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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10권 별집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끝]

연암집 제10권 별집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10권 별집 &n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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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10권 별집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엄화계수일 잡저(罨畫溪蒐逸雜著)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1 열부(烈婦) 이씨(李氏) 정려음기(旌閭陰記)

2 말 머리에 무지개 선 것을 보고 기록하다

3 취하여 운종교(雲從橋)를 거닌 기록

4 주영렴수재기(晝永簾垂齋記)

5 죽오기(竹塢記)

6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

7 사장(士章) 애사(哀辭)

8 정석치(鄭石癡) 제문(祭文)

9 남수(南壽)에게 답함

10 어떤 이에게 보냄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11 족제(族弟) 준원(準源) 에게 보냄

12 영규비(靈圭碑)

13 박 열부(朴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바치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14 이 열부(李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올리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열부(烈婦) 이씨(李氏) 정려음기(旌閭陰記)

 

박군 경유(朴君景兪)의 누이는 김씨의 처인데 지아비를 따라 죽으니 조정에서 일찍이 정려(旌閭)의 은전을 내렸다. 그 뒤 경유가 죽자 그의 아내 이씨가 의()에 따라 처신한 것이 경유의 누이에 비해 더욱 뛰어났다. 그래서 또 그 집에 정문(旌門)을 세우기를 김씨 처의 경우와 같이 하였다.

! 이런 일은 세상에서 드물게 있는 바이거늘 마침내 박씨의 집안에는 저와 같이 용이하니, 또한 어찌 근본한 바가 없이 그러하겠는가? 박군은 나를 종유(從遊)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 그 사람됨이 온유하고 효우(孝友)하며 평소에 소학(小學)으로써 몸을 다스렸다. 다른 사람에 있어서는 혹 마지못해 한숨지으며 하는 일이라도 박군은 날마다 항상 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어린 누이와 젊은 아내가 귀에 젖고 눈에 익어 그 의열(義烈)을 보기를 마치 물 긷고 방아 찧는 일처럼 몸소 할 만하고 술과 음식을 의논하여 마련하는 것같이 여겼으며, 그다지 가혹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로 보지 않고 참으로 보통 남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한 번도 얻기 어려운 것을 그 집안에서는 15년 사이에 두 번이나 보게 된 것이다.

박군은 밀양인(密陽人)으로 자()는 치연(穉然)이며 자호(自號)는 담영(澹寧)이라 한다. 이씨는 학생 윤배(允培)의 따님인데 임인년(1782) 5 18일에 죽으니, 그때 나이 36세였다. 죽은 그 이듬해 정월 21일에 나라에서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D-001]박군 경유(朴君景兪) …… 내렸다 : 연암집 10 박 열부 사장(朴烈婦事狀)에 그 경위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D-002] …… 뛰어났다 : 연암집 10 이 열부 사장(李烈婦事狀)에 그 경위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말 머리에 무지개 선 것을 보고 기록하다

 

 

밤에 봉상촌(鳳翔村)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에 강화(江華)로 들어가는데 5리쯤 가니 하늘이 비로소 밝아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한 점의 구름이나 한 올의 아지랑이도 없더니 해가 겨우 하늘에 한 자쯤 떠오르자 갑자기 검은 구름 한 점이 일어나 까마귀 머리만 하게 해를 가렸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해의 절반을 가려 버려 어두침침해지자, 한스러운 듯 근심스러운듯 얼굴을 찡그리며 편안치 못한 것 같더니, 바깥으로 혜성과 같은 빛줄기를 뿜어 대는데 성난 폭포수처럼 하늘가로 내리쏘았다.

바다 건너 여러 산에는 각각 작은 구름이 나타나 멀리 서로 조응하여 뭉게뭉게 독기를 머금고 간혹 번개가 번쩍여 위용을 떨치며 해 아래서 우르르 꽝꽝 하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사면이 검은빛으로 온통 뒤덮여 혼솔과 틈 하나 없고, 번개가 그 사이로 번쩍하고 나서야 비로소 첩첩이 주름진 구름이 수천 꽃가지 수만 꽃잎을 이루어 마치 옷 가장자리에 선을 덧댄 듯, 꽃잎 가장자리에 무늬가 번진 듯 각각 그 엷고 짙음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둥소리가 찢어질 듯하여 혹시 흑룡(黑龍)이라도 뛰쳐나오지 않나 하였으나, 비는 그다지 사납게 내리지 않았다. 멀리 연안(延安)과 배천(白川) 사이를 바라보니 빗발이 명주필을 드리운 것 같았다.

말을 재촉하여 십 리를 가니 햇빛이 갑자기 뚫고 나와 차츰 밝고 고와지며 아까 보이던 먹구름이 상서로운 구름으로 변하여 오색이 영롱하였다. 말 머리 위로 무슨 기운이 한 길이 넘게 뻗쳐 나 누르꾸름하여 마치 엉긴 기름 같더니, 어느새 갑자기 붉고 푸른 색으로 변하여 하늘로 높이 치솟았는데, 마치 문을 삼아 지나갈 수도 있을 듯했고 다리로 삼아 건널 수도 있을 듯했다. 그것이 처음에는 말 머리에 있어 손으로 만질 수도 있을 것 같더니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멀어져만 갔다. 이윽고 문수산성(文殊山城)에 당도하여 산기슭으로 돌아 나가 강화부(江華府)의 외성(外城)을 바라보니, 강을 누빈 백 리 연안에 하얀 성첩(城堞)이 해에 비치는데 무지개발은 여전히 강 가운데에 꽂혀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취하여 운종교(雲從橋)를 거닌 기록

 

 

7월 열사흗날 밤에 박성언(朴聖彦)이 이성위(李聖緯 이희경(李喜經))와 그의 아우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 원약허(元若虛 원유진(元有鎭)), 여생(呂生), 정생(鄭生), 동자 현룡(見龍)을 데리고 지나는 길에 이무관(李懋官 이덕무)까지 끌고 찾아왔다. 이때 마침 참판(參判) 서원덕(徐元德)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에 성언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 자주 밤 시간을 살피며 입으로는 작별 인사하고 가야겠다고 말하면서도 짐짓 오래도록 눌러앉았다. 좌우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선뜻 먼저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원덕 역시도 갈 뜻이 전혀 보이지 않자 성언이 마침내 여러 사람들을 끌고 함께 나가 버렸다.

한참 후에 동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이 이미 떠났을 터이라 여러 분들이 거리를 산보하다가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려 술을 마시려고 합니다.”

하였다. 원덕이 웃으면서,

 

() 나라 사람이 아닌 자는 쫓아내는구려.”

하고서, 드디어 일어나 서로 손을 잡고 거리로 걸어 나갔다. 성언이 질책하기를,

 

달이 밝아서 어른이 집에 찾아왔는데 술을 마련하여 환대를 아니하고, 유독 귀인(貴人)만 붙들고 이야기하면서 어른을 오래도록 밖에 서 있게 하니 어쩌자는 거요?”

하였으므로, 나의 아둔함을 사과하였다. 성언이 주머니에서 50전을 꺼내어 술을 샀다. 조금 취하자, 운종가(雲從街)로 나가 종각(鐘閣) 아래서 달빛을 밟으며 거닐었다. 이때 종루(鐘樓)의 밤 종소리는 이미 삼경(三更) 사점(四點)이 지나서 달은 더욱 밝고, 사람 그림자는 길이가 모두 열 발이나 늘어져 스스로 돌아봐도 섬뜩하여 두려움이 들었다. 거리에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 어지러이 짖어 대는데, 희고 여윈 큰 맹견 한 마리가 동쪽에서 다가오기에 뭇사람들이 둘러싸고 쓰다듬어 주자, 그 개가 기뻐서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일찍이 들으니 이 큰 맹견은 몽골에서 난다는데 크기가 말만 하고 성질이 사나워서 다루기가 어렵다고 한다. 중국에 들어간 것은 그중에 특별히 작은 종자라 길들이기가 쉽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더욱더 작은 종자라고 하는데 그래도 토종 개에 비하면 월등히 크다. 이 개는 이상한 것을 보아도 잘 짖지 않지만, 그러나 한번 성을 내면 으르렁거리며 위엄을 과시한다. 세간에서는 이를 호백(胡白)이라 부르며, 그중에 가장 작은 것을 발발이犮犮라 부르는데, 그 종자가 중국 운남(雲南)에서 나왔다고 한다. 모두 고깃덩이를 즐기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똥을 먹지 않는다. 일을 시키면 사람의 뜻을 잘 알아차려서 목에다 편지 쪽지를 매어 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반드시 전달하며, 혹 주인을 못 만나면 반드시 그 주인집 물건을 물고 돌아와서 신표(信標)로 삼는다고 한다. 해마다 늘 사행(使行)을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만 대부분 굶어 죽으며, 언제나 홀로 다니고 기를 펴지 못한다. 무관이 취중에 그놈의 자() 호백(豪伯)’이라 지어 주었다. 조금 뒤에 그 개가 어디론지 가 버리고 보이지 않자, 무관이 섭섭히 여겨 동쪽을 향해 서서 호백이!’ 하고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듯이 세 번이나 부르니,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그러자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던 개떼들이 마구 달아나면서 더욱 짖어 댔다.

드디어 현현(玄玄)을 지나는 길에 찾아가 술을 더 마시고 크게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옛날 일을 이야기했다. 당시 정월 보름날 밤에 연옥(蓮玉 유연())이가 이 다리 위에서 춤을 추고 나서 백석(白石 이홍유(李弘儒))의 집에서 차를 마셨는데,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이 장난삼아 거위의 목을 끌고 와 여러 번 돌리면서 종에게 분부하는 듯한 시늉을 하여 웃고 즐겼던 것이다. 지금 하마 6년이 지나서 혜풍은 남으로 금강(錦江)을 유람하고 연옥은 서쪽 관서(關西)로 나갔는데 모두 다 무양(無恙)한지 모르겠다.

다시 수표교(水標橋)에 당도하여 다리 위에 줄지어 앉으니, 달은 바야흐로 서쪽으로 기울어 순수히 붉은빛을 띠고 별빛은 더욱 흔들흔들하며 둥글고 커져서 마치 얼굴 위로 방울방울 떨어질 듯하며, 이슬이 짙게 내려 옷과 갓이 다 젖었다. 흰 구름이 동쪽에서 일어나 옆으로 뻗어 가다 천천히 북쪽으로 옮겨 가니 성() 동쪽에는 청록색이 더욱 짙어졌다. 맹꽁이 소리는 눈 어둡고 귀먹은 원님 앞에 난민(亂民)들이 몰려와서 송사(訟事)하는 것 같고, 매미 소리는 일과를 엄히 지키는 서당에서 시험일에 닥쳐 글을 소리 내어 외우는 것 같으며, 닭 울음소리는 한 선비가 홀로 나서 바른말 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는 것 같았다.

 

 

[C-001]운종교(雲從橋) : 한양의 종로 네거리 종루(鐘樓 : 종각鐘閣) 근처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D-001]박성언(朴聖彦) : 1743~1819. 서자(庶子)였던 박제가(朴齊家)의 적형(嫡兄) 박제도(朴齊道), 성언은 그의 자이다.

[D-002]서원덕(徐元德) : 1738~1802. 서유린(徐有隣)으로, 원덕은 그의 자이다. 문과 급제 후 현달하여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의 관찰사와 형조 · 병조 · 호조 · 이조의 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의 아우 서유방(徐有防)과 함께 약관 시절부터 연암과 절친한 사이였다.

[D-003]() 나라 …… 쫓아내는구려 : 원문은 非秦者逐인데, 이사(李斯)의 간축객서(諫逐客書)에 나오는 말이다. 진 시황(秦始皇)이 객경(客卿) 즉 진 나라 출신이 아닌 관리들을 추방하려 하자 이사가 글을 올려 진 나라 사람이 아닌 자는 떠나게 하고, 객경이 된 자는 추방하는非秦者去 爲客者逐 축객령(逐客令)의 부당함을 지적하여, 추방을 면하고 복직되었다. 史記 卷87 李斯列傳》 《文選 卷39 上書秦始皇 여기서 서유린은 그와 같은 표현을 써서, 일행이 아닌 자신을 따돌리려는 것을 농담 섞어 항의한 것이다.

[D-004]삼경(三更) 사점(四點) : 현대 시각으로 밤 12시 반쯤이다. 3경은 밤 11시에서 다음날 오전 1시까지인데, 1경은 5점으로 1점은 24분이다.

[D-005]서쪽으로 기울어 : 원문은 西隨인데,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西墮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주영렴수재기(晝永簾垂齋記)

 

 

주영렴수재(晝永簾垂齋)는 양군 인수(梁君仁叟)의 초당(草堂)이다. 집은 푸른 벼랑 늙은 소나무 아래 있었다. 모두 여덟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안쪽을 칸으로 막아 깊숙한 방을 만들었으며 창살을 성글게 하여 밝은 마루를 만들었다. 드높이어 층루(層樓)를 만들고, 아늑히 하여 협실(夾室)을 만들었으며, 대 난간으로 두르고 띠풀로 지붕을 이었으며, 바른편은 둥근 창문이요 왼편은 교창(交窓)을 만들었다. 그 몸체는 비록 크잖으나 오밀조밀 갖출 것은 거의 갖추어졌으며 겨울에는 밝고 여름에는 그늘이 졌다. 집 뒤에는 여남은 그루의 배나무가 있고 대 사립 안팎은 모두 묵은 은행나무와 붉은 복숭아나무요, 하얀 돌이 앞에 깔려 있다. 맑은 시냇물이 소리 내며 급히 흐르는데, 먼 샘물을 섬돌 밑으로 끌어들여 네 귀가 번듯한 연못을 만들었다.

양군은 본성이 게을러 들어앉아 있기를 좋아하며, 권태가 오면 문득 주렴을 내리고, 검은 궤() 하나, 거문고 하나, () 하나, 향로 하나, 술병 하나, 다관(茶罐) 하나, 옛 서화축(書畵軸) 하나, 바둑판 하나 사이에 퍼진 듯이 누워 버린다. 매양 자다 일어나서 주렴을 걷고 해가 이른가 늦은가를 내다보면, 섬돌 위에 나무 그늘이 잠깐 사이에 옮겨 가고, 울 밑에 낮닭이 처음 우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궤에 기대어 검을 살펴보고, 혹은 거문고 두어 곡을 타고 술 한 잔을 홀짝거려 스스로 가슴을 트이게 하거나, 혹은 향 피우고 차 달이며, 혹은 서화를 펼쳐 보기도 하고 혹은 옛 기보(碁譜)를 들여다보면서 두어 판 벌여 놓기도 한다. 이내 하품이 밀물이 밀려오듯 나오고 눈시울이 처진 구름처럼 무거워져 다시 또 퍼져 누워 버린다. 손이 와서 문에 들어서면, 주렴이 드리워져 고요하고 낙화가 뜰에 가득하며 처마 끝의 풍경은 저절로 울린다. 주인의 자()를 서너 번 부르고 나서야 일어나 앉는데, 다시 나무 그늘과 처마 그림자를 바라보면 해가 여전히 서산에 걸리지 않았다.

 

 

[D-001]교창(交窓) : 실내를 밝게 하기 위해 설치하는 광창(光窓)의 일종으로, 창살을 효()자 모양으로 짜기 때문에 교창이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죽오기(竹塢記)

 

 

예로부터 대나무를 칭송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시경(詩經) 기욱편(淇奧篇)에서부터 대나무를 노래하고 감탄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이라 칭하여 높이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대나무가 마침내 이 때문에 병들고 말았다. 그렇지만 천하에서 대나무로써 호()를 삼는 자가 그칠 줄을 모르고, 더 나아가 글을 지어 기록까지 하고 있으니, 아무리 채륜(蔡倫)이 종이를 만들고 몽염(蒙恬)이 붓을 만들었다 한들 풍상(風霜)에도 변치 않는 대나무의 지조와 소탈하면서도 고고한 태도를 예찬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지었다는 글들이 모두 다 쓸데없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은 셈이어서, 대나무는 이 때문에 풀이 죽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글 못하는 나조차도 대나무의 덕성(德性)을 칭송하고 대나무의 소리와 색깔을 형용하여 시문을 지은 것이 많은데 다시 또 무슨 글을 짓는단 말인가.

양군 양직(梁君養直)은 강직하고 지절(志節)이 있는 사람이다. 일찍이 스스로 호를 죽오(竹塢)’라 하여 자기 거실에 편액을 걸고 내게 기()를 지어 달라고 청했는데, 아직껏 응해 주지 못한 것은 내가 대나무에 대하여 진실로 난처하게 여기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그대가 그 액호를 바꾸면 글은 당장이라도 지어 줄 수 있다.”

하고서, 그를 위하여 고금의 인물들이 지은 기발하고 운치 있는 이름으로 이를테면 연상각(烟湘閣),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행화춘우림정(杏花春雨林亭), 소엄화계(小罨畵溪), 주영렴수재(晝永簾垂齋), 우금운고루(雨今雲古樓) 등 열이고 백이고 누차 꼽으면서 그더러 스스로 선택하라고 권했으나, 양직은 머리를 흔들며 다 거절하였다. 그러고는 앉으나 누우나 죽오요 잠시 잠깐도 죽오를 떠나지 아니하며, 매양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문득 죽오라 쓰게 하여 벽에 걸곤 하니 벽의 네 모퉁이가 모두 죽오뿐이었다. 향리에서 죽오를 들어 기롱하는 사람 또한 많았지만, 천연덕스레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 채 편안히 받아넘기곤 하였다. 그래서 나에게 글을 청한 것이 지금 하마 십 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천번 꺾이고 백번 눌려도 그 뜻을 바꾸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간절하였다. 심지어는 술까지 대접하며 달래기도 하고 언성을 높여 강요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번번이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면, 분격하여 낯빛을 붉히고 삿대질하며 노려보는데, 눈썹은 개() 자 모양으로 치켜세우고 손가락은 메마른 댓마디가 되며, 꿋꿋하면서도 비쩍 마른 모습이 갑자기 대나무의 형상을 이룬다.

아아! 양직은 어쩌면 진정으로 대나무에 미쳐서 그렇게 극진히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겉모습만 보아도 그의 마음이 기암괴석처럼 울뚝불뚝하고, 그윽한 대나무 숲이 그 마음속에 무성하게 들어차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 나의 글을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어찌 말려야 말 수 있겠는가? 옛사람 중에 이미 대나무를 높여서 군()이라 부른 사람이 있었으니, 그렇다면 양직 같은 이는 백세(百世) 뒤에 차군(此君)의 충신이 될 만하다. 나는 이에 대서특서(大書特書)하여 정표(旌表)하기를, ‘고고하고 정결한 양 처사의 집高孤貞靖梁處士之廬이라 했다.

 

 

[D-001]()이라 …… 있었으니 : 대나무를 차군(此君)이라 한다. 왕희지(王羲之)가 대나무를 몹시 사랑하여, 단 하루도 차군(此君)’이 없으면 안 된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80 王羲之傳 소식(蘇軾)의 묵군당기(墨君堂記) 유독 왕희지가 대나무를 군()이라 하였으니, 천하 사람들이 이를 따라 군()으로 삼으면서도 군말이 없었다.”고 하였다.

[D-002]양군 양직(梁君養直) : 양호맹(梁浩孟)을 말한다. 그의 자가 양직이고, 호가 죽오였다. 양호맹은 개성의 부유한 향반(鄕班)으로, 연암이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이거하면서 개성에 잠시 머물 때 그의 별장에 묵은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교분을 맺고 연암의 문하를 출입했다.

[D-003]()  : 대 줄기를 상형(象形)한 글자로서, 대를 헤아리는 단위로도 쓰인다. 또한 동양화에서 죽엽(竹葉)을 개() 자 모양으로 그린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

 

 

무릇 꽃이 피고 지는 것은 모두 비바람에서 연유한다. 그렇다면 비바람은 바로 꽃의 조맹(趙孟)이라 할 것이다. 필운동(弼雲洞)에서 살구꽃을 구경할 때는 어찌 이 골짜기의 복사꽃이 열흘을 넘지 않아서 필 줄을 알았겠는가. 필운동에 놀던 사람들이 모두 다 이 골짜기로 왔으니, 비하자면 위기후(魏其侯)의 빈객(賓客)들이 무안후(武安侯)를 섬기자고 떠난 것과 같다. 어찌 나면서부터 고귀한 대접을 받는 복사꽃에 한()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몽득(劉夢得)의 현도관(玄都觀)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기쁨과 성냄과 슬픔과 즐거움의 감정이 발()하지 않은 것을 ()’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라 이르나니, ‘란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하고 자욱하며 성대하게 유행하여, 온 누리가 따뜻한 햇빛을 머금어 한 번의 숨도 끊어지지 않고 틈이 생길 만한 한 번의 모자람도 없는 것이다. 지금 이 골짜기로 와 보니 충만하고 성대하여 중화(中和)의 기운이 무성하다. 한 나무도 복사 아닌 것이 없고 한 가지도 꽃이 피지 않은 것이 없어, 온후하면서도 빼어나게 환해서 나도 모르는 새 마음이 가라앉고 기()가 평온해지니, 평소의 편벽된 성품이 어찌 이에 이르러 누그러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경일(高景逸)의 우정(郵亭)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저 언덕 위에서 사람들이 무리 지어 노래하고 떼 지어 웃고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술 취한 사람이 통곡하며 말끝마다 제 어미를 불러 대고 있었다. 구경꾼이 담장을 두르듯 모여들었으나, 얼굴에는 부끄러운 빛 하나 없고 거듭 흐느끼는 소리의 억양이 모두 다 절주(節奏)에 들어맞았다. 이는 그의 마음이 우는 데 전념하여 자연히 음률에 들어맞은 것이다. 만약 취한 사람이 복사꽃을 보고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런다 해도 아닐 것이요, 또 이는 계절과 사물에 감촉되어 저절로 슬픔이 일어났다 해도 아닐 것이요, 또 효자가 어머니를 생각하여 어디를 가도 그렇게 된다고 해도 역시 아닐 것이다. 이는 곧 구경하는 사람의 억측일 뿐이요, 취한 사람의 진정은 아니니, 모름지기 취한 사람에게 무슨 일로 통곡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아난(阿難)이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미소를 지은 것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날 경부(敬夫)가 특히 많이 취하여 사언(士彦)의 나귀를 거꾸로 타고 소나무 사이로 어지러이 달렸고, 일여(逸如)의 무리는 좌우에서 소리치고 둘러싸서 웃고 즐겼으며, 무관(懋官 이덕무)과 혜보(惠甫 유득공) 또한 크게 취하여 너털웃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가위 실컷 마시고 크게 취했다고 하겠으니 즐거움이 또한 극에 달했다. 그러나 해가 저물자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사람마다 돌아갈 길을 재촉하는데, 한 사람도 질탕하게 복사꽃 밑에서 머물러 자는 이가 없었으니, , 슬프도다! 어부가 나루터를 찾지 못한 것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관도도인(觀桃道人)이 마침내 게어(偈語)를 지었노라.

 

복숭아꽃 빛깔을 내 처음 보니 / 我見桃花色

발끈히 성낸 모습 생동하는 듯 / 勃然如有神

복숭아꽃도 역시 향기가 있어 / 亦有桃花香

바람이 불면 사람 향해 뿜어 대네 / 臨風噴射人

꽃망울은 팥알만 한 불상 같고 / 菩蕾如豆佛

뒤집힌 잎사귀는 느슨해진 활 같네 / 反葉學弨弓

향기와 빛깔 모두 형체에 덧붙은 것일 뿐 / 香色皆附質

생명력은 도로 공()을 따라 사라지네 / 生意還從空

 원문 빠짐  / □□□□□

 원문 빠짐  / □□□□□

투기 않고 앙탈도 부리잖으면 / 不妬亦不嗔

()의 의미를 결코 모르고말고 / 定不識情字

 

 

[C-001]도화동(桃花洞) : 한양의 북악(北岳) 아래에 있었다. 복숭아나무가 많으므로 도화동이라 했다. 청헌(淸軒) 문성(文晟)이 이 동리에 살았으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옛 집터도 있었다. 漢京識略 卷2 名勝

[D-001]조맹(趙孟) : 조맹은 춘추(春秋) 시대 진() 나라 권신(權臣)인 조돈(趙盾)과 그 직계 후손들을 말한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조맹이 귀하게 해 준 것은 조맹이 천하게 할 수 있다.趙孟之所貴 趙孟能賤之에서 나온 말로, 비바람이 꽃을 피게 할 수도 있고 떨어지게 할 수도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D-002]위기후(魏其侯) …… 같다 : () 나라 무제(武帝) 때에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의 권세가 약해지고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의 권세가 강해지자 권세를 좇는 사람들이 모두 무안후에게 가서 붙었다. 이 글에서 위기후는 살구꽃에 해당하고, 무안후는 복사꽃에 해당한다. 史記 卷107 魏其武安侯列傳

[D-003]유몽득(劉夢得)의 현도관(玄都觀) : 몽득은 당() 나라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자()이고, 현도관은 장안(長安)에 있던 도교사원道觀이다. 유우석의 꽃구경하는 군자들에게 장난삼아 지어 주다戲贈看花諸君子라는 시에서 현도관 안의 복사나무 천 그루, 모두 내가 떠난 후에 심은 것이로세.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라고 한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劉賓客文集 卷24

[D-004]기쁨과 …… 이르나니 : 중용장구(中庸章句)  1 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D-005]고경일(高景逸)의 우정(郵亭) : 경일은 명() 나라 때의 학자요 정치가이며 동림당(東林黨)의 영수였던 고반룡(高攀龍 : 1562~1626)의 호이다. 우정(郵亭)의 복사꽃을 노래한 그의 시가 있는 듯하다.

[D-006]아난(阿難) ……  : 미상(未詳)이다. 석가의 염화시중(拈花示衆)에 가섭(迦葉)이 홀로 파안미소(破顔微笑)한 고사와 혼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D-007]일여(逸如) : 김사희(金思羲)의 자이다. 김사희는 호를 이아탕주인(爾雅宕主人)이라 하며, 진사 급제하였다. 이덕무와 친하여 그가 만든 윤회매(輪回梅)를 사 주었다고 한다. 靑莊館全書 卷63 輪回梅十箋 附詩 炯菴

[D-008]실컷 …… 취했다 : 원문의 劇飮 極飮과 같다. 구양수(歐陽脩)의 석비연시집서(釋秘演詩集序)에 비연(秘演)이 석만경(石曼卿)과 절친하여 실컷 마시고 크게 취하게 되면 노래 부르고 시를 읊조리며 웃고 소리치는 것으로 제 마음에 맞는 천하의 즐거움으로 삼았으니 이 얼마나 씩씩한가.當其極飮大醉 歌吟笑呼 以適天下之樂 何其壯也라 하였다.

[D-009]어부가 ……  :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 나라 때 무릉(武陵) 출신의 한 어부가 복숭아나무 숲을 지나 수원(水源)이 다하는 곳에 있는 어느 산속의 동굴로 들어갔다가 진() 나라 때 피난 왔다는 사람들의 후손이 모여 사는 별세상을 만났으나, 일단 그곳을 나온 뒤 다시는 그리로 들어가는 나루터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사장(士章) 애사(哀辭)

 

 

사장(士章)이 죽어 염을 마친 뒤에야 나는 비로소 그의 방에서 곡을 하였다. 그림을 벽에서 떼어 내고 병풍과 장자(障子)를 치우고 서책(書冊)을 옮겼으며, 집기와 감상품 따위를 바깥 마루에다 흩어 놓았고, 방 한가운데에 머리를 동으로 둔 채 얇은 이불로 덮어 놓아, 마치 거문고를 집에 넣어 금상(琴牀) 위에 둔 것 같았다. 쓰다듬으며 통곡했더니 손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울컥 싫은 마음이 나서 방문을 닫고 나왔다. 뜰에는 왁자지껄하면서 뚝딱뚝딱 널을 짜고 이음매에 옻을 칠하니, 장차 우리 사장을 가두어 두려는 것이었다. 그의 벗 함원(咸原) 어경국(魚景國)과 풍산(豐山) 홍숙도(洪叔道)의 이름이 조문객 명부에 있었다. 문설주를 잡고 엎디어 울고 있는 그들에게 두 분은 그리도 애통하시오?” 하고 물었더니, “너무도 애통하오이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호곡하기도 전에 눈물 콧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아! 사장은 명문가의 자제로 용모가 아름다웠다. 일찍이 필운대(弼雲臺)에서 꽃구경할 적에 그때는 바야흐로 석양이라 언덕 위에 말을 세우고 부채를 들어 해를 가리고 있었더니 사람마다 얼굴을 돌려 돌아보지 않는 자가 없었다. ()는 전우산(錢虞山 전겸익(錢謙益))을 본받고 글씨는 미남궁(米南宮 미불(米芾))을 배웠으며, 그가 좋아하는 것은 보검(寶劍)인데 그 값이 왕왕 백금(百金)이나 되는 것도 있었다.

무릇 공작새가 먼지를 피하는 것과 화포(火布)가 때를 씻어 내는 것과 백지(白芷)와 백출(白朮)이 땀을 그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천성이라 하겠고, 원앙새나 금계(錦鷄)가 물에 섰는 것은 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사랑한 때문이라 하겠다. 당시의 노래 잘 부르는 자들을 좋아하여, 한밤중에 가야금을 타면서 매양 그들의 신성(新聲)을 변주(變奏)하는데 가락이 느릿느릿하게 변하여 처량하고 슬픈 회포를 드러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각혈병을 앓은 지 두어 달 만에 죽으면서 뱃속에 아들을 남겼다. 그 선세(先世)는 나와 조상이 같다.

애사(哀辭)는 다음과 같다.

 

나는 매양 모르겠네, 소리란 똑같이 입에서 나오는데, 즐거우면 어째서 웃음이 되고 슬프면 어째서 울음이 되는지. 어쩌면 웃고 우는 이 두 가지는 억지로는 되는 게 아니고 감정이 극에 달해야 우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모르겠네, 이른바 정이란 것이 어떤 모양이관대 생각만 하면 내 코 끝을 시리게 하는지. 또한 모르겠네, 눈물이란 무슨 물이관대 울기만 하면 눈에서 나오는지.

아아, 우는 것을 남이 가르쳐서 하기로 한다면 나는 의당 부끄럼에 겨워 소리도 내지 못할 것이다. 내 이제사 알았노라, 이른바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란 배워서 될 수 없다는 것을.

 

 

[D-001]사장(士章) : 박상한(朴相漢 : 1742~1767)의 자이다. 그의 조부는 이조 판서를 지낸 박사수(朴師洙)이고, 부친은 박만원(朴萬源), 장인은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이다. 그의 집안과 연암의 집안은 야천(冶川) 박소(朴紹) 이후 갈라져, 박상한은 야천의 9대손이 되고, 연암은 8대손이 된다. 김윤조의 「《幷世集 所載 연암 작품의 검토(安東漢文學論集6, 1997) 참고.

[D-002]어경국(魚景國) : 경국(景國)은 어용빈(魚用賓 : 1737~1781)의 자이다. 함원(咸原)은 곧 함종(咸從)으로, 함종 어씨 집안과 반남 박씨 집안은 가까운 인척간이었다. 어경국은 어유봉(魚有鳳)의 손자로, 연암의 고모부인 어용림(魚用霖)의 동생이다. 김윤조의 幷世集 所載 연암 작품의 검토(安東漢文學論集6, 1997) 참고.

[D-003]홍숙도(洪叔道) : 숙도(叔道)는 홍낙임(洪樂任 : 1741~1801)의 자이다. 그는 홍봉한(洪鳳漢)의 아들로, 어용빈과 절친한 사이였다. 김윤조의 幷世集 所載 연암 작품의 검토(安東漢文學論集6, 1997) 참고.

[D-004]두 분은 …… 하였다 : 논어 선진(先進) 안연(顔淵)이 죽자 공자가 곡하며 너무도 애통해하니, 따라간 제자가 선생님께서 너무도 애통해하십니다.’ 하였다.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는 대목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D-005]사장(士章)이 죽어 …… 아름다웠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缺百六字로 되어 있는데, 윤광심(尹光心) 병세집(幷世集)에 의거하여 보충 · 번역하였다. 단 보충된 원문은 모두 126자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士章歿 旣殮 余始哭于其室 畵刊于壁 撤屛捲障 遷其書冊 器什玩好 散于外廳 中霤東首 覆以涼衾 若室琴而床者 憮以慟 黏手津津 心慨然惡之 扃戶而出 中庭薨薨 約之丁丁 陳柒其坎 將以閉吾士章也 其友咸原魚景國 豊山洪叔道 名在弔簿 問其持戶伏而啼者曰 二子慟歟 曰 慟矣 泗先其咷 嗟乎 士章名家子 美姿儀

[D-006]화포(火布) : 화완포(火浣布)라고도 하며 지금의 석면(石綿)에 해당한다. 화포는 불 속에다 집어넣어 때를 없앤다고 한다. 列子 湯問

[D-007]백지(白芷)와 백출(白朮) : 백지는 우리말로 구릿대, 백출은 흰삽주라고 하며, 이것으로써 온분(溫粉)을 만들어 몸에 뿌리면 땀 나는 것이 멈춘다고 한다. 東醫寶鑑 止汗法 溫粉

[D-008]신성(新聲) : 당시 한양의 가객(歌客)들은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빠른 가락의 시조창(時調唱)을 즐겨 불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정석치(鄭石癡) 제문(祭文)

 

 

살아 있는 석치(石癡)라면 함께 모여서 곡을 할 수도 있고, 함께 모여서 조문할 수도 있고, 함께 모여서 욕을 할 수도 있고, 함께 모여서 웃을 수도 있고, 여러 섬의 술을 마실 수도 있어 서로 벌거벗은 몸으로 치고받고 하면서 꼭지가 돌도록 크게 취하여 너니 내니도 잊어버리다가, 마구 토하고 머리가 짜개지며 위가 뒤집어지고 어찔어찔하여 거의 죽게 되어서야 그만둘 터인데, 지금 석치는 참말로 죽었구나!

석치가 죽자 그 시신을 빙 둘러싸고 곡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석치의 처첩과 형제 자손 친척들이니, 함께 모여서 곡을 하는 사람들이 진실로 적지 않다. 또한 손을 잡고 위로하기를,

 

덕문(德門 남의 집안을 높여 부르는 말)이 불행하여 철인(哲人)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하면, 그 형제와 자손들이 절하고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하기를,

 

제 집안이 흉한 화를 만났습니다.”

하고, 그 붕우들마다 서로 더불어 탄식하며,

 

이 사람은 확실히 얻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니, 함께 모여서 조문하는 사람들도 진실로 적지 않다.

한편 석치와 원한이 있는 자들은 석치더러 염병 걸려 뒈지라고 심하게 욕을 했지만, 석치가 죽었으니 욕하던 자들의 원한도 이미 갚아진 셈이다. 죄벌로는 죽음보다 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에는 진실로 이 세상을 꿈으로 여기고 인간 세상에서 유희(遊戲)하는 자가 있을 터이니, 석치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진실로 한바탕 웃어젖히면서 본래 상태로 돌아갔다 여겨서, 입에 머금은 밥알이 나는 벌떼같이 튀어나오고 썩은 나무가 꺾어지듯 갓끈이 끊어질 것이다.

석치가 참말로 죽었으니 귓바퀴가 이미 뭉그러지고 눈망울이 이미 썩어서,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이며, 젯술을 따라서 땅에 부으니 참으로 마시지도 취하지도 못할 것이다. 평소에 석치와 서로 어울리던 술꾼들도 참말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파하고 떠날 것이며, 진실로 장차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파하고 가서는 자기네들끼리 서로 모여 크게 한잔할 것이다.

제문을 지어서 읽어 가로되,

 원문 빠짐 

 

 

[D-001]석치(石癡) : 정철조(鄭喆祚)의 호이다. 정철조는 정조 5(1781)에 죽었다.

[D-002]철인(哲人) : 죽은 사람을 높여 부른 말이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공자가 죽기 얼마 전에 태산이 무너지려는가? 대들보가 쓰러지려는가? 철인이 병들려는가?哲人其萎乎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남수(南壽)에게 답함

 

 

사흘 낮을 이어 비가 내리니 가련하게도 필운동(弼雲洞)의 번성하던 살구꽃이 다 떨어져 붉은 진흙으로 변하고 말았네. 진작 이렇게 될 줄 알았던들, 왜 서로 주선하여 하루 동안의 심심풀이를 서둘지 않았겠는가? 긴긴날 무료히 앉아 홀로 쌍륙(雙六)을 즐기자니, 바른손은 갑()이 되고 왼손은 을()이 되어, ()를 부르고 백()을 부르는 사이에 그래도 피아(彼我)의 구분이 있어 승부에 마음을 쏟게 되고 번갈아 가며 적수가 되니, 나도 정말 모를 일이지, 내가 나의 두 손에 대하여도 역시 편애하는 바가 있단 말인가? 이 두 손이 이미 저것과 이것으로 나뉘어졌다면 어엿한 일물(一物)이라 이를 수 있으며 나는 그들에 대해 또한 조물주라 이를 수 있는데, 오히려 사정(私情)을 이기지 못하고 편들거나 억누르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어저께 비에 살구꽃이 비록 시들어 떨어졌지만 복사꽃은 한창 어여쁘니, 나는 또 모를 일이지, 저 위대한 조물주가 복사꽃을 편들고 살구꽃을 억누른 것 또한 저들에게 사정(私情)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문득 보니 발 곁에서 제비가 지저귀는데, 이른바 회여지지 지지위지지(誨汝知之 知之爲知之)’라 하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네가 글 읽기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나 바둑이나 장기도 있지 않느냐? 그나마 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라 하였느니.”

그랬네. 내 나이 사십이 못 되었는데 벌써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그 기력과 태도가 하마 노인 같아, 제비 손님과 장난치며 웃으니, 이것이 노인의 소일하는 비결일세.

이때에 갑자기 그대의 서찰이 내 앞에 떨어져 나의 그리운 마음을 충분히 위안해 주기는 하였으나, 자줏빛 첩()에 쓴 부드러운 필치는 너무도 문곡(文谷)과 흡사하여 우아한 점은 있지만 풍골(風骨 웅건한 기상)이 전혀 없네그려. 이는 용곡(龍谷) 윤 상서(尹尙書)가 비록 진신(搢紳)의 모범은 될지언정 결국은 대가(大家)의 필법은 아닌 것과 같으니, 이 점만은 불가불 알아야 할 것이네.

정존와기(靜存窩記)는 그 글을 찾으러 오겠다는 말을 지금 읽고서야 비로소 깨달았으니, 평소 남에게 너무 쉽게 승낙하기 때문에 이런 독촉을 받게 되는 것이라 자못 후회가 되고 부끄럽군. 그러나 지금 이미 유념해 두었으니 삼가 차분하게 만들어 보겠으나, 다만 그 더디고 빠름은 미리 헤아릴 수 없네. 불선(不宣).

 

 

[C-001]남수(南壽) : 박남수(朴南壽 : 1758~1787)를 말한다. 그는 자가 산여(山如), 진사 급제 후 대과에는 누차 낙방하여 불우하게 지냈다. 연암의 증조인 박태두(朴泰斗) 이후 갈라진 동족간으로, 연암의 족손(族孫)이 된다. 박남수는 남공철(南公轍)과 절친한 사이였다.

[D-001]회여지지 지지위지지(誨汝知之 知之爲知之) : 논어(論語) 위정(爲政)에서 공자(孔子)가 자로(子路)에게 말하기를, “너에게 아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니라.誨汝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하였는데, 원문의 음이 제비의 지저귀는 소리와 비슷하다 하여 제비를 묘사할 때 자주 쓰인다.

[D-002]바둑이나 …… 낫겠지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하루 종일 배불리 먹고 아무 마음도 쓰지 않고 지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바둑이나 장기도 있지 않느냐? 이것이라도 하는 것이 그나마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D-003]문곡(文谷) : 김수항(金壽恒 : 1629~1689)의 호이다. 김수항은 숙종(肅宗) 때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의 영수로서, 전서(篆書)와 해서(楷書) · 초서(草書)에 두루 능하였다고 한다.

[D-004]윤 상서(尹尙書) : 판서를 지낸 윤급(尹汲 : 1697~1770)을 가리킨다. 그는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에 대해 용기 있게 반대하여 자주 파직 · 좌천되었으므로 직신(直臣)으로 명망이 매우 높았다. 필법이 정려(精麗)하여 당시 이름난 고관 대신들의 비갈(碑碣)을 많이 썼으며, 사람들이 그의 편지를 얻으면 글씨를 다투어 모방하여 그런 글씨를 윤상서체(尹尙書體)’라 불렀다고 한다. 槿域書畵徵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어떤 이에게 보냄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심한 더위 속에 여러분들은 여전히 건강하게 지내는지?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은 근자에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마음에 걸리어 더욱 잊혀지지 않네. 중존(仲存 이재성(李在誠))과는 가끔 서로 만나 술이라도 마실 수 있겠지만, 백선(伯善)은 청교(靑橋)를 떠나고 성위(聖緯 이희경(李喜經))도 이동(泥洞 현재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없으니 이와 같이 긴긴날에 무얼로 소일하며 지내는지 모르겠네.

재선(在先 박제가(朴齊家))은 듣자니 이미 벼슬을 그만두었다는데, 집에 돌아온 뒤 몇 번이나 서로 만났는가? 그가 이미 조강지처를 잃고 또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 같은 훌륭한 벗을 잃어, 이승에서 오래도록 외톨이로 쓸쓸하게 지내게 되었으니, 그의 얼굴과 말은 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네. 그 또한 천지간에 의지가지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고말고.

아아, 슬프도다! 지기(知己)를 잃은 슬픔이 아내 잃은 슬픔보다 심하다고 논한 적이 있었지. 아내를 잃은 자는 그래도 두 번 세 번 장가라도 들 수 있고, 서너 차례 첩을 들여도 안 될 것이 없네. 마치 의복이 터지고 찢어지면 꿰매고 때우는 것과 같고, 집기가 깨지고 이지러지면 새것으로 다시 바꾸는 것과 같네. 때에 따라서는 후처(後妻)가 전처(前妻)보다 나을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나는 비록 늙었지만 상대는 새파랗게 젊어서 신혼의 즐거움이 초혼과 재혼 사이에 차이가 없을 수도 있네. 하지만 지기를 잃은 쓰라림에 이르러서는 그렇지가 않지. 내가 다행히 눈을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보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귀를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듣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입을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나의 맛을 함께하며, 내가 다행히 코를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맡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마음을 지녔지만 장차 뉘와 더불어 나의 지혜와 영각(靈覺)을 함께한단 말인가?

종자기(鍾子期)가 세상을 떠났으니, 백아(伯牙)가 이 석 자의 오동나무 고목을 끌어안고 장차 뉘를 향하여 타며 장차 뉘로 하여금 듣게 한단 말인가? 그 형세로 말하자면 부득불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단번에 다섯 줄을 긁어 대어 그 소리가 쟁그르르 하고 났을 걸세. 그렇게 하여 줄을 자르고 끊고 부딪고 깨고 부수고 밟아서 모조리 아궁이에 밀어 넣고 단번에 불태워 버린 연후에야 마음이 후련하였을 것이네. 그리고 제 자신과 이렇게 문답했겠지.

 

네 속이 시원하냐?”

시원하고말고.”

울고 싶으냐?”

울고 싶고말고.”

그러자 울음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하며, 눈물이 솟아나 옷깃 앞에 마치 화제(火齊)나 슬슬(瑟瑟)처럼 떨어졌을 것이네. 눈물을 드리운 채 눈을 들어 바라보노라면, 빈 산에는 사람 하나 없는데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절로 피어 있네.

네가 백아를 보았느냐고 물을 테지. , 보았고말고!

 

 

[C-001]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 것이다 : 연암은 정조 16(1792) 음력 1월에 안의에 부임하여 정조 20(1796) 2월까지 현감으로 재직하였다. 글 중에 이덕무(李德懋)가 사망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음을 보면, 1793년 여름 무렵에 씌어진 편지로 짐작된다.

[D-001]청교(靑橋) : 한양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쌍리동(雙里洞)의 개울물이 북쪽으로 흘러 이 다리를 지나 태평교와 합친다고 하였다. 漢京識略 卷2 橋梁

[D-002]영각(靈覺) : 불교 용어로,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다는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본성을 말한다.

[D-003]종자기(鍾子期) : 중국 춘추 시대 초() 나라 사람으로 음악에 정통했다는 인물이다. 거문고 명수인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연주하였더니, 종자기가 이를 듣고 백아의 뜻이 고산유수(高山流水)에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이 세상에 자신의 음악을 이해할 사람知音이 없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줄을 끊고 거문고를 부수어 버린 뒤 종신토록 거문고를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呂氏春秋 本味》 《列子 湯問

[D-004]울음소리가 …… 듯하며 :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증자(曾子)가 위() 나라에 있을 때 몹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시경의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했다.聲滿天地 若出金石고 하였다.

[D-005]화제(火齊)나 슬슬(瑟瑟) : 모두 구슬 모양으로 된 보석의 일종이다.

[D-006]빈 산에는 …… 피어 있네 : 원문은 空山無人 水流花開, 소식(蘇軾)의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에 나오는 구절이다. 연암은 이 구절을 빌려, 고산유수(高山流水)의 뜻을 표현했던 자신의 음악을 알아줄 이가 이제는 없음을 서글퍼한 백아의 심경을 나타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족제(族弟) 준원(準源) 에게 보냄

 

 

인산(因山)이 끝나고 왕께서 영원히 떠나셨으니, 멀리 운향(雲鄕)을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리고 길이 부르짖은들 어느 곳에 미치리오.

깊은 겨울 모진 추위에 대감의 기거(起居)는 두루 좋으신지요?

돌아가신 형님의 유집(遺集)은 교정된 본()으로 모두 몇 권이나 되는지요? 말세의 풍속이 명예만을 제일로 삼고 덕을 알아보는 자는 드물지요. 이는 아마도 형님께서 몸가짐을 나직이 하였으되 뜻은 고상하고, 겉모습은 여위었지만 속마음은 여유가 있었으며, 은거하면서도 친한 이를 기피하지 않아 남들이 은거하는 줄을 알지 못한 때문일 것이오. 유명해져도 선비의 본분을 벗어나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소. 또 처지가 이처럼 가까운데도 멀리 떠나려는 마음은 돌이킬 수가 없었고, ()가 형통하려는 때를 만났는데도 고생을 마다 않는 굳은 절개를 굽히게 하기 어려웠으니, 이 어찌 홀로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굳건하여 그 뜻이 뽑히지 않는 그런 인물이 아니겠소. 옛 현인 중에서 찾아봐도 실로 더불어 짝할 이 드문지라, 비록 그 명성과 지위가 충분하지 못하고 출사(出仕)와 은거가 똑같지는 않지만, 민풍(民風)을 세워 세상을 선도하고 학설을 세워 후세에 남기고자 한 점에 있어서는 미상불 동일하다 아니 할 수 없소이다. 그 공이 어찌 다만 사문(斯文 유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데에 그칠 뿐이리요.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과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 두 선조를 보좌하고 우리 종중을 더욱 튼튼히 하리라 믿소.

지난번 영남의 고을에 있을 적에 화양동(華陽洞) 선묘(先墓)에 제사 지낼 때 축문(祝文)을 쓰는 일로 장문의 편지를 나에게 내려 주신 일이 있었는데, 그 편지가 유집 가운데 수록되었는지 모르겠소. 그때 답서를 올리면서 부득불 낱낱이 들어 실정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에 아울러 등초(謄抄)하여 보내니, 부디 원서(原書)의 아래에다 붙이되 글자 한 자를 낮추어 기록함이 어떻겠소?

족종(族從 연암을 가리킴)은 노병이 날로 심한데도 다시 산으로 바다로 헤매면서 기꺼이 밥이나 탐하는 늙은이가 되었으니, 이거야말로 무슨 심보인지요? 고을의 폐단이나 백성의 고질이 모두 고치기 어려운 형편인데, 바람마저 매우 달라 나무를 뽑고 기왓장을 날리곤 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며, 고래나 악어의 울부짖음이 바로 베개맡에 들린다오. 돌이켜 고향 집이 생각나도 수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가로막고 있지요. 대저 이곳은 한때의 구경꾼들이 지팡이 짚고 나막신 신고 명승지로 찾을 만한 땅은 될 수 있지만, 노경에 노닐면서 몸을 보양할 곳은 전혀 못 되지요. 더구나 하인 하나도 데리고 있지 않고 중처럼 외로이 살고 있는 신세이리요!

이해도 저물어 가는데 그리움으로 울적한 마음을 소폭의 편지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어 이만 줄이오.

 

 

[C-001]족제(族弟)에게 보냄 : 이 편지는 1800년 음력 9월에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임명된 연암이 연말에 쓴 것으로 보인다.

[D-001]인산(因山) …… 떠나셨으니 : 순조(純祖) 즉위년(1800) 11월에 거행된 정조(正祖)의 장례를 가리킨다. 원문은 珠邱事竣 弓劍永悶인데, ‘주구(珠邱)’는 순() 임금의 무덤에 새가 날아와 구슬을 떨어뜨린 것이 쌓여서 언덕을 이루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능침(陵寢)을 뜻한다. 拾遺記 虞舜 그리고 궁검(弓劍)’은 각각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지상에 떨어뜨렸다는 활과, 텅 빈 그의 무덤 속 관에 남아 있었다는 칼을 가리킨다. 史記 卷28 封禪書》 《列仙傳

[D-002]운향(雲鄕) : 운향은 백운향(白雲鄕) 또는 제향(帝鄕)과 같은 말로 선계(仙界)를 가리킨다. 장자 천지(天地)에 성인(聖人) 천세(千歲)토록 살다가 인간 세상이 싫어지면 떠나서 신선이 되어 올라가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에 이른다.千歲厭世 去而上僊 乘彼白雲 至於帝鄕고 하였다.

[D-003]돌아가신 형님의 유집(遺集) : 박준원의 형인 박윤원(朴胤源 : 1734~1799)의 문집 근재집(近齋集)을 가리킨다. 근재집은 이후 1807년에 박준원의 아들인 박종경(朴宗慶)에 의해 전사자(全史字)로 간행되었다.

[D-004]몸가짐을 나직이 하였으되 : 원문은 卑牧인데, 주역(周易) 겸괘(謙卦) 초육(初六)의 상사(象辭) 지극히 겸손한 군자는 몸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기른다謙謙君子 卑以自牧고 하였다.

[D-005]속마음은 여유가 있었으며 : 원문은 肥遯인데, 주역(周易) 돈괘(遯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 여유 있는 마음으로 물러가 숨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肥遯 无不利고 하였다.

[D-006]처지가 …… 없었고 : 아우 박준원의 딸이 후궁이 되어 왕세자(후일 순조純祖)를 낳음에 따라 귀근(貴近)의 처지가 되었는데도 굳이 은둔하려 했다는 뜻이다. 정조 22(1798) 원자(元子)를 위한 강학청(講學廳)이 설치되자 그 요속(僚屬)으로 천거 · 선발되었으나, 박윤원은 정조의 거듭된 엄교(嚴敎)에도 불구하고 병을 핑계 대고 취임하지 않았다. 원문은 地如此近 而遐心莫回인데,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 그대의 목소리를 금옥처럼 여겨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품지 마소.毋金玉爾音 而有遐心라고 하였다. 이 시는 산중으로 떠나려는 현자(賢者)를 만류하는 시라고 한다.

[D-007]홀로 …… 않는 : 원문은 獨立而不懼 確乎其不拔인데, 주역 대과괘(大過卦)의 상사(象辭) 군자는 이 괘를 써서 홀로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아니한다.君子以獨立不懼고 하였고, 건괘(乾卦) 초구(初九)의 효사(爻辭)에 대한 문언전(文言傳)에 공자 가라사대 굳건하여 그 뜻이 뽑힐 수 없는 것이 잠룡이다.確乎其不可拔 潛龍也라고 하였다.

[D-008]영남의 …… 없었지요 : 안의 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1796년 박윤원이, 안의현 부근의 합천(陜川) 화양동(華陽洞)에 있던 선조 박소(朴紹)의 묘에 대한 제사를 지낼 때 호장(戶長)이 축문(祝文)을 쓴다고 잘못 전해 듣고 그 비례(非禮)를 견책하면서 시정을 촉구한 편지를 보내왔으므로, 연암이 그에 대해 자세히 해명하는 답서를 보낸 바 있다. 그 답서는 연암집 2 답족형윤원씨서(答族兄胤源氏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고, 박윤원의 편지도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근재집(近齋集) 18에도 연암에게 보낸 박윤원의 편지가 실려 있다.

[D-009]산으로 바다로 헤매면서 : 연암이 충청도 면천(沔川)의 군수로 재직하다가, 1800년 음력 8월 승진하여 강원도 양양(襄陽)에 부사(府使)로 부임한 사실을 가리킨다. 양양은 동해에 임하여 바닷바람이 거세고 산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험준한 고을이었다.

[D-010]고래나 악어의 울부짖음 : 원문은 鯨吼鼉鳴인데, 비바람을 몰고 오는 대해(大海)의 거센 파도 소리를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영규비(靈圭碑)

 

 

신종황제(神宗皇帝) 20년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 25년에 왜놈이 침략해 와 우리 삼경(三京 경주 · 한양 · 평양)을 무너뜨리자, 중 영규(靈圭)가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수길(秀吉)의 군사를 청주(淸州)에서 크게 깨뜨리고, 군사를 금산(錦山)으로 옮겨 힘껏 싸우다 죽었다.

이때를 당하여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金千鎰)은 의()를 내걸고 민병(民兵)을 일으켜 초토사(招討使)가 되었으며, 최경회(崔慶會)는 송골매 골() 자로 군기(軍旗)를 표()하고, 임계영(任啓英)은 범 호() 자로 군기를 표하고, 김덕령(金德齡)은 초승(超乘)으로 휘장(徽章)을 만들고, 곽재우(郭再祐)는 홍의(紅衣)로 군을 구별 지었는데, 이들은 모두 대부(大夫)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세신(世臣)의 후예들이었다. 그런데 영규는 승려로서, 토지나 병갑(兵甲)을 지닌 것도 아니고 부신(符信)을 발급하거나 호령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건만, 마침내 그 무리를 이끌고 궐기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의를 내세워 궐기한 자들이 10여 진()이었다. 그들은 혹 제 고장을 스스로 호위하기도 하고, 혹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지휘를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고, 혹 연수(連帥 관찰사)의 죄를 성토하여 각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리기도 했는데, 오직 문열공 조헌의 군중만은 사자(使者)를 보내어 스스로 조정과 연락을 취했으니 그 의()가 특히 정대하였다. 여기에서 식자들은 영규의 의()가 동맹자를 얻었음을 알았다.

절도사(節度使) 박홍(朴泓)은 군사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이각(李珏)과 조대곤(曺大坤)은 군량 10여 만 가마를 불태우고 정기(旌旗)를 땅에 묻어 버리고 적을 만나자 먼저 도망했으며, 부사(府使) 서예원(徐禮元)과 군수 이유검(李惟儉)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관찰사 이광(李洸)과 윤선각(尹先覺) 10여 만의 군사를 지니고도 왕을 호위하지 못했고, 왕이 용만(龍灣 의주(義州))으로 거둥하였으나 힘을 다해 적을 토벌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영규는 승려로서, 한 치의 무기나 한 말의 군량도 지닌 처지가 아니었건만, 마침내 그 무리를 이끌고 힘껏 싸웠다. 문열공의 군사가 청주성(淸州城)의 동문(東門)을 포위하자 영규는 성의 서문에서 전투를 벌여 먼저 성에 올라가니, 모두가 일당백(一當百)으로 싸웠다. 여기에서 식자들은 영규의 용맹함이 반드시 그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때를 당하여 천자가 대신을 보내어 조선 문제를 맡기니, 군사를 통솔한 대장군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 진린(陳璘) · 마귀(麻貴) · 유정(劉綎)은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었고, 군무(軍務)를 맡아 다스린 어사(御史) 만세덕(萬世德) · 양호(楊鎬)와 상서(尙書) 형개(邢玠)는 모두 병법에 깊은 자들이었다. 유격장군(遊擊將軍) 낙상지(駱尙志)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릴 정도로 힘이 세었고, 양원(楊元)과 사대수(査大受)는 기이한 재주와 굳센 용맹으로 적진에 뛰어들 때는 맨 앞에서 나서고 성을 칠 때는 남보다 먼저 올라갔다. 군사들은 모두 절강(浙江) · 사천(泗川) · 운남(雲南) · 등주(登州) · 귀주(貴州) · 내주(來州)의 날랜 기병(騎兵)과 활 잘 쏘는 사수들이며, 거기에는 대장군의 집종 천 명과 유계(幽薊)의 검객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왜놈을 공격하다가 자주 군사가 퇴각했으며, 포위망을 공격하다 패한 적도 자주 있었으며, 항상 많은 군사로 적은 수효의 왜병을 공격했으되, 무기가 파손되고 군사는 지쳐서 7년 사이에 성을 쳐서 빼앗은 것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영규는 승려로서, 머리 깎고 검은 옷 입고 술과 고기를 끊고 살생을 경계하는 무리를 이끌고 하루아침에 견고한 성 아래로 육박하여, 왜병들로 하여금 제 한 목숨 구하기에도 바빠 죽은 시체를 불태우고 도망가게 만들었으니,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이런 공적은 일찍이 있은 적이 없었다. 급기야 군사를 금산으로 이동하여 절도사 및 여러 의병들과 왜병을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마침 큰비가 내려 군사들이 모두 기일을 놓치게 됨으로써 문열공이 전사하였다. 영규가 장중(帳中)에 들어갔으나 문열공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공의 휘하 700사람과 더불어 같은 날에 전사하였다.

오호라! 이때를 당하여 정발(鄭撥)은 적의 습격을 받아 죽었고, 송상현(宋象賢)은 성이 무너지고 힘이 다해 적을 꾸짖고 죽었으며, 신립(申砬)과 김여물(金汝岉)은 군대가 패하여 죽었으며, 신길원(申吉元), 정담(鄭湛), 변응정(邊應井)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죽었으며, 황진(黃進), 원호(元豪)는 힘껏 싸우다 죽었으니, 모두 공()에 죽고 절()에 죽은 신하들이다. 저 영규는 승려로서, 공에 죽고 절에 죽어야 하는 신하가 아닌데도 마침내 그 무리들과 함께 특별히 죽었으니, 그 의열(義烈)과 충용(忠勇)은 족히 칭찬할 만한 점이 있다.

저 영규는 승려인데도 선비와 군자들이 그 절의를 지극히 사모하여 비석을 깎아 그 공을 새긴다고 한다. 영규의 법호(法號) 청허대사(淸虛大師)’라 한다.

 

 

[D-001]초승(超乘)으로 휘장(徽章)을 만들고 : 초승은 수레 위를 훌쩍 뛰어오른다는 뜻으로 용맹스러운 군대를 가리킨다. 김덕령은 선조로부터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D-002]군무(軍務) …… 양호(楊鎬) :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도찰원(都察院) 우첨도어사(右僉都御使) 양호는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임명되었으며, 만세덕은 양호가 파직된 뒤 그의 후임으로 왔다.

[D-003]상서(尙書) 형개(邢玠) : 원문 중 尙書邢玠 다음에 몇 자가 누락된 듯하다. 정유재란 때 병부 상서 형개는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와 총독계요보정군무(總督薊遼保定軍務)를 겸임하였다.

[D-004]유계(幽薊) : 거란(契丹)이 지배했던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등 연운(燕雲) 16()를 가리키는데, 지금의 하북성(河北省)과 산서성(山西省)의 북부 일대에 해당한다.

[D-005]원호(元豪) : 1533~1592. 퇴직 무신으로서 임진왜란 때 강원도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여강(驪江) 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인물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박 열부(朴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바치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남부(南部 한양의 오부(五部) 중 하나)에 사는 아무 직책을 맡은 아무개 등은 작고한 사인(士人) 김국보(金國輔)의 아내 밀양 박씨가 절사(節死)한 사실을 삼가 정장(呈狀)합니다. 저희들은 박씨의 이웃에 살고 있는데, 이달 열아흐렛날 밤 삼경에 이웃집 문지게를 누차 두들기며 급한 목숨 구하라는 소리가 있으므로, 위아래 여남은 집이 일제히 놀라 일어나 급히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바로 박씨가 독약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그 집안이 허둥지둥 어찌할 줄을 모르고, 이웃에 이에 대한 경험방(經驗方)을 여기저기 물어보아 만의 하나나마 살릴 길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일제히 그 집에 모여 그가 마신 독약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바로 간수였습니다. 그래서 방약(方藥)을 이것저것 쓰게 하고 쌀뜨물을 여러 번 퍼먹여 보았으나 이미 어쩌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에 온 집안이 슬피 부르짖어 차마 듣지 못하도록 참혹했습니다.

대개 박씨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에 대한 효순(孝順)이 천성에서 우러나와, 의복과 음식의 범절에 있어 부모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으며, 몸 한 번 움직이고 발 한 번 옮기는 사이에도 반드시 어른의 뜻을 받들어 중문 밖을 내다보지 않고 바깥 뜰에는 노닐지 않으며, 단장(端莊)하고 근칙(謹飭)하여 매사에 여자의 법도를 따랐으니, 비록 이웃집의 계집종이나 물건 팔러 다니는 할멈도 그 얼굴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닐곱 살 때에 벌써 소문과 칭송이 무성하여 사방에서 딸 가진 자들은 누구나 박씨의 어린 딸을 칭찬하는 것으로써 자기 딸을 가르치고 타일렀습니다.

나이 열여섯 살이 되자 김씨에게 출가하였는데, 그 지아비가 불행히도 병에 걸렸고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약물 치료도 계속하기 어려웠으므로 비녀와 가락지 등속을 다 팔았으며, 병간호를 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천역(賤役)을 자청하였으며, 모진 추위 심한 더위에도 허리띠를 풀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잠 한숨 붙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점치고 기도하기를 극진히 아니한 적이 없어 매번 자신이 대신 죽게 해 달라고 칠성님께 빌었는데, 그 말을 마음속으로 하면서도 행여나 남이 알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급기야 지아비가 죽어 초혼(招魂)하게 되자 크게 한 번 부르고는 까무라쳤다가 겨우 깨어났으며, 그 이후로는 입을 다물고 한 숟갈 물도 마시지 않은 채, 죽어서 지하로 따라가기를 맹세하였습니다. 때때로 정신을 잃고 숨이 넘어가려 하여 친정 부모나 시부모들이 백방으로 달래고 타이르며 천 가지로 간곡히 권하자, 겨우 죽을 마음을 늦추고 억지로 부드러운 얼굴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친부모와 시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서 그렇게 한 것이지, 죽으려는 마음은 이미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 형제들이 처음에 가끔 말을 걸어 의중을 떠보면,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목이 막혀 하는 말이,

 

내가 김씨 집안에 들어와서 이미 한 점의 혈육도 둔 바 없으니 삼종(三從)의 도리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살아서 또한 무얼 하오리까? 한낮의 촛불같은 목숨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아 오래도록 부모님께 근심만 끼쳐 드리고 있으니, 이 역시 큰 불효입니다.”

하였습니다. 항상 조그마한 방에 따로 거처하여 발걸음이 뜰을 내려가지 않으니 사람 얼굴을 보기가 드물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 집안사람들이 무언중 그 뜻을 살피고서 극력 방비하여, 비록 화장실 가는 사이에도 반드시 그 동정을 살폈으며 잠시 동안이라도 감히 방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반년이 되어 방비가 조금 풀어지자, 이달 초열흘경에 턱밑에 갑자기 조그마한 부스럼이 생겨 그다지 아픈 지경까지 이르지도 않았는데, 박씨는 그 오라비에게 청하여 의원에게 물어 고약을 붙이곤 하므로 그 집에서는 더욱 방심했던 것입니다. 열아흐렛날 밤 화장실에 가는 길에 그 어머니가 따라가다가 앞과 뒤가 조금 떨어졌는데 갑자기 대청 위에서 넘어져 거꾸러지는 소리가 들리기에 놀라 쫓아 나와 보니 삽시간에 이미 구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리라 생각하고 그 곁을 두루두루 살펴봐도 칼이나 비단 같은 도구들은 없고, 간수만 대청에 흥건하였습니다. 대개 그 집안에서 막 침장(沈醬)을 하려고 소금을 달아매어 짠맛을 빼고 있었으므로, 몰래 그 액체를 마시고서 기절하여 토했던 것입니다. 워낙 일이 경각에 일어났기 때문에 먼저 살피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일을 목격하고 서로 돌아보며 화들짝 놀라고는, 모두 말하기를,

 

놀랍도다, 이렇게 정말 죽다니! 평소에 효순하다는 소문이 이미 저와 같이 자자했고, 오늘 절개를 지켜 죽은 결백한 모습이 또한 이와 같이 우뚝하니, 한 마을에 사는 정의로 보아 어찌 관청에 소지(所志)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그 아버지가 울며 중지시키면서 하는 말이,

 

내 딸이 저의 뜻을 이룰 수 있었으니 열녀라 이를 수는 있지만, 나에게 지극한 슬픔을 끼치고 죽었으니 효녀라고 이를 수는 없소. 지금 일을 크게 벌인다면 이 역시 죽은 자의 본뜻이 아닐 것이오.”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일제히 말하기를,

 

이 일은 친청집과는 관계없는 일이오.”

하고서 물러 나와, 마을 안의 제일 어른의 집에 일제히 모였으며, 소지를 올려야 마땅하다는 데에 아무도 이의가 없었습니다. 이에 그동안 듣고 본 바를 주워 엮어 일제히 예조의 문밖에서 부르짖는 바입니다.

아아!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감동하여 분발하게 하는 방법은, 진실로 남다르고 정숙한 행실을 포상하고 정표(旌表)하는 은전을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영화(榮華)를 탐하거나 은혜를 바라서가 아니라 실은 풍속을 돈후하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옛날에 남녀간에 권고하고 충고하는 말은 여항(閭巷)에서 부르는 풍요(風謠)의 가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성정(性情)에서 나와 풍속의 교화에 도움이 된다면 시를 채집하는 신하들이 이를 왕국에 바치고 악()을 맡은 관원들이 음악으로 전파하여 사방을 교화하고 민심을 감발(感發)시켰는데, 지금 박씨의 아름다운 행실과 곧은 절개는 보통을 훨씬 넘었으며 담담하게 의()에 나아가고 결백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는 국가가 백성을 교화하고 좋은 풍속을 만들고자 하는 정책에 비추어 볼 때 실로 빛이 나는 일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임금님께 아뢰어 정려(旌閭)의 은전을 얻게 하여, 이로써 풍속의 교화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고 정렬(貞烈)을 지킨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한다면, 저희들이 다행히도 열녀와 한마을에서 산 덕분으로 본받는 바 있을 것이며,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D-001]급기야 …… 되자 : 원문은 及其皐復인데, 초혼(招魂)을 고복(皐復)이라 한다. 죽은 사람이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손에 들고 지붕에 오르거나 마당에 서서 영혼이 돌아오라는 뜻으로 아무개 복!某復이라고 세 번 외치는데 이를 삼고(三皐)라 한다.

[D-002]침장(沈醬) : 간장이나 된장을 만들려고 메주를 소금물에 담그는 일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 열부(李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올리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남부(南部)에 사는 아무 직책을 맡은 아무개 등은 남양 이씨(南陽李氏)의 절사(節死)한 사실을 삼가 정장(呈狀)합니다. 이씨는 곧 문장과 덕행을 지닌 선비인 박경유(朴景兪)의 아내입니다. 경유가 불행히도 여러 해 동안 앓아 오던 병으로 지난해 12월에 요절했는데, 그때에 경유의 조모(祖母)는 나이 82세로서 오래된 병고로 오늘내일하여 집안에 어떠한 상사(喪事)가 일어난 줄도 모르는 상태에 있었으며, 경유의 부친도 평소 기이한 병을 앓아 역시 위독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씨는 좌우로 병 수발하느라 남편의 죽음에 울음 울 겨를도 없이, 한편으로는 죽은 남편의 시신을 염하고 입관(入棺)할 채비를 몸소 마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 노인의 탕약을 손수 달여 올리면서 울음소리를 죽이고 눈물을 삼키며 금방 밝은 낯빛을 짓곤 하였습니다. 친척으로 조문하는 자들이 모두 그 효성에 감격하였으며, 이웃에서도 듣고 그 정경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삼우제(三虞祭)와 졸곡(卒哭)을 마치자 보살피던 두 병자가 차례로 조리되어 마침내 완쾌를 보게 되니, 모두들 이씨의 지성에 신이 감동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5 17일이 되어 집안사람들에게 두루 이별하는 듯한 말을 하였는데, 아마도 그 이튿날이 바로 이씨의 생일이라 집안사람들은 그가 살아서 이날을 당하고 보니 비통함이 마땅히 갑절이나 더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보다 생각하였을 뿐, 죽기로 맹세한 뜻을 품고 남몰래 시기를 정해 두었을 줄은 실로 알지 못했습니다.

밤이 되자 그는 시조모를 모시고 곁에 앉았는데 그 처량한 말과 비통한 안색을 스스로 숨길 수 없어 일어나려다가 다시 앉으며 차마 떠나지 못하고 서성대며 어물어물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물러나니, 온 집안이 잠이 들어 변이 일어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새벽녘에 이르러 갑자기 이씨가 잠자는 방에서 숨이 끊어질 듯 급하게 몰아쉬는 소리가 나기에 옆방 사람들이 급히 가 보니 조금 전에 이미 혼절했으나 따스한 기운은 그때까지도 남아 있었으며 베개맡의 사발에 간수가 흥건해 있었으므로, 그가 이것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 집안사람들이 허둥지둥 이웃을 찾아다니며 해독할 경험방을 여기저기 묻고 다니자, 위아래 마을 여남은 집이 놀라고 가엾이 생각하여 일제히 살피러 쫓아가서 쌀을 씻어 뜨물을 내어 수없이 입에 부어 넣었으나 이미 어쩌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에 온 집안이 통곡하여 그 참상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과연 죽은 이날이 바로 그의 생일날이라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찬탄하면서, 모두 하는 말이 열부로다!” 하였습니다.

이어 그 자리 밑에서 언문 유서 두 통을 발견했는데, 그중에 하나는 정월에 쓴 것으로서 기일을 정하여 죽기로 맹세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내용에, ‘남편이 죽었는데도 바로 죽지 못한 것은 실로 시조모와 시아버님 병환이 모두 위독한 상태였기 때문으로, 10년 동안 병자를 모시면서 작은 정성이나마 다하지 못하고 갑자기 내 뜻대로 한다면 지은 죄가 더욱 클 것이요, 또 죽은 남편의 초종(初終)도 거듭되는 초상으로 인해 미진한 바가 있을까 두려워서 시일을 끌면서 참아 왔는데 5 18일은 나의 생일이니 이날이 바로 나의 죽을 날이다.’ 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이달 17일에 쓴 것으로서 시아버님께 이별을 고하는 편지였습니다. 우선 끝까지 봉양하지 못함을 사죄하고, 다음으로 자신의 초상을 치르는 범절은 반드시 남편의 상보다 줄여 줄 것을 부탁했으며, 염할 준비는 다 갖추어 놓았는데 이는 모두 밤을 틈타 손수 만든 것이라 운운하였습니다. 아마도 이씨가 남편을 따라 죽을 결심을 한 것은 남편이 죽던 그날에 이미 결정되었을 터인데, 다섯 달이나 시일을 끌면서 몰래 염할 옷을 꿰매었는데도 주위 사람들에게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었으니, 일 처리의 치밀함과 죽음을 결단하는 차분함으로 보자면 비록 옛날 전기(傳紀)에 열거된 인물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무엇이 더하오리까?

대개 이씨는 어린 나이 때부터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 천성에서 우러나왔으며, 성장해서는 여자로서의 행실이 예의 법도에 절로 들어맞았으며, 구태여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바느질과 길쌈을 다 할 줄 알았습니다. 그가 경유에게 출가해서는 지아비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경유는 뜻이 독실하고 행실이 옛사람 같았으며 평소에 소학(小學)으로써 몸을 다스렸으므로 아내를 벗으로 삼고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같이 하였습니다. 경유의 조모는 여러 해를 앓아 온 고질로 노상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이씨가 조모를 간호하고 봉양하던 범절은 한결같이 경유의 뜻을 따른 것으로서 10년 동안 조금도 게을리 한 바 없었으니, 경유가 옷의 띠를 풀지 않으면 이씨도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경유가 몸소 변기(便器)를 가져 나르면 이씨는 친히 변기를 씻었습니다. 시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슬픔과 예절을 다하여 마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절통한 마음을 머금고 때를 기다리다 한 번의 결단으로 목숨을 버린 것을 가지고는 이씨의 고절(高節)을 말하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효순하다는 소문이 이미 저와 같이 자자하고, 오늘 절개를 지켜 죽은 결백한 모습이 또한 이와 같이 우뚝하니, 한마을에 사는 도의로 보아 어찌 관청에 소지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이 마을 안의 제일 어른 집에 일제히 모였는데, 어떤 이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기이하도다! 우리들이 이런 일을 한 것이 이번으로 두 번째요, 10년 사이에 이런 일이 모두 한집안에서 나왔는데 우리가 전번에 이미 소지를 올려 목적을 달성했으니, 어찌 뒤의 일인들 혹시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소?”

하였습니다.

대개 경유의 누이인 김씨의 아내도 예전에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절개를 지켜 죽은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앞뒤로 잇닿아 빛났으므로, 저희들이 일제히 예조에 부르짖고 다시 임금님께도 들리게 하여 이미 정려의 은전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씨의 아름다운 행실과 곧은 절개도 보통보다 훨씬 뛰어나 전인(前人)의 아름다움에 뒤지지 않습니다. 이는 국가가 백성을 교화하고 좋은 풍속을 만들고자 하는 정책에 비추어 볼 때 실로 빛이 나는 일입니다.

아아! 남녀간에 권고하고 충고하는 말은 여항에서 부르는 풍요의 가사에 지나지 않으나, 그것이 성정(性情)에서 나와 풍속의 교화에 도움이 된다면 시를 채집하는 관원이 이를 왕국에 바치고 악()을 맡은 관원이 음악으로 전파하여 사방을 교화하고 민심을 감발시켰는데, 지금 이씨의 성취한 바가 어찌 풍요로서 채집되거나 음악으로 만들어지는 데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저희들이 다행히도 열녀와 한마을에 살고 있어 눈으로 익히 보고 귀에 젖었으면서도 연명(聯名)으로 소지를 만들고 일제히 한목소리로 집사(執事)에게 달려가 고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저희들의 죄입니다. 나아가, 숨겨진 일을 드러냄으로써 성명(聖明)한 조정에서 풍속을 바로 세우고 도탑게 하는 정사(政事)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각하(閣下)의 직분입니다. 저희들이 어찌 그것까지 관여하겠습니까?

 

 

[D-001]박경유(朴景兪) : 연암집 10 열부 이씨 정려음기(烈婦李氏旌閭陰記)에 소개되어 있다. 연암의 문하(門下)에 출입하던 선비로 정조 5(1781)에 요절했다. 박윤원(朴胤源)이나 이덕무의 문집에 박경유에게 준 답서가 수록되어 있다. 이덕무는 사소절(士小節)에서 박경유를 덕행을 갖춘 인물로 칭찬했다.

[D-002]초종(初終) : 초상이 난 이후 졸곡(卒哭)까지의 모든 장례 절차를 말한다.

[D-003]거듭되는 초상 : 병 수발을 소홀히 하여 시조모와 시아버지가 잇달아 죽게 될 경우를 가정해서 한 말이다.

