 없다. 그런데도 오히려 믿지 못할 것이 이와 같은데, 누가 답답하게시리 천고의 앞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어리석게시리 천세의 뒤 시대를 굼뜨게 기다릴 수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벗이란 반드시 지금 이 세상에서 구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 나는 회성원집을 읽고서 나도 몰래 속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눈물을 마구 흘리면서 속으로 이렇게 자문자답했다.

 

나는 봉규() 씨와 더불어 이미 이 세상에 같이 태어났으니, 이른바 나이도 서로 같고 도()도 서로 비슷하다 하겠는데, 어찌 서로 벗이 될 수 없단 말인가. 기필코 장차 서로 벗을 삼을진대 어찌 서로 만나볼 수 없단 말인가. 두 지역의 거리가 만리(萬里)인즉, 지역이 멀어서 그런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아아, 이미 서로 만나 볼 수 없는 처지라면 그래도 벗이라 이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봉규 씨의 키가 몇 자인지, 수염과 눈썹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용모도 알 수 없다면 한세상에 같이 사는 사람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장차 어찌해야 할 것인가? 나는 장차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는 식으로 벗을 삼을 것인가?”

봉규의 시는 성대하도다! 장편의 시는 소호(韶頀) 풍악이 일어나듯 하고, 짧은 시들은 옥이 부딪치듯 맑게 울린다. 시가 차분하고 기품이 있으며 따뜻하고 우아함은 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를 보는 것 같고, 깊이 있고 쓸쓸함은 동정호(洞庭湖)의 낙엽 지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그러니 나는 또 이 시를 지은 이가 자운(子雲)인지, 읽는 이가 자운인지 모르겠다.

, 언어는 비록 다르나 문자는 똑같으니, 그가 시에서 즐거워하고 웃고 슬퍼하고 우는 것은 통역을 안 해도 바로 통한다. 왜냐하면 감정을 겉으로 꾸미지 않고, 소리가 충심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장차 봉규 씨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후세의 자운을 기다리는 이를 비웃고, 한편으로는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는 이를 위문할 것이다.

 

 

[C-001]회성원집(繪聲園集) : 청 나라 산서인(山西人) 곽집환(郭執桓 : 1746~1775)의 문집이다. 곽집환은 자가 봉규() · 근정(勤庭)이며, 호가 반오(半迂) · 동산(東山) · 회성원(繪聲園)으로, 시를 잘 지었으며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곽집환은, 홍대용이 1766년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분을 맺게 된 그의 친구 등사민(鄧師閔)을 통해, 자신의 시고(詩稿) 회성원집에 대해 조선 명사들의 서문을 요청하였다. 이에 홍대용과 아울러 연암이 회성원집의 발문을 짓게 되었다. 熱河日記 避暑錄》 《湛軒燕記 鄧汶軒》 《湛軒書 內集 卷3 繪聲園詩跋

[D-001]붕우를 …… 했다 :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交友論)의 첫머리에 나의 벗은 타인이 아니라 곧 나의 반쪽이요 바로 제 2 의 나이다.吾友非他 卽我之半 乃第二我也라고 하였다. 주선인(周旋人)은 보통 시중드는 사람이나 문객(門客)을 뜻하는데, () 나라 이전에는 한때 붕우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晉書 卷99 陶潛傳》 《宋書 卷89 袁粲傳

[D-002]날개 우() …… 것이다 : 마테오 리치의 설을 취한 것이다. 교우론의 원주(原註) () 자는 전서(篆書)로는 로 쓰니 이는 곧 두 손으로서, 꼭 있어야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자는 전서로는 로 쓰니 이는 곧 양 날개로서, 새가 이를 갖추어야 바야흐로 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자에 대해서는 붕() 자의 가차자(假借字)라는 설, ()의 옛글자라는 설, 두 개의 월() , 또는 육() , 또는 패() 자를 합친 것이라는 설 등 정설이 없다. () 자는 손을 뜻하는 우()  2개가 합쳐진 회의자(會意字)이다.

[D-003]싸늘한 바람 : 대본은 영풍(泠風)’인데 이는 표풍(飄風)의 반대말로, 부드러운 미풍(微風)을 뜻한다. 莊子 齊物論 그러나 문맥과 잘 어울리지 않으므로,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 등에 의거하여 냉풍(冷風)’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D-004]양자운(揚子雲) …… 했는데 : 자운(子雲)은 양웅(揚雄)의 자이다. 자신이 저술한 태현경(太玄經)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비웃자, 양웅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후세에 다시 양자운이 나와 반드시 이 저술을 애호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서 87 양웅전(揚雄傳)에는 보이지 않으며, 한유(韓愈)의 여풍숙논문서(與馮宿論文書)에만 나온다. 이어서 한유는, “양웅이 죽은 지 거의 천년이 되었으나 끝내 아직도 양웅이 나오지 않았으니 한탄스럽다.”고 했다.

[D-005]조보여(趙寶汝) : 조귀명(趙龜命 : 1694~1737)으로, 보여(寶汝)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풍양(豐壤)이고 호는 동계(東谿)이다. 재종형(再從兄)인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과 절친하였다. 생원시에 합격한 뒤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에 제수되고, 공조 좌랑(工曹佐郞)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말년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시직(侍直) · 익위(翊衛) 등을 지냈다. 황경원(黃景源)과 함께 당대의 문장가로손꼽힐 만큼 문장에 뛰어났다. 문집으로 동계집(東谿集)이 있다.

[D-006]내가 …… 있겠는가 : 조귀명의 조성언시집서(趙聖言詩集敍) 나로 말하자면 세상에 나를 알아줄 자운이 없는 사람이다. 자운이 없으니 자신의 글을 스스로 보면서 나의 눈으로 하나의 자운을 삼고, 스스로 읊으면서 나의 귀로 하나의 자운을 삼고, 스스로 춤추고 발을 구르면서 나의 손과 발로 각각 하나의 자운을 삼는다.余則無子雲於世者也 無已則自覽以吾目爲一子雲 自諷而以吾耳爲一子雲 自舞自蹈而以吾手足各爲一子雲고 하였다. 東谿集 卷7

[D-007]봉규() : 청장관전서에는 ‘’ 자가  자로 되어 있는데, 같은 글자이다.

[D-008]나이도 …… 비슷하다 : 한유의 사설(師說)에 나오는 말이다. 이 글에서 한유는 당시 사대부들이 사제(師弟)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저 사람과 저 사람은 나이가 서로 같고 도()도 서로 비슷하다.”는 이유로 비웃는 세태를 개탄하였다.

[D-009]소호(韶頀) : () 나라 탕() 임금 때의 궁중음악이라는 설도 있고, ()는 순() 임금 때의 궁중음악, ()는 탕 임금 때의 궁중음악이라는 설도 있다. 옛날 태평성대의 음악을 가리킨다.

[D-010]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 : 낙수는 지금의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하(洛河)를 말한다. 삼국 시대 위() 나라 조식(曹植)의 낙신부(洛神賦)에서 하수(河水)의 여신(女神)을 묘사하기를 경쾌한 모습이 마치 놀라서 날아오르는 기러기 같다.翩若驚鴻고 하였다.

[D-011]동정호(洞庭湖)의 낙엽 지는 소리 : 남북조 시대 북주(北周) 유신(庾信)의 애강남부(哀江南賦) 낙엽 지는 동정호를 떠난다.辭洞庭兮落木고 하였다. 이는 굴원(屈原)의 구가(九歌)  상부인(湘夫人)’ 동정호에 파도 일고 낙엽이 지네.洞庭波兮木葉下라고 한 구절에 전고(典故)를 둔 것이다.

[D-012]문자는 똑같으니 : 원문은 書軌攸同이다. 중용장구  28 장에 지금 천하에 수레는 궤도가 똑같고 서적은 문자가 똑같다.今天下車同軌 書同文고 하였다. 그러므로 원래는 천하가 통일되었다는 뜻이나, 여기서는 중국인과 조선인이 비록 언어는 다르나 같은 문자를 쓴다는 점에 치중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D-013]그가 …… 것은 : 원문은 惟其歡笑悲啼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필세설(筆洗說)

 

 

오래된 그릇을 팔려고 하나 3년 동안이나 팔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그릇의 재질은 투박스러운 돌이었다. 술잔이라고 보기에는 겉이 틀어지고 안으로 말려들었으며, 기름때가 끼어 광택을 가리고 있었다. 온 장안을 다 돌아다녀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다시 부귀한 집안을 다 찾아갔지만 값이 더욱 떨어져 수백에 이르고 말았다.

하루는 누군가가 이것을 가지고서 서군 여오(徐君汝五)에게 보였다. 그러자 여오가 말하기를,

 

이것은 필세(筆洗 붓 씻는 그릇)이다. 이 돌은 복주(福州) 수산(壽山)의 오화석갱(五花石坑)에서 나는 것인데, 옥에 버금가는 것으로 옥돌과도 같다.”

하며, 값의 고하를 따지지 아니하고 즉석에서 8000냥을 내주었다. 그러고는 때를 긁어내니, 예전에 투박스럽게 보였던 것은 바로 물결 모양의 무늬가 있고 쑥잎처럼 새파란 돌이었다. 비틀어지고 끝이 말려든 모양은 마치 말라서 그 잎이 또르르 말린 가을의 연꽃과 같았다. 그래서 마침내 장안의 이름난 그릇이 되었다.

여오는 말하기를,

 

천하의 물건치고 하나의 그릇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꼭 맞는 곳에 사용할 따름이다. 붓은 먹을 머금은 채 딴딴히 굳어지면 모지라지기 쉽기 때문에, 항상 그 먹을 씻어서 부드럽게 해 둔다. 그러므로 이 그릇이 필세가 된 것이다.”

하였다.

무릇 서화나 골동품에는 수장가가 있고 감상가가 있다. 감상하는 안목이 없으면서 한갓 수장만 하는 자는 돈은 많아도 단지 제 귀만을 믿는 자요, 감상은 잘하면서도 수장을 못 하는 자는 가난해도 제 눈만은 배신하지 않는 자이다. 우리나라에는 더러 수장가가 있기는 하지만, 서적은 건양(建陽)의 방각(坊刻)이고 서화는 금창(金閶 소주(蘇州))의 안본(贋本 위조품)뿐이다. 율피색(栗皮色) 화로를 곰팡이가 피었다고 여겨 긁어내려 하고, 장경지(藏經紙)를 더럽혀졌다고 여겨 씻어서 깨끗이 만들려고 한다. 조잡한 물건을 만나면 높은 값을 쳐주고, 진귀한 물건은 버리고 간직할 줄 모르니, 그 또한 슬픈 일일 따름이다.

신라의 선비들은 당 나라에 가서 국학(國學)에 들어갔으며, 고려의 선비들은 원() 나라에 유학하여 제과(制科)에 급제했으므로 안목이 트이고 흉금을 넓힐 수 있었으니, 그들은 감상학(鑑賞學)에 있어서도 아마 그 시대에 출중했을 터이다. 우리 왕조 이래로 3, 4백 년 동안에 풍속이 갈수록 촌스러워졌으니, 비록 해마다 북경을 내왕하였으나 부패한 약재나 저질의 비단 따위나 사올 뿐이었다. 우하(虞夏) · () · ()의 옛날 그릇이나 종요(鍾繇) · 왕희지(王羲之) · 고개지(顧愷之) · 오도자(吳道子)의 친필이 어찌 한 번이라도 압록강을 건너온 적이 있었으랴.

근세의 감상가로는 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를 일컫는다. 그러나 재사(才思 재기)가 없으니 완미(完美)하다고는 못 할 것이다. 대개 김씨는 감상학을 개창한 공이 있으나, 여오(汝五)는 꿰뚫어보는 식견이 있어 눈에 닿는 모든 사물의 진위를 판별해 내는 데다가, 재사까지 겸비하여 감상을 잘하는 자라 하겠다.

여오는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웠다. 문장을 잘 짓고 해서(楷書)로 소자(小字)를 잘 쓰며, 아울러 소미(小米)의 발묵법(潑墨法)에도 능숙하고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다. 봄가을로 틈나는 날에는 정원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그곳에서 향을 피우고 차를 음미하였다. 일찍이 집이 가난하여 수장하지 못하는 것을 못내 한탄했고, 또 시속의 무리들이 그로 인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할까 걱정하곤 하였다. 그 때문에 답답해하면서 내게 말하기를,

 

나더러 좋아하는 물건에 팔려 큰 뜻을 상실했다玩物喪志고 나무라는 자는 어찌 진정 나를 아는 자이겠는가. 무릇 감상이란 것은 바로 시경(詩經)의 가르침과 같네. 곡부(曲阜)의 신발을 보고서 어찌 감동하여 분발하지 않을 자가 있겠으며, 점대(漸臺)의 위두(威斗)를 보고서 어찌 반성하여 경계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하기에, 나는 그를 위로하기를,

 

감상이란 구품중정(九品中正)의 학문일세. 옛날 허소(許劭)는 인품이 좋고 나쁜 것을 탁한 경수(涇水)와 맑은 위수(渭水)처럼 분명히 판별했으나 당세에 허소를 알아주는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네.”

하였다.

지금 여오는 감상에 뛰어나서, 뭇사람들이 버려둔 가운데서 이 그릇을 능히 알아보았다. 아아, 그러나 여오를 알아주는 자는 그 누구이랴?

 

 

필세를 빌려서 자신의 문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다.

 

[D-001]수백 : 화폐 단위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당시의 물가로 미루어 보면 수백 문(), 즉 너덧 냥이 아닌가 한다. 뒤에 나오는 ‘8000’ 역시 8000,  80냥이 아닌가 한다.

[D-002]서군 여오(徐君汝五) : 서상수(徐常修 : 1735~1793), 여오는 그의 자의 하나이다. 호는 관재(觀齋) · 관헌(觀軒) 등이다. 서얼 출신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은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에 그쳤다.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 백탑(白塔) 서쪽의 관재(觀齋)와 도봉산 서쪽의 별장인 동장(東庄)을 소유하였으며, 이덕무에게도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D-003]복주(福州) 수산(壽山)의 오화석갱(五花石坑) : 복주는 중국의 복건성(福建省)에 속한 부(), 그 동북쪽에 있는 수산은 아름다운 옥돌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수산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오화석갱이 있는데, 돌이 다섯 가지 색을 띠어 그렇게 명명되었다고 한다.

[D-004]값의 …… 아니하고 : 원문은 不問値高下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5]건양(建陽)의 방각(坊刻) : 방각은 방본(坊本)과 같은 말로, 민간의 서점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인쇄한 조잡한 서적을 말한다. 송 나라 때 복건성 건양현에서 인쇄한 방각본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D-006]율피색(栗皮色) …… 한다 : () 나라 선덕(宣德) 연간에 강서성(江西省) 경덕진(景德鎭)의 관요(官窯)에서 만든 유명한 향로인 선덕로(宣德爐)의 빛깔은 밤색栗色, 가지 껍질색茄皮色, 팥배나무색棠梨色, 갈색(褐色), 장경지색(藏經紙色)의 다섯 등급으로 나누는데, 그중 장경지색을 최고로 친다고 한다. 장경지(藏經紙)는 밀납을 먹여 광택이 나는 짙은 황색(黃色)의 견지(繭紙)인데, 장경(藏經)이 많기로 유명한 절강성(浙江省) 금속사(金粟寺)의 장경이 이 종이에 쓰여졌기 때문에 장경지라 부른다.

[D-007]제과(制科) : 제거(制擧)라고도 하며, 황제가 임시로 조령(詔令)을 내려 실시하는 부정기적인 과거(科擧)를 말한다. 고려 말에 최해(崔瀣) · 안축(安軸) · 이곡(李穀) · 이색(李穡) 등이 제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D-008]우하(虞夏) : () 임금의 치세와 하() 나라 왕조를 함께 묶어서 부른 말이다.

[D-009]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 : 김광수(金光遂 : 1696~?), 상고당은 그의 호이다. 조선후기의 화가이자 서화고동(書畫古董) 감식가 및 수장가이다. 그의 자는 성중(成仲)이고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이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의 아들이다. 진사 급제 후 벼슬은 인제 군수를 지냈다. 연암집 7 ‘관재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觀齋所藏淸明上河圖跋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D-010]소미(小米)의 발묵법(潑墨法) : 소미는 북송 때의 유명한 서화가 미불(米芾)의 아들로서 그 역시 뛰어난 서화가였던 미우인(米友仁 : 1086~1165)을 가리킨다. 발묵법은 선을 사용하지 않고 먹을 뿌리듯이 하여 번져나간 먹 자국만으로 산수를 표현하는 수법을 말한다. 미불과 미우인 부자는 화면에 이른바 미점(米點)이라는 횡으로 길고 큰 먹점을 겹쳐 찍는 기법으로 안개 짙은 산수를 표현하는 독특한 화풍을 창시했는데, 이후 문인 화가들이 수묵 산수화를 그릴 때 이 기법을 즐겨 따랐다.

[D-011]시경(詩經)의 가르침 : 시경을 배우면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효과가 있음을 말한다. 주자(朱子) 시집전(詩集傳)의 서문에서, 시경의 시는 감정을 말로 표현한 것인데 감정에는 사()도 있고 정()도 있어 시에도 좋은 시가 있고 나쁜 시가 있으나, 좋은 시를 읽고서 선을 행하고 나쁜 시를 읽고서 악을 경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D-012]곡부(曲阜)의 신발 :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山東省) 곡부에는 후손들이 간직해 온 공자의 신발 등 유품들이 있었다고 한다. 동관한기(東觀漢記) 동평헌왕창(東平憲王蒼) () 나라 공씨(孔氏)들이 아직까지도 중니의 수레, 가마, (), 신발을 간직하고 있으니, 훌륭한 덕을 지녔던 사람은 그 영광이 멀리까지 미침을 밝힌 것이다.” 하였다.

[D-013]점대(漸臺)의 위두(威斗) : 점대는 중국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에 있는 대() 이름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건장궁(建章宮)을 짓고는 태액지(太液池) 안에 점대를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무려 20여 장()이었다. 漢書 卷25 郊祀志下 왕망(王莽)이 유현(劉玄)의 군사에게 쫓겨서 점대에 이르러 살해되었는데, 왕망은 쫓기는 와중에도 부명(符命)과 위두(威斗)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위두는 왕망이 위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만든 기물(器物), () 5()으로 만들었고 길이는 2 5촌이었으며, 모양이 북두칠성과 유사했다고 한다. 漢書 卷99 王莽傳

[D-014]구품중정(九品中正)의 학문 : 구품중정은 위진 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의 관리 선발제도로서, 각 고을에 중정관(中正官)을 두어 그 고을 인사들을 재능에 따라 9품으로 나누어 평가해서 조정에 천거하게 하였다. 여기서는 인재를 엄격히 품평하듯이 골동품과 서화를 품평하는 것도 전문 분야라는 뜻으로 썼다.

[D-015]허소(許劭) …… 판별했으나 : 허소는 후한 때 사람으로, 종형(從兄) 허정(許靖)과 함께 당세에 명성이 있었다. 특히 향리(鄕里)의 인물을 품평하기를 좋아해서 달마다 사람들을 품평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일러 월단평(月旦評)이라 했다 한다. 後漢書 卷68 許劭列傳 경수(涇水)는 위수(渭水)의 지류로 모두 섬서성에 있다. 경수가 맑고 위수가 탁하다는 설도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서얼 소통(疏通)을 청하는 의소(擬疏)

 

 

삼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하늘이 인재를 내린 것이 그토록 다르지 않사옵니다. 그러므로 전얼(顚蘖)과 변지(騈枝)도 고루고루 비와 이슬에 젖고, 썩은 그루터기 나무나 더러운 두엄에서도 영지(靈芝)가 많이 나며, 성인(聖人)이 태평의 치세로 이끄실 적에는 귀하고 천한 선비가 따로 없었습니다. 시경

 

문왕(文王)이 장수를 누리셨으니 어찌 인재를 육성하지 않았으리오.文王壽考 遐不作人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왕국이 안정되었으며, 크나큰 명성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아, 우리 왕조가 서얼의 벼슬길을 막은 지 300여 년이 되었으니, 폐단이 큰 정책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옛날을 상고해도 그러한 법이 없고, 예법과 형률을 살펴봐도 근거가 없습니다. 이는 건국 초기에 간사한 신하들이 기회를 틈타 감정을 푼 것이 대번에 중대한 제한 규정으로 되어 버렸으며, 후대에 요직에 있던 인사들이 공론을 핑계 대어 주장함으로써 명성이 높아지자 오류를 답습하여 하나의 습속을 이루었고, 세대가 차츰차츰 멀어지면서 구습을 따르고 개혁을 하지 못했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는 오로지 문벌만을 숭상하여 인재를 초야에 버려둔다는 탄식을 초래하였으며, 사가(私家)에서는 한갓 명분만을 엄히 하여 마침내 인륜을 무너뜨리는 단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지족(支族 먼 조상 때 갈라진 일족)에게서 양자를 입양하니 대개 임금을 속이는 죄를 범하는 것이요, 모계를 더 중시하는 셈이니 도리어 본종(本宗)을 높이는 도리를 경시하는 것입니다.

아아, 적자와 서자 사이에 비록 차등이 있다 해도 나라의 체통에는 이로울 것이 없으며, 구분과 한계가 너무 각박하여 가족간에 애정이 적어지는 것입니다. 무릇 자기 집안의 서얼이야 비천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온 세상에서 배척받을 이유는 없으며, 한 문중의 명분은 의당 엄히 해야겠지만 온 조정에서까지 논할 바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명분의 논의를 고수하다 보니 벼슬길을 막는 관례는 더욱 심해지고, 조종(祖宗)의 제도라 핑계 대다 보니 갑자기 혁신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까지 안일하게 세월만 보내면서 개혁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옛날에도 상고할 데가 없고 예법에도 근거가 없는데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고질이요 깊은 폐단이 되고 있기에, 정치하는 올바른 방법을 깊이 아는 선정(先正 선대의 유현(儒賢))과 명신(名臣)들은 모두 이를 급선무로 여기고, 공정한 도리를 확대하여 반드시 벼슬길을 터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경연(經筵)에서 아뢰고 차자(箚子)로써 논한 분들이 끊이지 않고 나왔던 것입니다.

역대 임금들께서는 공정한 원칙을 세워 통치의 법도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며, 벼슬자리에는 어진 사람만 임명하고 직무를 나누어 맡기는 데는 능력만을 고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두를 공정하게 대하였으니, 어찌 또 모계의 귀천(貴賤)을 가지고 차별을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조정에 임하여 널리 묻고, 그 처지를 애통해하며 불쌍히 여겨, 변통하여 벼슬길을 열어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세족(世族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의 권세가 막중하고 언론을 아래에서 좌우하는 까닭에, 명예로운 벼슬과 화려한 경력을 본래부터 자기네가 차지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여러 갈래로 갈림길이 생기고 권한이 쪼개질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똑같은 세족의 자손이라도 정밀한 저울로 눈금을 재듯이 따지니 정주(政注)를 한 번 거치고 나면 수치와 분노가 마구 몰려들고 지탄과 알력이 벌떼처럼 일어나는데, 하물며 서얼은 명분이 굳어지고 행동에 구애를 받아 세상에서 천대받은 지 오래이니, 대등하게 인정해 주려 하지 않는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진실로 제 가문만을 오로지 위하고 사욕을 달성하려는 편파적인 의도이지, 공공을 위하는 통치의 보편적 도리는 결코 아닙니다. ()이 그 잘못됨을 남김없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무릇 서얼과 적자(嫡子)는 진실로 차등이 있지만, 그 가문을 따져 보면 그들 역시 선비 집안입니다. 저들이 진실로 국가에 대하여 무슨 잘못이 있다고, 벼슬길을 막고 폐기하여 저들로 하여금 벼슬아치의 대열에 끼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군자가 없으면 야인(野人)을 다스릴 수 없고, 야인이 없으면 군자를 먹여살릴 수 없다.”

하였으니, 대범 군자와 야인은 지위를 들어 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명덕(明德)을 지녔으면서도 비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천거하라고 한 것明明揚側陋은 요() 임금이 관리를 임용한 준칙이요, ‘어진 이를 기용하는 데 출신을 따지지 않은 것立賢無方은 탕() 임금이 정치적 안정을 구한 방도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 · () · () 삼대(三代)의 시대에도 이미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있었지만, 인재를 천거할 때에는 본시 귀천의 차별을 두지 않았고 어떤 부류인지도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왕조의 이른바 서얼은 대대로 벼슬이 끊어지지 않은 혁혁한 문벌인데, 어찌 모계가 비천하다 하여 고귀한 본종(本宗)을 싸잡아 무시해 버릴 수 있겠습니까.

() 나라와 당() 나라 이래로 차츰 벌열을 숭상하였으나, 그런데도 강좌(江左)의 사대부들은 도간(陶侃)을 배척하지 않았고 왕씨(王氏)와 사씨(謝氏) 같은 명문 귀족들도 주의(周顗)를 동류로 끼워 주었으며, 소정(蘇頲)은 바로 소괴(蘇瓌)의 얼자(孼子)이지만 지위는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이소(李愬)는 바로 이성(李晟)의 얼자로되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르렀으며,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은 송 나라의 어진 정승이 되었고, 호인(胡寅) · 진관(陳瓘) · 추호(鄒浩)는 당세의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서얼이라 하여 벼슬길을 막지 않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진실로 남의 문벌을 따질 적에는 단지 그 부계만을 중시하고 그 모계는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계를 중시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본종을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계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부계가 몹시 변변찮을 경우, 현달한 문벌이라고 칭송이 자자할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고려 시대로 말하더라도 정문배(鄭文培)는 예부 상서(禮部尙書)가 되었고, 이세황(李世璜)은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었고, 권중화(權仲和)는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도 도평의사(都評議使)가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왕조의 법으로 따진다면 도간이나 주의 같은 어진 이도 장차 사대부에 끼지 못하고, 소정이나 이소 같은 인재로도 장차 장수와 정승이 될 수 없고, 한기 · 범중엄 · 호인 · 진관 · 추호 같은 사람들도 모두 장차 억눌리고 버림받아, 기껏해야 문관으로는 교서관(校書館), 음직(蔭職)으로는 전옥서(典獄署)에나 자리를 얻어, 지위는 유품(流品 잡다한 하급 관직)을 벗어나지 못하고 녹봉은 승두(升斗 소량의 쌀)에 지나지 않을 터이니, 공훈과 업적, 지조와 절개가 장차 당세에 혁혁히 드러나고 먼 후세까지 아름다운 명성을 남길 수가 없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말씀드린 옛날을 상고해도 그러한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서(經書)에 이르기를,

 

서자는 장자(長子)의 상() 3년의 복()을 입을 수 없다.”

하였고, 정현(鄭玄)의 주()에 이르기를,

 

서자란 아비의 뒤를 잇는 자의 동생이다. ()라 말한 것은 구별하여 거리를 두자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무릇 서자는 비록 적자와 어머니가 같더라도 끊은 듯이 구별하여 거리를 두는 것이 이와 같이 엄했는데, 천한 첩자(妾子)의 경우는 서자보다 더욱 신분이 낮으나 다시 서자와 구별함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란 차례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통(宗統)은 근본을 둘로 나누지 아니하고 차등은 거듭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부모에게 비자(婢子) 및 서자와 서손(庶孫)이 있어 이들을 몹시 사랑했다면, 비록 부모가 돌아가셨을지라도 종신토록 이들을 공경하여 변함이 없어야 한다.”

하였고, 진호(陳澔)의 주에는,

 

비자(婢子)는 천한 자의 소생이다.”

하였습니다. 무릇 부모가 사랑했던 이라면 첩의 자식이라도 오히려 끌어들여 중히 여기고, 감히 소홀히 하거나 도외시하지 못했던 것은 또한 근본을 중히 여기고 종통을 높이는 까닭이었습니다. 회전(會典)에 이르기를,

 

무릇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함에 있어 적자(嫡子)나 적손(嫡孫)이 없을 경우에는 서장자(庶長子)가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한다.”

하였으니, 서장자란 첩자(妾子)를 이른 것입니다.

무릇 예란 헷갈려서 의혹스러운 경우를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칭을 바로잡고 신분을 정하는 것이니, 비록 어머니가 같은 적제(嫡弟)라도 오히려 구별하여 거리를 두었던 것입니다. 무릇 예란 남을 후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지(本支)를 중히 여기는 것이니, 천첩의 자식이라도 오히려 끌어안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회전에서 아비의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하는 데 적서(嫡庶)로써 구애를 삼지 않은 까닭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주관(周官 주례(周禮))은 주공(周公)이 정한 관직 제도를 기록한 책이며, 한서(漢書)의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는 모든 관직을 구분해 놓은 것인데, 서얼의 벼슬길을 막는 문구는 대충 보아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말씀드린, ‘예법과 형률을 살펴봐도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듣자온대 예로부터 전해지기를, 서얼의 벼슬길을 막은 데는 대개 유래가 있다고 합니다. 건국 초기의 죄상(罪相) 정도전(鄭道傳)은 서얼의 자손인데,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이 정도전이 총애하던 종에게 욕을 본 일이 있어 그 원수를 갚을 길만 생각하고 있다가, 정도전이 패망하게 되자 서선이 마침내 명분의 논의를 견강부회하여 죽은 뒤에나마 한 번 욕을 본 데 대한 감정풀이를 한 것이었으나, 제 말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그 법이 반드시 행해지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야흐로 이때 정도전이 죄를 지어 막 처형당한 때다 보니, 그 말이 먹혀들기 쉬웠고 그 법이 성립되기 쉬웠던 것입니다. 찬성(贊成) 강희맹(姜希孟), 안위(安瑋) 등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처음 만들면서 조문을 미처 다듬을 겨를이 없어, 서얼에 대한 과거 금지와 관직 진출 금지의 주장이 조문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하면서 유자광(柳子光)에 대한 사림파(士林派)의 원망이 잔뜩 쌓였는데, 분풀이할 곳이 없자 서얼의 벼슬길을 막아야 한다는 논의가 더욱 엄중하고 심각해진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분풀이하게 만든 상황이 참으로 또한 슬프다 하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자고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찌 유자광 같은 무리에게서만 나왔겠습니까. 불행히도 한 번 서얼 가운데서 나온 것인데, 유자광 하나로 인해 서얼의 벼슬길을 모조리 막아 버리고 말았으니, 만약에 불행하게도 양반 자손 중에서 난신적자가 뒤이어 나왔을 경우 또 장차 무슨 법으로 처리하시겠습니까?

아아, 유학과 문장으로 추앙받을 만하고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들이 계속 배출되었는데도, 한 번 전락(轉落)하여 명분의 논의에 제한을 받더니, 거듭 전락하여 문벌 숭상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송익필(宋翼弼) · 이중호(李仲虎) · 김근공(金謹恭)의 도학(道學), 박지화(朴枝華) · 이대순(李大純) · 조신(曺伸)의 행의(行誼 덕행)와 어무적(魚無迹) · 어숙권(魚叔權) · 양사언(楊士彦) · 이달(李達) · 신희계(辛喜季) · 양대박(梁大樸) · 박호(朴淲)의 문장과, 유조인(柳祖認) · 최명룡(崔命龍) · 유시번(柳時蕃)의 재주는 위로 임금의 정책을 보필할 수 있고 아래로 한 시대의 표준이 될 만한데도 끝내 오두막집에서 늙어 죽었으며, 때로는 간혹 하찮은 녹을 받은 사람도 있었으나 보잘것없이 미관말직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비록 분수를 지키고 처지대로 살면서 액운을 편히 여기며 근심하지 않더라도, 성왕(聖王)이 관직을 마련하고 직책을 나누어 어진 이를 예우하고 능력 있는 이를 임용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이산겸(李山謙), 홍계남(洪季男) 같은 경우는 충의로 떨치고 일어나 의병을 규합하여 왜적을 쳐부쉈으며, 권정길(權井吉)은 피를 토하며 군사들에게 훈시하고 남한산성에 지원하러 들어갔으니, 그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뜻은 오히려 뭇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떨치고 일어섬이 저렇듯 우뚝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시대가 평화롭고 세상이 편안해지고 나자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잊어 그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옛사람의 이른바 쓸모 있는 자들은 녹을 주어 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이에 대하여 개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근래의 일로 보더라도, 홍림(洪霖)은 일개 잔약한 서얼로서 늘그막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막료(幕僚)가 되어 처량하게도 호구지책을 삼았는데, 갑자기 국난에 목숨을 바쳐 늠름히 열사(烈士)의 기풍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표창과 증직의 은전을 아끼지 않아 비록 비상한 관직을 추증(追贈)하기는 했으나, 그것보다는 그가 살아서 백부(百夫)의 장()이 되어 우뚝이 성에 임했더라면, 변방을 굳건히 하고 환란을 막아냄이 어찌 막부(幕府)에서 한 번 죽는 것뿐이었겠습니까.

아아, 벼슬길을 막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배척하고 관계를 끊어 버려, 본디 가지고 있는 윤상(倫常 오륜)을 스스로 일반인들 앞에 내세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은애(恩愛)는 부자 사이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의리는 군신 관계보다 큰 것이 없는데 임금에게 가까이 할 길이 없으며, 늙은이가 말석에 앉게 되어 학교에는 장유(長幼)의 차서가 없게 되고, 더불어 동류가 되기를 부끄러워하는 바람에 향당(鄕黨)에서는 붕우(朋友)의 도의가 없어졌습니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을 것인저!”

하였으니, 아들은 아비를 아비로 대하고, 아비는 아들을 아들로 대하며, 형은 형 노릇 하고 아우는 아우 노릇 하는 것이 바로 명분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륜상의 존칭으로는 부형(父兄)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지금의 서얼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들이 아비를, 아우가 형을 오히려 감히 직접 가리켜 제대로 부르지 못하니, 저절로 종이 그 상전을 대하는 것과 같아졌습니다. 이른바 명분이란 적()과 서()를 이름인데, 어찌 서로 부르는 때에 아비라거나 형이라 하지 못하고, 자신을 낮추어 천한 노복들과 같이 해야만 명분을 엄히 하고 적서를 구분한다 하겠습니까.

지금의 서얼들은 낭관(郞官)도 오히려 하지 못하는 처지인데 시종신(侍從臣)을 어찌 감히 바라겠습니까. 아무리 충성을 바칠 마음을 지녔을지라도 임금을 보필하는 직책은 맡을 수 없고, 아무리 국가를 경영할 재주를 품었을지라도 포부를 펼 곳이 없습니다. 인의(引儀)로서 여창(臚唱)할 때에는 잠깐 조신(朝臣)의 대열에 순서대로 서지만 끝내 노복이나 다름 없으며, 해당 관서의 윤대(輪對)를 통해서 간혹 임금을 가까이에서 뵙기도 하지만 서먹서먹함을 면치 못합니다. 그리하여 관직에 나아가도 감히 대부(大夫)가 하는 일은 하지 못하고, 물러나면 차마 평민들의 생업에 종사할 수도 없으니, 이른바 나라의 고신(孤臣)이요 집안의 얼자로 마음에 병이 들어 마음가짐이 늘 조심스러운 자들입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태학(太學)에 들어가면 치() 순서로써 한다.”

하였으니, ‘치 순서로써 한다는 것은 나이를 중시한다는 것이고, ()에 이르기를,

 

잔치 자리에서 모()로써 구별하는 것은 연치(年齒)의 순서를 정하자는 것이다.”

하였으니, ‘()’란 머리털의 흑백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의 서얼들은 태학(太學 성균관)에 들어갈 경우 나이 대접을 받지 못하여, 황발(黃髮)과 태배(鮐背)의 노인이 아래에 앉고, 겨우 관례를 마친 자들이 도리어 윗자리에 앉습니다. 무릇 태학은 인륜을 밝히자고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자의 원자(元子 맏아들)와 중자(衆子 나머지 아들들)로부터 제후의 세자(世子)까지도 오히려 태학에서 나이 순서를 지키는 것은 천하에 공손함을 보이기 위함이며, 천자가 태학을 순시할 적에 조언을 구하고 음식을 대접하는 예의가 있었으니 이는 효도를 천하에 넓히기 위함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서얼들이 태학에서 나이에 따른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옛날 어진 임금의 효제(孝悌)를 넓히는 도리가 아닙니다.

()에 이르기를,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

하였고, 맹자는 말하기를,

 

벗이란 그의 덕을 벗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 많다고 으스대지 않고 신분이 높다고 으스대지 않고 형제를 믿고 으스대지 않고서 벗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귀천이 비록 다를망정 덕이 있으면 스승이 될 수 있고 나이가 같지 않더라도 인()을 도울 경우에는 벗이 될 수 있다는 말인데, 더구나 서얼은 본디 모두 양반의 자제들입니다. 그들이 아름다운 재주나 현명함과 능력이 없다면 그만이겠으나, 만일 그들이 진실하고 곧고 들은 것이 많아 재주와 덕이 나보다 낫다면 또한 어찌 서얼이라 해서 그들과 벗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겠습니까.

그런데도 서얼은 양반과 서로 어울려도 벗은 할 수 없고, 서로 친해도 나이 대접을 받을 수 없으며, 충고하거나 책선(責善)하는 도리도 없고, 탁마(琢磨)하고 절시(切偲)하는 의리도 끊겼으며, 말을 하는 때에는 예절이 너무 까다롭고, 만나서 예의를 차리는 즈음에도 원망과 비방이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서얼들의 경우 오륜(五倫) 가운데 끊어지지 않고 간신히 남아 있는 것은 부부유별(夫婦有別) 한 가지뿐입니다.

아아, 재주 있고 어진 이가 버려져 있어도 근심하지 않고 인륜이 무너져도 구제하지 않으면서도,

 

서얼 중에는 재주 있고 어진 이가 없다.”

하고, 또한

 

이렇게 해야만 명분이 바로잡힌다.”

하니, 이것이 어찌 이치라 하겠습니까. 무릇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이는 것은 할아비를 계승하여 중책(重責)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옛날에 석태중(石鮐仲)이 적자가 없고 서자만 여섯 명이 있어, 뒤를 이을 자를 점쳤을 때 기자(祁子)에게 길조가 나타났으니, 이는 어진 이를 가린 것이었습니다. 당 나라의 법률에,

 

무릇 적자를 세움에 있어 법을 어긴 자는 1년의 도형(徒刑)에 처한다.”

고 되어 있고, 이에 대하여 뜻을 풀이한 자가 말하기를,

 

적처(嫡妻)의 장자가 적자가 되는데, 부인의 나이가 50이 넘어서 다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하게 될 경우에는 서자를 세워 적자로 삼기를 허락하되, 서자 중의 맏이를 세우지 않으면 형률이 또한 같다.”

하였으니, 이는 근본이 어지러워짐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대명률(大明律)에도,

 

무릇 적자를 세움에 있어 법을 어긴 자는 장()으로 다스린다. 적처의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자식이 없는 자는 서장자(庶長子)를 세울 수 있게 하고, 서자 중의 장자를 세우지 않는 자는 죄가 같다.”

하였으며, 경국대전에는,

 

적처와 첩에 모두 아들이 없어야만 같은 종족의 지자(支子 적장자가 아닌 아들)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는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관에서 작성한 문서와 양가(兩家)에서 작성한 문서에 명백한 증거와 근거가 있은 후에 마침내 임금에게 아뢸 수 있는 것은, 조명(造命)을 신중히 여긴 까닭입니다.

세간의 사대부들이 제가 보고 들은 것에만 익숙하다 보니 대다수가 잘못된 규례를 답습하여, 본처에게 아들이 없으면 아무리 첩들의 자식이 많더라도 도리어 가문을 위한 개인적 타산에서 정을 끊고 사랑을 억누르고서, 임금에게 아뢰는 글을 엉터리로 지어 지족(支族) 중에서 양자를 들여오되 촌수가 멀고 가까운 것도 가리지 않는 실정입니다.

, 아비가 전하고 아들이 이어받으니 혈맥(血脈)이 계승되고, 조부의 제사를 손자가 받드니 정기(精氣)가 서로 유사하여 감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갓 적서의 구분에 얽매여, 혹은 촌수가 이미 멀어진 후손을 멀리서 데려다가 조상의 혼령을 받드는 경우도 있으니, 이는 바로 옛사람이 말한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술병을 들고 술을 따라 강신(降神)하게 한다 한들 무슨 황홀(怳惚)이 있겠으며, 신령의 향취가 진동하여 애통한 마음이 생긴다 한들 어찌 정기(精氣)를 교접(交接)할 수 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고 두 분을 그리워한다.”

했으니, ‘두 분이란 부모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을 극진히 하면 마치 존재하시는 듯하고, 정성을 극진히 하면 마치 나타나신 듯하다.” 한 것은 군자가 제사 지내는 법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까운 사람을 두고 먼 데서 구하여 그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어찌 신령이 아련히 나타나 존재하시는 듯할 턱이 있겠습니까. 천리(天理)를 거스르고 인정에 위배되며, 예법으로 따지면 조상을 멀리하는 것이요, 법률로 따지면 임금을 속이는 것이니, 신은 일찍이 이를 통한하여 마지않았습니다.

무릇 명분의 논의가 승세하고 습속이 변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한 집안 안에서도 구별하고 제한하는 법이 거의 남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심지어는 부형(父兄)조차 그 자제(子弟)를 노예처럼 부리고, 종족들은 친척으로 대하기를 부끄러워하여, 족보에서 빼 버리기도 하고 항렬 이름자를 달리하기도 합니다. 이는 단지 외가쪽에만 치중하느라 도리어 본종(本宗)을 가벼이 여기는 일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륜상으로 너무나도 각박하고 몰인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는 조정에 건의하기를,

 

우리 왕조는 인물이 중국에 비하여 적은데, 또 적서를 분별하는 법마저 있습니다. 무릇 신하로서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이 어찌 적자냐 서자냐에 따라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인재를 뽑아 쓰는 길이 너무도 편협하니 신은 그윽이 통탄하는 바입니다. 청하건대 서얼 중에서도 인재를 가려서 등용하되, 직위가 높아진 뒤에 혹 명분을 어지럽히는 죄를 지을 경우에는 엄격히 법률을 적용하소서.”

하였습니다.

선조(宣祖) 때에 미쳐 신분(申濆)  1600명이 소장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자 임금께서 하교하기를,

 

해바라기가 태양을 따라 도는 것은 곁가지라도 다를 바가 없다. 신하로서 충성하고자 하는 뜻이 어찌 적자에게만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선정신 이이(李珥)가 제일 먼저 서얼을 통용할 것을 건의하여 비로소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고, 선정신 성혼(成渾)과 선정신 조헌(趙憲)이 연달아 봉사(封事 밀봉한 상소)를 올려 서얼을 청요직(淸要職)에도 통용할 것을 각기 청하였습니다.

인조 때는 고()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이 부제학으로서 홍문관의 동료 심지원(沈之源) · 김남중(金南重) · 이성신(李省身)과 더불어, 의견을 구하는 성지(聖旨)에 호응하여 연명(聯名)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는데 그 내용이 몹시 절실하였습니다. 또한 고 상신 장유(張維)도 소를 올려 그 일에 대해 논하니, 임금께서는 조정에서 논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고 상신 김상용(金尙容)이 이조 판서로서 회계(回啓)하기를,

 

하늘이 인재를 낸 것은 적자든 서자든 차이가 없는바, 서얼 금고법은 고금의 역사에 없는 것입니다. 옥당(玉堂 홍문관)의 차자(箚子)를 통해서 여론을 알 수 있습니다. 묵은 폐단을 깨끗이 개혁하고자 하여 성지에 호응해 간절히 아뢰었으니,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의견을 수합하게 한 뒤 정탈(定奪 채택)하소서.”

하여, 사안이 비변사로 내려졌습니다. 고 상신 이원익(李元翼) · 윤방(尹昉) 등이 의견을 올리기를,

 

서얼을 박대하는 것은 천하 만고에 없는 법이니, 유신(儒臣 홍문관 관원들)이 아뢴 차자는 대단히 식견이 있습니다.”

하였고, 고 상신 오윤겸(吳允謙)은 의견을 올리기를,

 

서얼의 벼슬길을 막는 것은 고금 천하에 없는 법이니, 조정에서는 어진 이를 등용하고 인재를 거두어 쓸 따름입니다. 직위가 높아진 후에 명분을 문란시킬 경우에는 국법이 본디 엄중하니 염려할 바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호조 판서 심열(沈悅), 순흥군(順興君) 김경징(金慶徵), 공조 판서 정립(鄭岦), 판결사(判決事) 심집(沈諿), 동지중추부사 정두원(鄭斗源), 호군(護軍) 권첩(權怗)은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고, 도승지 정온(鄭蘊)도 상소하여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은 일찍이 의소(擬疏)를 지어 정도전도 오히려 대제학이 되었던 사실을 끌어대면서, 대개 서얼의 벼슬길을 제한하는 법은 중세(中世)에 나온 것이므로 모두 벼슬길을 열어주기를 청하였으니, 이 상소를 끝내 올리지는 못했으나 우암집(尤庵集)에 실려 있습니다. 또 선정신 박세채(朴世采)는 아뢰기를,

 

서얼 중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기재(奇才)가 있을지라도 등용될 길이 없으니, 크게 변통하기를 청합니다. 성상께서는 유행하는 풍속에 구애되지도 마시고 상규(常規)에 얽매이지도 마시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이치를 자각하시고 결단하여 시행하소서.”

하였습니다. () 지돈녕부사 신() 김수홍(金壽弘)은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으나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했고, () 판서 이무(李袤)는 대사헌으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으나, 도승지 신() 김휘(金徽)가 물리쳐서 상소가 임금께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 뒤 고 상신 최석정(崔錫鼎)이 이조 판서로서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논의한 지 오래였는데도 시행되지 못했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 오직 가문만을 위하고 제 이익을 이루려는 계획이 깊어질수록 명분의 논의를 더욱 굳게 지키고, 벼슬에 등용하거나 벼슬을 막는 권한이 커지자 도리어 조종(祖宗)의 법을 핑계 대어, 인정을 억누르고 은애(恩愛)를 저버림으로써 본종을 중히 여기는 것을 멸시하고, 친한 사람을 버리고 소원한 사람을 취함으로써 고의로 임금을 속입니다. 잘못을 답습하는 것이 습속을 이루었는데도 인륜을 무너뜨리는 것인 줄 모르고, 정밀한 저울로 달아 눈금을 재듯이 문벌을 따지면서 인재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도 걱정 하지 않습니다.

명분의 주장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남김없이 변론했으니, 청컨대 옛 제도를 혁신하는 논의에 대해서 다시 남김없이 말씀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무릇 법이란 오래가면 폐단이 생기게 마련이고, 일이란 막히면 통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준수해야 할 때에 준수하는 것이 바로 계술(繼述)이거니와, 변통해야 할 때 변통하는 것도 역시 계술이니, 굳게 지키거나 혁신하는 것을 오직 때에 맞도록 한다면 그 의의는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이 뭇 백성을 낳으시니 너의 극()이 아님이 없다.”

하였고, 서경 대우모(大禹謀)에 이르기를,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그 중()을 잡으리라.”

하였습니다. 무릇 이란 이치의 극진함이요, ‘이란 의리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서경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치우침도 없고 기울어짐도 없으면 왕도(王道)가 평탄하리라.”

하였으니, 이를 두고 이름입니다.

더구나 서얼 금고법은 옛날을 상고해 봐도 그러한 법이 없고, 예법과 형률을 뒤져봐도 근거가 없습니다. 처음에 한 사람의 감정 풀이에서 나온 것일 뿐 본시 건국 당시 정한 제도가 아니었으며, 100년이 지난 뒤에 선조(宣祖)께서 비로소 과거에 참여하는 길을 터 주었고, 인조(仁祖) 때 미쳐 또 삼조(三曹)의 관직을 허락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면 역대 임금들께서 혁신하고 변통하려 한 성의(聖意)를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아아, 서얼로 태어나면 세상의 큰 치욕이 되어 버리니, 현요직(顯要職 지위가 높고 중요한 벼슬)을 금지하여 조정과 멀어지고, 명칭을 제대로 가리켜 부르지 못하여 가정에서도 핍박을 받습니다. 학교에 가도 나이 대접을 받지 못하고 고향 마을에서는 친구마저 끊어져서, 처지가 위태롭고 신세가 고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때문에 큰 부담을 진 듯이 전전긍긍하면 사람들은 천히 여기니, 궁하여도 귀의할 곳 없어 몸 둘 바를 모릅니다. 혹은 자취를 감추어 조용히 지내고자 무리를 떠나 뜻을 높이 가지면 교만하다 이르며, 혹은 어깨를 움츠리고 가련한 태도를 취하며 무릎을 꿇고 구차히 비위를 맞추면 비루하고 간사하다 합니다.

