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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6권 별집 - 서사(書事)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6권 별집 - 서사(書事)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6권 별집   서사(書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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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6권 별집

 

 

서사(書事)

 

 

이방익(李邦翼)의 사건을 기록함

 

면천 군수(沔川郡守) 신 박지원은 교명(敎命)을 받들어 지어 올립니다.

 

금상(今上 정조(正祖)) 20  () 나라 가경(嘉慶) 원년(1796)  9 21일에 제주 사람 전() 충장장(忠壯將) 이방익이 서울에 있는 자기 부친을 뵐 양으로 배를 탔다가 큰바람을 만나 표류되어 10 6일에 팽호도(澎湖島)에 닿았습니다. 관에서 의복과 음식을 주어 십여 일을 머물게 한 뒤에 호송하여 대만(臺灣)에 당도하고, 거기서 또 하문(厦門)을 경유하여 복건(福建), 절강(浙江), 강남(江南), 산동(山東) 등 여러 성()들을 거쳐 북경(北京)에 도달하고, 요양(遼陽)을 경유하여 다음해인 정사년 윤6월에 서울에 돌아오니, 수륙(水陸) 만여 리를 거쳐온 것입니다.

상께서 특별히 방익을 불러 보고 지나온 산천과 풍속을 하문하면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그 일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배를 같이 탄 8명 가운데 방익만이 문자를 알기는 하였으나, 겨우 노정(路程)만을 기록해 놓았을 뿐이요, 또 기억을 더듬어 입으로 아뢴 것도 왕왕 차서(次序)를 잃었습니다. 신 지원이 면천 군수로서 사은숙배(謝恩肅拜)하러 희정당(熙政堂)에 입시(入侍)하자 상께서 분부하시기를,

 

이방익의 사건이 몹시 기이한데 좋은 기록이 없어 애석하니 네가 한 책을 지어 올리도록 하라.”

하시었습니다. 이에 신 지원이 송구한 마음으로 명을 받들고는 물러나 그 사실을 가져다 대략 증정(證正)을 가하였습니다.

방익의 부친은 전() 오위장(五衛將) 광빈(光彬)인데 일찍이 무과에 응시하려고 바다를 건너다가 표류되어 일본 장기도(長崎島)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외국 선박들이 많이 모이고 시장과 마을이 번화하였습니다. 그때 의사(醫士) 한 사람이 광빈을 맞아 그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잘 대접하면서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광빈이 굳이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하니 의사가 내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예쁘장한 젊은 계집을 나오라 하여 광빈에게 절을 시키면서,

 

내 집에 천금 재산을 쌓아 놓았으나 사내자식은 하나도 없고 다만 이 계집애가 있을 뿐이니, 원컨대 그대는 내 사위가 되어 달라. 내가 늙어서 죽게 되면 천금의 재산은 그대의 차지가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계집을 슬쩍 보니 치아가 서리같이 하얗고 아직 철즙(鐵汁)을 물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과연 처녀였습니다. 광빈이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제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재물을 탐내고 여색에 연연해서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 버린다면 이는 개돼지만도 못한 자이다. 더구나 나는 내 나라에 돌아가면 과거에 올라 부귀를 누릴 수 있는데, 하필 그대의 재물과 그대의 딸을 탐내겠는가.”

했더니, 의사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광빈이 비록 섬 속의 무인(武人)이지만 의젓하여 열사(烈士)의 기풍이 있었으며, 그 부자(父子)가 멀리 이국에 노닐게 된 것도 역시 기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제주는 옛날의 탐라(耽羅)입니다. 북사(北史)에 이르기를, “백제에서 남쪽으로 항해하면 탐모라(耽牟羅)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땅에는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백제에 복속하였다.”라 했고, 또 이르기를,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이 위() 나라 선무제(宣武帝)에게 말하기를, ‘황금은 부여(夫餘)에서 나고 옥은 섭라(涉羅)에서 산출되는데 지금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이 됐으므로, 이 두 가지 물품은 그 때문에 올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용삭(龍朔) 초에 담라(澹羅)가 있었는데 그 왕 유리도라(儒理都羅)가 사신을 보내 입조(入朝)했다. 나라는 신라 무주(武州) 남쪽 섬에 있는데 풍속이 박루(樸陋)하여 개가죽 옷을 입고 여름에는 혁옥(革屋 가죽을 펴서 지붕을 삼은 집)에서 살고 겨울에는 움집에서 생활한다. 처음에는 백제에 복속되었으나 후에 신라에 복속되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이는 다 탐라를 가리킵니다. 우리나라 방언에 도() 이라 이르고 국() 나라라 이르는데 탐() · () · () 세 음은 모두 과 유사하니 대개 섬나라라는 뜻입니다. 옛 기록에 일컬은 바, “처음에 탐진(耽津 강진(康津))에 배를 정박하고 신라에 조회했기 때문에 탐라라 한다.”고 한 것은 견강부회의 설입니다.

송 나라 가우(嘉祐) 연간에 소주(蘇州) 곤산현(崑山縣) 해상에 배 하나가 돛대 꼭지가 부러져 바람에 날리어 해안에 닿았는데, 배 안에는 30여 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의관(衣冠)은 당 나라 사람 같았으며 홍정(紅鞓 붉은 가죽 띠)과 각대(角帶 뿔로 장식한 허리띠)를 띠고 짧고 검은 베적삼을 입었는데, 사람을 보면 모두 통곡만 하고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험 삼아 글자를 쓰게 했더니 쓴 글자 역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다닐 적에는 서로 줄지어 다녀 기러기 줄과 같았습니다. 한동안 있다가 문서 하나를 꺼내어 사람에게 보이는데, 바로 한자(漢字)로 씌어진 것으로서 당 나라 천수(天授 690~692) 연간에 둔라도(屯羅島) 수령 배융부위(陪戎副尉)에 임명한다는 제서(制書 왕의 명령서)이고, 또 하나의 문서가 있는데 바로 고려에 올리는 표문(表文)으로서 둔라도라 칭했으며 그 역시 한자를 사용했습니다. 곤산현 지사(崑山縣知事)가 사람을 시켜 그 돛대 꼭지를 수리해 주게 했는데 그 돛대 꼭지는 예전에는 선목(船木) 위에 꽂혀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인(工人)이 그를 위하여 돌리는 굴대를 만들어 돛대를 일으키고 눕히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살펴보건대, 제주는 옛날에 또한 탁라(乇羅)’라고도 불렸으며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 탐부라(耽浮羅)’라 불렀습니다. 이른바 둔라(屯羅)’라는 것은 탁라(乇羅)’의 와전입니다. 천수(天授)는 고려 태조의 연호이니 고려사 천수 20년에 탁라 도주(乇羅島主)가 내조(來朝)하여 왕이 작()을 내렸다.”는 것이 바로 그 실례입니다. 송 나라 사람이 이를 당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연호로 본 것은 더욱 틀린 것으로서, 제주 사람이 중국에 표류되어 들어간 것은 예로부터 있어 온 일입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배가 바람에 휘날려 혹은 동서로 혹은 남북으로 표류하기를 열엿새 동안이나 하였습니다. 일본에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중국으로 향하였습니다. 양식이 떨어져서 먹지 못한 것이 여러 날이었는데, 문득 큰 물고기가 배 안으로 뛰어들어 여덟 사람이 함께 산 채로 씹어 먹었습니다. 먹을 물이 다 떨어졌는데 하늘이 또 큰비를 내려 주어 모두들 두 손을 모아 받아 마시고 갈증을 풀었습니다. 배가 처음 해안에 닿았을 때는 정신이 어지러워 인사불성이 되었사온대, 어떤 사람이 멀리 서서 이를 엿보고 있더니 이윽고 무리를 지어 배에 올라 배 안에 있는 의복 따위들을 모두 챙기고 각자 한 사람씩 업고 나섰습니다. 이렇게 30여 리를 가니 마을이 나왔는데 30여 호쯤 되었고 중앙에는 공청(公廳)이 있어 곤덕배천당(坤德配天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미음을 만들어 주어 마시고 화로를 가져다 옷을 말려 주곤 하여 겨우 정신을 차려서는 지필(紙筆)을 청하여 글자를 써서 묻고서야 비로소 그곳이 중국의 복건성(福建省) 소속인 팽호도(澎湖島) 지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팽호도는 서쪽으로 천주(泉州)의 금문(金門)과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도경(圖經 지도책)에 의하면 팽호도는 동길서(東吉嶼), 서길서(西吉嶼)  36개의 섬이 있어 바다를 건너는 자는 반드시 동길서와 서길서를 경유하여야 합니다.

예전에는 동안현(同安縣)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명 나라 말기에 이르러 지역이 바다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있음으로 인해 세금 수납이 불가능하므로, 마침내 논의하여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 후 내지(內地)의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리다 못해 가끔 그 안으로 도피해 갔는데, 동안(同安)과 장주(漳州)의 백성이 가장 많았습니다. 홍모(紅毛 네덜란드인)가 대만(臺灣)을 점령했을 때 이 지역도 아울러 차지했으며, 정성공(鄭成功) 부자(父子)가 다시 대를 이어 웅거할 때 이 지역을 맏고 대만의 문호로 삼았습니다. 주위를 빙 둘러 36개의 섬이 있는데, 그중 제일 큰 섬은 마조서(媽祖嶼) 등지로 오문구(澳門口)에 두 포대(砲臺)가 있고, 그 다음은 서서두(西嶼頭) 등지이며, 각 섬들 가운데 서서(西嶼)만이 조금 높을 뿐 나머지는 다 평탄합니다. 하문(厦門)으로부터 팽호에 이르기까지는 물빛이 검푸른 색이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으며 뱃길의 중도(中道)가 되어 순풍이면 겨우 7() 반 만에 갈 수 있는 물길이지만 한번 태풍을 만나면 작게는 별항(別港)에 표류되어 한 달 남짓 지체하게 되고, 크게는 암초에 부딪쳐 배가 엎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뱃사람들은 바람을 보고 기후를 점치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정하였고, 바다에 나갈 때는 시기에 따라 각각 그 방향을 달리하였습니다. 즉 봄과 여름에는 진해기(鎭海圻)를 통해 바다로 나가는데, 정남풍이 불면 건해방(乾亥方 서쪽에서 북으로 45~60도 방향)에서 손사방(巽巳方 동쪽에서 남으로 45~60도 방향)을 향해 나아가며, 서남풍이 불면 건방(乾方 북서향)에서 손방(巽方 남동향)을 향해 나아갑니다. 겨울에는 요경(寮經)을 경유하여 바다로 나가는데, 정북풍이 불면 술방(戌方 서쪽에서 북으로 30도 방향)에서 진방(辰方 동쪽에서 남으로 30도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한밤중에는 건술방(乾戌方 서쪽에서 북으로 30~45도 방향)에서 손진방(巽辰方 동쪽에서 남으로 30~45도 방향)을 향해 나아가며, 동북풍이 불면 신술방(辛戌方 서쪽에서 북으로 15~30도 방향)에서 을진방(乙辰方 동쪽에서 남으로 15~30도 방향)을 향해 나아갑니다. 혹 위두(圍頭)를 경유하여 바다로 나가기도 하는데, 정북풍이 불면 건방(乾方)에서 손방(巽方)을 향해 나아가고 한밤중에는 건해방(乾亥方)에서 손사방(巽巳方)을 향해 나아가며, 동북풍이 불면 건술방(乾戌方)에서 손진방(巽辰方)을 향해 나아갑니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든 날이 밝아질 즈음이면 모두 팽호의 서서두(西嶼頭)를 볼 수가 있습니다. 팽호를 거쳐 대만으로 갈 때에는 모두 손방(巽方)을 향해 나아가는데 저물녘이면 대만을 볼 수 있습니다. 팽호는 애초에 벼를 심을 만한 수전(水田)이 없었고 다만 고기 잡는 것으로써 생계를 삼았으며 혹은 남새를 가꾸어 자급하는 형편이었는데, 지금은 무역선이 폭주하여 점차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여덟 사람이 함께 채선(彩船 아름답게 장식한 배)을 타고 5리쯤 가서 마궁(馬宮)의 아문(衙門)으로 나아가니 강물을 따라 채선 수백 척이 널려 있고 강가에는 화각(畵閣)이 있는데 바로 아문이었습니다. 문 안에서 소리를 높여 세 번 외치고는 우리 여덟 사람을 인도하였습니다. 마궁의 대인(大人 고위 벼슬아치)이 홍포(紅袍)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나이는 예순 남짓하고 수염이 좋게 났으며, 계단 아래에는 붉은 일산을 세우고 대상(臺上)에는 시립(侍立)해 있는 자가 80명쯤 되었습니다. 모두 무늬 새긴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혹은 남색 혹은 녹색이었으며, 혹은 칼을 차고 혹은 화살을 짊어졌고, 대하(臺下)에는 붉은 옷 입은 병졸이 30명쯤 되는데 모두 몽둥이를 쥐고 있었으며 간혹 대나무 작대기도 쥐고 있었습니다. 황룡기 2쌍을 들고 징 1쌍을 울리면서 우리 여덟 사람을 인도하여 대상에 올라가니 마궁의 대인이 바다에 표류된 연유를 묻기에, 우리는 조선 전라도 전주부(全州府) 사람으로서 이러이러한 연유로 표류하게 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고는 물러 나오니, 큰 건물이 있는데 바닥에 깐 것이 모두 주단이었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대로 만든 자리와 베개를 주고 날마다 미음 한 그릇과 닭고깃국 한 그릇을 주고 또 향사육군자탕(香砂六君子湯)을 두 때씩 주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마궁 대인의 그 궁() 자는 아마도 공() 자인 것 같습니다. ()과 궁()이 중국 음으로는 서로 같으므로 이는 응당 마씨(馬氏) 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통판(通判 주부(州府)의 장관(長官) 다음 직책)이 된 자일 것입니다. 또 탐라 사람이 이국에 표류된 경우 본적을 일컫기를 꺼리고 영광(靈光) · 강진(康津) · 해남(海南) · 전주(全州) 등의 지방으로 둘러대는 것은, ()에서 전하기를 유구(琉球)의 상선(商船)이 탐라 사람의 해를 입은 때문이라고 합니다. 혹은 유구가 아니고 안남(安南)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중환(李重煥) 택리지(擇里志)에 그에 대한 시()가 모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증거가 될 만한 옛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세속의 유전(流傳)일 뿐이니 굳이 그 진위(眞僞)를 분변하려 들 것은 없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두 척의 큰 배에 나누어 타고 서남(西南)으로 향하여 이틀 만에 대만부(臺灣府)의 북문(北門) 밖에서 하륙(下陸)했는데, 번화하고 장려하여 길 양옆에 누대가 늘어서 있고 밤에는 유리등을 켜 대낮처럼 밝았습니다. 또 기이한 새를 채색 초롱에 기르고 있는데 그 새는 시간을 알아서 울곤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대만은 명사(明史)에 계롱산(鷄籠山)이라 칭하였고 또 동번(東蕃)이라 칭했습니다. 영락(永樂) 연간에 정화(鄭和)가 동서의 대양(大洋)을 두루 원정하여 모두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유독 동번만은 멀리 피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화가 이를 미워하여 집마다 하나씩 구리 방울을 주어 그 목에 걸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구국(狗國)에 비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사람들은 도리어 그 방울을 보배로 여겨, 부자는 여러 개씩을 걸고 다니며 이는 조상이 물려준 것이라며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풍속은 꿩을 먹지 않고 다만 그 털만 취하여 장식품을 만든다 합니다. 건륭 52(1787)에 임상문(林爽文)의 난을 토벌하자 임상문의 군사가 패하여 내산(內山)으로 들어가니 생번(生番)들이 포박하여 바쳤는데 열하(熱河)의 문묘(文廟) 대성문(大成門) 바른편 벽의 비()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번들은 다 키가 왜소하며 단발한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머리카락은 칠흑색이며 양미간이나 턱 위에 팔괘(八卦) 무늬와도 같은 낙인을 찍었으며, 귓바퀴를 뚫어 주석(朱錫) 통을 꽂았는데 그 통은 앞뒤가 통하며, 혹은 횡목(橫木)을 꿰어 골패(骨牌)를 달고 다닌다고 합니다. 투왕(投旺), 균력력(勻力力), 나사회축(囉沙懷祝), 야황와단(也璜哇丹), 회목회(懷目懷)라 불리는 자들은 일찍이 열하에 입조(入朝)한 자들입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대만부(臺灣府)의 경내에는 모두 뱃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는 것을 거리로 구분하지 않고 하루를 10()으로 나눈 시간으로 기준을 삼습니다. 계롱(鷄籠)과 담수(淡水)에서 배로 복주(福州) 항구에 이르자면 5()이 걸리고, 대만항으로부터 팽호(澎湖)에 이르자면 4경이 걸리고, 팽호로부터 천주(泉州) 금문소(金門所)에 이르자면 7경이 걸립니다. 동북으로 향하여 일본국에 이르자면 72경이 걸리며, 남으로 여송국(呂宋國 스페인 치하의 필리핀 루손섬)에 이르자면 60경이 걸리며, 동남으로 대항(大港)에 이르자면 22경이 걸리며, 서남으로 남오(南澳)에 이르자면 7경이 걸리는데, 다 순풍을 만났을 때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동쪽 끝의 바다에 위치하여 달이 항상 일찍 뜨기 때문에 조수(潮水)의 드나듦도 하문(厦門)과 동안(同安)에 비교하여 또한 이른 편입니다. 바다에 큰바람이 많아서 그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태풍(颱風)입니다. 토번(土蕃)에 태풍이 오는 것을 알려 주는 풀이 있어 이 풀이 나면서 마디가 없으면 일 년 내내 바람이 없고, 마디가 하나면 태풍이 한 번 불고, 마디가 많으면 태풍 또한 그 수만큼 부는데, 들어맞지 않는 적이 없었습니다.

 녹이문(鹿耳門)은 대만 서쪽 30리에 있는데 그 형상이 사슴의 귀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양쪽 해안에 모두 포대(砲臺)를 쌓아 놓았고 바닷물이 해협 사이로 흘러 구불구불 휘돌아 들어옵니다. 그 가운데에 해옹굴(海翁崛)이 있는데 평소에는 뜬모래가 많고 물이 얕으나, 바람이 세게 불면 깊이가 돌변하여 가장 험한 곳이 됩니다. 녹이문 안으로 들어가면 수세(水勢)가 약해지고 넓은 곳이 나와 1000척의 배를 정박해 둘 만한 곳이 있으니 곧 대원항(大圓港)이라는 곳입니다.

 가의현(嘉義縣)은 정씨(鄭氏) 때에 천흥주(天興州)에 속하였다가 강희(康熙) 23(1684)에 분리되어 제라현(諸羅縣)이 되었습니다. 건륭 52(1787)에 대만의 도적 임상문이 현성(縣城)을 공격했을 때 성내의 거주민 4만 명이 제독(提督)을 도와 성을 지켰으므로, 이로 인해 칙령을 내려 제라현을 가의현으로 고쳐 정표(旌表)를 한 것입니다.

 안평진성(安平鎭城)은 일곤신(一崑身)의 위에 있는데, 곤신(崑身)이란 번어(蕃語 원주민의 말)로 모래 제방이라는 뜻입니다. 동쪽으로는 만가도두(灣街渡頭)에 닿고 서쪽의 모래언덕은 대해(大海)에 닿으며, 남쪽으로는 이곤신(二崑身)에 이릅니다. 북쪽에는 해문(海門 해협)이 있는데 원래 홍모(紅毛)의 협판선(夾板船)이 드나들던 곳입니다. 살펴보건대, 일곤신은 둘레가 5리입니다. 홍모가 성을 쌓을 때 큰 벽돌을 이용하고 동실유(桐實油)와 석회를 섞어 함께 다져서 만든 것입니다. 성의 기초는 땅 밑으로 한 길 남짓 들어가고 깊이와 너비도 한두 길이나 됩니다. 성벽 위의 성가퀴는 모두 쇠못을 박았는데 둘레가 1리이며 견고하여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동쪽 지역에는 집들과 시장을 마련하여 백성의 무역을 허용하였습니다. 성안은 누대를 오르내리듯 굴곡이 심하고, 우물물은 싱겁고 짠맛이 일정하지 않아 별도로 우물을 파 놓았는데 구멍이 하도 작아서 두레박이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고 물이 벽에서 흘러내립니다. 서쪽과 남쪽 일대는 본시 모래 돈대였는데 홍모들이 돌을 실어다 견고하게 쌓아서 파도가 대질러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적감성(赤嵌城) 역시 홍모가 쌓은 것인데 대만의 해변에 있어 안평진(安平鎭)과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 성의 둘레는 반 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계롱(鷄籠)과 담수(淡水)는 조그마한 성인데 홍모가 쌓아서 바닷바람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풍만 막아 줄 뿐 북풍은 막아 주지 못합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대만에 머문 지 7일째 되던 날 글을 올리고 돌아갈 것을 청했더니 관에서 옷 한 벌을 내주고 전별연을 열어 송별해 주었는데 손을 꼭 잡고 아쉬워하였습니다. 배로 하문(厦門)에 이르러 자양서원(紫陽書院)에 머물렀는데, 들어가서 주자(朱子)의 상()에 절을 하니 유생 수백 명이 와서 보고 다정스레 대해 주었습니다. 험한 길에는 또 죽교(竹轎)를 타고 갔으며 동안현(同安縣)의 치소(治所)와 천주부(泉州府) · 흥화부(興化府)를 지났는데, 대홍교(大虹橋 대형 무지개다리)가 있어 좌우로 용주(龍舟 용머리로 장식한 경주용 배) 만여 척이 줄지어 서 있고 노래와 풍악 소리로 시끌벅적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주자가 동안현의 주부(主簿)로 있을 때에 고사헌(高士軒)을 지어 여러 유생과 더불어 그곳에서 강습한 일이 있는데 지금의 서원이 서 있는 자리는 아마도 그 옛터인 듯합니다. 또 원() 나라 지정(至正) 연간에 고을 수령 공공준(孔公俊)이 서원을 세우고 청하여 대동서원(大同書院)이란 액호를 하사받았는데 바로 이 서원을 가리킵니다. 대홍교는 곧 낙양교(洛陽橋)로서, 당 나라 선종(宣宗)이 미행(微行)을 나와 산천의 승경(勝景)을 구경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경탄하며 하는 말이, “우리 낙양과 너무나 닮았구나.” 했기 때문에 낙양교라 이름한 것이고, 일명(一名) 만안교(萬安橋)라고도 합니다. 또 강어귀에 낭자교(娘仔橋)가 있는데 그 길이가 매우 깁니다. 예전에 바닷나루海渡에서 해마다 빠져 죽는 자가 수없이 많았기에 군수 채양(蔡襄)이 돌을 포개어서 교량을 만들고자 했는데, 조수가 밀려들어 인력으로는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침내 해신(海神)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지어 한 아전에게 주어 보냈는데 그 아전이 술을 실컷 마시고는 해안에서 반나절 동안이나 잠을 자다가 조수(潮水)가 빠질 때 깨어나 보니 문서는 이미 봉투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돌아와서 바치므로 채양이 열어 보았더니 다만 작() 자 한 자만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채양이 그 뜻을 깨닫고서 ()이 나에게 스무하룻날 유시(酉時)에 공사를 시작하라고 하는구나.”라고 하였는데 그날에 이르자 조수가 과연 물러갔습니다. 그리하여 8일 저녁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는데 소비된 금전이 1400만이요, 길이가 360()이요, 너비는 1 5()입니다. 예전에도 표류하다 돌아온 제주 사람 가운데 이 다리를 지나온 자가 있었는데, 어떤 이는 다리의 길이가 10리라 하고 어떤 이는 50리라 하는 등 안타깝게도 정확하게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기록에는 길이가 360장이고 홍공(虹空) 47개라고도 합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정월 초닷샛날 복건성(福建省)에 들어서니 문안에 법해사(法海寺)라는 절이 있었고 보리는 하마 누렇게 익었으며 귤과 유자(柚子)는 열매가 드리워 있고 의복과 음식이 우리나라와 비슷하였습니다. 우리를 보러 온 사람들이 앞 다투어 사탕수수를 던져 주었으며, 어떤 이는 머뭇거리고 아쉬워하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고 어떤 이는 우리의 의복을 입어 보고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는 옷을 안고 돌아가 가족들에게 보여 주고 돌아와서는 소중하게 감상하면서 가족들과 돌려 보았다고도 말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장주(漳州)에는 신라현(新羅縣)이 있는데 당 나라 시대에 신라가 조공을 바칠 때 거쳤던 지역이었습니다.  신라가 오() · ()을 침범하여 그 지역의 일부를 점령하여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주(泉州)와 장주 지역의 유속(遺俗)이 우리와 유사하다는 것은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 의복을 보고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아직도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행차가 지체되어 또다시 글을 올려 순무부(巡撫府)에 애걸하던 차에 관인(官人) 한 사람이 쌍가마를 타고 누런 일산(日傘)을 받치고 지나가기에 바로 나아가 길을 가로막고 진정하였더니, 그 관원이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며칠 후에 서른다섯 명의 관원이 일제히 모일 터이니 그때 다시 오라.’ 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가서 호소하였더니 뭇 관원이 돌려 가면서 보고 나서 순무부에 고하여 순검(巡檢) 한 사람을 임명해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의 서문(西門)으로 나와 40리를 가서 황진교(黃津橋)에 당도하였고, 작은 배에 올라 이틀 만에 상륙하여 서양령(西陽嶺), 보화사(寶華寺)를 경유하여 절강성(浙江省)에 당도하여 선하령(仙霞嶺)을 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선하령은 강산현(江山縣)에 있습니다. 송 나라 사호(史浩)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곳을 지나면서 돌을 쌓아 길을 냈는데 모두 360개의 층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강남성(江南省) 강산현(江山縣)에 당도한 다음 배를 타고 길을 재촉하여 떠났습니다. 강가에 작은 배가 있는데 어옹(漁翁)이 청둥오리靑鳧 수십 마리를 싣고 가서 물 한가운데에다 풀어놓으니 그 오리가 고기를 물고 배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강산현의 지명은 그곳에 강랑산(江郞山)이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뱃사람이 곡식으로 돼지를 키워 돼지고기 맛이 보통과 다른데, 사람들 말에 이르기를 희생(犧牲)으로는 대려(大荔)의 염소와 강산의 돼지가 가장 좋다.” 하였습니다. 또 고기를 잡아 오는 청둥오리는 바로 가마우지요, 물오리가 아닙니다. 일명 오귀(烏鬼)라고도 하는데 두보(杜甫)의 시에,

 

 

집집마다 오귀를 기르니 / 家家養烏鬼

끼니마다 황어를 먹게 된다 / 頓頓食黃魚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강남 지방을 그린 그림 속에 왕왕 이러한 풍경이 있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용유현(龍游縣)을 지나서 엄주(嚴州)에 당도하여 자릉대(子陵臺)에 올라보니 대() 곁에 자릉사(子陵祠)가 있었습니다. 항주부(杭州府) 북관(北關)의 대선사(大善寺)에 이르니 산천의 수려함이라든가 인구의 번성함이라든가 누대의 웅장함이 쉴 새 없이 보아도 다 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큰 배가 출렁이는 물결 위에 떠 있어 여러 명의 기녀들이 뱃머리에서 유희를 하고 있었는데 차고 있는 패옥 소리가 쟁그랑쟁그랑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용구산(龍邱山)은 용유현에 있는데 아홉 개의 바윗돌이 수려하게 솟아서 형상이 연꽃과 흡사합니다. () 나라 용구장(龍邱萇)이 이곳에 은거하였는데 엄광(嚴光)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조대(釣臺)는 바로 엄광이 은거한 곳으로서 두 벼랑이 깎아지른 듯이 서서 검주(黔州)와 무주(婺州)에서 흘러온 물을 끼고 동려(桐廬)현으로 내려가는데 꾸불꾸불 헤엄치는 용의 형세로 7리를 뻗쳐 있습니다. 물이 불어나면 물살이 부딪치는 것이 화살과 같고 산허리에 큰 바윗돌 두 개가 우뚝하니 마주 서서 기울어 떨어질 듯하므로 조대(釣臺)라고 이름한 것이니 이는 천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호사자(好事者)가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왼편에는 백 척()의 낚싯줄을 드리우고 오른편에는 아주 작은 솥 하나를 남겨 두었습니다. ()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깊은 못은 물빛이 녹옥(綠玉 에메랄드)처럼 검푸른 빛을 띠고 있고 산기슭에는 온갖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뻗어 있으며 아래에는 십구천(十九泉)이 있는데 육우(陸羽)의 품평을 거친 샘입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항주(杭州)로부터 엿새 만에 소주(蘇州)에 당도하니 서쪽에 한산사(寒山寺)가 있는데 누런 기와집 40칸이었습니다. 지현(知縣)인 왕공(王公)이 음식을 장만하여 후대하고 저희들에게 유람을 시켜 주었습니다. 배로 10리를 가니 고소대(姑蘇臺)에 당도했고 또 30리를 가니 악양루(岳陽樓)가 나왔는데 구리로 기둥을 세웠고 창문과 대청마루는 다 유리를 써서 만들었으며 대청 밑에다 못을 파고 오색 물고기를 길렀고, 앞으로는 동정호(洞庭湖)가 바라보였습니다. 거기서 돌아와서 또 호구사(虎邱寺)에 당도하니 천하에서 제일 큰 절이라고 하는데 7층의 탑이 바라보니 가없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신 지원이 일찍이 듣건대, 중국 사람들은 강산이 아름답기로는 항주가 제일이요, 번화하기로는 소주가 제일이라 하였고, 또 여자의 머리 모양새는 소주에서 유행하는 모양을 제일로 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소주는 한 주()의 부세(賦稅)만 보더라도 다른 고을에 비하여 항상 10배가 더하니, 천하의 재물과 부세가 소주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산사(寒山寺)는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 일찍이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계(張繼)의 시() 중에 고소성 밖의 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라는 시구를 익히 들어 왔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반드시 이로써 품평을 하는데 이것은 모방이 지나친 것으로, 진짜 한산사나 진짜 고소대로 말하자면 종래로 이곳에 몸소 갔다 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방익이 창문(閶門)에서 옷을 털고 태호(太湖)에서 갓끈을 씻을 수는 있으나, 그가 악양루(岳陽樓)를 보았다고 말한 것은 사뭇 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대개 태호는 동동정(東洞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고 태호 속에는 포산(包山)이 있어 이를 또 동정산(洞庭山)이라 불렀습니다. 이 동정(洞庭)이라는 이름 때문에 마침내 악주성(岳州城) 서문루(西門樓 악양루)의 이름까지 함부로 들먹였으니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태호와 관련된 여러 기록들을 부기(附記)하여 근거 없이 하는 이야기를 논파하고자 합니다.

 태호는 오군(吳郡)의 서남쪽에 있는데 넓이가 3 6000()이며 그 안에는 72개의 산이 있고 소주(蘇州), 호주(湖州), 상주(常州)를 접하고 있습니다. 일명은 구구(具區)이며 일명은 입택(笠澤), 일명은 오호(五湖)입니다. 우중상(虞仲翔)이 말하기를, “태호는 동으로 장주(長洲)의 송강(松江)과 통하고, 남으로 오정(烏程)의 삽계(霅溪)와 통하고, 서로 의흥(宜興)의 형계(荊溪)와 통하고, 북으로 진릉(晉陵)의 격호(滆湖)와 통하고, 동으로 가흥(嘉興)의 구계(韭溪)와 이어진다. 물이 무릇 다섯 길로 흐르기 때문에 오호라 이른다.” 하였습니다. 지금 호수 속에 또한 다섯 개의 호수가 있는데 즉 능호(菱湖), 막호(莫湖), 유호(游湖), 공호(貢湖), 서호(胥湖)입니다. 막리산(莫釐山)의 동에 30여 리를 두른 것은 능호요, 그 서북으로 50리를 두른 것은 막호요, 장산(長山)의 동으로 50리를 두른 것은 유호요, 무석(無錫)과 노안(老岸)을 따라 내려가서 190리를 두른 것은 공호요, 서산(胥山)의 서남쪽 60리를 두른 것은 서호입니다. 오호 이외에 또 세 개의 작은 호수, 즉 매량호(梅梁湖), 금정호(金鼎湖), 동고리호(東皐里湖)가 있는데 오인(吳人 강남 지방 사람)들은 이들을 일컬을 때 오직 태호라고만 합니다.

태호에는 봉우리가 72개가 있는데 그 시발(始發)은 천목산(天目山)으로부터 뻗어 와서 의흥(宜興)에까지 이르고 태호에 들어 우뚝 솟아 여러 산이 되었습니다. 태호의 서북쪽에 있는 산은 14개인데 그중에 마적산(馬跡山)이 가장 크며, 또 서쪽에 있는 산은 41개인데 서동정산(西洞庭山)이 가장 크고, 또 동쪽에 있는 산은 17개인데 동동정산(東洞庭山)이 가장 큽니다. 마적산과 두 동정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아득하여 속세를 벗어난 듯한데, 가까이 나아가 보면 무성한 숲과 넓은 들, 여항(閭巷)과 정사(井舍), 선궁(仙宮 도관(道觀))과 범우(梵宇 )들이 별이나 바둑알처럼 널려 있습니다. 마적산의 북쪽에는 진리산(津里山)과 부초산(夫椒山)이 큰 산인데 부초산은 부차(夫差)가 월 나라를 무너뜨린 곳입니다. 서동정산의 동북쪽에는 도저산(渡渚山), 원산(黿山), 횡산(橫山), 음산(陰山), 봉여산(奉餘山), 장사산(長沙山)이 큰 산이며, 장사산의 서쪽에는 충산(衝山), 만산(漫山)이 큰 산입니다. 동동정산의 동쪽에는 무산(武山)이 있고, 북쪽에는 여산(餘山)이 있으며, 서남쪽에는 삼산(三山), 궐산(厥山), 택산(澤山)이 큰 산입니다. 이들 산 위에도 사람들이 수백 가호가 살고 있습니다. 마적산의 서북쪽에는 마치 돈을 쌓아 놓은 듯한 산이 있는데 이름은 전퇴산(錢堆山)이라 합니다. 조금 동으로 가면 대올산(大屼山)과 소올산(小屼山)이 있으며, 석산(錫山)과 더불어 이어진 것 같으면서도 끊어져서 배가 그 사이로 다니는데 이를 독산(獨山)이라 하며, 물오리 두 마리가 서로 향하고 있는 것 같은 것이 있는데 이는 동압산(東鴨山)과 서압산(西鴨山)이며 그 가운데 삼봉산(三峯山)이 있습니다. 조금 남으로 나가면 대타산(大墮山)과 소타산(小墮山)이 있고 부초산과 더불어 마주 대하면서 조금 작은 산이 있는데 이것을 소초산(小椒山), 두기산(杜圻山)이라 합니다. 두기산은 범려(范蠡)가 일찍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서동정산의 북쪽 공호(貢湖) 가운데 두 개의 산이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데 대공산(大貢山), 소공산(小貢山)이라 이르며, 오성(五星)이 모인 것 같은 산이 있는데, 이는 오석부산(五石浮山)이라 합니다. 또 묘부산(茆浮山)과 사부산(思夫山)이 있으며, 마치 두 새가 날려다가 그친 것 같은 산이 있는데 이는 남오산(南烏山), 북오산(北烏山)입니다. 그 서쪽으로 두 산이 남북으로 마주했으나 서로 보이지 아니하며, 보이면 바로 바람 불든가 번개 치든가 하는 이상(異常) 현상이 있으니 이는 대뢰산(大雷山), 소뢰산(小雷山)입니다. 횡산의 동쪽에는 천산(千山)과 소산(紹山)이 있고 탄부산(疃浮山)이 있으며 또 동옥산(東獄山)과 서옥산(西獄山)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오 나라 왕이 이곳에다 남녀의 감옥을 각각 설치했다 합니다. 그 앞은 죽산(粥山)이라 하는데 오왕(吳王)이 죄수를 먹이던 곳이라 합니다. 거문고 같은 모양의 산이 있는데 이는 금산(琴山)이요, 방앗공이 같은 모양의 산이 있는데 이는 저산(杵山)이며, 대죽산(大竹山)과 소죽산(小竹山)은 충산(衝山)에 가까이 있습니다. 마치 물건이 수면에 뜬 것 같아서 볼 만한 것이 있는데 이는 장부산(長浮山), 나두부산(癩頭浮山), 전전부산(殿前浮山)이며, 원산(黿山)과 더불어 마주 대하여 조금 작은 것은 구산(龜山)이라 하며, 두 여자가 곱게 단장하고 서로 대한 것 같은 것은 사고산(謝姑山)입니다. 깎아지른 듯한 산머리에 기둥을 세운 것 같은 것이 있는데 옥주산(玉柱山)이요, 조금 물러서서 금정산(金庭山)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해산(峐山)이 있고 역이산(歷耳山)이 있으며, 가운데는 높고 옆이 낮은 산은 필격산(筆格山)이요, 머리를 쳐들고 달리는 것 같은 산은 석사산(石蛇山)이요, 노인이 섰는 것 같은 산은 석공산(石公山)인데 석사산과 석공산이 가장 기이합니다. 원산 · 구산과 더불어 남북으로 대면한 산은 타산(鼉山)이며 그 산 옆에는 소타산(小鼉山)이 있습니다. 소라 같은 모양의 산은 청부산(靑浮山)이며, 타산과 소타산 사이에 보일락 말락 한 산이 있는데 이것은 경람산(驚藍山)입니다. 동동정산의 남쪽으로 산머리가 뾰족하고 산자락이 갈라진 산은 전부산(箭浮山)이며, 집이 마치 틀어진 것 같이 생긴 것은 왕사부산(王舍浮山), 저부산(苧浮山)이요, 또 남으로 나가면 백부산(白浮山)이 되었으며, 택산(澤山)과 궐산(厥山)의 사이에 삿갓이 수면에 떠 있는 모습의 산이 있는데 이것은 약모산(蒻帽山)이요, 앞에서 도망가고 뒤에서 쫓아가서 잡은 모습의 산이 있는데 이는 묘서산(猫鼠山)이요, 마치 비석이 드러누워 있는 것 같은 산이 있는데 이는 석비산(石碑山)입니다. 이상은 태호 속에 있는 일흔두 봉을 열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크고 이름난 것은 두 동정산입니다.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그 아래에 동굴이 있어 물밑으로 잠행(潛行)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지맥(地脈)이라 부른다.” 하였고, 도가서(道家書)에는 이것을 제구동천(第九洞天)이라고 하였습니다.

 호구산(虎邱山)은 일명 해용봉(海湧峯)으로 불리는데 그 안에 작은 시내가 많고 굽이쳐 흐르는 물이 그 사이로 끼고 돌아 마치 달을 안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 가장 깊고도 아름다운 곳으로는 화정사(和靖祠) 터가 제일인데 푸른빛이 흰빛 너머로 찌를 듯이 비치어 하늘과 더불어 서로 닿아 있으며 그 위에는 탑이 있어 그곳에서 고소대(姑蘇臺)를 내려다보면 손바닥만 하게 보입니다. 탑을 돌아 남쪽으로 가면, 대대로 전하기를 생공강당(生公講堂)과 오석헌(悟石軒)이 그곳에 있다고 하며, 오석헌 곁에는 검지(劒池)가 있는데 칼로 잘라 놓은 듯이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수천 척 높이로 곁에 서 있으며 맑고 차가운 물이 콸콸 소리 내며 흐르는데 그 아래에 사방이 트이고 한없이 넓은 거석(巨石)이 있어 그 위에 천 명이 앉을 만하고, 가운데에는 백련지(白蓮池)가 있는데 백련이 쭉쭉 솟아나 있고 꽃은 단청(丹靑)처럼 울긋불긋 피어 있습니다. 또 조금 내려가면 조그마한 돌길이 그 사이에 구불구불 뻗어 있는데 샘이 더욱 희한하고 돌은 더욱 기이하며, 홀연 높이 우뚝 솟아올라 소나무와 대나무가 넓게 자라나 있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화정(和靖)이 글 읽던 곳이었습니다. 호구산은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장지(葬地)여서 그 속에는 금부(金鳧) · 옥안(玉雁) · 동타(銅駝) · 수정(水精) · 벽해(碧海) · 단사(丹砂) 등 여러 물건이 많았으며, 일찍이 백호(白虎)가 산마루에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 나라의 사도(司徒) 왕순(王珣)과 그 아우 민()이 함께 여기에서 살았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금산사(金山寺)는 오색의 채와(彩瓦)로써 지붕을 덮었으며 절 앞에는 석가산(石假山 인공으로 만든 돌산)이 있는데 높이가 백 길은 됨 직하고 또 섬돌을 5리나 빙 둘렀으며 이층의 누각을 세웠는데 아래층은 유생(儒生) 수천 명이 거주하면서 책을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고 위층에는 노랫소리 피리 소리가 하늘을 뒤덮었으며 낚시하는 사람들이 낚싯대를 잡고 열을 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석가산 위에는 십자형(十字形)의 구리기둥이 가로놓이고 석판(石版)으로써 대청을 만들었으니 바로 법당(法堂)이었으며, 또 종경(鐘磬) 14개가 있는데 목인(木人 나무 인형)이 때에 맞추어 저절로 치게 되어 있어 종 하나가 먼저 울면 뭇 종이 차례로 다 울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금산(金山)은 양자강 한가운데에 있는데 그 빼어난 경치가 천하의 제일이라 합니다. 산아래에는 돌들이 그 앞에 나란히 솟아 쌍궐(雙闕)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곽박(郭璞)을 장사 지낸 곳이라 전해집니다. 그곳에 있는 샘을 중냉천(中冷泉)이라 하는데 맛이 극히 달고 차서 육씨(陸氏)의 수품(水品)에는 이 샘을 동남 지방의 제일로 삼았습니다. 절로는 용유사(龍游寺)가 있고 누각으로는 비라각(毘羅閣)이 있습니다. 비라각의 남쪽은 묘고대(妙高臺)라 하는데 대() 위에는 예전에 능가실(楞伽室)이 있어 송 나라 미산(眉山) 소공(蘇公)이 일찍이 여기서 불경을 베껴 썼다 합니다. 북쪽은 선재루(善財樓)와 대비각(大悲閣)이 있으며, 탄해정(呑海亭) · 유운정(留雲亭) 두 정자가 산마루를 웅거하여 있고 그 두 정자를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강 물결이 아득하여 대()와 전(殿)이 모두 그 아래에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날아갈 듯 정신이 상쾌해지게 만든다고 합니다. 동파(東坡)의 시에,

 

 

금산의 누각은 어찌 그리 심원한가 / 金山樓閣何耽耽

종소리 북소리가 회남까지 들려오네 / 撞鍾伐鼓聞淮南

 

한 것은 이를 묘사한 것입니다. 정자 남쪽에는 돌에 묘고대(妙高臺)와 옥감당(玉鑑堂)이라는 여섯 자의 큰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조금 내려가면 탑의 기단(基壇)이 둘이 있는데 남북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송 나라 승상 증포(曾布)가 건립한 것인 듯한데, 불에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관란정(觀瀾亭)을 경유하여 돌계단을 타고 서쪽으로 내려가면, 세월이 오래되어 계단의 돌이 많이 끊어지고 짜개졌으며, 강물결을 굽어보면 하늘 위를 다니는 것 같아서 발이 몹시 부들부들 떨린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조사암(祖師巖)이라는 바위가 있어, 가운데 부분이 당 나라 배두타(裴頭陀)의 형상과 닮았는데, 배두타가 산을 개간하다가 금을 얻었으므로 이 산의 이름을 금산(金山)이라 부른 것입니다. 바위의 바른편에는 동굴이 있어 깊고 캄캄하여 들어갈 수가 없으며, 용지(龍池)가 있어 가문 해에 기도를 드리면 비구름을 일으킬 수 있다 합니다. 왼편에는 용왕사(龍王祠)가 있는데 사전(祠典)에 나타나 있습니다. 또 강산일람정(江山一覽亭)과 연운기관정(烟雲奇觀亭)이라는 두 정자가 있는데 더욱 기이하고 빼어나다 합니다. 방익이 말한 이층의 누각은 바로 강천각(江天閣)으로서, 중 혜개(惠凱), 풍몽정(馮夢楨), 오정간(吳廷簡) 등 여러 사람의 기()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산동성(山東省) 이후로는 배에서 내려 수레를 탔는데 풍속이 비루하고 인민이 검소하여 가시싸리문에 먹는 것이라고는 기장과 서숙뿐이었습니다.”

하여, 일체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방익은 나이 41세로, 갑진년(1784)에 무과에 올라 수문장(守門將)에 제수되고, 승진하여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이 되었는데, 활쏘기 시합에 으뜸을 차지하여 특별히 자급(資級)을 올린 것입니다. 상께서 방익을 불러 보고는 장유(壯游)로 고생했다고 하여 특별히 전라도 중군(全羅道中軍)을 제수하여 그의 귀환을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선조(宣祖) 치세에 무인(武人)인 노인(魯認)이라는 자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쳐서 무주(婺州)에 이르러 고정서원(考亭書院)에서 늠생(廩生)으로 지내다가 압록강(鴨綠江)을 통해 돌아왔는데, 민중(閩中 복건성) 지방의 여러 명사(名士)들로부터 받은 송별시가 지금까지 그 집에 수장되어 있습니다. 노인 이후로 국외에 멀리 나간 자로는 방익을 처음으로 꼽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앞서 연경(燕京)에 들어간 자가 들은 바로는 해적이 중국의 남해를 가로막고 있어 상려(商旅)가 통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방익이 만리 길을 뚫고 지나왔으나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조금도 듣지 못했으니 온 누리가 태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방익이 기록한 도정(途程) 주행비람(周行備覽) 등의 책들과 꼭 들어맞아 어긋나지 않으므로 이에 부록(附錄)하는 바입니다.

 

팽호(澎湖)  대만부(臺灣府)  하문(厦門)  동안현(同安縣)  천주부(泉州府)  흥화부(興化府)  복청(福淸)  복녕(福寧)  복건성성(福建省城) 법해사(法海寺)  황진교(黃津橋)  민청현(閩淸縣) 황전역(黃田驛)  청풍관(淸風館)  금사일(金沙馹)  남평현(南平縣) 대왕관(大王館)  태평일(太平馹)  건녕부(建寧府) 섭방관(葉坊館)  건양현(建陽縣) 인화관(仁化館)  서양령(西陽嶺)  만수교(萬壽橋)  보화사(寶華寺)  포성현(浦城縣)  절강성(浙江省) 선하령(仙霞嶺)  협구참(峽口站)  절강성(浙江省) 구주부(衢州府) 강산현(江山縣) 제하관(齊河館)  서안현(西安縣) 부강산(浮江山)  용유현(龍游縣)  엄주부(嚴州府) 건덕현(建德縣)  자릉조대(子陵釣臺)  동려현(桐廬縣)  부양현(富陽縣)  항주부(杭州府) 북관(北關) 대선사(大善寺)  석문현(石門縣)  가흥부(嘉興府)  소주부(蘇州府) 한산사(寒山寺)  고소대(姑蘇臺)  호구사(虎邱寺)  동동정(東洞庭)  상주부(常州府) 무석현(無錫縣)  장주(長洲)  단양현(丹陽縣)  근강부(近江府)  과주(瓜洲)  양주부(楊州府) 강도현(江都縣)  금산사(金山寺)  하신현(下信縣)  고우현(高郵縣) 고우사(高郵寺)  회부(懷府) 회현(懷縣)  청강부(淸江阜)  왕가영(王家營)  보응현(寶應縣)  산양현(山陽縣)  청호현(淸湖縣)  도원현(桃源縣) 도원역(桃源驛)  산동성(山東省) 담성현(郯城縣)  이가장(李家庄)  난산현(蘭山縣) 반성관(半城館)  서공점(徐公店)  두장점(杜庄店)  몽음현(蒙陰縣)  신태현(新泰縣) 양류점(楊柳店)  태안부(太安府) 장성관(長城館)  제하현(齊河縣)  우성현(禹城縣)  덕주(德州)  경주(景州)  하간현(河閒縣)  탁주()  낭야현(娘縣)  북경(北京)

 

팽호에서 대만까지는 수로(水路) 2일이요, 대만에서 하문(厦門)까지는 수로로 10일이며, 하문에서 복건성성(福建省城)까지는 1600리요, 복주(福州)에서 연경(燕京)까지는 6800리이고, 연경에서 우리 국경 의주(義州)까지는 2070리이며, 의주에서 서울까지는 1030리이고, 서울에서 강진(康津)까지는 900리입니다. 탐라에서 북으로 강진까지와 남으로 대만까지의 수로는 계산에 넣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합 1 2400리의 여정이 됩니다.

 

 

[C-001]이방익(李邦翼)의 사건을 기록함 : 정조 21(1797) 7월 연암이 면천 군수로 임명되어 사은(謝恩)차 입시했을 때 정조는 내가 전에 문체를 개변하라는 뜻으로 타일렀는데 과연 개변하였느냐?”고 물은 후, “내가 요즘 좋은 제목을 하나 얻어, 너를 시켜 한 편의 좋은 문자를 창작하도록 하고 싶은 지가 오래되었다.”고 하면서 이방익의 사건을 문자화하도록 명하였다. 정조는 타락한 문풍(文風)을 바로잡으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열하일기의 문체를 문책한 뒤, 연암에게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려고 이러한 지시를 내린 것이다. 過庭錄 卷3 이방익(1756~?)은 국문으로 된 표해가(漂海歌)를 남겼다.

[D-001]하문(厦門) : 샤먼, 또는 아모이(Amoy)라고 불리는 복건성(福建省) 남동부의 항구도시이다. 명말(明末)부터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상선들이 출입하였다.

[D-002]치아가 …… 처녀였습니다 : 일본에는 예전에 시집간 여자가 이빨을 까맣게 물들이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을 칠치지국(漆齒之國)이라고도 한다.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游錄), “이미 시집간 여자는 이가 모두 검은빛인데 철액(鐵液)을 약에 타서 머금으면 그 이가 곧 물들여진다. 시집가지 아니한 처녀와 기생은 모두 흰 치아이다.” 하였다. 海行總載

[D-003]북사(北史) …… 하였습니다 : 북사 94 백제전(百濟傳)에 나온다.

[D-004]담라(澹羅) : 신당서(新唐書)에는 儋羅로 표기되어 있다.

[D-005]유리도라(儒理都羅) : 신당서에는 儒利都羅로 표기되어 있다.

[D-006]당서(唐書) …… 하였습니다 : 신당서 220 동이전(東夷傳)에 나온다.

[D-007]배융부위(陪戎副尉) : 고려 시대 무관의 종 9 품 품계이다.

[D-008]송 나라 …… 주었습니다 : 이 부분은 송 나라 범성대(范成大)가 찬집한 오군지(吳郡志) 46 이문편(異聞篇)을 인용한 것이다.

[D-009]한 문공(韓文公) …… 불렀습니다 : 창려선생문집(昌黎先生文集) 21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에 나온다.

[D-010]천수 …… 내렸다 : 연암이 어떤 기록을 인용했는지 알 수 없다. 현재 전하는 고려사(高麗史)에는 그와 같은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고려사 2 세가(世家) 2 태조(太祖) 2와 권57 () 21 지리(地理) 2에 태조 21년 탐라국 태자 말로(末老)가 내조하여 성주(星主) 왕자(王子)의 작을 내렸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태조 21년은 천수 21년에 해당된다.

[D-011]정성공(鄭成功) : 1624~1662. 명 나라의 유신(遺臣)이다. 명 나라가 망한 후 중국 남부로 이동하여 청 나라에 대항하다 1661년에 대만으로 건너가 네덜란드군을 축출하고 대만에 웅거하다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D-012]마조서(媽祖嶼) : 팽호도 본섬의 옛 이름이다.

[D-013]별항(別港) : 강이나 바다로 통하는 작은 강支流을 말한다.

[D-014]저물녘이면 …… 있습니다 : 원문은 薄暮可望見으로만 되어 있다.

[D-015]예전에는 …… 있습니다 : 이 부분은 청 나라 임겸광(林謙光)이 지은 대만기략(臺灣紀略)을 인용한 것이다.

[D-016]마궁(馬宮) : 팽호군도의 주도(主島)의 중심 도시인 마공(馬公)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여신(女神)인 낭마보살(娘媽菩薩)을 제사 지내는 낭마궁(娘媽宮)이 있어 마궁(媽宮)’이라 불렸던 것이 마궁(馬宮)’으로 되고, 다시 마공(馬公)’으로 변한 듯하다.

[D-017]이중환(李重煥) …… 있습니다 :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 산수조(山水條), 인조(仁祖) 때 유구(琉球)의 세자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왕을 구속(救贖)하기 위해 국보(國寶)를 배에 싣고 항해하다가 제주도에 표류했는데 보물을 탐낸 제주 목사에게 장살(杖殺)되었다고 하며, 유구의 세자가 죽기 전에 지었다는 율시(律詩) 1수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인조 때가 아니라 광해군 초에 있었던 실제 사건이었다. 한편 영조(英祖) 말에 제주도 선비인 장한철(張漢喆)이 유구에 표류하였다가 안남(安南) 상선에 구조된 끝에 귀환한 기록인 표해록(漂海錄)에서는, 안남 선원들은 장한철 일행이 탐라인임을 알게 되자, 옛날 탐라 왕이 안남의 세자를 죽였다고 하여 그들을 중도에 내려놓고 가버렸다고 하며, 이로 미루어 예전에 제주 목사가 죽였다는 유구 세자는 실은 안남의 세자였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D-018]정화(鄭和) : 1371~1433. 명 나라 때의 환관이다. 영락 3(1405) 성조(成祖)의 명으로 해외로 나간 것을 시작으로 7차에 걸쳐 28년 동안 동남아와 아라비아 등 30여 개국을 순회하며 각국을 중국에 복속하게 하였다.

[D-019]구국(狗國) : 원래는 서융(西戎)이 세운 고국(古國)의 하나를 가리키나, 다른 나라에 대한 욕으로도 쓰인다.

[D-020]명사(明史) …… 합니다 : 명사 323 계롱전(鷄籠傳)에 나온다.

[D-021]임상문(林爽文) : ?~1788. 청 나라 때 대만의 창화(彰化) 사람이다. 농민으로 천지회(天地會)에 참가하여 창화천지회의 수령이 되었고, 건륭 51(1786)에 봉기하였으나 다음해에 진압되고 포로로 잡혀 죽었다.

[D-022]생번(生番) : 야만인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대만의 원주민을 가리킨다. 원문은 生蕃으로 되어 있다.

[D-023]투왕(投旺) …… 회목회(懷目懷) : 투왕은 주라대포사번(珠蘿大埔社番)의 두목, 균력력(勻力力)은 망자립사번(望仔立社番)의 두목, 나사회축(囉沙懷祝)은 말독사번(末篤社番)의 두목, 야황와단(也璜哇丹)은 옥오사번(屋鼇社番)의 두목, 회목회는 사자사번(獅子社番)의 두목이다. 八旬萬壽盛典 卷52

[D-024]토번(土蕃) : ‘土番이라고도 적으며, 야만적인 원주민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토번이 사는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D-025]정씨(鄭氏) : 정성공(鄭成功) 부자를 가리킨다.

[D-026]협판선(夾板船) : 중국인들이 네덜란드의 대형 범선(帆船)을 가리켜 부른 말이다. 원문은 夾版船으로 되어 있다.

