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작자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작가가 멸문의 화를 당하는극형으로 인하여 작품이판매금지되었다는 사실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법적으로는 조선 사회를 비판한 <금수회의록>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지만, 실상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최초의 국문소설로 발표된, 1511년 왕명으로 불태워진 채수의 <설공찬전>도 판금소설에 해당한다. <홍길동전>은 독자의 수요에 호응하여 목판이 만들어지기까지, <열하일기>는 연암 사후 100년에 이르기까지필사에 의해 전승되었다고 보면 된다.

홍길동전 [洪吉童傳]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209982


이 작품은 이식(李植)의 〈택당잡저 澤堂雜著〉를 바탕으로 해서 허균이 지은 것으로 믿어왔으나 근래에 와서 한문본의 발견으로 작자와 국문원작설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같은 문제제기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허균의 국문원작설을 완전히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허균의 작품으로 볼 경우에도 현재 전하는 작품이 그의 원작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홍길동전〉에는 현재 30종 가까운 국문본과 후대의 번역으로 보이는 한문본이 하나 있다. 이들 이본들의 내용은 부분적으로는 약간씩의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다.

〈홍길동전〉은 한국 최초의 국문소설이며, 고소설 가운데 작자를 알 수 있는 극소수의 작품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소설의 발생과 작자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이 작품은 당대의 사회현실을 절실하게 반영하면서 탐관오리를 힘으로 응징하고, 억압받는 서민들의 한을 대변함으로써 서민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목판본원문 표기 읽기[경판본, 완판본]

http://e3000.hallym.ac.kr/~korean/zboard/view.php?id=honggil&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


현대역읽기[경판본, 완판본, 정우락본(원문표기)]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so-seol/hong-kil-dong-outline.htm

[홍길동전 줄거리]

http://cont2.edunet4u.net/~danti2/k6/noveljakpum/hongildong.html


주인공 홍길동은 조선조 세종 때 서울에 사는 홍판서의 시비 춘섬의 소생 서자이다. 홍판서가 용꿈을 꾸어 길몽이기에 본부인을 가까이 하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춘섬과 혼인해서 낳은 아들이 길동이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고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기상을 보였으나, 천생인 탓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을 품는다.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이 될까 두려워서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려고 한다. 길동은 위기에서 벗어나자 집을 나서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러다가 도적의 소굴에 들어가 힘을 겨루어 두목이 된다. 먼저 기이한 계책으로 해인사의 보물을 탈취하였으며, 그 뒤로 길동은 활빈당이라 자처하고 기계(奇計)와 도술로써 팔도지방 수령들의 불의의 재물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다치지 않는다.


길동은 함경도 감영의 불의의 재물을 탈취해오면서 전곡을 도적질한 자가 자신임을 방으로 붙여둔다. 함경감사가 도적을 잡으려다가 잡지 못하자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려 좌우포청으로 하여금 홍길동이라는 대적을 잡으라고 한다. 팔도가 다같이 장계를 올리는데 도적의 이름이 홍길동이요 도적당한 날짜가 한날 한시였다. 우포장 이흡이 길동을 잡으러 나섰다가 도리어 우롱만 당하고 만다.


국왕이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 명령을 전국에 내렸던 바 전국에서 잡혀온 길동이 300여명이나 된다. 그러나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둔갑장신(遁甲藏身)하는 초인간적인 길동의 도술을 당해날 수 없었다. 길동은 오히려 병조판서의 교지(敎旨)를 내리면 잡히겠다는 방을 써서 4대문에 붙여 관가를 희롱한다.


하루는 길동이 공중에서 내려와 스스로 잡히기를 자청 결박당했다가 철삭을 끊고 사라져 버린다. 조정에서는 홍판서를 시켜 회유하고 길동의 형 인형도 가세하여 길동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병조판서를 제수하여 회유하기로 한다.


길동은 사모관대하고 초헌을 타고 대궐 안에 들어와, 평생의 한을 풀어 준 천은(天恩)에 감사하고 공중으로 사라진다. 비로소 왕은 그 기이한 재주에 감복하여 길동 잡기를 단념한다.


그 후 길동은 왕에게 하직하고 부하를 데리고 고국을 떠나 남경으로 가다가 산수가 화려한 율도국을 발견한다. 요괴를 퇴치하여 불모로 잡혀온 미녀를 건지고 율도국왕이 된다.