, 하늘이 인재를 내린 것이 그토록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만 배양 방법이 다르고 진로가 달라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맹자는 이르기를,

 

만약 제대로 배양하면 성장하지 않는 생물이 없고, 만약 제대로 배양하지 않으면 소멸하지 않는 생물이 없다.”

하였으니, 다만 배양하여 성숙시키지 않고서는 어찌 그들 중에 인재가 없다고 질책하겠습니까?

혹은 적전(嫡傳 적자의 지위)을 이어받더라도 서얼이란 이름이 삭제되지 않고, 아무리 세대가 멀어져도 영원히 천속(賤屬)이 되는 것이 실로 노비의 율()과 같습니다. 그들의 친족이 번성하여 거의 나라의 반에 이르렀으나, 귀의할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항산(恒産 생업)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누렇게 야윈 얼굴에 삐쩍 마른 목으로 무기력한 채 피폐하게 살아가고, 가난이 뼈에 사무치되 떨치고 일어날 길이 없습니다.

아아, 옛날의 이윤(伊尹)은 백성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치 자기가 밀어서 웅덩이 속에 집어넣은 것같이 여겼는데, 지금 서얼로서 제자리를 잃고 고생하는 자가 어찌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억눌려 지내온 지 이미 오래라서 울분이 갈수록 쌓였으니, 천지의 화기(和氣)를 손상하여 재해를 부른 것이 반드시 이 때문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을 본받아 민물(民物)을 다스림에 성스러운 업적이 우뚝하고 빛나시니, 온 나라의 생명치고 제자리를 얻어 각기 그 삶을 즐기고 그 생업에 편안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묻혀 있고 버려져 있던 자들을 진작시키고 기용하여 능히 탕평(蕩平)의 정책을 확대하시고, 단점을 고쳐 주고 결점을 덮어 주어 모두 임금의 교화에 감싸이게 하셨습니다. 묵은 폐단과 미비된 법들을 모조리 바로잡으시면서도, 유독 서얼을 통용하는 법에 있어서는 아직 뚜렷한 정책이 서지 못했습니다.

, 지금 신의 이 말씀은 어리석은 신 한 사람의 개인적 발언이 아니라 바로 온 나라 식자들의 공언(公言)이며, 현재의 온 나라 공언일 뿐만 아니라 바로 역대 임금들 이래로 선정(先正)과 명신(名臣)들이 간절히 잊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중 다른 의견을 제시한 자들에 대해서도 신이 이미 낱낱이 거명하여 아뢰었는데, 대개 학식이 천박하고 도량이 좁아서 제가 보고 들은 것만을 굳게 지키고 한갓 유행하는 풍속만을 따르는 자들이니,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명분을 엄히 해야 한다는 것과 혁신하기가 어렵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 세상에도 편들기를 주장하고 상식과 어긋난 주장 펴기를 좋아하는 이런 무리들이 반드시 없다고는 못 하겠는데, 이들은 모두 명신 정온(鄭蘊)의 상소 하나만을 끌어와 구실 삼고 있습니다. 무릇 정온의 순수한 충성과 큰 절개야말로 일월(日月)과 함께 빛을 다툴 만한즉, 신은 감히 이 상소가 무엇에 격발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개 그 요지는 역시 명분과 국가 제도의 두 가지 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 먼 시골 지방의 사람은 그의 내력을 모르더라도 문반으로는 사헌부와 사간원에 통용될 수 있고 무반으로는 병사(兵使) · 수사(水使)를 지낼 수 있는데, 그의 문벌을 묻지 않아 아무런 구애될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서얼들은 가깝게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다 공경대부(公卿大夫)이고 멀리로는 저명한 유학자와 어진 재상이 그 조상이니, 먼 시골 지방 사람에게 비하면 그의 내력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벼슬길을 막는 법은 죄에 연루된 자보다 심하고 차등하는 명분은 종보다 엄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지금 서얼들 중에 누가 어질어 쓸 만하고 누가 재간이 있어 발탁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정이 백성들에게 차별없이 베푸는 은혜를 하늘이 덕을 베풀 듯이 하시고, 천지와 같은 덕화를 만물에게 빈틈없이 미치시어, 단점을 고치고 장점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이미 무너진 인륜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 성숙시키고 배양함으로써 오래 버려 두었던 인재를 다시 거두어들이며, 양자 세우는 법을 경국대전에 위배되지 않게 하고 본종을 높이는 도리를 모조리 고례(古禮)로 돌아가게 하며, 가정에서는 부자간의 호칭을 바로잡고 학교에서는 나이에 따른 질서를 세워서, 300년 동안이나 버려졌던 뒤에 다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한다면, 그들 모두가 스스로 새 출발 할 것을 생각하여 명예를 지키고 품행을 닦고자 노력하며, 충성을 바치고자 하고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여 나라를 위해 죽기를 다투기에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중대한 왕정(王政) 가운데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터이니, 위대하신 성인(聖人 임금)이 장수를 누리면서 인재를 육성하시는 공적 역시 이 일을 버려 두고 어디에서 찾으시겠습니까.

 

 

[C-001]서얼 …… 의소(擬疏) : 원문은 擬請疏通疏로 되어 있으나,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擬請疏通庶孼疏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소통(疏通)’은 곧 허통(許通)으로, 천인(賤人)이나 서얼에게 벼슬길을 터주는 조치를 말한다. ‘의소(擬疏)’는 상소의 초고(草稿)를 말하는데, 대개 기초(起草)만 해두고 실제로 올리지는 않은 상소를 뜻한다. 이 글은 누락된 글자가 많아 이본들을 참작하여 보충 번역하였다.

[D-001]삼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 원문은 云云으로 되어 있으나,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伏以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2]하늘이 …… 않사옵니다 : 맹자 고자 상(告子上) 풍년에는 자제들이 많이 느긋해지고 흉년에는 자제들이 많이 거칠어지는데, 하늘이 인재를 내린 것이 그토록 다른 것이 아니라非天之降才爾殊也, 그들의 마음을 빠져들게 한 원인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D-003]전얼(顚蘖)과 변지(騈枝) : 전얼은 쓰러진 나무에 난 싹을 말한다. 서경 반경 상(盤庚上)에서 若顚木之由蘖을 인용한 것이다. 변지는 변무 지지(騈拇枝指)의 줄임말이다. 변무는 엄지발가락이 검지발가락과 붙어 하나가 된 것을 가리키고, 지지는 엄지손가락 곁에 작은 손가락 하나가 더 생겨 육손이가 된 것을 가리키는데, 모두 쓸모없는 물건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莊子 騈拇 여기서는 한데 붙은 기형적인 나뭇가지라는 뜻으로 쓰였다.

[D-004]성인(聖人) : 성왕(聖王)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5]문왕(文王) …… 않았으리오 : 시경 대아(大雅) 역복(棫樸)에 나온다. 원시(原詩)에는 주왕(周王)’으로 되어 있는 것을 연암은 문왕으로 고쳐 인용하였다. 원시에 따라 文王 周王으로 고친 이본도 있는데 주왕은 곧 문왕을 말한 것이다. 이 시는 주 나라 문왕이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한 것을 예찬한 시이다.

[D-006]인재를 …… 초래하였으며 : 원문은 □□遺才之歎인데, 여러 이본에 致有遺才之歎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07]사가(私家)에서는 …… 마침내 : 원문은 私家□□□인데, 여러 이본에 私家徒嚴名分 遂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08]임금을 …… 것이요 : 조선 시대에 사대부가에서 후사가 없어 양자를 두고자 하는 경우에는, 양가(兩家)가 계후(繼後)하는 데 동의한 뒤 계후를 청원하는 소지(所志)를 작성하여 예조에 올리고, 예조에서는 양가와 관계자로부터 사실을 확인하는 진술서를 받은 다음, 이를 왕에게 보고하여 왕의 허락을 받은 뒤 예조로부터 양자의 허가증명서인 예사(禮斜)를 발급받아야 했다. 단 본처와 첩에게서 모두 자식을 얻지 못했을 경우에 한하여 계후를 허락했으므로, 서자가 있는 사실을 숨기고 계후를 청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D-009]적자와 …… 해도 : 원문은 等威인데, 여러 이본에 等威雖殊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0]공정하게 대하였으니 : 원문은 인데, 여러 이본에 均視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1]어찌 …… 했겠습니까 : 원문에는 豈復差於□□□□인데, 이본에 豈復差別於母族之貴賤哉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2]언론을 아래에서 좌우 : 이조의 정랑과 좌랑은 하급 관원임에도 불구하고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과 같은 청요직(淸要職)에 대한 후보 제청권과 자신의 후임을 추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조정의 언론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영조 17(1741) 한림(翰林)에 대해 회천(回薦)하던 규례를 혁파하면서, 아울러 이조의 정랑과 좌랑의 그와 같은 권한들도 혁파되었다. 연암집 3 ‘조부께서 손수 쓰신 한림 추천서에 대한 기록王考手書翰林薦記 참조.

[D-013]정주(政注) : 관직의 후보자를 복수로 추천하여 올리는 일을 말한다.

[D-014] …… 의도이지 : 원문은 專門濟私之□□인데, 여러 이본에 專門濟私之偏意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5]저들이 …… 있다고 : 원문은 固何負於國家인데,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6]저들로 …… 말입니까 : 원문은 □□不得齒衿紳之列哉인데, 몇몇 이본에는 使不得齒衿紳之列哉,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使之不得齒衿紳之列哉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원문 중의 금신(衿紳)’은 원래 유자(儒者)의 복장을 뜻하며, 나아가 선비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진신(搢紳), 즉 벼슬아치로 번역해야 합당할 듯하다.

[D-017]군자가 …… 없다 : 맹자 등문공 상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군자는 치자(治者) 계급을 뜻하고, 야인은 소인(小人) 즉 일반 백성을 뜻한다.

[D-018]그렇지만 : 원문은 인데, 여러 이본에는 然而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9]명덕(明德) ……  : 서경 요전(堯典)에서 요 임금이 신하들에게 제위(帝位)를 선양할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면서 한 말이다. 이 말에 대한 해석은 상서정의(尙書正義)를 따랐다.

[D-020]어진 이를 ……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집주(孟子集註)에 따라 해석하였다.

[D-021]강좌(江左) : 강동(江東) 즉 양자강(揚子江) 이남의 동쪽 지역으로, 동진(東晉)을 비롯한 남조(南朝)의 국가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D-022]도간(陶侃) : 259~334. 어려서 고아로 가난하였으나, 현리(縣吏)가 되어 공적을 쌓아 자사(刺史)에 이르렀다. 반란을 진압하여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졌으며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다. 도간의 어머니 담씨(湛氏)는 첩이었다. 晉書 卷96 列女傳 陶侃母湛氏

[D-023]주의(周顗) : 269~322. 안동장군(安東將軍) 주준(周浚)의 아들로, 젊은 시절부터 명망이 높았다. 동진(東晉) 원제(元帝)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으며, 왕돈(王敦)의 반란에 저항하다 피살되었다. 주의의 어머니 이씨(李氏)는 쇠잔한 이씨 가문을 일으키고자 명문 귀족인 안동장군 주준을 유혹하여 자진해서 그의 첩이 되었다. 晉書 卷96 列女傳 周顗母李氏

[D-024]소정(蘇頲) : 670~727. 좌복야를 지낸 허국공(許國公) 소괴(蘇瓌)의 아들로,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진사가 되고 습봉(襲封)하여 소허공(小許公)으로 불렸다. 현종(玄宗) 때 자미황문평장사(紫微黃門平章事)가 되었다.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과 함께 문장가로 유명하였다. 소정은 부친 소괴가 천비(賤婢)에게서 얻은 자식으로, 처음에 소괴는 그를 아들로 알지 않고 마구간에 두고 일을 시켰으나, 손님이 그의 시재(詩才)를 알아보고 소괴에게 그대의 종족의 서얼이냐?”고 물었다. 그제야 소괴가 사실을 밝히자 손님은 아들로 거두어 기르기를 청하였다. 그때부터 소괴가 조금씩 그를 가까이하다가 어느날 그의 시재에 놀라 마침내 아들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開天傳信記》 《靑莊館全書 卷24 編書雜稿4 詩觀小傳

[D-025]얼자(孼子) : 원문은 인데, 여러 이본에는 賤産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천산(賤産)은 천첩산(賤妾産) 즉 얼자를 말한다. 양첩산(良妾産)은 서자(庶子)라 하여, 얼자와 구별하였다.

[D-026]이소(李愬) : 773~821. 당 나라 덕종(德宗) 때 반란을 진압하고 수도를 회복한 공으로 서평군왕(西平郡王)에 봉해진 이성(李晟)의 아들로, 헌종(憲宗) 때 오원제(吳元濟)가 회서(淮西)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양국공(涼國公)에 봉해졌다. 벼슬은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이르렀고, 사후에 태위(太尉)에 증직(贈職)되었다.

[D-027]호인(胡寅) · 진관(陳瓘) · 추호(鄒浩) : 호인(1098~1156)은 호안국(胡安國)의 조카로 그의 양자가 되었으며, 양시(楊時)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저서로 논어상설(論語詳說) 등이 있다. 진관은 송 나라 철종(哲宗) · 휘종(徽宗) 연간에 태학박사(太學博士) · 간관(諫官)을 지냈으며 저서로 요옹역설(了翁易說) 등이 있다. 추호는 휘종 때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를 지냈으며 저서로 역계사의(易繫辭義) 등이 있다.

[D-028]정문배(鄭文培) : 미상이다. 영조 즉위년(1724) 서얼 출신 진사(進士) 정진교(鄭震僑) 등이 올린 상소에는 정문측(鄭文則)’으로 되어 있다. 英祖實錄 卽位年 12 17

[D-029]이세황(李世璜) : 미상이다. 영조 즉위년 서얼 출신 진사 정진교 등이 올린 상소에는 이세황(李世黃)’으로 되어 있다. 上同

[D-030]합문지후(閤門祗侯) : 각문지후(閣門祗侯), 고려 때 각종 의식을 담당하던 각문(閣門 : 통례원通禮院)의 정 7 품 벼슬이다.

[D-031]권중화(權仲和) : 1322~1408. 고려 공민왕 때 과거 급제 후 좌부대언(左副代言) · 정당문학(正堂文學), 공양왕 때 삼사좌사(三司左使) ·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역임했으며, 조선조에 들어 태조(太祖) 때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지고 태종 때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의약서(醫藥書) 편찬에도 힘썼다. 도평의사(都評議使)는 나중에 의정부(議政府)로 개칭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속한 관직이다. 권중화는 고려 말의 권신(權臣)인 권한공(權漢功)의 서자였다. 高麗史 卷125 奸臣傳1 權漢功

[D-032] …… 남길 : 원문은 流光於百代인데, 직역하면 먼 후세까지 복택(福澤)을 끼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는 한기 · 범중엄 · 호인 · 진관 · 추호에 대해 지나친 찬사가 되므로, ‘유방백세(流芳百世)’와 비슷한 뜻으로 판단하고 번역하였다.

[D-033]경서(經書) …… 하였습니다 :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원문과 정현의 주를 인용한 것이다.

[D-034]비록 …… 같더라도 : 원문은 雖與□□□인데, 여러 이본에 雖與嫡子同母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35]비자(婢子) : 원문에는 없는데, 예기 원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D-036]비록 부모가 돌아가셨을지라도 : 원문에는 없는데, 예기 원문에 雖父母沒이라 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D-037]비자(婢子) : 원문에는 없는데, () 나라 때 진호(陳澔 : 1261~1341)가 지은 예기집설(禮記集說)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D-038]예기(禮記) …… 하였습니다 : 진호의 예기집설 5 내칙(內則)에서 인용했는데, 인용된 예기 내칙의 원문과 그에 대한 진호의 주석에 모두 빠진 글자들이 있어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비자(婢子)는 대개 천첩(賤妾)으로 해석하는데, 진호는 천첩이 낳은 자식으로 해석하였다.

[D-039]회전(會典) …… 하였으니 : 명 나라 무종(武宗) 4(1509)에 간행된 명회전(明會典) 106 병부(兵部) 습직체직조(襲職替職條) 무릇 군관(軍官)이 사망하거나 연로하거나 원정에서 부상하면 반드시 적장남아(嫡長男兒)가 계승하여 직책을 대체한다. 혹시 적장남아가 죽거나 심한 불구라면 적손(嫡孫)이 세습하여 대체한다. 만약 적자나 적손이 없으면, 서장자(庶長子)나 서장손(庶長孫)이 세습하여 대체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청 나라 서건학(徐乾學) 독례통고(讀禮通考) 53 상의절(喪儀節) 16 입후조(立後條)에 역시 명회전을 인용하여, “무릇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함에 있어 홍무(洪武) 26년에 정하기를, 군관이 사망하거나 연로하거나 원정에서 부상하면 반드시 적장남(嫡長男)이 계승하여 직책을 대체한다. 혹시 적장남이 일찍 죽거나 심한 불구가 되면, 적손으로써 세습하여 대체한다. 만약 적자나 적손이 없으면 서장자가 계승하여 대체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연암은 이 조목을 명회전에서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독례통고를 통해 재인용하면서 축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D-040]본지(本支) : 적계(嫡系)와 서출(庶出)의 자손들을 함께 묶어 부르는 말이다.

[D-041]건국 …… 정도전(鄭道傳) : 원문은 □□□相鄭道傳인데, 여러 이본에 國初罪相鄭道傳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정도전이 후일 태종(太宗)이 되는 왕자 이방원(李芳遠)과 권력 다툼을 벌이다 역모죄로 처단되었기 때문에 죄상(罪相)’이라 한 것이다.

[D-042]서선(徐選) : 1367~1433. 원천석(元天錫)의 문인으로, 태조 때 과거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415(태종 15) 우부대언(右副代言 : 우부승지)이 되자 서얼의 차별대우를 진언하였다. 그 뒤 예조 우참의, 우대언(右代言 : 우승지)을 거쳐 관찰사, 참판, 판서 등을 지냈다.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D-043]찬성(贊成) 강희맹(姜希孟), 안위(安瑋) : 사실 관계에 약간 착오가 있는 듯하다. 강희맹(1424~1483)과 안위(1491~1563)는 동시대 사람이 아니다. 강희맹은 세조(世祖) 때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崔恒), 호조판서 겸 대제학 서거정(徐居正), 우찬성(右贊成) 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형조 판서로서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하였다. 안위는 1550(명종 5)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서 봉상시 정(奉常寺正) 민전(閔荃)과 함께 경국대전의 주해관(註解官)에 임명되어 주해 작업을 맡았으며, 1554(명종 9) 청홍도 관찰사(淸洪道觀察使)로 부임하여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를 간행하였다.

[D-044]송익필(宋翼弼) …… 도학(道學) : 송익필(1534  1599)은 조모가 천첩의 소생이어서 본래의 신분은 미천하였다. 과거를 포기하고 성리학에 전념하여 이이(李珥) · 성혼(成渾) 등과 학문적 교유가 깊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김장생(金長生)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중호(李仲虎 : 1512~1554)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현손(玄孫)으로, 호는 이소재(履素齋)이다. 일찍부터 시로써 명성이 높았다. 성리학에 전념하여 성리명감(性理明鑑) 등의 저술을 남기는 한편으로 제자들을 많이 길러 그의 문하에서 김근공(金謹恭) · 유조인(柳祖認) 등이 배출되었다. 김근공(1526~1568)은 본관이 강릉(江陵)이고 호는 척암(惕菴)이다. 목사(牧使) 김모(金瑁)의 서자이다. 동몽훈도(童蒙訓導)에 천거되었으며,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D-045]박지화(朴枝華) …… 행의(行誼) : 박지화(1513~1592)는 본관이 정선(旌善)이고 호는 수암(守庵)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이문학관(吏文學官)이 되었으나 곧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 때 춘천으로 피란갔다가 자살하였다. 사례집설(四禮集說) 등의 저술이 있다. 이대순(李大純 : 1602~?)은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호는 남포(南浦)이다.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주살(誅殺)된 정준(鄭遵)의 사위였으므로, 1624(인조 2) 문과에 급제하고도 오래동안 벼슬길이 막혔다가 강서 현령(江西縣令), 서윤(庶尹)을 지냈다. 조신(曺伸)은 본관이 창녕(昌寧)이고 호는 적암(適庵)이며, 조위(曺偉 : 1454~1503)의 서형(庶兄)이다. 사역원 정(司譯院正)에 발탁되었고 명 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여러 차례 다녀왔다. 중종 때 어명으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했다.

[D-046]어무적(魚無迹) …… 문장 : 어무적은 본관이 함종(咸從)이고 호는 낭선(浪仙)이다. 모친이 관비(官婢)였으므로 김해(金海)의 관노(官奴)가 되었다. 성종 · 연산군 연간에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대변한 한시들을 남겼다. 어숙권(魚叔權)은 본관이 함종이고 호가 야족당(也足堂)이며, 어세겸(魚世謙)의 서손(庶孫)이다. 이문(吏文)에 능통하였으며 중종 · 명종 연간에 중국 사신을 수행하거나 중국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저술로 패관잡기(稗官雜記) 등이 있다. 양사언(楊士彦 : 1517~1584)은 호가 봉래(蓬萊)이고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평안도 안변(安邊)의 시골 여자인데 자진하여 첩이 되었다고 한다. 이달(李達 : 1539~1618)은 호가 손곡(蓀谷)이다. 허균(許筠)에게 시를 가르쳤다고 하며,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관기(官妓)였다. 신희계(辛喜季 : 1606~1669)는 본관이 영월(寧越)이고 호가 송서(松西)이며, 부제학을 지낸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의 손자이다. 1633(인조 11)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고 이후 문신 중시(文臣重試)에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으로서 장원을 차지했는데 이처럼 서얼이 장원을 차지하기로는 개국 이래 처음이었다고 한다. 1660(현종 1) 조부 신응시와 부친 신경진(辛慶晉)의 시문집인 백록유고(白麓遺稿)를 간행하였다. 벼슬은 낭청을 거쳐 군수를 지냈다. 양대박(梁大樸 : 1544~1592)은 본관이 남원(南原)이고 호가 청계(淸溪)이며, 목사 양의(梁艤)의 서자이다. 임진왜란 때 가산을 털어 모병(募兵) 활동을 벌이다가 과로로 죽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글씨를 잘 썼고 시를 잘 지었다. 박호(朴淲)는 박호(朴箎 : 1567~1592)의 오류인 듯하다. 박호는 본관이 밀양(密陽)이고 자가 대건(大建)이다. 1584(선조 17) 18세로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수찬, 교리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상주(尙州)에서 전사하였다.

[D-047]유조인(柳祖認) …… 재주 : 유조인(1533~1599)은 본관이 문화(文化)이고 호가 범애(泛愛)이며, 서봉(西峰) 유우(柳藕)의 서자이다. 1583(선조 16) 충효와 절의로 천거되어 이천 현감(伊川縣監)과 우봉 현감(牛峰縣監)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고, 임진왜란 때 임금과 세자를 호종하여 형조 참의에 제수되고 공신으로 녹훈되었다. 최명룡(崔命龍 : 1567~1621)은 본관이 전주이고 호가 석계(石溪)이며, 현감 최위(崔渭)의 서자이다. 성혼(成渾)으로부터 도학(道學)으로 인정받았으며, 김장생(金長生)을 종유(從遊)하였다. 주역과 상수학(象數學)에 정통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유시번(柳時蕃 : 1616~1692)은 본관이 문화이고 호는 사월당(沙月堂)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저명한 학자 손처눌(孫處訥)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657(효종 8) 문과 급제 후 봉상시 주부, 교서관 교리 등을 거쳐 여러 고을의 군수를 역임했으며, 태상시 첨정에 이르렀다.

[D-048]그들이 …… 살면서 : 원문은 雖其守分行素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49]과연 …… 하겠습니까 : 원문은 果安在也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50]이산겸(李山謙), 홍계남(洪季男) : 이산겸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서자로, 임진왜란 때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조헌(趙憲)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조헌이 전사한 뒤 잔여 병력을 이끌고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1594(선조 27) 송유진(宋儒眞)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처형되었다. 홍계남은 본관이 남양(南陽)이다. 1590(선조 23)부터 1591년에 걸쳐 통신사의 군관(軍官)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때 부친 홍언수(洪彦秀)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공으로 수원 판관(水原判官)이 되었을 때 홍계남도 첨지로 승진했다. 부친이 전사하자 적진에 돌입하여 부친의 시신을 찾아왔으며 왜적을 추적하여 다수 참살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D-051]권정길(權井吉) : 무관으로 임진왜란 때 상주 판관(尙州判官)이었고, 정묘호란 때 연평부원군 이귀(李貴)의 군관으로 전쟁터에 자원하여 포상을 받았다. 병자호란 때 원주 영장(原州營將)으로 강원도의 근왕병(勤王兵)을 지휘하여 남한산성을 향하다가 부근 검단산(黔丹山)에서 청 나라 군대와 격전 끝에 패퇴하였다. 그 뒤 회양 부사(淮陽府使), 춘천 부사, 인동 부사(仁同府使) 등을 지냈다.

[D-052]피를 …… 훈시하고 : 원문은 沬血誓衆인데, ‘회혈(沬血)’은 피로 얼굴을 씻다시피한다는 뜻이다. 문맥상으로는 구혈서중(嘔血誓衆)’이나 역혈서중(瀝血誓衆)’이라야 적합할 듯하다. 전자로 판단하고 번역하였다.

[D-053]쓸모 있는 …… 않는다 : 한비자(韓非子) 현학(顯學) 녹을 주어 기르는 자들은 쓸모가 없고, 쓸모 있는 자들은 녹을 주어 기르지 않는다. 이것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원인이다.所養者非所用 所用者非所養 此所以亂也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사기 63 한비열전(韓非列傳)에도 인용되어 있는데, 연암은 이를 재인용하였다.

[D-054]홍림(洪霖) : 1685~1728. 본관은 남양이고 부친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홍수명(洪受命)이다. 1727(영조 3)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李鳳祥)의 막료가 되었는데 그 이듬해 이인좌(李麟左)의 난 때 청주성이 함락되자 이봉상과 함께 반란군에 저항하다 죽었다. 나중에 호조 참판에 증직되고 정려가 내렸다.

[D-055]비록 : 원문은 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56]백부(百夫)의 장() : 서경 목서(牧誓)에 나오는 말로, 1000명의 병졸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천부장(千夫長), 100명의 병졸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백부장(百夫長)이라 한다.

[D-057]반드시 …… 것인저 : 논어 자로(子路)에서 정치의 급선무가 무엇이냐고 물은 자로의 질문에 공자가 답한 말이다.

[D-058]아들은 …… 것입니다 : 논어 안연(顔淵)에서 제() 나라 임금이 정치란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임금이 임금 노릇을 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하며, 아비가 아비 노릇을 하며 아들이 아들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D-059]낭관(郞官) …… 바라겠습니까 : 낭관은 육조(六曹) 5 · 6품 하급 관원을 말하고, 시종신은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홍문관 · 예문관 · 승정원 등의 관원을 가리킨다.

[D-060]인의(引儀) : 궁중 의식을 담당하는 통례원의 종 6 품 벼슬이다. 조회(朝會)나 기타 의례에서 여창(臚唱), 즉 식순에 따라 구령을 외치는 일을 맡았다. 업무가 과다하고 빈번하여 종 9 품의 겸인의(兼引儀), 가인의(假引儀)를 증설하였다.

[D-061]윤대(輪對) : 윤번(輪番)으로 궁중에 들어가서 임금의 질문에 응대(應對)하거나 정사(政事)의 득실을 아뢰는 일을 말한다.

[D-062]나라의 …… 자들입니다 : 맹자 진심 상(盡心上) 덕행과 지혜와 학술과 재지(才智)가 있는 사람은 항상 마음의 병이 떠나지 않는다. 오직 고신(孤臣 : 외로운 신하)과 얼자(孼子)만이 그 마음가짐이 늘 조심스럽고 환난을 염려함이 깊기 때문에 사리(事理)에 통달하게 된다.”고 하였다. 원문의 疹疾 맹자의 원문대로 疢疾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으나 뜻은 마찬가지이다.

[D-063]예기 …… 하였으니 : 예기 왕제(王制)에 나오는 말이다.

[D-064]() …… 하였으니 : 중용집주(中庸集註)  19 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D-065]황발(黃髮)과 태배(鮐背) : 황발은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가 다시 누런 빛을 띠는 것이고, 태배는 등에 복어처럼 검은 반점이 생긴 것을 말한다.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의 특징이다.

[D-066]천자가 …… 있었으니 :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 등에 나오는 내용이다.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이라는 직위를 두어 벼슬에서 물러난 연로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을 임명하고, 천자가 그들에게 태학에서 음식을 대접하면서 조언을 구하였다고 한다.

[D-067]() …… 하였고 : 논어 안연(顔淵)에 나오는 말이다.

[D-068]벗이란 …… 것이다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나오는 말인데, 앞뒤 순서를 바꾸어 인용하였다.

[D-069]진실하고 …… 많아 : 논어 계씨(季氏) 유익한 벗이 셋이요 유해한 벗이 셋이니, 곧은 사람을 벗하며, 진실한 사람을 벗하며, 들은 것이 많은 사람을 벗하면 유익하다.” 하였다.

[D-070]충고하거나 …… 없고 : 맹자 이루 하(離婁下) 책선(責善)은 붕우간의 도리이다.” 하였다.

[D-071]탁마(琢磨)하고 …… 끊겼으며 : 붕우들이 함께 강학(講學)하는 것을 뜻한다. 절시(切偲)는 절절시시(切切偲偲)의 준말이다. 논어 자로(子路) 붕우간에는 간절하고 자상히 권면하여야 한다.朋友切切偲偲고 하였다.

[D-072]구제하지 않으면서도 : 원문은 莫之救인데, ‘莫之救而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73]할아비를 …… 것입니다 : 고대의 종법(宗法)에 적자(嫡子)가 죽으면, 혹시 서자가 있더라도 적손(嫡孫)에게 할아비를 계승해서 상제(喪祭)나 가묘(家廟)의 중책을 맡도록 했다. 할아비가 적손에게 중책을 전한다고 하여 전중(傳重)’이라 하고, 적손이 중책을 계승한다 하여 승중(承重)’이라 하였다.

[D-074]석태중(石鮐仲) …… 나타났으니 :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나오는 내용이다. 석태중은 위() 나라의 대부였는데, 그가 죽자 여섯 명의 서자 중에 누구를 양자로 정할 것인가를 점치게 되었다. 점치는 사람이 목욕하고 옥()을 찬 다음에 점을 치도록 하겠다고 하자, 다른 서자들은 모두 그 말을 따랐으나 석기자(石祁子)만은 부친상 중에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부했는데 점을 쳐 보니 석기자의 점괘가 길조를 보였다고 한다.

[D-075]당 나라의 …… 하였으니 : 당률소의(唐律疏義) 12 입적위법조(立嫡違法條)에 나오는 내용이다.

[D-076]대명률(大明律)에도 …… 하였으며 : 대명률 호율(戶律) 입적자위법조(立嫡子違法條)에 나오는 내용이다.  ()’으로가 아니라 () 80로 다스린다고 하였다.

[D-077]경국대전에는 …… 하였습니다 : 경국대전 예전(禮典) 입후조(立後條)에 나오는 내용이다.

[D-078]조명(造命) : 사람의 화복(禍福)을 좌우하는 것을 뜻한다. 임금은 이러한 조명의 권능을 지녔다고 보았다. 여기서는 양자(養子)로 인정함으로써 그의 운명을 바꾸어 주는 조치를 가리킨다.

[D-079]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 : 사기 75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맹상군 전문(田文)은 제() 나라의 재상인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이 천첩에게서 얻은 자식이었다. 그는 불길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여 태어나면서부터 버림을 받았으나, 장성한 뒤 부친을 만나 설득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자식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마침내 부친의 후계자가 되어 맹상군이 되었다. 맹상군이 부친을 만나 설득할 때 묻기를, “아들의 아들은 무엇입니까?” 하니, 부친은 손자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손자의 손자는 무엇입니까?” 하니, 부친은 현손(玄孫)이다.” 하였다. 또다시 묻기를, “현손의 현손은 무엇입니까?” 하니, 부친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맹상군은, 부친이 나라 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몹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탐욕스럽게 재산을 모아, 그와 같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所不知何人에게 남겨 주려 한다고 비판하였다.

[D-080]황홀(怳惚) : 후손이 정성껏 제사를 받들면 조상의 혼령이 내려와 어렴풋이 직접 그 모습을 뵙게 되는 듯한 경지를 말한다. 禮記 祭義 원문의  자는 예기 으로 되어 있는데, 서로 통하는 글자이다.

[D-081]신령의 …… 한들 : 원문은 焄蒿凄愴인데, 예기 제의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의  자는 예기 로 되어 있는데, 뜻은 같다.

[D-082]날이 …… 그리워한다 :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나오는 구절이다.

[D-083]사랑을 …… 듯하다 : 예기 제의에 나오는 말이다.

[D-084]신령이 …… 듯할 : 원문은 僾然著存인데, ‘애연(僾然)’ 저존(著存)’ 모두 예기 제의에 나오는 말이다.

[D-085]종족들은 …… 부끄러워하여 : 원문은 宗族恥於爲類인데, ‘宗族而恥於爲類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86]선정신(先正臣) : 문묘(文廟)에 배향된 선대(先代)의 유현(儒賢)을 임금 앞에서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이다.

[D-087]판결사(判決事) : 노비 문서와 노비 문제 소송 사건을 처리하는 장례원(掌隷院)의 우두머리로 정 3 품 벼슬이다.

[D-088]송시열(宋時烈) …… 있습니다 : 이 의소(擬疏) 송자대전(宋子大全) 13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시대순으로 상소를 배열한 점으로 미루어 1670(현종 11)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에서 송시열은 서얼 방한(防限) 제도의 경우는 애초 조종(祖宗)이 확정한 제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국초에 정도전은 그 어미가 실은 사비(私婢)였지만 마침내 대제학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방한으로 된 것은 혹시 중간 시대에 나온 것인 듯합니다.”라고 하면서, 서얼이 기용되지 못함을 애석해하였다.

[D-089]반드시 …… 자각하시고 : 원문은 自見必然之理인데, 여러 이본에는自見其必然之理로 되어 있다.

[D-090]다시 ……  : 원문은 復得而極言之인데, 여러 이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91]하늘이 …… 없다 : 인용상에 약간 착오가 있는 듯하다. 시경 주송(周頌) 사문(思文)에는 곡식으로 우리 뭇 백성을 기르시니 너의 극()이 아님이 없다.立我蒸民 莫非爾極고 하였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으시니天生蒸民 시경 대아(大雅) ()과 증민(蒸民)에 나오는 구절이다. 또한 너의 극()이 아님이 없다에서 ()’은 대개 시중(時中)’ 또는 중정(中正)’의 도()나 지극한 덕()으로 풀이하는데, 연암은 그와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D-092]치우침도 …… 평탄하리라 : 인용상에 약간 착오가 있는 듯하다. 원문은 無偏無陂 王道平平이라 하였으나, 홍범에는 無偏無陂 遵王之義라 하고 無黨無偏 王道平平이라 하였다.

[D-093]인조(仁祖) …… 허락하였으니 : 삼조(三曹)의 관직은 호조(戶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의 낭관(郞官)이다. 인조 3년 옥당의 차자로 인해서 서얼을 허통(許通)하는 사목(事目)을 만들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조 11년에 이를 준행하기를 왕에게 다시 청하였다. 仁祖實錄 11 10 15

[D-094]만약 …… 없다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D-095]옛날의 …… 여겼는데 : 서경 열명 하(說命下) 맹자 만장(萬章)에 거듭 나오는 내용이다.

[D-096]능히 …… 확대하시고 : 정조(正祖)가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을 계승한 사실을 말한다.

[D-097]이 상소가 …… 것인지는 : 원문은 此疏卽何所激인데,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고,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자가 누락되어 있다.

[D-098]단점을 …… 함으로써 : 원문은 洗濯磨礪인데, 앞에서 나온 단점을 고쳐 주고 결점을 덮어 주다刮垢掩瑕와 호응하는 표현으로, ‘괄구마광(刮垢磨光)’과 같은 뜻이다.

[D-099]죽기를 다투기에 : 원문은 爭死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爭先死로 되어 있다.

[D-100]이보다 …… 터이니 : 원문은 無過於此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無過於此而로 되어 있다.

[D-101]위대하신 …… 공적 : 시경 대아(大雅) 역복(棫樸)에 전거를 둔 표현이다. 이 글 첫머리에도 인용되었다.

[D-102]역시 …… 찾으시겠습니까 : 원문은 云云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其亦捨此而奚求哉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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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1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1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공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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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1]

1 자서(自序)

2 계우(季雨)에게 증정한 서문

3 낭천(狼川) 수령으로 나가는 심백수(沈伯修)를 송별하는 서문

4 은산(殷山) 수령으로 나가는 서원덕(徐元德)을 송별하는 서문

5 대은암(大隱菴)에서 창수(唱酬)한 시의 서문

6 자소집서(自笑集序)

7 유구(悠久)에게 증정한 서문

8 여름날 밤잔치의 기록

9 초구(貂裘)에 대한 기록

10 조부께서 손수 쓰신 한림(翰林) 추천서에 대한 기록

11 소완정(素玩亭)의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에 화답하다

12 불이당기(不移堂記)

13 소완정기(素玩亭記)

14 금학동(琴鶴洞) 별장에 조촐하게 모인 기록

 

[2]

15 만휴당기(晩休堂記)

16 명론(名論)

17 백이론(伯夷論) ()

18 백이론(伯夷論) ()

19 형암(炯菴) 행장(行狀)

20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 발문

21 회성원집(繪聲園集) 발문

22 필세설(筆洗說)

23 서얼 소통(疏通)을 청하는 의소(擬疏)

 

[3]

24 주금책(酒禁策)

25 유사경(兪士京 유언호 )에게 답함

26 황윤지(黃允之)에게 감사함

27 어떤 이에게 보냄

28 홍덕보(洪德保 홍대용 )에게 답함

29 두 번째 편지

30 세 번째 편지

31 네 번째 편지

32 유수(留守)가 대궐에서 하사받은 귤 두 개를 보내 준 데 감사한 편지

33 족손(族孫) 홍수(弘壽) 에게 답함

34 함양 군수(咸陽郡守)에게 답함

35 순찰사에게 답함

36 어떤 이에게 보냄

37 순찰사에게 올림

38 김 우상(金右相)에게 올림

39 김계근(金季謹)에게 답함

40 전라 감사에게 답함

 

[4]

41 이 감사(李監司) 서구(書九) 가 귀양 중에 보낸 편지에 답함

42 순찰사에게 답함

43 순찰사에게 올림

44 순찰사에게 답함

45 순찰사에게 올림

46 순찰사에게 올림

47 영목당(榮木堂)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祭文)

48 장인 처사(處士) 유안재(遺安齋)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

49 오천(梧川) 처사 이장(李丈)에 대한 제문

50 이몽직(李夢直)에 대한 애사(哀辭)

51 유경집(兪景集)에 대한 애사

52 재종숙부 예조 참판 증 영의정공(領議政公) 묘갈명(墓碣銘)

53 삼종형(三從兄) 수록대부(綏祿大夫) 금성위(錦城尉)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贈諡) 충희공(忠僖公) 묘지명(墓誌銘)

 

 

 

 

자서(自序)

글이란 뜻을 그려내는 데 그칠 따름이다. 글제를 앞에 놓고 붓을 쥐고서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거나, 억지로 경서(經書)의 뜻을 찾아내어 일부러 근엄한 척하고 글자마다 정중하게 하는 사람은, 비유하자면 화공(畫工)을 불러서 초상을 그리게 할 적에 용모를 가다듬고 그 앞에 나서는 것과 같다.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옷은 주름살 하나 없이 펴서 평상시의 태도를 잃어버린다면, 아무리 훌륭한 화공이라도 그 참모습을그려내기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사람도 어찌 이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

말이란 거창할 필요가 없으며, ()는 털끝만한 차이로도 나뉘는 법이니, 말로써 도를 표현할 수 있다면 부서진 기와나 벽돌인들 어찌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도올(檮杌)은 사악한 짐승이지만 초() 나라의 국사(國史)는 그 이름을 취하였고,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몰래 매장하는 것은 극악한 도적이지만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니, 글을 짓는 사람은 오직 그 참을 그릴 따름이다.

이로써 보자면 글이 잘되고 못되고는 내게 달려 있고 비방과 칭찬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귀가 울리고 코를 고는 것과 같다. 한 아이가 뜰에서 놀다가 제 귀가 갑자기 울리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기뻐하며, 가만히 이웃집 아이더러 말하기를,

 

너 이 소리 좀 들어 봐라. 내 귀에서 앵앵 하며 피리 불고 생황 부는 소리가 나는데 별같이 동글동글하다!”

하였다. 이웃집 아이가 귀를 기울여 맞대어 보았으나 끝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자, 안타깝게 소리치며 남이 몰라주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일찍이 어떤 촌사람과 동숙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의 코 고는 소리가 우람하여 마치 토하는 것도 같고, 휘파람 부는 것도 같고, 한탄하는 것도 같고, 숨을 크게 내쉬는 것도 같고, 후후 불을 부는 것도 같고, 솥의 물이 끓는 것도 같고, 빈 수레가 덜커덩거리며 구르는 것도 같았으며, 들이쉴 땐 톱질하는 소리가 나고, 내뿜을 때는 돼지처럼 씩씩대었다. 그러다가 남이 일깨워 주자 발끈 성을 내며 난 그런 일이 없소.” 하였다.

, 자기만이 홀로 아는 사람은 남이 몰라줄까 봐 항상 근심하고, 자기가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먼저 깨닫는 것을 싫어하나니, 어찌 코와 귀에만 이런 병이 있겠는가? 문장에도 있는데 더욱 심할 따름이다. 귀가 울리는 것은 병인데도 남이 몰라줄까 봐 걱정하는데, 하물며 병이 아닌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코 고는 것은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 주면 성내는데, 하물며 병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을 보는 사람이 부서진 기와나 벽돌도 버리지 않는다면, 화공의 선염법(渲染法)으로 극악한 도적의 돌출한 귀밑털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요, 남의 귀 울리는 소리를 들으려 말고 나의 코 고는 소리를 깨닫는다면 거의 작자의 뜻에 가까울 것이다.

 

 

[D-001] …… 것이다 : 원문은 難得其眞인데, 종북소선(鍾北小選) 병세집(幷世集)에는  로 되어 있다.

[D-002]말이란 …… 버리겠는가 : 부서진 기와나 벽돌처럼 쓸모없는 것들에도 도()가 존재하므로, 이를 소재로 삼아 말로 표현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서 동곽자(東郭子) 이른바 도()란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장자는 없는 데가 없다.無所不在고 하면서, 땅강아지나 개미에도 있고, 稊稗에도 있고, 기와나 벽돌瓦甓에도 있고, 똥이나 오줌에도 있다고 하였다. 시경(詩經) 용풍(鄘風) 장유자(墻有茨)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말하면 추해진다네.所可道也 言之醜也라고 하였다. 원문의 瓦礫 종북소선 병세집 糞壤으로 되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不棄瓦礫 瓦礫도 같다.

[D-003]도올(檮杌) …… 취하였고 :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 () 나라의 ()과 초() 나라의 도올과 노() 나라의 춘추(春秋)가 똑같은 것이다.” 하였다. 도올은 원래 전설에 나오는 사악한 짐승이었는데, 초 나라에서 악을 징계하기 위해 이로써 국사의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원문의 楚史取名에서  자는 종북소선 로 되어 있다.

[D-004]몽둥이로 …… 남겼으니 : 극도로 흉악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라 할지라도 역사책에 남겨 후세 사람들이 교훈으로 삼게 한다는 뜻이다. () 나라 무제(武帝) 때 왕온서(王溫舒)라는 혹리(酷吏)가 젊은 시절 사람을 죽이고 암매장하는 악행을 자행했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사기(史記) 한서(漢書)의 혹리전(酷吏傳)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다. 원문의 劇盜 종북소선 병세집 狗屠로 되어 있고, ‘遷固是敍 是敍 종북소선 生色으로 되어 있다.

[D-005]이로써 보자면 : 원문은 以是觀之인데, ‘以是 종북소선에는 由是, 병세집에는 是以로 되어 있다.

[D-006]귀가 울리고 : 병으로 인해 귀에 이상한 잡음이 들리는 이명증(耳鳴症)을 말한다.

[D-007]놀라서 …… 기뻐하며 : 원문은 啞然而喜인데, 종북소선에는  로 되어 있다.

[D-008]내 귀에서 …… 동글동글하다 : 이와 비슷한 비유가 이덕무(李德懋)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1에 나온다. 이덕무가, 어린 동생이 갑자기 귀가 쟁쟁 울린다고 하여 그 소리가 무엇과 비슷하냐고 물었더니, “그 소리가 별같이 동글동글해서 빤히 보고 주울 수 있을 듯해요.其聲也 團然如星 若可覩而拾也라고 답했다. 이에 이덕무는 형상을 가지고 소리를 비유하다니, 이는 어린애가 무언 중에 타고난 지혜이다. 옛날에 한 어린애가 별을 보고 저것은 달의 부스러기이다.’라고 했다. 이런 따위의 말들은 몹시 곱고 속기를 벗어났으니, 케케묵은 식견으로는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라고 평하였다.

[D-009]마치 …… 같고 : 원문은 如哇如嘯如嘆如噓인데, 종북소선에는 如歎如哇로만 되어 있다.

[D-010]톱질하는 소리가 나고 : 원문은 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鉅鍛으로 되어 있다.

[D-011]남이 일깨워 주자 : 원문은 被人提醒인데, 종북소선에는 提醒 搖惺으로 되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怒人之提醒 提醒도 같다.

[D-012]자기가 …… 사람은 : 원문은 己所未悟者인데, 종북소선에는  로 되어 있다.

[D-013]남이 …… 싫어하나니 : 원문은 惡人先覺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4]문장에도 …… 따름이다 : 원문은 文章亦有甚焉耳인데, 종북소선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5]하물며 : 원문은 인데, 종북소선에는 이 앞에  자가 더 있다.

[D-016]선염법(渲染法) : 동양화에서 먹을 축축하게 번지듯이 칠하여 붓 자국이 보이지 않게 하는 수법을 이른다.

[D-017]극악한 도적 : 원문은 劇盜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狗屠로 되어 있다.

[D-018]돌출한 귀밑털 : 원문은 突鬢인데, 즉 봉두돌빈(蓬頭突鬢), 쑥대머리에다 돌출한 귀밑털이란 뜻으로, 거칠고 단정치 못한 모습을 말한다.

[D-019]들으려 말고 : 원문은 毋聽인데, 종북소선에는 不問으로, 병세집에는 無聽으로 되어 있다.

[D-020]깨닫는다면 : 원문 인데, 종북소선에는 으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계우(季雨)에게 증정한 서문

 

 

스승의 도()가 폐기된 지 오래되었다. 중니(仲尼 공자)가 돌아가신 때로부터 맹자(孟子) 이하는 모두 스승의 도로써 자처할 수 없었다.  스승이니 제자니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그 스승의 어짊을 참으로 안다고는 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도를 믿는 것이 반드시 돈독하다고는 할 수 없다. 도가 이미 반드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면, 스승도 존숭할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공자(孔子)는 문하의 제자를 부를 적에 반드시 삼(), (), (), (), (), (), ()이라고 이름을 부르면서 너나들이하였으니, 무릇 이름을 바로 부르면서 너나들이하는 것은 자제(子弟)로부터 더 아래로 부리는 종이나 하인들에게까지도 모두 쓰는 말이다.