[D-004]슬픔과 예절을 다하여 :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자로(子路)가 전한 공자(孔子)의 말로 상례(喪禮)에 슬픔은 부족한데 예절이 남음이 있는 것은, 예절은 부족하되 슬픔이 남음이 있는 것만 못하다.喪禮 與其哀不足而禮有餘 不若禮不足而哀有餘고 하였다.

[D-005]각하(閣下) : 이본들에는 합하(閤下)’로 되어 있다. 집사(執事)와 각하, 합하는 모두 판서(判書)에 대한 경칭으로 통용되는 것들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연암집

 

연암집 제10권 별집

 

엄화계수일 잡저(罨畫溪蒐逸雜著)

 

 

원사(原士)

 

선친의 글을 살펴보니 유실된 것이 많았다. 이 편()은 연암협(燕巖峽)의 묵은 종이 모아 둔 곳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글뭉치가 터지고 찢어져 윗부분에 몇 항목이 빠지고 중간에도 왕왕 빠진 데가 있으며, 또 편의 이름도 없었다. 그래서 조목 중에 원사(原士)’란 두 글자를 취하여 편명(篇名)으로 삼았다.

아들 종채(宗采)가 삼가 쓰다.

 

무릇 선비란 아래로 농() · ()과 같은 부류에 속하나, 위로는 왕공(王公)과 벗이 된다. 지위로 말하면 농 · 공과 다를 바 없지만, 덕으로 말하면 왕공이 평소 섬기는 존재이다. 선비 한 사람이 글을 읽으면 그 혜택이 사해(四海)에 미치고 그 공은 만세에 남는다. 주역에 이르기를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온 천하가 빛나고 밝다.見龍在田 天下文明고 했으니, 이는 글을 읽는 선비를 두고 이름인저!

 

그러므로 천자는 원래 선비原士이다. 원래 선비라는 것은 생민(生民)의 근본을 두고 한 말이다. 그의 작위는 천자이지만 그의 신원(身元)은 선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작위에는 높고 낮음이 있으되 신원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며, 지위에는 귀천이 있으되 선비는 다른 데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작위가 선비에게 더해지는 것이지, 선비가 변화하여 어떤 작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를 사대부(士大夫)’라 하는 것은 높여서 부르는 이름이요, 군자를 사군자(士君子)’라 하는 것은 어질게 여겨서 부르는 이름이다. 또 군졸을 ()’라 하는 것은 많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사람마다 사()라는 점을 밝힌 것이요, 법을 집행하는 옥관(獄官) 라 하는 것은 홀로임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천하에 공정함을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공정한 말을 사론(士論)’이라 이르고, 당세의 제일류를 사류(士流)’라 이르고, 사해(四海)에서 의로운 명성을 얻도록 고무하는 것을 사기(士氣)’라 이르고, 군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이르고, 학문과 도를 강론하는 곳을 사림(士林)’이라 이른다.

송 광평(宋廣平)이 연공(燕公)더러 이르기를 만세에 존경을 받는 것이 이 일에 달려 있다.” 했으니, 어찌 천하의 공정한 말이 아니겠는가? 환관이나 궁첩(宮妾)들이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어찌 당세의 제일류가 아니겠는가? 노중련(魯仲連)이 동해(東海)에 몸을 던지려고 하자 진() 나라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으니, 어찌 사해에서 의로운 명성을 얻도록 고무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어진 사람이 죽어 가고, 온 나라가 병들었네.人之云亡 邦國疹瘁라고 했으니, 이 어찌 군자가 죄 없이 죽은 것을 애석히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하많은 선비들이여, 문왕(文王)이 이들 덕분에 편안하셨네.濟濟多士 文王以寧라고 했으니, 학문과 도를 강론하지 않고서야 능히 이와 같이 될 수 있겠는가?

 

무릇 선비란 다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천자가 태학(太學)을 순시할 때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의 자리를 마련하여 조언을 구하고 음식을 대접한 것은 효()를 천하에 확대하자는 것이요, 천자의 원자(元子)와 적자(適子)가 태학에 입학하여 나이에 따른 질서를 지킨 것은 공손함을 천하에 보여 주자는 것이다. 효제(孝悌)란 선비의 근원이요, 선비란 인간의 근원이며, 본디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니, 천자도 오히려 그 본디를 밝히거든 하물며 소위(素位)의 선비이랴?

 

아아! 요순(堯舜)은 아마도 효제(孝悌)를 실천한 본디 선비雅士, 공맹(孔孟)은 아마도 옛날에 글을 잘 읽은 분인저!

 

누군들 선비가 아니리요마는, 능히 본디를 행하는 자는 적고, 누군들 글을 읽지 아니하리요마는 능히 잘 읽는 자는 적다.

 

이른바 글을 잘 읽는다는 것은 소리 내어 읽기를 잘한다는 것도 아니요, 구두(句讀)를 잘 뗀다는 것도 아니며, 그 뜻을 잘 풀이한다는 것도 아니고, 담론을 잘한다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갖춘 사람이 있을지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모두 사사로운 지혜로 천착(穿鑿)한 것이요, 아무리 권략(權略)과 경륜(經綸)의 술()이 있다 할지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모두가 주먹구구로 맞힌 것이니, 내가 말한 본디 선비雅士는 아니다. 내가 말한 본디 선비란, 뜻은 어린애와 같고 모습은 처녀와 같으며 일 년 내내 문을 닫고 글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어린애는 비록 연약하여도 제가 흠모하는 것에 전념하고 처녀는 비록 수줍어도 순결을 지키는 데에는 굳건하나니, 우러러봐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봐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은 오직 문을 닫고 글을 읽는 그 일인저!

 

참으로 고아(古雅)하도다, 증자(曾子)의 독서여! 해진 신발을 벗어던지고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그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마치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았도다. 또한 공자가 말씀하신 바는 시경, 서경과 지켜야 하는 예()이니 이 셋에 대해 평소 늘 말씀하셨다.

 

어떤 이가 묻기를,

 

안자(顔子 안회(顔回))는 자주 굶주리면서도 그 즐거운 마음을 변치 않았다고 하는데, 안로(顔路)가 굶주릴 때에도 여전히 또한 즐거웠겠습니까?”

한다면 이렇게 답하리라.

 

쌀을 짊어지고 올 곳이 있다면 백 리도 멀다 아니 했을 것이며, 그 쌀을 구해 와서 아내를 시켜 밥을 지어 올리게 한 다음 대청에 올라 글을 읽었을 것이다.”

 

무릇 글을 읽는 것은 장차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문장술(文章術)을 풍부히 하자는 것인가? 글 잘 짓는다는 명예를 넓히자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학문과 도()를 강론하기 위해 글을 읽는 것이다.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은 이러한 강학(講學)의 내용이요,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은 강학의 응용이니, 글을 읽고서도 그 내용과 응용을 알지 못한다면 강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강학을 귀히 여기는 것은 그 내용과 응용 때문이다. 만약 고상하게 성()과 명()을 담론하고, 극도로 이()와 기()를 분변하면서 각각 자기 소견만 주장하고 기어이 하나로 일치시키고자 한다면, 담론하고 분변하는 사이에 혈기(血氣 감정)가 작용하게 되어 이와 기를 겨우 분변하는 동안 성()과 정()이 먼저 뒤틀어질 것이다. 이는 강학이 해를 끼친 것이다.

 

글을 읽어서 크게 써먹기를 구하는 것은 모두 다 사심(私心)이다. 일 년 내내 글을 읽어도 학업이 진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심이 해를 끼치는 때문이다.

 

백가(百家)를 넘나들고, 경전(經傳)을 고거(攷據)하여 그 배운 바를 시험하고자 하고, 공리(功利)에 급급하여 그 사심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독서가 해를 끼친 때문이다.

 

천착(穿鑿)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그 속에 사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창 천착할 때에는 언제나 경전(經傳)으로써 증거를 삼고, 천착하다 막힌 데가 있으면 또 언제나 경전으로써 유추해 본다. 유추하기를 그만두지 않다가 마침내 경문(經文)을 고치고 주()를 바꾼 뒤에야 후련해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주례(周禮)는 아마도 주공(周公)의 저술인저!”

하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왕망(王莽)은 명예를 좋아하여 천하를 해쳤고, 개보(介甫 왕안석(王安石))는 법을 좋아하여 천하를 그르쳤다.”

한다.

 

덕보(德保 홍대용)가 말하기를,

 

구차스레 동조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요, 억지로 남과 달리하려는 것은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였다.

 

글을 잘 읽는다는 것이 어찌 훈고(訓詁)에만 밝고 마는 것이겠으며, 이른바 선비란 것이 어찌 오경(五經)에만 통하고 말겠는가.

 

무릇 성인의 글을 읽어도 능히 성인의 고심(苦心)을 터득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중니(仲尼)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피나는 정성을 쏟은 분이 아니겠으며, 맹자가 어찌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한 분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주자 같은 이는 성인의 고심을 터득했다 할 만하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도 나를 죄주는 것도 오직 춘추(春秋)일 것이다.”

하였고, 맹자가 말하기를,

 

내 어찌 구변(口辯)을 좋아해서 그렇겠느냐? 나는 마지못해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공자가 주역(周易)을 읽어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그렇기에, “나를 몇 해만 더 살게 해 준다면 제대로 주역을 읽을 수 있을 텐데.”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주역에 십익(十翼)을 달았으면서도 일찍이 문인(門人)들에게 주역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맹자는 시서(詩書)에 대한 해설은 잘 하면서도 일찍이 주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중니(仲尼)의 문하에서 주역에 대해 들은 이는 오직 증자(曾子)일 것이다. 왜냐하면 증자는, “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주역으로 칭찬을 들은 이는 오직 안로(顔路)의 아들 안자(顔子)일 것이다. 안자는, 한 가지 좋은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늘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질지 못하도다, 자로(子路)의 말이여! “거기에는 사직(社稷)도 있고 인민도 있으니, 어찌 꼭 글을 읽어야만 학문을 한다 하겠습니까.”라고 했으니 말이다.

 

군자가 종신토록 하루라도 폐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오직 글을 읽는 그 일인저!

 

그러므로 선비가 하루만 글을 읽지 아니하면 얼굴이 단아하지 못하고, 말씨가 단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몸을 가누지 못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음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장기 두고 바둑 두고 술 마시고 하는 것이 애초에 어찌 즐거워서 했겠는가?

 

자제(子弟)들이 오만하고 방탕하며 빈둥대면서 제멋대로 온갖 짓을 다 하다가도, 곁에서 글 읽는 사람이 있으면 풀이 죽어 그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자제들이 아무리 총명하고 준수해도 글 읽기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부인네나 농사꾼일지라도 자제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군자의 아름다운 말 속에도 혹 뉘우칠 만한 말이 있고, 착한 행실 속에도 혹 허물이 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글을 읽는 경우에는 일 년 내내 읽어도 뉘우칠 것이 없으며, 백 사람이 따라서 행하더라도 허물이 생기지 않는다.

 

명분과 법률이 아무리 좋아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쇠고기 돼지고기가 아무리 맛있어도 많이 먹으면 해가 생긴다. 많을수록 유익하고 오래갈수록 폐단이 없는 것은 오직 독서일 것이다.

 

어린애가 글을 읽으면 요망스럽게 되지 않고 늙은이가 글을 읽으면 노망이 들지 않는다. 귀해져도 해이해지지 않고 천해져도 제 분수를 넘지 않는다. 어진 자라 해서 남아돌지 않고 미련한 자라 해서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집이 가난한 이가 글 읽기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부자로 잘 살면서 글 읽기 좋아한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대숙(大叔) 시경(詩經)을 읽느라 삼 년 동안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하루는 대청에서 내려와 소변을 보는데 집에서 기르던 개가 그를 보고 놀라서 짖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들어도 때에 따라 귀가 따갑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경우가 있지만, 글을 읽는 경우에는 그 소리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부모의 바람은 자식이 글을 읽는 것이다. 어린 아들이 글 읽으라는 말을 듣지 않고도 글을 읽으면, 부모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자 없다. 아아! 그런데 나는 어찌 그리 읽기를 싫어했던고.

 

도연명(陶淵明)은 고아(高雅)한 선비였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을 때 술을 많이 못 마신 것을 한스러워했을 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는데, 도연명은 어찌 글을 많이 읽지 못하였던 것을 한스러워하지 않았던가?

 

글 읽는 법은 일과(日課)를 정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질질 끄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많이 읽으려도 말고, 속히 읽으려도 말라. 읽을 글줄을 정하고 횟수를 제한하여 오로지 날마다 읽어 가면 글의 의미에 정통하게 되고 글자의 음과 뜻에 익숙해져 자연히 외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의 순서를 정하라.

 

잘 아는 글자라고 소홀히 하거나 쉽게 여기지 말고, 글자를 달리듯이 미끄러지듯이 줄줄 읽지 말며, 글자를 읽을 때 더듬거리지 말며, 글자를 거꾸로 읽지 말며, 글자를 옆줄로 건너뛰어 읽지 말라. 반드시 그 음을 바르게 읽어야 하며, 반드시 그 고저가 맞아야 한다.

 

글 읽는 소리가 입에 머무르되 엉겨붙지 말게 하며, 눈으로 뒤쫓되 흘려 보지 말며, 몸은 흔들어도 어지럽지 않게 한다.

 

눈썹을 찌푸리지 말고, 어깨를 잡지 말고, 입을 빨지 말라.

 

책을 대하면 하품도 하지 말고, 책을 대하면 기지개도 켜지 말고, 책을 대하면 침도 뱉지 말고, 만일 기침이 나면 고개를 돌리고 책을 피하라. 책장을 뒤집을 때 손가락에 침을 바르지 말며, 표시를 할 때는 손톱으로 하지 말라.

 

서산(書算)을 만들어 읽은 횟수를 기록하되, 흡족한 기분이 들면 접었던 서산을 펴고, 흡족한 기분이 들지 않으면 서산을 펴지 않는다.

 

책을 베개 삼아 베지도 말고, 책으로 그릇을 덮지도 말며 권질(卷帙)을 어지럽히지 말라. 먼지를 털어 내고 좀벌레를 없애며, 햇볕이 나는 즉시 책을 펴서 말려라. 남의 서적을 빌려 볼 때에는 글자가 그르친 데가 있으면 교정하여 쪽지를 붙여 주며, 종이가 찢어진 데가 있으면 때워 주며, 책을 맨 실이 끊어졌으면 다시 꿰매어 돌려주어야 한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눈을 감고 꿇어앉아 이전에 외운 것을 복습하고 가만히 다시 음미해 보라. 그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는가, 그 뜻이 통하지 않는 곳은 없는가, 글자를 착각한 것은 없는가? 마음속으로 검증하고 몸으로 체험해 보아 스스로 터득한 것이 있으면 기뻐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등불을 켜고 옷을 다 입고서 엄숙하고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책상을 마주한다. 이어 새로 읽을 글을 정하고 묵묵히 읽어 가되 몇 줄씩 단락을 끊어서 읽는다. 그런 다음 서산(書算)을 덮어 밀쳐놓고, 가만히 훈고(訓詁)를 따져 보며 세밀히 주소(註疏)를 훑어보아 그 차이를 분변하고, 그 음과 뜻을 깨우친다. 차분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며 제멋대로 천착하지 말고 억지로 의심하지 말 것이며,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복해서 생각하고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하늘이 밝아지면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곧바로 부모님의 침실로 가서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기침 소리가 들리거나 가래침 뱉고 하품하는 소리가 들리면 들어가서 문안을 드린다.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혹 무슨 일을 시키면, 급히 제 방으로 돌아가서도 안 되고 글을 읽는다는 핑계로 거절해서도 안 된다. 바로 이것이 글을 읽는 것이니, 혹 글 읽기에 열중하느라 혼정신성(昏定晨省)도 제때에 하지 아니하고, 때 묻은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로 지내는 것은 글을 읽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물러가라고 말씀하시면 물러나 제 방으로 돌아와서 책상 위의 먼지를 털고 책들을 가지런히 바로 놓고 단정히 앉아 잡된 생각을 가라앉히기를 얼마쯤 한 연후에 책을 펴고 읽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읽지 말 것이며 자구(字句)를 분명히 하고 고저를 부드럽게 해서 읽는다.

 

긴요한 말이 아니면 한가하게 응답하지도 말며, 바쁜 일이 아니면 즉시 일어나지도 말라. 부모가 부르면 책을 덮고 바로 일어나며, 손이 오면 읽는 것을 멈추되 귀한 손님이 오면 책을 덮는다. 밥상이 들어오면 책을 덮되 반쯤 읽었으면 그 횟수는 끝마치며, 밥 먹고 나면 바로 일어나 천천히 거닐고, 밥이 소화되고 나면 다시 읽는다.

 

부모가 병이 나면 일과(日課)를 폐하고, 재계(齋戒)를 할 때는 일과를 폐하고, ()을 당하면 일과를 폐한다. 기공(朞功)의 상()에 이미 성복(成服)했으며 집이 다를 경우는 일과를 시작한다. 친구의 상사(喪事)에는 아무리 멀어도 학업을 같이 하던 사람이면 달려가 조문하고 일과를 폐한다.

 

글을 읽다가 예전에 잘 몰라서 질문을 한 적이 있던 대목을 만나면 탄식하고, 잘 몰라서 의심이 나는 대목을 만나면 탄식하고, 새로 깨닫게 된 것이 있으면 탄식한다.

 

삼년상에는 장례를 치른 뒤에 예서(禮書)를 읽고, 동자(童子)는 평상시와 같이 글을 읽는다.

 

어떤 이가 묻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아버지가 보던 책을 선뜻 읽지 못하는 것은 손 때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집에 전해 내려오는 책은 다 선반에 얹어 두고 읽지 않아야 하는가?”

하였는데, 답하기를,

 

옛날에 증석(曾晳)이 양조(羊棗 고욤)를 즐겨 먹었으므로 그 아들인 증자(曾子)는 양조를 먹지 않았다.”

하였다.

 

마치 부모의 명을 들으면 머뭇거리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친구와 더불어 약속을 하면 곧바로 실천할 것을 생각하듯이,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글 읽는 방법이다.

 

천하 사람들이 편안히 앉아 글을 읽을 수 있게 한다면, 천하가 무사할 것이다.

 

 

[D-001]조목 중에 : 원문은 就條中인데, 이본들에는 남아 있는 조목 중에就存條中로도 되어 있다.

[D-002]아들 …… 쓰다 : 박종채의 과정록(過庭錄) 4 일찍이 사훈(士訓)이라는 글을 지으셨는데, 학자가 글을 읽는 취지를 많이 논하셨다. 문집에 있지만 빠진 곳이 매우 많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글을 가리킨다.

[D-003]지위로 …… 존재이다 : 원문은 以位 則無等也 以德 則雅事也인데,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서 맹자가 한 주장에 근거를 둔 말이다. , () 나라 목공(繆公)이 자사(子思)에게 옛날에 제후가 선비를 벗 삼았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묻자, 자사가 불쾌해하면서 옛사람의 말에 그를 섬긴다고 했을지언정, 어찌 그를 벗 삼는다 했으리요.”라고 답하였다. 맹자는 이 말을 풀이하기를, 자사가 불쾌해한 이유는, “지위로 말하면 그대는 임금이요 나는 신하인데 어찌 감히 임금과 벗을 할 것이며, 덕으로 말하면 그대는 나를 섬기는 사람인데 어찌 나와 벗이 될 수 있으리요.以位 則子君也 我臣也 何敢與君友也 以德 則子事我者也 奚可以與我友라고 생각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D-004]나타난 …… 밝다 :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나온다.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에 따르면, 비록 상위(上位)에 있지는 않으나, 천하가 이미 그의 교화를 입었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D-005]송 광평(宋廣平) …… 했으니 : 송 광평은 당() 나라 현종(玄宗) 때의 명신으로, 광평군공(廣平郡公)에 봉해진 송경(宋璟 : 663~737)을 가리킨다. 연공(燕公)은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진 장열(張說 : 667~730)을 가리킨다. 송경과 장열이 함께 봉각사인(鳳閣舍人)으로 재직할 때, 무후(武后)의 총신(寵臣) 장역지(張易之)가 어사대부(御史大夫) 위원충(魏元忠)을 모함하면서 장열을 증인으로 끌어들이자, 송경이 장열에게 어전(御前)에서 결코 위증(僞證)하지 말도록 당부하면서 만대(萬代)에 존경을 받는 것이 이 일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舊唐書 卷96 宋璟傳

[D-006]환관이나 …… 사람이야말로 : () 나라 때 인종(仁宗)이 왕소(王素)에게 고관 중 재상(宰相) 직을 맡길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자, 왕소가 오직 환관과 궁첩들이 성명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선택할 만하다.”고 직언하였다. 이에 인종은 부필(富弼)을 재상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4

[D-007]노중련(魯仲連) …… 물러갔으니 : () 나라 군대가 조() 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일개 선비인 노중련이 자청하여 나서 위() 나라 장수 신원연(新垣衍)을 상대로 진 나라 왕의 폭정(暴政)을 성토하고 자신은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진 나라의 백성은 되지 않겠노라고 하면서 조 나라를 돕도록 설득하여 감동시킨 결과 신원연이 마음을 돌렸으며, 그 소문을 듣고 진 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물러간 고사를 말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D-008]어진 …… 병들었네 : 시경 대아(大雅) 첨앙(瞻卬)  5 장의 한 구절이다.  시경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9]하많은 …… 편안하셨네 :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  3 장의 한 구절이다.

[D-010]천자가 …… 것이요 :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은 고대 중국의 천자가 설립하여 부형(父兄)의 예()로써 봉양했다는 직위이다. 정현(鄭玄)의 설에 따르면 이들은 각 1인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연로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 및 악기(樂記)에 관련 내용이 있다.

[D-011]천자의 …… 것이다 :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세 가지 선()을 모두 얻는 이는 오직 세자뿐이다. 그 한 가지 일이란 태학에서 나이에 따른 순서를 지키는 일을 말한다.”고 하였다. 원문의 天子之元子適子에서 適子 衆子라고 해야 온당할 듯하다. 주자(朱子)의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 15세가 되면 천자의 원자와 중자(衆子)로부터 공경 · 대부 · 원사(元士)의 적자(適子)와 범민(凡民)의 수재(秀才)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학에 입학한다고 하였다.

[D-012]소위(素位)의 선비 : 평소의 처지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선비라는 뜻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14 장에 군자는 평소의 처지에 따라 행동하지,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고 하였다. 여기서  자는 앞 문장에서 근원으로 번역한  , ‘본디로 번역한  자와 의미가 상통하는 단어이다. 모두 평소, 평상, 본래, 본바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D-013]본디 선비雅士 : 여기서 雅士는 아정(雅正)한 선비나 고아(高雅)한 선비라는 일반적인 뜻이 아니라, 앞에서 천자는 원래 선비原士라고 한 것과 같은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 연암은  자를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고 있다.

[D-014]해진 …… 같았도다 :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증자(曾子)가 몹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해진 신발을 끌고 시경의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했다.曳縰而歌商頌 聲滿天地 若出金石고 하였다. 연암은 曳縰 縱屣로 고쳐 인용하였다.

[D-015]공자가 …… 말씀하셨다 : 논어 술이(述而) 공자가 평소 늘 말씀하신 바는 시경 서경과 지켜야 하는 예()이니 이 셋에 대해 평소 늘 말씀하셨다.子所雅言 詩書執禮 皆雅言也고 한 구절을 조금 고쳐 인용한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종래의 해석은 구구한데, 여기에서 연암은  자를 바르다는 뜻보다 평소 늘素常이라는 뜻으로 보았던 듯하다.

[D-016]안자(顔子) …… 않았다 : 원문은 顔子屢空 不改其樂인데, 논어 선진(先進) 안회는 도에 가까운저! 그러나 자주 굶주리는구나.回也 其庶乎 屢空라는 공자의 말과 옹야(雍也)에서 어질구나,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추한 동네에서 살게 되면 남들은 우울해 마지않는데, 안회는 그 즐거운 마음을 변치 않는다. 어질구나,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한 공자의 말을 합쳐서 줄인 것이다.

[D-017]안로(顔路) : 안회의 아버지이다. 역시 공자의 제자로서 이름은 무요(無繇)이고, ()는 그의 자()이다. 안회가 죽었을 때 안로가 가난하여,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서 곽()을 갖추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나 공자는 이를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史記 卷67 仲尼弟子列傳

[D-018]쌀을 …… 것이며 : 공자가어(孔子家語) 2 치사(致思), 자로(子路)가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부모를 위해 백 리 밖에서도 쌀을 짊어지고 왔는데爲親負米百里之外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스러워하자, 공자가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D-019]천착(穿鑿)하는 것 : 어떤 한 가지 사항에 대하여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이치에 닿지 않는 주장을 펴는 것을 말한다.

[D-020]경전으로써 유추해 본다 : 원문은 以經傳反之인데, 여기서  자는 유추(類推)한다는 뜻이다. 논어 술이(述而) 한 모서리를 들어 보였는데도 나머지 세 모서리를 유추하지 못하면 다시 일러 주지 않았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고 하였다.

[D-021]주례(周禮) …… 저술인저 : 정현(鄭玄) 주례 천관(天官) 총재(冢宰) ‘惟我王國의 주()에서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을 하면서 육전(六典)의 직책을 만들고 이를 주례(周禮)라고 불렀다.”고 하여 주례를 주공의 저술로 보았다. 이것이 후세에 통설이 되었으나, 그에 대한 반론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유흠(劉歆)의 위작설(僞作說)이다. , 왕망(王莽)의 명에 따라 유흠이 지어냈다는 것이다.

[D-022]왕망(王莽) …… 그르쳤다 : () 나라 때 정권을 찬탈한 왕망이 주례를 모범으로 삼아 관제(官制)를 개혁하려고 한 사실과, 그와 마찬가지로 북송(北宋) 때 왕안석(王安石) 주례를 모범으로 삼아 신법(新法)을 추진한 사실을 비판한 말이다.

[D-023]중니(仲尼) …… 아니겠는가 : 원문은 仲尼豈不是至公血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으로, 주자의 답진동보서(答陳同夫書)에 나오는 구절이다. 晦庵集 卷28 연암은 孔子 仲尼로 고쳐 인용했다. 맹자에 대해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했다고 한 것은 맹자가 이단(異端) 배척에 힘쓴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D-024]나를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D-025]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하에 나오는 말이다.

[D-026]공자가 …… 하였다 : 사기(史記) 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오는 말을 약간 고쳐 인용한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에서도 공자는 나를 몇 해를 더 살게 해 주어 쉰 살에 주역을 배운다면 큰 허물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하였다.

[D-027]십익(十翼) : 주역에 대해 공자가 저술한 것으로, 단전(彖傳) 상하, 상전(象傳) 상하, 계사전(繫辭傳) 상하,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을 말한다.

[D-028]중니(仲尼) …… 때문이다 : 논어 이인(里仁), 공자가 나의 도는 한 가지 이치로 일관되어 있다.”고 하자 증자만이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들이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부자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라고 증자가 대답하였다. 주자(朱子)와 정자(程子)는 이 충서(忠恕)’ 주역 건괘(乾卦)에서 말한 건도(乾道)로 확대 해석하였다. 연암은 논어집주(論語集註)에 소개된 이들의 해석을 따라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D-029]주역으로 …… 때문이다 : 중용(中庸)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안회의 사람됨이 중용을 택하여 한 가지 선()을 얻으면 마음속에 늘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연암은 이 구절을 약간 고쳐 인용하였다. 그리고 이와 호응하는 대목이 주역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주역 계사전(繫辭傳)에서 공자가 안씨(顔氏)의 아들은 거의 도()에 가까울 것이다. 불선(不善)한 점이 있으면 일찍이 모른 적이 없고, 알고 있으면 다시는 행하지 않았다. ()에 이르기를 멀리 가지 않고 돌아와 뉘우침에 이르지 않을 것이니, 크게 길하리라.不遠復 无祗悔 元吉 하였다.”고 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D-030]거기에는 …… 하겠습니까 : 자로(子路)가 학식이 부족한 자고(子羔)를 비읍(費邑)의 읍재(邑宰)로 천거한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공자가 남의 아들을 해치는구나.”라고 하자, 자로가 거기에는 인민도 있고 사직도 있으니 어찌 꼭 글을 읽어야만 학문을 한다 하겠습니까.”라고 항변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論語 先進

[D-031]대숙(大叔) : 누구의 자()인지, 아니면 친척을 가리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D-032]도연명(陶淵明)은 고아(高雅)한 선비였다 : 원문은 陶潛雅士也인데, 여기서 아사(雅士)’라 한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고상하고 멋을 아는 선비를 가리킨다. 연암이 말하는 본디 선비라는 뜻의 아사(雅士)’와는 다르다. 연암은 도연명과 같은 유형의 인물을 아사(雅士)’로 여기는 풍조를 비판한 것이다.

[D-033]아침에 …… 좋다 : 논어 이인(里仁)에 나오는 말이다.

[D-034]글자를 거꾸로 …… 말라 : 원문은 字毋倒 字毋傍인데, 이덕무(李德懋) 사소절(士小節) 8 동규(童規) 교습조(敎習條)에 독서와 관련하여 거꾸로 읽지 말며 …… 글줄을 건너뛰어 읽지 말라.勿倒讀 …… 勿越行讀고 하였다.

[D-035]기공(朞功) …… 경우 : 상기(喪期) 1년인 경우를 기복(朞服)이라 하는데 조부모 · 백숙부모 · 형제자매 · 처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하고, 9개월인 경우를 대공(大功)이라 하는데 사촌 형제자매의 상이 이에 해당하고, 5개월인 경우를 소공(小功)이라 하는데 증조부모 · 재종형제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바로 뒤에 집이 다름異宮’, 즉 분거(分居)가 나오므로, 형제의 상()으로 보아야 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전() 형제는 사체(四體)이다. 그러므로 형제는 의리상 나누어서는 안 되지만 그런데도 나누는 것은, 자식으로서 편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자식이 제 부모를 편애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자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궁(東宮) · 서궁(西宮) · 남궁(南宮) · 북궁(北宮)을 두어, 거처를 달리하되 재산은 공유한다.異居而同財고 하였다. 형제는 한 몸이므로 동거동재(同居同財)함이 원칙이나, 동거(同居)하면 백부(伯父)를 섬기는 데 힘을 다해야 하므로 각자의 부친을 섬기는 데 소홀히 할 우려가 있어 주거를 달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D-036]글을 …… 탄식한다 : 원문에는 앞의 단락과 연결되어 있으나, 내용상으로 보아 별개의 단락으로 나뉘어야 한다.

[D-037]아버지가 …… 때문 : 예기(禮記) 옥조(玉藻)에 나오는 말이다.

[D-038]옛날에 …… 않았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오는 말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증자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양조를 차마 먹지 못했다고 한다.

[D-039]곧바로 실천할 것 : 원문은 無宿諾인데, 논어 안연(顔淵) 자로(子路)는 승낙한 일을 묵혀두지 않았다.子路無宿諾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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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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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1 조부 자헌대부(資憲大夫)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증시(贈諡) 장간공(章簡公) 부군(府君) 가장(家狀)

2 승지 증() 이조 판서 나은(懶隱) 이공(李公) 시장(諡狀) 사신(詞臣) 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3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부군(府君) 묘표음기(墓表陰記) 금성위(錦城尉 : 박명원朴明源)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4 문효세자(文孝世子) 진향문(進香文) 의빈(儀賓) 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5 정종대왕(正宗大王) 진향문(進香文)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6 양 경리(楊經理) () 치제문(致祭文) 사신(詞臣)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7 형 상서(邢尙書) () 치제문(致祭文)

8 연분(年分) 가청(加請) 장계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무오년(1798, 정조 22)

9 연분 가청 장계 정사년(1797, 정조 21)에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10 둔암집서(遯庵集序) 남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11 공손앙(公孫鞅)이 진() 나라에 들어가다

 

 

 

조부 자헌대부(資憲大夫)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증시(贈諡) 장간공(章簡公) 부군(府君) 가장(家狀)

 

부군의 휘는 필균(弼均), 자는 정보(正甫), 초휘(初諱)는 필현(弼賢)이다. 우리 박씨는 계통이 신라에서 나왔으며, 나주(羅州)의 반남현(潘南縣)에서 성()을 얻어 반남인이 되었다.

고려 공양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낸 휘 상충(尙衷)이 맨 먼저 상소를 올려 명() 나라를 받들 것을 청하였는데 그 사실이 고려사 본전(本傳)에 실려 있으며, 우리 왕조에서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추증하였다. 문정공의 아들 휘 은()은 우리 태종대왕을 도와 좌의정에 올랐고 시호가 평도(平度)이다. 여러 대를 지나 휘 소()는 사간(司諫)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인데, 세상 사람들이 야천선생(冶川先生)이라 불렀으며 부군에게는 6세조가 된다. 휘 응복(應福)을 낳았는데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고조(高祖)는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휘 동량(東亮)인데, 공훈을 세워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증조(曾祖)인 금양위(錦陽尉) 휘 미()는 선조(宣祖)의 제 5 녀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조부는 첨정(僉正)을 지낸 휘 세교(世橋)인데 이조 판서 금흥군(錦興君)에 추증되었다. ()의 휘는 태길(泰吉)인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종숙부 문순공(文純公) 세채(世采)에게 사사(師事)하였고 뛰어난 행실로 명성이 사우(士友)들 사이에 자자하였으나 일찍 졸()하였다. ()는 칠원 윤씨(漆原尹氏) 진사 선적(宣績)의 따님으로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부군은 숙종 11년 을축년(1685) 정월 1일에 태어났다. 다섯 살에 부친을 여의고 중부(仲父)인 교리공(校理公) 태만(泰萬)도 곧이어 졸하였으므로 부군은 종형(從兄)인 금녕군(錦寧君) 필하(弼夏)에게 양육을 받았는데, 금녕군의 아들인 판서공(判書公) 사익(師益)과 참판공(參判公) 사정(師正)이 모두다 부군보다 나이가 많았다. 부군이 어려서 학문을 시작하여 약관에 이르러서는 경사(經史)를 널리 통하였는데, 이는 모두 그들을 따라 배운 덕분이었다.

금녕군이 오랫동안 담화병(痰火病)을 앓던 중에도 부군을 사랑한 것은 유독 지성(至性 극히 선량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병이 심하게 되자 발자국 소리와 문소리를 특히 싫어하였으나 부군의 발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만은 탓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군이 그 안색을 먼저 살핀 다음에 아들들을 데리고 와 뵙게 하였으며, 아들들이 매일 밤늦은 시각에 땔감을 가지고 아궁이 앞에 서 있다가 부군이 몰래 전하는 기침 신호를 받은 뒤에야 감히 불을 지피곤 하였다. 혹 그 틈을 얻지 못하면 날이 차고 눈이 얼어붙어도 문 안팎에서 함께 날을 새며 서로 가엾이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무릇 이와 같이 하기를 8, 9년이 되도록 하루같이 하였다. 그래서 판서공 형제는 부군의 은덕이 골육보다 낫다고 감격해하였으며, 부군이 비단 양육해 준 이에게 효도를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효를 실천하도록 만들어 주기까지 한 것을 온 집안이 모두 칭송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대부들 사이에 언론이 서로 엇갈려 각각 자기가 어질게 여기는 이를 스승으로 삼아, 비록 한집안일지라도 지향하는 바가 동일하지 않으면 나가는 길이 서로 달라지곤 하였다. 부군의 사촌 형제 수십 명 중에 부군의 나이가 가장 적었지만 명론(名論 명분론)은 가장 고명하였다. 종형 여호선생(黎湖先生) 필주(弼周)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는, 장차 한강 밖으로 은둔할 계획으로 부군의 어린 아들을 데려다 양자를 삼고 가사(家事)를 모두 부군에게 맡기면서 출처(出處 벼슬길에 나서는 문제)로써 부군을 권면하여 말하기를,

 

나는 죄를 짊어지고 태어난 몸이라  선생이 태어나자마자 모부인(母夫人)이 첫 국밥도 들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세상에 나갈 뜻을 끊고 지냈는데 지금 허명(虛名)으로 자신을 그르치게 되었으니, 부득불 한강을 경계로 삼아 그 너머에서 몸을 마치려 하네. 우리 아우는 재주나 학식이 모두 넉넉한데도 평생토록 과거를 보지 않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몸과 집안을 일으킬 작정인가?”

하니, 부군은 썩 즐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천하의 의리가 무궁하다지만 끝내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은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조야(朝野)에서 이익을 농단(壟斷)하려는 사람이 많지만 만약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을 잘못 끌어들여 이익을 독점하려고 한다면 우리 집안의 의론(議論)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우리 집안의 양대(兩代) 비갈(碑碣)은 대로(大老 송시열(宋時烈))께서 지은 것이요, 우리 중부(仲父 박태만(朴泰萬))께서 청한 것입니다. 우리 중부께서 불행히 세상을 일찍 떠나셨으나, 예전부터 팔학사(八學士)의 칭호를 받았는데 세상에서 국시(國是)를 어기는 자들이 멀리서 받들어 존중하였으니, 이를 어찌 변론하여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남구만(南九萬)과 유상운(柳尙運)이 각자 제 몸을 위하는 꾀를 내어 사론(邪論)을 주창했으니 이는 진실로 해독을 백세에 끼칠 것입니다. 그런데 유상운은 우리 집안의 외손이므로 그에 연루되어 점차 물들고 있으니,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을 끊지 않는다면 이 어찌 우리 집안의 큰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 집안의 명론(名論)이 진실로 바르게 된다면, 내가 과거 보는 것이 아무리 늦더라도 다시 무엇을 한스럽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다. 급기야 경종(景宗) 초년에 남구만과 유상운의 무리가 크게 무옥(誣獄)을 일으켜 건저(建儲)한 여러 대신을 죽이고 사류(士類)들을 마구 없애자 부군은 통진(通津)의 묘소 아래 은거하였다.

영종(英宗) 원년 을사년(1725)에 비로소 정시(庭試)에 응시하여 병과(丙科)에 들었으니, 이때 나이 벌써 41세였다. 대개 한 번의 응시로 급제하는 경우는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이해에 왕세자를 책봉하고 시강원(侍講院)의 요속(僚屬)들을 엄선하였는데, 참하관(參下官 7품 이하 관원)은 청망(淸望)으로서 겸함(兼銜)을 더욱 중히 여겼다. 이때 부군은 아직 분관(分館)이 되지 못하였는데도 상례(常例)를 뛰어넘어 특별히 겸설서(兼說書)에 제수되었고, 얼마 후 한림(翰林 예문관)에 천거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가 대교(待敎)에 올랐다.

병오년(1726)에 모친 윤부인(尹夫人)의 상을 당하여 삼년복을 마치고, 도로 한림에 들어와 봉교(奉敎)로 올랐다. 무신년(1728) 이전에 제수받은 것은 다 구명(舊名 필현(弼賢))으로 받은 것이고 봉교 이하의 관직부터는 지금 이름으로 받은 것이다.

기유년(1729) 경종실록(景宗實錄)이 완성되자 4월에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에 수장하고 이어 선조(先朝 경종(景宗))의 사첩(史牒)을 고출(考出)하였다. 임금이 한림을 새로 추천할 것을 재촉하여, 부군이 추천을 맡는 것을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혹자가 김약로(金若魯)를 넣어 달라고 부탁하자 부군이 말하기를,

 

내가 예전에 김사직(金士直 김약로의 아버지 김유(金楺))을 조상(弔喪)하였는데 여러 아들 가운데 눈이 붉은 자가 있더니 이자가 바로 그자인가?”

하였다. 분향고사(焚香故事)에 추천을 맡은 자는 추천장을 소매에 넣고 한림의 선배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는데, 예문관에 소속된 하인이 먼저 문으로 들어가 소리 높여 손님을 물리치라고 하면, 아무리 대관(大官)이라도 전에 검열을 지낸 사람이 아니면 으레 다 자리를 피해야 한다. 그리하여 찾아온 사람과 주인이 처음부터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새 추천장을 꺼내 보여 털끝만큼의 하자도 지적되지 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완천(完薦 추천 완료)이 되었으니, 그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이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중히 여긴 까닭이다.

이때에 문벌(門閥)과 재학(才學)이 막상막하인 자가 오륙 명이었는데 급기야 신만(申晩)과 윤급(尹汲)을 한원(翰苑 예문관)에 추천해 들이자, 온 세상이 떠들썩하여 모두 부군을 허물하며 오로지 외모만 취하였다.’ 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관옥(冠玉)같이 아름다운 자라고 해서 반드시 내실을 갖춘 것은 아니다.’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어찌 그리 기탄이 없는 것이 그렇게도 제 외숙을 닮았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부군을 위하여 걱정하며 눈이 붉은 자가 두렵다.’ 하더니, 마침내 이것이 구실이 되어 원망하는 뭇사람 중에 김약로가 특히 심하였다. 얼마 안 가서 마침내 대간(臺諫)의 진언(進言)으로 추천이 폐기되었고 부군은 이로 인하여 삭직되었다가, 곧 서용(敍用 복직)되어 6품에 올랐다. 경술년에 비로소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전에 임금이 새로 즉위하자 제일 먼저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 등 여러 역적을 베고 네 충신을 위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두어 해가 못 가서 저쪽 사람들이 다시 국권을 잡게 되어 네 충신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였으니, 이를 정미진퇴(丁未進退 정미환국)라 한다. 무신역변(戊申逆變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있은 이후로 구신(舊臣)들을 거두어 서용하여 차츰차츰 조정에 다시 서게 하였지만, 이로부터 충역(忠逆)이 뒤섞이게 되고 시비(是非)가 똑같아지는 등 당파 간의 조정(調停)에만 힘을 쏟아 마침내 탕평책(蕩平策)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충민공(忠愍公)과 충익공(忠翼公)의 관작만을 회복시키고 충헌공(忠獻公)과 충문공(忠文公)은 죄안(罪案) 속에 그대로 두었음에도 그 원통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없더니, 부군이 상소를 올려 극언하기를,

 

두 신하가 신원(伸寃)되지 못하면 성상(聖上)에 대한 무고도 씻을 수 없고, 뭇 흉적(凶賊)을 그대로 키우면 임금의 원수 역시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한() 나라와 역적은 양립하지 못한다는 것은 의리가 본시 두 가지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네 신하는 바로 한 몸인데, 반은 신원이 되고 반은 신원이 되지 않아 두 갈래로 나눠진다면, 이는 비유컨대 중풍을 앓는 사람이 몸의 반만 마비가 되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불인(不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이 이를 남의 일 보듯이 하여 조금도 구제하려 하지 않으니 그 불인이 너무 심하다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하시고 싶은 일이 어찌 나라의 원칙을 세우는 정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시비(是非)를 전도시키고 억지로 호대(互對)를 찾고 있으니, 이는 이른바 그 뿌리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그 끝만 맞추려는 것입니다. 나라의 원칙을 세우는 일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관직을 임명하고 토죄(討罪)를 명하는 것이 올바른 천리(天理)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마침내 사의(私意)를 면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본원(本源)을 다지는 입장에서 만약 이 병폐를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잘 다스리고자 하여도 아마 그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장령(掌令) 윤흥무(尹興茂)가 이를 두고 부군이 당을 비호한다고 질책하면서 삭직을 요청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 신해년(1731)에 비로소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소명(召命)을 어겼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7월에 다시 정언에 제수되자 상소를 올리기를,

 

선왕(先王 경종(景宗))께서 병이 있으시고 후사마저 없으므로 당시 대신들이 선왕의 수필(手筆)을 받들고 자성(慈聖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언교(諺敎 언문 교서)를 받들어 종사(宗社)를 위하여 왕세제를 세웠으니 이는 대신으로서 해야 할 정상적인 직임인데, 불행히도 세도(世道)가 뒤바뀌어 새 죄안(罪案)을 억지로 첨가했으니, 어찌 거듭 원통할 일이 아니리까. 신이 지난번 상소에서 신원을 청한 것은 온 나라의 공통된 정론(正論)인데, 윤흥무가 갑작스레 당을 비호한다 일렀으니, 그가 비록 감히 그 일을 바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동과 언사에서 그 정상이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특명으로 상소를 돌려주고, 소명을 어긴 죄로 파직시켰다.

임자년(1732)에 용인 현령(龍仁縣令)으로 나갔으며, 계축년(1733)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선발되었다가 교리로 승진하였고, 또 옮겨서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가 도로 수찬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다 취임하지 않았다. 시강원(侍講院)의 사서(司書), 겸사서(兼司書), 문학(文學), 보덕(輔德)을 지내고, 그 사이에 학교수(學敎授 사학(四學)의 교수), 별겸춘추(別兼春秋), 훈국랑(訓局郞 훈련도감의 낭관(郎官)),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맡았다.

경신년(1740)에 부응교(副應敎)에 제수되고 그해 6월에 효종(孝宗)의 휘호(徽號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할 때 대축(大祝 축관의 우두머리)의 직임을 맡은 노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받았다. 8월에 임금이 존호를 받을 때 예방승지(禮房承旨)를 맡은 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고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9월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고, 10월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병조 참판으로 옮겼다.

신유년(1741) 8월에 지방관으로 나가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었는데, 임금이 능()을 알현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양(高陽)에 이르러 궁시(弓矢)와 호피(虎皮)를 하사했다. 10월에 당시 정승이 표재(俵災)의 일로 논계(論啓 잘못을 따져 아룀)하여 파직되었다.  가을에 장단(長湍)을 순시하였는데, 부사 윤경룡(尹慶龍)이 재해 보고를 사실보다 지나치게 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아전을 추궁하고 내사하자 윤경룡이 세도 재상 조현명(趙顯命)에게 부탁하여 조현명이 파직을 청하는 계사를 올린 것이다.  곧이어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교체되었으며, 좌윤(左尹)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호조 참판으로 옮겼다.

갑자년(1744)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병인년(1746)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고, 무진년(1748)에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경오년(1750)에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무인년(1758)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제수되었는데, 임금의 특명으로 입시(入侍)하자 내시를 시켜 부축하여 전(殿)에 올라오게 하며 말씀하기를,

 

경을 본 지 지금 몇 해가 지났도다.”

하고는, 앞으로 나와 용안(龍顔)을 쳐다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스스로 용수(龍鬚)를 쓰다듬으며,

 

똑똑히 보이지 않소? 수염과 털이 이렇게 다 희었다오.”

하고서, 이어 전교(傳敎)를 내리기를,

 

이 사람은 염담(恬淡)하여 내가 늘 가상하게 여겨 왔다. 마땅히 한() 나라에서 탁무(卓茂)를 봉한 예를 본떠 특별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하여 예전부터 노인을 존대하던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경진년(1760)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되고 그 사이에 금오(金吾 의금부)의 총부(摠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와 괴원(槐院 승문원)의 제거(提擧)를 겸임하였다. 무릇 한 벼슬에 거듭 제수된 것은 다 기록하지 않았다.

그해 8월 초이튿날에 세상을 뜨시니 수() 76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이 조제(弔祭)를 내리고, 며칠 후에 교서를 내려 돌아가신 이를 애도하고 유사(有司)에게 별도로 명하여 쌀과 포목을 더 하사하여 상사(喪事)에 쓰도록 하였다. 10월 초이렛날 광주(廣州) 초월면(草月面) 학현(鶴峴)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계해년에 양주(楊州) 별비면(別斐面) 성곡(星谷) 술좌(戌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부군은 타고난 성품이 고결하고 담박하여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털끝만큼도 세속의 영욕을 가슴속에 담아 본 적이 없었다. 일찍이 선비의 평소 행실을 논하여 말하기를,

 

그릇이나 물건 따위를 남에게 줄 경우에 반드시 이를 깨끗이 씻고 여러 겹 싸서 조심스레 만지거늘 하물며 임금에게 자신의 몸을 바치고자 하면서 먼저 자신을 더렵혀서야 되겠는가. 이는 그 임금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부군은 조정에서 벼슬한 지 30년이 되도록 전답이나 자산이 백금(百金 100)도 되지 않았으며, 성 아래 있는 허름한 집이 값으로 치면 돈 30꿰미에 불과했으나 죽을 때까지 거처를 바꾸지 않았다. 오직 늙은 종 하나를 두었는데 거친 밥이나마 배를 채우지 못했음에도 죽는 날까지 주인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진신(搢紳 높은 벼슬아치)들과도 왕래하는 일이 전혀 없어서, 이병태(李秉泰) · 정형복(鄭亨復) · 황재(黃榟) 등 세 분이 부군과 가장 친한 사이라 하는데도 일 년에 대개 한두 차례 오가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겉과 속이 진솔하여 격의를 두지 않았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예로부터 자신의 몸을 깨끗이 지키고 권도(權道)에 따라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명예나 이익이 따라붙을 것 같으면 이 또한 어찌 의리를 세운 본뜻이겠는가.”

하였다. 세간에 이 말을 듣고 종신토록 유감을 풀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조만간 부군이 이조(吏曹)의 관직에 제수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때마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하여, 물의(物議)가 자못 비등하였다. 그러나 부군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체하였다. 전법(銓法)에 당하관(堂下官)의 통색(通塞 승진 문제)은 붓을 잡은 낭관이 주관하게 되어 있다. 낭관이 후임자를 자천(自薦)할 때가 되자 이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느닷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낭관을 주시하니 낭관이 두려워 일어나 뒷간으로 나갔다. 김취로가 갑자기 부군을 홍문관 응교로 의망(擬望)하니 아전이 옛 규례를 고집하며 곧바로 승차(陞差 승진 임명)할 수 없다고 하자, 김취로가 꾸짖어 말하기를,

 

낭관이 붓을 던지고 일어나 나갔으니, 오늘 승차를 의망한 것은 바로 옥당(玉堂 홍문관)의 구차(久次 오래 승진이 지체되는 자리)이다.”

하였다. 이처럼 부군이 벼슬길에서 낭패를 본 까닭은 실로 한천(翰薦) 한 가지 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다.

판서공(判書公 박사익)이 일찍이 여호선생(黎湖先生 박필주)에게 질문하기를,

 

이여오(李汝五)가 저에게, ‘그대의 집안에 명사(名士)가 둘이 있는데 한 사람은 해오라기가 가을 물가에 서 있어 겉에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모습과 같고, 또 한 사람은 소나무가 아스라한 낭떠러지 위에 솟아나 넝쿨들이 타고 오르기 어려운 모습과 같다.’라고 하자, 이희경(李熙卿)이 이 말을 듣고는 참 좋은 말이라 하면서, ‘이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나약한 자에게 뜻을 세우게 할 수 있고 탐욕스러운 자를 청렴하게 만들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비유로 말한 저 두 인물 가운데 누가 나은가요?”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과연 그렇겠다! 시숙(時叔)은 꼿꼿하고 정보(正甫 박필균)는 담박하지. 담박한 사람은 어리숙한 듯이 보이나 실상은 꼿꼿하고, 꼿꼿한 사람은 오만한 듯이 보이나 실상은 담박하니, 이들은 대체로 두 사람이면서도 한 몸이나 마찬가지이겠지.”

하였다. 시숙(時叔)은 참판공(參判公 박사정)의 자()이다.

급기야 참판공의 아들 명원(明源)이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성위(錦城尉)로 봉해지고, 참판공이 얼마 후 돌아가시자 집안에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조정에 선 자가 없게 되었다. 부군은 등과(登科)하여 16년이 지난 뒤에도 백발의 늙은 학사(學士)로 지냈으며, 늦게서야 비로소 당상관에 올랐으니, 한미한 가문 출신의 평범한 진출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처음에는 임금의 촉망을 받고 있는 줄을 알지 못했다. 승정원에서 숙직할 때에, 밤에 임금이 부군을 불러 물으시기를,

 

승지는 지금 나이가 몇이며, 집은 어디에 있는가? 왜 집을 성안으로 옮겨 살지 않는가?”

하였다. 이때 우사(右史)만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임금이 우사에게 밖으로 나가서 정명(政命)을 전달하라고 명하자, 부군이 황공하여 물러나려고 하니 임금이 갑자기 앞으로 나오라 명하고는 말씀하기를,

 

존호(尊號)를 받는 것이 내가 즐겨하는 바는 아니지만 동조(東朝)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 여러 신하들의 청을 마지못해 따른 것인데 이제(李濟)가 소를 올려 경계의 말을 하였으므로 나는 실로 부끄러웠다. 내시들이 이것(존호를 받는 것)은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하지만, 저들이 어찌 감히 조정의 논의에 간여한단 말인가. 승지는 친인척(親姻戚)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니 바깥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

하였다. 부군이 물러나서 생각해 보니 황송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생각지도 않게 하루아침에 두 자급(資級)을 뛰어오르는 은택을 입은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규례에 따라 도승지에 오르게 되자 열이레 동안 병을 핑계 대고는 마침내 나아가 숙배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다시는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화평옹주가 처음 시집을 올 때 의식을 가례(嘉禮 사가(私家)의 혼례)와 똑같이 하여 당시에 종족(宗族)과 빈객(賓客)들이 모두 다 모였다. 그들의 생각에, 부군이 벽제(辟除)를 잡히고 초헌을 타고 와서 상석(上席)을 맡게 된다면 비단 이날에 문호(門戶)를 빛내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부마를 위해서도 빛이 나리라 여기어, 느지막에 종질(從姪) 아무개가 와서 부군에게 권하기를,

 

숙부가 오시지 않으면 자못 실망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하니, 부군은 놀라며 하는 말이,

 

옹주의 집을 외인이 어찌 함부로 갈 수 있느냐?”

하였다.

얼마 후 옹주가 정안옹주(貞安翁主 박미(朴瀰)의 부인)의 사당을 알현하였는데, 정안옹주의 후손 중에 지위가 잘 알려진 사람이 사당의 문에서 예의를 갖추라는 중지(中旨)를 받은 데다, 장차 정안옹주에게 치제(致祭)하여 영광이 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부군이 병으로 오지 못하여 향()을 받을 자가 없어서, 마침내 치제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종중(宗中)의 여러 장로(長老)들이 모두 부군을 나무라기를,

 

어찌 병을 무릅쓰고 임금의 명을 받들어서 온 집안의 은영(恩榮)이 되도록 아니 했소.”

하였다.

명원(明源)이 병이 깊어 일 년이 넘자 어의(御醫)가 밤낮으로 간호하고 친척들이 찾아와 문병을 하였으며 날마다 병세를 기록하고 보고하였는데, 유독 부군은 이상하게도 한 차례 안부도 물은 적이 없었다. 명원 역시 일찍이 서운히 여기어 원망하기를,

 

우리 선대(先代)에서도 왕가(王家)와 혼인이 있었는데, 지금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도 소원하게 대하여 마치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긴단 말인가. 유독 우리 선친께서 소싯적에 그 고아 신세를 비호해 준 일은 생각지도 않는가.”

하였다.

종질(從姪) 아무개가 일찍이 부군에게 와서 말하기를,

 

숙부께서는 밖으로는 산림(山林)의 명망을 짊어지고 있고 안으로는 왕실의 친척과 관계를 맺고 있어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앉아서 풍속(風俗)을 진정시킬 수 있으니, 지금의 국시(國是)를 쥐고 있는 자가 어느 누군들 옷깃을 여미고 받들지 않겠습니까? 다섯 사람이 설원(雪寃)되지 못하고 세 흉적이 토죄(討罪)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숙부께서 삼사(三司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에 절대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여러 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이 성상의 은총을 받고 앞길이 확 트여 세도(世道)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저 탕평파(蕩平派)의 신하들까지도 우리 집안의 동정을 몰래 엿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니, 부군이 깜짝 놀라며,

 

너는 본래 우둔한 자인데, 누가 너에게 이 말을 가르쳐 주었으며, 산림이란 너에게 있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위로는 어진 부형에게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어린 자식을 망치려 들려고 하느냐? 이른바 세도라는 것이 어찌 너처럼 일개 늙은 음관(蔭官)이 알 수 있는 바이겠느냐.”

하니, 아무개가 무색하여 말하기를,

 

숙부께서 답답하게도 성벽을 마주하고 앉아 여론을 접하지 않으시기에 특별히 와서 진심을 토로한 것인데, 도리어 성을 내신단 말씀입니까.”

하자, 부군이,

 

돌아가 지금 세도를 행하는 자에게 말하라. 숨바꼭질하듯이 몸을 숨기는 것을 도깨비罔兩라 이르고, 구차스레 득실을 걱정하는 자를 비부(鄙夫 비열한 인간)라 이른다. 나는 진실로 답답하거니와, 어찌 너처럼 자질구레한 자 때문에 지조가 무너지겠느냐. 세상에 공정한 여론이 있다면, 지난번에 내가 갑자기 승진한 것에 대해서 논박을 달게 받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추측컨대 당시 사람들이, 부군이 이미 누차 중지를 어긴 줄을 알지 못하고 근거 없는 소문에만 주목하여 남몰래 청탁할 일이 있게 되자 임금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타진해 본 것인 듯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본시 세상에 영합하여 뜻을 이루었는데, 임금의 마음이 한번 옮겨지고 정대한 여론이 마침내 펴지는 날이면 자신도 한 패거리로 몰려 빠져나오지 못할 것을 다시 두려워하여,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조금이라도 보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부군이 홀로 세상과 영합하지 않아 예전에는 김씨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얼마 전에는 또 요상(僚相)이 모함을 한 사실을 생각하고는, 자주 부군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부군은 그의 언론이 항상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을 평소에 비루하게 여겨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여호선생을 천거하여 이조 판서를 삼았으니, 이것이 바로 그가 세상에 영합하는 술책이었다. 그런데 임금은 본래 생각하기를 산림에 묻혀 뜻을 닦는 자는 세상에 쓰이기에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잠깐 나왔다 곧바로 떠나곤 하여 절차만 번거롭게 할 뿐이다. 게다가 조야(朝野)가 편안하지 못한 것도 대개는 이에 연유한다.’고 하였던 터였다. 하지만 이미 초빙이 되었으므로, 여호선생이 부군(府君)의 집에 와서 처소를 정하니, 처소에 모이는 자가 매일 조정의 절반은 되었다. 정승 조현명(趙顯命)이 찾아오자, 방과 대청이 협착하고 누추하여 여러 조신(朝臣)들이 피해 있을 곳이 없었다. 이에 조현명이 여러 조신들에게 읍을 하고 자리에 나아가 말하기를,

 

오늘은 선생님을 모시고 강론하고 싶은 대목이 있어 여러 분들과 더불어 함께 듣고자 하니, 조정의 예()로써 서먹서먹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소매 속에서 대학(大學)을 꺼내 혈구장(絜矩章)을 강론하기 시작하자 부군이 웃으며,

 

상공(相公)의 혈구(絜矩)는 본디 사슴 가죽으로 된 것인데 어찌하여 사슴을 타고 와서 강론하려 드시오?”

하자, 조현명이 히히 웃다가 얼굴빛이 변하면서 그쳤다. 이날 구경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두들 부군을 위해 걱정하였다.

홍계희(洪啓禧)는 척분(戚分)이 있어 날마다 선생을 모시고 잤는데, 부군이 몰래 선생에게 말하기를,

 

() 나라 수레와 주() 나라 면류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아마도 순서가 바뀐 듯합니다.”

하자, 선생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부군이,

 

“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 하라遠佞人는 대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홍계희가 밤에 부군에게 의견을 묻기를,

 

어제 여호선생이 등대(登對)하셨을 적에 임금께서 친히 손을 잡으시고는 개정(開政)할 것을 독촉하셨으니 한번 명()을 받드는 것이 그만둘 수 없는 일인 듯싶습니다만, 부제학 자리를 만약 신통(新通 새 인물을 후보로 결정함)한다면 피차간에 어려운 점이 있어 중통(重通)만 못합니다. 그렇다면 김상로(金尙魯)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의 말이 비록 남을 위하는 것 같지만 본심은 실로 자기가 맡으려는 것이었다. 이에 부군이 말하기를,

 

이른바 집이 가까워도 사람은 멀다는 격이군요. 그대는 왜 곧장 이조(吏曹)에 가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 거요?”

하였다. 이튿날 홍계희가 우암(尤庵)의 고사를 다분히 끌어대어 여호선생에게 넌지시 말하자, 부군이 버럭 소리를 치기를,

 

우암이 정사(政事)를 했다면 김상로는 제주 목사가 되고 정익하(鄭益河)는 부령 부사(富寧府使)가 되었을 것이오.”

하자, 좌중 사람들이 몸이 오싹하여 서로 쳐다보았다. 이때 홍계희는 벌써 여러 김씨(金氏)들에게 달려가 고자질하여 부군을 위태롭게 하고자 꾀하고, 나아가 선생에게까지 위험이 미치게 하려 하였다. 그러자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제주 목사를 부풀려서 강계 부사(江界府使)니 영월 부사(寧越府使)니 하면서 다투어 상대를 지목하니, 당로자(當路者)들이 모두들 부군을 뼈에 사무치도록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선생이 직접 차자(箚子)를 올리고 진신(搢紳)들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趙泰耈) 등을 토죄(討罪)할 때 유독 김상로 형제만 참여하지 않았으며, 박문수(朴文秀)가 상소를 올려 여호선생을 쫓아냈을 때에 여러 김씨들의 힘이 작용하였으니, 이는 다 홍계희가 한 짓이었다.

9월에 비로소 유봉휘, 조태구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자 세간에서 부군을 편론(偏論)의 도가(都家)로 지목하는 일이 있게 되니, 부군은 스스로 마음이 편치 않아 지방으로 나가기를 구하여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 방어영(防禦營)을 철원(鐵原)으로 옮겨 설치한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두어 달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화평옹주(和平翁主)가 죽자 임금이 갑자기 왕림하시니 백관들이 허둥지둥 걸어서 뒤를 따랐다. 중지(中旨)가 내리기를,

 

시가(媤家)의 존속(尊屬) 한 사람이 입장(入帳)하고 상사(喪事)를 감독하게 하라.”

하였으나, 부군이 성명(成命 공식 왕명)이 내리지 않았다 하여 병을 핑계 대고 가지 않았다. 상이 이틀 밤이 지나도록 환궁하지 않아 대신들이 누차 환궁할 것을 청했으나 거듭 엄한 분부만 듣고 모두 문밖에서 대기하였다. 어떤 사람이 부군을 원망하면서,

 

이때가 어느 때인데 정()으로 보나 의()로 보나 어찌 유독 오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장차 명정(銘旌)을 설치하려고 부군에게 와서 글씨를 요청하자, 부군은 병이 위독하다고 핑계 대고서 쓰지 않았다. 이어 붉은 비단을 그대로 돌려보내면서, 도위(都尉 박명원)에게 편지를 써 나무라기를,

 

듣자니 삼공(三公)이 감히 물러가지 못하고 마구간 사이에 줄지어 있다 하니 이게 무슨 거조(擧措)란 말인가. 오늘날 조정이 아무리 비루하다 한들 어찌 너희같이 조의(朝衣)와 조관(朝冠)을 갖추고 도탄(塗炭)에 앉아 있는 무리들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어이해 제 머리를 깨부수고 제 목을 찌를 듯이 하여 임금의 마음을 빨리 돌리지 않고 내시들과 함께 앉아서 겨우 눈물이나 흘리고 있단 말이냐?”

하였다. 이때 군사 호위가 너무도 엄하여 뭇 신하들을 들여놓지 않았으므로 도위가 실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하다가, 급기야 이 편지를 보고서 어찌할 바를 몰라 뜰에 내려와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니, 임금이 몹시 성을 내며,

 

너도 또한 조정 신하들을 흉내 내느냐? 파직시켜라, 파직시켜라!”

하였다. 얼마 후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파직을 시킨다면 결국 맹만택(孟萬澤)의 경우와 같은 꼴이 될 것이다.”

하고는, 곧바로 그 명을 도로 거두도록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부군이 도위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듣고는 외판(外辦)할 것을 하명하니, 대신이 그제야 비로소 진현(進見)할 수 있게 되어 바야흐로 진언을 드리려 하였으나, 임금이 갑자기 신사철(申思喆)을 꾸짖으며 도로 다시 편전(便殿)의 문을 닫아 버렸다. 그제야 비로소 임금이 치미는 울화가 있어서 다른 일에다 성을 낸 것을 조정의 안팎에서 알게 되었다.

당시에 사대부로서 처신에 능란한 자들에게는 기회를 엿보기에 모든 것이 좋은 때였으나 홀로 부군만이 꿋꿋이 자신을 지켜 조금도 자리를 옮겨 앉지 않았으니, 19년 동안 한산직(閑散職)을 전전한 것만 보아도 그 본말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욕(榮辱)의 사이에도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고, 방촌(方寸 마음)의 사이에 담연(澹然)하여 얽매임이 없었던 것은 오직 부군만이 그러했으니, 비록 당세에 부군을 좋아하지 않던 이들도 또한 청신(淸愼)하고 개제(愷悌 온화함)하다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는 정부인(貞夫人)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우윤(右尹) ()의 따님이다. 3 1녀를 낳으니, 아들은 사유(師愈), 사헌(師憲), 사근(師近)인데, 사근은 현감을 지냈으며 여호선생에게 출계(出繼)했다. 딸은 판관(判官) 어용림(魚用霖)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희원(喜源)과 지원(趾源)인데 지원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손녀는 감역(監役) 이현모(李顯模)와 현감 서중수(徐重修)에게 출가했는데, 다 큰아들 소생이다. 진원(進源)은 일찍 죽고 수원(綏源)은 부사요, 손녀는 황형(黃馨)에게 출가했는데, 사근(師近)의 소생이다. 외손(外孫)에는 군수 어재소(魚在沼)와 어재운(魚在雲)이 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불초 손() 지원이 삼가 쓰다.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조부 …… 가장(家狀) : 연암이 만년에 지은 글이다. 박종채(朴宗采)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당시 연암은 눈이 어둡고 팔이 마비되어 아들 박종채에게 구술해서 이 글을 완성했다고 한다. 純祖實錄에 의하면 순조 5(1805) 1 7일 박필균에게 장간(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연암은 그 해 10 20일에 별세했으므로, 이 글은 그가 남긴 최후의 글이었을 것이다.

[D-001]고려사》 …… 있으며 : 고려사 112 열전(列傳)25에 실려 있다. 박상충(1332~1375)은 이곡(李穀)의 문인이요 사위였으며, 신진 성리학자이자 친명파(親明派)로 활약하다가 반대파에게 암살되었다.

[D-002]모두 …… 덕분이었다 : 원문은 皆肩隨師資也인데,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 나이가 다섯 살이 많은 사람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여 그 뒤를 따라간다.五年以長 則肩隨之고 하였다. 나이 차이가 그 정도밖에 나지 않는 사이였지만 박사익 · 박사정 형제를 스승처럼 여겨 본받았다는 뜻이다.

[D-003]사대부들 …… 하였다 : 숙종(肅宗) 때 서인(西人)이 송시열(宋時烈) 등을 추종하는 노론(老論)과 윤증(尹拯) 등을 추종하는 소론(少論)으로 갈라진 사실을 말한다. 연암의 집안에서도 박세채(朴世采 : 1631~1695)는 소론에 속하였고, 박필주(朴弼周 : 1665~1748)는 노론에 속하였다.

[D-004]우리 …… 것입니다 : 송자대전(宋子大全) 191에 박동량의 묘표인 금계군 박공 동량 묘표(錦溪君朴公東亮墓表)’와 권163에 박미의 신도비인 금양군 박공 미 신도비명(錦陽君朴公瀰神道碑銘)’이 수록되어 있다. 박미의 신도비는 그 손자인 박태만(朴泰萬)이 송시열에게 지어 주기를 청한 사실이 본문에 밝혀져 있다. 박동량의 묘표는 그 손자인 박세채(朴世采)가 송시열에게 지어 주기를 청한 글이었다.

[D-005]팔학사(八學士) : 송시열의 고제(高弟) 8인을 뜻하는 듯하다. 참고로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 한원진(韓元震) · 이간(李柬)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었다.

[D-006]남구만(南九萬) …… 것입니다 : 소론의 지도자였던 남구만(1629~1711)과 유상운(柳尙運 : 1636~1707)은 숙종 20(1694) 합세하여,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오빠 장희재(張希載)를 처형하는 데 반대하고 그를 유배에 처하는 유화 조치를 취하여 노론의 지탄을 받았다. 또한 이 두 사람은 숙종 27(1701) 노론에 맞서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경형(輕刑)으로 다스릴 것을 주장했다가 숙종이 희빈 장씨에게 사사(賜死)를 내리자, 노론의 탄핵을 받고 함께 파직당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왕위 계승 문제에서 소론이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후일의 경종)를 추대한 반면, 노론은 세자의 이복 동생인 연잉군(延礽君 : 후일의 영조)을 추대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유상운은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외손자였다.

[D-007]경종(景宗) …… 없애자 : 남구만과 유상운은 소론의 초기 인물이다. 이 사건은 경종 초기에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세워 대리청정을 하게 한 노론을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 과격파들이 공격하여 대대적으로 숙청을 가한 신임사화(辛壬士禍 : 1721~1722)를 가리키는 것으로, 남구만과 유상운이 이미 죽고 난 후의 일이다. 따라서 남구만과 유상운의 무리는 이들의 영향을 받은 김일경 등 소론 과격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D-008]청망(淸望) : 청환(淸宦)의 의망(擬望)이란 뜻으로, 명예로우면서도 중요한 벼슬자리, 즉 청요직(淸要職)에 삼망(三望)  3인의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천거되는 경우를 말한다. 시강원의 참하관으로는 설서(說書), 겸설서, 자의(諮議)가 있다.

[D-009]아직 …… 못하였는데도 : 과거 급제자를 박사(博士)의 채점에 따라 삼관(三館) 즉 승문원과 성균관과 교서관에 차례로 배치하는 것을 분관(分館)이라 한다. 소정의 점수를 얻지 못해 다음번 분관을 기다리는 사람을 미분관인(未分館人)이라 한다.

[D-010]고출(考出) : 실록(實錄)을 포쇄(曝曬)할 때 취래(取來) · 고출(考出) · 개장(改粧) · 개궤(改櫃) 등의 작업을 하는데, 고출은 실록의 내용을 초록(抄錄)하는 것을 뜻한다. 실록의 포쇄관(曝曬官)으로는 예문관 봉교대교검열이 파견되었다.

[D-011]김약로(金若魯) : 1694~1753.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박세채 · 송시열의 문인으로 이조참판 겸 양관의 대제학을 지낸 김유(金楺 : 1653~1719)의 아들이다. 김약로는 영조 3(1727) 과거 급제 후 승문원 정자가 되고,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좌의정까지 지냈다. 판서를 지낸 그의 형 김취로(金取魯), 우의정을 지낸 아우 김상로(金尙魯), 영의정을 지낸 사촌 형 김재로(金在魯)와 함께 고위직에 있으면서 한때 세도가 매우 컸다.

[D-012]분향고사(焚香故事) : 분향은 예문관에서 한림의 새 후보자를 추천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에 분향하여 고하는 절차를 말한다. 그러나 후보자에게 소시(召試)를 보게 하는 것으로 제도가 바뀌면서 분향하던 절차도 없어졌다. 그러므로 고사(故事)라 한 것이다. 연암집 3 왕고수서한림천기(王考手書翰林薦記)에서도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D-013]이것은 …… 까닭이다 : 예문관의 봉교(奉敎) 이하는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였다.

[D-014]신만(申晩)과 윤급(尹汲) : 신만(1703~1765)은 판중추부사 신사철(申思喆 : 1671~1759)의 아들이다. 1726년 과거 급제 후 승문원 정자가 되었으나 이듬해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득세할 때 파직당했다. 후일 영의정까지 지냈다. 윤급(1679~1770)은 이재(李縡), 박필주(朴弼周)의 문인으로 1725년 과거 급제 후 이조 판서, 우참찬까지 지냈으나, 탕평책에 반대하여 누차 파직 또는 좌천되었다.

[D-015]관옥(冠玉)같이 …… 아니다 : 사기(史記) 56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서 유방(劉邦)의 총애를 받던 진평(陳平)을 헐뜯는 자들이 진평은 비록 미남자이지만 모자를 장식하는 옥과 같을 따름이니, 그 내실을 반드시 갖춘 것은 아니다.平雖美丈夫 如冠玉耳 其中未必有라고 한 말에서 따온 표현이다.

[D-016]네 충신 : 경종 때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사대가인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를 가리킨다.

[D-017]저쪽 사람들 : 소론을 가리킨다. 영조 3(1727) 소론 측의 이광좌(李光佐)가 영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우의정이 되고, 노론 측의 정호(鄭澔), 민진원(閔鎭遠)이 유배를 가게 되었다.

[D-018]() 나라와 …… 못한다 :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선제(先帝 : 유비)는 한 나라와 역적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先帝慮漢賊不兩立고 하였다. 한 나라의 정통을 계승한 촉()은 한 나라의 역적인 위()의 조조(曹操)를 토벌해야 한다는 뜻이다.

[D-019]나라의 …… 정치 :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하나로 임금이 원칙을 세움建用皇極을 들었다.

[D-020]호대(互對) : 노론과 소론의 세력 균형을 취한 인사정책을 말한다. 노론 측 인사를 영의정으로 삼으면 소론 측 인사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는 식이다.

[D-021] …… 맞추려는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말이다. ()보다 식색(食色)이 중요하지 않느냐는 주장에 대해 맹자는 그 뿌리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그 끝만 맞추려는不揣其本而齊其末 궤변이라고 비판하였다.

[D-022]표재(俵災) : 재해를 입은 논밭에 대하여 그 비율에 따라 조세의 감면을 할당하는 것을 말한다.

[D-023]염담(恬淡) : 명예나 이익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을 뜻한다.

[D-024]탁무(卓茂) : ?~28. 왕망(王莽)이 집권할 때 벼슬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 대고 사직하였으므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특별히 불러 태부(太傅)를 삼고 포덕후(褒德侯)에 봉하였다.

[D-025]이병태(李秉泰) · 정형복(鄭亨復) · 황재(黃榟) : 이병태(1688~1733) 1723년 과거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 참의가 되었으나 탕평책에 반대하다 파직되었고, 1730년 경상 감사 · 우부승지에 취임하기를 거부하여 합천 군수로 좌천되었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청백리로서 합천의 청천서원(淸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정형복(1686~1769) 1725년 과거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강원도전라도황해도 감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폈고 판서까지 지냈다. 황재(1689~?) 1718년 과거 급제 후 1721년 설서(說書)가 되었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그 후 이조 참의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노론의 청류(淸流)로 명망이 높았다. 두 차례 중국을 갔다 온 뒤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 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을 남겼다.

[D-026]자신의 …… 사람 : 논어 미자(微子)에서 공자가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을 평하여 그들은 은거하여 기탄없이 말하면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지키고 권도에 따라 벼슬하지 않았다.隱居放言 身中淸 廢中權고 하였다.

[D-027]전법(銓法) : 전랑천대법(銓郞薦代法)을 말한다. 이조의 낭관이 사면(辭免)하려면 반드시 후임자를 추천하여 직책을 대신하도록 하게 한 규정이다.

[D-028]붓을 잡은 낭관 : 전랑(銓郞)이라고도 한다. 이조(吏曹)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을 말한다.

[D-029]한천(翰薦) 한 가지 일 : 앞서 김약로를 예문관 검열에 추천하지 않았던 일을 가리킨다.

[D-030]이여오(李汝五) : 여오는 이병상(李秉常 : 1676~1748)의 자이다. 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으며, 검소하게 살았다. 이병태(李秉泰)의 족형(族兄)이다.

[D-031]이희경(李熙卿) : ‘희경은 이재(李縡 : 1680~1746)의 자이다. 대제학과 참판을 지냈으며, 탕평책에 반대하였다. 낙론(洛論)계의 저명한 성리학자였다.

[D-032]나약한 …… 있다 : 원문은 立懦廉頑인데, 맹자 만장 하(萬章下) 및 진심 하(盡心下)에서 맹자는 백이(伯夷)를 예찬하면서 그의 기풍에 관해 들은 자라면 탐욕스러운 자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는 뜻을 세울 수가 있게 된다.頑夫廉 懦夫有立志고 하였다.