마침 아버지가 죽으매 부음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잘 다스린다



[주]장생은 전우치, 홍길동처럼 도술을 행하는, 실존인물에다 민간에서 이적을 추가하여 만들어 낸이인(異人)이다. 조선 후기엔 이런 인물전기가 많이 만들어졌다. 그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장생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기축년 간에 서울을 따라붙어 왕래하였는데 걸식으로 업을 삼았다. 그 이름을 물으면 곧 말하기를 "나 또한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거주를 물으니 곧 말하기를 "아비는 밀양좌수로 내가 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비첩의 간계에 넘어가 나를 외거노비의 집으로 쫓아냈다.

15살이 되었을 때 노비는 나를 위해 양민 여자를 취하여 주었다. 수년이 지나자 부인이 죽고 인하여 호남 서쪽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다 지금 서울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 용모가 심히 준수하고 눈매가 그림 같았다. 우스개 소리를 잘하고 특히 노래를 잘하였다. 소리를 내면 처절하여 사람을 감동시켰다. 항상 자색 겹옷을 입고 춥거나 더울 때에도 갈아입지 않았다. 창녀의 집, 기생방을 드나들며 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술이 있으면 언제나 스스로 매우 취할 때까지 노래를 부르는데 그 기뻐함이 지극하였다.

혹 술이 한창일 때 눈먼 점장이, 술취한 무당, 게으른 선비, 소박맞은 여자, 걸인, 늙은 젖어미 등의 시늉 등을 잘 했으며, 또 얼굴로 십팔나한을 흉내내었는데 심히 비슷하였다. 또 찌푸려 입으로 호각, 피리, 쟁, 비파, 기러기, 개 닭 울음소리를 잘 흉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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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전(蔣生傳)-허균(許筠)


蔣生不知何許人(장생불지하허인)

: 장생(蔣生)이란 사람은 어떠한 내력을 지닌 사람인 줄을 알 수가 없었다.

己丑年間(기축년간) : 기축년(1589) 무렵에

往來都下(왕래도하) : 서울에 왕래하며

以乞食爲事(이걸식위사) : 걸식하면서 살아갔다.

問其名則吾亦不知(문기명칙오역불지)

: 그의 이름을 물으면 자기 역시 알지 못한다 하였고,

問其祖父居住則曰(문기조부거주칙왈)

: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거주했던 곳을 물으면, 이르기를

父爲密陽座首(부위밀양좌수) : "아버지는 밀양(密陽)의 좌수였는데

生我三歲而母沒(생아삼세이모몰)

: 내가 태어난 후 세 살이 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父惑婢妾之譖(부혹비첩지참) : 아버지께서 비첩(婢妾)의 속임수에 빠져

黜我莊奴家(출아장노가) : 나를 농장(農莊) 종의 집으로 쫓아냈소.

十五奴爲娶民女(십오노위취민녀)

: 15세에 종이 상민(常民)의 딸에게 장가들게 해주어

數歲婦死(수세부사) : 몇 해를 살다가 아내가 죽자

因流至湖南西數十州(인류지호남서수십주)

: 떠돌아 다니며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의 수십 고을에 이르렀고

今抵洛矣(금저락의) : 이제 서울까지 왔소."하였다.


其貌甚都秀(기모심도수) : 그의 용모는 매우 우아하고 수려했으며

眉目如畫(미목여화) : 미목(眉目)도 그린 듯이 고왔다.

善談笑捷給(선담소첩급) : 담소(談笑)를 잘하여 막힘이 없었고

尤工謳(우공구) : 더욱 노래를 잘 불렀으니

發聲凄絶動人(발성처절동인):노래 소리가 처절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곤 했었다.

常被紫錦裌衣(상피자금겹의):늘 자주색 비단으로 된 겹옷[裌衣]을 입고 다녔는데

寒暑不易(한서불역) : 추울 때나 더울 때에도 갈아 입는 적이 없었다.


凡倡店姬廊(범창점희랑) : 창녀(倡女)나 기생들 집에도

靡不歷入慣交(미불력입관교) : 다니지 않는 곳이 없어 잘 알고 지냈으며,

遇酒輒自引滿(우주첩자인만): 술만 있으면 곧바로 자기가 떠다가 잔뜩 마시고는

發唱極其懽而去(발창극기환이거) : 노래를 불러 아주 즐겁게 해주고는 떠나가 버렸다.