공자가 돌아가셨을 때 문인(門人)들이 복()을 어떻게 입을지를 정하지 못하자, 자공(子貢)이 이르기를,

 

옛날에 부자(夫子)께서 안연(顔淵)의 상()을 당했을 때 아들의 상을 당한 것같이 하였으나 복은 입지 않았으니, 지금 문인들도 부친의 상을 당한 것같이 하되 복은 입지 말도록 하자.”

하였다. 문인이 스승에 대해서 아비와 자식 관계같이 했으니 어찌 도를 믿지 않고서 그렇게 되겠는가. 수레를 팔 것을 청하자 허락지 아니하고, 후히 장사를 치르자 탄식하였으니, 이는 문인을 아들과 똑같이 대하려는 것이었고, ()와 예() 외에 특별히 들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아들을 문인과 똑같이 대하려는 것이었다.

맹자는 일찍이 문하의 제자에 대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 그대)’라 칭했다. ‘라는 것은 상대를 높이는 언사로서, 자기와 대등한 사람으로부터 그 위로 군공(君公 제후)과 아버지나 스승에게까지 쓸 수 있는 말이니, 문인에게 이 말을 쓴다면, 이는 친구가 친구를 대하는 도리이다.

공자의 70명의 제자들 중에 제 스승을 요순(堯舜)보다 어질다고 칭송하는 자가 있어도, 참람되이 여기지 않았다. 그가 스승의 어짊을 참으로 알고 그 도를 깊이 믿었다면, 해와 달도 크다고 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고, 태산(泰山)도 높다고 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며, 강과 바다도 깊다고 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맹자의 제자인 만장(萬章)과 공손추(公孫丑)의 무리는 재주와 식견이 낮아서, 스승의 어짊을 참으로 알지 못했고 그 도를 깊이 믿지 못했기 때문에 기껏 그 스승을 높인다는 것이 관중(管仲)과 안자(晏子)의 부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맹자는 문인에 대하여, 그들이 물으면 대답하였지 자신의 포부를 말한 적이 없었다. 이미 스승의 어짊을 알지 못하고 그 도를 믿지 못한다면, 길에 지나가는 사람과 다를 바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길에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서 너나들이하는 것도 안 될 말인데, 더구나 감히 스승의 도로써 자처하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맹자는 일찍이 스승의 도에 엄하여 진상(陳相)을 책망하고, 조교(曹交)를 거절했으니, 아마도 그는 70명의 제자들이 공자에게 심복한 것에 대해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맹자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할 것을 생각했지만, 또 사람들이 남의 스승되기를 좋아하는 것을 근심하였으니, 그가 경솔하게 남에 대해 스승 노릇을 하고자 아니 한 것 역시 분명하다.

지금 계우(季雨)는 나이 겨우 약관인데, 험한 길을 멀다 아니 하고 대추와 육포를 품고 책상자를 짊어지고 그의 스승을 찾아가 따르려고 한다. 나는 그 선생님이 반드시 영재를 얻어 교육할 것을 생각하시고, 또 경솔하게 아무에게나 스승 노릇을 하고자 아니 하실 줄을 안다. 아마도 틀림없이 나의 이 말로써 먼저 그 선생님께 예물 삼아 올릴 터인데 선생님께서도 의당 답이 있으실 것이다. 그래서 글로 써서 계우에게 증정하는 바이다.

 

 

공자와 맹자는 100여 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사제간의 친분이 치수(淄水)와 승수(澠水)같이 판이하였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세상의 도의가 날로 하락한 것을 한탄하지 않은 적이 없다.

 

[C-001]계우(季雨) : 누구의 자()인지 알 수 없다. 연암집 5에 수록된 중관에게 보냄與仲觀이란 편지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D-001]() : 성명은 증삼(曾參), ()는 자여(子輿)이다.

[D-002]() : 성명은 안회(顔回), 자는 자연(子淵)이다.

[D-003]() : 성명은 단목사(端木賜), 자는 자공(子貢)이다.

[D-004]() : 성명은 복상(卜商), 자는 자하(子夏)이다.

[D-005]() : 성명은 공서적(公西赤), 자는 자화(子華)이다.

[D-006]() : 성명은 중유(仲由), 자는 자로(子路)이다.

[D-007]() : 성명은 염옹(冉雍), 자는 중궁(仲弓)이다.

[D-008]너나들이하였으니 …… 말이다 : 이 부분이 병세집에는 爾汝之也者 魯之方音 此待子弟之道 弟子者子弟也 故로 되어 있다.

[D-009]공자가 …… 하였다 :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D-010]수레를 …… 탄식하였으니 : 안회가 죽었을 때 안회의 아버지 안로(顔路)가 공자의 수레를 팔아 외관(外棺)인 곽()을 장만하기를 청하였는데, 공자는 자신의 아들 이()가 죽었을 때도 관()만 있었고 곽은 없었다고 대답하면서 승낙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인들이 후히 장사 지내려 하자 공자는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결국 후히 장사 지내자, “안회는 나를 아버지처럼 여겼는데 나는 그를 자식처럼 대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저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하고 탄식하였다. 論語 先進

[D-011]() …… 없었으니 : 공자가 문하의 제자와 자신의 아들을 가르치는 데 차별을 두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고사(故事)이다. 진항(陳亢)이 백어(伯魚 : 공자의 아들 이)에게 그대도 뭔가 좀 특별히 들은 것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묻자, 백어가 대답하기를, “그런 것은 없었다. 언젠가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는데, ‘()를 배웠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아직 못 배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 하시므로 내가 물러 나와 시를 배웠다. 그 후에 또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는데, ‘()를 배웠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아직 못 배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예를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 없다.’ 하시므로 내가 물러 나와 예를 배웠다. 이 두 가지를 들었노라.” 하였다. 論語 季氏

[D-012]공자의 70명의 제자들 : 공자 문하의 제자 약 3000명 중에서 재주와 덕이 출중한 제자로 72명 또는 77명을 꼽는데, 史記 卷47 孔子世家, 67 仲尼弟子列傳 대충하여 70명이라고도 한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 덕으로써 사람을 복종시키는 자는 마음이 즐거워서 진실로 복종하게 하나니,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복종하는 경우와 같다.”고 하였다.

[D-013]제 스승을 …… 있어도 : 공자의 제자 재아(宰我) 내가 보기에 부자(夫子 : 공자孔子)는 요순(堯舜)보다 훨씬 뛰어나시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孟子 公孫丑上

[D-014]깊이 믿었다면 : 원문은 深信인데, 병세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5]해와 …… 것이다 :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를 헐뜯자 공자의 제자 자공은, 다른 현자들이 언덕과 같아 넘을 수 있는 존재라면 공자는 해와 달 같아 도저히 넘을 수 없다.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고 옹호하였다. 論語 子張 또한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은 스승을 예찬하여, 언덕과 개밋둑에 비교하면 태산과 비슷하고, 길바닥에 괸 물과 비교하면 강과 바다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이 부분이 병세집에는 天地不足以爲大 日月不足以爲高 河海不足以爲深矣로 되어 있다.

[D-016]만장(萬章) …… 않았다 : 관중(管仲)과 안자(晏子)는 춘추 시대 제() 나라 사람이다. 관중은 이름이 이오(夷吾), 자가 중()인데, 환공(桓公)을 섬겨 부국강병에 힘쓰고 제후를 규합하여 환공을 오패(五覇)의 으뜸이 되게 하였다. 안자는 이름이 영(), 자가 평중(平仲)인데, 영공(靈公) · 장공(莊公) · 경공(景公)의 재상이 되어 절검 역행(節儉力行)하여 국력 배양에 힘썼다. 공손추가 맹자에게 부자(夫子)께서 만일 제() 나라에서 요직을 맡으신다면 관중과 안자의 공적을 다시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맹자는 그대는 참으로 제 나라 사람이구나, 관중과 안자밖에 모르는 것을 보니!”라고 못마땅해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D-017]진상(陳相)을 책망하고 : 등문공(滕文公)이 맹자의 가르침을 따라 인정(仁政)을 펴자, 이 소문을 듣고 초() 나라의 유자(儒者) 진량(陳良)의 문도인 진상이 등 나라로 와서 그 백성이 되기를 자원하였다. 이때 신농씨(神農氏)의 설()을 따르는 허행(許行)도 등 나라로 옮겨와 직접 신을 삼고 자리를 짜서 생활하였는데, 진상이 허행을 보고는 자신이 그동안 해 온 학문을 버리고 허행을 추종하였다. 진상이 맹자를 만나 등 나라 군주는 현군(賢君)이기는 하지만 도()는 듣지 못했습니다. 현자(賢者)는 백성들과 함께 밭갈이해서 먹고 손수 밥을 지어 가며 다스려야 하는데, 지금 등 나라에는 창름(倉廩)과 부고(府庫)가 있으니, 이는 백성들을 해쳐서 자신을 봉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맹자는 허행의 학설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설명하고, 진상이 스승의 학문을 배반한 것을 호되게 꾸짖었다. 孟子 滕文公上

[D-018]조교(曹交)를 거절했으니 : 조교는 조군(曹君)의 동생이다. 조교가 맹자에게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조교가 다시 문왕(文王)은 키가 10척이고 탕() 임금은 9척이라고 했는데, 지금 저는 9 4촌이나 되는데도 밥만 축낼 뿐이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든 노력만 하면 요순처럼 될 수 있다.”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조교가 제가 추군(鄒君)을 만나면 관사(館舍)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머물면서 문하(門下)에서 배웠으면 합니다.” 하므로, 맹자는 도()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뜻이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는 대로(大路)와도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의 병통은 구하지 않는 데 있을 뿐이니, 그대가 돌아가서 찾는다면 스승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면서 거절하였다. 孟子 告子下

[D-019]천하의 …… 생각했지만 : 맹자가 군자(君子)의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하면서,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세 번째 즐거움으로 들었던 것을 두고 한 말이다. 孟子 盡心上

[D-020]사람들이 …… 근심하였으니 : 맹자가 사람들의 병통은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함에 있다.”고 했던 것을 두고 한 말이다. 孟子 離婁上

[D-021]험한 …… 하고 : 원문은 不遠道路之險인데, 병세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22]대추와 …… 짊어지고 : 원문은 抱棗脯 負書笈인데, 병세집에는 負書笈 抱棗脯로 되어 있다. 대추와 육포는 스승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바치는 예물로 쓰인다.

[D-023]그의 …… 한다 : 이 대목이 병세집에는 운평(雲坪)으로 찾아가 따르려 한다. 장차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서이다.往從于雲坪 蓋將以師之也라고 되어 있다. 운평은 곧 송능상(宋能相 : 1710~1758)인 듯하다. 송능상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현손(玄孫)이자 한원진(韓元震)의 제자로 저명한 성리학자인데, 1751년부터 충청도 회덕(懷德) 운평에 살면서 운평을 호로 삼고 학문과 교육에 전념했다. 저서로 운평문집(雲坪文集)이 있다.

[D-024]치수(淄水)와 승수(澠水) : 현재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두 강의 이름이다. 두 강의 물맛이 서로 달랐던 데서 유래하여, 두 가지 사물의 성격이 판이한 경우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낭천(狼川) 수령으로 나가는 심백수(沈伯修)를 송별하는 서문

 

 

낭천(狼川)은 고대의 맥국(貊國)으로, 땅은 외지고 백성은 가난한 지역이다. 벗인 심군 백수(沈君伯修)가 이곳에 수령으로 부임하게 되자 의기가 충만하였으며, 날을 정해서 행장을 꾸려 가족을 이끌고 떠나는데, 뜻을 이룬 사람과 몹시 흡사하였다.

심군은 겨우 약관일 적에 용모와 자태가 단정하고 수려하며 학문과 창작이 걸출하고 정민(精敏)할 뿐더러, 논의를 펴면 바람이 이는 듯하고 붓을 잡으면 나는 듯하여 명성과 예찬이 마침내 당대에 떨쳐졌다. 그래서 그가 교유한 사람들은 모두 그보다 연배나 지위가 높았는데도 그와 교유하기를 원했던 것이며, 우리 왕조 개국 이래로 조달(早達)한 이를 낱낱이 헤아려 볼 때 이한음(李漢陰 이덕형(李德馨))이나 김문곡(金文谷 김수항(金壽恒))만큼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임금께서 일찍이 진사(進士)들을 불러 정시(庭試)를 보일 적에 친림(親臨)하여 시험지를 하사하셨다. 때마침 비가 내려 선비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시험지를 하사받고 비를 피하여 행랑 아래로 들어갔으나, 군은 공수(拱手)하고 홀로 비를 맞으며 뜰 가운데 서 있었다. 임금께서 바라보고 기특하게 여겨 돌아보며,

 

저기 홀로 섰는 자가 누구냐?”

하고 묻자, 측근 신하가 군()의 이름을 아뢰었다. 임금은 감탄하며,

 

어떻게 하면 분주히 이익을 다투지 않고 홀로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셨다. 그래서 그가 과거에 합격하기를 권면하고 장차 크게 쓰려는 뜻이 매우 성대하였다. 군 역시 발탁되었다가 공교롭게도 면직을 당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임금은 그의 이름을 들을 적마다 늘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오랫동안 군도 과거 답안 쓰는 공부를 그만두고 더욱 글을 읽어, 문장의 수준이 날로 높아갔다. 그러나 도리어 낭서(郞署)에 머물면서 승진되거나 좌천되거나 하였다. 지금 그를 옛사람에 비교해 보면 문형(文衡 대제학)을 맡고 정승에 제수될 나이인데, 마침내 산간 벽지의 한 작은 고을에 벼슬자리를 얻었으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군을 송별하는 사람들은 바야흐로 입을 모아 군이 뜻을 펴지 못했노라고 읊었지만, 군으로 말하자면 장차 밤낮으로 장부와 문서를 정리하고 부지런히 백성의 고통을 조사하며, 청사(廳舍)는 어떻게 보수해야 하며 고을의 폐단은 어떻게 개혁해야 하나 생각하여, 마치 평생토록 평소에 뜻을 둔 사람같이 할 것이다. 그리고 군의 불우함을 거론하며 근심스럽게 여겨 슬퍼한 사람들은 모두 장차 겸연쩍어하면서 자신을 폄하(貶下)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

군이야말로 진정 내면의 만족을 얻어 외적인 영화를 잊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선비가 성공과 실패, 영예와 치욕의 갈림길에서 자주 운명을 뇌까린다면 참으로 운명을 모르는 자가 아니겠는가. 군은 일찍이 밭을 팔아 책을 사서 몸소 만 권을 이루고 날마다 서루(書樓)에서 강독하였으니, 방법에 대해서는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조그마한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C-001]낭천(狼川) …… 서문 : 낭천은 강원도에 있던 현()으로 지금의 화천군(華川郡)인데, 현감(縣監)이 다스렸다. 백수(伯修)는 심염조(沈念祖 : 1734~1783)의 자이다. 심염조는 연암의 젊은 시절 절친한 벗으로, 음관(蔭官)으로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거쳐 낭천 현감으로 나갔다. 1776년 문과에 급제하고, 1778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이덕무(李德懋)를 대동하고 연행(燕行)을 다녀왔으며, 정조의 총애를 받아 규장각 직제학, 홍문관 부제학,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D-001]맥국(貊國) : 지금의 강원도 춘천 지역에 맥족(貊族)이 세웠다는 소국(小國)이다.

[D-002]조달(早達) …… 있었다 : 이덕형(李德馨 : 1561~1613) 21세에 문과 급제하고 31세에 대제학이 되었으며 42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김수항(金壽恒 : 1629~1689) 23세에 문과 급제하고 34세에 예조 판서가 되었으며 44세에 우의정과 좌의정이 되었다.

[D-003]낭서(郞署) : 낭관(郞官)이라고도 하며, 주로 육조(六曹)의 정 5 품 벼슬인 정랑(正郞)이나 정 6 품 벼슬인 좌랑(佐郞)을 이른다.

[D-004]군을 …… 읊었지만 : 심염조와 송별할 때 사람들이 그의 불우함을 위로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는 뜻이다. 벗인 김기장(金基長)이 지은 송별시가 전한다. 在山集 卷7 送沈員外伯修出守狼川

[D-005]서루(書樓) : 김기장의 송별시에 설향루(雪香樓)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은산(殷山) 수령으로 나가는 서원덕(徐元德)을 송별하는 서문

 

 

옛날에는 사대부들이 내직(內職 중앙관직)을 중히 여기고 외직(外職 지방관직)은 가볍게 여겼다. 그래서 임금 측근의 친밀한 신하들은 정세상 조정에 있기 거북하거나 특명으로 견책을 당해 외직에 보임된 자가 아니면, 아무도 선뜻 고을살이로 자기 몸을 얽어매려 아니 하였으며, 재능과 지혜를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명예와 절조를 근엄하게 갖추었다. 대개 그 명망이 매우 높아서 스스로 처신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과 현격히 달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명성이 클수록 관직은 더욱 맑으며, 관직이 맑을수록 그 녹봉으로 받는 것이 더욱 청렴했다.

간혹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은 경우에는 관례적으로 걸군(乞郡)을 할 수 있지만, 웅장하게 큰 고을은 아무리 가득 찬 고을 창고를 차지하고 있고 어업과 소금 판매의 이익을 마음대로 한다 할지라도,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자신을 기름지게 하는 데 사용하여 명예와 절조를 훼손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번화하고 비옥한 지방을 다스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며, 반드시 산수가 뛰어난 지역을 선택하였다. 산에 오르고 물을 찾아가는 즐거움과 한적하고 후미진 정취가 있어야만 기꺼이 잠깐 외직으로 나가 휴식을 취하려고 하였다. 노계(露雞 야생 닭)와 석봉(石蜂)으로 몸을 보양할 만하고 기생의 춤과 노래로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지라, 날마다 나가 놀며 잔치를 열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살피지 않지만, 항상 위엄과 무게를 갖추고, 관직을 맡게 되느냐 그만두게 되느냐에 대해서는 하찮게 여겼다.

그러므로 관찰사도 그를 공경하면서 두려워하여, 공문(公文)으로 아뢰고 청하면 곡진히 들어주지 않음이 없으며, 늘 암행어사가 옆에서 감시하는 것같이 쉬지 않고 부지런히 근무하고 삼가고 경계하여 스스로 행실을 닦아나갔으며, 무관(武官)이나 음관(蔭官)으로 수령이 된 사람들은 이를 본받음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공을 거두었다. 백성들은 그의 간략함을 사모하고, 아전들은 그의 청렴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공적을 평가할 때는 노상 모든 고을 중에서 으뜸이었으니, 유독 위엄과 명망이 특별하고 명성과 위세를 과시해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청렴한 지조와 간략한 정사(政事)로 문치(文治)가 저절로 넉넉하여 조치를 번거롭게 시행하지 아니해도 효과가 착실히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근세에 와서 명환(名宦 명예롭게 여기는 벼슬)이 무너져 버리고 나자, 사대부들이 날로 더욱 태만하고 방자하여 조금도 명예를 소중히 여기지 않아, 염방(廉防)과 명론(名論)이 날로 따라서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처신함도 유품(流品)과 다름이 없으므로, 전택(田宅)이나 재산 마련을 일삼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일단 가산(家産)에 마음을 둔 이상에는 비옥한 고을의 수령 자리가 하나 나오면, 수만 명이 눈독을 들여 청탁이 어지럽게 쏟아지므로 세력이 강하고 민첩한 자가 아니면 마침내 한 번도 얻지 못하니, 그 자리를 얻기가 본디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밤낮으로 부서기회(簿書期會)하는 사이에 이익을 탐하게 된다. 그래서 예전에 위엄과 무게를 근엄하게 갖추었던 자들도 애써 자신을 억누르며, 대개는 단련되어 익숙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비단 감사나 병사(兵使)가 걸핏하면 군무(軍務)나 이사(吏事 관리의 사무)로써 서로 감찰하고 견책할 뿐만 아니라, 진사(鎭司)나 방영(防營)에서도 모두 상관(上官)으로서 탄압할 수 있으니, 호령을 따르고 받들 겨를도 없는데 설마 어찌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 잔치하며 여유 있게 즐길 수 있겠는가. 아아, 내직이 경시되고 외직이 중시됨으로써 사대부들이 비로소 재능과 지혜를 말하게 되었으니, 임금 측근의 친밀한 신하들이 진실로 휴식할 곳이 없게 된 셈이다.

벗 서군 원덕(徐君元德)이 홍문관 교리로서 은산 수령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가 떠나면서 굳이 나에게 한마디 말을 요구하므로, 나는 자중(自重)하여 상관에게 굽히지 말 것을 굳이 권면했다.

무릇 내직과 외직에 경중(輕重)을 두어 차별하는 것은 역시 외물(外物)에 기대하는 것이다. 군자가 이에 처하면서, 어찌 경중을 분별하며, 지금과 예전에 차이가 있으랴. 그러므로 군자는 밝은 때라 해서 자신의 절의를 드러내 보이려 하지 않고, 어두운 때라 해서 자신의 행실을 태만하게 하지 않는다.” 하였다. ‘자중하라고 말한 것은 그 지체와 명망으로 위엄 있고 무게 있게 굴라는 것이 아니요, ‘굽히지 말라고 한 것은 오만불손하라는 말이 아니다. 청렴하고 간략하며 깨끗하고 신중하면, 백성은 편안하고 아전은 두려워하며, 관직을 맡느냐 못 맡느냐를 하찮게 여긴다면, 상관이 하기 어려운 일로써 책임 지우지 아니하는 법이다. 이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외직을 중시하는 것이 재물이나 이득으로 인한 혜택 때문에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서군(徐君)으로부터 깨끗하고 명예로운 관직이 되었기 때문이라면, 은산은 진실로 장차 다른 고을에 솔선하여 우뚝이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바가 될 것이다. 무릇 이와 같이 된다면 지방에 있는 고을을 중시하는 데 대해 내가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직과 외직의 경중을 말한 것이 도도하면서도 근거가 있으니, 사대부의 관잠(官箴)이 될 만하다.

 

[C-001]은산(殷山) …… 서문 : 은산은 평안도에 속한 현()으로, 현감이 다스렸다. 원덕(元德)은 서유린(徐有隣 : 1738~1802)의 자이다. 서유린은 아우 서유방(徐有防)과 함께 약관 시절부터 연암과 절친한 사이로, 1766년 문과 급제 후 1769년 홍문관 수찬 · 교리 등을 거쳐 1770년경 은산 현감으로 나갔던 듯하다. 정조 즉위 후 관찰사, 참판, 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D-001]관직은 더욱 맑으며 : 비록 지위나 봉록은 높지 않으나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만이 임명될 수 있는 명예로운 관직을 청환(淸宦)이라 한다. 주로 홍문관 · 예문관 · 규장각 등의 당하관(堂下官)을 이른다.

[D-002]걸군(乞郡) : 지방 수령은 본인이나 처의 고향에는 부임하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나, 문과 급제자에 한하여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이나 고향 가까운 곳의 수령직을 청할 수 있는데 이를 걸군(乞郡)이라 한다.

[D-003]석봉(石蜂) : 바위틈에 집을 짓고 사는 석벌을 이른다. 석벌에서 얻는 꿀이 석청(石淸)이다.

[D-004]문치(文治) : 원문은 文理인데, 이는 문교(文敎)와 예악(禮樂)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문치와 같은 말이다.

[D-005]염방(廉防)과 명론(名論) : 염방은 염치와 예방(禮防) 즉 예법을 말하고, 명론은 사대부로서의 명망을 말한다.

[D-006]유품(流品) : 유품잡직(流品雜織)이라 하여, 문무 양반만이 맡는 정직(正職) 이외의 여러 가지 잡다한 벼슬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D-007]부서기회(簿書期會) : 1년 동안의 회계를 장부에 기입하여 기일 내에 조정에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D-008]감사나 병사(兵使) : 원문은 方伯連帥인데, 원래 방백(方伯)은 다섯 나라 제후들의 우두머리, 연수(連帥)는 열 나라 제후들의 우두머리를 뜻한다. 천자의 다음이며 제후보다 상위이다. 柳宗元 封建論 조선 시대에는 고을 수령을 천자국의 제후에 비겼으므로, 방백과 연수를 감사와 병사로 번역하였다.

[D-009]진사(鎭司)나 방영(防營) : 진사는 곧 진영(鎭營)으로, 여기서는 진영장(鎭營將)을 가리킨다. 각 도의 병영이나 수영에 소속된 정 3 품 무관 벼슬이다. 방영은 곧 방어영(防禦營)으로, 여기서는 방어사(防禦使)를 가리킨다.  2 품 무관 벼슬이다.

[D-010]군자는 …… 않는다 : () 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이 한 말로, 소학(小學) 계고(稽古)에 나온다. 그녀는 한밤중에 궁궐에 출입할 때 나는 수레바퀴의 소리만 듣고도, 그 수레를 탄 사람이 위 나라의 어진 대부(大夫) 거원(蘧瑗)임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거원은 어두운 밤일지라도 대궐 문 앞에서 반드시 하마례(下馬禮)를 행하고 어가(御駕)를 끄는 말에게 경례를 표하는 예의를 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릇 충신과 효자는夫忠臣與孝子으로 되어 있는 원문을 연암은 군자는君子으로 조금 고쳐 인용하였다.

[D-011]관잠(官箴) : 관리로서 지켜야 할 계율이라는 뜻이다. ()은 원래 문체의 하나로, 스스로 경계(警戒)하기 위해 짓는 글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대은암(大隱菴)에서 창수(唱酬)한 시의 서문

 

 

무인년 섣달 열나흗날 국지(國之 이구영(李耈永)), 의지(誼之 이서영(李舒永)), 원례(元禮 한문홍(韓文洪))와 함께 밤에 백악(白岳 북악산(北岳山)) 동쪽 기슭에 올라 대은암(大隱巖) 아래 줄지어 앉았노라니, 시냇물 언 것이 똑똑 떨어져 새어나오면서 층층이 얼어서 쌓여 있고, 얼음 밑의 그윽한 샘에서는 옥이 부딪듯 맑은 소리가 쓸쓸하게 들렸다. 달은 몹시 차고 눈은 가무스름하여, 지경은 고요하고 정신은 차분하였다. 서로 바라보며 웃고, 농담하면서 즐겁게 시를 주고받다가, 이윽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옛날 남곤 사화(南袞士華)가 살던 곳이다. 박은 중열(朴誾仲說)은 온 나라에 이름난 선비였는데 중열이 술을 마시려면 반드시 이 대은암으로 왔으며, 그가 시를 지을 적에는 사화와 더불어 짓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당시에 문장과 교유가 융성하여, 관리로 선발된 그 시대의 우수한 인재들을 망라하였다고 할 만했으나, 수백 년이 지나는 사이에 앞사람들의 명승고적은 모두 이미 묻히고 사라져서 알 수 없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더군다나 남곤 같은 자에 있어서랴.

지금 그 무너진 담장과 황폐해진 집터 사이에서 감개하여 서성대는 것은, 성쇠(盛衰)가 때가 있음을 슬피 여김과 동시에 선악(善惡)은 민멸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원례가 이곳에 잠시 거처하여 시를 노래하며 즐겁게 놀면서 흉금을 털어놓는 것이 거의 장차 중열과 맞먹을 정도인 데다, 시냇물과 솔바람에는 상기도 여운이 남아 있다.

아아, 그 두 사람이 여기에서 노닐 적에 그들의 의기(意氣)의 융성함이 또한 어떠했겠는가. 실컷 마시고 한껏 취하여 둘이 서로 속내를 다 털어놓고는 손을 맞잡고 길게 한숨지을 적에, 그 기개는 산악을 무너뜨릴 듯하고 그 언변은 황하나 한수(漢水 양자강의 지류)의 둑이 터진 듯하였을 것이니, 또한 천고(千古)의 인물들을 논평할 적에도 어찌 군자와 소인의 구별에 엄하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중열은 연산군의 조정에서 간()하다 죽었는데, 그의 시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적다고 한스럽게 여기게 된다. 지금도 그의 시를 읽어보면 늠름하여 확고히 설 수 있었음을 상상케 한다. 남곤은 북문(北門)의 화()를 열어 바른 사람들을 참살하였는데, 남곤이 바야흐로 죽을 적에 자신의 글을 다 불태우면서 말하기를, ‘이 글을 후세에 전한다 하더라도 누가 보려 하겠는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문장과 특별한 교유도 진실로 하나의 여사(餘事)일 따름이니, 그것이 어찌 그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관계되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군자인 경우에는 뒷사람이 그 자취를 사모하고 후세에까지도 그 전하는 시가 많지 않음을 한스러워하며, 소인인 경우에는 오히려 자기 손으로 글을 없애 버리기에 바빴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에 있어서랴.”

창수한 시는 대략 몇 편이다. 중미(仲美 연암)가 서문을 썼다.

 

[C-001]대은암(大隱菴)에서 …… 서문 : 영조 34년 무인년 12 14(양력 1759 1 12) 서울 북악(北岳) 동쪽 기슭의 대은암에서 연암이 벗들과 시를 창수한 사실은 이희천(李羲天 : 1738~1771) 석루유고(石樓遺稿) 화백록시서(和白麓詩序)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당시 함께한 사람들은 이희천의 당숙부(堂叔父)인 이구영(李耈永 : 1736~1787), 이희천의 족숙부(族叔父)인 이서영(李舒永 : 1736~1800), 연암과 과거(科擧) 공부를 같이 하던 한문홍(韓文洪 : 1736~1792)이었다. 김윤조, 역주 과정록, 태학사, 1997.

[D-001]남곤 사화(南袞士華) : 사화는 남곤(1471~1527)의 자이다. 남곤은 중종(中宗)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림파를 숙청하고 영의정까지 지냈다. 죽은 뒤에 사림파의 탄핵을 받아 시호와 관작을 삭탈당했다. 대은암(大隱巖)은 남곤의 집 뒤에 있던 바위였는데 그 밑을 흐르는 여울을 만리뢰(萬里瀨)라 하였다. 젊은 시절 남곤의 벗이었던 박은(朴誾)이 각각 그와 같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D-002]박은 중열(朴誾仲說) : 중열은 박은(1479~1504)의 자이다. 박은은 조선 중기의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연산군 때 직언(直言)으로 인해 파직되었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에 걸려 요절하였다.

[D-003]북문(北門)의 화() :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말한다. 기묘사화 때 남곤이 훈구 대신(勳舊大臣)들과 함께 승지와 사관들이 모르도록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와서 중종에게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죄를 청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자소집서(自笑集序)

 

 

아아, “예가 상실되면 재야에서 구한다.禮失而求諸野고 하더니 그 말이 틀림없지 않은가! 지금 중국 천하가 모두 머리 깎고 오랑캐 옷을 입어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알지 못한 지 이미 100여 년인데, 유독 연희(演戱) 마당에서만 오모(烏帽)와 단령(團領)과 옥대(玉帶)와 상홀(象笏 상아로 만든 홀)을 본떠서 장난과 웃음거리로 삼고 있다. 아아, 중원(中原)의 유로(遺老)들이 다 세상을 떠났지만, 그래도 혹시 낯을 가리지 않고는 차마 보지 못할 이가 있겠는가? 아니면 혹시 이 연희 마당에서 그것들을 즐겁게 구경하면서 예로부터 전해 온 제도를 상상하는 이라도 있겠는가?

세폐사(歲幣使 동지사)가 북경에 들어갔을 때 오() 지방 출신 인사와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고장에 머리 깎는 점방이 있는데 성세낙사(盛世樂事 태평성세의 즐거운 일)’라고 편액을 써 걸었소.”

하므로, 서로 보며 크게 웃다가 이윽고 눈물이 주르르 흐르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슬퍼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습관이 오래되면 본성이 되는 법이다. 세속에서 습관이 되었으니 어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부인들의 의복이 이 일과 매우 비슷하다. 옛 제도에는 띠가 있으며 모두 소매가 넓고 치마 길이가 길었는데, 고려 말에 이르러 원() 나라 공주에게 장가든 왕이 많아지면서 궁중의 수식(首飾)이나 복색이 모두 몽골의 오랑캐 제도가 되었다. 그러자 사대부들이 다투어 궁중의 양식을 숭모하여 마침내 풍속이 되어 버려, 3, 4백 년 된 지금까지도 그 제도가 변하지 않고 있다.

저고리 길이는 겨우 어깨를 덮을 정도이고 소매는 동여놓은 듯이 좁아 경망스럽고 단정치 못한 것이 너무도 한심스러운데, 여러 고을 기생들의 옷은 도리어 고아(古雅)한 제도를 간직하여 비녀를 꽂아 쪽을 찌고 원삼(圓衫)에 선을 둘렀다. 지금 그 옷의 넓은 소매가 여유 있고 긴 띠가 죽 드리워진 것을 보면 유달리 멋져 만족스럽다. 그런데 지금 비록 예()를 아는 집안이 있어서 그 경망스러운 습관을 고쳐 옛 제도를 회복하고자 하더라도, 세속의 습관이 오래되어 넓은 소매와 긴 띠를 기생의 의복과 흡사하다고 여기니, 그렇다면 그 옷을 찢어 버리고 제 남편을 꾸짖지 않을 여자가 있겠는가.”

이군 홍재(李君弘載)는 약관 시절부터 나에게 배웠으나 장성해서는 한역(漢譯 중국어 통역)을 익혔으니, 그 집안이 대대로 역관인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다시 문학을 권면하지 않았었다. 이군이 한역을 익히고 나서 관복을 갖추고 본원(本院 사역원(司譯院))에 출사(出仕)하였으므로, 나 역시 속으로 이군이 전에 글을 읽을 적에 자못 총명하여 문장의 도를 알았는데 지금은 거의 다 잊어버렸을 터이니, 재능이 사라지고 말 것이 한탄스럽다.’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이군이 자기가 지은 글들이라고 말하면서 자소집(自笑集)’이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 () 및 서(), (), (), ()  100여 편이 모두 해박한 내용에다 웅변을 토하고 있어 특색 있는 저작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처음에 의아해하며,

 

자신의 본업을 버리고 이런 쓸데없는 일에 종사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물었더니, 이군은 사과하기를,

 

이것이 바로 본업이며 과연 쓸데가 있습니다. 대개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외교에 있어서는 글을 잘 짓고 장고(掌故)에 익숙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원의 관리들이 밤낮으로 익히는 것은 모두 옛날의 문장이며, 글제를 주고 재주를 시험하는 것도 다 이것에서 취합니다.”

하였다. 나는 이에 낯빛을 고치고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대부가 태어나 어렸을 적에는 제법 글을 읽지만, 자라서는 공령(功令 과거 시험 문장)을 배워 화려하게 꾸미는 변려체(騈儷體)의 문장을 익숙하게 짓는다. 과거에 합격하고 나면 이를 변모(弁髦)나 전제(筌蹄)처럼 여기고, 합격하지 못하면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거기에 매달린다. 그러니 어찌 다시 이른바 옛날의 문장이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역관의 직업은 사대부들이 얕잡아 보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훌륭한 글을 남기는 참된 학문을도리어 서리들의 하찮은 기예로 간주하게 될까 두렵다. 그렇게 되면 연희 마당의 오모나 고을 기생들의 긴 치마처럼 여기지 않을 자가 거의 드물것이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이 점을 두려워하여 이 문집에 대해 특별히 쓰고 나서, 다음과 같이 서문을 붙인다.

아아, “예가 상실되면 재야에서 구한다.”고 하였다. 중국 고유의 예로부터 전해 온 제도를 보려면 마땅히 배우들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요, 부인 옷의 고아(古雅)함을 찾으려면 마땅히 고을 기생들에게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장의 융성함을 알고 싶다면 나는 실로 미천한 관리인 역관들에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D-001]예가 …… 구한다 : 한서 30 예문지(藝文志)에 인용된 공자(孔子)의 말이다. 안사고(顔師古)는 주()에서 도읍(都邑)에서 예가 사라졌을 경우 재야에서 구하면 역시 장차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였다.

[D-002]한관(漢官)의 위의(威儀) : () 나라 관리들의 위엄 있는 복식과 전례(典禮) 제도라는 말로, 중화(中華)의 예의 제도를 뜻한다.

[D-003]중원(中原)의 유로(遺老) : 한족(漢族) 왕조인 망한 명() 나라에 대해 여전히 신민(臣民)으로서 충성을 다하는 노인 세대를 가리킨다.

[D-004]() 지방 출신 인사 : () 지방은 중국의 동남쪽 강소성(江蘇省) · 절강성(浙江省) 일대를 가리킨다. 이 지역 사람들은 학문과 예술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명 나라 말에 최후까지 만주족의 침략에 저항하여 유달리 반청(反淸) 사상이 강하였다.

[D-005]소매 : 원문은 인데, ‘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6]()를 아는 집안 :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과 예의 범절을 대대로 전승해 오는 명문가를 시례지가(詩禮之家)’라고 한다. 연암의 집안에서는 5대조 박미(朴瀰)의 부인 정안옹주(貞安翁主)가 중국식의 상복(上服)을 착용한 이후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이를 집안의 예()로 확정했으며, 조부 박필균(朴弼均)도 집안 부인네에게 이를 따르게 했다고 한다. 居家雜服攷 內服

[D-007]이군 홍재(李君弘載) : 홍재는 이양재(李亮載 : 1751~?)의 초명(初名)이다. 이양재는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이언용(李彦容)의 아들이다. 1771(영조 48) 역과(譯科)에 급제하고 사역원(司譯院)에 재직하였다. 譯科榜目 원문은 李君인데, ‘弘載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아래에 나오는 李君은 모두 같다.

[D-008] …… 때문이었다 : 원문은 乃其家世舌官인데, ‘ 자가 추가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9]재능이 …… 한탄스럽다 : 원문은 乾沒可歎인데 간몰(乾沒)’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여기에서는 물속으로 침몰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D-010]특색 있는 …… 있었다 : 원문은 勒成一家인데, 글을 엮어 책을 만드는 것을 늑위성서(勒爲成書)’  늑성(勒成)’이라 하고, 특색 있는 저작을 일가서(一家書)’라고 한다.

[D-011]과연 쓸데가 있습니다 : 대본은 果有用 則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이 되면 문리가 잘 통하지 않아, 이본에 따라 고쳐 번역하였다.

[D-012]변모(弁髦)나 전제(筌蹄) : 무용지물을 뜻한다. 변모는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면 쓸데없는 치포관(緇布冠)과 동자(童子)의 다팔머리를 말하고, 전제는 물고기를 잡고 나면 쓸데없는 통발과 토끼를 잡고 나면 쓸데없는 올가미를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유구(悠久)에게 증정한 서문

 

 

이유구(李悠久)가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장차 평안도의 영유현(永柔縣)으로 가게 되었으므로, 그와 더불어 노닐던 이들이 다 그 집에서 전송하였는데, 죄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노닐고 함께 거처하며 글을 읽고 의리를 이야기하곤 했는데, 지금 유구가 벗들을 버리고 학업조차 중단하고, 서울에서 600리나 떨어진 곳으로 떠나가 벗들과 헤어져서 외로이 지내게 되었단 말인가.

평안도는 산수가 아름답고 도회지가 풍요하고 웅대하며, 풍속이 사치스럽고 방탕하였다. 밖에 나가면 누관(樓觀)을 유람하고, 들어앉으면 기악(妓樂)을 즐기며, 편을 나누어 쌍륙(雙陸) 놀이를 하고 무리를 지어 투호(投壺) 놀이를 하며, 맑은 노래와 칼춤이 늘 좌우에 있으니, 그만하면 서울 생각도 잊을 만하고 외로이 지내는 근심을 위로할 만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안색은 우울해하는 것 같고 풀이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과도 같다. 나는 이로써 유구가 오래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며, 벗들과 헤어져 외로이 지내지 않을 것임을 안다. 남아 있는 사람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을 것이 아니요, 떠난 사람은 반드시 속히 돌아올 것임을 안다. 이런 까닭에 나는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어떤 이가,

 

유구가 비록 배움을 위해서라 하지만 장차 혼정신성(昏定晨省 부모님을 보살펴 드리는 예의)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은 어찌하겠는가?”

하기에, 나는,

 

옛사람 중에는 수천 리 먼곳으로 유학하는 사람도 있었네. 하물며 그의 부모님이 아직 늙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을 오래 붙잡아둘 분들이 아님에랴!”

했더니, 모두들

 

그렇겠다.”

고 했다.

 

 

[C-001]유구(悠久) : 이영원(李英遠 : 1739~1799)의 자이다. 이영원은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경상 감사, 대사헌, 한성부 판윤 등을 지낸 이연상(李衍祥)의 아들로서, 1774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그의 부친 이연상은 1759년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한 이후 1771년 문과 급제하기 전까지 신녕 현감(新寧縣監) 등 지방관으로 전전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여름날 밤잔치의 기록

 

 

스무이튿날 국옹(麯翁)과 함께 걸어서 담헌(湛軒)의 집에 이르렀다. 풍무(風舞)가 밤에 왔다. 담헌이 가야금을 타니, 풍무는 거문고로 화답하고, 국옹은 맨상투 바람으로 노래를 불렀다. 밤이 깊어 떠도는 구름이 사방으로 얽히고 더운 기운이 잠깐 물러가자, 줄에서 나는 소리는 더욱 맑게 들렸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하고 있어 마치 단가(丹家)가 장신(臟神)을 내관(內觀)하고 참선하는 승려가 전생(前生)을 돈오(頓悟)하는 것 같았다. 무릇 자신을 돌아보아 올바를 경우에는 삼군(三軍)이라도 반드시 가서 대적한다더니, 국옹은 한창 노래 부를 때는 옷을 훨훨 벗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품이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여겼다.

매탕(梅宕)이 언젠가 처마 사이에서 왕거미가 거미줄 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나에게 말하기를,

 

절묘하더군요! 때로 머뭇거리는 것은 마치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고, 때로 재빨리 움직이는 것은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으며, 파종한 보리를 발로 밟아주는 것과 같고, 거문고 줄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과도 같습디다.”

하더니, 지금 담헌이 풍무와 어우러져 연주하는 것을 보고서 나는 왕거미의 행동을 깨우치게 되었다.

지난해 여름에 내가 담헌의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담헌은 한창 악사(樂師) ()과 함께 거문고에 대해 논하는 중이었다. 때마침 비가 올 듯이 동쪽 하늘가의 구름이 먹빛과 같아, 천둥소리 한 번이면 용이 승천하여 비를 부를 수 있을 듯싶었다. 이윽고 긴 천둥소리가 하늘을 지나가자, 담헌이 연()더러

 

이것은 무슨 성()에 속하겠는가?”

하고서, 마침내 거문고를 당겨 천둥 소리와 곡조를 맞추었다. 이에 나도 천뢰조(天雷操)를 지었다.

 

 

[D-001]국옹(麯翁) : 누구의 호인지 알 수 없다. 홍대용(洪大容)의 벗으로, ()은 이씨(李氏)이며 시와 글씨에 빼어났다고 한다. 湛軒書 內集 卷3 次友人韻却寄李麯翁 국옹은 혹시 이한진(李漢鎭 : 1732~1815. 호 경산京山)의 일호(一號)일지 모른다. 이한진은 명필로서 전서(篆書)를 특히 잘 썼을 뿐 아니라 음률에도 밝았으며, 퉁소의 명수로서 홍대용, 김억(金檍) 등과 즐겨 합주(合奏)하였다고 한다. 만년에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하기도 했다.

[D-002]담헌(湛軒) : 홍대용의 당호이다. 담헌의 집은 서울 남산 기슭 영희전(永禧殿) 북쪽에 있었는데 그 집의 유춘오(留春塢)라는 정원에서 악회(樂會)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D-003]풍무(風舞) : 김억(金檍 : 1746~?)의 호이다. 본관은 청양(靑陽)이고 자는 효직(孝直)이며,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김종택(金宗澤)의 아들이다. 1774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금사(琴師)이자 가객(歌客)으로 유명하였다.

[D-004]떠도는 …… 물러가자 : 원문은 流雲四綴 暑氣乍退인데, 종북소선에는 暑氣乍退 流雲四綴로 되어 있다.

[D-005]줄에서 나는 소리 : 원문은 絃聲인데, 종북소선에는 兩絃으로 되어 있다.

[D-006]단가(丹家)가 장신(臟神)을 내관(內觀)하고 : 단가는 연단술(煉丹術)을 행하는 도사(道士)를 이른다. 연단술은 기공(氣功)으로 정신을 수련하는 내단(內丹)과 약물을 복용하는 외단(外丹)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단에서 오장(五臟)에 깃든 신()을 관조하는 수련법을 내관이라 한다.

[D-007]무릇 …… 대적한다더니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부동심(不動心)의 방법으로 용기(勇氣)에 관해 논한 대목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거기에서 증자(曾子)는 공자로부터 대용(大勇)에 관해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아 올바를 경우에는 비록 수천 수만 명이라도 나는 가서 대적할 것이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고 하였다. 여기서 ()’ 자는 ()’ 자와 뜻이 같다.

[D-008]두 다리를 ……  : 원문은 磅礴인데, 종북소선에는 盤礡으로 되어 있다. 서로 같은 말로, 무례하게 두 다리를 쭉 뻗은 모습을 뜻한다.

[D-009]매탕(梅宕) : 이덕무(李德懋)의 일호(一號)이다. 종북소선에는 炯菴으로 되어 있는데, 이 역시 이덕무의 일호이다.

[D-010]절묘하더군요 …… 같습디다 :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서 이덕무가 거미가 줄을 치는 모습을 관찰하고서 한 말과 같다. 靑莊館全書 卷63

[D-011]지금 …… 보고서 : 원문은 今湛軒與風舞相和也인데, 종북소선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2]() : 연익성(延益成)이다. 담헌서(潭軒書) 내집(內集) 4 연익성에 대한 제문祭延益成文이 실려 있는데, 이에 따르면 연익성은 뛰어난 거문고 연주가로서 장악원(掌樂院)의 악공을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53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홍대용과는 30년 동안 교유하였다고 한다.

[D-013]용이 …… 듯싶었다 : 원문은 可以龍矣인데 문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可以龍이든 可以龍矣이든 글자가 누락된 듯하기에 문맥을 감안하여 의역하였다.

[D-014]이것은 …… 속하겠는가 : 전통음악의 다섯 가지 기본 음률인 궁() · () · () · () · ()의 오성(五聲) 중 어디에 속하느냐고 물은 것이다.

[D-015]나도 …… 지었다 : ()는 금곡(琴曲)에 붙이는 명칭이다. 여기서는 천뢰조라는 금곡의 가사(歌辭)를 지었다는 뜻이다. 종북소선에는 이 구절이 終未得云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마침내 거문고를 당겨 그에 맞추어 조율하였으나, 끝내 조율하지 못하였다.”라고 번역해야 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초구(貂裘)에 대한 기록

 

 

선문왕(宣文王)이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 있다가 돌아와서는 개연히 복수할 뜻을 품었으니, 하루라도 심양에 있던 날을 잊을 수 없어서였다. 이때 명() 나라가 망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 나라가 이미 천하에서 뜻을 이루어 세계만방을 예속시킴에 따라, 중국 천하의 사대부들이 모두 이미 머리 깎고 오랑캐 옷을 입었으며, 그 조정에 나아가 그 임금을 섬기는 자들 역시 이미 있었으니, 천하에 다시 명 나라 왕실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독 선문왕의 뜻만은 언제나 명 나라의 왕실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선문왕이 대통(大統)을 이어받은 뒤 맨 먼저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을 초빙하여 빈사(賓師)의 예로써 대우하고, 위대한 명 나라大明의 원수를 갚고 선왕(先王)의 치욕을 씻을 방법을 도모했으니, 이는 먼저 배우고 난 뒤에 신하로 대하려는 것이었다. 선생은 아침저녁으로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아뢰었는데, 왕이 그 말을 즐겨 들음으로써 산중에 은거하던 선비들이 모두 나와서 왕의 조정에 줄을 잇게 되었다.