[D-027]공공준(孔公俊) : 자는 사도(師道)이고, 공자의 53대손으로 지정 연간에 동안현을 맡아 다스려 치적을 올렸으며 대동서원(大同書院)을 세워 주자(朱子)를 제사 지냈다. 福建通志 卷30

[D-028]채양(蔡襄) : 1012~1067. 송 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군모(君謨)이다. 천주부(泉州府)의 태수가 되어 천주만을 횡단하는 만안교를 건설하였다.

[D-029]8 …… 완료되었는데 : 원문은 凡八日夕而工成으로 되어 있는데, 채양이 지은 만안교비문(萬安橋碑文)에 의하면 황우(皇祐) 5(1053)에 시작하여 가우(嘉祐) 4(1059)에 완공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와전된 것이거나 전사(轉寫)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福建通志 卷73

[D-030]홍공(虹空) : 아치형 교각(橋脚)을 가리킨다.

[D-031]정월 …… 들어서니 : 이방익의 표해가(漂海歌)에는 정사(丁巳)년 정월 4일에 하문부(厦門府)의 자양서원(紫陽書院)에 들었다고 하였고, “염칠일(念七日 : 27) 교자(轎子) 타고 복건(福建)으로 발행(發行)하니라고 하였다. 표해가는 청춘(靑春) 창간호(1914)에 소개되어 있다.

[D-032]우리나라 …… 것입니다 : 당시 청조 치하에서 만주족(滿洲族)의 의복을 강요당해 착용하고 있던 한족(漢族)들은 조선의 의복이 망한 명 나라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고 하여 몹시 흠모하였다.

[D-033]순무부(巡撫府) : 순무(巡撫)는 전성(全省)의 군사와 행정 등을 총찰하는 최고 직위로, 복건 순무(福建巡撫)는 복주(福州)에 주재(駐在)하였다. 淸史稿 卷116 91 職官3

[D-034]사호(史浩) : 1106~1194. 남송(南宋) 때의 사람으로 자는 직옹(直翁)이다. 장준(張浚)의 북벌론(北伐論)에 대항하여 강남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저서에는 상서강의(尙書講義)가 있다.

[D-035]강남성(江南省) 강산현(江山縣) : 강남성은 순치(順治) 2(1645)에 설치했던 성으로, 강희(康熙) 연간에 강소성(江蘇省)과 안휘성(安徽省)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강산현은 절강성(浙江省) 구주부(衢州府)에 속한 현이었다. 淸史稿 卷65 40 地理12

[D-036]강산현의 …… 것입니다 : 강랑산(江郞山) 수서(隋書)에 강산(江山)이라 하였다. 淸史稿 卷65 40 地理12

[D-037]집집마다 …… 된다 : 두시상주(杜詩詳註) 20 희작배해체견민(戱作俳諧體遣悶)에 나오는 구절이다.

[D-038]용구장(龍邱萇) : 한 나라 때의 은사(隱士)로서 왕망(王莽)을 피해 태말산(太末山)에 들어가 은둔하였다. 왕망이 죽고 유현(劉玄)이 황제가 되자 관직에 나왔으나 곧 병으로 죽었다.

[D-039]엄광(嚴光) : 자는 자릉(子陵)이고 한 나라 때의 은사(隱士)이다. 광무제(光武帝)와 동문수학하였으며 광무제가 즉위한 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서 은둔하였다.

[D-040]아래에는 …… 샘입니다 : 당 나라 은사(隱士)인 육우(陸羽 : 733~804)가 지은 다경(茶經)에 천하의 물맛을 품평하여 등급을 나누었는데 조대(釣臺) 아래에 있는 이 샘의 물이 열아홉 번째를 차지하였으므로 십구천(十九泉)이라 하였다. 육우는 차를 좋아하고 다도(茶道)에 밝아 다신(茶神), 다성(茶聖), 다선(茶仙)으로 불린다. 浙江通志 卷19

[D-041]한산(寒山)과 습득(拾得) : 당 나라 태종 때의 고승으로 서로 교우관계를 맺었다.

[D-042]장계(張繼) …… 한산사 : ‘고소성 밖의 한산사 풍교야박(楓橋夜泊)’ 시의 한 구절로서, 이 시의 전문은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眠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이다. 장계(?~779년경)는 당 나라 때의 시인으로 자는 의손(懿孫)이며, 저서에 장사부시집(張祠部詩集)이 있다.

[D-043]창문(閶門)에서 …… 있으나 : 창문은 소주(蘇州)의 성문 이름으로, () 나라 왕 합려(闔閭)가 초() 나라를 격파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옷을 턴다振衣는 것은 먼지를 털어 복장을 단정히 하는 것을 말한다.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新浴者必振衣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니 나의 갓끈을 씻을 만하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는 모두 굴원(屈原) 초사(楚辭) 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 구절이다.

[D-044]악주성(岳州城) 서문루(西門樓) : 악양루(岳陽樓)를 가리킨다. 동정호(洞庭湖) 옆에 있다.

[D-045]우중상(虞仲翔) : 우번(虞翻 : 164~232)의 자가 중상(仲翔)이다. 우번은 삼국 시대 오() 나라 사람으로 손권(孫權)에게 기용되었으나 직언을 자주하여 좌천되었다. 저명한 학자로서 특히 주역에 밝았다.

[D-046]부차(夫差) : 오 나라 왕으로 선왕 합려(闔閭)의 원수를 갚기 위해 월 나라 왕 구천(句踐)을 부초(夫椒)에서 크게 무찔렀다. 나중에 다시 월 나라에 패하여 나라가 멸망하고 자신은 자살하였다.

[D-047]범려(范蠡) : 춘추 시대 초() 나라 사람으로, 월 나라 왕 구천을 보좌하여 오 나라를 멸망시킨 뒤, 월 나라를 떠나 제() 나라로 가서 변성명하고 상업으로 치부하였다.

[D-048]왕사부산(王舍浮山) : 고소지(姑蘇志) 9에는 王舍山으로 되어 있다.

[D-049]생공강당(生公講堂)과 오석헌(悟石軒) : 호구산의 검지(劍池) 앞에 천 명이 앉을 만한 넓고 평편한 거석(巨石)이 있는데, 그곳이 진() 나라 때의 신승(神僧) 축도생(竺道生)이 설법한 자리 즉 생공의 강당이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때 축도생의 설법을 듣고 머리를 끄덕였다고 하는 점두석(點頭石) 옆에 오석헌이 세워졌다고 한다. 姑蘇志 卷8》 《江南通志 卷31》 《方輿勝覽 卷2

[D-050]화정(和靖) : 윤순(尹焞 : 1071~1142)의 호이다. 윤순은 송 나라 하남(河南) 사람으로 자는 언명(彦明) 또는 덕충(德充)이며, 정이(程頤)에게서 수학하였다. 저서에 논어해(論語解), 문인문답(門人問答), 화정집(和靖集)이 있다.

[D-051]쌍궐(雙闕) : 궁전이나 사묘(祠廟), 능묘(陵墓) 등의 앞쪽 양편에 설치하는 누대를 말한다.

[D-052]곽박(郭璞) : 276~324. 동진(東晉)의 학자로서 자는 경순(景純)이다. 진사(晉史)의 편수에 참여하였고 이아(爾雅), 산해경(山海經) 등의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D-053]육씨(陸氏)의 수품(水品) : 육우(陸羽) 다경(茶經)에서 물맛을 평한 것을 가리킨다.

[D-054]미산(眉山) 소공(蘇公) :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소식의 본향이 미주(眉州)의 미산(眉山)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D-055]금산의 …… 들려오네 : ‘금산에서 배를 타고 초산에 이르다自金山放船至焦山 시에 나온다. 한시대성(漢詩大成) 본에는 이 구절이 金山樓觀何耽耽, 撞鍾擊鼓聞淮南으로 되어 있다.

[D-056]증포(曾布) : 1036~1107. 송 나라 때 관료로서 자는 자선(子宣)이며 증공(曾鞏)의 아우이다.

[D-057]배두타(裴頭陀) : 두타(頭陀)는 탁발승이라는 뜻이다. 배두타는 당 나라 때 상국(相國) 배휴(裴休)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영특했다고 하며, 출가하여 두타행(頭陀行)을 하다가 금산에 이르렀다고 한다. 江南通志 卷174

[D-058]노인(魯認) : 1566~1622. 호는 금계(錦溪)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남원(南原)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잡혀갔으나 명 나라로 탈출하여 무이서원(武夷書院 : 고정서원考亭書院)에서 주자학을 배우며 지내다가, 신종(神宗)이 조서(詔書)를 내려 포로가 되어서도 절개를 지킨 것을 칭찬하면서 귀환을 허락함에 따라 3년 만인 1599년에 귀국하였으며, 선조(宣祖)도 그의 충절을 칭찬하고 수원 부사에 임명하였다. 당시 일본과 중국의 풍물을 기록한 금계일기(錦溪日記)가 전한다. 그의 문집 금계집(錦溪集)에 명 나라 인사들의 송별시가 수록되어 있다.

[D-059]동안현(同安縣) : 복건성(福建省) 천주부(泉州府)에 속한 현이다.

[D-060]천주부(泉州府) : 천주부의 치소(治所), 현재 천주시(泉州市)를 가리킨다.

[D-061]복청(福淸) : ‘복청현(福淸縣)’이라야 정확한 표기가 된다. 복건성 복주부(福州府)에 속한 현이다.

[D-062]복녕(福寧) : ‘복녕부(福寧府)’라야 정확한 표기가 된다. 복건성에 속한 부이다.

[D-063]복건성성(福建省城) : 복주부(福州府)의 치소로 현재의 복주시(福州市)인 복주(福州)에 있었다.

[D-064]민청현(閩淸縣) : 복주부(福州府)에 속한 현이다.

[D-065]남평현(南平縣) : 복건성 연평부(延平府)에 속한 현이다.

[D-066]섭방관(葉坊館) : 복건성 건녕부(建寧府) 건안현(建安縣)에 속한 역() 이름이다. 淸史稿 卷70 45 地理17 福建

[D-067]건양현(建陽縣) : 복건성 건녕부에 속한 현이다.

[D-068]포성현(浦城縣) : 복건성 건녕부에 속한 현이다.

[D-069]선하령(仙霞嶺) : 절강성 구주부(衢州府) 강산현(江山縣)에 있다. 淸史稿 卷65 40 地理12 浙江

[D-070]서안현(西安縣) : 절강성 구주부에 속한 현이다.

[D-071]용유현(龍游縣) : 절강성 구주부에 속한 현이다.

[D-072]자릉조대(子陵釣臺) : 절강성 엄주부 동려현(桐廬縣) 부춘산(富春山)에 있다.

[D-073]동려현(桐廬縣) : 절강성 엄주부에 속한 현이다.

[D-074]부양현(富陽縣) : 절강성 항주부(杭州府)에 속한 현이다.

[D-075]석문현(石門縣) : 절강성 가흥부(嘉興府)에 속한 현이다.

[D-076]가흥부(嘉興府) : 가흥부의 치소(治所), 현재의 가흥시(嘉興市)를 가리킨다.

[D-077]소주부(蘇州府) : 강소성(江蘇省)에 속한 부이다.

[D-078]장주(長洲) : 강소성 상주부 무석현에 속한 모래섬의 이름이다. 淸史稿 卷58 33 地理5 江蘇

[D-079]단양현(丹陽縣) : 강소성 진강부(鎭江府)에 속한 현이다.

[D-080]근강부(近江府) : ‘진강부(鎭江府)’의 잘못인 듯하다. 진강부의 치소는 현재의 진강시(鎭江市)이다.

[D-081]과주(瓜洲) : 강소성 양주부(楊州府) 강도현(江都縣)에 속한 모래섬으로 군사와 교통의 요지였다. 淸史稿 卷58 33 地理5 江蘇

[D-082]금산사(金山寺) : 강소성 진강시(鎭江市)의 서북쪽 금산(金山)에 있다.

[D-083]하신현(下信縣) : 미상(未詳). 강소성 내에는 하신현이 없다.

[D-084]고우현(高郵縣) : ‘고우주(高郵州)’의 잘못인 듯하다. 고우주는 강소성 양주부에 속한 주이다.

[D-085]회부(懷府) 회현(懷縣) : 미상(未詳). 강소성 내에는 회부가 없다. ‘회안부(淮安府)’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회현 역시 강소성 내에는 없다.

[D-086]청강부(淸江阜) : 강소성 회안부(淮安府) 청하현(淸河縣) 북쪽에 있던 청강포(淸江浦)를 가리키는 듯하다.

[D-087]왕가영(王家營) : 강소성 회안부 청하현에 있던 진()의 이름이다.

[D-088]보응현(寶應縣) : 강소성 양주부에 속한 현이다.

[D-089]산양현(山陽縣) : 강소성 회안부에 속한 현이다.

[D-090]청호현(淸湖縣) : 미상(未詳). 강소성 내에는 청호현이 없다. 회안부 청하현(淸河縣)’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D-091]도원현(桃源縣) : 강소성 회안부에 속한 현이다.

[D-092]담성현(郯城縣) : 산동성 기주부(沂州府)에 속한 현이다.

[D-093]난산현(蘭山縣) : 산동성 기주부에 속한 현이다.

[D-094]서공점(徐公店) : 난산현에 속한 역()의 하나이다. 淸史稿 卷61 36 地理8 山東

[D-095]몽음현(蒙陰縣) : 산동성 기주부에 속한 현이다.

[D-096]신태현(新泰縣) : 산동성 태안부(泰安府)에 속한 현이다.

[D-097]태안부(太安府) : ‘태안현(泰安縣)’의 잘못인 듯하다. 태안현은 태안부에 속한 현으로, 그 치소는 현재의 태안시(泰安市)에 있다.

[D-098]제하현(齊河縣) : 산동성 제남부(濟南府)에 속한 현이다.

[D-099]우성현(禹城縣) : 산동성 제남부에 속한 현이다.

[D-100]덕주(德州) : 산동성 제남부에 속한 주이다.

[D-101]경주(景州) : 직례(直隸) 하간부(河間府)에 속한 주이다.

[D-102]하간현(河閒縣) : 직례 하간부에 속한 현이다.

[D-103]탁주() : 직례 순천부(順天府)에 속한 주이다.

[D-104]낭야현(娘縣) : ‘양향현(良鄕縣)’의 잘못인 듯하다. 양향현은 직례 순천부에 속한 현으로, 탁주에서 북경으로 향하는 도중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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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5권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5권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5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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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5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

 

척독(尺牘)

1 자서(自序)

2 경지(京之)에게 답함

3 두 번째 편지

4 세 번째 편지

5 중일(中一)에게 보냄

6 두 번째 편지

7 세 번째 편지

8 창애(蒼厓)에게 답함

9 두 번째 편지

10 세 번째 편지

11 네 번째 편지

12 다섯 번째 편지

13 여섯 번째 편지

14 일곱 번째 편지

15 여덟 번째 편지

16 아홉 번째 편지

17 설초(雪蕉)에게 보냄

18 치규(穉圭)에게 보냄

19 중관(仲觀)에게 보냄

20 어떤 이에게 보냄

21 중옥(仲玉)에게 답함

22 두 번째 편지

23 세 번째 편지

24 네 번째 편지

25 북쪽 이웃의 과거 급제를 축하함

26 사강(士剛)에게 답함

27 영재(泠齋)에게 답함

28 두 번째 편지

29 아무개에게 답함

30 성지(誠之)에게 보냄

31 석치(石癡)에게 보냄

32 두 번째 편지

33 세 번째 편지

34 네 번째 편지

35 어떤 이에게 보냄

36 아무개에게 보냄

37 두 번째 편지

38 군수(君受)에게 답함

39 중존(仲存)에게 보냄

40 경보(敬甫)에게 보냄

41 두 번째 편지

42 원심재(遠心齋)에게 보냄

43 초책(楚幘)에게 보냄

44 성백(成伯)에게 보냄

45 두 번째 편지

46 종형(從兄)에게 올림

47 두 번째 편지

48 대호(大瓠)에게 답함

49 두 번째 편지

50 세 번째 편지

51 담헌(湛軒)에게 사과함

 

 

 

자서(自序)

 

 원문 60자 빠짐  우자(右者)는 삼가 아룁니다라는 의미의 우근진(右謹陳)’을 들어 타매(唾罵)하고 있다. 이른바 우근진이란 말이 저열한 표현인 것은 사실이나, 세상에 붓대를 쥐고 글줄이나 쓴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마는, 그들의 글을 책으로 간행한 것들을 보면 모두가 가득 늘어만 놓은 음식의 찌꺼기처럼 시금떨떨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왜 구태여 문서의 서두어나 말을 꺼낼 때 사용하는 상투어만을 나무라는지 모를 일이다. 제전(帝典 서경(書經) 요전(堯典) · 순전(舜典)) 월약계고(曰若稽古)’나 불경(佛經) 여시아문(如是我聞)’도 바로 지금의 우근진과 같은 성격의 투식어일 뿐이다.

특히 봄 숲에서 새 울음을 들으면 소리마다 각기 다르고 해시(海市)에서 보물을 둘러보면 하나하나 다 새로우며, 연잎 위의 이슬은 본디 둥글고 초() 나라의 박옥(璞玉)은 깎지 않은 채로 있다. 이것이 바로 척독가(尺牘家)들이 논어(論語)를 조술(祖述)하고 풍아(風雅 시경(詩經))로 거슬러 올라간 점이다. 사령(辭令)으로 말하면 자산(子産)과 숙향(叔向)을 본받고 장고(掌故)로 말하면 신서(新序) 세설(世說)을 본받았다. 확실하고 적절한 점으로 말하면 양책(良策)을 올린 가 태부(賈太傅 가의(賈誼))나 정사(政事)를 주관하던 육 선공(陸宣公 육지(陸贄))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저들은 일단 고문사(古文辭)라 하면 단지 서()와 기()가 으뜸이 되는 줄만 알아서, 거짓으로 글을 짓고 부화한 표현들을 끌어다 쓰고는, 정작 이러한 글들에 대해서는 소가(小家)의 묘품(妙品)이라고 배척하여, 밝은 창가의 조촐한 궤석(几席)에서 잠이 깬 뒤 베개 고이고 읽을 따름이다.

무릇 공경은 예()를 갖추어야 확립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엄숙하고 근엄하게만 대하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 더 나아가 큰 손님이라도 맞이하듯 도포를 떨쳐입고는 대충 안부나 묻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버이를 공경한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예를 안다고는 할 수 없다. 기쁜 안색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곁에서 어버이를 봉양하는 모습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빙그레 웃으며 아까 한 말은 농담이다.” 한 것은 공자다운 멋진 해학이요, “아내가 닭이 울었다 하자, 남편은 아직 어두운 새벽이다 말하네.” 한 것은 시인(詩人)의 편지인 셈이다.

우연히 상자 속을 뒤지다가, 추운 겨울을 맞아 창구멍을 바르려던 참에 옛날에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의 부본(副本)으로 쓸데없는 것들을 찾아내었는데, 모두 50여 건이었다. 어떤 것은 글자가 파리 대가리만 하게 작고 어떤 것은 종이가 나비 날개마냥 얇다. 어떤 것은 장독 덮개로 쓰기에 넉넉하고 어떤 것은 농을 바르기에 부족하다. 이에 한 권으로 베껴 내어 방경각(放瓊閣)의 동루(東樓)에 보관한다.

임진년(1772) 맹동(孟冬) 상한(上澣)에 연암거사(燕巖居士)는 쓴다.

 

 

[D-001]문서의 …… 상투어 : 앞의 우근진(右謹陳)’은 관청에 청원하는 문서, 즉 소지(所志)의 서두어이다. 다음에 나오는 옛일을 상고하건대라는 뜻인 월약계고(曰若稽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노라라는 뜻인 여시아문(如是我聞) 서경이나 불경에서 말을 꺼낼 때 사용하는 상투어이다.

[D-002]해시(海市) : 일반적으로는 맑은 날 바다 한가운데 나타난다는 화려한 성시(城市), 즉 신기루(蜃氣樓) 현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해안의 성시로 보아야 할 듯하다. 우상전(虞裳傳)에 소개된 이언진(李彦瑱)의 시 해람편(海覽篇)에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각종 보물들이 거래되고 있음을 노래하면서 페르시아 상인들도 눈이 부셔하고 절강의 성시들도 빛이 바랬네.波斯胡目眩 浙江市色奪라고 하였듯이, 중국 동남 해안의 성시들에서는 각종 보석 거래를 비롯하여 대외무역이 매우 활발했다.

[D-003]() 나라의 박옥(璞玉) : 초 나라 사람 화씨(和氏)가 얻었다는 다듬어지지 않은 옥덩어리로, 화씨벽(和氏璧)이라고도 한다.

[D-004]이것이 …… 점이다 : 척독(尺牘)이 문학적으로 볼 때, 논어 시경의 참신하면서도 진솔한 문답체 표현 방식을 계승했다는 뜻이다. 그 좋은 예가 자서의 후반에 인용되어 있다.

[D-005]사령(辭令)으로 …… 본받고 : 사령은 말로써 응대(應對)하는 것을 말한다. 외교에서는 특히 사령을 잘해야 한다. () 나라가 형법(刑法)의 조문을 새긴 정()을 주조하자, () 나라 숙향(叔向)이 정 나라 공자(公子) 자산(子産)에게 서신을 보내어 형벌로써 백성을 다스리려 하는 것을 힐난했으며, 자산은 이러한 숙향의 서신을 받고 그의 충고에 감사하는 답신을 보냈다. 春秋左氏傳 昭公 6 3 이는 서신을 통해 사령을 잘한 예이다.

[D-006]신서(新序) 세설(世說) : 둘 다 한() 나라 때 유향(劉向)이 지은 책이다. 신서는 춘추전국 시대의 고사를 모아 놓은 책이다. 세설은 실전(失傳)되어 내용을 알 수 없는데, 후세의 세설신어(世說新語)는 이 책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D-007]양책(良策) …… 아니다 : 가의(賈誼)의 상소(上疏)나 육지(陸贄)의 주의(奏議)에 못지않다는 뜻이다. () 나라 때 가의는 문제(文帝)에게 치안책(治安策)을 올렸으며, 당 나라 때 육지는 덕종(德宗)에게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는 주의를 올려 국정을 잘 보좌하였다.

[D-008]소가(小家) : 대가(大家)의 반대로, 시시한 군소 작가들이란 뜻이다.

[D-009]격식에 …… 봉양하는 : 원문은 左右無方인데,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부모를 섬길 때에는 곁에서 봉양하는 데 격식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左右就養無方고 하였다.

[D-010]빙그레 ……  : 공자가 무성(武城) 지방에 가서 백성들이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빙그레 웃으며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 하며 넌지시 조롱하였다. 무성의 수령인 제자 자유(子游)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예전에 공자가 한 말을 들어 따지자, 공자가 제자들을 보고서 얘들아 자유의 말이 옳다. 아까 한 말은 농담이다.” 하였다. 論語 陽貨

[D-011]아내가 …… 말하네 : 시경(詩經) 계명(鷄鳴)의 첫 구절로서, 아내가 닭이 울었으니 일하러 나가라고 하자 남편이 나가기 싫어 아직 어두운 새벽이라고 둘러대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주자(朱子)는 이 시를 부부가 서로 권계(勸戒)한 것이라고 주해(註解)하였으나, 연암은 부부가 일상적인 집안일로 문답을 나눈 시로 보았다.

[D-012]시인(詩人) : 계명(鷄鳴)을 지은 옛 시인을 가리킨다.

[D-013]종이가 …… 얇다 : 원문은 紙如蝶翅인데, 왕안석(王安石)이 나비를 노래한 시에 날개가 가루보다 가볍고 비단보다 얇다.翅輕於粉薄於繒 하였다.

[D-014]장독 …… 넉넉하고 : ‘장독 덮개覆瓿란 가치가 없는 저작을 가리키며, 주로 자신의 저작에 대한 겸양의 말로 쓰인다. () 나라 때 유흠(劉歆)이 양웅(揚雄)의 태현(太玄)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장독 덮개로나 쓸 것이라고 풍자한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경지(京之)에게 답함

 

 

작별할 때의 말씀이 여전히 잊히지 않지만, 이른바 그대를 천리까지 전송해도 한 번 이별은 종당 있기 마련인 것을 어찌하오리까. 다만 한 가닥 희미한 아쉬움이 하늘하늘 마음에 얽혀 있어, 마치 공중의 환화(幻花)가 어디선가 날아왔다가 사라지고 나서도 다시 하늘거리며 아름다운 것과 같습니다.

예전에 백화암(白華菴)에 앉았노라니, 암주(菴主)인 처화(處華) 스님이 먼 마을에서 바람 타고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를 듣고는, 그의 비구(比丘)인 영탁(靈托)에게 게()를 전하기를,

 

“ ‘탁탁 치는 소리와 땅땅 울리는 소리 중에 어느 것이 먼저 들렸겠느냐?”

하니, 영탁이 손을 맞잡고 공손히 대답하기를,

 

먼저도 아니고 나중도 아닌, 바로 그 사이에 들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어제 그대가 여전히 정자 위에서 난간을 따라 배회하고 있을 때, 이 몸도 또한 다리 가에서 말을 세우고 있었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아마 1리쯤 되었지요.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았던 곳도 역시 바로 그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D-001]작별할 …… 않지만 : 원문은 別語關關인데, ‘關關 시경 관저(關雎)에 나오는 표현으로, 원래는 새들이 서로 짝을 그리워하면서 울음소리로 화답함을 뜻한다.

[D-002]그대를 …… 마련 : 멀리까지 전송할 것이 없다고 상대방을 위로하는 말로, 전송하는 사람을 만류할 때 흔히 쓰는 속담이다. 수호전(水滸傳)에서 무송(武松)이 송강(宋江)을 만류하며 형님은 멀리 전송할 것 없소이다. 속담에 그대를 천리까지 전송해도 끝내 한 번은 이별해야 한다.’고 했소.尊兄不必遠送 常言道 送君千里 終須一別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부지런하고 정밀하게 글을 읽기로는 포희씨(庖犧氏)와 대등할 이 뉘 있겠습니까. 글의 정신과 의태(意態)가 우주에 널리 펼쳐 있고 만물에 흩어져 있으니, 우주 만물은 단지 문자나 글월로 표현되지 않은 문장입니다.

후세에 명색이 부지런히 글을 읽는다는 자들은 엉성한 마음과 옅은 식견으로 마른 먹과 낡은 종이 사이에 시력을 쏟아 그 속에 있는 좀오줌과 쥐똥이나 찾아 모으고 있으니, 이는 이른바 술찌끼를 잔뜩 먹고 취해 죽겠다.” 하는 격이니 어찌 딱하지 않겠습니까.

저 허공 속에 날고 울고 하는 것이 얼마나 생기가 발랄합니까. 그런데 싱겁게도 새 ()’라는 한 글자로 뭉뚱그려 표현한다면 채색도 묻혀 버리고 모양과 소리도 빠뜨려 버리는 것이니, 모임에 나가는 시골 늙은이의 지팡이 끝에 새겨진 것과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

더러는 늘 하던 소리만 하는 것이 싫어서 좀 가볍고 맑은 글자로 바꿔 볼까 하여 새 ()’ 자로 바꾸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글만 읽고서 문장을 짓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병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로 그늘진 뜰에 철 따라 우는 새가 지저귀고 있기에,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마구 외치기를, “이게 바로 내가 말하는 날아갔다 날아오는 글자요,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하는 글월이다. 다섯 가지 채색을 문장(文章)이라 이를진대 문장으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오늘 나는 참으로 글을 읽었다.” 하였습니다.

 

 

[D-001]시골 ……  : 나라에서 경로(敬老)의 뜻으로 노인들에게 하사하던 구장(鳩杖)을 가리킨다. 지팡이 끝에 비둘기 모양을 새겼다.

[D-002]다섯 …… 이를진대 : 다섯 가지 채색은 청() · () · () · () · ()을 가리킨다. 문장(文章)이란 말에는 원래 무늬나 문채(文彩)라는 뜻이 있다. 순자(荀子)의 부() 다섯 가지 채색을 갖추어야 문장이 이루어진다.五采備而成文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그대가 태사공(太史公) 사기(史記)를 읽었으되 그 글만을 읽었을 뿐 그 마음은 읽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읽고서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장면이나 생각하고, 자객열전(刺客列傳)을 읽고서 고점리(高漸離)가 축()을 치던 장면이나 생각하니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늙은 서생들이 늘 해 대는 케케묵은 이야기로서, 또한 살강 밑에서 숟가락 주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린아이들이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司馬遷)의 마음을 간파해 낼 수 있습니다. 앞다리를 반쯤 꿇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발꿈치를 들고서 두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만들어 다가가는데,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나비가 그만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기에 어이없이 웃다가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성을 내기도 하지요.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할 때의 마음입니다.

 

 

[D-001]성벽 …… 장면 : 항우(項羽)의 초() 나라 군대가 거록(鉅鹿)에서 진() 나라 군대를 무찌를 때 그 기세에 눌린 다른 제후의 장수들은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고만 있었다.

[D-002]고점리(高漸離) …… 장면 : () 나라 출신의 자객인 형가(荊軻)는 연() 나라에 왔을 때 축()을 잘 치는 고점리와 절친하여, 술이 취하면 고점리가 치는 축에 맞추어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 진 시황(秦始皇) 암살 임무를 띠고 떠나기에 앞서 역수(易水)에서 형가가 고점리가 치는 축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니 전송 나온 자들이 모두 감동하였다고 한다. 형가가 암살에 실패하고 죽은 뒤 고점리는 진 시황 앞에 불려 와 축을 치다가, 축을 던져 그를 죽이려 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피살되었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중일(中一)에게 보냄

 

 

힘으로써 남을 구제하는 것은 ()’이라 이르고, 재물로써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라 합니다. ()를 갖추면 명사(名士)가 되거니와, ()을 갖추어도 이름이 드러나 후세에 전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협과 고를 겸하면 ()’라 하나니,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찌 진실로 대장부가 아니겠습니까. 무릇 예()란 제멋대로 행함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요, ()는 제멋대로 결단함이 없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급하게 의에 따라 선()을 행하다 보면, 설령 제멋대로 행하고 결단을 내린 것이기는 하지만, 착한 아들이라도 부모에게 여쭙지 못하고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고, 어진 부모라도 이를 금지하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한() 나라 급암(汲黯)은 황제의 조서를 사칭하고 창고 곡식을 풀어 하남(河南)의 주린 백성을 구제했고, () 나라 범요부(范堯夫)는 보리 싣고 가던 배를 석만경(石曼卿)에게 넘겨준 일이 있었습니다. 무릇 황제의 조서를 사칭한 것은 사형죄에 해당하는 것이요, 아버지 모르게 남에게 주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임금과 아비는 지극히 존엄한 분이지만, ()에 비추어 급히 행해야 할 경우에는 부월(鈇鉞)의 처벌도 피하지 않았고 혼자 결단하여 행하는 죄도 범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제(武帝)는 총명한 군주라는 명성을 잃지 않았고 범 문정(范文正 범중엄(范仲淹))은 어진 아비가 되었으며, 장유(長孺 급암(汲黯))는 곧은 신하가 되는 데 지장이 없었고 요부(堯夫)는 좋은 아들이 되었습니다.

지금 준()은 친상(親喪)을 당한지라, 친한 친구가 이처럼 측석(側席)하고 밥을 배부르게 먹지 못할 때이니, 단지 하남(河南)의 굶주림과 석만경의 다급한 사정에 비할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대가 힘을 다해 구제해 준다면, 이는 창고 곡식을 풀고 배의 보리를 넘겨준 행동만큼 멋대로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D-001]() 나라 …… 구제했고 : 한 나라 무제(武帝) 때에 하내(河內)의 민가 천여 호가 불에 타는 큰 화재가 발생하자 급암(汲黯)을 사자로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러 보냈다. 급암이 하내의 상황을 보니, 백성들이 가뭄과 홍수로 만여 호가 굶주리고 있었으므로 임의로 황제의 명을 사칭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한 후 무제에게 이를 보고하자 무제가 훌륭히 여겨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연암집에는 하내(河內)가 하남(河南)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남은 하외(河外)에 속한다. 漢書 卷50 張馮汲鄭傳

[D-002]() 나라 ……  : 요부(堯夫)는 범순인(范純仁)의 자()이고 만경(曼卿)은 석연년(石延年)의 자이다. 범순인이 젊었을 때 그의 부친 범중엄(范仲淹)의 심부름으로 소주(蘇州)로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부친의 친구인 석만경(石曼卿)을 만났는데, 석만경이 장례 비용이 없어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배로 싣고 온 보리를 모두 그에게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범중엄에게 이 일을 말하자 범중엄이 기뻐했다고 한다. 山堂肆考 卷102

[D-003]() : 두 번째 편지를 보면 ()’은 바로 사준(士俊)’으로, 원문에  자가 빠진 것이 아닌가 한다.

[D-004]측석(側席) : 자신의 좌석만 남기고 내객(來客)을 맞을 좌석은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에 우환이 있는 사람은 측석하고 앉는다.有憂者 側席而坐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그대가 사준(士俊)에게 돈 백 금()을 주면서 장사를 하라 했다니, 어찌 그리 적게 주었습니까. 결국에는 사준이 빈손으로 돌아올 것이니, 그대는 그때 가서 날더러 말을 아니해 주었다고 허물일랑 마시오.

무릇 한 집의 살림살이를 잘 다스리는 것이 천하의 정사를 다스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탕왕(湯王)의 땅은 사방 칠십 리요 문왕(文王)은 백 리의 땅으로 일어났는데, 맹자는 이를 구실로 삼아 걸핏하면 은 나라와 주 나라의 예를 끌어와 당시의 임금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등() 나라로 말하자면 임금을 제대로 만나 도를 행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이를 만했습니다. 등 나라 문공(文公) 같은 천하의 어진 임금이 군주로 있고, 허행(許行)과 진상(陳相) 같은 당시의 호걸이 백성으로 있었지만, 그런데도 등 나라를 떠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형세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 나라와 위() 나라의 임금은 지극히 불초하지만, 그래도 못내 돌아보고 서성대며 차마 떠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토지가 넓고 인민이 많고 무기가 날카롭고 모든 물자가 풍부하여 그 형세를 이용하면 공()을 이루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맹자의 말에 제 나라를 가지고서 왕천하(王天下)하기란 손바닥 뒤집기나 마찬가지이다.” 하고, 등 나라에 대해서는 이리 잘라 저리 맞추면 거의 사방 오십 리가 될 것이니 큰 나라를 만들 수가 있다.” 하였던 것입니다. 스승의 도는 제 나라를 훨씬 높게 보고 등 나라를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닌데도 때에 따라 맹자가 굴신(屈伸)의 차이를 보인 것은 대국과 소국의 형세가 다르기 때문이요, 등 나라 땅이 은 나라나 주 나라보다 훨씬 작은 것이 아닌데도 맹자의 말과 실제 행동이 서로 어긋난 것은 삼대(三代)와 전국(戰國)이라는 고금(古今)의 시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D-001]백 금() : ()은 화폐 단위로서 시대마다 값이 다르다. 여기서 백 금은 엽전 백 냥을 가리킨다. 열하일기 옥갑야화(玉匣夜話)에 허생(許生)이 도적 두목에게 천 명이 천 금을 약탈하면 각자의 몫이 얼마냐?千人掠千金 所分幾何라고 묻자, 도적 두목은 한 사람당 한 냥일 뿐이오.人一兩耳라고 답하였다.

[D-002]탕왕(湯王) …… 설득했습니다 : 맹자 공순추 상(公孫丑上) 왕자(王者)는 대국(大國)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탕 임금은 칠십 리의 땅으로 왕자가 되었고 문왕은 백 리의 땅으로 왕자가 되었다.王不待大 湯以七十里 文王以百里고 하였다.

[D-003]허행(許行)과 진상(陳相) : 허행은 농가(農家)에 속하는 학자로 초 나라 사람인데, 등 문공이 인정(仁政)을 베푼다는 소문을 듣고 등 나라로 귀의하였다. 진상은 초 나라 사람 진량(陳良)의 제자였으나, 역시 등 문공을 흠모하여 등 나라로 귀의한 뒤 허행의 학설에 공감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맹자는 중원(中原)으로 와서 유교를 배운 진량에 대해서만 호걸지사(豪傑之士)’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D-004]제 나라를 …… 마찬가지이다 : 맹자 등문공 상에 나오는 말이다.

[D-005]이리 …… 있다 : 맹자 등문공 상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에는 큰 나라大國가 아니라 좋은 나라善國를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D-006]스승의 도 : 맹자는 나라 다스리는 법을 묻는 등 문공에게 정전법(井田法)과 학교 제도를 시행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면 왕자가 나오면 반드시 와서 그 법을 본받을 터이니, 이는 왕자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有王者起 必來取法 是爲王者師也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그러므로 여기서 스승의 도란 장차 왕도(王道)로 다스려질 나라의 모범이 되는 통치 방법을 뜻한다. 제 나라와 같은 대국뿐 아니라 등 나라와 같은 소국도 이러한 스승의 도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D-007]굴신(屈伸) : ‘진퇴(進退)’와 같은 말이다. 벼슬에 나아가 포부를 펴거나, 아니면 물러나 은둔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어린애들 노래에 도끼를 휘둘러 허공을 치는 것이 바늘을 가지고 눈동자를 겨누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고, 또 속담에 정승을 사귀려 말고 네 몸가짐부터 신중히 하라.” 하였으니, 그대는 아무쪼록 명심하시오. 차라리 약하면서도 굳센 편이 낫지 용감하면서도 뒤가 물러서는 아니 되오. 하물며 외세(外勢)란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D-001]외세(外勢) : 타인의 권세(權勢)를 말한다. 관자(管子) 팔관(八觀) 권력을 쥔 자가 그의 재능과 무관하게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 백성들은 효제충신을 등지고 외세를 구한다.權重之人 不論才能 而得尊位 則民倍本行而求外勢고 하였다. 외세를 구한다는 것은 외국의 세력과 결탁하여 사욕을 채우려 한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창애(蒼厓)에게 답함

 

 

보내 주신 문편(文編)을 양치질하고 손을 씻고서 무릎을 꿇고 정중히 읽고 나서 말하오. 그대의 문장이 몹시 기이하다 하겠지만, 사물의 명칭이 빌려 온 것이 많고 인용한 전거가 적절치 못하니 이 점이 백옥의 티라 하겠기에 노형을 위하여 아뢰는 바요.

문장을 짓는 데에는 법도가 있으니, 이는 마치 송사하는 자가 증거를 지니고 있고 장사치가 물건을 들고 사라고 외치는 것과 같소. 아무리 사리(辭理)가 분명하고 올바르다 하더라도, 다른 증거가 없다면 어찌 이길 수가 있겠소. 그러므로 문장을 짓는 사람은 경전을 이것저것 인용하여 자기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오. 대학(大學)은 성인(聖人)이 짓고 현인(賢人)이 이를 계술(繼述)하였으니, 이보다 더 미더울 게 없소. 그런데도 서경(書經)의 강고(康誥)에서 극명덕(克明德)’을 인용하고 또 제전(帝典 요전(堯典))에서 극명준덕(克明峻德)’을 인용하여 명명덕(明明德)의 뜻을 밝히고 있소.

관호(官號)나 지명은 남의 것을 빌려 써서는 아니 되는 것이니, 나무를 지고 다니면서 소금을 사라고 외친다면 하루 종일 길에 다녀도 장작 한 다발 팔지 못할 것이오. 마찬가지로 황제가 살고 있는 곳이나 제왕의 도읍지를 다 장안(長安)’이라 칭하고 역대의 삼공(三公)을 다 승상(丞相)’이라 부른다면, 명칭과 실상이 혼동되면서 도리어 속되고 비루한 표현이 되고 마오. 이는 곧 좌중을 놀라게 한 가짜 진공(陳公)과 얼굴 찌푸림을 흉내 낸 가짜 서시(西施)의 꼴과 같소. 그러므로 문장을 짓는 사람은 아무리 명칭이 비루해도 이를 꺼리지 아니하고, 아무리 실상이 속되어도 이를 은폐하지 말아야 하오. 맹자 성은 다 같이 쓰는 것이지만 이름은 독자적인 것이다.”라고 했듯이, 또한 문자는 다 같이 쓰는 것이지만 문장은 독자적인 것이다.”라고 하겠소.

 

 

[C-001]창애(蒼厓) : 유한준(兪漢雋 : 1732~1811)의 호이다. 유한준은 진사 급제 후 음직(蔭職)으로 군수 · 부사 · 목사 · 형조 참의 등을 지냈다. 당대의 문장가로 평판이 높았으며, 젊은 시절에 연암과 절친하였으나, 나중에 열하일기를 비방하고 산송(山訟)을 벌이는 등 사이가 극히 나빠졌다. 박종채(朴宗采)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바로 이 편지로 인해 유한준이 연암에 대해 유감을 품기 시작했다고 한다.

[D-001]문편(文編) : 책으로 엮은 글을 말한다.

[D-002]대학(大學) …… 있소 : 주자(朱子) 대학을 경() 1장과 전() 10장으로 나누고, ()은 공자의 말을 증자(曾子)가 조술(祖述)하고, ()은 증자의 뜻을 그의 문인들이 기록한 것이라고 보았다. 서경의 강고와 요전에서 인용한 말은 전()의 제 1 장에 나오는데, 이는 대학의 경()의 첫 문장 즉,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 데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D-003]좌중을 …… 진공(陳公) : 진공은 전한(前漢) 말의 인물인 진준(陳遵)을 가리킨다. 자는 맹공(孟公)이다. 당시에 열후(列侯) 가운데 진준과 성()과 자()가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진준이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언제나 진맹공(陳孟公)이 왔노라고 알렸다. 좌중이 깜짝 놀라 일어나 보면 그들이 생각했던 그 열후가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에 진준을 가리켜 진경좌(陳驚座)’라고 불렀다. 漢書 卷92 游俠傳 陳遵

[D-004]얼굴 …… 서시(西施) : 춘추 시대의 미인인 서시가 가슴앓이로 인해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니 그 모습이 더욱 예뻤다. 그러자 이웃 마을에 사는 추녀(醜女)가 이를 보고는 자신도 흉내 내고 다녔더니 더욱 추해졌다고 한다. 莊子 天運

[D-005]성은 …… 것이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오는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본분으로 돌아가 이를 지키는 것이 어찌 문장에 관한 일뿐이리요. 일체 오만 가지 것이 모두 다 그러하다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 밖에 나갔다가 제집을 잃어버리고 길가에서 우는 자를 만나서

 

너는 어찌 우느냐?”

했더니, 대답이

 

저는 다섯 살 적에 소경이 되었는데, 그런지 지금 20년이 되었습니다. 아침나절에 밖을 나왔다가 갑자기 천지 만물을 환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뻐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밭둑에 갈림길이 많고 대문들이 서로 같아서 제집을 구분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울고 있습니다.”

하기에, 선생이

 

내가 너에게 돌아갈 방도를 가르쳐 주마. 네 눈을 도로 감으면 바로 네 집이 나올 것이다.”

했습니다. 이에 소경이 눈을 감고 지팡이로 더듬으며 발길 가는 대로 걸어가니 서슴없이 제집을 오게 되었더라오. 눈 뜬 소경이 길을 잃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색상(色相)이 뒤바뀌고 희비(喜悲)의 감정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로 망상(妄想)이라 하는 거지요. 지팡이로 더듬고 발길 가는 대로 걸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분수를 지키는 전제(詮諦), 제집으로 돌아가는 증인(證印)이 되는 것이오.

 

 

[D-001]색상(色相)이 뒤바뀌고 : ‘색상은 불교 용어로, 겉으로 드러난 만물의 모습을 말한다. 색상은 본래 실체가 없는 공()이라고 한다. ‘뒤바뀌다顚倒 역시 불교 용어로, 번뇌로 인해 망상(妄想)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D-002]전제(詮諦) : 불교 용어로 진제(眞諦)와 같은 말이다. 속사(俗事)의 허망한 도리인 속제(俗諦)와 구별되는 진정한 도리를 가리킨다.

[D-003]증인(證印) : 불교 용어로 인가(印可)와 같은 말이다. 제자가 진리를 증득(證得)한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마을의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주다가, 읽기를 싫어해서는 안 된다고 나무랐더니, 그 애가 하는 말이

 

하늘을 보니 푸르고 푸른데 하늘 ()’이란 글자는 왜 푸르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싫어하는 겁니다.”

하였소. 이 아이의 총명이 창힐(蒼頡)로 하여금 기가 죽게 하는 것이 아니겠소.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네 번째 편지

 

 

어제 자제가 찾아와서 글 짓는 법을 묻기에 내가 일러 주기를,

 

()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

했더니 자못 좋아하지 않는 기색을 하고 떠나더군요.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즈음에 혹시 고합디까?

 

 

[D-001]자제 :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兪晩柱 : 1755~1788)를 가리킨다. 유만주는 1775년부터 13년간 쓴 일기 흠영(欽英) 24 6책을 남겼는데, 연암에 대한 평가를 포함하여 당시 문단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D-002]() …… 말라 :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한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다섯 번째 편지

 

 

저물녘에 용수산(龍首山)에 올라 그대를 기다렸으나 그대는 오지 않고 강물만 동쪽에서 흘러와 어디론가 흘러갔습니다. 밤이 깊어 달빛 비친 강물에 배를 띄워 돌아와 보니, 정자 아래 고목나무가 하얗게 사람처럼 서 있기에 나는 또 그대가 거기에 먼저 와 있는가 의심했었다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여섯 번째 편지

 

 

선비란 궁유(窮儒)의 별호(別號)가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일이 흰 바탕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으니,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선비가 아닐 수 없지요. 저들이 스스로 벼슬할 만하다고 자부하면서도 지치고 굶주린 선비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평생 과거 시험장에서 요행수를 노리다가 스스로 증오하고 스스로 업신여긴 때문이지요. 천자로서 선비가 아닌 자는 주전충(朱全忠 후량(後梁)의 태조(太祖)) 한 사람뿐이지요. 이를테면 조자환(曹子桓)은 동경(東京 낙양(洛陽))의 수재(秀才)이며 환경도(桓敬道)는 강좌(江左 양자강 동쪽 지방)의 명사(名士)라 하겠지요.

 

 

[D-001]그림을 ……  : 논어 팔일(八佾)에서 공자가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바탕을 희게 칠한 다음의 일이다.繪事後素라고 하였다. ()를 배우기 전에 그 바탕이 되는 덕행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D-002]천자로부터 …… 없지요 : 연암집 10 원사(原士)에서 그러므로 천자도 근원은 선비이다. 근원이 선비란 것은 생민(生民)의 근본을 두고 한 말이다. 그의 작위는 천자이지만 그의 신분은 선비인 것이다.故天子者 原士也 原士者 生人之本也 其爵則天子也 其身則士也라고 하였다. 예기(禮記) 옥조(玉藻) 천자도 편히 쉴 때에는 사복(士服)인 현단(玄端)을 입는다.” 하였으며, 의례(儀禮) 사관례(士冠禮) 천자의 원자는 선비와 같다. 천하에 나면서부터 귀한 사람은 없다.天子之元子猶士也 天下無生而貴者也고 하여 세자(世子)가 관례(冠禮)를 치를 때 사례(士禮)와 똑같이 한다고 하였다. 연암의 주장은 이러한 예설(禮說)에 근거한 것이다.

[D-003]조자환(曹子桓) : () 나라 문제(文帝)인 조비(曹丕)이다. 자환은 그의 자()이다.

[D-004]환경도(桓敬道) : 동진(東晉) 말기에 건강(建康)을 함락시키고 초() 나라를 세운 환현(桓玄)이다. 경도는 그의 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일곱 번째 편지

 

 

그대는 보따리를 풀고 말안장을 내리도록 하시오. 내일은 비가 올 거요. 샘물이 울음소리를 내고 시냇물이 비린내를 풍기고, 흙섬돌에는 개미 떼가 밀려들고, 왜가리는 울며 북으로 가고, 연기는 서려 땅으로 치닫고, 별똥은 서쪽으로 흐르고, 바람도 살펴보니 샛바람이 아니겠소.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여덟 번째 편지

 

 

나무를 심고 꽃을 심는 것은 마땅히 진() 나라 사람의 글씨가 글자를 구차스레 배열하지 않고도 줄이 저절로 시원스레 곧은 것처럼 해야 하는 거라오.

 

 

[D-001]() 나라 사람의 글씨 : 왕희지(王羲之)의 초서(草書)를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아홉 번째 편지

 

 

정옹(鄭翁)은 술을 많이 마실수록 필흥(筆興)이 더욱 도도하여, 그 큰 점은 공만 하고 먹방울은 튀어서 왼뺨에 떨어지곤 하지요. 남녘 ()’ 자의 오른쪽 다리획이 종이 끝을 넘어 깔개 자리까지 뻗치자, 붓을 던지고 허허 웃더니 유유히 용호(龍湖)를 향해 떠나갔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소그려.

 

 

[D-001]정옹(鄭翁) : 정내교(鄭來僑: 16811759)를 가리키는 듯하다. 정내교는 저명한 여항(閭巷) 문인으로, 호는 완암(浣巖)인데 현옹(玄翁)으로도 불리웠다. 홍봉한(洪鳳漢)과 김종후(金鍾厚) 형제의 숙사(塾師)였다. 김종후가 지은 완암 정옹 묘지명(浣巖鄭翁墓誌銘)에 의하면, 정내교는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술이 취하면 강개하여 비가(悲歌)를 부르던가, 붓을 휘둘러 시를 썼는데 서법 또한 굳세고 호방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경모(敬慕)했다고 한다. 本庵集 卷8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설초(雪蕉)에게 보냄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다른 사람의 서첩(書帖)에 제사(題辭)를 써 주면서 아옹(鵝翁)’이라 일컬었는데,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이를 보고 웃으면서

 

대감이 오늘에야 제소리를 내는구려.”

했으니, 이는 아옹이 고양이 소리와 비슷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지요. 이 사람도 오늘 제 마음을 쏟아 내었으니, 두렵고 두려울 뿐이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치규(穉圭)에게 보냄

 

 

백우(伯雨)는 아마도 떨쳐 일어나지 못할 것 같소. 무당이 문에 들어오자 귀신이 그 방에 가득 차 있었으며, 아침나절 나아가 진찰을 해 보니 얼굴빛은 새까맣고 눈동자는 벌겋고 부어 있었소. 무엇이 빌미가 되었느냐고 묻자,

 

자주 두려움에 시달리고 지난 일을 자주 뉘우쳤더니 이것이 병의 빌미가 되었소.”

하기에,

 

군자는 도를 즐기어 근심을 잊으며, 운명과 이치에 순응하여 도에 맞게 행동하거늘, 두려울 게 무에 있으며 뉘우칠 게 무에 있으랴.”

하였더니, 시자(侍者)가 눈짓을 하며 만류하였소. 시간을 살펴보다 밖으로 나와서 좌우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선생님의 병세는 증오하는 것이 많은 점인데 특히 여자를 가장 꺼려합니다.”

합디다.

생각해 보니 백우는 얼굴이 훤하고 잘생긴 데다 항상 모양을 냈으니 지금 병의 빌미는 여자를 지나치게 총애한 때문이오. 이 이글거리면 쇠붙이가 녹고, 나무가 성하면 흙이 흘러내리듯이, 두려움이 생기면 뉘우침이 뒤따르는 법이니 이 때문에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증세가 생긴 것이지 귀신이 내린 재앙은 아니오. 그런데 무당을 불러다가 기도를 하니 나는 백우의 병이 정말로 귀신이 내린 재앙이 될까 두렵소.

무릇 귀신에도 군자의 귀신이 있고 소인의 귀신이 있소. 삼신(三辰 , , )과 오행(五行), 사직(社稷)과 산천(山川)은 백성에게 주는 이로움으로 인하여 섬기는 귀신이요, 죽음으로써 나랏일에 힘쓴 인물과 고생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인물, 공정한 법을 백성에게 실시한 인물과 재해와 큰 환란을 막은 인물은 백성들에게 미친 공로로 인하여 섬기는 귀신이오. 이와 같이 공덕과 큰 이익을 주는 귀신들은 모두 제사를 지내 주도록 사전(祀典)에 기록되어 있소. 이를 일러 명신(明神)이라 하는데, 이들은 어질고 신령하며 귀하고 오래 살며 높고도 밝게 드러나니, 이것이 바로 군자의 귀신이오.

그런데 부엌, 방구석, 문지방, 중류(中霤)에 붙어 있는 귀신들로 말하면 모두 제사에 대한 보답은 있을지언정 위에서 말하는 귀신과는 진실로 그 부류가 다르오. 이를 간신(奸神)이라 하는데, 미련하고 신령하지 못하며 천하고 일찍 죽으며 낮고 음침하니 이것이 바로 소인의 귀신이오. 이들이 숲과 늪에 붙으면 매()가 되고 덤불과 골짜기에 붙으면 양()이 되며, 벌레와 물고기에 붙으면 요()가 되고 풀이나 나무에 붙으면 상()이 되며, 물건에 붙으면 괴()가 되고 사람에게 붙으면 수()가 되며, 꿈에 붙으면 압()이 되고 일에 붙으면 마()가 되고 병에 붙으면 여()가 된다오. 이는 사전에도 실려 있지 않고 천지(天地) 사이에도 용납되지 못하여, 해와 달이 환히 비추고 바람과 천둥이 뒤흔들어 버리면 구멍 속으로 숨고 틈 사이로 파고들어, 궁핍하게 억눌려 지내다가 간간이 민간의 사귀(邪鬼)가 되어 나타난다오. 이때 무당이 음기(淫氣)를 빙자하여 장구를 두들기고 춤을 추면서 저와 의기가 통하는 귀신들을 불러 대어 집안 식구들을 겁주는 것이오.

시경에 이르기를 점잖은 군자들은 복을 구해도 간사하게 하지 않는다.愷悌君子 求福不回 했거늘, 군자의 병에 어찌하여 소인의 귀신을 섬길 까닭이 있겠소. 부인네를 천시하는 것은 바로 말이 많기 때문이오. 부인네가 말이 많은 것은 무당을 끌어들이는 미끼가 되고 여자 무당이 장구 치며 춤추는 행위는 귀신을 불러들이는 매개가 되오. 이러한 미끼와 매개가 이미 다 갖추어졌으니, 이는 실로 화를 불러들이는 것이오. 갈대 빗자루로 쓸어 내고 부적을 가지고 주문을 외면서, 겉으로는 귀신을 쫓는 척하나 남몰래 귀신을 불러들여 머리를 조아리고 귀신을 부르고 그에게 복종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이오. 그래서 귀신처럼 말하고 귀신처럼 웃고 귀신처럼 성내고 귀신처럼 기뻐하면서, 이리 부르고 저리 불러 온 방에 가득 차게 하고, 들어오면 목구멍에 머물다가 나갈 때는 꽁무니로 빠져나가며, 남의 병을 가지고 농락하면서 재물을 삼키려 드니, 어찌 떨치고 일어날 수 있겠소.

성인(聖人)은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기 때문에 나의 기도는 오래되었다.” 하였으니, 지금 방 안에서 항상 빌고 있다면 귀신을 이보다 더 가까이하는 것이 뭐가 있겠소. 이것이 과연 명신(明神)일진대 어찌 희생(犧牲)과 옥백(玉帛)을 놓아 두고 민가에 내려와서 밥을 얻어먹겠으며, 만약 그것이 나쁜 짓을 일삼는 간신(奸神)과 음신(淫神)이라면 무슨 복을 주겠소. 거북점도 두 번 하면 오히려 알려 주지 않거늘 하물며 예()가 아닌 일에 푸짐하게 차려 놓고 많은 재물을 주어 청하려고 한들 될 리가 있겠소.