[D-033]학사(學士) :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여기서는 예문관의 하급 관원을 말한다.

[D-034]늦게서야 …… 올랐으니 : 원문은 晩始緋玉인데, 비옥(緋玉)은 홍포(紅袍)에다 옥관자를 붙인 당상관의 차림새를 말한다.

[D-035]우사(右史) : 고대 중국의 사관으로 좌사(左史)와 우사(右史)가 있어 각각 기언(記言)과 기사(記事)를 맡았다고 한다. 여기서는 사관(史官)을 가리킨다. 주로 예문관의 봉교 이하가 춘추관의 사관을 겸임하였다.

[D-036]동조(東朝) : 왕대비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숙종의 계비(繼妃)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를 가리킨다.

[D-037]승지는 …… 때문에 : 박사정의 아들 박명원(朴明源)이 부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D-038]하루아침에 …… 입은 : 박필균은 영조 16(1740) 6월 정 3 품 통정대부에 오른 데 이어 8월에 다시 종 2 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D-039]중지(中旨) : 임금이 조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어필로 써서 내린 명령을 말한다.

[D-040]나를 …… 말인가 : 원문은 疎絶我若浼也인데, 백이(伯夷)는 관을 올바로 쓰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마치 자기 몸이 더렵혀지기나 할 듯이 여겼다.若將浼焉고 한다. 孟子 公孫丑上

[D-041]다섯 …… 있다 : 신원되지 못한 다섯 사람이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경종(景宗) 시해 음모 혐의로 처형된 김용택(金龍澤 : 김창집의 아들), 이천기(李天紀 : 이이명의 아들), 이희지(李喜之), 심상길(沈尙吉), 정인중(鄭麟重)을 가리키며, 토죄되지 못한 세 역적이란 소론 대신인 이광좌(李光佐), 최석항(崔錫恒), 조태억(趙泰億)을 가리킨다.

[D-042]삼사(三司) ……  : 원문은 鐵限於三司인데, 철한(鐵限)은 철문한(鐵門限) 즉 얇은 철판으로 문지방을 감싼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출입의 제한을 엄중하게 하는 비유로 쓰였다.

[D-043]성벽을 마주하고 앉아 : 원문은 面郭而坐인데, 담벼락을 마주하고 서 있다는 면장이립(面牆而立)과 비슷한 표현이다. 소견이나 견문이 좁음을 비유한 말이다.

[D-044]송인명(宋寅明) : 1689~1746. 영조 때 조현명(趙顯命 : 1690~1752)과 함께 탕평책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D-045]김씨들 : 김약로, 김취로, 김상로 등을 가리킨다.

[D-046]요상(僚相) : 정승이 다른 정승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는 좌의정 송인명이 앞서 표재의 일로 박필균의 파직을 청하는 계사를 올렸던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을 가리켜 한 말이다.

[D-047]혈구장(絜矩章) : 대학장구 () 10장에 이른바 평천하(平天下)가 그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위에서 노인을 노인으로 대접하니 백성들이 효심을 일으키며, 위에서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니 백성들이 공경심을 일으키며, 위에서 고아를 돌보니 백성들이 배반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군자에게는 혈구의 도絜矩之道가 있다. 위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아래를 부리지 말며, 아래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위를 섬기지 말며, 앞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뒤에 먼저 하지 말며, 뒤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앞이 따르게 하지 말며, 오른쪽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왼쪽에 건네지 말며, 왼쪽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오른쪽에 건네지 말라. 이것을 혈구의 도라 이른다.”고 하였다. 혈구(絜矩)란 곡척(曲尺)으로써 잰다는 뜻으로,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도덕 규범을 뜻한다. 여기서는 언행의 기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D-048]상공(相公) …… 드시오 : 조현명의 호가 귀록(歸鹿)인 점과 녹비(鹿皮)에 가로왈이라는 속담을 연계시켜 탕평파인 그를 신랄하게 풍자한 말이다. 사슴 가죽에 쓴 날 일() 자는 가죽을 잡아당기면 가로 왈() 자도 되므로, 조현명의 처신이 바로 그처럼 주견이 없이 세상에 영합함을 풍자한 것이다. 또한 사슴을 타고 와서騎蒭라고 한 것은 조현명의 호가 백록을 타고 다니는 신선처럼 살고 싶다는 뜻의 귀백록(歸白鹿)’에서 유래한 점을 비꼰 것이다.

[D-049]홍계희(洪啓禧) : 1703~1771.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737년 과거 급제 후 우의정 조현명의 천거로 교리에 특진되었으며, 좌의정 송인명의 천거로 공조 참의가 되었다. 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탕평파나 척신(戚臣)에 접근하여 출세했으므로 지탄을 받았다.

[D-050]() 나라 …… 말입니다 : 안연(顔淵)이 공자(孔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하 나라의 역법을 쓰고, 은 나라의 수레를 타고, 주 나라의 면류관을 쓰고, 음악은 소무를 쓰고, 정 나라 음악을 추방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정 나라 음악은 인심을 음탕하게 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은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라고 하였다. 論語 衛靈公 말재주 있는 사람은 홍계희를 빗대어 한 말이다.

[D-051]개정(開政) : 이조에서 관원들의 인사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대개 6월과 12월에 시행하였다.

[D-052]집이 …… 멀다 : 시경 정풍(鄭風) 동문지선(東門之墠) 동문 옆 평지 지나 언덕에 꼭두서니 자라는 곳. 그 집은 가까워도 그 사람은 몹시 멀어라.東門之墠 茹藘在阪 其室則邇 其人甚遠라고 하였다. 사모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홍계희가 인사 문제 청탁차 사처(私處)로까지 찾아온 것을 풍자하기 위해 이 시의 일절을 인용하였다.

[D-053]편론(偏論)의 도가(都家) : 다른 당파를 비난하는 편파적인 여론 조성을 도맡아 한다는 뜻이다.

[D-054]입장(入帳) : 기장(記帳), 즉 명부(名簿)에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D-055]조의(朝衣) …… 있는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백이(伯夷) 악인의 조정에 서서 악인과 함께 말하는 것을 마치 조의와 조관을 갖추고 도탄에 앉아 있는 듯이 여겼다.立惡人之朝 與惡人言 如以朝衣朝冠 坐於塗炭고 하였다.

[D-056]맹만택(孟萬澤)의 경우 : 맹만택은 맹주서(孟冑瑞)의 아들로 현종(顯宗)의 딸 명선공주(明善公主)에게 장가가기로 되어 신안위(新安尉)에 봉해졌다. 그러나 공주가 미처 시집오기 전에 죽었다 하여 그 작호를 환수당하였다. 顯宗實錄 12 12 27

[D-057]외판(外辦) : 임금이 행차하기 위해 호위들을 소집하여 정돈시키는 것을 말한다.

[D-058]신사철(申思喆) : 1671~1759. 노론계 중신으로 영조 때 평안 감사, 예조 판서,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1745년 판중추부사로 기로소에 들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승지 증() 이조 판서 나은(懶隱) 이공(李公) 시장(諡狀) 사신(詞臣)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금상(今上) 8년 갑진년(1784)에 영남 유생 아무개 등 몇 사람이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소장을 올려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우리 영종대왕(英宗大王 영조)께서 특별히 고() 승지 신() 이동표(李東標)에게 이조 판서의 관직을 추증하시고, 그 고신(告身) 청의(淸議)를 힘써 주장하여 수립한 공로가 남보다 뛰어났다.力主淸議 樹立卓然라는 여덟 자를 쓰도록 명하여 포창(褒彰)하였으니, 조정에서 이룩한 대절(大節)이 이에 밝게 빛을 발하고 위대하게 드러나, 공이 기사년(1689)에 구원하려고 했던 박태보(朴泰輔), 오두인(吳斗寅) 등 여러 충신들과 아울러 백세(百世)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적의 본말에 있어서는 임금이 임종하시기 직전이라 상세히 아뢰지 못한 바가 있어,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이 밝게 다스려진 이 시대에 아직까지 시행되지 않았으니, 지사(志士)들이 오랫동안 품어 온 유감이 오늘을 기다린 듯합니다.

옛날 송() 나라 신하 공도보(孔道輔)는 벼슬이 중승(中丞)이요, 추호(鄒浩)는 벼슬이 우정언(右正言)이었습니다. 법으로 따지자면 마땅히 시호를 얻지 못할 처지인데도 단지 곧은 절개로써 둘 다 당대에 훌륭한 시호를 얻었습니다. 지금 동표(東標)가 행한 의리는 이들 옛 성현과 꼭 같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순수하고 심오함에 있어서는 두 사람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유음(兪音 허락하는 조서)을 내리시어 특별히 동표에게 증시(贈諡)의 은전을 거행케 하여 주소서. 신 등은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이 소()가 아침에 올라가자 저녁에 회보를 내리기를,

 

그가 행한 의리에 대해서는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니 소청(疏請)한 대로 시행할 것을 특별히 윤허한다.”

하였다. 이에 그 일을 태상(太常 봉상시(奉常寺))에 내리자 백관들은 경외하며 우러러보고 사림(士林)들은 면목이 섰다.

( 서유린(徐有隣))는 일찍이 관각(館閣)의 직책을 맡았고 사관(史官)을 맡은 적이 있으니, 어진 사대부의 덕업(德業 덕행과 사업)과 명행(名行 명성과 품행)에 대하여 기꺼이 드러내야 할 처지인데, 하물며 이 시장(諡狀)을 짓는 데 있어 어찌 감히 글재주가 없다 하여 사양할 수 있으랴.

삼가 살피건대, ()의 자는 군칙(君則)이요, 호는 나은(懶隱)이요, 그 선세(先世)는 진보(眞寶) 사람이다. 고려 말엽에 활동한 휘() 자수(子修)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홍건적(紅巾賊) 토벌을 도와 공신이 되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으며, 6세조 휘 우()는 경학과 문장으로써 정릉조(靖陵朝 중종(中宗))에 이름을 드날려 세상 사람들이 송재(松齋)라 불렀는데, 이분은 퇴계(退溪) 문순공(文純公)의 숙부(叔父)가 된다. 증조(曾祖)인 휘 일도(逸道)는 봉사(奉事)를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인 휘 지형(之馨)은 참봉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일찍이 광해조(光海朝)에 상소를 올려 이이첨(李爾瞻)을 참형에 처하기를 청하였다. ()인 휘 운익(雲翼)은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으며, 종조숙부(從祖叔父) 휘 지온(之馧)에게 출계(出系 양자로 나감)하였다. ()는 순천 김씨(順天金氏)로 생원(生員) 기후(基厚)의 따님이다.

숭정(崇禎) 갑신년(1644, 인조 22) 4 5일에 공()을 낳으니, 용모가 뛰어나고 인품을 타고났다. 지학(志學 15)의 나이 때부터 분발하여 성현(聖賢)을 목표로 삼고, 한 가지 기예로써 이름이 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겼다. 처사공(處士公 부친 이운익)의 임종 시 부탁을 받고 난 뒤로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아우와 더불어 날마다 반드시 첫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단정히 하여 자리를 맞대고 학문을 강론하여 침식을 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 아우가 죽게 되자 공은 비로소 과거(科擧) 공부에 힘을 쏟았는데 이는 모부인(母夫人)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을묘년(1675)에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니 선비들의 기대가 더욱 커졌다. 일찍이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한 적이 있었는데 여러 고관(考官)들이 사석에서 서로 말하기를,

 

재주와 학식이 이모(李某)보다 나은 자가 없으니 마땅히 장원을 차지할 것이다.”

하였는데, 공은 어렴풋이 이 말을 듣고서 시험 당일이 되자 일부러 머리를 천 번이나 빗고 또 빗으며 늑장을 부려 마침내 과장(科場)의 문에 들어가지 않고 물러 나왔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이천소(李千梳)라 부르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정사년(1677)의 증광시(增廣試)에 회시(會試) 장원(壯元)이 되었으나 얼마 뒤 곧 파방(罷榜 급제자 발표 취소)이 되었고, 계해년(1683)의 증광시에 또다시 회시 장원이 되어 삼관(三館)에 분관(分館)하게 되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영남 선비들의 여론은 모두 이 사람이 주동한다.”

하고서, 마침내 성균관에 눌러두어 4년 동안 등용되지 못했다.

정묘년(1687)에 외직으로 쫓겨나 창락 찰방(昌樂察訪)에 제수되었다.

기사년(1689)에 사국(史局 춘추관(春秋館))에 천거되고 다시 남상(南床 홍문관 정자)에 의선(議選 선발)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전적(典籍)으로 품계를 뛰어 넘어 승진되고 그 이튿날에 홍문관 부수찬에 특별히 제수되니, 공이 너무 빠른 승진이라 하여 사양하고 소명(召命)에 나가지 않았다. 5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때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 이세화(李世華)가 상소를 올려 극력으로 간언하였다. 임금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여 이들을 모두 대궐 뜰에서 국문하니, 오두인과 박태보 두 분 모두 국문의 여독으로 귀양 도중 길에서 죽었다. 임금이 명을 내리기를,

 

이 일로써 다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역적의 죄로써 다스리겠다.”

하였다. 공이 이때 시골집에 있다가 변을 듣고 상소를 지어 극언을 올리려 하다가 나이 많은 태부인(太夫人 어머니)에게 큰 슬픔을 끼칠까 두려워서 망설이고 있는데, 태부인이 그 말을 기껍게 듣고는 공을 재촉해서 길에 오르게 하였다.

공이 서울에 당도하자, 상소 내용 가운데, “옥산의 새 무덤엔 양마석(羊馬石)이 우뚝 서고, 여양의 옛집은 기상이 참담하다.玉山新阡 羊馬嵯峨 驪陽舊宅 氣像愁慘라는 말이 있어 보는 자마다 모두 얼굴빛이 변했다. 그 상소에 또 이르기를,

 

전하께서 이세화(李世華)의 죄에 대해서는 이미 다 풀어 주셨으나 이상진(李尙眞)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히 다 풀어 주지 않고 있으니 어찌 한결같이 대하고 똑같이 사랑하는 도()이겠습니까. ! 일을 만나면 논쟁하는 것이 신하된 직분이거늘 전하의 오늘날 처사에 대하여 모두가 분부에 순종하여 한 사람도 과감히 말하는 자가 없으니, 천하만세(天下萬世)의 사람들이 전하의 조정에 서서 전하의 녹을 먹고 있는 자를 충신이라 하겠습니까, 아니라 하겠습니까? 오늘날 조정 신하 중에는 합문(閤門)에 엎드려 간언하기를 갑자기 중지한 것을 가지고 지금도 한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있는데, 그 마음이 어찌 다 전하께 불충하거나 국가의 계책을 근심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후회한다는 한 마디 말씀을 아끼시고 사방 백성의 소망을 가볍게 저버리려 하십니까.”

하였고, 또 이르기를,

 

조사기(趙嗣基)의 말이 궁위(宮闈)를 범하여 보고 듣기에 놀라운 점이 있는데 대간(臺諫)의 계사(啓辭)를 갑자기 정지시키셨으니 신은 이를 애석히 여깁니다.”

하였다. 이 상소가 올라가자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일이 장차 어찌 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 임금의 마음이 풀려 그 죄가 파출(罷黜)에 그쳤다.

곧 서용되어 병조 정랑에 제수되고 다시 수찬에 제수되었다. 이때 여론을 쥐고 있는 자들이 노봉(老峯) 민공(閔公)을 논계(論啓)하여 기어코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삼사(三司)가 일제히 모여 공에게 논계에 참여하기를 청하자 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곤성(坤聖 인현왕후)께서 폐위되던 날에 여러분이 머리가 부서지도록 힘껏 간()하지 못하였으니 이미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죽는 의리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 또다시 이 사람마저 죽이려 하고 있으니, 성모(聖母 인현왕후)에 대해 어찌 하려는 것인가?”

하였다. 이담명(李聃命)이 이 주장을 특히 강력하게 지지하여 붓과 벼루를 앞에다 내놓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너무 사양하지 말고 나를 봐서라도 계사를 기초하라.”

하니, 공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그대가 사적인 원한을 갚고자 하면서 어찌 남의 붓을 빌리려 하는가.”

하고서, 마침내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그 뒤 사간원 헌납,  원문 빠짐  수찬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공은 나랏일이 걱정되기는 하였으나 세상에 나갈 뜻을 끊어 버리고 영천암(靈泉巖)을 사랑하여 그곳에다 집을 지어 놓고 학문을 닦을 장소로 삼아 평생토록 지낼 듯이 하였다.

경오년(1690)에 또 헌납과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어버이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 봄에 공의 경학(經學)으로 보아 외방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아뢰는 자가 있어, 헌납으로 부름을 받아 서학 교수(西學敎授)를 겸임하고 이어 수찬으로 옮겼다. 임금이 장릉(章陵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묘)에 행행(幸行)할 때 호종하였는데, 임금이 육신묘(六臣墓)를 지나면서 제사를 내리고 아울러 복관(復官)하도록 명하였다. 조정의 의론이 불가함을 고집하면서 그 이유로써 춘추(春秋) 어버이를 위하여 그 잘못을 숨긴다.爲親者諱는 대문을 들고 나오자, 공이 홀로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광묘(光廟 세조(世祖))께서 이미 육신을 죽였으니 만약 그 충절을 포장(褒獎)해 준다면 어찌 성덕(聖德)의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교리에 제수되자 휴가를 청하여 근친(覲親)하였고, 가을에 또 헌납으로 부름을 받았다가 교리로 옮겨 제수되었다. 임금이 과거 급제자들에게 광대로 하여금 앞길을 인도하도록 명하자, 공이 아뢰기를,

 

광대의 잡희(雜戱)는 성인(聖人)이 싫어하신 바이니 아마도 정색(正色)을 함으로써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였다.

일찍이 천둥의 이변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임금이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논했는데 절실한 말들이 많았다. 공이 조정에 있을 때에는 지조가 꿋꿋했으며 풍도가 준엄하였고, 경연(經筵)에서 경서(經書)를 펼쳐 놓고 토론을 할 때에는 그 뜻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에 있었으므로 임금이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세속에 따라 적당히 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자주 근친을 위한 휴가를 청하고 이로 인해 아주 떠나 버리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매번 공이 떠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공에게 따뜻한 봄이 되면 모친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라 명한 다음, 모친에게는 곡식과 비단을 내려 특별히 은총을 베풀었다.

또 헌납으로 부름을 받아 이조좌랑 겸 시강원사서(吏曹佐郞兼侍講院司書)에 제수되었다. 전형(銓衡)을 맡은 자가 이수인(李壽仁)과 유재(柳栽)를 청환직(淸宦職)에 통망(通望 후보 추천)하자고 하자, 공이 유재는 문학(文學)이 없고 이수인은 일찍이 기사년의 대론(大論)을 피해 갔다는 이유를 들어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또 민장도(閔章道)를 통망하자고 하였는데, 그 아비 민암(閔黯)이 당시에 국권을 잡고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장도는 평소 훌륭한 행실이 없다.”

하고, 매우 준엄하게 막아 버렸다. 이에 강요를 하다가 먹혀들지 않자 심지어 화복(禍福)으로써 유혹하기까지 하니,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이따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부끄럽다.”

하며, 그날로 정고(呈告 사직서를 올림)하고 비를 무릅쓰고 남으로 돌아갔다. 도롱이를 입고 배에 오르니 공을 전송하는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며 서로 말하기를,

 

오늘 작은 퇴계小退溪를 다시 보게 되었도다.”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학문을 강론하려는 자들이 날마다 모여들어 그들과 토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헌납, 부교리, 교리, 겸교수에 제수되고 얼마 후 헌납으로 옮겨 제수되고 다시 이조 좌랑, 겸문학, 교리, 겸필선(兼弼善)에 제수되고 또다시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천암(靈泉巖)의 별장에 거처하여 조용히 앉아 주역을 읽으면서 지냈는데, 이때 문인(門人)에게 답한 태극(太極)에 대한 변설(辨說), ‘천리와 인욕이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天理人欲同行異情는 설에 대한 해석은 그 연구가 극히 정미(精微)하였다.

계유년(1693)에 의정부 사인, 사헌부 집의, 시강원 보덕에 오르고 또다시 집의에 제수되었다.

이렇게 전후로 역마(驛馬)를 보내 부른 것이 13차례나 되었으므로 마침내 마지못하여 명에 응하였다. 이때 장희재(張希載)가 장부(將符)를 차고 있으면서 권세를 믿고 불법을 많이 자행하고 있었으므로 공이 그의 노비 가운데 심하게 우쭐대는 놈을 호되게 처벌하니,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통쾌히 여겼다.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옮겨 제수되자 또 휴가를 빌어 귀성하였다. 사간 겸 중학교수(司諫兼中學敎授)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리고 이와 함께 시정(時政)을 논하기를,

 

주자(朱子) 사대부의 출처거취(出處去就)가 풍속의 성쇠(盛衰)에 관계된다.’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대각(臺閣)의 신하들이 한 번이라도 소명(召命)을 어기면 곧바로 이조의 논의를 따라 하옥하고 갈아 치우니, 이는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대관(臺官)이 자기 직책을 소홀히 한 지 실로 이미 오래되기는 하였으나, 전하께서 간신(諫臣)을 대우하는 것 또한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 사람의 대간(臺諫)이 강하게 간쟁을 하여도 받아들이지 않던 일을 대신(大臣) 한 사람의 한 마디 말에 거뜬히 해결이 되며, 뻣뻣하게 남의 말을 거부하는 기색이 있을 뿐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미덕은 없으시니, 오늘날 언로(言路)가 막혀 버린 것이 어찌 모두가 어물쩡 넘어가는 신하들만의 죄이겠습니까. 군신간에 존재하는 정의(情義)가 신뢰감을 잃고 질책만 뒤따르니, 신하들이 무서워 성상의 마음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오직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합니다.惶恐待罪만 나불대는 승정원(承政院) 성교가 지당하십니다.聖敎至當만 나불대는 비변사(備邊司)를 불행히도 오늘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여러 차례 조정의 신하를 들어 쓰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하셨습니다. 한창 중용할 때에는 마치 무릎 위에라도 올려놓을 듯이 하다가 밀어내어 배척할 때에는 못에다 떨어뜨릴 듯이 하였으며, 정권을 바꿔 치울 때에는 대대적으로 주살(誅殺)을 행하였으니, 국운이 어떻게 병들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인심이 어떻게 동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여러 신하에 대하여 은혜와 원수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 하면 나라의 위망(危亡)이 장차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내언(內言)이 문지방 밖으로 나가고 외언(外言)이 문지방 안으로 들어와 정도(正道)를 거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소인들이 사악한 농간을 부리는 매개가 되는 것이니, 임금이 그 술책에 한번 빠지게 되면 그들의 술책대로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러한 은밀한 샛길을 호되게 막으소서.”

하였다.

성균관 사성에 제수되었다가 집의로 옮기고 응교에 제수되었다가 또다시 집의에 제수되었고 다시 응교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조정에 돌아오자 곧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왕명에 사은하는 날 임금이 초모(貂帽)를 내리고 탑전(榻前)에서 써 보도록 명하였다.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해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가 요역(繇役)을 줄이고 민폐(民弊)를 혁파하니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으나, 관찰사와 일의 가부(可否)를 다투다가 마침내 수령의 인()을 던지고 돌아왔다.

을해년(1695)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병자년(1696)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다. 이에 앞서 공은 누차 부제학, 대사성, 이조 참의의 물망에 올랐는데, 급기야 외직으로 나가게 되자 모두들 공이 나가는 것을 애석히 여겼다. 그러나 공은 관직에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지조만은 시종 한결같이 지키면서,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고을이 한가하고 바다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기도 해서, 한 고을을 힘껏 잘 다스려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마침 큰 흉년을 만나 백성들이 유랑하여 고을이 거의 다 비게 되었다. 공은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녹봉을 털어 진휼하였고, 아울러 삼(), , 생선, 미역 등을 세금으로 걷던 것을 모두 다 없애주고는 스스로 살길을 찾게 하였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흉년 구제에 대한 편의를 요청하자 임금은 다 그렇게 하라고 했다. 정승 장암(丈巖) 정호(鄭澔)가 그 당시 암행어사가 되어 수계(繡啓)에서 공의 업적을 칭찬하였고, 해직하고 돌아온 뒤에는 그 고을 사민(士民)들이 공을 추모하여 동비(銅碑)를 만들어 그 덕을 칭송하였다.

무인년(1698) 겨울에 모친상을 만나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살피며 호곡(號哭)하였는데, 아무리 모진 바람과 심한 비가 내려도 이를 폐하지 않았다. 2년 뒤인 경진년(1700) 7 17, 마침내 그 슬픔으로 수척해진 끝에 졸하니 향년 57세였다. 수의(襚衣)가 만들어지는 대로 염()을 마치고 부음을 알리니, 임금이 놀라고 슬퍼하여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렸다. ()는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며, 공이 낳은 아들과 손자들은 지갈(誌碣 묘지와 묘갈)에 실려 있으므로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사대부 간의 명론(名論)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서 나라의 불행이 된 지 오래되었다. 이는 단지 그들이 어질다고 여기는 분이 서로 같지 아니하여 이에 따라 호오(好惡)가 편파적으로 이루어지고 심지어 평피의 기회平陂之會에 이르러 번갈아 국시(國是)를 정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옳다고 여기는 것이 천정(天定)이면 세운(世運)이 융성하고 평화롭게 될 것이요,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인승(人勝)이면 명의(名義 명분과 도의)가 어긋나고 어지러워질 것이니, 이는 호오가 공정하냐 아니냐에 달렸을 뿐이다.

나은(懶隱) 이공(李公)을 삼가 살펴본 적이 있는데, 공은 국시가 무너지던 날에 초연히 우뚝 서서 권세에도 굽히지 아니하고 화()를 당하는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도 윤리를 힘껏 지켜 나갔으니, 스스로 충정(忠正)을 견지하고 평소 의리에 밝아서 공정한 천정(天定)을 확실하게 자득한 자가 아니면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답답해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아마도 공에게 가까운 말이 될 것이다.

영남(嶺南)이란 곳은 본래 우리나라의 추로(鄒魯)에 해당되는 지역으로서 그 호오에 있어 공과 차이가 있는 사람이 거의 드무니, 이 또한 나은(懶隱)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기사년 이후로 한결같이 명의(名義)로 인해 질책을 받았으니, 이는 국시를 통일시키고 호오를 함께하려는 조정의 본뜻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선조(先朝 영조(英祖))께서 관직을 추증하는 은전을 내리고 금상(今上)께서 시호(諡號)의 은전을 내린 것이 어찌 다만 공의 이름과 덕이 온 나라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공이 모범을 보인 것이 저렇듯이 우뚝하니, 이 때문에 권장하고 격려하는 임금의 뜻도 전후에 한결같았던 것이다. 그러하니 조정에서 벼슬을 같이한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임금의 뜻을 우러러 본받아 이 일에 함께 힘쓰지 않겠는가.

삼가 공이 조정에서 벼슬을 한 경위를 수집하여 집사(執事)에게 고하노라.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사신(詞臣) : 왕을 측근에서 수행하면서 각종의 글을 기초하는 문학시종(文學侍從)의 신하를 말한다. 시장(諡狀)은 봉상시와 홍문관에서 작성하므로, 여기서는 홍문관 관원을 가리킨다.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8에 수록된 시장(諡狀)은 연암이 지은 시장을 바탕으로 한 글인데 지은이가 서유린(徐有隣)으로 되어 있다. 서유린은 연암의 절친한 벗으로, 시장을 찬진할 당시 이조 판서로서 홍문관 제학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등을 겸하고 있었다.

[D-001]영남 …… 사람 : 안동(安東) 유생 권이도(權履度) 등을 가리킨다. 正祖實錄 8 11 5

[D-002]공도보(孔道輔) : 공자의 45대손으로, 송 나라 인종(仁宗)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자 범중엄(范仲淹) 등과 함께 곽 황후(郭皇后)의 폐위에 극력 반대하여 직신(直臣)으로 명성이 높았다. 사후인 인종 황우(皇祐) 3(1051)에 공부시랑(工部侍郞)에 특별히 증직(贈職)되었다고 하나,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宋史 卷297 孔道輔傳

[D-003]추호(鄒浩) : 송 나라 철종(哲宗) 때 우정언(右正言)에 발탁되자 맹후(孟后)의 폐위를 반대했으며 그 일로 인해 두 번이나 귀양을 갔다가 복직되었다. 사후인 고종(高宗) 즉위 초에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에 증직되고 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宋史 卷345 鄒浩傳

[D-004]민정중(閔鼎重) : 1628~1692.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송시열의 문인이자 서인의 지도자로서 좌의정까지 지냈으나 기사환국 이후 귀양 가서 죽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은 그의 동생이다.

[D-005]옥산(玉山) …… 참담하다 : 옥산은 장희빈의 본관인 인동(仁同)의 별칭으로 그 선조의 무덤이 이곳에 있으며, 여양은 인현왕후의 본관인 여흥(驪興)의 별칭으로 그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이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따라서 이 말은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후가 된 상황을 개탄한 것이다.

[D-006]이세화(李世華) : 1630~1701. 경상 감사를 지낸 뒤 향리에 있다가,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는 상소에 참여하여 숙종의 친국(親鞫)을 받은 후 유배가던 중 풀려났다.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서용되어 판서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D-007]이상진(李尙眞) : 1614~1690. 우의정까지 지냈으나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여 간언(諫言)하다가 종성(鍾城) 등지로 귀양을 갔다. 그 뒤 용서되어 향리에서 은둔하던 중 죽었다.

[D-008]조사기(趙嗣基) …… 범하여 : 궁위(宮闈)는 현종(顯宗)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호군(護軍)으로 있던 조사기가 상소를 올려 명성왕후의 지문(誌文)을 지은 송시열을 비판하면서 명성왕후에 대해 언급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숙종실록(肅宗實錄) 15 3 27일 조에 조사기의 상소가 실려 있다. 조사기는 이 상소로 인해 숙종 20년에 참형을 당하였다.

[D-009]이 상소 : 숙종실록(肅宗實錄) 15 5 27일 조에 이 상소가 실려 있다.

[D-010]나라를 …… 의리 : 원문은 循國之義로 되어 있으나,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중의 시장에는 殉國之義로 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11]이담명(李聃命) : 1646~1701. 남인(南人)으로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홍주 목사에서 파직되었으나, 숙종 9(1683) 복관되어 감사, 참판 등을 지냈다.

[D-012]원문 빠짐 : 이동표의 문집인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부록 권8에 실린 홍중효(洪重孝) () 묘지명에는 겸지제교(兼知製敎)’ 4자가 들어 있다.

[D-013]춘추(春秋) …… 숨긴다 :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민공(閔公) 원년(元年) 조에 나온다.

[D-014]과거 …… 명하자 : 유가(遊街)라 하여, 과거 급제자가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행진하고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 친지들을 방문하던 풍속이 있었다.

[D-015]광대의 …… 바이니 : () 나라 정공(定公)이 제() 나라 경공(景公)과 협곡(夾谷)에서 회합할 때 당시 재상(宰相)의 일을 섭행(攝行)하던 공자는 제 나라가 노 나라 정공 앞에서 광대와 난쟁이를 시켜 잡희를 벌이는 것을 금지시키고, 임금을 웃긴 죄를 물어 처형하도록 하였다. 春秋穀梁傳 定公10》 《史記 卷47 孔子世家》 《孔子家語 卷1 相魯

[D-016]정색(正色) …… 도리 : 서경(書經) 필명(畢命)에서 강왕(康王)은 필공(畢公)에게 훈계하면서 정색으로 아랫사람들을 통솔하라.正色率下고 하였다. , 안색(顔色)을 엄하게 가짐으로써 아랫사람들이 경외(敬畏)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D-017]전형(銓衡)을 맡은 자 : 당시 이조 판서 오시복(吳始復)을 가리킨다. 懶隱先生文集 卷8 行狀

[D-018]기사년의 대론(大論) : 숙종 15(1689) 장희빈의 소생을 원자(元子)로 정하는 것을 반대한 서인(西人)들의 논의를 가리킨다. 이로 인해 남인(南人)들이 집권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다.

[D-019]민장도(閔章道) : 1655~1694. 남인의 영수인 우의정 민암(閔黯 : 1636~1694)의 아들로, 인현왕후의 복위를 추진하던 서인들을 체포하여 일대 옥사를 일으키려다가, 도리어 갑술환국을 당해 민장도는 국문 도중 장살(杖殺)되고, 민암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D-020]심지어 …… 하니 : 이세택(李世澤)이 쓴 행장에 의하면, 이조 판서 오시복은 심지어 사람을 시켜 넌지시 귀띔하기를 만약 민장도의 추천을 허락한다면, 나도 역시 영남 사람을 통용(通用)하겠다고 했다 한다. 懶隱先生文集 卷8

[D-021]천리(天理) ……  : 호굉(胡宏) 지언(知言)에서 천리와 인욕이 체는 같으나 용이 다르며同體異用,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同行異情고 주장하였다. 주자(朱子)는 이러한 호굉의 주장 중에서 체는 같으나 용이 다르다同體異用는 설은 비판하고 물리쳤으나,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同行異情는 설은 긍정하여 받아들였다. 즉 시청언동(視聽言動)이나 식색(食色)과 같은 행동은 성인도 범인과 마찬가지이지만, 성인은 그것이 예()와 합치되게 함으로써 천리(天理)를 따른다는 점에서 정()이 다르다고 보았다. 朱子語類 卷101 程子門人 胡康侯

[D-022]문인(門人)에게 …… 정미(精微)하였다 : 그의 문인 김이갑(金爾甲 : 자는 원중元中)에게 준 편지 답김원중문목(答金元中問目)의 내용을 가리킨다. 懶隱先生文集 卷4

[D-023]장희재(張希載) …… 있으면서 :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는 숙종 18(1692) 총융청(摠戎廳)의 우두머리인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

[D-024]사대부의 …… 관계된다 : 주자는 사대부의 사수출처(辭受出處)는 비단 그 자신만의 일이 아니다. 그 처신의 득실은 바로 풍속의 성쇠에 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특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性理大全書 卷50 8 力行

[D-025]예로써 …… 도리 : 논어(論語) 팔일(八佾)에서 공자는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부려야 한다.君使臣以禮고 하였다. 신하를 대할 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D-026]내언(內言) …… 들어와 : 내언은 여자가 규방에서 하는 말을 가리키고, 외언(外言)은 남자가 공무에 관해 하는 말을 가리킨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 외언이 문지방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야 하며, 내언이 문지방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外言不入於梱 內言不出於梱고 하였다.

[D-027]정호(鄭澔) : 1648~1736.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현손이며 송시열의 문인이다. 기사환국 때 파직되고 유배되었으나,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풀려나 판서까지 지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하여 파란을 많이 겪었다. 신임사화로 파직되고 유배되었으나, 영조 즉위 후 영의정까지 지냈다.

[D-028]그 당시 …… 칭찬하였고 : 원문은 褒公績이라고만 되어 있으나,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중의 시장에는 啓褒公績으로 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29]평피의 기회平陂之會 : 시운에 따라 세력이 크게 변하는 기회를 이른다. 주역 태괘(泰卦) 구삼(九三)의 효사에 편평하기만 하고 치우치지 않은 경우는 없고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법은 없다.无平不陂 无往不復고 하였다. 여기서는 숙종 때의 환국(換局)을 가리킨다.

[D-030]옳다고 …… 것이니 : 천정(天定)은 천명으로 정해진 것을 뜻하고, 인승(人勝)은 다수 대중의 힘으로 천명을 어기는 것을 뜻한다. 사기 66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서 신포서(申包胥)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지만, 천명도 정해지면 사람들을 능히 격파한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는 말을 인용하여, 초 나라 평왕(平王)의 시신을 매질하여 복수한 벗 오자서의 난폭한 행동을 나무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록 한때의 난폭한 행동으로 천명을 어길 수 있을지라도, 천명 역시 화를 내려 난폭한 자들을 징계한다는 뜻이다.

[D-031]홀로 …… 않는다 : 주역 대과괘(大過卦)의 단사(彖辭) 군자는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숨어 살아도 답답해하지 않는다.君子以獨立不懼 遯世无悶고 하였다.

[D-032]추로(鄒魯) : 맹자(孟子)와 공자(孔子)의 고향으로 곧 유교의 발상지를 뜻한다.

[D-033]공이 …… 고하노라 : 정조 8(1784) 11월 이동표에게 시호를 내리라는 어명이 내렸으며, 12(1788) 4월 충간(忠簡)의 시호가 내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부군(府君) 묘표음기(墓表陰記) 금성위(錦城尉 : 박명원朴明源)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여기 파주(坡州) 읍치(邑治) 서쪽 백석리(白石里) 갑좌(甲坐 정동쪽에서 북으로 15도 방향)의 언덕에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박공지묘(禮曹參判贈領議政朴公之墓)’라는 묘표(墓表)가 있는데, 바로 우리 선고(先考)의 의리(衣履)가 매장된 곳이다. 부군(府君)의 휘()는 사정(師正)인데 초휘(初諱)는 사성(師聖)이요, ()는 시숙(時叔)이다. 세상에서 반남 박씨(潘南朴氏)를 관면(冠冕 벼슬을 한 집안)의 대족(大族)으로 높이 받드는 것은 그 선세에 문정공(文正公) 휘 상충(尙衷)과 문강공(文康公) 휘 소()가 있어 곧은 도()와 바른 학문으로 명덕(名德)이 서로 계승된 때문이었다. 증조는 첨정(僉正) 휘 세교(世橋)인데 이조 판서 금흥군(錦興君)에 추증되었으며, ()는 군수(郡守) 휘 태두(泰斗)인데 좌찬성 금은군(錦恩君)에 추증되었으며, ()는 참봉(參奉) 휘 필하(弼夏)인데 좌찬성 금녕군(錦寧君)에 추증되었다. 고조(高祖)인 문정공(文貞公) 휘 미() 때부터 적손(嫡孫)으로서 충익공(忠翼公) 휘 동량(東亮)의 훈봉(勳封)을 승습(承襲)하였다. ()는 윤씨(尹氏)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으며 관찰사 반()의 따님이다.

숙종(肅宗) 9년인 계해년(1683)에 부군을 낳았는데, 셋째 아들이었다. 정유년에 문과(文科)에 발탁되어 예문관 검열에 천거되었다가 대교로 승진하였다. 부모의 상을 거듭 당한 뒤 상복을 벗고서 다시 봉교에 부직(付職)되었다.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에서는 실직(實職)과 겸직(兼職)으로 설서에서 보덕까지 이르렀으며, 양사(兩司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정언, 헌납, 사간, 집의, 대사간을 역임하였고, 옥서(玉署 홍문관)에서는 부수찬에서 응교까지 이르렀다. 전랑(銓郞 이조 좌랑)에 천배(薦拜 추천 임명)되었고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 사복시 정(司僕寺正), 종부시 정(宗簿寺正)을 역임하였으며, 은대(銀臺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로부터 도승지에 이르렀다. 육조에서는 이조 · 호조 · 병조의 참의를 지내고, 호조 · 예조 · 공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경조(京兆 한성부)에서는 좌윤과 우윤을 지냈다. 외임(外任)으로는 안변 부사(安邊府使), 강화 유수(江華留守)를 제수받았고, 별직(別職)으로는 지제교(知製敎), 겸교서교리(兼校書校理), 별겸춘추(別兼春秋), 동학 교수(東學敎授), 전라도 암행어사, 실록청 낭청(實錄廳郞廳), 천릉도감 도청(遷陵都監都廳),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오위도총부 총관(五衛都摠府摠管), 태상(太常 봉상시) · 괴원(槐院 승문원) · 주사(籌司 비변사)의 제거(提擧)에 제수되었으며, 자급(資級)은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영종(英宗 영조) 기미년(1739) 10 26일에 돌아가시니 수() 57세였다. 임금이 몹시 애도하여 윤음(綸音)을 내리고 특별히 관재(棺材)를 내렸다.

예전에 한원(翰院 예문관)에서 당시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사국(史局 춘추관)으로 들여보낼 때 적신(賊臣) 이진유(李眞儒)에 의해 밀려났다. 급기야 뭇 흉적들이 권력을 쥐고서 장차 사필(史筆)을 독점하기 위해 먼저 부군을 회인 현감(懷仁縣監)으로 내쫓아 부군이 천거되는 것을 아예 막아 버렸다. 얼마 안 있어 무옥(誣獄 신임사화(辛壬士禍))이 일어났는데 우리 백부(伯父) 장효공(章孝公 박사익(朴師益))이 위맹(僞盟)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마침내 귀양을 가게 되자 부군은 시골집으로 물러 나와 버렸다.

영종이 새로 즉위하여 구신(舊臣)들을 불러들이게 되자, 부군은 마침내 연명(聯名)으로 상소를 올려 김일경(金一鏡)을 처형할 것을 청하였고, 또 시정(時政)에 대하여 극력 진언하였으며, 신치운(申致雲) 등이 박필몽(朴弼夢)에게 빌붙어 사국(史局)의 관직을 마구 차지한 것을 공박하였으며, 양사(兩司)와 합동으로 조태구(趙泰耈), 유봉휘(柳鳳輝)를 비롯한 역적들을 토죄(討罪)하고 사대신(四大臣)을 한 사당에 함께 제향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차자(箚子)를 올려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윤지완(尹趾完)을 묘정(廟庭)에서 출향(黜享)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조 좌랑으로 있을 때 판서가 공격(公格 공직의 격식)을 어긴 것을 비판한 것으로 임금의 뜻을 거슬러 흥양 현감(興陽縣監)으로 전출되었다가 얼마 뒤 돌아왔다. 누차 제수(除授)가 있었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특별히 남해 현령(南海縣令)에 보직되었다. 당시에 조정이 누차 평피(平陂)를 겪어 사람들이 일정한 지향이 없었으며 시류에 영합하는 자들은 국시(國是)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였고, 선악(善惡)을 뒤섞고 반드시 양편을 짝 지워 천거하는 것으로써 조정(調停)을 삼았으므로 사대부들이 오랫동안 답답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아침에 머리를 숙이면 저녁에 벌써 조정의 윗자리에 오르게 되곤 하였는데 부군만은 홀로 본마음을 그대로 지켰다. 일찍이 충신과 소인이 함께 등용되는 것을 개탄하고 수치로 여겨서 임금의 부름에 기어이 응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하옥되어 아침에 용서받았다가 저녁에 갇히기도 하고 해를 넘기도록 갇혀 지내기도 하였다.

삼전(三銓 이조 참의)을 맡은 뒤로 공정한 판단을 견지하여 관리의 선별을 엄격하게 함으로써 당시의 규례와 완전히 다르게 하니 당로자(當路者)들이 미워하여 기어이 중상하려고 하였다.

불초(不肖 박명원(朴明源) 자신을 가리킴)가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를 들고 부군이 이조 참의로 오래 지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규례대로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승진되는 것으로 추천되었다. 그러자 당인(黨人)들이 묘당(廟堂)의 의론을 먼저 부탁했다는 이유를 들어 조정을 협박했으나 다행히 임금께서 그들의 간사함을 환히 아셨으며, 이에 부군은 벼슬길이 갈수록 험악함을 깊이 깨닫고는 스스로 조용히 물러나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광좌(李光佐)가 영의정이 되자 비변사의 관직을 극력 사임하였으니, 국민들이 역적이 날뛰도록 내버려 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였다.

부군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단정하였으며 용모가 아름다웠다. 몸을 조심하고 명성을 단속하여 내심과 외모가 모두 정숙하였으며, 도의(道義)를 숭상하고 유능하다고 명성이 나는 것을 억눌렀다. 또한 온화하면서도 씩씩하여 화복(禍福) 때문에 거취(去就)에 얽매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계부(季父) 문경공(文敬公 박필주(朴弼周))이 당세의 유종(儒宗 유학의 대가)이 되었고, 장효공(章孝公)은 원우완인(元祐完人)이라 일컬어졌으므로, 부군이 사우(師友)와 부형(父兄)의 사이에서 나눈 명론(名論)이 집 밖을 나가지 않고도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남들과 어울리고 쫓아다니며 열성적으로 영합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아무리 익숙한 친구일지라도 항상 처음 대면한 듯이 하여 생각 없이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았다.

상하간에 논의를 하거나 일에 응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철두철미하고 화기애애하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정성이 간절하여, 남들로 하여금 즐겁게 만들고 비루한 마음이 움트는 것을 저절로 녹여 버렸다. 무인(武人)이나 역관(譯官)들은 문에 들이지도 않았으며, 또한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일체 세속에서 연모하는 즐거움 따위는 마음속에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찍이 세도(世道)를 대신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선비(先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증 참판 택상(宅相)의 따님이요, 구원(九畹) 이춘영(李春英)의 후손이다. 16세에 부군에게 시집왔는데, 서사(書史 경사류(經史類)의 책)에 밝으며 말이 적고 행동이 신중하였으며, 동서들과 잘 지내 규문(閨門)의 미덕이 세족(世族 대대로 벼슬한 집)의 모범이 되었다. 왕가(王家)와 혼인을 맺은 후로는 더욱 조심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으며, 부군보다 19년 뒤에 돌아가셨다.

4 2녀를 길렀는데, 아들은 진사 흥원(興源), 정언 창원(昌源), 형원(亨源), 불초(不肖) 명원(明源)이며, 사위는 김기조(金基祚)와 이도양(李度陽)이다.

장남은 아들이 셋인데, 종덕(宗德)은 판서요, 종악(宗岳)은 참의(參議)로 셋째 아들 형원의 집으로 출후(出后)하고, 상철(相喆)은 부윤(府尹)인데 명원의 후사가 되었다. 종덕(宗德)의 아들로는 정자(正字)에 추증된 수수(綏壽), 진사 홍수(紭壽), 경수(絅壽)이며, 종악(宗岳)의 아들로는 아무개와 아무개가 있다. 김기조는 계자(繼子) 택현(宅鉉)을 두었는데 주부(主簿)이고, 이도양은 1남 갑()을 두었는데 판서이다.

, 부군의 산소를 누차 옮기는 바람에 비석을 갖출 겨를이 없었고, 지금 아들과 손자로서는 다만 불초와 종악이 남아 있을 뿐이다. 더구나 돌아가신 이의 덕행을 징험해 줄 만한 사람으로서 아득한 50년 사이에 누가 생존하여 이를 근심할 것인가.

아침 이슬 같은 인생, 나 역시 곧 죽을 것이 두려워서 세벌(世閥)과 관력(官歷)과 자손(子孫)을 위와 같이 대략 기록해 둔다.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묘표음기(墓表陰記) : 묘표의 뒤에 새긴 글을 말한다. 박사정(朴師正)의 묘갈명(墓碣銘) 연암집 3 재종숙부 예조 참판 증 영의정공 묘갈명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D-001]의리(衣履) : 무덤에 함께 묻는 옷과 신발인데, 시신의 대유(代喩)로 쓰였다.

[D-002]동량(東亮)의 훈봉(勳封) : 박동량이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義州)로 호종한 공으로 호성 공신(扈聖功臣) 2등을 받고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진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D-003]겸교서교리(兼校書校理) : 교서관(校書館)의 종 5 품 관직으로 겸교리라고도 한다. 홍문관 교리와 구별하기 위해 여기서는 겸교서교리라고 하였다.

[D-004]이진유(李眞儒) : 1669~1730. 소론으로서 경종 1(1721) 김일경(金一鏡) 등과 함께 노론의 사대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이들을 축출하였다. 경종이 죽자 이조 참판이 되어 고부사(告訃使)로 청 나라에 다녀왔으며, 영조 즉위 후 유배 갔다가 불려 와 문초 중 장살되었다.

[D-005]위맹(僞盟) …… 되자 : 박사정은 경종 시해 음모를 고변(告變)한 목호룡(睦虎龍) 등 부사 공신(扶社功臣)의 회맹(會盟)에 불참하였다고 탄핵되어 경종 3(1723) 4월 유배되었다.

[D-006]신치운(申致雲) : 1700~1755. 경종 때 소론의 신예(新銳)로서 노론의 거두였던 권상하(權尙夏) 등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영조 31(1755)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D-007]박필몽(朴弼夢) : 1668~1728. 소론 강경파로서 김일경 · 이진유 등과 함께 노론 사대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영조 즉위 초 무신란(戊申亂)이 나자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가담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해 은둔하던 중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D-008]사대신(四大臣) :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를 가리킨다.

[D-009]이조 좌랑으로 …… 전출되었다가 : 영조실록 4 6 20일 조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D-010]평피(平陂) : 주역 태괘(泰卦) 구삼(九三)의 효사에 편평하기만 하고 치우치지 않은 경우는 없고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법은 없다.无平不陂 无往不復고 하였고,  서경(書經) 홍범(洪範) 치우치지 말고 왕의 의로움을 따르라.無偏無陂 遵王之義”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탕평하리라.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고 하였다.

[D-011]당로자(當路者)들이 …… 하였다 :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임금을 알현한 자리에서 이조 참의 박사정이 이흡을 대사간으로 의망한 것은 법을 굽혀 사정(私情)을 따른 조치라고 비난하였다. 英祖實錄 12 3 24

[D-012]묘당(廟堂) …… 들어 : 수찬 홍중일(洪重一)이 상소를 올려, 박사정이 아들 박명원이 부마가 되도록 의정부의 추천을 먼저 부탁하고廟薦先屬 순서를 뛰어넘어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하였다고 비난하였다. 英祖實錄 14 6 6

[D-013]유능하다고 …… 억눌렀다 : 원문은 絀抑聲能인데, ‘성능(聲能)’ 능성(能聲)’,  유능하다는 명성과 같은 뜻으로 쓴 것으로 보았다.

[D-014]원우완인(元祐完人) : 송 나라 때 철종 원우 연간(1086~1093)에 활동한 유안세(劉安世 : 1048~1125)를 가리킨다. 유안세는 사마광(司馬光)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철종 즉위 후에 사마광이 집권하자 그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다가 장돈(章惇)에 의해 밀려난 인물이다. 그 후 30년 동안 전전하다, 휘종(徽宗) 선화(宣和) 연간에 환관 양사성(梁師成)이 권력을 잡아 그에게 자식을 위해서라도 관직에 나오라는 편지를 보내자, 그는 내가 자식을 위했더라면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밀려난 지 거의 30년이 되도록 일찍이 권력을 가진 자에게 편지 한 자 주고받은 적이 없다. 나는 원우의 완인으로 그대로 남고 싶으니 그 마음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편지를 되돌려 보냈다. 사마광을 추종하고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는 당파를 원우당인(元祐黨人)이라 하며, 완인(完人)이란 덕행이 완미(完美)한 사람이란 뜻이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12 여기서는 박사익이 노론의 당론에 충실한 것을 칭송한 말이다.

[D-015]남들과 …… 않아 : 원문은 不喜徵逐爲翕翕熱인데, 한유(韓愈) 당 고 조산대부 상서고부랑중 정군 묘지명(唐故朝散大夫尙書庫部郞中鄭君墓誌銘)’ 중에 不爲翕翕熱이라 한 대목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한유의 문집 중에는 翕翕熱 翕翕然으로 되어 있는 이본(異本)도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문효세자(文孝世子) 진향문(進香文) 의빈(儀賓)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하늘이 우리 동방 돌보시사 / 天眷東方

광명하고 창성하니 / 景明靈昌

성신(聖神)으로 기르시고 / 聖造神育

인덕(仁德)으로 살찌우시네 / 德膴仁肪

백성 소망 살피시어 / 乃省群顒

탄생을 늦추지 않아 / 其降不遲

한 번 구해 진괘(震卦) 되고 / 一索成震

두 번 밝아 이괘(離卦) 되었네 / 兩明作离

영조의 증손이요 / 英宗曾孫

지금 임금의 세자시니 / 今王世子

나라 점()이 길조여서 / 國占用吉

선조를 계승하리라 하네 / 厥曰攸似

붉디붉은 궁중 대추 / 赫赫宮棗

백년 만에 다시 열리니 / 百年再實

숙조와 부합하는 영험을 / 肅祖靈符

오늘 다시 보게 되네 / 復覩今日

탄생하던 그날 저녁 / 誕彌之夕

붉은빛이 궁에 가득 / 紅光滿宮

추성(樞星)에 번개 두른 듯 / 如樞繞電

화저(華渚)에 무지개 지듯 / 如渚流虹

이 모든 징조들이 / 凡厥庶徵

처음부터 다 후하여 / 罔不篤初

봉의 바탕에 용의 무늬 / 鳳質龍章

실로 하늘이 예비하셨네 / 實天所儲

어질고 온화함은 / 仁孝溫文

본성에서 나왔으니 / 惟性之根

임금님이 오시면은 / 天顔載臨

기뻐하며 옹알대다 / 婉愉言言

임금님이 가시면은 / 玉趾言旋

돌아보며 앙앙 우네 / 顧懷喤喤

병풍 위의 글자 분별 / 屛間辨字

걸음마도 하기 전이요 / 時未扶床

쓴 약 권해 올릴 때도 / 誘進苦劑

반드시 책을 먼저 잡으셨네 / 必先方冊

한밤중에 화재 경고하시니 / 深宵警火

하늘이 준 예지로세 / 慧智天錫

코 골던 놈 곧 깨어나 / 彼鼾方覺

연소(延燒) 아니 되었다오 / 遂不延逮

청구를 처음 열 제 / 靑邱肇闢

요 임금의 첫해와 같았으니 / 叶堯初載

조정에서 세자 책봉 받으실 제 / 受冊大庭

해 빛나고 구름 상서로워라 / 日麗雲卿

쌍상투에 칠장복(七章服) / 雙髻七章

차비 갖춰 맞을 적에 / 備事將迎

백관의 모자 우뚝우뚝 / 會弁嵬峨

일만 눈이 다투어 보며 / 萬眸爭瞻

목을 빼고 발끝 드니 / 延頸跂踵

수염이 길게 드리웠네 / 若若其髥

의젓하게 앉았으니 / 穆然端坐

늘 본 것같이 여기되 / 若常覿之

기대거나 한눈팔지 않고 / 不凭不惰

두려워하거나 의심 않으니 / 不攝不疑

저절로 생긴 위엄 / 不威而嚴

하마 그 위()에 나타났네 / 已見其位

어릴망정 대인(大人)이요 / 雖幼大人

군자의 덕 갖추셨네 / 維德不器

이날 여러 재상들이 / 是日群卿

뛸 듯이 기뻐하며 절하고 / 忭躍俯跪

사랑으로 안고 싶었으나 / 愛若進抱

두려워서 물러나 기다렸지 / 畏將退俟

이듬해 중구일(重九日) / 翌歲重九

효경 수업 시작하니 / 肇講孝經

우리 왕가 빛난 전통 / 我家徽躅

나이와 때 꼭 맞았네 / 年辰適丁

반교(泮橋 성균관 다리)에 둘러서서 귀 기울이면 / 環橋聳聽

글 읽는 소리 경종(磬鐘)을 울리는 듯 / 若出磬鍾

천년의 밝은 운수 / 千載熙運

거듭 만나 아름다워라 / 於休重逢

사백 년의 긴긴 세월 / 厥禩四百

쌓고 쌓인 경사에다 / 積慶累洽

하늘 보답 또렷하여 / 天有顯報

큰 덕으로 왕위를 얻으리라 / 大德必得

장구한 국가 사업 / 靈長之業

영원하길 비옵고 / 永祈千秋

우리 임금 근심 없어 / 吾王無憂

병만을 근심했네 / 惟疾是憂

복이 내려 이튿날 나았으니 / 慶臻翌瘳

하늘 이치 어긋나리요 / 謂理無舛

성한 의식 거행키로 / 縟儀將擧

좋은 날을 가렸는데 / 吉日載選

하룻밤 새 이게 웬일 / 云胡一夕

온 장안 놀라 뒤숭숭 / 滿城駭遑

남종 여종에다 / 丫靑隸皂

늙은이와 어린애들까지 / 叟白童黃

허둥지둥 헐떡이며 / 顚仆喘汗

가슴 헤치고 하늘에 호소 / 袒胸龥旻

세자를 부르짖으며 / 長號貳極

모두 대신 백번이라도 죽으려 하네 / 擧懷百身

제사도 지내 봤고 / 珪璧旣卒

의술도 소용없어 / 刀圭亦窮

팔도는 슬픔으로 뒤덮이고 / 哀普八域

삼궁은 비통에 잠겼네 / 痛纏三宮

종묘 제사 어디 의탁하며 / 宗器靡托

신과 사람은 뉘를 의지하리 / 神人疇依

중륜의 칭송 스러지고 / 重輪撒謠

전성의 빛 가리우니 / 前星掩輝

상자 속 사계삼(四䙆衫)은 겨우 한 자요 / 篋䙆纔尺

소반 위 활은 겨우 석 자로세 / 盤弧厪三

슬프다 이 온 나라에 / 嗟爾匝域

수많은 어린아이들 / 有萬女男

홍역 한창 치성하여 / 疹之方熾

마을 곳곳 불 지필 때 / 衖鬨爐烘

왕께선 자식인 양 여기시고 / 王無弗子

내 몸처럼 아파하여 / 若恫在躬

영약을 집집이 돌리고 / 靈丹戶遍

의원을 보내 다 같이 치료받게 하여 / 臣跗汝偕

귀신에게서 빼앗아 내어 / 奪之鬼牙

어미 품에 돌려주니 / 還厥母懷

이 누구의 덕이더뇨 / 繄誰之賜

검은 머리 백성들아 / 群黎百姓

너희가 하루라도 안정되면 / 集汝一日

바로 네 경사로다 / 尙作汝慶

복령(茯苓) 백출(白朮) 모아다가 / 阜厥苓朮

산처럼 쌓았건만 / 猶成陵岡

하늘 실로 못 믿겠고 / 天固難諶

사람 또한 어질지 못하네 / 人亦不臧

저 의원놈 잡아다가 / 願執彼醫

승냥이나 범에게 던져 주었으면 / 投畀豺虎

아 슬퍼한들 어쩌리요 / 何嗟及矣

이내 마음 씀바귀 맛 / 我心荼苦

어린 세자 지극한 효성 / 沖齡至性

저승에 간들 다름없으리 / 無閒幽明

 원문 빠짐  / □□□□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문효세자(文孝世子) : 정조의 첫아들이다. 정조 6(1782) 의빈(宜嬪) 성씨(成氏)의 소생으로 태어나 정조 8년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조 10(1786) 5월 병사(病死)하였다. 효창원(孝昌園)은 그의 묘소이다.

[C-002]의빈(儀賓) : 임금의 사위. 여기서는 금성위 박명원을 가리킨다. 당시 경희궁(慶熙宮)에 안치한 빈궁(殯宮)에 박명원이 종척(宗戚)으로서 참석하여 향을 올렸다.

[D-001]백성 소망 살피시어 : 군옹(群顒)은 군생(群生)이 앙모(仰慕)함을 뜻한다. 회남자(淮南子) 숙진훈(俶眞訓) 이런 까닭에 성인은 음양의 기를 호흡하니 군생이 모두 앙모하여 그 덕을 우러러 유순하게 따른다.是故聖人呼吸陰陽之氣 而群生莫不顒顒然 仰其德以和順고 하였다. 옹옹연(顒顒然)은 앙망하는 모양을 뜻한다.

[D-002]한 번 …… 되고 : 주역 정전(程傳)에 의하면 진괘(震卦)는 나라를 계승하는 왕의 장남(長男)을 상징한다. 양효(陽爻)가 두 음효(陰爻)의 아래에 있어 하늘과 땅의 교접을 한 번 구하여 진()이 되니, 생물의 장()이므로 장남이 된다.乾坤之交 一索而成震 生物之長也 故爲長男고 하였다. 여기서는 장남이 태어났다는 뜻이다.

[D-003]두 번 …… 되었네 : 3개의 효()로 된 소성괘(小成卦) ()는 밝음을 상징하는데, 이것이 중복된 것이 대성괘(大成卦) ()이다. 이괘는 왕이 선왕(先王)의 명덕(明德)을 계승하여 선정을 베풀 조짐을 상징한다. 주역 이괘 상사(象辭)에 이르기를, “밝음이 중복되어 이()를 일으키니 대인(大人)이 이로써 밝음을 계승하여 천하를 밝게 비춘다.明兩作離 大人以繼明 照于四方고 하였다. 여기서는 왕위를 능히 세습할 만한 인물이 태어났다는 뜻이다.

[D-004]선조를 계승하리라 하네 : 점사(占辭)의 내용을 가리킨다. ()는 사속(嗣續)의 뜻으로, 선조의 유업(遺業)을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斯干) 선조를 계승하여 담장이 백도나 되는 집을 지었네.似續妣祖 築室百堵라는 구절이 있다.

[D-005]숙조(肅祖) …… 되네 : 숙조는 공경하는 선조란 뜻으로, 여기서는 숙종(肅宗)을 가리킨다. 정조 10 6월 판돈녕부사 김종수(金鍾秀)가 지어 올린 문효세자지문(文孝世子誌文)에 의하면, 경희궁(慶熙宮)에 있던 큰 대추나무가 한동안 시들었다가 현종(顯宗) 2(1661)에 갑자기 꽃을 피우더니 그해 가을에 숙종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 후 대추나무가 다시 시들었다가 문효세자가 태어날 때에도 꽃을 피우는 이적(異蹟)을 나타냈으며, 정조는 대추가 익자 측근의 신하들에게 이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夢梧集 卷7 文孝世子誌文

[D-006]추성(樞星) : 북두칠성의 첫째 별을 말한다. 황제(黃帝)는 그의 어머니가 번갯불이 추성을 에워싸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

[D-007]화저(華渚)에 무지개 지듯 : 황제(黃帝)의 아들 백제(白帝) 소호씨(少昊氏)는 그의 어머니가 큰 별이 무지개처럼 화저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낳았다고 한다. 宋史 卷23 符瑞志 그러므로 왕의 탄생을 유저(流渚)나 유홍(流虹)이라 한다.

[D-008]실로 하늘이 예비하셨네 : ()는 예비로 저축한다는 뜻으로, 세자를 저군(儲君)이라 하고, 세자를 세우는 것을 건저(建儲)라고 한다.

[D-009]반드시 …… 잡으셨네 : 문효세자는 말을 배우기 전부터 이미 책을 좋아할 줄 알아서 글자가 씌어진 병풍을 곁에 두게 했으며, 몸이 아파 울 적에도 장난감이 아니라 책을 가져다 손에 쥐어 주면 진정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천자문(千字文)이 닳아지고 손때가 탔을 정도라고 한다. 夢梧集 卷7 文孝世子誌文

[D-010]청구(靑邱) …… 같았으니 : 삼국유사(三國遺事) 1 기이(紀異) 고조선(古朝鮮) 조에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고조선의 개국이 요 임금과 같은 때與高同時라고 하였다.

[D-011]칠장복(七章服) : 무늬가 장식된 대례(大禮) 제복(祭服), 즉 면복(冕服)을 장복(章服)이라 한다. 황제는 12종의 무늬를 장식한 12장복을 입고, 왕은 9장복을 입는다. 왕세자는 화충(華蟲) · () · 종이(宗彛) · () · 분미(粉米) · () · ()의 무늬를 장식한 7장복을 입는다.

[D-012]군자의 덕 갖추셨네 : 논어 위정(爲政)에서 공자는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君子不器라고 하였다. 특정한 용도를 가진 그릇처럼 특정한 기능만을 갖춘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D-013]우리 …… 맞았네 : 문효세자는 네 살이 되던 정조 9(1785) 중양절(重陽節) 날부터 효경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날은 숙종이 처음 효경을 배웠던 연월일(年月日)로부터 꼭 재주갑(再周甲 : 120)이 되는 때였다고 한다. 夢梧集 卷7 文孝世子誌文

[D-014]천년의 …… 아름다워라 : 기자(箕子)가 건국한 이래 천년이 지나 다시 조선(朝鮮)이 중흥했다는 뜻이다.

[D-015]사백 년의 긴긴 세월 : 조선왕조 건국 이후 400년이 지났다는 뜻이다.

[D-016] …… 얻으리라 : 중용장구  17 장에서 공자는 순() 임금의 위대한 효성을 칭찬하면서 그러므로 큰 덕은 반드시 그 지위를 얻는다.故大德必得其位고 하였다.

[D-017]우리 …… 근심했네 : 논어 위정(爲政)에서 맹무백(孟武伯)이 효()에 관해 묻자 공자는 부모가 오직 그의 병만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다.父母唯其疾之憂라고 답하였다. 병을 앓는 일 외의 일체의 다른 일로 부모를 근심하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효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는 문효세자가 다른 일로는 정조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았는데 다만 홍역을 앓아 정조가 걱정했다는 뜻이다.

[D-018]제사도 지내 봤고 :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 규벽도 다 썼는데 왜 호소를 들어 주시지 않나.圭璧旣卒 寧莫我聽라고 하였다. 규벽(圭璧) 규벽(珪璧)’과 같으며, 제사 지낼 때 예물로 바치는 옥()이다.

[D-019]삼궁(三宮) : 왕과 대비(大妃)와 왕비를 가리킨다.

[D-020]중륜(重輪) : 태양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광채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대에는 태자(太子)를 이에 비유하였다.

[D-021]전성(前星) : 심성(心星)의 세 별 중의 하나로서 세자(世子)를 가리킨다. 한서(漢書) 27 오행지(五行志) 심성 가운데 큰 별은 천왕(天王), 앞의 별은 태자(太子), 뒤의 별은 서자(庶子)를 상징한다.” 하였다.

[D-022]사계삼(四䙆衫) : 동자(童子)의 평상복을 가리킨다. 居家雜服攷 卷3 幼服

[D-023]소반 …… 석 자로세 : 세자가 태어난 지 3일 뒤에 활 쏘는 사람이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로 천지와 사방에 여섯 번 쏜다. 세자가 장차 원대한 뜻을 품기를 기대하는 취지에서라고 한다. 禮記 內則

[D-024]의원을 …… 하여 : ‘신부(臣跗)’ ()’는 황제(黃帝) 때의 명의(名醫)인 유부(兪跗)를 가리킨다. 유부는 편작(扁鵲)과 함께 유편(兪扁)’이라 불렸으며, 명의의 치료술을 유편지술(兪扁之術)이라 하였다. 당시 정조는 한성부(漢城府)에 명하여 양반과 상민을 막론하고 자력으로 약물을 준비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의사(醫司)가 의원을 지정하여 진찰하고 약물도 공급하도록 했다. 正祖實錄 附錄 行狀

[D-025]원문 빠짐 : 이본에는 장지를 정하니 율목의 언덕이라.去隧載卜 栗木之原는 구절이 더 있다. 율목은 고양군(高陽郡) 율목동으로 현재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 자리를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정종대왕(正宗大王) 진향문(進香文)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천 년 지나 성인 한 분 / 千載一聖

동방에서 왕위를 받으시니 / 誕膺東方

기자(箕子) 홍범(洪範)으로 다시 질서 세우고 / 箕範再敍

문운(文運) 거듭 창성했네 / 奎運重昌

공자(孔子) 생각 주공(周公) 마음 / 孔思周情

계승하고 본받아서 / 祖述憲章

크고 넓은 정책 펴니 / 宏規鴻猷

 · 당조차 옹색하다 여기셨네 / 狹陋漢唐

재위하신 스물네 해 동안 / 二紀光御

한결같이 건강의 덕을 지켜 / 一德乾剛

궁원 호칭 바로잡고 / 號正宮園

선왕(先王)을 깊이 사모하셨네 / 慕深羹牆

총악 같은 간신 잘라 버리고 / 璁萼折萌

헌기 같은 외척 없애 버리니 / 憲冀鋤强

밝게 내건 큰 의리가 / 大義昭揭

모든 왕에 우뚝하네 / 卓冠百王

교화하고 상벌 주기 / 秩敍命討

우로(雨露) 같고 상설(霜雪) 같아 / 雨露雪霜

누가 감히 현혹하며 / 孰敢疑眩

누가 감히 속이리 / 孰敢譸張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즈음에 / 向背之際

군자와 소인이 판명되나니 / 斯判陰陽

저 일만 삼천 선비들 / 彼萬三千

어찌하여 광풍처럼 날뛰는가 / 云胡颷狂

군중으로써 위협하여 / 要脅以衆

우리나라의 법도(法度) 거스르니 / 悖我典常

말세 풍속 길을 헤매며 / 末俗昏衢

자빠지고 쓰러지네 / 醉顚汗僵

어찌 악취가 다르랴만 / 豈不異臭

같은 속셈 이게 웬일 / 柰此同腸

화복과 이해 따라 / 利害禍福

허둥대는 꼬락서니 / 所以披猖

그 원인을 따져 보면 / 究厥所原

망녕된 생각이 주가 된 것 / 妄度爲將

거센 물결 넘실넘실 / 滔滔狂瀾

뉘라 능히 막을쏜가 / 誰能力鄣

의리는 대소를 막론하고 / 理無巨細

털끝만 한 차이로 나뉜다네 / 析在毫芒

이 의리를 준수하는 자 / 嚴此義者

상서롭고 길하거니와 / 迺吉迺祥

이 이치를 등진 자는 / 北是理者

올빼미 아니면 승냥이라 / 爲梟爲狼

옛 성왕(聖王)의 훌륭하신 예절 / 皇王盛節

이 대방을 뉘 지키리 / 孰此大防

황극(皇極)에 모이고 귀의하게 하여 / 會極歸極

도를 따라 모두 선량하게 하니 / 與道偕臧

어허, 이 지극한 덕 / 嗚呼至德

뉘라서 잊게 하리 / 俾也可忘

용도각(龍圖閣)을 세우고 / 龍圖建閣

천책부(天策府)를 만드니 / 天策設廂

진실로 문무 갖추어 / 允文允武

그 공 그 꾀 아름답네 / 謨烈思皇

백사(百事)가 절도에 맞아 올바르시니 / 百度惟貞

이에 비로소 대양하였네 / 昉此對揚

형벌을 신중히 하고 농업을 중시하여 / 欽刑重農

일념으로 백성을 보살피시니 / 一念如傷

형벌을 감해 주신 은혜 뼈에 사무치고 / 恩蠲浹髓

내린 윤음(綸音) 빛나고 빛나 / 寶綸煌煌

모진 추위 심한 더위에도 / 祈寒盛暑

종묘 제사라면 몸소 나서고 / 必躬烝嘗

상신 더욱 중히 하니 / 尤重上辛

밝은 덕이 향기롭네 / 明德馨香

친히 지은 백 권 문집 / 御製百卷

성스러운 방략 원대하여라 / 聖謨洋洋

정주 학문 으뜸 삼고 / 學宗程朱

복희(伏羲) 황제(黃帝) 법통 이어 / 統接羲黃

대지 같고 바다 같은 학문으로 / 地負海涵

동방에 유교를 전파하셨네 / 吾道其東

 

()은 협운(叶韻)으로 도()와 량()의 반절(反切),  으로 발음한다.

세도(勢道) 물리치고 속악(俗樂) 바로잡기 / 黜霸正䵷

쇠를 긁어내고 쭉정이 솎아 내듯 / 剔鐵簸糠

열성조(列聖朝) 가법 따라 / 列聖家法

존화양이(尊華攘夷) 준수하고 / 式遵尊攘

춘추대의(春秋大義) 따라 / 一部陽秋

손수 조정의 기강 이끄시니 / 手提天綱

백성 중의 비범한 인물들 / 赤子龍蛇

임금께 대도(大道) 보였도다 / 示我周行

오늘날의 서학(西學)이란 / 今之西學

양주(楊朱) 묵적(墨翟)보다 심하기에 / 甚於墨楊

사서(邪書)를 불태우고 / 火其邪書

우리 백성 사람 되게 하셨네 / 人吾黔蒼

맹자(孟子)처럼 사설(邪說)을 물리치니 / 辭廓孟闢

우 임금처럼 크신 공로 / 功侔禹荒

선왕의 사업 잇고 앞길 개척해 / 繼往開來

세자 위해 좋은 계책 전했으니 / 燕詒元良

구여 칭송 드높고 / 九如頌騰

사중 노래 길었도다 / 四重歌長

요순의 도 한번 꽃피우리라 / 堯舜一花

은인을 용상(龍床) 앞에 두시더니 / 銀印在床

천만년 지나도록 / 謂千萬年

강녕(康寧) 길이 받으시리 믿었는데 / 永受色康

어쩌자고 하루저녁 / 胡寧一夕

하늘나라로 떠나셨소 / 遽遐雲鄕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듯 / 地坼天崩

온 세상 사람들 부모를 여읜 듯이 여기네 / 率土如喪

남방에서 부음 듣고 / 奉諱南服

북을 향해 통곡하네 / 長號北望

팔도 백성 모두 엎디어 절하며 / 頓顙八埏

천지 일월 아득아득 / 宇宙茫茫

산과 바다도 슬피 울고 / 山哀海哭

피눈물이 눈에 가득 / 血淚盈眶

지난날 깊은 인덕(仁德) / 驗昔深仁

이 큰 슬픔 보니 알겠도다 / 觀此巨創

수렴하신 성모님이 / 聖母垂簾

희정당에 납시어서 / 熙政一堂

원우의 덕 짝하시고 / 媲懿元祐

주강 미덕 이으시사 / 嗣徽周姜

어린 임금 도우시니 / 保佑聖躬

황상원길(黃裳元吉)과 화합하도다 / 吉叶黃裳

하늘이 지으신 화성에는 / 天作華城

뽕나무 가래나무 우거졌네 / 有菀梓桑

가까이 선침 있어 / 仙寢密邇

대왕을 장차 모시리라 / 劍舃將藏

신이 오 년 동안 붓을 꽂고 / 臣五載簪筆

대왕을 곁에 모셔 / 黼扆之傍

각별히 입은 총애 / 偏荷寵私

하해(河海)엔들 비하리까 / 河海莫量

맡은 직책 얽매이어 / 符守所攖

흠위도 바라보지 못했도다 / 廞衛靡瞻

 

()은 협운으로 제()와 량()의 반절,  으로 발음한다.

욕의조차 못한 몸이 / 身未褥蟻

활을 안고 방황하며 / 抱弓彷徨

삼가 토산 제물 마련하고 / 敬修壤奠

명수 따라 올립니다 / 明水在觴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 정조 24(1800) 6월 정조가 승하하자 충청 감사가 당시 면천 군수로 재임 중이던 연암을 진향문 제술관(進香文製述官)으로 차출했으므로, 충청 감사를 대신해서 이 글을 지었다. 과정록 3에도 이 진향문이 인용되어 있다.

[D-001]동방에서 왕위를 받으시니 : 서경(書經) 무성(武成)에서 무왕(武王)은 선왕인 문왕(文王)을 예찬하면서 천명을 크게 받으셨다.誕膺天命고 하였다. 탄응(誕膺)은 천명이나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뜻한다.

[D-002]기자(箕子) …… 세우고 : () 나라 무왕(武王)이 기자에게 인륜(人倫)의 질서에 관해 묻자, 기자는 하늘이 우() 임금에게 주었다는 홍범구주(洪範九疇)가 곧 인륜의 질서라고 답하였다. 書經 洪範

[D-003]건강(乾剛) : 주역(周易) 잡괘전(雜卦傳) 건괘는 강함을 상징하고 곤괘는 부드러움을 상징한다.乾剛坤柔고 하였다. 건강의 덕乾剛之德은 왕의 권위를 뜻한다.

[D-004]궁원(宮園) 호칭 바로잡고 : 정조의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惠慶宮)으로 높이고,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하여 그 묘를 현륭원(顯隆園)으로 정한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D-005]선왕(先王)을 깊이 사모하셨네 : 정조 10(1786) 왕명으로 열성조(列聖朝) 19대의 업적을 서술한 갱장록(羹牆錄)을 간행한 일을 말한다.