하루는 선생이 대궐에서 숙직하고 있었는데 세자가 무릎을 꿇고서 왕이 손수 쓴 편지를 직접 건네주므로, 선생은 달려나아가 조정에 입시(入侍)하였다. 왕이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초구(貂裘)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연계(燕薊)에는 추위가 일찍 오니 이것으로 바람과 눈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이에 선생은 드디어 왕에게 있는 힘을 다할 것을 약속하였으니, 대개 앞으로 10년 동안 인구를 늘리고 물자를 비축한 뒤에 대의(大義)를 천하에 떨쳐, 비록 임금과 신하가 함께 군중(軍中)에서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얼마 안 있어 왕이 승하하고 나자 산중에 은거하던 선비들도 차차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떠나갔다. 선생은 이미 물러나 파곡(葩谷)에 살고 있었는데, 늘 혼자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 가슴을 치고 하늘에 부르짖으며 초구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적신(賊臣)들 중에 음해하고자 하는 자들이 많아 유언비어를 만들어 청 나라에 넌지시 알리니, 청 나라 사람들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 이르렀다.

선생이 안으로는 이미 적신들에게 자주 배척을 당하고 밖으로는 청 나라 사람들에게 협박을 받았지만, 배우는 사람들과 더불어 반드시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하여 선왕(先王 효종(孝宗))의 뜻을 밝히니, 선왕에게서 뜻을 얻지 못한 자들이 선생을 많이 원망하여 선생을 여러 번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선생은 바닷가로 귀양 가서도, 춘추대의를 펴지 못하고 종주국(宗主國 명 나라)이 장차 위태로워질 것을 원통히 여기고, 매양 선왕을 추모하며 초구를 안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침내 죄인들이 다 처벌을 받고 선생은 돌아오게 되었으나, 선왕의 유신(遺臣)들은 이미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에 다시는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일을 말하지 않고, 아득한 40년 세월 동안 조공(朝貢)하는 사신이 해마다 연계(燕薊)의 교외를 달려가게 되었다.

급기야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적신들이 다시 정권을 쥐자, 선생이 선왕에게 불만을 품어 종통(宗統)을 폄하시키고 복()을 낮추었다고 하여 끝내 죽음에 몰아넣고 말았으니, 국내에서는 마침내 초구에 대한 일에 관해 말하기를 꺼렸다. 문인들이 선생의 유명(遺命)에 따라 파곡(葩谷)에 사우(祠宇)를 세워 명 나라 현황제(顯皇帝 신종(神宗))와 열황제(烈皇帝 의종(毅宗))를 제사하였다. 숙종(肅宗) 때 금원(禁苑)에 대보단(大報壇)을 쌓아 두 분 황제를 아울러 제사하면서도, 파곡의 사우를 보존하여 선생의 의리를 잊지 않게 하였다.

지금 임금今上 영조(英祖)32년에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게 되어 선생의 자손이 선생의 유상(遺像)과 초구를 받들어 임금께 올리니, 임금께서 찬()을 지어 내렸다. 3 19일은 열황제가 사직을 위해 순절(殉節)하신 날이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이후 세 번째 돌아오는 갑신년(1764, 영조 40)에 임금께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친히 대보단에 제사를 지냈다.

이에 즈음하여 마을 안의 부형들이 성() 서쪽에 있는 송씨의 우사(寓舍)로 가서, 선생의 초상에 절하고 초구를 꺼내어 대청 가운데에 펼쳐 놓고 서로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모두 나에게 부탁하기를,

 

곡부(曲阜)의 공자 후손들은 공자가 신던 신발을 보배로 여겼고, 정호(鼎湖)의 신하들은 떨어진 황제(黃帝)의 활을 안고 울었다네. 더구나 이 초구는 선왕께서 하사하시고 선생께서 받으신 것이 아닌가. 더더구나 열황제가 순절하신 때가 바로 이해요 이날이 아닌가!”

하기에,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공손히 손 모아 큰절하며 수락하였다. 다음과 같이 시를 덧붙인다.

 

우리 선왕에게도 / 維我先王

위에 임금 있었나니 / 亦維有君

대명의 천자님은 / 大明天子

우리 임금의 임금일레 / 我君之君

선왕에게 신하 있었나니 / 先王有臣

이름은 시열 자는 영보라 / 時烈英甫

천자님께 충성하길 / 忠于天子

제 임금께 충성하듯 했네 / 如忠其主

선왕에게 원수 있었나니 / 先王有仇

저 건주 오랑캐라 / 維彼建州

어찌 단지 사감(私憾) 때문이리 / 豈獨我私

대국의 원수로세 / 大邦之讎

왕께서 복수코자 / 王欲報之

대로 불러 상의하며 / 大老與謀

힘쓸지어다 / 王曰懋哉

초구를 하사하노라 하셨네 / 賜汝貂裘

서리 만난 갖옷은 / 秋毫啣霜

북쪽 변방에서 빛을 발했을 텐데 / 紫塞騰光

큰 공을 못 이룬 채 / 大功未集

왕이 문득 승하하셨네 / 王遽陟方

대로는 상심하여 / 大老其寒

갖옷 안고 눈물 흘리니 / 抱裘而泣

그 눈물 땅에 가득 / 其淚滿地

벽옥으로 변했고야 / 化而爲碧

갖옷 아니면 추워서가 아니라 / 匪裘不溫

미처 입지 못한 때문이요 / 未服是矣

선왕께서 내린 명령 / 先王之命

좌절된 때문일레 / 命獘是矣

오늘 저녁이 어느 땐고 / 今夕何辰

세 번째 돌아온 갑신년이라 / 甲其三申

우리는 망한 명 나라의 백성이요 / 明之遺民

선왕은 성인이셨네 / 先王聖人

 

 

[D-001]선문왕(宣文王) : 효종(孝宗)이다. 효종은 시호(諡號)가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이다.

[D-002]빈사(賓師)의 예로써 대우하고 : 빈사는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군주로부터 귀빈 대접을 받는 사람을 이른다. 대본은 以賓師之禮인데, ‘ 자 다음에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3]선왕(先王) : 청 나라에 항복한 인조(仁祖)를 가리킨다.

[D-004]먼저 ……  : 군주가 현인(賢人)을 초빙할 경우 신하로 삼기 이전에 먼저 스승으로 섬긴다는 뜻이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 탕왕(湯王)은 이윤(伊尹)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들지 않게 왕도(王道)를 행하였고,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들지 않게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하였다.

[D-005]성의 정심(誠意正心)의 학문 : 대학(大學)을 이른다. 여기에서 군주가 자신의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짐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화평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서도 대학의 말을 인용하고 나서 옛날의 이른바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뜻을 성실히 하는 이는 장차 그럼으로써 큰 일을 하려는 것이었다.” 하였다.

[D-006]초구(貂裘) :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갖옷을 말한다. 값비싼 방한복이다.

[D-007]연계(燕薊) : 유계(幽薊)라고도 하며, 옛 연() 나라 땅인 유주(幽州) 계지(薊地), 즉 지금의 북경을 포함한 하북성(河北省) 일대를 가리킨다.

[D-008]10 …… 뒤에 : 원문은 生聚十年인데, 이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원년(元年) 조에 월() 나라가 “10년 동안 인구를 늘리고 물자를 비축하며, 10년 동안 백성을 잘 가르치면十年生聚 而十年敎訓” 20년 뒤에는 오() 나라가 월 나라에게 망할 것이라고 우려한 오자서(伍子胥)의 말에 출처를 둔 것이다. 그러므로 상하가 합심해서 부국강병을 도모하여 원수를 갚는 것을 생취교훈(生聚敎訓)’이라 한다.

[D-009]파곡(葩谷) :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에 있는 화양동(華陽洞) 구곡(九曲) 중의 제 9 곡인 파곶(葩串 : 또는 巴串)을 말한다

[D-010]적신(賊臣) …… 알리니 : 1650(효종 1)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 나라에 조선의 북벌계획을 밀고한 사실을 이른다.

[D-011]춘추대의(春秋大義) : 춘추에서 강조한바 주() 나라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의리를 이른다. 여기서는 명 나라를 존숭하고 청 나라를 배척하는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의리를 이른다.

[D-012]바닷가로 귀양 가서도 : 효종비(孝宗妃)의 상()으로 인한 갑인년(1674)의 예송(禮訟)에서 서인(西人)들이 남인(南人)들에게 패함에 따라 우암도 파직, 삭탈되고 경상도 장기(長鬐)와 거제도(巨濟島) 등지로 귀양 간 사실을 이른다.

[D-013]죄인들이 …… 되었으나 : 1680(숙종 6)의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들이 정계에서 숙청되고 서인들이 복귀한 사건을 이른다. 당시 우암은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고, 이어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D-014]급기야 …… 말았으니 : 1689(숙종 15)의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들이 숙청되고 남인들이 재집권한 사건을 이른다. 당시 숙종이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후궁 장씨(張氏)의 소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해 우암이 상소를 올려 다시 반대론을 제기하자, 이에 격분한 숙종은 우암을 비롯한 서인들을 축출하고 남인들을 불러들였다. 우암은 세자 책봉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기해년(1659)의 예송(禮訟)에서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을 둘로 나누고 효종이 적장자(嫡長子)가 아니라는 이유로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의 복상을 삼년복(三年服)이 아닌 기년복(朞年服)으로 강등시켰다는 공격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D-015]사우(祠宇) : 화양동(華陽洞)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를 가리킨다.

[D-016]() …… 우사(寓舍) : 대본은 宋氏城西之寓舍로 되어 있으나, 이본에 의거하여 宋氏之城西寓舍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D-017]곡부(曲阜) :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공자의 고향이다. 동관한기(東觀漢記) 동평헌왕창(東平憲王蒼) () 나라 공씨(孔氏)들이 아직까지도 중니의 수레, 가마, (), 신발을 간직하고 있으니, 훌륭한 덕을 지녔던 사람은 그 영광이 멀리까지 미침을 밝힌 것이다.” 하였다.

[D-018]정호(鼎湖) …… 울었다네 : 정호는 옛날에 황제(黃帝)가 솥을 만들고 난 뒤 승천(昇天)했다는 곳이다. 사기 28 봉선서(封禪書), 황제가 용을 타고 신하와 후비(后妃) 70여 인도 함께 용에 올라타고 승천하자 남아 있던 신하들이 함께 가려고 용의 수염을 잡았는데, 용의 수염이 빠지면서 신하들은 추락하고 황제의 활과 검도 함께 떨어졌다고 하였다. 제왕(帝王)의 서거를 슬퍼하는 고사로 쓰인다. 화양구곡(華陽九曲)에 읍궁암(泣弓巖)이 있다.

[D-019]건주(建州) : 지금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동남 지역으로, 이곳의 여진족(女眞族)들이 중심이 되어 청 나라를 세웠다.

[D-020]대로(大老) : 덕망 높은 노인이란 뜻으로, 노론에서 송시열을 높여 대로라고 불렀다.

[D-021]벽옥으로 변했고야 : 장자 외물(外物)에 주() 나라 영왕(靈王)의 어진 신하인 장홍(萇弘)이 쫓겨나서 촉() 땅에서 배를 갈라 죽었는데 그 피를 3년 동안 간직해 두었더니 벽옥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충신열사가 흘린 피를 벽혈(碧血)이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조부께서 손수 쓰신 한림(翰林) 추천서에 대한 기록

 

 

아아, 이는 나의 조부께서 한림 추천을 맡았을 때 손수 두 사람의 이름을 쓴 것이다. 그 두 사람이 누군가 하면 영의정 신공 만(申公晩)과 이조 판서 윤공 급(尹公汲)이다.

우리 왕조가 건국한 지 이미 오래되다 보니 사대부들이 전적으로 문벌만을 숭상하는데, 그 문벌의 청환(淸宦)으로는 한림과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이조의 정랑(正郞)과 좌랑은 3품 이하의 관원에 대해서 통색(通塞)을 모두 주관하며 또 자기 후임을 스스로 추천하지만, 그 이름과 지위는 낭서(郞署)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한림의 고사(故事 오래된 규례)에는 회천(回薦)이 대문에 이르러, 예문관에 소속된 하인이 고사에 따라,

 

자리에 계신 분들은 회피하셔야겠습니다.”

하고 아뢰면, 아무리 대관(大官)이라도 전에 검열을 지낸 사람이 아니면 으레 다 자리를 피해야 한다. 선발에 든 사람이 문벌과 재학(才學)에 털끝만큼의 하자도 지적되지 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완천(完薦 추천완료)이 되었다. 완천한 날에는 분향하고 맹세하기를,

 

추천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면 재앙이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것은 사관(史官)의 직무를 중히 여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벼슬은 비록 낮으나 어디에도 통제되고 소속되지 않았으니, 이조의 정랑과 좌랑에 비해서 이름이 더욱 화려하고 돋보였다.

옛날에 종더러 말에게 콩을 더 주라고 훈계한 자가 있었고, 곡식을 말릴 적에 직접 참새를 쫓아 버린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좀스럽다는 비방을 입어 종신토록 청선(淸選)이 막히고 말았다. 말에게 콩을 더 주도록 하고 참새를 쫓아 버린 것이 그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너무도 각박하다는 혐의를 거의 면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대부들이 집에서 생활할 적에도 오히려 모든 일에 친히 관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관직 생활을 할 적에 청렴한 절조를 함양하고 명론(名論 명망)을 중히 여기기를 바라는 것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이로써 본다면, 사소한 부분을 질책하는 것은 너무도 각박한 데 가까운 것이 아니라, 바로 사대부를 특별히 함양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 문벌과 재학이 한림의 선발에 충분히 들 만한 사람이라면, 비록 10년 동안이나 관리로 등용되지 못할지라도 오히려 스스로 기다리며, 등급을 뛰어넘어 승진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로자(當路者)들은 명론이 하급 관원들에게 있는 것을 싫어하여, 마침내 한림의 고사를 일체 파괴해서 한림 추천을 소시(召試)로 바꾸고, 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일반 관리로 만들어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사대부들이 거침없이 날로 부귀영달의 길로 치달려, 한 자급(資級)이나 반 자급이라도 혹시 남에게 뒤질까봐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었으니, 300년 동안 사대부를 특별히 함양했던 제도가 거의 다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아아, 기거주(起居注)는 시정기(時政記)와 일력(日曆)을 맡은 중책인데도 분향하고 맹세하는 말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누가 다시 조부의 이 글이 한림의 고사와 관계된 것인 줄을 알겠는가. 조부께서 한림으로 추천한 두 분은 오히려 사대부들이 관직에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게 하고 명예를 지키도록 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으며, 편지 글씨가 모두 대단히 뛰어나서 당시에 벼슬아치들이 이를 본떴다고 한다.

 

 

[C-001]조부께서 …… 기록 : 연암의 조부 박필균(朴弼均 : 1685~1760) 1729(영조 5)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로서 한림(翰林) 즉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의 후보자 추천을 맡았던 사실을 말한다. 연암집 9에 실린 조부 박필균의 가장(家狀)에도 중요한 사실로 언급되어 있다.

[D-001]신공 만(申公晩) : 신만(1703~1765) 1762(영조 38)에 영의정이 되었다.

[D-002]윤공 급(尹公汲) : 윤급(1697~1770) 1763(영조 39)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D-003]통색(通塞) : 등용과 저지라는 뜻으로, 관원에 대한 추천권을 말한다. 일반 관직의 후보자로 천거하는 것을 통망(通望), 청환(淸宦)의 후보자로 천거하는 것을 통청(通淸)이라 한다.

[D-004]회천(回薦) : 예문관 검열의 후보자를 정한 뒤에 추천서를 가지고 전 · 현직 검열을 지낸 선배들을 두루 찾아가 가부를 묻는 것을 말한다. 그중의 단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추천할 수 없게 된다.

[D-005]청선(淸選) : 청환(淸宦)의 후보자로 선발되는 것을 말한다.

[D-006]당로자(當路者)들은 …… 만들어 버렸다 : 영조 17(1741)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이 영조의 탕평책에 호응하여, 한림에 대해 회천(回薦)하던 규례를 혁파하고 제술(製述)을 시험하여 선발하는 한림소시(翰林召試)의 제도를 만들고, 아울러 이조의 정랑과 좌랑이 통청(通淸)하던 규례도 혁파한 사실을 말한다. 그중 특히 한림 회천은 국초부터 300년 동안 전해 내려온 규례였으므로, 이를 혁파하는 데 대한 반발이 적지 않았다. 英祖實錄 17 4 19, 22, 25

[D-007]파괴해서 : 원문은 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勝溪文庫) 필사본에는 로 되어 있다.

[D-008]기거주(起居注) : 예문관 검열을 말한다. 원래 기거주는 고려 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 5 품 관직으로, 사관직(史官職)을 주로 하고 간쟁(諫爭)과 봉박(封駁)의 임무를 지닌 간관(諫官)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예문관 검열이 사관(史官)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D-009]시정기(時政記) : 임금이 정무를 집행할 때에 있었던 중요 사안들을 훗날 실록(實錄) 편찬의 자료로 삼기 위해서 사관이 추려 적은 기록을 말한다.

[D-010]맹세하는 : 원문은 誓祝인데, ‘祝誓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1]편지 …… 한다 : 특히 윤급의 편지 글씨체는 윤상서체(尹尙書體)’라 하여 사람들이 다투어 모방했다고 한다. 槿域書畫徵 卷5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소완정(素玩亭)의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에 화답하다

 

 

유월 어느날 낙서(洛瑞)가 밤에 나를 찾아왔다가 돌아가서 기()를 지었는데, 그 기에,

 

내가 연암(燕巖) 어른을 방문한즉, 어른은 사흘이나 굶은 채 망건도 쓰지 않고 버선도 신지 않고서, 창문턱에 다리를 걸쳐 놓고 누워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계셨다.”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연암이란 금천(金川)의 협곡에 있는 나의 거처인데, 남들이 이것으로 내 호()를 삼은 것이었다. 나의 식구들은 이때 광릉(廣陵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었다.

나는 본래 몸이 비대하여 더위가 괴로울 뿐더러,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푹푹 찌고 여름이면 모기와 파리가 들끓고 무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을 것을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매양 여름만 되면 늘 서울집에서 더위를 피하는데, 서울집은 비록 지대가 낮고 비좁았지만, 모기 · 개구리 ·  · 나무의 괴로움은 없었다. 여종 하나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문득 눈병이 나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주인을 버리고 나가 버려서, 밥을 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행랑 사람에게 밥을 부쳐 먹다 보니 자연히 친숙해졌으며, 저들 역시 나의 노비인 양 시키는 일 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고요히 지내노라면 마음속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가끔 시골에서 보낸 편지를 받더라도 평안하다는 글자만 훑어볼 뿐이었다. 갈수록 등한하고 게으른 것이 버릇이 되어, 남의 경조사에도 일체 발을 끊어버렸다. 혹은 여러 날 동안 세수도 하지 않고, 혹은 열흘 동안 망건도 쓰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간혹 말없이 차분하게 앉았기도 하였다. 어쩌다 땔나무를 파는 자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서 그와 함께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간곡하게 하는 말이 종종 수백 마디였다. 사람들이 간혹 힐책하기를, 세상 물정에 어둡고 얼토당토아니하며 조리가 없어 지겹다고 해도 이야기를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집에 있어도 손님이요 아내가 있어도 중과 같다고 기롱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느긋해하며, 바야흐로 한 가지도 할 일이 없는 것을 스스로 만족스러워하였다.

새끼 까치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짤뚝거리니 보기에도 우습길래, 밥알을 던져주었더니 더욱 길들여져 날마다 와서 서로 친해졌다. 마침내 그 새를 두고 농담하기를,

 

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하였다. 우리나라의 속어에 엽전을 푼이라 하므로, 돈을 맹상군이라 일컬은 것이다.

자다가 깨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자도 깨워주는 이가 없으므로, 혹은 종일토록 실컷 자기도 하고, 때로는 글을 저술하여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그마한 철현금(鐵絃琴)을 새로 배워, 권태로우면 두어 가락 타기도 하였다. 혹은 친구가 술을 보내주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흔쾌히 술을 따라 마셨다. 술이 취하고 나서 자찬(自贊)하기를,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양주(楊朱)와 같고 / 吾爲我似楊氏

만인을 고루 사랑하는 것은 묵적(墨翟)과 같고 / 兼愛似墨氏

양식이 자주 떨어짐은 안회(顔回)와 같고 / 屢空似顔氏

꼼짝하지 않는 것은 노자(老子)와 같고 / 尸居似老氏

활달한 것은 장자(莊子)와 같고 / 曠達似莊氏

참선하는 것은 석가(釋迦)와 같고 / 參禪似釋氏

공손하지 않은 것은 유하혜(柳下惠)와 같고 / 不恭似柳下惠

술을 마셔대는 것은 유영(劉伶)과 같고 / 飮酒似劉伶

밥을 얻어먹는 것은 한신(韓信)과 같고 / 寄食似韓信

잠을 잘 자는 것은 진단(陳摶)과 같고 / 善睡似陳搏

거문고를 타는 것은 자상(子桑)과 같고 / 皷琴似子桑

글을 저술하는 것은 양웅(揚雄)과 같고 / 著書似揚雄

자신을 옛 인물과 비교함은 공명(孔明)과 같으니 / 自比似孔明

나는 거의 성인에 가까울 것이로다 / 吾殆其聖矣乎

다만 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 但長遜曹交

청렴함은 오릉(於陵)에 못 미치니 / 廉讓於陵

부끄럽기 짝이 없도다 / 慚愧慚愧

 

하고는, 혼자서 껄껄대고 웃기도 했다.

이때 나는 과연 밥을 못 먹은 지 사흘이나 되었다. 행랑아범이 남의 집 지붕을 이어주고서 품삯을 받아, 비로소 밤에야 밥을 지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밥투정을 부려 울며 먹으려 하지 않자, 행랑아범은 성이 나서 사발을 엎어 개에게 주어 버리고는 아이에게 뒈져 버리라고 악담을 하였다. 이때 나는 겨우 밥을 얻어먹고 식곤증이 나서 누웠다가, 그에게 장괴애(張乖崖)가 촉( 사천성(四川省)) 지방을 다스릴 때 어린아이를 베어 죽인 고사를 들어 깨우쳐 주고 나서, 또 말하기를,

 

평소에 가르치지 않고서 도리어 꾸짖기만 하면, 커 갈수록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상하게 되는 법이다.”

하였다. 그러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은하수는 지붕에 드리우고, 별똥별은 서쪽으로 흐르며 흰 빛줄기를 공중에 남겼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낙서(洛瑞)가 와서 묻기를,

 

어른께서는 혼자 누워서 누구와 이야기하십니까?”

하였으니, ()에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계셨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낙서는 또 눈 내리는 밤에 떡을 구워 먹던 때의 일을 그 글에 기록했다. 마침 나의 옛집이 낙서의 집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동자(童子) 때부터 그는 나의 집에 손님들이 날마다 가득하고 나도 당세에 뜻이 있었음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나이 40이 채 못 되어 이미 나의 머리가 허옇게 되었다며, 그는 자못 감개한 심정을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병들고 지쳐서 기백이 꺾이고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어, 지난날의 모습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다. 이에 기()를 지어 그에게 화답한다.

 

 

낙서의 기()는 다음과 같다.

 

 

유월 상현(上弦 7~8일경)에 동쪽 이웃 마을로부터 걸어가서 연암 어른을 방문했다. 이때 하늘에는 구름이 옅게 끼고 숲속의 달은 희끄무레했다. 종소리가 처음 울렸는데 시작할 때에는 우레처럼 은은(殷殷)하더니, 끝날 때에는 물거품이 막 흩어지는 것처럼 여운이 감돌았다. 어른이 집에 계시려나 생각하며 골목에 들어서서 먼저 들창을 엿보았더니 등불이 비쳤다. 그래서 대문에 들어섰더니, 어른은 식사를 못한 지가 이미 사흘이나 되셨다. 바야흐로 버선도 신지 않고 망건도 쓰지 않은 채 창문턱에 다리를 걸쳐 놓고 행랑것과 문답하고 있다가, 내가 온 것을 보고서야 드디어 옷을 갖추어 입고 앉아서, 고금의 치란(治亂) 및 당세의 문장과 명론(名論)의 파별(派別) · 동이(同異)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하시므로, 나는 듣고서 몹시 신기하게 여겼다.

이때 밤은 하마 삼경이 지났다. 창밖을 쳐다보니 하늘 빛은 갑자기 밝아졌다 갑자기 어두워졌다 하고, 은하수는 하얗게 뻗쳐 더욱 가볍게 흔들리며 제 자리에 있지 않았다. 내가 놀라서,

저것이 어째서 그러는 거지요?”

했더니, 어른은 빙그레 웃으시며,

자네는 그 곁을 한번 보게나.”

하셨다. 대개 촛불이 꺼지려 하면서 불꽃이 더욱 크게 흔들린 것이었다. 그제서야 조금 전에 본 것은 이것과 서로 어리비쳐 그렇게 된 것임을 알았다. 잠깐 사이에 촛불이 다 되어, 마침내 둘이 어두운 방안에 앉아서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내가 말하기를,

예전에 어른께서 저와 한마을에 사실 적에 눈 내리는 밤에 어른을 찾아뵌 적이 있었지요. 어른께서는 저를 위해 손수 술을 데우셨고, 저 또한 떡을 손으로 집고 질화로에서 구웠는데, 불기운이 훨훨 올라와 손이 몹시 뜨거운 바람에 떡을 잿속에 자주 떨어뜨리곤 하여, 서로 쳐다보며 몹시 즐거워했었지요. 그런데 지금 몇 년 사이에 어른은 머리가 이미 허옇게 되시고 저 역시 수염이 거뭇거뭇 돋았습니다.”

하고는, 한참 동안 서로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이날 밤 이후 13일 만에 이 기()가 완성되었다.

 

[C-001]소완정(素玩亭) : 이서구(李書九 : 1754~1825)의 일호이다. 그 밖에 강산(薑山) · 척재(惕齋) 등의 호가 있다. 자는 낙서(洛瑞 : 또는 洛書)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연암에게 문장을 배웠으며,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자학(文字學)과 전고(典故)에 조예가 깊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1774년 정시(庭試)에 합격한 후 전라도 관찰사, 우의정 등을 지냈다.

[D-001]금천(金川) : 황해도에 속한 군()으로 개성(開城) 근처에 있었다. 박지원이 은거했던 그곳의 한 협곡은 입구에 제비들이 항시 둥지를 틀고 있다고 하여 제비 바위라는 뜻으로 연암(燕巖)이라 불렀다고 한다.

[D-002]여름이면 …… 들끓고 : 원문은 夏夜蚊蠅인데, 문리가 잘 통하지 않아 夏多蚊蠅으로 되어 있는 몇몇 이본들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D-003]시골에서 …… 받더라도 : 당시 연암은 식구들을 경기도 광주의 석마(石馬 : 지금의 분당)에 있던 처가에 보냈다. 그곳에 있는 가족들이 보낸 안부 편지를 받았다는 뜻이다.

[D-004]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 돈이 한푼도 없다는 말이다. 맹상군은 전국(戰國) 시대 제() 나라의 공자(公子)인데, 성은 전()이고 이름은 문()이다. 연암이 아래에 덧붙인 설명을 참조하면, 우리나라에서 엽전을 푼이라고 했기 때문에, 맹상군의 이름 전문(田文)이 엽전 한푼錢文과 같다고 농담을 한 것이다.

[D-005]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 평원군은 전국 시대 조() 나라의 공자인데 문하(門下)에 식객이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평원군의 이웃에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원군의 애첩이 그가 절뚝거리며 물 긷는 것을 보고 깔깔거리며 비웃었으므로, 평원군을 찾아와서 선비들이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는 것은 군께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고 첩을 천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불행히 병을 앓아 불구가 되었는데, 군의 후궁(後宮)이 저를 보고 비웃었으니 목을 베어 주십시오.” 하였다. 평원군이 승낙은 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베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여겨 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다리 저는 이웃 사람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객들이 반 이상이나 떠나가 버렸으므로, 마침내 평원군은 그 애첩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여기에서는 다리를 저는 새끼 까치를 평원군의 식객에다 비유한 것이다.

[D-006]철현금(鐵絃琴) : 금속 줄로 된 양금(洋琴)을 이른다. 유럽에서 들어왔다고 하여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이라고도 한다. 명 나라 말에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 처음 소개하였는데, 조선에는 영조(英祖) 때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의 증언에 의하면, 1772년 홍대용이 국내 최초로 이 철현금을 향악(鄕樂) 음정에 조율하여 연주하는 데 성공한 뒤 그 연주법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熱河日記 銅蘭涉筆

[D-007]자찬(自贊)하기를 : 한문(漢文)의 문체 중에 찬()이 있는데 대개 운문(韻文)이다. 작가가 자신에 대해 지은 찬을 자찬(自贊)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스스로를 칭찬한다는 뜻과 함께, 자찬을 지었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D-008]양식이 …… 같고 : 안회(顔回)는 공자 제자로 도()를 즐거워하고 가난을 편안히 받아들여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論語 先進

[D-009]꼼짝하지 …… 같고 : 장자 천운(天運)에서 공자(孔子)가 노자(老子)를 만나고 와서 용을 만나 본 것과 같다고 감탄하자, 자공(子貢) 그렇다면 정말 꼼짝하지 않으면서도 용이 나타난 것과 같은 사람尸居而竜見이 있다는 말인가?” 하며 노자를 만나러 갔다고 하였다.

[D-010]공손하지 …… 같고 : 유하혜(柳下惠)는 노() 나라 대부(大夫)로 이름은 전금(展禽)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자신의 처신을 백이(伯夷)의 처신과 비교하여 백이는 편협하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않으니, 편협한 것과 공손하지 않은 것은 군자가 따르지 아니한다.” 하였다.

[D-011]술을 …… 같고 : 유영(劉伶)은 진()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이다. 술을 매우 좋아하여 늘 술병을 지니고 다녔으며, 주덕송(酒德頌)을 지어 술을 찬양하였다. 晉書 卷49 劉伶傳

[D-012]밥을 …… 같고 : 한신(韓信)은 한() 나라 고조(高祖)의 명신(名臣)으로, 포의(布衣) 시절에 생계를 꾸려가지 못하여 항상 남에게서 밥을 얻어먹고 지냈다고 한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D-013]잠을 …… 같고 : 진단(陳摶 : ?~989)은 송() 나라 때의 유명한 도사(道士)로 주돈이(周敦頣)의 태극도(太極圖)의 남상이 되는 선천도(先天圖)를 남겼다. 그는 한 번 잠이 들면 100여 일 동안이나 깨지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457 陳摶傳

[D-014]거문고를 …… 같고 : 대본에는 鼓琴似子桑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몇몇 이본들에는 공백 없이 鼓琴似子桑戶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자상호(子桑戶)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인물로, 그가 죽자 막역지우(莫逆之友)인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이 그의 시신을 앞에 두고서 편곡(編曲)하거나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상호가 거문고를 탔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같은 대종사에 나오는 자상(子桑)과 혼동한 듯하다. 즉 자상의 벗 자여(子輿)가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자상은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의 지독한 가난을 한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원문의 鼓琴似子桑를 그 다음 문장과 연결시켜서 鼓琴似子桑 戶著書似揚雄으로 구두를 떼고 누락된 글자를 로 추정하여 鼓琴似子桑 閉戶著書似揚雄으로 판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앞의 문장들이 대개 □□□□ 5자구(字句)를 취하고 있는 점과 어긋난다. 또한 소순(蘇洵) 폐호독서(閉戶讀書)’한 사실은 있어도 양웅이 폐호저서(閉戶著書)’했다는 기록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子桑戶 는 역시 연자(衍字)로 보아야 할 것이다.

[D-015]글을 …… 같고 : 양웅(揚雄 : 기원전 53~기원후 18)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책을 박람(博覽)했으며 사부(辭賦)를 잘 지었고, 빈천(貧賤)하면서도 부귀영달에 급급하지 않았다. 그가 당시 집권자들에게 아부하여 벼슬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며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하고 있음을 보고 조소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조(解謿)’를 지었다. 또한 태현경이 너무 심오하여 사람들이 알기 어렵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난(解難)’을 지었다. 40여 세가 지나서 비로소 상경하여 애제(哀帝) 때 낭()이 되고, 왕망(王莽)이 집권했을 때에도 벼슬이 겨우 대부(大夫)에 머물렀다. 이는 그가 세리(勢利)에 연연하지 않고 호고낙도(好古樂道)하면서 문장으로 후세에 명성을 이룰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로 인해 당시에 홀대를 당했으며 알아주는 이가 적었다. 유흠(劉歆) 태현경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장독 덮개覆醬瓿로나 쓸 것이라고 조롱했다. 漢書 卷87 揚雄傳

[D-016]자신을 …… 같으니 : 공명(孔明)은 삼국 시대 촉()의 재상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킨다. 제갈량이 융중(隆中)에서 농사지으며 은거할 때 양보음(梁甫吟)을 즐겨 부르면서 매양 자신을 제() 나라의 재상 관중(管仲)과 연() 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에게 견주었다고 한다. 世說新語 方正

[D-017]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 조교는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인물로 키가 9 4촌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교가 맹자에게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조교가 다시 문왕(文王)은 키가 10척이고 탕() 임금은 9척이라고 했는데, 지금 저는 9 4촌이나 되는데도 밥만 축낼 뿐이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든 노력만 하면 요순처럼 될 수 있다.”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조교가 제가 추군(鄒君)을 만나면 관사(館舍)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머물면서 문하(門下)에서 배웠으면 합니다.” 하므로, 맹자는 도()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뜻이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는 대로(大路)와도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의 병통은 구하지 않는 데 있을 뿐이니, 그대가 돌아가서 찾는다면 스승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면서 거절하였다. 孟子 告子下

[D-018]청렴함은 …… 미치니 : 오릉(於陵)은 곧 오릉중자(於陵仲子)인 진중자(陳仲子)를 가리킨다. 진중자는 전국 시대 제 나라 사람으로, 형이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을 의롭지 않다고 여겨, () 나라의 오릉에 가서 은거하며 가난하게 살았으므로 오릉중자라 하였다. 당시 그는 3일 동안이나 굶주려 우물가로 기어가서 굼벵이가 반 넘게 파먹은 오얏을 삼키고 나서야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이 보였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D-019]식곤증이 나서 누웠다가 : 원문은 旣困臥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20]장괴애(張乖崖) …… 고사 : 괴애(乖崖)는 북송(北宋) 초의 명신(名臣)인 장영(張詠)의 호이다. 그는 강직함을 자처하고 다스림에 있어서 엄하고 사나움을 숭상하여, 괴팍하고 모가 났다는 뜻의 괴애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고 한다. 그는 태종(太宗) 때 익주 지사(益州知事)로 나가 은위(恩威)를 병용하여 선정(善政)을 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다고 한다. 그 뒤 진종(眞宗)은 이러한 남다른 치적을 알고 그를 거듭 익주 지사로 임명했다. 宋史 卷293 張詠傳 장영이 촉() 지방 즉 익주(益州)를 다스릴 적에 어느 늙은 병졸이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장난삼아 늙은 아비의 뺨을 때리는 것을 보고는 격분한 장영이 그 아이를 죽여 버리게 했다고 한다. 靑莊館全書 卷48 耳目口心書1 원문에는 장괴애가 守蜀했다고 하였는데, 조신(朝臣)으로서 지방관으로 나가 열군(列郡)을 지키는 경우 이를 수신(守臣)이라 부른다.

[D-021]이미 병들고 지쳐서 : 원문은 已病困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2]낙서의 …… 같다 : 이서구의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는 그의 자문시하인언(自問是何人言)에 수록되어 있는데, 연암집에 인용된 것과 조금 차이가 있다. 차이 나는 부분은 각주에 밝혀 두었다.

[D-023]연암 어른 : 원문은 燕岩丈人인데, 이서구의 자문시하인언에는 燕巖朴丈人으로 되어 있다.

[D-024]종소리가 처음 울렸는데 : 서울 종루(鐘樓 : 종각鐘閣)에서 초경(初更 : 저녁 7~9)을 알리는 타종을 했다는 뜻이다.

[D-025]다리를 걸쳐 놓고 : 원문은 加股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加膝로 되어 있다.

[D-026]명론(名論) : 여기서는 노론 · 소론 · 남인 등의 당론(黨論)을 가리킨다.

[D-027]내가 놀라서 : 원문은 余驚曰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余顧謂丈人曰로 되어 있다.

[D-028]대개 : 원문은 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余驚視之로 되어 있다.

[D-029]잠깐 …… 되어 : 원문은 須臾燭盡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그 다음에 余欲歸待僕 卒不至 且檠上無膏燭可以繼者가 추가되어 있다.

[D-030]불기운이 훨훨 올라와 : 원문은 火氣烘騰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31]한참 …… 탄식하였다 : 원문은 因相與悲歎者久之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久之 良久 夜半始歸家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불이당기(不移堂記)

 

 

사함(士涵)이 스스로 호를 죽원옹(竹園翁)이라고 짓고, 거처하는 당() 불이(不移)’라는 편액을 걸고는 나에게 글을 써 달라고 청해 왔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그 마루에 올라 보고 정원을 거닐어 보았어도 한 그루의 대나무도 보지 못했다. 내가 돌아보고 웃으며,

 

이는 이른바 무하향(無何鄕)이요 오유선생(烏有先生)의 집인가? 이름이란 실질(實質)의 손님이니 날더러 장차 손님이 되란 말인가?”

하였더니, 사함이 실망스러워하며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그저 스스로 뜻을 붙인 것뿐일세.”

하였다.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상심할 것 없네. 내 장차 자네를 위해 실질이 있게 만들어 줄 테니.

지난날 학사(學士) 이공보(李功甫)께서 관직에 있지 않고 한가히 지낼 적에 매화시(梅花詩)를 짓고는, 심동현(沈董玄)의 묵매도(墨梅圖)를 얻자 그 시로써 두루마리 그림의 첫머리에 화제(畫題)를 붙이셨지. 그러고 나서 웃으며 나더러 말씀하시기를,

너무하구나, 심씨의 그림이여! 능히 실물을 빼닮았을 뿐이구나!’

하기에, 나는 의혹이 들어서,

그림을 그린 것이 실물을 빼닮았다면 훌륭한 화공인데 학사께서는 어째서 웃으십니까?’

하고 물었네. 그러자 학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럴 일이 있지. 내가 처음에 이원령(李元靈)과 교유할 적에 비단 한 벌을 보내어 제갈공명(諸葛孔明) 사당 앞의 측백나무를 그려 달라고 청했더니, 원령이 한참 있다가 전서(篆書)로 설부(雪賦)를 써서 돌려보냈지. 내가 전서를 얻고는 우선 기뻐하며 더욱 그 그림을 재촉하였더니, 원령이 빙그레 웃으며, 그대는 아직 모르겠는가? 전에 이미 그려 보냈네. 하길래, 내가 놀라서, 전에 보내온 것은 전서로 쓴 설부뿐이었네. 그대는 어찌 잊어버린 겐가? 했더니, 원령은 웃으며, 측백나무가 그 속에 들었다네. 무릇 바람과 서리가 매섭게 몰아치면 변치 않을 것이 어찌 있겠는가. 그대가 측백나무를 보고 싶거든 눈 속에서 찾아보게나. 하였지. 나는 마침내 웃으며 응수하기를,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는데 전서를 써 주고, 눈을 보고서 변치 않는 것을 생각하라고 하다니, 측백나무와는 거리가 너무도 머네그려. 그대가 도()를 행하는 것이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였지.

얼마 있지 않아서 나는 간언(諫言)을 올린 일로 죄를 얻어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지. 그때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700리 길을 달려갔는데, 도로에서 전하는 말들이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장차 이르면 후명(後命)이 있을 것이라 하니, 하인들이 놀라서 떨며 울음을 터뜨렸지. 때마침 날씨는 차고 눈이 내리며, 낙엽진 나무들과 무너진 산비탈이 들쭉날쭉 앞을 가리고 바다는 눈앞에 끝없이 펼쳐졌는데, 바위 앞에 오래된 나무가 거꾸로 드리워져 그 가지가 마른 대나무와 같았지. 나는 바야흐로 말을 세우고 도롱이를 걸치다가, 손으로 멀리 가리키면서 그 기이함을 찬탄하며 이것이야말로 어찌 원령이 전서로 쓴 나무가 아니겠는가! 하였지.

섬에 위리안치되고 나니 장기(瘴氣)를 머금은 안개로 음침하기 짝이 없고 독사와 지네 따위가 베개나 자리에 이리저리 얽혀 언제 해를 끼칠지 알 수 없었지. 어느 날 밤 큰 바람이 바다를 뒤흔들어 벼락이 치는 듯했으므로 종인(從人)들이 다 넋이 달아나고 토하고 어지러워했는데, 나는 노래를 짓기를,

남쪽 바다 산호가 꺾어진들 어쩌리오 / 南海珊瑚折奈何

오늘 밤 옥루가 추울까 그것만 걱정일레 / 秪恐今宵玉樓寒

하였지.

원령이 편지로 답하기를, 근자에 산호곡(珊瑚曲)을 얻어 보니, 말이 완곡하면서 슬픔이 지나치지 않고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뜻이 조금도 없으니, 그만하면 환난에 잘 대처할 수 있겠구려. 지난날에 그대가 측백나무를 그려 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대 역시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할 수 있겠소. 그대가 떠난 후에 측백나무를 그린 그림 수십 본이 서울에 남아 있는데, 모두 조리(曹吏)들이 몽당붓禿筆으로 서로 돌려가며 베껴 그린 것이라오. 그러나 그 굳센 줄기와 꼿꼿한 기상이 늠름하여 범접할 수 없고, 가지와 잎은 촘촘하여 어찌 그리도 무성하던지! 하였으므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원령이야말로 몰골도(沒骨圖)라 이를 만하구나 하였지. 이로 말미암아 보면, 좋은 그림이란 실물을 빼닮은 데 있는 것은 아니야.’

하시기에, 나도 역시 웃었다네.

얼마 있다가 학사께서 세상을 떠났기에 나는 그분을 위하여 그 시문(詩文)을 편집하다가, 그분이 유배지에 있을 적에 형님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네. 그 내용인즉,

근자에 아무개의 편지를 받아 보니, 그가 나를 위하여 당로자(當路者)에게 귀양을 풀어 주기를 청하고자 한다 하였으니, 어찌 나를 이다지도 얕잡아 대하는지요? 비록 바다 한가운데에 갇혀서 병들어 죽을지언정 저는 그런 노릇은 하지 않겠습니다.’

했네. 나는 그 편지를 쥐고 슬피 탄식하며,

이 학사(李學士)야말로 진짜 눈 속에 서 있는 측백나무이다. 선비란 곤궁해진 뒤라야 평소의 지조가 드러난다. 재난을 염려하면서도 그 지조를 변치 않고, 고고하게 굳건히 서서 그 뜻을 굽히지 않으신 것은, 어찌 추운 계절이 되어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함은 성품이 대나무를 사랑한다. 아아, 사함은 참으로 대나무를 아는 사람인가? 추운 계절이 닥친 뒤에 내 장차 자네의 마루에 오르고 자네의 정원을 거닌다면, 눈 속에서 대나무를 볼 수 있겠는가?

 

 

[D-001]사함(士涵) …… 왔다 : 사함이 누구의 자()인지 알 수 없다. ‘불이(不移)’는 사철 내내 푸른 대나무처럼 절조를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빈천이 그의 절조를 변하게 할 수 없는貧賤不能移 사람이라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D-002]거처하는 당 : 원문은 所居之堂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3]무하향(無何鄕) :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준말로,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현실의 제약을 벗어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이상향을 가리킨다. 莊子 逍遙遊

[D-004]오유선생(烏有先生) :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을 뜻한다. ()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자허부(子虛賦)에서 자허(子虛) · 오유선생 · 무시공(亡是公)이라는 가공의 세 인물을 설정하여 문답을 전개하였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D-005]이름이란 …… 말인가 : 장자 소요유에서 요() 임금이 은자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넘겨주려고 하자 허유가 이를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이름과 실질의 관계를 고찰하는 명실론(名實論)은 묵가(墨家) 등 중국 고대 철학의 중요한 주제였다. 이름이 실질의 손님이란 말은, 이름이 실질에 대해 종속적 · 부차적인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D-006]학사(學士) 이공보(李功甫) : 이양천(李亮天 : 1716~1755)으로, 공보는 그의 자이다. 연암의 장인인 이보천(李輔天)의 동생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므로 학사라 칭한 것이다. 이양천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수학 시절의 연암에게 문학을 지도하였다. 연암집 3 ‘영목당 이공에 대한 제문祭榮木堂李公文 참조.

[D-007]심동현(沈董玄) : 화가 심사정(沈師正 : 1707~1769)으로, 동현은 그의 자이다. 명문 사대부 출신이면서도 과거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화업(畫業)에 정진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화훼(花卉) · 초충(草蟲)을 가장 잘 그렸다고 한다.

[D-008]훌륭한 화공 : 원문은 良工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良畫로 되어 있다.

[D-009]어째서 웃으십니까 : 원문은 何笑爲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0]이원령(李元靈) : 화가 이인상(李麟祥 : 1710~1760)으로, 원령은 그의 자이다. 호는 능호(凌壺)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음죽 현감(陰竹縣監) 등을 지냈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은거하며 벗들과 시 ·  · 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D-011]제갈공명(諸葛孔明) …… 측백나무 : 두보(杜甫)의 시 촉상(蜀相) 촉 나라 승상의 사당을 어디서 찾으리. 금관성 밖 측백나무 울창한 곳이라네.丞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柏森森라 하였다. 여기에서 측백나무는 변치 않는 제갈공명의 절조를 상징한다. 이양천은 이인상에게 두보의 이 시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D-012]설부(雪賦) : () 나라 사혜련(謝惠連 : 397~433)이 지은 부()의 제목이다. 서한(西漢)의 양효왕(梁孝王)이 양원(梁園)이라는 호사스러운 원림(園林)에서 당대의 문사인 사마상여(司馬相如) 등과 함께 주연을 벌이다가 눈이 오자 흥에 겨워 시를 주고받았던 고사를 노래하였다. 文選 卷14 雪賦

[D-013]그대가 …… 아닌가 : 중용(中庸)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중용장구  13 장에서 공자는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나니,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도라고 할 수 없다.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고 하였다. 고원(高遠)하여 행하기 힘든 일에서 도를 찾으려는 경향을 경계한 말이다.

[D-014]나는 ……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지 : 실록에 의하면 영조 28(1752) 10월 홍문관 교리 이양천은 소론의 영수인 이종성(李宗城)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조치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분노를 사서 흑산도에 위리안치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 이듬해 6월 위리(圍籬)가 철거되고 육지로 나왔으나, 영조 31(1755)에야 관직에 복귀했다가 이내 사망했다.

[D-015]후명(後命) : 유배형을 받은 죄인에게 다시 사약(賜藥)을 내리는 일을 말한다.

[D-016]들쭉날쭉 : 대본은 嵯砑인데, ‘ 의 오자이다. ‘치아(嵯岈)’는 둘쭉날쭉 뒤섞여 있는 모습을 뜻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차아(嵯峨)’로 되어 있는데, 이는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뜻한다.

[D-017]남쪽 …… 걱정일레 : 옥루(玉樓)는 상제(上帝)가 산다는 곳인데, 여기서는 궁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비참한 운명에는 개의치 않고 오직 임금께서 평안하신지 염려한다는 뜻이다. 이 시는 걸작으로 알려져, 그의 벗 이윤영(李胤永)이 지은 만시(輓詩)에도 인용되었다. 丹陵遺稿 卷10 挽功甫

[D-018]조리(曹吏) : 예조(禮曹)의 도화서(圖畫署)에 소속된 화원(畫員)을 이른다. 이들의 그림을 화원화(畫員畫)라고 하여, 사대부 출신 화가들이 그린 문인화(文人畫)와 차별하고 그 예술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였다.

[D-019]몽당붓禿筆 : 예리하지 못한 붓이라는 뜻으로, 그림 솜씨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경우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D-020]원령이야말로 …… 만하구나 : 몰골도(沒骨圖)는 붓으로 윤곽을 그리지 않고 직접 채색하는 수법으로 그린 그림을 이른다. 몰골도에는 붓 자국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인상이 편지에서, 화원들이 모방한 측백나무 그림이 사이비(似而非)임을 언중유골(言中有骨)로 은근히 풍자했다는 뜻이다.!