或於酒半(혹어주반) : 어느 때는 술이 한창 취하면

效盲卜醉巫懶儒棄婦乞(효맹복취무라유기부걸자로잉소위) 맹인ㆍ점쟁이ㆍ술취한

무당ㆍ게으른 선비ㆍ소박맞은 여인ㆍ걸인ㆍ노파들이 하는 짓을 흉내냈으니

種種逼眞(종종핍진) : 하는 짓마다 아주 똑같이 해댔었다.

又以面孔學十八羅漢(우이면공학십팔라한)

: 또 가면을 쓰고 열심히 십팔나한(十八羅漢)을 흉내 내면

無不酷似(무불혹사) : 꼭 같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又蹙口作笳簫箏琶鴻鵠(우축구작가소쟁파홍곡추䳱아학등음) : 또 입을 찡그려서 피리ㆍ거문고ㆍ비파ㆍ기러기ㆍ고니ㆍ무수리ㆍ집오리ㆍ갈매기ㆍ학(鶴) 등의 소리를 내는데,

難辨眞贗(난변진안) : 진짜와 가짜임을 구별하기 어렵게 하였다.

夜作鷄鳴狗吠(야작계명구폐) : 밤에 닭우는 소리ㆍ개 짖는 소리를 내면

則隣犬鷄皆鳴吠焉(칙린견계개명폐언) : 이웃 개나 닭이 모두 울고 짓어대는 지경이었다.


朝則出乞於野市(조칙출걸어야시)

: 아침이면 밖으로 나와 거리나 저자에서 구걸을 했으니,

一日所獲幾三四斗(일일소획기삼사두)

: 하룻동안에 얻는 것이 거의 서너 말[斗]이었다.

炊食數升(취식수승) : 몇 되[升]쯤 끓여 먹고 나면

則散他丐者(칙산타개자) : 다른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故出則群乞兒尾之(고출칙군걸아미지)

: 그래서 밖으로만 나오면 뭇 거지 아이들이 뒤를 따랐다.

明日又如是(명일우여시) : 다음날에도 또 그와 같이 해버리니

人莫測其所爲(인막측기소위) : 사람들은 그가 하는 짓을 헤아릴 수 없었다.


嘗寓樂工李漢家(상우악공리한가)

: 전에 악공(樂工) 이한(李漢)이라는 사람 집에서 더부살이한 적이 있었다.

有一叉鬟學胡琴(유일차환학호금) : 머리를 쌍갈래로 땋은 계집이 호금을 배우느라

朝夕與之熟(조석여지숙) : 조석으로 만나므로 서로 친숙하였다.

一日失綴珠紫花鳳尾(일일실철주자화봉미)

: 하루는 구슬로 이어진 자주빛 봉미를 잃어버리고

莫知所在(막지소재) : 있는 곳을 모른다고 하였다

蓋朝自街上來(개조자가상래) : 연유를 들어 보니, 아침에 길 위에서 오다가

有俊年少調笑偎倚(유준년소조소외의)

: 준수한 소년이 있기에 웃으며 농을 붙이고 몸이 닿고 스치더니

因而不見(인이불견) : 이내 봉미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啼哭不止(제곡불지) : 그러면서 애처롭게 울기를 그치지 않더란다.

生曰(생왈) : 그래서 장생이 이르기를,

唉小兒何敢乃(애소아하감내이)

: "우습구나, 어린 것들이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

願娘無泣(원낭무읍) : 아가씨야 울지 마라.

夕當袖耒(석당수뢰) : 저녁이면 반드시 내 소매 속에 넣어 오겠다."하고는,

翩然而去(편연이거) : 훌쩍 나가버렸다.

及夕(급석) : 저녁이 되자

招叉鬟出(초차환출) : 계집아이를 불러내어 따라오게 하고서는,

迤從西街傍景福西墻(이종서가방경복서장)

: 서쪽 거리 곁 경복궁(景福宮) 서쪽 담장을 따라

至神虎門角(지신호문각) : 신호문(神虎門)의 모퉁이에 이르렀다.

以大帶綰鬟之腰(이대대관환지요) : 계집의 허리를 큰 띠로 묶어

纏於左臂(전어좌비) : 왼쪽 어깨에 들쳐매고

奮迅一踊(분신일용) : 풀쩍 뛰어,

飛入數重門(비입수중문) : 몇 겹으로 겹친 문으로 날아서 들어갔다.

時曛黑莫辨逕路(시훈흑막변경로) : 한창 어두울 때여서 길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倏抵慶會樓(숙저경회루) : 급히 경회루(慶會樓) 위로 올라가니

上有二年少(상유이년소) : 두 소년이 있었다.