[D-006]총악(璁萼) : () 나라 세종(世宗)의 신하인 장총(張璁 : 1475~1539)과 계악(桂萼 : ?~1531)을 가리킨다. 세종이 황제가 되어 자신의 생부 흥헌왕(興獻王)을 추숭하려고 하자 장총과 계악이 세종의 뜻에 영합하여 효종(孝宗)을 황백고(皇伯考), 흥헌제를 황고(皇考)로 부를 것을 청하고, 이에 반대하는 조정의 수많은 신하들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여기에서는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추숭하자고 주장을 하다가 죽음을 당한 이덕사(李德師)와 조재한(趙載翰) 등을 가리킨다.

[D-007]헌기(憲冀) : 후한 화제(和帝)의 외숙인 두헌(竇憲 : ?~92)과 환제(桓帝)의 외숙인 양기(梁冀 : ?~159)를 가리키며, 모두 황제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전횡한 사람이다. 여기에서는 정조 즉위년에 죽음을 당한 정조의 외종조부 홍인한(洪麟漢)과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 정후겸(鄭厚謙) 등을 가리킨다.

[D-008]밝게 …… 의리가 : 정조는 즉위 직후 홍인한 등을 역적으로 사사(賜死)한 사건의 전말을 밝힌 명의록(明義錄)을 간행하였다.

[D-009]교화하고 상벌 주기 : 서경 고요모(皐陶謨), 하늘이 부여한 질서天敍에 오전(五典 : 오륜)이 있고, 하늘이 부여한 등급天秩에 오례(五禮)가 있으며, 하늘이 임명하심天命은 덕이 있기 때문이니 오복(五服)으로써 그런 사람을 표창하고, 하늘이 성토하심天討은 죄가 있기 때문이니 오형(五刑)을 그런 사람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서() · () · () · ()는 백성들을 전례(典禮)로써 교화하고 신하들에게 상벌을 공정하게 시행하는 것을 뜻한다.

[D-010]일만 삼천 선비들 : 정조 16(1792) 4 27일 사도세자 30주기에 즈음하여 영남 유생 이우(李㙖)  1 57명이 연명하여 사도세자의 죄를 신원하고 그를 모해한 무리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5 7일에 다시 1 368명이 연명하여 2차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노론(老論)의 이병모(李秉模), 서유린(徐有隣), 정민시(鄭民始) 등이 동조하고 소론(少論) 유생 700여 명도 동조하는 상소를 올렸다. 일만 삼천의 선비라고 한 것은 이들을 포함한 숫자로 보인다. 正祖實錄

[D-011]거센 …… 막을쏜가 :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 백천(百川)을 막아 동으로 흐르게 하고, 거꾸로 흐르는 거센 물결을 돌이켰다.障百川而東之 廻狂瀾於旣倒고 하였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이단사설(異端邪說)의 유행에 맞서 유교의 정통을 수호한 공로를 예찬한 말이다.

[D-012]올빼미 : 올빼미는 어미를 잡아먹는다고 하여 불효조(不孝鳥)로 간주되었다. 부모를 잡아먹는 극악무도한 인간을 효경(梟獍)이라 한다.

[D-013]대방(大防) : 백성들이 악에 빠지는 것을 막아 주는 큰 둑이란 뜻이다. 옛 성왕(聖王)들은 이를 위해 예절을 제정하였다.

[D-014]황극(皇極) …… 하여 : 황극은 제왕(帝王)이 천하를 통치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을 말한다. 이 구절은 서경 홍범의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탕탕(蕩蕩)하며, 편당함이 없고 편벽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평평(平平)하며, 상도(常道)에 위배됨이 없고 기울어짐이 없으면 왕의 도가 정직(正直)할 것이니, 그 극()에 모여 그 극()에 돌아올 것이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D-015]용도각(龍圖閣) : () 나라의 왕실 도서관으로서 황제의 문집, 도화(圖畵), 세보(世譜) 등을 보관한 곳이다. 여기에서는 정조가 왕실 도서관으로 설치한 규장각(奎章閣)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D-016]천책부(天策府) : 당 나라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설치한 군부(軍府)의 이름으로 이세민은 이를 통해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는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친위 군영(親衛軍營)인 장용영(壯勇營)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D-017]진실로 문무 갖추어 : 시경 노송(魯頌) 반수(泮水) 진실로 문무 갖추어 조상을 빛내시니允文允武 昭假烈祖라 하였다. () 나라 임금을 칭송한 말이다.

[D-018]백사(百事) …… 올바르시니 : 서경 여오(旅獒) 귀와 눈에 부림을 당하지 않으면 백사가 절도에 맞아 올바를 것이다.不役耳目 百度惟貞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임금이 성색(聲色)을 멀리하였다는 뜻이다.

[D-019]대양(對揚) : 신하가 왕명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D-020]일념으로 백성을 보살피시니 : 맹자 이루 하(離婁下) 문왕(文王)은 백성을 마치 다친 사람처럼 보살피셨다.視民如傷고 하였다.

[D-021]형벌을 …… 사무치고 : 정조는 재판과 형벌에도 신중을 기하여 억울한 죄인이 나오지 않도록 했으며, 형구(刑具)를 정비하기 위해 흠휼전칙(欽恤典則)을 편찬하게 했다. 정조의 판결을 모은 심리록(審理錄) 26권이 있다.

[D-022]내린 …… 빛나 : 정조는 농정(農政)을 권장하는 윤음을 여러 차례 내렸는데, 그중 특히 정조 22(1798)에는 권농정(勸農政) 구농서(求農書)의 윤음을 내려 널리 농사 진흥책을 구하였다.

[D-023]상신(上辛) …… 하니 : 상신은 매월 상순(上旬)의 신일(辛日)에 해당하는 날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정월(正月) 신일에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특히 중하게 다룬 것을 말한다.

[D-024]밝은 덕이 향기롭네 : 서경 군진(君陳) 훌륭한 정치는 향기로워 신명을 감응케 한다. 기장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이 오직 향기롭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香 明德惟馨고 하였다.

[D-025]백 권 문집 : 홍재전서(弘齋全書) 100권을 가리킨다.

[D-026]성스러운 방략 원대하여라 : 서경 이훈(伊訓)에서 이윤(伊尹)은 탕() 임금의 손자 태갑(太甲)이 왕위에 오르자, 선왕(先王) 성스러운 방략은 원대하고, 훌륭한 교훈은 매우 분명하다.聖謨洋洋 嘉言孔彰고 하면서 이러한 선왕의 모훈(謨訓)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D-027]동방에 유교를 전파하셨네 :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오도는 일관되어 있다.吾道一以貫之고 하였듯이, ‘오도(吾道)’는 공자의 가르침 즉 유교를 말한다. 또한 후한(後漢) 때 정현(鄭玄)이 마융(馬融)의 문하를 떠나자 마융이 오도가 동으로 갔구나.吾道東矣라고 탄식하였다고 한 고사에서, 동쪽으로 유학이 전파되었다는 뜻의 오도동(吾道東)’이란 성어가 생겼다.

[D-028]임금께 대도(大道) 보였도다 : 시경 소아(小雅) 녹명(鹿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여 나에게 대도(大道)를 제시했네.人之好我 示我周行라고 하였다. 신하들에게 잔치를 후히 베풀어 화합을 도모하니, 신하들이 감복하여 임금인 자신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대도(大道)를 피력했다는 뜻이다.

[D-029]맹자(孟子)처럼 …… 공로 : 정조가 천주교를 배척한 것은 맹자가 피사(詖辭) · 음사(淫辭) · 사사(邪辭) · 둔사(遁辭)를 확청(廓淸)함으로써 양주와 묵적 같은 이단(異端) 사설(邪說)을 배척한 것과 같으며, 우 임금이 치수(治水) 사업으로 홍수를 막은 공로에 비할 만하다는 뜻이다.

[D-030]구여(九如) : 임금의 덕을 칭송하여 산과 같고如山 언덕과 같고如阜 산마루와 같고如岡 구릉과 같고如陵 냇물이 한창 흘러오는 것과 같으며如川之方至 초승달과 같고如月之恒 떠오르는 해와 같고如日之升 장구한 남산과 같고如南山之壽 무성한 송백과 같음如松柏之茂을 말한 것이다. 詩經 小雅 天保

[D-031]사중(四重) : 말을 중하게 하고重言 행동을 중하게 하고重行 용모를 중하게 하고重貌 좋아하는 것을 중하게 하는 것重好을 말한다. 揚子 法言

[D-032]요순(堯舜) …… 두시더니 : 영조 말년 대리청정할 때 정조는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승정원일기에서 자신의 생부(生父)인 사도세자와 관련된 기사를 세초(洗草)해 줄 것을 간청했다. 정조의 효성에 감동한 영조는 이를 허락하고 정조에게 유서(諭書)와 함께 효손(孝孫)’이라 새긴 은으로 주조한 도장을 하사했다. 그 후 정조는 조회할 때나 행차할 때나 항상 이 유서와 은인(銀印)을 앞에다 두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정조는 영조와 사도세자에 대해 효도를 다하고자 했으므로, 정조실록에 실린 행장에서도 맹자(孟子)에서 요순의 도는 효제일 따름이다.堯舜之道 孝悌而已矣란 말을 인용하여 정조의 효를 예찬했다.

[D-033]하늘나라로 떠나셨소 : 운향(雲鄕)은 선계(仙界)를 가리킨다.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성인(聖人) 천세토록 살다가 인간 세상이 싫어지면 떠나서 신선이 되어 올라가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에 이른다.千歲厭世 去而上僊 乘彼白雲 至於帝鄕고 하였다.

[D-034]성모님 : 영조(英祖)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를 가리킨다.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D-035]원우(元祐)의 덕 짝하시고 : 원우는 송() 나라 철종(哲宗)의 연호이다. 철종이 9세로 황제에 오르자 조모 선인태후(宣仁太后) 고씨(高氏)가 수렴청정을 하여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 문언박(文彦博)을 재상으로 삼아 나라를 안정시켰다.

[D-036]주강(周姜) 미덕(美德) 이으시사 : 주강은 주() 나라 태왕(太王)의 비()이자 문왕(文王)의 조모(祖母)인 태강(太姜)을 말한다. 현명하고 덕이 있었다. 시경 대아(大雅) 사제(思齊) 태사께서 태강의 미덕을 이으시니太似嗣徽音라고 하였다.

[D-037]황상원길(黃裳元吉) : 주역 곤괘(坤卦) 육오(六五)의 효사(爻辭) 황색 치마이니 크게 길하리라.黃裳 元吉 하였는데, 이는 여자로서 높은 신분에 있으면서 중도를 지키고 아래에 거처하면 크게 길하다는 뜻이다.

[D-038]뽕나무 가래나무 우거졌네 : 뽕나무와 가래나무桑梓는 부모가 자손에게 물려주고자 심는 나무들이다. 따라서 고향이나 노부모를 상징하는데, 여기서는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가 묻힌 곳이라는 뜻이다.

[D-039]선침(仙寢) :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인 현륭원(顯隆園)을 가리킨다. 정조의 능침인 건릉(健陵)은 현륭원의 동편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두 능침은 현재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화산(花山)에 나란히 있다.

[D-040]대왕을 장차 모시리라 : ‘검석(劍舃)’은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죽어 교산(橋山)에 묻혔는데, 산이 무너지면서 관이 텅 비고 칼과 신만 관에 남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列仙傳

[D-041]붓을 꽂고 : ‘잠필(簪筆)’은 모자에다 붓을 꽂아 두어 측근에서 임금의 말씀을 기록할 준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사관(史官)이나 간관(諫官), 승지(承旨) 등의 직무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D-042]흠위(廞衛)도 바라보지 못했도다 : 흠위는 국장(國葬)의 행렬에 동원된 군대를 말한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D-043]욕의(褥蟻) : 임금과 함께 죽는 것을 말한다.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나오는 안릉군(安陵君)의 고사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D-044]활을 안고 방황하며 : 황제(黃帝)가 죽을 때 용을 타고 승천하자, 용을 타지 못한 신하들이 용의 수염을 붙잡는 바람에 용의 수염이 뽑혀 떨어지면서 황제가 지니고 있던 활도 함께 떨어졌으므로, 백성들이 그 활과 용 수염을 끌어안고 통곡했다고 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여기서는 죽은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D-045]명수(明水) : 제사 때 올리는 맑은 물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양 경리(楊經理) () 치제문(致祭文) 사신(詞臣)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우리 동방 되살린 건 / 再造我東

누구의 공이던고 / 繄誰之功

천자의 명을 받은 / 天子攸命

창서 양공 이분일레 / 蒼嶼楊公

직책은 경리로서 / 職是經理

문무 재주 겸했고 / 才兼文武

범과 용 모양 부절(符節) 차니 / 虎符龍節

옛 윤길보(尹吉甫)에 견줄 만하네 / 視古吉甫

천과 휘두르며 / 天戈所揮

왜놈 소탕 맹세하니 / 誓蕩島夷

어사중승(御史中丞) 배도(裴度) / 如御史度

회서(淮西) 군사 순무하듯 / 往撫淮師

동작나루에서 군대 살피고 / 觀軍銅雀

자각을 호위하네 / 圍碁紫閣

호령소리 들릴세라 / 不聞號令

방략 지시 가만가만 / 潛授方略

으뜸 공은 뉘의 차지 / 孰占頭功

휘하에 서마 있어 / 帳有西麻

삼천 기병 풀어다가 / 發騎三千

소사에서 적 맞으니 / 迎敵素沙

깃대 하나 둑에 꽂고 / 塘置一旗

묵묵히 적의 동정 살피어서 / 黙察偃竪

천리 밖의 승부 결단 / 千里決勝

제 손바닥 금을 보듯 / 如掌其覩

적이 모인 남쪽 땅에 / 妖氛南天

나비 모양 진 만들고 / 蝴蝶爲陣

아침 해가 떠오르며 거울처럼 빛나자 / 輝鏡朝旭

칼 휘두르고 나아갔네 / 舞劍以進

이에 천자의 군사 / 于時天兵

다리 밑서 철갑을 걸치고 / 浴甲橋下

재빠른 삼백 기병(騎兵) / 弄猿三百

한꺼번에 말 채찍질 / 一時鞭馬

 원문 빠짐 - / □□□□

말굽 아래 무찔렀으니 / 悉殲蹄間

이 한 접전 아니면 / 微此一鏖

교관(郊關) 지키기 어려웠지 / 難保郊關

번개처럼 군사 달려 / 全師電馳

저 울산(蔚山) 성채 쳐부수니 / 搗彼蔚砦

왜놈 수괴 궁지 몰려 / 凶渠窮蹙

사로잡긴 시일 문제 / 指日可械

반구정(伴鷗亭) 태화강(太和江)에서 / 鷗亭和江

적의 발톱 뽑아 버렸지만 / 落其牙距

몰린 왜놈 전세를 관망하며 / 困獸隙鬪

도산성(島山城)에서 버티네 / 島山是拒

절지를 앙공하며 / 絶地仰攻

막 불을 놓아 잡으려니 / 方圖熏穴

마침 하늘 찬비 내려 / 會天凍雨

손가락 떨어지고 살갗 찢어졌네 / 指墮膚裂

남은 도적 못 벤 것은 / 殘寇逋誅

때가 아직 불리한 탓 / 緣時未利

포위 풀고 잠시 철수 / 暫撤重圍

뒷 계획을 의논하자 / 後擧是議

간교한 참설 꾸며 / 讒說如簧

성대한 공적 헐뜯으며 / 忮毁茂績

공이 패전 숨기고 / 誣公掩敗

적을 풀어 줬다 무고하니 / 咎公縱敵

온 나라가 놀라 부르짖으며 / 擧國驚號

천조(天朝)에 달려가 송사했는데 / 走訟天朝

사신 내왕 빈번했어도 / 冠蓋旁午

비방 여론 막지 못하였네 / 莫遏群囂

마침내 공이 해임되어 / 遂解重務

행차 돌려 돌아가니 / 旌棨言旋

도성 안의 백성들이 / 都人士女

앞서 뒤서 달려오네 / 奔走後先

수레 잡고 통곡하나 / 攀轅痛哭

뉘 이 걸음 만류하리 / 莫挽其行

왜 조금 더 머물러서 / 胡不少留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지 않나 / 究我生成

결국 왜놈 잡은 것은 / 終焉獲醜

실로 공의 위엄 덕분 / 寔公餘威

백성들이 안정되고 / 生靈奠妥

온 나라가 깨끗해졌네 / 區宇淸夷

무릇 우리 조선 사람 / 凡我東人

은혜 입고 못 갚았으니 / 含恩未報

눈앞에 뵈옵는 듯한 정성으로 / 如見之誠

빛나는 사당 세웠도다 / 有奐廟貌

, 군탄의 해를 맞아 / 嗚呼涒灘

중국이 상전벽해(桑田碧海) 되었으나 / 桑海中州

오직 우리나라만은 / 惟我家法

춘추 대의(春秋大義) 지켰노라 / 一部春秋

명 나라 망한 것을 슬퍼하며 / 浸苞之悲

구원병 보내 준 일 생각하니 / 采芑之思

백 년이 지나도록 / 逮玆百年

의리 더욱 깊어지네 / 罙篤是義

운거에다 풍마 타고 / 雲車風馬

칠월이라 동쪽 순행 나서시니 / 七月東巡

충만하여 곁에 계신 듯한 / 洋洋左右

공은 황제의 신하 / 公惟帝臣

성 남쪽을 돌아보니 / 顧瞻城南

이내 생각 깊어지고 / 我思邃長

깨끗하고 엄숙한 사당 / 庭宇汛肅

단청 다시 으리으리 / 丹雘復光

흡사 영용(英勇)한 모습으로 / 彷彿英姿

갑옷 입고 머무시는 듯하니 / 來憩鎧仗

신령의 위엄 미친 곳마다 / 威靈所曁

바다 육지 길이 안정되리 / 永鎭海壤

술과 고기 진설하고 / 牲醪踐列

징과 북을 울리오니 / 鐃鼓振作

밝으신 신명이여 / 神明不昧

이 잔 고이 받으소서 / 庶歆玆酌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양 경리(楊經理) 치제문(致祭文) :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도찰원우첨도어사 겸 경리조선군무(都察院右僉都御史兼經理朝鮮軍務)로서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에 대한 제문이다. 양호는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함께 왜군을 격퇴했으나 울산 전투에서 고전 끝에 일시 경주로 철수한 뒤 참소를 당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조선 정부는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양호의 공적을 밝히고 그의 유임을 건의하면서 그에 대한 참소에 대해 해명하는 상소를 명 나라에 보냈으며, 그의 귀환을 애석해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고 선무사(宣武祠)에 배향(配享)하였다. 박종채(朴宗采) 과정록(過庭錄) 3에 의하면 이 글은 정조 20(1796) 안의 현감의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돌아와 산직(散職)에 있던 연암이 당시 좌승지였던 이서구(李書九)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라 한다. 즉 이서구가 편지를 보내, 어명으로 명 나라 장수 양호와 형개(刑玠)의 제문을 짓게 되었으나 공무에 바빠 겨를이 없으니 각각 50()으로 초고를 대신 만들어 줄 것을 간절히 부탁했으므로 지어 준 것이라 한다.

[D-001]창서(蒼嶼) : 양호의 호()이다.

[D-002]윤길보(尹吉甫) : 서주(西周) 선왕(宣王) 때의 인물로 성은 혜씨(兮氏)요 이름은 갑(), 자는 백길보(伯吉甫)이며, ()은 관직 이름이다. 선왕 때에 험윤(玁狁)이 침입하여 호경(鎬京)을 공격하자 윤길보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험윤을 태원(太原)까지 쫓아내고 돌아왔다. 여기에서 양호(楊鎬)를 굳이 윤길보에 견준 것은 양호의 ()’ 자가 서주의 도읍인 호경의  자와 같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詩經 小雅 六月

[D-003]천과(天戈) : 천자의 창 즉 제왕의 군대를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조주자사사상표(潮州刺史謝上表) 천자의 창을 휘두르니 모두 순종하네.天戈所麾 莫不寧順라고 하였다.

[D-004]어사중승(御史中丞) …… 순무하듯 : 당 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12(817)에 어사중승 배도가 회서선유초토처치사(淮西宣諭招討處置使)가 되어 채주(蔡州)의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은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新唐書 卷173 裵度傳

[D-005]동작나루에서 군대 살피고 : 선조 30(1597) 9 12일에 양호가 선조와 함께 한강의 동작나루에 와서 남쪽 지방의 전황을 살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宣祖實錄

[D-006]자각(紫閣) : 도성(都城)을 가리킨다.

[D-007]서마(西麻) : 양호 휘하의 제독 마귀(麻貴)를 가리킨다. 당시에 명 나라에서는 이여송(李如松)으로 대표되는 철령(鐵嶺)의 이씨와 마귀로 대표되는 사령(沙嶺)의 마씨 집안에 장수들이 가장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동리서마(東李西麻)’라 하였다. 또한 이여송의 아우 이여매(李如梅)도 총병(摠兵)으로 양호의 휘하에 함께 와 있었다. 明史 卷238 麻貴傳

[D-008]소사(素沙) : 직산(稷山)의 소사평(素沙坪)으로 정유재란 때 명 나라 장수 해생(解生), 양등산(楊等山) 등이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일본군을 격파한 곳이다.

[D-009]적의 동정 : 언수(偃竪)는 깃발을 내리거나 세우는 것을 말한다.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깃발을 내리는 것을 언기(偃旗)라 한다.

[D-010]철갑을 걸치고 : 철갑을 걸치는 것을 욕철(浴鐵)’이라 한다.

[D-011]재빠른 삼백 기병(騎兵) : 동진(東晉)의 화가 대규(戴逵)의 그림에 농원도(弄猿圖)가 있고, 마상희(馬上戱)의 하나로 원기(猿騎)가 있다. 원숭이는 동작이 민첩하여 원첩(猿捷)’이란 성어가 있다.

[D-012]원문 빠짐 :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狡彼倭奴’, 숭실대 박물관 소장 필사본에는 猾彼倭奴로 되어 있다. 둘 다 교활한 저 왜놈들이란 뜻이다.

[D-013]교관(郊關) : 도성(都城)을 에워싼 교외 지역을 방어하는 관문(關門)을 말한다.

[D-014]왜놈 수괴 : 왜장 가또오 기요마사加藤淸正를 가리킨다.

[D-015]전세를 관망하며 : 소식(蘇軾)의 초연대기(超然臺記) 마치 틈 사이로 싸움을 구경하는 것 같으니, 승부가 어느 쪽에 있을지 또 어찌 알 수 있으랴.如隙中之觀鬪 又焉知勝負之所在라고 하였다.

[D-016]도산성(島山城) : 왜장 가또오 기요마사가 울산의 해변가 험준한 곳에 쌓은 성이다. 1597 12월에 양호가 울산으로 진군하여 반구정과 태화강의 왜적 소굴을 공격하자 왜군은 미리 만들어 놓은 도산성으로 도망을 가 항거하였다. 燃藜室記述 卷17 宣祖朝故事本末

[D-017]절지(絶地)를 앙공(仰攻)하며 : 험악하여 출로가 없는 지역을 절지라 하며, 저지대에서 높은 곳을 공격하는 것을 앙공이라 한다.

[D-018]간교한 참설 꾸며 : 당시 병부직방사 찬획주사(兵部職方司贊劃主事)로 조선에 온 정응태(丁應泰)가 명 나라 조정에다 양호를 무고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교언(巧言) 간교한 말 생황의 혀 같네.巧言如簧라고 하였다.

[D-019]눈앞에 …… 정성으로 : 제사 지낼 때 재계(齋戒)하는 동안 고인을 간절히 그리워하면, 그러한 정성에 감응하여 고인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한다. 禮記 祭義

[D-020]사당 : 선무사(宣武祠)를 가리킨다. 선무사는 선조 31(1598)에 형개(邢玠)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하여 세운 생사당(生祠堂)인데, 선조 37(1604)에 왕명으로 양호를 배향하였다.

[D-021]군탄(涒灘)의 해 : 군탄은 고갑자(古甲子)에서 신()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는 명 나라가 멸망한 1644년인 갑신년(甲申年)을 가리킨다.

[D-022]명 나라 …… 슬퍼하며 : 시경 조풍(曹風) 하천(下泉) 차갑게 흘러내리는 저 샘물, 가라지 덤불을 적시네. 아아 내 깨어나 탄식하며, 저 주 나라 서울을 생각하노라.洌彼下泉 浸彼苞稂 愾我寤嘆 念彼周京 하였다. 서주(西周)의 서울은 호경(鎬京)이므로, 양호(楊鎬)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도 함축할 수 있다.

[D-023]구원병 …… 생각하니 : 시경 소아(小雅) 채기(采芑)의 내용을 가리킨다. 주 나라 선왕(宣王) 때 만형(蠻荊)이 반란을 일으키자 방숙(方叔)에게 정벌을 명하였는데, 그때 군사들이 쓴 나물을 뜯어 먹으며 행군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정유재란 때 명 나라 천자가 양호가 이끄는 구원병을 파견한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D-024]운거(雲車)에다 풍마(風馬) 타고 : () 나라 무제(武帝) 때 만든 교사가(郊祀歌) 천지 신령의 수레는 검은 구름을 얽고 …… 천지 신령이 내려오실 때 바람같이 빠른 말을 타시네.靈之車 結玄雲 …… 靈之下 若風馬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명() 나라 신종(神宗)에게 제사를 올리니 황제의 신령이 강림한다는 뜻이다.

[D-025]칠월이라 …… 나서시니 : 음력 7 21일이 명() 나라 신종(神宗)의 기일(忌日)이었으므로,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을 향해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영조실록󰡕 36 7 21일 영조 22(1746)부터 대보단 제사에 명 나라 신종의 신하인 양호(楊鎬)와 형개(邢玠)를 배향(配享)하기로 하였다.

[D-026]충만하여 …… 듯한 : 중용장구  16 장에서 공자는 조촐하게 재계하고 엄숙한 옷차림으로 제사를 받들면 귀신이 충만하여 위에 계신 듯하고 좌우에 계신 듯하다.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형 상서(邢尙書) () 치제문(致祭文)

 

 

덕 높이고 공 갚는 건 / 崇德報功

나라의 큰 예법이라 / 邦禮之經

그 공 그 덕 무엇인고 / 功德維何

사직과 백성 살리신 것 / 社稷生靈

비하자면 물과 불이 / 譬如水火

문턱까지 아슬아슬 / 危迫堂戶

아차 순간 못 구했더라면 / 斯須不救

기둥까지 미쳐 집이 무너질 뻔했네 / 延棟潰宇

엄청난 신력으로 / 有大神力

불을 잡고 물 막으니 / 撲燎湮洪

어찌 갚아 좋을는지 / 宜如何報

그런 덕과 그러한 공 / 之德之功

예전에 우리나라 / 往歲吾邦

백륙 운수 걸려들어 / 離運百六

용과 뱀을 못 죽이니 / 龍蛇未菹

고래 악어 다시 뭍에 올랐네 / 鯨鱷復陸

영남 호남 재차 함락 / 嶺湖再陷

서울 근교까지 화 미쳤네 / 震及郊圻

이에 오 년이라 긴 세월 / 于時五載

우리 군사 비바람 속에 고생했으나 / 暴露王師

뒷마무리 계책 실수하고 / 策遺善後

화친(和親) 의논 잘못되어 / 和議實謬

황제 이에 성을 내어 / 天怒斯赫

요동 바다 병력 증가 / 遼海增戍

삼십 만의 대군이라 / 雄師卅萬

징과 북 소리 천리나 이어지고 / 鉦鼓千里

육지로 바다로 내달리니 / 陸走海運

꼴과 곡식 산더밀레 / 芻粟山峙

왜놈 정벌 이제까지 / 自征倭來

이런 거동 처음이라 / 未有此擧

천자의 말씀이, 이럴 수가! / 天子曰吁

군사 뉘 독려할꼬 / 疇督我旅

늠름할사 우리 형공(邢公) / 曁曁我公

궁중의 파목이라 / 禁省頗牧

병법 알고 변방 익숙 / 知兵熟邊

온 조정이 추천하니 / 廷中推轂

너는 가서 공경히 행하라 / 汝往欽哉

내 위엄을 대신 행하라 하시며 / 朕威汝將

상방검(尙方劍)을 빌려 주시니 / 劍借尙方

추상(秋霜)보다 으시으시 / 凜若秋霜

경리라 제독이라 / 惟是經理

그 이하를 막론하고 / 提督以下

모두 네가 통제하여 / 咸汝節制

가차 없이 지휘하라 하시었네 / 無所貸假

압록강에 공이 이르러 / 公臨鴨水

선발대가 한강 넘자 / 先驅渡漢

군대 함성 우레 같고 / 軍聲震駭

벽루 모습 달라졌네 / 壁壘改觀

공이 군중 다짐할 제 / 公來誓衆

옥대에다 망포 입고 / 玉帶蟒袍

원수 장군 숨죽이며 / 元帥屛營

활집을 메고 화살통을 찼네 / 屬鞬注櫜

청산(靑山) 직산(稷山)에서 무찌르고 / 靑稷旣鏖

울산(蔚山) 도산(島山)에서 몰아치니 / 蔚島繼蹙

토끼 굴이 마구 파이고 / 窟兎橫決

상산(常山)의 뱀 움츠러드네 / 常蛇瑟縮

괴수 놈은 넋 빠지고 / 凶渠褫魄

남은 잔당 놀라 숨으니 / 餘醜駭竄

우리나라 백성들이 / 惟我邦人

도탄 속을 벗어났소 / 得出塗炭

강을 건너 다시 올 젠 / 方其再渡

상처 입고 자리에 누웠더니 / 瘡痍衽席

마침내 돌아갈 젠 / 逮厥大歸

왜병 막을 꾀 남기셨네 / 禦倭餘策

공이 처음 올 적에는 / 始公之來

천둥 번개 치는 듯이 / 迹若雷霆

요사 흉악 쓸어 내길 / 蕩沴殲妖

재빠르고 힘차더니 / 奮迅砰轟

우로(雨露) 같은 은혜 남겨 / 留作雨露

죽은 목숨 살려 주고 / 洗癍蘇枯

은택을 베푼 뒤엔 / 膏澤旣潤

없는 듯이 떠났다네 / 斂歸如無

저 천둥과 저 이슬은 / 惟彼雷露

상제님의 은덕이나 / 上帝之仁

사람으론 상제님께 / 人於上帝

은혜 삼지 못하나니 / 莫之敢恩

조선 사람 이 때문에 / 所以東人

공의 은덕 잊지 못하네 / 公之德含

은덕 잊지 못하면 어찌하리 / 含德如何

성 남쪽에 생사당(生祠堂) / 廟貌城南

남들은 사자(死者) 제사하나 / 人祭其死

우린 생자(生者) 제사하니 / 我祠其生

이는 실로 조선 사람들이 / 寔由東人

신명처럼 받들기 때문 / 奉若神明

사악(四嶽)의 정기 타고나신 분 / 嶽降之神

세상 떠나신 지 하마 오래 / 久已騎箕

더더구나 백 년 지나 / 矧復百年

중원 문물 쑥밭이라 / 周京黍離

온 누리를 돌아보니 / 顧瞻四海

한쪽 우리 땅만 조촐하이 / 片土乾淨

공의 영령 예 계시니 / 公靈在此

누구보다 큰 업적 남기셨네 / 孔烈無競

해마다 칠월이면 / 年年七月

옥로(玉輅)가 동순(東巡)하니 / 玉輅東巡

명 나라 그리는 맘 / 風泉之思

이 사당을 중수(重修)하고 / 廟宇重新

지조 있는 선비들 잔 올리며 / 介士奉斝

징과 북을 울리노니 / 鐃鼓轟鳴

공을 죽지 않도록 하는 건 / 俾公不死

우리나라 사람들 정성일레 / 我人之誠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형 상서(邢尙書) 치제문(致祭文) : 원문에는  자가  자로 잘못 되어 있다. 형개(邢玠)는 정유재란 때 병부상서 겸 우부도어사 총독계요보정군무(兵部尙書兼右副都御史總督薊遼保定軍務)로서 명 나라 원병 3만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형개에 대한 제문 역시 1796년경 좌승지 이서구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

[D-001]백륙(百六) 운수 : 액운(厄運)을 말한다. 백륙은 음양가(陰陽家)에서 말하는 양구(陽九)의 액이다. ()는 양()의 극수(極數), 양만 있고 음이 없으므로 만물이 교섭을 할 수 없어 천하가 어지러워진다고 한다. 4617() 1()으로 하고, 처음 원에 든 106세 중에 양구(陽九)  9번의 재해가 있다고 하며, 재해가 가장 많으므로 액회(厄會)라 한다.

[D-002]용과 …… 올랐네 : 용과 뱀, 고래와 악어는 모두 포악한 존재, 곧 왜적을 가리킨다. 또한 용과 뱀은 각각 진()년과 사()년을 상징하며, 이러한 용사년(龍蛇年)은 흉년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는 처음 왜란이 난 임진년과 그 이듬해 계사년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섬멸하지 못해 정유재란이 났다는 뜻이다.

[D-003]파목(頗牧) : 전국(戰國) 시대 조() 나라의 명장인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가리키는 말로서, 궁중의 시종관(侍從官) 가운데 문무(文武)를 겸비한 신하를 금중파목(禁中頗牧)’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당시에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있던 형개를 빗대어 말한 것이다.

[D-004]너는 …… 행하라 : ‘가서 공경히 행하라往欽哉 서경(書經) 요전(堯典)에서 요 임금이 곤()에게 황하로 가서 치수(治水)에 힘쓸 것을 명하면서 한 말이다.

[D-005]상방검(尙方劍) : 상방(尙方)은 천자가 사용하는 기물(器物)을 제작하는 관서로서 천자가 대신(大臣)에게 권한을 위임할 때 그 징표로 내려주는 칼을 상방검이라 한다.

[D-006]경리(經理)라 제독(提督)이라 : 경리 양호(楊鎬)와 제독 마귀(麻貴)를 가리킨다.

[D-007]토끼 굴 : ‘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만들어 놓는다.狡兎三窟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왜적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개의 은신처를 말한다.

[D-008]상산(常山)의 뱀 : 머리와 꼬리가 서로 도와 적을 공격한다는 전설상의 뱀이다. 여기에서는 군진(軍陣)의 수미(首尾)가 서로 도와 가며 적에게 공격을 가하는 진법(陣法)을 말한다.

[D-009]사악(四嶽) …… 오래 :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 사악이 정기를 내려 보후(甫侯)와 신백(申伯)을 낳으셨도다.維嶽降神 生甫及申라고 하였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부열(傅說)이 죽어서 기미(箕尾)를 타고 올라가 별이 되었다고 하였다. 기수(箕宿)와 미수(尾宿) 사이에 부열성(傅說星)이 있다.

[D-010]누구보다 …… 남기셨네 : 시경 주송(周頌) 집경(執競) 강력하신 무왕이여, 누구도 다툴 수 없는 업적이셨다.執競武王 無競維烈라고 하였다.

[D-011]옥로(玉輅) : 천자가 타는 수레를 가리킨다.

[D-012]명 나라 그리는 맘 : ‘풍천지사(風泉之思)’는 주() 나라 왕실이 쇠미해짐을 탄식한 시경 회풍(檜風)의 비풍(匪風)과 조풍(曹風)의 하천(下泉) 시를 슬픈 마음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연분(年分) 가청(加請) 장계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무오년(1798, 정조 22)

 

 

본도(本道)의 농사가 참혹하게 흉년이 든 연유와 절박한 백성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이미 연달아 장계를 올린 바 있습니다. 신이 관할 지역을 순행하면서 연해의 고을을 먼저 하고 산간의 고을을 나중에 하여 이목(耳目)이 미치는 고을은 거의 다 파악하였으나, 길이 돌거나 구석진 고을의 경우는 편비(褊裨 측근의 비장(裨將))를 보내어 탐사하게 하거나 해당 수령들에게 물어서 처리하였습니다.

대저 본도는 경기와 영남의 사이에 처해 있어 왼쪽의 산간 지방은 그 지형이 높고 건조한 곳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오른쪽의 해안 지방은 그 토질이 소금기가 있는 땅이 절반이 넘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흉년이 들면 유달리 심한 흉년이 들기도 하고 풍년이 들어도 고르게 풍년이 들지 않습니다. 이 점을 호서(湖西) 사람들은 깊이 걱정하고 크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재해의 대장(臺帳)을 낱낱이 상고해 보면 그중에서도 가뭄의 피해가 가장 심합니다. 그런데 금년의 경우는 갓 해동(解凍)하던 때부터 이미 가뭄이 들 조짐이 있었으며, 2, 3월경에 비록 네댓 차례 비가 내리기는 하였으나 호미질하거나 쟁기질하거나 할 때 강수량이 일정치 않았으며 연해의 고을과 산간의 고을에 따라서도 강수량이 같지 않았습니다. 골짜기의 물이 나는 논이나 시내에서 봇물을 대어 오는 들판의 경우 간혹 때에 맞추어 물을 대고 파종을 하여 제때에 모내기를 한 곳이 있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10 2, 3에 불과합니다. 이 밖에 뭍으로 이어진 높고 메마른 땅들은 간신히 두레박으로 물을 끌어올리느라 힘은 갑절이나 들면서도 이미 모내기한 모는 땅에 심자마자 시들어 버리고 모내기를 하지 못한 모는 모판에서 그대로 타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계절이 늦여름이 되도록 한결같이 불볕 같은 가뭄이 계속되어 각처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인심이 목이 타들어 가듯 하였으나, 어리석은 백성들은 다른 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채 눈앞에서 농사의 때를 놓치고 있으면서도 단지 황급한 사태를 쳐다만 볼 뿐 앞으로의 조처를 어떻게 변통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루 이틀 아무런 손도 써 보지 못하고 있을 때, 성상께서 특별히 염려하시어 식량을 넉넉히 할 방도를 생각하시어 다른 작물을 대신 파종하도록 권장하고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을 유시(諭示)하여 봄기운처럼 온화한 윤음(綸音)을 내리시니, 백성들이 갈라지고 소금기 있는 들판과 묵혀서 버려진 구릉을 갈고 파종하여 앞 다투어 일을 하였습니다.

유월 초닷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큰비가 밤낮으로 계속 쏟아져 원근의 고을에 모두 흡족히 내렸습니다. 이에 미처 모를 옮겨 심지 못한 자들도 일제히 일어나 힘을 합쳤으므로 영읍(營邑)에서 백성들을 독려하고 권면할 때면 반드시 그래도 아예 버려두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였고, 요행을 바라는 백성들도 있어서 비록 늦기는 하지만 혹 수확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노약자들까지 힘을 모아 도롱이에 삿갓을 쓰고 다투어 달려 나오기는 하였으나 절기가 이미 늦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할 일은 어지럽게 많은데 인력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 보름이나 스무날을 끄는 바람에 이조차 차례로 중지하고 말았으니, 이 때문에 늦게 모내기한 벼가 모내기하지 않은 벼보다 많고, 모내기하지 않은 벼가 일찍 모내기한 벼보다 많게 된 것입니다. 대체로 이렇게 늦게 모내기한 허다한 벼들이 모두 중복(中伏) 전후로 심겨져, 설령 이후의 날씨가 고르고 비가 자주 내린다 하더라도 오히려 수확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형편이거늘, 농가(農家)에서 말하는 삼복(三伏)의 가뭄이 또다시 혹독하게 닥쳐와 유월 그믐과 칠월 스무날에 내린 비로는 이미 그 시듦을 막을 수가 없었으니, 일찍 모내기한 것은 대부분이 말라 버렸고 늦게 심은 것도 거의 다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강가의 척박한 땅과 바닷가의 소금기가 밴 땅이 가장 심하여 한 평() 두 평을 막론하고 마른 벼 포기가 논두렁에 연이어져 있고, 5 10리에 걸쳐 거친 갈대가 숲을 이루어 이것저것 보이는 것이 극히 참담합니다.

다만 산에 의지하여 조금 일찍 심은 것과 가뭄을 입되 조금 덜한 것 가운데는 혹 농사가 모양을 갖추어 간혹 수확되는 것도 있기는 하나, 여러 번 재상(災傷)을 겪어 받은 피해가 이미 고질이 되어 열매를 맺은 것이 거의 보잘것없다시피 하며 소출이 태반이나 줄어들었습니다. 대신 파종한 각종 작물은 필경 수확한 것이 처음 예상보다 배나 더하여, 늦게 모내기하느라 아무런 이익도 없이 헛수고한 것에 비하면 그 이익이 현격히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닙니다. 이에 이르러 민심이 마치 믿는 바가 있는 듯이 여기면서 모두들 조정에서 미리 다른 작물의 파종을 권장한 거룩한 덕과 지극한 뜻에 감격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한스러운 것이 있다면 이는 일찌감치 힘을 써 벼농사를 포기하고 다른 작물을 파종하지 못한 점입니다.

밭농사의 경우 논농사와 비교하여 훨씬 낫기는 하지만 이삭이 팰 무렵에 가뭄을 만나고 열매가 영글 무렵에 바람의 피해를 당한 탓에, 처음 대풍을 바라던 곳은 겨우 흉작을 면하였고 처음 흉작을 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곳은 결국 제대로 익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콩팥은 화종(和種 씨를 뿌려서 심는 것)과 근경(根耕 그루갈이)을 막론하고 기름진 곳이 아니면 거의 말라 시들어 수확이 얼마 되지 않았으며, 목면(木綿)은 연해의 고을이 더러 흉년이 들기는 하였으나 산간의 밭은 자못 수확이 잘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답을 조사하여 급재(給災 재해를 입은 전답의 조세를 면제해 주는 것)해 주는 일은 위로는 나라의 살림과 관계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과 관계되므로 평년이라 할지라도 진실로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되는 일이거늘, 하물며 금년처럼 곳곳에서 재해를 입어 이 고을 저 고을에서 흉작을 보고해 오는 실정에서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전번에 사목재(事目災) 1 5000결을 획하(劃下)하라는 특명을 내리셨는데 이는 실로 상례(常例)를 넘어선 전후에 보기 드문 은혜이니, 성상의 뜻을 선양하는 직책에 있는 자로서 특히나 십분 경계하고 백배 잘 살핀 다음 수령들을 연이어 신칙하여 고을마다 정리를 하게 하고 간간이 염탐하는 관리를 보내어 창고마다 살피게 하여 묵은 재탈(災頉)과 새 재탈 사이에 뒤섞이기 쉬운 것이나, 일찍 모내기하고 늦게 모내기한 것 사이에 구별하기 어려운 것 및 어느 면()이 재해가 많고 적은지와 어느 리()가 재해가 들고 풍실(豐實)한지를 별도로 조사하여 실정에 맞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다 보니 자연 이리저리 꿰맞추게 되어 각 고을의 개장(槪狀)조차 마감해 들이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따라서 모두 도착된 다음에 신이 삼가 장부를 열람하여 재총(災摠 재결의 총수)을 비교하고 가감(加減)할 것을 변별하여 세세한 것까지 타당하게끔 만들어 차례대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재해가 일어난 해에 토지의 등급을 매기는 것은 관계된 바가 더욱 중하므로 한번 착오가 생겨 혹 은혜가 고르게 베풀어지지 못하거나 조세를 편파적으로 징수한다는 원망이 나오게 되면, 이 또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성상의 뜻을 받드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이 이에 고을에서 올라온 보고와 백성들의 호소를 참고하고 직접 귀로 들은 것과 눈으로 본 것을 비교하여 한 도()를 세 등급으로 나누어 정했으니, 홍주(洪州)  39개 고을과 평신진(平薪鎭)은 우심읍(尤甚邑)에 올리고 충주(忠州)  18개 고을은 지차읍(之次邑)에 올리고 청풍(淸風)  7개 고을은 초실읍(稍實邑)에 올려 해당 고을의 이름을 낱낱이 기록하여 예람(睿覽 임금이 열람함)하실 수 있게 하였습니다.

대개 이와 같이 등급을 나눈 것은 다만 격례(格例)에 따라 거행한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따져 들어가 말하자면 그 사이에 재해를 입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통틀어 논해 보면 등급을 달리할 만큼 우열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산간의 고을은 밭이 많은 데다 밭농사의 수확이 논농사의 수확보다 잘 되었으므로 간혹 초실읍이 나온 것이며, 바닷가의 고을은 논이 많으나 논농사의 수확이 밭농사의 수확보다 못하였으므로 대체로 우심읍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금년에 이른바 초실읍이라고 하는 곳도 거두어들인 수확을 가지고 비교해 보면 평년의 우심읍과 차이가 없으니, 지차읍이나 우심읍의 상황 또한 이를 통해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우심읍 가운데 은진(恩津) · 석성(石城) · 부여(扶餘) · 예산(禮山) · 한산(韓山) · 연기(燕岐) · 서천(舒川) · 태안(泰安) · 덕산(德山)  9개 고을의 경우 강가의 토지는 척박하고 바다와 가까운 토지는 메말라 한눈에 보기에도 적지(赤地)여서 왕왕 모든 면()이 재황(災荒)으로 처리된 곳도 있으니, 이는 우심읍 가운데서도 특히 심한 고을입니다.

고을의 등급이 이미 나누어졌으니 면()을 나누는 일이 흉년에는 응당 시행되어야 할 것이며 리()를 나누고 가호(家戶)를 가리는 일 또한 그만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게다가 재해를 입은 곳이 예전에 비해 몇 갑절이나 되며, 한 평 안에서도 동쪽 서쪽이 판이하고 한 고() 안에서도 아래위로 현저히 달라서 우심면(尤甚面) 가운데에도 혹 초실호(稍實戶)가 있고 초실면(稍實面) 가운데에도 또한 우심호(尤甚戶)가 많이 있으니, 정밀하게 조사하는 정사(政事)를 시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전 고을로 나누어 그 대체(大體)만을 범범하게 논해서는 진실로 안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유별로 구분하게 하되 면()의 등급을 나누는 것은 고을의 보고가 올라오기를 조금 더 기다렸다가 성책(成冊)을 하여 추후에 비변사(備邊司)로 올려 보낼 계획입니다. ()를 나누고 가호를 가리는 일을 같은 식으로 기록하자면 결국 너무 번잡해지게 되겠기에 이것은 다만 영읍(營邑)에서만 사용하여 참고할 자료로 삼겠습니다.

본도(本道)로 말하자면 평소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다고 일컬어지며 평년에도 목숨을 연명하는 것조차 이어 가기가 어려운 실정인데, 이번의 참혹한 흉년을 돌아보면 옛날에도 드문 일이라 길쌈질도 그만두었을 뿐 아니라 소량의 양식도 똑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곡물 값이 배로 뛰어 다른 지역에서 사 오려고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추수가 한창인 계절에 목숨을 구걸하는 백성들과 봄이 채 되기도 전에 진휼을 청하는 백성들이 신의 일행이 가는 곳마다 말을 에워싸고 울며 호소하기를,

 

밭을 갈고 김을 매느라 온 힘과 양식을 다 바치고 열 식구가 이마에 손을 얹고 축수하며 추수 때가 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한번 가뭄이 들어 온갖 곡식이 모두 흉작이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해전(海箭 어전(魚箭) 즉 어살), 염분(鹽盆 바닷물을 가마에서 졸여 소금 만드는 일), 백저(白苧 흰모시), 포소(圃蔬 채소 기르기)와 같은 민간의 부업이 될 만한 것들도 거의 다 실패하게 되었으니, 신포(身布)는 어디서 마련해 낼 것이며 환곡(還穀)은 어디에서 구해 바치오리까?”

하며, 수백 수천 명이 떼를 지어 모여듭니다. 그들을 일일이 대응할 겨를도 없거니와 신 또한 이 지경이 되니 대답할 말이 없어, 단지 조정에서 백성들을 자기 몸 상한 듯이 가슴 아파하고 어린애를 보호하듯이 여기는 덕의(德意)를 받들어 가는 곳마다 유시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위로해 줄 뿐입니다.

지금 보니 가을걷이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므로 당장 구휼할 방법과 앞으로의 구제책을 다시 깊이 생각하여 계속해서 즉시 아뢸 계획입니다. 앙청(仰請)할 여러 조목들을 참작하고 마련하여 또한 일체 개좌(開坐 개록(開錄) 즉 기록)하였으니 묘당(廟堂 비변사)으로 하여금 성상의 지시를 받들어 분부하게 하소서.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연분(年分) 가청(加請) 장계 : 매년 호조에서 그해의 작황을 참고하여 조세 감면 대상인 급재결(給災結)과 조세 부과 대상인 실결(實結)의 총수를 정하여 각 도()에 반포한 것을 연분 사목(年分事目)이라 한다. 호조에서 연분 사목을 내려 보내면 각 도의 감사는 도내 고을 수령들이 재실(災實)을 보고한 개장(槪狀)을 참작하여, 고을별로 초실(稍實) · 지차(之次) · 우심(尤甚)으로 등급을 정한 뒤 급재결수(給災結數)를 배분하고 이를 성책(成冊)하여 호조에 보고한다. 이를 연분 장계라 한다. 호조에서 연분 사목으로 정해 준 급재(給災)를 사목재(事目災)라고 하며, 만약 사목재가 실제보다 적게 책정되었다고 판단되면 감사는 재결(災結)을 추가해 달라고 요청하는 장계를 올리는데 이 장계를 가청 장계라 한다.

[D-001]각처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 원문은 圭璧徧擧인데, 규벽(圭璧)과 같은 옥기(玉器)를 신에게 바치고 기우제를 드린다는 뜻이다.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음이 없고 이 희생물을 아끼지 않아, 규벽을 이미 다 바쳤거늘 어찌 나의 호소를 들어주시지 않나.靡神不擧 靡愛斯牲 圭璧旣卒 寧莫我聽라고 하였다.

[D-002]개장(槪狀) : 중요 내용을 개략적으로 보고한 문서로, 대개장(大槪狀)이라고도 한다.

[D-003]적지(赤地) : 재해를 입어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한 땅을 말한다.

[D-004]() : 일정한 곳의 논밭을 말한다. 성종실록(成宗實錄) 6 4 23일 조에 토속어로 전지가 있는 곳을 고라 한다.俗以田之所在謂庫 하였다.

[D-005]관문(關文) :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시달하는 공문서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연분 가청 장계 정사년(1797, 정조 21)에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본도(本道)의 농사 형편은 이미 전후(前後)의 장계(狀啓)에서 대강 진술하였거니와, ()의 부임이 마침 사방 들판의 곡식들이 익어 가는 때였으므로 도로변에서 본 바로는 풍년이 들 희망이 없지 않았으며 열읍(列邑)의 보고를 참조해 보아도 또한 그렇게 파악되었습니다. 그런데 관할 지역 순행에 나섰을 때가 곡식들을 수확할 무렵이어서 직접 눈으로 본 바로는 앞서와 확연히 달라, 비단 비가 내리기를 빌고 있는 고을들만 큰 흉년이 든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순행길에 몸소 지나간 곳이 아니면 수령들을 직접 면대하여 물어보았고, 만약 또 멀리 떨어져 있는 궁벽한 곳이라면 편비(褊裨)를 나눠 파견하여 하나하나 자세히 탐문하고 곳곳마다 허위 보고를 적발하게 하였더니, 도내(道內)의 농사 정도가 보고 들은 것이 대략 동일하고 열읍(列邑)의 작황이 심중에 분명하게 파악되었습니다.

통틀어 논하자면 과연 혈농(穴農)이기는 하지만, 연해와 산간 고을 사이에 득실(得失)의 차이가 있고 한 고을 안에서도 재해와 풍실(豐實)이 다릅니다. 이는 대체로 모내기할 때부터 대부분 가뭄이 들어, 비록 방죽 아래에 있는 논이나 봇물이 닿는 땅이라 하더라도 수원(水源)이 마른 곳이 많아서 제대로 물을 대지 못하였고, 가끔씩 소낙비가 내리기는 하였지만 물이 적셔진 곳은 같은 들에서도 배미끼리 서로 물을 다투고, 같은 배미에서도 논두렁끼리 서로 물을 다투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이때를 틈타서 모를 옮겨 심느라 자연히 시기를 놓치게 되다 보니 한 평 안에서도 모내기를 하지 못한 곳이 여기저기 많아졌습니다.

유월 이후부터는 한결같이 내리쪼이는 햇볕이 더욱 심하여 은진(恩津)  16개 고을은 칠월 한 달 동안 시종 기우제를 지내야 했으며, 늦게야 큰비가 내리기는 하였지만 말라붙은 벼포기를 소생시키기에는 별로 효험이 없었습니다.

무릇 바닷가의 소금기가 많은 땅은 모내기도 늦었거니와 그나마 곧바로 말라붙어, 미처 벼가 자라지도 못한 상태에서 소금기가 올라오는 바람에 더러는 애초부터 이삭이 패지 못한 것도 있고 더러는 빈 이삭만 나온 것도 있으며, 심지어 온 들판을 바라보면 벼들이 갈대처럼 하얗게 서 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골짜기에 가까운 척박한 고을은 일찌감치 가뭄을 입어 이삭도 크지 못했거니와 여문 열매 또한 드물었으며, 급기야 수확을 마치고 보니 평년보다 반이나 줄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백성들 사정이 급박한 것이 흉년을 만난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또한 감히 무슨 재해라 이름 붙여 말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여름과 가을 이래로 바람, 서리, 멸구, 우박 같은 일시적인 재앙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비가 끝내 흡족하지 못하여 절기(節氣)의 변화가 늦추어진 데서 일어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신이 처음 부임하면서 풍년을 점쳤던 것이 허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비록 땅만 보고 사는 늙은 농사꾼조차도 저도 모르는 사이 가만히 앉아서 풍년을 놓친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논농사의 대강입니다.

이어 밭농사에 대해 말하자면, 가뭄으로 타서 말라붙은 흙이 쇠처럼 굳어 싹을 잘 틔우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나마 비를 기다려서 잡초를 제거하자니 자연 때가 지나고 말아 늦게 맺은 곡식은 절반이 쭉정이뿐이었으며, 모래흙에 메마른 밭의 경우는 간혹 온 고()가 다 버려져 종자를 찾을 희망조차 갖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면화는 아무리 한초(旱草 가뭄을 잘 견디는 식물)라고는 하지만 이것도 너무 건조하면 뿌리를 내릴 수 없으며, 비록 뿌리를 내릴 수 있다 할지라도 줄기가 왜소하고 가지가 성글어 꽃과 열매가 패지 못하여 제일 나중에 수확한 것은 겨우 큰 흉작을 면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밭농사의 대강입니다.

지금 한 도()의 좌우(左右)를 들어 논하면 우도(右道)는 해안에 접하여 논이 많고 밭이 적은 까닭에 벼가 조금이라도 익은 곳은 해안 고을이 많으며, 좌도(左道)는 산골짜기에 가까워서 밭이 많고 논이 적은 까닭에 각종 곡물이 조금이라도 익은 곳은 산간 고을이 비교적 낫습니다.

그리고 재해의 정도를 논하면 우도 해안의 포구에 가까운 논은 소금기가 유달리 심하고 좌도 산간의 높고 건조한 지대는 가뭄의 피해가 가장 심합니다. 신이 순행하며 살피는 길에 재해를 입은 백성들이 도처에서 떼를 지어 어깨에 말라붙은 짚단을 메고 말 머리를 에워싸는 바람에 거의 앞으로 나가지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이에 신이 하나하나 면대하여 각자 안심할 것이며 무분별하게 조세를 징수할 염려는 하지 말라는 뜻으로 타일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답을 조사하여 급재(給災)를 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정사로서, 위로는 국가 경비의 넉넉하고 모자람에 관계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이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급재를 베풀다 보면 나라 살림을 이어 가기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과감하게 급재를 줄이면 백성의 고통을 구휼해 줄 길이 없습니다.

신이 변변치 못한 몸으로 외람되이 분수 밖의 관직을 받아, 밤낮으로 두려움에 떨면서 자고 먹는 것도 잊은 채 어찌하면 백성을 근심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전하의 뜻을 만의 하나나마 받들까 생각하나, 그 길은 표재(俵災 재결을 배분하는 것)를 하는 정사보다 우선되는 것이 없습니다. 더하고 덜고 하는 사이에 털끝 하나라도 실상과 어긋난다면 신이 성은(聖恩)을 저버린 죄야 그래도 신 한 몸에 그치고 말겠으나, 나라의 살림은 어찌하며 백성의 고통은 어찌하겠습니까?

신이 열읍(列邑)의 개장(槪狀)이 모두 당도한 후로 정밀하게 분석하기에 힘썼는데, 보고된 재총(災摠) 중에서 검토 결과 타당한 것은 곧 모내기조차 못한 곳이 ()이고, 그 밖에 함손(鹹損 소금기로 인해 손상됨) · 준축(蹲縮 땅이 내려앉아 줄어듦) · 환진(還陳) 등 각종의 재탈(災頉) 결이며, 유래(流來)와 구초불(舊初不)의 경우로서 신재(新災)로 추이(推移)하여 분표(分俵 재결을 배분함)한 것이 또 1237결이어서, 신구(新舊)의 재탈(災頉)을 통계하면 도합 1 결입니다. 이를 사목재(事目災)로 획하(劃下) 1070결에 비하면 부족량이 결입니다. 만약 재해를 입은 열읍들을 통틀어서 따지자면 을묘년(1795)의 재해에 비하여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집중적으로 재해를 입은 지역만 가지고 말하자면 을묘년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을묘년에 내린 표재(俵災) 2 5500결이었으니, 금년의 재탈이 을묘년에 비하여 3분의 2가 줄어든 것으로 볼 때 너무 지나치게 책정한 것은 아닐 듯합니다.

대저 금년의 농사는 들리는 바로는 호남과 영남이 특히 심하며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모두 가뭄으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신이 관할하는 지역은 작황만 가지고 논한다면 차이가 있으나 재손(災損)을 비교해 보면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이처럼 분등(分等)할 때에 신의 도를 연분(年分)  5 등에 묶어 두어 획하한 표재(俵災)가 겨우 1000결을 넘는 정도이니, 신이 아무리 변변치 못하나 도대체 유독 무슨 마음으로 의례적으로 장황하게 백성들의 고통을 실지 이상으로 늘어놓아 성상의 귀를 놀라게 하고 구중궁궐에서 밤낮으로 근심하는 성상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하겠습니까. 만약 신이 한갓 성상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만 가지고 아무 말 없이 세월을 보내며, 백성을 어린애 돌보듯이 하시는 성상의 은혜를 우러러 본받지 못하고 마침내 한 백성이라도 그 은택을 고루 받지 못해 탄식하게 한다면 조정에서 신을 범부(凡夫) 중에서 선발하여 특별히 직책을 주신 뜻이 자못 아닐 것입니다.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감히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간절한 마음을 아뢰는 바입니다.

전에 획급한 사목재 외에 부족한 급재(給災) 결을 특별히 더 획급해 주도록 하시면, 신이 삼가 순서에 따라 분표(分俵)하여 농사를 망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마치 다친 사람처럼 살피시는 성상의 은택을 골고루 받게 하겠습니다. 열읍의 등급을 나누는 일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하므로 더욱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상호 참작하고 잘 재량하여 각각의 고을들을 우심읍(尤甚邑), 지차읍(之次邑), 초실읍(稍實邑)으로 구분하여 후면에 기록하였습니다. 앙청(仰請)할 여러 조목들을 참작하고 마련하여 일체 개좌(開坐)하였으니 아울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성상의 지시를 받들어 분부하게 하소서.

그리고 지금 재해를 가장 혹독하게 입은 우심읍 몇 고을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구휼이 있은 연후에야 자리를 잡고 생업을 지탱할 수 있을 터인데, 작년에 이미 약간의 풍년이 들었을 뿐 아니라 금년은 공통적으로 대흉(大凶)은 아닌 만큼, 격식을 갖추어 진휼하는 일에 대해서는 감히 갑작스레 거론할 바가 아니므로, 형편의 완급(緩急)에 따라 사진(私賑 수령이 자신의 녹봉을 털어 구휼함) 또는 구급(救急)의 방법을 통해 편의에 맞게 원조하여 백성들이 굶어 죽는 일은 기어코 면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런 연유를 아울러 치계(馳啓)합니다.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D-001]혈농(穴農) : 곳에 따라 풍작과 흉작이 고르지 못한 농사, 즉 구메농사를 말한다.

[D-002]환진(還陳) : 논밭이 도로 묵어짐.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續還陳으로 되어 있다. 해마다 계속 묵히는 논밭을 속진전(續陳田)이라 한다.

[D-003]유래(流來) …… 경우 : 유래는 곧 여러 해 동안 계속 재해를 입은 논밭인 유래재결(流來災結)을 말하고, 구초불(舊初不)은 여러 해 전부터 경작하지 않고 묵히는 논밭을 말한다.

[D-004] 5  :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에 따라 중중년(中中年)으로 분류되었다는 뜻이다.

[D-005]마치 …… 은택 : 맹자 이루 하(離婁下) 문왕(文王)은 백성을 마치 다친 사람처럼 살피셨다.視民如傷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둔암집서(遯庵集序) 남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옛날 나의 선친이 일찍이 암행어사로서 호우(湖右 전라우도(全羅右道)) 지방의 민심을 채방(採訪)할 때에, 영광(靈光)에 사는 양군(梁君) 아무개가 성품이 순근(醇謹)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마치 한() 나라의 삼로(三老)가 농사에 힘쓰면서 효도와 우애를 다진 것과 같았으므로 술과 쇠고기로 위로하고 비단을 주어 장려할 만하다고 하였다.

얼마 후 조정에서 배척을 당해 호남 고을에 보직이 되자 양군이 예전에 은혜를 입었다 하여 따라와 문객(門客)이 되었고, 또 이로 인하여 왕래가 계속되어 한양에 와서도 문객이 되었다. 이때에 선친이 자주 전부(銓部 이조(吏曹))를 맡았으나 매위(靺韋 무부(武夫))와 제상(鞮象 역관(譯官))의 알현은 문전에서 거절하였으며, 심지어 먼 지방의 방기(方技)와 이술(異術)에 밝은 선비나 비록 평소 문장을 잘한다고 소문난 자에 이르러서도 모두 사절하고 한 번도 대면한 일이 없었다. 반면에 유독 양군만은 문객이 된 지 수십 년 동안 명성(名聲)이나 세리(勢利) 따위는 서로 잊어버리고 지냈다. 집 남쪽에 무성한 나무 그늘이 뜨락에 반쯤 내려와 덮게 되면 바둑을 여러 판 둘 뿐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손에 책 한 권을 쥐고 저녁 내내 흥얼대면서 거의 기갈(飢渴)도 잊어버리고 형해(形骸)도 내버린 듯이 지냈다. 아마도 우리 집의 청백(淸白)하고 화락한 가풍에 깊이 탄복한 바 있어서 우리와 감고(甘苦)를 같이하여 문객이 된 것을 즐겁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집안의 젊은이들부터 그가 근후(謹厚)한 장자(長者)임을 흠모하여 따랐으며, 아래로는 하인들까지도 그를 공경하여 따를 줄을 알고 그가 문객으로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지낼 정도였다. 게다가 나는 그 당시 겨우 더벅머리 어린아이였으므로 그는 유모처럼 나를 안고서 입으로 동서남북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그어 주기도 하였다.

, 양군(梁君)은 생각해 보면 우리 양대(兩代)와 함께 지내며 백발이 된 사람이다. 그는 평소에 공손하여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다가도,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면 마치 강둑이 터져 물이 퀄퀄 내려가듯이 하였으며, 그 밖에 의술, 점술, 천문 역법, 풍수(風水)로 대상을 넓혀 이야기를 하여도 어느 것 하나 모르는 것이 없었다. 비록 그것이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독자적으로 터득하여 심오한 경지로 곧바로 나아갔으며 여러 학자들의 훈고(訓詁)에 구애되지 않은 점은 족히 칭찬할 만하였다. 또한 그의 문장은 속으로는 큰 기상이 들어 있고 겉으로는 호방하여, 글을 매끄럽게 다듬지 않았어도 예스러우면서 순박하고 노숙하면서 힘이 있어 볼 만한 것이 매우 많았다.

지금 그의 아들 아무개가 그 글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하게 하고자 하여, 그 평생의 저술을 수집하여 몇 편()으로 정리하였는데 시()와 문()이 몇 권()이 된다. 그리고 재주 없는 내가 양대에 걸쳐 세의(世誼)가 있는 집안이라 하여 나의 거친 글을 청하기에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예전에 보고 기억나는 것을 낱낱이 서술하여 돌려보낸다.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D-001]() 나라의 삼로(三老) : 한 나라 때 지방에서 덕행이 있는 장로(長老)를 삼로로 천거하여 향()에는 향삼로(鄕三老), ()에는 현삼로(縣三老), ()에는 군삼로(郡三老)를 두고, 지방관들을 도와 교화(敎化)에 힘쓰게 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공손앙(公孫鞅)이 진() 나라에 들어가다

 

 

 

임금께서 지으신 책문(策問)은 이러하다.

남이 자기를 비방한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 두려워하며 그 화를 피하려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공손앙은 끝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으니 계책이 밝은 사람이 아니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에게 범인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음을 공숙좌(公叔座)가 알기는 하였으나, 위앙(衛鞅 공손앙)이 쓸 만한 인물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혜왕(惠王)이 등용하지 못하리라는 점은 알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신하가 임금에게 고할 적에 지성으로 고하지 않고서 그 청을 받아들이게 한 사람은 없었다. 혜왕에게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청한 말을 보건대, 이는 대체로 공손앙을 기재(奇才)라고 한 칭찬과 임금을 신하보다 우선시하는 의리를 실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온 나라를 들어다 그에게 맡기라고 청해 놓고 또다시 그를 죽이라고 권했으니, 어찌 앞뒤가 어긋난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소하(蕭何)가 한신(韓信)을 천거할 때 한신을 쓸 일이 없다.’고 말한 것에 불과하였으나, 한 고조(漢高祖)가 선뜻 그의 말을 따랐는데, 이는 단지 한 고조가 한 고조다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소하 또한 성실하고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공숙좌가 진작에 지성으로 천거하고 충심으로 아뢴 다음, 위앙이 하는 일과 말을 살피고 누차 시험하고 점차적으로 등용하는 방법을 다하게 했더라면, 혜왕이 과연 온 나라를 들어서 위앙에게 맡겼을 뿐만 아니라 진 효공(秦孝公)이 이룩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공렬(功烈)도 이룰 수 있지 않았겠는가?

 

() 아무개는 삼가 답합니다.

예로부터 신하가 그 임금에게 간언을 올림에 있어서는 어느 것이든 지성에서 우러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풍언(諷言 넌지시 풍자함)으로써 간하는 것이 배우의 익살에 가깝고, 궤변으로써 대답하는 것이 회휼(回遹)함을 면치 못하였으나 옛사람을 논한 후세의 논자(論者)들은 또한 그들의 간언이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비난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는 죽은 뒤에 자신의 시신을 늘어놓게 한 일도 있었으나 군자가 오히려 그의 곧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숙좌가 위앙을 천거한 것은 곧은 점으로는 사어(史魚)와 같고, 속임수를 쓴 점으로는 소하(蕭何)와 같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위앙의 나라 다스림과 한신(韓信)의 군사 거느림은 오직 크게 써야 할 능력이지 작은 일로써 시험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무릇 길가에 재를 버리는 데에서 법을 세우고, 목재 하나 옮기는 데에서 상()을 미덥게 한 것은 곧 나라를 부유케 하고 군사를 강하게 하는 술책으로서, 이를 작은 관직에서나 일개 현()에서 시험했다면, 대중의 생각과 어긋나고 풍속을 놀라게 하여 당장에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며, 아무리 하루아침에 경상(卿相)의 자리에 앉았다 할지라도 당시의 군주가 온 나라를 들어 맡기지 않았다면 위앙이 큰 일을 하지 못하였을 것 또한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평상시 일 없는 날에 위앙을 추천하고 아뢸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하는 자도 힘이 되지 못할까를 항상 걱정하고, 듣는 자도 깊이 신뢰할 수 없음을 늘 괴로워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하는 일과 그의 말을 살피는 방법은 인재를 등용하는 보통의 방법에 불과하며, 누차 시험하고 점차적으로 등용하는 방법은 단지 약한 나라의 대부(大夫)에게나 적용할 방법일 뿐이니, 도리어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아침저녁 좌우로 모시던 날에는 우선 참고 있다가 병문안을 온 임금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위앙을 천거한 것은, 죽음에 임박하여 비장한 말로써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자신의 말을 반드시 믿게 하기에 부족하다 여겨 마지막에는 그를 죽여 버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비단 임금을 격동하여 그 부탁을 굳히자는 것일 뿐만 아니라, 만약 그를 놓아주어 국경을 벗어나게 한다면 진실로 위() 나라에 후일의 근심이 있을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충신이 나라를 근심하는 고심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시신을 늘어놓게 한 직간(直諫)에도 부끄럼이 없다 할 것입니다.

소하가 한신을 천거한 경우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소하가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도 한 고조가 등용하지 않자, 결국은 한신을 추적했노라는 궤변을 하여 고조를 격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저 한신은 적국의 한 도망병에 불과한데, 그를 위해 하루아침에 단장(壇場)을 만들고 갑작스레 상장(上將)의 인()을 수여하는 것이 충격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공숙좌의 지혜가 한 고조의 총명함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공숙좌는 단지 혜왕의 일개 구신(具臣)이요 위앙의 하류(下流)에 불과한 자입니다. 맹자(孟子)도 일찍이 위 나라에 갔었는데 공숙좌가 그 임금에게 천거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인의(仁義)의 설이 천하를 통치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세상에서 진 효공(秦孝公)을 논하는 자들은 그가 위앙을 등용했다 해서 현명하다 하고, 양 혜왕(梁惠王)을 논하는 자들은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해서 어리석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설령 맹자가 진 나라에 갔다 해도 효공(孝公)은 반드시 그를 등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써 그럴 줄을 아느냐 하면, 위앙이 먼저 제왕(帝王)의 도로써 말하자 효공이 이따금 졸았으니, 맹자라면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펴는 따위는 반드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만약에 혜왕이 위앙을 직접 보았다면 반드시 허둥지둥 빗자루를 끼고 맞았을 것이니, 공숙좌의 천거가 없었더라도 나라를 들어 그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무엇으로써 그것을 아느냐 하면, 처음 맹자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어떻게 하면 나라를 이롭게 할지를 물은 것으로 보아, 공실(公室)을 강화하고 사문(私門)을 막아야 한다는 위앙의 주장이 나라를 이롭게 하는 술책이 아닌 것이 없으며 모두 혜왕이 듣기 좋아하는 말들이었으니, 혜왕이 부국강병의 공렬을 이루는 것이 어찌 진 효공보다 뒤졌겠습니까.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D-001]남이 …… 있겠는가 : () 나라 재상 공숙좌(公叔座)가 병이 위중하자 혜왕(惠王)이 병문안을 가서 그가 죽은 후의 대책을 물었더니 공숙좌가 대답하기를, “공손앙(公孫鞅)이 나이 비록 젊으나 기재(奇才)가 있으니 왕께서 온 나라를 들어다 맡기소서.” 하니, 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가려 하였다. 이에 다시 왕께서 공손앙을 등용하지 않으시겠다면 반드시 그를 죽여서 국경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런 다음 공손앙을 불러다 신하보다 임금을 우선시하는 마음에 너를 죽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빨리 도망치거라.” 하니, 공손앙이 왕이 나를 등용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니 나를 죽이라는 말 또한 어찌 듣겠습니까?” 하고는 끝내 도망가지 않았다. 한편 혜왕은 좌우의 신하들에게 공숙이 병이 심하니 슬픈 일이오만, 나더러 나라를 공손앙에게 맡기게 하려 하니, 어찌 앞뒤 안 맞는 소리가 아니오.豈不悖哉라고 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D-002]한신을 …… 없다 : 승상 소하(蕭何)가 도망친 한신(韓信)을 데려와 한 고조에게 천거하면서, “왕께서 한중(漢中)에서 영원히 왕으로 지내고 싶으시면 한신을 쓸 일이 없겠으나, 반드시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와도 일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D-003]성실하고 …… 때문이다 : 원문은 老實無 缺로 되어 있으나,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老實無妄耳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4]회휼(回遹) : 간사하고 편벽되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 정책이 회휼하니 언제 멈출 건가.謀猶回遹 何日斯沮라고 하였다.

[D-005]심지어는 …… 인정하였습니다 : 공자가어(孔子家語) 곤서(困誓)에 위() 나라 영공(靈公)이 어진 거백옥(蘧伯玉)을 등용하지 않고 어질지 못한 미자하(彌子瑕)를 등용하자 대부(大夫) 사어(史魚)가 달려가 이를 간하였으나 영공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어가 병이 들어 죽음에 임박하자 아들을 불러다 놓고, “내가 위 나라 조정에 거백옥을 등용하지도 못하고 미자하를 물리치지도 못하였다. 이는 내가 임금을 바로잡지 못한 것이니 죽어도 장례를 치를 수가 없구나. 내가 죽거든 내 시신을 창문 아래에다 그냥 두거라.”라고 하였다. 영공이 조문을 왔다가 이상하게 여겨 아들에게 물어서 그 연유를 알고는 깜짝 놀라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곧바로 거백옥을 등용하였다. 이에 대해 논어 위령공(衛靈公)에서 공자(孔子) 곧도다, 사어여!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으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구나.”라는 말로 그를 칭송하였다.

[D-006]길가에 …… 세우고 : 공손앙이 변법(變法)을 만들면서 길가에 재를 버리는 사소한 잘못을 중형에 처함으로써 큰 법을 어기지 못하게 하였다. 史記 卷87 李斯列傳

[D-007]목재 ……  : 공손앙이 변법을 제정한 다음 이를 시행하기에 앞서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도성의 남문에 세 길이 되는 목재를 세워 놓고 이를 북문까지 옮겨다 놓는 사람에게는 50()을 상으로 주겠다고 선포한 후 목재를 옮기는 사람이 나오게 되자 곧바로 50금을 주어 백성들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D-008]병문안을 ……  : 원문은 東首拖紳之除際이다. 논어(論語) 향당(鄕黨)에 공자는 병이 들어, 임금이 와서 살펴보시거든, 동으로 머리를 두시고, 조복(朝服)을 몸에 덮고 그 위에 큰 띠를 얹으셨다.疾 君視 東首 加朝服拖紳고 하였다.

[D-009]구신(具臣) : 단지 수효만 채우고 있는 쓸모 없는 신하를 말한다.

[D-010]위앙이 …… 졸았으니 : 위앙이 진() 나라 총신(寵臣)인 경감(景監)을 통해 진 효공을 만났는데, 첫 번째 만남에서 제도(帝道)에 대하여 유세하였더니 진 효공이 꾸벅꾸벅 졸았다. 다음 만남에서는 왕도(王道)에 대해 말하였으나 이 또한 듣지 않았고, 다음에는 패도(霸道)에 대하여 말하자 차츰 관심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강국(强國)에 대하여 말하자 효공이 매우 좋아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D-011]한 자를 …… 따위 : 원문은 枉尺直尋인데,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자존심을 조금 굽힘으로써 큰 이익을 얻는 짓을 말한다.