[D-021]근자에 …… 하였으니 : 실록에 의하면 영조 29(1753) 3월과 4월에 언관(言官)들이 이양천의 해배(解配)를 건의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이러한 공개적인 노력 말고도, 이양천의 벗들 중에 당시 정계의 실력자들을 찾아다니며 석방운동을 벌이려는 사람이 있었던 듯하다.

[D-022]추운 …… 아니겠는가 : 논어 자한(子罕) 추운 계절이 되어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맨 나중에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소완정기(素玩亭記)

 

 

완산(完山 전주(全州)) 이낙서(李洛瑞 이서구(李書九))가 책을 쌓아둔 그의 서재에 소완(素玩)’이라는 편액을 걸고 나에게 기()를 청하였다. 내가 힐문하기를,

 

무릇 물고기가 물속에서 놀지만 눈에 물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인가? 보이는 것이 모두 물이라서 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낙서 자네의 책이 마룻대까지 가득하고 시렁에도 꽉 차서 앞뒤 좌우가 책 아닌 것이 없으니, 물고기가 물에 노는 거나 마찬가지일세. 아무리 동생(董生)에게서 학문에 전념하는 자세를 본받고 장군(張君)에게서 기억력을 빌리고 동방삭(東方朔)에게서 암송하는 능력을 빌린다 해도, 장차 스스로 깨달을 수는 없을 터이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자, 낙서가 놀라며,

 

그렇다면 장차 어찌해야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자네는 물건 찾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가? 앞을 바라보면 뒤를 놓치고, 왼편을 돌아보면 바른편을 빠뜨리게 되지. 왜냐하면 방 한가운데 앉아 있어 제 몸과 물건이 서로 가리고, 제 눈과 공간이 너무 가까운 때문일세. 차라리 제 몸을 방 밖에 두고 들창에 구멍을 내고 엿보는 것이 나으니, 그렇게 하면 오로지 한쪽 눈만으로도 온 방 물건을 다 취해 볼 수 있네.”

했더니, 낙서가 감사해 하면서,

 

이는 선생님께서 저를 약()으로써 인도하신 것이군요.”

하였다. 내가 또 말하기를,

 

자네가 이미 약()의 도()를 알았으니, 나는 또 자네에게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관조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는가. 저 해라는 것은 가장 왕성한 양기(陽氣)일세. 온 누리를 감싸주고 온갖 생물을 길러주며, 습한 곳이라도 볕을 쪼이면 마르게 되고 어두운 곳이라도 빛을 받으면 밝아지네. 그렇지만 해가 나무를 태우거나 쇠를 녹여내지 못하는 것은 왜인가? 광선이 두루 퍼지고 정기(精氣 양기)가 흩어지기 때문일세. 만약 만리를 두루 비추는 빛을 거두어 아주 작은 틈으로 들어갈 정도의 광선이 되도록 모으고 유리구슬로 받아서 그 정광(精光 양광(陽光))을 콩알만 한 크기로 만들면, 처음에는 불길이 자라면서 반짝반짝 빛나다가 갑자기 불꽃이 일며 활활 타오르는 것은 왜인가? 광선이 한 군데로 집중되어 흩어지지 않고 정기가 모여서 하나가 된 때문일세.”

하니, 낙서가 감사해 하면서,

 

이는 선생님께서 저를 깨달음으로써 깨우쳐 주신 것이군요.”

하였다. 내가 또 말하기를,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있는 것들은 모두가 이 책들의 정기(精氣)이니, 제 눈과 너무 가까운 공간에서 제 몸과 물건이 서로를 가린 채 관찰하고 방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본래 아니지. 그러므로 포희씨(包犧氏)가 문()을 관찰할 적에 위로는 하늘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땅을 관찰했다.’고 하였고, 공자(孔子)는 포희씨가 문을 관찰한 것을 찬미하고 나서 덧붙여 말하기를, ‘가만히 있을 때는 그 말을 완미(玩味)한다.’ 했으니, 무릇 완미한다는 것은 어찌 눈으로만 보고 살피는 것이겠는가. 입으로 맛보면 그 맛을 알 것이요, 귀로 들으면 그 소리를 알 것이요, 마음으로 이해하면 그 핵심을 터득할 것이다.

지금 자네는 들창에 구멍을 뚫어 오로지 한쪽 눈만으로도 다 보며, 유리구슬로 빛을 받아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해도 방의 들창이 비어 있지 않으면 밝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유리알이 투명하게 비어 있지 않으면 정기를 모아들이지 못하지. 무릇 뜻을 분명히 밝히는 방법은 본래 마음을 비우고 외물(外物)을 받아들이며 담담하여 사심이 없는 데 있는 것이니, 이것이 아마도 소완(素玩)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였더니, 낙서가 말하기를,

 

제가 장차 벽에 붙여 두고자 하니 선생님은 그 말씀을 글로 써 주십시오.”

하기에, 마침내 그를 위해 써 주었다.

 

 

[D-001]소완(素玩) : ‘()’는 흰 바탕의 편지나 책을 의미하므로, 이서구는 책들을 완상(玩賞)한다는 뜻으로 이 당호를 지었을 것이다. 또한 ()’에는 텅 비었다는 뜻도 있으므로, 연암은 이 뜻을 취하여 허심(虛心)으로 완상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D-002]동생(董生)에게서 …… 본받고 : 동생은 한() 나라 때 학자 동중서(董仲舒)이다. 춘추를 전공하여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는데, 학문에 전념하여 휘장을 드리우고 강송(講誦)하면서 3년 동안 정원을 한 번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D-003]장군(張君)에게서 기억력을 빌리고 : 장군은 장화(張華 : 232~300)를 이른다. 그는 진() 나라의 유력한 정치가로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문인 · 학자로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기억력이 탁월하기로 당대 제일이었다고 한다.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있을 때 진 무제(晉武帝)가 한() 나라의 궁실 제도와 건장궁(建章宮)에 관해 묻자 장화는 땅에다 지도를 그려가며 청산유수로 응답하여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수레 30대에 실은 책을 읽고 나서 박물지(博物志) 400권을 지었는데, 무제가 번거롭다고 하여 10권으로 줄였다고 한다. 장화를 장군이라 호칭한 것은 그가 광무현후(廣武縣侯)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晉書 卷36 張華傳

[D-004]동방삭(東方朔)에게서……해도 : 동방삭은 한 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관직은 낮았지만 해학(諧謔)과 변설(辯舌), 직언(直言) 등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예로부터 전해 오는 책들을 좋아하고 경술(經術)을 좋아하였으며, 야사 · 전기와 잡서들까지 박람(博覽)하였다. 또한 시() · () · 백가(百家)의 말들을 암송하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東方朔

[D-005]() : 핵심을 취한다는 뜻이다. 소식(蘇軾)의 가설(稼說)에서 학문하는 방도로 책을 널리 보되 핵심을 취하며, 실력을 두텁게 쌓되 조금만 드러내라.博觀而約取 厚積而薄發고 권하였다.

[D-006]유리구슬로 받아서 : 원문은 承玻璃之圓珠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여기서 유리구슬은 곧 돋보기를 말한다.

[D-007]불길이 자라면서 : 원문은 亭毒인데, 두 글자 모두 기른다는 뜻이다. 노자(老子)에 도() 만물을 기르고 기른다亭之毒之고 하였다.

[D-008]포희씨(包犧氏) …… 하였고 : 포희씨는 곧 태곳적 중국의 삼황(三皇)의 한 사람인 복희씨(伏羲氏), 팔괘(八卦)와 문자書契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포희씨가 문()을 관찰했다고 할 때의 ()’은 단순히 문자나 문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문(天文)과 지문(地文)과 인문(人文)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일월(日月)은 하늘의 문()이요, 산천(山川)은 땅의 문이요, 언어는 사람의 문이라고 한다.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역() 위로는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지리를 관찰한 것이다.仰以觀於天文 俯而察於地理라고 하였고, 또한 계사전 하(繫辞傳下)에 옛날 포희씨가 왕이 되어 천하를 다스릴 적에 위로는 하늘에서 상()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땅에서 법()을 관찰하여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팔괘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D-009]가만히 …… 완미(玩味)한다 : 원문은 居則玩其辭인데, 김택영(金澤榮) 중편연암집에는 居則觀其象而玩其辭로 되어 있다. 주역 계사전 상에 이런 까닭에 군자는 가만히 있을 때는 그 상을 관찰하고 그 말을 완미한다.是故 君子居則觀其象而玩其辭 하였다. ()은 팔괘와 육효(六爻)를 뜻하고 말은 괘와 효가 나타내는 길흉에 대한 설명을 뜻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금학동(琴鶴洞) 별장에 조촐하게 모인 기록

 

 

연암협(燕巖峽)에 있는 나의 거처는 개성(開城)에서 겨우 30리 거리에 있었으므로 나는 항상 개성으로 나가서 노닐곤 하였다. 금년 겨울에 규장각 직제학 유사경(兪士京)이 막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부임하여 이미 여저(旅邸)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는데, 즐겁게 옛일을 이야기하기를 빈천했던 선비 시절과 똑같이 하였으니, 세속에서 말하는 출세와 몰락 따위는 서로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었다.

하루는 사경(士京)이 추도(趨導)를 단출히 하고 그의 아들을 데리고서 금학동(琴鶴洞)을 찾아주었는데, 그때 나는 양씨(梁氏)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빨리 술을 데우게 하고, 각기 지은 글들을 꺼내어 둘이 서로 평가해 보고는, 마주 보며 웃으면서 말하기를,

 

마하연(摩訶衍)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때에 비하면 어떠한가? 단지 백화암(白華菴)에서 참선하던 비구승 준()만이 없을 뿐이고, 조촐하게 모인 것은 관천(灌泉)의 모임과 비슷한데, 우리들은 어느새 다 같이 머리가 허옇게 되었네그려!”

하였다. 관천은 한양 서소문 밖 나의 옛집이 있던 곳인데, 금강산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조촐한 모임을 가졌다. 나는 이때 나이 스물아홉 살로 사경보다 일곱 살이 적었는데도, 양쪽 귀밑머리에는 하마 대여섯 가닥의 흰머리가 생겼으므로, ()의 재료를 얻었다고 스스로 기뻐했었다. 그런데 지금 하마 13년이 흐르고 보니 이른바 시의 재료는 주체할 수 없이 어지럽게 늘어났고, 사경은 문권(文權)을 겸대(兼帶)하면서 병권(兵權)을 쥐고 큰 부성(府城)을 진무(鎭撫)하고 있느라고 지금 그의 수염이 이처럼 다 희어지고 말았다. 사경은 스스로 귀밑머리 뒤 금관자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스스로 보기에도 겸연쩍은데, 하물며 귀밑머리 뒤편은 스스로 보지도 못함에랴!”

라고 했다.

지난날에 나는 연암협으로부터 마침 성내(城內)로 들어가다가, 군사훈련을 하고 부중(府中)으로 돌아가던 유수와 노상에서 마주쳤다.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갈 무렵이었는데, 말에서 내려 남녀들 틈에 끼어 길 왼쪽에 엎드렸다. 횃불이 휘황하고 깃발들이 펄럭였다.

내가 지난날 길 왼쪽에서 군대의 위용을 구경했던 일을 말하니, 사경은 크게 웃으며,

 

왜 내 자()를 부르지 않았던가?”

하기에,

 

도성 사람들이 놀랄까 두려웠네.”

라고 답하고는, 서로 더불어 크게 웃었다. 사경이,

 

군대의 위용은 어떻던가?”

하기에,

 

원앙대(鴛鴦隊)를 지어 10보 간격으로 세 줄로 선 것이 훈련도감의 군대보다는 조금 못해도 평양의 군대보다는 훨씬 낫더군. 게다가 난후병(攔後兵)은 벙거지를 번듯하게 쓰고 더그레는 앞뒤로 두 치가 짧으니, 한창 의기양양하여 더욱 씩씩하더군.”

하였다. 사경이 묻기를,

 

나는 어떻던가?”

하기에,

 

나는 장군(將軍 유언호를 가리킴)의 초상화만 보았지 장군은 보지 못했네.”

하니, 사경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왼쪽에는 온 원수(溫元帥), 바른쪽에는 마 원수(馬元帥), 앞에는 조현단(趙玄壇)의 깃발이요, 초헌(軺軒) 뒤에만 유독 말 위에서 깃발을 들었는데 검은 바탕에 그려진 별은 구진(句陳)과 흡사하더군. 내 일찍이 화공을 불러 초상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반드시 잠자코 정색을 하고 있어 대체로 평상시의 태도와는 달랐으니, 장군도 접때 틀림없이 기침과 재채기를 참았을 테고, 가려워도 감히 긁지도 못했을 걸세.”

했더니, 사경은 크게 웃으며,

 

과연 또 하나의 내가 길가에서 나를 관찰했구먼!”

하였다. 나도 크게 웃으며,

 

옛날에 조공(曹公)이 스스로 일어나 칼을 쥐고 용상(龍床) 앞에 서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나를 관찰하는 법일세. 그러나 장군은 몸소 말을 타지는 않는 점이 두원개(杜元凱)와 흡사한데 좌전(左傳)에 주()를 붙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느슨한 띠에 선비의 기풍이 있는 것은 양숙자(羊叔子)와 흡사한데 뒷날에 누가 비석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지 모르겠구려.”

하였다. 그러고는 크게 웃고 나서 일어나 문밖으로 가니, 달이 한창 둥글어 달빛이 가득했다. 나는 문에서 전송하면서 말하기를,

 

내일 밤에는 달이 더욱 밝을 터이니 나는 장차 남루(南樓)에서 달을 구경할 생각이네. 장군은 다시 걸어와 주겠는가?”

했더니,

 

그러세.”

하였다.

예전에 관천에서 조촐히 모였을 때에 기()를 지은 바 있다. 사경이 먼저 중경소집기(中京小集記)를 지어 보여 주었기에, 이 기를 지어서 화답한다.

 

 

[D-001]금년 …… 부임하여 : 사경(士京)은 젊은 시절부터 연암과 절친한 사이였던 유언호(兪彦鎬 : 1730~1796)의 자이다. 실록에 의하면 유언호는 정조 1(1777) 6월 이조 참의에서 개성 유수로 특별 발탁되었고, 7월에는 규장각 직제학을 겸임하였다. 9 22일 소대(召對)에 나아간 뒤 10월경에 임지로 떠났던 듯하다. 그 후 정조 3(1779) 3월 이조 참판에 임명될 때까지 개성 유수로 재직했다. 유언호가 개성 유수로 부임하게 된 것은 부모 봉양의 편의를 위해 왕이 특별히 배려한 결과였다. 閔鍾顯 兪文忠公行狀

[D-002]여저(旅邸) : 객지에 임시로 머물러 사는 집을 말한다. 유언호의 서경소집기(西京小集記)에 의하면 당시 연암은 개성 유수의 관아(官衙)로 유언호를 방문했으므로, 여기서는 개성 유수의 거처인 내아(內衙)를 가리키는 듯하다.

[D-003]추도(趨導) : 고관이 행차할 때 앞장 서서 말을 끌고 길을 인도하는 기졸(騎卒)을 이른다.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는데, 뜻은 같다.

[D-004]금학동(琴鶴洞) …… 있었다 : 금학동은 개성에 있던 동명(洞名)이다. 그곳에 개성의 선비로서 연암을 종유(從遊)하던 양호맹(梁浩孟) · 양정맹(梁廷孟) 형제의 별장이 있었다.

[D-005]마하연(摩訶衍)에서 …… 뿐이고 : 마하연은 내금강에 있는 절이고, 백화암(白華菴)은 그에 딸린 암자이다. 1765(영조 41) 연암이 유언호 등 벗들과 함께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다가 백화암에서 승려 준대사(俊大師)를 만났던 사실은 연암집 7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와 관재기(觀齋記) 등에도 언급되어 있다.

[D-006]사경은 …… 있느라고 : 문권(文權)을 지녔다는 것은 당시 유언호가 규장각 직제학의 직함을 띠고 있었던 사실을 말한 것이다. 개성 유수는 행정뿐 아니라 군사업무도 주관하였다. 즉 개성부(開城府)의 군무(軍務)와 대흥산성(大興山城)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된 관리영(管理營)의 우두머리인 관리사(管理使)를 겸하였다.

[D-007]금관자 : 관자(貫子)는 망건을 쓸 때 당줄을 꿰어 졸라매는 작은 고리인데 품계에 따라 그 재료와 새김장식이 달랐다. 당시 유언호는 종 2 품인 개성 유수였으므로, 초룡(草龍) 등을 새긴 금으로 된 관자를 하였다.

[D-008]스스로 보기에도 …… 못함에랴 :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요() 임금이 은사 허유(許由)에게 나는 스스로 겸연쩍게 생각되니, 천하를 그대에게 양도하게 해달라.我自視缺然 請致天下고 하였다. 관자는 망건의 편자下帶 귀 닿는 곳에 달아서, 편자 끝에 달린 좌우의 당줄을 맞바꾸어 걸어 넘기도록 되어 있으므로 제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여기서는 유언호가 친구 앞에서 자신의 출세를 과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한 말이다.

[D-009] …… 않았던가 : ()는 절친한 평교간(平交間)에만 부를 수 있었다.

[D-010]원앙대(鴛鴦隊) : 5인의 병사가 1조를 이루는 것을 오()라 하는데, 1 · 3 · 5 · 7 · 9번째 병사들이 좌오(左伍)가 되고 2 · 4 · 6 · 8 · 10번째 병사들이 우오(右伍)가 되어, 가로로 보면 2인이 하나의 짝을 이루도록 편성한 부대를 말한다. 兵學指南 卷2

[D-011]난후병(攔後兵) : 부대의 후방을 방어하는 부대로 난후군(攔後軍)이라고도 한다.

[D-012]벙거지를 번듯하게 쓰고 : 원문은 不淅巾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不浙巾으로 되어 있다. 어느 경우건 문리가 통하지 않는다. 혹시 不折巾의 오기일지도 모른다. 절건(折巾)은 절각건(折角巾)이라 하여 한 모서리가 꺾여진 두건을 말한다. 또한 목민심서(牧民心書) 병전(兵典) 연졸조(練卒條)에 군사훈련할 때 호의(號衣)와 전립(戰笠)이 하나라도 해지거나 찢어진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호의는 군복인 더그레, 전립은 군모인 벙거지를 가리킨다.

[D-013]온 원수(溫元帥) : 원수(元帥)는 천군(天君)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도교(道敎)에서 숭상하는 무용(武勇)의 신()이다. 온 원수는 마 원수(馬元帥), 조 원수(趙元帥), 관 원수(關元帥 : 관우關羽)와 함께 도교의 호법 사신(護法四神)’의 하나로, 이들을 속칭 사대원수(四大元帥)’라고 한다. 온 원수는 원래 온주(溫州) 사람으로 이름을 경()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청면적발신(靑面赤髮神)으로 변하여 무장을 하고 용맹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동악대제(東岳大帝)가 그를 우악신장(祐岳神將)으로 삼았다고 한다. 三敎源流搜神大全 여기서는 온 원수의 모습를 그리거나 溫元帥라고 쓴 깃발을 뜻한다.

[D-014]마 원수(馬元帥) : 화광대제(華光大帝), 삼안영관마천군(三眼靈官馬天君)이라고도 한다. 전신(前身)이 남두(南斗)  6 성이어서 그 별의 이름을 따서 승()으로 이름을 삼았으며, 머리가 셋에 눈이 아홉 개였다고 한다. 옥황상제로부터 진무대제부장(眞武大帝部將)에 봉해졌다고 한다.

[D-015]조현단(趙玄壇) : 조 원수(趙元帥)를 말한다. 이름은 낭()이나, 공명(公明)이라는 자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조공명은 진() 나라 때 산중으로 피난하여 수련 끝에 옥황상제로부터 신소부수(神宵副帥), 주령뢰정부원수(主領雷霆副元帥) 등에 임명되었으며, 또한 천사(天師) 장도릉(張道陵)이 선단(仙丹)을 수련할 때 옥황상제로부터 현단대원수(玄壇大元帥)에 임명되어 단로(丹爐)를 수호하러 강림했다고 한다. 검은 호랑이를 타고 다닌다고 하였다.

[D-016]구진(句陳)과 흡사하더군 : 구진은 전통 천문학의 이른바 자미원(紫薇垣)에 있는 별의 하나이다. 작은 별 6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곧 현대 천문학에서 말하는 북극성(北極星)이다. 구진은 천자(天子)의 군대를 주관한다고 하며, 금군(禁軍)을 상징한다. 원문은 似句陳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7]옛날에 …… 있었으니 : 조공(曹公)은 조조(曹操)를 이른다. 흉노(匈奴)가 사신을 보내오자, 조조는 자신의 용모가 보잘것없음을 꺼려 위엄 있고 잘생긴 신하 최염(崔琰)을 시켜 대신 용좌(龍座)에 앉아 있게 하고, 자신은 스스로 칼을 쥐고 용상(龍床) 앞에 서 있었다. 나중에 사람을 시켜 조공(曹公)이 어떻더냐?’고 물었더니, 흉노의 사신이 대답하기를 조공이 잘생기기는 했으나, 용상 앞에서 칼을 쥐고 시립(侍立)한 사람이야말로 영웅이더라.’고 했다고 한다. 三國志補注 卷3 魏書 崔琰傳》 《世說新語 容止

[D-018]몸소 …… 못했고 : 두원개(杜元凱)는 진() 나라의 유장(儒將) 두예(杜預 : 222~284), 원개는 그의 자이다. 진 나라 무제(武帝) 때 양호(羊祜)의 천거로 그의 후임으로 대장군이 되어 오()를 정벌하고 무공을 세웠으나, 말을 탄 적이 없었으며 화살이 과녁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스스로 좌전벽(左傳癖)’이 있다고 하였으며 좌전집해(左傳集解)를 저술했는데, 이는 가장 이른 시기의 좌전 주해(注解)였다. 晉書 卷34 杜預傳 규장각 직제학을 겸임한 유언호가 두예와 같은 학문적 업적을 남기기를 기대하며 한 농담이다. 유언호는 말 대신 초헌(軺軒)을 탔다.

[D-019]느슨한 …… 모르겠구려 : 양숙자(羊叔子)는 진 나라 때의 명신(名臣) 양호(羊祜), 숙자는 그의 자이다. 양호는 군진(軍陣)에 있을 때 항상 가벼운 갖옷을 입고 띠를 느슨히 맨 채 갑옷을 걸치지 않아 선비의 기풍이 있었다 한다. 양호가 장수로서 양양현(襄陽縣)을 지키고 있을 때에 이곳 주민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그가 죽자 백성들이 그가 이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다가 인생무상을 느끼고 눈물을 흘렸다는 현산(峴山)에 추모비를 세웠다. 사람들이 이 비석을 보기만 하면 양호를 추념하여 눈물을 흘렸으므로, 두예가 타루비(墮淚碑)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晉書 卷34 羊祜傳 유언호가 양호와 같이 선정을 행하기를 기대하며 한 농담이다.

[D-020]남루(南樓) : 개성 남대문(南大門)의 문루(門樓)를 가리키는 듯하다.

[D-021]중경소집기(中京小集記) : 유언호의 연석(燕石)  2 책에 서경소집기(西京小集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그 밑에 소주로 정유(丁酉)’라 하여 1777년에 지은 것임을 밝혀 두었다. ‘중경 서경은 같은 말로, 개성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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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3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3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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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3]

28 족손(族孫) ()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박군(朴君) 묘지명

29 맏누님 증() 정부인(貞夫人) 박씨 묘지명

30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 묘지명

31 홍덕보(洪德保) 묘지명

32 치암(癡庵) 최옹(崔翁) 묘갈명

33 이 처사(李處士) 묘갈명

34 () 사헌부 지평 예군(芮君) 묘갈명

35 참봉(參奉) 왕군(王君) 묘갈명

36 가의대부(嘉義大夫) 행 삼도통제사(行三道統制使) 증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 충강(忠剛)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37 주공탑명(麈公塔銘)

 

 

 

족손(族孫) ()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박군(朴君) 묘지명

 

원임(原任) 이조 판서 박공 상덕(朴公相德)이 맏아들 급제군(及第君) 수수(綏壽)의 상()을 당했다. ()에 맏아들을 위해 삼 년의 복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대개 그의 조부인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부군(府君) () 아무와, 선친 진사(進士) 증 이조 판서 부군 휘 아무를 계승하여 따로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차 모년 모월 모일에 파주(坡州) 광현(筐峴) 모 좌향(坐向)의 벌에 장사할 예정이다.

공은 지원(趾源)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내 아이가 일찍이 숙부님의 글을 몹시 좋아했으니, 숙부님이 지은 묘지명을 얻음으로써 죽은 자를 불후(不朽)하게 하고, 그뿐 아니라 산 자도 가끔 읽어 보고 그의 용모와 목소리를 상상함으로써 무궁한 그리움을 메워 볼까 합니다.”

지원은 공에게,

 

예예, 알겠습니다.”

하고 답하였다.

박씨(朴氏)는 여덟 망족(望族 명망 높은 씨족)이 있는데 그중에 반남(潘南)을 본관으로 한 박씨가 일족도 많고 크게 출세하였다. 다만 그 천성의 졸박(拙朴)함을 성자(姓字)와 함께 얻어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모범이 다른 씨족과는 크게 달랐다. 모두들 안에서는 부형을 스승으로 섬기고, 밖에서는 결코 허황되게 남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명론(名論)은 집 밖을 벗어나지 않고 발걸음이 뒷골목에 미치는 일이 드물었다.

그중에 곤궁한 자는 춥고 배고픈 데에 이골이 나서 삼가 자신의 분수에 충실할 뿐이며, 현달한 자는 겸양과 염치를 길러 혹시라도 선비의 본색을 벗어날까 두려워했고, 어진 이는 스스로 터득하기에 있는 힘을 다하고 선()을 보면 단단히 지키며, 어리석은 자는 차라리 고루하고 견문이 적은 탓으로 떨쳐 일어나지 못할망정 세상 돌아가는 대로 따라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순박하고 촌스럽고 비타협적이고 어눌함으로써 확연히 남다른 하나의 가풍을 이루었으며, 이른바 세태와 시속(時俗)이란 것은 배우고 싶어도 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귀 기울이고 눈길 돌릴 줄도 모르니 물들려야 물들 수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속에 부끄러움으로 그 낯빛을 붉힌 채 마치 농사꾼이 번화가를 걷듯 하는 자는 물을 것 없이 우리 박씨였다.

그러므로 비록 공이 일찌감치 귀한 신분이 되었으나 홀()을 쥐고 허리띠를 드리운 채 조정에서 행동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의 가풍을 스스로 증험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간혹 우리 집안사람들의 성품이 이러한 줄은 모르고, 남과 친히 할 때 조금 곰살궂지 못하면 오만한 게 아닌가 자못 의심하며, 응대하는 일에 왕왕 소홀하다 보면 도리어 뻣뻣한 탓으로 돌리어, 모두 이르기를 반남 박씨란 거들먹거릴 것도 없으면서 제멋대로 교만하다.’ 하였다. 그러므로 자제 중에 총명하고 재주 있어 조금이라도 그런 티를 드러내는 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집안끼리 모여서 두려워하며 이놈은 어째서 우리 집안의 상규(常規)와 다른가라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보니 망자(亡者 박유수를 가리킴)는 재주가 그렇게 아름다운데도 오히려 집안에서라도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두텁게 가리고 숨기느라 겨를이 없었는데, 하물며 딴 사람에게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비록 과거에 우연찮게 급제하기는 했지만 담박하여 흥미 없어 했으며, 수시로 먼 데를 바라보며 사모하기를 마치 학이 새장 안에 있는 것같이 하였다. 그러나 답답한 심정을 이야기할 상대가 없으니 홀로 술로써 속을 풀었다. 거처하는 방에는 먼지가 뽀얗고 책상에는 초라한 두어 질의 책뿐으로, 항상 하루 묵고 가는 주막집과 같았다. 감사로 나가는 아버지를 여러 번 따라다녔으나 상자 속에는 먹 한 자루도 저장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벼룻집을 만들고 싶었으나 그 품삯을 걱정하여 그만두었으니 그 졸박함이 이와 같았다.

평양은 도읍이 화려하고 돈이 물 흐르듯 하며, 높고 큰 누대들이 많아서 사방에서 유람객들이 몰려들어 오고 맑은 노래와 절묘한 춤이 노상 좌우에 있었지만, ()은 바야흐로 고개를 공손히 숙이고 날마다 정문(程文)을 공부하였다. 문밖에는 신 두 켤레밖에 없었으니,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동접(同接)의 선비였다. 때로는 스스로 아이종에게 술 한 병을 들려 따르게 하고서, 훌쩍 홀로 걸어 나가 먼 곳을 내려다보며 시를 읊조리곤 하였다. 홀홀하기가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았으니, 전 감영의 군교(軍校)와 이졸(吏卒)들도 군이 관아에 있는 줄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런 군을 누가 조롱하였더니, 군은 말하기를 집에 있으면 감독(監督)이요, 관아에 있으면 나그네이지요.”라 하였다.

! ()은 아비가 된 29년에 그 아들에 대해 안 것이라곤 오직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손하고 검박하여 가풍을 잃지 아니하고, 자신의 곤궁함과 현달함, 어짊과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그의 맑고 트인 흉금이라든가 빛나고 화려한 문장 같은 것은 역시 어느 것도 알 수가 없었으니, 군의 어짊이 남보다 크게 나은 점이 있었지만 지금 그를 대신해서 그의 평생을 자상히 말하여 공의 마음을 거듭 아프게 하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공은 듣고서 너무도 애통하여,

 

과연 그랬군요 과연 그랬다면 산 자의 원통함이 죽은 자보다 더욱 심하니, 이로써 묘지(墓誌)를 지어 주기 바랍니다.”

하므로, 드디어 그 말을 적고 나서 다음과 같이 서문을 붙인다.

군의 자()는 공리(公履),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 첨정(僉正  4 품 벼슬) ()의 따님이다. 군은 지금 임금 갑자년(1744, 영조 20)에 태어나서 임진년(1772, 영조 48) 모월 모일에 죽었다.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8세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였다. 그 이듬해에 죽었으므로 미처 분관(分館)을 못한 까닭에 관례에 따라 홍문관 정자를 증직(贈職)하였다. 현감(縣監) 한산(韓山) 이응중(李應重)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딸 하나를 두었는데 현재 다섯 살이다.

군이 바야흐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장차 그의 가문을 이어 갈 터였으나, 다만 술에 병들어 갈수록 더 마시다가 황달이 들었다. 하루는 거울을 끌어다 자기 얼굴을 비춰 보고는 땅에 내던지며,

 

내가 어찌 오래가겠나.”

하고서, 공중에 대고 글자나 쓰며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더니, 이내 의관을 정제하고 부모님께 나아가 영이별을 고하는데 말이 너무나도 비창하였다. 온 집안이 크게 놀라며 비로소 그가 병든 줄 알고 바야흐로 의원을 맞아다 황달을 치료했으나 이미 늦어서, 군은 병으로 인해 혀가 굳어 말을 못한 채 며칠 만에 죽었다. 그는 사람 관상을 잘 보아 왕왕 기가 막히게 맞추었다. ()은 다음과 같다.

 

귀하게 되면 인색해지고 / 貴之徵嗇

부유해지면 더러워지고 / 富之徵濁

오래 살면 포악해진다 / 壽之徵虐

인자하고 진실한 자에겐 요절이 뒤따르고 / 慈諒者夭之躅

깨끗하여 찌끼 없는 자에겐 가난이 깃들고 / 皭無滓者貧之宅

베풀기 좋아하고 주는 것 많은 자는 높은 벼슬이 없다 / 好施多予者無高爵

이 여섯 가지 덕 중에 내 장차 어느 것을 택할꼬 / 于玆六德吾將焉擇

! 못난 자식에겐 격려하여 일으켜 세우고 / 吁不肖者勸以作

얌전한 자에겐 가로막아 억누르다니 / 愷悌者沮而抑

내 말을 못 믿거들랑 여기 새긴 글월을 보소 / 有不信視此刻

 

 

얼굴을 그려 낸 글로는 천고에 사마천(司馬遷) 같은 이가 없다. 그는 매양 사람의 흠 있는 부분이나 결여된 부분에 대해 반드시 있는 힘을 다해 그려 내었다. 요컨대 흠 있는 부분이나 결여된 부분은 그 사람의 여백이지만, 그 여백이야말로 그 사람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정신이란 이른바 붓을 들어 표현하기 이전에 있으며, 표현된 문장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대가미(戴葭湄)가 남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 얼굴이 둥글면 모나게 그려 내고, 그 얼굴이 길면 짧게 그려 낸다. 그린 것은 모나고 짧지만, 초상은 둥글고 길다.” 하였는데, 이 말은 문장가에게 가장 합당하다 하겠다. 나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속에서 이 사람박수수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지금 이 글을 읽고는 글 짓는 요령을 대략 터득하였다.

 

[C-001]족손(族孫) …… 묘지명 : 정자(正字)는 홍문관의 정 9 품 벼슬이다. 동일한 제목의 글이 윤광심(尹光心) 병세집(幷世集)에도 실려 있는데 내용이 크게 차이 난다. 운산만첩당집 중 이 글에 붙인 이재성(李在誠)의 평어에 고친 원고가 처음 원고만 못하다.改本不如草本고 했는데, 병세집에 실린 글은 여기서 말한 처음 원고가 아닌가 한다.

[D-001]박공 상덕(朴公相德) : 상덕(相德)은 박종덕(朴宗德 : 1724~1779)의 초명(初名)이다. 박종덕은 이조 판서로 전후 18년간이나 재임하였으며,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그의 조부는 박사정(朴師正 : 1683~1739)인데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연암에게는 재종숙부가 된다. 연암이 지은 묘갈명과 묘표음기(墓表陰記)가 각각 연암집 3과 권9에 수록되어 있다. 박종덕의 부친은 박흥원(朴興源 : 1708~1736)인데 진사 급제 후 요절하였다.

[D-002]() …… 하였으니 : 의례(儀禮) 상복(喪服) 아버지는 맏아들을 위해 참최(斬衰)의 복을 입는다.父爲長子고 하였다. 적장자(嫡長子)는 장차 대종(大宗)이나 소종(小宗)의 종주(宗主)가 되기 때문이다. 예기 대전(大傳) 서자(庶子)는 맏아들을 위해 3년의 복을 입을 수 없으니 그 맏아들은 선조를 계승할 수 없기 때문이다.庶子不得爲長子三年 不繼祖也라고 하였다.

[D-003]아무 : 원문은 인데, 김택영의 연암속집(燕巖續集) 중편연암집에는 師正으로 이름을 밝혀 놓았다.

[D-004]아무 : 원문은 인데, 김택영의 연암속집 중편연암집에는 興源으로 이름을 밝혀 놓았다.

[D-005]따로 …… 때문이다 : 소종(小宗)이 되었다는 뜻이다. 고래의 종법제도(宗法制度)에 의하면 무릇 고조(高祖)가 같은 형제들이 하나의 소종이 되며,  5 대가 되어 고조가 같지 않게 되면 별개의 소종(小宗)으로 나뉘게 된다.

[D-006]박씨(朴氏) …… 있는데 : 박씨 중 밀양(密陽) · 반남 · 고령(高靈) · 함양(咸陽) · 죽산(竹山) · 순천(順天) · 무안(務安) ·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하는 이른바 팔박(八朴)’을 가리킨다.

[D-007]명론(名論) : 여러 가지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사대부로서 처신하는 문제, 즉 출처(出處)의 명분(名分)에 관한 논의를 가리키는 듯하다.

[D-008]() …… 지키며 : 중용장구  20 장에 성실하고자 하는 자는 선()을 가려서 단단히 지키는 자이다.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라고 하였다.

[D-009]부끄러움으로 ……  : 원문은 其色赧赧然若夏畦之行于莊嶽者인데,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유래한 표현들로 점철되어 있다. 자로(子路) 남들과 의견이 합치하지 않는데도 그들과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낯빛을 살펴보면 부끄러움으로 벌겋다.觀其色赧赧然 이와 같은 처신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고, 증자(曾子) 어깨를 움츠리고 억지 웃음 짓는 것이 여름철 밭일하기夏畦보다 괴롭다.”고 하였다. ‘夏畦는 농사꾼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또한 맹자는 말하기를, () 나라 대부(大夫)가 아들에게 말을 가르칠 때 그 아들을 데려다 장()과 악()의 사이에 수년간 두면, 아무리 회초리질을 하며 제 나라 말 대신 초() 나라 말을 배우게 강요한들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장과 악은 각각 제 나라의 도읍 안에 있던 거리와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D-010]() ……  : 임금 앞에서 신하는 반드시 홀을 손에 쥐어야 한다. 임금을 모시고 있을 때에는 허리를 굽히고 있으므로 관복의 허리띠가 아래로 드리워지게 된다. 禮記 玉藻

[D-011]먹 한 자루 : 원문은 一墨인데, 병세집에는 一筆로 되어 있다.

[D-012]정문(程文) : 과거 응시자가 지어 바치는 일정한 격식의 문장을 이른다.

[D-013]집에 있으면 감독(監督)이요 : 사기 41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집에 맏아들이 있으면 그 집안의 감독이라 한다.家有長子曰家督고 하였다. 원문은 在家則督인데, ‘ 자가 병세집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14]과연 그랬군요 : 원문 有是哉 논어 자로(子路)  3 장에 나오는 구절인데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이에 대해 다산(茶山)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 예전부터 의심하던 것이 이제 증명되었다는 말이라 해석하였다.!

[D-015]진사시 : 원문은 進士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司馬, 병세집에는 生員으로 되어 있다.

[D-016]분관(分館) : 문과에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承文院), 성균관(成均館), 교서관(校書館)의 세 관청에 나누어 배치하여 일종의 임시직인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를 익히게 하는 일을 이른다.

[D-017]홍문관 정자를 증직(贈職)하였다 : 원문은 贈弘文館正字인데, 병세집에는 그 다음에 兼知製敎’ 4자가 더 있다.

[D-018]공중에 …… 쓰며 : 원문은 書空인데, () 나라 은호(殷浩)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크게 실망한 경우를 비유할 때 쓴다. 은호(殷浩)가 무능하다 하여 먼 지방으로 쫓겨나자 온종일 어허! 괴상한 일이로고.咄咄怪事라는 네 글자만 공중에 대고 쓰며 지냈다고 한다.

[D-019]부모님께 …… 고하는데 : 원문은 辭訣於父母인데, 병세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0]부유해지면 더러워지고 :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것을 탁부(濁富)’라고 한다. 청빈(淸貧)의 정반대가 되는 말이다.

[D-021]포악해진다 : 원문은 인데, 병세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22]격려하여 일으켜 세우고 : 원문은 勸以作인데, 여러 이본들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3]대가미(戴葭湄) : 가미(葭湄)는 청대(淸代) 초상화의 대가인 대창(戴蒼)의 자()이다.

[D-024]문장가에게 …… 하겠다 : 원문은 最宜操觚家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最宜省으로 되어 있다.

[D-025]이 글 : 원문은 此篇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맏누님 증() 정부인(貞夫人) 박씨 묘지명

 

 

유인(孺人)의 휘()는 아무요 반남 박씨이다. 그 아우 지원(趾源) 중미(仲美 연암의 자)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유인은 16세에 덕수(德水) 이택모 백규(李宅模伯揆)에게 출가하여 1 2남을 두었으며 신묘년(1771, 영조 47) 9월 초하룻날에 돌아갔다. 향년은 43세이다. 남편의 선산이 아곡(鵶谷)에 있었으므로 장차 그곳 경좌(庚坐)의 묘역에 장사하게 되었다.

백규가 어진 아내를 잃고 난 뒤 가난하여 살아갈 방도가 없게 되자, 그 어린것들과 여종 하나와 크고 작은 솥과 상자 등속을 끌고 배를 타고 협곡으로 들어갈 양으로 상여와 함께 출발하였다. 중미는 새벽에 두포(斗浦)의 배 안에서 송별하고, 통곡한 뒤 돌아왔다.

, 슬프다! 누님이 갓 시집가서 새벽에 단장하던 일이 어제런 듯하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응석스럽게 누워 말처럼 뒹굴면서 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더듬거리며 정중하게 말을 했더니, 누님이 그만 수줍어서 빗을 떨어뜨려 내 이마를 건드렸다. 나는 성을 내어 울며 먹물을 분가루에 섞고 거울에 침을 뱉어 댔다. 누님은 옥압(玉鴨)과 금봉(金蜂)을 꺼내 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달랬었는데, 그때로부터 지금 스물여덟 해가 되었구나!

강가에 말을 멈추어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휘날리고 돛 그림자가 너울거리다가, 기슭을 돌아가고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르러 쪽 찐 머리 같고, 강물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고운 눈썹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누님이 빗을 떨어뜨렸던 일을 생각하니, 유독 어렸을 적 일은 역력할 뿐더러 또한 즐거움도 많았고 세월도 더디더니, 중년에 들어서는 노상 우환에 시달리고 가난을 걱정하다가 꿈속처럼 훌쩍 지나갔으니 남매가 되어 지냈던 날들은 또 어찌 그리도 촉박했던고!

 

떠나는 자 정녕히 다시 온다 다짐해도 / 去者丁寧留後期

보내는 자 눈물로 여전히 옷을 적실 텐데 / 猶令送者淚沾衣

조각배 이제 가면 어느제 돌아오나 / 扁舟從此何時返

보내는 자 헛되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 送者徒然岸上歸

 

 

인정(人情)을 따른 것이 지극한 예()가 되었고, 눈앞의 광경을 묘사한 것이 참문장이 되었다. 문장에 어찌 일정한 법이 있었던가? 이 글을 옛사람의 문장을 기준 삼아 읽는다면 당연히 이의가 없겠지만, 지금 사람의 문장을 기준 삼아 읽기 때문에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상자 속에 감추어 두기 바란다.  중존(仲存 : 이재성의 자) 

 

[C-001]맏누님 …… 묘지명 : 종북소선(鍾北小選) 망자 유인 박씨 묘지명亡姊孺人朴氏墓誌銘’, 병세집 맏누님 유인 박씨 묘지명伯姊孺人朴氏墓誌銘 과 동일한 작품이지만, 구체적인 표현에서 크게 차이 난다. 초기작인 종북소선이나 병세집의 글을 개작한 것이라 판단된다. 연암은 이 묘지명의 글씨를 중국인에게 받아 오도록 사행(使行) 편에 부탁했던 듯하다. 그리하여 중국인 호부 주사(戶部主事) 서대용(徐大榕)이 그의 외종제(外從弟) 양정계(楊廷桂)의 글씨를 받아 연암에게 부쳐 왔다고 한다. 熱河日記 避暑錄

[D-001]유인(孺人) : 벼슬하지 못한 선비의 아내를 사후에 일컫는 존칭이다. 덕수 이씨(德水李氏) 족보에 의하면, 박씨의 남편인 이현모(李顯模)는 나중에 종 2 품 벼슬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선친 이유(李游)에게도 참판이 증직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인 박씨에게도 추후에 정부인(貞夫人)의 봉작(封爵)이 내렸던 듯하다.

[D-002]이택모 백규(李宅模伯揆) : 택모(宅模)는 이현모(李顯模 : 1729~1812)의 처음 이름이다. 백규(伯揆)는 그의 처음 자이고, 나중에 이름을 고치면서 자도 회이(誨而)로 고쳤다. 이현모는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후손이다.

[D-003]아곡(鵶谷) :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楊平郡)에 통합된 지평현(砥平縣)에 있었다.

[D-004]두포(斗浦) : 병세집에는 두포(豆浦)’로 되어 있다. 두포(豆浦)는 곧 두모포(豆毛浦)를 가리킨다. 두모포는 지금의 한강 동호대교 북단인 서울 성동구 옥수동 옥정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유명한 나루였다. 우리말로는 두뭇개라고 했는데, 이는 한강과 중랑천의 두 물이 합류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지명이라 한다. 이와 같이 두모포(豆毛浦)가 원래 두뭇개를 음차(音借)한 것이었으므로, 그 준말인 두포(豆浦)’를 한자음이 같은 두포(斗浦)’로 적기도 했던 듯하다.

[D-005]말처럼 뒹굴면서 : 원문은 인데 말이 토욕(土浴)하는 것, 즉 땅에 뒹굴며 몸을 비벼 대는 것을 말한다.

[D-006]옥압(玉鴨)과 금봉(金蜂) : 옥압은 오리 모양으로 새긴 옥비녀를 가리킨다. 비슷한 것으로 옥봉(玉鳳), 옥연(玉燕) 등이 있다. 또 금으로 나비나 잠자리 모양 등을 만들어 비녀 위에 장식하는 것을 금충(金蟲)이라 한다. 금봉(金蜂)은 금으로 벌 모양을 만든 그와 같은 수식(首飾)을 가리킨다.

[D-007]조각배 이제 가면 : 원문은 扁舟從此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此時此去로 되어 있고, 과정록(過庭錄) 1에는 扁舟一去로 되어 있다.

[D-008]떠나는 …… 돌아가네 : ()을 대신하여 7언 절구를 실었다. 과정록(過庭錄) 1에서 이덕무(李德懋) 배에서 누님의 상여 행차를 송별하며舟送姊氏喪行란 제목으로 이 시를 소개한 뒤 이를 읽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 묘지명

 

 

공인의 휘()는 아무이니 완산(完山 전주(全州)) 이동필(李東馝)의 따님이요, 왕자 덕양군(德陽君)의 후손이다. 16세에 반남(潘南) 박희원(朴喜源)에게 출가하여 아들 셋을 낳았으나 다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

공인은 평소 여위고 약하여 몸에 온갖 병이 떠날 새가 없었다. 희원의 조부는 당세에 이름난 고관으로서 선왕 때에 매양 한() 나라 탁무(卓茂)의 고사를 들어 벼슬을 올려 주었다. 그러나 그분은 관직에 있을 때에 조그만큼도 재산을 늘려서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았으므로 청빈(淸貧)이 뼛속까지 스몄으며, 별세하던 날에 집안에는 단 열 냥의 재산도 남겨 둔 것이 없었다. 게다가 해마다 거듭 상()을 당했다.

공인은 힘을 다하여 그 열 식구를 먹여 살렸으며, 제사 받들고 손님 접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명문 대가의 체면이 손실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미리 준비하고 변통하기 거의 20년 동안에, 애가 타고 뼛골이 빠졌으며 근소한 식량마저 바닥이 나게 되니, 마음이 위축되고 기가 꺾이어 마음먹은 뜻을 한 번도 펴 본 적이 없었다. 매양 늦가을에 나뭇잎이 지고 날이 차지면 마음이 더욱 허전하고 좌절됨으로써 병이 더욱 더치어, 몇 해 동안을 끌더니 마침내 지금 임금 2년 무술년(1778) 7 25일에 돌아갔다.

! 가난한 선비의 아내를 옛사람은 약소국의 대부(大夫)에 견주었거니와, 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지탱하려 하나 언제 망할지 모르는 지경인데도 능히 제 힘만으로 외교사령(外交辭令)을 잘하고 나라의 체모를 갖추었던 약소국의 대부처럼, 가난한 선비의 아내로서 보잘것없는 제물이나마 결코 제사를 거르지 않았으며 넉넉지 못한 부엌살림이나마 잔치를 너끈히 치러 냈으니, 어찌 이른바 몸이 닳도록 힘을 다하여 죽어서야 그만둔 분이 아니겠는가?

시동생 지원(趾源)이 애를 낳아 막 탯줄을 끊자마자 공인이 사내임을 살펴보고서 드디어 아들을 삼았는데 그 아들이 지금 13세가 되었다. 지원이 화장산(華藏山) 속 연암(燕巖) 골짜기에 새로 살 곳을 정하고, 그곳의 산수를 좋아하여 손수 잡목 수풀을 베어 내고 수목에 의지하여 집을 만들었다.