백우가 말하기를, 그대의 누이가 몹시 어질고 오빠의 감화를 받아 매사를 그대에게 의논한다 하였소. 그렇다면 그대는 번연히 알면서도 말리지 않은 것이니, 그들과 똑같은 잘못이 있다 할 것이오. 그대는 아무쪼록 생각해 보시오.

 

 

[D-001]군자는 …… 잊으며 : 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는 도를 즐기어 근심을 잊는다.樂以忘憂고 하였다. 또한 양운(楊惲)의 보손회종서(報孫會宗書) 군자는 도를 행하느라 즐거워서 근심을 잊는다.君子游道 樂以忘憂고 하였다. 文選 卷41

[D-002]삼신(三辰) …… 있소 : 예기(禮記) 제법(祭法), “무릇 성왕(聖王)이 제사를 제정함에 있어 공정한 법을 백성에게 실시한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죽음으로써 나랏일에 힘쓴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고생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큰 재해를 막은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큰 환란을 막은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낸다. …… 그리고 일월성신은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대상이요, 산림, 천곡, 구릉은 백성들이 재물을 가져다 쓰는 곳이므로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제외한 대상은 사전(祀典)에 실리지 않는다.夫聖王之制祭祀也 法施於民則祀之 以死勤事則祀之 以勞定國則祀之 能禦大菑則祀之 能捍大患則祀之 …… 及夫日月星辰 民所瞻仰也 山林川谷丘陵 民所取財用也 非此族也 不在祀典 하였다.

[D-003]중류(中霤) : 방의 중앙을 가리킨다. ()는 낙숫물이란 뜻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방 중앙에 낙숫물 받는 곳이 있었으며 토()는 중앙을 주관하므로, 방 중앙에서 토신(土神)의 제사를 지냈다.

[D-004]점잖은 …… 않는다 : 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나오는 구절이다.

[D-005]성인(聖人) …… 하였으니 : 논어 옹야(雍也), 번지(樊遲)가 지()에 관해 묻자, 공자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의(道義)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면 지()라 말할 수 있다.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고 하였다. 논어 술이(述而), 공자가 병이 위중해지자 자로가 신에게 기도를 드릴 것을 청하면서 상하 천지신명에게 기도한다.禱爾于上下神祇라고 한 뇌문(誄文)의 말을 인용하니, 공자가 그런 기도라면 나의 기도는 오래되었다고 하여, 자로의 청을 완곡하게 물리쳤다. 평소의 행동이 신명(神明)의 뜻과 부합했으므로 기도를 일삼을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D-006]거북점도 …… 않거늘 : 시경 소아(小雅) 소민(小旻) 나의 거북이 이미 싫증을 낸지라 나에게 길흉을 알려 주지 않네.我龜旣厭 不我告猶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귀염불고(龜厭不告)란 성어가 생겼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중관(仲觀)에게 보냄

 

 

내 듣건대 그대가 계우(季雨)와 절교했다고 하니 이 무슨 일이지요? 계우가 어질다면 절교해서는 안 되는 거고, 만약 불초하다면 그대가 바로잡아 주지 못하고 마침내 대대로 맺어 온 집안의 친분을 저버리는 것이니,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어진 이와 절교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요 불초한 사람을 바로잡아 주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니, 그 시비곡직을 가리려 들진대 고을과 이웃의 부형들의 여론을 기다려야 할 것이 아니겠소. 상서로운 일을 저버리고 어진 일을 포기한 것은 그 책임이 그대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하오.

예전 그대의 관례(冠禮)에 그대의 선고(先考)께서 자방(子方) 씨를 빈()으로 뽑았고 백우(伯雨)가 실로 찬자(贊者)가 되어, 그들 두 사람이 그대를 붙들어 섬돌 위로 인도하고 축()을 읽고 관을 씌워 주어 성인(成人)의 의식을 행하였으며, 술을 따라 제()를 올려 그 복을 이루게 하고 절을 하고 자()를 지어 그 덕을 표방했으며, 띠와 신을 내려 주면서도 다 훈계하는 말을 하였소. 그런데 자방 씨와 백우가 죽은 뒤에 그들의 고아이자 어린 아우를 모른 척하여 그들의 혼령을 슬프게 한다면 그대가 마음이 편안하겠소? 돌아가신 분들이 생전과 같은 지각(知覺)이 없다 해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며, 만약에 지각이 있다고 한다면 어찌 두 아버님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소.

무릇 관이란 머리에 얹는 것이요, 띠는 허리에 매는 것이요, 신은 발에 신고 다니는 것인데, 지금 그대는 관만 머리에 얹었지 그 덕은 얹지 않았고, 그 띠만 허리에 매었지 그 훈계의 말은 매지 않았고, 그 신만 발에 신었지 그 훈계는 실천하지 않고 있소. 이는 곧 얹은 관을 떨어뜨리고 맨 띠를 풀어 버리고 그 선대(先代)의 양가의 친목을 이어 가지 않는 것이니, 장차 어떻게 관 쓰고 띠 매고 옷 입고 신 신고 향리에 다닌단 말이오? 그대는 아무쪼록 생각해 보오.

 

 

[D-001]도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 원문은 若之何인데, ‘若之何其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이는 서경이나 시경 등에서 종종 쓰이는 표현으로, ‘는 음절을 조정하는 조사(助詞)일 뿐 뜻이 없다.

[D-002]자방(子方) 씨를 …… 되어 : 자방은 누구의 자()인지 알 수 없다. 관례를 행하기 3일 전에 주인은 중빈(衆賓) 가운데서 한 사람을 관례를 주관하는 빈()으로 선택하고 길흉을 점치는데, 이를 서빈(筮賓)이라 한다. 빈은 자신을 돕는 찬자(贊者) 한 사람을 요청한다.

[D-003]술을 …… 하고 : 삼가례(三加禮)를 마친 뒤에 빈()이 관자(冠者)에게 술을 따르며 절하고 술잔을 받아 제사를 올려 너의 복을 이루어라.拜受祭之 以定爾祥라고 치사(致辭)한다. 儀禮 士冠禮

[D-004]그들의 …… 아우 : 계우(季雨)를 가리킨다. 계우는 자방 씨의 아들이자 백우(伯雨)의 동생이었다.

[D-005]두 아버님 : 중관(仲觀)의 부친과 백우(伯雨) · 계우(季雨)의 부친 자방 씨를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어떤 이에게 보냄

 

 

그대는 고서를 많이 쌓아 놓고 절대로 남에게 빌려 주지 않으니, 어찌 그리 빗나간 짓을 하오. 그대는 장차 대대로 전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요? 무릇 천하의 물건이 대대로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오래되었소. 요순(堯舜)도 전하지 못하고 삼대(三代)도 능히 지키지 못한 천하를 진 시황제가 대대로 지키려 하였으니, 이 때문에 그를 어리석다 하는 것이오. 그런데도 그대는 몇 질의 서적을 대대로 지키고자 하니, 어찌 빗나간 짓이 아니겠소.

책이란 일정한 주인이 없으니, 선행을 즐기고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갖기 마련인 거요. 만약 뒷 세대가 어질어서 선행을 즐기고 학문을 좋아하면 벽간(壁間)에 소장된 책과 총중(冢中)에 비장된 책과 한문으로 번역된 먼 나라의 책들도 장차 남양(南陽)의 시대로 전해질 것이오. 만약 뒷 세대가 어질지 못하여 안일하고 게으르다면 천하도 지키지 못하거늘 하물며 서적이겠소? 남에게 말을 타도록 빌려 주지 않는 것도 공자는 오히려 슬퍼했거늘 책을 가진 자가 남에게 읽도록 빌려 주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하잔 셈이오?

그대가 만약 자손이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다 대대로 책들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것 또한 크게 빗나간 짓이오. 군자(君子 제왕(帝王))가 나라를 처음 세워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이를 계속 이어 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오. 그러므로 법으로써 밝히고 덕으로써 거느리고 위용으로써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없었지만, 뒷 세대가 오히려 이를 실추시켜서 제대로 계승하는 경우가 없었소. 관석화균(關石和鈞)을 하() 나라 자손이 대대로 지켰더라면 구정(九鼎)이 어찌 옮겨졌겠으며, 명덕형향(明德馨香)을 은() 나라의 자손이 제대로 지켰더라면 박( 은 나라 수도)의 사직(社稷)이 어찌 누차 옮겨졌겠으며, 천자목목(天子穆穆)을 주() 나라 자손이 대대로 지켰더라면 명당(明堂 제후들의 조회를 받던 궁전)이 어찌 헐렸겠소.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법을 밝혀 후세에 전하고 덕과 위용으로써 보여 주어도 오히려 지키기 어려운 일이거늘, 지금 천하의 고서(古書)를 사장(私藏)하고서 남에게 빌려 주는 선행을 하지 아니하며, 교만하고 인색한 마음을 품고서 이를 후세로 하여금 계승하게 하려고 하니, 너무도 불가한 일이 아니겠소?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보완해 나가는 법이니, 그대가 만약 인을 구할진대 천 상자의 서적을 친구들과 함께 보아서 닳아 없어지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오. 그런데도 지금 책들을 묶어서 고각(高閣)에 방치해 두고 구구하게 뒷 자손에게 전해 줄 생각만 한단 말이오?

 

 

[D-001]요순(堯舜) …… 것이오 : 진 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뒤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게 하고,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은 숫자로만 헤아려 2, 3세라는 식으로 불러 만세에 이르도록 무궁하게 제위(帝位)를 전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진 나라는 불과 2세에서 망하였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D-002]벽간(壁間) …… 것이오 : 벽간에 소장된 책이란 서한(西漢) 무제(武帝) 때 공자(孔子)의 옛집 벽간에서 출토된 고문상서(古文尙書) 등의 책들을 가리킨다. 총중에 비장된 책이란 진() 나라 때 급군(汲郡)에 있던 위() 나라 안희왕(安釐王)의 무덤에서 발굴된 일주서(逸周書) 등의 책들을 가리킨다. 한문으로 번역된 먼 나라의 책들이란 아홉 번이나 통역을 거쳐야 할 정도로 먼 외국의 책들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말하며, 불경(佛經)이나 서학서(西學書)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남양(南陽)의 시대란 광무제(光武帝)의 치세와 같이 학문이 흥성한 시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동한(東漢)을 세운 광무제는 남양 사람이어서 남양에는 왕기(王氣)가 서려 있었다고 한다. 광무제는 보기 드문 호학(好學)의 군주로서 태학(太學)을 일으키고 예악을 정비하였으며 학문을 장려하여 그의 치세에 경학(經學)이 다시 융성하였다. 그러므로 문심조룡(文心雕龍) 정위(正緯)에서도 광무제의 시대에 이르러 …… 그의 교화에 크게 영향받아 학자들이 대거 배출되었다.至于光武之世 …… 風化所靡 學者比肩고 하였다.

[D-003]남에게 …… 슬퍼했거늘 :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불확실한 내용을 빼놓고 기록하지 않는 것과 말을 가진 자가 남에게 타도록 빌려 주는 것을 예전에는 보았는데 지금은 그나마 없어졌구나.”라고 탄식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D-004]관석화균(關石和鈞) : 서경(書經) 오자지가(五子之歌)의 네 번째 노래에, “밝고 밝은 우리 선조 온 나라의 임금이시라 법과 규칙 높이 세워 자손에게 남기셨네. 석과 균을 통용시켜 왕의 창고 풍족하더니 그 전통 실추시켜 종족 망치고 제사 끊겼도다.明明我祖 萬邦之君 有典有則 貽厥子孫 關石和鈞 王府則有 荒墜厥緖 覆宗絶祀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 노래는 하() 나라의 무능한 임금인 태강(太康)이 백성을 돌보지 않고 노는 데에만 빠져 왕위에서 쫓겨나자 그의 다섯 동생이 각각 1수씩 지어 태강의 부덕(不德)함과 나라 잃은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에서 석() 120, () 30근으로서, 관석화균은 도량형(度量衡)의 통일을 가리킨다.

[D-005]명덕형향(明德馨香) : 덕정(德政)을 뜻한다. 서경(書經) 군진(君陳), “지극한 정치는 향기로워 신명을 감동시키니, 서직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만이 향기롭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馨 明德惟馨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것은 주() 나라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이어 은() 나라의 유민(遺民)을 다스리러 가는 군진(君陳)에게 훈계하면서 한 말이다.

[D-006]천자목목(天子穆穆) : 천자의 위엄을 뜻한다. 시경(詩經) (), “제후들이 와서 제사를 돕거늘 천자는 엄숙하게 계시도다.相維辟公 天子穆穆 한 데서 온 말이다. 이 시는 주() 나라 무왕(武王)이 문왕(文王)에게 제사를 올릴 때를 노래한 것이다. 즉 천자가 권위가 있어 제후들이 자발적으로 와서 제사를 도운 것을 두고 한 말이다.

[D-007]군자는 …… 법이니 : 원문은 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인데, 논어 안연(顔淵)에서 증자(曾子)가 한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중옥(仲玉)에게 답함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은 애초에 듣지 말아야 할 것이요, 발설 말라 하면서 하는 말은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니, 남이 알까 두려운 일을 무엇 때문에 말하며 무엇 때문에 들을 까닭이 있소?

말을 이미 해 놓고 다시 경계하는 것은 상대방을 의심하는 일이요, 상대방을 의심하고도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장공예(張公藝)의 참을 인() 자 백 자는 끝내 활법(活法 융통성 있는 방법)이 되지 못하오. 장공예의 9대 동거(同居)를 당() 나라 대종(代宗)이 능히 해냈으니, 무어라 말하여 그리되었소? “어리석지 않고 귀먹지 않으면 가장 노릇을 하기 어렵다.”고 하였소. 그렇다면 어느 것이 활법이겠소? 그것은 바로 애비는 애비 노릇 하고 아들은 아들 노릇 하고 형은 형 노릇 하고 동생은 동생 노릇 하고 남편은 남편 노릇 하고 아내는 아내 노릇 하고 어른은 어른 노릇 하고 어린이는 어린이 노릇 하고 남종은 남종 구실 하고 여종은 여종 구실 하는 것뿐이오.

이번에 인재기(忍齋記)를 지으면서 이런 내용을 삽입하고자 하는데, 어떨는지 모르겠소. 고견을 밝혀 주시오.

 

 

[D-001]장공예(張公藝) …… 백 자 : 장공예는 9대가 함께 동거하여 북제(北齊), (), () 등 세 왕조에서 정표(旌表)를 내린 집안의 인물이다. 인덕(麟德) 연간에 고종(高宗)이 태산(泰山)에 봉선(封禪)을 하고 나서 그 집에 행차하여 친족 간에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이에 장공예가 지필묵을 꺼내어 참을 인() 자 백여 자를 써서 올렸더니, 고종이 훌륭히 여겨 비단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小學 卷6 善行

[D-002]어리석지 …… 어렵다 : 가장(家長)이 집안을 평화롭게 다스리려면 보아도 못 본 체 들어도 못 들은 체해야 한다는 뜻의 속담이다. 당 나라 대종(代宗) 때 곽자의(郭子儀)의 아들 애()가 승평공주(昇平公主)와 결혼했는데 공주와 말다툼을 하다가 천자에게 저촉되는 말을 했다. 공주가 이를 고자질하자 대종은 공주를 타일러 돌려보냈으며, 또한 이 사실을 안 곽자의가 아들을 감금하고 대죄(待罪)하자, 대종은 어리석지 않고 귀먹지 않으면 가장 노릇을 하기 어렵다.不痴不聾 不作家翁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너그러이 용서했다고 한다. 資治通鑒 卷224 唐代宗 大歷2

[D-003]애비는 …… 하고 :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 애비는 애비 노릇 하고 아들은 아들 노릇 하고 형은 형 노릇 하고 동생은 동생 노릇 하고 남편은 남편 노릇 하고 아내는 아내 노릇 하면 가도(家道)가 바르게 되니, 집안이 바르게 되어야 천하가 안정된다.父父子子 兄兄弟弟 夫夫婦婦 而家道正 正家而天下定矣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어제는 우리들이 달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 달이 우리들을 저버린 거요. 세상에 어떤 일이든 모두 다 저 달과 같지 않겠소?

한 달이라 서른 날에도 큰달이 있고 작은달도 있으니, 초하룻날과 초이튿날은 방백(旁魄)일 따름이며, 초사흗날에는 겨우 손톱 흔적만 하되 그래도 낙조(落照) 때에는 빛을 발하며, 초나흗날이면 갈고리만 하고 초닷샛날이면 미인의 눈썹만 하고 초엿샛날이면 활만 하되 빛은 아직 넓게 퍼지지 못하고, 칠팔일로부터 열흘에 이르면 비록 얼레빗만 하나 빈 둘레가 여전히 보기 싫고, 열하루, 열이틀, 열사흘이면 변송(汴宋 북송(北宋))의 산하(山河)처럼 오() · () · 강남(江南)이 차례로 평정되어 판도에 들어오는데 운주(雲州)와 연주(燕州)가 요()에 함락되어 국토가 끝내는 이지러진 모습을 지닌 것과 같고, 열나흘이면 마치 곽 분양(郭汾陽)의 운수가 오복(五福)을 다 갖추었으나 다만 한편으로 옆에 달라붙은 어조은(魚朝恩) 때문에 두려워하고 조심해야 했던 것이 한 가지 결함인 것과 같지요.

그렇다면 거울같이 완전히 둥근 때는 보름날 하루저녁에 불과한 데다 그나마 달이 가장 둥근 때가 열엿새로 옮겨지거나 혹은 살짝 월식(月蝕)이 되든지 달무리가 지거나 혹은 먹구름에 가려지거나 혹은 모진 바람과 세찬 비가 내려 어제처럼 사람들을 낭패하게 만들지요. 우리들은 이제부터 마땅히 송조(宋朝)의 인물을 본뜨고, 다만 곽 분양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복을 아끼기를 바라는 것이 옳겠지요.

 

 

[D-001]작은달 : 한 달이 28일이나 29일이 되는 달로 음력 2 · 4 · 6 · 9 · 11월이 작은달이다.

[D-002]방백(旁魄) : ()은 달이 태양빛을 받지 못해 어두운 부분을 말한다. 초하루의 달은 달빛이 아주 소멸하여 사백(死魄)이라 하고, 초이튿날의 달은 사백에 가깝다고 하여 방사백(旁死魄)이라 한다.

[D-003]곽 분양(郭汾陽) …… 같지요 : 곽 분양은 곽자의(郭子儀 : 697~781)를 말한다. 곽자의는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한 일등공신으로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으며, 부귀와 장수를 누리고 후손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였다. 단 총신(寵臣) 어조은(魚朝恩)이 관군용선위처치사(觀軍容宣尉處置使)로서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인 곽자의를 견제하고 집요하게 모함했으나, 곽자의는 은인자중하며 잘 대처하여 어조은의 참소가 끝내 통하지 못했다.

[D-004]달이 …… 옮겨지거나 : 달이 가장 밝은 때를 망()이라 하는데, 작은달에는 15일이 망이 되지만, 큰달에는 16일이 망이 된다.

[D-005]우리들은 …… 옳겠지요 :  15일에만 만나려 하지 말고, 그 전에 11일에서 14일 사이에 만나는 것도 좋겠다는 취지로 농담을 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네 번째 편지

 

 

말세에 처하여 사람을 사귈 때는 마땅히 상대방의 말이 간략하고 기운이 차분하며 성품이 소박하고 뜻이 검약한가를 살펴보아야 하며, 절대로 마음속에 계교(計巧)를 지닌 사람은 사귀어서는 안 되고 뜻이 허황된 사람은 사귀어서는 아니 되지요.

세상에서 떠드는 쓸모 있는 사람이란 반드시 쓸모없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떠들어 대는 쓸모없는 사람이란 반드시 쓸모 있는 사람이지요. 천하가 안락하고 향리에 아무런 사고가 없는데, 참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 때문에 재기(才氣)를 드러내고 정신을 분발하면서까지 경솔히 남에게 보여 주려고 애쓸 까닭이 있겠소.

저와 같이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는 것은 겉보기에 용맹한 것 같지만 이는 곧 노인의 상투적인 버릇이요, 60만 군사를 굳이 청한 것은 겁쟁이 같지만 이는 곧 지혜로운 이의 깊은 꾀랍니다.

 

 

[D-001]갑옷을 …… 버릇 : 전국(戰國) 시대 조() 나라의 명장 염파(廉頗)가 위() 나라에 도피해 있을 때 조 나라가 진() 나라의 침공으로 곤경에 처하자 조 나라 왕은 사자(使者)를 보내 염파가 아직 쓸 만한지를 탐문해 오게 하였다. 그때까지 조 나라에 다시 등용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염파는 사자가 보는 앞에서 한 말의 밥을 먹고 열 근의 고기를 먹은 다음 갑옷 차림으로 말을 타고서 자신이 아직도 쓸 만한 사람임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사자는 조 나라로 돌아가 보고하기를, “염 장군이 비록 늙기는 하였으나 아직까지 밥은 잘 먹습디다. 하지만 신과 함께 앉아 있으면서 잠깐 새에 세 번이나 변을 보았습니다.” 하니, 조 나라 왕은 그가 늙었다고 여겨 마침내 부르지 않았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D-002]60 ……  : 진 시황(秦始皇)이 초() 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장군 이신(李信)을 불러 얼마의 군사가 있으면 정벌할 수 있겠냐고 묻자 이신이 20만 명이면 충분하다고 대답하였다. 다시 장군 왕전(王翦)을 불러다 묻자 왕전은 60만 명은 있어야 정벌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진 시황은 왕전이 늙어서 겁이 많다고 질책하고 이신을 출전시켰으나 이신은 초 나라 정벌에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진 시황이 다시 왕전을 불러다 사과하고 그의 주장대로 60만의 군사를 내주자, 왕전이 출전하여 결국 초 나라를 멸망시켰다. 史記 卷73 白起王翦列傳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북쪽 이웃의 과거 급제를 축하함

 

 

무릇 요행을 말할 때에는 만의 하나萬一란 말을 하지요. 어제 과거에 응시한 사람이 줄잡아 수만 명이나 되었지만 창명(唱名 급제자 발표)은 겨우 스무 명밖에 아니 되니 이야말로 만의 하나라 이를 만하지 않겠소.

시험장의 문에 들어갈 때 서로 밟고 밟히고 죽고 다치고 하는 자들이 수도 없으며, 형제끼리 서로 외치고 부르고 뒤지고 찾곤 하다가, 급기야 서로 만나게 되면 손을 잡고 마치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나 만난 듯이 여기니, 죽을 확률이 십분의 구라 이를 만하지요.

지금 그대는 능히 십중팔구 죽을 확률에서 벗어나서 만의 하나뿐인 이름을 얻었소. 나는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만의 하나뿐인 영광스러운 발탁을 미처 축하하기 전에, 속으로 사망률이 십분의 구에 달하는 그 위태로운 장소에 다시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을 축하할 따름이오.

즉시 몸소 축하해야 마땅하겠으나, 나 역시 십분의 구의 죽음에서 벗어난 뒤라 지금 자리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으니 병이 조금 낫기를 기다려 주기 바라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사강(士剛)에게 답함

 

 

붓대를 쥐고 언 손을 호호 부니 손톱이나 의대(衣帶)에서 모두 술내가 풍기는구려. 마치 젊은 장수가 사냥에 도취하고 보니 갑옷이나 군화나 깃발이 모두 피비린내를 띤 거와 마찬가지오그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영재(泠齋)에게 답함

 

 

옛사람의 술에 대한 경계는 지극히 깊다 이를 만하구려. 주정꾼을 가리켜 후()라 한 것은 그 흉덕(凶德 흉악한 행실)을 경계함이요, 술그릇에 주()가 있는 것은 배가 엎어지듯 술에 빠질 것을 경계함이지요. 술잔 뢰()는 누( 오랏줄에 묶임)와 관계되고, 옥잔 가()는 엄( 계엄(戒嚴))의 가차(假借), ()는 풀이하면 불명(不皿 가득 채우지 말라)이 되고 술잔 치()는 위() 자와 비슷하고, 뿔잔 굉()은 그 저촉(抵觸)됨을 경계함이요,  두 개가 그릇 위에 있는 것은 서로 다툼을 경계한 것이고 술통 준()은 준절(撙節 절제(節制))을 보여 줌이요, ()은 금제(禁制)를 이름이요, 술 유() 부에 졸( 죽다)의 뜻을 취하면 취() 자가 되고 생( 살다) 자가 붙으면 술 깰 성() 자가 되지요. 주관(周官 주례(周禮)) 평씨(萍氏)가 기주(幾酒)를 맡았다.” 했는데, 본초(本草)를 살펴보니 ( 개구리밥)은 능히 술기운을 제어한다.” 했소.

우리들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것이 옛사람보다 더하면서, 옛사람이 경계로 남긴 뜻에는 깜깜하니 어찌 크게 두려운 일이 아니겠소. 원컨대 오늘부터 술을 보면 옛사람이 글자 지은 뜻을 생각하고, 다시 옛사람이 만든 술그릇의 이름을 돌아봄이 옳지 않을는지요.

 

 

[C-001]영재(泠齋) : 유득공(柳得恭)의 호이다.

[D-001]() : 술잔을 받치는 쟁반을 말한다. 찻잔 쟁반을 다주(茶舟)라고 한다.

[D-002]〕 ……  : ‘()’ 자를 가리킨다.

[D-003]() : 술잔을 놓는 탁자를 말한다. 의례(儀禮) 사관례(士冠禮) 정현(鄭玄)의 주에 이름을 금이라 한 것은 술을 경계한 때문이다.名之爲禁者 因爲酒戒也라고 하였다.

[D-004]평씨(萍氏)가 기주(幾酒)를 맡았다 : 주례 추관(秋官)에 나오는 말이다. 평씨는 나라의 물에 관한 금령(禁令)을 맡은 관직 이름이고, 기주는 백성들이 술을 구매하는 것이 적량(適量)이며 적시(適時)인가를 기찰(譏察)하는 임무를 말한다.

[D-005]본초(本草) …… 했소 : 신농씨(神農氏)가 지었다는 본초에 나오는 말로서 주례집설(周禮集說), 시아편(示兒編) 등에 인용되어 있다. 개구리밥은 물에 가라앉지 않는 성질이 있고 수기(水氣)가 승하여 술기운酒氣을 흩어지게 한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이는 은어(隱語)인데 나는 벌써 해석했소. ‘마혁과시(馬革裹尸)’는 종군(終軍)을 가리키고, ‘불감앙시(不敢仰視)’는 엄안(嚴顔)을 가리키고, ‘()’는 백기(白起)를 가리키고, ‘()’은 황향(黃香)을 가리키고, ‘()’은 악비(岳飛)를 가리키고, ‘()’은 산도(山濤)를 가리키고, ‘동안백발(童顔白髮)’은 소옹(少翁)을 가리키고, ‘집의소생(集義所生)’은 맹호연(孟浩然)을 가리키고, ‘풍자도(馮子都)’는 흉노(匈奴)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D-001]종군(終軍) : 한 무제(漢武帝) 때 제남(齊南)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박학하고 문장을 잘 지어 18세에 박사제자(博士弟子)가 되었다. 글을 올려 국사를 논한 일로 무제에게 발탁되어 간대부(諫大夫)가 되고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가서 남월왕으로 하여금 한 나라에 복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월상(越相) 오가(吳嘉)가 이에 반발하여 남월왕과 한 나라 사신을 살해하면서 종군도 죽였다. ‘말가죽에 시체를 싼다馬革裹尸는 것은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어서 시신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므로 종군을 비유한 것이다.

[D-002]엄안(嚴顔) : 후한(後漢)의 유장(劉璋)의 장수로서 파촉(巴蜀)을 지키다가 장비(張飛)에게 사로잡혀 항복을 권유받자 우리 주()에는 단두장군(斷頭將軍)만 있지 항장군(降將軍)은 없다.”고 하며 이를 거부하였다. 장비가 노하여 목을 베려 하였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으므로 장비가 이를 장하게 여겨 빈객(賓客)으로 삼았다. ‘감히 쳐다보지 못한다不敢仰視는 것은 엄한 얼굴을 나타내므로 엄안을 비유한 것이다.

[D-003]백기(白起) : 전국 시대 진() 나라의 명장으로서 초() 나라를 정벌한 공으로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거품은 하얗게 일어나므로 백기(白起)를 비유한 것이다.

[D-004]황향(黃香) : 후한 때의 강하(江夏) 사람으로 천하에 강하의 황동에 비견할 사람이 없다.天下無雙 江夏黃童고 할 정도로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다. ()은 색이 노랗고 향기가 있으므로 황향(黃香)을 비유한 것이다.

[D-005]악비(岳飛) : () 나라 때 금() 나라의 남하(南下)에 대항한 명장으로, 시호는 무목(武穆)이다. 구름은 산 위에 날아다니므로 악비(岳飛)를 비유한 것이다.

[D-006]산도(山濤) : 서진(西晉) 때의 인물로 혜강(嵇康), 완적(阮籍) 등과 교유하였으며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폭포는 산에서 이는 파도라 할 수 있으므로 산도(山濤)를 비유한 것이다.

[D-007]소옹(少翁) : 한 무제(漢武帝) 때에 제() 지방의 방사(方士)이다. 무제가 총애하던 왕부인(王夫人)의 혼령을 방술(方術)로 불러들여 그 공으로 문무장군(文武將軍)에 제수되었다. 어린애 얼굴에 흰머리童顔白髮는 애늙은이를 가리키므로 소옹(少翁)을 비유한 것이다. 史記 卷12 孝武本紀

[D-008]집의소생(集義所生) :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의 호연지기(浩然之氣) 장에서 호연지기는 의()가 축적되어 생겨나는 것이지 의가 갑자기 엄습하여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D-009]맹호연(孟浩然) : 당 나라의 시인으로 양양(襄陽) 사람이다. 특히 자연의 경물을 잘 묘사하여 왕유(王維)와 함께 왕맹(王孟)’으로 불린다.

[D-010]풍자도(馮子都) : 한 나라의 대장군 곽광(霍光)의 감노(監奴)로서 주인 곽광의 비첩인 현()과 사통(私通)을 하다가 곽광의 부인 민씨(閔氏)가 죽고 현이 정실부인이 되자 반란을 일으켰다. , 풍자도는 흉악한 노복(奴僕)에 해당하므로 흉노(凶奴) 즉 흉노(匈奴)를 비유한 것이다. 漢書 卷68 霍光金日磾傳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아무개에게 답함

 

 

우연히 야성(野性)을 찬미하다가 스스로를 고라니에 비한 것은 고라니가 사람만 가까이하면 잘 놀라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 감히 잘난 체해서가 아니었지요. 지금 그대의 편지를 받아 보건대, 스스로를 기마(驥馬) 꼬리에 붙은 파리에 비했으니, 또 어찌 그리 작지요? 진실로 그대가 작게 되기를 구한다면 파리도 오히려 크고말고요. 개미도 있지 않소?

내 일찍이 약산(藥山)에 올라 도읍을 굽어보니 사람들이 달리고 치닫고 하여 땅에 가득 구물대는 것이 마치 개밋둑에 진을 친 개미와 같아서, 한번 불면 능히 흩어질 것만 같았지요. 그러나 다시 그 도읍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게 한다면, 비탈을 더위잡고 바위를 오르고 다래 넝쿨을 움켜쥐고 나무를 타고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는 망령되이 스스로 높고 큰 양하는 모습이 이가 머리털을 타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게 있겠소?

그런데 지금 마침내 큰소리치며 스스로 비하기를 고라니라 했으니, 어찌 그리 어리석던지요. 당연히 대방가(大方家 식자(識者))에게 비웃음을 사 마땅한 일이지요. 만약 다시 그 형체의 크고 작고를 비교하고, 보이는 바의 원근을 분별하기로 든다면, 그대나 내가 모두 다 망령된 짓을 할 뿐이지요. 고라니는 과연 파리보다는 크다지만, 코끼리가 있지 않소? 파리가 과연 고라니보다 작다 하지만, 저 개미에게 견주어 본다면 코끼리와 고라니 사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저 코끼리가 서면 집채만 하고 걸음은 비바람같이 빠르며, 귀는 구름이 드리운 듯하고 눈은 초승달과 비슷하며, 발가락 사이에 진흙이 봉분같이 솟아 올라, 개미가 그 속에 있으면서 비가 오는지 살펴보고서 싸우려고 나오는데, 이놈이 두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코끼리를 못 보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보이는 바가 너무 멀기 때문이지요. 또 코끼리가 한 눈을 찡긋하고 보아도 개미를 보지 못하니, 이는 다름아니라 보이는 바가 너무 가까운 탓이지요. 만약 안목이 좀 큰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백 리의 밖 멀리에서 바라보게 한다면, 어둑어둑 가물가물 아무 것도 보이는 바가 없을 것이니, 어찌 고라니와 파리, 개미와 코끼리를 구별할 수 있겠소?

 

 

[D-001]야성(野性) : 자연 속에서 한적하게 살기를 좋아하는 성격을 말한다.

[D-002]고라니 : 고라니처럼 자연 속에서 한적하게 살고 싶어하는 것을 미록지(麋鹿志)’ 또는 미록성(麋鹿性)’이라 한다. 또한 노루처럼 담이 작아 잘 놀라는 것을 균경(麇驚)’이라 한다.

[D-003]기마(驥馬) …… 파리 : ()는 명마의 이름이다. 사기(史記) 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안연(顔淵)이 비록 학문을 독실히 했지만 기마의 꼬리에 붙었기에 그의 행실이 더욱 알려졌다.”고 하였다. 쉬파리가 기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가듯이, 안연도 공자의 제자가 된 덕분에 후세에 더욱 유명해졌다는 뜻이다.

[D-004]약산(藥山) : 평안도 영변군(寧邊郡)에 있는 산이다. 약산 동대(東臺)는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성지(誠之)에게 보냄

 

 

그의 말이 비록 터무니없이 거짓되어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라도 미리 거짓말이라 단정하지 말고 일단 믿을 만한 말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 어떨는지요? 비유하자면 마치 거짓말쟁이가 꿈 얘기 하는 것과 같아서, 참이라고 믿어 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이를 수도 없는 게 아니겠소. 다른 사람의 꿈속이라 한번 달려 들어가 볼 수도 없으니 말이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석치(石癡)에게 보냄

 

 

옛날에 원민손(袁愍孫)이 부 상시(傅常侍)의 청덕(淸德)을 칭송하면서,

 

그 문을 지날 때면 고요하여 사람이 없는 듯하다가, 막상 그 휘장을 걷고 보면 그 사람이 거기에 있다.”

했는데, 나는 매양 눈 속을 걸어가서 쪽문을 열고 매화를 찾을 때면 문득 부 상시의 청덕을 느낀다오.

 

 

[C-001]석치(石癡) : 정철조(鄭喆祚)의 호이다.

[D-001]옛날에 …… 했는데 : 원민손(袁愍孫)은 남조(南朝) () 나라 때의 인물인 원찬(袁粲 : 420~477)의 초명(初名)이며, 부 상시(傅常侍)는 양() 나라 때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낸 부소(傅昭 : 454~528)를 가리킨다. 원찬이 단양 윤(丹陽尹)으로 있을 때 부소를 고을의 주부(主簿)로 삼아 젊은이들을 가르치게 하였고, 명제(明帝)가 붕어(崩御)했을 때는 원찬의 이름으로 올린 애책문(哀策文)의 절반을 부소가 지었을 정도였다. 매번 부소의 문을 지날 때마다 감탄하기를, “그 문을 지날 때면 고요하여 사람이 없는 듯하다가 막상 휘장을 걷고 보면 그 사람이 거기에 있으니, 어찌 명현(名賢)이 아니겠는가.” 하였다고 한다. 南史 卷60 傅昭傳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군자의 도는 담박하면서도 싫증 나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빛이 난다.” 했는데, 이 말은 바로 매화를 위한 칭송인 것 같소. 소자첨(蘇子瞻)이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논하면서 질박해 보이면서도 실은 화려하고, 여위어 보이면서도 본래는 기름지다.” 했는데, 이로써 매화에 빗대어 말하면 다시 더 평할 말이 없지요.

 

 

[D-001]군자의 …… 난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33 장에 나오는 말이다.

[D-002]질박해 …… 기름지다 : 소철(蘇轍)이 지은 추화도연명시인(追和陶淵明詩引)에 나오는 말이다. 소식(蘇軾)이 도연명의 시에 화운(和韻)하여 지은 시를 모은 시집에 그 아우 소철이 서문을 썼는데, 소식이 동생에게 서문을 부탁하는 편지에서 그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옛날에 이 학사(李學士) 어른을 모시고 계당(溪堂)으로 매화 구경을 갔는데, 그 어른이 위연(喟然)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곽유도(郭有道)는 도도하면서도 속세를 끊지 않았고 부흠지(傅欽之)는 맑으면서도 화려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뜻밖에도 홀로 빼어난 향기로운 꽃 매화가 이 두 가지 덕을 갖추었단 말인가.”

라고 했지요.

 

 

[D-001]이 학사(李學士) : 연암의 처숙(妻叔)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양천(李亮天 : 1716~1755)을 가리킨다.

[D-002]곽유도(郭有道) …… 않았고 : 곽유도는 후한 때의 은사(隱士)인 곽태(郭太 : 128~169)를 가리킨다. 곽태의 자는 임종(林宗)이고 유도(有道)는 곽태가 도()를 지닌 사람으로 천거되었기 때문에 불린 이름이다. 어떤 사람이 범방(范滂)에게 곽태가 어떤 인물이냐고 묻자, “은거하면서도 가까운 사람을 떠나지 않았고 도도하면서도 속세를 끊지 않았으며, 천자도 그를 신하로 삼지 못했고 제후도 그를 벗으로 삼지 못했으니 나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하였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D-003]부흠지(傅欽之) …… 않았다 : 흠지(欽之)는 송() 나라 때 인물인 부요유(傅堯兪 : 1024~1091)의 자이다. 사마광(司馬光)이 소옹(邵雍)에게 맑고 강직하고 용맹한 덕은 사람들이 동시에 갖추기가 어려운 법인데 흠지(欽之)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갖추고 있소.” 하니, 소옹이 말하기를, “흠지는 맑으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강직하면서도 부딪치지 않고 용맹하면서도 온화하니,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오.” 하였다. 宋史 卷341 傅堯兪傳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네 번째 편지

 

 

시경 서경에는 매화를 말하면서 열매만 말하고 꽃은 말하지 않았는데, 우리들은 지금 매화시(梅花詩)를 지으면서 향기를 평하고 빛깔을 견주어 꽃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그래도 부족하여, 또 따라서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곤 하니, 겉치레에다 또 겉치레를 더하여 참모습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고 말았소. 어째서 태산이 임방(林放)만 못하다고 보는 거요?

 

 

[D-001]시경 …… 않았는데 : 시경 소남(召南) 표유매(摽有梅) 잎이 떨어진 매화나무여 그 열매가 겨우 일곱이로다.摽有梅 其實七兮라고 하였다. 서경 열명 하(說命下) 만약 양념을 넣은 국을 만들려거든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 주오.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는 매실로 만든 식초를 말한다.

[D-002]어째서 …… 거요 : 논어(論語) 팔일(八佾), () 나라의 대부(大夫)인 계씨(季氏)가 대부임에도 불구하고 제후(諸侯)만이 지낼 수 있는 여제(旅祭)를 태산(泰山)에서 지내자 공자가 계씨의 가신(家臣)인 제자 염유(冉有)에게 이를 막지 못한 것을 따지면서 어째서 태산이 임방(林放)만 못하다고 보는가?” 하고 질책하였다. 임방은 공자에게 예()의 근본을 물었던 사람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어떤 이에게 보냄

 

 

나는 집이 가난하고 꾀가 모자라니, 생계를 꾸리는데방공(龐公)을 배우고 싶지만 소계(蘇季)와 같은 한탄만 있을 뿐이지요. 허물 벗음은 이슬 마시는 매미보다 더디고 지조는 흙을 먹는 지렁이에 부끄러울 뿐이외다. 옛날에 매화 삼백예순다섯 그루를 심어 날마다 한 그루씩 보면서 세월을 보낸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나는 셋방살이 신세가 되어 고산(孤山)과 같은 동산이 있을 턱이 없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지요?

벼루맡의 어린 종은 손재주가 하도 교묘하므로 나 역시 때때로 그를 따라서 연전(硯田 문필로 생활함)의 겨를을 내어 절지(折枝)의 매화를 만드는데, 촛눈물은 화판(花瓣)이 되고 고라니털은 꽃술이 되고 부들의 꽃가루는 꽃술의 구슬이 되어, 이름을 윤회화(輪回花)라 했지요.  윤회라 일렀냐 하면, 무릇 나무에 붙어 있는 생화(生花)가 밀랍이 될 걸 어찌 알며, 밀랍은 벌집에 있는데 그것이 꽃이 될 줄 어찌 알리요? 그러나 노전(魯錢)과 원이(猿耳)는 꽃봉오리가 천연스럽게 이루어졌고 규경(窺鏡)과 영풍(迎風)은 그 자세가 아주 자연스럽지요. 오직 땅에 박히지 않았을 뿐 바로 자연의 정취를 볼 수 있지요. 황혼의 달 아래, 비록 그윽한 향기가 풍기는 것은 없지만, 눈 가득한 산중에 고사(高士)가 누워 있는 모습을 족히 상상하고말고요.

나는 그대에게 먼저 매화 한 가지를 팔아서 그 값을 정하고 싶소. 만약 그 가지가 가지답지 못하거나, 꽃이 꽃답지 못하거나, 꽃술이 꽃술답지 못하거나, 꽃술의 구슬이 구슬답지 못하거나, 상 위에 놓아도 빛이 나지 않거나, 촛불 아래서도 성긴 그림자가 생기지 않거나, 거문고와 짝지어도 기이한 흥취를 자아내지 않거나, 시에 넣어도 운치나지 않거나, 한 가지라도 이런 것이 있다면 영원히 물리쳐 버려도 끝내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을 거요. 이만 줄이오.

 

 

[C-001]어떤 이에게 보냄 : 목차에는 제목이 동인에게 보냄與同人으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어떤 이에게 윤회매를 보냄與人輪回梅 또는 매화를 파는 편지鬻梅牘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 편지는 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62 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에도 실려 있다. 즉 윤회매십전 팔지첩(八之帖)에 무릉(茂陵 : 박지원) 씨가 밀랍으로 만든 매화인 윤회매를 사라고 관재(觀齋 : 서상수徐常修)에게 보낸 편지로서 그 내용이 소개되어 있으며, 또한 편지의 말미 부분은 매화를 판 뒤 관재에게 작성해 준 증서인 윤회매십전 구지권(九之券)의 일부로 되어 있다.  연암집의 원문과 자구상의 차이가 적지 않다.

[D-001]방공(龐公) …… 뿐이지요 : 방공은 후한(後漢) 때의 은자(隱者)인 방덕공(龐德公)을 가리키고 소계(蘇季)는 전국 시대의 유세가(遊說家)인 소진(蘇秦)을 가리키는데 소진의 자가 계자(季子)이다. 소진이 연횡책(連衡策)으로 진() 나라 혜왕(惠王)을 설득하다가 실패하고 실컷 고생만 하고 고향에 돌아오자, 가족들이 모두 그를 외면하였다. 이에 소진은 아내는 나를 지아비로 여기지 않고, 형수는 나를 시동생으로 여기지 않고, 부모님은 나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구나.”라고 길게 탄식하였다고 한다. 戰國策 秦策

[D-002]허물 …… 뿐이외다 : 학업에 진전이 없는 것과 남에게 신세 지고 사는 것을 반성한 말이다. 순자(荀子) 대략(大略) 군자의 배움은 매미가 허물 벗듯이 신속하게 변한다.君子之學如蛻 幡然遷之고 하였으니, 부단히 학습하여 구태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낡은 것을 혁신하기를 매미가 허물 벗듯이 한다.去故就新 若蟬之蛻也는 말도 있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맹자는 오릉중자(於陵仲子)가 청렴을 지키기 위해 인륜마저 저버림을 비판하면서 오릉중자의 지조를 충족시키자면 지렁이가 된 뒤라야 가능할 것이다. 지렁이는 위로는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는 지하수만을 마시고 산다.充仲子之操 則蚓而後可者也 夫蚓 上食槁壤 下飮黃泉고 하였다.

[D-003]옛날에 …… 없으니 : () 나라 때의 은자(隱者)인 임포(林逋)가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여 방학정(放鶴亭)과 소거각(巢居閣)을 짓고는 주변에 매화 360그루를 심고 소일하였다고 한다. 欽定南巡盛典 卷86

[D-004]절지(折枝) : 가지가 구부러져 아래로 늘어진 모양을 말한다. 동양화에서는 매화 나무 전체를 그리지 않고 가지가 구부러져 늘어진 부분만을 그린다.

[D-005]노전(魯錢)과 원이(猿耳) : 이덕무의 윤회매십전 오지화(五之花)에 꽃잎 5개가 말려 있고 꽃술이 나와 있지 않은 매화를 옛 노전古魯錢이라 하고, 꽃잎 3개는 떨어지고 남은 2개도 떨어지려 하나 꽃술만은 싱싱한 매화를 원이(猿耳)라고 한다고 하였다. 노포(魯褒)가 전신론(錢神論)을 지었기 때문에 돈을 일러 노전(魯錢)이라 한다.

[D-006]규경(窺鏡)과 영풍(迎風) : 이덕무의 윤회매십전 오지화(五之花)에 꽃잎 5개가 만개한 것을 규경(窺鏡) 또는 영면(迎面)이라 한다고 하였다. 영풍은 영면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아무개에게 보냄

 

 

다른 사람에게 처음 손이 되어 가면, 모름지기 낯설거나 껄끄러운 고태(故態)를 가져야 하고, 친숙하거나 다정한 듯한 태도는 짓지 말아야 하오. “손을 씻고 국을 끓여 먼저 시누이를 불러 맛보게 한다.” 했는데, 이 시를 지은 이는 아마 예()를 아는 사람일 거요. 태묘(太廟)에 들어서는 매사를 반드시 물어서 해야 하는 법이오.

 

 

[D-001]손을 …… 한다 : 당 나라 왕건(王建)의 신가랑(新嫁娘) 시에 시집온 지 사흘 지나 부엌에 가서, 손을 씻고 국을 끓였네. 시어머니 식성을 아직 모르니, 먼저 시누이에게 맛보게 했네.三日入廚下 洗手作羹湯 未諳姑食性 先見小姑嘗라고 하였다. 새색시의 조심성 있고 사려 깊은 태도를 칭송한 것이다.

[D-002]태묘(太廟) …… 법이오 : 논어 팔일(八佾) 공자가 태묘에 들어서 매사를 물으니, 어떤 사람이 누가 추인(鄹人)의 아들이 예()를 안다고 하는가? 태묘에 들어서 매사를 묻는구나.’라고 하였다. 공자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하는 것이 예이니라.’라고 말했다.” 하였다. 공자가 노() 나라 주공(周公)의 묘에서 제사를 거들 때 매사를 물었던 것은 결코 예를 몰라서가 아니라, 극도로 공경하고 근신하여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시골 사람이 서울 맵시를 내 봤자 결국 촌놈이오. 비하자면 술 취한 사람이 아무리 정색을 해 봤자 하는 짓이 취한 짓뿐인 것과 같으니, 이걸 꼭 알아야 하지요.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군수(君受)에게 답함

 

 

보내 준 글은 비하자면 몰골도(沒骨圖)와 같소. 착색에 옅고 짙은 것이 있은 연후에야 눈썹과 눈을 분간할 수 있는 거지요.

 

 

[D-001]몰골도(沒骨圖) : 묵필(墨筆)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곧바로 채색한 그림을 말한다.

[D-002]눈썹과 눈 : 글의 요점을 비유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중존(仲存)에게 보냄

 

 

매탕(梅宕)은 반드시 미친병이 발작하고 말 것이니, 그대는 아는지요? 그가 장연(長淵)에 있을 때 일찍이 금사산(金沙山)에 올라 큰 바다가 하늘에 닿을 듯이 파도치는 것을 보고서 스스로 자기 몸이 좁쌀만 한 것을 깨닫자, 갑자기 수심이 생겨서 마침내 탄식하며 말하기를,

 

가령 저 탄환만 한 작은 섬이 여러 해 동안 기근이 든 데다 풍파가 하늘에 닿아서 구호식량마저 보낼 수 없다면 이를 어찌하나? 해적들이 몰래 일어나 바람에 돛을 올리고 침략해 와서 도망할 곳이 없게 된다면 이를 어찌하나? , 고래, 악어, 이무기가 육지를 타고 올라와 알을 까고 사람을 사탕수수 줄기처럼 마구 씹는다면 이를 어찌하나? 바다의 파도가 크게 넘쳐 마을을 갑자기 덮쳐 버린다면 이를 어찌하나? 바닷물이 멀리 옮겨 가 하루아침에 물길이 끊어지고 고립된 섬의 밑부분이 높이 솟구쳐 우뚝이 바닥을 보인다면 이를 어찌하나? 파도가 섬의 밑부분을 갉아먹어 부딪치고 넘치고 하길 오래 하여 흙도 돌도 지탱하기 어려워 물살에 무너지고 만다면 이를 어찌하나?”

하였다지요.

그의 의심과 염려가 이와 같으니 미치지 않고 어쩌겠소. 밤에 그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포복절도하여 손 가는 대로 써 보내는 거요.

 

 

[C-001]중존(仲存) :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의 자이다.

[D-001]매탕(梅宕) : 이덕무의 일호(一號)이다. 이덕무는 1768년 음력 10월 한양에서 황해도 장연(長淵)의 조니진(助泥鎭)까지 다녀온 여행일기인 서해여언(西海旅言)을 썼다. 서해여언 10 12일 조에 조니진에 머물면서 장산곶(長山串)의 사봉(沙峯) 즉 금사산(金沙山)에 올라 대해를 바라보며, 연암이 편지에서 인용한 바와 같은 망상을 했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단 연암은 서해여언 중의 해당 내용을 조금 줄여 인용하였다. 靑莊館全書 卷62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경보(敬甫)에게 보냄

 

 

공교롭고도 묘하구려, 이처럼 한데 만나게 된 인연이여! 도대체 누가 이런 계기를 만들었단 말이오? 그대는 나보다 앞서 나지도 않았고 나는 그대보다 뒤에 나지도 않아 둘 다 한 세상에 태어났으며, 그대는 이면(剺面)하지도 않았고 나는 조제(雕題)하지도 않아 둘 다 한나라에 태어났으며, 그대는 남쪽에 살지 않고 나는 북쪽에 살지 않아 둘 다 한마을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그대는 무()를 업으로 삼지 않고 나는 농사를 배우지 않아 똑같이 사문(斯文)에 종사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큰 인연이요 큰 기회(期會)가 아니겠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말에 구차스레 동조하거나 상대가 하는 일에 구차스레 맞추려고 한다면, 이는 차라리 위로 거슬러 올라가 천고(千古)의 옛사람을 벗하거나 백세(百世) 후에도 미혹되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소.

 

 

[D-001]이면(剺面) : 칼로 얼굴에 자국을 낸다는 뜻이다. 고대에 흉노(匈奴)나 위구르 등지의 종족들은 큰 우환이나 초상을 당하면 칼로 얼굴에 자국을 내어 그 비통함을 표시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북쪽 나라에서 태어남을 말한 것이다.

[D-002]조제(雕題) : 칼로 이마 위에 꽃무늬를 새겨 넣는다는 뜻이다. 고대에 남방의 소수민족 사이에 유행했던 풍속으로, 여기에서는 남쪽 나라에서 태어남을 말한 것이다.

[D-003]백세(百世) …… 않는 : 중용장구(中庸章句)  28 장에, 군자의 도는 백세 후에 성인(聖人)을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는다.百世以俟聖人而不惑고 하였다. 이는 군자는 백세 후에 출현할 성인이라도 자신과 동일한 도를 말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뜻이지만, 연암의 편지에서는 백세 후에라도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안회(顔回)처럼 누항(陋巷)에 살면서, 그가 즐거워한 바가 무슨 일인지를 탐구하고 있소이다. 원헌(原憲)은 봉려(蓬廬)에 살면서,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가난할 뿐이다.”라고 말했지요.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도토리를 아침에는 세 개씩 주고 저녁에는 네 개씩 주니, 도토리를 주고서도 원숭이들을 화나게 만들었소. 그리고 맹자는 일국(一國)으로써 팔국(八國)을 굴복시키려는 것을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짓에 비유하였지요.

그대는 나날이 나아가오. 나도 나날이 나아가겠소.

 

 

[D-001]안회(顔回)처럼 …… 있소이다 : 논어 옹야(雍也)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항(陋巷)에서 살게 되면 남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라고 하였다. 또한 술이(述而)에서도 공자는 거친 음식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즐거움은 또한 그 가운데에 있다.”고 하였다. 아무리 가난한 생활도 그의 즐거움을 변하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안회나 공자가 무엇을 즐거워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주자(周子)는 이같이 공자와 안회의 즐거움을 말한 대목에서 즐거워한 바가 무슨 일인지所樂何事를 깨우치도록 하였고, 정자(程子)도 공자가 즐거워한 바가 무슨 일인지所樂者何事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연암은 박제가(朴齊家)에게 굶주림을 하소연하며 돈을 꿔 달라고 요청한 편지에서 해학적인 어조로, “공자가 진() · ()에서 겪은 것처럼 곤액이 심하지만, 도를 실천하느라고 그렇게 된 것은 아닐세. 그러나 망령되이 안회의 누항 생활에 비기면서, 그가 즐거워한 바가 무슨 일인지 탐구하고 있네.厄甚陳蔡 非行道而爲然 妄擬陋巷 問所樂而何事라고 하였다. 貞蕤閣文集 卷4 答孔雀館

[D-002]원헌(原憲) …… 말했지요 : 공자의 제자 원헌은 쑥대를 짜서 문을 겨우 만들어 단 가난한 집에 살면서도 정좌하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 출세한 자공(子貢)이 좋은 옷차림에 거마(車馬)를 타고 원헌을 방문했는데, 허름한 옷차림의 그를 보고는 탄식하며 무슨 병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원헌이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배운 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을 병이라 하네. 나는 지금 가난한 것이지 병에 걸린 것은 아니라네.”라고 하였더니 자공이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莊子 讓王

[D-003]원숭이를 …… 만들었소 :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D-004]맹자는 …… 비유하였지요 :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서 맹자는 제() 나라 선왕(宣王)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고 싶어하자, 이를 나무에 올라서 물고기를 구하는 짓에 비유하면서, 천하의 강국 아홉 나라 중의 하나에 불과한 제 나라가 나머지 여덟 나라를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비판하였다.