[D-012]빗자루를 …… 것이니 : 고대 중국에서는 귀빈을 맞을 때 길을 먼저 청소하고, 주인이 빗자루를 끼고 대문에서 손님을 맞음으로써 경의를 표하는 풍습이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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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열하일기, 허생전, 양반전

*종전에 사용하던 포털 사이트가 여러 차례 소멸되어 희미한 글씨의 수정이 불가능하므로 읽기 쉽게 재수록합니다. 박지원/ 原士 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http://kydong77.tistory.com/7938 ,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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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호질虎叱/ 열하일기 4.관내정사

虎叱 https://kydong77.tistory.com/18892 은 안 보이고, 대신 <범의 꾸중>이라 번역해 사용합니다. 최상의 권위를 지닌 북곽이 최하위의.." data-og-host="kydong77.tistory.com" data-og-source-url="htt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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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허생전/ 열하일기 10.옥갑야화

https://ko.wikipedia.org/wiki/%EC%97%B4%ED%95%98%EC%9D%BC%EA%B8%B0 열하일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인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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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전 -초기구전

양반전兩班傳 ◇ <兩班傳>의 성공 비결 1)충격적 소재:양반 매매. 중세의 가치관과 질서의식 파괴-양반과 천부의 전도(顚倒) 신분 맞바뀜. 2)수사법:반어법(신분과 부의 불일치, 士族의 존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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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8권 별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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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1 자서(自序)

2 마장전(馬駔傳)

3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4 민옹전(閔翁傳)

5 광문자전(廣文者傳)

6 양반전(兩班傳)

7 김신선전(金神仙傳)

8 우상전(虞裳傳)

9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10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자서(自序)

 

오륜 끝에 벗이 놓인 것은 / 友居倫季

보다 덜 중시해서가 아니라 / 匪厥疎卑

마치 오행 중의 흙이 / 如土於行

네 철에 다 왕성한 것과 같다네 / 寄王四時

()과 의()와 별()과 서() / 親義別敍

() 아니면 어찌하리 / 非信奚爲

상도(常道)가 정상적이지 못하면 / 常若不常

벗이 이를 시정하나니 / 友迺正之

그러기에 맨 뒤에 있어 / 所以居後

이들을 후방에서 통제하네 / 迺殿統斯

세 광인이 서로 벗하며 / 三狂相友

세상 피해 떠돌면서 / 遯世流離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논하는데 / 論厥讒諂

그들의 얼굴이 비치어 보이는 듯하네 / 若見鬚眉

 

이에 마장전(馬駔傳)을 짓는다.

 

선비들이 먹고사는 데에 연연하면 / 士累口腹

온갖 행실 이지러지네 / 百行餒缺

호화롭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해도 / 鼎食鼎烹

그 탐욕 고치지 못하거늘 / 不誡饕餮

엄 행수(嚴行首)는 똥으로 먹고살았으니 / 嚴自食糞

하는 일은 더럴망정 입은 깨끗하다네 / 迹穢口潔

 

이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을 짓는다.

 

민옹은 사람을 누리같이 여겼고 / 閔翁蝗人

노자(老子)의 도()를 배웠네 / 學道猶龍

풍자와 골계로써 / 託諷滑稽

제멋대로 세상을 조롱하였으나 / 翫世不恭

벽에 써서 스스로 분발한 것은 / 書壁自憤

게으른 이들을 깨우칠 만하네 / 可警惰慵

 

이에 민옹전(閔翁傳)을 짓는다.

 

선비란 바로 천작이요 / 士迺天爵

선비의 마음이 곧 뜻이라네 / 士心爲志

그 뜻은 어떠한가 / 其志如何

권세와 잇속을 멀리하여 / 弗謀勢利

영달해도 선비 본색 안 떠나고 / 達不離士

곤궁해도 선비 본색 잃지 않네 / 窮不失士

이름 절개 닦지 않고 / 不飭名節

가문(家門) 지체(地體) 기화 삼아 / 徒貨門地

조상의 덕만을 판다면 / 酤鬻世德

장사치와 뭐가 다르랴 / 商賈何異

 

이에 양반전(兩班傳)을 짓는다.

 

홍기는 대은이라 / 弘基大隱

노니는 데 숨었다오 / 迺隱於遊

세상이야 맑건 흐리건 청정(淸淨)을 잃지 않았으며 / 淸濁無失

남을 해치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았네 / 不忮不求

 

이에 김신선전(金神仙傳)을 짓는다.

 

광문은 궁한 거지로서 / 廣文窮丐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쳤네 / 聲聞過情

이름나기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 非好名者

형벌을 면치 못하였거든 / 猶不免刑

더구나 이름을 도적질하여 / 矧復盜竊

가짜로써 명성을 다툰 경우리요 / 要假以爭

 

이에 광문전(廣文傳)을 짓는다.

 

아름다운 저 우상은 / 孌彼虞裳

옛 문장에 힘을 썼네 / 力古文章

서울에서 사라진 예()를 시골에서 구한다더니 / 禮失求野

생애는 짧아도 그 이름 영원하리 / 亨短流長

 

이에 우상전(虞裳傳)을 짓는다.

 

세상이 말세로 떨어져 / 世降衰季

허위만을 숭상하고 꾸미니 / 崇飾虛僞

시를 읊으면서 무덤을 도굴하는 / 詩發含珠

위선자요 사이비 군자라네 / 愿賊亂紫

은자인 체하며 빠른 출세를 노리는 짓을 / 逕捷終南

예로부터 추하게 여겼느니 / 從古以醜

 

이에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을 짓는다.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공손하면 / 入孝出悌

배우지 않았어도 배웠다 하리니 / 未學謂學

이 말이 비록 지나치지만 / 斯言雖過

거짓 군자를 경계할 만하네 / 可警僞德

공명선(公明宣)은 글 읽지 않았어도 / 明宣不讀

삼 년을 잘 배웠으며 / 三年善學

농부가 밭을 갈며 / 農夫耕野

아내를 손님같이 서로 공경하니 / 賓妻相揖

글자를 읽을 줄 몰라도 / 目不知書

참된 배움이라 이를 만하네 / 可謂眞學

 

이에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을 짓는다.

 

[D-001]오륜 ……  :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차례를 두고 한 말이다.

[D-002]마치 …… 같다네 : 오행설(五行說)에서는 봄에는 나무의 기운이 왕성하고, 여름에는 불의 기운이 왕성하고, 가을에는 쇠의 기운이 왕성하고, 겨울에는 물의 기운이 왕성한 것으로 본다. 만 그에 해당하는 계절이 없는 셈인데,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각 계절 90일에서 18일씩을 덜어서 흙에 배당함으로써 오행에 맞추어 각 계절이 모두 72일씩으로 고루 안배될 수 있게 한 것을 가리킨다.

[D-003]상도(常道) …… 시정하나니 : 인의예지(仁義禮智)에다 신()을 보태어 오상(五常)이라 한다. 본래 신은 오행설의 유행에 따라 인의예지에 추가된 것이었다.

[D-004]그들의 …… 듯하네 : 순자(荀子) 해폐(解蔽), 인심(人心)을 대야의 물에 비유하면서, 대야의 물을 안정시켜 혼탁한 것들을 가라앉히면 수염과 눈썹을 볼 수 있다足以見鬚眉고 했다.

[D-005]호화롭게 …… 해도 : 정식(鼎食)은 솥들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식사하는 것을 뜻하고, 정팽(鼎烹)은 솥에 삶아 죽이는 형벌을 당하는 것을 뜻한다.

[D-006]엄 행수(嚴行首)는 똥으로 먹고살았으니 : 박종채(朴宗采) 과정록(過庭錄)에는 엄 행수는 제힘으로 먹고살았으니嚴自食力로 소개되어 있다.

[D-007]노자(老子)의 도()를 배웠네 : 공자가 노자를 만나 보고 용과 같다猶龍고 감탄했다고 한다. 史記 卷63 老子列傳

[D-008]천작(天爵) : 인작(人爵)의 대립 개념으로, 천부적으로 존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孟子 告子上

[D-009]선비의 …… 뜻이라네 : ‘()’라는 글자의 구조를  의 결합으로 풀이한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의 풀이는 이와 다르다.

[D-010]대은(大隱) : 은자에도 대은(大隱), 중은(中隱), 소은(小隱)의 등급이 있다. 산중에 숨어 사는 은자가 소은이라면, 진정으로 위대한 은자인 대은은 하층 민중이나 다름없이 시중에서 산다.

[D-011]남을 …… 않았네 : 시경(詩經) 패풍(邶風) 웅치(雄雉)에 나오는 구절이다.

[D-012]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쳤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서,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침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聲聞過情 君子恥之고 했다.

[D-013]서울에서 …… 구한다더니 : 한서(漢書) 30 예문지(藝文志) 10에 공자(孔子)가 한 말로 소개되어 있다. 연암집 3 자소집서(自笑集序)에서도 이 말을 인용하면서, 양반 사대부들의 글에서 사라진 고문사(古文辭)를 역관(譯官)들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개탄하였다.

[D-014]시를 …… 도굴하는 : 장자(莊子) 외물(外物), 시경의 시를 읊조리면서 무덤을 도굴하여 죽은 사람의 입에 물려진 구슬을 훔치는 타락한 유자(儒者)의 이야기가 나온다.

[D-015]위선자요 사이비 군자라네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향원(鄕愿)은 덕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다.鄕愿 德之賊也라고 했으며, 또한 자줏빛이 붉은빛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한다.惡紫之奪朱也고 했다.

[D-016]은자인 …… 짓을 : 당 나라 노장용(盧藏用)이 수도 장안(長安)의 종남산에 은거함으로써 고사(高士)라는 명성을 얻어 도리어 재빠르게 출세한 것을 풍자한 말이다.

[D-017]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 학문을 팔아먹는 큰 도적에 관한 전기(傳記)라는 뜻이다.

[D-018]집에서 …… 하리니 : 논어 학이(學而)에서 공자는 자제들은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공손해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悌고 했으며, 자하(子夏) 어진 이를 좋아하여 호색하는 마음을 바꾸며 …… 벗과 사귈 때 말이 믿음직하면, 비록 배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하겠다.賢賢易色 ……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고 했다.

[D-019]공명선(公明宣) …… 배웠으며 : 공명선은 증자(曾子)의 제자로, 그의 문하에서 삼 년이나 있으면서도 글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에 그 까닭을 묻자, 공명선은 스승인 증자의 모범적인 행동을 보고 따라 배우고자 노력했을 뿐이라고 답했으므로, 증자가 감복(感服)했다고 한다. 說苑 反質

[D-020]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 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50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의하면, 황해도 봉산에 사는 어느 무식한 농민이 한글밖에 모르지만 소학언해(小學諺解)를 읽고 그의 모든 언행을 이에 준해 실천했다고 한다.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 반드시 서로 절하기로 아내와 약속하고, 부부가 같이 날마다 소학언해를 읽었으므로, 그 고을의 이웃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봉산학자전은 이 사실을 소재로 한 전기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마장전(馬駔傳)

 

말 거간꾼이나 집주릅이 손뼉을 치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 짓이나, 관중(管仲)과 소진(蘇秦)이 닭 ·  ·  · 소의 피를 바르고 맹세했던 일은 신뢰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어렴풋이 헤어지잔 말만 들어도 가락지를 벗어던지고 수건을 찢어 버리고 등잔불을 돌아앉아 벽을 향하여 고개를 떨구고 울먹거리는 것은 믿을 만한 첩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요, 가슴속의 생각을 다 내보이면서 손을 잡고 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믿을 만한 친구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콧잔등〕 - 음은 ()’이다.  까지 부채로 가리고 좌우로 눈짓을 하는 것은 거간꾼들의 술책이며, 위협적인 말로 상대의 마음을 뒤흔들고 상대가 꺼리는 곳을 건드려 속을 떠보며 강한 상대에겐 협박을 하고 약한 상대는 짓눌러서 동맹한 나라들을 흩어 버리거나 분열된 나라들을 통합하게 하는 것은 패자(覇者)와 유세가들이 이간하고 농락하는 권모술수이다.

옛날에 가슴앓이 하는 이가 있어, 아내를 시켜 약을 달이게 하였는데 그 양이 많았다 적었다 들쑥날쑥하였으므로 노하여 첩을 시켰더니, 그 양이 항상 적당하였다. 그 첩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창구멍을 뚫고 엿보았더니, 많으면 땅에 버리고 적으면 물을 더 붓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첩이 양을 적당하게 맞추는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귀에 대고 소근거리는 것은 좋은 말이 아니요, 남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은 깊은 사귐이 아니요, 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내는 것은 훌륭한 벗이 아니다.

송욱(宋旭), 조탑타(趙闒拖), 장덕홍(張德弘)이 광통교(廣通橋) 위에서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탑타가 말하기를,

 

내가 아침에 일어나 바가지를 두드리며 밥을 빌다가 포목전에 들렀더니, 포목을 사려고 가게로 올라온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포목을 골라 혀로 핥아 보기도 하고 공중에 비쳐 보기도 하면서 값은 부르지 않고 주인에게 먼저 부르라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나중에는 둘 다 포목은 잊어버린 채 포목 장수는 갑자기 먼 산을 바라보며 구름이 나왔다고 흥얼대고, 사러 온 사람은 뒷짐을 지고 서성대며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있더군요.”

하니, 송욱이 말하기를,

 

너는 사귀는 태도만 보았을 뿐 사귀는 도()는 보지 못했다.”

하였다. 덕홍이 말하기를,

 

꼭두각시놀음에 장막을 드리우는 것은 노끈을 당기기 위한 것이지요.”

하니, 송욱이 말하기를,

 

너는 사귀는 겉모습만 보았을 뿐 사귀는 도는 보지 못했다. 무릇 군자가 사람을 사귀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으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법으로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나는 그 가운데 한 가지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그러기에 나이 삼십이 되었어도 벗 하나 없다. 그러나 그 도만은 내 옛적에 들었노라. 팔이 밖으로 펴지지 않는 것은 술잔을 잡았기 때문이지.”

하니, 덕홍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시경(詩經)에도 본래 그런 말이 있지요.

우는 학이 그늘에 있으니 / 鳴鶴在陰

그 새끼가 화답한다 / 其子和之

내게 좋은 벼슬이 있으니 / 我有好爵

내가 너와 더불어 같이한다 / 吾與爾縻之

하였는데 아마도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하였다. 송욱이 말하기를,

 

너만 하면 벗에 대한 도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내가 아까 그 한 가지만을 알려 주었는데, 너는 두 가지를 아는구나. 천하 사람이 붙따르는 것은 형세요, 모두가 차지하려고 도모하는 것은 명예와 이익이다. 술잔이 입과 더불어 약속한 것도 아니건만, 팔이 저절로 굽혀지는 것은 응당 그럴 수밖에 없는 형세이다. 학과 그 새끼가 울음으로써 서로 화답하는 것은 바로 명예를 구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벼슬을 좋아하는 것은 이익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붙따르는 자가 많아지면 형세가 갈라지고, 도모하는 자가 여럿이면 명예와 이익이 제 차지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오랫동안 이 세 가지를 말하기를 꺼려 왔다. 내가 그렇기 때문에 은유적인 말로 네게 알려 주었는데 네가 이 뜻을 알아차렸구나.

너는 남과 더불어 교제할 때, 첫째, 상대방의 기정사실이 된 장점을 칭찬하지 말라. 그러면 상대방이 싫증을 느껴 효과가 없을 것이다. 둘째, 상대방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우쳐 주지 말라. 장차 행하여 거기에 미치게 되면 낙담하여 실망하게 될 것이다. 셋째, 사람 많이 모인 자리에서는 남을 제일이라고 일컫지 말라. 제일이란 그 위가 없단 말이니 좌중이 모두 썰렁해지면서 기가 꺾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귀는 데에도 기법이 있다. 첫째, 상대방을 칭찬하려거든 겉으로는 책망하는 것이 좋고, 둘째, 상대방에게 사랑함을 보여 주려거든 짐짓 성난 표정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셋째, 상대방과 친해지려거든 뚫어질 듯 쳐다보다가 부끄러운 듯 돌아서야 하고, 넷째,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꼭 믿게끔 하려거든 의심하게 만들어 놓고 기다려야 한다. 또한 열사(烈士)는 슬픔이 많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 때문에 영웅이 잘 우는 것은 남을 감동시키자는 것이다.

이 다섯가지 기법은 군자가 은밀하게 사용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처세(處世)에 있어 어디에나 통용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였다. 탑타가 덕홍에게 묻기를,

 

송 선생님의 말씀은 그 뜻이 너무나 어려워 마치 수수께끼와 같다.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니, 덕홍이 말하기를,

 

네까짓 게 어찌 알아? 잘한 일을 가지고 성토하여 책망하면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보니 노여움이 생기는 것이요, 꾸지람을 하는 과정에서 정이 붙는 것이므로 가족에 대해서는 이따금 호되게 다루어도 싫어하지 않는 법이다. 친한 사이일수록 거리를 둔다면 이보다 더 친한 관계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미 믿는 사이인데도 오히려 의심을 품게 만든다면 이보다 더 긴밀한 관계가 어디에 있겠는가.

술이 거나해지고 밤이 깊어 뭇사람은 다 졸고 있을 때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가 그 남은 취기(醉氣)를 타서 슬픈 심사를 자극하면 누구든 뭉클하여 공감하지 않는 자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귀는 데에는 상대를 이해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즐겁기로는 서로 공감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따라서 편협한 사람의 불만을 풀어 주고 시기심 많은 사람의 원망을 진정시켜 주는 데에는 우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다. 나는 사람을 사귈 때 울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울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31년 동안 나라 안을 돌아다녀도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탑타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충()으로써 사귐에 임하고 의()로써 벗을 사귀면 어떻겠는가?”

하니, 덕홍이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네 말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비루하구나. 그것도 말이라고 하는 거냐? 너는 듣거라. 가난한 놈이란 바라는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한없이 의()를 사모한다. 왜냐하면 저 아득한 하늘만 봐도 곡식을 내려 주지 않나 기대하고, 남의 기침 소리만 나도 무엇을 주지 않나 고개를 석 자나 빼고 바라기 때문이다. 반면에 재물을 모아 놓은 자는 자신이 인색하단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남이 자기에게 바라는 것을 끊자는 것이다. 그리고 천한 자는 아낄 것이 없기 때문에 충심(忠心)을 다하여 어려운 것도 회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을 건널 때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지 않는 것은 떨어진 고의를 입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수레를 타고 다니는 자가 갖신에 덧신을 껴신는 것은 그래도 진흙이 묻을까 염려해서이다. 신 바닥도 아끼거든 하물며 제 몸일까 보냐? 그러므로 충()이니 의()니 하는 것은 빈천한 자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부귀한 자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하였다. 탑타가 발끈하여 정색하면서 말하기를,

 

내 차라리 세상에 벗이 하나도 없을지언정 군자들과는 사귀지 못하겠다.”

하고서 이에 서로 의관을 찢어 버리고 때묻은 얼굴과 덥수룩한 머리에 새끼줄을 허리에 동여매고 저자에서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골계선생(滑稽先生)은 우정론(友情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무를 붙이자면 생선 부레를 녹여서 붙이고, 쇠를 붙이자면 붕사(鵬砂)를 녹여서 붙이고, 사슴이나 말의 가죽을 붙이자면 멥쌀밥粳飯을 이겨서 붙이는 것보다 단단한 것이 없음을 내 안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사귐에 있어서는 떨어진 틈이란 것이 있다. () 나라와 월() 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틈이 있는 것이 아니요, 산천(山川)이 가로막고 있어야 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무릎을 맞대고 함께 앉아 있다 하여 반드시 밀접한 사이가 아니요, 어깨를 치고 소매를 붙잡는 관계라 하여 반드시 마음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사이에도 틈은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상앙(商鞅)이 장황한 말을 늘어놓자 효공(孝公)이 꾸벅꾸벅 졸았고, 범저(范雎)가 성내지 않았다면 채택(蔡澤)이 아무 말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밖으로 나와서 상앙을 꾸짖어 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었으며, 채택의 말을 전하여 범저가 화를 내도록 만든 사람이 반드시 있었던 것이다. 공자(公子) 조승(趙勝 평원군(平原君))이 소개의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성안후(成安侯 진여(陳餘))와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은 사귐에 있어 조금의 틈도 없이 너무나 절친하게 지냈으므로, 그들 사이에 한번 틈이 생기자 누구도 그들을 위해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중히 여길 것은 틈이 아니고 무엇이며, 두려워할 것도 틈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첨도 그 틈을 파고들어가 영합하는 것이요, 참소도 그 틈을 파고들어가 이간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잘 사귀는 이는 먼저 그 틈을 잘 이용하고, 사람을 잘 사귈 줄 모르는 이는 틈을 이용할 줄 모른다.

성격이 강직한 사람은 외골수여서 자신을 굽히고 남에게 나아가지도 않고 우회적으로 말을 하지도 않으며, 한번 말을 꺼냈다가 의견이 합치하지 않으면 남이 이간질하지 않아도 제풀에 막히고 만다.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찍고 또 찍어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어디 있으리.”라고 했으며, “아랫목에 잘 보이기보다는 아궁이에 잘 보여라.”라고 했는데,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아첨을 전하는 데에도 방법이 있다. 몸을 정제(整齊)하고 얼굴을 다듬고 말을 얌전스레 하고 명예와 이익에 담담하며 상대와 사귀려는 마음이 없는 척함으로써 저절로 아첨을 하는 것이 상첨(上諂)이다. 다음으로 바른 말을 간곡하게 하여 자신의 속을 드러내 보인 다음 그 틈을 잘 이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는 것이 중첨(中諂)이다. 말굽이 닳도록 조석(朝夕)으로 문안(問安)하며 돗자리가 떨어지도록 뭉개 앉아, 상대방의 입술을 쳐다보며 얼굴빛을 살펴서, 그 사람이 하는 말마다 다 좋다 하고 그 사람이 행하는 것마다 다 칭송한다면, 처음 들을 때에야 좋아하겠지만 오래 들으면 도리어 싫증이 난다. 싫증이 나면 비루하게 여기게 되어, 마침내는 자기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이는 하첨(下諂)이다.

관중(管仲)이 제후(諸侯)를 여러 번 규합하였고, 소진(蘇秦)이 육국(六國)을 합종(合縱)시켰으니 천하의 큰 사귐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송욱과 탑타는 길에서 걸식을 하고 덕홍은 저자에서 미친 듯이 큰 소리로 노래 부르고 다니면서도 오히려 말 거간꾼의 술수를 부리지 않았거늘, 하물며 군자로서 글 읽는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D-001]손뼉을 …… 짓이나 : 맹세할 때 하는 동작들이다. 격장위서(擊掌爲誓), 지일서심(指日誓心)이니 하는 성구(成句)들이 있다.

[D-002] ……  : 고대 중국에서 동맹을 맺을 때 천자는 입가에 말이나 소의 피를 바르고, 제후는 개나 돼지의 피를 바르고, 대부 이하는 닭의 피를 바르고 맹세했다.

[D-003]콧잔등 : ‘ 자를 콧잔등이란 뜻으로 쓸 때는 이라 읽는다.

[D-004]상대가 …… 떠보며 : 원문은 餂情投忌이다. 맹자 진심 하(盡心下) 선비가 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말을 하면, 이는 말로써 속을 떠보는 것이다.士未可以言而言 是以言餂之라고 비판하였다. 투기(投忌) 쥐 잡으려 해도 그릇 깨뜨릴까 봐 꺼려진다.投鼠忌器는 말의 준말이다.

[D-005]송욱(宋旭) : 연암집 7 염재기(念齋記)에 의하면, 송욱은 당시 한양에 실존했던 기인(奇人)이었다.

[D-006]광통교(廣通橋) : 한양 중부 광통방(廣通坊)에 있던 다리. 광교(廣橋)라고도 한다. 청계천에 놓인 다리 중 가장 큰 다리였다.

[D-007]구름이 나왔다고 흥얼대고 : 무심한 체하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름은 무심하게 산굴에서 나오고雲無心以出岫라는 구절이 있다.

[D-008]벽에 …… 있더군요 : 원문은 壁上觀畵인데,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 항우의 군대가 거록(鉅鹿)에서 진() 나라 군대를 공격할 때 다른 제후의 장수들이 성벽 위에서 관망만 하고 있었던 고사에서 나온 벽상관전(壁上觀戰)’이란 성어의 패러디이다. 역시 무심한 체하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

[D-009]팔이 …… 때문이지 : 우리나라 속담이다. 이덕무(李德懋) 열상방언(洌上方言)에는 술잔 잡은 팔은 밖으로 굽지 않는다.把盃腕 不外卷라고 소개되었다. 靑莊館全書 卷62

[D-010]우는 …… 같이한다 : 주역(周易) 중부괘(中孚卦) 구이(九二)의 효사(爻辭)이다. 따라서 인용상 실수를 범했거나, 아니면 이를 시경의 일시(逸詩)로 간주한 듯하다.

[D-011]가족에 …… 법이다 : 주역 가인괘(家人卦) 구삼(九三)의 효사에 가족을 호되게 다루었으나 엄격함을 뉘우치면 길하니라.家人嗃嗃 悔厲 吉라고 하였다.

[D-012]골계선생(滑稽先生) …… 말했다 : 골계선생은 작가의 의견을 대변하기 위해 설정한 가상 인물이다. 따라서 우정론 역시 실제로는 작가가 지은 글이다. 골계란 풍자나 궤변(詭辯)을 잘한다는 뜻이니, 사기에 골계열전(滑稽列傳)이 있다.

[D-013]멥쌀밥粳飯 : 찹쌀밥糯飯의 오류인 듯하다. 멥쌀은 차지지 않아 풀로 쓰기 어렵다.

[D-014]상앙(商鞅) …… 졸았고 : 상앙이 진() 나라 총신(寵臣)인 경감(景監)을 통해 진 효공을 만났는데, 첫 번째 만남에서 제도(帝道)에 대하여 유세하였더니 진 효공이 꾸벅꾸벅 졸았다. 이에 경감이 나와서 상앙을 꾸짖자 다음 만남에서는 왕도(王道)에 대해 말하였으나 이 또한 듣지 않았고, 다음에는 패도(覇道)에 대하여 말하자 차츰 관심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강국(强國)에 대하여 말하자 효공이 매우 좋아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D-015]범저(范雎) …… 것이다 : 채택(蔡澤)이 진 나라에 들어가 진 소왕(秦昭王)을 볼 목적으로 먼저 사람을 시켜 당시 승상인 범저에게 자신이 진왕을 만나면 승상의 자리를 빼앗게 될 것이라고 하여 범저를 노하게 만듦으로써 범저와 만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이를 통해 진왕을 만났다. 史記 卷79 范睢蔡澤列傳

[D-016]공자(公子) …… 하였다 : () 나라 군대가 조() 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노중련(魯仲連)이 위() 나라 장수 신원연(新垣衍)을 설득하여 조 나라를 돕도록 하겠노라고 자청했으므로, 공자 조승, 즉 평원군(平原君)이 노중련을 신원연에게 소개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일개 선비인 노중련이 위 나라 장수 신원연을 상대로 유세할 수 있었던 것은 평원군의 소개 덕분이었다는 뜻이지만, 탈문(脫文)이 있는지, 아니면 지나치게 생략한 탓인지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다.

[D-017]성안후(成安侯) …… 없었다 : 사기 89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에 자세히 나온다.

[D-018]아랫목에 …… 보여라 : 논어 팔일(八佾)에 나오는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선귤자(蟬橘子)에게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벗이 한 사람 있다. 그는 종본탑(宗本塔) 동쪽에 살면서 날마다 마을 안의 똥을 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지냈는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엄 행수(嚴行首)라 불렀다. ‘행수란 막일꾼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한 칭호요, ‘은 그의 성()이다.

자목(子牧)이 선귤자에게 따져 묻기를,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벗의 도를 들었는데, ‘벗이란 함께 살지 않는 아내요 핏줄을 같이하지 않은 형제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벗이란 이같이 소중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이름난 사대부들이 선생님을 따라 그 아랫자리에서 노닐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지만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 엄 행수라는 자는 마을에서 가장 비천한 막일꾼으로서 열악한 곳에 살면서 남들이 치욕으로 여기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인데, 선생님께서는 자주 그의 덕()을 칭송하여 선생이라 부르는 동시에 장차 그와 교분을 맺고 벗하기를 청할 것같이 하시니 제자로서 심히 부끄럽습니다. 그러하오니 문하에서 떠나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선귤자가 웃으면서,

 

앉아라. 내가 너에게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해 말해 주마. 속담에 의원이 제 병 못 고치고 무당이 제 굿 못 한다.’ 했다. 사람마다 자기가 스스로 잘한다고 여기는 것이 있는데 남들이 몰라주면, 답답해하면서 자신의 허물에 대해 듣고 싶은 체한다. 그럴 때 예찬만 늘어놓는다면 아첨에 가까워 무미건조하게 되고, 단점만 늘어놓는다면 잘못을 파헤치는 것 같아 무정하게 보인다. 따라서 잘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얼렁뚱땅 변죽만 울리고 제대로 지적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크게 책망하더라도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니, 상대방의 꺼림칙한 곳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비슷한 물건을 늘어놓고 숨긴 것을 알아맞히듯이 자신이 잘한다고 여기는 것을 은근슬쩍 언급한다면, 마치 가려운 데를 긁어 준 것처럼 진심으로 감동할 것이다.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것에도 방법이 있다. 등을 토닥일 때는 겨드랑이에 가까이 가지 말고 가슴을 어루만질 때는 목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뜬구름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 결국 자신에 대한 칭찬이 들어 있다면,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신을 알아준다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벗을 사귄다면 좋겠느냐?”

하였다. 자목은 귀를 막고 뒷걸음질치며 말하기를,

 

지금 선생님께서는 시정잡배나 하인놈들이 하는 짓거리를 가지고 저를 가르치려 하시는군요.”

하니, 선귤자가 말하기를,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네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전자에는 있지 않고 후자에만 있구나. 무릇 시장에서는 이해관계로 사람을 사귀고 면전에서는 아첨으로 사람을 사귀지. 따라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세 번 손을 내밀면 누구나 멀어지게 되고, 아무리 묵은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세 번 도와주면 누구나 친하게 되기 마련이지. 그러므로 이해관계로 사귀게 되면 지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 사귀어도 오래갈 수 없다네. 훌륭한 사귐은 꼭 얼굴을 마주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훌륭한 벗은 꼭 가까이 두고 지낼 필요가 없지. 다만 마음으로 사귀고 덕으로 벗하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도의(道義)로 사귀는 것일세. 위로 천고(千古)의 옛사람과 벗해도 먼 것이 아니요, 만리(萬里)나 떨어져 있는 사람과 사귀어도 먼 것이 아니라네.

저 엄 행수란 사람은 일찍이 나에게 알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항상 그를 예찬하고 싶어 못 견뎌했지. 그는 밥을 먹을 때는 끼니마다 착실히 먹고 길을 걸을 때는 조심스레 걷고 졸음이 오면 쿨쿨 자고 웃을 때는 껄껄 웃고 그냥 가만히 있을 때는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네. 흙벽을 쌓아 풀로 덮은 움막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들어갈 때는 새우등을 하고 들어가고 잘 때는 개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지만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어나 삼태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와 뒷간을 청소하지.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 때쯤이면 뒷간에 말라붙은 사람똥, 마구간의 말똥, 외양간의 소똥, 홰 위의 닭똥, 개똥, 거위똥, 돼지똥, 비둘기똥, 토끼똥, 참새똥을 주옥인 양 긁어 가도 염치에 손상이 가지 않고, 그 이익을 독차지하여도 의로움에는 해가 되지 않으며, 욕심을 부려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해도 남들이 양보심 없다고 비난하지 않는다네. 그는 손바닥에 침을 발라 삽을 잡고는 새가 모이를 쪼아 먹듯 꾸부정히 허리를 구부려 일에만 열중할 뿐, 아무리 화려한 미관이라도 마음에 두지 않고 아무리 좋은 풍악이라도 관심을 두는 법이 없지. 부귀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지. 따라서 그에 대해 예찬을 한다고 해서 더 영예로울 것도 없으며 헐뜯는다 해서 욕될 것도 없다네.

왕십리(枉十里)의 무와 살곶이箭串의 순무, 석교(石郊)의 가지 · 오이 · 수박 · 호박이며 연희궁(延禧宮)의 고추 · 마늘 · 부추 ·  · 염교며 청파(靑坡)의 미나리와 이태인(利泰仁)의 토란들은 상상전(上上田)에 심는데, 모두 엄씨의 똥을 가져다 써야 땅이 비옥해지고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으며, 그 수입이 1년에 6000( 600)이나 된다네. 하지만 그는 아침에 밥 한 사발이면 의기가 흡족해지고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한 사발 먹을 뿐이지. 남들이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였더니 목구멍에 넘어가면 푸성귀나 고기나 배를 채우기는 마찬가지인데 맛을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대꾸하고, 반반한 옷이나 좀 입으라고 권하였더니 넓은 소매를 입으면 몸에 익숙하지 않고 새 옷을 입으면 더러운 흙을 짊어질 수 없다고 하더군. 해마다 정월 초하루 아침이나 되어야 비로소 의관을 갖추어 입고 이웃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는데 세배를 마치고 돌아오면 곧바로 헌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삼태기를 메고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네. 엄 행수와 같은 이는 아마도 자신의 덕을 더러움으로 감추고 세속에 숨어 사는 대은(大隱)’이라 할 수 있겠지.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부귀를 타고나면 부귀하게 지내고 빈천을 타고나면 빈천한 대로 지낸다.’ 하였으니, 타고난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음을 말한다네. 시경(詩經),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공소(公所)에 있으니, 진실로 명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라.夙夜在公 寔命不同 하였으니, 명이란 그 사람의 분수를 말하는 것이네. 하늘이 만백성을 낼 때 정해진 분수가 있으니 명을 타고난 이상 무슨 원망할 까닭이 있으랴. 그런데 새우젓을 먹게 되면 달걀이 먹고 싶고 갈포옷을 입게 되면 모시옷이 입고 싶어지게 마련이니, 천하가 이로부터 크게 어지러워져 백성들이 들고일어나고 농토가 황폐하게 되는 것이지. 진승(陳勝) · 오광(吳廣) · 항적(項籍)의 무리들은 그 뜻이 어찌 농사일에 안주할 인물들이었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짐을 짊어져야 할 사람이 수레를 탔으니 도적을 불러들일 것이다.’ 한 것도 이를 두고 말한 것이네. 그러므로 의리에 맞지 않으면 만종(萬鍾)의 녹을 준다 하여도 불결한 것이요 아무런 노력 없이 재물을 모으면 막대한 부를 축적하더라도 그 이름에 썩는 냄새가 나게 될 걸세. 그런 까닭에 사람이 죽었을 때 입속에다 구슬을 넣어 주어 그 사람이 깨끗하게 살았음을 나타내 주는 걸세.

엄 행수는 지저분한 똥을 날라다 주고 먹고살고 있으니 지극히 불결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먹고사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우며, 그가 처한 곳은 지극히 지저분하지만 의리를 지키는 점에 있어서는 지극히 높다 할 것이니, 그 뜻을 미루어 보면 비록 만종의 녹을 준다 해도 그가 어떻게 처신할는지는 알 만하다네.

이상을 통해 나는 깨끗한 가운데서도 깨끗하지 않은 것이 있고 더러운 가운데서도 더럽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네. 나는 먹고사는 일에 아주 어려운 처지를 당하면 언제나 나보다 못한 사람을 떠올리게 되는데, 엄 행수를 생각하면 견디지 못할 일이 없었지. 진실로 마음속에 좀도둑질할 뜻이 없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엄 행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 이를 더 확대시켜 나간다면 성인(聖人)의 경지에도 이를 것일세.

선비로서 곤궁하게 산다고 하여 얼굴에까지 그 티를 나타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요, 출세했다 하여 몸짓에까지 나타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니, 엄 행수와 비교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거의 드물 걸세. 그래서 나는 엄 행수에 대하여 스승으로 모신다고 한 것이네. 어찌 감히 벗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엄 행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것일세.”

하였다.

 

 

[D-001]선귤자(蟬橘子) : 이덕무의 호() 중의 하나이다.

[D-002]종본탑(宗本塔) : 미상(未詳)이다. 현재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지(圓覺寺址)의 석탑白塔을 가리킨다. 박제가(朴齊家) 정유문집(貞蕤文集) 1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에 의하면, 한때 그 부근에 연암과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등이 살았다고 한다.

[D-003]벗이란 …… 같다 : 윤광심(尹光心) 병세집(幷世集)에 수록된 이덕무의 적언찬(適言讚) 찬지칠(讚之七) 간유(簡遊)에 나오는 말이다.

[D-004]열악한 곳 : 원문은 下流이다. 논어 자장(子張) 그러므로 군자는 하류(下流)에 거처하기를 싫어한다. 천하의 더러운 것이 모두 모여들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D-005]살곶이箭串 : 현재 서울 성동구에 있는 뚝섬의 옛 이름 중의 하나이다.

[D-006]상상전(上上田) : 토지의 질에 따라 차등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토지를 상 ·  · 하로 나누고, 각각을 다시 상 ·  · 하로 나누어 모두 9등급을 두었다. 상상전은 최상급의 토지를 말한다.

[D-007]자신의 …… 대은(大隱) : () 나라 때의 동방삭(東方朔)이나 위진(魏晉) 때의 죽림칠현(竹林七賢)과 같은 인물을 가리킨다.

[D-008]이른 …… 때문이라 : 시경 소남(召南) 소성(小星)의 한 구절이다.

[D-009]진승(陳勝) · 오광(吳廣) · 항적(項籍) : 진승과 오광은 진() 나라 때 함께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항적은 곧 항우(項羽)이니, 그의 자()가 우()이다.

[D-010]짐을 …… 것이다 : 주역 해괘(解卦) 육삼(六三)의 효사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민옹전(閔翁傳)

 

 

민옹이란 이는 남양(南陽) 사람이다. 무신년 난리에 출정하여 그 공으로 첨사(僉使)가 되었는데, 그 뒤로 집으로 물러나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총명하였다. 유독 옛사람들의 뛰어난 절개와 위대한 자취를 사모하여 강개(慷慨)히 분발하였으며, 그들의 전기를 하나씩 읽을 때마다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7세 때에는 벽에다 큰 글씨로 항탁(項槖)이 스승이 되었다.”라고 썼으며, 12세 때에는 감라(甘羅)가 장수가 되었다.”고 하고, 13세 때에는 외황(外黃) 고을 아이가 유세를 하였다.”고 썼으며, 18세 때에는 더욱 쓰기를 곽거병(霍去病)이 기련산(祈連山)에 나갔다.”고 했으며, 24세 때에는 항적(項籍)이 강을 건넜다.”고 썼다. 40세가 되었으나 더욱더 이름을 날린 바가 없었기에 마침내 맹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라고 크게 써 놓았다. 이렇게 해마다 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벽이 다 온통 새까맣게 되었다. 70세가 되자 그의 아내가 조롱하기를,

 

영감, 금년에는 까마귀를 그리려우?”

하니, 옹이 기뻐하며,

 

당신은 빨리 먹을 가시오.”

하고, 마침내 크게 쓰기를,

 

범증(范增)이 기발한 계책을 좋아하였다.”

하니, 그 아내가 더욱 화를 내면서,

 

계책이 아무리 기발한들 장차 언제 쓰시려우?”

하니, 옹이 웃으며 말하기를,

 

옛날에 강 태공(姜太公) 80살에 매가 날아오르듯이 용맹하였으니 지금 나는 그에 비하면 젊고 어린 아우뻘이 아니오?”

하였다.

계유 · 갑술년 간, 내 나이 17, 8세 즈음 오랜 병으로 몸이 지쳐 있을 때 집에 있으면서 노래나 서화, 옛 칼, 거문고, 이기(彝器)와 여러 잡물들에 취미를 붙이고, 더욱더 손님을 불러들여 우스갯소리나 옛이야기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으나 그 답답함을 풀지 못하였다. 이때 어떤 이가 나에게 민옹을 소개하면서, 그는 기이한 선비로서 노래를 잘하며 담론도 잘하는데 거침없고 기묘하여 듣는 사람마다 후련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하기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반가워 함께 와 달라고 청하였다.

옹이 찾아왔을 때 내가 마침 사람들과 풍악을 벌이고 있었는데, 옹은 인사도 하지 아니하고 물끄러미 피리 부는 자를 보고 있더니 별안간 그의 따귀를 갈기며 크게 꾸짖기를,

 

주인은 즐거워하는데 너는 왜 성을 내느냐?”

하였다. 내가 놀라 그 까닭을 물었더니, 옹이 말하기를,

 

그놈이 눈을 부라리고 기를 쓰니 성낸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므로,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옹이 말하기를,

 

어찌 피리 부는 놈만 성낼 뿐이겠는가. 젓대 부는 놈은 얼굴을 돌리고 울 듯이 하고 있고 장구 치는 놈은 시름하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며 온 좌중은 입을 다문 채 크게 두려워하는 듯이 앉아 있고, 하인들은 마음대로 웃고 떠들지도 못하고 있으니, 이러고서야 음악이 즐거울 리 없지.”

하기에, 나는 당장에 풍악을 걷어치우고 옹을 자리에 맞아들였다. 옹은 매우 작은 키에 하얀 눈썹이 눈을 내리덮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은 유신(有信)이며 나이는 73세라고 소개하고는 이내 나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병인가? 머리가 아픈가?”

아닙니다.”

배가 아픈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병이 든 게 아니구먼.”

그리고는 드디어 문을 열고 들창을 걷어 올리니, 바람이 솔솔 들어와 마음속이 예전과는 아주 다르게 조금은 후련해졌다. 그래서 옹에게 말하기를,

 

저는 단지 밥을 잘 먹지 못하고 밤에 잠을 잘 못 자는 것이 병입니다.”

했더니, 옹이 일어나서 나에게 축하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며,

 

옹은 어찌하여 저에게 축하를 하는 것입니까?”

하니, 옹이 말하기를,

 

그대는 집이 가난한데 다행히 밥을 잘 먹지 못하고 있으니 재산이 남아돌 게고, 잠을 못 잔다면 밤까지 겸해 사는 것이니 남보다 갑절 사는 턱이 아닌가. 재산이 남아돌고 남보다 갑절 살면 오복(五福) 중에 수()와 부() 두 가지는 이미 갖춘 셈이지.”

하였다. 잠시 후 밥상을 들여왔다. 내가 신음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리고 음식을 들지 못한 채 이것저것 집어서 냄새만 맡고 있었더니, 옹이 갑자기 크게 화를 내며 일어나 가려고 하였다. 내가 놀라 옹에게 왜 화를 내고 떠나려 하는지 물었더니, 옹이 대답하기를,

 

그대가 손님을 초대해 놓고는 식사를 차려 내오지 않고 혼자만 먼저 먹으려 드니 예()가 아닐세.”

하였다. 내가 사과를 하고는 옹을 주저앉히고 빨리 식사를 차려 오게 하였더니 옹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팔뚝을 걷어 올린 다음 수저를 시원스레 놀려 먹어 대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군침이 돌고 막혔던 가슴과 코가 트이면서 예전과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밤이 되자 옹은 눈을 내리감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내가 얘기 좀 하자고 하였으나, 옹은 더욱 입을 다문 채 말을 하지 않아 나는 꽤나 무료하였다. 이렇게 한참이 지나자 옹이 갑자기 일어나서 촛불을 돋우면서 하는 말이,

 

내가 어릴 적에는 눈만 스쳐도 바로 외워 버렸는데 지금은 늙었소그려. 그대와 약속하여 평소에 못 보던 글을 두세 번 눈으로 읽어 보고 나서 외우기로 하세. 만약 한 자라도 틀리게 되면 약속대로 벌을 받기로 하세나.”

하기에, 나는 그가 늙었음을 업수이여겨,

 

그렇게 합시다.”

하고서, 곧바로 서가 위에 놓인 주례(周禮)를 뽑아 들었다. 그래서 옹은 고공기(考工記)를 집어 들고 나는 춘관(春官)을 집어 들었는데 조금 지나자 옹이,

 

나는 벌써 다 외웠네.”

하고 외쳤다. 그때 나는 한 번도 다 내리 읽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놀라서 옹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였더니, 옹이 자꾸만 말을 걸고 방해를 하여 나는 더욱 외울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잠이 와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날 날이 밝자 옹에게 묻기를,

 

어젯밤에 외운 것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옹이 웃으며,

 

나는 처음부터 아예 외우지를 않았다네.”

하였다.

하루는 옹과 더불어 밤에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옹이 좌객들을 조롱하기도 하고 매도하기도 하였으나 아무도 막아 낼 사람이 없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옹을 궁지에 몰아넣고자 하여 옹에게 물었다.

 

옹은 귀신을 본 일이 있소?”

보았지.”

귀신이 어디 있습니까?”

옹이 눈을 부릅뜨고 물끄러미 둘러보다가 손 하나가 등잔 뒤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크게 외치면서,

 

귀신이 저기 있지 않소.”

하였다. 그 손이 노하여 따져 들자,

 

밝은 데 있는 것은 사람이요, 껌껌한 데 있는 것은 귀신인데, 지금 어두운 데 앉아 밝은 데를 보고 제 몸을 감추고 사람들을 엿보고 있으니, 귀신이 아니고 무엇이오.”

하니, 온 좌중이 크게 웃었다. 손이 또 물었다.

 

옹은 신선을 본 일이 있소?”

보았지.”

신선이 어디에 있던가요?”

가난뱅이가 모두 신선이지. 부자들은 늘 세상에 애착을 가지지만 가난뱅이는 늘 세상에 싫증을 느끼거든. 세상에 싫증을 느끼는 사람이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옹은 나이 많이 먹은 사람을 보았소?”

보았지. 내가 아침나절 숲 속에 갔더니 두꺼비와 토끼가 서로 나이가 많다고 다투고 있더군. 토끼가 두꺼비에게 하는 말이 나는 팽조(彭祖)와 동갑이니 너는 나보다 늦게 태어났다.’ 하니, 두꺼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울더군. 토끼가 놀라 너는 왜 그처럼 슬퍼하느냐?’ 하고 물으니, 두꺼비가 말했지. ‘나는 동쪽 이웃집의 어린애와 동갑인데 그 어린애가 5살 먹어서 글을 배우게 되었지. 그 애는 목덕(木德)으로 태어나서 섭제격(攝提格 인년(寅年))으로 왕조의 기년(紀年)을 시작한 이래 여러 왕대를 거치다가, () 나라의 왕통(王統)이 끊어짐으로써 순수한 역서(曆書) 한 권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진() 나라로 이어졌으며, () 나라와 당() 나라를 거친 다음 아침에는 송() 나라, 저녁에는 명() 나라를 거쳤지. 그러는 동안에 갖가지 일을 다 겪으면서 기뻐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였으며, 죽은 이를 조문하기도 하고 장례를 치르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지루하게 이어져 왔지. 그런데도 귀와 눈이 밝고 이와 머리털이 갈수록 자라나니, 나이가 많기로는 그 어린애만 한 자가 없겠지. 팽조는 기껏 800살 살고 요절하여 시대를 겪은 것도 많지 않고 일을 겪은 것도 오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나는 슬퍼한 것이다.’ 토끼가 이 말을 듣고는 거듭 절하고 뒤로 물러나 달아나면서 너는 내 할아버지뻘이다.’ 하였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될 걸세.”

옹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보았소?”

보았지. 달이 하현(下弦)이 되어 조수(潮水)가 빠지고 갯벌이 드러나면 그 땅을 갈아 염전을 만들고 소금흙을 굽는데, 알갱이가 거친 것은 수정염(水晶鹽)이 되고 가는 것은 소금염(素金鹽)이 된다네. 온갖 음식 맛을 내는 데에 소금 없이 되겠는가?”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불사약(不死藥)만은 옹도 못 보았을 것입니다.”

하니, 옹이 빙그레 웃으며,

 

그거야 내 아침저녁으로 늘 먹는 것인데 어찌 모르겠는가. 깊은 골짜기의 반송(盤松)에 맺힌 감로(甘露)가 땅에 떨어져 천 년이 지나면 복령(茯靈)이 되지. ()은 영남(嶺南)에서 나는 것이 으뜸인데 모양이 단아하고 붉은빛을 띠며, 사지를 다 갖추고 동자처럼 쌍상투를 틀고 있지. 구기자(枸杞子)는 천 년이 되면 사람을 보고 짖는다 하네. 내가 이것들을 먹은 다음 백 일가량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지냈더니 숨이 차면서 곧 죽을 것만 같았네. 이웃 할머니가 와서 보고는 한숨을 지으며 하는 말이, ‘그대는 주림병이 들었소. 옛날 신농씨(神農氏)가 온갖 풀을 맛본 다음에야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였소. 무릇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약이 되고 주림병을 고치는 것은 밥이 되니, 그대의 병은 오곡이 아니면 낫지 못하오.’ 하고는 밥을 지어 먹여 주는 바람에 죽지 않았지. 불사약으로는 밥만 한 것이 없네. 나는 아침에 밥 한 사발 저녁에 밥 한 사발로 지금껏 이미 70여 년을 살았다네.”

하였다.

민옹은 말을 할 때면 장황하면서도 이리저리 둘러대지만, 어느 것 하나 곡진히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그 속에는 풍자를 담고 있었으니, 그는 달변가라 할 만하다. 손이 옹에게 물을 말이 다하여 더 이상 따질 수 없게 되자, 마침내 분이 올라 하는 말이,

 

옹도 역시 두려운 것을 보았습니까?”

하니, 옹이 말없이 한참 있다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두려워할 것은 나 자신만 한 것이 없다네. 내 오른 눈은 용이 되고 왼 눈은 범이 되며, 혀 밑에는 도끼가 들었고 팔목은 활처럼 휘었으니, 깊이 잘 생각하면 갓난아기처럼 순수한 마음을 보존하겠으나 생각이 조금만 어긋나도 되놈이 되고 만다네.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장차 제 자신을 잡아먹거나 물어뜯고, 쳐 죽이거나 베어 버릴 것이야. 이 때문에 성인은 사심(私心)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간 것이며 사악함을 막아 진실된 자신을 보존한 것이니, 나는 나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네.”

하였다.

수십 가지 난제(難題)를 물어보아도 모두 메아리처럼 재빨리 대답해 내 끝내 아무도 그를 궁지에 몰 수 없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추어올리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한 반면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조롱도 하고 업신여기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옹의 말을 듣고 배꼽을 잡고 웃어도 옹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누가 말하기를,

 

황해도는 황충(蝗蟲)이 들끓어 관에서 백성을 독려하여 잡느라 야단들입니다.”

하자, 옹이,

 

황충을 뭐 하려고 잡느냐?”

하고 물었다.

 

이 벌레는 크기가 첫잠 잔 누에보다도 작으며, 색깔은 알록달록하고 털이 나 있습니다. 날아다니는 것을 명()이라 하고 볏줄기에 기어오르는 것을 모()라 하는데, 우리의 벼농사에 피해를 주므로 이를 멸구滅穀라 부릅니다. 그래서 잡아다가 파묻을 작정이지요.”

하니, 옹이 말하기를,

 

이런 작은 벌레들은 근심할 거리도 못 된다네. 내가 보기에 종루(鐘樓) 앞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황충이오. 길이는 모두 7척 남짓이고, 머리는 까맣고 눈은 반짝거리고 입은 커서 주먹이 들락날락할 정도인데, 웅얼웅얼 소리를 내고 꾸부정한 모습으로 줄줄이 몰려다니며 곡식이란 곡식은 죄다 해치우는 것이 이것들만 한 것이 없더군. 그래서 내가 잡으려고 했지만, 그렇게 큰 바가지가 없어 아쉽게도 잡지를 못했네.”

하였다. 그랬더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정말로 이러한 벌레가 있는 줄 알고 크게 무서워하였다.

하루는 옹이 오고 있기에, 나는 멀찍이 바라보다가 은어(隱語) 춘첩자방제(春帖子狵啼)’라는 글귀를 써서 보였더니, 옹이 웃으며,

 

춘첩자(春帖子)란 문()에 붙이는 글월이니 바로 내 성 민()이요, ()은 늙은 개를 지칭하니 바로 나를 욕하는 것이구먼. 그 개가 울면 듣기가 싫은데, 이 또한 나의 이가 다 빠져 말소리가 분명치 않은 것을 비꼰 것이로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대가 늙은 개를 무서워한다면 개 견() 변을 떼어 버리면 될 것이고, 또 우는 소리가 싫으면 그 입 구()변을 막아 버리면 그만이지. 무릇 제()란 조화를 부리고 방()은 큰 물건을 가리키니, () 자에 방() 자를 붙이면 조화를 일으켜 큰 것이 되니 바로 용()이라네. 그렇다면 이는 그대가 나를 욕한 것이 아니라, 그만 나를 크게 칭송한 것이 되어 버렸구먼.”

하였다.

다음 해에 옹이 죽었다. 옹이 비록 엉뚱하고 거침없이 살았지만 천성이 곧고 착한 일 하기를 좋아한 데다, 주역(周易)에 밝고 노자(老子)의 말을 좋아하였으며, 책이란 책은 안 본 것이 없었다 한다. 두 아들이 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직 벼슬은 받지 못했다.

금년 가을에 나의 병이 도졌으나, 이제는 더 이상 민옹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나와 함께 주고받은 은어와 우스갯소리, 담론(談論)과 풍자 등을 기록하여 민옹전을 지었으니, 때는 정축년(1757, 영조 33) 가을이다.

나는 민옹을 위하여 뇌문(誄文 추도문)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아아! 민옹이시여 / 嗚呼閔翁

괴상하고 기이하기도 하며 / 可怪可奇

놀랍고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 可驚可愕

기뻐함직도 하고 성냄직도 하며 / 可喜可怒

게다가 밉살스럽기도 하구려 / 而又可憎

벽에 그린 까마귀 / 壁上烏

매가 되지 못하였듯이 / 未化鷹

옹은 뜻 있는 선비였으나 / 翁蓋有志士

늙어 죽도록 포부를 펴지 못했구려 / 竟老死莫施

내가 그대 위해 전을 지었으니 / 我爲作傳

아아! 죽어도 죽지 않았구려 / 嗚呼死未曾

 

 

[D-001]무신년 난리 : 영조 4(1728)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가리킨다.

[D-002]항탁(項槖)이 스승이 되었다 : 항탁은 7세에 공자(孔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감라(甘羅)가 여불위(呂不偉)를 설득하면서 한 말이다. 戰國策 秦策》 《史記 卷71 甘茂列傳

[D-003]감라(甘羅)가 장수가 되었다 : 이본에는 승상이 되었다로 되어 있다. 여불위는 진() 나라 장수 장당(張唐)이 연() 나라 승상으로 부임하기를 바랐으나, 장당이 이를 거부하자 감라가 그를 대신하여 장당을 설득하고 조() 나라에 가서 유세한 것을 말한다. 감라는 진 나라 명장 감무(甘茂)의 손자로 여불위의 가신(家臣)이었다. 여불위에게 등용되어 12세에 조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 나라를 설득하여 5개의 성을 할양받고 연 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영토를 획득하였다. 戰國策 秦策》 《史記 卷71 甘茂列傳

[D-004]외황(外黃) …… 하였다 : 항우가 진류(陳留)의 외항을 공격하였는데 외항 사람들이 항복하지 않고 버티다 며칠 후 항복하자 항우가 노하여 15세 이상 남자들을 성의 동쪽에다 파묻으려 하였다. 이에 외황 영(外黃令) 사인(舍人) 13세 된 아들이 항우에게 유세하여 외황 백성들을 살렸다. 史記 卷7 項羽本紀

[D-005]곽거병(霍去病) …… 나갔다 : 곽거병이 18세에 대장군 위청(衛靑)을 따라 표요교위(剽姚校尉)가 되어 흉노족을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그러나 기련산에까지 출정하여 공을 세운 것은 그가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된 21세 때의 일이다. 기련산은 중국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 경계에 있는 고산(高山)이다.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 《太平寰宇記 卷191 匈奴篇

[D-006]항적(項籍)이 강을 건넜다 : 항우는 24세 때 처음 기병(起兵)하여, () 나라 군대에 포위당한 조왕(趙王)을 구하기 위해 오강(烏江)을 건넜다. 史記 卷7 項羽本紀

[D-007]맹자는 …… 않았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나는 40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我四十不動心고 하였다.

[D-008]범증(范增) …… 좋아하였다 : 범증은 기발한 계책을 좋아하여, 나이 70세 때 항우의 숙부인 항량(項梁)을 찾아가 진() 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권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

[D-009]옛날에 …… 용맹하였으니 : 시경 대아(大雅) 대명(大明) 태사(太師) 상보(尙父)는 당시 매가 날아오르는 듯하였네.維師尙父 時維鷹揚라는 구절이 있다. 강 태공이 무왕(武王)을 도와 은() 나라를 정벌한 사실을 가리킨다. 단 그때 그의 나이가 80살이었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설인지 알 수 없다.

[D-010]계유 · 갑술년 간 : 영조 29(1753)과 영조 30(1754)이다.

[D-011]지금 : 원문은 今者인데, 이본에는 今子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지금 그대는 이다.

[D-012]팽조(彭祖) : 800살까지 살았다는 전설적인 인물로, 유향(劉向) 열선전(列仙傳), 갈홍(葛洪) 신선전(神仙傳) 등에 소개되어 있다.

[D-013]너는 …… 슬퍼하느냐 : 원문은 若乃若悲也인데, 이본에는 若乃何悲也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너는 어째서 슬퍼하느냐?’이다.

[D-014]목덕(木德)으로 …… 이래 : 십팔사략(十八史略) 첫머리에, “천황씨(天皇氏)는 목덕으로 왕이 되니 세성(歲星 : 목성)이 섭제(攝提), 즉 인방(寅方)에 나타났다.”라고 하였는데, 십팔사략에서는 천황씨를 삼황오제(三皇五帝) 이전 중국 최초의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초학(初學) 역사 교과서인 십팔사략을 읽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D-015]() 나라의 …… 이루어졌고 : 상고(上古)부터 주 나라 때까지의 정통 왕조의 역사를 섭렵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춘추(春秋)에서는 일 년의 첫 달을 () 왕정월(王正月)”이라 표기하여 주 나라의 왕통을 받들고 있음을 나타냈다. 순수한 역서란 춘추를 가리키는 듯하다.

[D-016]마침내 …… 이어졌으며 : 원문은 乃閏于秦이다. 진 나라와 같이 정통으로 인정받지 못한 왕조는 윤달과 같다고 해서 윤통(閏統)이라 폄하(貶下)한다.

[D-017]팽조는 …… 요절하여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서 요절한 아이보다 더 오래 산 자가 없으니, 그에 비하면 팽조도 요절한 셈이다.莫壽乎殤子 而彭祖爲夭라고 하였다.

[D-018]반송(盤松) …… 되지 : 복령(茯靈)은 곧 버섯의 일종인 복령(茯苓)을 말한다. 송진松脂이 땅에 스민 지 천 년이 되면 변하여 복령이 되고, 복령이 변하여 호박(琥珀)이 된다고 한다. 廣東通志 卷52 

[D-019]() …… 으뜸인데 : 원문은 蔘伯羅産인데, 우리나라 인삼 중에서 영남(嶺南)에서 나는 것을 나삼(羅蔘)이라 하고, 영동(嶺東)에서 나는 것을 산삼(山蔘)이라 하며, 강계(江界)에서 나는 것을 강삼(江蔘)이라 하고, 집에서 재배하는 것을 가삼(家蔘)이라 한다. 心田考 3 應求漫錄

[D-020]동자처럼 …… 있지 : 쌍상투雙紒는 고대 중국의 예법에 따른 남녀 아동의 머리 모양이다. 居家雜服攷 卷3 幼服 조선 시대의 아동은 변발(辮髮)을 하고 있었는데, 연암은 정온(鄭蘊)이나 송시열 등의 선구적 시도를 계승하여 이를 쌍상투로 개혁하고 싶어했다. 過庭錄

[D-021]이리저리 둘러대지만 : 원문은 遷就而爲之이다. 가의(賈誼)의 치안책(治安策)에서, 대신(大臣)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그에게 분명히 죄가 있어도 그 죄상(罪狀)을 직접 가리켜 말하지 않고 둘러대어 말함으로써 이를 덮어 준다.遷就而爲之諱也고 하였다.

[D-022] …… 되며 : 위엄이 있거나 무시무시한 모습을 용정호목(龍睛虎目)이라 한다.

[D-023]갓난아기처럼 …… 보존하겠으나 : 맹자 이루 하(離婁下) 대인이란 그의 갓난아기 때의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고 하였다.

[D-024]사심(私心) …… 것이니 : 원문은 克己復禮 閑邪存誠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 논어 안연(顔淵)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고, 한사존성(閑邪存誠) 주역 건괘(乾卦) 풀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D-025]()이라네 : ‘ 자를 ‘’ 자로 쓰기도 한다. 원래는 얼룩덜룩할  자로 읽어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광문자전(廣文者傳)

 

 

광문(廣文)이라는 자는 거지였다. 일찍이 종루(鐘樓)의 저잣거리에서 빌어먹고 다녔는데, 거지 아이들이 광문을 추대하여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삼고, 소굴을 지키게 한 적이 있었다.

하루는 날이 몹시 차고 눈이 내리는데, 거지 아이들이 다 함께 빌러 나가고 그중 한 아이만이 병이 들어 따라가지 못했다. 조금 뒤 그 아이가 추위에 떨며 거듭 흐느끼는데 그 소리가 몹시 처량하였다. 광문이 너무도 불쌍하여 몸소 나가 밥을 빌어 왔는데, 병든 아이를 먹이려고 보니 아이는 벌써 죽어 있었다. 거지 아이들이 돌아와서는 광문이 그 애를 죽였다고 의심하여 다 함께 광문을 두들겨 쫓아내니, 광문이 밤에 엉금엉금 기어서 마을의 어느 집으로 들어가다가 그 집 개를 놀라게 하였다. 집주인이 광문을 잡아다 꽁꽁 묶으니, 광문이 외치며 하는 말이,

 

나는 날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온 것이지 감히 도적질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영감님이 믿지 못하신다면 내일 아침에 저자에 나가 알아 보십시오.”

하는데, 말이 몹시 순박하므로 집주인이 내심 광문이 도적이 아닌 것을 알고서 새벽녘에 풀어 주었다. 광문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떨어진 거적을 달라 하여 가지고 떠났다. 집주인이 끝내 몹시 이상히 여겨 그 뒤를 밟아 멀찍이서 바라보니, 거지 아이들이 시체 하나를 끌고 수표교(水標橋)에 와서 그 시체를 다리 밑으로 던져 버리는데, 광문이 다리 속에 숨어 있다가 떨어진 거적으로 그 시체를 싸서 가만히 짊어지고 가, 서쪽 교외 공동묘지에다 묻고서 울다가 중얼거리다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집주인이 광문을 붙들고 사유를 물으니, 광문이 그제야 그전에 한 일과 어제 그렇게 된 상황을 낱낱이 고하였다. 집주인이 내심 광문을 의롭게 여겨, 데리고 집에 돌아와 의복을 주며 후히 대우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광문을 약국을 운영하는 어느 부자에게 천거하여 고용인으로 삼게 하였다.

오랜 후 어느 날 그 부자가 문을 나서다 말고 자주자주 뒤를 돌아보다, 도로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자물쇠가 걸렸나 안 걸렸나를 살펴본 다음 문을 나서는데, 마음이 몹시 미심쩍은 눈치였다. 얼마 후 돌아와 깜짝 놀라며, 광문을 물끄러미 살펴보면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다가, 안색이 달라지면서 그만두었다. 광문은 실로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날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지냈으며, 그렇다고 그만두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부자의 처조카가 돈을 가지고 와 부자에게 돌려주며,

 

얼마 전 제가 아저씨께 돈을 빌리러 왔다가, 마침 아저씨가 계시지 않아서 제멋대로 방에 들어가 가져갔는데, 아마도 아저씨는 모르셨을 것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에 부자는 광문에게 너무도 부끄러워서 그에게,

 

나는 소인이다. 장자(長者)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으니 나는 앞으로 너를 볼 낯이 없다.”

하고 사죄하였다. 그러고는 알고 지내는 여러 사람들과 다른 부자나 큰 장사치들에게 광문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두루 칭찬을 하고, 또 여러 종실(宗室)의 빈객들과 공경(公卿) 문하(門下)의 측근들에게도 지나치리만큼 칭찬을 해 대니, 공경 문하의 측근들과 종실의 빈객들이 모두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밤이 되면 자기 주인에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두어 달이 지나는 사이에 사대부까지도 모두 광문이 옛날의 훌륭한 사람들과 같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당시에 서울 안에서는 모두, 전날 광문을 후하게 대우한 집주인이 현명하여 사람을 알아본 것을 칭송함과 아울러, 약국의 부자를 장자(長者)라고 더욱 칭찬하였다.

이때 돈놀이하는 자들이 대체로 머리꽂이, 옥비취, 의복, 가재도구 및 가옥 · 전장(田庄) · 노복 등의 문서를 저당잡고서 본값의 십분의 삼이나 십분의 오를 쳐서 돈을 내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광문이 빚보증을 서 주는 경우에는 담보를 따지지 아니하고 천금(千金)이라도 당장에 내주곤 하였다.

광문은 사람됨이 외모는 극히 추악하고, 말솜씨도 남을 감동시킬 만하지 못하며, 입은 커서 두 주먹이 들락날락하고, 만석희(曼碩戲)를 잘하고 철괴무(鐵拐舞)를 잘 추었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서로 욕을 할 때면, “니 형은 달문(達文)이다.”라고 놀려 댔는데, 달문은 광문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광문이 길을 가다가 싸우는 사람을 만나면 그도 역시 옷을 홀랑 벗고 싸움판에 뛰어들어, 뭐라고 시부렁대면서 땅에 금을 그어 마치 누가 바르고 누가 틀리다는 것을 판정이라도 하는 듯한 시늉을 하니, 온 저자 사람들이 다 웃어 대고 싸우던 자도 웃음이 터져, 어느새 싸움을 풀고 가 버렸다.

광문은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머리를 땋고 다녔다. 남들이 장가가라고 권하면, 하는 말이,

 

잘생긴 얼굴은 누구나 좋아하는 법이다. 그러나 사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여자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나는 본래 못생겨서 아예 용모를 꾸밀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 남들이 집을 가지라고 권하면,

 

나는 부모도 형제도 처자도 없는데 집을 가져 무엇 하리. 더구나 나는 아침이면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며 저자에 들어갔다가, 저물면 부귀한 집 문간에서 자는 게 보통인데, 서울 안에 집 호수가 자그만치 팔만 호다. 내가 날마다 자리를 바꾼다 해도 내 평생에는 다 못 자게 된다.”

고 사양하였다.

서울 안에 명기(名妓)들이 아무리 곱고 아름다워도, 광문이 성원해 주지 않으면 그 값이 한 푼어치도 못 나갔다.

예전에 궁중의 우림아(羽林兒), 각 전(殿)의 별감(別監),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청지기들이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운심(雲心)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운심은 유명한 기생이었다. 대청에서 술자리를 벌이고 거문고를 타면서 운심더러 춤을 추라고 재촉해도, 운심은 일부러 느리대며 선뜻 추지를 않았다. 광문이 밤에 그 집으로 가서 대청 아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마침내 자리에 들어가 스스로 상좌(上坐)에 앉았다. 광문이 비록 해진 옷을 입었으나 행동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의기가 양양하였다. 눈가는 짓무르고 눈꼽이 끼었으며 취한 척 게욱질을 해 대고, 헝클어진 머리로 북상투北髻를 튼 채였다. 온 좌상이 실색하여 광문에게 눈짓을 하며 쫓아내려고 하였다. 광문이 더욱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치며 곡조에 맞춰 높으락나지락 콧노래를 부르자, 운심이 곧바로 일어나 옷을 바꿔 입고 광문을 위하여 칼춤을 한바탕 추었다. 그리하여 온 좌상이 모두 즐겁게 놀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문과 벗을 맺고 헤어졌다.

 

광문전 뒤에 쓰다

 

 

내 나이 열여덟 살 적에 몹시 병을 앓아서, 늘 밤이면 예전부터 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을 불러 놓고 여염(閭閻)에서 일어난 얘깃거리 될 만한 일들을 묻곤 하였는데, 대개는 광문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어렸을 적에 그 얼굴을 보았는데 너무도 못났었다. 나는 한창 문장을 배우기에 힘쓰던 판이라, 이 전()을 만들어 여러 어른들께 돌려 보였는데, 하루아침에 고문(古文)을 잘 한다는 칭찬을 크게 받게 되었다.

광문은 이때 호남과 영남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명성을 남겼고, 더 이상 서울에 올라오지 않은 지가 이미 수십 년이나 지났다.

바닷가에서 온 거지 아이 하나가 개령(開寧)의 수다사(水多寺)에서 빌어먹고 있었다. 밤이 되어 그 절의 중들이 광문의 일을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모두 그의 사람됨을 상상하며 흠모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때 그 거지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그 거지 아이는 한동안 머뭇거리다 마침내 광문의 아들이라 자칭하니, 그 절의 중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이때까지 그에게 밥을 줄 때는 박짝에다 주었는데, 광문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씻은 사발에 밥을 담고 수저에다 푸성귀랑 염장을 갖추어서 매번 소반에 차려 주었다.

이 무렵에 영남에는 몰래 역모를 꾀하는 요사한 사람이 있었는데, 거지 아이가 이와 같이 융숭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대중을 현혹시킬 수 있겠다 생각하여 가만히 거지 아이를 달래기를,

네가 나를 숙부라 부르면 부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저는 광문의 아우라 칭하고 제 이름을 광손(廣孫)이라 하여 광문의 돌림자를 땄다. 어떤 사람이 의심하기를,

광문은 본래 제 성도 모르고 평생을 형제도 처첩도 없이 독신으로 지냈는데, 지금 어떻게 저런 나이 많은 아우와 장성한 아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서, 마침내 고변(告變)을 하였다. 관청에서 이들을 모두 다 잡아들여 광문과 대질심문을 벌였는데, 제각기 얼굴을 몰랐다. 이에 그 요사한 자를 베어 죽이고 거지 아이는 귀양 보냈다.

광문이 석방되자, 늙은이며 어린애들까지 모두가 가서 구경하는 바람에 한양의 저잣거리가 며칠 동안 텅 비게 되었다.

광문이 표철주(表鐵柱)를 가리키며,

너는 사람 잘 치던 표망둥이表望同가 아니냐. 지금은 늙어서 너도 별 수 없구나.”

했는데, 망둥이는 그의 별명이었다. 서로 고생을 위로하고 나서 광문이 물었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과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은 무고들 하신가?”

모두 다 세상을 떠나셨다네.”

김군경(金君擎)은 지금 무슨 벼슬을 하고 있지?”

용호장(龍虎將)이 되었다네.”

그러자 광문이 말했다.

이 녀석은 미남자로서 몸이 그렇게 뚱뚱했어도 기생을 껴안고 담을 잘도 뛰어넘었으며 돈 쓰기를 더러운 흙 버리듯 했는데, 지금은 귀인(貴人)이 되었으니 만나 볼 수가 없겠군. 분단(粉丹)이는 어디로 갔지?”

벌써 죽었다네.”

그러자 광문이 탄식하며 말했다.

옛날에 풍원군이 밤에 기린각(麒麟閣)에서 잔치를 벌인 후 유독 분단이만 잡아 두고서 함께 잔 적이 있었지. 새벽에 일어나 대궐에 들어갈 차비를 하는데, 분단이가 촛불을 잡다가 그만 잘못하여 초모(貂帽)를 태워 버리는 바람에 어쩔 줄을 몰라 하였네. 풍원군이 웃으면서 네가 부끄러운 모양이구나.’ 하고는 곧바로 압수전(壓羞錢) 5000(50)을 주었었지. 나는 그때 분단이의 수파(首帕)와 부군(副裙)을 들고 난간 밑에서 기다리며 시커멓게 도깨비처럼 서 있었네. 풍원군이 방문을 열고 가래침을 뱉다가 분단이의 귀에 대고 말하기를, ‘저 시커먼 것이 무엇이냐?’ 하니, 분단이가 대답하기를 천하 사람이 다 아는 광문입니다.’ 했지. 풍원군이 웃으며 바로 네 후배(後陪)?’ 하고는, 나를 불러들여 큰 술잔에 술을 한 잔 부어 주고, 자신도 홍로주(紅露酒) 일곱 잔을 따라 마시고 초헌(軺軒)을 타고 나갔지. 이 모두 다 예전 일이 되어 버렸네그려. 요즈음 한양의 어린 기생으로는 누가 가장 유명한가?”

작은아기小阿其라네.”

조방(助房)은 누군가?”

최박만(崔撲滿)이지.”

아침나절 상고당(尙古堂)에서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안부를 물어왔네. 듣자니 집을 둥그재圓嶠 아래로 옮기고 대청 앞에는 벽오동 나무를 심어 놓고 그 아래에서 손수 차를 달이며 철돌(鐵突)을 시켜 거문고를 탄다고 하데.”

철돌은 지금 그 형제가 다 유명하다네.”

그런가? 이는 김정칠(金鼎七)의 아들일세. 나는 제 애비와 좋은 사이였거든.”

이렇게 말하고 다시 서글퍼하며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이는 다 나 떠난 후의 일들이군.”

하였다. 광문은 머리털을 짧게 자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쥐꼬리처럼 땋아 내리고 있었으며, 이가 빠지고 입이 틀어져 이제는 주먹이 들락거리지 못한다고 한다.

광문이 표철주더러 말하였다.

너도 이제는 늙었구나. 어떻게 해서 밥을 먹고사나?”

집이 가난하여 집주릅이 되었다네.”

너도 이제는 궁함을 면했구나. 아아! 옛날 네 집 재산이 누거만(累鉅萬)이었지. 그때에는 너를 황금투구라고 불렀는데 그 투구 어따 두었노?”

이제야 나는 세상 물정을 알았다네.”

광문이 허허 웃으며 말하기를,

네 꼴이 마치 재주를 다 배우고 나니 눈이 어둡다 이로구나.”

하였다.

그 뒤로 광문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D-001]추위에 …… 흐느끼는데 : 원문은 寒專纍欷인데, ‘寒專 寒戰 또는 寒顫과 같은 뜻으로 풀이된다. ‘纍欷는 거듭 흐느껴운다는 뜻으로, 연암집 10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에도 ‘’累欷掩抑이란 표현이 있다.

[D-002]말이 몹시 순박하므로 : 원문은 辭甚樸인데, 이본에는 辭甚款樸이라고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말이 몹시 진실되고 순박하므로이다.

[D-003]수표교(水標橋) :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의 하나로, 홍수에 대비하여 수심을 재는 눈금이 교각(橋脚)에 표시되어 있었다.

[D-004]만석희(曼碩戲) : 개성 지방에서 음력 4 8일에 연희되던 무언 인형극이다. 이 놀이는 개성의 명기 황진이(黃眞伊)의 미색과 교태에 미혹되어 파계하였다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조롱하기 위하여 연희되었다는 속전이 있으며, 일설에는 지족선사가 불공 비용을 만 석이나 받은 것을 욕하기 위하여 연희되었다고도 한다.

[D-005]철괴무(鐵拐舞) : 중국 전설상의 팔선(八仙) 중의 하나인 이철괴(李鐵拐)의 모습을 흉내 내어 추는 춤이다. 이철괴는 그 모습이 머리를 산발하고 얼굴에는 때가 자욱하고 배는 훌떡 걷어 올리고 다리는 절뚝거리며 쇠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고 한다.

[D-006]비록 …… 마찬가지다 : 원문은 唯女亦然인데, 이 경우  자는 비록이란 뜻으로  자와 같다.

[D-007]우림아(羽林兒) : 궁궐의 호위를 맡은 친위(親衛) 부대 중의 하나인 우림위(羽林衛) 소속의 군인들을 말한다. 우림위는 영조 때 용호영(龍虎營)에 소속되었다.

[D-008]별감(別監) : 궁중의 하례(下隸)로서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 등에서 잡무를 수행하는 한편 국왕이 행차할 때 시위와 봉도(奉導)를 맡았다.

[D-009]북상투北髻 : 여자의 쪽머리(낭자머리)를 모방하여 뒤통수에 상투처럼 묶은 머리 모양을 가리킨다. 硏經齋集 外集 卷5 蘭室譚叢 北髻

[D-010]광문에게 …… 하였다 : 원문은 瞬文欲敺之인데, 여기서  의 고자(古字) 쫓아내다로 새겨야 한다.