일찍이 공인을 마주하여 말하기를,

 

우리 형님이 이제 늙었으니 당연히 이 아우와 함께 은거해야 합니다. 담장에는 빙 둘러 뽕나무 천 그루를 심고, 집 뒤에는 밤나무 천 그루를 심고, 문 앞에는 배나무 천 그루를 접붙이고, 시내의 위와 아래로는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천 그루를 심고, 세 이랑 되는 연못에는 한 말의 치어(稚魚)를 뿌리고, 바위 비탈에는 벌통 백 개를 놓고, 울타리 사이에는 세 마리의 소를 매어 놓고서, 아내는 길쌈하고 형수님은 다만 여종을 시켜 들기름을 짜게 재촉해서, 밤에 이 시동생이 옛사람의 글을 읽도록 도와주십시오.”

했다. 공인은 이때 비록 병이 심했으나,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머리를 손으로 떠받치고 한 번 웃으며 말하기를,

 

이는 바로 나의 오랜 뜻이었소!”

하였다.

그래서 같이 오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바랐던 터인데, 심어 놓은 곡식이 익기도 전에 공인은 이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마침내 관()에 담겨 돌아와서 그해 9 10일에 집의 북쪽 동산 해좌(亥坐)의 묘역에 장사하였으니, 공인의 생전의 뜻을 이뤄 드리고자 해서였다. 그 지역은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속한다.

지원은 친구인 규장각 직제학 유언호(兪彦鎬)에게 명()을 청했다. 언호는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갓 부임했는데, 지역이 연암 골짜기와 인접하여 장례를 도와주고 명도 지어 주었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연암 골짜기는 산 곱고 물 맑은데 / 燕巖之洞山窈而水淥

여기에 시아주비가 터를 닦았네 / 繄惟小郞之所營築

! 온 가족 다 함께 은거하려 했더니 / 嗚呼鹿門盡室之計

마침내 여기에 몸을 맡기셨도다 / 竟於焉而托體

안온하고도 견고하니 / 旣安且固

후손들을 보호하고 도와주시리라 / 以保佑厥後

 

 

부드럽고 순하다婉嫕, 엄하고 착하다莊淑, 부지런하고 검소하다勤儉는 등의 글자가 하나도 없는데도, 조상 제사를 받들고 집안을 다스리고 우애하고 인자하고 온화하고 유순한 공인의 덕이 눈으로 보는 듯이 상상된다. 요컨대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깨끗한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 슬픔과 탄식으로 사람을 감동시킨다.  중존(仲存) 

 

 

옛날에 원헌(原憲)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최근 세상의 가난한 선비 집안의 부인네들에게는 가난이 바로 병이요, 병이 바로 가난이다. 가난이라는 병이 단단히 엉겨 붙어 벗어 내고 떼어 버릴 길이 없어, 집집마다 똑같은 증세요, 사람마다 매한가지 빌미이다. 왕왕 진찰하여 그 원인을 찾아내도, 가려서 취해 쓸 만한 묘한 약방문이 없으며, 이와 같은 묘한 약방문이 있어 가려서 취해 쓴다 한들 또한 국의(國醫)가 없어 처방을 낼 수 없다.

엽전 꿰미가 관복에 수놓은 이무기가 서린 것 같고, 상자를 열면 베와 비단이요, 쌀과 곡식이 창고에 가득 들어오면, 손으로 한번 어루만지기만 해도 고통이 씻은 듯 가셔 버리고, 눈을 들어 한번 보기만 해도 심장이 튼튼해지고 구미가 돌아와서, 죽다가도 되살아나니 이것이 바로 최상의 약이다. 사슴 머리에서 잘라 낸 녹용과 갓난애만 한 신비한 인삼으로도 이런 부인네를 낫게 하기란 마치 물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이것은 약왕보살(藥王菩薩)의 구고진경(救苦眞經)에서 나온 약방문이다.  중존(仲存) 

 

[C-001]맏형수 …… 묘지명 : 제목에 맏형수라는 伯嫂’ 2자가 없는 이본들도 있다.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 연암집 산고(散稿)에는 제목이 伯嫂李恭人墓碣銘으로 되어 있으며 본문도 상당히 차이 난다. 공인(恭人)은 정 5 품 또는 종 5 품 벼슬아치의 부인에게 내린 벼슬을 이른다. 연암은 이 묘지명의 글씨 역시 중국인에게 받아 오도록 사행(使行) 편에 부탁하여, 서대용(徐大榕)이 그의 외종제 양정계(楊廷桂)의 글씨를 부쳐 왔다고 한다. 熱河日記 避暑錄

[D-001]덕양군(德陽君) : 중종(中宗)과 숙원(淑媛) 이씨(李氏) 사이에서 출생한 왕자인 이기(李岐 : 1524~1581)의 봉호(封號)이다.

[D-002]박희원(朴喜源)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 연암집 산고(散稿)에는 喜源 로 되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喜源도 같다.

[D-003]탁무(卓茂)의 고사 : 탁무(?~28)는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자강(子康)이다. 전한(前漢) 원제(元帝) 때에 통유(通儒)로 불려 시랑(侍郞)에 천거되기도 하였고, 밀현령(密縣令)이 되어서 선정을 베풀기도 하였다. 왕망(王莽)이 집권할 때 벼슬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 대고 사직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즉위하자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그를 태부(太傅)로 발탁하고 포덕후(褒德侯)에 봉하였다. 後漢書 卷55 卓茂列傳

[D-004]희원의 …… 올려 주었다 : 희원의 조부는 자헌대부(資憲大夫)요 지돈녕부사를 지냈으며 시호를 장간(章簡)이라 한 박필균(朴弼均 : 1685~1760)이다. 연암집 9에 실린 그에 대한 가장(家狀)에 의하면, 1758년 동지돈녕부사에 제수되어 입시(入侍)했을 때 영조(英祖)가 탁무(卓茂)의 고사를 들어 특별히 지중추부사에 제수했다고 한다. 영조실록 34 7 24일 조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벼슬을 올려 주었다增秩는 부분이 褒之로 되어 있다.

[D-005]게다가 …… 당했다 : 1759년에 공인의 시어머니 함평 이씨(咸平李氏)가 사망한 데 이어 1760년 시조부 박필균이 사망하고, 1761년 시조모 여주 이씨(驪州李氏)가 사망하였다. 1767년에는 시아버지 박사유(朴師愈)가 사망하였다.

[D-006]열 식구 : 시동생인 연암의 가족들을 포함한 숫자이다. 당시 연암의 가족은 부부와 1남 종의(宗儀) 2녀로 모두 다섯 식구였다.

[D-007]뼛골이 빠졌으며 : 원문은 擢髓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8]병이 더욱 더치어 : 원문은 疾益發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9]가난한 …… 견주었거니와 : 주역 곤괘(困卦)에 대한 정이천(程伊川)의 전()에 구사(九四)의 효사(爻辭)를 풀이하면서, 처음에는 고생하지만 사필귀정(事必歸正)할 점괘이니 가난한 선비의 아내와 약소국의 신하는 각자의 올바른 명분에 안주할 따름이다.寒士之妻 弱國之臣 各安其正而已라고 하였다.

[D-010] …… 하나 : 원문은 拄傾支覆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1]제 힘만으로 : 원문은 自立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自强으로 되어 있다.

[D-012]보잘것없는 제물이나마 : 원문은 澗蘩沼毛인데 계곡물과 늪에 자란 산흰쑥과 풀들이라는 뜻으로,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3년 조에 진실로 분명한 믿음이 있다면, 계곡물과 늪가에 자란 풀이나 개구리밥 · 산흰쑥 · 조류(藻類) 같은 나물澗谿沼沚之毛 蘋蘩薀藻之采 …… 귀신에게 바칠 수 있고 왕공(王公)에게 드릴 수 있다.”고 하였다.

[D-013]결코 …… 않았으며 : 원문은 不餒其鬼神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足以響神으로 되어 있고,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俾神不餒로 되어 있다.

[D-014]몸이 …… 그만둔 : 원문은 鞠躬盡瘁 死而後已인데,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D-015]지원(趾源)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도 같다.

[D-016]지원(趾源) …… 되었다 : 1766년에 연암의 장남 종의(宗儀)가 출생하였다.

[D-017]화장산(華藏山) : 황해도 개성 동북쪽, 금천군(金川郡) 내에 있는 산이다.

[D-018] …… 뿌리고 : 원문은 一斗魚苗인데,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十斛量魚, 동문집성에는 十斛養魚로 되어 있다.

[D-019] …… 놓고서 : 원문은 繫牛六角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이 다음에 身耕耘’ 3자가 추가되어 있다.

[D-020]길쌈하고 : 원문은 積麻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織麻로 되어 있다.

[D-021]여종을 …… 재촉해서 : 원문은 課婢趣榨油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收荏趣瀝油로 되어 있다.

[D-022]옛사람의 글 : 원문은 古人書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古書로 되어 있다.

[D-023]자기도 …… 웃으며 : 원문은 不覺蹶然起 扶頭一笑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聞輒欣然樂으로 되어 있다.

[D-024]심어 …… 전에 : 원문은 禾稼未熟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築室未竟으로 되어 있다.

[D-025]9 10 : 원문은 九月十日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6]규장각 직제학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內閣直學士로 되어 있다.

[D-027]유언호(兪彦鎬) : 1730~1796.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정조 즉위년(1776) 음력 9월 규장각(奎章閣)이 설치될 때 정 3 품 벼슬인 직제학(直提學)에 첫 번째로 제수되었으며, 또한 정조의 특지(特旨)로 이듬해 6월에는 개성 유수에 제수되었다.

[D-028]물 맑은데 : 원문은 水淥인데,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9]온 가족 …… 했더니 : 후한(後漢) 때 방덕공(龐德公)이 처자를 이끌고, 지금의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고 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D-030]안온하고도 견고하니 : 묏자리를 가리켜 한 말이다. 한유(韓愈)의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의 명사(銘辭) 여기는 자후가 묻힌 곳, 견고하고도 안온하니旣固旣安, 후손에게 복리(福利)를 가져다 주리라.”라고 하였다.

[D-031]원헌(原憲) …… 말했는데 : 공자의 제자 원헌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살고 있었는데, 출세한 자공(子貢)이 찾아와 그를 보고는 탄식하며 무슨 병이 있느냐고 묻자 원헌이 나는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배우고서 행하지 못함을 병이라 한다고 들었소. 지금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이 아니라오.” 하니, 자공이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莊子 讓王

[D-032]국의(國醫) : 나라 안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를 이른다.

[D-033]구미가 돌아와서 : 원문은 歸脾인데, 비장의 기능이 회복되어 식욕이 살아남을 뜻한다. 안신보심탕(安神補心湯)과 귀비탕(歸脾湯)은 정충증(怔忡症)에 특효가 있는데, 정충증은 심장이 갑자기 뛰고 누가 잡으러 오는 것처럼 불안하고 두려운 증세로, 부귀에 급급하고 빈천을 근심하면서 소원을 이루지 못할 때 많이 생긴다고 한다. 東醫寶鑑 卷58 怔忡

[D-034]마치 …… 같다 : 돌을 물에 던져 보았자 물을 흡수하지 않듯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경우를 뜻한다.

[D-035]약왕보살(藥王菩薩)의 구고진경(救苦眞經) : 약왕보살은 불교에서 아미타불 25보살의 하나로 중생에게 좋은 약을 주어 몸과 마음의 병고(病苦)를 덜어 주고 고쳐 주는 보살을 이른다.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 구고진경은 있으나, 약왕보살과는 무관하다. 여기서는 풍자를 위해 지어낸 불경 이름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홍덕보(洪德保) 묘지명

 

 

덕보(德保 홍대용(洪大容))가 죽은 지 3일 후에 문객(門客) 중에 연사(年使 동지사)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행길은 응당 삼하(三河)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삼하에는 덕보의 친구 손유의(孫有義)란 사람이 있는데 호를 용주(蓉洲)라 하였다. 몇 년 전에 내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용주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해, 편지를 남겨 덕보가 남쪽 지방으로 원이 되어 나간 사실을 자세히 서술하고 덕보가 보낸 토산물 두어 종류를 남기어 성의를 전달하고 돌아왔다. 용주가 그 편지를 떼어 보았다면 응당 내가 덕보의 벗인 줄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문객에게 부탁하여 다음과 같이 부고를 전하게 했다.

 

건륭(乾隆) 계묘년(1783) 모월 모일 조선 사람 박지원은 머리를 조아리며 용주 족하(足下)에게 사룁니다. 폐방(敝邦 우리나라) 전임 영천 군수(榮川郡守) 남양(南陽) 홍담헌(洪湛軒) 휘 대용(大容) 자 덕보가 올해 10 23일 유시(酉時)에 영영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평소에는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중풍으로 입이 비틀리고 혀가 굳어 말을 못 하다 잠깐 사이에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향년은 53세입니다.

고자(孤子 부친상 중의 아들) ()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어 제 손으로 부고를 써서 전할 수도 없거니와, 양자강(揚子江) 남쪽에는 편지를 전할 길이 없습니다. 이 부고를 오중(吳中)으로 대신 전달해서 천하의 지기(知己)들로 하여금 그가 죽은 날짜를 알도록 해 주어, 망자나 산 자나 족히 한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문객을 보내고 나서 나는 항주(杭州) 인사들의 서화와 편지 및 시문(詩文)들 총 10권을 손수 점검하여 관 옆에 벌여 놓고, 관을 어루만지면서 통곡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 덕보는 통명(通明)하고 민첩하고 겸손하고 단아하며, 식견이 깊고 견해가 정밀하였다. 특히 음률과 역법(曆法)에 뛰어났으니, 그가 만든 혼의(渾儀) 제기(諸器)는 오래오래 깊이 생각한 끝에 새롭게 기지(機智)를 짜낸 것이었다. 처음에 서양인들은 땅이 구형(球形)임을 설명하면서도 땅이 돈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덕보는 일찍이 논하기를 땅이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 하였다. 그 설이 미묘하고 심오하였으나, 다만 미처 그에 대해 저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만년에는 땅이 돈다는 것을 더욱 자신하여 의심이 없었다.

세간에서 덕보를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찌감치 스스로 과거를 폐하고 명리(名利)에 뜻을 끊고, 한가히 들어앉아 이름난 향을 피우고 거문고와 가야금을 타는 것을 보고서, 그가 장차 담담히 스스로 즐기며 속세에서 벗어나는 데 오로지 뜻을 두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덕보가 만물을 종합하고 정리해서 아무리 복잡한 것도 단호히 처리하여, 나라의 재정을 맡길 만도 하고 먼 외국에 사신으로 보낼 만도 하며, 군대를 통솔하는 기발한 책략을 지녔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유독 남들에게 혁혁하게 과시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두어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문서를 신중히 처리하고 정령(政令)을 기한 내에 집행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아전들은 설치지 않고 백성들은 절로 따르게 한 데에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다.

일찍이 그의 숙부가 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 데 수행하여, 육비(陸飛)와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을 유리창(琉璃廠)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 세 사람은 다 같이 전당(錢塘)에 거주하며, 모두 문장과 예술의 선비여서 그들이 교유하는 사람들도 중국 내의 유명 인사들이었다. 그런데도 모두 덕보를 추앙하여 대유(大儒)로 여겼다. 이들과 더불어 필담한 것이 누만언(累萬言)으로, 유교 경전의 뜻과 천인성명(天人性命)과 고금(古今)의 출처대의(出處大義)를 분석하였는데, 굉장하고 뛰어나서 즐거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급기야 작별하는 마당에 다다르자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이 한 번 이별로 그만이구려! 저승에서 서로 만나도 부끄러움이 없게 살기를 맹세합시다.”

하였다. 엄성과는 더욱 서로 마음이 맞아서, 군자가 세상에 나서거나 숨는 것은 시대에 따라야 하는 것임을 살짝 깨우쳤더니, 엄성은 크게 깨달아 남쪽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그 후 두어 해 만에 그가 민중(閩中)에서 객사하자 반정균이 편지를 써서 덕보에게 부고하였다. 덕보는 애사(哀辭)를 짓고 예물로 향을 갖추어 용주에게 부쳐 마침내 전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전달된 그날 저녁이 바로 대상(大祥 2주기 제사) 날이었다. 제사에 모인 이들은 서호(西湖) 주위 여러 고을 사람들이었는데, 모두들 경탄하면서 이는 지극한 정성으로 혼령을 감동시킨 결과라고 일렀다. 엄성의 형 과()  이름이다.  가 예물로 보낸 향을 사르고 그 애사를 읽은 뒤 초헌(初獻)을 하였다. 아들 앙() 이름이다.  은 편지를 보내 덕보를 백부(伯父)라 칭하면서 그의 아버지 철교(鐵橋 엄성의 호)의 유집(遺集)을 보냈는데, 돌고 돌아 9년 만에 비로소 받아보게 되었다. 그 문집 속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초상화가 있었다. 엄성이 민중에 있을 때 병이 위독하였는데도 덕보가 증정한 조선 먹을 꺼내 향내를 맡고 가슴에 얹은 채 죽었다. 마침내 그 먹을 관에 함께 넣었다. 오하(吳下) 사람들은 이 사실을 널리 알리면서 특이한 일로 여기어 다투어서 시와 산문을 지었는데, 주문조(朱文藻)라는 이가 편지를 부쳐 와 그 상황을 이야기했다.

! 그는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도 이미 비범하기가 마치 옛날의 특이한 사적 같았다. 벗으로서 지성(至性 선량한 천성)을 지닌 이라면 반드시 그 일을 널리 전파하여 비단 이름이 양자강 남쪽 지방에 두루 알려질 뿐만이 아닐 터이니, 구태여 내가 그의 묘지(墓誌)를 짓지 않더라도 덕보의 이름을 불후(不朽)하게 할 것이다.

부친의 휘는 역()이니 목사(牧使), 조부의 휘는 용조(龍祚)니 대사간이요, 증조의 휘는 숙()이니 참판이요, 모친은 청풍 김씨(淸風金氏)로 군수 방()의 따님이다.

덕보는 영조 신해년(1731)에 태어났다.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으며, 곧 돈녕부 참봉으로 옮겼으나 세손익위사 시직(世孫翊衛司侍直)으로 고쳐서 제수되었다. 사헌부 감찰로 승진되고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로 전직되었으며, 태인 현감(泰仁縣監)이 되어 나갔다가 영천 군수로 승진되어, 두어 해를 있다가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임하고 돌아왔다.

부인은 한산(韓山) 이홍중(李弘重)의 따님으로 1 3녀를 낳았다. 사위는 조우철(趙宇喆) · 민치겸(閔致謙) · 유춘주(兪春柱)이다. 그해 12 8일에 청주(淸州) 모 좌()의 벌에 장사 지냈다. ()은 다음과 같다.  명은 원고를 잃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800여 언()이 벗으로써 시작하여 벗으로써 맺었다. 한 글자도 효성과 우애, 자애와 공경 같은 집안의 바른 행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인륜에 독실했다는 것을 말 밖에서 찾아볼 수 있다.

 

[D-001]삼하(三河) : 하북성(河北省) 삼하현(三河縣)에 속한 고을로, 이곳과 통주(通州)를 거치면 곧 북경에 당도하게 된다.

[D-002]손유의(孫有義) : 거인(擧人)으로, 자를 심재(心栽)라고 하였다. 북경에서 귀환하던 홍대용과 1766년 음력 3월 초에 만나 필담을 나눈 것을 계기로, 이후 10여 년간 서신을 통해 교분을 이어 갔다. 간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에는 홍대용이 그에게 보낸 편지 6통이 수록되어 있다.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D-003]몇 년 …… 것이다 : 열하일기 관내정사(關內程史)에 관련 기사가 있다. 1780년 음력 7 30일 연암은 삼하에 있는 자택으로 손유의를 찾아갔으나, 그가 부재중이라 홍대용의 편지와 선물만 전하고 떠났다고 한다. 당시 연암이 전한 홍대용의 편지가 간정동회우록 여손용주서(與孫蓉洲書)’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그 편지에서 홍대용은 자신이 연초에 태인 현감(泰仁縣監)에서 경상도 죽령(竹嶺) 남쪽 고을인 영천(榮川)의 군수로 영전(榮轉)된 사실을 전하고, 아울러 그에게 연암을 문장과 품망(品望) 면에서 자신의 외우(畏友)라고 소개하면서 이번에 사행에 나선 연암 편에 이 편지를 부친다고 하였다.

[D-004]오중(吳中) : 항주(杭州)가 있는 절강성(浙江省) 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오하(吳下)라고도 한다. 중편연암집에는 越中으로,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는 浙中으로 되어 있다.

[D-005]시문(詩文) : 운산만첩당집에는 文獻으로 되어 있다.

[D-006]혼의(渾儀) 제기(諸器) : 담헌서(湛軒書) 외집(外集) 6 농수각의기지(籠水閣儀器志)에 혼의의 옛 제도를 개량하고 서양의 방법에 정통하여 새롭게 만들었다고 소개한 통천의(統天儀) · 혼상의(渾象儀) · 측관의(測觀儀) · 구고의(句股儀) 등의 천문의기(天文儀器)를 가리킨다.

[D-007]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 데 : 원문은 書狀之行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書狀使燕之行으로 되어 있다.

[D-008]일찍이 …… 만났다 : 홍대용은 1765(영조 41) 동지사의 서장관인 숙부 홍억(洪檍)을 따라 북경에 갔다. 유리창(琉璃廠)은 골동품 · 서화 · 서적 · 문방구 등을 파는 북경 선무문(宣武門) 밖의 유명한 상가(商街)이다. 그 이듬해 음력 2월 일행 중 비장(裨將) 이기성(李基成)이 과거 응시차 상경한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을 유리창에서 우연히 알게 된 것을 계기로, 홍대용이 간정동(乾淨衕)에 있던 그 두 사람의 숙소로 여러 차례 방문하여 장시간 필담을 나누었으며, 뒤늦게 상경한 그들의 친구 육비(陸飛)까지 사귀게 되었다. 육비 · 엄성 · 반정균 3인에 대해서는 담헌서 외집 권3 건정록후어(乾淨錄後語)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D-009]전당(錢塘) : 절강성 항주부(杭州府)에 속한 현()이다.

[D-010]그런데도 …… 여겼다 : 엄성과 반정균은 홍대용이 주자학에 정통하다고 하여 그를 이학대유(理學大儒)’라고 극구 칭찬했다고 한다. 湛軒書 外集 卷3 乾淨衕筆談續 2 23

[D-011]천인성명(天人性命)과 고금(古今)의 출처대의(出處大義) : 천인성명은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관계,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뜻한다. 고금의 출처대의란 벼슬하거나 은거할 때를 올바르게 판단해서 처신하여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한 역사적 사례를 뜻한다.

[D-012]그 후 …… 객사하자 : 민중(閩中)은 복건성(福建省)을 이른다. 엄성은 정해년(1767) 봄에 복건성으로 가서 가정 교사를 하다가 학질에 걸려 귀향한 뒤 그해 겨울에 병사하였다. 淸脾錄 卷2 嚴鐵橋

[D-013]애사(哀辭) : 대개 요절한 경우에 짓는 추도사를 이르는데, 여기서는 담헌서 외집 권1에 실린 엄철교에 대한 제문祭嚴鐵橋文을 가리킨다.

[D-014]서호(西湖) : 절강성 항주에 있는 유명한 호수로, 서자호(西子湖) · 전당호(錢塘湖) 등으로도 불린다.

[D-015]아들 …… 되었다 : 엄앙(嚴昻)이 홍대용을 백부라 칭한 것은, 홍대용이 엄성과 결의형제(結義兄弟)하였으며 엄성보다 한 살 위였기 때문이다. 철교(鐵橋)의 유집(遺集)이란 엄성의 벗인 주문조(朱文藻)가 편찬한 소청량실유고(小淸涼室遺稿)를 이른다. 乙丙燕行錄 附錄 소청량실(小淸涼室)은 엄성의 서실 이름이다. 손유의는 이 책과 엄성의 초상화를 맡아 두었다가, 1778년 사행차 북경에 왔다 돌아가던 이덕무 편에 전달하였다. 靑莊館全書 卷67 入燕記下 6 17

[D-016]오하(吳下) : 중편연암집에는 越中으로, 여한십가문초에는 浙中으로 되어 있다.

[D-017]주문조(朱文藻) : 호를 낭재(朗齋)라고 하며, 육서(六書)와 금석(金石)에 정통했다. 엄성 · 육비 · 반정균 3인과 홍대용 등 조선 사행 6인이 주고받은 시와 편지를 편찬한 일하제금집(日下題襟集)에 서문을 썼다.

[D-018]() ……잃었다 : 과정록 1에는 홍대용이 죽었을 때 연암이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뇌사(誄辭)가 소개되어 있다. “서호에서 서로 만난다면, 그대는 날 부끄러워하지 않을 줄 아노라. 죽어서 입에 구슬 물지 않았으니, 도굴꾼 같은 타락한 선비를 공연히 딱하게 여겼도다.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詠麥儒 이는 다름아닌 홍덕보 묘지명의 상실된 명사(銘辭)로 추측된다. 한편 연암 후손가에 소장되어 온 연암집 산고에는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詠麥儒라고 하여 宜笑舞歌呼’ 5자가 추가된 명사가 있었다고 하며, 연암 후손가에 소장되어 온 열하일기에도 魂去不須 想逢西子湖 口裏不含珠 怊悵詠麥儒라는 명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치암(癡庵) 최옹(崔翁) 묘갈명

 

 

세상에는 본래 남의 어려움을 급히 돕느라고 천 냥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의로운 일이라도 한갓 은혜를 베푸는 데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다만 한 고을이나 마을의 협객은 될망정 나아가 온 고장이 선()을 향하도록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치암 최옹이 남의 어려움을 급히 도운 것과 같은 경우는 그 자신이 의로운 일에 성급해서였다. 남에게 우환이나 상사(喪事)가 있으면 마음이 허탈하여 마치 허기진 사람이 아침을 넘길 수 없듯이 하고, 그 마음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마치 눈에 가시가 날아든 듯 여겨, 마침내는 성급하게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으며,

 

이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나에게는 알리지 않았는가? 내가 혹시 남들에게 다랍게 보였던가?’

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돌아보아도 이런 일이 없으면 기뻐하며,

나는 지금 다행히도 먼저 소식을 들었구나!’

하며, 허겁지겁 서두르기를 길 가는 사람이 해 지기 전에 대가듯이 한다. 남을 위해 시집 장가를 보내 준 것이 여러 집이고, 남을 위해 염()하고 장사 지내 준 것이 여러 집이었으니, 이러고 보면 그가 아침저녁으로 솥 씻어놓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일이다.

반면에 비웃는 자도 있어 말하기를,

 

너무도 하다, ()의 어리석음이여! 남이 달라고 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베풀어 주기 때문에, 늘상 남을 급한 상황에서 건져 주어도 이렇다 할 감사도 못 받고 칭찬도 못 듣고 마는 게 아닌가?”

하였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걸 가지고 무얼 어리석다 하는가? 혹시라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늘상 자기 처자나 형제들에게 숨기고 몰래 베푸니, 이야말로 어찌 대단히 어리석은 자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어리석을 ()’ 자로 옹에게 별호를 붙이니, 옹 또한 그 호를 받아들여 늙어 죽도록 바꾸지 않았다.

그러므로 잘난 이건 못난 이건 간에 옹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마치 옛일을 이야기하듯 하였으며, 몇 사람들이 앉아서 서로 이야기하다가 곧 크게 웃는 경우는 반드시 옹이 행한 무슨 일 무슨 일에 관한 것이었다.

종가(宗家)의 아우가 젊은 나이에 허랑방탕하여 전답과 가택을 다 잃고나니, 옹은 집을 사서 그의 선령(先靈)을 편안히 모시고 나아가 그를 대신해서 제전(祭田)을 다시 마련하자, 종족(宗族)들이 서로 옹을 말리며,

 

한갓 재물만 허비할 뿐이지 아무 보탬이 안 될 거요.”

하였다. 그러자 옹은 정색을 하면서,

 

제전이 있으면 비록 제사를 못 지내게 된다 할지라도 내 마음에는 제사 올린 거나 마찬가지요.”

하며, 그를 도와서 가업을 일으키게 하느라 천 냥이 들었다. 종족들이 자기네끼리 몰래 비난하기를,

 

옹은 전에 이미 아무 보탬이 안 되고 그의 허물만 보태 주었는데, 지금 또다시 보태 주니 이 어찌 옹의 허물이 아니겠는가?”

했는데, 과연 몇 해가 못 가서 재산을 다 말아먹고 말았다. 그래도 또 그에게 천 냥을 주었더니 마침내 가업을 일으키고 착한 선비가 되었다. 옹의 지극한 정성이 아니고야 이렇게 교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는 그래도 종가의 아우이기에 망정이요. 옹의 친구인 아무 어른이 어질었는데 일찍 죽자 옹은 그분의 어린애들을 어루만져 길러 주었으니, 이런 일은 옛적에나 들었지 지금 세상에는 보지 못했소이다. 고아가 된 그 아들이 장성해서는 가난하여 결혼해서 가정을 이룰 수 없게 되자, 그의 재산을 마련해 주기 위해 수천 냥을 썼으니 옛적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가? 더구나 또 그를 대신해서 돌에 새겨 묘에 비를 세워, 그분의 어진 행실이 사라지지 않게 하였거늘!

아무 성씨인 아무 어른은 옹의 부친의 친구였는데 어진 분으로서 늙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옹은 반드시 새벽에 가서 밤새 안부를 묻고 손수 음식을 살펴 드리며, 또 매달 지급하고 남은 것을 따로 저축하여 세제(歲制)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였으니, 옛날에도 또한 옹과 같이 독실하고 후덕한 사람이 있었던가?”

하였다. 혹은 의아해하는 이도 있어 하는 말이,

 

옹이 재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의로운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심지어 먼 일가붙이들이 전염병에 걸렸을 때에도 반드시 몸소 간호해 주었으니 그런 일도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어찌 먼 일가붙이뿐이겠는가? 오랜 친구가 열병에 걸려 곧 숨이 넘어간다는 말을 듣고, 옹은 손수 약을 달여서는 곧 단번에 땀을 내어 낫게 한 일이 있으며, 그의 종이 병들었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네.”

하였다. 옹은 의원이 아니다. 그런데도 옹이 보살펴 주기만 하면 늘 살아났다. 옹은 이럴 때면 매양 분을 내어 말하기를,

 

한 사람이 전염병에 걸리면 일족이 모두 달아나 피하는 바람에, 병자가 제때 땀을 못 내게 되니 병자가 죽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지금 가만히 그의 행적을 검토해 보면, 한결같이 모두 소학(小學)에 열거된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었다. 이 가운데 한 가지만 있다 해도 실로 월등하게 뛰어난 것일 터인데, 옹에게는 아침저녁으로 마시는 숭늉이나 국물이요, 좌우에 놓여 있는 옷가지나 그릇 같은 것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높고 원대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인 줄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다. 대개 그의 자질이 돈후하고 독실하여 겉모습을 엄숙하게 꾸미는 따위는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고례(古禮)를 몹시 좋아하여, 관혼상제의 예식이 시속(時俗)의 눈에는 사뭇 괴이쩍게 보이니, 향리에서는 이로써도 더욱 옹을 어리석게 여겼지만, 옹은 그럴수록 스스로 기뻐하였다. 그의 담론과 행동을 보면, 예식을 도맡아 하는 가운데 날마다 익힌 게 아닌 것이 없었다.

선산의 묘목(墓木)을 기르기를 어린아이 기르듯 하여, 열매 맺은 잣나무 수만 그루가 묘역을 빙 둘러 있었다. 그리고 객호(客戶)들을 두어 수호하게 하며, 은혜와 신의로써 그들을 어루만지니 모두 서로 타이르며 다짐하기를,

 

이는 효자가 손수 심은 것이니 가지 하나인들 차마 잘라 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집 재산이 거만(鉅萬)이었지만, 죽는 날에 미쳐서는 한 냥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옹의 여러 아들들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옹을 자세히 알기로 나 같은 사람이 없다. 그러니 지금 묘 앞의 비를 새기는 데 정분상 글을 지어 주기를 사양할 수 있겠는가?

옹의 휘는 순성(舜星)이요, 자는 경협(景協)이다. 시조인 원()이 고려 때 양천(陽川)에 백()으로 봉해져 그대로 양천 최씨가 되었다. 증조의 휘는 아무인데 증() 집의(執義), 조부의 휘는 아무인데 증 좌승지요, 부친의 휘는 아무인데 증 호조 참판이다. 모년 모월 모일에 나서 모년 모월 모일에 죽으니 향년 71세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아무 좌()의 벌에 장사 지냈다. 네 아들을 두었는데 진사(進士)인 진관(鎭寬)과 진함(鎭咸) · 진익(鎭益) · 진겸(鎭謙)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숭산(崧山)에 선영 / 有塋于崇

군자가 봉해진 곳이로세 / 君子攸封

새파랗다 저 나무는 / 有樹如蔥

오립송(五粒松)이 아닌가 / 五粒之松

뉜들 차마 훼손하리 / 誰忍毁傷

그 얼굴을 뵈옵는 듯한데 / 如見其容

잊으려도 잊을 수 있을까 / 俾也可忘

온후하신 치옹 어른을 / 恂恂癡翁

효를 확대하면 충이 되니 / 推孝爲忠

벗에게도 충실했네 / 忠厥友朋

의로운 일 예절에 맞아 / 義行禮中

다 충심에서 우러난 것 / 罔不由衷

명성만이 드넓은 게 아니요 / 匪博厥聲

덕이 실로 몸을 윤택하게 하였네 / 德實潤躬

천 년 뒤에 그 풍모 상상하려거든 / 千載想風

여기 새긴 명을 보시구려 / 視此刻銘

 

 

향리 사람들과 먼 일가붙이들의 입을 빌려, 시원시원하고 의로운 일을 즐기며 남의 어려움을 급히 돕는 사람을 그려 내었는데, 옆에 있는 듯이 살아 움직인다.

 

 

9층의 누대를 오르면 한 층 한 층 높아질 때마다 곧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는 것과 같고, 동천(洞天)에 들어가면 물은 단지 맑은 원천 하나이건만 매양 한 굽이마다 전에 본 모습과 달라져서, 쏟아져 내리는 것은 폭포가 되고 부딪치는 것은 여울이 되고 멈춘 것은 못이 되며, 비단 무늬처럼 잔물결이 이는 것도 있고, 거문고와 축()과 환패(環珮) 소리가 나는 것도 있는 것과 같다.

나무는 구부러진 것이 싫지 아니하고, 돌은 괴이한 것이 싫지 아니하고, 기슭은 비스듬한 것이 싫지 아니하고, 오솔길은 경사진 것이 싫지 아니하고, 띳집과 대울은 어리비치고 이지러져 가린 것이 싫지 아니하다. 그리고 가끔 밭 가는 사람이나 나무꾼을 마주치게 되면 그들의 여윈 얼굴이 기이하고, 말라서 뼈가 울뚝불뚝 드러난 것이 싫지 아니하다.

 

[C-001]치암(癡庵) 최옹(崔翁) 묘갈명 : 연암은 개성 사람으로 자신의 문생(門生)이 된 최진관(崔鎭觀)의 청탁으로, 1789년 가을에 그의 부친 치암 최순성(崔舜星)의 묘갈명을 지어 주고 비석에 새길 글씨까지 직접 써 주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4 최순성에 대해서는 김택영(金澤榮)이 지은 전()이 있다. 崧陽耆舊傳 卷3 任恤傳 崔舜星

[D-001] …… 있다 : 음식을 곧 끓일 수 있게 솥을 깨끗이 씻어 놓고 기다리듯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다는 뜻의 속담이다.

[D-002]마찬가지요 : 원문은 인데,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백척오동각집, 동문집성 등에는 모두  자로 되어 있다. 의미는 같다.

[D-003]아무 어른 : 동문집성에는 고경항(高敬恒)’이라고 밝혀져 있다. 고경항은 본관이 제주(濟州)이고 자는 의중(義中)으로, 장창복(張昌復)의 문인이었다. 산중에 들어가 학업에 전념하다가 향년 38세로 병사하였다. 崧陽耆舊傳 卷1 學行傳 高敬恒, 3 任恤傳 崔舜星

[D-004]아무 …… 어른 : 동문집성에는 임군 두(林君㞳)’라고 밝혀져 있다. 임두는 본관이 곡성(谷城)이고, 해동악부(海東樂府)를 남긴 저명 시인이자 학자인 임창택(林昌澤)의 조카였다. 崧陽耆舊傳 卷2 文詞傳 林昌澤, 3 任恤傳 崔舜星

[D-005]세제(歲制) : 관을 만드는 것을 이른다. 사람이 60세가 되면 죽을 때가 가까우므로 1년에 걸려 관을 미리 만들어 두는 법이라고 한다. 禮記 王制

[D-006]아름다운 …… 행실 : 소학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에 소개된 모범적인 사례들과 흡사했다는 뜻이다.

[D-007]객호(客戶) : 그 고장에 2() 이상 거주하고 있는 호구를 주호(主戶)라고 하고, 타향에서 새로 들어와 사는 호구를 객호라고 한다.

[D-008]() : 고려 말기에 공신들에게 내렸던 봉호(封號)이다.

[D-009]증조의 …… 참판이다 : 선계(先系)에 대한 기술(記述)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최순성의 선조 중에 집의(執義)를 증직받은 이는 증조가 아니라 고조인 천립(天立)이고, 좌승지를 증직받은 이는 조부가 아니라 증조인 일신(日新)이며, 호조 참판을 증직받은 이는 부친이 아니라 조부인 외형(巍衡)이다. 부친인 석찬(錫贊)은 벼슬을 하지 못했다. 연암집 7에 수록된 운봉 현감 최군 묘갈명(雲峯縣監崔君墓碣銘)’은 최순성의 계부(季父)인 최석좌(崔錫佐)의 묘갈명인데, 거기에는 최석좌의 부친이 증 호조 참판, 조부가 증 좌승지로, 선계에 대한 기술이 올바르게 되어 있다. 박철상, 개성(開城)의 진사(進士) 최진관(崔鎭觀)과 연암(燕岩), 문헌과 해석 32, 2005. 10. 참조

[D-010]진관(鎭寬) : 대부분의 이본들과 관련 기록들에는 모두 鎭觀으로 되어 있다.

[D-011]진겸(鎭謙) : 그의 청탁으로 지은 독락재기(獨樂齋記) 연암집 1에 수록되어 있다.

[D-012]숭산(崧山) : 원문의  자는  자와 통한다. 숭산은 개성에 있는 산으로, 송악(松嶽)이라고도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 開城府 개성을 숭양(崧陽)이라 한다.

[D-013]오립송(五粒松) : 잣나무를 이른다. 잣나무는 잎이 다섯 개씩 모여 나기 때문이다.

[D-014]덕이 …… 하였네 : 대학장구 () 6장에 ()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한다.富潤屋 德潤身고 하였다.

[D-015]환패(環珮) : 허리에 차는 고리 모양의 옥()을 이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 처사(李處士) 묘갈명

 

 

어제표충윤음(御製表忠綸音) 한 권에 () 사인 이성택의 집에 내사함內賜故士人李聖擇家이라 제()하고 윗머리에 규장지보(奎章之寶)’라는 어인(御印)이 모셔져 있다. 대개 무신년 3월은 바로 우리 영종대왕(英宗大王)께서 무위(武威)를 드날려 난리를 평정한 해와 달이었는데, 위대하신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신 지 12(1788)에 그해 그달이 거듭 돌아오자, 성심(聖心)의 감격이 여느 때보다 더하시어 윤음을 널리 선포하여 팔도에 환히 효유하셨다. 이 처사와 같은 이는 평소에 제 공을 말한 바 없었으나, 포상 기록이 서책에 열거되고 존휼(存恤)이 자손에게까지 미쳤으니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랴!

처사의 처음 휘는 성시(聖時)요 자는 집중(執中)이며, 성택(聖擇)은 뒤에 고친 휘이다. 고려 때에 예부 상서(禮部尙書) ()가 하빈(河濱)에 봉해짐으로써 그로 인하여 하빈 이씨가 되었다.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는 휘 책()이 평강현(平康縣)의 지사(知事)가 되었으며, 거창(居昌)에 대대로 살았다. 처사의 고조 때부터 비로소 안의(安義) 사람이 되었는데, 그의 호는 농월담(弄月潭)으로, 동춘당(同春堂) 송 문정공(宋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이 인근 동()에 잠시 거주할 적에 실은 주인 노릇을 했다. 증조의 휘는 아무요, 조부의 휘는 아무이고, 부친의 휘는 만령(萬齡)이다. 모친은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참봉 규창(奎昌)의 따님이다.

처사는 숙종 병인년(1686, 숙종 12) 11 2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도 특이한 자질을 지녔더니, 차츰 장성하자 재주와 견식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비록 먼 시골에서 생장하였지만 국조(國朝)의 고사나, 사대부 집안의 길례(吉禮)와 흉례(凶禮)에 대한 예설(禮說)에 밝고 익숙하여, 원근을 막론하고 찾아와서 질문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약관의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학문을 닦았는데, 누구보다도 김삼연(金三淵 김창흡(金昌翕)) · 이도암(李陶菴 이재(李縡)) 등 여러 선생에게서 인정을 받았으며,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과 봉조하(奉朝賀) 이병상(李秉常)도 모두 그를 국사(國士)로서 허여했고, 정승 조도빈(趙道彬)도 그의 재주와 행실을 들어 조정에 천거한 적이 있었다.

급기야 신축년의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드디어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산과 늪 사이를 방랑하였다. 영조 4년에 흉적 정희량(鄭希亮)이 안의에서 거사하여 근방의 여러 고을을 연달아 함락시켰는데, 처사를 가장 꺼리어 몹시 급하게 추적하였다. 처사는 곧장 밤중에 도망을 쳐 서울로 빨리 달려가다가, 도중에서 한 필 말을 채찍질하여 오는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새로 부임하는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였다. 그는 바야흐로 적중(賊中)으로 달려 들어가는 길이었으나 요령을 알지 못하다가, 처사를 만나게 되자 크게 기뻐하여 역적들을 토벌할 것을 몰래 모의하였다. 현에 당도하여 보니 역적들은 이미 처형되었으며 잔당이 바위틈이나 수풀에서 잠시 목숨을 붙이고 있었으므로, 드디어 병마절제도위를 도와 모조리 잡아 베어 죽였다.

역적들이 평정되자, 임금은 이 현에서 원흉이 나온 것을 깊이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그 고을을 혁파하고 그 땅을 거창과 함양(咸陽)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이 두 고을은 모두 이 현의 하류(下流)에 있어, 지난날 농지에 물을 댈 적에는 항상 남아도는 물을 구걸해 갔으며, 산에 가서 나무하고 풀을 벨 때에도 도끼를 가지고 가지 못하게 했었다. 그런데 땅이 두 고을에 종속되고 나자, 공공연히 제방을 터서 물을 빼 가며 대낮에 나무를 베고 남의 묘목(墓木)까지 모조리 찍어 가도, 우두커니 보기만 하고 입을 다물고 감히 따지지도 못했으며, 곧 입술만 달싹거려도 도리어 역적이라 매도하였다. 부역에 종사하는 아전과 관하인들은 종놈처럼 혹사당하며, 장정을 모아 군적(軍籍)에 올릴 때 사족(士族)까지 그 대상으로 삼으니, 그 고통이 뼈에 사무쳤으나 호소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고을을 복구할 것을 원하고 있었으나 그 일을 맡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현의 부로(父老)들이 모두 와서 처사에게 청하니, 처사는 당장에 일어나서 서울로 올라가, 만 자가 넘는 장문의 상소를 올리고 5000호의 백성을 대신하여 그들의 목숨을 보전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대궐 문 앞을 지키기 여러 해였으나, 담당자들은 아무도 안의의 일로써 임금께 아뢴 자가 없었으며, 그 땅을 추하게 보아서 마치 자기 몸이 더럽혀지는 듯이 여겼다. 그러기에 경상도에서 온 자라면 대면하여 말도 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 여관을 찾아 헤매며 몹시 고생하고 초췌해져도 발을 들여놓을 곳조차 없었다.

처사는 일찍이 정승 김재로(金在魯)와 구면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이렇게 설득하였다.

 

저희 고을의 산천 귀신이 어리석고 영험이 없어 극악무도한 종자를 낳은 것이 역적 정희량(鄭希亮)으로 변하였으니, 성황(城隍)에 벌이 미쳐 귀신이 굶주림을 당하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무릇 역적이 나면 그자의 집터를 더러운 웅덩이로 만들어 풀도 돋지 못하도록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 고을로 말하면 마시는 우물도 그대로 있고 모여 사는 부락도 여전하지만, 마침내 그 관청 소재지를 없애고 그 사직(社稷)을 폐허로 만들었으니, 이는 100리 주위를 빙 둘러 웅덩이나 못으로 만든 셈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곡물로 바치던 세금과 베로 바치던 공물(貢物)을 토산물로 못 하게 하여 나라의 정세(正稅)를 축내게 하였으니, 후토씨(后土氏)가 무슨 죄이며, 구룡씨(句龍氏)가 무슨 죄입니까?

선성(先聖)과 선사(先師)께 석전제(釋奠祭)를 올리자 해도 주재자가 없고 제사에 바칠 짐승도 이미 노쇠해 버렸으며, 글 읽고 공부하던 곳도 잡초만 무성하여 자제들로 하여금 임금의 교화 속에서 자립할 수도 없게 하였습니다. 사직이 폐기되어 제사를 못 지내는 것도 오히려 원통한데, 더구나 또 학교까지 죄를 얻어 폐기하게 된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어서 백성들의 고통에 관한 10여 건을 조목조목 열거하고, 감개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조가(朝歌)와 승모(勝母)는 땅 이름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만 군자는 그래도 그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고향이 그립고 양잠과 길쌈이 소중하고 조상 무덤들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거주하는 사람은 옮겨 가기를 생각하고 옮겨 간 사람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음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모두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 스스로 죄악에서 탈피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장차 그곳에 더 이상 사는 사람이 없는 상태를 보게 될 것이니, 저는 이 땅이 마침내 도깨비 떼가 들끓고 여우나 독사가 득실대는 곳이 되고 말까 두렵습니다.”

이에 김공(金公)은 크게 느끼고 깨달아,

 

그렇겠소! 마땅히 그대를 위해 힘껏 아뢰어 보리다.”

하고서, 다음 날 임금을 알현하고 안의를 폐치(廢置)해서는 안 되는 상황을 극력 말하였는데, 모두 처사가 조목조목 열거한 바와 같았다. 임금은 측은히 여겨, 마침내 명을 내려 그 고을을 회복하고 원을 예전같이 두도록 하였다. 고을이 혁파된 지 무릇 9년 만에 복구되니, 이에 현사(縣社)와 현직(縣稷)의 사방 경내가 정비되고 아전과 관하인으로 다른 고을에 나뉘어 소속된 자들도 모두 옛 직책으로 돌아왔으며, 성황(城隍)과 족려(族厲)의 귀신도 다 제사를 받아먹게 되었다.

처사는 임술년(1742, 영조 18) 9월 모일에 죽으니 향년 57세였다. 그해 9월 모일에 현 남쪽 엄전동(嚴田洞) 오좌(午坐)의 벌에 안장되었다. 초취(初娶)는 정씨(鄭氏)로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인데, 1남 정전(廷銓)을 낳았으나 그 아들은 일찍 죽었고, 1녀는 선비 아무에게 출가했다. 후취는 여흥 민씨(驪興閔氏) 1남 택전(宅銓)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지금 나이 여든 살이다. 임금이 널리 국중에 은혜를 베풀어 선비나 평민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작위를 내렸으므로 이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계급을 얻었다. 두 딸은 사인(士人) 아무와 아무에게 출가했다. 택전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종한(宗漢)은 정전의 양자가 되었고, 차남은 천한(天漢)이며, 손자는 아무와 아무이다.