[D-005]그대는 …… 나아가겠소 :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 저 할미새를 보라, 부지런히 날면서 울어 대지 않는가. 나는 나날이 나아가니, 너도 다달이 나아가라.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너를 낳아 주신 분들을 욕되게 말아라.題彼脊令 載飛載鳴 我日斯邁 而月斯征 夙興夜寐 無忝爾所生 하였다. 이 시는 형제가 각자 나아가는 길이 혹시 다를지라도 부모에게 욕되지 않도록 서로 부지런히 노력하자고 형이 동생을 면려(勉勵)한 시로 풀이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연암은 친구 경보(敬甫)를 면려하는 뜻으로 이 시의 한 구절을 변형하여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원심재(遠心齋)에게 보냄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의 집에 속백호통(續白虎通)이 있는데 한() 나라 반표(班彪)가 짓고 진() 나라 최표(崔豹)가 주석을 내고 명() 나라 당인(唐寅)이 평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기서(奇書)라 여기고 소매 속에 넣고 돌아와 등잔 밑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혜풍 자신이 범에 대한 얘기를 모아서 한번 웃을 자료로 삼은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나는 참으로 머리가 둔하다 하겠소. 당인(唐寅)의 자가 백호(伯虎)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소. 그렇기는 하지만, 한번 웃음거리로 읽기에는 족할 것이니, 보고 나서 바로 돌려주기 바라오.

 

 

[D-001]당인(唐寅) …… 것이었소 : 백호통(白虎通)은 한() 나라 때 반고(班固)가 편찬한 책으로, 백호관(白虎觀)에서 오경(五經)에 관해 논의한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유득공이 속백호통을 반고의 아버지인 반표(班彪)가 편찬하고, 고금주(古今注)의 저자 최표(崔豹)가 주석을 냈다고 꾸며 댄 것은, 그들의 이름에 각각 작은 범 표() , 표범 표() 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인(唐寅)이 평했다고 꾸며 댄 것은 그의 자가 백호(伯虎)이기 때문이었는데, 그 점을 미처 간파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초책(楚幘)에게 보냄

 

 

그대는 행여 신령한 지각과 민첩한 깨달음이 있다 하여 남에게 교만하거나 다른 생물을 업신여기지 말아 주오. 저들에게 만약 약간의 신령한 깨달음이 있다면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으며, 만약 저들에게 신령한 지각이 없다면 교만하고 업신여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우리들은 냄새나는 가죽부대 속에 몇 개의 문자를 지니고 있는 것이 남들보다 조금 많은 데 불과할 따름이오. 그러니 저 나무에서 매미가 울음 울고 땅 구멍에서 지렁이가 울음 우는 것도 역시 시를 읊고 책을 읽는 소리가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소.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성백(成伯)에게 보냄

 

 

 

문 앞의 빚쟁이는 기러기처럼 줄 서 있고 / 門前債客鴈行立

방 안의 취한 놈들 고기 꿰미마냥 잠을 자네 / 屋裡醉人魚貫眠

 

이 시는 당() 나라 때 큰 호걸 사나이가 지은 시입니다. 지금 나는 찬 방에 외로이 지내면서 냉담한 품은 마치 선()에 든 중과 같은데, 다만 문 앞에 기러기처럼 늘어선 놈들 두 눈깔이 너무도 가증스럽소.

매양 비굴하게 말해야 할 때면 도리어 등() · ()의 대부를 생각할 뿐입니다.

 

 

[C-001]성백(成伯) : 서중수(徐重修 : 1734~1812)의 자이다. 서중수는 연암의 둘째 누님의 남편으로 진사 급제 후 강화부 경력(江華府經歷)을 지냈다.

[D-001]() 나라 …… 사나이 : 당 나라 때의 시인인 이파(李播)를 가리킨다. 이파는 원화(元和 : 806~820) 연간에 진사(進士)에 급제한 인물로서, 유우석(劉禹錫)과 백거이(白居易)로부터 칭송을 받을 정도로 시를 잘 지었다고 한다. 위에 인용된 시는 그의 대표적인 시 현지(見志)’의 일부분으로서 그 전문은 작년에 산 거문고값 아직 내지 않았고, 올해 산 술값도 돌려주지 않으니, 문 앞의 빚쟁이는 기러기처럼 줄 서 있고, 방안의 취한 놈들 고기 꿰미마냥 잠을 자네.去歲買琴不與價, 今年沽酒未還錢, 門前債主雁行立, 屋裡醉人魚貫眠이다. 唐詩紀事 卷47》 《靑莊館全書 卷53 耳目口心書6

[D-002]() · ()의 대부 : 논어(論語) 헌문(憲問)에서 공자가, “맹공작(孟公綽)은 조() 나라나 위() 나라의 가로(家老)가 되기에는 충분하지만 등() 나라나 설() 나라의 대부(大夫)는 될 수 없다.” 하였는데, 이는 맹공작의 인물됨이 청렴하고 욕심이 없기는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가 부족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등 나라나 설 나라는 약소국이라 그 나라의 대부가 되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고생이 막심하다. 연암은 가난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무능한 자신을 그에다 견주어 탄식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나는 나이 스무 살 되던 때 설날 아침에 거울을 마주 보며元朝對鏡라는 시를 지었지요.

 

 

두어 올 검은 수염 갑자기 돋았으나 / 忽然添得數莖鬚

육척의 몸은 전혀 커진 것이 아니네 / 全不加長六尺軀

거울 속의 얼굴은 해를 따라 달라져도 / 鏡裡容顔隨歲異

철모르는 생각은 지난해 나 그대로 / 穉心猶自去年吾

 

이 시는 대개 턱밑에 드문드문 난 짧은 수염을 처음 보고서 기뻐서 지은 것이라오. 그 뒤 6년이 지나 북한산에서 글을 읽는데 납창(蠟窓 밀랍 종이를 바른 창)의 아침 햇살에 거울을 마주하고 이리저리 돌아보니 두 귀밑에 몇 올의 은실이 비치는 것이 아니겠소. 스스로 기쁨을 가누지 못하여 시()의 재료를 더 얻었다 생각하고 아까워서 뽑아 버리지 않았지요. 지금 다시 5년이 지나니 앞에서 이른바 시의 재료라는 것은 어지러이 얼크러지고, 턱밑에 드문드문 났던 것은 뻣세기가 생선의 아가미뼈 같으니, 연소한 시절의 철모르던 생각을 회상하면 저도 몰래 부끄러워 웃게 됩니다. 만약 진작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아무리 새 시 몇 백 편을 얻는다 해도, 어찌 스스로 기뻐하면서 남이 알지 못할까 걱정했겠소.

우리들이 만약 말을 타고 문을 나서려고 한다면 용문(龍門)에 오르기보다 어려우니 어느 때에 서로 만날 수 있겠소? 생각이 날 때 즉시 가야 하지만, 단지 지독한 가뭄이 돌을 녹이고 바람 먼지가 얼굴을 덮칠 뿐 아니라, 귀인(貴人)은 더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애쓰고 있고 시생(侍生)은 하마(下馬)를 해야 하니 이것이 난감하외다. 이를 어찌하겠소.

 

 

[D-001]설날 …… 보며 : 이 시는 연암집 4 영대정잡영(映帶亭雜咏)에 수록되어 있다.

[D-002]지금 …… 지나니 : 이로 미루어 이 편지가 연암의 나이 31세 때인 1767년에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D-003]용문(龍門) …… 어려우니 : 황하(黃河)의 잉어가 급류를 거슬러 용문에 오르면 용으로 변한다고 해서, 과거에 급제하거나 입신출세하는 것을 등룡(登龍)이라 한다.

[D-004]귀인(貴人) …… 있고 : 귀인은 성백(成伯)을 가리킨다. 원문은 貴人喝扇으로 되어 있는데, 선갈(扇喝)은 더위 먹은 사람에게 부채질을 해 준다는 뜻으로, 덕정(德政)을 찬양할 때 쓰는 말이다. () 나라 무왕(武王)이 더위 먹은 사람을 보고 손수 부축하여 부채질을 해 주었다는 고사가 있다. 淮南子 人間訓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종형(從兄)에게 올림

 

 

사람들이 심한 더위와 모진 추위를 만나면 그에 대처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옷을 벗거나 부채를 휘둘러도 불꽃 같은 열을 견뎌내지 못하면 더욱 덥기만 하고, 화롯불을 쪼이거나 털배자를 껴입어도 한기(寒氣)를 물리치지 못하면 더욱 떨리기만 하는 것이니, 이것저것 모두가 독서에 착심(着心)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요컨대 자기 가슴속에서 추위와 더위를 일으키지 않아야 하겠지요.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이른바 이광(李廣)은 운명이 기구하여 편장(偏將)과 비장(裨將)들도 다 후()에 봉()해졌거늘 홀로 그리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짧은 베옷 바람으로 차가운 날씨에 옷자락을 끌고 어느 왕공(王公)의 문하를 쫓아다녔겠습니까?

찾으시는 문편(文編 책으로 엮은 글)을 삼가 받들어 올리기는 합니다만, 제왕(齊王)의 문 앞에서 거문고를 잡고 있는 격이어서 재주를 파는 방법을 모른다는 비웃음을 살 뿐이요, () 나라 궁궐에 옥()을 바치는 격이어서 발뒤축이 잘려도 후회하지 않을는지 두렵습니다.

 

 

[D-001]이광(李廣)은 운명이 기구하여 : () 나라 무제(武帝) 때 이광은 자원하여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의 휘하에서 흉노(匈奴) 정벌에 종군했으나, 이광이 늙었다고 여긴 무제는 위청에게 이광은 운명이 기구하니 선우(單于)와 대적하지 못하게 하라는 밀지(密旨)를 내렸다. 漢書 卷54 李廣傳

[D-002]제왕(齊王) ……  : () 나라 왕이 피리를 좋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제 나라에서 벼슬을 얻기 위해 거문고를 들고 가서 제왕의 문 앞에서 3년 동안 서 있었으나 들어가 보지도 못하자, 밖에서 크게 소리치기를, “내가 거문고를 연주하면 귀신도 춤을 추게 할 수가 있으며 헌원씨(軒轅氏)의 음률에도 합치가 됩니다.” 하였다. 그러자 문객이 나와 꾸짖기를, “왕께서는 피리를 좋아하신다. 네가 거문고를 아무리 잘 연주한다 한들 왕께서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을 어찌하겠느냐.” 하였다. 한유(韓愈)는 말하기를, “이는 거문고는 잘 타지만 제 나라에 벼슬을 구하는 것은 잘 못한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문체가 당시의 유행에 맞지 않는 것을 그에 비기어 탄식하였다. 韓昌黎文集 卷18 答陳商書

[D-003]() 나라 ……  : 변화(卞和)가 직경이 한 자나 되는 박옥을 얻어 초 나라 여왕(厲王)과 무왕(武王) 두 임금에게 바쳤으나 옥을 감정하는 사람이 보고 돌이라 하여 두 발이 잘리고 말았다. 그 후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박옥을 안고 사흘 밤낮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문왕이 이 사실을 듣고 사람을 보내 이유를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발이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게 아니라 보배로운 옥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를 미치광이라 하니, 이 때문에 내가 슬피 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옥공(玉工)을 시켜 박옥을 다듬게 하여 마침내 보옥을 얻고 이를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 이름하였다. 韓非子 卷4 和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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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大瓠)에게 답함

 

 

보내 주신 원관루부(遠觀樓賦)는 종횡무진 거침없는 표현이 지나쳐 글제의 뜻을 고려하지 않았더군요. 비하자면 초상화를 그릴 때 본래의 모습과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어도 아무개의 초상화라고 제목을 붙여 놓지 않는다면 필경에는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도 오히려 불가(不可)하거늘, 더 나아가 녹야당(綠野堂) 안의 사람을 그리면서 그 모습을 고쳐 피부가 하얗고 눈썹이 선명하게 그려 놓는다면, 비록 걸어 놓고 보기에는 좋지만 배도(裴度)나 곽광(霍光)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C-001]대호(大瓠) : 누구의 호인지 알 수 없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서 호를 따왔다. 혜자(惠子)가 위() 나라 왕이 준 대호(大瓠 : 큰 조롱박)의 씨앗을 심었더니 그 열매가 너무 커서 쓸모가 없어 부수어 버렸다고 하자, 장자(莊子)는 그것으로써 대준(大樽 : 요주腰舟)을 만들어 강호(江湖)에 떠서 노니는 데 쓰면 되지 않느냐고 공박하였다.

[D-001]녹야당(綠野堂) …… 그려 놓는다면 : 녹야당 안의 사람은 당 나라 때의 재상인 배도(裴度 : 756~839)를 가리킨다. 배도는 벼슬에서 은퇴하고 낙양(洛陽)으로 물러나 녹야당이란 별장을 짓고 당대의 시인인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과 교유하였다 한다. 그리고 피부가 하얗고 눈썹이 선명한 것은 한 나라 때 대장군을 지낸 곽광(霍光 : ?~기원전68)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곽광은 사람됨이 침착하고 치밀하며, 키가 7 3촌에 하얀 피부와 선명한 눈썹, 멋진 수염을 지녔다고 한다. 新唐書 卷173 裴度傳》 《漢書 卷68 霍光傳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남에게 청하는 것과 남에게 주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싫으냐 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청하는 것이 싫다 할 것이오. 만약 남에게 주는 자의 마음이 실로 남에게 청하는 자의 마음만큼이나 싫다면, 사람치고 남에게 주는 자가 없으리다. 그런데 지금 나는 청하지 않고서도 매우 후하게 받았으니, 그야말로 그대는 남에게 주는 것을 즐기는 분이 아니겠소.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은 반드시 보응이 있고, 침착하고 조용한 자는 반드시 수양이 있고, 너그럽고 후한 자는 반드시 복이 있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자는 반드시 이룸이 있다.” 했는데, 이는 감경(甘京)의 말이지요. 그의 스승 정산(程山)은 여기에다 네 가지 말을 더했는데, “근엄하고 공경한 자는 반드시 실수가 없고, 청렴하고 근신한 자는 반드시 허물이 없고, 자상하고 신중한 자는 반드시 뉘우침이 없고, 겸손하고 화순한 자는 반드시 욕보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찍이 이 두 사람의 말을 외우고 다녔더니, 이장(李丈)께서 말씀하기를,

 

어찌 기필할 수 있으리오만 반드시 이와 같이 해야 할 따름이다.”

하였지요. 지금 무필재기(無必齋記)를 보니, 성인(聖人 공자(孔子))에게 사심(私心)이 없다는 걸 꿰뚫어 보았다 하겠소.

 

 

[D-001]감경(甘京) : 1622~?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학자로 호는 건재(健齋)이며, 사문천(謝文洊)의 제자이다.

[D-002]정산(程山) : 명말 청초의 학자인 사문천(謝文洊)을 가리킨다. 정산(程山)은 그의 호이다. 초기에는 왕양명(王陽明)의 학문을 연구하다 40세 이후에는 정주(程朱)의 학문으로 전환하였고 정산학사(程山學舍)를 세워 학문에 매진하였다.

[D-003]이장(李丈) : 연암의 장인인 이보천(李輔天)을 가리킨다. 과정록 초고본 권4에 연암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필재기를 논하며 이장의 말씀(李丈語)’이라 일컬은 조목은 바로 장인 이보천의 말씀이라고 밝혔다.

[D-004]무필재기(無必齋記) …… 하겠소 : 논어 자한(子罕) 공자는 네 가지를 끊으셨다. 억측하지 않고, 기필하지 않으며, 고집하지 않고, 아집을 부리지 않았다.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고 하였다. ‘毋必 無必과 같은 말로, 반드시 이루려고 무리하지 않음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담헌(湛軒)에게 사과함

 

 

어젯밤 달이 밝기로 비생(斐生)을 찾아갔다가 그를 데리고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을 지키던 자가 말하기를,

 

키 크고 수염 좋은 손님이 노랑말을 타고 와서 벽에다 글을 써 놓고 갔습니다.”

하기에, 촛불을 비춰 보니 바로 그대의 필치였소. 안타깝게도 손님이 왔다고 알려 주는 학()이 없기에 그만 그대에게 문에다 ()’ 자를 남기게 하였으니, 섭섭하고도 송구하구려. 이제부터서는 달 밝은 저녁이면 당분간 밖에 감히 나가지 않을 거요.

 

 

[C-001]담헌(湛軒) : 홍대용(洪大容)의 호이다.

[D-001]손님이 …… () : () 나라의 은사(隱士)로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한 임포(林逋)는 학 두 마리를 길렀는데 손님이 오면 그 학이 손님이 온 것을 알렸다고 한다. 宋詩鈔 卷13 林逋和靖詩鈔序

[D-002]문에다 …… 하였으니 : () 나라 때 혜강(嵇康)이 여안(呂安)과 친하여 매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들면 천리 길도 마다 않고 찾아갔다. 어느 날 여안이 혜강을 찾아갔으나 마침 혜강은 집에 없고 그의 형 혜희(嵇喜)가 문을 나와 맞이하자 여안이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문 위에다 ()’ 자를 쓰고는 가 버렸다. 혜강이 돌아와서 그것을 보고 범조(凡鳥)’  평범한 새로 파자(破字)하여 읽었다. 즉 혜희는 평범한 인물이므로 함께 사귈 만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적어 놓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누구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韻府群玉 卷19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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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4권 -영대정잡영(映帶亭雜咏)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4권 -영대정잡영(映帶亭雜咏)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4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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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4

 

 

영대정잡영(映帶亭雜咏)

1 총석정(叢石亭)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

2 좌소산인(左蘇山人)에게 주다

3 해오라비 한 마리 도중에 잠시 개다道中乍晴라고도 되어 있다.

4 농삿집

5 산해도를 열람한 노래搜山海圖歌

6 해인사(海印寺)

7 갓을 노래한 연구(聯句)

8 담원 팔영(澹園八詠) 구체적인 사실은 피서록(避暑錄)에 보인다.

9 설날 아침에 거울을 마주 보며

10 새벽길

11 극한(極寒)

12 산중에서 동짓날 이생(李生)에게 써 보이다

13 산행(山行) ‘산전갈이山耕로 된 데도 있다.

14 이거(移居)

15 노군교(勞軍橋)

16 필운대(弼雲臺)의 꽃구경

17 강가에 살며

18 압록강을 건너 용만성(龍灣城)을 돌아보다

19 구련성(九連城)에서 노숙하며

20 통원보(通遠堡)에서 비에 막히다

21 요동(遼東) 벌판을 새벽에 지나며

22 동관(東關)에서 유숙하다

23 원문 빠짐 절구 한 수를 읊다

24 원문 빠짐  말 위에서 구호(口號)하다 피서록(避暑錄)에 보인다.

25 필운대(弼雲臺)에서 살구꽃 구경하며

26 절구 네 수 제목 없음. 연경에 들어가는 사람을 송별한 때이거나 연경에 가면서 지은 잡영(雜咏)인 듯하다.

27 강가에 살며 멋대로 읊다

28 연암(燕岩)에서 선형(先兄)을 생각하다

29 홍태화(洪太和)의 비성아집(秘省雅集) 시에 차운하다

30 재실(齋室)에서 제릉 영(齊陵令)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31 술을 조금 마시다

32 구일날 맹원(孟園)에 올라 두목(杜牧)의 시에 차운하다

 

 

 

총석정(叢石亭)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

 

길손들 한밤중에 서로 주고받는 말이 / 行旅夜半相呌譍

먼 닭이 울었는가 아직 울지 않을 텐데 / 遠鷄其鳴鳴未應

먼저 우는 먼 닭은 그게 바로 어드메냐 / 遠鷄先鳴是何處

의중에만 있는 거라 파리 소리처럼 희미하네 / 只在意中微如蠅

마을 속의 개 한 마리 짖다 도로 고요하니 / 邨裏一犬吠仍靜

고요 극해 찬기 일어 마음이 으시으시 / 靜極寒生心兢兢

이때 마침 소리 있어 두 귀가 울리는 듯 / 是時有聲若耳鳴

자세히 듣자니 집닭 울음 뒤따르네 / 纔欲審聽簷鷄仍

예서 가면 총석정이 십 리밖에 되잖으니 / 此去叢石只十里

동해에 곧바로 다다르면 해돋이를 보겠구먼 / 正臨滄溟觀日昇

하늘과 맞닿은 물만 넘실넘실 해 뜰 조짐 전혀 없고 / 天水澒洞無兆朕

거센 파도 언덕 치니 벼락이 일어나네 / 洪濤打岸霹靂興

노상 의심쩍은 건 폭풍이 바다를 뒤집어엎고 / 常疑黑風倒海來

뿌리째 산을 뽑아 뭇 바위 무너질까 / 連根拔山萬石崩

고래 곤어 다투다가 뭍으로 나올 법도 하이 / 無怪鯨鯤鬪出陸

뜻밖에 회오리 바람 일어 나래 치는 붕새를 만날지도 / 不虞海運値摶鵬

다만 걱정되는 건 이 밤이 오래도록 아니 새어 / 但愁此夜久未曙

이제부터 혼돈을 뉘 다시 징벌할지 / 從今混沌誰復徵

아마도 겨울 신이 제 힘을 과시하여 / 無乃玄冥劇用武

구유(九幽)를 일찍 닫고 우연(虞淵)을 얼게 하지 않았나 / 九幽早閉虞淵氷

아마도 하늘 축이 오래도록 돌고 돌다 / 恐是乾軸旋斡久

서북으로 기울어져 묶은 줄이 끊어진 게지 / 遂傾西北隳環絙

세 발 달린 까마귀 날기로는 천하제일인데 / 三足之烏太迅飛

누가 주술 부려 발 하나를 노끈으로 매어 놓았나 / 誰呪一足繫之繩

해야(海若)의 옷과 띠엔 물방울이 뚝뚝 듣고 / 海若衣帶玄滴滴

수비(水妃)의 쪽 찐 머린 추위 서려 싸늘하네 / 水妃鬢鬟寒凌凌

큰 고기 활개 치며 준마같이 내달리니 / 巨魚放蕩行如馬

붉고 푸른 지느러미 어찌 그리 터부룩한고 / 紅鬐翠鬣何鬅鬙

개벽 이전 어둔 누리 본 사람이 누구더냐 / 天造草昧誰參看

참다 못해 외쳐 대며 등이라도 켜려 드네 / 大呌發狂欲點燈

혜성이 꼬리를 끌고 화성(火星)이 광망(光芒)을 뻗치네 / 欃槍擁彗火垂角

낙엽 진 나무의 부엉이 울음 더욱더 밉상일레 / 禿樹啼鶹尤可憎

조금 뒤에 수면에 작은 부스럼 생긴 듯 / 斯須水面若小癤

용의 발톱 잘못 긁혀 독기로 벌겋더니 / 誤觸龍爪毒可

그 빛이 점점 커져 만리를 비추누나 / 其色漸大通萬里

물결 위에 번진 빛 꿩의 가슴 비슷하이 / 波上邃暈如雉膺

아득아득 이 천지에 한계 처음 생겼으니 / 天地茫茫始有界

붉은 붓 한 번 그어 두 층이 되었구려 / 以朱劃一爲二層

매삽이라 신성이라 염색집이 하도 커서 / 梅澁新惺大染局

몇 천 필 색을 들여 온갖 비단 으리으리 / 千純濕色縠與綾

산호나무 누가 베어 참숯을 만들었나 / 作炭誰伐珊瑚樹

부상나무 뒤이으니 더욱더 이글이글 / 繼以扶桑益熾蒸

염제는 불을 불어 입이 응당 비틀리고 / 炎帝呵噓口應喎

축융은 부채 휘둘러 바른팔이 지쳤구려 / 祝融揮扇疲右肱

새우 수염 가장 길어 그슬리기 제일 쉽고 / 鰕鬚最長最易爇

굴껍질은 굳을수록 더욱더 절로 익네 / 蠣房逾固逾自

한 치 구름 조각 안개 동으로 다 쓸려 가서 / 寸雲片霧盡東輳

온갖 상서 바치려고 제 힘을 다하누나 / 呈祥獻瑞各效能

자신궁(紫宸宮)엔 조회 전에 바야흐로 갖옷을 모셔놓고 / 紫宸未朝方委裘

병풍만 펼쳐 논 채 용상은 비어 있네 / 陳扆設黼仍虛凭

초승달은 샛별 앞에 오히려 밀려나서 / 纖月猶賓太白前

먼저 예를 행하겠다고 등설(滕薛)처럼 제법 맞서누나 / 頗能爭長薛與滕

붉은 기운 차츰 묽어 오색으로 나뉘더니 / 赤氣漸淡方五色

먼 물결 머리부터 절로 먼저 맑아지네 / 遠處波頭先自澄

바다 위 온갖 괴물 어디론지 숨어 버리고 / 海上百怪皆遁藏

희화만이 홀로 남아 수레 장차 타려 하네 / 獨留羲和將驂乘

육만이라 사천 년을 둥글둥글 내려왔으니 / 圓來六萬四千年

오늘 아침 동그라미 고쳐 어쩌면 네모가 될라 / 今朝改規或四楞

만길의 깊은 바다에서 어느 누가 길어 올렸을까 / 萬丈海深誰汲引

이제서야 믿겠노라 하늘도 오를 계단이 있음을 / 始信天有階可陞

등림에 가을 열매 한 덩이가 붉었고 / 鄧林秋實丹一顆

동공이 채색 공을 차서 반만 올렸구려 / 東公綵毬蹙半登

과보는 헐레벌떡 뒤따라오고 있고 / 夸父殿來喘不定

육룡은 앞서 끌며 교만스레 자랑하네 / 六龍前道頗誇矜

하늘가 어둑해져 갑자기 눈살 찌푸리듯 하늘가 어두워지다가 / 天際黯慘忽顰蹙

어영차 해 수레 미니 기운이 솟아난 듯 / 努力推轂氣欲增

바퀴처럼 둥글잖고 독처럼 길쭉한데 / 圓未如輪長如瓮

뜰락 말락 하니 철썩철썩 부딪치는 소리 들리는 듯 / 出沒若聞聲砯砯

만인이 어제처럼 모두 바라보는데 / 萬物咸覩如昨日

어느 뉘 두 손으로 받들어 단번에 올려놨노 / 有誰雙擎一躍騰

 

 

[C-001]총석정(叢石亭)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 : 연암의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지은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영조 41(1765) 연암은 벗 유언호(兪彦鎬) · 신광온(申光蘊)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할 때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를 보고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하며, 연암 스스로도 득의작으로 자부하여 열하일기 일신수필(馹迅隨筆) 7 20일 조에 수록해 놓았다. 윤광심(尹光心) 병세집(幷世集)에는 총석관일(叢石觀日)이라는 제하에 수록되어 있는데, 자구의 차이가 있으며 12 84자가 추가되어 있다. 연암집에 수록된 시의 초고로 짐작된다.

[D-001]파리 소리처럼 희미하네 : 시경(詩經) 제풍(齊風) 계명(鷄鳴) 닭이 우는 것이 아니라, 파리 소리로다.匪鷄則鳴 蒼蠅之聲라고 하였다. 현비(賢妃)가 임금이 조회(朝會)에 늦지 않게 깨우려고 조바심하다가 파리 소리를 닭 울음으로 잘못 들었다는 뜻이다.

[D-002]두 귀가 울리는 듯 : 이명증(耳鳴症)으로 헛소리를 들은 듯하다는 뜻이다.

[D-003]곤어(鯤魚) : 북해(北海)에 살며 크기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는 물고기로,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온다. 원문의  병세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04]나래 치는 붕새 : 제해(齊諧)에 붕새가 남쪽 바다로 이동할 때 물보라가 삼천 리나 일어나며 나래로 회오리바람을 쳐서 오르기 구만 리나 된다.摶扶搖而上者九萬里고 하였다. 장자 소요유에 나온다.

[D-005]이제부터 혼돈을 : 혼돈은 천지개벽 초에 만물이 아직 구별되지 않은 어두운 상태를 가리킨다. 이 혼돈은 중국 고대 문헌에서 주로 부정적인 존재로 의인화(擬人化)되었다. 장자 응제왕(應帝王)에서는 눈, , , 귓구멍, 콧구멍이 없는 중앙의 제왕으로 소개되어 있다. 삼황(三皇) 이전 천지의 시초의 제왕이라고도 한다. 또한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제홍(帝鴻) 즉 황제(黃帝)의 못난 자식으로서 그 후손이 요순(堯舜) 시대 때 악명 높은 사흉(四凶)의 하나였다고 한다. 신이경(神異經)에는 곤륜산(崑崙山) 서쪽에 사는 악수(惡獸)라고도 하였다. 원문의 從今 병세집에는 從玆로 되어 있다.

[D-006]구유(九幽) : 땅속의 가장 깊은 곳을 가리킨다.

[D-007]우연(虞淵) : 전설상 해가 지는 곳이다.

[D-008]하늘 축 : 원문의  병세집 등 이본에는 로 되어 있다. ‘건뉴(乾紐)’는 천도(天道)란 뜻이다.

[D-009]서북으로 기울어져 : 고대 중국에서는 하늘이 서북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일월성신(日月星辰)이 그쪽으로 가고 있다고 믿었다. 列子 湯問》 《사기(史記) 127 일자열전(日者列傳)에도 하늘은 서북쪽이 부족하니 별들이 서북으로 이동한다.天不足西北 星辰西北移고 하였다.

[D-010]묶은 …… 게지 : 원문의  병세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11]세 발 달린 까마귀 : 전설상 해 속에 산다는 새이다.

[D-012]주술 : 원문의  병세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13]해야(海若) : 전설상의 해신(海神)이다.

[D-014]수비(水妃) : 전설상 수중의 신녀(神女)이다.

[D-015]쪽 찐 머린鬢鬟 : 양쪽 귀밑머리를 잡아당겨 만든 환상(環狀)의 쪽 찐 머리를 말한다.

[D-016]혜성이 꼬리를 끌고 : 원문의 참창(欃槍)은 혜성의 이름이고, 혜성은 비를 들어 쓸어 버린 듯이 꼬리를 길게 끌기 때문에 소추성(掃帚星)이라고도 한다.

[D-017]붉은 …… 그어 : 원문의 以朱劃一 병세집에는 殷紅深碧으로 되어 있다.

[D-018]매삽(梅澁)이라 신성(新惺)이라 : ‘매삽 신성은 그 의미가 불확실하나 염색집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원문의  열하일기 일신수필(馹迅隨筆) 7 20일 조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9]부상(扶桑)나무 : 전설상 해 뜨는 곳에 자란다는 나무이다.

[D-020]염제(炎帝) : 전설상 불을 주관하는 신이다.

[D-021]축융(祝融) : 이 또한 불을 주관하는 신이다.

[D-022]온갖 …… 다하누나 : 원문의 獻瑞各效能 병세집에는 效瑞難具稱으로 되어 있으며, 이어서 成曇變霱爭來王 縓緣絳領金線縢’ 2행이 추가되어 있다.

[D-023]자신궁(紫宸宮) : 당송(唐宋) 시대에 천자가 신하나 외국의 사신을 조회하던 정전(正殿)이다.

[D-024]바야흐로 갖옷을 모셔놓고 : 임금이 죽고 새 임금이 아직 조정에 나와 앉기 전에는 선왕의 유의(遺衣)인 갖옷을 모셔놓고 조회한다.

[D-025]등설(滕薛)처럼 제법 맞서누나 : () 나라 은공(隱公) 11년 봄에 등후(滕侯)와 설후(薛侯)가 노 나라에 조현(朝見)을 왔다가 예를 행하는 데 있어 그 선후를 다투자 은공이 설후를 설득하여 등후가 먼저 예를 행하도록 한 데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隱公11

[D-026]먼 물결 머리부터 : 원문의  병세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27]바다 위 : 원문은 海上인데, 병세집에는 俄者로 되어 있다.

[D-028]희화(羲和) : 전설상 해를 태운 수레를 모는 신이다.

[D-029]수레 …… 하네 : 병세집에는 이 다음에 有物如盖來覆之 其下蜿蜒馳神螣’ 2행이 추가되어 있다.

[D-030]육만이라 사천 년 : 소옹(邵雍)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의하면, 우주가 개시해서 소멸할 때까지를 1()이라 하는데, 1원은 12(), 1회는 30()으로, 1운은 12(), 1세는 30()으로 나뉜다. 따라서 1원은 12 9600년이 된다. 우주의 역사가 6()가 되면 6 4800년이 된다.

[D-031]하늘도 …… 있음을 : 논어(論語) 자장(子張), 진자금(陳子禽)이 자공(子貢)에게 공자라도 그대만 못하겠다고 칭찬하자, 자공은 선생님에게 미칠 수 없음은 하늘을 계단을 밟아 오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라고 반박하였다.

[D-032]등림(鄧林) : 전설상의 숲 이름이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북경(海外北經), 과보(夸父)가 해를 따라 달리다가 목이 말라 죽었는데 그때 버린 지팡이가 숲을 이뤄 등림이 되었다고 한다.

[D-033]동공(東公) : 전설상의 해를 맡은 신이다.

[D-034]육룡(六龍)은 앞서 끌며 : 전설에서 해의 신이 수레를 타면 여섯 용이 수레를 끌고 희화가 이를 몰고 다닌다고 한다. 원문의  열하일기 일신수필(馹迅隨筆) 7 20일 조에는 로 되어 있다.

[D-035]바퀴처럼 둥글잖고 : 원문의  병세집 등 이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36]뜰락 ……  : 병세집에는 이 구절 다음부터 끝까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다.  金銀震蕩色未定 欲掛冥靈枝不勝 慌惚直欲雙手擎 轉眄之間一躍騰 快如盡曉難解書 喜極新逢欲招朋 爽如翻惺作噩夢 喉中未聲聲忽能 離海一尺無不照 儘覺生平天宇弘으로 되어 있다.

[D-037]만인이 …… 바라보는데 :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오(九五)의 효사(爻辭)에 대한 공자의 풀이 중에 성인이 나타나시니 만물이 바라본다.聖人作而萬物覩는 말이 있다.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에 의하면 이때 만물(萬物)은 만인(萬人)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해를 성인에 비겼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좌소산인(左蘇山人)에게 주다

 

 

이 세상 사람들을 내 살펴보니 / 我見世之人

남의 문장을 기리는 자는 / 譽人文章者

()은 꼭 양한을 본떴다 하고 / 文必擬兩漢

시는 꼭 성당을 본떴다 하네 / 詩則盛唐也

비슷하다는 그 말 벌써 참이 아니라는 뜻 / 曰似已非眞

한당(漢唐)이 어찌 또 있을 리 있소 / 漢唐豈有且

우리나라 습속은 옛 투식 즐겨 / 東俗喜例套

당연하게 여기네 촌스러운 그 말을 / 無怪其言野

듣는 자는 도무지 깨닫지 못해 / 聽者都不覺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이 없군 / 無人顔發赭

못난 놈은 기쁨이 뺨에 솟아서 / 騃骨喜湧頰

입을 벌려 웃어 대며 침을 흘리고 / 涎垂噱而哆

약은 놈은 갑자기 겸양을 발휘하고 / 黠皮乍撝謙

삼십 리나 피하여 달아나는 척 / 逡巡若避舍

허한 놈은 두 눈이 놀라 휘둥글 / 餒髥驚目瞠

더웁지 않은데도 땀 쏟아지고 / 不熱汗如瀉

약골은 굉장히도 부러워하여 / 懦肉健慕羨

이름만 들어도 향기 나는 듯 / 聞名若蘅若

심술꾼은 공공연히 노기를 띠어 / 忮肚公然怒

주먹 불끈 후려치길 생각한다오 / 輒思奮拳打

내 또한 이와 같은 기림을 듣고 / 我亦聞此譽

갓 들을 땐 낯가죽이 에이는 듯싶더니 / 初聞面欲剮

두 번째 듣고 나니 도리어 포복절도 / 再聞還絶倒

여러 날 허리 무릎 시큰하였다네 / 數日酸腰髁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더욱 흥미 없어 / 盛傳益無味

밀조각을 씹은 듯이 도리어 맛이 없더군 / 還似蠟札飷

그대로 베껴서는 진정 안 될 말 / 因冒誠不可

오래 가면 마치도 실성하여 바보가 된 듯하지 / 久若病風傻

심술쟁이를 돌아보며 얘기하노니 / 回語忮克兒

잔재주 따윌랑 우선 버리게 / 伎倆且姑舍

조용히 내가 한 말 들어나 보면 / 靜聽我所言

네 마음 응당 너그러워질 터 / 爾腹應坦奲

흉내쯤이야 시새울 게 무엇이 있다고 / 摸擬安足妒

스스로 야료를 부리다니 무안스럽지 않나 / 不見羞自惹

걸음을 배우려다가 되려 기어서 오고 / 學步還匍匐

찌푸림을 본받으면 단지 추할 뿐 / 效嚬徒醜䰩

이제 알리라 그려 놓은 계수나무가 / 始知畵桂樹

생생한 오동만 못하다는 걸 / 不如生梧檟

손뼉 치며 초() 나라를 놀라게 해도 / 抵掌驚楚國

마침내는 의관(衣冠)을 빌린 것이며 / 乃是衣冠假

푸르고 푸른 언덕의 보리를 노래한 것은 / 靑靑陵陂麥

입속의 구슬을 몰래 빼내기 위함이라 / 口珠暗批撦

제 속이 속된 줄은 생각 안 하고 / 不思膓肚俗

아름다운 붓 벼루만 애써 찾거든 / 强覓筆硯雅

육경의 글자로만 점철하는 건 / 點竄六經字

비하자면 사당에 의탁한 쥐와 꼭 같지 / 譬如鼠依社

훈고(訓詁)의 어휘를 주워 모으면 / 掇拾訓詁語

못난 선비들은 입이 다 벙어리 되네 / 陋儒口盡啞

태상이 제물을 벌여 놓으니 / 太常列飣餖

절인 생선과 젓갈 뒤섞여 썩은 냄새 진동하고 / 臭餒雜鮑鮓

여름철 농사꾼이 허술한 제 차림 잊고 / 夏畦忘疎略

창졸간에 갓끈과 띠쇠로 겉치장한 셈이지 / 倉卒飾緌銙

눈앞 일에 참된 흥취 들어 있는데 / 卽事有眞趣

하필이면 먼 옛것을 취해야 하나 / 何必遠古抯

한당은 지금 세상 아닐 뿐더러 / 漢唐非今世

우리 민요 중국과 다르고말고 / 風謠異諸夏

반고(班固)나 사마천(司馬遷)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 班馬若再起

반고나 사마천을 결단코 모방 아니 할걸 / 決不學班馬

새 글자는 창조하기 어렵더라도 / 新字雖難刱

내 생각은 마땅히 다 써야 할 텐데 / 我臆宜盡寫

어쩌길래 옛 법에만 구속이 되어 / 奈何拘古法

허겁지겁하기를 붙잡고 매달린 듯 하나 / 刦刦類係把

지금 때가 천근(淺近)하다 이르지 마소 / 莫謂今時近

천년 뒤에 비한다면 당연히 고귀하리 / 應高千載下

손자(孫子) 오자(吳子)의 병서 사람마다 읽긴 하지만 / 孫吳人皆讀

배수진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지 / 背水知者寡

남들이 사 두지 않는 물건을 서둘러 산 이는 / 趣人所不居

유독 저 여불위(呂不韋)란 큰 장사치뿐이었네 / 獨有陽翟賈

이 몸은 음()이 허해 병이 깊어져 / 而我病陰虛

사 년째 다리가 쑤시고 아팠다오 / 四年疼跗踝

적막한 물가에서 그대를 만나니 / 逢君寂寞濱

가을철 쓸쓸한 규방의 미인마냥 얌전도 하이 / 靜若秋閨姹

웃음을 자아내는 광형(匡衡)이 방금 온 듯 / 解頤匡鼎來

몇 밤이나 등잔 심지 돋우었던가 / 幾夜剪燈灺

글 평론 약속한 듯 서로 꼭 들어맞으니 / 論文若執契

두 눈을 빛내며 술잔을 잡네 / 雙眸炯把斝

하루아침에 막힌 가슴 쑥 내려가니 / 一朝利膈壅

입에 가득 매운 생강 씹은 맛일레 / 滿口嚼薑葰

평생에 숨겨 둔 두어 줌 눈물 / 平生數掬淚

싸 두었다 뿌리노라 가을 하늘에 / 裹向秋天灑

목수장이 나무 깎길 맡았지마는 / 梓人雖司斲

대장장이를 배척한 일이 없었네 / 未曾斥鐵冶

미장이는 제 스스로 쇠흙손 잡고 / 圬者自操鏝

기와 이는 놈 제 스스로 기와 만드네 / 蓋匠自治瓦

그들이 방법은 비록 같지 않지만 / 彼雖不同道

목적은 큰 집을 짓자는 거야 / 所期成大厦

저만 옳다 하면 남이 붙지를 않고 / 悻悻人不附

지나치게 깔끔을 떨면 복 못 받느니 / 潔潔難受嘏

그대는 아무쪼록 현빈을 지키고 / 願君守玄牝

아무쪼록 기저를 장복(長服)하게나 / 願君服氣姐

부디 한창 젊을 적에 노력한다면 / 願君努壯年

전문이 동쪽으로 활짝 열리리 / 專門正東閜

 

 

[C-001]좌소산인(左蘇山人) : 서유본(徐有本 : 1762~1822)의 호이다. 서유본은 그 아우 서유구(徐有榘)와 함께 연암을 종유(從遊)하고 문학적으로 큰 감화를 받았다.

[D-001]() …… 하네 : () 나라 왕세정(王世貞) 문은 반드시 서한을 본뜨고 시는 반드시 성당을 본떠야 한다.文必西漢 詩必盛唐고 제창하여 의고주의(擬古主義) 문풍이 성행하게 되었다.

[D-002]향기 나는 듯 : 원문의 형약(蘅若)은 향초(香草)인 두형(杜蘅)과 두약(杜若)을 말한다. 형약(蘅若) ()’은 이때 상성(上聲) 마운(馬韻)으로 압운하였으므로  의 반절(反切) 로 읽어야 한다.

[D-003]걸음을 …… 오고 : 수릉(壽陵) 지방의 젊은이가 당시 조() 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에 가서 그곳 사람들의 세련된 걸음걸이를 배우려다가 이를 제대로 익히지도 못하고 예전의 걸음걸이마저 잃어버린 채 기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莊子 秋水

[D-004]찌푸림을 ……  : 중국 최고의 미인이라 불리는 서시(西施)가 가슴앓이로 인상을 찌푸리고 다녔는데 그 모습마저 아름답게 보이자 이웃의 추녀가 그 모습을 흉내 내었으나 도리어 더 추해 보였다고 한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莊子 天運

[D-005]손뼉 …… 것이며 : () 나라 악공(樂工) 우맹(優孟)이 죽은 초 나라 재상 손숙오(孫叔敖)의 의관을 입고 장왕(莊王) 앞에 나타나 손뼉을 치면서 이야기하자 장왕이 깜짝 놀라면서 손숙오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으로 믿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D-006]푸르고 …… 위함이라 : 장자(莊子)가 유자(儒者)를 도굴꾼에 비유해 풍자한 글에서, 유자가 시체의 입에 물고 있는 구슬을 보고 푸르고 푸른 보리, 언덕 위에 자랐네. 살아 생전 베풀지 않더니만, 죽어서 구슬 문들 무엇하리오.靑靑之麥 生于陵陂 生不布施 死何含珠爲라는 시를 읊조리며 입을 벌려 구슬을 끄집어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즉 시문(詩文)을 지을 때 남의 훌륭한 구절을 훔쳐 내어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말한 것이다. 莊子 外物

[D-007]육경(六經) …… 같지 : 사람들이 범할 수 없는 사당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쥐처럼, 사람들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성스러운 경전(經典)에 의탁하여 시문을 짓는 것을 말한다. 晏子春秋 問上九

[D-008]태상(太常) : 제사와 예악을 담당하는 관리이다.

[D-009]지금 …… 고귀하리 : 근대 이전 동양에서는 복고적인 역사관에 따라 문학에서도 옛것일수록 고귀하게 여기고 요즘 것일수록 천시하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의 경향이 심했다. 연암은, 지금 것도 천년이 지나면 옛것이 되어 고귀하게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하여 복고적인 사상을 비판한 것이다.

[D-010]배수진(背水陣) …… 드물지 : () 나라 장수 한신(韓信) 사지(死地)에 빠진 뒤에야 살 수 있고, 죽을 자리에 놓인 뒤라야 산다.”는 병법을 활용하여, 오합지졸들을 모아 배수진을 침으로써 조() 나라 군대를 대파할 수 있었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D-011]여불위(呂不韋) : 전국 시대 말기 양적현(陽翟縣)의 대상인이다. () 나라에 볼모로 와 천대받고 있던 진() 나라 공자 자초(子楚)를 만나자 이를 사 둘 만한 기화奇貨可居라 여기고는, 계책을 써서 진 나라의 왕이 되게 함으로써 그의 아들인 진 시황에 이르기까지 진 나라의 승상을 지낼 수 있었다. 史記 卷85 呂不韋列傳

[D-012]이 몸은 …… 깊어져 : 한의학에서 음()에 속하는 정액이나 진액(津液)이 부족해지는 병을 음허(陰虛)라고 한다. 음허가 되면 몸에 열이 나고 식은땀과 천식이 생긴다고 한다.

[D-013]웃음을 ……  : () 나라 광형(匡衡) 시경에 대한 풀이를 잘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시경에 대해 풀이할 사람이 없다 싶으면 광형이 바로 오고, 광형이 시경을 풀이하면 사람들이 저절로 웃음을 터뜨린다.無說詩 匡鼎來 匡說詩 解人頤 하였다. 漢書 卷81 匡張孔馬傳

[D-014]현빈(玄牝) : 노자(老子) 6장에 곡신은 죽지 않으니 현빈이라 이른다. 현빈의 문은 천지의 뿌리이다.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天地之根라고 하였다. 현빈은 현묘한 모체(母體)란 뜻으로, 양생(養生)의 도()를 가리킨다.

[D-015]기저(氣姐) : 기저의 저()는 모()와 같은 뜻으로 說文 女部, ‘ 의 반절인 로 읽어야 한다. 기저는 기모(氣母), 즉 우주의 원기(元氣)를 말한다. 장자 대종사(大宗師), 복희씨가 도를 얻어 기모를 배합했다고 한다. 복기(服氣)는 도가(道家)의 양생술인 호흡법을 말한다.

[D-016]전문(專門) …… 열리리 : 이백(李白)의 고시(古詩) 59수 중 제 3 수에서 진 시황(秦始皇)이 천하를 제압한 사실을 노래하면서, “함곡관(函谷關)이 동쪽으로 활짝 열렸네.函谷正東開라고 하였다. 진 시황이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침략을 두려워할 일이 없어, 그동안 굳게 닫아걸었던 동쪽 관문(關門) 함곡관을 활짝 열어 두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좌소산인 서유본이 문장 공부에 전념한다면 장차 천하를 제압하는 명가(名家)가 되리라는 격려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해오라비 한 마리 도중에 잠시 개다道中乍晴라고도 되어 있다.

 

 

한 마리 해오라비 버들 등걸 밟고 섰고 / 一鷺踏柳根

또 한 마리 물 가운데 우뚝 서 있네 / 一鷺立水中

산허리는 짙푸르고 하늘은 시커먼데 / 山腹深靑天黑色

무수한 해오라비 공중을 빙빙 돌며 나네 / 無數白鷺飛翻空

선머슴 소를 타고 시냇물 거슬러 건너는데 / 頑童騎牛亂溪水

시내 너머로 각시 무지개 날아오르네 / 隔溪飛上美人虹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농삿집

 

 

늙은 첨지 참새 쫓느라 남녘 둑에 앉았는데 / 翁老守雀坐南陂

개꼬리 같은 조 이삭에 노란 참새 매달렸네 / 粟拖狗尾黃雀垂

큰아들 작은아들 모두 다 들에 나가니 / 長男中男皆出田

농삿집 진종일 낮에도 문 닫겼네 / 田家盡日晝掩扉

솔개가 병아리를 채려다가 빗나가니 / 鳶蹴鷄兒攫不得

호박꽃 울타리에 뭇 닭이 꼬꼬댁거리네 / 群鷄亂啼匏花籬

젊은 아낙 바구니 이고 시내를 건너려다 주춤주춤 / 小婦戴棬疑渡溪

꾀복쟁이와 누렁이가 줄지어 뒤따르네 / 赤子黃犬相追隨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산해도를 열람한 노래搜山海圖歌

 

 

 

여름날에 백씨(伯氏) 및 종제(從弟) 이중(履仲), 덕보(德保), 무관(懋官)과 약속하여 현원(玄園)에 노니는데, 각기 하나씩 감상품을 내놓고 비교해 보기로 했다. 이 두루마리 그림은 길이가 거의 활 한 마당 지점에 달하게 되므로 원중(園中)에 벌여 놓고 그림을 따라 모두 걸음을 옮겨가면서 감상했다.

 

() 기르는 복부(服不) 소임 어느 뉘 맡았는고 / 豢龍服不誰其司

동서남북 넓은 세상 기괴한 것 하고하네 / 四荒之野多詭奇

북두성 빗기어라 늙은 여우 절을 하고 / 北斗星斜拜老狐

화표주 푯말 아랜 누런 살쾡이 울음 우네 / 華表柱下啼黃貍

남산의 큰 원숭이 고운 첩을 훔쳐 내어 / 南山大玃盜媚妾

바위틈에 함께 살며 억지로 사통하네 / 與處岩穴强之私

산도깨비 대낮에 산을 떠나 내려와서 / 山魈白日下山來

사람 사는 부엌 빌려 방게를 구워 먹네 / 借人竈突燒蟛蜞

울루를 야유하고 백익과 숨바꼭질 / 揶揄鬱累迷伯益

늪이라 수풀에서 제멋대로 실컷 노네 / 菹澤叢林恣飽嬉

관운장이 모습 바꿔 신병을 거느리니 / 關王變相領神兵

하얀 낯에 수염은 한 올도 돋지 않고 / 白面乃無一莖髭

검은 관 붉은 신에 누른 비단 도포 입고 / 玄冠赤舃黃羅袍

석 자 길이 교의에 호피 깔고 앉았구려 / 三尺胡床委皐比

왼손을 무릎까지 드리우고 바른편을 돌아보며 / 左手垂膝右顧視

성났어도 미소 지으며 그 눈썹 치켜세웠네 / 怒而微笑竪其眉

도검을 받든 자는 칼자루를 오른손으로 잡고 있고 / 奉刀劍者右其柄

동자놈은 탄환 갖고 찰싹 붙어 따라가네 / 小童執彈親身隨

녹의 입은 늙은 관리 백책을 손에 쥐고 / 綠衣老吏執白策

몸을 굽혀 붙따르며 힐끗힐끗 눈치를 먼저 보네 / 鞠躳將趨頻先窺

어떤 자는 동개 차고 어떤 자는 도끼 잡아 / 或佩櫜鞬或秉鉞

엄숙하고 경건하니 뉘 감히 딸꾹질하리 / 肅敬伊誰敢噦嘻

봉황 부채 학 일산(日傘) 빽빽이 늘어서고 / 鳳扇鶴傘立簇簇

붉은 깃발 반만 가려 바람에 펄렁펄렁 / 紅旂半遮風旖旎

땅에 엎뎌 영을 듣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떠나가니 / 伏地聽令挐雲去

모두 다 새까맣고 험상궂은 놈들일세 / 盡是黑漢與醜厮

푸른 놈은 그 얼굴이 쪽물을 들여논 듯 / 綠者其面如入藍

누런 놈은 그 다리 치자를 발라논 듯 / 黃者其脚如塗梔

부리가 뾰족뾰족 닭 같은 놈 있다면은 / 有如鷄者喙尖尖

뿔이 우뚝우뚝 외뿔소 같은 놈도 있다마다 / 有如兕者角觺觺

태어나서 한 번도 머리를 빗질 않아 긴 털이 더풀더풀 / 生不梳頭髮鬅鬙

귀신 밉단 사람 말을 내 이제 알았다오 / 人言鬼憎吾今知

겨드랑이 주변에 입이 달려 아! 괴이하도다 / 脇上有口吁可怪

그 입에 칼을 무니 수저를 머금은 듯 / 其口遇劍如含匙

귀 뚫어 구리 고리 달고 팔목에는 팔찌 찼네 / 耳穿銅環臂跳脫

다리에는 모직 행전을 치고 신에는 끈을 매지 않았네 / 脚繫毛偪不屨綦

어떤 놈은 칼 안 들고 돌만을 쥐고 / 或不執兵但執石

나무 뽑아 가지 쳐서 거꾸로 쥐었구나 / 拔木去枝仍倒持

만 발 길이 쇠줄에 흉악한 용 매달고서 / 萬丈鐵索係毒龍

한 마디 영차 소리 늪과 언덕 무너지네 / 一聲許邪拔澤陂

줄 끊기자 두 귀신 넘어져 엉치 다치니 / 索絶二鬼顚傷尻

한 귀신 팔을 펴며 한바탕 크게 웃네 / 一鬼張臂大笑之

용이란 놈 기세등등하며 떨어지질 아니하니 / 龍也搖頭不能落

그 비늘과 뺨의 털 가지런히 달려 있구나 / 纍纍縣其鱗之而

거센 물결 이처럼 시커멓다 이상할 것 없네 / 無怪驚濤黑如此

용의 침을 섞어서 귀신 다리 씻겼겠지 / 應洗鬼脚和龍漦

뱀 잡는 놈이 있어 뱀이 그놈 목 감아 대니 / 有捕蛇者蛇纏頸

눈이 솟고 낯이 벌건 채 턱을 덜덜 떨고 있네 / 目聳面赤簸其頤

칼 휘둘러 달려가니 다시 주춤 물러서서 / 揮劍直前復小卻

갈라진 혓바닥을 실로 불꽃처럼 날름거리네 / 實燀如炎舌有歧

헐떡거리며 달아나는 놈은 붉은 옷을 입었는데 / 喙且走者衣紫衣

꼬리 탐스러워 어슬렁대는 숫여우 같구나 / 尾豐似是雄綏綏

아내 하나 화살 맞아 두 팔을 쭉 뻗대고 / 一妻箭中兩臂伸

아내 하나 매에게 채여 오른 눈썹 비틀렸네 / 一妻鷹攫右眉攲

아내 하나 아이 안고 낭자 잡고 달아나는데 / 一妻抱兒奉髻走

아이가 여전히 젖을 빨자 그 아이를 나무라네 / 兒猶吮乳嗔其兒

왕 원숭이 타박 입어 뼈마디가 물러지고 / 猴王被打骨到軟

배꼽 아래로 고개 처져 사지는 비실비실 / 頭垂過臍委四肢

두 계집 부축 받아 절뚝절뚝 걸어가니 / 兩女扶腋踉蹡行

서두르는 손길에 부딪쳐 오사모(烏紗帽)가 떨어지네 / 手忙觸落烏接䍦

화상 입은 한 덩이 육신을 보전코자 / 欲全焦揚一塊肉

몸종은 울면서 비단보로 감싸 주누나 / 侍婢泣以錦襁詩

범의 네 발목을 얽어 작대기로 꿰어 드니 / 縛虎四蹄貫以木

축 늘어진 꼴이 홰에 걸린 갖옷과도 같구려 / 離披有如裘掛椸

땅 위에 철봉 꽂고 붉은 띠로 얽고 얽어 / 植棒地上纏赤帶

그 꼬리 손에 쥐고 당기기를 엿 늘이듯 / 手執其尾引如飴

물소를 잡아 와서 두 손가락으로 코 뚫고 / 兩指穿挽水牛鼻

코뚜레 못 얻으니 노끈으로 목을 얽었네 / 索絼不得項繫縻

날아오른 사슴의 이마 뿔이 꺾여 내려오니 / 飛上鹿定摧角下

너무 뾰족해서 갈면 송곳으로 합당하이 / 太尖只合磨爲觿

거북을 짊어지니 거북 발톱 다릿살을 후벼 파고 / 負龜龜以爪爬腿

고래를 껴안으니 고래 코는 수염 내를 씩씩 맡네 / 抱鯨鯨以鼻嗅髭

자라 끌고 두껍 들고 양옆으로 칼을 끼며 / 曳鼈提蟾挾擁劍

멧돼지 메고 이리를 내쫓으며 비유를 꿰찼네 / 肩豕揮狼佩肥遺

크고 작은 귀신 합쳐 아흔에 여덟인데 / 大小鬼凡九十八

또 하나 왕 귀신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진 않네 / 又一鬼王不在斯

털 짧은 추한 짐승들 스물하나라면 / 臝毛之醜二十一

어여쁜 선녀들 열여섯이 섞여 있네 / 一十有六之魔姬

용어와 자라에다 뱀마저 열에 여덟 / 龍魚鼈鼇蛇十八

개 하나 매 하나에 다시 또 거북 하나 / 犬一鷹一復一龜

묻노라 어느 사람 이 그림 그렸는고 / 借問何人作此畵

왕적(王迪)이라 기후(起侯)가 만든 걸로 되어 있네 / 王迪起侯之所爲

여러 손들 모여서 보고 다투어 찬탄하며 / 諸客聚觀爭讚歎

유과(油菓) 기름 묻을까 봐 서로를 경계하네 / 相戒勿汚寒具脂

나 역시 집에 오니 눈에 아직 삼삼하여 / 我亦歸家眼森森

밤에도 잠 못 이루고 생각이 여기에만 / 宵不成寐念在玆

애오라지 붓을 들고 수효대로 기록하여 / 聊復捻筆記其數

때때로 펼쳐 보며 스스로 즐긴다오 / 時時披閱以自怡

 

 

[C-001]산해도를 열람한 노래搜山海圖歌 : 유득공(柳得恭) 영재집(泠齋集) 1에도 같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자구상 차이가 적지 않다. 제목 아래에 소주(小註) 이 아래에 형암(炯菴 : 유득공의 호) 2수를 써야 한다.此下當書炯菴二首고 적혀 있고, 작품이 끝나는 곳의 상단 여백에도 두주(頭註) 이 아래에 형암의 2수를 쓰시오.此下書炯菴二首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이 수산해도가는 연암의 원작이 영재집에 잘못 수록된 것이며, 형암이 지었다는 수산해도가 2수가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해도(山海圖)는 고대 중국의 신화집(神話集)이자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의 내용을 소재로 삼은 그림이다. 완씨칠략(阮氏七略)에 의하면 남조(南朝) () 나라의 화가 장승요(張僧繇)가 그렸다는 산해도가 기록으로 전하는 최초의 작품이다. 六硏齋筆記 卷3 동진(東晉) 때 곽박(郭璞)이 산해경도찬(山海經圖讚)을 지었고, 도연명(陶然明)이 독산해경(讀山海經) 시를 지은 이래, 이백(李白)과 맹호연(孟浩然) 등 저명한 시인들이 산해도를 본 시들을 남기고 있음을 보면, 산해도가 후대에 지속적으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연암이 보았다는 산해도는 왕적(王迪)이 그린 작품이라 하는데, 왕적이 누구인지 확실치 않다. 참고로, 남송(南宋) 신종(神宗) 때 유명한 은자(隱者)로 먹을 잘 만들었다는 왕적(王迪)이란 인물이 있다. 墨史 卷中》 《能改齋漫錄 卷18

[D-001]백씨(伯氏) …… 무관(懋官) : 연암의 백씨는 박희원(朴喜源)이다. 벼슬을 하지 못했으며, 연암의 장남 종의(宗儀)를 양자로 들였다. 이중(履仲)은 연암의 삼종제(三從弟)인 박수원(朴綏源)의 자이다. 그는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의 손자로서, 진사 급제 후 선산 부사(善山府使)를 지냈다. 덕보(德保)는 홍대용(洪大容)의 자이고, 무관(懋官)은 이덕무(李德懋)의 자이다.