[D-011]개령(開寧)의 수다사(水多寺) : 개령은 현재 경상북도 김천시에 속하는 고을이고, 수다사는 그 이웃 고을인 선산군(善山郡)에 있다. 신라 때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D-012]광문이 석방되자 : 영조 40(1764)에 일찍이 나주(羅州) 괘서(掛書) 사건으로 처형된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하징(李夏徵)의 서얼 이태정(李太丁)이란 자가 달손(達孫) 즉 광문의 동생을 자처하면서, 광문의 아들이라는 자근만(者斤萬)을 시켜 유언비어를 퍼뜨리다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덩달아 체포되었던 광문은 역모 혐의는 벗었으나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 推案及鞫案 卷22》 《英祖實錄 40 4 17

[D-013]표철주(表鐵柱) : 실존 인물로서 당시 서울의 무뢰배 조직인 검계(劍契)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자칭 왈짜曰者라고도 하는데, 노름판과 사창가 등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살인과 약탈, 강간 등을 자행하였다.

[D-014]용호장(龍虎將) : 용호영(龍虎營)의 정 3 품 벼슬이다.

[D-015]압수전(壓羞錢) : 부끄러움을 진정시킨다는 명분으로 주는 돈이다.

[D-016]수파(首帕)와 부군(副裙) : 수파는 여자들의 머리를 감싸는 머릿수건이고, 부군은 덧치마를 가리킨다.

[D-017]후배(後陪) : 뒤를 따르는 하인을 말한다.

[D-018]홍로주(紅露酒) : 소주에다 멥쌀로 만든 누룩과 계피 등을 넣고 우려 만든 약주로, 감홍로(甘紅露), 감홍주(甘紅酒)라고도 부른다.

[D-019]조방(助房) : 기생의 기둥서방으로, 조방(助幇)이라고도 한다.

[D-020]상고당(尙古堂) : 김광수(金光遂)의 호이다. 숙종 22(1696) 이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서른 살에 진사 급제 후 잠시 인제 군수(麟蹄郡守)를 지냈다. 서화에 뛰어났으며, 골동품 수집과 감정으로 명성이 높았다. 연암집 3 필세설(筆洗說), 7 관재소장청명상하도발(觀齋所藏淸明上河圖跋)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D-021]둥그재圓嶠 : 서대문 밖 아현동 부근에 있었던 고개로, 원현(圓峴)이라고도 한다.

[D-022]철돌(鐵突) : 거문고의 명수로 알려진 실존 인물로, 김철석(金哲石)이라고 한다.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 가기(歌妓) 추월(秋月) · 매월(梅月) · 계섬(桂蟾) 등과 한 그룹을 이루어 직업적인 연예 활동으로 자못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D-023]너도 …… 면했구나 : 원문은 汝今免矣인데, 곤궁에서 벗어나는 것을 면궁(免窮)’이라 한다.

[D-024]재주를 …… 어둡다 : ‘복이 박하다는 뜻의 우리나라 속담이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62 열상방언(洌上方言) 기술 익히자 눈에 백태 낀다.技纔成 眼有眚는 유사한 속담이 소개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양반전(兩班傳)

 

양반(兩班)이란 사족(士族)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정선(旌善) 고을에 한 양반이 있었는데 어질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므로, 군수가 새로 도임하게 되면 반드시 몸소 그의 집에 가서 인사를 차렸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관청의 환곡을 빌려 먹다 보니, 해마다 쌓여서 그 빚이 천석(千石)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하면서 환곡 출납을 조사해 보고 크게 노하여,

 

어떤 놈의 양반이 군량미를 축냈단 말인가?”

하고서 그 양반을 잡아 가두라고 명했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하여 보상을 할 길이 없음을 내심 안타깝게 여겨 차마 가두지는 못하였으나, 그 역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양반이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고 밤낮으로 울기만 하고 있으니, 그의 아내가 몰아세우며,

 

당신은 평소에 그렇게도 글을 잘 읽지만 현관(縣官)에게 환곡을 갚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구려. 쯧쯧 양반이라니, 한 푼짜리도 못 되는 그놈의 양반.”

이라 했다.

그때 그 마을에 사는 부자가 식구들과 상의하기를,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높고 귀하며, 우리는 아무리 잘 살아도 늘 낮고 천하여 감히 말도 타지 못한다. 또한 양반을 보면 움츠러들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뜰 아래 엎드려 절해야 하며, 코를 땅에 박고 무릎으로 기어가야 하니 우리는 이와 같이 욕을 보는 신세다. 지금 저 양반이 환곡을 갚을 길이 없어 이만저만 군욕(窘辱)을 보고 있지 않으니 진실로 양반의 신분을 보존 못할 형편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 양반을 사서 가져보자.”

하고서 그 집 문에 나아가 그 환곡을 갚아 주겠다고 청하니, 양반이 반색하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부자는 당장에 그 환곡을 관에 바쳤다. 군수가 크게 놀라 웬일인가 하며 그 양반을 위로도 할 겸 어떻게 해서 환곡을 갚게 되었는지 묻기 위해 찾아갔다. 그런데 그 양반이 벙거지를 쓰고 잠방이를 입고 길에 엎드려 소인이라 아뢰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 붙들며,

 

그대는 왜 이렇게 자신을 낮추어 욕되게 하시오?”

하니까, 양반이 더욱더 벌벌 떨며 머리를 조아리고 땅에 엎드리며,

 

황송하옵니다. 소인놈이 제 몸을 낮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환곡을 갚기 위하여 이미 제 양반을 팔았으니, 이 마을의 부자가 이제는 양반입니다. 소인이 어찌 감히 예전의 칭호를 함부로 쓰면서 스스로 높은 척하오리까?”

했다. 군수가 탄복하며,

 

군자로다, 부자여! 양반이로다, 부자여! 부자로서 인색하지 않은 것은 의(), 남의 어려운 일을 봐준 것은 인()이요, 비천한 것을 싫어하고 존귀한 것을 바라는 것은 지()라 할 것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양반이로고. 아무리 그렇지만 사적으로 주고받았을 뿐 아무런 증서도 작성하지 않았으니 이는 소송의 빌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너는 고을 백성들을 불러모아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증서를 작성하여 믿게 하자. 군수인 나도 당연히 자수(自手)로 수결(手決)할 것이다.”

했다. 그리고 군수는 관사로 돌아와, 고을 안의 사족(士族) 및 농부, 장인, 장사치들을 모조리 불러다 뜰 앞에 모두 모이게 하고서, 부자를 향소(鄕所)의 바른편에 앉히고 양반은 공형(公兄)의 아래에 서게 하고 다음과 같이 증서를 작성했다.

 

건륭(乾隆) 10(1745, 영조 21) 9월 모일 위의 명문(明文)은 양반을 값을 쳐서 팔아 관곡을 갚기 위한 것으로서 그 값은 1000섬이다.

대체 그 양반이란, 이름 붙임 갖가지라. 글 읽은 인 선비 되고, 벼슬아친 대부 되고, 덕 있으면 군자란다. 무관 줄은 서쪽이요, 문관 줄은 동쪽이라. 이것이 바로 양반, 네 맘대로 따를지니.

비루한 일 끊어 버리고, 옛사람을 흠모하고 뜻을 고상하게 가지며, 오경이면 늘 일어나 유황에 불붙여 기름등잔 켜고서, 눈은 코끝을 내리 보며 발꿈치를 괴고 앉아, 얼음 위에 박 밀듯이 동래박의(東萊博議)를 줄줄 외어야 한다. 주림 참고 추위 견디고 가난 타령 아예 말며, 이빨을 마주치고 머리 뒤를 손가락으로 퉁기며 침을 입 안에 머금고 가볍게 양치질하듯 한 뒤 삼키며 옷소매로 휘양揮項을 닦아 먼지 털고 털무늬를 일으키며, 세수할 땐 주먹 쥐고 벼르듯이 하지 말고, 냄새 없게 이 잘 닦고, 긴 소리로 종을 부르며, 느린 걸음으로 신발을 끌 듯이 걸어야 한다. 고문진보(古文眞寶), 당시품휘(唐詩品彙)를 깨알같이 베껴 쓰되 한 줄에 백 글자씩 쓴다. 손에 돈을 쥐지 말고 쌀값도 묻지 말고, 날 더워도 발 안 벗고 맨상투로 밥상 받지 말고, 밥보다 먼저 국 먹지 말고, 소리 내어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방아 찧지 말고, 생파를 먹지 말고, 술 마시고 수염 빨지 말고, 담배 필 젠 볼이 움푹 패도록 빨지 말고, 분 나도 아내 치지 말고, 성 나도 그릇 차지 말고, 애들에게 주먹질 말고, 뒈져라고 종을 나무라지 말고, 마소를 꾸짖을 때 판 주인까지 싸잡아 욕하지 말고, 병에 무당 부르지 말고, 제사에 중 불러 재()를 올리지 말고, 화로에 불 쬐지 말고, 말할 때 입에서 침을 튀기지 말고, 소 잡지 말고 도박하지 말라.

이상의 모든 행실 가운데 양반에게 어긋난 것이 있다면 이 문서를 관청에 가져와서 변정(卞正)할 것이다.

성주(城主) 정선 군수(旌善郡守)가 화압(花押 수결(手決))하고 좌수(座首)와 별감(別監)이 증서(證署).”

이에 통인(通引)이 여기저기 도장을 찍는데, 그 소리가 엄고(嚴鼓) 치는 것 같았으며, 모양은 북두칠성과 삼성(參星)이 종횡으로 늘어선 것 같았다. 호장(戶長)이 문서를 다 읽고 나자 부자가 어처구니없어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양반이라는 것이 겨우 이것뿐입니까? 제가 듣기로는 양반은 신선 같다는데, 정말 이와 같다면 너무도 심하게 횡령당한 셈이니, 원컨대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고쳐 주옵소서.”

하므로, 마침내 증서를 이렇게 고쳐 만들었다.

 

하느님이 백성 내니, 그 백성은 넷이로세. 네 백성 가운데는 선비 가장 귀한지라, 양반으로 불려지면 이익이 막대하다. 농사, 장사 아니하고, 문사(文史) 대강 섭렵하면, 크게 되면 문과(文科) 급제, 작게 되면 진사(進士)로세. 문과 급제 홍패(紅牌)라면 두 자 길이 못 넘는데, 온갖 물건 구비되니, 이게 바로 돈 전대(纏帶), 서른에야 진사 되어 첫 벼슬에 발 디뎌도, 이름난 음관(蔭官)되어 웅남행(雄南行)으로 잘 섬겨진다. 일산 바람에 귀가 희고 설렁줄에 배 처지며, 방 안에 떨어진 귀걸이는 어여쁜 기생의 것이요, 뜨락에 흩어져 있는 곡식은 학()을 위한 것이라. 궁한 선비 시골 살면 나름대로 횡포 부려, 이웃 소로 먼저 갈고, 일꾼 뺏어 김을 매도 누가 나를 거역하리. 네 놈 코에 잿물 붓고, 상투 잡아 도리질하고 귀얄수염 다 뽑아도, 감히 원망 없느니라.”

부자가 그 문서 내용을 듣고 있다가 혀를 내두르며,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참으로 맹랑한 일이요. 장차 나로 하여금 도적놈이 되란 말입니까?”

하며 머리를 흔들고 가서는, 종신토록 다시 양반의 일을 입에 내지 않았다.

 

 

[D-001]한 푼짜리도 …… 양반 : 양반(兩班)을 양반(兩半)으로 풀어 한 냥의 절반밖에 안 된다고 풍자한 것이다.

[D-002]벙거지 : 하인들이 쓰던 털모자.

[D-003]향소(鄕所) :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D-004]공형(公兄) : 호장(戶長)과 이방(吏房) 및 수형리(首刑吏)를 삼공형(三公兄)이라 한다.

[D-005]명문(明文) : 증명서란 뜻으로, ‘적발이라고도 한다.

[D-006]무관 …… 동쪽이라 : 궁궐에서 무관과 문관이 각각 서쪽과 동쪽에 나누어 서는 것을 가리킨다.

[D-007]눈은 …… 보며 : 호흡법의 일종이다. 주자(朱子)의 조식잠(調息箴)에 보인다. 연암집 4 담원팔영(澹園八詠) 중 소심거(素心居)를 노래한 제 3 수에도 나온다.

[D-008]동래박의(東萊博議) : 남송(南宋) 때 여조겸(呂祖謙)이 지은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를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주제를 취해 평론한 것인데, 과거(科擧)에서 논설을 짓는 데 도움 되는 책으로 중국과 조선에서 널리 읽혔다.

[D-009]이빨을 …… 삼키며 : 도가(道家)에서 유래한 양생법(養生法)이다. 가볍게 윗니와 아랫니를 36번 부딪치고,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둘째와 셋째 손가락으로 뒷골을 24번 퉁긴다. 입 안에 고이게 한 침을 가볍게 양치질하듯이 부걱부걱하기를 36번 하면 이를 수진(漱津)이라 하여 맑은 물이 되는데, 이것을 3번에 나누어 꾸르륵 소리를 내며 삼켜서 단전(丹田)에 이르게 한다. 퇴계(退溪) 선생의 유묵(遺墨)으로 전하는 명() 나라 현주도인(玄洲道人) 함허자(涵虛子) 활인심방(活人心方)에 자세하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7 6일 조를 보면 연암이 고치탄뇌(叩齒彈腦)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D-010]냄새 …… 닦고 : 원문은 漱口無過인데, 입냄새를 구과(口過)라 한다. ()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송지문(宋之問)이 재주 있는 시인임을 알았으나 그의 입냄새가 심한 것을 싫어하여 기용하지 않았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수록되어 있는 송지문의 걸작 명하편(明河編)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D-011]당시품휘(唐詩品彙) : () 나라 때 고병(高棅)이 편찬한 당시집(唐詩集)이다. 모두 90권으로 시인 620인의 작품 5700여 수를 형식별로 수록하였다. 따로 습유(拾遺) 10권이 있다.

[D-012]뒈져라고 …… 말고 : 연암집 3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도 뒈져라고 악담하다惡言詈死와 같은 표현이 있다.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1 사전(士典) 1 언어조(言語條), 종에게 뒈질 놈可殺’ ‘왜 안 뒈지냐胡不死와 같은 욕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D-013]엄고(嚴鼓) : 임금이 행차할 때 치던 큰북이다.

[D-014]너무도 …… 셈이니 : 원문은 太乾沒인데, ‘乾沒은 물을 말려 없애듯이 남의 재산을 마구 횡령하거나 몰수하는 것을 말한다. 부자가 양반을 대신해서 환곡 천 석을 갚아 주었으나 그 대가가 너무도 보잘것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D-015]웅남행(雄南行) : 음관을 남행(南行)이라 한다. 웅남행은 위품(位品)이 높은 음관을 가리킨다.

[D-016]일산 …… 처지며 : 수령은 행차할 때 일산을 받쳐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므로 햇빛을 쏘이지 않아 귀가 희어지고, 일을 시킬 때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부르면 되므로 편해서 배에 살만 찐다는 뜻이다.

[D-017]방 안에 …… 것이요 : 기생이 놀다 간 뒤라 귀걸이가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사기 골계열전에서 순우곤(淳于髡)이 제() 나라 위왕(威王)에게 자신의 주량(酒量)을 설명하며 한 말 중에, 주려(州閭)의 모임에 남녀가 뒤섞여 앉아 술을 즐겁게 마시고 나면 앞에는 귀걸이가 떨어져 있고 뒤에는 비녀가 남겨져 있다.前有墮珥 後有遺簪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김신선전(金神仙傳)

 

 

김 신선의 이름은 홍기(弘基)이다. 나이 16세에 장가를 들어 아내와 한 번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서는 더 이상 가까이하지 않았다. 화식(火食)을 물리치고 벽을 향하여 앉아서, 그렇게 하기를 여러 해 만에 몸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국내의 명산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항상 수백 리 길을 걷고서야 때가 얼마나 되었나 해를 살폈으며, 5년에 신을 한 번 바꿔 신고, 험한 곳을 만나게 되면 걸음이 오히려 더욱 빨라졌다. 그런데도 그는,

 

물을 만나 바지를 걷고 건너기도 하고, 배를 타고 건너기도 하느라 이렇게 늦어진 것이다.”

라고 말하곤 하였다.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신선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는 예전에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때 듣자니 신선의 방술(方術)이 더러 특이한 효험이 있다 하므로 더욱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윤생(尹生)과 신생(申生)을 시켜서 가만히 찾아보게 하여, 한양 안을 열흘 동안 뒤졌으나 만나지 못했다. 윤생이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홍기가 서학동(西學洞)에 산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라 바로 그 사촌 형제의 집으로 거기다 처자를 맡겨 두었습디다. 아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저의 부친은 한 해에 대략 서너 번 찾아올 뿐이지요. 부친의 친구 분이 체부동(體府洞)에 살고 있는데 그분은 술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하는 김 봉사(金奉事)라 하더군요. 누각동(樓閣洞) 김 첨지(金僉知)는 바둑을 좋아하고, 그 뒷집 이 만호(李萬戶)는 거문고를 좋아하고, 삼청동(三淸洞) 사는 이 만호는 손님을 좋아하고, 미원동(美垣洞) 사는 서 초관(徐哨官)과 모교(毛橋) 사는 장 첨사(張僉使)와 사복천(司僕川) 가에 사는 지 승(池丞)은 모두 손님을 좋아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합니다. 이문안里門內 조 봉사(趙奉事)라는 분도 역시 부친의 친구 분인데 그 집엔 이름난 화초가 가득 심겨져 있고, 계동(桂洞) 유 판관(劉判官)은 기서(奇書)와 고검(古劍)을 가지고 있어, 부친이 늘 그분들 집에서 놀며 지내고 있으니, 그대가 만나 뵙고 싶으면 이 몇 집을 찾아보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집을 다니며 일일이 물어보았으나 어느 집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저물녘에 한 집에 들렀더니, 주인은 거문고를 타고 있고 두 손은 모두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허연 머리에 관도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는 김홍기를 만났구나 생각하고 한참 동안 서서 기다렸습니다. 거문고 가락이 끝나 가기에 나아가, ‘어느 분이 김 장인(金丈人 장인은 노인에 대한 경칭이다.)이신지 감히 여쭙습니다.’ 했지요. 주인이 거문고를 밀쳐 놓고 대답하기를, ‘좌중에 김씨 성 가진 사람은 없소. 그대는 왜 묻는가?’ 하기에, ‘저는 목욕재계하고서 감히 찾아와 뵙는 것이오니 노인께서는 숨기지 마소서.’ 하였더니, 주인이 웃으며, ‘그대가 아마 김홍기를 찾는가 보오. 홍기는 오지 않았소.’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오시는지 감히 여쭙습니다.’ 하였더니, ‘홍기란 사람은 묵어도 일정한 거처가 없고 놀아도 일정한 곳이 없으며, 와도 온다고 예고하지 않고 가도 다시 오겠다는 약조를 하지 않으며, 하루에 두세 번 올 때도 있는 반면 안 올 때는 해가 지나도 오지 않소. 듣자니 홍기가 창동(倉洞)이나 회현방(會賢坊)에 주로 있고, 또 동관(董關) · 배오개 · 구리개 · 자수교(慈壽橋) · 사동(社洞) · 장동(壯洞) · 대릉(大陵) · 소릉(小陵) 등지에도 오락가락하며 놀고 자곤 한다는데, 내가 그 주인의 이름은 거의 다 모르고 유독 창동만 알고 있으니 그리로 가서 물어보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물었더니, ‘그가 오지 않은 것이 벌써 두어 달 되었소. 내 들으니 장창교(長暢橋)에 사는 임 동지(林同知)가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홍기와 더불어 술 겨루기를 한다는데, 지금 임씨 집에 있는지도 모르겠소.’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집을 찾아갔더니, 임 동지라는 이는 나이 80여 세여서 자못 귀가 먹었는데, 하는 말이, ‘쯧쯧, 어젯밤에 나와 술을 잔뜩 마시고 오늘 아침에 취기가 남은 채로 강릉(江陵)에 간다고 떠났소.’ 하였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있다 묻기를, ‘김홍기란 이에게 특이한 점이 있습니까?’ 하니,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단지 밥 먹는 것을 못 보았소.’ 하였고, ‘생김생김이 어떠합니까?’ 하였더니, ‘키는 7척이 넘고 몸집은 여위고 수염이 좋으며, 눈동자는 파랗고 귀는 길고 누렇지요.’ 하였으며, ‘술은 얼마나 마시오?’ 하였더니,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데 한 말을 마셔도 더 취하지는 않소. 예전에 취하여 길에 누워버린 적이 있었는데, 포리(捕吏)가 잡아다가 이레 동안 구속했으나 그 술이 깨지 않으므로 마침내 놓아주었다오.’ 하였습니다. ‘말할 때는 어떱습디까?’ 하였더니,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대로 앉아서 졸고 있다가, 그 말이 끝나면 계속해서 웃기만 한다오.’ 하였으며, ‘몸가짐은 어떻습니까?’ 하였더니, ‘조용한 품은 참선(參禪)하는 중 같고, 꾸밀 줄 모르기는 수절하는 과부 같았지요.’ 하였습니다.”

나는 한때 윤생이 힘들여 찾지 않았나 의심을 했었다. 그러나 신생 역시 수십 집을 찾아다녔어도 다 못 만났고, 그의 말도 윤생과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홍기는 나이가 백여 살이고, 더불어 노는 사람들도 모두 노인이다.”

하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 홍기가 나이 열아홉에 장가들어 곧바로 아들을 낳았고 지금 그 아들이 겨우 스물 전후이니, 홍기의 나이 지금 쉰 남짓쯤 될 것이다.”

하였으며, 어떤 이는

 

김 신선이 지리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벼랑에서 떨어져서 돌아오지 못한 지 지금 하마 수십 년이 되었다.”

하고, 어떤 이는

 

지금도 컴컴한 바위굴에 번쩍번쩍하는 무언가가 있다.”

하고, 어떤 이는

 

그게 바로 노인의 눈빛이다. 산골짜기에서 이따금 기지개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 홍기는 단지 술을 잘 마실 뿐이요, 딴 방술(方術)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직 그 이름을 빌려서 행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 동자 복()을 시켜서 가서 찾아보라 했으나 끝내 만나 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이때는 계미년(1763, 영조 39)이었다.

그 이듬해 가을에 나는 동으로 바닷가를 여행하다가 저녁나절 단발령(斷髮嶺)에 올라서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그 봉우리가 만이천 개나 된다고 하는데 흰빛을 띠고 있었다. 산에 들어가 보니 단풍나무가 많아서 한창 탈 듯이 붉었으며, 싸리나무, 가시나무, 녹나무, 예장(豫章)나무는 다 서리를 맞아 노랗고, 삼나무, 노송나무는 더욱 푸르르며, 사철나무가 특히나 많았다. 산중의 갖가지 기이한 나무들은 다 잎이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어 둘러보고 즐거워했다. 가마를 멘 중에게 묻기를,

 

이 산중에 도승이 있느냐? 있다면 그 도승과 더불어 놀 수 있느냐?”

하니,

 

그런 중은 없고, 선암(船菴)에 벽곡(辟穀)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소. 누구는 말하기를 영남 선비라고 하는데, 꼭 알 수는 없습니다. 선암은 길이 험하여 당도하는 자가 없습니다.”

했다. 내가 밤에 장안사(長安寺)에 앉아서 여러 중들에게 물으니, 모두 처음의 대답과 같았으며, 벽곡하는 자가 100일을 채우고 떠나겠다고 했는데 지금 거의 90일 남짓이 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몹시 기뻐서 아마 그 사람이 선인(仙人)인가 보다.’ 생각하고 당장에 밤이라도 가고 싶었으나, 그 이튿날 아침을 기다려서 진주담(眞珠潭) 아래에 앉아 같이 갈 사람을 기다렸다. 거기서 한참 동안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모두 약조를 어기고 오지 않았다. 게다가 관찰사가 군읍(郡邑)을 순행하다가 마침내 산에 들어와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쉬고 있었으므로, 각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모여들어 잔치를 벌이고 음식과 거마(車馬)를 제공했으며, 매양 구경 나갈 때는 따라다니는 중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선암은 길이 끊기고 험준하여 도저히 혼자 도달할 수는 없으므로 영원(靈源)과 백탑(白塔) 사이를 스스로 오가며 애만 태운 적이 있었다. 그 후로 날이 오랫동안 비가 내려 산중에 엿새 동안을 묵고서야 선암에 당도할 수 있었다. 선암은 수미봉(須彌峯) 아래에 있었으므로 내원통(內圓通)으로부터 20여 리를 들어갔는데, 큰 바위가 깎아질러 천 길이나 되었으며 길이 끊어질 때마다 쇠줄을 부여잡고 공중에 매달려서 가야만 했다. 당도하고 보니 뜨락은 텅 비어 우는 새 한 마리도 없고, () 위에는 조그마한 구리부처가 놓여 있고 신 두 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 이리저리 서성이며 우두커니 바라만 보다가, 마침내 암벽 아래에다 이름을 써 놓고 탄식하며 떠나왔다. 그런데 거기에는 노상 구름 기운이 감돌고 바람이 쓸쓸하게 불었다.

어떤 책에는 신선이란 산사람山人을 의미한다.”라고 하며 또 어떤 책에는 “ ‘산에 들어가 있는 사람入山을 신선이라고 한다.” 하기도 한다. 또한 신선이란 너울너울僊僊 가볍게 날아오르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벽곡하는 사람이 꼭 신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아마도 뜻을 얻지 못해 울적하게 살다 간 사람일 것이다.

 

 

[D-001]홍기(弘基) : 김홍기는 당시의 실존 인물로,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3에는 金洪器로 소개되어 있다.

[D-002]윤생(尹生)과 신생(申生) : ‘광문전 뒤에 쓰다書廣文傳後에서 연암은 예전부터 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에게 여염에서 일어난 얘깃거리가 될 만한 일들을 물었다고 했는데, 윤생과 신생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던 듯하다.

[D-003]서학동(西學洞) : 한양의 사학(四學)의 하나인 서학(西學)이 있던 동네로, 현재 태평로 1가 조선일보사 부근이다.

[D-004]누각동(樓閣洞) : 누각골이라고도 한다.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 체부동(體府洞)에 걸쳐 있었던 마을이다. 서리(胥吏)들의 거주지로 인왕산 아래 누각이 있었으므로 누각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D-005]미원동(美垣洞) : 미동(美洞)을 가리키는 듯하다. 미동은 현재 을지로 1가 소공동 북쪽에 해당한다.

[D-006]서 초관(徐哨官) : 초관(哨官)은 군대의 편제인 초()의 우두머리로 종 9 품의 벼슬이다.

[D-007]모교(毛橋) : 청계천에 놓인 다리의 하나로, 모전교(毛廛橋)라고도 한다. 현재의 무교동과 서린동의 사거리 지점에 있었다.

[D-008]사복천(司僕川) : 한양 중부 수진방(壽進坊 현재 수송동 일대)에 있던 사복시(司僕寺) 앞의 계천(溪川)이다.

[D-009]지 승(池丞) : ()은 서() · () · () 등 중앙의 각 관청에 있었던,  5 품에서 종 9 품에 걸친 벼슬이다.

[D-010]이문안里門內 : 한양 중부에 있던 동네로, 이문동(里門洞)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종로구 공평동 삼성타워(예전 화신백화점 자리) 뒤편에서 태화빌딩(옛날 順化宮과 태화관 자리)에 이르는 골목 일대에 해당한다.

[D-011]창동(倉洞) : 남대문 안 선혜청(宣惠廳)의 창고 부근에 있었던 동네로, 현재 남대문 시장이 있는 남창동 일대이다.

[D-012]동관(董關) …… 소릉(小陵) : 동관은 미상(未詳)이다. 배오개는 현재 종로 4가 인의동에 있었던 고개이고, 구리개는 현재 을지로 입구, 롯데백화점 맞은편에 있었던 고개이다. 자수교는 현재 옥인동과 효자동 · 궁정동이 만나는 곳에 있던 다리로, 조선 시대에 후궁들의 거처로 쓰인 자수궁(慈壽宮)이 있었던 곳이어서 자수궁교라고도 하였다. 사동은 사직단(社稷壇 : 현재 사직공원) 부근의 동네이다. 장동은 장의동(壯義洞)이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효자동 · 궁정동 · 청운동 일대이다. 대릉과 소릉은 각각 대정동(大貞洞)과 소정동(小貞洞)을 가리킨다. 원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중구 정동 일대이다.

[D-013]장창교(長暢橋) :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의 하나로 한양 중부 장통방(長通坊 : 현재 장교동, 관철동 일대)에 있었다. 장창교(長倉橋), 장통교(長通橋), 장교(長橋)라고도 불렸다.

[D-014]홍기가 …… 것이다 : 약간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작품의 서두에서는 김홍기가 16세에 장가들었다고 하였다. 설령 그가 열아홉에 장가들었다고 해도 그때 낳은 아들이 스무 살 전후가 되었다면 홍기의 현재 나이는 마흔 살쯤이라야 한다.

[D-015]그 이듬해 …… 바라보았다 : 박종채의 과정록에는 연암이 금강산을 유람한 것은 2년 뒤인 을유년(1765, 영조 41) 가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D-016]선암(船菴) : 내금강(內金剛) 표훈사(表訓寺)에 딸린 암자이다.

[D-017]진주담(眞珠潭) : 금강산 입구 만폭동(萬瀑洞)의 팔담(八潭) 중 가장 장대한 명승지이다.

[D-018]영원(靈源)과 백탑(白塔) : 골짜기의 이름으로, 내금강 명경대(明鏡臺) 구역에 있는 명승지들이다.

[D-019] …… 뿐이었다 : 신선이 득도하여 승천(昇天)한 증거로 흔히 신발만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진 사실을 든다.

[D-020]나는 : 원문은 인데, 이본에는 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자면 는 섬돌의 뜻으로 앞 구에 연결되어 신 두 짝만 섬돌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로 해석된다.

[D-021]어떤 …… 의미한다 : 석명(釋名)이나 자휘(字彙) 등의 사전류에서  자를 풀이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우상전(虞裳傳)

 

 

일본 관백(關白)이 새로 들어서자, 널리 재정을 비축하고 이궁(離宮)과 별관을 수리하고 선박을 정비하고서, 속국의 각 섬들에서 남다른 재주를 갖춘 검객과 기이한 기예를 갖춘 사람과 서화나 문학에 재능이 있는 인사를 샅샅이 긁어내어, 도읍으로 불러 모아놓고 수년 동안 훈련을 시킨 다음에, 마치 시험 문제 내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우리나라에 사신을 요청해 왔다. 이에 조정에서는 3품 이하의 문관을 엄선하여 삼사(三使)를 갖추어 보냈다. 사신을 보좌하는 이들도 모두 문장이 뛰어나고 식견이 많은 자들이었으며, 천문, 지리, 산수(算數), 복서(卜筮), 의술, 관상, 무예에 뛰어난 자들로부터, 피리나 거문고 등의 연주, 해학이나 만담, 음주 가무, 장기, 바둑, 말타기, 활쏘기 등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재주로써 나라 안에서 이름난 자들을 모두 딸려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시문(詩文)과 서화(書畵)를 가장 중하게 여겼으니, 조선 사람이 쓴 글을 한 자라도 얻는다면 양식을 지니지 않아도 천 리를 갈 수 있었다.

사신들이 거처하는 건물은 모두 비췻빛 구리 기와를 이었고 섬돌은 무늬를 아로새긴 돌이었으며 기둥과 난간에는 붉은 옻칠을 하고, 휘장은 화제주(火齊珠), 말갈아(靺鞨芽), 슬슬(瑟瑟) 등으로 치장하고, 식기는 모두 금은(金銀)으로 도금하여 사치스럽고 화려하였다. 천 리를 가는 동안 그들은 곳곳에 기묘한 볼거리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찮은 포정(庖丁)이나 역부(驛夫)에게까지도 의자에 걸터앉아 발을 비자(枇子)나무로 만든 통에 드리우게 하고 꽃무늬 적삼 입은 왜놈 아이종으로 하여금 씻어 주게 하였다. 이처럼 그들이 겉으로 순종하는 척하며 존모(尊慕)의 뜻을 보였으나, 우리 역관들이 호랑이 가죽, 표범 가죽, 담비 가죽, 인삼 등 금지된 물건들을 가져다 보석과 보도(寶刀)와 몰래 바꾸는 바람에 그곳의 거간꾼들이 이익을 노려 재물에 목숨을 걸기를 마치 말이 치달리듯 하니, 그 이후로는 왜인들이 겉으로만 공경하는 척할 뿐 더 이상 문명인으로 존모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상(虞裳)만은 한어(漢語)의 통역관으로 수행하여 홀로 문장으로 일본에 큰 명성을 날렸다. 이에 일본의 이름난 중이나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기를, “운아(雲我) 선생은 둘도 없는 국사(國士)이다.” 라고 하였다. 오사카大阪 이동(以東)에는 중들이 기생처럼 많고 절들이 여관처럼 즐비한데, 도박에 돈을 걸듯이 시문(詩文)을 지어 보이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이 수전(繡牋)과 화축(花軸)을 상에 그득 쌓아놓고, 대개는 어려운 글제와 억센 운()을 내어 궁지에 몰려 했으나 우상은 매번 즉석에서 읊어 대기를 마치 진작에 지어 놓은 것을 외우듯이 하였으며, 운을 맞추는 것도 평탄하고 여유가 있었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으며 기운 없는 글귀가 없었다.

그가 지은 해람편(海覽篇)의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대지 안에 널려 있는 일만 나라가 / 坤輿內萬國

바둑알 놓이듯 별이 깔리듯 / 碁置而星列

머리 틀어 상투 쫒은 우월(于越)의 나라 / 于越之魋結

머리를 박박 깎은 인도의 나라 / 竺乾之祝髮

소매 너른 옷 입은 제로(齊魯)의 나라 / 齊魯之縫腋

모포를 뒤집어쓴 호맥(胡貊)의 나라 / 胡貊之氈毼

혹은 문명하여 위의를 갖추기도 하고 / 或文明魚雅

혹은 미개하여 음악이 요란스럽기만 하네 / 或兜離侏佅

무리로 나뉘고 끼리끼리 모여서 / 群分而類聚

온 땅에 펼쳐진 게 모두 인간인데 / 遍土皆是物

일본이란 나라를 볼작시면 / 日本之爲邦

깊은 파도 넘실대는 섬나라 / 波壑所蕩潏

숲 속엔 부목이 울창하여 / 其藪則搏木

그곳에선 해돋이를 볼 수 있고 / 其次則賓日

여인네 하는 일은 비단에 수놓기요 / 女紅則文繡

토산품은 등자와 귤이며 / 土宜則橙橘

고기 중에 괴이한 게 낙지라면 / 魚之怪章擧

나무 중에 기이한 건 소철이라네 / 木之奇蘇鐵

그 진산(鎭山)과 방전(芳甸 방초 무성한 들판) / 其鎭山芳甸

구진성(句陳星)처럼 차례로 섬들이 늘어서 있어 / 句陳配厥秩

남북으론 가을과 봄이 다르고 / 南北春秋異

동서로는 낮과 밤이 갈라지도다 / 東西晝夜別

중앙은 그릇 엎어 놓은 것과 같아서 / 中央類覆敦

꼭대기엔 태곳적 눈이 영롱하네 / 嵌空龍漢雪

그늘로 소 떼를 뒤덮는 큰 나무와 / 蔽牛之鉅材

까치 잡는 데나 쓰이는 흔한 옥돌과 / 抵鵲之美質

단사나 금이나 주석들이 / 與丹砂金錫

모두 다 산에서 흔히 나온다네 / 皆往往山出

오사카는 큰 도회지라 / 大阪大都會

진기한 보물들은 용궁의 보물을 다 털어낸 듯 / 瓌寶海藏竭

기이한 향은 용연향(龍涎香)을 사른 것이요 / 奇香爇龍涎

보석은 아골석(雅鶻石)을 쌓아 놓았네 / 寶石堆雅骨

입에서 뽑은 코끼리 어금니 / 牙象口中脫

머리에서 잘라낸 무소뿔 / 角犀頭上截

페르시아의 상인들도 눈이 부셔하고 / 波斯胡目眩

절강의 저자들도 빛이 바랬네 / 浙江市色奪

온 섬이 지중해를 이루어 / 寰海地中海

오만 가지 산 것들이 구물거려라 / 中涵萬象活

돛을 펼친 후어(鱟魚)의 등이며 / 鱟背帆幔張

깃발을 달아맨 해추(海鰌)의 꼬리며 / 鰌尾旌旗綴

다닥다닥 붙은 굴은 벌집 같은데 / 堆壘蠣粘房

굴 더미 등에 진 거북은 소굴에서 쉬네 / 屭贔龜次窟

산호 바다로 문득 변하니 / 忽變珊瑚海

번쩍번쩍 음화가 타오르고 / 煜耀陰火烈

검푸른 바다로 문득 변하니 / 忽變紺碧海

노을 비치어 갖가지 빛깔이로세 / 霞雲衆色設

수은 바다로 문득 변하니 / 忽變水銀海

수만 개가 뿌려진 큰 별 작은 별 / 星宿萬顆撒

커다란 염색가게로 문득 변하니 / 忽變大染局

천 필의 능라 비단 찬란도 하고 / 綾羅爛千匹

커다란 용광로로 문득 변하니 / 忽變大鎔鑄

오금의 빛이 터져 퍼지네 / 五金光迸發

용이 하늘을 가르며 힘차게 나니 / 龍子劈天飛

천 벼락 만 번개가 치고 / 千霆萬電戞

발선과 마갑주는 / 髮鱓馬甲柱

신비하고 기괴해 마구 얼을 빼네 / 秘怪恣怳惚

백성들은 알몸에다 관을 썼는데 / 其民裸而冠

독하게 쏘아 대니 속이 전갈 같구나 / 外螫中則蝎

일 만나면 죽 끓듯 요란 떨고 / 遇事則麋沸

사람을 모략할 땐 쥐처럼 교활하네 / 謀人則鼠黠

이익을 탐낼 땐 물여우가 독을 쏘듯 / 苟利則蜮射

조금만 거슬려도 돼지처럼 덤벼들고 / 小拂則豕突

계집들은 남자에게 농지거리 잘하고 / 婦女事戱謔

아이들은 잔꾀를 잘 부리네 / 童子設機括

조상은 등지면서 귀신에 혹하고 / 背先而淫鬼

살생을 즐기면서 부처에 아첨하네 / 嗜殺而侫佛

글자는 제비 꼬락서니 못 면하고 / 書未離鳥鳦

말은 때까치 울음소리나 다를 바 없네 / 詩未離鴃舌

남녀간은 사슴처럼 문란하고 / 牝牡類麀鹿

또래끼린 물고기처럼 몰려다니며 / 友朋同魚鱉

씨부려 대는 소린 새 지저귀듯 / 言語之鳥嚶

통역들도 잘 알지 못한다네 / 象譯亦未悉

진귀한 풀과 나무들은 / 草木之瓌奇

나함조차 자기 책을 불사를 지경 / 羅含焚其帙

수없이 뻗어 있는 물길들은 / 百泉之源滙

역생조차 항아리 속 진디등에로 만드네 / 酈生瓮底蠛

요사스러운 수족들은 / 水族之弗若

사급조차 도설을 덮게 하고 / 思及閟圖說

도검에 새겨진 꽃무늬와 글자들은 / 刀劒之款識

정백이 속편을 다시 지어야 하리 / 貞白續再筆

지구상의 차이며 / 地毬之同異

섬들의 등급에 관해서는 / 海島之甲乙

서태 이마두가 / 西泰利瑪竇

치밀하고 명쾌하게 밝혀 놓았네 / 線織而刃割

무식한 제가 이 시를 지어 바치노니 / 鄙夫陳此詩

말은 촌스러도 뜻은 퍽 진실하이 / 辭俚意甚實

이웃 나라와 잘 지내는 큰 계략 있으니 / 善隣有大謨

잘 구슬려서 화평을 잃지 마소 / 羈縻和勿失

 

위의 시로 볼 때 우상 같은 자는 이른바 문장으로 나라를 빛낸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을 만한 자가 아니겠는가. 신종(神宗) 만력(萬曆) 임진년에 왜적 평수길(平秀吉)이 군사를 몰래 출동시켜 우리나라를 엄습하여, 우리의 삼도(三都)를 유린하고 우리의 노약자들을 코를 베어 욕보였으며 왜철쭉과 동백을 우리나라 각지에 심었다.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이 의주로 피난을 가서 천자께 사연을 아뢰자, 천자가 크게 놀라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동으로 구원을 보냈다. 당시에 대장군(大將軍)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 진린(陳璘) · 마귀(麻貴) · 유정(劉綎) · 양원(楊元)은 모두 다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었으며, 어사(御史) 양호(楊鎬) · 만세덕(萬世德) · 형개(邢玠)는 재주가 문무(文武)를 겸하고 도략이 귀신을 놀래킬 만했으며, 그 군사 역시 모두 진봉(秦鳳) · 섬서(陝西) · 절강(浙江) · 운남(雲南) · 등주(登州) · 귀주(貴州) · 내주(萊州)의 날랜 기병과 활 잘 쏘는 군사들이며, 대장군의 가동(家僮) 1000여 명과 유계(幽薊)의 검객들이었다. 그런데도 끝내 왜적과 화평을 맺고 겨우 나라 밖으로 몰아내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수백 년 동안 사신의 행차가 자주 에도江戶를 내왕하였다. 그러나 사신으로서 체통을 지키고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치중하느라 그 나라의 민요, 인물(人物), 요새, 강약(强弱)의 형세에 대해서는 마침내 털끝만큼도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왔다갔다만 하였다. 그런데 우상은 힘으로는 붓대 하나도 이기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 나라의 정화(精華)를 붓끝으로 남김없이 빨아들여 섬나라 만리의 도성(都城)으로 하여금 산천초목이 다 마르게 하였으니, 비록 붓대 하나로써 한 나라를 무너뜨렸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우상의 이름은 상조(湘藻)이다. 일찍이 손수 제 화상(畵像)에 제()하기를,

 

 

공봉백(供奉白)과 업후필(鄴侯泌) / 供奉白鄴侯泌

철괴와 합쳐 창기가 되니 / 合鐵拐爲滄起

옛 시인과 옛 선인 / 古詩人古仙人

옛 산인이 모두 다 이씨(李氏)라네 / 古山人皆姓李

 

했는데, ()는 그의 성이요, 창기(滄起)는 그의 또 다른 호이다.

대체로 선비란 자신을 알아주는 이 앞에서는 재능을 펴고 자신을 몰라주는 이 앞에서는 재능을 펴지 못하는 법이다. 교청(鵁鶄 푸른 백로)과 계칙(鸂鶒 자원앙(紫鴛鴦))은 새 중에서도 보잘것없는 새이지만, 그럼에도 제 깃털에 도취되어 물에 비추어 보고 서 있다가 다시 하늘을 맴돌다 내려앉거늘, 사람이 지닌 문장을 어찌 고작 새 깃털의 아름다움에 비하겠는가. 옛날에 경경(慶卿)이 밤에 검술을 논하자 합섭(蓋聶)이 성을 내며 눈총을 주어 나가게 하였으며, 고점리(高漸離)가 축()을 연주하자 형가(荊軻)가 화답하여 노래하더니 이윽고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붙들고 운 일이 있었다. 무릇 그 즐거움이야 극에 달했겠지만, 더 나아가 울기까지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음이 복받쳐서 엉겁결에 슬퍼진 것이다. 비록 그 당사자에게 물어본다 해도 역시 그때 제 마음이 무슨 마음이었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문장으로써 서로 높이고 낮추고 하는 것이 어찌 구구한 검사(劒士)의 한 기예 정도에 비할 뿐이겠는가? 우상은 아마도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사람일까? 그의 말에 어쩌면 그렇게도 슬픔이 많단 말인가? 그의 시에,

 

 

닭의 머리 위 벼슬은 높기가 관과 같고 / 鷄戴勝高似幘

소의 축 처진 멱미레는 크기가 전대 같네 / 牛垂胡大如袋

집에 있는 보통 물건이란 하나도 기이할 것 없지만 / 家常物百不奇

크게 놀랍고 괴이한 건 낙타의 등이로세 / 大驚怪槖駝背

 

하였으니, 우상은 늘 자신을 남다르게 여겼던 것이다. 병이 위독하여 죽게 되자 그동안 지어 놓은 작품들을 모조리 불태우면서,

 

누가 다시 알아주겠는가.”

하였으니, 그 뜻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공자가 말하기를,

 

재주 나기가 어렵다는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

 

관중(管仲)은 그릇이 작다.”

하였다. 자공(子貢)이 묻기를,

 

저는 무슨 그릇입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너는 호련(瑚璉)이다.”

하였다. 이는 자공의 재주를 칭찬하면서도 작게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덕은 그릇에 비유되고 재주는 그 속에 담기는 물건에 비유된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결이 쪼록쪼록 저 옥 술잔이여, 황금빛 울창주가 그 속에 들었도다.”라 했고, 주역에 이르기를 솥이 발이 부러져 공()의 먹을 것이 엎어졌도다.” 했으니, 덕만 있고 재주가 없으면 그 덕이 빈 그릇이 되고, 재주만 있고 덕이 없으면 그 재주가 담길 곳이 없으며, 있다 해도 그 그릇이 얕으면 넘치기가 쉽다. 인간은 천지(天地)와 나란히 서니 바로 삼재(三才)가 된다. 그러므로 귀신은 재()에 속하며 천지는 큰 그릇이 아니겠는가? 깔끔을 떠는 자에게는 복이 붙을 데가 없고, 남의 정상(情狀)을 잘 꿰뚫어 보는 자에게는 사람이 붙지를 않는 법이다. 문장이란 천하의 지극한 보배이다. 오묘한 근원에서 정화(精華)를 끄집어내고, 형적이 없는 데서 숨겨진 이치를 찾아내어 천지 음양의 비밀을 누설하니, 귀신이 원망하고 성낼 것은 뻔한 일이다. 재목 중에 좋은 감이 있으면 사람이 베어 갈 생각을 하고, 재물 중에 좋은 감이 있으면 사람이 뺏어 갈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재목 재() 자와 재물 재() 자 속에 있는 ()’ 자의 글자 모양이 밖으로 삐치지 않고 안으로 삐치는 것이다.

우상은 일개 역관에 불과한 자로서, 나라 안에 있을 때는 소문이 제 마을 밖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벼슬아치들이 그의 얼굴조차 몰랐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름이 바다 밖 만리의 나라에 드날리고, 몸소 곤어(鯤魚)와 고래와 용과 악어의 소굴까지 뒤졌으며, 솜씨는 햇빛과 달빛으로 씻은 듯 환히 빛났고, 기개는 무지개와 신기루에 닿을 듯이 뻗치었다. 그러므로 재물을 허술하게 보관하는 것은 훔쳐 가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 것이며, ‘물고기란 못을 떠날 수 없는 법이니 이기(利器)를 남에게 보여 주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승본해(勝本海)를 지나면서 다음의 시를 지었다.

 

 

맨발의 왜놈 사내 몰골조차 괴상한데 / 蠻奴赤足貌魀

압색의 윗도리 등엔 별과 달이 그려져 있네 / 鴨色袍背繪星月

꽃무늬 적삼 입은 계집들 달음질해 문 나서니 / 花衫蠻女走出門

머리 빗다 못 마친 양 그 머리 동여 맸네 / 頭梳未竟髽其髮

어린아이 칭얼대며 어미 젖을 빨아 대니 / 小兒號嗄乳母乳

어미가 등을 토닥이자 울음소리 잦아드네 / 母手拍背鳴嗚咽

이윽고 북 울리며 관인이 들어오니 / 須臾擂鼓官人來

오만 눈이 둘러싸고 활불인 양 여기누나 / 萬目圍繞如活佛

왜놈 관리 무릎 꿇고 절하며 값진 보물 올리는데 / 蠻官膜拜獻厥琛

산호랑 대패를 소반 받쳐 내오누나 / 珊瑚大貝擎盤出

주인과 손님이 늘어섰으나 실로 벙어리인 양 / 眞如啞者設賓主

눈짓으로 말을 하고 붓끝으로 얘기하네 / 眉睫能言筆有舌

왜놈의 관부(官府)에도 정원 풍취 풍부하여 / 蠻府亦耀林園趣

종려나무 푸른 귤이 뜨락에 가득 찼네 / 栟櫚靑橘配庭實

 

배 안에서 치질 병이 생겨 매남노사(梅南老師)의 말을 누워 생각하며 다음의 시를 지었다.

 

 

공자의 유교와 석가의 불교는 / 宣尼之道麻尼敎

각각 경세와 출세로서 해라면 달이로세 / 經世出世日而月

서양 선비 일찍이 오인도 가 보았으나 / 西士嘗至五印度

과거나 현재에 부처 하나 없었다오. / 過去現在無箇佛

유가에도 장사꾼이 있기로는 마찬가지 / 儒家有此稗販徒

붓과 혀를 까불려서 괴이한 말 퍼뜨려 / 弄筆舌神吾說

산발을 하고 뿔이 난 채 지옥에 떨어진다 하니 / 披毛戴角墜地犴

생시에 남 속인 죄 마땅히 받으리라 / 當受生日欺人律

해독의 불길이 진단의 동쪽에도 미쳐 와서 / 毒焰亦及震旦東

화려하고 큰 절들이 도시와 시골에 널렸구려 / 精藍大衍都鄙列

섬 백성 흘겨보며 화복으로 겁을 주니 / 睢盱島衆怵禍福

향화(香火)라 공양미가 끊일 날이 없고말고 / 炷香施米無時缺

비하자면 제 자식이 남의 자식 죽여 놓고 / 譬如人子戕人子

들어와 봉양하면 어느 부모 좋아하리 / 入養父母必不說

육경이 중천에서 밝은 빛을 비추는데 / 六經中天揚文明

이 나라 사람들은 눈에 옻칠한 듯하네 / 此邦之人眼如漆

양곡이나 매곡이 이치가 둘이겠나 / 暘谷昧谷無二理

순종하면 성인 되고 배반하면 악인 되네 / 順之則聖背檮杌

우리 스승 나더러 대중에게 고하라기 / 吾師詔吾詔介衆

목탁 대신 이 시 지어 네거리에 울리노라 / 以詩爲金口木舌

 

우상의 이러한 시들은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하다. 나중에 머물렀던 곳을 다시 들렀더니 그새 이 시들이 모두 책으로 인출(印出)되었다고 한다.

나는 우상과는 생전에 상면이 없었다. 그러나 우상은 자주 사람을 시켜 나에게 시를 보여 주며 하는 말이,

 

유독 이분만이 나를 알아줄 수 있을 것이다.”

했다기에, 나는 농담 삼아 그 사람더러 이르기를,

 

이거야말로 오농(吳儂)의 간드러진 말투이니 너무 잗달아서 값나갈 게 없다.”

했더니, 우상이 성을 내며,

 

창부(傖夫)가 약을 올리는군!”

하고는 한참 있다가 마침내 한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세상에 오래갈 수 있겠는가?”

하고 두어 줄의 눈물을 쏟았다기에, 나 역시 듣고서 슬퍼했다.

얼마 후 우상이 죽으니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이었다. 그의 집안사람이 꿈속에서, 신선이 술에 취하여 푸른 고래를 타고 가고 그 아래로 검은 구름이 드리웠는데 우상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얼마 후에 우상이 죽으니, 사람들 가운데는 우상이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고들 말하기도 하였다. ! 나는 일찍이 속으로 그 재주를 남달리 아꼈다. 그럼에도 유독 그의 기를 억누른 것은, 우상이 아직 나이 젊으니 머리를 숙이고 도()로 나아간다면, 글을 저술하여 세상에 남길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하니 우상은 필시 나를 좋아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우상의 죽음에 대해 만가(輓歌)를 지은 이가 있어 노래하기를,

 

 

오색을 두루 갖춘 비범한 새가 / 五色非常鳥

우연히도 지붕 꼭대기에 날아 앉았네 / 偶集屋之脊

뭇사람들 다투어 달려가 보니 / 衆人爭來看

놀라 일어나 홀연 자취를 감추었네 / 驚起忽無跡

 

하였고, 그 두 번째 노래에,

 

 

까닭 없이 천금을 얻고 나면은 / 無故得千金

그 집엔 재앙이 따르는 법 / 其家必有災

더구나 이처럼 세상에 드문 보배를 / 矧此稀世寶

오래도록 빌릴 수 있으리요 / 焉能久假哉

 

하였고, 그 세 번째 노래에,

 

 

조그마한 하나의 필부였건만 / 渺然一匹夫

죽고 나니 사람 수가 준 걸 알겠네 / 死覺人數減

세도와 관련된 일이 아니겠는가 / 豈非關世道

사람들은 빗방울처럼 많다마는 / 人多如雨點

 

하였다. 또 노래하기를,

 

그 사람은 쓸개가 박마냥 크고 / 其人膽如瓠

그 사람은 눈빛이 달같이 밝고 / 其人眼如月

그 사람은 팔목에 귀신 붙었고 / 其人腕有鬼

그 사람은 붓끝에 혀가 달렸네 / 其人筆有舌

 

하였고, ,

 

 

남들은 아들로써 대를 잇지만 / 他人以子傳

우상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 / 虞裳不以子

혈기야 때로는 끊어지지만 / 血氣有時盡

명성은 끝질 날이 없으리 / 聲名無窮已

 

하였다.

나는 이전에 우상을 보지 못하여 매양 한스럽게 여겼는데, 그 문장까지 불살라서 남은 것이 없다 하니, 세상에 그를 알 사람이 더욱 없게 되었다. 그래서 상자 속에 오래 수장한 것을 꺼내어 그가 예전에 보여 준 것을 찾았는데, 겨우 두어 편뿐이었다. 이에 모조리 다 기록하여 우상전을 지었다.

우상에게 아우가 있는데, 그 역시도  이하 원문 빠짐 

 

 

[D-001]일본 …… 들어서자 : 관백은 천황을 대신하여 섭정(攝政)한다는 뜻으로, 막부(幕府)의 최고 실력자인 쇼군將軍을 가리킨다.  10 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 1761(영조 37) 정식으로 관백에 즉위하였다.

[D-002]속국 : 당시 일본은 기내(畿內) 5(), 동해도(東海道) 15, 동산도(東山道) 8, 북륙도(北陸道) 7, 산음도(山陰道) 8, 산양도(山陽道) 8, 남해도(南海道) 6, 서해도(西海道) 9국 등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蜻蛉國志 卷2 輿地

[D-003]삼사(三使)를 갖추어 보냈다 : 영조 39(1763) 정사(正使) 조엄(趙曮), 부사(副使) 이인배(李仁培), 종사관(從事官) 김상익(金相翊)을 통신사(通信使)의 삼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D-004]섬돌은 …… 돌이었으며 : 원문은 除嵌文石인데, 무늬 있는 돌로 된 궁궐의 섬돌을 문석계(文石階)’ 또는 문석지계(文石之階)’라고 한다.

[D-005]화제주(火齊珠) : 보석의 일종으로 청색, 홍색, 황색 등 빛깔이 다양하다. 매괴주(玫瑰珠)라고도 하며 일설에는 유리(琉璃)라고도 한다.

[D-006]말갈아(靺鞨芽) : 보석의 일종으로 붉은빛을 띤다. 홍마노(紅瑪瑙)라고도 하며 주로 말갈 지역에서 생산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D-007]슬슬(瑟瑟) : 보석의 일종으로 푸른빛을 띤다. 녹주(綠珠)라고도 한다.

[D-008]우상(虞裳) : 이언진(李彦瑱 : 1740~1766)의 자()이다. 호는 운아(雲我), 송목관(松穆館) 등이다.

[D-009]해람편(海覽篇) : 이언진의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도 수록되어 있다. 송목관신여고 1860년에 저자의 시문(詩文) 잔편들을 수집하여 간행한 본으로서 같은 해에 중국과 조선 두 곳에서 함께 출간되었다. 중국본은 이상적(李尙迪)이 간행한 목판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이고, 조선본은 후손 이진명(李鎭命) 등이 간행한 활자본(한국문집총간 252)이다. 그리고 청장관전서 1809년경에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李光葵)가 재편한 것을 1900년대 초에 등사한 본(한국문집총간 258)으로서 이들 송목관신여고 2종을 포함한 4종의 판본 사이에는 글자나 구절상의 차이가 다소 있다.

[D-010]대지 …… 나라가 : 마테오리치利瑪竇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가리킨다.

[D-011]소매 …… 나라 : 제로(齊魯)는 제 나라와 노 나라로,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문화국가이다. 공자는 노 나라에서 성장하여 소매 너른 옷을 입었다고 한다. 禮記 儒行 봉액(縫腋)은 봉액(逢掖)이라고도 하며, 옷 소매가 넓은 유자(儒者)의 복장을 가리킨다.

[D-012]모포를 …… 나라 : 호맥(胡貊)은 중국 북방에 사는 흉노(匈奴) 등의 민족을 가리킨다. 원문의  송목관신여고에는 로 되어 있다.

[D-013]부목(搏木) : 부상(扶桑), 부상(榑桑), 부상(搏桑)이라고도 하며, 전설상 해 돋는 곳에서 자란다는 신목(神木)이다. 일본을 가리키기도 한다. 원문의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는 로 되어 있다.

[D-014]나무 …… 소철이라네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  청장관전서에는  로 되어 있다.

[D-015]구진성(句陳星) : 자미원(紫微垣)에 속하는 별로, 모두 6개의 소성(小星)으로 이루어져 있다.

[D-016]그늘로 …… 나무 :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장석(匠石)이 제() 나라에 가서 신목(神木)을 보았는데 그 크기가 수천 마리의 소를 그늘로 가릴 정도나 된다.” 하였다.

[D-017]까치 …… 옥돌 : 환관(桓寬) 염철론(鹽鐵論), “곤륜산(崑崙山) 근처에서는 박옥(璞玉)으로 까치를 잡는다.” 하였다. 즉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 아주 흔하게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D-018]진기한 ……  : 송목관신여고  청장관전서에는 이 구절 다음에 빛나는 것은 수시은(朱提銀)이요 둥근 것은 말갈아(靺鞨芽)요 붉은 것 푸른 것은 화제주(火齊珠)와 슬슬(瑟瑟)이라네.光者是朱提 圓者是靺鞨 赤者與綠者 火齊映瑟瑟라는 구절이 더 들어 있다.

[D-019]용연향(龍涎香) : 고래의 분비물로 만든 명향(名香)의 이름이다.

[D-020]아골석(雅鶻石) : 슬슬(瑟瑟)과 비슷한 청록색 보석이다. 송목관신여고에는  로 되어 있다.

[D-021]절강의 …… 바랬네 : 송목관신여고에는 이 구절 다음에 수레를 밀며 떼 지어 몰려가니 수많은 거간꾼들 늘어섰는데却車而攈至 駔儈千戶埒라는 구절이 더 들어 있다.

[D-022]돛을 …… 등이며 : 후어(鱟魚)는 참게를 말한다. 등 위에는 7, 8() 되는 껍질이 있는데 바람이 없으면 이 껍질을 눕히고 바람이 불면 이 껍질을 돛처럼 펴서 바람을 타고 다닌다고 한다. 酉陽雜俎

[D-023]깃발을 …… 꼬리며 : 해추(海鰌)는 꼬리지느러미가 솟아 있는 긴흰수염고래를 말한다. 유순(劉恂) 영표록이(嶺表錄異)에 의하면 그 지느러미가 붉은 깃발을 흔드는 것 같다고 하였다.

[D-024]다닥다닥 붙은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에는 , 청장관전서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25]음화(陰火) : 산호가 물 속에서 내는 빛을 가리킨다.

[D-026]오금(五金) : 황색의 금, 백색의 은, 적색의 구리, 청색의 납, 흑색의 철을 가리킨다.

[D-027]하늘을 가르며 : 원문의 劈天 송목관신여고에는 擘天으로 되어 있다.

[D-028]천 벼락 …… 치고 : 이 구절이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는 千電萬霆戞’, 조선본에는 雷霆極閃戞로 되어 있고, 송목관신여고에는 이 구절 다음에 동쪽 구름 사이론 용의 비늘과 발톱이 번뜩이고 서쪽 구름 사이론 지체가 드러났네.東雲閃鱗爪 西雲露肢節라는 구절이 더 들어 있다.

[D-029]발선(髮鱓)과 마갑주(馬甲柱) : 발선은 드렁허리의 일종이다. 마갑주는 살조개, 또는 꼬막이라고 하며, 그 육주(肉柱)가 맛있다.

[D-030]죽 끓듯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 조선본과 청장관전서에는 로 되어 있다.

[D-031]조금만 거슬려도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로 되어 있다.

[D-032]글자는 …… 면하고 : 원문의 鳥鳦 鳦鳥 즉 제비를 뜻한다. 한자의 초서체(草書體)에서 만들어진 일본의 히라카나平假名가 제비 모양과 같다고 풍자한 것이다. 송목관신여고에는 鳥鳦 鳥跡으로 되어 있는데, ‘鳥跡은 조전(鳥篆), 즉 새의 형태와 같은 장식을 가하여 전체(篆體) 비슷하게 된 예술적인 자체(字體)를 가리키는 것으로 춘추전국 시대에 유행하였다. 따라서 鳥跡으로 하면 일본의 글자 모양과는 무관하게 된다.

[D-033]말은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에는 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34]때까치 울음소리 : 다른 나라의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鴃舌이라고 한다.

[D-035]남녀간은 사슴처럼 문란하고 : 예기 곡례 상(曲禮上) 저 금수(禽獸)만은 예가 없다. 그러므로 부자가 암컷을 공유한다.父子聚麀고 하였다.

[D-036]또래 : 원문의 友朋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朋流로 되어 있다.

[D-037]새 지저귀듯 : 원문의 鳥嚶 송목관신여고에는 啁啾로 되어 있다.

[D-038]통역들도 …… 못한다네 : 이 구절이 송목관신여고  청장관전서에는 鞮象譯未悉로 되어 있다.

[D-039]나함(羅含) : 동진(東晉) 때의 인물로서 상수(湘水) 지역의 산수를 다룬 상중산수기(湘中山水記)를 저술하였다.

[D-040]역생(酈生) : 북위(北魏) 때의 인물인 역도원(酈道元 : 466~527)을 가리킨다. 그는 중국지리학의 명저인 수경주(水經注)를 저술하였다.

[D-041]항아리 속 진디등에 : ‘우물 안 개구리와 비슷한 말로 식견이 좁다는 뜻이다.

[D-042]사급(思及) :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艾儒略 : Julio Aleni, 1582~1649의 자()이다. 그는 명 나라 때에 중국에 들어와 직방외기(職方外紀)를 저술하였다. 그 내용은 권두에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수록한 뒤 아시아 등 오대주에 대해 기록하고 사해총설(四海總說)을 덧붙여 각국의 풍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D-043]꽃무늬와 글자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44]정백(貞白) : () 나라 때의 인물인 도홍경(陶弘景 : 452~536)의 시호이다. 그는 역대 제왕들과 각국 인물들의 도검(刀劍)에 대하여 기술한 고금도검록(古今刀劍錄)을 저술하였다.

[D-045]서태(西泰) 이마두(利瑪竇) : 서태는 마테오리치(Matteo Ricci)의 자()이다. ‘西泰 송목관신여고에는 서양을 뜻하는 泰西로 되어 있다.

[D-046]치밀하고 …… 놓았네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에는 로 되어 있다.

[D-047]말은 촌스러도 : 원문의 辭俚意 송목관신여고에는 語俚義로 되어 있다.

[D-048] …… 마소 : 기미(羈縻)란 말에 굴레를 씌우거나 소에 고삐를 매어 통제한다는 뜻으로, 억센 상대를 회유(懷柔)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은 주변의 이민족(異民族)들에 대해 잘 구슬리면서 외교 관계를 끊지 않는羈縻勿絶 정책을 취하였다.

[D-049]삼도(三都) : 경주東都, 한양, 평양西都을 가리킨다.

[D-050]진봉(秦鳳) : 봉상부(鳳翔府)의 진계(秦階), 농봉(隴鳳) 일대를 가리킨다. 大淸一統志

[D-051]유계(幽薊) : 거란(契丹)이 지배했던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등 연운(燕雲) 16()를 가리키는데, 지금의 하북성(河北省)과 산서성(山西省)의 북부 일대에 해당한다. 유주와 계주의 치소(治所)는 각각 지금의 북경(北京)과 하북성 계현(薊縣)에 있었다.

[D-052]상조(湘藻) : 상조는 이언진이 스스로 지은 또 하나의 이름이다. 淸脾錄 卷3 李虞裳

[D-053]공봉백(供奉白) : () 나라 시인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공봉한림(供奉翰林)에 제수되었으므로 공봉백이라 한 것이다.

[D-054]업후필(鄴侯泌) : 당 나라 문장가 이필(李泌 : 722~789)을 가리킨다. 신선술을 좋아하였다. 업후(鄴侯)에 봉하여졌으므로 업후필이라 한 것이다.

[D-055]철괴(鐵拐) : 중국 전설상의 팔선(八仙) 중의 하나인 이철괴(李鐵拐)를 가리킨다.

[D-056]공봉백(供奉白) …… 이씨(李氏)라네 : 이 시는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 동호거실(衕衚居室)’이라는 제목의 장편 육언시 중의 한 수로 수록되어 있고, 원문의 古詩人古仙人 古山人皆姓李 송목관신여고에는 古詩人古山人 古仙人皆姓李로 되어 있다.

[D-057]옛날에 …… 있었다 : 형가(荊軻)는 전국 시대 말기 위() 나라 사람으로 위 나라에서는 경경(慶卿)으로 불렸다. () 나라가 위 나라를 멸망시키자 연() 나라로 망명한 다음 연 나라 태자 단()과 모의하여 진왕(秦王) ()을 죽이려다 실패한 인물이다. 형가가 어느날 유차(楡次) 고을을 지나다가 합섭(蓋聶)과 검술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합섭이 성을 내며 눈총을 주자 형가가 그만 기분이 상해 나가 버렸다. 또 형가가 연 나라에 가서 고점리와 시장에서 술을 마셨는데 술에 취한 고점리가 축()을 연주하자 형가가 이에 화답하여 노래를 부르고 이어 주위도 아랑곳 않고 서로 붙들고 울었다. 형가에게 있어서 합섭은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에 해당하고 고점리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 해당한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D-058]닭의 …… 등이로세 : 이 시 또한 송목관신여고 동호거실(衕衚居室)’의 한 수로 수록되어 있다.

[D-059]재주 …… 아니겠는가 : 논어 태백(泰伯)에 보인다.

[D-060]관중(管仲)은 그릇이 작다 : 논어 팔일(八佾)에 보인다.

[D-061]자공(子貢) …… 호련(瑚璉)이다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보인다. 호련은 종묘(宗廟)에서 서직(黍稷)을 담는 데 쓰는 그릇이다.

[D-062]시경(詩經)…… 했고 : 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나오는 구절이다.

[D-063]주역 …… 했으니 : 주역 정괘(鼎卦) 구사(九四)의 효사이다. 구사는 대신(大臣)의 지위를 상징하고, ()은 임금을 가리킨다. 소인(小人)이 대신의 중책을 감당하지 못해 국사를 그르친다는 뜻이다.

[D-064]귀신은 재()에 속하며 : 예기 예운(禮運) 그러므로 사람이란 천지(天地)의 덕()이며, 음양이 서로 교통하고, 귀신이 서로 만난 것이다.鬼神之會也라고 하였다. ()는 형체(形體), ()은 정령(精靈)을 뜻한다.

[D-065]곤어(鯤魚) : 북쪽 대해(大海)에 산다는 큰 물고기이다. 莊子 逍遙遊

[D-066]솜씨는 …… 빛났고 : 원문은 手沐日月이다. () 임금이 남악(南岳)에 올라 금간옥자(金簡玉字)의 비서(秘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목일욕월(沐日浴月)’ 운운한 표현이 있었다고 한다. ‘목일욕월은 햇빛과 달빛으로 목욕한 듯이 윤택하다는 뜻이다. 庾仲雍 荊州記

[D-067]재물을 …… 다름없다 : 주역 계사전(繫辭傳), “재물을 허술하게 보관하는 것은 훔쳐 가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없고, 얼굴을 예쁘게 꾸미는 것은 음심(淫心)을 갖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慢藏誨盜, 冶容誨淫 하였다.

[D-068]물고기란 …… 된다 : 노자  장자(莊子) 거협(胠篋), “물고기란 못을 떠날 수 없는 법이니 나라의 이기(利器)를 남에게 보여 주면 안 된다.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하였다.

[D-069]승본해(勝本海) : 승본(勝本)은 현 장기현(長崎縣) 북쪽 일기도(壹岐島)에 소속된 지명으로 그 일대의 바다를 승본해라 한다.

[D-070]압색(鴨色)의 윗도리 : 오리 머리 빛깔인 녹색을 가리키는 것으로 압두록(鴨頭綠)이라고도 한다. ‘ 우에노기누라고 하는 윗도리를 말한다.

[D-071]꽃무늬 적삼 : 원문의 花衫 송목관신여고  청장관전서에는 花裙으로 되어 있다.

[D-072]울음소리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73]관인(官人) : 우리나라 사신을 가리킨다.

[D-074]대패(大貝) : 바닷조개 중 가장 크다는 거거(車渠)와 흡사한 조개의 일종이다. 껍질은 장식품으로 쓴다.

[D-075]말을 하고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  청장관전서에는 로 되어 있다.

[D-076]왜놈의 …… 풍부하여 : 이 부분이 송목관신여고에는 蠻府亦解園林趣로 되어 있다.

[D-077]맨발의 …… 찼네 : 이 시는 일기도(壹岐島)’라는 제목으로 송목관신여고에 수록되어 있다.

[D-078]석가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에는 ’, 청장관전서에는 로 되어 있다.

[D-079]일찍이 : 원문의  청장관전서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80]오인도(五印度) 가 보았으나 : 인도를 오천축(五天竺)이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가 동, , , , 중의 5부로 구획되어 있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이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16세기에 인도에 진출한 사실을 가리킨다.

[D-081]장사꾼 : 원문의 俾販徒 송목관신여고에는 稗販徒’, 청장관전서에는 裨販徒로 되어 있다.

[D-082]괴이한 말 : 원문은 吾說인데,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83]산발을 …… 하니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 청장관전서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84]생시에 ……  : 원문의 日欺 송목관신여고에는 前誣’, 청장관전서에는 日誣로 되어 있다.

[D-085]진단(震旦)의 동쪽 : 일본을 가리킨다. 진단은 고대 인도에서 중국을 일컫던 말이다.

[D-086]절들이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 청장관전서에는 로 되어 있다.

[D-087]향화(香火) …… 없고말고 : 원문의 無時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長無로 되어 있다. 송목관신여고에는 이 구절 다음에 부처를 받들면서 부처가 싫어하는 것 되레 좋아하여 물고기 구워 먹고 회 쳐 먹고 마구마구 죽여 대니好佛反好佛所惡 燒剔魚鼈恣屠殺라는 구절이 더 들어 있다.

[D-088]육경이 …… 비추는데 : 원문의 揚文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는 揭文’, 조선본에는 揭大로 되어 있다.

[D-089]양곡(暘谷)이나 매곡(昧谷) : 양곡은 해 뜨는 곳, 매곡은 해 지는 곳을 가리킨다.

[D-090]우리 ……고하라기 : 원문의 전후에 있는 가 모두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91]공자의 …… 울리노라 : 마지막 구 以詩爲金口木舌  송목관신여고에는 로 되어 있다. 이 시는 일양의 배 안에서 혜환노사의 말씀을 생각하며壹陽舟中念惠寰老師言라는 제목으로 송목관신여고에 수록되어 있는데, 혜환(惠寰)은 이언진의 스승 이용휴(李用休 : 1708~1782)의 호이다.

[D-092]오농(吳儂)의 간드러진 말투 : 오농은 오() 나라 사람, 즉 화려하고 세련됨을 추구한 강남(江南)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삼국 시대 때 오 나라 땅이었던 이 지역 사람들의 말투가 간드러진 느낌을 주었으므로 오농연어(吳儂軟語)’ 오농교어(吳儂嬌語)’니 하였다. 원문의 오농세타(吳儂細唾)’도 같은 뜻의 말이다.

[D-093]창부(傖夫) : 창부는 시골뜨기라는 뜻으로, 강남 사람들이 중원(中原) 사람들을 비하하여 부른 말이다. 오 나라 출신인 육기(陸機)가 동생 육운(陸運)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문학적 경쟁 상대로서 중원 출신인 좌사(左思) 창부라 비웃은 적이 있다. 晉書 卷92 文苑傳 左思 여기서 이언진은 자신과 연암의 관계를 육기와 좌사의 관계에 비긴 것이다.

[D-094]만가(輓歌)를 지은 이 :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 만이우상(挽李虞裳)’이라는 제목의 오언고시 10수가 실려 있으며 그 작자가 이용휴(李用休)로 되어 있다. 연암은 그 중 5수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다.

[D-095]놀라 일어나 : 원문의 驚起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는 飛去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유실됨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유실됨

 

외숙 지계공(芝溪公)의 말씀을 듣건대, “역학대도전은 당시에 선비로서의 명성을 빌려 권세와 이권을 몰래 사들여 기세등등한 자가 있어서 부군(府君)이 이 글을 지어 기롱한 것인데, 대개 노소(老蘇)의 변간론(辨姦論)과 같은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나중에 그 사람이 패가망신 당하자, 부군이 마침내 이 글을 불살라 버렸으니, 대개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자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상편 우상전에 결락이 있고 하편들이 유실된 것은 권질(卷帙)상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함께 없어진 것이다.” 하였다.

아들 종간(宗侃)이 삼가 쓰다.

 

이상 아홉 편의 전은 다 아버님이 약관 시절에 지은 것으로서, 집에 장본(藏本)이 없어 매번 남들에게서 얻어 왔다. 예전에 아버님께서 이들 작품을 없애 버리라고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가 젊었을 적에 작가에 뜻을 두어 작문하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 지은 것인데, 지금까지도 더러 이 작품들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하셨다. 불초한 우리 형제가 비록 아버님의 명을 받들고는 싶지만, 사람들이 전파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난번에 이러한 일로 외숙 지계공께 상의를 드렸더니, 공이 말씀하시기를,

 

선공(先公)이 지은 논설 중에는 전아(典雅)하고 장중(莊重)한 것이 많다. 반면에 이 작품들은 사실 저술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으니 있건 없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더구나 젊었을 때의 작품이니만큼 더욱 그렇다. 게다가 예로부터 문장가들에게는 이와 같이 유희 삼아 지어 보는 작품이 없지 않았으니, 반드시 폐기할 것까지는 없다. 다만 양반전 한 편은 속된 말이 많아서 조그마한 흠이 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실로 왕포(王褒)의 동약(僮約)을 모방하여서 지은 것이니만큼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였으므로, 불초한 우리 형제가 감히 함부로 취사(取舍)를 할 수 없어, 별집(別集)의 말미에 붙여 둔다.

아들 종간이 삼가 쓰다.

 

[D-001]지계공(芝溪公) :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이다. 호를 지계(芝溪)라 하였다.

[D-002]노소(老蘇) : 소식(蘇軾)의 아버지인 소순(蘇洵)을 가리킨다. 소순은 변간론(辨姦論)을 지어 왕안석(王安石)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D-003]종간(宗侃) : 연암의 아들 박종채(朴宗采)의 초명(初名)이다. 그의 형 박종의(朴宗儀)는 백부 박희원(朴喜源)의 양자가 되었다.