! 예로부터 충의(忠義)의 선비치고 어찌 사직을 편안케 하는 것으로써 즐거움을 삼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일개 현을 미루어서 천하와 국가를 알 수 있는 법이다. 비록 그 제단의 제도에 등급의 차별이 있고 제물의 수효에 더하고 덜함은 있을망정, 신령과 사람이 의지하는 대상인 점에서는 원래 다름이 없다. 진실로 이미 없어진 뒤에 다시 존속하도록 도모할 수 있었다면, 어찌 혹시라도 열 집밖에 안 되는 작은 고을이라 해서 그의 충신(忠信)을 하찮게 볼 수 있겠는가. ()은 다음과 같다.

 

저 옛날 무신년에 / 粵昔戊申

안음(安陰 안의(安義)의 옛 이름) 사직 없어졌네 / 安陰社亡

역적 나온 까닭으로 / 凶渠之故

그 태생지 증오한 탓 / 癉厥胎鄕

땅덩이가 더럽혀지고 말았으니 / 土壤遂醜

백성들 이 무슨 재앙인가 / 凡民何殃

신령과 사람 모두 의지할 곳 없이 / 人神無依

아홉 해가 바뀌었도다 / 九換星霜

임금께서 널리 은혜 내리사 / 王降沛澤

피비린내 단번에 씻어 내니 / 一滌腥衁

산은 높고 물은 맑고 / 山高水淸

초목조차 빛 되찾았네 / 草樹回光

사직단 고쳐 쌓아 / 靈壇改築

하늘 양기(陽氣) 다시 받고 / 復受天陽

글 읽는 노래 드높아라 / 絃歌增蔚

석전(釋奠) 제물 향기롭네 / 亦奉苾薌

이 누구의 공이런가 / 云誰之功

처사 집중(執中) 그 아니냐 / 處士執中

태수가 명() 지으니 / 太守作銘

참여만도 영광일레 / 亦與有榮

 

 

[D-001]어제표충윤음(御製表忠綸音) : 정조 12(1788)에 무신란(戊申亂) 평정 1주갑(周甲)을 맞아 당시의 공신들과 그 자손에게 내린 윤음을 편찬한 것으로, 1책이다. 그중에 제도계문포상인(諸道啓聞褒賞人)’이라 하여 포상자 명단이 실려 있다.

[D-002]영종대왕(英宗大王)께서 ……  : 영조 4(1728)에 이인좌(李麟佐) · 정희량(鄭希亮) 등이 일으킨 난을 평정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D-003]존휼(存恤)이 자손에게까지 미쳤으니 : 존휼은 방문하여 문안하고 음식을 하사하는 것을 말한다. 정조실록 12 3 23일 조에, 경상 감사의 장계에 따라 무신란 때 공을 세운 안의(安義) 선비 이성택(李聖擇) 등을 표창하고 그 자손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도록 명하였다고 했다.

[D-004]평강현(平康縣)의 지사(知事) : 평강현은 지금의 강원도 평강군이다. 지사는 조선 초기에 현을 맡아 다스리던 장관(長官)으로, 나중에 현령(縣令)으로 고쳤다.

[D-005]동춘당(同春堂) …… 했다 : 송준길(宋浚吉 : 1606~1672)은 호란(胡亂)이 나자 1637년 초에 피난차 안의현에 내려와 원학동(猿鶴洞) 1년 가까이 거주한 적이 있다. 同春堂續集 卷6 附錄1 年譜 그 당시 이웃 마을에 살았던 이성택의 고조가 실질적으로는 송준길을 위해 숙식을 제공했던 듯하다.

[D-006]민진원(閔鎭遠) : 1664~1736. 송준길의 외손으로 노론의 영수로 활약했다.

[D-007]이병상(李秉常) : 1676~1748. 소론 배척에 앞장섰으며, 판돈녕부사를 지냈다. 봉조하(奉朝賀)는 종 2 품 이상의 퇴임 관리에게 예우 차원에서 주는 벼슬이다.

[D-008]조도빈(趙道彬) : 1665~1729. 우의정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힘썼다.

[D-009]신축년의 무옥(誣獄) : 1721년 경종(景宗)의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옥사로, 그해인 신축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임인년(1722)까지 이어졌다 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도 한다. 경종이 후사가 없고 병약하자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이이명(李頤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사대신이 주장하여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자 소론의 조태구(趙泰耈), 유봉휘(柳鳳輝) 등이 반대하고 목호룡(睦虎龍)이 사대신을 역모로 무고하여, 사대신 이하 노론 일파들이 대거 실각한 사건을 말한다.

[D-010]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  6 품 무관직으로 지방 수령이 겸임했다. 안의 현감은 진주진관 병마절제도위(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D-011]5000 : 연암제각기에는 4000호로 되어 있다.

[D-012]김재로(金在魯) : 1682~1729. 영의정을 지냈다. 노론의 선봉장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도 공로가 컸다.

[D-013]후토씨(后土氏) …… 입니까 : 후토씨와 구룡씨는 모두 토지를 맡아 다스리는 신을 이른다.

[D-014]선성(先聖)과 선사(先師) :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 무릇 처음 학교를 세웠을 때에는 반드시 선성과 선사께 석전제(釋奠祭)를 올린다.”고 하였다. 선성과 선사로 제향(祭享)된 인물들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다. 연암제각기(燕巖諸閣記)에 수록된 이본 중의 한 대목으로 보아, 여기에서의 선성은 공자(孔子)를 가리키고 선사는 안회(顔回) 이하 공자의 제자들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D-015]조가(朝歌) …… 않았습니다 : 음악을 금기시했던 묵자(墨子)는 고을 이름이 조가(朝歌)라는 것을 알고는 수레를 돌렸으며, 효자로 유명한 증자(曾子)는 승모(勝母)라는 이름의 고을을 만나자 그 고을에 들어가지 않았다.

[D-016]현사(縣社)와 현직(縣稷) : 각각 현의 토신(土神)을 모신 곳과 곡신(穀神)을 모신 곳을 말한다.

[D-017]사방 경내가 정비되고 : 연암제각기에는 그다음에 공자로부터 안회(顔回)와 증삼(曾參) 이하가 모두 그 위판(位版)을 복구하였다.自孔子顔曾以下 皆復其位矣는 문장이 추가되어 있다.

[D-018]족려(族厲) : 후사가 끊긴 대부(大夫)의 신령을 이른다. 禮記 祭法

[D-019]초취(初娶) …… 후손인데 : 원문은 初娶鄭文獻公後인데, 중편연암집이나 여한십가문초에는 初娶鄭氏로만 되어 있다. 양자를 절충하여 初娶鄭氏 文獻公後가 되어야 문리가 순탄해진다.

[D-020]임금이 …… 얻었다 : 1794년 정조가 자신의 생모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나이 일흔 이상 된 전국의 노인들에게 가선(嘉善) · 통정(通政) 등의 작위를 내리기로 하고 그 대상자를 보고하도록 하여 안의현에서도 보고를 올려 50여 명이 그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過庭錄 卷2

[D-021]사직을 ……  : 원문은 社稷’ 2자뿐으로 문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여한십가문초 安社稷으로 되어 있어 그에 따라 번역하였다.

[D-022]어찌 …… 있겠는가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는 열 집밖에 안 되는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신한 사람이 있을 터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 如丘者焉라고 하였다.

[D-023]하늘 …… 받고 : 사직단은 하늘의 양기를 받기 위해 지붕을 만들지 않는 법이다. 禮記 郊特牲

[D-024]태수 : 안의 현감인 연암 자신을 가리킨다.

[D-025]참여만도 영광일레 : 연암제각기에는 이 아래에 從縣社廢興處 鋪述感慨 文氣菀然 凡爲人作遺事而可備一縣一國廢興沿革之故實者 必一縣一國磊落奇偉之士 然幾許不爲世間惡筆所抹殺奄奄無生意哉 處士不幸爲一縣之士 亦幸而得此文 足以不朽千古라는 평어가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 사헌부 지평 예군(芮君) 묘갈명

 

 

옛적에 대도(大道)가 행해졌을 때에는 천하의 자식된 자치고 누구나 안색이 부드럽지 않은 자 없고, 그 언성이 즐겁지 않은 자 없고, 그 기()가 다소곳하지 않은 자 없고, 그 용모가 온순하지 않은 자 없고, 부모에 관한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부지런히 하지 않음이 없고, 부모의 봉양에는 가까이 나아가지 않음이 없고, 부모의 상사(喪事)에는 슬픔을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와 같은 시대에는 천하에 효자가 없었으니, 효자가 없었던 것은 효자 아닌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어버이 섬기기를 증자처럼 하면 된다.”

하였다. 이는 증자의 어버이 섬김이 사람의 자식으로서 당연히 할 직분에 불과해서, 굳이 놀라며 이상하게 여기거나 크게 탄식하며 칭찬할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겠는가?

무릇 크게 탄식하여 칭찬하기를,

 

효자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한다면, ‘이런 사람이란 칭찬을 받는 그는 진실로 장차 이 효자라는 명칭에다가 자신의 고통을 감출 것이니, 이는 비단 이런 사람의 불행일 뿐만이 아니라 곧 천하의 불행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사람으로 하여금 당세에 특이한 존재로 만들어 놓으려 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런 사람이 천리(天理)의 극치에 직분을 다하는 동안, 그 간절하고 은밀한 사정에 대해서는 대중들이 능히 살피지 못하는 점이 있으므로, 군자가 부득이 공공연하게 말하고 교훈을 베풀어 천하와 후세에 분명히 밝히게 되는 것이다.

! 후세에 와서는 효자의 정문(旌門)이 어찌 그리도 자주 세워지는 것일까? 나는 효자의 여막(廬幕)을 지날 때마다 송구스러워 발이 머뭇거려지면서 효자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증() 지평(持平) 예군(芮君) 같은 이는 어째서 칭찬하는 것인가?

군의 휘는 귀주(歸周), 자는 양경(讓卿)이니, 계통은 주() 나라 사도(司徒) 예백만(芮伯萬)으로부터 나왔다. 휘 낙전(樂全)이 고려 때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의 관직을 지내고, 비로소 의흥(義興) 고을 부계(缶溪)로 본관을 삼았다. 우리 왕조에 들어와 휘 난()은 예조 참의요, 휘 사문(思文)은 병조 참판이요, 휘 승석(承錫)은 이조 참의로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이르고, 휘 충년(忠年)은 경주 부윤(慶州府尹)인데, 이상은 모두 문과 출신이다. 고조의 휘는 경적(景績)으로 봉사(奉事 중앙 관아의 종 8 품 벼슬), 증조의 휘는 응선(應善)이요, 조부의 휘는 귀련(貴連)이요, 부친의 휘는 복림(福林)이다. 모친은 옥천 이씨(沃川李氏) 종신(宗信)의 따님이다.

군은 숭정(崇禎) 기묘년(1639, 인조 17) 모월 모일에 상주(尙州) 회룡리(回龍里)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차분하고 얌전하여 같은 무리 중에서 뛰어났으며, 같은 군()의 통례(通禮) 이원규(李元圭)에게 글을 배웠다. 뜻을 독실히 하고 힘써 행하며, 영달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위해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당도하여, 장차 시험장에 들어가려다가 통례의 부음을 듣고서 그날로 돌아와 상복을 입었다. 드디어 은거하여 뜻을 높이 가지며, 금산(金山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금산동)의 북쪽에 서실을 짓고 그 거처를 모초(慕初)’라 이름 지었다. 경전(經傳)을 구명(究明)하고 산수(山水) 속에서 마음을 즐겁게 하면서 세속의 재미에 대해서는 담박하였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당연히 힘써야 할 것이 세 가지이니 충성과 신의와 학문이요, 당연히 경계해야 할 것이 세 가지이니 여색과 싸움과 이득이다.人之所當勉者三 忠信學 所當戒者三 色鬪得

하고 손수 써서 스스로 좌우명으로 삼았다. 또 말하기를,

 

남들 말이 아무가 어질다 하면, 그 부모들은 아들이 어질지 못할까 하여 항상 일깨워 주고, 부모가 내 자식은 효자다 하면 그 아들은 불효할까 하여 항상 두려워한다면 그 가도(家道)는 대체로 괜찮다 할 것이다.”

하였다. 또 글을 지어 아들들을 훈계했는데, 그 제목은 모사(慕思)’, ‘무은(無隱)’ 등이었으니 모두가 실학(實學 실천을 중시하는 참학문)이었다.

군은 숙종 무자년(1708, 숙종 34) 모월 모일에 죽었다. 모월 모일에 감문산(甘文山) 북쪽 해좌(亥坐)의 벌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상산 김씨(商山金氏) 이명(以鳴)의 따님으로 3 2녀를 낳았다.

군이 죽은 뒤 수십 년에 그 고장 인사들이 군을 지극한 효자라 칭송하며 마땅히 표창할 만하다고 하여, 계유년(1753, 영조 29)에 감사를 통해서 임금께 사뢰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5 품 벼슬)이란 증직이 내려졌다.

그 증손 아무가 현 고부 군수(古阜郡守) 홍원섭(洪元燮)의 서한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 대제학 남공 유용(南公有容), 증 대제학 이공 진형(李公鎭衡), 규장각 직제학 심공 염조(沈公念祖)가 모두 글을 지어 그의 효성에 감응한 특이한 사적을 기록했으며, () 참찬 유공 최기(兪公最基)는 군의 묘지(墓誌)를 지어 그 언행을 자세히 차례로 서술했으니, 모두 징빙이 될 만하다.

대개 군의 어버이 섬김은 제 몸을 제 것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젖 먹을 때로부터 장례와 제사에 이르기까지 충실하고 공경하고 예법을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므로 친척들이 다 감화되었으며, 심지어 신명(神明)에게 통하고 조수(鳥獸)까지도 느끼게 하였다. 이 점을 들어 온 고을에서는 지극한 효자라고 군을 칭송하게 되었으나, 군이 스스로 마음 갖는 것으로 말하면, ‘나는 자식된 직책에 있어 그 분수를 다하지 못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어느 겨를에 감히 어버이를 잘 섬겼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어떤 사람이 덩달아 대중에게 외치기를 이 사람이야말로 효자다, 효자야!’ 한다면, 역시 증자가 어버이를 섬겼던 의리와는 다르다 할 것이다. ()은 다음과 같다.

 

대개 소인이 부모 사랑하는 일은 있어도 / 蓋有小人而愛親

군자가 제 몸 제 것으로 여겼단 말 못 들었소 / 未聞君子而私其身

부모에게서 받은 살 한 점 터럭 한 올 / 一膚一髮

반 발자국 순식간이라도 / 跬步瞬息

빗나가면 방향 잃고 / 橫之則無方

곧추세우면 끝이 없네 / 竪之則無極

눈 속에 죽순 돋고 / 筍可雪抽

얼음물에 잉어 뛰니 / 鯉可氷躍

혹시라도 마지못해 한다면 / 有或俛黽

신명(神明)이 순응 않네 / 神不爾若

저 사나운 호랑이가 / 彼䯱髵者

사슴 물어 바쳐 주니 / 含鹿來効

남들은 이적(異蹟)이라 칭송하지만 / 人所稱異

그대에겐 어찌 여한(餘恨)이 없으리오 / 在君何恔

효도란 말 들먹이어 / 毋言其孝

그 마음을 아프게 마소 / 以戚其心

시로써 명()을 새기노니 / 我刻銘詩

뜻을 같이하는 이들은 잠계(箴戒)로 삼으소 / 同好爲箴

 

 

[C-001] …… 묘갈명 : 예귀주(芮歸周) 9세손 예종선(芮鍾璿)이 편한 모초재실기(慕初齋實紀) 1에는 묘지명(墓誌銘)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약간의 자구 차이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본문 중에 묘갈명을 청했다고 한 점으로 보아, 원래 묘갈명으로 받았던 글을 묘지명으로 바꾸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모초재실기에는 정종로(鄭宗魯)가 지은 별도의 묘갈명과 유최기(兪最基)가 지은 별도의 묘지(墓誌)가 있다. 또한 모초재실기에 실린 연암의 글 말미에는 聖上十六年壬子月日 通訓大夫安義縣監潘南朴趾源撰이라고 명기(明記)되어 있어, 이 글이 1792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D-001]그 용모가 …… 없고 : 예기 제의(祭義) 부모를 깊이 사랑하는 효자는 반드시 부드러운 기()를 지니고, 부드러운 기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즐거운 안색을 하고, 즐거운 안색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온순한 용모를 갖춘다.孝子之有深愛者 必有和氣 有和氣者 必有愉色 有愉色者 必有婉容고 하였다.

[D-002]부모에 …… 없고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부모를 섬길 때에는 좌우에 가까이 나아가 봉양하며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죽을 지경이 되도록 힘든 일에 부지런히 종사한다.左右就養無方 服勤至死고 하였다.

[D-003]부모의 …… 없었다 : 논어 자장(子張)에 자유(子游)가 말하기를 ()은 슬픔을 극진히 하는 데 그칠 따름이다.喪致乎哀而止라고 하였다.

[D-004]어버이 …… 된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오는 말이다. 증자가 그의 부친을 봉양할 때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었으며, 남에게 음식을 주기 좋아하는 부친을 위해 상을 치울 때에도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줄지 여쭈었고, 남은 음식이 있느냐고 물으면 반드시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증자의 아들은 증자를 봉양할 때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기는 했으나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줄지 여쭙지 않았고 남은 음식이 있어도 그것을 나중에 또 내놓을 속셈으로 없다고 답했다. 맹자는 증자의 아들처럼 하는 것은 부모의 몸만 봉양하는 것養口體이요, 증자처럼 해야 그 마음을 봉양하는 것養志이라고 하면서, 위와 같이 말하였다.

[D-005]천리(天理)의 극치 : ()를 가리킨다.

[D-006]예백만(芮伯萬) : 춘추 시대 예국(芮國)의 군주伯爵, 성은 희()요 이름이 만()이다. 春秋左氏傳 桓公3 그 선조인 예백(芮伯)이 주() 성왕(成王) 때 육경(六卿)의 하나인 사도(司徒)가 되었다. 書經 顧命 예백의 후예들이 나라 이름으로써 성씨를 삼았다.

[D-007]경적(景績) : 모초재실기 중의 의흥예씨세계도(義興芮氏世系圖)와 연암이 지은 묘지명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관련 기록에는 대적(大績)’으로 되어 있다.

[D-008]통례(通禮) 이원규(李元圭) : 통례는 궁중 의식을 관장하는 통례원(通禮院)의 정 3 품 벼슬이다. 이원규의 호는 서곡(鋤谷)이다.

[D-009]산수(山水) : 원문은 山林으로 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이본에 따라 山水로 고쳐 번역하였다.

[D-010]세속의 재미 : 원문은 世味인데, 이는 공명을 이루고 벼슬하고 싶은 욕심을 이른다.

[D-011]손수 …… 삼았다 : 원문은 手書以自警인데, 모초재실기 중의 유최기(兪最基)가 지은 묘지(墓誌)’에는 手書二十字以警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최기가 연암과 똑같이 인용한 좌우명은 모두 18자로, ‘所當戒者 人之所當戒者로 되어야 20자가 된다. 모초재실기 1 잡저(雜著) 손수 20자를 써서 좌우명을 삼다.手書二十字以警란 제목의 글이 있으나, 내용은 판이하다.

[D-012]남들 …… 것이다 : 모초재실기 1 잡저(雜著) 자도(自道)’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D-013]모사(慕思) : 원문은 思慕로 되어 있으나. 모초재실기 1 잡저에는 제목이 慕思로 되어 있으며, 돌아간 부모를 그리워하는 시이다.

[D-014]무은(無隱) : 모초재실기 1 잡저에 수록되어 있다. “숨기면 허물을 고칠 수 없게 되고 악을 없앨 수 없게 된다.隱則過不至改 惡不至銷고 하면서, 오륜의 실천에 있어서 숨김 없음無隱의 공덕을 예찬한 글이다.

[D-015]감문산(甘文山) …… 지냈다 :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에 있는 산이다. 이 부분이 모초재실기에는 初葬甘文山 後移窆于回龍里로 되어 있는데, 이는 후손이 나중에 고친 듯하다.

[D-016]아무 : 모초재실기에는 수겸(秀兼)’으로 되어 있다.

[D-017]홍원섭(洪元燮) : 1744~1807. 자는 태화(太和), 호는 태호(太湖),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충주 목사를 지냈으며 고문(古文)을 잘 지었다. 연암과 친교가 있었다. 연암집 4에 그의 비성아집(秘省雅集) ()에 차운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D-018]대제학 남공 유용(南公有容) : 모초재실기에는 參判洪公梓로 되어 있다. 실제로 모초재실기에는 남유용의 글이 없으며, 홍재(洪梓)의 글만 있다. 慕初齋實紀 卷1 孝行帖追錄

[D-019]심공 염조(沈公念祖) : 모초재실기에는 그다음에 今大提學吳公載純이 추가되어 있다.  모초재실기에는 심염조의 글은 없고, 오재순과 이진형의 글만 있다. 慕初齋實紀 卷2 孝行帖追敍

[D-020] …… 하였다 : 모초재실기에 의하면 예귀주는 세 살 때부터 이미 부모를 경애할 줄 알아 젖을 먹을 때에도 무릎을 꿇고 젖을 빨아 먹었다고 한다. 부모를 위해 노루 고기를 구했더니 호랑이가 노루를 물어다 놓기도 하고, 꿩 고기를 구했더니 꿩이 스스로 날아왔다고 한다.

[D-021]증자가 …… 의리 : 연상각집에는 맹자가 증자에 대해서 효라고 칭찬했던 의리孟子所嘗稱孝於曾氏之義라 되어 있다.

[D-022]반 발자국 순식간이라도 : 모초재실기 1 무은(無隱)에서 한순간도 간사하게 꾸미는 태도一息私僞之態가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D-023] …… 뛰니 :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소개된 효자 맹종(孟宗)과 왕상(王祥)의 고사를 말한다. 맹종은 오() 나라 사람으로 모친을 위해 죽순을 구했더니 겨울인데도 죽순이 돋았다고 하며, 왕상은 진() 나라 사람으로 계모를 위해 생선을 구하고자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갔더니 잉어가 뛰어올랐다고 한다.

[D-024]그대에겐 …… 없으리오 : 부모에 대한 효를 다했다고 후련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 좋은 목재로 관곽(棺槨)을 두텁게 만들어 죽은 이의 피부에 흙이 닿지 않게 한다면 사람 마음에 어찌 후련하지 않겠느냐.於人心 獨無恔乎고 하였다.

[D-025]뜻을 …… 삼으소 : 모초재실기에는 이 다음에 聖上十六年壬子月日 通訓大夫安義縣監潘南朴趾源撰이란 내용이 추가되어 있고, 운산만첩당집에는 이 뒤에 또 老子云 六親不和 有孝慈라는 평어가 추가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참봉(參奉) 왕군(王君) 묘갈명

 

 

왕씨(王氏)가 고려 시대에는 다 공족(公族 왕족)이었는데, 나라가 바뀌자 자기네끼리 서로 공포에 떨어 성()을 변경하고 도피하여 숨어 살았으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옥씨(玉氏), 금씨(琴氏), 마씨(馬氏), 전씨(全氏), 전씨(田氏) 등 다섯 성에 왕씨들이 많이 숨어들었다. 우연히 들에서 서로 만나면 걸어가면서 노래를 불러 주고받기를,

 

()을 찬 저 사람은 근본을 잊지 않네.’

거문고는 있어도 줄이 없으니 벙어리나 마찬가지네.’

꼴 아닌 곡식으로 저 말에겐 밥을 먹이네.’

 사이에 엎디어서 달갑게 남 밑에 사네.’

하였다. 이는 대개 두려움으로 움츠리지 않을 수 없어서 은어(隱語)를 만들어 서로 알아차리도록 한 것이라 한다.

우리 왕조에서 참봉이란 관직을 만들어 왕씨를 찾아서 마전(麻田)에 있는 왕씨는 숭의전(崇義殿)을 받들게 하고, 개성(開城)에 있는 왕씨는 현릉(顯陵)을 받들게 하였으니 모두 고려 태조의 후손들이었다. ()는 아무, ()는 아무가 있는데 그 증조 휘 아무, 조부 휘 아무, 부친 휘 아무로부터 군()에 이르기까지 4대를 연달아 모두 현릉 참봉이 되었다. 모친은 울산 박씨(蔚山朴氏) 아무의 따님이다.

군은 숙종 병진년(1676, 숙종 2)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 겉으로는 겸손하여 몸 둘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능히 사물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실오라기 하나도 빠뜨림이 없었다.

임금이 선죽교(善竹橋)에 거둥하여 어필(御筆)로써 고려 충신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를 기려,

 

일월(日月)같이 밝은 충성 만고에 뻗치리니 / 日月精忠亘萬古

태산같이 높은 절개 포은(圃隱) 선생이로다 / 太山高節圃隱公

 

라 쓰고, 담당자에게 명하여 돌에 새겨 비()를 만들어 다리 입구에 세우게 하였다. 군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의 종족(宗族)을 거느리고 날마다 비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빗돌을 받치는 귀부(龜趺)가 완성되자 이를 끌어당기는 자가 거의 만 명이었으나, 너무도 무거워서 까딱할 수가 없었다. 비를 세울 날짜는 정해져 있어, 담당자는 그 시기에 대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군이 웃통을 벗고 밧줄을 잡아 호야!’ 하고 한 번 끌어당기자 대중들의 힘이 일제히 솟아나, 돌이 가기를 물 흐르듯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담력과 용맹으로써 칭송을 받았다. 장차 비각(碑閣)을 건립할 양으로 주춧돌을 고궁의 터에서 캐어 오려 하자 군은 강개한 어조로 말하기를,

 

이 역사(役事)가 누구를 표창하기 위한 것인데 하필이면 고려 고궁의 대()를 헐어서 한단 말인가!”

하니, 담당자는 말을 못 하고 한참 있다가 탄식하면서,

 

저 사람 말이 옳다.”

하고, 마침내 다른 곳에서 주춧돌을 가져왔다.

고려 왕릉의 제사는 세월이 오래되자 해이해져서, 석물(石物)이 이지러지고, 술 담는 제기(祭器) 등속이 깨지고 금이 갔으며, 겉에 새겨진 갖가지 무늬들이 마멸되어 선명하지 못하였다. 군은 개성부의 유수(留守)에게 간청하고 또 예조에 신고하여, 자리에 가선을 두르고 안석을 원래대로 했으며, 서직(黍稷) 담는 제기에 장식을 하고, 제물을 올리고 술을 땅에 붓고 일어났다가 엎드렸다 하는 것을 모두 의식에 맞게 하였다.

집안이 처음에는 몹시 가난했으나 군이 고생을 거듭하여 푼푼이 모으고,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주린 배도 견디곤 하여, 늘그막에는 살림이 윤택하였으며 자손들을 잘 깨우치고 이끌어서, 크게 재산을 이루어 향리에서 갑부가 되었다고 한다.

병인년(1746, 영조 22) 모월 모일에 죽으니 향년 83세이다. 개성부의 남쪽 봉명산(鳳鳴山) 동녘 기슭 경좌(庚坐)의 벌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단양 우씨(丹陽禹氏) 아무의 따님인데, 슬하의 아들은 아무요, 두 딸은 선비 아무와 아무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다섯인데 맏손자 아무는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은 전임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 그다음 손자 아무는 진사(進士), 또 그다음 손자 아무도 진사요, 나머지 손자들은 어리다. ()은 다음과 같다.  명은 원고를 잃었다. 

 

 

[C-001]참봉(參奉) 왕군(王君) 묘갈명 : 운산만첩당집의 목차에는 현릉 참봉(顯陵參奉) 왕군 묘갈명으로 되어 있고,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 연암집 산고(散稿)에는 여릉 참봉(麗陵參奉) 왕군 묘갈명으로 되어 있다. 후자는 대본에 비해 간략하며 자구의 차이가 적지 않아 초기작으로 추정되지만, 명사(銘辭)를 갖추고 있다.

[D-001]공족(公族)이었는데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이 다음에 本其所自出이라는 말이 더 있다.

[D-002]나라가 바뀌자 : 원문은 鼎革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革除'로 되어 있다.

[D-003]걸어가면서 노래를 불러 : 원문은 行歌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로 되어 있다.

[D-004]() …… 않네 : 예기 옥조(玉藻) 옛날의 군자는 반드시 옥을 찼다.古之君子必佩玉고 하였다. 여기서의 군자(君子)는 왕이나 귀족을 뜻한다.

[D-005]남 밑 :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다는 말로서, 사람 인() 아래에 임금 왕()이 있는 전씨(全氏)’ 성을 가리킨다.

[D-006]대개 …… 만들어 : 원문은 蓋不能無畏約 爲隱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久畏約 故爲隱으로 되어 있다.

[D-007]왕씨를 찾아서 : 원문은 求王氏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求王氏後로 되어 있다.

[D-008]숭의전(崇義殿) : 조선 시대에 전 왕조인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과 일곱 임금, 즉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을 제사 지내던 사당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1397(태조 6)에 경기도 마전현(麻田縣)에 왕건의 묘()를 세운 뒤, 1399(정종 1)에는 고려 태조와 일곱 임금을 제사 지내고, 1542(문종 2)에는 이곳을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D-009]현릉(顯陵) : 고려 태조 왕건의 능으로 개풍군(開豐郡)에 있다.

[D-010]모두 …… 후손들이었다 : 원문은 皆太祖後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獨皆太祖後로 되어 있다.

[D-011]() …… 있는데 : 원문은 有諱某字某로 되어 있으나, 그러면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 돌출한 셈이 되어 문리가 순탄하지 않다. 아마 초서로  자가  자와 유사하므로, ‘ 자를  자로 잘못 판독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의 휘는 아무, 자는 아무인데로 번역되어야 한다.

[D-012] …… 되었다 : 이 부분이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여릉 참봉이다. 부친의 휘는 아무인데 급제하였고, 조부의 휘는 아무이다.麗陵參奉 考諱某 及第 祖諱某라고 되어 있다.

[D-013] …… 같지만 : 원문은 無所措躬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4]사물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 원문은 綜理事物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綜密投會로 되어 있다.

[D-015]임금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영종(英宗)’으로 되어 있다. 영조(英祖)를 가리킨다. 1740(영조 16) 9월에 영조가 개성에 거둥하여 과거를 열고 성균관에서 알성례(謁聖禮)를 행한 후 선죽교(善竹橋)에 정몽주(鄭夢周)를 추숭하는 비를 세우게 하였다.

[D-016]어필(御筆)로써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단지 손수 글을 써서 돌에 새겼다.手書刻石라고만 되어 있다.

[D-017]장차 …… 하자 : 원문은 將建閣 採礎故宮之墟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有司將建閣 採礎麗墟로 되어 있다.

[D-018]하필이면 …… 말인가 : 원문은 而壤麗氏臺爲哉인데, 운산만첩당집 하풍죽로당집에는 而壤麗氏臺爲閣哉로 되어 있고,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壤麗氏臺爲悅者乎로 되어 있다. ‘고려 고궁의 대()’란 개성 송악산 기슭에 있는 만월대(滿月臺)를 이른다.

[D-019]탄식하면서 : 원문은 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20]세월이 오래되자 해이해져서 : 원문은 歲久弛墮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吏滋不虔으로 되어 있다.

[D-021]예조 : 원문은 秩宗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禮曹로 되어 있다.

[D-022]자리에 …… 하였다 : 서경 고명(顧命)에 천자가 죽으면 궁중 여러 곳에 가선을 두른 자리를 깔며 안석은 생시와 같이 놓아둔다고 하였다. 원문의 은 자리의 테두리를 천으로 둘러 꾸민 것을 말하고, 안석을 생시와 같이 놓아두는 것을 잉궤(仍几)’라 한다. 주례 춘관(春官) 사궤연(司几筵)에도 무릇 길사(吉事)에는 안석을 새로 바꾸고 흉사(凶事)에는 안석을 그대로 쓴다.凶事仍几고 하였다. 이 부분이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罍雲尊彪 席几純仍 式秩式威 昻頫愀喜로 되어 있다.

[D-023]집안이 …… 가난했으나 : 원문은 家初赤貧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家赤貧으로 되어 있다.

[D-024]군이 …… 모으고 : 원문은 君積苦錙銖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徒手無絲髮綠 能積苦錙銖로 되어 있다.

[D-025]주린 …… 하여 : 원문은 貶腹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6]윤택하였으며 : 원문은 阜潤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稍潤則으로 되어 있다.

[D-027]병인년 …… 83세이다 : 착오가 있는 듯하다. 생년이 숙종 병진년(1676)이므로, 향년이 83세이면 몰년은 영조 34(1758) 무인년이 되어야 옳다.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병인년에 합치되도록 향년이 ‘71로 되어 있다.

[D-028]손자는 다섯인데 : 원문은 孫五人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有孫五人으로 되어 있다.

[D-029]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 : 의영고는 호조(戶曹) 소속으로 궁중에서 쓰는 각종 기름과 조미료 등 식품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관청이다. 주부는 종 6 품 벼슬이다.

[D-030]() …… 잃었다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티끌 모아 태산 같은 항산(恒産) 이루었으되, 누가 알리 그분이 항덕(恒德)도 지녔음을. 덕에는 크고 작음이 없나니, 자손에게 남긴 가업 항상 변함없으리.聚塵成泰恒 孰知厥德恒 德無大小然 遺厥嗣業恒라는 명사(銘辭)가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가의대부(嘉義大夫) 행 삼도통제사(行三道統制使) 증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 충강(忠剛)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오호라! 청 나라 사람들이 처음 그 국호(國號)를 세우면서, 우리나라 사신을 겁박하여 잡아다가 기필코 한 번 그 뜰에 꿇리고서 큰 절을 받고자 했다. 이는 틀림없이 온 천하에 소리쳐 떠들기를,

 

조선은 예의의 나라로서 여러 나라들에 솔선하여 우리를 황제로 섬긴다.”

하려는 것이었으니, ! 사신된 자는 이보다 더 사정이 급박할 수 없었다. 그 머리가 잘릴망정 조아려서는 안 되고, 그 무릎이 끊길망정 꿇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진실로 고()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이 사신 노릇 하듯이 하지 아니했다면, 동해(東海) 주변 수천 리의 우리나라가 장차 무엇으로써 천하에 대해 스스로 떳떳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힘은 족히 심양(瀋陽)을 함락시키고 요동(遼東) 전역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약한 나라의 일개 사신을 이기지 못했고, 그들의 위엄은 족히 몽고의 40여 왕을 굴복시키고 하루아침이 못 걸려서 두송(杜松) 20만 군사를 깨뜨렸지만, 필부의 허리를 꺾어 뜰에 꿇리지는 못했다. 옥쇄를 획득하고 부명(符命)을 늘어놓으며, 기세등등하게 하늘로부터 이를 얻었다고 자부하는 것이 저와 같이 용이했건만, 그들이 우리 사신의 절 한 자리 받기란 이와 같이 어려웠다. 그렇지만 사건이 영토 밖에서 벌어져 국내 사람들이 통쾌하게 직접 본 바 아니었고 몸이 살아서 돌아온 데다가 저들의 서한을 받아 왔다는 혐의를 받았으므로 그 당시에 나라를 욕되게 했다는 논란이 어찌 그칠 수 있었겠는가!

그 뒤 명 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천자에게 아뢴 사실과, 중원(中原)의 망한 명 나라 백성들이 당시의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둔 사실을 전문(傳聞)을 통해서 차츰차츰 알게 되자, 국내의 의심이 점점 풀리어 비로소 표창하고 증직(贈職)하는 특전을 더하게 되었다. 그러나 저 적국의 뜰에서 강하고 굳세게 맞선 사적에 대해서는 상기도 국내 사람들이 반신반의해 온 것이 지금까지 140여 년이었다. 이는 당연히 만세가 되어도 공론(公論)에 힘입어 사라질 수 없을 사적이요, 청 나라 황제로서도 덮어 버릴 수 없었던 사적이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확()이요, 자는 여량(汝量)이다. 계통은 선파(璿派)에서 나왔으니, 시조는 왕자 경녕군(敬寧君) ()였다. 부친의 휘는 유인(裕仁)인데, 문과에 급제하고, 함경도 관찰사로서 왜병이 침략했을 때 싸우다 피살되어 예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경주 최씨(慶州崔氏)로 만력(萬曆) 경인년(1590, 선조 23)에 공을 낳았다.

공은 세 살 때에 부친을 여의었다. 장성하자 키는 팔 척이요, 음성은 큰 쇠북을 울리는 것 같았으며, 용력이 절등하여 우뚝한 장수의 재목이었다.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그가 고아로 가난하게 사는 것을 가련하게 여겨 무과(武科)를 권하니, 응시하여 갑과(甲科 첫째 등급)로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는데, 사나운 범이 금원(禁苑)에 들어오자 공이 쏘아 죽였다. 그리고 적신(賊臣)이 문무백관을 위협하여 대궐 뜰에서 대비를 폐할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그 반열에 참여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겨 공에게 병을 핑계 대라 권하자, 공은 성을 내며,

 

병들지 않았다면 참여해야 된단 말인가?”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날이 갈수록 패악하므로 공의 뜻을 떠보려는 자가 있자 공은 사양하기를,

 

나는 어머니가 있으니 감히 그대들을 따르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나에 대한 의심은 말고 다만 노력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정사(靖社)에 미쳐 밀약이 있었다. 동성군(東城君) 신경인(申景禋)이 공에게 함께 가자고 요청했으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공이 이때에 어영청 천총(御營廳千摠  3 품 벼슬)을 맡고 있었는데, 박승종(朴承宗)이 평소 공을 믿었으므로 급히 공을 불러 말하기를,

 

네가 대장 이흥립(李興立)과 더불어 모반한다고 고자질하는 자가 있으나, 나는 너를 의심하지 않으니 급히 군사를 돈화문(敦化門 창덕궁 정문) 밖에 모아 비상에 대비하라.”

하자, 공은 드디어 군중(軍中)에 명령하기를,

 

오늘은 내가 특장(特將)으로 지휘를 도맡았으니 감히 어기는 자는 베어 죽이리라!”

하였다. 밤에 반정군의 깃발이 돈화문을 향하자 군중이 동요하였다. 외병(外兵)이 있다고 보고하므로, 공은 말을 타고 동으로 향해 서서,

 

내 말 머리만 보고 따르라.”

하였다. 막 공의 자()를 부르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공은 짐짓 못 들은 척했는데, 공을 부른 사람은 바로 동성군이었다.

일이 평정되자 여러 공신들이 공을 의심하여 공도 함께 베어 죽이려고 했으나,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그들과 맞서 힘껏 다투면서,

 

가령 이확(李廓)이 진()을 물리지 않았더라면 누가 감히 궁궐로 들어갔겠는가?”

하였다. 연평군이 평산 부사(平山府使)로서 의거를 일으켜 일약 호위대장(扈衛大將)에 제수되자, 공을 힘껏 보호하여 중군(中軍)을 삼았으며 다시 공을 천거하여 평산 부사를 대신 맡게 하여 감싸 주었다. 그러나 박승종은 영의정으로서 처형을 당했는데, 공은 일찍이 그에게 신임을 받던 처지라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어 늘 울적하게 지내면서 뜻을 펴지 못했다.

이듬해에 이괄(李适)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전해 오자, 공은 마침 심리(審理)를 받던 중이었으나, 임금이 급히 불러 접견하고 활과 칼을 내려 주어 출정케 하였다. 저탄(猪灘)에서 적을 막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역적들은 상금을 걸고 공을 잡으려고 서둘렀으나, 급기야 공이 타던 말이 죽어서 물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공이 이미 죽었다고 여겨 마침내 가 버렸다. 공은 흘러가는 시체에 올라타서 죽음을 면하게 되자, 알몸으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군대로 달려갔으나 군중에서는 공을 역적의 첩자로 의심하여 베어 죽이려고 했다. 장만은 공을 특별히 사면하여 선봉장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속죄하게 하였다. 드디어 역적을 쳐부수고 서울을 회복하였으나, 그 공로가 의심스럽다고 하여 책훈(策勳)되지 못했다. 외직으로 나가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었다가 곧 자산 부사(慈山府使)로 옮겼다.

강홍립(姜弘立)이 만주족(滿洲族)을 인도하고 와서 의주성(義州城)을 함락시키자 인접 고을들도 따라서 와해되었으므로, 관찰사 윤훤(尹暄)이 급히 공을 불러 평양성(平壤城)을 구원하게 하였다. 공은 도중에서 평양성이 이미 함락되고 자산 역시 지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자 근거지조차 잃어버려 낭패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격문(檄文)을 띄워 여러 고을 군사를 소집하여 절도사에게로 달려갈 작정이었는데, 김기종(金起宗)이 윤훤을 대신하여 관찰사가 되자, 공이 도중에 기웃거리기만 하고 급히 평양성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의심하여 베어 죽이려고 했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는 공에게 김덕경(金德卿)과 고한룡(高汗龍)이란 자를 얼른 잡아 없애도록 맡겼다. 이 두 역적은 모두 서쪽 변방의 보잘것없는 역관으로 만주족에게 투항하였는데, 김덕경은 만주족에 의해 임시로 안주 목사(安州牧使)에 임명된 자였다. 공은 이 두 역적을 사로잡아 스스로 속죄할 것을 청하고는 마침내 계획을 세워 고한룡을 참수하고 김덕경을 사로잡았으며, 강물을 반쯤 건넌 역적들을 공격하여 잡혀가는 우리 백성들을 빼앗아 오고, 고차 박씨(高遮博氏)를 추격하여 그를 호종하는 기병 두 명을 쏘아 죽였다.

그러자 김기종은 손을 잡고 기뻐하며 술잔을 나누면서,

 

서로 늦게 안 것이 한스럽소.”

하고, 드디어 만류하여 중군(中軍)으로 삼고 군사에 대한 것을 모두 그에게 위임하였다.

적이 물러가자, 내직으로 들어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외직으로 나가 경원 부사(慶源府使)가 되었다가 곧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옮겼다. 다시 들어와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고, 또다시 나가 제주 목사가 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모친의 연로함을 들어 사직하고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때 만주족이 이미 심양을 점거하여 자주 산해관(山海關)을 침공하였으며, 몽고의 여러 부족들을 다 복속시켰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교린(交隣)의 도리로써 대우하여 사신의 내왕이 끊이지 않았다. 숭정(崇禎) 9년 병자년(1636, 인조 14)에 만주족은 영아아대(英兒阿代)와 마복탑(馬福塔)을 보내와 서신을 전달했는데, 그 사연이 몹시 패악하고 거만하여,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전날과 아주 달랐다. 그래서 대각(臺閣 사헌부 · 사간원) 및 성균관 유생들이 번갈아 상소를 올려, 그 사신을 베어 머리를 함에 넣어 명 나라 황제께 아뢰자고 요청하니, 영아아대 등은 크게 놀라 숙소에서 뛰쳐나가 말을 빼앗아 타고 달려가면서 국서(國書)를 도중에 내버렸다.

이때 사대부들은 모두 심양에 사신 가기를 회피했으므로 마침내 공을 회답사(回答使)에 충원시키니, 서신을 가지고 뒤를 쫓아 용만(龍灣 의주(義州))에 이르렀다. 때마침 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이 공보다 먼저 출발하여 막 용만에 머물러 있다가, 드디어 동행하여 심양으로 들어갔다.

()이 공들을 접견하고서 더욱 거만하게 굴며 폐백을 선뜻 받아 주지 않고, 사자(使者)를 숙소로 번갈아 보내어 10여 건의 일을 들어 트집만 잡곤 하였다. ()이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 하면서, 먼저 정명수(鄭命壽)를 시켜 오만 가지로 회유하고 협박했으므로, 공은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정명수에게 주면서,

 

내 머리를 가지고 가라!”

하였다. 이튿날 만주족 기병 수십 명이 채찍으로 문을 후려치고 크게 호통 치면서,

 

조선 사신은 빨리 예복을 갖추라!”

하자, 공은 탄식하며,

 

오늘에야 죽을 자리를 얻었나 보다.”

하고, 드디어 나공(羅公)과 함께 동쪽을 향해 사배(四拜)를 드려 멀리서 임금께 하직을 고하였다. 그리고 손수 관복을 찢고 사모(紗帽)를 밟아 뭉개뜨려 다시 입지 않을 뜻을 나타냈으며, 스스로 상투를 풀고 머리를 맞대어 두 가닥을 한데 합쳐 묶고 서로 보듬고 누웠다.

()이 장사(壯士)를 보내어 공들을 좌우로 끼고서 내달리어 제단 아래 이르자, 패륵(貝勒)과 팔고산(八固山)과 번자(番子)들이 다 줄지어 서고, 몽고의 수십 만 기병이 제단을 빙 둘러 진을 쳤다. ()은 자황포(柘黃袍)를 입고 규()를 잡고 제단에 올라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尊號)를 받고, 국호를 세워 대청(大淸)’이라 하고 숭덕(崇德)’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장사들이 공을 끼고 서자, 공은 즉시 나자빠져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장사들이 앞을 다투어 그 팔과 다리를 붙잡고 고개를 억누르고 꽁무니를 쳐들고 사지를 들어 땅에 엎어뜨리자, 공은 크게 호통 치며 몸을 뒤쳐 바로 누우며, 앞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누운 채 발길로 그 얼굴을 차서 코가 깨져 피가 터지곤 하니, 이날 구경하던 자들은 깜짝 놀라고 혐오스러워 차마 보지를 못했다. 마침내 거꾸로 질질 끌어다 숙소에 가두었다.

이튿날 다시 동교(東郊)에서 제사를 지낼 적에 또 공들을 끌고 갔다. 공들은 더욱 사납게 항거하며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으니, 정말로 그 사나움을 당해 낼 수 없었다. 만주족의 여러 신하들이 흔고(釁鼓)하여 대중 앞에 위엄을 보일 것을 청하자, (),

 

저것들이 시방 죽여 달라고 요구하는 판인데, 지금 죽이면 도리어 저놈들의 소원을 풀어 주는 것이 되고, 또 사신을 죽였다는 악명을 무릅쓰게 된다. 그러니 놓아 돌려보내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드디어 서한을 만들어 보따리 속에 넣어 주고 기병 100여 명을 시켜 공을 압송하여, 아골관(鴉鶻關)까지 이르러 되돌아갔다. 공들이 비로소 보따리를 점검하고 과연 한()의 서신을 발견하자 놀라며,

 

서신에 새 도장을 찍어 봉했으니 그 내용은 뻔하다. 만일 서신을 떼어봤다가 예전 격식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면 장차 어찌하랴?”

하고, 드디어 서신을 여점(旅店)에 놓아두고 말을 달려 돌아와 책()을 벗어났다. 변방에서는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기를, 공들이 적의 뜰에서 절하고 춤을 추었다 했고, 관찰사 홍명구(洪命耈)는 장계를 급히 올려 국경에서 그들을 효시(梟示)할 것을 청했다. 이에 삼사(三司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와 성균관 유생들이 모두 상소를 올려 베어 죽이기를 청하므로,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역설하기를,

 

두 사신을 아직 신문해 보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유독 먼저 베어 죽인단 말인가!”

하여 말감(末減)을 얻었다. 그리하여 공은 선천(宣川)으로 귀양 가고, 나덕헌은 백마산성(白馬山城)을 병사(兵士)로서 지키게 되었다.

한참 뒤에 조정에서는 도독(都督) 심세괴(沈世魁)가 명 나라 황제에게 아뢰는 수본(手本 손수 작성한 보고서)을 얻어 보고서야 비로소 공들이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던 실상을 알게 되었으며, 양사(兩司)에서는 효수(梟首)하자는 계문(啓聞)을 잠시 정지했다. 그러나 말 많은 자들은 오히려 심 도독이 명 나라 조정에 거짓 보고한 것이라 했다. 급기야 마복탑(馬福塔)이 공들이 여점(旅店)에다 버린 서신을 이유로 몹시 성을 내며 하는 말이,

 

황제가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데 사신된 자는 의당 공손히 예를 행해야 할 것이거늘 이확(李廓) 등은 패악스럽게 난동을 부려 뜰에서 천자를 욕보였으니 어찌 이놈을 당장에 죽여 대국에 사과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따라갔던 역관 신계음(申繼愔) 등이 비로소 속을 털어놓고 원통함을 호소하여 공들의 귀양을 풀게 되었다.