秉燭相迓(병촉상아) : 촛불을 들고 마중나와

相視大噱(상시대갹) : 서로 보며 껄걸 웃어대었다.

因自梁上鑑嵌中(인자량상감감중) : 그러더니 상량 위의 뚫어진 구멍에서

出金珠羅絹甚多(출금주라견심다) : 금구슬ㆍ비단ㆍ명주가 무척 많이 나왔다.

鬟所失鳳尾亦在焉(환소실봉미역재언) : 계집이 잃어버린 봉미 또한 있었다.

年少自還之(년소자환지) : 소년들이 그걸 돌려주자

生曰(생왈) : 장생(蔣生)이 이르기를,

二弟愼行止(이제신행지) : "두 아우는 행동거지를 삼가서

毋使世人瞰吾蹤也(무사세인감오종야)

: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종적을 보지 못하도록 하게나."하였다.

遂引還飛出北城(수인환비출북성)

:그런 뒤에 끌고 다시 날라서 북쪽 성(城)으로 나와

送還其家(송환기가) : 그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未明詣李家謝之(미명예리가사지)

: 계집은 다음날 밝기 전에 이씨(李氏)의 집으로 가서 감사의 말을 하려 했더니

則醉臥齁齁(칙취와후후) : 술이 취해 누워 있으며 코를 쿨쿨 골고 있었고,

人亦不知夜出也(인역불지야출야) : 사람들 또한 밤에 외출했던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壬辰四月初吉(임진사월초길) : 임진년(1592) 4월 초하룻날

賖酒數㪷大醉(사주수두대취)

: 값을 뒤에 주기로 하고 술 몇 말[斗]을 사와, 아주 취해서는

攔街以舞(란가이무) : 길을 가로 막으며 춤을 추고

唱歌不綴(창가불철) : 노래 부르기를 그치지 않다가는

遲明(지명) : 거의 밤이 되어

殆夜倒於水標橋上(태야도어수표교상) : 수표교(水標橋) 위에서 넘어졌다.

人見之(인견지) : 다음날 해뜬 지 늦어서야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는데,

死已久矣(사이구의) : 죽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었다.

屍爛爲蟲悉生翼飛去(시란위충실생익비거)

: 시체가 부패하여 벌레가 되더니 모두 날개가 돋아 전부 날아가 버려

一夕皆盡(일석개진) : 하룻밤에 다 없어지고

唯衣襪在(유의말재) : 오직 옷과 버선만이 남아 있었다.


武人洪世熹者居于蓮花(무인홍세희자거우련화방)

: 무인(武人) 홍세희(洪世熹)라는 사람은 연화방(蓮花坊)에서 살았으니,

最與之昵(최여지닐) : 장생(蔣生)과 친하게 지냈었다.

四月從李鎰防倭(사월종리일방왜) : 4월에 이일을 따라 왜적을 방어했었다.

行至烏嶺(행지오령) : 조령(鳥嶺)에 이르렀을 때

見生(견생) : 장생을 만났다.

芒屩曳杖(견생망교예장) : 그는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면서

握手甚喜曰(악수심희왈) : 손을 붙잡고는 무척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吾實非死也(오실비사야) : "나는 사실 죽지 않았소.

向海東覓一國土去矣(향해동멱일국토거의)

: 바다 동쪽으로 향하여 한 나라를 찾아 떠나버렸소."하더란다.

因曰(인왈) : 그러면서 이르기를,

君今年不合死(군금년불합사) : "그대는 지금 죽을 나이가 아니오.

有兵禍(유병화) : 병화(兵禍)가 있으면

向高林勿入水(향고림물입수)

: 높은 곳의 숲으로 향해 가고, 물에는 들어가지 마시오.

丁酉年(정유년) : 정유년에는

愼毋南來(신무남래) : 삼가고 남쪽으로는 오지는 마시오.

或有公幹(혹유공간) : 혹 공사(公事)의 주관한 일이 있더라도

勿登山城(물등산성) : 산성(山城)으로 오르진 마시오."하고는

言訖(언흘) : 말을 끝마치자

如飛而行(여비이행) : 날아서 가버리니

須臾失所在(수유실소재) : 잠깐 사이에 있는 곳을 알 수 없더란다.