[D-002]복부(服不) : 맹수를 키우거나 조련시키는 관직이다. 周禮 夏官 司馬 요순(堯舜) 시절 동보(董父)가 용을 잘 길렀으므로 순 임금이 그에게 환룡(豢龍)이란 성씨를 내렸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昭公29

[D-003]북두성 빗기어라 : 원문의 斜拜老 영재집에는 高拜蒼으로 되어 있다.

[D-004]화표주 푯말 아랜 : 화표주는 교량이나 성곽, 능묘 따위의 앞에 세우는 거대한 기둥을 가리킨다. 원문의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으나, 잘못인 듯하다.

[D-005]고운 첩 : 원문의 媚妾 영재집에는 媚婦로 되어 있고, 김택영의 중편연암집(重編燕巖集)에는 美妾으로 되어 있다.

[D-006]산도깨비 …… 내려와서 : 원문의 白日下山來 영재집에는 彳亍窺村竈로 되어 있다.

[D-007]사람 …… 빌려 : 원문은 借人竈突인데, 영재집에는 束蘊乞火로 되어 있다. ‘ 자가 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8]울루(鬱累) : 악귀를 잘 다스린다는 신()의 이름이다. ‘鬱壘라고도 한다. 세간에서 대문의 신門神으로 받들었다. 論衡 訂鬼

[D-009]백익(伯益) : () 임금의 신하로 우()를 도와 치수(治水)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書經 舜典 순 임금이 백익에게 불을 관장하게 하자 백익이 산과 못을 불질러 태웠더니 새와 짐승들이 달아나 숨었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上

[D-010]관운장이 …… 거느리니 : 원문은 關王變相領神兵인데, 영재집에는 帝聞之怒勅鬼伯으로 되어 있다.

[D-011]하얀 …… 않고 : 원문은 白面乃無一莖髭인데, 영재집에는 部勒六丁兵一枝로 되어 있다.

[D-012]도포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13]돌아보며 : 원문은 顧視인데, 영재집에는 顧眄으로 되어 있다.

[D-014]성났어도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15]녹의(綠衣) : 정색(正色)이 아닌 하등(下等) 복색(服色)으로, () 나라 때 6, 7품의 하급 관리가 착용했다.

[D-016]백책(白策) : 영재집에는 白板으로 되어 있다. 정식으로 도장이 찍혀 있지 않은 사령장(辭令狀)을 뜻한다. 정식 발령을 받지 못한 관리도 백판이라 한다.

[D-017]봉황 …… 일산(日傘) : 원문은 鳳扇鶴傘인데, 영재집에는 頭稀脚衆으로 되어 있다.

[D-018]쪽물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9]부리가 뾰족뾰족 : 원문은 喙尖尖인데, 영재집에는 嘴微曲으로 되어 있다.

[D-020]뿔이 …… 있다마다 : 원문은 有如兕者角觺觺인데, 영재집에는 有如牛者角雙觺로 되어 있다.

[D-021]긴 털이 더풀더풀 : 원문은 髮鬅鬙인데, 영재집에는 髮蓬葆로 되어 있다.

[D-022]내 이제 : 원문은 吾今인데, 영재집에는 今乃로 되어 있다.

[D-023]영차 소리 : 원문은 許邪인데, 영재집에는 邪許로 되어 있다.

[D-024]엉치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25]그 비늘과 뺨의 털 : 원문은 其鱗之而인데,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재인(梓人) 에 나오는 표현으로, 해석이 분분하다. 여기서는 청() 나라 왕인지(王引之)의 설에 따라 해석하였다.

[D-026]주춤 : 원문의 가 이본에는 로 되어 있는데, 같은 뜻이다.

[D-027]붉은 옷을 입었는데 : 원문은 衣紫衣인데, 영재집에는 其衣紫로 되어 있다.

[D-028]어슬렁대는 숫여우 : 시경(詩經) 위풍(衛風) 유호(有狐) 여우가 어슬렁댄다有狐綏綏는 구절이 있다. ‘수수(綏綏)’에 대해 주자(朱子) 짝을 찾아서 혼자 다니는 모습이라고 풀이했다.

[D-029]쭉 뻗대고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30]걸어가니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31] : 원문의 이 이본에는 으로 되어 있으나, 잘못이다.

[D-032]비유(肥遺) : 산해경 서산경(西山經) 영산(英山)에 새가 있어 그 모습이 메추라기와 같고 노란 몸에 붉은 부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을 비유(肥遺)라 한다.” 하였다.  산해경 북산경(北山經)에는 혼석산(渾夕山)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뱀이 있는데, 그 이름을 비유라 한다.” 하였다.

[D-033]왕 귀신 : 원문은 鬼王인데, 영재집에는 鬼伯으로 되어 있다.

[D-034]용어(龍魚) : 산해경 해외서경(海外西經)에 용어는 잉어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신성한 사람이 그것을 타고 구주(九州)를 다닌다고 하였다.

[D-035]자라 : 원문은 鼈鼇인데, 영재집에는 鼈蟹로 되어 있다.

[D-036]다시 …… 하나 : 원문은 復一龜인데, 영재집에는 蟾與龜라고 되어 있다.

[D-037] …… 삼삼하여 : 원문은 我亦歸家眼森森인데, 영재집에는 我歸森森長在眼으로 되어 있다.

[D-038]수효대로 기록하여 : 원문은 記其數인데, ‘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해인사(海印寺)

 

 

합천이라 해인사 절이 있으니 / 陜川海印寺

웅장 화려 팔도에 이름이 났네 / 壯麗稱八路

가마 타고 골짝에 막 들어서니 / 肩輿初入洞

그윽한 경치 차츰차츰 모여드누나 / 幽事漸相聚

못은 깊어 수은을 담아 놓은 듯 / 湫深若貯汞

온갖 형상 아리땁게 갖추었어라 / 窈窕萬象具

팔다리에 얼크러진 나무 그림자 / 樹影錯脛肘

폐부를 뚫고 드는 산빛이로세 / 山光寫肺腑

제 깃 사랑하여 비춰 보려고 새는 자주 물을 기웃거리고 / 愛羽鳥頻窺

제 터럭 믿고 수달은 능히 물을 거슬러 오르네 / 恃毛獺能泝

으슥진 곳 헤치고 지날 땐 악몽을 꾸는 듯 / 剔幽類夢噩

괴성을 지를 적엔 건주정 피우는 듯 / 呌奇競淸酗

다람쥐는 뺨에다 물어 밤을 저장하고 / 鼯廩頰藏栗

고슴돛은 등의 가시로 찔러 토란을 싣네 / 蝟載背刺芋

눈 깜짝하는 사이에 기괴하게 변하니 / 俄頃轉譎詭

너무도 생소하여 의구심마저 나네 / 生疎甚疑懼

갑자기 으리으리 깁옷 입은 것은 / 照爛忽衣錦

십리 길을 양옆에 낀 단풍나무 숲이어라 / 十里擁丹樹

천둥 같은 폭포 소리 높은 골짝 짜개고 / 飛霆疈高峽

온 샘이 용솟아 한데로 쏟네 / 百泉湧傾注

후려치고 물어뜯다가 놀라서 서로 합치고 / 搏嚙驚相合

부딪치고 싸우다가 물러섰다 도로 내닫네 / 觸鬪卻還赴

물의 성질 본래는 유순하지만 / 水性本柔順

수많은 험한 돌과 서로 만나면 / 犖确石與遇

한 치도 선선히 양보하지 않아 / 不肯一頭讓

마침내 수천 년을 성낸 채 내려오네 / 遂成千古怒

남은 여울물은 모래밭에 엎디어 울며 / 餘湍伏沙鳴

사람 향해 하소연 흐느껴 우네 / 幽咽向人訴

모를레라 저 물이랑 저 돌을 보면 / 不知水於石

서로 무슨 질투가 있다는 건지 / 有何相嫉妒

물이 돌에 부딪치지 않는다면 / 使水不相激

돌도 응당 원망하며 거스르지 않을 텐데 / 石應無怨忤

원하노니 돌이 조금 양보한다면 / 願言石小遜

물도 편평하게 퍼지며 흘러갈 것을 / 水亦流平鋪

어쩌자고 힘자랑 밀치고 다투어 / 奈何力排爭

밤낮으로 야단법석 일삼는 건고 / 日夜事喧嘑

가마 떠멘 중 덕분에 험지(險地)를 지나는데 / 歷險賴轝僧

두어 걸음 못 벗어나 번갈아 메네 / 替擔纔數步

어깨 붉어지고 오목한 홈이 패여 가엾고 / 肩騂憐凹筧

시뻘개진 까까머리 박처럼 깨져 버릴까 걱정 / 巓赭恐破瓠

허리 쥐고 숨을 한창 헐떡거리고 / 捧腰喘方短

등에 밴 땀방울 흐르다 말라 버리네 / 透背汗因沍

묻노라 너희는 무슨 낙() 있어 / 問爾何所聊

갖은 고생 다 겪으며 깊은 산속에 사느냐 / 辛苦萬山住

잡역으로 관가에 종이 만들어 바치고 / 雜役供官紙

힘 남으면 사사로 신도 삼지요 / 餘力織私屨

오히려 무서운 건 지나는 나그네들 / 猶將畏過客

관의 부름에 나아가듯 빨리 달려간다오 / 犇趨似赴募

이를 보니 마음이 측은하여라 / 見此心悱惻

호소할 데 없는 신세 차마 못 볼레 / 不忍無控籲

미투리 바꿔 신고 지팡일 챙겨 / 換屨覓短笻

엎어지고 자빠지며 가는 비탈길 / 仄逕任顚仆

화공(畵工)이 가을 산에 들어가면은 / 畵史入秋山

해질녘의 먼 경치 그리려 하나니 / 意匠在遠暮

서리 숲은 단청으로 풍요로운데 / 霜林饒丹靑

찬 햇볕이 하얀 깁을 대신하누나 / 冷陽替絹素

골짝 입구 갑자기 넓게 벌어져 / 洞門忽廣坼

수레 백 대도 나란히 몰 수 있겠군 / 百車可並驅

숲은 첩첩 아스라이 어리비치고 / 疊樹遠掩映

()는 층층 반만이 얼굴 내미네 / 層閣半呈露

여라 넝쿨 무성한 길에 마중 나온 노승을 보니 / 老僧候蘿逕

장삼 굴갓 차림새가 괴이하구려 / 巾衲詭制度

은근히 먼 길을 위로하면서 / 慇懃勞遠途

합장으로 대신하며 예의를 갖추네 / 合掌成禮數

나를 끌어 절 문으로 발을 들이자 / 引我入寺門

눈이 놀라 몇 번이고 돌아보는 걸 / 眩轉勞眄顧

사천왕상 우뚝허니 앞을 막으니 / 巨靈屹當前

팔다리 느닷없이 벌벌 떨려라 / 手脚實危怖

벌린 입은 찢겨져 눈까지 닿았고 / 張口裂至目

불거진 두 눈깔엔 황금 발랐군 / 突睛黃金鍍

귓속에서 뽑아낸 두 마리 뱀은 / 耳中拔雙蛇

꿈틀꿈틀 독 안개 뿜어내는 듯 / 蜿蜒若射霧

제멋대로 비파를 끼고도 있고 / 汗漫擁琵琶

알록달록한 칼 끈을 쥐고도 있네 / 落莫執劍韄

힘을 써서 요귀의 배를 밟으니 / 努力蹋鬼腹

그 요귀 혀와 눈이 모두 튀어나왔네 / 鬼目舌並吐

단풍나무 귀신은 팔이 잘려 떨어지고 / 楓魖腕鑿落

대나무 귀신은 손톱이 갈큇발 같아 / 竹魈爪回互

벽라의 옷깃 어깨를 덮고 / 覆肩薜蘿襟

호피의 바지로 배를 가렸네 / 掩肚虎皮袴

괴룡이랑 가뭄 귀신은 / 乖龍及旱魃

꽁무니와 뿔이 서로 엉겨 붙었고 / 尻角相依附

우레 치는 귀신이랑 바람 귀신은 / 雷公與飛廉

부리나 이마가 유독 타고난 자질이라 / 嘴額獨天賦

엎치락뒤치락 갖신 밑에 숨어 / 顚倒竄鞾底

팔다리 돌려대며 허공에 허우적이네 / 爬空匝臂股

불전은 깊은 골짝이라 몹시 차가워 / 佛殿寒洞天

용마루 서까래만 햇볕 겨우 드네 / 甍桷纔容煦

황금빛과 푸른빛 번쩍번쩍 눈부실 지경 / 金碧閃相奪

해를 보니 저절로 눈이 침침해지네 / 視陽自昏瞀

창문을 아로새겨 연꽃 이루고 / 雕窓成菡萏

파닥파닥 가마우지는 멱을 감누나 / 翩翩浴鶿鷺

연리화(連理花)는 붉은 꽃받침 함께하고 / 連理幷紫蔕

비익조(比翼鳥)는 푸른 목이 하나로 되었네 / 比翼結翠嗉

예쁜 아이 검은 용의 구슬을 손에 놀리고 / 妖童弄驪珠

고운 계집 새장에다 봉새 기르네 / 豔女調鳳笯

칠성(七星)의 관원님들 시위(侍衛)를 거느리고 / 星官從羽衛

구름 타고 경포에 모여드누나 / 步雲集瓊圃

영롱 세계 두루두루 구경코 나니 / 玲瓏罷周覽

서글퍼서 마음이 무너지는걸 / 悵然使心斁

도리어 꿈속에서 경치를 보면 / 還如夢中景

어두침침해서 늘 비 내리는 날과 같고 / 沈沈常雨雨

시름 속에 밥을 먹으면 / 又似愁裏饍

눈앞에 성찬이 있어도 배불리 못 먹는 것과도 같네 / 滿眼不飽饇

비로소 알괘라 괴이한 구경은 / 始知詭異觀

즐거움 극에 달하면 되려 운치 없음을 / 樂極還無趣

내 진작 들었노라 석가여래는 / 我聞牟尼佛

코와 눈이 본래 추악했는데 / 鼻眼本醜惡

뒷세상 사람들이 더럽게 여겨 / 或恐後世人

애모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 嘔穢不愛慕

저 경박한 제() · ()의 아이놈들이 / 輕儇齊梁兒

제멋대로 화상과 소상(塑像) 만드니 / 私意傅繪塑

어떤 건 아주 작아 팥알 같건만 / 幺麽或如豆

전생을 깨달은 것처럼 해 놓고 / 前生若可悟

우람하기 짝이 없는 장륙불상(丈六佛像) / 塊然丈六身

다리 하나가 수레를 다 차지할 만하네 / 一肢可專輅

감괘(坎卦)처럼 손가락들을 맞대었는데 / 箇箇指連坎

크고 작은 손가락들 모두 곱고 예쁘네 / 巨細悉媺嫮

부처에게 더구나 그게 무슨 상관이랴 / 於佛更何有

알고 보면 이런 꾀는 모두 잘못이지 / 此計儘錯誤

그렇게 해서 부처를 높이려는 수작이 / 所以尊之者

도리어 극심한 비방을 초래하였지 / 還自極訿䜑

이러쿵저러쿵 곱네 밉네 해도 / 紛紛姸蚩間

혜심은 응당 예전 그대로겠지 / 慧心應如故

빙 두른 팔십 칸 행랑을 보소 / 回廊八十間

넓고 넓도다 장경판고(藏經板庫) / 蕩蕩藏經庫

거울처럼 윤이 나는 옻칠한 판자 / 漆板明如鏡

좀이 못 들게 소금물에 삶아 냈다지 / 烹鹽備蟫蠹

차곡차곡 쌓아서 얼음 창고 같은데 / 委積若凌陰

실명한 듯 깜짝 놀라 제대로 보질 못하겠네 / 失目驚瞿瞿

비하자면 늘어선 비단 가게와 같아 / 譬如列錦肆

 원문 빠짐  / □□□□□

방패들이 늘어선 듯 짜임새 있게 놓였고 / 織織比盾干

댓가지 꽂아 논 듯 촘촘히 쌓였네 / 簀簀揷箘簵

서성대며 시험 삼아 뽑아다 보니 / 徘徊試抽看

주석조차 없어서 도무지 모르겠지만 / 茫然失箋註

괴이한 빛이 때로 터져 나오니 / 光怪時迸發

오금이 용광로에 녹아 있는 양 / 五金入鎔鑄

뉘 능히 승법을 풀이할 건고 / 誰能說乘法

갈대배 타고 바다 건넌 사람 없으니 / 無人蘆渡

뜰에서 거닐 땐 침도 못 뱉어 / 步庭不敢唾

밥알이 떨어져도 주워 먹겠군 / 粒墜堪拾哺

섬돌 틈엔 개밋둑도 없고 / 除級無封螘

기와 이음매엔 새들도 깃들지 않네 / 瓦縫絶棲羽

쓸지 않아도 절로 먼지가 없어 / 不掃自無塵

조촐해라 봄비로 씻긴 듯하네 / 淨若沐新澍

찬바람이 으스스하니 / 寒風瑟然

온갖 신이 남몰래 꾸짖으며 지켜주나 봐 / 百神陰呵護

묻노라 그 누가 이 절 지었노 / 問誰剏此寺

나라를 기울일 재물 축냈네 / 傾國致財賂

옛날 옛적에 천흉의 중이 / 宿昔穿胸僧

바다를 건너와 살았다는데 / 浮海常來寓

그 조각상은 새까매 까마귀 같고 / 厥像黑如烏

비쩍 말라서 할망구 같았네 / 崎嶇若老嫗

() 새기던 처음 일을 남김없이 말하는데 / 緬言刻經初

황당하고 괴이하여 후려잡기 어려워라 / 荒怪難討

이씨 성에 이름은 거인이란 자 / 李氏名居仁

부처에 아첨하여 복을 비는데 / 媚佛求嘏祚

그 집에는 눈 셋 박힌 개가 생겨나 / 家産三眼狗

어린애 기르듯이 곱게 길렀네 / 愛養如養孺

그 개가 달아나 뵈지 않으니 / 狗去不知處

갑자기 보살펴 준 은공을 잊어버린 듯했네 / 忽若忘濡呴

나중에 몸이 죽어 황천에 가서 / 及死到黃泉

어떤 한 신인(神人)을 만났었는데 / 乃與神人遌

그 신인 개마냥 눈이 셋이라 / 三目亦如狗

깜짝 놀라 반기며 몰래 부탁했더니 / 驚喜潛囑喩

주인님 은혜에 실로 감동해 / 實感主人恩

신령의 도움으로 깨어나게 할 터이니 / 冥祐行

원컨대 팔만의 게()를 새기어 / 願刻八萬偈

불사를 널리널리 전파해 달라 했네 / 佛事廣傳布

땀을 쭉 쏟으며 꿈 깨듯 일어나니 / 汗發若夢寐

시원스레 묵은 병이 달아났어라 / 洒然去沈痼

친척들이 입관(入棺) 소렴(小斂) 서두는 동안 / 親戚謀棺斂

고을과 이웃에선 부조 보냈네 / 鄕隣致賵賻

신인이 한 말에 감격이 되어 / 感激神所言

온갖 불경 판목에 새기었다니 / 全經剞劂付

이 일은 진실로 황당하여라 / 此事誠荒唐

아득한 옛날 일을 거슬러 오를 수 없으니 / 邃古非可遡

설령 진짜 이런 일이 있다 하여도 / 且令眞有是

유자(儒者)로선 마음에 둘 일이 아닐세 / 儒者所不措

십삼경을 생각하면 탄식이 절로 / 所歎十三經

머나먼 연경(燕京)의 시장까지 달려가 사 오질 않나 / 遠購燕市騖

저네들은 한 사람의 힘만으로도 / 彼能一人力

천년토록 굳건하게 경판을 전하였구나 / 刻板千載固

아침나절 학사대에 올라 보니 / 朝上學士臺

문창후(文昌侯)를 만날 것도 같구만 그래 / 文昌如可晤

이분이 신선을 하 좋아하여 / 此子喜神仙

종신토록 장가 두 번 안 들었다네 / 終身不再娶

도를 얻어 갑자기 하늘 오르니 / 得道忽飛昇

신발 두 짝 숲 언덕에 버려두었네 / 雙履遺林步

황제(黃帝)가 비록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하지만 / 軒轅雖騎龍

교산에는 상기도 무덤이 있네 / 喬山尙有墓

선탑(禪榻)에 기대어 밤을 묵으니 / 暝宿倚禪榻

초승달엔 이지러진 두꺼비와 옥토끼 / 初月缺蟾兎

금탑에선 풍경이 땡그랑 울고 / 金塔鳴風鐸

옥등잔엔 심지가 무지개 이루었네 / 玉燈貫虹炷

청아한 범패 소리 어고(魚鼓) 흔들고 / 淸梵搖魚

바람 소리 일어나 고루 퍼지네 / 虛籟發鈞濩

 

 

[C-001]해인사(海印寺) : 연암이 지리산 아래 경상도 안의현(安義縣)에서 사또로 지내던 1790년대 전반기의 창작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이 있는 글로 1795(정조 19) 음력 9월에 지은 해인사창수시서(海印寺唱酬詩序) 연암집 1에 실려 있다.

[D-001] …… 대신하누나 : 찬 햇볕이 비치는 가운데 울긋불긋 단풍이 든 광경을 하얀 비단 위에 채색 그림을 그린 것에 비유한 표현이다.

[D-002]제멋대로 …… 있고 : 사천왕(四天王) 중 북방(北方)을 수호하는 다문천(多聞天)은 비파를 들고 있다.

[D-003]알록달록한 …… 있네 : 사천왕 중 동방(東方)을 수호하는 지국천(持國天)은 칼을 들고 있다.

[D-004]벽라(薜蘿) : 넝쿨식물인 벽려(薜荔 : 줄사철나무)와 여라(女蘿 : 소나무겨우살이)를 가리킨다. 초사(楚辭) 구가(九歌) 중 산귀(山鬼), 산신(山神)을 뜻하는 산귀는 벽려로 옷을 삼아 입고 여라로 띠를 삼아 두른다고 하였다. 은자(隱者)의 의복을 벽라라고 하기도 한다.

[D-005]괴룡(乖龍) : 전설에 나오는 나쁜 용으로, 비를 내려주기를 싫어해서 온갖 방법으로 숨지만 결국 뇌신(雷神)에게 붙잡히고 만다고 한다. 茅亭客話 卷5

[D-006]연리화(連理花) : 한 꽃받침에 꽃이 두 개 달린 병체화(幷蔕花)를 말한다. 사랑하는 부부를 상징한다.

[D-007]비익조(比翼鳥) : 날개 하나에 눈이 하나인 암수 새 둘이 한 몸이 되어 난다는 전설상의 새이다.

[D-008]푸른 목翠嗉 : 규장전운(奎章全韻)  새의 목鳥吭이라 새겼다.

[D-009]칠성(七星)의 관원님들 : 칠성각(七星閣)에 모신 북두칠성의 신을 가리킨다.

[D-010]경포(瓊圃) : 신선이 산다는 동산을 말한다.

[D-011]마음이 무너지는걸 : 원문의 은 거성(去聲) 우운(遇韻)으로 압운을 했으므로 로 읽어야 한다. 규장전운(奎章全韻)  敗也라 새겼다.

[D-012]() · ()의 아이놈들이 : 제 나라와 양 나라는 남조(南朝)에 세워진 나라들로서 당시에 중국의 불교가 가장 극성하였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을 경멸하여 부른 말이다.

[D-013]제멋대로 …… 만드니 : 원문의 가 이본에는  자로 되어 있으나, 채색한다는 뜻의 를 취하여 새겼다.

[D-014]우람하기 짝이 없는 : 원문은 塊然인데, 이본에 따라 瑰然으로도 되어 있지만 높고 크다는 그 뜻은 마찬가지이다.

[D-015]감괘(坎卦)처럼 손가락들을 맞대었는데 : 감중련(坎中連)이라고 하여 음효(陰爻) 가운데 양효(陽爻)가 끼여 있는 감괘 모양으로 소지(小指)를 대지(大指)와 맞닿게 한 인상(印相)을 말한다.

[D-016]크고 …… 예쁘네 : 부처는 전생에 베푼 선행의 결과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날 때 32가지 길상(吉相)을 갖추었는데, 그중의 하나로 손가락이 가늘고 길어 예뻤다고 한다. 大智度論 卷4

[D-017]혜심(慧心) : 불교 용어로, 진리를 달관할 수 있는 밝은 마음을 말한다.

[D-018]장경판고(藏經板庫) : 팔만대장경판을 모신 건물로, 남북으로 마주 보는 수다라장(修多羅藏)과 법보전(法寶殿)의 두 채로 되어 있다.

[D-019]거울 : 원문은 인데, 이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20]오금(五金) :  ·  · 구리 ·  · 주석 등 다섯 가지 금속을 말한다.

[D-021]승법(乘法) : 행인을 실어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수레車乘에다 부처의 교법을 비유한 말이다.

[D-022]갈대배 …… 없으니 : 보리달마(菩提達磨)가 남인도에서 갈대로 만든 배를 타고 포교하러 중국에 건너온 고사를 거론한 것이다. 보리달마와 같은 고승이 없다는 뜻이다. 시문에서 折蘆渡江’ ‘折蘆渡水’ ‘折蘆渡海 등의 표현이 종종 보이므로, 빠진 글자는  자가 아닌가 한다. 河南通志 表》 《學言稿 卷2 送無悅上人歸高句麗

[D-023]천흉(穿胸) : 중국 남방의 이민족 중의 하나이다. 이아(爾雅)에서 육만(六蠻)’에 대한 이순(李巡)의 주석에 육만은 천축(天竺), 해수(咳首), 초요(僬僥), 기종(跂踵), 천흉(穿胸), 담이(儋耳), 구지(狗軹), 방척(旁脊)이다.”라고 하였다. 천흉족은 가슴에 구멍이 나 있어, 그중의 귀인들은 그 구멍에 긴 장대를 꿰어 가지고 두 사람이 떠메게 하여 다닌다고 한다.

[D-024]옛날 …… 같았네 : 해인사의 조사당(祖師堂)에 모셔져 있던 희랑조사상(希郞祖師像)을 묘사한 것이다. 신라 말의 고승이었던 희랑(希郞)은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과 싸울 때 큰 도움을 주어 그 보답으로 해인사를 크게 중건할 수 있었다. 세간에서는 그 유래를 모르고 조사상이 천흉국(穿胸國) 사람의 모습이라는 설이 있었다고 한다. 雅亭遺稿 卷3 伽倻山記

[D-025]후려잡기 어려워라 : 원문의 빠진 글자는 문맥과 운자(韻字)로 보아, 토포(討捕)  자가 아닌가 한다.

[D-026]이씨 ……  : 이거인(李居仁)은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 합천의 이서(里胥)로서, 왕을 설득하여 해인사의 사간장경판(寺刊藏經板)을 만들게 했다는 인물이다. 이하 시의 내용은 그와 관련한 영험담(靈驗談)을 전한 것이다.

[D-027]갑자기 …… 듯했네 :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샘물이 말라 버리니 물고기들이 함께 뭍에 처하여, 서로 촉촉한 입김을 불어 주고 입의 거품으로 적셔 주었으나, 강호에서 피차 잊고 지내느니만 못하였다.泉涸 魚相與處於陸 相呴以濕 相濡以沫 不如相忘於江湖고 하였다. 그러므로 원문의 忘濡呴는 어려울 때 도와준 사실을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D-028]십삼경 : () 나라 때 학관(學官)에 세운 역경(易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5경에다, () 나라 때 주례(周禮), 의례(儀禮),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을 합쳐 9경이 되었고, 여기에 다시 효경(孝經), 논어(論語), 이아(爾雅)를 보태 12경이라 했다. () 나라 때 다시 맹자(孟子)를 보탰으며, () 나라 때 이들을 합쳐 13경이라 일컬었다.

[D-029]문창후(文昌侯) : 최치원(崔致遠)은 고려 현종(顯宗) 때 문창후에 추시(追諡)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D-030]교산(喬山)에는 …… 있네 : 교산은 황제(黃帝)를 장사 지냈다는 곳이다. 교산(橋山)이라고도 한다. 열선전(列仙傳), 황제를 교산에 장사 지냈더니 산언덕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묘에 시신이 사라지고 단지 칼과 신발만 남았다고 한다.

[D-031]두꺼비와 옥토끼 : 달에 산다는 요정이다. 보름달이 아니면 그들의 모습이 온전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D-032]어고(魚鼓) : 원문에는  자 다음에 한 글자가 빠졌으나, ‘ 자가 아닌가 한다. 어고는 곧 목어(木魚)로서, 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을 만들고 속을 파낸 것으로 불사(佛事) 할 때 두들긴다.

[D-033]바람 소리虛籟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천뢰(天籟), 지뢰(地籟), 인뢰(人籟)가 있다고 했다. 바람 소리는 천뢰로서, 허뢰(虛籟)라고도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갓을 노래한 연구(聯句)

 

 

 

봄날 밤에 연상각(烟湘閣)에 모여 갓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 자를 운자로 얻었다. 나이 순서로 첫 번째 운자를 시작하기로 했는데, 나는 정사(丁巳)생이고, 청장(靑莊 이덕무)은 신유(辛酉)생이며, 영재(泠齋 유득공)는 무진(戊辰)생이다. 내가 마침내 먼저 시구를 불렀다.

 

포변이 주 나라 때 만든 거면 / 布弁周製歟

죽관은 한 나라 때 의식일까  연암 / 竹冠漢儀未

금화모는 우아한 멋 다하고 / 金華輸雅致

청약립은 시골 멋이 넘치네  이덕무 / 靑篛饒風味

백방립은 경아전(京衙前)의 근심거리요 / 白方畿吏愁

골소다는 고구려에서 귀하게 여겼지  유득공 / 骨多麗朝貴

둥근 갓양태는 부처의 광배(光背) 같고 / 旁圓佛放光

볼록한 갓모자 의서(醫書)에 그려진 위 같네  연암 / 中凸醫畵胃

갓을 두고 맹약한 것은 월 나라 사람부터이고 / 結盟越人自

갓을 씌워 싸움 금지한 건 기자국을 말함이라  이덕무 / 止鬪箕邦謂

그림쇠는 썼으되 곱자는 쓰지 않았고 / 以規不以矩

씨줄에다 또 날줄로 베처럼 짰네  유득공 / 有經復有緯

패랭이는 혹 이상하다 하겠지만 / 蔽陽或異件

절풍건은 점잖은 부류에 속하지  연암 / 折風是常彙

비 오면 쓰는 갈모는 도롱이 비슷하고 / 雨冒紙類萆

먼지 털면 휘양은 고슴도치 닮았네  이덕무 / 塵刷毛肖蝟

성한 갓과 찌부러진 갓은 실로 범군과 초왕 같고 / 成虧眞凡楚

좋은 갓과 거친 갓은 때로 경수와 위수 같네  유득공 / 精粗或涇渭

벼슬아친 뺨 왼쪽에 산호 매달았고 / 爵頰左綰瑚

선비는 턱 양쪽에 비단 끈 드리웠네  연암 / 儒頷雙緌緭

옻칠 말리는 건 비 오고 구름 낀 날 틈타고 / 燥髹乘雨霮

아교로 붙이는 건 불기운을 빌려야지  이덕무 / 緻膠藉火煟

제 혼자 단정히 쓰면 영락없는 일산이요 / 獨整儼華蓋

나란히 서게 되면 마주 대한 상위 같네  유득공 / 離立峙象魏

큰길에서 걸핏하면 서로 부딪치니 / 康莊動相觸

백성들 시비하느라 물 끓듯 하네  연암 / 黎黔鬧若沸

비스듬히 그림자 지면 막 피려는 연꽃 보는 듯 / 仄影看卷荷

성글게 그늘 드리우면 그늘 우거진 팥배나무 같네  이덕무 / 疏陰怳棠芾

함께 식사할 땐 거치적거려 싫지만 / 共食礙堪嫌

측간에 갈 땐 벗어도 누가 비난하랴  유득공 / 如厠免何誹

왕기는 그림을 몹시 그르쳤고 / 王圻畵殊失

왜놈은 나무로 새기느라 힘만 빠졌네  연암 / 倭奴刻浪費

 

세상에 전하기를, 교역하던 한 왜인이 갓을 보고 좋아하면서 나무로 새겨야겠다고 여겨, 그 나라의 솜씨 좋은 장인이 나무로 새겼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반과산의 두보에겐 씌울 수 있어도 / 可加飯顆甫

상투 쫒은 위타에겐 어찌 도움이 되랴  이덕무 / 寧資椎髻尉

모자가 떨어진 걸 벼슬아친 자랑할 만하지만 / 帽妥仕堪詫

비녀를 지탱할지 노인을 위로하긴 어렵구려  유득공 / 簪支老難慰

벽에 붙어 기대기에 불편하고 / 襯壁倚不便

문미(門楣)를 지날 땐 부딪칠까 두렵네  연암 / 過楣觸可畏

비구승이 쓴 건 엎어 논 사발처럼 둥글고 / 比邱圓覆盂

우바새(優婆塞)가 쓴 건 얽어 논 어망처럼 엉성하네  이덕무 / 優婆疎結罻

좌중에 참석하면 주위를 산처럼 에워싸고 / 參座圍岌嶪

구경거리에 끼어들면 대숲처럼 무성하네  유득공 / 觀場簇蓊蔚

반쯤 파손된 갓을 협객은 일부러 애호하고 / 半挫俠故喜

갓 쓰고 너무 가까이 가면 난쟁이가 꺼려하지  연암 / 太博矮所諱

고관은 붉은 명주실로 감아 근엄하고 / 達官儼朱線

새 사위는 노란 풀로 엮어 어여쁘네  이덕무 / 新壻姣黃卉

선비에겐 물총새 깃으로 만든 관이 어울리지 않는데 / 不稱士冠鷸

여자들도 비비 털로 된 다리를 달가워하랴  유득공 / 寧屑女髢狒

영달하면 종립(鬃笠)에다 갖신이 합당하고 / 達可鬃而鞾

궁색하면 전립(氈笠)에다 짚신이 합당하지  연암 / 窮可氈而屝

제주도 갓은 매미 날개보다 더 얇고 / 耽羅薄於蜩

고려 때 갓은 비취새처럼 파랗게 물들였지  이덕무 / 高麗染如翡

섬세한 빛깔은 아침 해처럼 눈에 가득하고 / 纖彩旭滿眶

둥근 갓 그림자 정오엔 다리까지 덮치네  유득공 / 圓影午壓腓

저물녘 처마 밑처럼 거미나 하루살이가 뒤덮고 / 夕簷蒙蝣蛛

타작마당처럼 껑충대는 메뚜기를 머리에 이네  연암 / 秋場戴跳蜚

평평한 갓 천장은 하늘 구멍 메운 듯하고 / 平頂天穿補

검은 갓양태는 개기월식 같구나  이덕무 / 玄規月蝕旣

금작은 우전에게 더해졌고 / 金雀加優旃

옥로는 악의(樂毅)에게 내려졌네  유득공 / 玉鷺賜樂毅

이마가 꽉 조이면 죽사(竹絲)를 몸에 맞게 구부리고 / 額穹竹彎體

상투가 갑갑하면 모시로 하여 더운 기를 제거하네  연암 / 髻鬱紵泄氣

얼굴에 덮으면 잠시 잠을 즐길 수 있지만 / 面覆睡暫悅

옆에 끼고 담 넘자니 어찌 탄식이 나오지 않으랴  이덕무 / 腋挾超詎欷

먹으로 칠한 건 담제인(禫制人)을 위로하기 위함이요 / 墨塗慰服禫

은으로 꾸민 건 녹미 받음을 축하해서라네  유득공 / 銀飾賀祿餼

빨리 달리면 가는 휘파람과 서늘한 바람 일고 / 迅馳細嘯颸

갓 너머로 엿보려면 흐릿한 무늬 번지네  연암 / 閃睨潤纈霼

습기 찰세라 노끈으로 팽팽히 당겨 두고 / 恐濕撑繩糾

더럽혀질세라 갓집에 싸서 두네  이덕무 / 惜汚套匣衣

머리 뒤로 젖혀 쓰면 방탕해 보이고 / 岸腦則近蕩

이마 쪽으로 눌러 쓰면 성난 듯하네  유득공 / 貼額者若愾

머리 크기 다르지만 않다면 / 頭顱苟不異

친구 사이엔 빌려 줄 수도 있지  유득공 / 朋友可相乞

 

 

[C-001]갓을 노래한 연구(聯句) : 유득공의 영재집 1에도 같은 제목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자구상 약간 차이가 있다. 이덕무의 아정유고(雅正遺稿) 1에도 같은 제목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덕무가 지은 14구만 수록되어 있으며 역시 자구상 약간 차이가 있다. 연암이나 홍대용, 이덕무 등은 갓을 쓰던 당시 풍속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갓을 개량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연암집 15 열하일기 동란섭필(銅蘭涉筆)’과 홍대용의 연기(燕記) 건복(巾服), 이덕무의 앙엽기(盎葉記) 8 입당개조(笠當改造), 입폐(笠弊), 논제립(論諸笠) 등 참조.

[D-001]봄날 …… 불렀다. : 영재집에 수록된 갓을 노래한 연구의 서문은 이와 조금 다르다.  경인년(1770) 봄에 선귤당(蟬橘堂 : 이덕무의 서실)에 모여, 박연암, 이무관(李懋官 : 이덕무)과 함께 미운(未韻)을 다 써서 지었다.”고 하였다. 시구의 말미에 연암이 지은 것은 ’, 이덕무가 지은 것은 ’, 유득공이 지은 것은 로 표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번역에서 각 시구 말미에   연암으로, ‘  이덕무, ‘  유득공으로 보충해 두었다.

[D-002]포변(布弁) : 상례(喪禮) 때 착용하는 것으로, 작변(爵弁)과 제도가 같으나 15()의 베를 사용하며, 그 위에 환질(環絰)을 얹는다. 禮記集說 卷48 曾子問

[D-003]죽관(竹冠) : 대나무 껍질이나 댓잎으로 만드는데, 사서(士庶)나 석도(釋道)가 주로 썼다. 언월관(偃月冠)과 고사관(高士冠)의 두 가지 식이 있다. 朱子語類 卷91

[D-004]금화모(金華帽) : 금으로 만든 꽃으로 장식한 모자이다. 이백(李白)의 고구려(高句麗) 시에 금화로 장식한 절풍모 썼는데, 흰말이 조금 멈칫거리며 빙빙 도네.金花折風帽 白馬小遲回 하였다.

[D-005]청약립(靑篛笠) : 푸른 조릿대로 만든 삿갓이다.

[D-006]백방립(白方笠) : 방립(方笠)은 원래 서울의 아전들이 쓰던 모자로 검은색이었으나, 조선 중엽 이후 흰색으로 바뀌면서 상을 당한 사람들이 쓰는 것으로 되었다.

[D-007]골소다(骨蘇多) …… 여겼지 : 골소다는 고구려 때 귀인(貴人)들이 쓰던 고깔 모양의 모자로, 골소(骨蘇), 소골(蘇骨)이라고도 했다. 원문은 骨多麗朝貴인데, 영재집에는 蘇骨麗朝貴로 되어 있다.

[D-008]갓을 …… 사람부터이고 : 풍토기(風土記)에 월 나라에서는 남과 처음 사귈 때의 예의로, 개와 닭을 잡아 제사 지내면서 그대가 수레 타고 나는 갓 쓰고 있으면, 후일 만날 때 그대는 수레에서 내려 읍하라. 그대가 우산 쓰고 내가 말을 타고 있으면, 후일 만날 때 그대 위해 말에서 내릴 것이다.”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노래를 월요가(越謠歌)라고 한다. 古詩紀 卷2

[D-009]갓을 …… 말함이라 : 우리나라 사람들이 싸움하기를 좋아하므로,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와서 큰 갓과 긴 소매의 옷을 지어 입혀 백성들이 몸을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했으니, 이는 싸움을 금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盎葉記 8 笠爲雨具

[D-010]그림쇠는 …… 않았고 : 둥글기만 하고 모가 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병무(騈拇)에서 천하의 사물 중에 둥근 것은 그림쇠를 쓰지 않고도 스스로 둥글고, 모난 것은 곱자를 쓰지 않고도 스스로 모났다.圓者不以規 方者不以矩고 한 데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D-011]그림쇠는 …… 짰네 : 원문은 以規不以矩 有經復有緯인데, 영재집에는 怪彼倭帽兀 鄙哉滿冠緯로 되어 있다.

[D-012]절풍건(折風巾) : 고구려인들이 즐겨 썼던 것으로, 중국에 들어가 한위(漢魏) 시대에 유행했다. 北史 卷94 高麗傳

[D-013]먼지 …… 닮았네 : 휘양은 방한용 털모자로, 연암의 양반전에 옷소매로 휘양을 닦고, 먼지 털어 털 무늬를 일으킨다.袖刷毳冠 拂塵生波고 하였다.

[D-014]범군(凡君)과 초왕(楚王) : 약소국인 범국(凡國)의 임금과 강대국인 초 나라의 임금처럼 형세가 판이하다는 뜻이다. 장자 전자방(田子方)에 초왕과 범군의 대화가 나온다. 범국은 세 번이나 망할 뻔했지만 그래도 범군은 참된 자아를 보존했는데, 초왕은 나라를 보존했어도 참된 자아를 보존하지는 못했다고 비판했다.

[D-015]경수(涇水)와 위수(渭水) : 중국의 강 이름으로, 경수는 흐리고 위수는 맑다.

[D-016]성한 …… 같네 : 원문은 成虧眞凡楚 精粗或涇渭인데, 영재집에는 風欹醉登峴 雪覆翁釣渭로 되어 있다.

[D-017]산호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8]상위(象魏) : 고대 중국의 궁궐문 밖에 마주 보게 세운 한 쌍의 건물이다. 그곳에 교령(敎令)을 현시(懸示)했다고 한다. 周禮 天官 太宰

[D-019]제 혼자…… 같네 : 원문은 獨整儼華蓋 離立峙象魏인데, 영재집에는 何物人笑齊 小加史證魏로 되어 있다.

[D-020]비스듬히 …… 같네 : ‘그늘 우거진 팥배나무棠芾 시경(詩經) 소남(召南) 감당(甘棠) 蔽芾甘棠이란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蔽芾의 풀이는 주석가에 따라 구구하다. 여기서는 초목이 무성해서 그늘이 짙은 모양으로 새겼다. 원문은 仄影看卷荷 疏陰怳棠芾인데, 아정유고에는 護髮峙娑婆 俯肩蔭蔽芾로 되어 있다. 영재집에는 卷荷 荷卷으로 되어 있다.

[D-021]거치적거려 싫지만 : 원문의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22]왕기(王圻) …… 그르쳤고 : () 나라 때 왕기가 편찬한 삼재도회(三才圖會)에 갓이 잘못 그려져 있다는 뜻이다.

[D-023]반과산(飯顆山)의 두보(杜甫) : 이백(李白)의 희증두보(戲贈杜甫) 시에 반과산 정상에서 두보를 만났더니, 해가 정오라 머리에 삿갓 썼구려.飯顆山頭逢杜甫 頭戴笠子日正午 하였다.

[D-024]위타(尉陀) : 위타는 남월(南越)의 왕으로, 그 나라 습속에 따라 상투 머리를 하고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한() 나라 사신 육가(陸賈)를 접견했다. 說苑 奉使

[D-025]모자가 …… 만하지만 : () 나라 때 맹가(孟嘉) 9 9일 중양절(重陽節)에 환온(桓溫)이 베푼 용산(龍山)의 연회에서 바람에 모자를 떨어뜨렸다는 고사를 말한 것이다. 晉書 卷98 孟嘉傳 그 이후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 모자를 떨어뜨리는 풍류가 생겨났다. 원문은 帽妥仕堪詫인데, 영재집에는 巾妥仕頗矜으로 되어 있다.

[D-026]비녀를 …… 어렵구려 : 두보(杜甫)의 시 춘망(春望) 중에 흰머리 긁적여 보니 더욱 짧아져, 전혀 비녀를 지탱하지 못하겠네.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라고 한 시구를 말한 것이다.

[D-027]우바새(優婆塞) …… 엉성하네 : 우바새는 속세에 있으면서 부처를 믿는 남자를 가리키는데, 거사(居士)라고도 한다. 원문은 優婆疎結罻인데, 아정유고에는 頭陀疏結罻로 되어 있다.

[D-028]참석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29]반쯤 …… 애호하고 : 사기(史記) 77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에 등장하는 후영(侯嬴)의 고사를 가리키는 듯하다. 후영은 비천한 문지기로서 다 떨어진 의관(衣冠) 차림으로 위 나라 공자 무기(無忌)의 수레에 선뜻 올라타고는 대연회에 참석했다.

[D-030] …… 꺼려하지 : 관장왜인(觀場矮人)이란 말이 있다. 난쟁이가 키 큰 사람들 틈에 끼여 구경거리를 보려 하나 잘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제대로 보지 못해 식견이 얕은 자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D-031]고관은 …… 어여쁘네 : 첫째 구는 갓 중의 극상품(極上品)인 진사립(眞絲笠)을 가리키고, 둘째 구는 초립(草笠)을 말한다. 원문은 達官儼朱線 新婿姣黃卉인데, 아정유고에는 取輕鋪玄鬃 憐細編黃卉로 되어 있고, 영재집에는 達官 高官으로 되어 있다.

[D-032]선비에겐 …… 않는데 :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24년 조에 정() 나라의 자장(子臧)이 송() 나라로 달아나서 물총새의 깃을 모아 만든 관鷸冠을 쓰기를 좋아했으나, 이 소문을 들은 정백(鄭伯)이 법도에 어긋난 관을 쓴 것을 증오하여 도적을 시켜 그를 죽였다. 춘추좌씨전에서는 이 기사에 이어 논평을 가하면서, 시경 조풍(曹風) 후인(候人) 저와 같은 사람들은 그 옷이 어울리지 않도다.彼其之子 不稱其服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D-033]여자들도 …… 달가워하랴 : 비비(狒狒)는 원숭이의 일종으로, 머리털을 늘어뜨리고 빠르게 달린다고 한다. 爾雅 釋獸 다리는 여자들이 머리숱을 풍부하게 보이려고 덧넣었던 딴머리를 말한다. 또한 시경 용풍(鄘風) 군자해로(君子偕老) 검은 머리 구름 같으니, 다리를 달갑잖게 여기네.鬒髮如雲 不屑髢也라고 하였다.

[D-034]종립(鬃笠) : 말총으로 만든 갓이다.

[D-035]전립(氈笠) : 짐승 털을 다져 넣어 만든 모자로, 벙거지라고도 한다.

[D-036]섬세한 …… 덮치네 : 원문은 纖彩旭滿眶 圓影午壓腓인데, 영재집에는 簪緇避漢溺 冠玉笑荊䠊로 되어 있다.

[D-037]거미나 하루살이 : 원문의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으나, 잘못이다.

[D-038]금작(金雀) …… 더해졌고 : 금작은 갓 꼭대기의 장식물인 정자(頂子)의 일종인 듯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대군(大君)은 금정자(金頂子)를 사용한다. 우전(優旃)은 진() 나라의 배우인데, 우전에게 금작이 상으로 더해진 고사는 출처를 알 수 없다. 영재집에는 우전이 초() 나라의 악공인 우맹(優孟)’으로 되어 있다.

[D-039]옥로(玉鷺) …… 내려졌네 : 옥로 역시 정자(頂子)의 일종이다. 옥로로 장식한 갓을 옥로립(玉鷺笠)이라 하는데, 장신(將臣)이 착용했다. 악의(樂毅)는 중국 전국(戰國) 시대 연() 나라의 명장(名將)이다.

[D-040]은으로 …… 축하해서라네 :  3 품 이상이 되면 은정자(銀頂子)로 갓 꼭대기를 장식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담원 팔영(澹園八詠) 구체적인 사실은 피서록(避暑錄)에 보인다.

 

 

붉은 파초 푸른 돌 동녘 담에 솟아 있고 / 紅蕉綠石出東墻

한 그루 벽오동은 그윽한 누각 앞에 / 一樹梧桐窈窕堂

꿋꿋한 한평생 손님 응대 게으르니 / 傲骨平生迎送嬾

저물녘 산 풍경에나 허리를 숙이신다네 / 丈人惟拜暮山光

 

이상은 내청각(來靑閣)이다.

 

남녘 둑의 못에 종일토록 그림자 한들한들 / 南陀竟日影婆娑

저 그림자 나를 부를 듯하고 나도 저를 부를 수 있을 듯한데 / 耐可呼吾亦喚他

갑자기 산들바람 그치고 오리 백로 지나가니 / 乍綴微風鳧鷺去

내 그림자 어지러이 백 갈래로 나눠지고 말았네 / 不禁撩亂百東坡

 

이상은 감영지(鑑影池)이다.

 

코끝을 따라서 어렴풋한 흰 기운을 바라본 뒤 / 已觀微白鼻端依

장신을 분별코자 두 눈꺼풀을 감았더니 / 欲辨臟神掩兩扉

그윽한 향기 호올로 쓸쓸한 꿈결에 스며들고 / 獨有暗香侵夢冷

나부산(羅浮山) 밝은 달이 환히 빛나네 / 羅浮明月弄輝輝

 

이상은 소심거(素心居)이다.

 

() 자 난간 깊고 깊어 솔 그늘 덮였는데 / 松覆深深卍字欄

늘어진 다래 기울어진 돌 서로 얽혀 푸르네 / 垂蘿攲石翠相攢

그림배 바람 따라 흘러가게 맡겨 두니 / 一任畵舫風吹去

밤새도록 차거운 솔바람 소리 여울처럼 쏟아지네 / 盡夜寒聲瀉作灘

 

이상은 송음정(松蔭亭)이다.

 

꽃잎에 살짝 뿜어 취한 넋을 깨워 주고 / 噀輕堪醒醉魂花

푸른 갈기 더풀더풀 허공 닫는 천마(天馬)인 양 / 天褭行空翠鬣髿

불사약을 캐고자 유신(劉晨) 완조(阮肇) 찾아가니 / 採藥將尋劉阮去

적성 노을 아른아른 길을 잃었네 / 路迷廉閃赤城霞

 

이상은 비하루(飛霞樓)이다.

 

꽃은 흡사 가려는 손 억지로 잡아 논 듯한데 / 花似將歸强挽賓

비바람에게 불지 말라 당부했다가 되려 꾸짖음만 당했다오 / 囑他風雨反逢嗔

두어라 골짝에서 병사(甁史)를 익힌 이래로 / 自從洞裏修甁史

삼백이라 예순 날이 모두 다 봄이로세 / 三百六旬都是春

 

이상은 유춘동(留春洞)이다.

 

옥주 쥐고 맑은 밤 홀로 누대에 오르니 / 玉麈淸宵獨上臺

구기자나무 시렁에 서리 지고 기러기 울음소리 애처롭네 / 杞棚霜落鴈流哀

한 가락 휘파람 소리 가을 구름을 다 흩날리니 / 一聲劃裂秋雲盡

창공이라 만리에 하얀 달이 솟아오르네 / 萬里瑤空皓月來

 

이상은 소월대(嘯月臺)이다.

 

화예부인 처음으로 궁중에 들어오니 / 花蘂夫人初入宮

부끄럼이 말을 앞서 볼 먼저 붉어지네 / 含羞將語臉先紅

앵가사리 본래로 묘한 게 아니라오 / 鸚哥舍利元非妙

도를 깨닫게 한 아난의 공덕 그 뉘라 알려는지 / 誰識阿難悟道功

 

이상은 어화헌(語花軒)이다.