[D-004]왕포(王褒)의 동약(僮約) : 노비 계약을 다룬 글로서 그 내용은, 왕포가 양혜(楊惠)라는 과부의 집에 들렀다가 오만하게 술심부름을 거부하는 양혜의 노비 편료(便了)를 샀는데, 그 노비문서에서 노비가 해야 할 수많은 일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어겼을 때의 처벌 조항까지도 세세하게 밝혀 놓음으로써 편료를 길들인다는 이야기이다. 왕포는 전한(前漢) 시대의 인물로 사부(辭賦)에 능했다. 古文苑 卷17 僮約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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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7권 별집 - 종북소선(鍾北小選)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7권 별집 - 종북소선(鍾北小選)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7권 별집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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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7권 별집

 

 

종북소선(鍾北小選)

1 자서(自序)

2 낭환집서(蜋丸集序)

3 녹앵무경서(綠鸚鵡經序)

4 우부초서(愚夫艸序)

5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

6 북학의서(北學議序)

7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

8 유씨도서보서(柳氏圖書譜序)

9 영처고서(嬰處稿序)

10 형언도필첩서(炯言桃筆帖序)

11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

12 영재집서(泠齋集序)

13 순패서(旬稗序)

14 염재기(念齋記)

15 관재기(觀齋記)

16 선귤당기(蟬橘堂記)

17 애오려기(愛吾廬記)

18 환성당기(喚醒堂記)

19 취미루기(翠眉樓記)

20 이당(李唐)의 그림에 제()하다.

21 천산엽기도(天山獵騎圖) 발문

22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발문

23 관재(觀齋)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24 일수재(日修齋)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25 담헌(湛軒)이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26 우인(友人)의 국화시(菊花詩) 시축(詩軸)에 제()하다

27 효자 증 사헌부 지평 윤군(尹君) 묘갈명(墓碣銘)

28 양 호군(梁護軍) 묘갈명

29 취묵와(醉黙窩) 김군(金君) 묘갈명

30 운봉 현감(雲峯縣監) 최군(崔君) 묘갈명

 

 

 

자서(自序)

 

, 포희씨(庖犧氏)가 죽은 뒤로 그 문장(文章)이 흩어진 지 오래다. 그러나 벌레의 촉수(觸鬚), 꽃술, 석록(石綠), 비취(翡翠)의 깃털에 이르기까지도 그 문장의 정신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으며, 솥 발, 병 허리, 해 고리, 달 시울에도 그 자체(字體)가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바람과 구름, 천둥과 번개, 비와 눈, 서리와 이슬 및 새와 물고기, 짐승과 곤충 등이 웃고 울고 지저귀는 소리에도 성() · () · () · ()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을 읽지 않으면 그림을 알지 못하고, 그림을 알지 못하면 글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포희씨가 주역을 만들 적에 위로는 하늘을 살피고 아래로 땅을 관찰하여 홀수인 양효(陽爻)와 짝수인 음효(陰爻)를 배가한 것에 불과하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그림이 되었으며, 창힐씨(蒼頡氏)가 문자를 만들 적에도 사물의 정()과 형()을 곡진히 살펴서 상()과 의()를 전차(轉借)한 것에 불과하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에도 소리가 있는가?

이윤(伊尹)이 대신(大臣)으로서 한 말과 주공(周公)이 숙부(叔父)로서 한 말을 내가 직접 듣지는 못했으나 글을 통해 그 목소리를 상상해 보면 아주 정성스러웠을 것이며, 아비에게 버림받은 백기(伯奇)의 모습과 기량(杞梁)의 홀로된 아내의 모습을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글을 통해 그 목소리를 상상해 보면 아주 간절하였을 것이다.

글에도 빛깔이 있는가?

시경(詩經)에도 있듯이, “비단 저고리를 입으면 엷은 덧저고리를 입고, 비단 치마를 입으면 엷은 덧치마를 입는다네.衣錦褧衣 裳錦褧裳라 하고, “검은 머리 구름 같으니, 달비도 필요 없네.鬒髮如雲 不屑髢也라고 노래한 것이 그 예이다.

어떤 것을 정()이라 하는가?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이 푸르고 산이 푸른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을 경()이라 하는가?

멀리 있는 물은 물결이 없고 멀리 있는 산은 나무가 없고 멀리 있는 사람은 눈이 없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요 공수(拱手)하고 있는 사람은 듣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늙은 신하가 어린 임금에게 고할 때의 심정과, 버림받은 아들과 홀로된 여인의 사모하는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함께 소리를 논할 수 없으며, 글에 시적인 구상(構想)이 함께 없으면 시경 국풍(國風)의 빛깔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이별을 겪지 못하고 그림에 고원한 의취(意趣)가 없다면 글의 정()과 경()을 함께 논할 수 없다. 벌레의 촉수나 꽃술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문장의 정신이 전혀 없을 것이요, 기물(器物)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글자를 한 자도 모르는 사람이라 말해도 될 것이다.

 

 

[D-001]포희씨(庖犧氏) …… 오래다 : 포희는 복희(伏羲)라고도 하며, 태곳적 중국의 삼황(三皇) 중의 한 사람이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 포희가 천지를 관찰하여 팔괘(八卦)로 된 최초의 ()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 문장이 흩어진 지 오래다라는 것은, 포희가 팔괘와 각 효()를 풀이한 문장繫辭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D-002]석록(石綠) : 공작석(孔雀石)이라고도 한다. 녹청색의 아름다운 광물로 장식품이나 안료(顔料)로 쓰인다.

[D-003]비취(翡翠)의 깃털 : 원문은 羽翠인데, ‘翠羽와 같은 뜻이 아닌가 한다. 비취는 물총새로 아름다운 녹색 깃털을 지녔는데, 귀중한 물건으로 여겨져 장식품으로 쓰인다.

[D-004]솥 발 …… 남아 있다 : 솥 정() 자는 솥의 세 발을 상형(象形)으로 나타낸 것이고, 병 호() 자는 병의 허리 부분을 상형으로 나타낸 것이고, 해 일() 자는 해의 둥근 고리 모양을 상형으로 나타낸 것이고, 달 월() 자는 달의 휜 가장자리인 시울을 상형으로 나타낸 것이라는 뜻이다.

[D-005]사물의 …… 전차(轉借) : 한자(漢字)의 조자(造字) 방법인 육서(六書)’를 가리킨다. 사물의 정()과 형()을 곡진히 살펴서 글자를 만든 것은 지사(指事) 및 회의(會意)와 상형(象形), ()과 의()를 전차한 것은 형성(形聲) 및 전주(轉注)와 가차(假借)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D-006]이윤(伊尹) ……  : 탕왕(湯王)이 죽고 그의 아들 태갑(太甲)이 왕이 되자 이윤이 어린 왕을 훈도하는 글을 올렸다. 서경(書經) 이훈(伊訓) · 태갑(太甲) · 함유일덕(咸有一德) 등은 이를 기록한 것이다.

[D-007]주공(周公) ……  : 무왕(武王)이 죽고 그의 아들 성왕(成王)이 왕이 되자 무왕의 아우인 주공 단()이 어린 왕에게 안일(安逸)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훈계하였다. 서경 무일(無逸)은 이를 기록한 것이다.

[D-008]아비에게 버림받은 백기(伯奇) : () 나라 선왕(宣王)의 신하인 윤길보(尹吉甫)의 아들 백기가 계모(繼母)의 모함을 받아 쫓겨나게 되자 이상조(履霜操)’라는 노래를 지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樂府詩集 琴曲歌辭1

[D-009]기량(杞梁)의 홀로된 아내 : 춘추 시대 제() 나라 대부인 기량이 전사(戰死)하자 그의 아내가 슬퍼하면서 목놓아 크게 울다 강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녀의 여동생이 언니의 이러한 죽음을 애도하여 기량처(杞梁妻)’라는 노래를 지었다. 古今注 音樂

[D-010]비단 저고리를 …… 입는다네 : 시경 정풍(鄭風) ()에 나온다.

[D-011]검은 머리 …… 필요 없네 : 시경 용풍(鄘風) 군자해로(君子偕老)에 나온다. 달비는 여자들이 머리를 장식하기 위해 덧넣은 가발로서 다리라고도 한다.

[D-012]새가 …… 말한다 : () 나라 현종(玄宗)이 양 귀비(楊貴妃)와 사별(死別)한 뒤에, “새가 울고 꽃이 지며 물이 푸르고 산이 푸르니鳥啼花落 水綠山靑 더욱 슬프다고 탄식했다 한다. 여기에서는 花落 花開로 고쳐 인용한 것이다. 說郛 卷111下 楊太眞外傳下

[D-013]멀리 …… 없다 : 산수화에서 원경(遠景)을 간략하게 그리는 수법을 말한 것이다. 왕유(王維)의 산수론(山水論)이나 형호(荊浩)의 화산수부(畵山水賦)에 유사한 구절이 있다.

[D-014]고원한 의취(意趣) : 왕유는 산수론에서 산수를 그릴 때 의취가 붓질보다 우선한다.凡畵山水 意在筆先고 하여, 원경(遠景)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원의(遠意)를 표현할 것을 강조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낭환집서(蜋丸集序)

 

 

자무(子務)와 자혜(子惠)가 밖에 나가 노니다가 비단옷을 입은 소경을 보았다. 자혜가 서글피 한숨지으며,

 

, 자기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기 눈으로 보지를 못하는구나.”

하자, 자무가,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자와 비교하면 어느 편이 낫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청허선생(聽虛先生)에게 함께 가서 물어보았더니, 선생이 손을 내저으며,

 

나도 모르겠네, 나도 몰라.”

하였다.

옛날에 황희(黃喜) 정승이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 딸이 맞이하며 묻기를,

 

아버님께서 이를 아십니까? 이는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옷에서 생기지요?”

하니,

 

그렇단다.”

하므로 딸이 웃으며,

 

내가 확실히 이겼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며느리가 묻기를,

 

이는 살에서 생기는 게 아닙니까?”

하니,

 

그렇고 말고.”

하므로 며느리가 웃으며,

 

아버님이 나를 옳다 하시네요.”

하였다. 이를 보던 부인이 화가 나서 말하기를,

 

누가 대감더러 슬기롭다고 하겠소. 송사(訟事)하는 마당에 두 쪽을 다 옳다 하시니.”

하니, 정승이 빙그레 웃으며,

 

딸아이와 며느리 둘 다 이리 오너라. 무릇 이라는 벌레는 살이 아니면 생기지 않고, 옷이 아니면 붙어 있지 못한다. 그래서 두 말이 다 옳은 것이니라. 그러나 장롱 속에 있는 옷에도 이가 있고, 너희들이 옷을 벗고 있다 해도 오히려 가려울 때가 있을 것이다. 땀 기운이 무럭무럭 나고 옷에 먹인 풀 기운이 푹푹 찌는 가운데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은, 옷과 살의 중간에서 이가 생기느니라.”

하였다.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말을 타려고 하자 종놈이 나서며 말하기를,

 

나으리께서 취하셨군요. 한쪽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른 한쪽에는 짚신을 신으셨으니.”

하니, 백호가 꾸짖으며

 

길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길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내가 뭘 걱정하겠느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논할 것 같으면, 천하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발만 한 것이 없는데도 보는 방향이 다르면 그 사람이 가죽신을 신었는지 짚신을 신었는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의 중간에 있다. 예를 들어 땀에서 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은미하여 살피기 어렵기는 하지만, 옷과 살 사이에 본디 그 공간이 있는 것이다.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으며,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라 할 것이니, 누가 그 중간을 알 수가 있겠는가.

말똥구리蜣蜋는 자신의 말똥을 아끼고 여룡(驪龍)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여룡 또한 자신에게 구슬이 있다 하여 말똥구리의 말똥蜋丸을 비웃지 않는다.

자패(子珮)가 이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로써 내 시집(詩集)의 이름을 붙일 만하다.”

하고는, 드디어 그 시집의 이름을 낭환집(蜋丸集)’이라 붙이고 나에게 서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내가 자패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정령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돌아왔으나 아무도 그가 정령위인지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격이 아니겠는가. 태현경(太玄經)이 크게 유행하였어도 이 책을 지은 자운(子雲 양웅(揚雄))은 막상 이를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소경이 비단옷을 입은 격이 아니겠는가. 이 시집을 보고서 한편에서 여룡의 구슬이라 여긴다면 그대의 짚신을 본 것이요, 한편에서 말똥으로만 여긴다면 그대의 가죽신을 본 것이리라. 남들이 그대의 시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정령위가 학이 된 격이요, 그대의 시가 크게 유행할 날을 스스로 보지 못한다면 이는 자운이 태현경을 지은 격이리라. 여룡의 구슬이 나은지 말똥구리의 말똥이 나은지는 오직 청허선생만이 알고 계실 터이니 내가 뭐라 말하겠는가.”

하였다.

 

 

[C-001]낭환집서(蜋丸集序) : 유득공(柳得恭)의 숙부인 유연(柳璉 : 1741~1788) 기하실시고략(幾何室詩藁略)에는 길강전서(蛣蜣轉序)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자구상 약간 차이가 있으나, 동일한 작품이다. 길강전(蛣蜣轉)은 유연의 시고(詩藁)로서, 다름 아닌 낭환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낭환집서에서 낭환집의 작자로 소개되어 있는 자패(子珮)는 곧 유연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계명대학교 김윤조(金允朝) 교수의 조언에 의거한 것이다.

[D-001]자무(子務)와 자혜(子惠) : 자무는 이덕무(李德懋)의 자()인 무관(懋官), 자혜는 유득공(柳得恭)의 자인 혜풍(惠風)에서 따온 이름인 듯하다.

[D-002]비단옷 ……  : 항우(項羽)가 진 시황의 아방궁을 함락하고 나서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으니, 누가 알아줄 것인가. 富貴不歸故鄕 如衣繡夜行 誰知之者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史記 卷7 項羽本紀

[D-003]여룡(驪龍)의 구슬 : 여룡은 검은 빛깔의 흑룡을 말한다. 용의 턱밑에는 여의주(如意珠)라는 영묘한 구슬이 있다고 한다.

[D-004]말똥구리蜣蜋 …… 않는다 :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63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螗蜋自愛滾丸 不羨驪龍之如意珠 驪龍亦不以如意珠 自矜驕而笑彼蜋丸이라 하여 거의 똑같은 구절이 있다.

[D-005]정령위(丁令威) …… 못하였으니 : 정령위는 한() 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으로 신선이 된 지 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고향을 찾아갔으나, 그가 학이 되어 화표주(華表柱)에 앉은 줄을 모르는 한 젊은이가 활로 쏘려고 했으므로 탄식하며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搜神後記 卷1

[D-006]짚신 : 연암 후손가 소장 필사본 및 기하실시고략 길강전서에는 가죽신으로 되어 있다.

[D-007]가죽신 : 연암 후손가 소장 필사본 및 기하실시고략 길강전서에는 짚신으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녹앵무경서(綠鸚鵡經序)

 

 

낙서(洛瑞 이서구(李書九))가 푸른 앵무새를 얻었는데, 지혜로울 듯하다가도 지혜로워지지 않고 깨우칠 듯하다가도 깨우쳐지지 않기에, 새장 앞으로 가서 눈물을 흘리며, “네가 말을 못하면 까마귀烏鴉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나야말로 동이(東夷)로구나   자가 이본에는  자로 되어 있다.  하니, 갑자기 앵무새의 총기가 트였다. 이에 녹앵무경(綠鸚鵡經)을 짓고 나에게 그 서문을 청해 왔다.

내가 일찍이 흰 앵무새의 꿈을 꾸고서 박수무당을 불러다 꿈 이야기를 들려준 후 점을 쳐 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내 평소에 꿈을 꾸는데, 꿈에서는 밥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꿈에서는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꿈에서는 악취를 맡아도 더럽지 않고, 꿈에서는 향내를 맡아도 향기롭지 않고, 꿈에서는 힘을 써도 강해지지 않고, 꿈에서는 불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네. 혹은 용()이 하늘을 날기도 하고, 혹은 봉황이나 기린이나 귀물(鬼物)이나 이수(異獸)들이 뒤섞이어 달리고 쫓곤 하지. 눈 넷 달린 신장(神將)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입이 등 위에 있고, 이빨에는 칼이 물려져 있고, 손에도 눈이 있으며, 작은 눈에 작은 귀, 큰 입에 큰 코를 가지고 있지. 또 큰 바다에 파도가 넘실대기도 하고 푸른 산이 불에 타기도 하며, 일월(日月)과 성신(星辰)이 내 몸을 휘감아 에워싸기도 하고 천둥과 번개에 놀라 식은땀이 흐르기도 하고, 높은 하늘에 올라 빛나는 구름을 타기도 하지. 9층 누대에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아름다운 단청(丹靑)과 유리 창문에 아름다운 여인들이 눈웃음 지으며 즐거워하고 절묘한 노랫소리 맑게 드날리니 피리 젓대 어우러져 반주하기도 하네. 혹은 매미 날개마냥 몸이 가벼워져 나뭇잎에 붙기도 하고, 지렁이와 싸우기도 하고, 맹꽁이와 함께 웃기도 하며或助蛙笑〕 -  자가 이본에는  자로 되어 있다 , 혹은 담벼락을 뚫고 들어가니 바로 널찍한 집이 있기도 하고, 혹은 높은 손이 되어 큰 깃발과 작은 깃발, 대장기(大將旗)를 휘날리며, 큰 파초선(芭蕉扇)을 받친 초거(軺車)가 백 채나 되기도 한다네. 무슨 망상(妄想)이 이와 같이 뒤죽박죽 나타난단 말인가?”

하니, 박수무당이 큰 소리로 외치며 말하기를,

 

온몸이 덜덜 떨리는구나. 죄를 받을까봐 두렵다. 너는 잘 생각해 보아라. 네가 연단(鍊丹)을 하게 되면 공기 속의 진기(眞氣)만 들이마시고 아무런 음식도 필요치 않게 될 것이며, 점차 가족도 싫어져 집도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저 바위 밑에 거처하면서 아내와 자식을 다 버리고 친구마저 이별하며, 하루아침에 몸이 가벼워져 어깨에는 도토리 나뭇잎을 걸치고 허리에는 범 가죽을 두른 채, 아침에는 창해(滄海)에서 노닐고 저녁에는 곤륜산(崑崙山)에서 노닐다가 그 이튿날 낮이나 저녁이 되어 잠시 만에 돌아오는데, 그 사이에 이미 천 년이 지나기도 하고 혹은 팔백 년이 지나기도 한다. 저렇듯이 오래 사는 것을 이름하여 신선(神仙)이라 한다. 그렇게 되면 다시 어찌할 텐가?”

하였다. 나는 바로 마다하며,

 

이것도 하나의 망상이다. 천 년이나 팔백 년이 아침저녁으로 노니는 사이에 지나가 버리다니 어찌 그리 짧은 건가. 내가 장생(長生)한들 누가 다시 나를 알아보겠으며, 어느 친구가 있어 내가 나인 줄 알아보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다행스럽게 옛집이 허물어지지 않고 마을도 예전 그대로 있으며 자손도 번성하여 8, 9대 또는 10대에 이른다 한들, 내가 내 집에 돌아가면 대문에 들어설 때 잠깐 기쁠 뿐이고 다시금 슬퍼질 것이다. 한동안 앉아 있다가 가는 목소리로 집안사람들에게 살짝 이르기를, 동산 뒤에 있는 배나무와 부엌에 있는 크고 작은 솥들이며 진주(眞珠)와 보당(寶璫)에 대하여 어떤 게 있고 어떤 게 없는지를 말하여, 그 말이 조금씩 맞아떨어지게 되면, 자손들이 크게 성을 내면서, 저기 어떤 망령된 늙은이냐, 저기 어떤 미친 영감이냐, 저기 어떤 취한 놈이냐 하며 와서 나를 욕하고 지팡이로 나를 쫓아내며 몽둥이로 나를 몰아낼 터이니, 내가 어찌해야 하겠는가? 나를 증명할 만한 문서도 없으니 관청에 가서 소송한들 어찌하겠는가. 비유하자면 내가 꿈을 꾸는 것과 같아서, 내 꿈은 나만이 꿀 뿐 남들이 내 꿈을 꾸어 주지는 않으니 누가 내 꿈을 믿겠는가.”

하였다. 박수무당이 큰 소리로 외치며 말하기를,

 

온몸이 덜덜 떨리는구나. 죄를 받을까 봐 두렵다.”

하고는, 큰 자비심을 내어 탄식하기를,

 

네 말인즉 크게 맞는 말이다. 너도 알 것이다. 자손과 처첩이 잠시만 이별해 있어도 너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네가 그들을 연연해서 무엇하겠는가. 서방(西方)에 한 나라가 있으니 세계(世界)의 낙국(樂國)이다. 네가 고행(苦行)을 하여 수양을 혹독하게 하면, 그 나라에 왕생(往生)하여 삼재(三災)에서 벗어나고 줄칼에 쓸려 불에 타 죽는 것剉燒을 면할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 그렇게 되면 다시 어찌할 텐가?”

하였다. 나는 바로 마다하며,

 

이것도 하나의 망상이다. 이미 왕생이라 말할진대 이승에서 죽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다비(茶毘)를 하여 뼛가루를 날려 버리는데 어찌 줄칼에 쓸려 불에 타 죽는 것을 면한다는 말인가. 지금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이렇게 각고의 고행을 하면서 저 내세(來世)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깜깜하고 아득한 그곳이 극락임을 누가 알겠는가. 만약에 내세의 세계가 극락임을 안다면 어찌하여 이승에서는 전생을 모른단 말인가.”

하였다.

이를 듣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진짜 신선이나 부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닐세. 신선은 신령스럽고 부처는 지혜로운 존재인데 앵무새가 그러한 본성을 지녔으니, 이는 박수무당이 앵무새가 신령스럽고 지혜로워 사람의 말을 잘하는 것을 점친 것일세. 그대의 문장이 앞으로 날로 진보함이 있을 것이네.”

하였다.

! 그 일이 있은 후로 지금 18년이 지났는데 나의 도덕은 날이 갈수록 졸렬해지고 문장은 조금도 진보되지 못했으며, 어리석은 마음과 망상은 꿈을 꾸지 않을 때도 꿈을 꿀 때와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녹앵무경을 보니 앵무새의 둥근 혀와 갈라진 발가락이 완연히 꿈에서 본 것과 같으며, 신령한 본성으로 신묘하게 알아듣고 지혜로운 말이 구슬 구르듯 하여, 신선의 신령함과 부처의 지혜로움을 다했다 할 것이다. 박수무당의 해몽은 아마도 이 점을 두고 한 말이리라.

 

 

[D-001]지혜로울 …… 않기에 : 푸른 앵무새가 스스로 말을 하거나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형(禰衡)의 앵무부(鸚鵡賦) 본성이 지혜로워서 말을 할 줄 알며, 재주가 총명하여 기미를 알아챈다.性辯慧而能言兮 才聰明而識機고 하였다. 文選 卷31

[D-002]까마귀烏鴉 : 이본에는 까치烏鵲로 되어 있다.

[D-003]네 말을 …… 동이(東夷)로구나 : 중국에서 수입된 앵무새이기에 중국어를 하는 앵무새의 말을 자신은 동이(東夷) 즉 조선인이라서 알아듣지 못한다는 자조적(自嘲的) 표현이다. 원문에서는 오랑캐라는 뜻의  자를 기휘(忌諱)하여  자로 바꾸어 놓았다. 원주(原註)는 이 점을 시사하고 있다.

[D-004]녹앵무경(綠鸚鵡經) : 이서구가 북경(北京)에서 수입된 푸른 앵무새를 접한 것을 계기로, 영조 46(1770)에 앵무새에 관한 각종 문헌 기록들을 모아 편찬했다는 책이다. 불리비조편(不離飛鳥編)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그 내용의 일부가 이규경(李圭景)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48 앵무변증설(鸚鵡辨證說)에 전하고 있다. 또한 이규경의 시가점등(詩家點燈)에도 녹앵무경서와 그에 대한 평()이 실려 있다.

[D-005]이수(異獸) : 이본에는 귀수(鬼獸)’로 되어 있다.

[D-006]신장(神將) : 무속(巫俗)에서 잡귀나 악신을 물리친다는 장수신(將帥神)을 말한다.

[D-007]절묘한 …… 드날리니 : 원문은 妙肉淸颺으로, 반주 없이 부르는 노래를 육성(肉聲) 또는 청창(淸唱)이라 한다.

[D-008]맹꽁이와 …… 하며 : ‘웃기도 하며는 원주에 따라 울기도 하며로 고쳐야 옳다. 조객(弔客)이 오면 상주(喪主)가 사람을 시켜 조객과 함께 곡하도록 하는 것을 조곡(助哭)’이라 한다.

[D-009]삼재(三災) : 불교 용어로, 계산할 수 없는 긴 세월인 겁()의 말년에 일어나는 세 가지 재해를 말한다. 도병재(刀兵災) · 역병재(疫病災) · 기근재(饑饉災)의 소삼재(小三災)가 있고 화재(火災) · 수재(水災) · 풍재(風災)의 대삼재(大三災)가 있다고 한다.

[D-010]줄칼에 ……  : 좌골소신(剉骨燒身)을 말한다. 뼈가 줄칼에 쓸려 가루가 되고 육신이 뜨거운 불에 타는 지옥의 형벌이다.

[D-011]그대의 …… 것이네 : 연암이 흰 앵무새의 꿈을 꾼 것은, 말 잘하는 앵무새처럼 문인으로서 대성할 것을 예언한 것이라는 뜻이다.

[D-012]나의 …… 못했으며 : 문학은 도()를 전달해야 하며, 문인은 글쓰기에 앞서 도덕에 힘써야 한다는 문이재도(文以載道)’ 도문일치(道文一致)’의 문학관을 전제로 한 말이다.

[D-013]갈라진 발가락 : 앵무새는 앞 발가락이 2, 뒷 발가락이 2개로 갈라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五洲衍文長箋散稿 卷48 鸚鵡辨證說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우부초서(愚夫艸序)

 

 

상말도 알고 보면 모두가 고상한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 여염(閭閻)에서는 부스럼을 가리켜 곤데라 하고 식초를 단 것이라고 한다. 어린 계집애가 마을의 할멈이 단 것을 판다는 말을 듣자 그것이 꿀이라 생각하고, 어머니 어깨에 매달려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에이, 시다. 어째서 단 것이라고 하는 거야?”

하니, 그 어미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라는 것이로구나. 무릇 예라는 것은 인정(人情)에서 연유된 것이다. 매실(梅實)이란 말만 들어도 저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인다. 그러므로 식초를 음식에 치기 전에는 오히려 그것이 시다고 말하기를 꺼린다. 하물며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부스럼보다 더 더럽게 여기는 것에 있어서랴.”

이에 사소전(士小典)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무릇 귀가 먹어 들리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귀머거리라 부르지 않고 소곤대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며, 눈이 흐려 보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장님이라 부르지 않고 남의 흠집을 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며, 혀가 굳고 목소리가 막혀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벙어리라 부르지 않고 남 비평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등이 굽고 가슴이 튀어나온 사람鉤背曲胸 곱사등이을 가리켜 아첨하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며, 혹이 달린 사람을 가리켜 중후함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고 한다. 심지어 네 발가락이나 여섯 손가락, 절름발이나 앉은뱅이처럼 비록 육체는 병신이지만 덕()에는 해가 될 것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오히려 둘러대어 말할 것을 생각하고 곧바로 지적하여 말하는 것을 꺼린다. 하물며 이른바 어리석다고 하는 말은 소인(小人)의 덕이요, 변화될 수도 없는 성품임에 있어서랴. 천하에 치욕스러움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그런데 여경(汝京 유언호(兪彦鎬)) 같은 총명과 예지를 갖춘 사람이 그 어리석음을 자처하고 스스로 우부(愚夫)’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웬일인가?

그의 문집인 연석(燕石)을 읽어 보았더니 기휘(忌諱)에 저촉되고 혐노(嫌怒)를 범한 것이 퍽이나 많았다. 백가(百家)의 장점을 포용하고 만물(萬物)을 다 감싸 안아 그 정상(情狀)을 터득한 것이 마치 무소뿔에 불을 붙여 비추어 보고 구정(九鼎)에다 그림을 그려 넣은 것과 같았으며, 그 미묘한 데에서 변화하는 것은 알에서 털이 돋기 시작하고 매미의 날개가 돋아나려는 것과 같아서, 운기(雲氣)와 돌고드름까지도 만져 볼 수 있으며 벌레의 촉수와 꽃술까지도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직설적으로 지적하여 말하는 것이 어찌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라 부르는 정도뿐이겠으며, 원망과 노여움을 사게 되는 것이 또한 어찌 식초의 신맛에 얼굴을 찡그리는 정도뿐이겠는가. 사람의 노여움을 범하는 것도 오히려 피해야 하거늘 하물며 조물주가 꺼리는 바이겠는가.

무릇 이러한 것을 두려워한다면, 총명(聰明)과 혜지(慧智)와는 반대로 행동하여 자신을 숨기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며, 세상 사람들에게도 또한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게 한다거나 입에서 군침이 돌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아!

 

 

[C-001]우부초서(愚夫艸序) : 유언호(兪彦鎬)의 문집인연석(燕石)에 써 준 서문인 연석서(燕石序)와 거의 같은 글이다. 연석서의 말미에 을미년(1775, 영조 51) 12월에 지었다고 밝혔다.

[D-001]부스럼을 …… 하고 : 원문은 指癤爲麗, 홍기문(洪起文) 선생은 서울 방언에서 부스럼을 곤데라고 하는 것은 곪았다는 의미인 곪은 데요 곱다는 의미인 고운 데가 아닐 것이라고 하면서 지절위려(指癤爲麗)’의 그릇된 해석은 연암의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 하였다. 홍기문의 朴燕巖 藝術 思想(조선일보, 1937. 7. 29) 참고.

[D-002]사소전(士小典) : 연암이 연석서를 쓴 영조 51 12월에 이덕무는 사전(士典)  3편으로 구성된 사소절(士小節) 8책을 완성하였다. 사소전은 이 사소절과 같거나 유사한 책이 아닌가 한다.

[D-003]마치 …… 같았으며 : () 나라 사람인 온교(溫嶠)가 무소뿔을 태워 물속을 비추어 보았더니 괴물들이 모조리 정체를 드러냈다는 전설이 있다. 異苑 卷7 () 나라 때에는 구정(九鼎)에다 온갖 사물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백성들이 괴물들을 익히 알아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宣公3 두 가지 비유 모두 사물에 대한 통찰이 비범한 경우를 뜻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

 

 

달관한 사람에게는 괴이한 것이 없으나 속인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으면 괴이하게 여기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관한 사람이라 해서 어찌 사물마다 다 찾아 눈으로 꼭 보았겠는가.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눈앞에 그려 보고, 열 가지를 보면 백 가지를 마음속에 설정해 보니, 천만 가지 괴기(怪奇)한 것들이란 도리어 사물에 잠시 붙은 것이며 자기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마음이 한가롭게 여유가 있고 사물에 응수함이 무궁무진하다.

본 것이 적은 자는 해오라기를 기준으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기준으로 학을 위태롭다고 여기니, 그 사물 자체는 본디 괴이할 것이 없는데 자기 혼자 화를 내고, 한 가지 일이라도 자기 생각과 같지 않으면 만물을 모조리 모함하려 든다.

,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유금(乳金) 빛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석록(石綠) 빛을 반짝이기도 하며,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튀어 올라 눈이 어른거리다가 비췻빛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 새에게는 본래 일정한 빛깔이 없거늘, 내가 눈으로써 먼저 그 빛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으리오. 보지 않고서 먼저 그 마음으로 정한 것이다.

, 까마귀를 검은색으로 고정 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또다시 까마귀로써 천하의 모든 색을 고정 지으려 하는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하지만,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른빛과 붉은빛이 그 검은 빛깔 안에 들어 있는 빛인 줄 알겠는가. 검은 것을 일러 어둡다 하는 것은 비단 까마귀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 빛깔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은 검기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옻칠은 검기 때문에 능히 거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빛깔이 있는 것치고 빛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형체가 있는 것치고 맵시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미인(美人)을 관찰해 보면 그로써 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고개를 나직이 숙이고 있는 것은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턱을 고이고 있는 것은 한스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홀로 서 있는 것은 누군가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눈썹을 찌푸리는 것은 시름에 잠겨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 있으면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바라는 것이 있으면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만약 다시 그녀에게 서 있는 모습이 재계(齋戒)하는 것처럼 단정하지 않다거나 앉아 있는 모습이 소상(塑像)처럼 부동자세를 취하지 않는다고 나무란다면, 이는 양 귀비(楊貴妃)더러 이를 앓는다고 꾸짖거나 번희(樊姬)더러 쪽을 감싸 쥐지 말라고 금하는 것과 마찬가지며, ‘사뿐대는 걸음걸이蓮步를 요염하다고 기롱하거나 손바닥춤掌舞을 경쾌하다고 꾸짖는 것과 같은 격이다.

나의 조카 종선(宗善)은 자()가 계지(繼之)인데 시()를 잘하였다. 한 가지 법에 얽매이지 않고 온갖 시체(詩體)를 두루 갖추어, 우뚝이 동방의 대가가 되었다. 성당(盛唐)의 시인가 해서 보면 어느새 한위(漢魏)의 시체를 띠고 있고 또 어느새 송명(宋明)의 시체를 띠고 있다. 송명의 시라고 말하려고 하자마자 다시 성당의 시체로 돌아간다.

, 세상 사람들이 까마귀를 비웃고 학을 위태롭게 여기는 것이 너무도 심하건만, 계지의 정원에 있는 까마귀는 홀연히 푸르렀다 홀연히 붉었다 하고, 세상 사람들이 미인으로 하여금 재계하는 모습이나 소상처럼 만들려고 하지만, 손바닥춤이나 사뿐대는 걸음걸이는 날이 갈수록 경쾌하고 요염해지며 쪽을 감싸 쥐거나 이를 앓는 모습에도 각기 맵시를 갖추고 있으니, 그네들이 날이 갈수록 화를 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세상에 달관한 사람은 적고 속인들만 많으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쉬지 않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아!

연암노인(燕巖老人)이 연상각(烟湘閣)에서 쓰노라.

 

 

[D-001]오리를 …… 여기니 : 다리가 짧은 오리가 다리가 긴 학을 넘어지기 쉽다고 비웃는다는 뜻이다. 부단학장(鳧短鶴長)이란 말이 있다. 장자(莊子) 변무(騈拇) 길다고 해서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며, 짧다고 해서 부족한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오리는 다리가 짧지만 그 다리를 이어 주면 걱정하고, 학은 다리가 길지만 그 다리를 자르면 슬퍼한다.”고 하였다.

[D-002]양 귀비(楊貴妃) : 당 나라 현종(玄宗)의 애첩이다. 양 귀비가 평소 치통을 앓았는데 그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를 그린 양귀비병치도(楊貴妃病齒圖)가 있다.

[D-003]번희(樊姬)더러 …… 말라고 : 번희는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영현(伶玄)의 애첩이었던 번통덕(樊通德)을 가리킨다. 영현이 번희에게 조비연(趙飛燕)의 고사를 이야기하자, 번희가 손으로 쪽을 감싸 쥐고 서글피 울었다고 한다. 이를 소재로 한 번희옹계(樊姬擁髻)라는 희곡도 있다. 趙飛燕外傳 附 伶玄自敍

[D-004]사뿐대는 걸음걸이蓮步 : () 나라 폐제(廢帝) 동혼후(東昏侯)가 금으로 연꽃을 만들어 땅에다 깔아 놓고 애첩인 반비(潘妃)로 하여금 그 위를 걸어가게 한 후 사뿐대는 걸음걸이를 보고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난다고 하였다. 南史 齊紀下 廢帝東昏侯

[D-005]손바닥춤掌舞 : 한 나라 때 유행한 춤으로 춤사위가 유연하고 경쾌하다. 한 나라 성제(成帝)의 황후인 조비연(趙飛燕)이 잘 추었다고 한다. 장상무(掌上舞) 또는 장중무(掌中舞)라고도 한다.

[D-006]종선(宗善) : 1759~1819. 연암의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의 서장자(庶長子)로 규장각 검서를 지냈다.

[D-007]연상각(烟湘閣) : 연암이 안의 현감(安義縣監) 시절 관아(官衙) 안에 지었다는 정각(亭閣) 중의 하나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북학의서(北學議序)

 

 

학문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한다. 심지어 동복(僮僕)이라 하더라도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더 많이 안다면 우선 그에게 배워야 한다. 자기가 남만 같지 못하다고 부끄러이 여겨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고루하고 어쩔 방법이 없는 지경에 스스로 갇혀 지내게 된다.

() 임금은 농사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는 일로부터 제()가 되기까지 남들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나는 젊었을 적에 미천했기 때문에 막일에 능한 것이 많았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막일 또한 농사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는 일 따위였을 것이다. 아무리 순 임금과 공자같이 성스럽고 재능 있는 분조차도, 사물에 나아가 기교를 창안하고 일에 임하여 도구를 만들자면 시간도 부족하고 지혜도 막히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순 임금과 공자가 성인이 된 것은 남에게 잘 물어서 잘 배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한쪽 구석 땅에서 편벽된 기운을 타고나서, 발은 대륙의 땅을 밟아 보지 못했고 눈은 중원의 사람을 보지 못했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을 때까지 제 강역(疆域)을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학의 다리가 길고 까마귀의 빛이 검듯이 각기 제가 물려받은 천성대로 살았고, 우물의 개구리나 밭의 두더지마냥 제가 사는 곳이 제일인 양 여기고 살아왔다. ()는 차라리 소박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누추한 것을 검소하다고 여겨 왔으며, 이른바 사민(四民 () · () · () · ())이라는 것도 겨우 명목만 남아 있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구는 날이 갈수록 빈약해져만 갔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배우고 물을 줄을 몰라서 생긴 폐단이다.

만일 장차 배우고 묻기로 할진대 중국을 놓아 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의 중국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은 오랑캐들이다.” 하면서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여, 중국의 옛법마저도 다 함께 얕잡아 무시해 버린다. 저들이 진실로 변발(辮髮)을 하고 오랑캐 복장을 하고 있지만, 저들이 살고 있는 땅이 삼대(三代) 이래 한(), (), (), ()의 대륙이 어찌 아니겠으며, 그 땅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삼대 이래 한, , , 명의 유민(遺民)이 어찌 아니겠는가. 진실로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아름다울진대 장차 오랑캐에게라도 나아가 배워야 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그 규모의 광대함과 심법(心法)의 정미(精微)함과 제작(制作)의 굉원(宏遠)함과 문장(文章)의 찬란함이 아직도 삼대 이래 한, , , 명의 고유한 옛법을 보존하고 있음에랴.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 나무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 말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본받아 행하겠는가.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재선(在先 박제가(朴齊家))이 그가 지은 북학의(北學議) 내편(內編)과 외편(外編)을 보여 주었다. 재선은 나보다 먼저 북경에 갔던 사람이다.

그는 농잠(農蠶), 목축(牧畜), 성곽(城郭), 궁실(宮室), 주거(舟車)로부터 기와, 대자리, ,  등을 만드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헤아리고 마음으로 비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물어보았고,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배웠다. 시험 삼아 책을 한 번 펼쳐 보니, 나의 일록(日錄 열하일기(熱河日記))과 더불어 조금도 어긋나는 것이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았다. 이러한 까닭에 그가 진실로 즐거운 마음으로 나에게 보여 준 것이요, 나도 흐뭇이 여겨 3일 동안이나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 이것이 어찌 우리 두 사람이 눈으로만 보고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진실로 비 뿌리고 눈 날리는 날에도 연구하고, 술이 거나하고 등잔불이 꺼질 때까지 토론해 오던 것을 눈으로 한번 확인한 것뿐이다. 요컨대 이를 남들에게 말할 수가 없으니, 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

 

 

[C-001]북학의서(北學議序) : 박제가의 북학의에 붙은 원래의 서문 말미에 신축년(1781, 정조 5) 중양절(重陽節)에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D-001]나는 …… 많았다 :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

[D-002]심법(心法) : 용심지법(用心之法)을 말한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청 나라 문물의 특장(特長)으로 대규모(大規模) 세심법(細心法)’ 즉 규모가 크고 심법이 세밀한 점을 들었다.

[D-003]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 연암은 정조 4(1780) 5월부터 10월까지 진하 겸 사은별사(進賀兼謝恩別使)의 일원으로 중국 북경을 다녀왔다.

[D-004]재선은 …… 사람이다 : 박제가는 정조 2(1778)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일원으로 이덕무와 함께 북경을 다녀온 뒤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

 

 

옛날에 승려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총명하고 영특하고 출중한 인물들이었다. 한번이라도 임금이 그의 계행(戒行)을 존경하고 불전(佛典)에 마음을 두어 그에게 호()를 내리고 예를 달리하여 빈객으로 대우하고 스승으로 맞아들이는 일이 있으면 당시의 사대부들 역시 모두가 그와 함께 어울리기를 즐겨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고행을 하며 숨어 지내고 조용히 있어도 도리어 부귀와 영화가 뒤따른다. 이것이 본디 불문(佛門)의 본분은 아니지만 불교를 권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의 언어와 문장이 찬란하여 볼 만하였다.

국조(國朝) 이래로 유교를 전적으로 숭상하여 사대부들이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데 엄격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스스로 체득하는 선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이른바 이단의 학설마저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그 황폐된 사찰에는 살고 있는 승려들이 여전히 끊이지 않고는 있으나, 모두 궁핍한 백성과 굶주린 종들로서 군역(軍役)을 도피하여 머리 깎고 검은 장삼을 입는 자들이라, 비록 이름은 승려라 하지만 어리석고 혼몽하여 눈으로는 글자 하나 보지 못하는 형편이니, 불교를 금지하지 않아도 그 도()가 거의 사라질 지경이다.

나는 항상 명산(名山)을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명산의 태반을 둘러보았다. 일찍이 특이한 중을 만나 방외(方外)의 교유를 해 보고자 생각하였으나, 산수(山水)에 등림(登臨)할 적마다 그들을 만나지 못해 쓸쓸히 배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친구인 신원발(申元發 신광온(申光蘊)) · 유사경(兪士京 유언호(兪彦鎬))과 어울려 백화암(白華菴)에서 함께 잔 적이 있었다. 그때 준()이란 중이 깊은 밤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불등(佛燈)은 밝게 빛나고 선탑(禪榻)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책상 위에는 반야심경(般若心經) 법화경(法華經) 등 여러 불경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준에게,

 

네가 불경을 좀 아느냐?”

하고 물었더니,

 

모릅니다.”

하고 사과하기에, 

 

네가 시율(詩律)을 알고 지을 줄 아느냐?”

하고 물었더니,

 

못합니다.”

하고 또 사과하였다. 그래서 또 묻기를,

 

이 산중에 더불어 교유할 만한 특이한 중이 있느냐?”

했더니, 대답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 이튿날 진주담(眞珠潭) 아래에 앉아서 일행끼리 말하기를,

 

준공(俊公)은 미목(眉目)이 청수(淸秀)하니, 만약 문자를 조금만 알았다면 시를 꼭 잘 짓지는 못하더라도 시축(詩軸)에 연서(聯書)할 정도는 될 것이요, 담론(談論)이 반드시 심오하지는 못하더라도 회포를 풀기에는 충분할 것이니, 어찌 우리들의 풍류를 돋우어 주지 않았겠는가.”

하면서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고 일어섰다.

이번에 풍악대사(楓嶽大師) 보인(普印)의 시문(詩文)을 보다가, 미처 다 보기도 전에 탄식하기를,

 

내가 지난번에 특이한 중을 만나서 방외의 교유를 해 보고자 했으면서도 인공(印公)을 놓쳤구나!”

하였다. 대체로 그는 내원통(內圓通)에서 수행을 하였는데, 그 시기가 바로 내가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던 때였다. 그의 문집을 보았더니 준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시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준은 확실히 그의 벗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보인(普印)이라는 특이한 중이 있다고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던가? 준이 아마도 나를 속인 것이리라. 나는 여기에서, 보인이 본디 고승이었으나 준이 과연 그를 위하여 말해 주지 않은 것임을 더욱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보건대, 준이 과연 시에도 능하고 불경의 담론에도 능한 자일 것이니, 준 역시 고승이었을 것이다. 나는 함께 놀았던 준도 몰라보고 놓쳤는데, 하물며 직접 보지도 못한 인공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불교를 권장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그 도()를 믿고 스스로 수행한 것이 이와 같다. 그렇다면 인공처럼 내가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나는 산에 있어서도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이 북으로는 장백산(長白山), 남으로는 지리산(智異山), 서로는 구월산(九月山)이 있다. 내 장차 두루 유람하여 혹시 그런 이를 한번 만나게 된다면 준공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우선 이 시집에다 서문을 지어 놓는 바이다.

 

 

[D-001]방외(方外)의 교유 : 세속의 예법에서 벗어나 승려나 도인(道人), 은자(隱者)들과 사귀는 것을 말한다.

[D-002]일찍이 …… 있었다 : 박종채(朴宗采) 과정록에 의하면, 연암은 1765(영조 41) 몇몇 친구들과 함께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였다.

[D-003]보인(普印) : 1701~1769. 호가 풍악(楓嶽)으로, 금강산의 내원통암(內圓通庵)에서 염불과 참선에 전념하다가 법랍(法臘) 51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이복원(李福源)이 지은 비가 금강산 유점사에 세워졌으며, 저서로 시문집인 풍악당집(楓嶽堂集) 1책이 전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유씨도서보서(柳氏圖書譜序)

 

 

연옥(連玉)은 인장(印章)을 잘 새겼다. 그는 돌을 쥐고 무릎에 받치고서 어깨를 비스듬히 하고 턱을 숙인 채, 눈을 깜빡이며 입으로 후후 불면서, 먹 자국에 따라 누에가 뽕잎 갉아먹듯 파 들어가는데 마치 실처럼 가늘면서도 획이 끊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모으고 칼을 밀고 나가는데 눈썹을 찡긋찡긋하며 힘을 쓰더니, 이윽고 허리를 받치고 하늘을 쳐다보며 !’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이 지나는 길에 들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위로하기를,

 

자네는 그 굳은 돌멩이를 새겨서 장차 무엇을 하려는 건가?”

하였더니, 연옥이 대답하기를,

 

무릇 천하의 모든 물건에는 각각 그 주인이 있고, 주인이 있으면 이를 증명할 신표가 있어야 하네. 그러기에 열 집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고을이나 백부장(百夫長)까지도 부절(符節)이나 인신(印信)이 있었던 것일세. 주인이 없으면 흩어져 버리고 신표가 없으면 어지러워지거든.

내가 무늬 있는 좋은 돌을 얻었는데 결이 반질반질하고 크기가 사방 한 치로 옥처럼 빛이 난다네. 손잡이 꼭지에다 쭈그리고 앉아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서 으르렁대는 사자를 새겨 놓으면, 나의 문방(文房 서재)을 지키고 문방의 사우(四友 종이, , , 벼루)를 보호할 걸세.  아조헌원 씨류명련(我祖軒轅氏柳名璉)’이라는 여덟 글자를 아름답고 우아하게 종정문(鍾鼎文)과 석고문(石鼓文)의 서체나 조전(鳥篆)과 운전(雲篆)의 서체로 새긴 다음, 서책에다 찍어서 나의 자손들에게 물려준다면 산일(散佚)될 우려가 없어 수백 권이라도 다 보전될 걸세.”

하였다. 무관(懋官)이 허허 웃으며,

 

그대는 화씨(和氏)의 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그야 천하의 지극한 보배이지.”

하므로,

 

그렇다네. 옛날 진 시황이 6국을 병합한 후 그 옥돌을 깨뜨려 도장을 만들었네. 위에는 푸른 용을 서려 두고 옆에는 움츠린 붉은 용을 새겨, 이것을 자신이 천자(天子)라는 증거물과 사해(四海)를 진정시키는 상징물로 삼고,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쌓아 지키게 하였네. 그러고는 하는 말이, ‘2, 3세로 내려가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무궁하게 전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연옥이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어린 아들을 무릎에서 밀쳐 내려 놓으며,

 

어찌 네 아비의 머리를 희게 만드느냐?”

하였다.

하루는 그가 전에 수집했던 고금의 인본(印本 인보(印譜))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그래도 예전에는 사관(史官)이 의심나는 내용은 적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러한 풍습이 없어졌다.” 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세태를 슬퍼한 것이다. 여기에 함께 적어 두어, 책을 빌려 주지 않는 사람을 깊이 경계하는 바이다.

 

 

[D-001]연옥(連玉) : 유연(柳璉 : 1741~1788)의 자이다. 유연은 유득공의 숙부로, 1776(영조 52) 연행(燕行)을 다녀오면서 이름을 유금(柳琴)으로 고쳤다.

[D-002]자네는 …… 새겨서 : 원문은 子之攻堅也인데 攻堅은 원래 견고한 곳을 공격한다는 뜻이다. 관자(管子) 제분(制分)에 용병술(用兵術)과 관련하여, 상대방의 견고한 곳을 공격하면 쉽사리 패배시킬 수 없으며, 틈이 있는 곳을 파고들어야 신속히 승리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무관의 말은 풍자의 어조를 띤 것이다.

[D-003]백부장(百夫長) : 천 명의 병졸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천부장(千夫長), 백 명의 병졸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백부장이라 하였다. 書經 牧誓

[D-004]새끼에게 …… 으르렁대는 : 새끼를 기르는 맹수를 유수(乳獸)라 한다. 맹수는 젖을 물려 새끼를 기르는 동안에는 평소보다 더욱 사납다.

[D-005]아조헌원 씨류명련(我祖軒轅氏柳名璉) : 유연의 본관은 문화(文化)인데, 문화 유씨의 시조 유차달(柳車達)은 원래 차씨(車氏)로서 차무일(車無一) 38세손이라고 한다. 차씨는 황제(黃帝) 헌원씨의 후손 사신갑(似辛甲)이 조선으로 망명한 뒤 그 후손이 차무일로 변성명함으로써 비롯되었으며, 신라 말에 유씨(柳氏)로 개성(改姓)하였다가, 고려 초에 유차달의 아들 중 장남이 차씨를 계승하고 연안(延安) 차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유연(柳璉) 기하실시고략(幾何室詩藁略)에 이와 같은 문화 유씨의 세계(世系)를 노래한 술계(述系)라는 시가 있다.

[D-006]종정문(鐘鼎文) …… 서체 : 종정문은 주로 주() 나라 때의 청동기에 새겨진 문자인 금문(金文)을 말하며, 석고문(石鼓文)은 현재 북경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보존되어 있는 북 모양의 돌에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조전(鳥篆)은 전체(篆體)의 고문자(古文字)로 모양이 새의 발자국과 흡사하다 해서 조적서(鳥迹書), 조서(鳥書)라고도 한다. 운전(雲篆) 역시 전체의 고문자로 필획이 구름 같다고 해서 운서(雲書)라고도 한다.

[D-007]사해(四海) …… 상징물 : 이와 유사한 것으로 진규(鎭圭)가 있다. 사방을 진정시킨다는 뜻으로 사방의 진산(鎭山)을 본떠 만든 천자의 홀()을 진규라고 한다.

[D-008]2 …… 전하라 : 진 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뒤 시법(諡法)을 없앨 것을 명하면서,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고 후세는 숫자로만 헤아려, 2, 3세라는 식으로 만세에 이르도록 무궁하게 전하라고 하였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D-009]그래도 …… 없어졌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수록된 원문을 보면 그래도 예전에는 사관(史官)이 의심나는 내용은 적지 않고 말을 가진 사람이 남에게 빌려 주어 타게 하는 풍습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한 풍습조차 없어졌다.吾猶及史之闕文也 有馬者借人乘之 今亡矣夫로 되어 있다. ‘有馬者借人乘之를 생략하였으나, 실은 생략된 부분에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 공자가 남에게 말을 빌려 주지 않는 야박한 세태를 비판했듯이, 연암은 남에게 책을 빌려 주지 않는 세태를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연암집 5 여인(與人) 참조.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영처고서(嬰處稿序)

 

 

자패(子佩 유연(柳璉))가 말했다.

 

비루하구나, 무관(懋官)이 시를 지은 것이야말로! 옛사람의 시를 배웠음에도 그와 비슷한 점을 보지 못하겠다. 털끝만큼도 비슷한 적이 없으니 어찌 그 소리인들 비슷할 수 있겠는가? 야인(野人)의 비루함에 안주하고 시속(時俗)의 자질구레한 것을 즐기고 있으니, 바로 오늘날의 시이지 옛날의 시는 아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크게 기뻐하여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시에서 살필 수 있는 점이다. 옛날을 기준으로 지금을 본다면 지금이 진실로 비속하기는 하지만, 옛사람들도 자신을 보면서 반드시 자신이 예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시를 살펴보던 사람 역시 그때에는 하나의 지금 사람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세월이 도도히 흘러감에 따라 풍요(風謠)도 누차 변하는 법이다. 아침에 술을 마시던 사람이 저녁에는 그 자리를 떠나고 없으니, 천추만세(千秋萬世)토록 이제부터 옛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는 것은 옛날과 대비하여 일컬어지는 이름이요, ‘비슷하다는 것은 그 상대인 저것과 비교할 때 쓰는 말이다. 무릇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비슷하기만 한 것이어서 저것은 저것일 뿐이요, 비교하는 이상 이것이 저것은 아니니, 나는 이것이 저것과 일치하는 것을 아직껏 보지 못하였다.

종이가 하얗다고 해서 먹이 이를 따라 하얗게 될 수는 없으며, 초상화가 아무리 실물과 닮았다 하더라도 그림이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사단(雩祀壇) 아래 도저동(桃渚洞)에 푸른 기와로 이은 사당이 있고, 그 안에 얼굴이 붉고 수염을 길게 드리운 이가 모셔져 있으니 영락없는 관운장(關雲長)이다. 학질(瘧疾)을 앓는 남녀들을 그 좌상(座牀) 밑에 들여보내면 정신이 놀라고 넋이 나가 추위에 떠는 증세가 달아나고 만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아무런 무서움도 없이 그 위엄스러운 소상(塑像)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데, 그 눈동자를 후벼도 눈을 깜짝이지 않고 코를 쑤셔도 재채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덩그러니 앉아 있는 소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보건대, 수박을 겉만 핥고 후추를 통째로 삼키는 자와는 더불어 그 맛을 말할 수가 없으며, 이웃 사람의 초피(貂皮) 갖옷을 부러워하여 한여름에 빌려 입는 자와는 더불어 계절을 말할 수가 없듯이, 관운장의 가상(假像)에다 아무리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워 놓아도 진솔(眞率)한 어린아이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무릇 시대와 풍속을 걱정하고 가슴 아파한 사람으로는 역사상 굴원(屈原)만 한 사람이 없는데도, () 나라 풍속이 귀신을 숭상했기 때문에 귀신을 노래한 구가(九歌)를 지었으며, () 나라는 진() 나라의 옛것에 의거하여 진 나라의 땅에서 황제가 되고 진 나라의 성읍에다 도읍을 정하고 진 나라의 백성을 백성으로 삼았으되, 약법삼장(約法三章)에 있어서는 진 나라의 법을 답습하지 않았다.

지금 무관(懋官)은 조선 사람이다. 산천과 기후가 중화(中華) 땅과는 다르고 언어와 풍속도 한당(漢唐)의 시대와 다르다. 그런데도 만약 작법을 중화에서 본뜨고 문체를 한당에서 답습한다면, 나는 작법이 고상하면 할수록 그 내용이 실로 비루해지고, 문체가 비슷하면 할수록 그 표현이 더욱 거짓이 됨을 볼 뿐이다.

우리나라가 비록 구석진 나라이기는 하나 이 역시 천승(千乘)의 나라요, 신라와 고려가 비록 검박(儉薄)하기는 하나 민간에 아름다운 풍속이 많았으니, 그 방언을 문자로 적고 그 민요에다 운()을 달면 자연히 문장이 되어 그 속에서 참다운 이치眞機가 발현된다. 답습을 일삼지 않고 빌려 오지도 않으며, 차분히 현재에 임하여 눈앞의 삼라만상을 마주 대하니, 오직 이 시가 바로 그러하다.

, 시경에 수록된 삼백 편의 시는 조수(鳥獸)와 초목(草木)의 이름을 들지 않은 것이 없고, 여항(閭巷)의 남녀가 나눈 말들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패국(邶國)과 회국(檜國) 사이에는 지리적으로 풍토가 같지 않고, 강수(江水)와 한수(漢水) 유역에는 백성들이 그 풍속을 각기 달리하므로, 시를 채집하는 사람이 열국(列國)의 국풍(國風)으로 만들어 그 지방 백성들의 성정(性情)을 고찰하고 그 풍속을 파악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무관(懋官)의 이 시가 예스럽지 않은 점에 대해 어찌 다시 의아해하겠는가. 만약 성인(聖人)이 중국에 다시 나서 열국의 국풍을 관찰한다면,  영처고(嬰處稿)를 상고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될 것이고, 우리나라 남녀의 성정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를 조선의 국풍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D-001]이것이야말로 …… 점이다 : 원문은 此可以觀인데,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시경(詩經)의 시로써 풍속의 성쇠(盛衰) 살필 수 있다.可以觀고 하였다.

[D-002]옛날을 …… 따름이다 : 옛날을 이상화하고 지금을 말세로 여기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의 복고적 사상을 비판한 말이다.

[D-003]우사단(雩祀壇) : 서울 남산 서편 기슭에 있었던 기우제 지내던 단()이다. 사방이 40척이고, 구망(句芒), 축융(祝融), 후토(后土), 욕수(蓐收), 현명(玄冥), 후직(后稷)을 모셨다. 유월 상순에 제사를 드렸다. 남관왕묘(南關王廟)가 그 부근인 남대문 밖 도저동(桃渚洞)에 있었는데 선조(宣祖) 때 명 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세웠다고 한다.

[D-004]구가(九歌) : 태일신(太一神)인 동황태일(東皇太一), 구름신인 운중군(雲中君), 상수(湘水)의 신인 상군(湘君),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상부인(湘夫人) 등 귀신들을 노래한 11수로 되어 있다.

[D-005]약법삼장(約法三章) : 한 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진 나라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한 뒤, 진 나라의 가혹하고 번다한 법률 대신 삼장(三章), 즉 살인자는 죽이고 상해자와 도적은 처벌한다는 세 가지 법만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史記 卷8 高祖本紀

[D-006]실로 : 원문은 로 되어 있는데, 이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07]시경 …… 없고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시경(詩經)의 시를 공부하면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D-008]여항(閭巷) …… 않는다 : 주자(朱子)는 시집전서(詩集傳序)에서 시경의 국풍(國風)은 여항의 가요에서 나온 것이 많으며, 남녀가 함께 노래하면서 각자의 감정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D-009]우리나라 남녀의 성정 : 원문은 貊男濟婦之性情인데, ‘貊男은 강원도 남자, ‘濟婦는 제주도 여자를 가리킨 것이 아닌가 한다. 강원도는 옛날에 맥국(貊國)의 땅이었다고 한다. 연암집 3 送沈伯修出宰狼川序 또한 연암집 7 ‘이방익의 사건을 기록함(書李邦翼事)’에서 제주도 사람을 제인(濟人)’이라 표현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형언도필첩서(炯言桃筆帖序)

 

 

아무리 작은 기예(技藝)라 할지라도 다른 것을 잊어버리고 매달려야만 이루어지는 법인데 하물며 큰 도()에 있어서랴.

최흥효(崔興孝)는 온 나라에서 글씨를 제일 잘 쓰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시권(試卷)을 쓰다가 그중에 글자 하나가 왕희지(王羲之)의 서체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는, 종일토록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차마 그것을 버릴 수가 없어 시권을 품에 품고 돌아왔다. 이쯤 되면 이해득실 따위를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고 이를 만하다.

이징(李澄)이 어릴 때 다락에 올라가 그림을 익히고 있었는데 집에서 그가 있는 곳을 몰라서 사흘 동안 찾다가 마침내 찾아냈다. 부친이 노하여 종아리를 때렸더니 울면서도 떨어진 눈물을 끌어다 새를 그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림에 온통 빠져서 영욕(榮辱)을 잊어버렸다고 이를 만하다.

학산수(鶴山守)는 온 나라에서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산속에 들어가 소리를 익힌 적이 있었는데, 매양 한 가락을 마치면 모래를 주워 나막신에 던져서 그 모래가 나막신에 가득 차야만 돌아왔다. 일찍이 도적을 만나 장차 죽게 되었는데, 바람결에 따라 노래를 부르자 뭇 도적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쯤 되면 죽고 사는 것을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고 이를 만하다.

나는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큰 도()가 흩어진 지 오래되어, 어진 이를 좋아하기를 여색 좋아하듯이 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저들은 기예를 위해서라면 자기의 목숨마저도 바꿀 수 있다 여겼으니, ! 이것이 바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것이로구나.”

도은(桃隱) 형암총언(炯菴叢言) 도합 열세 조목을 글씨로 써서 한 권의 책자로 만들어 나에게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도은과 형암 이 두 사람은 내적인 면에 오로지 마음을 쓰는 사람인가, 육예(六藝) 속에서 노니는 사람인가? 그것이 아니고 이 두 사람이 사생(死生)과 영욕(榮辱)의 분별을 잊어버리고 이와 같이 정교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어찌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이 두 사람이 무언가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면, 도와 덕 속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기 바란다.

 

 

[D-001]최흥효(崔興孝) : 조선 세종(世宗) 때의 명필로 초서에 뛰어났다고 한다.

[D-002]이징(李澄) : 선조 14(1581) 유명한 화가였던 종실(宗室) 학림정(鶴林正) 이경윤(李慶胤)의 서자로 태어났다.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 되었으며, 산수화에 뛰어났다고 한다.

[D-003]학산수(鶴山守) : 성명은 미상(未詳)이다. ()는 종친부(宗親府)의 정 4 품 벼슬이다.

[D-004]어진 이를 …… 못하였다 : 논어 자한(子罕)과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말이다.

[D-005]아침에 …… 좋다 :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한 말이다.

[D-006]형암총언(炯菴叢言) : 이덕무가 지은 책인데,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전하지 않는다. 형암은 이덕무의 호이다.

[D-007]육예(六藝) …… 사람인가 : 육예는 예() · () · () · () · () · ()를 말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며, 인에 의지하며, 예에서 노닌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 하였는데, 앞의 세 항목이 내적인 면에 마음을 쓰는 것이라면, 육예에서 노니는 것은 외적인 면, 즉 일상적인 행동을 통해 수양에 힘쓰는 것을 뜻한다. 주자(朱子)의 주에 따르면, 그렇게 할 때 본말을 갖추게 되고 내외가 서로 함양된다고 하였다. 論語 述而

[D-008]도와 …… 바란다 :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물고기들이 샘물이 말라붙는 바람에 졸지에 육지에 처하여 서로 습기를 호흡하고 입의 거품으로 서로의 몸을 축여 주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는 것相忘於江湖이 낫다고 하였다. 연암은 이와 같이 유교의 예악(禮樂)과 인의(仁義)를 모두 잊어버릴 것을 역설한 장자의 일절(一節)을 변용하여, 도리어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라는 공자의 말씀을 철저히 실천하는 일 외에 다른 모든 일을 잊어버리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

 

 

옛글을 모방하여 글을 짓기를 마치 거울이 형체를 비추듯이 하면 비슷하다고 하겠는가?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반대로 되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물이 형체를 비추듯이 하면 비슷하다고 하겠는가? 뿌리와 가지가 거꾸로 보이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 한다면 비슷하다고 하겠는가? 한낮이 되면 난쟁이侏儒僬僥가 되고 석양이 들면 키다리龍伯防風가 되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림이 형체를 묘사하듯이 한다면 비슷하다고 하겠는가? 걸어가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소리가 없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옛글과 끝내 비슷할 수 없단 말인가?

그런데 어찌 구태여 비슷한 것을 구하려 드는가? 비슷한 것을 구하려 드는 것은 그 자체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천하에서 이른바 서로 같은 것을 말할 때 꼭 닮았다酷肖라 일컫고, 분별하기 어려운 것을 말할 때 진짜에 아주 가깝다逼眞라고 일컫는다. 무릇 ()’이라 말하거나 ()’라고 말할 때에는 그 속에 ()’ ()’의 뜻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천하에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전혀 다르면서도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언어가 달라도 통역을 통해 의사를 소통할 수 있고, 한자(漢字)의 자체(字體)가 달라도 모두 문장을 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외형은 서로 다르지만 내심은 서로 같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마음이 비슷한 것心似은 내면의 의도라 할 것이요 외형이 비슷한 것形似은 피상적인 겉모습이라 하겠다.

이씨의 자제인 낙서(洛瑞 이서구(李書九))는 나이가 16세로 나를 따라 글을 배운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심령(心靈)이 일찍 트이고 혜식(慧識)이 구슬과 같았다. 일찍이 녹천관집(綠天館集)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질문하기를,

 

, 제가 글을 지은 지가 겨우 몇 해밖에 되지 않았으나 남들의 노여움을 산 적이 많았습니다. 한 마디라도 조금 새롭다던가 한 글자라도 기이한 것이 나오면 그때마다 사람들은 옛글에도 이런 것이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 발끈 화를 내며 어찌 감히 그런 글을 짓느냐!’고 나무랍니다. , 옛글에 이런 것이 있었다면 제가 어찌 다시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판정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손을 모아 이마에 얹고 세 번 절한 다음 꿇어앉아 말하였다.

 

네 말이 매우 올바르구나. 가히 끊어진 학문을 일으킬 만하다. 창힐(蒼頡)이 글자를 만들 때 어떤 옛것에서 모방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안연(顔淵)이 배우기를 좋아했지만 유독 저서가 없었다. 만약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창힐이 글자를 만들 때를 생각하고, 안연이 표현하지 못한 취지를 저술한다면 글이 비로소 올바르게 될 것이다.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남들에게 노여움을 받으면 공경한 태도로 널리 배우지 못하여 옛글을 상고해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사과하거라. 그래도 힐문이 그치지 않고 노여움이 풀리지 않거든, 조심스러운 태도로 은고(殷誥)와 주아(周雅)는 하() · () · () 삼대(三代) 당시에 유행하던 문장이요, 승상(丞相) 이사(李斯)와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는 진() 나라와 진() 나라에서 유행하던 속필(俗筆)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거라.”

 

[D-001]난쟁이侏儒僬僥 : 주유(侏儒)는 난쟁이를 말하고, 초요(僬僥)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나오는 단인국(短人國) 사람, 또는 국어(國語) 노 하(魯下)에 나오는 키가 석 자밖에 안 된다는 종족이다.

[D-002]키다리龍伯防風 : 용백(龍伯) 열자 탕문에 나오는 대인국(大人國) 사람, 방풍(防風) 국어 노 하에 나오는 키가 큰 종족이다.

[D-003]나이가 16세로 : 이서구는 1754년에 태어났으므로, 이 글을 지은 때는 1769년임을 알 수 있다.

[D-004]은고(殷誥)와 주아(周雅) : 은고는 중훼지고(仲虺之誥)와 탕고(湯誥),  서경(書經)을 가리키고, 주아는 주공(周公)이 제정했다는 소아(小雅)와 대아(大雅),  시경(詩經)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영재집서(泠齋集序)

 

 

장석(匠石 돌을 다듬는 사람)이 기궐씨(剞劂氏 돌에 글씨를 새기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천하의 물건 가운데 돌보다 단단한 것은 없다. 그렇게 단단한 것을 베어 내어 자르고 깎고 하여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만들어 신도(神道)에 세우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바로 나의 공이니라.”

하니, 기궐씨가 이렇게 말했다.

 

오래도록 닳아 없어지지 않기로는 글자를 새기는 것보다 더 오래가는 것이 없다. 위대한 인물의 훌륭한 행적에 대하여 군자가 비명(碑銘)을 지어 놓았다 하더라도 나의 공력이 들어가지 않으면 장차 그 빗돌을 어디에다 쓰겠는가.”

그렇게 다투다가 마침내 마렵자(馬鬣子 무덤)에게 함께 가서 시비를 가리려 했으나, 마렵자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히 있기만 할 뿐 세 번을 불러도 세 번 다 대답이 없었다. 이때 옆에 있던 석옹중(石翁仲 무덤 앞에 세워놓은 석인(石人))이 껄껄대고 웃으면서,

 

그대들은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것으로 돌보다 더한 것이 없고, 오래도록 닳아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 글자를 새기는 것보다 더 오래가는 것이 없다고 하는구먼. 비록 그러하나 돌이 정말 단단하다면 어떻게 깎아서 빗돌을 만들 수 있겠으며, 닳아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글자를 새길 수 있겠는가. 그것을 깎아서 새길 수 있는 이상 부엌을 만드는 사람이 가져다가 솥을 앉히는 이맛돌로 쓰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하겠는가.”

하였다.

양자운(揚子雲 양웅(揚雄))은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기자(奇字)를 많이 알았다. 한창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하다가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변하더니, 개연히 크게 탄식하기를,

 

! (), 너는 알고 있어라. 석옹중의 풍자를 들은 사람들은 장차 이 태현경을 장독의 덮개로 쓰겠지.”

하니, 듣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봄날에 영재집에다 쓴다.

 

 

[D-001]기자(奇字) : 고문(古文 : 공자벽중서孔子壁中書), 전서(篆書), 예서(隸書), 무전(繆篆), 충서(蟲書)와 함께 한자(漢字)의 육체(六體)의 하나로, 고문의 변체(變體)인데 양웅이 이를 즐겨 배웠다고 한다.

[D-002]() : 양웅의 아들 양오(揚烏), 동오(童烏)라고도 한다. 문학의 신동(神童)이었으나 아홉 살로 요절했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패서(旬稗序)

 

 

소천암(小川菴)이 우리나라의 민요와 민속, 방언(方言)과 속기(俗技) 등을 두루 기록하고, 심지어는 종이연에도 계보(系譜)를 만들고 어린애들 수수께끼에도 해설을 붙여 놓았다. 여항(閭巷) 구석구석의 익숙한 실태며, 문에 기댄 기녀들이 몸을 움츠리고 아양을 떠는 모습과 칼을 두드리는 백정이 손뼉을 치면서 맹세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수집해 실어 놓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각각의 내용들을 조목별로 잘 엮어 놓았다. 입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까지도 붓으로 잘 묘사했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내용들까지도 책을 펼쳐 보면 곳곳에 나와 있으며, 닭이 울고 개가 짖어 대는 소리와 벌레가 몸을 일으키고 굼벵이가 꿈틀거리는 모습 등 모든 것이 실제의 모습과 소리대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십간(十干)의 순으로 배열하고는 책이름을 순패(旬稗)라 하였다.

하루는 이 책을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이 책은 내가 어린 시절에 손장난 삼아 지어 본 것일세. 그대는 음식 가운데 거여(粔籹 유밀과(油蜜菓)의 일종인 중배끼)를 보지 못하였는가? 찹쌀을 가루로 만들어 술에 적시어 누에 크기만큼 잘라서 더운 구들장에 말린 다음 기름에다 튀기면 그 모양이 누에고치 모양으로 부푼다네. 보기에 깨끗하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 속이 텅텅 비어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으며, 잘 부스러지는 성질이 있어 입으로 훅 불기만 해도 눈발 날리듯 한다네. 그래서 물건 가운데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비어 있는 것을 거여라고 하지.

그런데 개암, , 벼 등은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들이지만 실로 아름다우면서도 참으로 배가 불러서, 이것으로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드릴 수도 있고 귀한 손님에게 예물로 드릴 수도 있지. 무릇 문장을 짓는 방법 역시도 이와 마찬가지일세. 그런데도 사람들은 개암, , 벼를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니 그대가 나를 위해 시비를 가려 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에게 대답하기를,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는 말은 믿지 않을 수 없지만, () 나라 때의 장수 이광(李廣)이 쏜 화살이 바위를 뚫고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끝내 의문을 남긴다네. 왜냐하면 꿈이라는 것은 직접 보기 어려운 것이고, 반면에 실제로 눈앞에 일어난 일은 징험하기가 쉽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그대는 일상생활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조사하고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수집하였으므로, 평범한 남녀들의 가벼운 웃음거리와 일상적인 생활사들이 어느 것 하나 눈앞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눈이 시도록 보고 귀로 실컷 들어서 성단용노(城旦庸奴)라도 그렇다고 여기는 것들이네. 그렇기는 하지만 묵은 장()이라도 그릇을 바꾸어 담으면 입맛이 새로워지듯, 늘 보던 것도 장소가 달라지면 마음과 보는 눈이 모두 달라지는 법이지.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은 굳이 소천암이 어떤 사람인지, 민요가 어느 지방의 것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 책만 보면 바야흐로 알 수가 있으이. 이 책에다 운()을 달아 연독(聯讀)하면 백성들의 성정(性情)을 논할 수 있고, 계보에 따라 그림을 그리면 그 대상의 수염과 눈썹까지도 검증할 수가 있을 것이네.

재래도인(䏁睞道人)이 일찍이 말하기를, ‘석양 아래 작은 돛단배가 갈대숲 속에 살짝 가리워지니, 사공과 어부가 모두 텁수룩한 수염에 구레나룻이 험상궂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저 건너 물가에서 바라보면 그들이 곧 고사(高士) 육노망(陸魯望) 선생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하였으니, 아아, 도인(道人)이 이러한 생각을 나보다 먼저 해버렸네그려. 그러니 그대는 도인을 스승으로 섬겨야 하겠네. 찾아가서 징험해 보도록 하게나.”

하였다.

 

 

[D-001]문에 …… 모습 : 원문은 肩媚인데, 견미란 협첨(脅諂)’과 같은 말로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몸을 움츠리고 억지웃음 짓는 것이 여름철 밭일하기보다 괴롭다.脅肩諂笑 病于夏畦고 하였다. ‘협견첨소(脅肩諂笑)’는 소인배가 권세가 앞에서 아첨하는 태도를 말한다.

[D-002]손뼉을 …… 모습 : 원문은 掌誓로 민간에서 맹세할 때 손뼉을 쳐서 신용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격장위서(擊掌爲誓)’라 한다.

[D-003]이광(李廣) …… 이야기 : 이광이 사냥을 나갔다가 풀 속에 있는 바위를 호랑이인 줄 알고 힘껏 쏘았더니 화살이 바위를 뚫고 들어갔으나, 바위인 줄 알고 난 뒤 다시 쏘았을 때는 끝내 화살이 바위를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D-004]성단용노(城旦庸奴) : 도형(徒刑)을 사는 무식한 자이다. 원문에서는 조선 태조(太祖)의 이름자 단()을 휘하여 城朝庸奴라 하였다.

[D-005]이 책에다 …… 있고 : 이 책의 내용을 소재로 시를 지으면 이를 통해 백성들의 심성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D-006]재래도인(䏁睞道人) : 재래도인은 귀머거리에다 사팔뜨기를 겸한 도인이란 뜻으로 이덕무의 호의 하나이다. ‘䏁䚅道人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재래도인이 했다는 말은 청장관전서 63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 나오는 말과 거의 똑같다.

[D-007]육노망(陸魯望) : 당 나라 때의 인물로 이름은 귀몽(龜蒙),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며, 노망(魯望)은 그의 자이다. 강호에서 노닐기를 좋아하였으며, 조정에서 고사(高士)로서 초빙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염재기(念齋記)

 

 

송욱(宋旭)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자다가 해가 떠올라서야 겨우 잠에서 깨었다. 누워서 들으니, 솔개가 울고 까치가 지저귀며, 수레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시끄러우며, 울 밑에서는 절구 소리가 나고 부엌에서는 그릇 씻는 소리가 나며, 늙은이의 부르는 소리와 어린애의 웃음소리, 남녀 종들의 꾸짖는 소리와 기침하는 소리 등 문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 없건만 유독 자신의 소리만은 들리지 않았다.

이에 몽롱한 가운데 중얼거리기를,

 

집안 식구는 모두 다 있는데 나만 어찌하여 없는가?”