이해 겨울에 만주족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습격하여,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이때 공은 모친 최 부인(崔夫人)의 상을 당했으나, 임금은 기복(起復)을 명하였다. 이에 공이 포위한 가운데로 들어가 임금을 뵙자, 임금은 공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내시를 보내어 육식을 권했을 뿐 아니라 친히 왕림하여 위로하고 격려했다. 독전어사(督戰御史) 김익희(金益熙) · 황일호(黃一皓) · 김수익(金壽益) · 이후원(李厚源) · 임담(林墰) 등 여러 공들이 공이 방비하는 데 신기한 계략을 지녔음을 보고, 국사(國士)로서 허여하며, 비로소 전에 심양에 사신 간 때의 일을 믿게 되었다. 포위가 해제되자, 돌아가 최 부인을 장사하기를 요청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치자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제수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발탁되어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에 제수되었다.

공은 심양에 있을 적에 하도 두들겨 맞아서, 어혈이 들고 속으로 곪아 하체가 마비되었다. 연로하자 시골에 살며 누차 제수받은 직을 사양했다. 현종(顯宗) 을사년(1665, 현종 6)에 집에서 죽으니, 양근군(楊根郡) 북쪽 울업리(鬱業里) 을좌(乙坐)의 벌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흥양 이씨(興陽李氏)로 응배(應培)의 따님인데 3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익장(益章) · 익상(益常) · 익행(益行)이요, 딸은 윤세미(尹世美)에게 출가했다. 익장과 익상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익행은 5남을 두었는데 현() · () · () · () · ()이다.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등주(登州)에 들어갔다가 마홍주(馬弘周)에게 사로잡혀 북경(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길에서 한 그림을 보니 바로 공들이 굴하지 않은 상황을 그린 것이었다. 이에 앞서 황명 열황제(皇明烈皇帝)가 어사 황손무(黃孫茂)를 보내어 공의 절의를 굉장히 칭찬했는데, 이때는 벌써 가도(椵島)가 깨어진 뒤라 그 조서(詔書)는 마침내 전해질 수 없었다. 이로부터 명 나라 천자의 사신은 다시 조선에 오지 않았다.

오늘날에 이르러 청 나라 황제가 역대 제왕으로부터 한()이 국호를 세운 때의 일까지를 논술하여 제목을 어제전운시(御題全韻詩)라 했는데, 시는 5권으로 간행되어 천하에 유포되었다. 그 시 속에는, “조선 사신이 절을 아니 하고 유독 틀어졌네.”라는 말이 있고, 친히 주석(註釋)을 자세히 달아 아래와 같이 말했다.

 

태종(太宗)이 이미 존호를 받았는데, 조선 사신 이확과 나덕헌이 유독 절을 하지 않았다. 태종이 뭇 신하에게 유시하기를, ‘사신이 무례한 것은 짐()이 먼저 분쟁의 빌미를 만들어 그 사신을 죽이게 하여 나에게 맹약을 무너뜨렸다는 악명을 덮어씌우고자 함이니, 짐은 끝내 한때의 분풀이로 그 사신을 죽이지 않으련다. 그러니 이를 불문에 부치라!’ 하였다. 그리고 곧 이확 등을 돌려보냈다.”

거기에서 태종이라 일컬은 자가 한()이었다.

지금 임금 3(1779)에 특명으로 그 책을 구입해 들여오게 하여 어람(御覽)하고는 가상히 여기고 탄식한 다음, 이확의 집 문에 정표(旌表)하도록 명하고 시호를 충강(忠剛)이라 내렸다.

오호라! 이는 어찌 공들에 대해 백 년 동안 내려온 의심이 하루아침에 통쾌히 밝혀진 것일 뿐이겠는가? 천하로 하여금 만세토록 우리 조선만이 홀로 당시에 만주족을 황제의 나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더욱 의롭게 여기도록 만들 것이다. 드디어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우리 선왕에게도 / 維我先王

위에 임금 있었나니 / 亦維有君

대명(大明)의 천자님은 / 大明天子

우리 임금의 임금일레 / 我君之君

()이 천명 받기 전엔 / 淸未受命

이웃의 강국일 뿐이었는데 / 卽我强隣

요동 심양 점령하고 나서는 / 入據遼瀋

창 휘두르고 사방으로 눈 부릅뜨니 / 揮戈四瞋

악라(鄂羅)라 회회(回回) / 鄂羅回回

두이백특(杜爾伯特)이라 / 杜爾伯特

찰뢰(扎賴)라 옹우(翁牛) / 扎賴翁牛

오주(烏珠)라 토묵(土黙)들이 / 烏珠土黙

모두 신하로 자처하자 / 莫不稱臣

더욱 강경하고 오만해져 / 益强以傲

가한(可汗)이란 칭호 부끄러워 / 羞稱可汗

황제 칭호 넘보려네 / 謀僭大號

범 같은 우리 장수 / 我有虎將

이확(李廓)이요 자는 여량(汝量) / 曰廓汝量

사신으로 저들 관사에 묵으니 / 聘在彼館

죽음을 각오한 용사일레 / 元不忘喪

제아무리 황제라 자처해도 / 彼雖自帝

꿈속에 배부른 격 / 若飽于夢

공의 절을 꼭 받아서 / 必借公拜

군중에게 과시하려 했네 / 以誇其衆

변발에다 붉은 모자 / 辮髮朱帽

부리부리한 눈에 귀신 같은 이빨로 / 焰瞳鬼齶

앞뒤로 끼고 몰아 / 前擁後驅

번갯불에 산 무너지듯 / 若霆摧嶽

청이 황제 노릇 할지 못 할지 / 淸之帝不

공의 절 한 번에 달렸는데 / 係公一俯

하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서서 / 撑宙亘宇

기둥처럼 굳게 박혔네 / 確植如柱

나의 목은 토제 인형이요 / 項領土梗

등과 배는 옹기나 마찬가지 / 腹背瓮盎

창자를 베건 위장을 도려내건 / 屠腸刳胃

네 멋대로 실컷 배를 채우려무나 / 任汝飫脹

오직 이 무릎만은 간직하여 / 獨保此膝

천하 위해 굽히지 않으니 / 爲天下伸

저 역시 의()에 부끄러워 / 彼亦赧義

제 신하에게 자중하게 하였네 / 以儆厥臣

장순(張巡) 허원(許遠)처럼 죽지 않고 / 巡遠不剮

소무(蘇武) 장건(張騫)처럼 살아 오니 / 武騫生還

국론이 물 끓듯이 / 國言沸騰

입 달린 자 모두들 탓하고 헐뜯네 / 喙喙郵訕

적에게 아양 떨어 / 謂公媚敵

절 올리고 춤췄으니 / 跳躍拜舞

진실로 이런 놈은 / 洵若斯者

목을 베어야 한다 했네 / 其咽可斧

살아서건 죽은 뒤건 / 于存于歿

업적과 명성 더럽혀지니 / 跡穢名衊

황하 물 끌어다 세숫물 삼은들 / 挽河爲盥

누가 대신 씻어 주리 / 誰爲滌之

화산(華山) 돌 깎아서 송곳을 만든들 / 斲華爲觿

누가 대신 찔러 터뜨려 주며 / 誰爲摘之

깜깜하고 암담한데 / 幽昧暗黮

누가 대신 밝혀 주리 / 誰爲晳之

청은 이제 사대가 되어 / 淸今四葉

건륭이라 연호 세우고 / 號登乾隆

황제 몸소 시가 지어 / 親作歌詩

조상 공덕 찬송했네 / 頌厥祖功

공이 절 아니한 걸 의아해하며 / 訝公不拜

뜻이 유독 틀어졌다 했으니 / 謂志獨乖

이 한 말 얻기란 / 獲此一言

하늘 오르기 어려움과 같네 / 若天難階

시의 주석(註釋) 살펴보면 / 觀其所註

응당 공의 뼈를 가루로 만들었을 텐데 / 理當粉骸

패역(悖逆)하다 꾸짖은 건 / 詈公悖常

공에게는 의용(義勇)일세 / 卽公義勇

제 아량 자랑이지 / 自述宏度

공을 칭송한 것 아니고 / 非爲公頌

대서특필한 것도 / 大書特書

공을 총애한 것 아니라 / 非爲公寵

누가 글 올려 황제 구워삶았으며 / 孰章賂帝

누가 함께 달래고 권했기에 / 孰與慫慂

어찌 한 번 죽임 아끼어 / 胡靳一殺

백 년 동안이나 공을 해쳤나 / 刻公百年

곧은 일은 펴지는 법 / 無直不伸

의심나면 하늘에 물어보소 / 可質蒼天

우리 왕조 역대의 법도는 / 我聖家法

오랑캐 물리치고 중화(中華)를 받드나니 / 攘夷尊周

동해 주변 삼천리 우리나라 / 環東爲國

춘추의 의리를 지켜 왔네 / 一部春秋

공과 같은 신하는 / 有臣若公

오랜 세월 지났어도 어제런 듯하여 / 曠世如昨

태상시에 명 내리고 / 爰命太常

정부 관각 불러다가 / 政府館閣

글자 살펴 시호(諡號) 정하고 / 考文選號

굳센 넋을 정표(旌表)하니 / 以旌毅魄

작설(綽楔)이 엄연할사 / 綽楔有儼

이름과 작위 높이 걸렸구려 / 揭名列爵

현저한 보답 융숭하였으니 / 顯報旣崇

저승으로부터 되살아나서 / 九原可作

이 크고 아름다운 비석을 본다면 / 視此豐珉

공의 낯빛에 부끄럼 없으리라 / 色庶無怍

 

 

글 전체가 의심할 의()’ 자로써 안건(案件)을 삼았다. 사건에 대한 서술이 기발하고 변화가 많으니, 사마천(司馬遷)의 진수를 터득했다. () 역시 극도로 기이하고 전아하여, 한창려(韓昌黎 한유(韓愈))를 배웠으면서도 거기서 환골탈태하여 묘경(妙境)을 얻었다고 하겠다.

 

 

이확(李廓) · 나덕헌(羅德憲)의 성명이 일통지(一統志)에 보이기는 하지만, 어제전운시가 나오기 이전에는 특별히 표창한 사람이 없었다. 그 때문에 백여 년 동안 적막하게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가령 당시 만에 하나라도 혹시 마음은 자기 몸을 드러눕게 하고 싶지만 힘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엎드리게 되어, 저놈들이 장차 절을 한 것으로 임시변통으로 인정해 버렸다면 공은 장차 어찌되었겠는가. 이는 다행히도 하늘이 공에게 곰과 범 같은 자질을 주어서 이 지경을 견뎌 내게 한 것이다. 그때에 여러 공들도 누군들 척화(斥和)할 생각이 없었으리오마는, 대저 모두 글 짓는 선비들이라 마음은 강하지만 뼈대는 연약하고 외모는 씩씩하지만 체질은 약하니, 비록 절의야 천지에 우뚝 세울 만하고 뜨거운 분노야 우주를 떠받칠 만하다 해도 반드시 용력이 장군과 같이 굳셀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워서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은 적이 없다.

 

[C-001]가의대부(嘉義大夫) …… 신도비명(神道碑銘) : 가의대부는 종 2 품의 품계이다. 삼도통제사는 곧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종 2 품의 관직이다. 자헌대부는 정 2 품의 품계이다. 자헌대부의 품계가 추증되었으므로, 품계보다 관직이 낮음을 표시하는 행() 자가 삼도통제사의 관직 앞에 붙었다. 오위도총부는 조선 시대의 군사조직인 오위(五衛)를 총괄하던 최고 군령(軍令) 기관이고, 도총관은 그 우두머리인 정 2 품의 관직이다. 원문에는 시호가 충렬(忠烈)’로 되어 있으나, 이확(李廓)에게 실제로 내린 시호는 충강(忠剛)’이었다. 正祖實錄 4 11 9, 5 11 20 혹시 그와 고난을 같이하여 함께 증시(贈諡)되었던 나덕헌(羅德憲)의 시호와 혼동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글은 전주 이씨 경녕군파 세보(全州李氏敬寧君派世譜) 권지수(卷之首)에도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말미에 통정대부 행 안의현감 겸 진주진관 병마절제도위 박지원 지음通政大夫行安義縣監兼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朴趾源撰이라고 되어 있어, 연암이 안의 현감 시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D-001]두송(杜松) : 명 나라 말기의 장수로 담력과 지혜가 뛰어나 주요 군직(軍職)을 역임하면서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1619년에 양호(楊鎬)가 후금(後金)을 공격할 때 그의 주력(主力)이 되어 함께 출전하였으나, 자신의 용맹을 믿고 경솔하게 진격하다 후금의 군대에 크게 패하고 자신도 전사하였다.

[D-002]부명(符命)을 늘어놓으며 : 제왕이 천명을 받은 증거로서 하늘이 보여 주는 상서로운 조짐을 부명이라 한다. 또한 그러한 상서로운 조짐들을 늘어놓으며 제왕을 예찬하는 글도 부명이라 한다.

[D-003]덮어 …… 사적이다 : 원문은 不得掩也인데, 운산만첩당집,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 동문집성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4]선파(璿派) : 전주 이씨(全州李氏) 왕실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宗派)를 이른다.

[D-005]경녕군(敬寧君) () : 태종(太宗)과 효빈(孝嬪) 김씨(金氏) 사이에 출생한 왕자이다.

[D-006]응시하여 갑과(甲科)로 합격하여 : 원문은 中甲科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그 앞에 光海中이 더 있다.

[D-007]선전관(宣傳官) : 임금이 행차할 때 호위와 명령 전달 등을 맡던 종 9 품부터 정 3 품까지의 관직이다. 임금을 측근에서 보좌하므로 장차 출세가 보장되는 무반(武班)의 명예로운 요직으로 간주되었다.

[D-008]적신(賊臣) :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주도한 이이첨(李爾瞻)을 일컫는다. 중편연암집에는 그 앞에 光海君時가 더 있다.

[D-009]공의 뜻 : 원문의 公意인데, 동문집성에는 公議로 되어 있다.

[D-010]정사(靖社) : 사직(社稷)을 안정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가리킨다.

[D-011]동성군(東城君) 신경인(申景禋) : 1590~1643. 무신 신립(申砬)의 아들로, 인조반정에 공로를 세워 정사 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책훈(策勳)되고 동성군에 봉해졌다.

[D-012]박승종(朴承宗) : 1562~1623. 광해조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인목대비 폐비에는 극력 반대했다. 반정이 일어나자 자결했다. 인조반정 직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나중에 신원(伸寃)되었다.

[D-013]이흥립(李興立) : 박승종과 사돈으로서 그의 추천으로 훈련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반정군(反正軍)에 합세하여 공이 컸으므로 정사 공신 1등으로 책훈되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투항했다가 난이 평정되자 자결했다.

[D-014]특장(特將) : 어느 한 방면을 전담하는 독자적인 부대의 주장(主將)을 이른다.

[D-015]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 : 1557~1633.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공신 1등으로 책훈되고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D-016]호위대장(扈衛大將) : 인조반정 이후 왕궁의 호위를 강화할 목적에서 설치한 호위청(扈衛廳)의 우두머리인 정 1 품 관직이다. 설치한 초기에는 호위 4()’이라 하여 공신인 이귀 등 4인이 대장이 되어 각기 군관(軍官)들을 거느렸다.

[D-017]공은 …… 처지라 : 원문은 嘗爲其所厚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公嘗爲其所厚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18]뜻을 펴지 못했다 : 원문은 不得意인데, 동문집성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9]이괄(李适) : 원문에는 로 되어 있는데,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李适로 되어 있다.

[D-020]저탄(猪灘) : 마탄(馬灘)이라고도 하며, 황해도 평산의 예성강(禮成江) 상류에 있었다.

[D-021]장만(張晩) : 1566~1629. 인조반정 직후 후금(後金)의 침략에 대비하여 평양에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자 그 우두머리인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었다. 1624년 평안병사 겸 부원수(平安兵使兼副元帥)인 이괄의 반란군이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던 평양을 피하여 파죽지세로 남진하자, 장만은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아 추격하여 마침내 서울 근교에서 격파했다. 그 공으로 진무 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책훈되고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D-022]강홍립(姜弘立) : 1560~1627. 명 나라의 후금(後金) 정벌 요청에 응해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서 출정했다가 패하자, 후금에 투항하고 억류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의 선도(先導)로서 입국하여 강화도에서 양국의 화의(和議)를 주선했다.

[D-023]윤훤(尹暄) : 1573~1627.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625년 평안 감사로 부임했다. 정묘호란 때 평양을 버리고 성천(成川)으로 후퇴함으로써 전세를 불리하게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어 강화도에서 효수되었다.

[D-024]공은 …… 듣자 : 원문은 道聞平壤已陷 而慈亦失守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앞에  자가 더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25]김기종(金起宗) : 1585~1635.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의 종사관으로서 무공을 세워 진무 공신 2등으로 책훈되고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다.

[D-026]서쪽 …… 역관 : 의주(義州)의 통사(通事)를 이른다.

[D-027]고차 박씨(高遮博氏) : 박씨(博氏)는 만주어(滿洲語)를 음역(音譯)한 관직 이름이고, 고차(高遮)는 만주족의 이름인 듯하다. 병자호란 직후 청 나라의 차사(差使)로 박씨들이 누차 입국한 바 있다. 숙종실록 36 10 7일 조의 주() 박씨(博氏)는 호인(胡人) 군졸의 명목이다.”라고 하였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6 27일 조에도 책문(柵門)을 지키는 청 나라 관원들에게 줄 예물 명단에 박씨(博氏), 가출박씨(加出博氏), 세관박씨(稅官博氏) 등의 관직이 열거되어 있다.

[D-028]기뻐하며 술잔을 나누면서 : 원문은 歡飮인데, 문맥으로 보아 勸飮의 잘못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술을 마시라고 권하면서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D-029]영아아대(英兒阿代) : 용골대(龍骨大)라고도 한다. 만주 정백기인(正白旗人)으로, 호부 상서를 지냈다. 조선에 누차 사신으로 왔으며, 병자호란 때 청 태종(淸太宗)의 막료로서 참전했다.

[D-030]마복탑(馬福塔) : 마부대(馬富大 : 또는 馬夫大)라고도 한다. 만주 정황기인(正黃旗人)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자주 왔으며,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의 막료로서 참전했다.

[D-031]회답사(回答使) : 교린(交隣) 관계에 있는 나라에서 사신을 통해 국서를 보내왔을 때 그에 회답하는 국서를 전하기 위해 파견하는 사신을 이른다.

[D-032]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 :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후금(後金)과 형제 맹약을 맺고 매년 봄과 가을에 사신을 심양에 보내 조공을 바쳤는데, 봄에 보내는 사신을 춘신사라 하였다. 나덕헌(1573~1640)은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진무 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훈되었다. 1636년 춘신사로서 회답사인 이확과 함께 심양에 가 청 태종이 칭제건원(稱帝建元)하는 의식에서 삼궤구고례(三跪九叩禮)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다. 그러나 귀국 이후 오히려 누명을 쓰고 유배되었다가 풀려났으며, 교동수사(喬桐水使) 겸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지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D-033]() : 고대 북방 민족의 족장(族長) 또는 왕()을 일컫던 말로 가한(可汗), (khan)으로도 불린다. 여기서는 청 태종을 이른다.

[D-034]정명수(鄭命壽) : 평안도의 천민으로 1619년 강홍립의 군대를 따라갔다가 포로가 되자 잔류하여 신임을 얻었다. 병자호란 때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의 통역으로 입국하여 갖은 횡포를 부렸다.

[D-035]패륵(貝勒)과 팔고산(八固山)과 번자(番子) : 패륵은 청() 종실(宗室)의 봉작(封爵)의 하나이다. 청 종실의 봉작은 친왕(親王), 군왕(郡王), 패륵(貝勒), 패자(貝子)의 순서로 되어 있다. 팔고산은 곧 팔기병(八旗兵)을 이른다. 팔기병은 병졸 300인이 하나의 우록(牛彔)을 이루고, 다섯 우록이 하나의 갑라(甲喇)를 이루고, 다섯 갑라가 하나의 고산(固山)을 이루어, 모두 여덟 고산이 된다. 번자는 형사(刑司)에 소속되어 체포와 형장(刑杖)을 맡은 벼슬아치를 이른다.

[D-036]자황포(柘黃袍) : 뽕나무 즙을 물들여 만든 적황색의 도포로, 수당(隋唐) 이래 황제들의 복색(服色)으로 사용되었다.

[D-037]깜짝 놀라고 혐오스러워 : 원문은 駭惡인데, ‘駭愕의 오류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깜짝 놀라로 번역되어야 한다.

[D-038]이튿날 …… 갔다 : 원문은 明日復祀東郊 又擁公等去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明日復擁公等去로 되어 있다.

[D-039]흔고(釁鼓) : 전쟁을 할 때 사람을 죽여 그 피를 북에 바르고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이른다. 여기서는 두 조선 사신을 죽이자는 뜻이다. 운산만첩당집,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祭纛으로 되어 있고, 여한십가문초에는 祀東郊 又釁鼓로 되어 있다.

[D-040]보따리 속 : 원문은 裝中인데,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公裝中으로 되어 있다.

[D-041]아골관(鴉鶻關) : 요령성(遼寧省) 요양현(遼陽縣)에 있는 관문의 이름이다.

[D-042]() : 요령성의 압록강 부근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 일대에 말뚝을 박아 국경 출입을 통제한 시설물을 이른다. 그곳의 책문(柵門)을 통해서만 사신 왕래와 교역이 이루어졌다.

[D-043]떠들썩하게 이야기하기를 : 원문은 讙言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譁言으로 되어 있다.

[D-044]홍명구(洪命耈) : 1596~1637. 인조반정 이후 등용되어, 병자호란 때 평안 감사로서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향해 달려가다가 전사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D-045]말감(末減) : 가벼운 죄에 처하는 것을 이른다.

[D-046]백마산성(白馬山城) : 평안도 의주(義州) 백마산(白馬山)에 있던 성으로, 병자호란 때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지켰던 곳이다.

[D-047]도독(都督) 심세괴(沈世魁) : 명 나라 요동도사(遼東都司) 모문룡(毛文龍)의 군대가 후금의 군대에 쫓긴 끝에 국경을 넘어 평안도 철산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주둔하게 되자, 1623년 명 나라는 후일을 도모하려고 가도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모문룡을 그 도독으로 임명했다. 모문룡이 조정의 명에 따라 요동(遼東)에 출전했다가 실패하고 죽은 뒤, 가도로 도망한 그 잔당 사이에 누차 내분이 일어난 끝에 장사꾼 출신으로 그 딸이 모문룡의 첩이었던 심세괴가 도독이 되었다. 심세괴는 1637년 청 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죽었다.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도독 앞에  자가 더 있다.

[D-048]기복(起復) : 부모의 상중에 벼슬에 나아가는 것으로,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상중에 벼슬하지 않는 관례를 깨고 특별히 조정에 불러 올리는 제도를 이른다.

[D-049]독전어사(督戰御使) …… 임담(林墰) : 독전어사는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파견된 어사로, 병자호란 때 군 통솔을 위해 특별히 설치한 관직이다. 김익희(金益熙 : 1610~1656)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손자로서 후일 대제학까지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황일호(黃一晧 : 1588~1641)는 척화파(斥和派)로서,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재임할 때 명 나라를 도와 청을 치려고 최효일(崔孝一) 등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청 나라 병사에게 피살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김수익(金壽益 : 1600~1673)은 의주 부윤, 병조 참의, 목사(牧使) 등을 지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이후원(李厚源 : 1598~1660)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공신 3등으로 책훈되고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다. 후일 우의정까지 지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임담(1596~1652)은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D-050]아들은 익장(益章) : 원문은 益章인데,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男益章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51]임경업(林慶業) …… 압송되었는데 : 임경업(1594~1646) 1640년 청 나라가 명 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함에 따라 출전했으나 오히려 명 나라 군대와 협력했다. 이 사실이 탄로 나자 청 나라의 압력으로 국내에서 체포되어 청 나라로 압송되던 도중 해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 표착(漂着)한 뒤 등주(登州)에서 명 나라의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 임명되어 병사를 거느렸다. 그러나 청 나라가 마침내 북경을 함락하고 명 나라 조정이 남경(南京)으로 후퇴하자, 임경업은 1645년 명 나라의 항장(降將) 마홍주(馬弘周)에게 속아서 붙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D-052]황명 열황제(皇明烈皇帝) : 명 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장렬제(莊烈帝) 의종(毅宗 : 재위 1627~1644)을 이른다.

[D-053]황손무(黃孫茂) : 1636년 심세괴가 상주한 내용을 본 명 나라 의종(毅宗)이 우리나라를 표창하는 조서를 내리면서 감군어사(監軍御使) 황손무를 가도(椵島)로 파견했으나, 그 이듬해 내분으로 인해 황손무는 도독 심세괴의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D-054]공의 절의 : 원문은 公節義인데,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公等節義로 되어 있다.

[D-055]조선 : 운산만첩당집,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속국(屬國)’으로 되어 있다.

[D-056]어제전운시(御製全韻詩) : 청 고종(淸高宗) 건륭제(乾隆帝)가 지은 것으로, 106()에 맞추어 상평성(上平聲) 15수는 청 나라의 발상(發祥)부터 태조(太祖) · 태종(太宗)의 사적을 다루었고, 하평성(下平聲) 15수는 세조(世祖) · 성조(聖祖) · 세종(世宗)의 사적을 다루었으며, 상성(上聲) · 거성(去聲) · 입성(入聲) 76수는 요() · ()부터 명 나라 최후의 복왕(福王)까지의 사적을 다루었다. 사고전서(四庫全書) 중의 어제시집(御製詩集) 4()  47 ,  48 ,  49 권에 수록되어 있다.

[D-057]조선 …… 틀어졌네 : 원문은 朝鮮使不拜獨乖로 되어 있으나 어제전운시에 실린 것과 차이가 있다. 그 전문은 조선 사신이 있었는데, 절을 아니 하고 뜻이 유독 틀어졌네. 가식적으로 명에 대한 예의를 지켜서, 나를 격분시켜 그 무리를 죽이게 하려는 게지.乃有朝鮮使 不拜志獨乖 知爲假守禮 激我戮其儕라고 되어 있다.

[D-058]태종(太宗) …… 돌려보냈다 : 어제전운시의 실제 주와 차이 난다. 그 전문은 태종이 존호를 받고 나서 뭇 신하들에게 선유(宣諭)하니, 모두 삼궤구고례(三跪九叩禮)를 행했으나 유독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이 절을 하지 않았다. 태종이 유시(諭示)하기를, ‘조선 사신이 무례한 경우를 이루 열거하기 힘들지만, 이는 조선 국왕이 원한을 맺으려는 의도를 품고, 짐이 먼저 분쟁의 빌미를 만들어 그 사신을 죽이게 하여 짐에게 맹약을 저버렸다는 악명을 덮어씌우고자 함일 뿐이다. 짐은 종래 한때의 하찮은 분풀이를 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와 같이 쩨쩨하게 굴어 두 나라는 이미 원수지간이 되었다. 전쟁할 때에도 일이 있어 사람을 보내면 역시 보낸 사자를 즉시 죽이지 않는 법이거늘, 하물며 조회(朝會)하러 온 경우이겠는가? 불문에 부치라!’ 하였다. 곧 그 사신을 돌아가게 하면서 서신으로 조선 국왕을 힐책하고, 다시 그 사신에게 유시하기를, ‘너희 왕이 만약 스스로 죄를 후회할 줄 안다면 응당 자제를 인질로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짐은 즉시 대군을 일으켜 너희의 국경에 닥칠 것이니, 그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였다.太宗旣受尊號 宣諭群臣 皆行三跪九叩禮 惟朝鮮使臣羅德憲李廓不拜 太宗諭曰 朝鮮使臣無禮處 難以枚擧 是皆朝鮮國王有意構怨 欲朕先啓釁端 戮其使臣 加朕以背棄盟誓之名耳 朕從不肯逞一時之小忿 如此瑣屑 卽兩國已成仇敵 戰爭之際 以事遣人 亦無卽戮其來使之理 況朝會乎 其勿問 尋遣其使臣歸 以書詰責朝鮮王 復諭其使臣曰 爾王若自知悔罪 當送子弟爲質 不然 朕卽擧大軍 以臨爾境 雖悔何及乎라고 되어 있다.

[D-059]지금 임금 …… 내렸다 : 정조 2(1778)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가 북경에 체류하던 중 수역(首譯) 이언용(李彦容) 어제전운시 4책을 빌려 와서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귀국 후 서장관 심염조(沈念祖)가 임금에게 보고하여 동지사(冬至使)가 이 책을 구입해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조 3년에 어제전운시의 기록을 근거로 이확과 나덕헌에게 증시(贈諡)하고 정려(旌閭)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나덕헌과 달리 이확은 그의 고향과 자손을 몰라 어명을 중지했다가, 그 이듬해 심염조의 건의에 따라 재차 증시하도록 명했으며, 정조 5년 이확에게 충강(忠剛)이란 시호가 내렸다. 入燕記 下 6 12》 《全州李氏敬寧君派世譜 卷之首 嘉林君派 七世 廓》 《正祖實錄 3 9 3, 4 11 9, 5 11 20

[D-060]악라(鄂羅) …… 토묵(土黙) : 악라는 곧 악라사(鄂羅斯)로 러시아(Russia)의 음역(音譯)이다. 회회(回回)는 회흘(回紇)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위구르(Uighur)족을 이른다. 두이백특(杜爾伯特)은 내몽골 철리목맹(哲里木盟) 4()의 하나로, 청 나라 초기에 두이백특부(杜爾伯特部)를 세우고 흑룡강성(黑龍江省) 용강도(龍江道)의 동남쪽에 자리잡았다. 찰뢰(扎賴)는 찰뢰(扎賚)라고도 하며 내몽골의 찰뢰특부(扎賚特部)를 이른다. 철리목에 통합되었으며 본거지는 거란(契丹) 땅이다. 옹우(翁牛)는 내몽골의 옹우특부(瓮牛特部)로 만리장성의 고북구(古北口) 동북쪽에 거주했다. 오주(烏珠)는 내몽골의 오주목심부(烏珠穆沁部)로 역시 고북구의 동북쪽에 거주했다. 토묵은 내몽골의 토묵특부(土墨特部)로 옛날 고죽국(孤竹國)의 남쪽, 성경(盛京)의 변두리에 거주했다. 淸史稿 卷77 52 地理24 內蒙古

[D-061]죽음을 각오한 용사일레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용사는 제 머리가 잘려 잃게 될 것을 잊지 않는다.勇士不忘喪其元고 하였다.

[D-062]변발에다 붉은 모자 : 모두 만주족의 풍습이다. 청 나라 때 남자의 예모(禮帽)는 붉은 실로 짠 모위(帽緯)로 장식하였다.

[D-063]나의 …… 마찬가지 : 토경(土梗)은 흙으로 빚은 인형으로, 비에 젖으면 무너진다고 하여 하찮은 물건의 비유로 쓰인다. 옹앙(瓮盎)은 곧 옹기로, 흔해 빠져서 역시 하찮은 물건의 비유로 쓰인다.

[D-064]장순(張巡) 허원(許遠) : 장순과 허원은 당() 나라 현종(玄宗) 때의 관리로,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장순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허원은 수양 태수(睢陽太守)로 있으면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안녹산의 군대에 맞섰으나, 성이 포위된 지 몇 개월 만에 구원병도 오지 않고 양식도 떨어져 성은 함락되고 적들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 뒤 낙양으로 압송되어, 그들의 회유에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D-065]소무(蘇武) 장건(張騫) : 소무는 전한 때의 장수로, 무제(武帝) 천한(天漢) 원년(기원전 100)에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들에게 구금되어 회유를 당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기원전 81년 소제(昭帝)가 흉노와 화친을 하자 19년 만에 한 나라로 돌아왔다. 장건은 전한 때의 장수로, 무제 건원(建元) 2(기원전 139)에 월지국(月氏國)으로 사신 가다가 도중에 흉노에게 사로잡혀, 전후 11년 동안 억류를 당하여 그곳에서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았다. 마침내 그곳을 탈출하여 본래의 목적지인 월지국에 갔다가, 한 나라를 떠난 지 13년 만에 돌아왔다.

[D-066]절 올리고 춤췄으니 : 원문 중 拜舞 연상각집에는 抃舞로 되어 있다. 또한 蹈躍 跳躍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跳躍抃舞가 되어, “기뻐 날뛰며 손뼉 치고 춤췄으니로 번역되어야 한다.

[D-067]화산(華山) …… 만든들 : 화산은 중국 오악(五嶽) 중의 서악(西嶽)으로 섬서성(陝西省) 화음현(華陰縣) 남쪽에 있는데, ‘화산지금석(華山之金石)’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금석(金石)이 난다고 한다. 淮南子 地形訓

[D-068]청은 …… 되어 : 명 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이 자결하고, 청 세조(淸世祖) 순치제(順治帝)가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여 북경을 차지한 때부터 쳐서 4대가 된다. 원문의  자가 동문집성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69]하늘 …… 같네 : 논어 자장(子張)에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선생님께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은 하늘을 사다리 타고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고 하였다.

[D-070]시의 …… 물어보소 : 이 부분의 원문이 연상각집에는 手復詳註 孰與慫慂 自述宏度 非爲公寵 胡靳一劉 刻公百年 寔破積疑 撥露覩天 帝口雖詈 筆則斯揚 公所見乖 允爲國光으로 되어 있다.

[D-071]동해 …… 우리나라 : 원문의  자가 여한십가문초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72]춘추의 의리를 지켜 왔네 : 이 부분의 원문이 연상각집에는 一袞一鉞 曰維春秋로 되어 있다.

[D-073]태상시(太常寺) : 봉상시(奉常寺)의 옛 이름으로 제사(祭祀)와 시호(諡號)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D-074]정부 관각 : 정부는 의정부(議政府)를 이르고, 관각은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봉상시에서 삼망(三望 : 세 가지 시호 후보)과 함께 시장(諡狀)을 홍문관에 보내면, 홍문관에서 삼망을 의논한 뒤 봉상시 관원과 다시 의정(議定)하고, 의정부로 넘겨 서경(署經)하는 절차를 거쳐 시호가 정해진다.

[D-075]글자 …… 정하고 : 조선 시대의 시법(諡法)에서 사용하는 글자는 모두 301자로 그 범위 내에서 시호를 고르게 되어 있었다. 세종(世宗) , 주례(周禮)의 시법(諡法)에 나오는 28자와 사기(史記)의 시법에 나오는 194자에다, 의례(儀禮),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을 참조하여 107자를 추가해서 시호로 사용할 수 있게 정했다.

[D-076]작설(綽楔) : 효자(孝子)나 충신(忠臣) 등을 정표(旌表)하기 위하여 문 옆에 세운 대()를 이른다.

[D-077]환골탈태 : 원문은 換脫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78]일통지(一統志) : 청 나라 건륭 29(1764)에 청 고종(淸高宗)의 명에 따라 지어진 지리지(地理志)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를 이른다. 이 책 권421 ‘조선조(朝鮮條)’를 보면, “조선 사신 나덕헌 · 이확이 돌아갈 때 서신을 보냈으나, 조선국왕이 답변을 보내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D-079]그 때문에 …… 뿐이다 : 원문은 故百餘年寥寥無聞耳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자 앞에 今得此銘 庶可以照耀千古라는 내용이 더 있다.

[D-080]공은 장차 어찌되었겠는가 : 원문은 公將奈何乎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公將奈何奈何乎로 되어 있다.

[D-081]이는 …… 주어서 : 원문은 此幸天賦公熊虎之材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此幸 此何幸으로 되어 있다.

[D-082]그때에 …… 선비들이라 : 원문은 其時諸公 孰不斥和 而大抵皆文儒也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其時斥和諸公 大抵皆文儒也로 되어 있다.

[D-083]두려워서 : 원문은 怵然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주공탑명(麈公塔銘)

 

 

주공 스님이 입적(入寂)한 지 6일 만에 적조암(寂照菴)의 동쪽 대()에서 다비(茶毗)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온숙천(溫宿泉) 회나무 아래와 거리가 열 발자국도 안 되었다. 밤이면 거기서 늘 빛이 어른거리는데 벌레 등처럼 파랗기도 하고 고기 비늘처럼 하얗기도 하고 썩은 버드나무처럼 까맣기도 했다.

대비구(大比丘) 현랑(玄朗)이 뭇 중들을 거느리고 다비 장소에 둘러서서 두려운 마음으로 재계를 올리고 마음으로 공덕 쌓기를 다짐했더니, 나흘 밤이 지나서 마침내 스님의 뇌주(腦珠 사리) 세 개를 얻어, 장차 부도(浮圖 사리탑)를 세울 양으로 글과 폐백을 갖추어 나에게 명()을 청해 왔다. 나는 본시 불교의 설을 잘 모르나, 그 청이 너무도 간곡하기에 시험 삼아 다음과 같이 물었다.

 

현랑아, 내 예전에 병이 나서 지황탕(地黃湯)을 마셨는데, 약을 짜서 그릇에 부었더니 가는 거품들이 활짝 퍼져, 황금빛 좁쌀들이나 은빛 별들, 물고기 입에서 뽀글대는 물방울이나 벌집과도 같은 거품에 나의 살과 털이 찍혀, 마치 눈동자에 부처가 깃든 것처럼 각각으로 상()을 나타내고 여여(如如)하게 성()을 머금었지. 열이 식고 거품이 그쳐, 모조리 마셨더니 그릇이 텅 비었더라. 예전에 성성(惺惺)했다 한들, 어느 누가 네 스님이 그랬음을 증명하랴?”

현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로써 아()를 증명하니 저 상()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므로 나는 허허 웃으며,

 

()으로써 심()을 본다면, ()이 몇이나 있다는 건가?”

하고서, 드디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붙였다.

 

구월이라 하늘에서 서리 내리니 / 九月天雨霜

나무들 모두 말라 잎이 졌는데 / 萬樹皆枯落

얼핏 보니 맨 꼭대기 나뭇가지에 / 瞥見上頭枝

과일 하나 벌레 먹은 잎에 가렸네 / 一果隱蠹葉

위는 붉고 아래는 누렇고 퍼런데 / 上丹下黃靑

굼벵이가 반은 먹어 씨가 드러났네 / 核露螬半蝕

뭇 아이들 고개 뒤로 젖히고 서서 / 群童仰面立

손을 모아 다투어 따려고 드네 / 攢手爭欲摘

팔매로는 멀어서 맞히기 어렵고 / 擲礫遠難中

장대를 이어 봤자 높아 안 닿네 / 續竿高未及

갑자기 바람 일어 툭 떨어지니 / 忽被風搖落

온 숲을 뒤져도 얻지 못했네 / 遍林索不得

아이는 나무에 도로 와서 맴돌며 울다 / 兒來繞樹啼

부질없이 까막까치 욕해대누나 / 空詈烏與鵲

나는 저 아이들에 비유하노니 / 我乃比諸兒

네 눈에도 응당 나무가 나타나 보였을 터 / 爾目應生木

쳐다보고 없어진 줄 알았을진대 / 爾旣失之仰

굽어보고 주울 줄은 어찌 모르나 / 不知俯而拾

과일이 떨어지면 필시 땅에 있는 법 / 果落必在地

발 밑에 응당 밟힐 터인데 / 脚底應踐踏

하필이면 허공에서 찾으려 드나 / 何必求諸空

실리란 보존된 씨와 같나니 / 實理猶存核

씨를 일러 인()이라 자()라 하는 건 / 謂核仁與子

낳고 낳아 쉴 줄을 모르는 때문 / 爲生生不息

마음으로 마음을 전할 양이면 / 以心若傳心

주공의 탑을 찾아 증거를 삼게 / 去證麈公塔

 

 

부처의 설법 중 비유품(譬喩品)은 온갖 사물의 모양을 곡진하게 그려 내어 고묘(高妙)함을 더욱더 깨닫게 한다. 이 글이 그와 근사하여, 육제(六諦)를 해탈하고 실상(實相)을 원증(圓證 두루 증명함)하니, 결코 대승(大乘) 이하의 구기(口氣 어조(語調))가 아니다.

 

[C-001]주공탑명(麈公塔銘) : ‘()’가 원문에는 ()’로 되어 있는데, 오자이다. ()는 사슴의 일종이고, ()는 고라니에 속하여 서로 다르나 글자가 비슷해서 혼동하기 쉽다. ()는 사슴보다 몸집이 훨씬 크고 그 꼬리가 움직이는 대로 뭇 사슴들이 따라간다고 해서 사슴 중의 왕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왕중왕(王中王) 주중주(麈中麈)’라 한다. 또한 그 꼬리인 주미(麈尾)는 고승이 설법할 때 번뇌와 어리석음을 물리치는 표지로서 손에 쥐는 불자(拂子)로 쓰이는데 이를 승주(僧麈)라 한다. 이 글은 연암의 젊은 시절 작품으로, 그 시절 연암과 절친했던 김노영(金魯永1747~1797)이 이를 애송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연암의 처조카인 이정리(李正履 : 1783~1843)는 이 글을 불교를 배척하는 작품이라 보았고, 아들 박종채가 이 글을 어느 노승에게 보였더니 그 노승 역시 불교를 배척하는 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4 아울러 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도 이 글은 실존했던 고승의 사리탑에 대한 명()이 아니라, 승주(僧麈)를 의인화(擬人化)한 이름의 가상적인 고승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탑명(塔銘)의 형식을 빌려 불교를 비판한 희작(戱作)이 아닐까 한다.

[D-001]벌레 …… 하고 : 원문은 蟲背之綠也 魚鱗之白也인데, 종북소선에는 魚鱗之白也 蟲背之綠也로 되어 있다.

[D-002]썩은 …… 했다 : 썩은 버드나무는 캄캄할 때 빛이 나므로 이를 도깨비불이라 하여 무서워하였다.

[D-003]대비구(大比丘) : 덕이 높고 나이 많은 비구승을 이른다. 종북소선에는 앞에  자가 더 있다.

[D-004]장차 …… 양으로 : 원문은 將修浮圖인데, 종북소선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5]폐백 : 원문은 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06]나에게 …… 왔다 : 원문은 請銘于余인데, 종북소선에는 磨頂請銘으로 되어 있다.

[D-007]지황탕(地黃湯) : 육미지황탕(六味地黃湯)이라고도 하며, 숙지황 · 구기자 · 산수유 등 6종의 약재를 넣어 만든 탕약(湯藥)으로 폐결핵 등에 효험이 있다.

[D-008]활짝 퍼져 : 원문은 細張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은 앞 구절의 운자인 과 같은 평성 양() 자 운이 아니라 거성 양() 자 운이어서 운이 맞지 않는다.

[D-009]각각으로 …… 머금었지 : ()은 불교에서 주관(主觀)의 인식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삼라만상의 모습을 이르는데, 이는 아직 참모습眞如대로가 아닌 가상(假象)이라 한다. 여여(如如)는 진여와 같은 말이다. ()은 상()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삼라만상의 변치 않는 본질을 이른다. 그러나 상()은 또한 성()을 머금고 있다고 본다.

[D-010]성성(惺惺)했다 한들 : 성성은 선불교에서 참선을 통해 마음이 최고조로 각성되어 있는 상태를 이른다.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 하여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또렷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D-011]()로써 아()를 증명하니 : 여기서 말하는 아()는 불교에서 가아(假我)로 간주하는 육신(肉身)을 갖춘 자아(自我)가 아니라, 진아(眞我)를 이른다. 열반(涅槃)의 경지에 이르면 본질이 변치 않고 진실되며 그 작용이 자재무애(自在無碍)한 아덕(我德)을 갖추게 되는데 이를 진아라고 한다.

[D-012]()으로써 …… 건가 : 불교에서는 관심견성(觀心見性)이라 하여, 자기 마음을 관조해서 그 본성을 밝히고자 한다. 주희(朱熹)는 관심설(觀心說)에서 불교의 학설은 심()으로써 심()을 구하고 심()으로써 심()을 부리니, 입이 제 입을 씹고 눈이 제 눈을 보는 것과 같다면서, 이는 하나인 심()을 둘로 나누고, 주체인 심()을 객체인 물()로 만들며, ()에 대해 명령하는 심()을 물에게 명령을 받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晦庵集 卷67 정도전(鄭道傳)도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이는 별도로 일심(一心)으로써 이 일심(一心)을 본다는 것이니 마음에 어찌 둘이 있으랴?”라고 하면서, 이심관심(以心觀心) 입이 제 입을 씹는 것과 같아, 응당 볼 수 없는 것으로써 본다는 것이니, 이 무슨 말인가?”라고 비판했다. 三峰集 卷9

[D-013]다음과 …… 붙였다 : 원문은 爲係詩曰인데, ()을 지어 붙였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한유(韓愈)가 지은 비지문(碑誌文) 중에도 명왈(銘曰)’ 대신 계왈(系曰)’, ‘시왈(詩曰)’로 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D-014]나는 …… 비유하노니 : 원문의  자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 및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15]과일이 ……  : 원문의 必在地 종북소선에는 應歸土로 되어 있다.

[D-016]실리란 …… 같나니 : 이 부분이 종북소선에는 核存猶自托으로 되어 있다.

[D-017]실리란 …… 때문 : 성리학에서는, 불교가 공허한 이치를 추구하는 데 비해 유교는 진실된 이치實理를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만물을 끊임없이 생성하는 하늘의 도()가 곧 인()이라고 보고, 그러한 인()이 사람의 마음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종종 곡식의 씨앗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연암집 1 ‘이자후의 득남을 축하한 시축의 서문李子厚賀子詩軸序에도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D-018]주공의 …… 삼게 : 병세집에는 그 다음에 地黃湯喩 演而說偈曰이라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여 놓았다. “我服地黃湯 泡騰沫漲 印我顴顙 一泡一我 一沫一吾 大泡大我 小沫小吾 我各有瞳 泡在瞳中 泡中有我 我又有瞳 我試嚬言 一齊蹙眉 我試笑焉 一齊解頤 我試怒焉 一齊搤腕 我試眠焉 一齊闔眼 謂厥塑身 安施堊泥 謂厥繡面 安施鍼絲 謂畫筆描 安施彩色 謂檀木鐫 安施彫刻 謂金銅鑄 安試皷橐 我欲撥泡 欲抱其腰 我欲穿沫 欲撫其髮 斯須器淸 香歇光定 百我千我 了無聲影 咦彼麈公 過去泡沫 爲此碑者 現在泡沫 伊今以往 百千歲月 讀此文者 未來泡沫 匪我暎泡 以泡暎泡 匪我暎沫 以沫暎沫 泡沫暎滅 何歡何怛 그런데 이덕무(李德懋)의 손자 이규경(李奎景)이 지은 시가점등(詩家點燈)에도 주공탑명의 전문을 소개한 다음, 다시 평왈(評曰)”이라 하면서 위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병세집과 몇 자 차이가 있다. 또한 매탕(梅宕 : 이덕무)이 평열(評閱)했다는 종북소선에도 두주(頭註) 余讀麈公塔地黃湯喩 演而說偈曰이라 하면서 역시 위와 같은 글을 싣고 있다. 다만 이 역시 병세집, 시가점등과 글자 및 순서에 사소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위의 글은 연암이 아니라 이덕무의 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시가점등에는 다시 評之又評曰이라 하면서 假佛語 寓儒旨 用筆微而婉 江郞曰 黯然消魂 余斷章取義 以評麈公塔이라 하였는데, 이 역시 종북소선 말미의 평어와 일치하므로, 이덕무의 평어임을 알 수 있다.

[D-019]비유품(譬喩品) : 대승(大乘)의 교법을 설한 법화경(法華經) 28() 중 제 3 품을 이른다. 속세의 중생을 노느라 정신이 팔려 불이 난 집에서 빠져나올 줄 모르는 아이들에 비유한 삼계화택(三界火宅)’의 비유로 유명하다.

[D-020]육제(六諦) : 불교에서 고제(苦諦) · 집제(集諦) · 멸제(滅諦) · 도제(道諦)를 영원히 변치 않는 네 가지 진리 즉 사제(四諦)라고 하며, 여기에 속제(俗諦)와 진제(眞諦)의 이제(二諦)를 합쳐 육제(六諦)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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