 

[C-001]담원 팔영(澹園八詠) : 중국인 곽집환(郭執桓 : 호 회성원繪聲園)은 홍대용이 1766년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분을 맺게 된 그의 친구 등사민(鄧師閔 : 호 문헌汶軒)을 통해, 자신의 시고(詩稿) 회성원집(繪聲園集)에 대한 조선 명사들의 서문과 아울러, 부친 곽태봉(郭泰峯 : 호 금납錦納)의 거처인 담원(澹園)을 노래한 시를 지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燕記 鄧汶軒》 《湛軒書 內集 卷3 繪聲園詩跋 담원 팔영은 이에 호응하여 지은 시로, 유득공과 박제가(朴齊家) 등도 같은 제목의 시를 지었다. 泠齋集 卷1 곽집환에게 보낸 박제가의 편지에 의하면, 이는 영조 49(1773)의 일로 짐작된다. 貞蕤閣文集 卷4 與郭澹園 附答書 피서록(避暑錄) 열하일기에 실려 있다.

[D-001]백 갈래로 …… 말았네 : 백동파(百東坡)는 소동파의 시 범영(泛潁)에 나오는 표현이다. 거울 같은 영수(潁水)에 제 얼굴을 비추어 보던 중 홀연 물고기 떼가 나타나 물에 비친 얼굴을 교란시켜 놓는 바람에 흩어져 수백 동파 되었다가 잠깐 새에 도로 여기에 있네.散爲百東坡 頃刻復在玆라고 하였다.

[D-002]코끝을 ……  : 불교에서 유래한 수양법을 말한다. 눈으로 코끝을 바라보면서 호흡을 조절하는데, 그렇게 하면 코로 숨쉴 때 연기처럼 흰 기운이 출입하는 것이 보인다고 한다. 주자(朱子)의 조식잠(調息箴) 능엄경(楞嚴經) 등 참조.

[D-003]장신(臟神) : 오장(五臟), 즉 심장, 신장, , , 비장을 가리킨다. ‘()’ ()’이란 뜻으로, ()은 신장에 숨고, ()은 심장에 숨고, ()은 간에 숨고, ()은 폐에 숨고, ()는 비장에 숨는다고 한다.

[D-004]나부산(羅浮山) : 중국 광동성(廣東省)에 있는 산으로 도교(道敎)의 명산 중의 하나이며, 매화(梅花)의 고사로 유명한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 나라 개황(開皇) 연간에 조사웅(趙師雄)이란 사람이 나부산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에게서 나는 향기가 너무나 향기롭고 목소리가 청아하여 함께 술을 마시고 대취하였다가 깨어나 보니 큰 매화나무 아래였다고 한다. 龍城錄 매화를 나부몽(羅浮夢)이라 한다.

[D-005]유신(劉晨) 완조(阮肇) : 두 사람 모두 후한 때의 인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후한 명제(明帝) 영평(永平) 연간에 이 두 사람이 약을 캐러 천태산(天台山)으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 두 여인을 만났다. 그집에 들어가 하룻밤 유숙한 다음 부부의 연을 맺고 살게 되었다. 반년이 지난 후 세상에 나와 보니 아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 아무도 없고 이미 7()가 지났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다시는 돌아갈 길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太平廣記 神仙傳

[D-006]적성(赤城) : 중국 절강성(浙江省) 천태현(天台縣)에 있는 산이다. 천태산(天台山)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산을 거쳐 가야 한다고 한다. 또한 도교(道敎)의 전설에도 적성산이 나오는데, 그 산 아래 단동(丹洞)이 있어 단()이 풍족하다고 한다. 初學記 8 登眞隱訣

[D-007]병사(甁史) : 병중(甁中)의 화사(花史)란 뜻으로, 꽃병에다 이꽃 저꽃을 갈아 꽂는 것을 말한다. 또한 명() 나라 원굉도(袁宏道)가 지은 병사란 책이 있는데, 병화(甁花 : 병에 꽂은 생화生花)와 그 삽법(揷法)에 대해 논하였다.

[D-008]옥주(玉麈) : 옥으로 만든 자루에다 고라니 털을 달아서 벌레를 쫓거나 먼지를 털 때 사용하는 물건이다. 옛사람들이 한가롭게 담론을 할 때 늘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D-009]화예부인(花蘂夫人) : 오대(五代) 때 촉주(蜀主) 맹창(孟昶)의 부인을 일컫는다. 재색(才色)으로 궁에 들어와 왕비가 되었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작품으로 당() 나라 말기의 시인 왕건(王建)의 궁사(宮詞)를 본떠 지은 화예부인궁사(花蘂夫人宮詞)가 있다. 미인을 말하는 꽃解語花이라 한다.

[D-010]앵가사리 : 지혜롭고 말 잘하는 앵무새를 가리켜 한 말인 듯하다. 앵가(鸚哥)는 앵무새란 뜻이다. 또한 부처의 10대 제자 중 지혜가 제일이라는 사리불(舍利佛)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사리(舍利)라는 여인의 아들이란 뜻이고, 사리(舍利)는 말 잘하는 새라는 뜻이라고 한다.

[D-011]도를 …… 알려는지 : 아난(阿難)은 부처의 10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다문제일(多聞第一)이었다고 한다. 수달 장자(須達長者)에게 앵무새 두 마리가 있었는데, 아난이 그 새들을 위해 사제(四諦)의 법을 설하니 듣고 깨우쳤으며, 죽은 뒤 하늘에 태어났다고 한다. 金藏經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설날 아침에 거울을 마주 보며

 

 

두어 올 검은 수염 갑자기 돋았으나 / 忽然添得數莖鬚

육척의 몸은 전혀 커진 것이 아니네 / 全不加長六尺軀

거울 속의 얼굴은 해를 따라 달라져도 / 鏡裡容顔隨歲異

철모르는 생각은 지난해 나 그대로 / 穉心猶自去年吾

 

 

[C-001]설날 …… 보며 : 연암집 5 ‘성백에게 보냄與成伯 두 번째 편지에도 인용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새벽길

 

 

까치 하나 외로이 수숫대에 잠자는데 / 一鵲孤宿薥黍柄

달 밝고 이슬 희고 밭골 물은 졸졸 우네 / 月明露白田水鳴

나무 아래 오두막은 둥글어라 돌 같은데 / 樹下小屋圓如石

지붕 위 박꽃은 별처럼 반짝이네 / 屋頭匏花明如星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극한(極寒)

 

 

깎아지른 북악은 높기도 한데 / 北岳高戌削

남산이라 송림(松林)은 새까만 빛을 / 南山松黑色

송골매 지나가니 숲이 소슬하고 / 隼過林木肅

두루미 울음소리 하늘 파랗네 / 鶴鳴昊天碧

 

 

[D-001]북악(北岳) : 한양의 경복궁 뒷산을 가리킨다. 다음에 나오는 남산은 한양의 목멱산(木覓山)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산중에서 동짓날 이생(李生)에게 써 보이다

 

 

연암이라 그 아래 집을 지으니 / 築室燕岩下

바로 화장산(華藏山) 동쪽이로세 / 乃在華藏東

수석에 다다를 땐 지팡이 짚고 / 倚杖臨水石

물거리를 베느라 낫을 찬다오 / 携鎌剪灌叢

기이한 바위는 푸른빛 이슬진 병풍 같고 / 奇巖翠滴屛

그윽한 여울물 소리 궁음(宮音) 곡조로 울리네 / 幽湍響操宮

뜰 안에 심어 논 건 무어냐 하면 / 庭中何所植

복숭아와 대나무 소나무 단풍일세 / 桃竹與松楓

시냇가 푸른 사슴 물을 마시고 / 磵畔飮蒼鹿

섬돌에 꿩이 내려 곡식 쪼누나 / 階除啄華蟲

짚 처마 정교하게 달을 새기고 / 簷茅工鏤月

추녀 끝의 풍경은 바람에 절로 우네 / 楹磬自戞風

해 다 가도 사람은 아니 보이니 / 盡日不見人

적막에 사로잡힌 방지기 신세 / 寂寞守窓櫳

어찌 보면 선정(禪定)에 든 중과도 같고 / 還如僧入定

공곡(空谷)으로 도망간 부처도 같네 / 復似佛逃空

어느 뉘 겨울 해가 짧다고 했나 / 誰謂冬日短

이따금 낮잠 들어 정신이 몽롱하네 / 午睡時矇矓

나를 따르는 이생이 있어 / 相隨有李生

농에 가득 고서를 가지고 왔네 / 古書携滿籠

산전(山田)이라 가을 되어도 곡식이 여물지 않아 / 山田秋不熟

푸성귀나 풋콩으론 배 못 채워 괴롭네 / 蔬菽苦未充

그렇지만 부지런히 외우고 읽어 / 猶然勤誦讀

목이 메도록 웅얼거리네 / 伊吾嗌喉嚨

늙어서 게을러진 나를 깨우쳐 주어 고마운데 / 感君警衰惰

연마하는 너를 깔보다니 부끄럽구나 / 媿我蔑磨礱

()이 처음 자라나는 이날을 맞아 / 是日値陽至

대학(大學) 책 한 권을 끝마쳤다니 / 君讀曾傳終

묻노라 무엇을 네 얻었는고 / 問君何所得

()는 본래 하나라서 서로 통하지 / 一理本相通

성하거나 쇠하는 건 각자 점차적으로 되나니 / 消長各有漸

쌓고 또 쌓아야만 다함 없느니 / 累積乃無窮

겨울 되면 비록 견고해지지만 / 及冬雖貞固

봄이 오면 누그러져 퍼지기 마련 / 至春得發融

빠르지 않은 반면 느리지도 않아 / 不疾亦不舒

총총히 오가는 게 아니고말고 / 來往非怱怱

한 가지 일 제아무리 독차지할 수 있어도 / 一事雖得專

사시(四時)는 제 혼자서 공() 못 이루네 / 四時不自功

비하자면 알을 품은 암탉과 같아 / 譬如鷄伏卵

아득한 그 가운데 말없이 되는 법 / 默化窅冥中

미약한 양()은 겨우 실낱 같고 / 微陽僅如線

초승달은 영락없이 활 모양이네 / 初月又似弓

아무리 눈 밝은 이루가 있고 / 雖有離婁明

귀 밝은 사광이 온달지라도 / 復使師曠聰

그 기미를 듣고 보기 어려운 것은 / 其幾難聞覩

혼돈에서 비롯된 갈라짐이기 때문 / 判別肇鴻濛

사사로운 지력(智力) 따위 어찌 용납이 되리 / 寧容智力私

천지조화의 공평함을 예서 보는걸 / 乃見運化公

창의 해그림자 책력(冊曆)을 대신하는데 / 窓晷代曆日

물시계를 시험해서 무엇 하리오 / 何用驗漏筒

네 부디 밝은 덕을 숭상하여라 / 願君崇明德

일신의 효험을 차츰 보게 되리라 / 漸看日新工

 

 

 

[C-001]이생(李生) : 이본들에는 이현겸(李賢謙)’이라 밝혀져 있다. 정조 2(1778)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갓 이거(移居)한 연암은 그전에 잠시 개성(開城) 금학동(琴鶴洞)에 있던 양호맹(梁浩孟)의 별장에 머물면서 개성의 청년 문사들을 가르쳤는데, 그중 이현겸은 그 지역에서 문학으로 가장 명성이 높던 청년이었다. 연암이 금학동 별장으로부터 연암협으로 돌아오자, 이현겸 등도 따라와 글을 배웠는데, 이 시는 그때 지은 작품으로 추정된다. 過庭錄 卷1

[D-001]부처 : 원문은 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02]()이 처음 자라나는 : 동짓날은 일양시생(一陽始生)이라 하여, 음이 극에 달하여 양이 다시 자라나기 시작하는 날이라고 한다.

[D-003]대학(大學) : 원문의 증전(曾傳)’은 증자(曾子)가 공자의 가르침을 전한 것,  대학을 가리킨다.

[D-004]이루(離婁) : 고대 중국에서 눈이 몹시 밝았다는 사람이다.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온다. 아래의 사광(師曠)은 춘추 시대 진() 나라의 유명한 맹인 악사(樂師), 역시 맹자의 같은 편에 나온다.

[D-005]일신(日新) : 대학 명덕을 밝히라明明德는 말씀에 이어 탕() 임금의 반명(盤銘)을 인용하여 진실로 날로 새롭게 되려면, 나날이 새로 하고, 또 날로 새로이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산행(山行) ‘산전갈이山耕로 된 데도 있다.

 

 

이랴저랴 소몰이 소리 구름 속에 들리고 / 叱牛聲出白雲邊

하늘 찌른 푸른 봉우리엔 비늘같이 밭골 즐비하네 / 危嶂鱗塍翠揷天

견우직녀 왜 구태여 까막까치 기다리나 / 牛女何須烏鵲渡

은하수 서쪽 나루 달이 걸려 배 같은데 / 銀河西畔月如船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거(移居)

 

 

관도 주변으로 집을 옮기니 / 移家官道下

하루 내내 행인 구경 하누나 / 盡日看行人

가는 자가 오는 자를 맞는가 하면 / 去者逢來者

앞사람 발자취가 뒷사람 발자취를 잇대는구려 / 前塵接後塵

이 길을 말미암아 천리를 가노라고 / 由玆千里適

인생 백년의 몸이 늙어 버리는데 / 老彼百年身

 원문 빠짐  / □□□□□

딴 길을 따르는 사람을 도리어 가엾어하네 / 還嗟異所循

 

 

[D-001]관도(官道) : 조선 정부에서 만든 간선도로로, 한양을 기점으로 전국에 10대 간선도로가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노군교(勞軍橋)

 

 

어옹노래 초부타령 영웅이 몇이더뇨 / 漁歌樵唱幾英雄

날고 뛰는 싸움 공격 패기도 없어졌네 / 戰伐飛騰伯氣終

옛날이라 어구(御溝)에 흐르는 물 어디 가고 / 昔日御溝流水盡

보리밭 묵정 속에 노군교만 남아 있네 / 勞軍橋在麥田中

 

 

[C-001]노군교(勞軍橋) : 개성 송악산 입암동(立岩洞)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부근에 고려 왕궁 터가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필운대(弼雲臺)의 꽃구경

 

 

나비의 꽃 희롱 하필 극성이라 나무라노 / 戲蝶何須罵劇顚

사람들 되려 나비 따라 꽃과 인연 맺으려 달려가네 / 人還隨蝶趁芳緣

아지랑이 뜬 저 너머에 한낮의 봄은 새파랗고 / 春靑晝白遊絲外

길엔 붉은 먼지 자욱하고 마실 풍경 드설레네 / 井哄烟喧紫陌前

새 울음 각각인 건 제 뜻대로라지만 / 各各禽啼容汝意

도처에 꽃이 핀 건 저 하늘 뜻대로지 / 頭頭花發任他天

명원(名園)에 앉아 둘러보니 소년들 하나 없고 / 名園坐閱無童髦

머리 허연 노인들만 작년과 달라진 게 서글프네 / 白髮堪憐異去年

 

 

[C-001]필운대(弼雲臺) : 한양 경복궁 서쪽 인왕산의 필운동에 있던 명승지이다.

[D-001]명원(名園) …… 서글프네 : 이 두 구절이 원문에는 이라고 되어 있으나,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 의거하여 보충 번역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강가에 살며

 

 

푸른 나무 그늘 짙고 짙어 산비둘기 까치 새끼 놀고 / 鳴鳩乳鵲綠陰垂

돛대 머리에 돛 날리네 조운선(漕運船) 올라올 때 / 亂颿檣頭漕上時

강가 누각에서 졸고 나니 하나도 일이 없어 / 江閣罷眠無一事

박태기나무 꽃 아래에서 당시(唐詩)를 베낀다오 / 紫荊花下錄唐詩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압록강을 건너 용만성(龍灣城)을 돌아보다

 

 

손바닥만 한 외론 성에 빗발이 어지럽고 / 孤城如掌雨紛紛

갈대 억새 아득아득 변방 해는 어둑어둑 / 蘆荻茫茫塞日曛

먼 길 나선 말 울음 쌍나팔에 어울리고 / 征馬嘶連雙吹角

고향 산은 점점 희미하게 만겹 구름에 감싸였네 / 鄕山渲入萬重雲

용만이라 군리들은 모래톱에서 돌아가고 / 龍灣軍吏沙頭返

압록강에서 새와 물고기도 물 사이에서 나눠지네 / 鴨綠禽魚水際分

고국 소식 담은 편지 예서부터 끊어지니 / 家國音書從此斷

가없는 저 벌판으로 고개 돌려 어이 들리 / 不堪回首入無垠

 

 

[C-001]압록강을 …… 돌아보다 : 용만(龍灣)은 의주(義州)를 말한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정조 4(1780) 6 24일 조에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넌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구련성(九連城)에서 노숙하며

 

 

요양(遼陽) 가는 만리 길에 누워서 생각하니 / 臥念遼陽萬里中

예 이제 강과 산에 영웅이 몇이더뇨 / 山河今古幾英雄

이적이 도호부(都護府) 설치한 곳엔 나무들 잇대었고 / 樹連李勣曾開府

동명왕 살던 궁궐 구름에 뒤덮였네 / 雲壓東明舊住宮

날고 뛰는 싸움 공격 강물과 함께 흘러가버렸고 / 戰伐飛騰流水盡

어부와 나무꾼 태평세월 노래하니 석양만 쓸쓸하이 / 漁樵問答夕陽空

출새곡(出塞曲) 노래하다 취한 김에 웃어 대니 / 醉歌出塞歌還笑

머리 하얀 한낱 서생 바람으로 머리를 빗질하겠구나 / 頭白書生且櫛風

 

 

[C-001]구련성(九連城)에서 노숙하며 : 열하일기 도강록 6 24 · 25일 조에 관련 기사가 있다. 구련성은 압록강 너머 30리 거리에 있었다.

[D-001]이적(李勣) …… 곳엔 : 668년 당() 나라 고종(高宗)은 장수 이적을 시켜 고구려를 정벌케 했다. 이적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

[D-002]동명왕(東明王) 살던 궁궐 :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을 가리킨다. 연암은 구련성이 곧 예전의 국내성일 것으로 보았다.

[D-003]출새곡(出塞曲) : 국경의 요새를 거쳐 외국으로 나갈 때 불렀다는 악부(樂府) 횡취곡(橫吹曲)의 이름이다. 중국의 한() 나라 초부터 불려졌다고 하며, 당 나라 때 두보(杜甫) 등 유명한 시인들이 가사를 지었다.

[D-004]머리 …… 빗질하겠구나 : 바람으로 머리를 빗질하고 비로 머리를 감는다는 뜻의 즐풍목우(櫛風沐雨)’는 갖은 고생을 하며 바삐 돌아다니는 경우에 쓰는 표현이다. ‘머리 하얀 한낱 서생은 연암이 자신을 자조적(自嘲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통원보(通遠堡)에서 비에 막히다

 

 

변방에 비 주룩주룩 그칠 줄 모르니 / 塞雨淋淋未肯休

어명 받든 사신들 행차 길이 막혔구려 / 皇華使者滯行輈

예로부터 유세(遊說)하기를 소의 꼬리 되는 게 부끄럽다는데 / 遊談從古羞牛後

마두들만 믿고 있는 일행들이 가엾구려 / 眷屬還憐恃馬頭

취한 속에 바라보아도 내 나라가 아니로세 / 醉裏相看非故國

어느 시대 세상인지 초가을이 또 왔구려 / 人間何世又新秋

앞 강에 배 없다 기별이 전해 오니 / 前河報道闕舟楫

긴긴 날 지루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 長日無聊那可由

 

 

[C-001]통원보(通遠堡)에서 비에 막히다 : 열하일기 도강록 7 2일 조에 관련 기사가 있다. 6 29일 통원보에 도착한 조선 사행(使行) 7 1일부터 큰비를 만나 그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7 2일에도 앞 계곡에 물이 불어 건널 수 없다는 보고를 받고 계속 체류하게 되었다.

[D-001]예로부터 …… 부끄럽다는데 : 중국 전국 시대의 유세가인 소진(蘇秦)이 한() 나라 선혜왕(宣惠王)에게 진() 나라에 신복(臣服)하지 말도록 설득하면서 닭의 머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寧爲鷄口 無爲牛後는 속담을 인용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69 蘇秦列傳 앞장서지 못하고 낙후함이 부끄럽다는 뜻이다.

[D-002]마두(馬頭) : 중국 사행길을 수행하는 하천배의 하나로 말을 모는 일을 담당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요동(遼東) 벌판을 새벽에 지나며

 

 

요동 벌판 어느 제나 끝이 날는지 / 遼野何時盡

열흘 내내 산이라곤 보지 못했네 / 一旬不見山

새벽 별은 말 머리 위로 솟아오르고 / 曉星飛馬首

아침 해가 논밭에서 솟아나누나 / 朝日出田間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동관(東關)에서 유숙하다

 

 

앞 계곡에 물이 불어 수레를 또 멈추니 / 前溪水漲又停車

난간에 기대어 어쩔거나 외칠밖에 / 只得憑欄喚奈何

어린 시절부터 중국 일을 글에서만 읽었더니 / 自幼讀書中國事

이로부터 대방가의 풍속을 보겠구려 / 從玆觀俗大方家

예나 지금이나 오가는 비와 구름 여름 겨우 지났는데 / 雨今雲古纔經夏

조삼모사(朝三暮四) 이 아니랴 강물을 몇 번이나 건넜던고 / 暮四朝三幾渡河

 원문 빠짐  / □□□□□□□

 원문 빠짐  / □□□□□□□

 

 

[D-001]이로부터 …… 보겠구려 : 장자(莊子) 추수(秋水)에서 강의 신인 하백(河伯)은 가을에 비가 많이 내려 황하(黃河)가 불어난 것을 보고 크게 자부심을 느꼈다가, 황하가 흘러든 북해(北海)가 아득하게 넓은 것을 보고는 자신의 식견이 좁았던 것을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바다의 신인 해야(海若)에게 나는 길이 대방지가(大方之家)의 웃음거리가 되겠구려.”라고 말했다. 대방지가는 대도(大道)를 아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시에서는 대국(大國)인 중국에서는 조선과 달리 비가 한번 왔다 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물이 엄청나게 불어난다는 뜻으로 그와 같은 표현을 쓴 듯하다.

[D-002]원문 빠짐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에는 원문이 빠진 곳에 결구(缺句) 표시를 하고 그 아래에, “어떤 본에는 절하느라 이마에 진흙 묻힌 꼴을 보고 웃었더니, 되려 날 보고 웃긴 왜 웃나我政笑君泥點額, 君還向我笑甚麽로 되어 있다.”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원문 빠짐 절구 한 수를 읊다

 

 

머리 하얀 서생이 황경(皇京)을 들어가니 / 書生頭白入皇京

의복 차림 의연히 하나의 노병(老兵)일레 / 服着依然一老兵

말을 타고 또다시 열하를 향해 가니 / 又向熱河騎馬去

공명(功名)에 나아가는 가난한 선비 같네 / 眞如貧士就功名

 

 

[C-001]절구 한 수를 읊다 : 어떤 이본들에는 이 시의 제목이 熱河途中으로 되어 있다. 열하일기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에 의하면 연암은 정조 4 8 5일 북경에서 열하로 출발하였다.

[D-001]머리 하얀 : 원문은 頭白인데, 어떤 이본들에는 白首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원문 빠짐  말 위에서 구호(口號)하다 피서록(避暑錄)에 보인다.

 

 

푸른 깃에 은정자(銀頂子) 모자 쓰니 이야말로 무부(武夫) 같네 / 翠翎銀頂武夫如

요양(遼陽)이라 천리 길 사신 수레 뒤따랐소 / 千里遼陽逐使車

중국에 한번 들어온 뒤 호칭 세 번 바뀌었으니 / 一入中州三變號

좀스러운 선비들은 예로부터 물고기 벌레 따위나 배우는 법 / 鯫生從古學蟲魚

 

 

[C-001]구호(口號) : 입에서 나오는 대로 즉흥적으로 읊었다는 뜻이다. 또한 그렇게 지은 시를 구호라고 한다.

[D-001]호칭 세 번 바뀌었으니 : 연암 자신처럼 아무런 직임을 띠지 않고 사행길을 따라가는 자를 국내에서는 밴댕이盤當와 음이 같은 반당(伴當), 중국에서는 새우 : 무부武夫라는 뜻, 가오리(哥吾里 : 고려高麗라는 뜻)라고 부르는 것을 빗대어서 말한 것이다.

[D-002]좀스러운 ……  : 추생(鯫生)은 식견이 얕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고, 충어(蟲魚)를 배운다는 것은 유교 경전을 연구하면서 벌레나 물고기의 명칭과 같은 자질구레한 지식들을 추구하는 것을 풍자한 말이다. 이 시에서는 연암 자신이 사행 길에 밴댕이, 새우, 가오리 등으로 불린 것을 스스로 풍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필운대(弼雲臺)에서 살구꽃 구경하며

 

 

석양이 갑자기 넋을 거두어들이니 / 斜陽倏斂魂

위는 밝고 아래는 그윽하고 고요해 / 上明下幽靜

꽃 아래 노니는 하고한 사람 / 花下千萬人

옷과 수염 저마다 볼 만하네 / 衣鬚各自境

 

 

[D-001]넋을 거두어들이니 : ‘斂魂은 원래 죽은 이의 넋을 모은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석양이 지면서 어두워졌다는 뜻으로 쓰인 듯하다. 황혼을 염혼(斂昏)이라고도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절구 네 수 제목 없음. 연경에 들어가는 사람을 송별한 때이거나 연경에 가면서 지은 잡영(雜咏)인 듯하다.

 

 

먼 길 나선 옷차림 월 나라 비단 치마로 갈아입었으니 / 征裙換盡越羅裳

강서(江西)의 문란(文蘭)으로 여점(旅店) 가득 향기롭네 / 江右文蘭滿店香

오직 조선에만 그 슬픈 사랑 이야기 글로 엮어 전해졌나니 / 唯有東韓編艶史

쓸쓸한 진자점(榛子店) 성벽 석양을 띠었구려 / 城寒榛子帶斜陽

 

화려한 집의 닭 울음소리 늘어진 버들처럼 길어라 / 金屋鷄聲似柳長

배신이 응대한 말 이제껏 향기롭네 / 陪臣牙頰至今香

노구교 새벽달은 상기도 맑고 고운데 / 蘆溝曉月涓涓在

심양왕의 만권당을 어느 뉘 알리 / 誰識瀋王萬卷堂

 

육왕(六王)을 겨우 끝장내자 한 철퇴가 날아드니 / 六王纔畢一椎來

산신(山神)은 소리 없고 백옥만 애처롭네 / 尾蔗閒談推第一 / 山鬼無聲白璧哀

미자한담에서 그를 당세 제일의 재사(才士)라 추앙하니

원매(袁枚) 같은 사람 중국에 몇이더뇨 / 幾人中土似袁枚

 

난하(灤河)의 맑은 모래 외로운 저 섬 속에 / 灤水沙晴島嶼孤

신세 좋은 해오라기는 티끌 한 점 안 묻었네 / 鵁鶄身世一塵無

백이(伯夷) 숙제(叔齊) 사당 아래 서글피 섰노라니 / 夷齊祠下悄然立

서희(徐熙)처럼 몰골도를 그리고 싶어지네 / 欲寫徐熙沒骨圖

 

 

[C-001]연경에 …… 듯하다 : 네 수 모두 연행 도중에 지은 시임이 분명하다.

[D-001]먼 길 …… 갈아입었으니 : 청 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강서성(江西省) 출신으로 수재(秀才) 우상경(虞尙卿)의 젊은 아내였던 계문란(季文蘭)은 남편이 만주족에게 피살당하고 자신은 납치되어 심양(瀋陽)으로 팔려 가면서, 산해관(山海關) 밖 진자점(榛子店)의 벽에다 구원을 호소하는 칠언절구 1수를 남겼다. 열하일기 피서록에 그 시의 전문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 시구는 그 시의 둘째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D-002]오직 …… 전해졌나니 : 1683년 사신으로 갔던 김석주(金錫冑)가 처음 계문란의 시를 기록하여 돌아왔고, 息菴集 그 이듬해 남구만(南九萬)도 그 시를 보았다고 했으며, 1712년 김창업(金昌業)도 그 시를 보고 차운한 시를 남겼다. 老稼齋燕行錄 그 이후 연행(燕行)에 나선 조선 문사들은 진자점을 지날 적마다 계문란의 고사를 회상하면서 시를 짓곤 하였다.

[D-003]화려한 …… 길어라 : 고려 때 충선왕(忠宣王)은 원() 나라 수도에서 만권당(萬卷堂)이란 서실을 짓고 기거하면서 조맹부(趙孟頫) 등 저명한 문사들과 교제했는데, 하루는 충선왕이 닭 울음소리가 문 앞의 버드나무 같네.鷄聲恰似門前柳라는 시구를 지었으나, 중국 문사들이 그 출처를 묻는데 답을 하지 못했다. 이때 왕을 측근에서 모시고 있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고려 사람의 시에 해 돋는 지붕 위로 금계가 우는데, 늘어진 버들처럼 간들간들 길어라.屋頭初日金鷄唱 恰似垂柳裊裊長라는 구절이 있다고 응대하여 온 좌중의 감탄을 샀다고 한다. 淸脾錄 卷1 鷄聲似柳 충선왕은 원 나라에 있을 때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졌다.

[D-004]배신(陪臣) : 이제현을 가리킨다. 제후(諸侯)의 신하는 천자에 대하여 신하의 신하가 된다는 뜻으로 배신이라 부른다.

[D-005]노구교(蘆溝橋) : 연경(燕京)의 광안문(廣安門) 서쪽에 있는 다리 이름이다.

[D-006]육왕(六王) …… 애처롭네 : 청 나라 건륭(乾隆) 때 시인 원매(袁枚 : 자 자재子才, 호 수원隨園)가 진 시황(秦始皇) 때의 역사를 노래한 회고시(懷古詩) 박랑성(博浪城)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육왕(六王)은 전국 시대의 6국인 제() · () · () · () · () · ()의 왕을 가리킨다. ‘한 철퇴가 날아드니는 장량(張良)이 박랑사(博浪沙)에서 진 시황을 철퇴로 저격하려다 실패한 사건을 말한다. ‘산신은 소리 없고 백옥만 애처롭네라고 한 것은 진 시황 36년에 어떤 신령스러운 사람이 진 시황의 사자(使者) 앞에 나타나 벽()을 주면서 진 시황의 죽음을 암시하는 예언을 하고 사라진 사건을 말한다. 이를 보고받은 진 시황은 산신은 본래 한 해의 일을 아는 데 불과하다고 짐짓 무시했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55 留侯世家 원매의 박랑성 시는 열하일기 피서록에 전문이 소개되어 있다.

[D-007]미자한담(尾蔗閒談)에서 …… 추앙하니 : 미자(尾蔗)는 사탕수수甘蔗를 맛이 쓴 뿌리부터 먹는다는 뜻으로 점입가경(漸入佳境)을 말한다. 청 나라 건륭 때 시인 이조원(李調元 : 호 우촌雨村)은 원매를 당세 제일의 재사(才士)라고 칭송하면서 자신의 미자헌한담(尾蔗軒閒談)에서 그에 관한 일을 기록했노라고 하였다. 淸脾錄 卷4 袁子才 이조원이 편집한 함해(函海) 미자총담(尾蔗叢談) 4권이 수록되어 있다.

[D-008]육왕(六王) …… 몇이더뇨 :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이 제 3 수만을 회증원수원(懷贈袁隨園)이란 제목을 붙여 수록해 놓았다. 그러나 연암과 원매 간에는 아무런 교분이 없으므로 적절한 제목이라 하기 어렵다.

[D-009]난하(灤河) …… 묻었네 : 이덕무의 청비록(淸脾錄) 3 연암조(燕巖條)에도 이 두 시구가 소개되어 있다. 단 첫 구 중의 灤水沙淸 水碧沙明으로 되어 있다. 박종채의 과정록(過庭錄) 4에도 이 시구를 소개한 대동소이한 기사가 있다.

[D-010]몰골도(沒骨圖) : 묵필(墨筆)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곧바로 채색한 그림을 말한다. 서희는 오대(五代) 말기에서 송() 나라 초기의 저명한 화가로 몰골도의 기법을 개발하였다.

[D-011]난하(灤河) …… 싶어지네 : 열하일기 일신수필 7 26일 조에 영평부(永平府)에서 출발하여 난하를 건너 이제묘(夷齊廟)를 들렀다고 기록되어 있고, 따로 이제묘기(夷齊廟記)와 난하범주기(灤河泛舟記)가 수록되어 있다. 연암은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강가에 살며 멋대로 읊다

 

 

우리 집 문밖은 바로 서호(西湖) 나루 근처 / 我家門外卽湖頭

쌀 사려 소금 사려 몇 곳의 배들이냐 / 米鬨鹽喧幾處舟

가을 기러기 한번 울자 일제히 닻을 올리고 / 霜鴈一聲齊擧矴

강에 가득 밝은 달 비추일 때 금주로 내려가네 / 滿江明月下金州

 

 

[D-001]서호(西湖) : 한양의 서강(西江)을 말한다. 한강의 마포(麻浦) 나루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조운(漕運)의 한 중심지였다.

[D-002]금주(金州) : 한강 입구의 김포(金浦)를 금주 또는 금릉(金陵)이라 불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연암(燕岩)에서 선형(先兄)을 생각하다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 / 我兄顔髮曾誰似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날 때마다 우리 형님 쳐다봤지 / 每憶先君看我兄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드메서 본단 말고 / 今日思兄何處見

두건 쓰고 도포 입고 가서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 自將巾袂映溪行

 

 

[C-001]연암(燕岩)에서 …… 생각하다 : 정조 11(1787) 연암의 형 박희원(朴喜源)이 향년 58세로 별세하여 연암협(燕巖峽)의 집 뒤에 있던 부인 이씨 묘에 합장하였다. 이덕무는 이 시를 읽고 감동하여 극찬한 바 있다. 過庭錄 卷1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홍태화(洪太和)의 비성아집(秘省雅集) 시에 차운하다

 

 

첫가을 맑은 잔치 난향(蘭香)이 상쾌한데 / 新秋淸讌洒蘭薰

밥상 받은 여러 님은 효반(皛飯)과 취반(毳飯)으로 나뉘었네 / 會飯群公皛毳分

영지(靈芝) 돋은 늙은 나무 옛 비를 간직했고 / 老樹蒸芝藏舊雨

 

어떤 본에는 장맛비를 머금고含積雨로 되어 있다. /

신기루 같은 먼 누각 무너지는 구름을 부축하고 있네 / 遙樓學蜃擁頹雲

시마(詩魔)에 홀렸다는 비웃음이 뒤따르고 / 詩魔邂逅從他笑

 

자주(自註) : 차수(次修 : 박제가朴齊家의 자)가 내 시를 보고 시마에 홀린 것이 아닙니까?” 하니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다.

용의 뿔 우뚝하게 그렸노라

 

어떤 본에는 허겁지겁 수묵화를 그렸노라墨畵蒼茫로 되어 있다.

반쯤 술이 취한 김에 / 龍角崢嶸倚半醺

 

자주 : 태화가 종이를 펴고 나더러 용을 그려 달라고 떼를 쓰기에 내가 비늘과 뿔을 대충 그리고 먹을 뿌려 보았다.

귀밑털에 서리 내린 이래로 기사(耆社)에 들기 넉넉하니 / 霜鬢由來優入社

북산에서 이문(移文)을 보내오진 않겠구먼 / 北山應不便移文

 

 

[C-001]홍태화(洪太和) …… 차운하다 : 태화(太和)는 홍원섭(洪元燮 : 1744~1807)의 자이다. 홍원섭은 충주 목사를 지냈으며 고문(古文)을 잘 지었다. 그의 문집 태호집(太湖集)에 비성아집첩전운(秘省雅集疊前韻)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시에 붙인 소주(小註)에 연암과 이덕무 · 박제가 · 유득공 · 성대중(成大中) 등과 함께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비성(秘省)은 비서성(秘書省) 즉 규장각(奎章閣)의 외각(外閣)인 교서관(校書館)을 가리킨다. 정조 15(1791) 7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가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병지(兵志)를 편찬할 때 성대중이 마침 교서관에 숙직하자 홍원섭과 박지원 등이 함께 모여 시를 지었다고 한다. 貞蕤詩集 卷3 辛亥七月同靑莊泠菴奉命纂輯國朝兵事開局於秘省而靑城適就直太湖燕巖玉流諸公偶集

[D-001]효반(皛飯)과 취반(毳飯)으로 나뉘었네 : 소식(蘇軾)과 전협(錢勰) 간의 해학적인 일화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전협이 소식에게 편지를 보내 효반을 대접하겠다고 했는데, 가 보니 밥 한 사발, 무 한 접시, 백탕(白湯) 한 그릇뿐이었다. 세 가지가 모두 백색(白色)이라고 효반이라 한 것이었다. 며칠 뒤 소식은 전협에게 편지를 보내 취반을 대접하겠노라고 했는데, 가 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 ()’와 통하므로,  ·  · 백탕 세 가지가 모두 없다는 뜻으로 취반이라 한 것이었다. 高齋漫錄 여기서는 차려진 음식이 변변치 않았음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D-002]차수(次修) …… 웃었다 : 평소 시를 즐겨 짓지 않던 연암이 모처럼 시를 지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농담을 한 것이다.

[D-003]기사(耆社) : 기로소(耆老所)를 말한다. 70세 이상의 고관들을 예우하기 위한 경로(敬老) 기관이었다.

[D-004]북산(北山)에서 …… 않겠구먼 : 북산은 중국의 종산(鍾山)을 가리키며 남경(南京)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북산이라 한다. 이문(移文)은 관부 문서의 일종으로 격문(檄文)과 비슷하며 어떤 대상을 성토하는 글이다. 남조(南朝) 때에 주옹(周顒)이 북산에 은거하다가 나중에 불려 나가 해염 영(海鹽令)이 되었는데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들어오다 다시 북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에 공치규(孔稚珪 : 447~501)가 북산의 산신(山神) 이름을 빌려 사이비 은사(隱士)인 그를 성토하였다. 文選 北山移文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재실(齋室)에서 제릉 영(齊陵令)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한두 잔 막걸리로 혼자서 맘 달래노라 / 淺酌村醪獨自寬

백발이 성글성글 탕건 하나 못 이기네 / 蕭蕭霜髮不勝冠

천년 묵은 나무 아래 황량한 집 / 千年樹下蒼涼屋

한 글자 직함 중에서도 쓸데없이 많은 능관(陵官)일레 / 一字啣中冗長官

맡은 일 시시하여 신경 쓸 일도 적지마는 / 都付鼠肝閒計小

그래도 닭 갈비처럼 버리기 아깝구려 / 猶將鷄肋快抛難

만나는 사람마다 지난겨울 괴로웠다 말하는데 / 逢人盡說前冬苦

나는 마침 재실에서 되려 추운 줄 몰랐다네 / 最是齋居却忘寒

 

 

[C-001]제릉 영(齊陵令)으로 …… 것이다 : 1790(정조14) 연암은 경기도 개풍군(開豐郡)에 있는 태조비(太祖妃)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을 관리하는 제릉 영으로 임명되어 그 이듬해까지 재직하였다. 작품 중에 겨울 추위를 겪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시는 1791(정조15)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D-001] …… 능관(陵官)일레 : ()은 사온서 · 평시서 · 사직서 · 종묘서 · 소격서 · 의영고 · 장흥고 등과 각 전(殿) 및 능()의 우두머리 벼슬로 종 5 품이었다. 그중에서도 능을 지키는 능관(陵官)이 가장 많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술을 조금 마시다

 

 

새소리는 여리고 느리게 문 앞에서 들리고 / 禽聲當戶緩

꽃 그림자 천천히 섬돌을 올라오네 / 花影上階遲

손자를 본 날이라 술 맛이 더욱 진하고 / 酒重添丁日

관직을 벗은 때라 몸이 가볍네 / 身輕解紱時

묵은 취반(毳飯)은 넉넉하고 / 三毛贏舊飯

양쪽 귀밑털에 새 흰머리 빛나누나 / 雙鬢耀新絲

고요한 속에 도로 일거리 찾노니 / 靜裡還尋事

남을 위해 만시(輓詩)를 쓰는 거로세 / 爲人寫輓詩

 

 

[C-001]술을 조금 마시다 :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필사본에는 때는 병진년(1796) 봄으로, 안의 현감(安義縣監)에서 해임되어 돌아왔는데, 어린 손자가 태어난 지 겨우 수일이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만시(輓詩)를 청하였다.時丙辰春 解安義宰歸 小孫生才數日 又有人請輓는 소주(小註)가 있다.

[D-001]손자를 본 날이라 : ‘첨정(添丁)’은 아들이나 손자가 태어난 것을 뜻한다. 아들이나 손자를 낳음으로써 나라를 위해 역역(力役)에 복무할 장정(壯丁)을 추가했다는 뜻이다.

[D-002]관직을 벗은 때라 : ‘해불(解紱)’은 수령이 차는 도장의 끈을 풀었다는 뜻으로, 관직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D-003]취반(毳飯) : () 삼모(三毛)’는 삼무(三無)와 같은 뜻으로 극히 보잘것없는 음식을 말한다. 소식(蘇軾)과 전협(錢勰) 간의 해학적인 일화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전협이 소식에게 편지를 보내 효반을 대접하겠다고 했는데, 가 보니 밥 한 사발, 무 한 접시, 백탕(白湯) 한 그릇뿐이었다. 세 가지가 모두 백색(白色)이라고 효반이라 한 것이었다. 며칠 뒤 소식은 전협에게 편지를 보내 취반을 대접하겠노라고 했는데, 가 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 ()’와 통하므로,  ·  · 백탕 세 가지가 모두 없다는 뜻으로 취반이라 한 것이었다. 高齋漫錄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구일날 맹원(孟園)에 올라 두목(杜牧)의 시에 차운하다

 

 

백발노인이 어찌 걸음 날래다 뽐낼쏜가 / 霜鬢爭誇步屧飛

삼청동(三淸洞) 구름 낀 숲은 바라봐도 아득하이 / 三淸雲木望中微

얼큰히 취한 내 얼굴은 단풍잎과 어떠한지 묻노라 / 半酣爲問楓何似

늘그막엔 두말 말고 국화와 절조를 함께해야지 / 晩節眞堪菊與歸

송동에서 화전(花煎) 부치며 옛일을 읊조리고 / 宋洞花餻吟古事

맹원에서 풍모 쓰고 가을 햇빛을 사랑하노라 / 孟園風帽媚秋暉

늙어 쇠했으나 금년에도 건재하니 / 婆娑又得今年健

천길 산꼭대기에서 한번 옷자락을 털어 보세 / 千仞岡頭試振衣

 

자주 : 이에 앞서 송동(宋洞)에 모여 화전을 부쳐 먹고 높은 곳에 오르자 약조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유몽득(劉夢得)이 구일시(九日詩)를 지으면서 ()’ 자를 쓰려고 했으나 오경(五經) 중에 없는 글자라 하여 걷어치우고 더 이상 짓지 않았다. 그리하여 송자경(宋子京)의 시에 유랑(劉郞)도 과감하게  자 운을 못 썼으니, 한세상 시호(詩豪)란 말 속절없이 저버렸네.劉郞未敢題餻字 空負詩中一世豪라고 하였다.

 

 

시는 고체(古體)와 금체(今體) 도합 42수이다. 아버님이 본시 시인으로 자처하지 아니하여 남과 더불어 창수(唱酬)한 것이 극히 드물었으며, 보통 요구에 응해 지은 작품들도 상자에 남겨 두지 않았기 때문에 작품 제목이 몹시 적다. 게다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는 것을 수집한 시가 많으므로 중간에 빠지고 확정하지 못한 곳이 꽤 있으나, 삼가 평소의 뜻을 좇아 문편(文編)의 끝에 붙여 둔다. 구고(舊稿) 영대잡영(映帶雜咏)’이라는 편제(編題)가 있으므로 지금 그대로 답습한다.

아들 종간(宗侃 박종채의 초명(初名))이 삼가 쓰다.

 

[C-001]구일날 …… 차운하다 : 구일날은 음력 9 9일 중양절(重陽節)을 가리킨다. () 나라 때 맹가(孟嘉)가 용산(龍山)에 올라 바람에 모자를 떨어뜨렸다는 고사로 인해 중양절에는 높은 곳에 올라 모자를 떨어뜨리는 풍류가 생겼다. 맹원(孟園)은 한양 가회방(嘉會坊 : 지금의 가회동) 북쪽에 있던 높은 고개인 맹현(孟峴)을 가리킨다. 연암이 차운했다는 두목(杜牧)의 시는 구일제산등고(九日齊山登高)이다.

[D-001]풍모(風帽) : 추위와 바람을 막는 방한모를 말한다.

[D-002]한번 옷자락을 털어 보세 : 맑은 바람에 옷의 먼지를 털어 보자는 뜻이다. 초사(楚辭) 어부(漁父)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모자의 먼지를 털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의 먼지를 터는 법이다.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하였다.

[D-003]유몽득(劉夢得) : 몽득(夢得)은 당 나라 유우석(劉禹錫 : 772~842)의 자이다.

[D-004]송자경(宋子京) : 자경(子京)은 송 나라 송기(宋祁 : 998~1061)의 자이다. 인용된 시구는 송기의 구일식고(九日食餻)의 후반부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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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4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4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공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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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4]

41 이 감사(李監司) 서구(書九) 가 귀양 중에 보낸 편지에 답함

42 순찰사에게 답함

43 순찰사에게 올림

44 순찰사에게 답함

45 순찰사에게 올림

46 순찰사에게 올림

47 영목당(榮木堂)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祭文)

48 장인 처사(處士) 유안재(遺安齋)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

49 오천(梧川) 처사 이장(李丈)에 대한 제문

50 이몽직(李夢直)에 대한 애사(哀辭)

51 유경집(兪景集)에 대한 애사

52 재종숙부 예조 참판 증 영의정공(領議政公) 묘갈명(墓碣銘)

53 삼종형(三從兄) 수록대부(綏祿大夫) 금성위(錦城尉)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贈諡) 충희공(忠僖公) 묘지명(墓誌銘)

 

 

이 감사(李監司) 서구(書九) 가 귀양 중에 보낸 편지에 답함

 

초가을에 집의 아이 혼인을 치르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중씨(仲氏) · 계씨(季氏) 두 분 진사를 만날 수 있어 귀양살이 소식을 대략 들었지요. 내 비록 영해(寧海)를 보지는 못했지만, 추측건대 천하의 동쪽 끝에 처하여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가 마치 아교로 붙이고 실로 꿰맨 듯이 맞닿고, 낙지나 인어(人魚)뿐일 터이니 누구를 이웃으로 삼으리오? 임금의 은혜를 받잡고 자신의 허물을 반성할 따름이지요. 옛사람은 그래서 어디에 들어가도 스스로 뜻을 이루었던 것이니, 군자(君子 남에 대한 존칭)께서는 더욱 명덕(明德)을 높여 나가시기 바라오.

가을이 다 가고 겨울이 닥쳐오매, 바람은 높은 곳에서 불고 서리는 조촐히 내려 그리움이 한창 간절했는데, 뜻밖에 소곡(巢谷)에서 갑자기 친필 편지를 전해 올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때는 묵은 학질이 또 발작하여, 이불을 포개 덮고도 추워서 떨며 숨을 몰아쉬고 있던 참이었는데, 편지를 받고는 이불을 걷어 젖히고 기쁨이 넘쳐 땀이 나면서, 등이 땅기던 것도 바로 그쳤답니다. 편지로 인하여 객지에서 신령의 가호로 건강히 지내심을 알게 되었으나, 어찌 한() 나라 대부(大夫)처럼 씩씩한 걸음으로 용감하게 갈 수 있으리오.

상자평(向子平)처럼 자녀의 혼사도 이미 다 치렀고, 도연명(陶淵明)처럼 집 정원에는 소나무와 국화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어찌하여 오래도록 밥이나 탐하는 늙은이가 되어 홀로 텅 빈 관아를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매화가 아내처럼 다정스럽게 안방을 떠나지 아니하고, 또 작은 화분이 있어서 매화 화분을 따라와 그 시녀가 되었지요. 옛사람 중에는 파초를 벗한 이가 없는데, 나는 유독 파초를 사랑하지요. 줄기는 비록 백 겹으로 돌돌 말려 있지만 가운데가 본래 텅 비어 한번 잎을 펼치면 아무런 꾸밈이 없으니, 이 때문에 나의 마음을 터놓는 벗이 된 것이라오. 달 밝은 창이나 눈 내리는 창가에서 가슴을 터놓고 마음껏 이야기하니, 중산군(中山君)이 민첩하여 말없이 도망치는 것과는 같지 않소이다.

생각해 보면, 젊은 시절에는 식사할 때 이가 있음을 잊어버리고 딱딱한 것 연한 것 가리지 않고, 혀를 놀리기를 바람같이 하고 뺨을 불끈거리기를 우레같이 하면서도, 물고 뜯고 씹어 대곤 하는 것을 각자 맡은 것이 있는 줄을 전혀 깨닫지 못했지요. 그런데 최근 4년 사이에 잇몸 사이가 요란스럽게 모두 들썩이고, 시고 짜고 덥고 찬 것에 따라 각기 다른 통증이 나타나니, 잠시 뭘 마시고 씹으려 해도 먼저 조심하게 되는구려.

지난가을에 왼쪽 볼의 둘째 이가 갑자기 빠져 나가고, 오른쪽 볼의 셋째 어금니는 안쪽은 빠지고 겉만 간신히 걸려 있어서 마치 마른 나뭇잎이 나뭇가지에 연연하는 것과 같으니, 이야기하고 숨쉬는 사이에도 뒤집힌 채로 들락날락하여 잘그락잘그락 패옥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곤 한다오. , 이가 빠진 뒤에도 이는 남아 있지만, 남아 있는 이라 해서 어찌 진실로 내가 소유했다 할 수 있겠소이까.

아침 해가 떴을 때 창가로 가서 빠진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뼈도 아니요 돌도 아닌 데다, 붙어 있는 뿌리가 너무나 옅어서 망치와 끌로도 단단히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대개 온몸의 힘과 원기가 그것들을 단속하고 다스릴 수 있었으나, 급기야 피와 살이 차츰 마르고 진원(眞元 원기)이 그것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되어서는, 예전에 나를 위하여 효능을 발휘했던 것들이 얼음 녹듯이 먼저 무너지고 마니, 예로부터 천하의 대세가 본디 대부분 이와 같지요. 내 이제 이 하나가 빠졌으나, 역시 또 어찌하겠소?

최근에 지은 졸작(拙作) 두어 편이 있기에, 이 편에 기록해 보내어 삼가 적막함을 위로하는 바이니 글을 바로잡아 주기를 망녕되이 바라오. 글에 대한 평어(評語)는 모두 중존(仲存 이재성)이 쓴 것이외다.

겨울 날씨가 봄같이 따뜻한데, 대감께서 더욱 조리 잘하시기만을 바라며, 나머지 많은 말은 우선 줄입니다.

 

 

[C-001]이 감사(李監司) …… 답함 : 정조실록에 의하면 전라 감사 이서구는 1795(정조 19) 6월 도내의 진휼(賑恤)을 실시한 고을에서 굶어 죽은 자들이 속출한 사건으로 인해 치죄를 당하고 경상도 영해부(寧海府)로 귀양 갔으며, 그해 11월 방면된 뒤 12월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었다.

[D-001]초가을에 …… 들었지요 : 연암의 차남 종채(宗采) 1795년 가을에 처사 유영(柳詠)의 딸인 전주 유씨(全州柳氏)와 결혼하였다. 이서구에게는 아우로 경구(經九 : 1763~1818)와 소구(韶九 : 1766~1818)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1790년에 함께 진사 급제하였다.

[D-002]옛사람은 …… 것이니 : 중용장구  14 장에 군자는 환난에 처하면 환난 속에서 도를 행한다. 군자는 어디에 들어가도 스스로 뜻을 이룬다.素患難 行乎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고 하였다.

[D-003]어찌 …… 있으리오 : 만나러 가기 힘들다는 뜻을 장취(張翠)의 고사를 이용하여 해학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 나라 대부(大夫) 장취는 초() 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진() 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하러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병을 핑계 대고 날마다 하나의 현()만 행진하였다. 장취가 진 나라에 도착하니, 승상 감무(甘武) 한 나라가 급하긴 급하군요. 선생이 병든 몸으로 오시다니.”라고 하였다고 한다. 戰國策 韓策

[D-004]상자평(向子平)처럼 …… 치렀고 : 자평은 한() 나라 때의 고사(高士) 상장(向長)의 자이다. 상장은 자녀의 혼사를 다 치르고 나자, 다시는 가사(家事)를 묻지 않고 명산을 유람하러 떠나 그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向長

[D-005]도연명(陶淵明)처럼 …… 있는데 :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정원의 세 갈래 작은 길은 잡초가 우거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그대로 있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다.

[D-006]매화가 아내처럼 다정스럽게 : 원문은 梅妻卿卿인데, 매처(梅妻)는 송 나라 은사 임포(林逋)가 매화를 아내로 삼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고, 경경(卿卿)은 아내가 남편을 친근하게 부른다는 뜻으로 세설신어(世說新語) 중 왕안풍(王安豐)의 고사에서 나온 말인데, 부부가 금슬이 좋은 모양을 표현할 때 쓴다.

[D-007]아무런 꾸밈이 없으니 : 원문은 無表襮邊幅인데, 옷의 겉이나 가장자리를 꾸미지 않듯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뜻이다.

[D-008]중산군(中山君) ……  : 생각을 글로 표현하려고 해도 붓이 잘 따라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중산(中山)에 나는 토끼의 털로 만든 붓이 가장 좋다고 하여 이를 중산호(中山毫)라 한다. 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에 붓毛穎은 중산(中山) 사람이며, 그 조상 중에 준() 민첩하여 달리기를 잘한다狡而善走고 하였다. 또한 붓은 진 시황 때 중서령(中書令)으로까지 승진하여 황제와 더욱 친근했으므로, 황제가 그를 중서군(中書君)’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답함

 

 

대범 살인 옥사가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만, 이 옥사처럼 상리(常理)에 어긋난 것은 없었습니다. 형적이 의심되는 것은 정상으로써 헤아리고, 죄수의 말에 숨김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증인의 말을 참고하는 법이니, 옥사를 신중히 살피는 대체(大體)가 진실로 이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옥사의 경우는, 정상으로 보면 죄수의 공초에 일컬은 바와 같이 친척 관계는 비록 외삼촌과 조카 사이이지만 아버지로 부르고 자식으로 기른 처지였고, 형적으로 말하면 검시장(檢屍場)에서 증험된 바와 같이 곧바로 칼로 찔러서 피가 다하자 죽음이 뒤따른 것이었습니다. 죄수의 말은, 몹시 사랑하고 아끼는 사이로서 진실로 그의 방탕한 마음을 깨우쳐 주자는 데에서 나왔다는 것이고, 증인의 말은, 우물쭈물 횡설수설하는 가운데도 오히려 그자가 칼을 가졌다는 것은 숨기지 않았습니다. 정상과 형적을 참조하여 연구해 보아도 진실로 상리가 아니고, 죄수와 증인의 말을 되풀이해 따져 보아도 더욱 의혹만 생깁니다.