洪果於琴臺之戰(홍과어금대지전) : 홍세희는 과연 탄금대(彈琴臺)의 전투에서

憶此言(억차언) : 그가 해 준 말을 기억해 내서

奔上山得免(분상산득면) : 그산 위로 달아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丁酉七月(정유칠월) : 정유년(1597) 7월에

以禁軍在直(이금군재직) : 금군(禁軍)으로 숙직을 할 때,

致有旨於梧里相(치유지어오리상)

: 오리(이원익) 정승에게 임금의 교지(敎旨)를 전해 주느라

都忘其戒(도망기계) : 그가 경계해 준 것을 모두 잊었었다.

回至星州(회지성주) : 돌아오면서 성주(星州)에 이르러

爲賊所迫(위적소박) : 적군의 추격을 당하자,

聞黃石城有備(문황석성유비)

: 황석성(黃石城)이 전쟁 준비가 잘 되어 있다 함을 듣고는

疾馳入(질치입) : 급히 달려갔는데,

城陷倂命(성함병명) : 성(城)이 함락되자 함께 죽고 말았다.


余少曰狎游俠耶(여소왈압유협야)

: 내가 젊은 시절에 협사(俠士)들과 친하게 지냈고,

與之諧謔甚親(여지해학심친)

: 그와도 해학(諧謔)을 걸 정도로 아주 친하게 지냈던 탓으로

悉覩其技(실도기기) : 그의 잡기놀이를 모두 구경하였다.

噫其神矣(희기신의) : 슬프다, 그는 신(神)이었거나

卽古所謂劍仙者流耶(즉고소위검선자류야)

: 아니면 옛날에 말하던 검선(劍仙)과 같은 부류가 아니랴


[주]성소부부고 권11, 문부8에는 12편의 '論'이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은 '호민론'과 '유재론(遺才論)'이다. 후자는 지역 차별, 서얼등용 제한 등을 철폐하여 인재등용에 제한을 두지 말자는 주장인데, <홍길동전> 때문인지 전자가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원문과 번역을 함께 읽어본다. 이 글은 맹자의 民本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http://blog.naver.com/osj1952?Redirect=Log&logNo=100004643395

 

호민론(豪民論)-허균(許筠)

호민론(豪民論)-허균(許筠)호민론-허균(許筠)天下之所可畏者(천하지소가외자) : 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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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민론(豪民論)

허균(許筠)

 

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다

天下之所可畏者
(천하지소가외자) : 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唯民而已
(유민이이) : 오직 백성뿐이다.

民之可畏
(민지가외) : 백성을 두려워해야 함은

有甚於水火虎豹
(유심어수화호표) : 홍수나 화재 또는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더 심함이 있다.

在上者方且狎馴而虐使之

(재상자방차압순이학사지)

: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업신여기면서 가혹하게 부려먹다니

抑獨何哉

(억독하재) : 도대체 어째서 다만 그러한가?

 

이 호민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夫可與樂成而拘於所常

(부가여악성이구어소상견자)

: 이미 이루어진 것을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고, 늘 보아 오던 것에 익숙하여

循循然奉法役於上者

(순순연봉법역어상자)

: 그냥 순순하게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은

恒民也
(항민야) : 항민(恒民)이다.

恒民不足畏也

(항민불족외야) : 이러한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厲取之而剝膚椎髓

(려취지이박부추수) : 모질게 착취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부서지면서도

竭其廬入地出
(갈기려입지출) : 집안의 수입과 땅에서 산출되는 것을 다 바쳐서 .

以供无窮之求
(이공무궁지구) : 한없는 요구에 이바지하느라,

愁嘆咄嗟
(수탄돌차) : 혀를 차고 탄식하면서

咎其上者
(구기상자) : 윗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怨民也
(원민야) : 원민(怨民)이다

怨民不必畏也

(원민불필외야) : 이러한 원민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潛蹤屠販之中
(잠종도판지중) : 자신의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陰蓄異心
(음축이심) :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僻倪天地間
(벽예천지간) : 세상을 흘겨보다가

幸時之有故
(행시지유고) : 혹시 그 때에 어떤 큰일이라도 일어나면

欲售其願者
(욕수기원자) : 자기의 소원을 실행해 보려는 사람들은

豪民也
(호민야) : 호민(豪民)이다.