하며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고리와 바지는 다 횃대에 놓여 있고 갓은 벽에 걸려 있고 띠는 횃대 끝에 걸려 있으며, 책들은 책상 위에 놓여 있고, 거문고는 뉘어져 있고 가야금은 세워져 있으며, 거미줄은 들보에 얽혀 있고, 쇠파리는 창문에 붙어 있다. 무릇 방 안의 물건치고 하나도 없는 것이 없는데 유독 자기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급히 일어서서 제가 자던 곳을 살펴보니 베개를 남쪽으로 하여 요가 깔려 있으며 이불은 그 속이 드러나 있었다. 이에 송욱이 미쳐서 발가벗은 몸으로 집을 나갔구나!’라고 생각하고는 매우 슬퍼하고 불쌍히 여겼다. 한편으로 나무라기도 하고 한편으론 비웃기도 하다가, 마침내 의관(衣冠)을 안고서 그에게 찾아가 옷을 입혀 주려고 온 길을 다 찾아다녔으나 송욱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성() 동쪽에 살고 있는 소경에게 가서 점을 쳐 보니, 소경이 점을 치며 말하기를,

 

서산대사(西山大師)가 갓끈이 끊겨 염주가 흩어졌구나. 저 부엉이를 불러다가 헤아려 보게 하자꾸나.”

하고는 엽전을 던지자 동그란 것이 잘도 굴러가 문지방에 부딪쳐서야 멈추었다. 소경이 엽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축하하기를,

 

주인은 여행을 나가고 나그네는 여의(旅衣)가 없구나. 아홉을 잃고 하나만 남았으니 이레가 지나면 돌아오리라. 이 점사(占辭)가 크게 길()하니 마땅히 과거에 장원급제하리라.”

하였다. 송욱이 크게 기뻐하여 매양 과거가 열려 선비를 시험할 때면 반드시 유건(儒巾)을 쓰고 응시를 하였는데, 그때마다 제 시권(試券)에다 비점(批點)을 치고 나서 큰 글씨로 높은 등수를 매겨 놓았다. 그래서 한양(漢陽)의 속담에 반드시 이뤄질 수 없는 일을 두고 송욱의 과거 보기宋旭應試라고 말한다.

식자들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기를,

 

미치긴 미쳤으나 역시 선비답구나. 이러한 행동은 과거에 응시하면서도 과거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계우(季雨)는 성격이 소탈하여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목청을 높여 노래하면서 스스로 주성(酒聖)’이라고 호를 지었다. 세상에 겉으로는 씩씩한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을 보면 마치 자기 몸이 더렵혀지기나 한 듯 구역질을 하였다.

내가 그에게 장난삼아 말하기를,

 

술에 취하고서 자신을 성인이라 일컫는 것은 미친 것을 숨긴 것이거니와, 그런데 심지어 취하지 않고서도 반성하지 않는다면 큰 미치광이大狂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니, 계우가 수심에 잠겨 한동안 있다가,

 

그대의 말이 옳소.”

하고는, 드디어 그 당()의 이름을 염재(念齋)’라 짓고 나에게 기()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송욱의 일을 써서 그를 권면하는 바이다. 저 송욱은 미치광이이기는 하지만 그 또한 스스로 노력한 자이다.

 

 

[D-001]여의(旅衣) : 여행 도중 입을 옷, 즉 행장(行裝)을 말한다.

[D-002]계우(季雨) : 성명은 미상(未詳)이다. 연암집 5 여중관(與仲觀)에 백우(伯雨)의 동생으로 언급되어 있다. 연암 후손가 소장 필사본 종북소선집(鍾北小選集)에는 이 글의 제목이 염재당기(念哉堂記)로 되어 있으며, 그와 함께 계우 숙응(叔凝)’으로 되어 있다. 숙응은 연암의 친구인 신광온(申光蘊)의 아우 신광직(申光直 : 1738~1794)의 자(), 그의 호가 또한 염재(念齋)였다. 신광직은 젊은 시절 연암뿐만 아니라 홍대용(洪大容)과도 절친하여 담헌서(湛軒書)에도 여신염재부증박연암지원(與申念齋賦贈朴燕巖趾源)’ 등 신광직과 관련된 시문이 몇 편 있다. 김영진의 조선 후기의 明淸小品 수용과 小品文의 전개 양상(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2003) 참고.

[D-003]세상에 …… 하였다 : 공자는 겉으로는 씩씩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을 남이 알까 두려워하며 몰래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둑에 비겨 비판하였고, 論語 陽貨 백이(伯夷)는 시골 사람과 서 있을 적에 그가 관을 올바로 쓰고 있지 않으면 뒤도 안 보고 가 버리면서 마치 자기 몸이 더럽혀지기나 할 듯이 여겼다.若將浼焉고 하며, 孟子 公孫丑上 오릉중자(於陵仲子)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거위 요리를 먹고 난 뒤 그 거위가 바로 형에게 선물로 들어온 것이었음을 알게 되자 나가서 구역질을 하였다.出而哇之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D-004]술에 …… 않겠는가 : 서경(書經) 다방(多方) 성인이라도 반성하지 않으면 광인이 되고, 광인이라도 반성할 줄 알면 성인이 된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고 하였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을 강조한 말이다. 본래 서경 다방에서의 광인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송욱(宋旭)의 경우와 연계되어 쓰였으므로 미치광이로 새겼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관재기(觀齋記)

 

 

을유년(1765, 영조 41) 가을에 나는 팔담(八潭)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마하연(摩訶衍)에 들어가서 준대사(俊大師)를 방문하였다. 그때 대사는 손가락으로 감중련(坎中連)을 하고서 눈으로는 코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자(童子)가 옆에서 화로를 헤치고 향()을 피우는데, 그 연기가 둥글게 피어올라 머리털을 묶은 듯 버섯이 돋아난 듯 방 안에 자욱하였다. 연기는 붙들지 않아도 곧게 피어오르고 바람이 없어도 저절로 출렁이며, 너울너울 한들한들하며 장차 다함이 없을 듯싶었다. 동자가 갑자기 깨우침을 얻은 듯 웃음을 지으며,

 

공덕(功德)이 충분히 쌓이면 움직임動轉은 바람으로 돌아가고, 나의 깨달음이 성취되면 한낱 향은 무지개로 화하리라.”

하니, 대사가 눈길을 돌리며 말하기를,

 

얘야, 너는 향()을 맡았지만 나는 그 재를 보며, 너는 그 연기를 보고 좋아하지만 나는 그 공()을 본다. 동정(動靜)이 이미 적멸했으니, 공덕(功德)을 어디에 베풀랴.”

하였다. 동자가 말하기를,

 

감히 묻겠습니다. 무엇을 이른 말씀입니까?”

하니, 대사가,

 

너는 시험 삼아 그 재를 맡아 보아라. 다시 무슨 냄새가 나느냐? 너는 그 공()을 보아라. 다시 무엇이 있느냐?”

하였다. 동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기를,

 

예전에 스승님께서 제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저에게 오계(五戒)를 내리셨고 저의 법명(法名)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름은 곧 내가 아니요, 나는 바로 저 공()이다.’ 하셨습니다. 공이란 곧 형체가 없는 것이니 이름이 있다 한들 장차 어디에다 쓰오리까. 청컨대 그 이름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하니, 대사가,

 

너는 공순히 받아서 고이 보내라. 내가 60년 동안 세상을 보았는데 어떠한 사물이든 머물러 있는 것이 없이 모두가 도도하게 흘러간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 바퀴를 멈추지 않으니, 내일의 해는 오늘의 해가 아니다. 그러므로 미리 헤아린다는 것은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요, ‘붙잡는다는 것은 억지로 애쓰는 것이요, ‘보낸다는 것은 순응하는 것이다. 너는 마음속에 머물러 두지 말고 기운이 막힘이 없도록 하라. ()에 순응하여 명()으로써 나를 보고, ()에 따라 보내어서 이()로써 사물을 보면, 흐르는 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 곳에 있을 것이요 흰 구름이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나는 이때 턱을 고이고 옆에 앉아서 듣고 있었으나 진실로 아득한 기분이었다.

백오(伯五 서상수(徐常修))가 그의 대청을 관재(觀齋)’라 이름 짓고 나에게 글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저 백오도 준대사의 설법을 들은 적이 있었던가. 드디어 그 말을 써서 기()를 짓는 바이다.

 

 

[D-001]손가락으로 …… 있었다 : 손가락으로 감중련을 하고 있다는 것은 감괘(坎卦) 모양으로 소지(小指)를 대지(大指)와 맞닿게 한 인상(印相)을 말한다. 눈으로 코끝을 내려다보는 것은 조식법(調息法)의 일종이다.

[D-002]동정(動靜) : 이본에는 동전(動轉)’으로 되어 있다.

[D-003] …… 내리셨고 : 계사(戒師)가 수행자의 정수리를 쓰다듬고 나서 계()를 내려 주는 것을 말한다. 오계(五戒)란 살생 · 도적질 · 간음 · 망언 · 술을 금하는 계율이다.

[D-004]미리 …… 것이요 : 거스를  자에  자와 같이 맞이한다는 뜻이 있음을 이용한 궤변이다. 단 여기서 ()’ 자는 예측한다는 뜻이다. 한편 ()’ 자에도 미리’, ‘사전에라는 뜻이 있다.

[D-005]붙잡는다 …… 것이요 : 이본에는  , ‘ 으로 되어 있다.

[D-006]보낸다 …… 것이다 : 이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07]관재(觀齋) : 이본에는 관물(觀物)’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글의 제목도 관물헌기(觀物軒記)’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선귤당기(蟬橘堂記)

 

 

영처자(嬰處子 이덕무(李德懋))가 당()을 짓고서 그 이름을 선귤당(蟬橘堂)이라고 하였다. 그의 벗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비웃었다.

 

그대는 왜 어지럽게도 호()가 많은가. 옛날에 열경(悅卿)이 부처 앞에서 참회를 하고 불법을 닦겠다고 크게 맹세를 하면서 속명(俗名)을 버리고 법호(法號)를 따를 것을 원하니, 대사(大師)가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열경더러 이렇게 말을 했네.

심하도다, 너의 미혹됨이여. 너는 아직도 이름을 좋아하는구나. 중이란 육체가 마른 나무와 같으니 목비구(木比丘)라 부르고 마음이 식은 재와 같으니 회두타(灰頭陀)라 부르려무나.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이곳에서 이름은 있어 어디에 쓰겠느냐. 너는 네 육체를 돌아보아라. 이름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 너에게 육체가 있기에 그림자가 있다지만, 이름은 본래 그림자조차 없는 것이니 장차 무엇을 버리려 한단 말이냐? 네가 정수리를 만져 머리카락이 잡히니까 빗으로 빗은 것이지, 머리카락을 깎아 버린 이상 빗은 있어 무엇하겠느냐.

네가 장차 이름을 버리려고 한다지만, 이름은 옥이나 비단도 아니요 땅이나 집도 아니며, 금이나 주옥이나 돈도 아니요 밥이나 곡물도 아니며, 밥솥이나 가마솥도 아니요 큰 가마나 큰솥도 아니며, 광주리도 술잔도 아니요 곡식 담는 각종 제기(祭器)도 고기 담는 제기도 아니다. 차고 다니는 주머니나 칼이나 향낭(香囊)처럼 풀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비단 관복이나 학()을 수놓은 흉배(胸背), 서대(犀帶)나 어과(魚果)처럼 벗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양쪽 끝에 원앙(鴛鴦)을 수놓은 베개나 술이 달린 비단 장막처럼 남에게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때나 먼지처럼 물로 씻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물까마귀 깃으로 토해 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부스럼이나 마른 딱지처럼 손톱으로 떼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네 이름이기는 하지만 너의 몸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남의 입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남이 부르기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되고 영광스럽게도 치욕스럽게도 되며 귀하게도 천하게도 되니, 그로 인해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멋대로 생겨난다.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유혹을 받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공포에 떨기까지 한다. 이빨과 입술은 네 몸에 붙어 있는 것이지만 씹고 뱉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는 셈이니, 네 몸에 언제쯤 네 이름이 돌아올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저 바람 소리에 비유해 보자. 바람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인데 나무에 부딪침으로써 소리를 내게 되고 도리어 나무를 흔들어 댄다. 너는 일어나 나무를 살펴보아라. 나무가 가만히 있을 때 바람이 어디에 있더냐? 너의 몸에는 본시 이름이 없었으나 몸이 생겨남에 따라 이름이 생겨서 네 몸을 칭칭 감아 너를 겁박하고 억류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 저 울리는 종에 비유해 보자. 북채를 멈추어도 그 소리는 울려 퍼진다. 그렇듯이 사람의 몸이 백 번 죽어도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것은 실체가 없으므로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이는 마치 매미의 허물이나 귤의 껍질과 같아서, 껍질이나 허물과 같은 외물에서 매미 소리를 찾거나 귤 향기를 맡으려 한다면 이는 껍질이나 허물이 저처럼 텅 비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처음 태어나서 강보(襁褓)에서 응애응애 울 때에는 이러한 이름이 없었다. 부모가 아끼고 기뻐하여 상서로운 글자를 골라 이름을 지어 주고, 다시 더럽고 욕된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 이 모든 게 다 네가 잘 되기를 축원한 것이다. 너는 이때만 해도 부모에 딸린 몸이어서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성장하고 나서야 네 몸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고 를 입신(立身)하고 나서는 가 없을 수 없으니, ‘ 에게 와서 짝이 되어 몸이 홀연 한 쌍이 되었다. 한 쌍의 몸이 잘 만나서 자녀를 두니 둘씩 짝을 이루는 것이 마치 주역의 팔괘와 같았다.

그리하여 몸이 이미 여럿이다 보니 거추장스럽게 되어 무거워 다닐 수가 없게 된다. 비록 명산(名山)이 있어 좋은 물에서 놀고 싶어도 이것 때문에 즐거움이 그치고 슬퍼하고 근심하게 되며, 사이좋은 친구들이 술상을 차려 부르면서 이 좋은 날을 즐기자고 말을 해도 부채를 들고 문을 나서다 도로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이 몸에 딸린 것을 생각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네 몸이 얽매이고 구속을 받는 것은 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이는 네 이름과 마찬가지여서, 어려서는 아명(兒名)이 있고 자라서는 관명(冠名)이 있으며, ()을 나타내기 위해 자()를 짓고 사는 곳에 호()를 짓는다. 어진 덕이 있으면 선생(先生)이란 호칭을 덧붙인다. 살아서는 높은 관작(官爵)으로 부르고 죽어서는 아름다운 시호(諡號)로 부른다. 이름이 이미 여럿이라 이처럼 무거우니 네 몸이 장차 그 이름을 감당해 낼지 모르겠다.’

이는 대각무경(大覺無經)에 나온 이야기일세. 열경(悅卿)은 은자(隱者)로서 이름이 아주 많아 다섯 살 적부터 호()가 있었지. 때문에 대사(大師)가 이로써 경계한 것이네.

갓난아기는 이름이 없으므로 영아(嬰兒)라 부르고 시집가지 않은 여자를 처자(處子)라고 하지. 따라서 영처(嬰處)라는 호는 대개 은사(隱士)가 이름을 두고 싶지 않을 때 쓴다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선귤(蟬橘)로써 자호(自號)를 하였으니 자네는 앞으로 그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일세. 왜냐하면 영아는 지극히 약한 것이고 처자란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어서, 사람들이 자네의 유약함을 보고는 여전히 이 호로써 부를 것이요, 매미 소리가 들리고 귤 향기까지 난다면 자네의 당()은 앞으로 시장처럼 사람이 모이게 될 걸세.”

이에 영처자(嬰處子)가 말하기를,

 

대사가 한 말과 같이, 매미가 허물을 벗어 그 허물이 말라붙고 귤이 시들어서 그 껍질이 텅 비어 버렸는데 어디에 소리와 빛과 내음과 맛이 있겠소? 이미 좋아할 만한 소리와 빛과 내음과 맛이 없는데 사람들이 장차 껍질이나 허물과 같은 외물에서 나를 찾겠소?”

하였다.

 

 

[D-001]그대는 …… 많은가 : 이덕무는 젊은 시절에 삼호거사(三湖居士) · 경재(敬齋) · 팔분당(八分堂) · 선귤헌(蟬橘軒) · 정암(亭巖) · 을엄(乙广) · 형암(炯菴) · 영처(嬰處) · 감감자(憨憨子) · 범재거사(汎齋居士) 등의 호를 지녔다. 靑莊館全書 卷3 嬰處文稿1 記號 그 밖에 청음관(靑飮館) · 탑좌인(塔左人) · 재래도인(䏁睞道人) · 매탕(槑宕) · 단좌헌(端坐軒) · 주충어재(注蟲魚齋) · 학초목당(學草木堂) · 향초원(香草園) 등의 호가 있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호는 청장관(靑莊館)과 아정(雅亭)이다.

[D-002]열경(悅卿) : 김시습(金時習)의 자이다. 김시습 역시 청한자(淸寒子) · 동봉(東峯) · 매월당(梅月堂) · 벽산청은(碧山淸隱) · 췌세옹(贅世翁) 등 호가 많았다.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D-003]회두타(灰頭陀) : 두타(頭陀)는 범어(梵語)의 음역(音譯)으로 행각승(行脚僧)을 말한다.

[D-004]어과(魚果) : ()는 신표(信標)라는 뜻이다. 물고기 모양을 나무에 새기거나 구리로 빚어 허리띠에 차던 관리의 신표를 말한다. 어부(魚符) 또는 어패(魚佩)라고도 하였다.

[D-005]몸이 …… 생겨서 : 원문은 卽有是事 廼有是名으로 되어 있으나 이본에 卽有身故 乃有是名으로 되어 있어 이본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6]다시 …… 주었으니 : 유아 사망률이 높던 당시에 귀신이 데려가지 말라고 일부러 개똥이와 같은 천한 이름을 지어 불렀던 풍습을 말한다.

[D-007]몸이 홀연 : 원문은 遂忽로 되어 있는데 뜻이 어색하다. 종북소선 身忽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8]한 쌍의 …… 만나서 :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혼의(昏義) 혼례란 장차 두 성씨가 잘 만나는 것婚禮者 將合二姓之好이라 하였다.

[D-009]둘씩 …… 같았다 : 자녀들이 차례로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팔괘가 음효(陰爻)와 양효(陽爻)의 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비유하였다. 이 구절이 卽成四身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들과 딸을 두어 네 몸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D-010]몸이 …… 보니 : 원문은 身之旣多인데, ‘몸이 이미 넷이다 보니身之旣四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1]이것 …… 그치고 : 원문은 爲此艮兌인데, 간괘(艮卦)는 그침을 상징하고, 태괘(兌卦)는 즐거움을 상징한다. 이 구절이 이 네 몸 때문에爲此四身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2] …… 생각하여 : 원문은 爲此卦身인데, ‘이 네 몸을 생각하여爲此四身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3]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 원문은 以多身故인데, ‘몸이 넷이기 때문이다以四身故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4]대각무경(大覺無經) : 허구로 지어낸 불경 이름이다.

[D-015]다섯 …… 있었지 : 김시습은 다섯 살 적에 세종 앞에서 시를 지어 명성을 떨쳤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오세(五歲)’라고 불렀다고 한다. 梅月堂先生傳 오세암(五歲菴)도 그의 당호(堂號)라는 설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애오려기(愛吾廬記)

 

 

정군 인산(鄭君仁山)이 자기가 거처하는 집을 애오려(愛吾廬)’라 이름하고 하루는 나에게 기()를 청해 왔기에, 나는 인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사람이나 사물이 처음 생길 적에는 진실로 각자가 구별되지 않았다. 즉 남이나 나나 다 사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를 들어 남과 마주 놓고서 라 일컬으며 구분을 짓게 되었다. 이에 천하의 사람들이 비로소 분분히 일어나 자기를 말하고 일마다 라 일컫게 되었으니, 이미 그 사심(私心)을 이겨 낼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까지 스스로 덧붙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효경(孝經)에서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감히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를 이미 라고 할진댄, 지금 의 터럭 하나를 잡아당긴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온몸이 편치 않을 것이다. 어찌 내 몸 전체를 들어 라고 여긴 경우에만 그러하겠는가. 비록 가느다란 터럭 하나라도 다 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요, 장차 사랑하지 않는 터럭이 없게 될 것이다.

, 터럭 하나도 라고 하여 이미 사랑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면, 나의 몸에서 겨우 터럭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대상이라도 실로 모른 척하고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제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 사람에게 이로움이 돌아간다 해도 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이미 자기의 터럭 하나를 천하보다 중하게 여기고 사랑하기를 지극히 두텁게 하니, 자기를 온전히 보호하여 아끼고자 생각하는 것이 어찌 지극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해(四海)가 지극히 넓다지만 장차 나의 터럭 하나도 잘 간수할 방법이 없을 터인즉, 또한 제 몸을 도외시함으로써 몸을 보존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저들은 제 몸을 도외시하여도 스스로를 보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나면, 자신을 사랑하기를 더욱 깊이 하고 근심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여, 심지어는 제 몸을 적멸(寂滅)하고자 하여 라는 것을 가합(假合)으로 여기고 사랑을 원업(冤業)으로 여기며 삼강오륜을 끊어 버리고 삶을 보기를 원수 대하듯 한다. 따라서 저들은 제 한 몸의 도 스스로 지닐 겨를이 없는데 하물며 터럭 하나의 이랴. 그리되면 앞에서 말한 사랑하기를 지극히 두텁게 한다는 것이 도리어 천하에 지극히 박한 것이 되고 만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내 한 몸을 사유물로 여기고 자기를 사랑하기를 지나치게 하기 때문이다.

()에 이르기를, “사람은 제 몸을 골고루 사랑하니, 제 몸을 기르는 것도 골고루 하려 한다. 그러나 몸의 작은 부분으로써 큰 부분을 해치지 말고 천한 부분으로써 귀한 부분을 해치지 말라.” 하였다. 그러므로 왕응(王凝)의 아내는 도끼를 가져다가 자신의 팔목을 끊어서 그 몸을 깨끗이 하였던 것이다. 팔목이 이미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면, 그 대소(大小)와 귀천(貴賤)이 어찌 한 점의 살이나 한 올의 머리털에 비할 바이랴. 그런데도 장차 자기 몸에 오물이 묻을 듯이 여겨, 이를 악물고 잘라 내어 조금도 연연해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팔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를 사랑하기를 왕씨의 아내같이 한다면 이는 사랑할 바를 안다고 할 것이다.

 

 

[D-001] …… 있다 : 맹자가 양자(楊子)에 대해 “ ‘나를 위함爲我을 취하여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 사람에게 이로움이 돌아간다고 해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孟子 盡心上

[D-002]적멸(寂滅)하고자 하여 : 열반(涅槃)에 들게 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D-003]가합(假合) : 불교에서는 일체의 사물을 지() · () · () · () 사대(四大)가 잠시 합쳐져서 이루어진 가합지신(假合之身)이라 본다.

[D-004]원업(冤業) : 악업(惡業), 즉 악한 결과를 받는 행동을 말한다.

[D-005]하물며 …… 나이랴 : 중이 삭발하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D-006]() …… 하였다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맹자가 한 말이다. 몸에서 천하고 작은 부분이란 구복(口腹)을 가리키며, 귀하고 큰 부분은 심지(心志)를 가리킨다. 구복만을 기르는 자를 소인이요, 심지를 기르는 자를 대인이라 하였다.

[D-007]왕응(王凝) …… 것이다 : 왕응이 타향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병으로 죽게 되자 그의 아내 이씨(李氏)가 어린 아들과 함께 유해를 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개봉(開封)에 들러 숙박을 하게 되었다. 이때 여관 주인이 그녀를 보고 수상하게 여겨 숙박을 거절하며 팔을 잡아당겨 끌어내자 이씨가 하늘을 보고 통곡하며 내가 여자가 되어 수절하지도 못하고 다른 남자에게 손이 잡혔으니, 이 손 때문에 내 몸을 더럽힐 수 없다.” 하고는 도끼를 가져다 제 팔목을 끊어 버렸다. 新五代史 卷54 雜傳

[D-008]장차 …… 여겨 : 백이(伯夷)는 관을 올바로 쓰고 있지 않은 시골 사람과 마주 서게 되면 뒤도 안 보고 가 버리면서 장차 자기 몸에 오물이 묻을 듯이 여겼다.若將浼焉 한다. 孟子 公孫丑上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환성당기(喚醒堂記)

 

 

()의 액호(額號) 불러서 깨운다는 뜻의 환성당(喚醒堂)’으로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주인옹(主人翁)이 손수 쓴 것이다. 주인옹은 누구인가? 서봉(西峰) 이공(李公)이다. 부르는 대상은 누구인가? 바로 자신을 부른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불렀는가? 공은 평소에 경이직내(敬以直內)하고 잠깐 사이라도 주일무적(主一無適)하여, 언제나 삼가고 독실하여 하나의 공경할 ()’ 자로써 힘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온 세상 사람들이 무지몽매하여 취생몽사(醉生夢死)하니 어느 한 사람도 이러한 도리를 간파한 자가 없었으므로, 아무리 불러 보았자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였고 아무리 깨워 보았자 취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에 기거하는 당에다 편액을 걸어서 좌우명(座右銘)으로 대신하고 아침저녁으로 스스로를 깨우치며 항상 볼 수 있게 하였으니, 어찌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공의 후손인 판서공(判書公)이 집을 짓고자 한 선조의 뜻을 잊지 아니하고 훌륭한 집을 이처럼 빛나게 지어 능히 선조의 미덕을 계승하였으니, 그 집안의 어진 자손이요 조상을 욕되게 아니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나는 이 당에 대하여 거듭 감회가 있다. 이른바 오래된 가문이라는 것은 거기에 교목(喬木)이 있다고 해서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대로 공신이 이어져 온 집에는 반드시 수백 년 된 교목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 그 정원을 두루 살펴보면, 늙은 나무가 우람하고 큰 가지 작은 가지가 새로 나서 울울창창하니, 이는 단지 비와 이슬만 먹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만약에 나무를 배양하는 노고가 없었더라면 어찌 이처럼 무성할 수 있겠는가.

계속해서 이 당에 사는 후손이 진실로 거경(居敬)하여 몸가짐을 지켜가지 않는다면, 뜰을 뒤덮은 늙은 나무를 보고 왕씨(王氏)의 세 그루 홰나무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를 힘써야 할진저.

 

 

[D-001]서봉(西峰) 이공(李公) : 이시방(李時昉 : 1594~1660)의 호가 서봉(西峰)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아들이요 영의정을 지낸 이시백(李時白)의 아우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부친과 함께 가담하여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으며,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 · 병자호란 때에도 공로가 있었다.

[D-002]경이직내(敬以直內)하고 …… 주일무적(主一無適)하여 : 주역 곤괘(坤卦) 군자는 경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로써 행동을 바르게 한다.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고 하였다. 논어 학이(學而)에서 공자가 천승(千乘)의 제후국을 통치하는 방법으로서 그 일을 공경하고 인민들에게 신임을 얻어야 한다.敬事而信고 했는데, 주자(朱子)의 주() 경이란 주일무적을 이른 것이다.敬者 主一無適之謂라고 하였다. ‘주일무적은 정신을 한 가지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성리학에서 경이직내 주일무적은 수양(修養) 방법을 나타내는 표어로 흔히 쓰였다.

[D-003]판서공(判書公) : 연암과 교분이 있었으며 공조 판서 · 형조 판서를 지낸 이민보(李敏輔 : 1717~1799)가 아닌가 한다.

[D-004]이른바 …… 마련이다 :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맹자가 제() 나라 선왕(宣王)을 만나서 이른바 오래된 나라라는 것은 거기에 교목이 있다고 해서 이르는 것은 아니다. 대대로 이어져 온 공신들이 있기에 그렇게 이르는 것이다.所謂故國者 非謂有喬木之謂也 有世臣謂之也라고 하였다. 연암의 말은 맹자의 이 말을 조금 변형한 것이다.

[D-005]거경(居敬) : 경으로써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거경궁리(居敬窮理)는 성리학에서 수양과 학문의 요체로 간주되었다.

[D-006]왕씨(王氏)의 세 그루 홰나무 : () 나라 때 왕우(王祐)가 뜰에다 홰나무 세 그루를 심어 놓고서, “내 자손 가운데 반드시 삼공(三公)이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그 후에 아들 왕단(王旦)이 정승이 되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삼괴왕씨(三槐王氏)’라 하였다. 宋史 卷282 王旦傳 삼괴(三槐)는 주 나라 때 삼공이 천자에게 조회할 때 궁정 뜰의 세 그루 홰나무를 바라보고 서 있었으므로 삼공을 상징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취미루기(翠眉樓記)

 

 

해마다 연말에 사신이 북경에 들어가게 되면 사대부들이 역관을 시켜 당액(堂額)의 글씨를 받아 오게 하는데, 받아 온 글씨를 보면 언제나 박명(博明)의 글씨였다. 박명은 현재 기거주(起居注) 일강관(日講官)으로서, 진실로 당액의 글씨를 잘 썼다. 그런데 그 뒤에 박명의 다른 글씨를 여러 번 보게 되었는데, 필력(筆力)이 당액의 글씨에 비하여 크게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나는 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다. 들리는 말로는 한 역관이 사물재(四勿齋)의 당액을 써 달라고 청하자 박명이 종이를 집어던지며 투덜대기를, “동방에는 호가 같은 자가 어찌 그리도 많으냐? 내 녹침필(綠沈筆)이 사물재를 쓰느라 다 닳아 버렸다.” 하더라는 것이었다.

박명은 조선 주고(主顧) 황씨(黃氏)의 사위인 까닭에 역관들이 박 기거(博起居)가 글씨를 잘 쓰는 줄 알게 되었을 것이며, 박명이 당액을 잘 썼던 것은 사물(四勿)’이란 액호(額號)를 워낙 많이 썼기 때문일 것이다.

, 우물에 빠진 모수(毛遂)와 좌중을 놀라게 한 진준(陳遵)도 똑같은 이름 때문에 오히려 당대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물며 호()란 것은 사람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거늘, ‘삼성(三省)’이니 구용(九容)’이니 하며 가는 곳마다 다 그런 호들이고, ‘눌와(訥窩)’ 묵재(黙齋)’니 하는 호들이 열에 서넛을 차지한다. 남산(南山) 밑에 사는 사람은 그 대청의 이름을 반드시 공신(拱辰)’이라 짓고, 북촌(北村) 안에 사는 사람은 그 당()의 이름을 모두 유연(悠然)’이라 짓는다. 조금이라도 원림(園林)이 있어서 잠시나마 그윽한 운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성시산림(城市山林)’이라 써서 걸어 놓고 있으니, 한 번은 있을 수 있지만 두 번은 지나친 것이다.

, 경기의 남양(南陽)이나 황해도 황주(黃州)는 지명이 중국과 우연히 같은데도, 남양에는 반드시 와룡선생(臥龍先生 제갈량(諸葛亮))을 모신 사당을 두고 황주에는 기어이 죽루(竹樓)를 짓고 마는데, 이것은 실질을 흠모한 것인가, 아니면 그 이름만 흠모한 것인가?

내가 임진강을 지나다가 강가의 절벽을 바라보았더니, 깎아지른 암벽이 수십 리나 뻗어 있었고 단풍나무 잎이 한창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몇 사람의 길손과 함께 한참 동안 물길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정색을 하며 옷깃을 여미고 똑바로 앉더니,

 

적벽(赤壁)은 예전 모습 그대로인데 다만 세월이 임술년이 아니요 기망(旣望)의 달도 없는 것이 한스럽구나.”

하기에, 내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지금부터 임술년을 기다리자면 내 나이 예순여섯 살 먹은 노인이 될 것이니, 가을 강의 찬 바람과 이슬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오. 게다가 그대는 소씨(蘇氏)가 아니요, 나 또한 그대의 노래에 화답하여 퉁소를 불지 못하니 이를 어찌하겠소?”

하고서, 서로 한바탕 웃은 일이 있었다.

이번에 이군 유일(李君有一)의 서루(書樓)에 올라가 보니, 누각이 남산 기슭에 있어 북으로는 백악산(白嶽山)을 바라보고 서로는 길마재鞍嶺 무악재를 마주하고 동으로는 낙산(駱山)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면이 확 틔어 있어 수많은 집들이 지상에 널려 있고 먼 봉우리들이 처마 위에 떠 있어 마치 미인의 눈썹처럼 아름다웠다. 누각의 이름을 취미루(翠眉樓)’로 지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누각의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마치 미인의 안방 이름과 같다 하여, 괴이하다고 질책하는 등 뭇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였다. 이군이 이러한 점을 답답하게 여겨 나에게 오해를 풀어 줄 것을 청하기에 나는 바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예로부터 임금에게 충성과 사랑을 바치는 자는 반드시 미인을 노래하며 그리워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저 미인이여, 서방 사람이로다.有美一人兮 西方之人兮 하였는데, 이 시를 설명하는 자가 말하기를, ‘서방의 미인은 주() 나라 문왕(文王)이다.’ 하였다. 굴원(屈原)과 경차(景差)의 일파도 미인을 노래하며 찬송한 시가 많았다. 지금 그대의 누각을 어찌 꼭 취미루라고 할 것이 있는가. ‘미인루(美人樓)’라 이름 지어도 무방할 것이다. 더구나 저 하늘가에 마치 그림과 같이 긴 눈썹이 검푸르게 드리워져 있으니, 시인이 노래를 지어 읊듯이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생각을 일으키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나는 그대가 남을 따라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요, 시문을 짓되 반드시 진부한 표현을 없애 버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나는 그대가 누각의 이름을 지은 것만으로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족히 기록할 만하다.

 

 

[D-001]박명(博明) : 호는 석재(晰齋) · 서재(西齋) 등이다. 몽골인으로, 원 세조(元世祖)의 후손으로 자칭하였다. 건륭(乾隆) 때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한림편수(翰林編修) 등을 거쳐 운남이서도(雲南迆西道)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을 지냈다. 저명한 고증학자 옹방강(翁方綱)과 동향(同鄕)이자 동문(同門)에다 동방(同榜)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조선 사행(使行)을 상대로 장사하여 치부한 북경 상인 황씨(黃氏) 집안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북경에 온 조선 인사들과 빈번하게 교유하였다. 장고(掌故)에 밝았으며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 봉성쇄록(鳳城鎖錄) 등이 있다.

[D-002]사물재(四勿齋) : 사물(四勿)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 즉 인을 실천하는爲仁 조목을 묻는 안연에게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고 답한 것을 가리킨다.

[D-003]녹침필(綠沈筆) : 대나무 붓대에 옻칠을 한 붓이다.

[D-004]조선 주고(主顧) : 조선인을 단골 고객으로 삼은 상인을 말한다.

[D-005]박 기거(博起居) …… 것이며 : 기거(起居)는 박명의 당시 직책인 기거주 일강관의 줄임말이다. 이본에는 이 구절의 첫머리에 유독이란 뜻의  자가 첨가되어 있다.

[D-006]우물에 빠진 모수(毛遂) : () 나라에 두 사람의 모수, 즉 평원군(平原君)의 식객(食客)으로 있는 모수와 야인(野人)인 모수가 있었다. 하루는 야인 모수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 식객 중에 한 사람이 이를 평원군에게 고하자, 평원군이 이 말을 듣고 ,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 하며 탄식하였다. 西京雜記 卷6

[D-007]좌중을 놀라게 한 진준(陳遵) : 진준은 전한(前漢) 말의 인물로 자는 맹공(孟公)이다. 당시에 열후(列侯) 가운데 진준과 성()과 자()가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진준이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언제나 진맹공(陳孟公)이 왔노라고 알렸다. 좌중이 깜짝 놀라 일어나 보면 그들이 생각했던 그 열후가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에 진준을 가리켜 진경좌(陳驚座)’라고 불렀다. 漢書 卷92 游俠傳 陳遵

[D-008]삼성(三省) : 논어 학이(學而)에서 증자(曾子) 나는 날마다 세 가지 조목에 비추어 자신을 반성한다.吾日三省吾身고 하였다.

[D-009]구용(九容) : 예기 옥조(玉藻)에 제시된 바 군자가 수신하고 처세할 때 지녀야 할 9종의 자용(姿容)으로, “발은 무겁고 손은 공손하며 눈은 단정하고 입은 다물며 목소리는 조용하고 머리는 곧게 세우며 기운은 엄숙하고 선 자세는 덕스러우며 낯빛은 씩씩하여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고 하였다.

[D-010]눌와(訥窩) :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군자는 말은 유창하지 못해도 실천은 민첩하고자 한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고 하였다.

[D-011]묵재(黙齋) : 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는 말없이 마음에 새겨 두고, 배우되 싫증을 내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힘든 일이랴.黙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라고 하였다.

[D-012]공신(拱辰) : 논어 위정(爲政)에서 덕정(德政)이란 비유컨대 제자리에 정지해 있는 북극성을 뭇별이 에워싸고 도는 것과 같다.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共之고 하였다.

[D-013]유연(悠然) : 도잠(陶潛)의 음주(飮酒) 시에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고 하였다.

[D-014]와룡선생(臥龍先生)을 모신 사당 :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 신은 본래 포의로서 남양에서 몸소 농사를 지었다.臣本布衣 躬耕於南陽고 하였다. 이덕무(李德懋) 동짓날 내제(內弟)를 그리워함至日憶內弟이란 시 제목 아래 주() 남양(南陽)에 와룡사(臥龍祠)가 있다.南陽有臥龍祠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2 嬰處詩稿

[D-015]죽루(竹樓) : 왕우칭(王禹稱)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려 있다. 왕우칭(954~1001)은 송 나라 진종(眞宗) 때 재상(宰相)과 불화하여 호북성(湖北省) 황주부(黃州府) 황강현(黃岡縣)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은 대나무의 명산지였으므로, 왕우칭은 대나무로 조촐한 누각 2칸을 짓고 나서 이 기를 지었다고 한다.

[D-016]세월이 ……  :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 임술년 가을 7월 기망(旣望)에 내가 길손들과 함께 배를 띄워 적벽(赤壁)의 아래에서 노닐었다.壬戌之秋七月旣望 蘇子與客浮舟於赤壁之下로 시작되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D-017] …… 어찌하겠소 : 소동파의 적벽부에서 소동파가 술이 거나하여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니 손님 중에 퉁소를 부는 사람이 있어 노래에 따라 화답을 하였다.客有吹洞簫者 依歌而和之고 하였다.

[D-018]이군 유일(李君有一) : 이유동(李儒東)으로, 자가 유일(有一)이고 호는 취미(翠眉)이다. 박제가(朴齊家)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요절하였다. 貞蕤詩集 卷1 戱倣王漁洋歲暮懷人六十首幷小序, 2 四悼詩

[D-019]有美一人兮 : 영남대본 연암집에는 彼美人兮로 되어 있다. 시경 패풍(邶風) 간혜편(簡兮篇)에 의거하여 바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D-020]경차(景差) : 전국(戰國) 시대 초() 나라의 시인으로서, 굴원(屈原)의 뒤를 이어 송옥(宋玉), 당륵(唐勒)과 함께 사부(辭賦)를 잘 지었다.

[D-021]긴 눈썹 : 당시(唐詩)에서 먼산遠山을 흔히 긴 눈썹脩眉에 비유하였다.

[D-022]진부한 …… 사람 : 한유(韓愈)는 답이익서(答李翊書)에서 오직 진부한 표현을 없애는 데 힘쓸 것惟陳言之務去을 역설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당(李唐)의 그림에 제()하다.

 

 

() 나라 도군황제(道君皇帝 휘종(徽宗)) 때에 하양현(河陽縣)의 삼성(三城) 사람 이당(李唐)이 있었는데, 자는 희고(晞古)이다. 화원(畵院)에 들어가 건염(建炎 남송 고종(高宗)의 연호. 1127~1130) 연간에 태위(太尉) 소연(邵淵)의 천거로 어지(御旨)에 따라 성충랑(成忠郞)과 화원대조(畵院待詔)를 제수받고 금대(金帶)를 하사받았다. 이때 나이가 80세였다.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렸으며 특히 소 그림을 잘 그렸다. 고종이 평소 그의 그림을 사랑하여 일찍이 그가 그린 장하강사도(長夏江寺圖)의 두루마리 첫머리에 제사(題辭)를 쓰기를, “이당은 당 나라 이사훈(李思訓)에 견줄 만하다.”고 하였다.

이 화첩이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은 만력(萬曆) 연간의 말기였는데 제사(題辭)로는 진인석(陳仁錫), 신용무(申用懋), 진계유(陳繼儒), 누견(婁堅), 요희맹(姚希孟), 동기창(董其昌), 문진맹(文震孟), 범윤림(范允臨), 설명익(薛明益), 진원소(陳元素) 등 여러 사람의 글씨가 있다.

설을 쇨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 그림을 내놓은 것이니, 그 값은 오천 냥이다. 그러나 그 주인의 이름은 숨기고 있다. 아마도 기계 유씨(杞溪兪氏) 집안에서 나온 물건으로 보인다. 나는 가난하여 이것을 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므로 그 내력이나마 기록해 둔다.

만력후(萬曆後) 사갑오(四甲午 1774) 섣달 그믐날 저녁 전의호동(典醫衚衕)에서 쓰다.

 

 

[D-001]() 나라 …… 하였다 : 이 단락은 연암이 도회보감(圖繪寶鑑) 4, 식고당서화휘고(式古堂書畵彙考) 44에 있는 내용을 거의 그대로 전재(轉載)한 것이다. 이사훈(李思訓 : 651~716)은 당() 나라 종실(宗室)로서 청록 산수화(靑綠山水畵)로 유명하였다.

[D-002]진인석(陳仁錫) …… 진원소(陳元素) : 모두 명말(明末)의 저명한 문사요 서화가이다. 진인석은 숭정(崇禎) 때 남경국자좨주(南京國子祭酒)를 지냈다. 明史 卷288 신용무(申用懋)는 천개(天開) 때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를 지냈다. 明史 卷218 진계유(陳繼儒)는 동기창(董其昌 : 1555~1636)과 동향으로, 산중에 은거하면서 시사(詩詞)와 서화에 전념하였다. 明史 卷298 요희맹(姚希孟)은 숭정 때 남경소첨사(南京少詹事)를 지냈다. 明史 卷216 문진맹(文震孟)은 문징명(文徵明)의 증손으로, 숭정 때 예부좌시랑 겸 동각대학사(禮部左侍郞兼東閣大學士)를 지냈으며, 문징명에 못지않은 명필이었다. 明史 卷251 범윤림(范允臨)은 서화에 뛰어나 동기창과 제명(齊名)하였다. 설명익(薛明益)은 글씨에 뛰어나 형산(衡山 : 문징명) 이후 제일인자로 평가되었다. 진원소(陳元素)는 묵란(墨蘭)을 잘 그렸으며 글씨와 시에 뛰어났다.

[D-003]전의호동(典醫衚衕) : 전의감동(典醫監洞)으로 종로구 견지동 일대에 해당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천산엽기도(天山獵騎圖) 발문

 

 

엽기도(獵騎圖)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는 모두 다섯 축()이 있는데, 진거중(陳居中)이 그린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숲 밖에 구름 기운이 음침하게 덮은 것은 바로 눈이 내릴 기세요, 꼬리가 긴 하얀 새가 갈 곳이 없어 나뭇가지에 앉았는데 그 털과 깃이 더욱 하얗게 보이고, 그 새를 흘겨보며 화살을 뽑은 되놈의 눈알은 온통 흰자위만 보이며, 말 위에서 비파를 절묘하게 타는 여인의 손가락도 하얗다.

이 그림만 보아도 북방의 한기(寒氣)가 음침하게 몰려와 온 하늘이 곧 눈으로 가득해지리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C-001]천산 : 중국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 경계에 있는 고산(高山)으로, 기련산(祁連山)이라고도 한다.

[D-001]진거중(陳居中) : 남송(南宋) 때의 유명한 화가로 영종(寧宗) 초에 화원대조(畵院待詔)가 되었다. 南宋院畵錄 卷5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발문

 

 

도읍으로서 융성하기는 송() 나라 도읍인 변경(汴京) 같은 데가 없고, 절기로서 화려하기는 청명(淸明) 같은 때가 없고, 화품(畵品)으로서 가장 섬세하기는 구영(仇英) 같은 사람이 없다.

이 두루마리 그림을 그리자면 10년 세월은 걸렸을 터이다. 이 두루마리 그림을 제외하고도 내가 본 것을 세어 보면 이미 일곱 종이나 된다.

십주(十洲) 15세의 정년(丁年) 때부터 그리기 시작했다면 이것은 95세 때의 작품에 해당할 터인데, 그때까지도 두 눈이 어둡거나 백태가 끼지 않고 털끝만큼이나 섬세하게 그릴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림 속의 거리와 점포들은 어슴푸레하여 꿈결 같고, 콩알만 한 사람과 겨자씨 같은 말들은 소리쳐 불러야 할 만큼 가물가물하다. 그중 특히 거위를 몰고 가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세심하게 그렸다.

 

 

[C-001]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 청명절(淸明節)에 변하(汴河)를 거슬러 오를 때 보이는 풍경을 그린 대작(大作)이다. 송 나라 때 장택단(張澤端)이 그렸다고 하는데, 원작은 전하지 않고 구영(仇英) 등 후대 화가들의 모방작만 전한다.

[D-001]구영(仇英) : () 나라 때의 화가로서 자는 실보(實父), 호는 십주(十洲)이다. 산수화와 화조화를 주로 그렸으며 특히 인물화를 잘 그렸다.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당인(唐寅) 등과 함께 명대 4대가로 불린다.

[D-002]정년(丁年) : 장정(壯丁)으로 간주되는 나이를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관재(觀齋)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이 두루마리 그림은 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의 소장으로서 구십주(仇十洲)의 진품이라 여기어 훗날 자신이 죽으면 무덤에 같이 묻히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씨가 병이 들자 다시 관재(觀齋 서상수(徐常修)) 서씨(徐氏)의 소장품이 되었다.

당연히 묘품(妙品)에 속한다. 아무리 세심한 사람이 열 번 이상 완상했더라도 매양 다시 그림을 펼쳐 보면 문득 빠뜨린 것을 다시 보게 된다. 절대로 오래 완상해서는 안 된다. 자못 눈을 버릴까 두려워서다.

김씨는 골동품이나 서화의 감상에 정밀하여, 절묘한 작품을 만나면 보는 대로 집안에 있는 자금을 다 털고, 전택(田宅)까지도 다 팔아서 보태었다. 이 때문에 국내의 진귀한 물건들은 모두 다 김씨에게로 돌아갔다.

그렇게 하자니 집안은 날로 더욱 가난해졌다. 노경에 이르러서는 하는 말이, “나는 이제 눈이 어두워졌으니 평생 눈에 갖다 바쳤던 것을 입에 갖다 바칠 수밖에 없다.” 하면서 물건들을 내놓았으나, 팔리는 값은 산 값의 10분의 2, 3도 되지 않았으며, 이도 이미 다 빠져 버린 상태라 이른바 입에 갖다 바치는 것이라곤 모두 국물이나 가루음식뿐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D-001]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 : 상고당은 김광수(金光遂 : 1696~?)의 호이다. 이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의 아들로, 서화에 뛰어났으며 골동품 수집과 감정으로 명성이 높았다. 연암집 3 필세설(筆洗說)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일수재(日修齋)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변경(汴京)이 전성기에는 40만 호가 되었는데 숭정(崇禎) 말기에 주왕(周王)이 변경을 지켰다.

틈장(闖將)으로 조조(曹操)라는 별호를 가진 나여재(羅汝才)가 세 차례나 쳐들어와 포위했으나, 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남녀들이 들끓어 식량과 병기를 어느 것 하나 성안에서 가져다 쓰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변경이 가장 오래 버티다 함락되었다.

바야흐로 포위된 지가 오래되다 보니, 양식이 다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 되어 보리쌀 한 되의 값이 은()으로 수천 수백 냥이나 되었고, 인삼(人蔘), 백출(白朮), 복령(茯苓) 등 모든 약재들도 다 먹어 없어지자, 수중의 물벼룩이나 뒷간의 지충(地蟲)까지도 다 보옥(寶玉)을 주고 사자 해도 살 수가 없었다.

급기야 황하가 터지고 성이 잠기게 되자 하룻밤 사이에 마침내 모든 곳이 늪지대가 되고 말았으며, 주왕부(周王府)에 있는 팔면 누각의 황금호로(黃金胡盧)가 겨우 그 꼭지만 보일 정도였다.

나는 매양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당시의 번화한 모습을 상상하였는데, 그림 속의 복전(複殿 복층의 궁전)과 주랑(周廊)과 층대(層臺)와 첩사(疊榭)를 보면, 주왕부의 황금호로 생각에 마음이 아프지 않은 적이 없었다.

 

 

[D-001]주왕(周王) : 숭정 14(1641) 주공효(朱恭枵)가 개봉(開封)의 왕, 즉 주왕으로 봉해졌다.

[D-002]틈장(闖將) : 맹장(猛將)이라는 뜻으로, 이자성(李自成) · 장헌충(張獻忠) · 나여재(羅汝才) 등을 부르는 칭호로 쓰였다. 나여재는 장헌충을 좇아 도적이 되었다가 이자성에게 귀의하였다.

[D-003]수중의 …… 지충(地蟲) : 물벼룩은 물고기의 사료로 쓰인다. 지충은 풍뎅이의 애벌레로 농작물을 해치는 땅속의 해충이다.

[D-004]황금호로(黃金胡盧) : 호로(胡盧)는 곧 호리병박葫蘆으로, 누각 지붕의 중앙 정점(頂點)에 설치한 호리병박 모양의 장식물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담헌(湛軒)이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나는 이 그림에 발문을 지은 것이 이미 여러 번이었다. 모두 다 십주(十洲) 구영(仇英)의 그림이라 일컫고 있으니, 어느 것이 진품이고 어느 것이 위조품인가?

중국의 강남(江南) 사람들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정에 어두우니, 이 두루마리 그림이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온 것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글씨는 왜 꼭 종요(鍾繇),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 유공권(柳公權)이라야 하며, 그림은 어찌 꼭 고개지(顧愷之), 육탐미(陸探微), 염입본(閻立本), 오도자(吳道子)라야 하며, 고정(古鼎)과 이기(彝器)는 어찌 꼭 오금(五金)으로 만든 선덕(宣德) 연간의 제품이라야만 하는가? 진품만 찾기 때문에 위조품이 수백 가지로 나오는 것이니, 비슷할수록 가짜가 많다.

융복사(隆福寺)나 옥하교(玉河橋)에 가면 손수 글씨나 그림을 그려 가지고 나와 파는 사람들이 있으니, 우아한지 속된지를 대충 가려서 사 두면 된다. 향로(香爐)로 말하면 건륭(乾隆) 연간의 제품이라도 모양이 고괴(古怪)하고 돈후(敦厚)한 것만 취한다면 북경 시장에서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D-001]오금(五金)으로 …… 제품 : () 나라 선종(宣宗) 선덕 연간에 강서(江西) 경덕진(景德鎭)의 관요(官窯)에서 만든 제품으로,  ·  · 구리 ·  · 납을 사용한다. 특히 선덕로(宣德爐)라 하여 선덕 연간에 만든 향로(香爐)를 일품으로 친다. 宣德鼎彛譜 卷1

[D-002]융복사(隆福寺)나 옥하교(玉河橋) :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 1 성북내외(城北內外)에 의하면 융복사는 명 나라 경종(景宗) 때 창건한 큰 절이었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북경 동성구(東城區)에 융복사가(隆福寺街)라는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 옥하교는 어하교(御河橋)라고 하며, 정양문(正陽門) 안 한림원(翰林院)과 조선관(朝鮮館 : 옥하관玉河館) 부근에 있었다. 연암의 열하일기 앙엽기(盎葉記) 및 알성퇴술(謁聖退述)에 이 두 곳에 관한 언급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우인(友人)의 국화시(菊花詩) 시축(詩軸)에 제()하다

 

 

꽃이란 들쑥날쑥 틀어지고 비스듬한 것이 도리어 정제(整齊)된 모습이 되는 것이니, 마치 진() 나라 시대 사람의 글씨가 글자를 구차스레 배열하지 않고도 줄이 저절로 시원스레 곧은 것과 같다. 만약 노란 꽃 흰 꽃을 서로 마주 대하게 한다면 이는 곧 자연스러운 멋을 잃어버리고 만다.

담배를 피워 연기로 꽃을 질식시키지 말 것이며, 속인들이 함부로 평론하여 꽃을 기죽게 하지 말 것이며, 가끔 맑은 물을 살짝 뿜어 주어 꽃의 정신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D-001]마치 …… 같다 : 이와 거의 동일한 구절이 연암집 5 답창애(答蒼厓) 여덟 번째 편지에 있다. () 나라 사람은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효자 증 사헌부 지평 윤군(尹君) 묘갈명(墓碣銘)

 

 

효자의 휘()는 관주(觀周), 자는 중빈(仲賓)으로, 칠원(漆原) 사람이다. 그의 7세조 율()이 명 나라 도독(都督) 진린(陳璘)을 따라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순천(順天)에 머물렀는데, 도독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마침내 남쪽에 그대로 남아 자손들이 대대로 살게 되었다. ()에 이르기까지 6세가 연달아 진사(進士)였다.

군은 효도로써 고을에 알려졌으며, 계모를 섬김에 있어서도 효성이 지극하였다. 군이 죽은 후 고을의 선비들이 이러한 사실을 글로 적어 관찰사에게 올리려고 하였는데, 그 글 속에는 말하기 어려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군의 맏아들 모()가 또한 효도로써 알려졌는데, 그가 길에까지 쫓아 나와서 그 글을 빼앗아 구기고 울면서 말하기를,

 

누가 우리 아버지를 효자라 해 달라던가?”

하니, 고을의 선비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향중(鄕中)에서 의논을 모으자 모두들 하는 말이,

 

이 일은 효자의 자제들과는 관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차라리 그 선행을 아주 묻어 버릴지언정 효자의 마음을 슬프게 해서야 되겠는가. 더더구나 죽은 자의 마음까지 슬프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그 글을 고쳐서 말하기 어려운 사실은 없애 버리고 그 내용을 심오하게 표현하여 관찰사에게 바치니, 관찰사가 그의 효를 살펴보았으나 증빙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내버려 두고 조정에 아뢰지 않았다.

그 후 관찰사가 세 번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장계(狀啓)를 올려 그 사안이 예조(禮曹)에 내려졌다. 그러나 예조에서도 효자가 어버이를 섬긴 시말을 보고한 글이 애매모호하여 그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다 하여 역시 내버려 둔 채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다. 이에 고을의 선비 14인이 도내 57개 고을 836인의 연명장을 가지고서 예조의 문 아래에 서서 큰 소리로,

 

어버이를 위해서는 그 잘못을 숨겨 주는 법이요, 잘못한 점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니, 우리 향당(鄕黨)에서의 정직함이란 의리상 서로 숨겨 주는 데에 있습니다.”

하고서 눈물을 흘리며 그 언사가 강개하니, 예관(禮官) 알겠다.”고 말하고는 그날로 즉시 아뢰어 효자로 정려(旌閭)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나서 이 도를 안찰(按察)하는 어사(御史)가 장계를 올려, 사헌부 지평에 추증하였다.

묘는 군 소재지 남쪽 10리 지점 곤좌(坤坐)의 묘역에 있다. 세 아들 모(), (), ()를 두었다. ()은 다음과 같다.

 

효자란 외쳐댄다고 해서 만들어지겠는가? / 孝可聲

외쳐대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 如可聲也

크게 탄식하며 명을 썼으리라. / 太息而銘

 

 

[D-001]이 일은 …… 일이다 : ‘이 일이란 효자로 표창해 줄 것을 상소하는 일을 가리킨다. 연암집 10 박 열부 사장(朴烈婦事狀)에서, 순절한 박씨를 열녀로 표창해 주도록 건의하려는 것을 박씨의 아버지가 만류하자, 동네 사람들은 이 일은 친정집과는 관계없는 일이오.是無與於本家라고 하면서 예조에 글을 올린 내용이 나온다.

[D-002]어버이를 …… 있습니다 : ‘어버이를 위해서는 그 잘못을 숨겨 준다爲親者諱는 것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민공(閔公) 원년(元年) 조에 나오는 말이다. ‘잘못한 점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觀過知仁는 것은 논어 이인(里仁)에 출처를 둔 고사성어이다. 또한 논어 자로(子路)에서 아비가 양을 훔친 사실을 증언한 아들을 정직하다고 칭찬한 섭공(葉公)에 대해 공자는 우리 향당의 정직한 사람은 이와 다릅니다. 아비는 아들의 잘못을 숨겨 주고, 아들은 아비의 잘못을 숨겨 주나니, 정직은 바로 그러한 가운데 있습니다.吾黨之直者 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양 호군(梁護軍) 묘갈명

 

 

내가 연암협(燕巖峽)에 집을 짓고 장차 가서 살 요량으로 자주 개성(開城)을 내왕하게 됨에 따라 남원 양씨(南原梁氏)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양씨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대갓집이라 어질고 호방한 장자(長者)들이 많이 출입하였다. 그 자제를 따라 숭산(崧山 송악산) 남쪽 계곡 사이에서 노닐었는데, 연못과 누대가 맑고 그윽하였으며 숲 속의 나무들이 모두 아름드리였다. 서로 함께 술을 마시면서, 좌우를 돌아보며 즐기고 있을 때 그중에 호맹(浩孟)이란 사람이 탄식하며,

 

그대는 미처 나의 백부(伯父)와 함께 노닐어 보지 못했지요. 백부께서는 좋은 술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빈객(賓客)을 좋아했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 그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청하기를,

 

우리 백부는 괴걸(魁傑)한 인물이니, 그대가 묘갈명을 지어 주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행장을 살펴보니, 군의 휘는 제영(濟泳)이요, 자는 군섭(君涉)이다. 증조는 부신(敷信)이니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조부는 의섬(義暹)이니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의 휘는 지성(枝盛)이니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비()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군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양무 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이 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나이도 젊은 데다 재산도 풍부하여 호탕하게 행동하였으며, 마음속으로 이제 훈신(勳臣)이 되었으니 족히 당세에 벼슬을 할 만하다.’ 여기고서, 의기양양하여 좋은 옷에 좋은 말을 타고 여러 조신(朝臣)들과 교유하였다. 여러 조신들도 어여삐 보고서 천거하고 위로하면서, 장차 쓸 만한 사람이라 지목하고 모두 자기 문하에서 출세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래 지날수록, 금품에 손발이 달린 듯 남몰래 오가며 벼슬자리에 샛길과 구멍이 많음을 알게 되자, 깊이 탄식하고 말하기를,

 

나는 내 고향으로 가서 즐겨야겠다.”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원과 집을 더욱 깨끗이 가꾸고 집안 살림은 모두 아우 일가에게 맡기고 관여하지 않았다. 날마다 향중의 부로(父老)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즐겁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4세요, 계미년(1763) 12 12일이었다.

효도와 우애에 독실하여 한 고을의 모범이 되었으며, 부모상을 당해서는 이미 늙어 머리가 하얀데도 예법을 지키기를 몹시 엄격히 하였다. 배위(配位)는 평산 이씨(平山李氏) 기숭(基崇)의 딸인데, 선영(先塋) 곤좌(坤坐)의 묘역에 합장하였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요절하고, 아우 제택(濟澤)의 아들 시맹(時孟)으로 대를 이었으나 그 역시 요절하였으므로 언맹(彦孟)의 아들 경헌(景憲)으로 뒤를 잇게 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농기구가 있다 해도 때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네 / 鎡基不如待時

상관에게 잘 빌붙는 건 때를 잘 타는 것만 못하다거나 / 或曰巧宦不如乘時

짧은 인생 즐겁게 살 따름이니 / 或曰人生行樂耳

부귀하기를 언제 기다리랴 하기도 하네 / 須富貴何時

 

 

[C-001]호군(護軍) : 조선 시대의 군사조직인 오위(五衛)의 정 4 품 벼슬. 실지로 맡아보는 일이 없는 산직(散職)이다.

[D-001]서로 …… 마시면서 : 원문은 相與飮酒인데, ‘相與飮食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2]양무 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 : 양무는 영조 4(1728)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려 준 공신호(功臣號)이다.

[D-003]훈신(勳臣)이 되었으니 : 원문은 勳胥 勳胥란 본래 연기가 점차 퍼져 나가듯이 다른 사람의 죄에 연좌되는 것을 뜻하나 여기서는 양무 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이 된 사실을 고려하여 이와 달리 풀이하였다.

[D-004]농기구가 …… 못하다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비록 지혜가 있다 해도 때를 잘 타는 것만 못하고, 비록 농기구가 있다 해도 때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雖有知慧 不如乘勢 雖有鎡基 不如待時는 제() 나라의 속담을 인용하였다.

[D-005]짧은 …… 기다리랴 : () 나라 양운(楊惲)이 보손회종서(報孫會宗書)에서 한 말이다. 文選 卷41》 《漢書 卷66 楊敞傳 양운은 사마천(司馬遷)의 외손으로, 선제(宣帝) 때 그의 벗 손회종이 자중할 것을 충고하는 편지를 보내오자 이를 반박하는 답서를 보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취묵와(醉黙窩) 김군(金君) 묘갈명

 

 

내가 개성(開城)에 기거할 잠시 기거할 적에 그 고을 선비들의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누차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말없이 기억해 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용모가 단정하고 진중하여, 음악과 술잔이 오가는 사이에서도 종일토록 말과 행동이 항상 처음 온 때와 같아서, 마치 덕이 높은 귀인이 스스로 뽐내지 않아도 풍모가 중후하게 보이는 것과 같았다. 나는 그를 몹시 특이하다고 여기어 더불어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가 정주 김씨(貞州金氏) 진사(進士) 형백(亨百)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서서히 그에 대한 고을 사람들의 평가를 듣게 되었는데, 모두가 충후한 장자(長者)라는 칭송을 그에게 돌리며, “()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김공(金公)뿐이다.” 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그의 행장을 읽어 보니 그 말이 더욱 징험이 되었다. 지난날 내가 말없이 특이하게 여겼던 것과 고을 사람들의 칭찬하던 것이 모두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의 자()는 석여(錫汝), 정주(貞州)는 지금의 풍덕부(豊德府)에 해당한다. () ()로부터 5()를 내려오면 휘 대춘(大春)에 이르는데, 남달리 특출하고 거침없이 행동했으며 이름난 산수에 노닐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처사(處士)라 불렀다. 이분이 바로 군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휘가 승휘(承輝)이니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고, ()는 휘가 종엽(宗燁)이니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는 휘가 시광(始光)이니 무과로 발신하여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지냈으며, ()는 옥야 임씨(沃野林氏) 학생(學生) 흥량(興良)의 딸이다. 영종(英宗) 2년 병오년(1726) 3 24일에 군을 낳았다.

군은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씩씩하여 보통 아이와 달랐으므로 사과군(司果君)이 특별히 사랑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식견과 도량이 남보다 뛰어나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하고서, 드디어 바깥일을 물리치고 아들을 보살피기에 전심하였으며, 부부가 서로 타이르고 깨우치며 남에게 널리 베풀어 선행을 많이 쌓음으로써 아들을 위해 복을 쌓기를 지극히 하였다.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장성하자 이를 가슴 아파해도 어쩔 도리가 없어 제삿날이 오면 그때마다 안절부절못하였으며, 종신토록 어린아이처럼 사모하여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거의 고인이 살아서 나타난 듯이 하였다.

한 분 형, 세 분 누나와 함께 어머니 임씨를 섬겼다. 형이 죽자 슬퍼하기를 마치 아버지를 여읜 듯이 하여, 상사(喪事)에 정성과 예()를 다했고 고아가 된 조카들과 과부가 된 형수를 따뜻하게 정성껏 돌보았으며, 가정을 자상히 보살피어 형이 살아 있을 때보다 도리어 재산이 더욱 불어나게 하였다.

어머니 임씨가 자기한테 와서 봉양을 받았는데, 성품이 자비로워서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셨다. 친족이나 이웃 사람들의 궁핍한 사정을 차마 보지 못하여,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 눈치가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보이면, 반드시 먼저 주선해 주되 한 번도 어려워하는 안색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얼마 후 어머니 상을 당하자, 상사(喪事)를 한결같이 예법에 따랐으며 순심(純心)으로 애모(哀慕)하여, 다른 일이나 쓸데없는 말로 그 마음을 저해하지 않았다.

누나들에게도 우애가 고루 지극하여, 살아 있을 때는 의식(衣食)을 함께 나누었고, 죽어서는 대신하여 그 소생 자손들을 어루만지고 가르치되, 마치 나무를 심고 북돋우듯, 벼의 모를 옮기고 물을 대듯이 하여, 기필코 자립시켜 성취가 있도록 만들었다.

가승(家乘)이 병란(兵亂)으로 불에 탔으므로 선대의 사적을 징험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서둘러 족보를 만들었다. 이때 의심난 점은 빼 버리고 미더운 것만 전하였으며, 스스로 글을 지어 종족 간에 우의를 돈독히 할 것을 서술하였다. 선조 3대의 묘에 묘지(墓誌)가 없으므로, 행적과 계파(係派)를 삼가 기록하여 무덤 속에 넣어 먼 장래에 대비하였다. 족인(族人)으로 마땅히 신주(神主)를 받들어야 하는 자가 가난하여 집을 갖지 못한 경우에는 그를 위하여 집을 사고 살림살이를 마련하여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외가(外家)가 친척도 없고 가난하여 단지 현손(玄孫) 하나만 있었는데, 그가 아직 어렸으므로 데려다 집에서 양육하였고, 장성해서는 장가를 들이고 농토를 떼어 주어 그것으로 제사를 지내고 먹고살게 해 주었다. 선조를 추모하고 후손을 염려하는 지극한 정성이 모두 이와 같았다.

친구들의 상사(喪事)에 있어서는 인정과 능력에 알맞게 부의(賻儀)를 보내어 혹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을 만들어 보내 주기도 하였으며, 가난한 일가로서 산골짜기에 들어와 생활하는 자에게는 혹 전답을 주기도 하였으며, 예전에 꿔 준 돈을 가난하여 갚지 못하는 자에게는 빚 문서를 돌려주기도 하였으며, 살림이 가난하여 시집이나 장가를 들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직접 아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반드시 도와주었으며, 농토나 농가를 가난한 사람들더러 경영하게 한 경우에는 대개 그 세를 가볍게 받아들였으므로 이에 힘입어 목숨을 부지해 가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는 어린 시절에 이미 부지런히 공부를 하여 글을 배운 지 몇 년 사이에 사서(四書)를 두루 외웠으며, 경서(經書)를 연구하려고 뜻을 두었으나, 집안 살림을 주간할 사람이 없어 어머니 임씨에게 심려를 끼칠까 염려하여 마침내 학업을 중단하였으니, 이것이 종신의 한이 되었다.

그러나 분별력이 정확하고 무릇 다스리고 계획하는 데 탁월하여 보통 사람의 생각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일이 시비(是非)가 뒤섞여 여러 논란이 한창 분분할 경우에도 군이 천천히 한마디 말로써 분석해 내면 보는 사람들이 당초에는 긴가민가하다가, 그 일이 끝내는 그 말대로 들어맞고 나서야 모두들 놀라 탄복하였다.

평소에 집안의 남녀들은 숙연하면서도 화목하였으며 자제와 동복(僮僕)들까지도 아순(雅順)하고 각자 직분을 잘 알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군은 날마다 반드시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단정히 한 다음 앉아서 일을 보살폈다. 집에 손님들이 항상 가득하였으나 반드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하였으며, 아래로 소작인이나 촌부들까지 뒤섞여 북적대면서 도와 달라고 서로 다투어도, 일마다 척척 처리하여 어느 것 하나 흡족하게 해결해 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람들을 대할 때는 간격을 두지 아니하여 흉금을 터놓고 지냈으나, 유독 자신의 몸가짐에 대해서만은 엄격하여 향중(鄕中)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고 관청에는 발조차 들이지 않았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서울에서 노닐었는데, 그때 교유한 사람들은 모두 신중한 장자(長者)들이었다. 그 영향으로 군은 종신토록 위태롭고 치욕이 될 만한 일은 가까이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더욱 관대하고 화락하며 편안하고 영화로웠다. 성곽을 두른 경치 좋은 땅에다 별장을 마련하니, 화단과 연못이 씻은 듯이 깨끗하고 나무들이 무성하게 늘어섰는데 그 속에서 날마다 유유자적하게 소요하였다.

일찍이 동으로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바닷가의 절경들을 유람하고, 서쪽으로 묘향산(妙香山)에 올라 비류수(沸流水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를 굽어보는 등 옛사람의 발자취를 뒤밟아 가며 훌쩍 속세를 벗어날 뜻을 품었다.

병이 위독하자, 가족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편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으니, 이날이 기유년(1789) 7 28일이요 향년 64세였다. 이해 9 9일에 수우리(修隅里) 고산동(高山洞) 해좌(亥坐)의 묘역에 장사 지냈다.

()는 화개 김씨(花開金氏) 학생(學生) 이태(麗兌)의 딸인데 3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재진(載晉)인데 진사(進士), 다음은 재해(載海)인데 일찍 죽었고, 다음은 재보(載普)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장녀는 김상육(金尙堉)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생원(生員) 이희조(李熙祖)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박상흠(朴尙欽)에게 출가했다.

재진은 우후(虞候) 상원(祥原) 최창우(崔昌祐)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으며, 재해는 문의(文義) 이춘교(李春喬)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딸을 낳았고 언교(彦敎)를 양자로 들였으며, 재보는 목천(木川) 마지광(馬之光)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언사(彦師)를 낳았는데 재진의 양자로 들어갔고, 딸 하나를 두었다. ()은 다음과 같다.

 

공직을 못 가졌으니 / 未嘗奉公

그 충성 어이 알며 / 焉知其忠

백성을 다스려 보지 못하였으니 / 未嘗莅民

그 어짊 어이 알리 / 焉知其仁

오직 효성과 우애는 / 惟孝友于

온갖 행실의 근원이라 / 實源百行

저 옥과 비단 같은 예물을 / 如彼玉帛

바치기에 앞서 공경을 갖추어야 하듯 / 未將也敬

못 써 보았다고 뭐가 슬프리 / 不試何傷

몸에 이기(利器) 지닌 것을 / 利器在躬

후손에게 경사(慶事) 있고말고 / 必有餘慶

선행을 쌓은 집 아니던가 / 積善之家

착한 사람 무덤이라 / 善人之藏

묘지에 심은 나무들까지 무성하도다 / 澤及松柞

이제 그 묘갈명을 새기어 / 我刻銘詩

천박해진 세상에 충고하노라 / 以勸衰薄

 

 

[D-001]내가 …… 적에 : 원문은 某嘗客松京인데, 이본에는 某嘗客遊松京으로 되어 있다.

[D-002]그때마다 안절부절못하였으며 : 원문은 輒皇皇如이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 부모의 장례를 마친 뒤에는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마치 누군가 오기를 바라건만 오지 않는 것 같다.旣葬 皇皇如有望而弗至 하였고,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공자는 석 달만 임금을 섬기지 못하면 안절부절못하였다.孔子三月無君 則皇皇如 하였다.

[D-003]사랑하고 …… 하였다 : 원문은 庶幾著存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돌아가신 부모에 대해 사랑을 바치기를 마치 살아 계신 듯이 하고, 정성을 다하기를 마치 감응(感應)하여 나타난 듯이 한다.致愛則存 致慤則著 하였다.

[D-004]아순(雅順)하고 …… 알아 : 원문은 雅馴職職인데, ‘職職 識職과 같다. 한유(韓愈)의 남양번소술묘지명(南陽樊紹述墓誌銘) 문자가 종순하여 각자 그 직분을 알았다.文從字順 各識職고 하였다.

[D-005] …… 하듯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예다 예다 하는데 옥과 비단을 이른 말이냐.禮云禮云 玉帛云乎라고 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없이 예물을 바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도 공경이란 예물을 바치기에 앞서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恭敬者 幣之未將者也라고 하였다.

[D-006]후손에게 …… 아니던가 : 주역 곤괘(坤卦) 선행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후손에게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운봉 현감(雲峯縣監) 최군(崔君) 묘갈명

 

 

군의 휘()는 모()요 자()는 모()이니 양천 최씨(陽川崔氏)이다. 고려 때에 휘 모가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금천(衿川)에 식읍(食邑)을 하사받음으로써 자손이 그곳에 대대로 살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금천에 본관을 두게 되었는데, 뒤에 개성부(開城府)로 옮겨 갔다.

군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정교하고 날렵한 솜씨를 아무도 앞설 만한 사람이 없었다. 금상(今上 영조) 4년 무신년(1728)에 영남에서 역적이 크게 일어나 서쪽으로 올라오자 군은 스스로 관부(官府)에 나아가 장사(壯士)의 선발에 끼었는데, 화살을 활통에 꽂고 말에 가슴걸이를 갖추고 활을 메고서 칼을 쥐고 나가며,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났으면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

하였다. 역적이 평정되자 양무공신(揚武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철권(鐵券)을 하사받았으며, 19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部將)을 거쳐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에 올랐다.

()이 만월대(滿月臺)에 거둥하여 보인 시험에 합격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고,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운봉 현감(雲峯縣監) 겸 영장(營將)이 되었다. 이때 운봉현과 그 속읍들에 크게 기근이 들고 역병(疫病)이 돌자 군이 한탄하며 말하기를,

 

우리 고향이 관직 진출이 막힌 지가 오래되었다. 내가 이번에 성상의 후한 은덕을 입고서 병부(兵符)와 인끈을 차고 일산(日傘)을 덮고 오마(五馬)를 몰아 부임한 것은 우리 고향의 영광이 되겠으나, 이 나라 백성들을 하나라도 살리지 못한다면 우리 고향의 수치가 될 것이다.”

하고는 녹봉을 모두 털어서 구제하고, 그래도 부족하자 관할하는 다섯 고을에서 두루 빌려 와서 진휼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고자 힘썼다. 그리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며 병들어 죽는 백성이 없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서울 집에서 죽으니 향년 71세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모좌(某坐)의 묘역에 장사 지냈다.

()의 휘()는 모()이니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의 휘는 모()이니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증조(曾祖)의 휘는 모()이니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는 정부인(貞夫人) 모씨(某氏)이며 아들과 딸은 아래쪽에 기록되어 있다. ()은 다음과 같다.

 

작은 곳간 큰 곳간 든든히 재어 놓고 / 窖廩囷倉固所藏

조금씩 골고루 나누어 주니 유사들은 착실했네 / 庾斛釜鍾有司良

운봉 현감으로 승진되었는데 재량을 잘못하여 / 升以雲峯失所量

쌀을 쌓아 놓고 썩혀 두면 우리 고향을 슬프게 하리 / 積久腐紅悲我鄕

자신은 크게 떨치지 못했어도 후손은 창성하리 / 不振厥躬留後昌

 

 

[D-001]철권(鐵券) : 공신들의 후손들에게도 각종의 특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증명서를 말하며 단서철권(丹書鐵券)’이라고도 한다.

[D-002]우리 …… 오래되었다 : ‘우리 고향이란 개성(開城)을 말한다. 조선 개국 이래 개성 사람들의 관직 진출이 오래도록 막혔었다.

[D-003]우리 …… 것이다 : 원문은 爲我鄕恥耶인데, 이본에는 爲我鄕洗恥耶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우리 고향의 수치를 씻을 수 있겠는가.”이다.

[D-004]조금씩 …… 착실했네 : 원문의 유(), (), (), ()은 모두 소량(少量)의 단위들이다. 논어 옹야(雍也)에서 공자는 제자 공서적(公西赤)이 제() 나라에 사신으로 갈 적에 사치스러운 차림을 한 사실을 들어 그의 모친에게 부( : 6 4) 아니면 유( : 16)의 식량만을 주도록 허락하면서, “군자는 급한 사람을 두루 돕지, 부자가 계속 여유 있도록 돕지는 않는다.君子周急 不繼富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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