왜냐하면 당초에 판열(判烈)의 아비 조응붕(曺應鵬)이 그 처남 임종덕(林宗德)과 더불어 한 마을에서 수십여 년을 살아 왔는데, 살림이 모두 넉넉하고 서로간에 관계도 아울러 돈독한 처지였습니다. 판열이 어릴 때부터 그 외삼촌에게서 자랐으므로, 종덕은 판열을 자기 자식같이 보아서 그에게 훈계하고 독촉하기를 부지런히 했고, 응붕은 실지로 종덕의 앞에서는 판열이 자기 자식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판열이 장성하여 장가든 뒤로, 몇 년 전부터 주색에 빠져서 남의 꾐에 넘어가 종덕의 집 여종아이에게 현혹되어 정실을 소박놓고 무뢰배와 휩쓸렸습니다. 그 때문에 그 외삼촌만이 깊이 우려한 것이 아니라 그 아비 역시 밤낮으로 버릇을 고칠 방도를 생각하였으나, 다만 자식을 사랑하는 정이 지극하여 망나니 자식을 위엄으로 억제하지 못하다 보니 평소에 외삼촌보다 덜 무서워하고 어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판열을 손수 끌고 종덕에게로 함께 가서 잘못을 자복하도록 강요하면서 정신을 차리라고 맹렬히 꾸짖었던 것이니, 그날 사건의 원인은 이와 같은 데 불과했습니다. 종덕은 성품이 어리석고 멍청한 탓에 일에 임하여 어려워할 줄 모르고, 함부로 가장으로 자처하고 엄준한 역할을 자임하다가, 갑자기 패악한 행동을 저질러 스스로 흉악한 짓을 한 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아, 부자간에 책선(責善)하는 것도 오히려 크게 경계하는 바인데, 하물며 외삼촌과 조카 사이에 은의(恩義)를 상한다는 것은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아이가 죄를 지었으면 회초리로 때리면 그만이지 어찌 잔인하게 칼로써 위협하며, 사랑할진댄 살리고 싶은 법인데 어찌하여 죽는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이 옥사는 죄수와 증인의 말을 들을 것도 없이 형적을 가지고서 정상을 따진다면,  이하 원문 빠짐 

 

 

[C-001]순찰사에게 답함 : 목록에는 편지의 제목이 함양의 옥사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論咸陽獄書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는 1792(정조 16)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 경상 감사 정대용(鄭大容)의 부탁을 받아 도내의 의심스러운 옥사를 심리(審理)하면서 경상 감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편지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그다음의 순찰사에게 올림도 마찬가지의 경위로 작성된 편지인 듯하다. 연암집 2 현풍현 살옥의 진범을 잘못 기록한 데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論玄風縣殺獄元犯誤錄書 등 이와 유사한 편지 4통이 수록되어 있다.

[D-001]부자간에 …… 바인데 : 맹자 이루 상(離婁上) 부자간에는 책선(責善)하지 아니하나니, 책선하면 사이가 벌어지고, 사이가 벌어지면 그보다 더 나쁜 일이 없다.”고 하였다.

[D-002]이하 원문 빠짐 : 원문은 無 缺인데, ‘ 자는 결자(缺字)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올림

 

 

지난번 정순기(鄭順己)의 의옥(疑獄) 사건으로써 직접 뵙고 아뢴 바 있었으나, 자세한 곡절은 다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대저 이 옥사는 실로 맹랑한 일에 속합니다. 당초에 재검(再檢)하여 옥사를 마무리할 사건이 아니었는데, 그때 겸관(兼官)이 도임한 지 수일 만에 갑자기 이 옥사를 당하자 겸읍(兼邑)의 하인들이 제멋대로 검시(檢屍)를 행하여, 상처가 어떠한지도 돌아보지 않고 자백과 증언의 유무도 헤아리지 않고서, 대강대강 옥안(獄案)을 갖춘 것이므로 이미 소홀하다는 탄식을 면치 못했습니다. 재검 때에 낙태라는 한 조목을 특별히 덧붙인 것은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전임 순찰사 때에 그 원통한 실상을 살펴서 안 바 없지 않아, 특별히 관문(關文)을 보내 이치를 따져서 여러 추관(推官)들로 하여금 의견을 내어 보고를 올리게 한 것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옥사의 정황을 곰곰이 따져 보니 완성된 옥안과 저절로 어긋나서 역시 앞뒤가 모순되는 혐의가 없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질질 끌어 온 것입니다. 이른바 원범(元犯)이라는 자는 그 생김새를 살펴보니, 평범하기 이를 데 없으며 지극히 순하고 용렬한 놈입니다. 해가 넘도록 옥에 갇혀 있는데 그동안에 부모는 다 죽고 아내도 또한 다른 데로 시집가 버렸으니, 비단 본 사건이 원통할 뿐만 아니라 인정상으로 또한 몹시 불쌍한데도 하소연할 곳조차 없습니다. 더더구나 지난겨울부터 감옥이 텅 비어 있습니다. 그가 비록 사형수라 할지라도, 텅 빈 감옥에 홀로 둔 채로 돌보고 먹여줄 사람이 없어, 주림과 병이 잇달아 옥중에서 병사하고 말 것이니, 신중히 살필 것을 거듭 당부하는 것 외에는 역시 옥사를 신중히 처리하는 방도가 어찌 있겠습니까. 사실을 낱낱이 들어 보첩(報牒 보고서) 속에 모두 기록하였으니, 재량하여 처리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 보첩의 초본

 

 

지금 이 옥사는 군수가 서울에 올라갔을 때에 생긴 것이어서, 검시에 참여하지 못했고 물어볼 만한 관련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초검과 복검의 검안(檢案)을 반복하여 따져 보니, 시친(屍親 피살자의 친척) 김한성(金汗成),

제 처 설운례(雪云禮)가 순기(巡己)와 싸움이 붙어 그자의 뺨을 갈기려 들자, 순기가 두 손으로 꽉 잡고서 머리채를 휘어잡고 발길질을 했는데, 3일 동안 앓아누웠다가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당초 싸움이 벌어졌을 때에 저는 출타 중이라서 애당초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라고 공초하였고, 원범 정순기(鄭巡己)의 공초에는

 

설운례와 싸움이 붙었을 때 그 여자가 몽둥이를 가지고 달려들기에 두 손을 붙잡아 몽둥이로 때리지 못하게 하려 했는데, 서로 버티고 있을 때 평소에 전혀 모르던 지나가는 사람이 힘껏 당겨서 양편을 갈라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성질을 이기지 못하여 제 몸을 마구 내던지며 스스로 이리 넘어지고 저리 자빠지고 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공초를 보면 모두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시친이 비록 목격했다고 말할지라도 믿을 바가 못 되므로, 관련자들을 잡아다 조사하여 참고가 될 만한 증거로 삼는 것입니다. 그가 이미 애당초 목격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진술했으니, 반드시 전해 들은 긴요한 증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증언을 한 자는 그의 아들인 일곱 살 난 아이에 지나지 않으며, 한성의 집이 산골짝에 외떨어져 있으니, 싸울 때의 광경과 두들겨 맞을 때의 경중(輕重)은 직접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다른 집의 일곱 살 난 아이라 할지라도 나이가 이미 차지 못하고 말이 자세하지 못하여 증인이 될 수 없는데, 하물며 딴 사람이 아니고 바로 그의 자식이고 보면 법으로 보아 당연히 물을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감히 증인으로 삼았으니 어찌 사리에 맞겠습니까.

원범에 대하여 논하자면, 둘이 서로 욕을 하다가 차츰 격해져서 몽둥이로 때리려 하였으니, 피해 달아나지 않으면 형세상 맞을 수밖에 없을 터인데, 장정인 그가 어찌 단지 그 여자의 두 손만 붙잡고 꼿꼿이 멍청하게 서 있었겠습니까. 머리채를 휘어잡고 발길질을 하는 것은 그렇게 아니 할 수 없는 바였습니다. 급기야 흉악한 짓을 한 몸이 되어 죄를 피할 수 없게 되어서는, 극구 발뺌하는데 무슨 말인들 못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당초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어찌 말이나 될 법한 일입니까. 손을 붙잡고 때리지 못하도록 막을 때에 만류하여 떼 놓은 사람은 과연 누구였겠습니까? 전혀 모르던 지나가는 사람을 얼렁뚱땅 증인으로 삼았으니, 극히 교묘하고 악독한 일입니다. 이것이 자백과 증언이 갖추어지지 못하고 정상과 형적이 더욱 알 수 없게 된 까닭입니다.

비록 두 검안의 실인(實因 사망 원인)을 들어 논한다 해도, 뜬구름을 잡는 것을 면치 못하여 억지로 상처를 찾아낸 것입니다.

 

하나는 불두덩陰岸에 피멍이 번진 것이고 하나는 아랫배에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이니, 마치 외부로부터 입은 상처인 듯하지만, 이미 정수리에 혈흔이 없으니 상처가 그다지 중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했는데, 상처가 과연 중하지 않다면 어찌 목숨을 잃게 되었단 말입니까. ‘마치 …… 듯하다宛是란 것은 긴가민가하는 말이요, ‘이미 …… 없다旣無라는 것은 분명히 그렇다고 단정하는 말입니다. 아랫배나 불두덩은 모두 급소에 속하는데 또한 어찌 3일 동안이나 연명했으며, ‘마치 …… 듯한 상처와 이미 …… 없다는 증험으로써 어찌 옥안을 충분히 갖출 수 있겠습니까. 요안(腰眼) 위쪽과 등뼈 아래쪽 사이에 찰과상이 이와 같이 확실하다면, 발에 차인 곳은 앞에 있어야지 뒤에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스스로 이리 넘어지고 저리 자빠졌다는 순기의 말은 이렇게 해서 발뺌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처가 불분명한 것은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실인을 하나는 내상(內傷)이라 하고 하나는 태상(胎傷)이라 한 것은, 결국 억지로 찾아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외상(外傷)이 드러나지 않으면 대개는 내상으로 돌리고, 내상을 알기 어려우면 태상으로 단정하지만, 그와 같이 단정한 것은 더욱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무릇 죽은 사람은 대맥(大脈)이 이미 풀어지면 평소에 쌓였던 어혈(瘀血)이 저절로 덩어리져 흘러내리는 수가 있습니다. 출산을 많이 한 부녀자의 경우에는 핏덩이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닌데, 이것으로써 억지로 태상이라고 실인을 정한다면 옳겠습니까? 더구나 그 여자는 출산한 뒤 겨우 열 달이 되었으니, 일 년에 두 번 임신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더구나 제 남편도 모르고 있는데, 볼록 튀어나온 것이 살짝 보인다고 해서 어찌 낙태했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또 한성이 3일 뒤에야 억지로 고발한 문서를 보면, 이미 그가 고주(苦主)가 아닙니다. 전임 순찰사가 특별히 공문을 보내어 의문점을 낱낱이 거론하고서, ‘반복하여 자세히 조사해서 의견을 내어 보고함으로써 무고히 재앙을 당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했는데, 그때 갑자기 영문(營門 순찰사)이 교체되는 때를 만나 미처 보고를 올리지 못하였고, 그 뒤에 한성이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 조사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가 넘도록 질질 끌어 온 것이니, 실로 옥체(獄體)를 중히 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대저 이 옥사는 현저한 상흔이 없고 또 직접 목격한 긴요한 증언이 없으니, 낙태 여부는 끝내 알 수가 없습니다. 원범에 대한 추궁을 중지한 지도 이미 오래이고 시친의 종적도 영원히 끊어져서 다시 힐문할 곳이 없으니, 또한 옥사를 신중히 처리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운운(云云).

 

 

[D-001]겸관(兼官) : 이웃 고을의 수령 자리가 비었을 때 임시로 그 고을의 사무를 겸임하는 수령을 말한다. 또한 이웃 고을의 수령이 겸관으로서 다스리는 고을을 겸읍(兼邑)이라 한다. 함양군과 안의현은 본래 겸관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여기서 겸관은 연암 자신을 가리키고, 겸읍은 함양군을 가리킨다. 연암집 2 ‘함양 군수 윤광석에게 보냄與尹咸陽光碩書 참조.

[D-002]추관(推官) : 사죄(死罪)를 저지른 경우 수령들이 회동하여 죄인을 신문(訊問)하는 것을 동추(同推)라고 하는데 그때의 동추관(同推官)을 말한다.

[D-003]군수 : 함양 군수 윤광석(尹光碩)을 가리킨다.

[D-004]싸움이 붙어 : 원문은 爭鬪인데, ‘爭鬨으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D-005]정순기(鄭巡己)의 공초에는 : 원문은 鄭巡己之招則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6]서로 ……  : 원문은 相撑拒之際인데, ‘互相撑拒之際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D-007]잡아다 조사하여 : 원문은 拘覈인데, ‘鉤覈으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D-008]지나가는 사람 : 원문은 過去人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過去之人으로 되어 있다.

[D-009]요안(腰眼) : 허리의 뒤쪽 허리등뼈의 좌우 부위를 가리킨다. 급소에 속한다.

[D-010]태상(胎傷) : 태중(胎中)의 태아(胎兒)가 입은 상처를 말한다.

[D-011]대맥(大脈) : 한의학에서는 인체의 기가 운행하는 통로로 각 장부(臟部)에 속하는 12정맥(正脈)과 그렇지 않은 8개의 기경맥(奇經脈)이 있다고 보는데 대맥은 기경맥 중 허리를 한 바퀴 도는 경맥을 말한다. 경맥 내부에 정상적인 생리 기능을 상실한 혈액이 풀어지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것이 어혈(瘀血)이다.

[D-012]고주(苦主) : 시친(屍親)으로서 고발하는 사람, 즉 살인사건의 원고(原告)를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답함

 

 

18일의 식희(飾喜)는 온 나라가 다 같이 기뻐하는 일이니, 비록 성대하게 초청하는 일이 없다 할지라도, 마땅히 공북루(拱北樓)와 쌍수정(雙樹亭)의 사이로 나는 듯이 달려가서 이 태평만세의 즐거움을 함께 기뻐해야 할 터인데, 저는 지금 더위를 먹어 설사가 나서 음식을 전폐한 채 여러 날 지쳐서,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으니 유감되고 한스러울 뿐입니다.

() 성곽의 동쪽, 향교의 앞에 둘레가 1056() 되는 버려진 방죽이 있는데, 둑 아래에 물을 받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스무 섬지기 남짓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오래되어 메워져 버려, 둑 안에는 말무덤馬塚이 옹기종기한 데다가 가시덩굴이 무성하고 뱀과 벌레 따위가 득실대었습니다. 봄에 시원스레 파내고 말무덤을 다 제거하고, 가운데에 조그마한 대()를 쌓고 대 위에다 초가지붕을 씌운 육면(六面)의 정자를 세우고, 세 개의 수문(水門)이 난 긴 다리를 만들어 북쪽 둑에 연결시켰습니다. 구름과 물은 아득한데 줄지은 봉우리들은 멀리 잠겨 있고 질펀한 들은 아스라히 넓으니, 혹은 달빛 아래 배를 띄우며 혹은 난간에 기대어 낚시도 드리우곤 합니다. 그 구조와 배치는 빈약하고 검소함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경물(景物)과 풍치에 있어서는 옛사람에게 뒤지지 않을 만합니다.

옛날에 정자 이름을 지은 사람은 늙어 창백한 얼굴에 흰머리를 하고 조금만 마셔도 문득 취한다 하여 취옹정(醉翁亭)’이라 하였으며, 한바탕의 큰비가 사흘을 내리고 그쳤는데 이때 나의 정자가 마침 이루어졌다 하여 희우정(喜雨亭)’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건물로 말하면 실로 두 가지 일을 겸했으므로, 드디어 감히 이름을 짓기를 취옹희우우사정(醉翁喜雨又斯亭)’이라 하였습니다. 이 일곱 자를 새겨서 걸어놓고 싶은데, 비단 저의 필의(筆意 운필의 멋)가 본시 졸렬할 뿐 아니라 여러 해 전부터 오래도록 풍비(風痺 중풍으로 인한 마비 증세)를 앓아서 붓과 벼루를 가까이하지 않은 지 오래였습니다. 저번에 붓을 들어 시험해 보니 먹이 많이 묻은 곳은 묵저(墨猪)가 되고 그렇지 않은 곳은 메마른 등나무 덩굴처럼 되어 종이 수십 장을 바꿔도 끝내 글자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분수에 넘치는 망녕된 짓임을 잊고서 이 일곱 글자를 손바닥만 한 크기로 써 주시기를 청하는 바이니, 혹시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호서(湖西)의 대단한 볼거리가 될 것이 틀림없을 터입니다. 다만 하읍(下邑 면천군을 가리킴)에는 각수(刻手)가 없을 뿐 아니라 화공(畫工)도 얻기 어렵사온즉, 빨리 각수에게 맡겨 주시고 화공을 시켜 대충 단청을 하게 하여 이 정자를 완성할 수 있게 하여 주신다면, 이보다 다행이 없겠습니다. 둑을 빙 둘러 버들을 심고 또 살구씨와 오얏씨 대여섯 말을 뿌려 놓았으며, 또 관노비를 시켜 지난가을에 먹고 버린 복숭아 씨를 주워 오게 하여 줄지어 심을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물정에 어두운 제 자신을 스스로 비웃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만,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C-001]순찰사에게 답함 : 연암은 1797년 충청도 면천 군수(沔川郡守)로 부임한 이후 성 동쪽 향교 앞의 버려진 연못을 준설하고 둑을 쌓아 저수지로 만들었으며, 그 연못 중앙에 작은 섬을 만들어 육각(六角) 초가 정자를 세우고 건곤일초정(乾坤一艸亭)’이라 이름 지었으며 부교(浮橋)를 놓았다고 한다. 過庭錄 卷3 이 편지는 그 일과 관련하여 당시 충청 감사 이태영(李泰永)에게 보낸 편지로 짐작된다. 이태영은 연암과 한동네 살았던 친구 사이로,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재임할 때에도 경상 감사로서 재임한 적이 있는데, 또한 연암이 면천 군수로 재임하던 중인 1798년 음력 7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충청 감사로 재임하였다.

[D-001]18일의 식희(飾喜) : 식희는 부모의 경사에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말하는데, 6 18일은 정조(正祖)의 생모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탄신일이었다.

[D-002]공북루(拱北樓)와 쌍수정(雙樹亭) : 공북루는 충청도 공주(公州)에 있는 공산성(公山城)의 북문이고, 쌍수정은 공산성 내에 있는 정자이다.

[D-003]늙어 …… 하였으며 : 구양수(歐陽脩)의 취옹정기(醉翠亭記)를 가리킨다.

[D-004]한바탕의 …… 하였습니다 : 소식(蘇軾)의 희우정기(喜雨亭記)를 가리킨다.

[D-005]지금 …… 말하면 : 원문은 今此所搆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D-006]묵저(墨猪) : 획이 굵기만 하고 힘찬 기운이 부족한 서투른 글씨를 말한다.

[D-007] …… 바이니 : 원문은 仰丐此掌大七字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 다음에  자가 추가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올림

 

 

인산(因山)이 문득 지나서 왕께서 영원히 떠나셨으니, 하늘을 바라보며 길이 부르짖은들 어느 곳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섣달 추위에 순사또께서는 건강이 어떠하신지요? 하관(下官 연암의 자칭)은 노병이 날로 깊어가는데도 오히려 다시 산으로 바다로 헤매면서 기꺼이 밥이나 탐하는 늙은이가 되었으니, 이거야말로 무슨 심보입니까.

지난번 대질 심문할 때에 마침 첫 추위를 만나서 5일 동안 찬 데서 거처한 탓에 다리 부분이 마비된 데다 다시 험하고 먼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오다 보니 마침내 곱사등이가 되고 말았으니, 스스로 가련해한들 어찌하겠습니까. 고을의 폐단이나 백성들의 고질이 모두 고치기 어려운 형편인데, 두어 달 지내는 동안에 비로소 바람마저 매우 다른 것을 깨달았습니다.

몰아치는 폭풍과 비릿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하면 곧 기왓장을 날리고, 고래나 악어의 울음 같은 거센 파도소리가 베갯머리에서 들리는 듯하니, 돌이켜 고향 집이 생각나도, 수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대저 이곳은 한때의 구경꾼들이 지팡이 짚고 나막신 신고 명승지로 찾을 만한 땅은 될 수 있지만, 노경에 노닐면서 몸을 보양할 곳은 전혀 못 됩니다. 더구나 하인 하나도 데리고 있지 않고 중처럼 외롭게 살고 있는 신세이리요!

도임한 지 9일 만에 앉은 자리가 따뜻해지기도 전에 금방 취리(就理)하는 일로 길을 떠났다가 10월 보름 뒤에 병을 안고 다시 왔는데, 갑자기 황장(黃腸)의 역사(役事)를 당하여 차관(差官)을 겨우 보내고 나니 세금 거두는 일이 시급했고, 환곡 받아들이는 일이 겨우 끝나자 또다시 진영(鎭營)에 죄를 지어 날마다 머리를 썩이고 있습니다.

가만히 헤아려 보면 관()에 있은 지 50일이 채 못 되는데, 온갖 사무가 바빠서 두서를 정하지 못한 상황이며, 진영 장교의 목근적간(木根摘奸)은 간교하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어, 촌민들이 겁을 먹고 올린 소장(訴狀)이 날마다 다시 관청의 뜰에 가득합니다. 진영에서는 아무렇게나 쓴 힐책하는 관문(關文)을 보내 단속을 너무 준엄하게 합니다. 어부 한 사람이 배를 고친 일로 인해 좋지 못한 말이 전관(前官)에게까지 파급되도록 하였으니, 제 마음에 미안함이 응당 또 어떠하겠습니까.

이는 당초에 진영 장교들이 지나는 길에 함부로 침탈한 것으로서 바로 그들의 수법인데, 뇌물을 토색질한 흔적을 은폐하고자 하여 사감(私憾)을 품고서 고자질한 것인즉, 교졸(校卒)들의 말만을 들어 부당하게 처리한 형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또 곧장 먼저 감영에 보고한 것을 노여워해서, 반드시 한쪽 편을 들면서 자기 주장만 우기고자 하여 이렇게까지 일이 확대되어 버린 것입니다. 비단 저의 곤경이 비할 바 없을 뿐 아니라, 이 일이 전임 수령에게 관계되기 때문에 조사를 행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새로 온 수령이 너무도 어리석어서 사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소홀히 다루었던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끄럽고 한스러운 마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앞서 순영(巡營)에서 간사한 상인들이 모여드는 폐단을 염려하여 각 고을에 특별히 관문을 보내어 엄하게 경계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어찌 유독 양양(襄陽) 일대에만 특별히 진영으로 하여금 따로 목근적간을 하게 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진영의 장교들이 재삼 와서는, 봉산(封山)의 금표(禁標)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고 나무 뿌리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많이만 적발하기 위하여 보이는 족족 기록하기 때문에, 산 아래 사는 백성과 다 쓰러져가는 절의 중들이 모두 놀라 도망할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특별히 측근의 비장(裨將)을 보내시어  이하 원문 빠짐 

 

 

[C-001]순찰사에게 올림 : 연암은 순조(純祖) 즉위년(1800) 9월에 강원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부임하였다. 이 편지는 그해 연말에 강원 감사 이노춘(李魯春)에게 보낸 것이다. 같은 시기에 족제(族弟) 박준원(朴準源)에게 보낸 편지가 연암집 10에 수록되어 있다.

[D-001]인산(因山) …… 떠나셨으니 : 순조 즉위년 11월에 정조(正祖)의 장례가 거행된 사실을 가리킨다. 원문은 因山奄過 弓劍永閟인데, ‘궁검영비(弓劍永閟)’는 활과 칼이 영영 감춰지고 말았다는 뜻으로,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승천할 적에 활을 지상에 떨어뜨렸으며 그의 관에는 칼만 남아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D-002]곱사등이 : 원문은 癃痤인데 癃疾의 오류인 듯하다. 융질(癃疾)은 늙고 병약하여 허리가 굽는 병을 말한다.

[D-003]취리(就理) : 죄를 지은 벼슬아치가 의금부에 나아가 심문을 받는 일을 말한다.

[D-004]황장(黃腸)의 역사(役事) : 황장은 왕실에서 관을 만드는 데 쓰는 질 좋은 소나무인 황장목(黃腸木)을 말하는데, 양양에는 황장목 숲이 많았다. 정조가 승하한 뒤 양양에 황장목을 벌채하라는 부역이 내렸으며, 임시로 파견된 차관(差官)이 그 일을 감독하였다. 過庭錄 卷3

[D-005]목근적간(木根摘奸) : 산림의 도벌(盜伐) 여부를 조사하는 일을 말한다.

[D-006]봉산(封山)의 금표(禁標) : 봉산은 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한 산이고, 금표는 봉산의 출입 금지를 알리는 푯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올림

 

 

새해를 맞이하여 순사또의 건강이 신령의 가호로 만강하시며, 부모님께서도 한결같이 강녕하시리라 믿으며, 위로와 축하를 아울러 올리는 정성을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하관(下官 연암의 자칭)은 지난 겨울에 독감을 거듭 앓고부터 두 다리에 힘이 없어지더니, 그대로 무릎이 오그라붙어 펼 수 없게 되어 버려, 안방에서 움직이는 데도 반드시 부축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해가 바뀐 뒤 이처럼 오랜 시일이 지나도록 아직도 나아가 새해 인사를 올리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 어찌 그지 있겠습니까.

지금 예조의 관문(關文) 신흥사(神興寺)의 잡역을 경감한 뒤로 종이에 먹도 마르기도 전에 불법 징수가 전보다 10배나 더하다.”고 하고, 심지어 수향리(首鄕吏)를 상사(上使)하여 엄형으로 다스리라는 조처까지 있으니, 그 땅을 맡아 다스리는 수령으로서는 너무도 놀랍고 두려워 몸 둘 바가 없습니다. 지난해 여름에 잡역 경감에 대한 절목(節目)을 영문(營門) 감영으로부터 반첩(反貼)받아 책자로 만들어서, 하나는 영문에 비치하고 하나는 본부(本府 양양부)에 비치하고 하나는 그 절에 보내어 증빙할 자료로 삼았으니, 설사 탐관오리가 있다 한들 어찌 구구하게 몇 권()의 종이를 절목 이외에 더 징수하려 하겠습니까.

또 관속(官屬)들이 시방 그 절로부터 협박받는 처지가 되어, 조심조심 날을 보내며 오히려 털끝만큼이라도 탈이 잡힐까 두려워하는 판국인데, 또한 어찌 감히 멋대로 10배의 불법 징수를 자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利害)를 놓고 헤아려 보면 절대로 이럴 리는 없습니다. 진실로 관문의 내용과 같다면, 아무 것도 꺼릴 바가 없는 듯이 구는 절의 중들이 어찌 절목을 하나하나 들어 본관(本官 양양 부사)에게 따져 바로잡지도 않고, 또한 어찌 의송(議送)을 순사또에게 올리지도 않고서, 감히 감영과 고을을 무시한 채 단계를 건너뛰어 경사(京司 중앙 관청)에 호소하여 무난히 사실을 날조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하관이 재임한 지 지난해 시월 보름부터 이달 그믐까지 겨우 100일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고을 일에 대해서는 아직 두서를 자세히 알지 못하니, 시행해야 할 모든 일은 단지 문서화된 규정을 살펴 행할 뿐입니다. 이른바 삭납지지(朔納紙地)는 두어 권에 불과한 데다, 비록 명색은 관납(官納)이나 본래부터 넉넉한 값으로 사서 썼으며, 지금은 또 값을 더 쳐주고 있습니다. 그 밖에 감영에서 소용되는 지석(紙席 두꺼운 종이로 만든 자리)과 상사(上司 직속 상급 관청)에 전례에 따라 납부하는 것도 모두 본전(本錢)으로 직접 샀으며 조목에 따라 값이 매겨져 있으니, 한 번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세세한 일이라 많은 변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저 본부(本府)에 신흥사(神興寺)가 있는 것은 바로 한 고을의 난치병과 다름이 없으며, 그 절에 창오(昌悟)와 거관(巨寬)이라는 승려가 있는 것 역시 그 절의 난치병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놈들이 하찮은 중으로서 여러 해 동안 서울 근교의 산들에 머무르면서, 중들을 꾀고 협박하여 절 재산을 탕진했는데, 말과 외모가 간사스럽고 종적이 수상합니다. 무뢰배와 결탁하고 외람되이 막중(莫重)한 곳을 빙자해서, 오로지 수령을 모함하고 관속들에게 위엄을 세우는 것만을 일삼는 것이 제놈의 수법인즉, 관리가 관리 노릇 못 한 지가 오래입니다. 토호들이 시골 구석에서 무단(武斷)하고 관부(官府)를 쥐고 흔드는 일이 옛날부터 간혹 있었지만, 중들이 이같이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은 지금 처음 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전번에 내수사(內需司)의 관문 내용을 고쳐 바꾸고 용동궁(龍洞宮)의 수본(手本 손수 작성한 서류)을 첨부하였는데, 제일 먼저 강원도 양양에 있는 신흥사는 바로 열성조(列聖朝)의 구적(舊蹟)이 봉안된 곳이라는 점을 들고 수령이 삼가 받들어 행하지 않은 죄를 나열해 놓았으니, 이는 모두 창오와 거관에게 속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밝히지 못한다면, 제 한 몸에 갑자기 닥친 재난은 본시 걱정할 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고을의 폐해는 어찌하며 나라의 기강은 어찌하겠습니까?

열성조의 구적이라고 한 것은 본부에 있는 낙산사(洛山寺)와 같은 곳을 이름이요, 신흥사가 아닙니다. 세조 병술년(1466)에 낙산사를 임시 숙소로 삼으신 일이 있는 데다, 성종의 친필이 열 겹이나 싸여 보물로 간직되어 있고, 숙종의 어제(御製) 현판은 사롱(紗籠)에 싸인 채 걸려 있어 지금까지도 보배로운 글씨가 하늘을 돌며 빛을 발하는 은하수처럼 휘황찬란하며, 명 나라 성화(成化) 5(1469)에 주조한 큰 종에는 당시의 명신(名臣)들이 왕명을 받들어 기록한 글이 있어 한 절의 귀중한 보물이 되었으니, 이것들은 모두 낙산사의 오래된 보배인 것입니다. 신흥사의 경우는 명 나라 숭정(崇禎) 갑신년(1644)에 새로 창건하여 내력이 100여 년밖에 되지 않아 역대 임금들이 남긴 글들이 본래 있지 않은데도, 감히 모호하게 막중한 곳을 끌어다가 궁속(宮屬)들을 속여서 부탁하여 수본을 발급받기를 도모하기를 이처럼 쉽게 하였으니, 다른 것은 오히려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작년에 감영과 본 고을에서는 비록 실상이 이와 같은 것을 알았지만, 다만 말이 막중한 곳과 관계되고 일이 내수사에 관련되는 까닭에, 감히 드러내놓고 분명하게 말할 수 없어서 미봉하여 넘겼으니, 중들이 더욱 패악을 부리는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그 절이 본시 전답의 소출이 많아서 부자 절이라 일컬어지는데도, 분수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정초에는 취한 김에 아료를 부려, 떠돌이 걸인들을 묶은 채로 구타하여 거의 살옥(殺獄)을 이룰 뻔한 것이 6명이나 되었습니다. 고한(辜限)이 이미 지났는데, 5명은 겨우 목숨을 건져 지팡이를 짚고 기동하게 되었으니 거의 걱정이 없겠으나, 그중 1명은 상기도 위태로운 지경이니 앞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중들의 버릇이 세력을 믿고 완강하고 막돼먹어 못할 짓이 없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원당(願堂)을 다시 설립하는 일은 책임진 곳이 따로 있으며 한낱 중들과 관련된 바가 아니니, 사리(事理)로써 헤아려 보면 실로 쥐 잡다 그릇 깰 우려는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러한 사정을 비변사에 보고하거나 장계(狀啓)를 올려 조사해 주도록 청함으로써, 요망한 중놈들이 막중한 곳을 빙자하여 속임수를 일삼는 죄를 속히 시정하게 해 주심이 어떻겠는지요?

현재 병세를 돌아보건대 감기까지 더치는 바람에 묵은 증세가 한꺼번에 발작하여 실로 무리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나, 바야흐로 군사훈련에 달려가야 할 때를 당하여 기일이 몹시 촉박할 뿐더러 여러 해 동안 누적된 속오군(束伍軍)의 궐액(闕額 부족한 수효)을 보충할 방도가 없으니, 과연 병을 말하고 사무를 폐할 시기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 답답한 개인적인 사정을 어찌 이루 다 아뢰겠습니까. 군사훈련이 지난 뒤에는 사면(辞免)을 거듭 간청해야 될 형편이니 하량하여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우선 이만 줄입니다.

 

 

[C-001]순찰사에게 올림 : 1801년 음력 1월 강원 감사에게 양양 신흥사(神興寺) 중들의 행패를 바로잡아 줄 것을 청원한 편지이다. 그러나 강원 감사가 미온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해 봄에 연암은 병을 핑계 대고 양양 부사직을 사임했다고 한다. 過庭錄 卷3

[D-001]상사(上使) :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명하여 죄인을 잡아 오게 하는 일을 말한다.

[D-002]반첩(反貼) : 보내온 공문서에 의견을 첨부하여 돌려보내는 것을 말한다.

[D-003]() : 한지를 세는 단위로, 스무 장으로 된 한 묶음을 말한다.

[D-004]의송(議送) : 백성이 고을 원의 판결에 불복하여 관찰사에게 올리는 항소장(抗訴狀)을 말한다.

[D-005]삭납지지(朔納紙地) : 매월 초하루마다 바치는 지물(紙物)을 말한다.

[D-006]창오(昌悟) : ‘창오(暢悟)’의 오기인 듯하다. 창오(暢悟) 1797(정조 21) 거관(巨寬)과 함께 신흥사의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했으며, 1801(순조 1) 역시 거관 등과 함께 용선전(龍船殿)을 창건하고 열성조(列聖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도 그는 1813(순조 13) 거관 등과 함께 보제루(普濟樓)를 중수하고, 1821(순조 21) 거관 등과 함께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수하였다.

[D-007]거관(巨寬) : 1762~1827. 호를 벽파(碧波)라고 하며, 율승(律僧)으로서 많은 제자를 두었다. 창오(暢悟)와 함께 신흥사 내의 건물들을 힘써 중수하였다. 신흥사에 있는 그의 부도(浮屠)에는 강원 감사 정원용(鄭元容)이 찬한 비가 있다.

[D-008]막중(莫重)한 곳 : 왕실을 가리킨다.

[D-009]용동궁(龍洞宮) : 명종(明宗) 때 세자궁(世子宮)으로 설치한 궁인데, 한양의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에 있었다. 명례궁(明禮宮 : 덕수궁德壽宮) · 어의궁(於義宮) · 수진궁(壽進宮)과 함께 4궁이라 불렸다. 이러한 궁들은 토지를 약탈 · 매입하거나 면세 특권을 이용하여 수세지(收稅地)를 확대하는 등으로 재산 늘리기에 힘써 폐단이 많았다.

[D-010]사롱(紗籠) : 현판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씌운 천을 말한다.

[D-011]하늘을 …… 은하수 : 원문은 雲漢昭回인데,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 저 밝고 큰 은하수는 하늘을 따라 그 빛이 도네.倬彼雲漢 昭回于天라고 하였다.

[D-012]고한(辜限) : 보고기한(保辜期限)의 준말이다. 남을 상해한 사람에 대하여 피해자의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처벌을 보류하는 기간으로, 이 기간 안에 피해자가 사망하면 살인죄가 성립되었다.

[D-013]원당(願堂) : 역대 임금들의 명복을 비는 법당(法堂)인데, 궁중에 있는 것은 내원당(內願堂)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창오와 거관 등이 설립을 추진한 신흥사의 용선전(龍船殿)을 가리킨다.

[D-014]속오군(束伍軍) : 선조(宣祖) 이후 향촌을 지키기 위해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束伍法)에 따라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을 혼합하여 편성한 지방군(地方軍)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영목당(榮木堂)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祭文)

 

 

유세차(維歲次) 을해(1755) 11월 경오삭(庚午朔) 1일 경오에 반남(潘南) 박지원은 삼가 술과 과일로 제물을 갖추어, 홍문관 교리 이공의 영전에 곡하며 영결을 고합니다.

 

내 나이 열여섯에 / 余年二八

덕망 높은 집안에 장가드니 / 入贅賢門

형제분이 우애로워 / 弟兄湛樂

화기가 애애했네 / 和氣氤氳

장인께서 이르시되 / 外舅謂我

내 아우 글 좋아하여 / 余季好文

벼슬에는 비록 소홀해도 / 仕宦雖疎

문학에는 몹시 부지런하니 / 文學甚勤

생관에 와 머물거라 / 來舍甥館

내 아우가 너의 스승이니라 / 余季汝師

나에 대한 공의 사랑 / 公之愛我

장인보다 더 깊어서 / 視舅亦深

내게 경서(經書) 가르칠 제 / 授我詩書

엄한 일과 사정없었네 / 嚴課無私

공 모시고 따라다닌 지 / 陪公周旋

이제 어언 사 년일세 / 四年于玆

세상 따라 문학도 쇠퇴해지매 / 文與世降

공이 다시 일으켜 세웠나니 / 公起其衰

산문은 한유의 골수를 취했고 / 文劈韓骨

시는 두보의 속살을 얻었네 / 詩斲杜肌

재주 없는 이 소자는 / 小子不佞

어리석고 노둔한데 / 才魯性癡

공의 유도에 힘입어서 / 荷公誘掖

우공이산(愚公移山) 바랐더니 / 庶幾愚移

내 한창 진취하려는데 / 余方有進

공이 갑자기 별세하시니 / 公奄棄世

갈림길 하많은데 / 茫茫岐路

어느 분을 찾아가야 하리 / 我尙疇詣

옛 전() 한 편 읽자 해도 / 讀古一傳

막히는 곳 너무 많아 / 已多觝滯

두어 줄만 읽어 내려가면 / 數行才下

뭇 의심이 앞을 가려 / 群疑交蔽

책을 덮고 장탄식 / 廢書太息

슬픈 눈물 뒤따르네 / 繼以悲涕

의심나면 뉘게 묻고 / 我疑何質

게으르면 뉘 잡아주리 / 我惰孰勵

생각할수록 슬픈 것은 / 念玆益悲

실은 제 처지가 슬퍼서네 / 實爲我地

지난 여름 장마와 무더위에 / 去夏潦暑

공의 병이 처음 생겼네 / 公疾始祟

아름다운 암벽 맑은 샘에서 / 玉巖淸泉

공은 갓끈을 씻고 / 公于濯纓

기수(沂水)에서 목욕할 제 입을 새옷 / 浴沂新服

그날에 다 지어졌는데 / 此日旣成

이 소자 돌아보며 이르시길 / 顧謂小子

어찌 물에서 보지 않느냐 / 盍觀於水

웅덩이를 채우고야 나아가니 / 盈科而進

뜻 이루는 것도 이 같은 법 / 有爲若是

흘러가는 냇물처럼 바빠야 한다 / 逝水其忙

그 말씀 아직도 귀에 쟁쟁 / 言猶在耳

이제 와서 생각하니 / 而今思之

공의 마지막 가르침이셨네 / 警誨止此

하늘이 우리 공을 낳으시고 / 天生我公

어찌 수명은 짧게 주셨는고 / 年命何屯

거적 자리엔 상주(喪主) 없고 / 苫席無孤

북당(北堂)에는 모친 계시네 / 萱堂有親

모를 것이 이치라서 / 昧昧者理

신에게도 묻지 못해 / 難質鬼神

후사 없고 단명한 건 / 無年無嗣

옛사람도 슬퍼한 일 / 昔人所愍

누가 이를 주장했나 / 孰主張是

그도 또한 잔인하이 / 其亦不仁

장원 급제 일렀으나 / 早擢魁科

집은 몹시 청빈했고 / 家甚淸貧

화직(華職) 요직(要職) 거쳤지만 / 歷敭華要

고을 수령되어 부모 봉양 못 했네 / 養未專城

금마옥당도 / 金馬玉堂

공에겐 영화가 아니었어라 / 於公非榮

전에 상소 한번 올렸다가 / 曩進一疏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가고 마셨지 / 遂竄南荒

나는 병으로 송별을 못 해 / 余病未別

고당에 와 절 드리니 / 來拜高堂

벽에 지도 걸어놓고 / 壁掛輿圖

가리키며 눈물지으셨네 / 指示泫然

아스랗다 귀양 가시는 분 / 逖矣遷人

산과 물이 얼기설기 / 鬱繆山川

아무 물 아무 산을 / 某水某山

어느 제 다 거칠꼬 / 何時度越

생이별도 못 참거든 / 不忍生離

사별이야 오죽하리 / 況此死別

전에 공이 귀양 가실 젠 / 昔公謫去

위로드릴 말이라도 있었지만 / 奉慰有說

지금 공이 이렇게 가실 제는 / 今公此行

차마 무슨 말을 하오리 / 忍作何言

이내 가슴 답답하여 / 余懷抑塞

저도 몰래 울음 삼키네 / 不覺聲呑

광주(廣州)라 그 남쪽이 / 維廣之陽

바로 공의 안식처일레 / 卽公眞宅

밤 지나면 계빈이라 / 啓殯隔宵

슬픈 영결 고하오니 / 含哀告訣

문장 비록 졸렬해도 / 文辭雖拙

가슴속에서 우러나왔고 / 腑肺攸出

제물 비록 박하지만 / 奠物雖薄

정례로써 올린 거니 / 情禮所設

밝으신 영령이시여 / 尊靈不昧

이 술 한 잔 받으소서 / 庶歆玆酌

상향 / 尙饗

 

 

[C-001]영목당(榮木堂) : 연암의 처삼촌인 이양천(李亮天 : 1716~1755)의 호이다. 연암의 장인인 이보천(李輔天)의 동생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이양천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수학 시절의 연암에게 문학을 지도하였다. 연암집 3 ‘영목당 이공에 대한 제문祭榮木堂李公文 참조.

[D-001]경오삭(庚午朔) 1일 경오 : 고대에는 날짜를 적을 적에 元嘉三年三月丙子朔二十七日壬寅이라는 식으로 연월(年月) 다음에 반드시 초하루를 뜻하는 삭() 자를 붙여서 삭() () 몇 일()이라 쓰고 또 간지(干支)를 붙였다. 따라서 초하루를 적을 때에도 이 제문처럼 乙亥十一月庚午朔一日庚午라 하여, 번거롭지만 날짜를 중복해서 적었다. 日知錄 卷20 年月朔日子

[D-002]생관(甥館) : 사위가 거처하는 방을 말한다.

[D-003]우공이산(愚公移山) : 우공(愚公)이란 노인이 집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들을 깎아 없애버리고자 결심하고 쉬지 않고 노력했더니 상제(上帝)가 감동하여 그 산들을 딴 곳으로 옮겨주었다고 하는 열자(列子) 탕문(湯問) 중의 우화에서 나온 고사성어로, 어려움을 무릅쓰고 꾸준히 노력하여 마침내 큰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D-004] …… 해도 : ‘옛 전()’ 사기 한서에 실린 전()들을 가리킨다. 연암은 이양천으로부터 사기를 배웠는데 항우본기(項羽本紀)를 본떠 이충무전(李忠武傳)을 지었더니, 이양천은 사마천(司馬遷)이나 반고(班固)와 같은 경지를 얻었다고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過庭錄 卷1

[D-005]기수(沂水)에서 …… 지어졌는데 :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포부를 물었을 때 증점(曾點) 늦은 봄이 되어 봄옷이 다 지어지면, () 쓴 어른 5, 6, 동자 6, 7명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論語 先進 여기서는 이양천이 연암을 데리고 물가로 놀러 나갔던 일을 가리킨다.

[D-006]어찌 …… 나아가니 : 맹자 진심 상(盡心上) 물을 보는 데에 방법이 있다. …… 흐르는 물이란 것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觀水有術 …… 流水之爲物也 不盈科 不行고 하였고, 이루 하(離婁下) 근원이 있는 물은 용솟음치며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웅덩이를 채우고야 나아가 사해로 쏟아진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고 하였다. 쉬지 않고 실천함으로써 차근차근 학업을 성취할 것을 당부한 말이다.

[D-007]흘러가는 …… 한다 : 논어 자한(子罕) 공자께서 냇가에서 말씀하시기를, ‘나아가는 것은 이 냇물과 같도다.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고 하였다.”는 구절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논어집주(論語集註)에 따르면, 이 구절은 쉬지 말고 면학할 것을 당부한 말이다.

[D-008]장원 급제 일렀으나 : 이양천은 1749(영조 25) 춘당시(春塘試)에 문과 급제하였다.

[D-009]화직(華職) 요직(要職) 거쳤지만 : 이양천은 1749년 이후 1755년 작고할 때까지 사간원 정언 · 헌납, 홍문관 부수찬 · 부교리 · 교리, 세자시강원 사서 · 필선 등을 지냈다.

[D-010]금마옥당(金馬玉堂) : 원래 한() 나라 때 글 잘짓는 신하들이 황제의 부름을 기다리던 궁중의 금마문(金馬門)과 옥당서(玉堂署)를 가리키는데, 후대에는 한림원(翰林院)의 학사(學士)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양천이 홍문관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한림원의 학사에 견주어 표현한 것이다.

[D-011]전에 …… 마셨지 : 이양천은 홍문관 교리로서 영조 28(1752) 10월 소론의 영수인 이종성(李宗城)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조치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연암집 3 불이당기(不移堂記) 참조.

[D-012]광주(廣州) …… 안식처일레 : 이양천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 돌마면(突馬面) 율촌(栗村)에 있었다.

[D-013]계빈(啓殯) : 발인을 할 때에 관을 내오기 위하여 빈소(殯所)를 여는 것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장인 처사(處士) 유안재(遺安齋)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

 

 

정유년(1777) 6 23일 정사(丁巳)일에 사위 반남 박지원은 삼가 술을 올려 장인 유안재 이공의 영전에 곡하며 영결을 고합니다.

아아, 이 소자 나이 열여섯에 선생의 가문에 사위로 들어와서 지금 26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고 우매하여 선생의 도를 잘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여 선생을 부끄럽게 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이제 선생이 멀리 떠나시는 날에 한마디 말로써 무궁한 슬픔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아 / 嗚呼

선비로서 일생 마치는 걸 / 以士沒身

세상 사람들은 수치로 알지만 / 世俗所恥

이를 비천하다 여기는 저들이 / 彼以卑賤

어찌 선비를 알 수 있으랴 / 惡能識士

이른바 선비란 건 / 所謂士者

상지하고 득기하나니 / 尙志得己

유하(柳下)의 절개와 유신(有莘)의 자득(自得) / 柳介莘囂

이와 같은 데 불과한 것 / 不過如是

이로써 보자하면 / 由是觀之

선비로 일생 마치기도 / 沒身以士

역시 어렵다 하리 / 亦云難矣

아아 / 嗚呼

선생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 先生存沒

선비 본분 안 어겼네 / 不違士也

예순이라 네 해 동안 / 六十四年

글을 진정 잘 읽으시어 / 善讀書者

오랫동안 쌓인 빛이 / 積久光輝

온아(溫雅)하게 드러났지 / 溫乎發雅

배부른 듯이 굶주림을 즐기셨고 / 樂飢若飽

과부처럼 절개 지키셨네 / 守節如寡

고고해도 무리를 떠나지 않고 / 孤不離群

꼿꼿해도 남을 책하지 않으셨네 / 貞不詭物

발언은 정곡을 찌르고 / 發言破鵠

일 처리는 똑부러지게 하셨지 / 制事截鐵

빙호추월처럼 / 氷壺秋月

안팎 모두 툭 틔었지 / 外內洞澈

천박한 세상의 썩은 유자(儒者)들은 / 陋世酸儒

변함없는 선비 절개 부끄러워하는데 / 恥士一節

객기는 진작 다 없애셨고 / 夙刊客浮

만년에는 호걸 기상 감추셨네 / 晩韜英豪

진실만을 바라보고 탄탄대로 걸으시어 / 視眞履坦

심기가 차분히 가라앉으셨지 / 心降氣調

타고난 천성 외엔 / 所性之外

털끝 하나 아니 붙여 / 不著一毫

먹 묻으면 씻어 버리고 / 墨則斯浣

논의 잡초 어찌 아니 뽑으리 / 稂豈不薅

팔을 베고 물 마시건 / 曲肱飮水

좋은 말 사천 필을 매어 놓건 / 繫馬千駟

덜고 보탬 있지 않네 / 旣無加損

()라는 한 글자엔 / 士之一字

운명이란 정해진 것 / 命有所定

때도 만나야 하는 법 / 時有所値

이를 분별할 줄 아는 이만 / 能辨此者

공의 뜻을 알게 되리 / 始識公志

아아 / 嗚呼

대들보 부러진 슬픔에다 / 梁木之哀

강한 같은 그리움으로 / 江漢之思

잔을 올리며 통곡하노니 / 奠斝一慟

만사가 끝났도다 / 萬事已而

공의 모습 빼닮은 / 眉宇之寄

아들 한 분 두셨으니 / 獨有庭芝

즐겁거나 슬프거나 잠깐 사이라도 / 歡戚造次

바라건대 함께 손잡고 / 庶共挈携

서로 책선하고 화기애애하여 / 不忘偲怡

알아주신 은혜 보답 잊지 않으리 / 以報受知

아아 / 嗚呼

예전의 어린 사위 / 昔日小婿

이젠 저도 백발이 되었다오 / 今亦白頭

이제부터 죽기 전까지 / 從今未死

허물 적기 바라오니 / 庶寡悔尤

은덕과 사랑으로 / 維德之愛

음조(陰助)하여 주소서 / 願言冥酬

간장에서 쏟는 눈물 / 肝膈之寫

영령께서 아실는지 / 靈或知不

아아 슬프외다 / 嗚呼哀哉

상향 / 尙饗

 

 

[C-001]유안재(遺安齋) : 이보천(李輔天 : 1714~1777)의 호이다. 이보천은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인 계양군(桂陽君)의 후손으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제자인 종숙부 이명화(李命華)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같은 농암 제자인 어유봉(魚有鳳)의 사위가 되어 그에게서도 사사받음으로써, 우암(尤庵)에서 농암으로 이어지는 노론의 학통을 계승한 산림 처사로서 명망이 높았다. 그는 사위인 연암에게 맹자를 가르쳤으며, 정신적으로 큰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D-001]그래도 …… 않았다 : 이 제문에서 장인을 예찬한 내용이 연암의 사호(私好)에서 나온 아부의 발언이 아님을 미리 밝혀두기 위해 한 말이다. 맹자 공손추 상에서 맹자는 재아(宰我)와 자공(子貢)과 유약(有若)은 지혜가 성인(聖人)을 넉넉히 알아볼 만하였다. 낮추어 보더라도 그들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汚不至阿其所好라고 하면서, 재아와 자공과 유약이 그의 스승 공자를 극구 예찬한 말을 공자에 대한 정당한 평가로서 인용하였다. 또한 이루 하에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침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聲聞過情 君子恥之고 하였다.

[D-002]이를 …… 저들이 : 원문 중 卑賤 貧賤으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D-003]상지(尙志)하고 득기(得己)하나니 : 맹자 진심 상에서 제() 나라 왕자 점() 선비란 무슨 일을 하는가?”라고 묻자, 맹자는 뜻을 고상하게 가진다尙志라고 답했다. 또한 송구천(宋句踐) 어떻게 해야 이처럼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가?何如斯可以囂囂矣라고 묻자, 맹자는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기 때문에 선비는 스스로 만족한다.窮不失義 故士得己焉고 하였다.

[D-004]유하(柳下) …… 자득(自得) : 유하는 노() 나라 대부(大夫) 전금(展禽)으로, 유하라는 곳에 살았고 시호(諡號)가 혜()였기 때문에 유하혜(柳下惠)라고 불렀다. 맹자 진심 상에, “유하혜는 삼공(三公)의 지위로도 그 절개를 바꾸지 않았다.” 하였다. 유신(有莘)의 자득(自得)이란 이윤(伊尹)이 유신의 들판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을 때 탕() 임금이 사람을 시켜 초빙하자, 이윤이 스스로 만족해하며 말하기를囂囂然曰 내가 어찌 탕왕의 폐백을 받아들이리오. 내 어찌 들판에서 농사지으며 이대로 요순(堯舜)의 도를 즐기는 것만 하겠는가.’ 하였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孟子 萬章上

[D-005]무리를 떠나지 않고 : 동문지간(同門之間)인 벗들을 떠나서 혼자 쓸쓸히 지내는 것을 이군삭거(離群索居)라 한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자하(子夏)가 아들을 여의고 상심하여 실명(失明)을 하자 증자(曾子)가 조문을 왔는데, 죄 없는 자신에게 불행을 주었다고 자하가 하늘을 원망하므로 증자가 이를 나무라며 그의 잘못을 성토하니, 자하는 내가 벗들을 떠나 혼자 산 지 역시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뉘우쳤다고 한다.

[D-006]빙호추월(氷壺秋月) : 얼음을 담은 옥항아리와 가을철의 밝은 달처럼 마음이 맑고 깨끗함을 말한다.

[D-007]팔을 …… 놓건 : 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그런 가운데에서도 역시 즐거움은 있다. 의롭지 못하면서 부귀한 것은 내게는 뜬구름과 같다.”고 하였고,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이윤(伊尹)은 유신의 들판에서 농사짓고 살 적에 요순(堯舜)의 도()를 좋아하여 의()가 아니고 도()가 아니거든, 천하를 녹으로 주어도 돌아보지 않고, 좋은 말 4000필을 마구간에 매어 놓아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하였다.

[D-008]대들보 …… 그리움으로 : 예기 단궁 상에 공자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꿈을 꾸고는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부러지고 철인(哲人)이 죽을 것이다.”라고 노래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대들보가 부러진다는 것은 스승이나 철인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또한 맹자 등문공 상에 증자(曾子)가 공자를 찬양하여 강한(江漢)으로 씻은 것 같고 가을 볕으로 쪼인 것 같아서 밝고 깨끗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다.” 하였다. 강한(江漢)은 양자강과 한수(漢水)를 말한다. 따라서 강한 같은 그리움이란 작고한 스승을 애타게 추모함을 뜻한다.

[D-009]아들 한 분 두셨으니 : 빼어난 자제(子弟)를 뜰에서 자라는 지란(芝蘭)과 옥수(玉樹)에 비유하여 정지(庭芝)’ 정옥(庭玉)’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을 가리킨다.

[D-010]서로 책선하고 화기애애하여 : 논어 자로(子路)에서 자로가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을 선비라 부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간절하게 서로 책선(責善)하고 화기애애하면 선비라고 부를 수 있다. 붕우간에 간절하게 책선하고 형제간에 화기애애하니라.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오천(梧川) 처사 이장(李丈)에 대한 제문

 

 

모년 모월 모일 반남 박모는 삼가 척계지서(隻鷄漬絮)의 제수를 갖추어 제사를 올리고 글로써 곡합니다.

 

아아 / 嗚呼

내가 나서 세 살 되니 / 我生三年

말 비로소 배울 때라 / 自始能言

밤이라 능금이라 / 栗兮楂兮

오천을 노래했지 / 詠言梧川

누굴 자랑한 거냐면 / 云誰之誇

갓 시집온 형수님 집이었네 / 新婦之家

공이 따님 보러 오실 제 / 公來視女

노상 흰 나귀를 탔고 / 常乘白驢

눈은 오목하고 수염 길어 / 深目長髯

위엄 있고 정숙하셨네 / 威儀雅魚

뛰어나가 절 드리며 / 超躍迎拜

기뻐서 글공부도 잊었지 / 喜闕課書

나도 장인이라 부르면서 / 亦呼丈人

형을 따라 같이 했네 / 隨兄而如

어제 아침 일 같은데도 / 怳若隔晨

어언 삼십여 년 / 三十年餘

공의 성품 강직하고 / 公性剛明

사리와 인정에 통달했으며 / 深達事情

고사에 정통하고 예의를 숭상 / 博古好禮

인륜 의리 투철하셨네 / 倫備義精

나라에 못 쓰이고 / 進不需國

산골짝에서 늙었으나 / 守老一壑

운명이니 어찌 슬퍼하리 / 命也何怛

후회도 부끄럼도 없이 사셨노라 / 生無悔怍

아아 / 嗚呼

어머님 같고말고 / 先妣之似

우리 형수 나에게는 / 母我嫂氏

우리 집의 형수님은 / 嫂氏於家

옛 충신과 같아서 / 如古藎臣

힘 다해 죽어서야 그만두니 / 盡瘁後已

공은 제 몸처럼 아프게 여겨 / 公癏若身

정성스레 보살피길 / 綢繆慇懃

마치 옛날 제후국이 / 如古矦邦

이웃 나라 구제하고 백성을 보호하며 / 恤鄰保民

때맞추어 곡물 주어 / 賑糶以時

제 백성을 돌보듯이 하셨네 / 視厥赤子

딸 생각은 그렇대도 / 女固念矣

그 동서까지 염려해 주셨네 / 推及厥娌

부모님을 여읜 뒤로 / 自我孤露

더욱 공의 비호에 의지했네 / 益仰燾庇

길 가다 반백의 노인 보면 / 路見斑白

내 마음 몹시 송구스럽네 / 我心怵惕

더구나 공은 연세와 덕망으로 / 況公年德

아버님과 의기투합한 벗이었거늘 / 父之誼執

어찌 백 년을 못 사시어 / 胡不百年

나를 섧게 만드시나 / 使我深慽

이 소자 와서 곡을 하고 / 小子來哭

뜰과 집을 두루 살펴보니 / 周瞻院屋

국화 피어 향기 짙고 / 菊有剩馨

솔 푸르러 뜰에 가득 / 松翠滿庭

오천의 산은 울울창창 / 梧山鬱鬱

오천의 물은 맑디맑네 / 梧水泠泠

고인의 자취 어제런 듯한데 / 遣䠱如昨

영상(靈床)에서 절 드리니 예전과 다르네 / 拜床非昔

두 줄기 눈물 쏟아지고 / 雙淚磊落

호곡 소리 목이 메네 / 聲苦喉嗌

지칠 줄 모르고 장려해 주셨는데 / 不倦奬掖

이제 어디에 가르침을 청하리 / 今安請益

거듭 당부하신 그 유언을 / 丁寧遺托

감히 어찌 명심하지 않으리오 / 敢不銘臆

혼령이시여 가까이 계시거든 / 尊靈不膈

이 술잔을 받으소서 / 庶歆玆酌

상향 / 尙饗

 

 

[C-001]오천(梧川) 처사 이장(李丈) : 연암의 형 박희원(朴喜源)의 장인인 이동필(李東馝 : 1724~1778)을 가리킨다. 연암집 2 ‘맏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 참조.

[D-001]척계지서(隻鷄漬絮)의 제수 : 간단한 제수를 뜻하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서치(徐穉)는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라 일컬어졌던 사람인데, 그가 먼 곳으로 문상(問喪)하러 갈 때 술을 솜에 적셔서 햇볕에 말리고 그것으로 구운 닭을 싸서 가지고 간 다음 솜을 물에 적셔 술을 만들고 닭을 앞에 놓아 제수를 올린 뒤 떠났던 데서 나온 말이다. 後漢書 卷53 周黃徐姜申屠列傳 徐穉

[D-002] …… 그만두니 :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 몸이 닳도록 힘을 다하여 죽어서야 그만둔다.鞠躬盡瘁 死而後已고 하였다.

[D-003]영상(靈床) : 염을 마치고 입관하기 전까지 시신을 모셔 놓은 곳을 말한다.

[D-004]혼령이시여 가까이 계시거든 : 원문의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는데, 뜻은 같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몽직(李夢直)에 대한 애사(哀辭)

 

 

대범 사람의 삶은 요행이라 할 수 있는데도 그 죽음이 공교롭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루 동안에도 죽을 뻔한 위험에 부딪치고 환난을 범하는 것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다만 그것이 간발의 차이로 갑자기 스쳐가고 짧은 순간에 지나가 버리는 데다가, 마침 민첩한 귀와 눈, 막아 주는 손과 발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되는 까닭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 뿐이며, 사람들도 편안하게 생각하고 안심하고 행동하여 밤새 무슨 변고가 없을까 염려하지 않는다. 진실로 사람마다 늘 뜻하지 않은 변고를 당하게 될 것을 염려하게 한다면, 비참하도록 두려워서 비록 종일토록 문을 닫고 눈 가리고 앉아 있다 해도,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 어떤 망기(望氣)하는 자가 한 여자의 관상을 보고서 소가 들이받는 것을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지게문 앞에서 귀이개로 귀를 후비다 지게문이 세차게 부딪치는 바람에 귀를 찔러서 죽었으니, 귀이개는 소뿔로 만든 것이었다. 또 사주쟁이가 한 사내의 사주팔자를 논하면서 쇠를 먹고 죽게 될 것이라 했는데, 이른 아침 밥을 먹다가 폐가 수저를 빨아들여 죽었다. 그 신기하게 들어맞고 공교하게 증험된 것이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일을 당하기에 앞서 간곡하게 조심하라고 당부하지 않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쇠는 먹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고 소도 규방에서 기르는 것이 아니니, 비록 천명을 아는 선비일지라도 이런 일을 미리 헤아려서 경계하고 조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군자는 그가 듣지 못하는 곳에서도 두려워하고, 그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경계한다.” 했지만, 이것이 어찌 소에 찔리고 쇠를 먹는 것을 두고 이름이겠는가. 요컨대 높은 산에 오르지 아니하고 깊은 물가에 다가가지 않고, 언어를 조심하고 음식을 조절하며, 나의 생각이 속에서 생겨나는 바를 경계한 것일 뿐이다. 밖에서 닥쳐오는 환난이야 역시 또 어찌하겠는가.

이몽직의 휘()는 한주(漢柱)이니, 본관은 덕수(德水)로서 충무공(忠武公)의 후손이다. 그 부친은 절도사(節度使)로 휘가 관상(觀祥)인데, 나의 매형(姊婿)인 의금부 도사 서중수(徐重修) 씨에게 외삼촌이 된다. 그러므로 몽직은 어렸을 때부터 내게 와서 배웠고, 그의 매제인 박씨의 아들 제운(齊雲 박제가)은 젊은 나이로 문장에 능하여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였는데 나와 친한 사이다. 몽직은 대대로 장수의 집안이라 비록 무관으로 종사했지만 문인을 좋아하여, 항상 초정을 따라서 나와 교유하였다. 사람됨이 어려서는 곱고 귀엽더니, 장성한 뒤에는 시원스럽고 명랑하여 호감을 주었다. 하루는 남산에서 활쏘기를 익히다가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렇게 죽었을 뿐 아니라 아들도 없었다.

, 국가가 태평을 누린 적이 오래라 사방에 난리가 없어 싸울 만한 일이 없는데도, 선비가 유독 창끝이나 살촉에 찔려 죽는다는 것은 어찌 공교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무릇 사람이 하루를 사는 것도 요행이라 하겠다. 이에 애사를 지어 전장에서 죽은 장사(壯士)를 애도하고, 이로써 몽직의 죽음에 대해 조문하노라. 애사는 다음과 같다.

 

장사가 몸을 솟구쳐 전장으로 내달리니 / 士踴躍兮赴戰塲

바람 모래 들이쳐라 양편 군사 맞붙는다 / 風沙擊兮兩軍當

목소리가 쉬고 거칠어 도리어 고조되지 아니하고 / 聲廝暴兮還不颺

입으로는 칼을 물고 전진하며 창 휘두르네 / 口含劍兮前舞槍

눈 한번 깜짝 않네 뭇 창끝이 몰려와도 / 目不瞬兮集衆鋩

오른발론 짓밟고 왼발을 날리누나 / 踏右足兮左脚揚

모든 힘을 다 쏟아라 임금님을 위함일레 / 竭膂力兮爲君王

모양 소리 사나워도 참으로 미치광이 아니라오 / 容聲惡兮諒非狂

아아 / 嗚呼

죽은 지가 오래지만 곧게 선 채 쓰러지지 않고 / 死已久兮立不僵

주먹 상기 쥐었어라 두 눈마저 부릅떴소 / 手猶握兮兩目張

자손에게 벼슬 주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며 / 蔭子孫兮表其鄕

역사책에 기록하니 아름다운 이름 길이 전하리 / 史書之兮流芬芳

 

 

나는 내 친구 이사춘(李士春)이 죽은 뒤부터는 사람들과 다시 교제하고 싶지 않아 경하(慶賀)건 조위(弔慰)건 모두 폐해 버렸다. 그리하여 평생의 절친한 친구로 이를테면 유사경(兪士京 유언호(兪彦鎬)), 황윤지(黃允之 황승원(黃昇源)) 같은 이들이 험한 횡액을 만나 섬에서 거의 죽게 되었어도, 한 글자 안부를 물은 적이 없었다. 비록 왕래하는 일이 있다 해도, 가까운 이웃에 밥 지을 물과 불을 얻거나 시복(緦服) 이내의 집안 친척을 조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척 원망하고 노여워하여, 꾸지람과 책망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나 역시 스스로 이와 같이 하겠다 감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교제가 끊어지는 것도 달갑게 여겨, 비록 실성하거나 멍청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았다.

대개 생각은 다 망상이요, 인연은 다 악연이다. 생각하는 데서 인연이 맺어지고, 인연이 맺어지면 사귀게 되고, 사귀면 친해지고, 친하면 정이 붙고, 정이 붙으면 마침내는 이것이 원업(冤業)이 되는 것이다. 그 죽음이 사춘(士春)처럼 참혹하고 몽직(夢直)처럼 공교로운 경우에는, 평생 서로 즐거워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데 마침내 재앙과 사망으로 고통이 혹독하여 뼈를 찔러대니, 이것이 어찌 망상과 악연이 합쳐져서 원업이 된 게 아니겠는가. 만약에 몽직과 애당초 모르는 사이였다면, 아무리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더라도 마음이 아프고 참담한 것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몽직이 나를 종유(從遊)한 것은 비록 사춘의 경우처럼 정이 깊고 교분이 두텁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달 밝은 저녁과 함박눈 내린 밤이면, 문득 술을 많이 가지고 와서 거문고를 퉁기고 그림을 평론하며 흠뻑 취하곤 했었다. 나는 고요히 지내면서 이런 생활에 익숙해 있었는데, 혹은 달빛 아래 거닐며 서글퍼하다 보면 몽직이 하마 이르렀고, 눈을 보면 문득 몽직을 생각하는데, 문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하면 과연 몽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만이다.

내가 그의 집에 가서 곡하고 조문하지 못할 형편이므로, 그를 위해 이 애사를 지어 저 옛날 한창려(韓昌黎)가 구양생(歐陽生)에 대한 애사를 손수 썼던 일을 본떠서, 드디어 한 통을 써서 초정에게 주는 바이다.

 

[C-001]이몽직(李夢直)에 대한 애사(哀辭) : 몽직은 이한주(李漢柱 : 1749~1774)의 자이다. 애사는 한문(漢文) 문체의 하나로, 주로 요절한 사람에 대한 추도사를 말한다.

[D-001]망기(望氣) : 망운(望雲)이라고도 하며, 구름을 보고 길흉을 예언하는 점술을 말한다.

[D-002]귀이개 : 원문은 ‘’인데, 이는 우리식 한자이다.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음은 이다. 귀지를 파내는 도구인데 조선조의 제품이다.音滔 取耳中垢之具也 韓代所製라고 주를 달아 놓았다.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도 유사한 주를 달아 놓았다.

[D-003]천명을 아는 : 주역 계사전 상에 천도를 즐기고 천명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근심하지 않는다.樂天知命 故不憂고 하였다.

[D-004]군자는 …… 경계한다 : 중용장구  1 장에 나오는 말이다. 단 앞뒤 구절의 순서가 바뀌었다.

[D-005]관상(觀祥) : 이관상(1716~1770)은 충무공의 5세손으로, 그의 친아들 한주는 형 이보상(李普祥)의 양자가 되었으며, 그의 둘째 서녀(庶女)가 박제가(朴齊家)에게 시집갔다. 무과 급제 후 고을 수령과 병수사(兵水使)를 여러 차례 지냈으며,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재임 중 사망했다.

[D-006]서중수(徐重修) : 1734~1812. 그의 자는 성백(成伯)이고 본관은 대구이다. 연암의 둘째 누님의 남편이다. 연암집 5 성백에게 보냄與成伯이란 두 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D-007]주먹 : 원문 가 대본에는 로 되어 있는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 등에 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고쳐 번역하였다.

[D-008]이사춘(李士春) : 이희천(李羲天 : 1738~1771)으로, 그의 자가 사춘(士春)이다. 호는 석루(石樓)이고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연암은 그의 부친인 이윤영(李胤永)에게서 주역을 배우게 된 것을 계기로, 젊은 시절부터 그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이희천은 청() 강희(康熙) 때 남양지부(南陽知府)를 지낸 주린(朱璘)이 편찬한 명기집략(明紀輯略)에 조선 태조의 세계(世系)를 왜곡 · 모독한 내용이 있는 줄 모르고 그 책을 책 장사로부터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실이 문제되어 참수되는 변을 당했다. 英祖實錄 47 5 26

[D-009]유사경(兪士京 ) …… 되었어도 : 영조 48(1772) 유언호(兪彦鎬)는 노론 청류(淸流)로 지목되어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0월 탕척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황승원(黃昇源)이 사간원 정언으로서 이광좌(李光佐) 등 소론계 대신의 관직을 복구하라는 영조의 특지(特旨)에 항의한 참판 조영순(趙榮順)을 두둔했다가 흑산도로 유배되어 몇 달 만에 풀려났다.

[D-010]시복(緦服) : 시마(緦麻)로 된 상복을 입는 3개월의 상을 말한다. 족부모(族父母), 족형제(族兄弟) 등 가장 촌수가 먼 친척의 상이 이에 해당한다.

[D-011]원업(冤業) : 악업(惡業), 즉 악한 결과를 받는 행동을 말한다.

[D-012]한창려(韓昌黎) ……  : 한유(韓愈)는 요절한 벗 구양첨(歐陽詹)을 위해 구양생애사(歐陽生哀辭)를 짓고 나서 덧붙인 제애사후(題哀辭後)에서 나 한유는 본래 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글을 짓고 난 뒤 단 두 통만을 손수 써서, 그중 한 통은 청하(淸河)의 최군(崔群)에게 주었다. 최군과 나는 모두 구양생의 벗이다.”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유경집(兪景集)에 대한 애사

 

 

유경집의 휘는 성환(成煥)이고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외모가 훤출하고 건장하며 성품은 순하고 언행은 겸손하며, 기억력이 아주 뛰어났고 문학에 빼어난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나이 스물둘에 병에 걸려 죽었다.

아아, 나는 경집의 아버지의 친구로서, 경집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 아버지를 잘 알았다. 경집의 조부모는 경집의 아버지만을 일찍 기르고서, 뚝 끊기듯이 다른 아들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경집이 태어나자 손자로 여기지 아니하고 작은 아들로 여겼으며, 경집의 부모 역시 감히 스스로 그 아들을 제 아들이라 하지 못하였는바, 경집도 어렸을 적부터 조부모를 제 부모로 여겼다.

급기야 경집이 죽자 그 부모는 감히 그 아들의 죽음에 곡도 못하고, 늙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두려워하여 속으로 울었다. 조부모는 차마 그 손자의 죽음에 곡도 못하고, 아들의 슬픔을 더 크게 할까 두려워하여 속으로 울었다. 두 살배기 아들은 그 아비에 대해 곡하는 슬픔을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어미가 슬퍼하는 것 때문에 울어대니, 그 아내 이씨(李氏)는 감히 죽지도 못하고 또한 감히 곡도 못하고 속으로 울었다. 친척과 친구들은 유생(兪生)이 재주와 덕행을 지니고도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그 아버지에게까지 조문하고 곡할 겨를이 없었으니, 그 조부모가 다 늙어서 작은 아들과 다름 없는 손자를 잃은 때문이다. 이것이 경집의 죽음을 대단히 슬퍼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애사를 지어 애도하는 바이다.

 

죽은 사람이 죽음의 슬픔을 모르는 것이 슬퍼할 만한 것과, 산 사람이 죽은 자가 자신의 죽음이 슬퍼할 만함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슬퍼할 만한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슬플까?

어떤 이는 죽은 사람이 슬프지.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이 슬퍼할 만한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산 사람이 그의 죽음이 슬퍼할 만한 일임을 슬퍼한 줄을 모르니, 이야말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산 사람이 슬프지. 죽은 사람은 이미 아무것도 몰라 슬퍼할 만한 것을 슬퍼함도 없으나, 산 사람은 날마다 그를 생각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생각하면 슬퍼서, 빨리 죽어 아무것도 모르게 되기를 바라니, 이야말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 효자는 더러 부모 여읜 슬픔으로 생명이 위급하기도 하고, 자부(慈父)는 더러 자식 잃은 슬픔으로 실명하기도 하고, 열부(烈婦)는 더러 자결하기도 한다. 이는 다 죽은 자에 대한 슬픔으로 말미암아 혹은 따라 죽고 혹은 병이 되고 만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논한다면,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슬픔은 함께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유경집의 죽음에 대해서 산 사람이 슬프다.”고 단언한다.

무릇 사람의 감정으로 볼 때 가장 원망스럽고 한스러워 혹독한 고통이 뼈를 찌르기로는, 나는 믿었는데 상대방이 속이는 것만 한 것이 없으며, 속임을 당한 고통은 가장 친하고 다정한 이가 문득 나를 등지고 떠나는 것만 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친하고 다정하기로 손자와 할아버지, 아들과 아버지, 남편과 아내 같은 사이보다 더한 경우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기를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또 믿어 의심함이 없기로는, 어느 것이 경집의 재주와 외모로 보아 장래가 크게 기대되는 경우와 같겠는가. 그런데도 마침내 상식과 이치에 어긋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그러니 어찌 원망스럽고 한스러워 혹독한 고통이 뼈를 찌르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아아, 비록 그렇지만 산 사람은 제 슬픔에 슬퍼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슬퍼하는지 슬퍼하지 않는지를 모른다. 그렇다면 평일에 나처럼 그를 아끼던 자가 어찌 애사를 지어, 한편으로는 산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죽은 사람이 제 슬픔에 슬퍼하지 못하는 것을 애도하지 않겠는가.

 

 

[D-001]경집의 아버지 : 유정주(兪靖柱 : 1729~1798)를 가리킨다. 유정주는 창애(蒼厓) 유한준(兪漢雋)의 족자(族子)가 되므로, 유한준도 그의 아들을 위해 애사(哀辭)를 지었다. 自著 卷15 族孫成煥哀辭

[D-002]조부모를 제 부모로 여겼다 : 원문은 乃大父焉是母인데 문리가 통하지 않는다. 문맥으로 유추하여 번역하였다.

[D-003]자부(慈父) …… 하고 :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아들을 여의고 상심하여 실명을 하였다고 한다. 禮記 檀弓上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재종숙부 예조 참판 증 영의정공(領議政公) 묘갈명(墓碣銘)

 

 

공의 휘는 사정(師正)이요 / 公諱師正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 潘南人也

자는 시숙(時叔)이요 / 字曰時叔

부친의 휘는 필하(弼夏)이네 / 考諱弼夏

우리 박씨는 / 維我朴氏

신라에서 비롯되어 / 肇自新羅

여덟 망족(望族)으로 갈렸는데 / 分爲八望

반남이 제일 대가 / 潘爲大家

평도공(平度公) / 維平度公

우리 태종 도우셨고 / 相我太宗

야천(冶川)께서 상서로운 조짐 일으켜 / 冶川發祥

대대로 번창하게 되었네 / 族世遂昌

금계군(錦溪君)의 공적이며 / 錦溪功業

금양군(錦陽君)의 문장이라 / 錦陽文章

증조 휘는 세교(世橋)이고 / 曾祖世橋

조부 휘는 태두(泰斗)이니 / 祖諱泰斗

추증(追贈)되는 경사 거듭되고 / 榮贈襲休

봉군(封君)이 대를 이었네 / 君封世受

모친 윤씨 부인은 / 妣尹夫人

관찰사 반()의 따님 / 監司攀女

공께서는 숙종대왕 / 公於肅廟

계해년에 출생하여 / 癸亥以擧

기미년에 돌아가시니 / 己未乃卒

향년은 오십칠 세 / 壽五十七

정유년에 정시 급제 / 丁酉庭試

한림이며 옥당이며 / 翰林玉堂

춘방이며 대각이며 / 春坊臺閣

검상이며 전랑을 / 檢詳銓郞

두루두루 거치셨지 / 周歷流轉

산직(散職) 겸직(兼職)도 있고 / 有冗有兼

해읍에도 간혹 보직되고 / 間補海邑

호남도 안렴(按廉)했네 / 亦按湖廉

처음에 흉당들이 / 厥初凶黨

사필 장악할 욕심으로 / 圖秉史筆

외직으로 공 내쫓고 / 絀公于外

효경(梟獍) 같은 자들을 배치했네 / 獍梟峙列

공이 그 간상(姦狀) 파헤쳐서 / 公發其姦

드디어 신치운 · 조지빈을 공박하니 / 遂駁雲彬

누가 저들을 함께 천거했나 / 誰其同剡

그 사람을 알 수 있네 / 可知其人

엄숙한 저 청묘는 / 肅肅淸廟

묘정(廟庭) 배향 장엄한데 / 庭食嚴哉

저 세 정승들은 / 若彼三相

진실로 재앙의 괴수들이라 / 寔俱禍魁

저들 배향 물리쳐서 / 並斥其享

제사 의식 중히 하고 / 以重祀典

몸가짐 고고히 하여 / 持我矯矯

저들의 관리 선발 조소하였네 / 譏彼銓選

네 충신을 함께 제사하자고 / 並祠四忠

공이 처음 의견 내셨네 / 詢謀自公

적신들이 집권하자 / 賊臣執命

국시가 무너지니 / 國是北崩

평피의 회합은 / 平陂之會

또 하나의 사당(私黨)일레 / 又一淫朋

공은 맹종하지 않고 / 公不詭隨

정절이 돌보다 단단했으니 / 貞于介石

사람들은 공의 처신 살펴보고 / 視公進退

영예로운 때인지 아닌지를 예측하였네 / 占時榮辱

왕릉 이전 공사 감독하여 / 董匠遷陵

그 공로로 승지로 승진하고 / 勞陞銀臺

안변 부사로서 치적 드러났나니 / 著治安邊

검약하고 절제하였네 / 廉約自裁

대사간으로 들어온 다음 / 入長薇垣

예조 형조 참의 되고 / 參議禮刑

이조 참의 세 번 되어 / 三入選部

청탁(淸濁)을 꼼꼼히 따졌네 / 錙分渭涇

강화 유수로 발탁되고 / 擢守沁府

한성부의 우윤과 좌윤 거쳤네 / 左右尹京

예조 참판 재임하고 / 再佐秩宗

도승지가 한 번 되니 / 一爲知申

품계로는 가의대부 / 階則嘉義

춘추관과 경연 직함에다 / 春秋經筵

의금부와 오위도총부 관직 겸하고 / 金吾摠管

봉상시 제조 거쳐 / 提擧奉常

비변사 제조 힘껏 사양해도 / 力辭籌司

수석 영광 차지했네 / 首席據光

부인은 이씨이니 / 夫人李氏

본적이 함평이요 / 其籍咸平

부친 휘는 택상(宅相)이며 / 父曰宅相

고조 휘는 춘영(春英)이라 / 高祖春英

공이 세상 떠나시고 / 距公之沒

십구 년 뒤에 별세했네 / 十九年卒

여섯 남매 낳았는데 / 六子是擧

아들 넷에 따님이 둘 / 四男二女

흥원(興源)은 스무 살에 / 興源弱冠

진사과에 합격했고 / 迺成進士

창원(昌源)은 문과 장원이나 / 昌源魁科

벼슬은 정언에 그쳤네 / 正言而止

형원(亨源)까지 일찍 죽어 / 亨源蚤歿

모두 서른 못 넘겼네 / 俱未卅禩

명원(明源)은 부마 되어 / 明源尙主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지니 / 封錦城尉

공이 영의정에 증직된 건 / 贈公議政

실로 그가 귀한 신분 된 덕일레 / 寔用其貴

큰사위는 김기조요 / 女金基祚

둘째 사위는 이도양인데 / 次李度陽

열렬한 이씨 아내는 / 烈烈李妻

남편 따라 자결했네 / 從夫自戕

장남에겐 아들 셋 있으니 / 長派三男

상덕(相德)은 이조 판서 / 相德吏判

상악(相岳)은 사간원 정언이며 / 相岳正言

상철(相喆)은 한성 부윤인데 / 相喆府尹

상악은 형원의 양자 되고 / 岳繼亨後

상철은 금성위의 양자 되고 / 喆爲尉子

족자인 상집(相集) / 族子相集

창원의 제사를 받들었네 / 亦承昌祀

공은 풍채 아름답고 / 公美姿度

천품이 곧고 깐깐하여 / 天姿抗簡

남의 부정 보게 되면 / 視人不正

그자의 갓이 기운 듯이 여겼네 / 若攲厥冠

집안에선 위의(威儀) 있고 / 在家獻獻

관에서는 강직하셨네 / 在官侃侃

소생이 묘갈명 지었으니 / 小子作銘

영원토록 마멸되지 않으리이다 / 永世不刊

 

 

[D-001]여덟 망족(望族) : 박씨 중 밀양(密陽) · 반남 · 고령(高靈) · 함양(咸陽) · 죽산(竹山) · 순천(順天) · 무안(務安) ·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하는 이른바 팔박(八朴)’을 가리킨다.

[D-002]평도공(平度公) : 박은(朴訔 : 1370~1422)의 시호이다. 태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D-003]야천(冶川) : 박소(朴紹 : 1493~1534)의 호이다. 연암집 1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참조.

[D-004]금계군(錦溪君) :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봉호이다.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신이었다.

[D-005]금양군(錦陽君) : 선조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한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 1592~1645)이다. 뒤에 금양군으로 개봉(改封)되었다. 당대의 문장가로서, 분서집(汾西集)이 있다.

[D-006]한림이며 …… 거치셨지 : 한림(翰林)은 예문관, 옥당(玉堂)은 홍문관, 춘방(春坊)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대각(臺閣)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가리킨다. 검상(檢詳)은 의정부의 정 5 품 벼슬로 문서 검열을 담당하였고, 전랑(銓郞)은 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가리킨다. 박사정(朴師正)의 관력(官歷) 연암집 9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부군 묘표음기(禮曹參判贈領議政府君墓表陰記)’에 자세하다.

[D-007]해읍(海邑)에도 …… 안렴(按廉)했네 : 흥양 현감(興陽縣監), 남해 현령(南海縣令) 등에 임명된 사실과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사실을 말한다.

[D-008]처음에 …… 배치했네 : 영조 즉위 초에 경종실록(景宗實錄)을 편찬하는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할 때 당상관(堂上官)은 유봉휘(柳鳳輝) · 조태억(趙泰億) · 김일경(金一境) · 이진유(李眞儒) , 낭청(郞廳)은 조지빈(趙趾彬) · 신치운(申致雲) 등 소론 일색으로 임명되고, 낭청으로 임명된 박사정은 회인 현령(懷仁縣令)으로 축출되었던 사실을 말한다.

[D-009]누가 …… 있네 : 박사정은 신치운 등이 박필몽(朴弼夢 : 1668~1728)에게 붙어 사관(史官) 자리를 차지한 것을 공박하였다. 박필몽은 소론 강경파로서 영조 즉위 초에 도승지가 되었는데, 실록청을 사사로이 출입한다고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D-010]청묘(淸廟) : 종묘의 묘실(廟室), 여기에서는 숙종의 묘실을 가리킨다.

[D-011]세 정승들 : 숙종의 묘에 배향된 소론측의 삼대신(三大臣)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崔錫鼎), 우의정을 지낸 윤지완(尹趾完)을 가리킨다.

[D-012]몸가짐 …… 조소하였네 : 영조 즉위 초에 노론과 소론을 가리지 않고 탕평책에 순응하는 사람들만 선발하는 데 항의하여, 박사정이 누차 관직에 제수되었어도 취임을 거부한 사실을 말한다.

[D-013]네 충신 : 노론 사대신인 김창집(金昌集) · 이이명(李頤命) · 이건명(李健命) · 조태채(趙泰采)를 가리킨다. 이들은 경종 때 왕세제(王世弟 : 후일의 영조)를 책봉하고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는 문제로 소론의 미움을 사서, 1722(경종 2) 노론계의 역모사건인 신임옥사(辛壬獄事)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이다. 1725(영조 1) 사충서원(四忠書院)을 건립하여 이들을 제향하고 사액(賜額)하였다.

[D-014]평피(平陂)의 회합 : 영조의 탕평책은 서경 홍범(洪範) 치우치지 말고 왕의 의로움을 따르라.無偏無陂 遵王之義”,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탕평하리라.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라는 구절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므로 평피의 회합은 노론과 소론이 뒤섞인 탕평파(蕩平派)를 풍자하여 한 말인 듯하다.

[D-015]천품이 곧고 깐깐하여 : 원문의 天姿 天資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는데, 뜻은 비슷하다.

[D-016]그자의 …… 여겼네 : 맹자 공손추 상에서 백이(伯夷) 시골 사람과 함께 서 있을 때 그가 쓴 갓이 바르지 못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기를 마치 제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겼다.與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浼焉고 하였다.

[D-017]위의(威儀) 있고 : ‘獻獻 의의라 읽으며,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을 나타내는 儀儀와 같은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삼종형(三從兄) 수록대부(綏祿大夫) 금성위(錦城尉)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贈諡) 충희공(忠僖公) 묘지명(墓誌銘)

 

 

지금 임금 14년 경술년(1790) 3 25일 을사일에 금성위 박공(朴公)이 제생동(濟生洞) 사제(賜第 임금이 하사한 집)의 정침(正寢 몸채의 방)에서 편안히 운명하였다. 부음을 아뢰자 임금께서는 조회(朝會)를 철폐하고 급히 전교하여 애도하는 뜻을 표했는데, 고굉폐부(股肱肺腑)의 신하로서 한 글자를 얻으면 사후나 생시의 영광으로 삼는 것이, 공에게는 삼백여 글자나 되었다. 널은 장생전(長生殿) 비기(秘器 상례에 쓰는 기구)의 여벌을 내려 주고 장례는 1등급의 예()를 적용하게 하였으며, 무릇 봉( 수레와 말), 수의(襚衣), 제수로 쓰일 물품은 모두 내부(內府 왕실의 창고)에서 지급하게 하였다. 담당 관원들이 각기 맡은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바야흐로 분주하게 문하에서 기다리는데, 가족들이 고인의 뜻을 아뢰어 예장(禮葬)을 면해 주기를 빌므로 임금께서 마지못해 응낙하여 그 뜻을 이뤄 주게 하였다. 그리고 바로 호조에 명하여, 그 대신 돈 30만 전(), 백미 100섬과 면포와 갈포 1400여 필을 실어 보내게 하였다. 염이 끝나자 승지를 보내어 조문하게 하고, 공경 대신(公卿大臣)들에게 명하여 모두 조문하게 하였다. 성복(成服)날이 되자 승지를 보내 어제 치제문(御製致祭文)을 읽어 제사 지내게 하였는데, 몸을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했던 신하로서 한 글자라도 얻으면 공훈을 기록한 명정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공에게는 또 삼백여 글자나 되었다.

이에 도신(道臣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도위(都尉)의 장사 날짜가 정해졌으니, 내 장차 비문을 친히 지어 그 신도(神道 무덤으로 가는 큰 길)를 빛나게 할 생각이다. 너는 큰 돌을 채취해 놓고 기다려라.”

하고, 이내 사신(詞臣 홍문관 제학)에게 명하기를,

 

어진 도위에게 시호(諡號)를 내려 주는 것은 정해진 은전(恩典)이다. 너는 그의 덕을 기록하여 봉상시(奉常寺)에 고하라.”

했다. 이에 봉상시 제조가 공의 평생의 대략을 특서한 것을 채집하니, ‘밀찬익호(密贊翊護)’ 건의천원(建議遷園)’이라는 여덟 글자였다. 의정부와 홍문관의 신하들이 모두 건의하기를,

 

공은 일찍이 바깥 조정에서 능히 못할 바에 절개를 바치고, 온 나라가 감히 못할 바에 충성을 다하여, 사직에 공이 있으니 시호를 충희(忠僖)라 짓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은 그 건의를 윤허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시법(諡法)에 나라를 생각하느라 집을 잊은 것을 ()’이라 하고, 조심하여 공순하고 삼가는 것을 ()’라 했다. 아아, 공은 그 시호에 합당하다 하겠다.

공의 휘()는 명원(明源)이요 자는 회보(晦甫)이다. 우리 박씨는 계통이 신라에서 나왔는데, 시조가 나주(羅州)의 반남(潘南)에서 성()을 얻었다. 고려 말에 휘 상충(尙衷)이 있어 우리 왕조에서 문정(文正)의 시호를 추증받았다. 이분이 평도공(平度公) 휘 은()을 낳으니, 우리 태종을 보좌하는 정승이 되었다. 그로부터 5대를 전해 내려와, 문강공(文康公) 휘 소()는 세상 사람들이 야천(冶川) 선생이라 일컬었으며, 선조(宣祖) 때의 명신인 충익공(忠翼公) 휘 동량(東亮)은 공훈으로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으며, 아들 문정공(文貞公) 휘 미()는 선조의 따님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우리 왕조의 문장 대가로 반드시 금양위(錦陽尉)를 손꼽으니, 바로 공의 5세조이다.

고조는 첨정공(僉正公) 휘 세교(世橋)인데 이조 판서 금흥군(錦興君)에 추증되었으며, 증조 군수공(郡守公)은 휘 태두(泰斗)인데 좌찬성 금은군(錦恩君)에 추증되었고, 조부 참봉공(參奉公)은 휘 필하(弼夏)인데 좌찬성 금녕군(錦寧君)에 추증되었으니, 충익공의 적손(嫡孫)인 때문에 모두 훈봉을 이어받은 것이다. 부친은 예조 참판 휘 사정(師正)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모친은 정경부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학생 택상(宅相)의 따님이다.

공은 영조대왕 원년인 을사년(1725) 10 21일에 태어났으며, 14세에 영조의 셋째 따님인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들었다. 처음에는 순의대부(順義大夫)에 제수되고, 품계가 쌓여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이르렀으며,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고 봉상시(奉常寺) · 전의감(典醫監) · 선공감(繕工監) · 사재시(司宰寺) · 장흥고(長興庫) · 제용감(濟用監)의 제조(提調)가 되었다. 누차 금보(金寶)와 옥책(玉冊)의 글씨를 써서 그때마다 상으로 말을 하사받았고, 사명을 받들고 세 번이나 북경에 갔으며, 임금의 특지(特旨)로 도감(都監)의 당상(堂上)에 제수된 것이 세 번인데 효창묘(孝昌墓)를 조성하는 데 가장 큰 공적이 있었다.

공은 풍채가 아름답고, 천성이 단정하고 선량하며 성실하고 정중하였다. 50여 년이나 대궐을 출입하였으나, 보는 것은 발길 미치는 곳을 넘지 않았고 들은 것은 가족들에게도 말을 옮기지 않았으며, 조정의 논의는 입 밖에 낸 적이 없고 조정 벼슬아치들의 집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임금의 총애와 예우가 여러 귀척(貴戚 임금의 인척)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지만, 밤이나 낮이나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늙을 때까지 해이해지지 않았다. 임금이 특별히 예외로 전장(田庄)과 노비를 하사하면, 문득 사양하며,

 

신이 임금의 은혜를 입어 일찍이 부마로 선택되었으니, 가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였다. 완상(玩賞)할 만한 옛 기물(器物)을 특별히 하사해도, 감히 스스로 지니지 않았다. 처음에 저택으로 이현궁(梨峴宮)을 하사했으나, 상소하여 기어이 사양하였다. 화평옹주가 돌아가매 영조가 누차 거둥하여 상사를 살피니, 공은 상소를 올려 기어이 임금의 행차를 중지토록 하였으며, 뜻대로 되지 않자 계속 어가(御駕)를 부여잡고 완강히 간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한적하여 사람이 없는 것 같았으며, 의원을 맞이하는 일이 아니면 새 얼굴을 대할 길이 없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 때문에 말하기를,

 

누가 그의 마음을 사랴? 차라리 금을 캐는 게 낫지. 그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촌철(寸鐵)도 안 통한다.”

했다. 그러므로 조카 종덕(宗德) 10여 년 동안 이조와 병조의 판서직을 맡았으나, 세상에 감히 공에게 인사 청탁을 하는 자가 없었다. 몸가짐을 항상 새 옷을 입은 듯이 하면서,

 

물건을 남에게 줄 때도 오히려 먼지를 터는 법인데, 하물며 몸을 임금에게 바침에 있어서랴.”

했다.

일찍이 지원(趾源)에게 말하기를,

 

부마가 무슨 벼슬인고?”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품계는 높아도 뭇사람이 우러러보는 재상의 직책이 아니요, 녹봉은 후해도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받는다는 책망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일찍이 수레를 하사하며 타라고 명하시므로, 남성(南城 남한산성)에서 호정(湖亭)까지만 타고 말았네. 십수 년 뒤에 임금이 다시 무엇을 타고 다니는지를 물으셨으므로 황공하여 미처 대답을 못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대신 이 사람은 수레가 없습니다.’라고 아뢰자, 대번에 명을 내려 만들어 주게 하셨지. 그래서 또 동대문으로부터 나와 교외의 별장까지만 타고 그만두었네.”

하므로, 내가 묻기를,

 

왜 타지 않았습니까?”

하였더니,

 

이는 명망과 덕행이 있는 이가 사용하는 것인데 어찌 재상과 나란히 수레를 몰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뒷날에 또 나에게 이르기를,

 

의빈(儀賓 부마)이란 어떤 사람인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대궐에 들어가면 임금의 일상생활을 시중들고 대궐 밖으로 나가면 임금의 행차를 뒤따라가니 귀근인(貴近人)이 아니겠습니까?”

했더니, 공은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 이슬 · 서리 · 눈 내리는 것이 하늘의 조화 아닌 것이 없는데, 만약 다시 하늘을 쳐다보고 구름을 바라보며, 망녕되이 비가 올지 볕이 날지를 점친다면 이는 모두 신하로서 죽을죄인데, 하물며 귀근인이랴?”

하였다. 공은 마음속으로, 자취가 왕실과 연결된 자는 마땅히 그 행동을 조심하여 세상 사람들이 의중을 엿보게 하지 말아야 하며, 명성을 지니기보다는 차라리 국민들이 아무개 도위가 있는 줄을 모르게 하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비록 걷거나 달려가고 한 번 찌푸리거나 한 번 웃는 일일지라도, 반드시 아주 사소한 것도 신중히 하고, 다만 국시에 따를 뿐이요 자기 의견은 개입시킨 바 없었다. 대중들과 함께 듣고 볼 뿐 대중들보다 먼저 하고자 하지 아니하며, 사소한 것까지 신중히 하고 자세히 검토하는 것은 감히 남들에게 뒤지지 않았으니, 그 공경하고 겸손하며 신중하고 과묵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일찍부터 남다른 지우(知遇)를 장헌세자(莊獻世子)에게서 입어, 세자에게 닥친 곤란과 우환을 항상 말없이 살피면서, 공과 귀주(貴主 화평옹주)가 안팎으로 협찬하며 정성을 다해 보호해 나갔으나, 궁중의 일이라서 이를 아는 이가 없었다. 귀주가 일찍 세상을 떠나매 공의 진실되고 외로운 충성은 임금의 마음속에만 기억되어 있었지만, 차마 자세히 드러내 말씀하시지 못하고 누차 귀주의 제문에다 뜻을 나타내셨으니, 이에 비로소 공이 세자를 보좌한 큰 공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공에게 넌지시 묻는 자가 있자, 공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임금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목이 멜 따름이다.”

하였다.

급기야 공이 장헌세자의 예전 장지의 네 가지 해로운 점을 자세히 아뢰자, 위로는 임금의 마음에 맞고 아래로는 여론이 흡족해하였다. 이에 좋은 묏자리를 얻어 나라의 터전을 영원히 굳혔으니, 돌아가신 세자에게 못다 한 공의 충정으로는 이 공사로써 거의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게 되었다고 하겠다. 바야흐로 이때에 임금은 공을 은인으로 여기셨고, 나라 안에서는 시귀(蓍龜)처럼 믿고 있었다. 공은 병이 심해져 점점 피곤해져서 거의 식사를 끊다시피 한 지가 여러 해였다. 그러나 여전히 길지(吉地)를 살피고 공사를 감독할 수 있었다. 매번 한번 왕명을 들으면 반드시 신속히 왕래하면서 자신이 쓰러질 것도 걱정하지 않았으니, 왕실에 관한 일을 근심하고 염려하여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만둔 것은 역시 그 천성이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원(趾源)이 일찍이 공을 따라 국경을 나갔다가 요하(遼河)에서 비로 길이 막혔는데, 하루는 공이 스스로 나가 물을 살펴보고는 드디어 급히 채찍질하여 곧장 건너므로, 사람들이 허둥지둥 놀라서 뒤를 따랐다. 강을 건너고 난 뒤 공이 사람들을 불러 위로하기를,

 

오늘 일은 진실로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조의 위덕(威德)에 힘입은 자는 물에 빠져 죽을 리가 없고, 설사 빠져 죽는다 해도 이것은 자기의 직분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아무도 감히 다시는 물이 넘실대어 건너갈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하였다. 또 길을 다급히 재촉하여 열하(熱河)로 갈 적에도 일을 요량하고 임기응변하는 것이 매번 시의적절하였으며, 자신을 다스리고 대중을 통제함에 있어서는 엄격함이 마치 행진(行陣)하는 것과도 같았다. 비단 사신으로서 왕명을 받든 이 한 가지 일만이 공에게서 볼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 밝은 식견과 굳센 지조는 조정에 나아가 엄숙한 태도로 아랫사람들을 통솔할 만한데도, 이미 나라의 제도에 제한되어 어찌할 수 없는 일인즉, 실로 한 세상이 모두 다 애석히 여기는 바이며, 임금께서도 조정에 임어(臨御)하실 적에 누차 탄식으로 그런 뜻을 드러내셨다.

임금께서 일찍이 연( 가마)을 타고 공의 집에 납시어, 공의 침소가 벼슬이 없는 선비와 같이 쓸쓸한 것을 보고 가상히 여겨 어서(御書) 만보정(晩葆亭)’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또 시를 하사하여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현륭원(顯隆園)이 완성됨에 미쳐서는 승지를 보내어 전장과 노비를 하사하고, 덧붙여 백금과 구마(廐馬)를 내렸으며, 무릇 금성위의 상소에 대해 비답(批答)을 내릴 때는 반드시 사관(史官)이 어전에서 한 번 읽었으니, 모두 특별한 예우였다.

병이 위급하자 태의(太醫 어의)가 약을 싸가지고 가 밤낮으로 진찰하고 간호하였으며, 액정서(掖庭署)의 사자들은 병세를 묻기 위해 날마다 길에 줄을 이었다. 임금께서 거둥하시는 길에 들러 보고자 하여 먼저 사관을 시켜 가 보게 했는데, 공은 이미 말을 못하는 지경이었고 띠를 걸쳐 놓을 수가 없는 상태였으므로 임금께서 슬퍼하며 돌아갔다. 그 후 수일 만에 공이 마침내 별세했으니, 향년 66세였다. 5 16일에 귀주의 묘에 합장하였다. 귀주는 영조 3년 정미년(1727) 4 27일에 태어나서 무진년(1748) 6 24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22세였다. 선왕(先王 영조)의 어찬(御撰) 효우록(孝友錄)이 있다. 공에게는 작은 초상화 두 벌이 있었는데, 선왕께서 모두 충효소심(忠孝小心)’이라 찬()을 하셨다.

공은 형의 아들 상철(相喆)을 데려다 양자로 삼았는데, 상철은 문과에 합격하여 부윤을 지냈다. 안동 김간행(金簡行)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부인은 일찍 죽고, 첩에게 4 3녀가 있으니, 아들은 종선(宗善) · 종현(宗顯) · 종건(宗蹇) · 종련(宗璉)이요, 딸은 장손(張僎), 서근수(徐瑾修), 이건영(李建永)에게 시집갔다. 상철은 종덕의 둘째 아들 홍수(紭壽)를 양자로 삼았는데, 홍수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참봉(參奉)을 지냈으나 일찍 죽었다. 그 아들 제일(齊一)이 지금 승중(承重)하였는데, 특명으로 상()이 끝나기를 기다려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에 보임토록 하였다. 딸은 이희선(李羲先), 홍정규(洪正圭)에게 시집갔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초상 때에 임금께서 공이 이 일에 두루 밝은 것을 살피시고, 빈궁(殯宮) 마련부터 사당 건립에 이르기까지 일을 많이 공에게 위임했다. 공은 이미 피로가 쌓여 병든 상태였는데도 오히려 자신의 몸이 추운지 더운지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고 조용히 지내며 깊이 생각에 잠겨 실의에 빠진 모습이 바보와도 같았고, 때로는 말을 잊은 채 저절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로부터 다시는 풍악 소리를 듣지 않고, 후방(後房 소실)의 즐거움도 끊고 정사(亭榭 정자)의 놀이도 끊었으며, 비록 술잔만이 오가는 작은 잔치라도 집에서 베풀지 않았으니, 대개 남모르는 애통함이 마음에 있는 때문이었다.

임종할 때에 조카 종악(宗岳)의 손을 잡고서 말하기를,

 

내가 세 조정의 은혜를 받았는데도 티끌만큼도 보답한 것이 없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하고, 유서를 초하려다 하지 못해 입으로 불렀는데, 한마디도 사사로운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공 같은 이는 나라의 충신이라 이를 만하니, 충희라는 시호를 얻음이 역시 합당하지 않겠는가!

()은 다음과 같다.

 

위의 있는 금성위여 / 獻獻錦城

화평옹주 배필 되어 / 作配和平

왕실에 공이 있었나니 / 功在王室

두 분 함께 아름답고 곧았도다 / 匹徽共貞

()을 옛사람과 견주어도 / 公於古人

뉘가 더 위대하리 / 將誰與京

 이하 원문 빠짐 

 

 

어떤 이본에는 공경스러운 금성위여, 나랏님의 사위 되어, 왕실에 공이 있었나니, 두 분 함께 아름답고 곧았도다. 천생배필 합장되었으니, 翼翼錦城 天家作甥 功在王室 匹徽共貞 天作隨山〕- 이하 원문 빠짐  로 되어 있다.

 

[C-001]삼종형(三從兄) …… 묘지명(墓誌銘) : 1790(정조 14) 금성위 박명원(朴明源)이 죽자 정조는 손수 그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짓겠노라고 하면서, 아울러 그의 묘지명을 연암이 짓도록 하교하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2

[D-001]고굉폐부(股肱肺腑)의 신하 : 임금이 자신의 팔다리처럼 믿고 중히 여기는 신하를 고굉지신(股肱之臣)이라 한다. 폐부의 신하란 간과 폐가 서로 붙어 있듯이 임금과 가장 친근한 관계에 있는 신하를 말한다.

[D-002]삼백여 글자나 되었다 : 정조실록 14 3 25일 조에 삼백여 자에 달하는 정조의 하교가 수록되어 있다.

[D-003]장례는 …… 하였으며 : 예장(禮葬) 1등급의 널감柩材을 사용하게 했다는 뜻이다.

[D-004]예장(禮葬) : 대신이나 공신이 죽었을 때 나라에서 예식을 갖추어 치러주는 장례를 말한다.

[D-005]30만 전() : 엽전 1냥이 10()으로, 엽전 3만 냥이다.

[D-006]성복(成服)날이 …… 되었다 : 홍재전서(弘齋全書) 21에 정조가 지은 금성도위 박명원의 성복일 치제문錦城都尉朴明源成服日致祭文이 수록되어 있다.

[D-007]밀찬익호(密贊翊護) …… 글자였다 : ‘밀찬익호는 정조의 생부인 장헌세자(莊獻世子 :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은밀히 돕고 보호에 힘쓴 공로가 있다는 뜻이고, ‘건의천원(建議遷園)’은 장헌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길 것을 건의한 공로가 있다는 뜻이다.

[D-008]순의대부(順義大夫) : 왕의 사위들에게 주는 종 2 품의 품계이다.

[D-009]수록대부(綏祿大夫) : 왕의 사위들에게 주는 정 1 품의 품계이다.

[D-010]금보(金寶)와 옥책(玉冊) : 금보는 죽은 임금이나 왕후의 존호(尊號)를 새긴 도장이고, 옥책은 왕이나 왕비에게 존호를 올릴 때 그 덕을 기리는 글을 새긴 옥 조각을 엮어 매어 책처럼 만든 것을 말한다.

[D-011]효창묘(孝昌墓) : 정조의 요절한 첫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소이다.

[D-012]천성 : 원문은 姿性인데, ‘姿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뜻은 비슷하다.

[D-013]이현궁(梨峴宮) : 한양 동부 연화방(蓮華坊) 즉 지금의 종로구 인의동에 있던 광해군의 잠저(潛邸)인데, 이 부근은 속칭 배고개梨峴라고 불려 이현궁(梨峴宮)이라고 하였다. 영조도 세제(世弟) 시절에 한때 이 궁에 거주했다.

[D-014]촌철(寸鐵) : 짧고 날카로운 무기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찌르는 짧은 말을 뜻한다.

[D-015]10여 년 : 대본은 數十年인데 十數年의 잘못이다. 연암집 1 ‘족형 도위공의 환갑에 축수하는 서문族兄都尉公周甲壽序 공의 조카가 10여 년 동안 번갈아 이조와 병조의 판서로 있었으되라고 하여 十餘年이라 되어 있다.

[D-016]호정(湖亭) : 한강 삼포(三浦)에 있던 박명원의 별장 세심정(洗心亭)을 가리키는 듯하다. 過庭錄 卷1 삼포는 곧 삼개로 마포(麻浦)를 가리킨다. 漢京識略 卷2 山川

[D-017]귀근인(貴近人) : 임금이 중히 여기고 친근하게 여기는 사람을 말한다.

[D-018]행동 : 원문은 聲臭인데,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 하늘이 하시는 일은 소리도 나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上天之載 無聲無臭 하였다. 겉으로 드러난 자취가 없어 하늘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D-019]세자에게 …… 귀주(貴主) : 원문은 常黙審艱虞 公曁貴主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世子之在艱虞 與貴主로 되어 있다.

[D-020]공이 …… 아뢰자 : 사도세자의 처음 장지인 영우원(永祐園)이 본래 협소하여 정조는 즉위 초부터 이장하고자 하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박명원이 상소하여 이장해야 할 네 가지 문제점을 거론하므로, 비로소 이장을 결단하고 원래 양주군(楊州郡)의 배봉산(拜峯山)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水原)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하게 되었다. 正祖實錄 13 7 11, 15

[D-021]예전 장지 : 원문은 舊園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永祐園으로 되어 있다.

[D-022]나라 …… 피곤해져서 : 이 부분이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委以其事 方是時 公以疾病으로 되어 있다. 시귀(蓍龜)는 시초(蓍草)를 이용한 주역(周易) ()과 거북 껍질을 이용한 점()으로, 이 점괘에 따라 대사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자문(諮問)하는 덕망이 높은 인물을 시귀라 하기도 한다.

[D-023]거의 …… 해였다 : 원문은 幾絶粒食將數歲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4]신속히 왕래하면서 : 원문은 迅往遄反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遄往迅返으로 되어 있다.

[D-025]지원(趾源) …… 못하였다 :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7 1일부터 6일까지의 기사에 통원보(通遠堡)에서 폭우로 강물이 불어 며칠 지체되었던 사실이 언급되어 있고,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8 5일자 기사에 또 정사 박명원이 결단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넌 사실이 회고되어 있다. 연암집 4에 수록된 통원보에서 비에 막히다滯雨通遠堡는 그때의 사건을 소재로 한 시이다.

[D-026]비단 …… 아니었다 : 원문은 不特啣命一事有足觀公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7]조정에 …… 만한데도 : 원문은 可以正色廊廟인데, 서경 필명(畢命)에 주 나라 강왕(康王)이 필공(畢公)에 대해, “엄숙한 태도로 아랫사람들을 통솔한다.正色率下고 칭찬하였다.

[D-028]이미 …… 제한되어 : 원문은 旣局邦制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旣局於邦制로 되어 있다.

[D-029]벼슬이 없는 선비 : 원문은 素士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寒士로 되어 있다.

[D-030]구마(廐馬) : 임금이 거둥할 때 쓰는 가마와 말을 맡아보는 내사복시(內司僕寺)에서 기르는 말을 가리킨다.

[D-031]비답(批答) : 임금이 상소문의 말미에 적는 가부(可否)의 답변을 말한다.

[D-032]액정서(掖庭署) :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왕이 쓰는 필기구, 대궐 안의 열쇠, 설비 등을 관리하는 관청이다.

[D-033]띠를 …… 상태 : 조복(朝服) 위에 띠를 걸쳐 놓지도 못한다는 말로,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는 뜻이다. 논어 향당(鄕黨) 병이 들었을 때에 임금이 병문안을 오면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누워서 조복을 몸에 걸치고 그 위에 띠를 걸쳐 놓았다.”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 “병들어 누워 있어서 옷을 입고 띠를 맬 수가 없으며, 또 평상복 차림으로 임금을 뵐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원문은 莫可以拖紳矣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이 6자 대신에 로만 되어 있다.

[D-034]() : 한문 문체의 하나로서 인물을 칭송하는 글을 말한다. 서화의 옆에 적는 찬을 화찬(畫贊)이라 한다.

[D-035]딸은 …… 시집갔다 : 원문은 女張僎徐瑾修李建永인데,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女長適張僎 次適徐瑾修 次適李建永으로 되어 있다.

[D-036]승중(承重) : 장손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D-037]문효세자(文孝世子) : 정조의 첫아들로, 다섯 살 때인 정조 10(1786)에 병사하였다. 당시 연암이 박명원을 대신하여 지은 문효세자 진향문(進香文)’ 연암집 9에 수록되어 있다.

[D-038]나라의 충신 : 원문은 國之藎臣인데,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는 王之藎臣으로 되어 있다.

[D-039]천생배필 합장되었으니 : 천생배필을 천작지합(天作之合)’이라 한다. 박명원은 화평옹주의 묘에 합장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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