夫豪民者
(부호민자) : 이 호민은

大可畏也

(대가외야) :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豪民伺國之釁
(호민사국지흔) : 호민이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覘事機之可乘
(첨사기지가승) : 일의 형편을 이용할 만한때를 노리다가

奮臂一呼於壟畝之上
(분비일호어롱무지상) :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번 소리를 지르게 되면,

則彼怨民者聞聲而集
(즉피원민자문성이집) : 원민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不謀而同唱
(불모이동창) : 모의하지 않고서도 소리를 지르고,

彼恒民者(피항민자) : 저들 항민도
(피항민자) : 저들 항민도

亦求其所以生
(역구기소이생) : 또한 제 살 방법을 찾느라

不得不鋤耰棘矜往從之

(불득불서우극긍왕종지) : 부득불 호미, 고무레, 창, 창자루를 가지고 쫓아가서

以誅无道也

(이주무도야) : 무도한 놈들을 죽인다.


秦之亡也
(진지망야) : 진나라가 망한 것은

以勝廣
(이승광) : 진승과 오광 때문이었고,

而漢氏之亂
(이한씨지란) :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亦因黃巾
(역인황건) : 또한 황건적 때문이었다.

唐之衰而王仙芝黃巢乘之

(당지쇠이왕선지황소승지): 당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와 황소가 그 틈을 타고 일어나

卒以此亡人國而後已
(졸이차망인국이후이) : 마침내 백성과 나라를 망하게 한 뒤에야 그쳤다.

是皆厲民自養之咎

(시개려민자양지구) : 이러한 일들은 모두 백성들에게 모질게 굴면서 저만 잘 살려고 한 허물이며,

而豪民得以乘其隙也

(이호민득이승기극야) : 호민들이 그러한 틈을 잘 이용한 것이다.


夫天之立司牧
(부천지립사목) : 무룻 하늘이 벼슬아치를 세운 것은

爲養民也
(위양민야) : 백성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였지

非欲使一人恣睢於上
(비욕사일인자휴어상) :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서

以逞溪壑之慾矣
(이령계학지욕의) : 계곡같이 커다란 욕심을 부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彼秦漢以下之禍
(피진한이하지화) : 진나라, 한나라 이후의 화란은

宜矣
(의의) : 당연한 결과였지,

非不幸也

(비불행야) :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 조선 관료들의 부패와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고려 말보다 더 심한 상태다

今我國不然
(금아국불연) : 조선은 중국과는 다르다.

地陿阨而人山
(지협액이인산) : 땅이 비좁고 험하여 사람도 적고,

民且呰寙齷齪
(민차자유악착) : 백성 또한 나약하고 게으르며 잘아서,

无奇節俠氣
(무기절협기) : 뛰어난 절개나 넓고 큰 기상이 없다.

故平居雖无鉅人雋才出爲世

(고평거수무거인준재출위세용)

: 그런 까닭에 평상시에 위대한 인물이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나와서 세상에 쓰여지는 일도 없었지만,

而臨亂亦无有豪民悍卒倡亂首爲國患者

(이림란역무유호민한졸창란수위국환자) : 난리를 당해도 또한 호민이나 사나운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앞장서서 나라의 (무기절협기) : 뛰어난 절개나 넓고 큰 기상이 없다.

其亦幸也
(기역행야) : 그 또한 다행이었다.


雖然
(수연) : 비록 그렇긴 하지만

今之時與王氏
(금지시여왕씨시불동야) : 지금의 시대는 고려 때와 함께해보면,

前朝賦於民有限
(전조부어민유한) : 고려 때에는 백성들에게 조세를 부과함에 한계가 있었고,

而山澤之利
(이산택지리) :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오는 이익도

與民共之
(여민공지) : 백성들과 함께 했었다. .

通商而惠工
(통상이혜공)  : 장사할 사람에게 그 길을 열어 주고,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

又能量入爲出
(우능량입위출) : 또 수입을 잘 헤아려 지출을 하였기

使國有餘儲
(사국유여저) : 나라에는 여분의 저축이 있어

卒有大兵大表
(졸유대병대표) : 갑작스럽게 커다란 병화나 상사(喪事)가 있어도

不加其賦
(불가기부) : 조세를 추가로 징수하지는 않았다.

及其季也
(급기계야) : 그러고도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猶患其三空焉

(유환기삼공언) : 오히려 세가지가 비게 됨을 걱정할 정도였다


我則不然
(아즉불연) : 우리 조정은 그렇지 아니하여

以區區之民
(이구구지민) : 구구한 백성이면서도

其事神奉上之節
(기사신봉상지절) : 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범절을

與中國等
(여중국등) : 중국과 대등하게 하고 있었는데,

而民之出賦五分
(이민지출부오분) : 백성들이 내는 조세가 다섯 푼이라면

則利歸公家者纔一分
(즉리귀공가자재일분) : 조정에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한 푼이고

其餘狼戾於姦私焉

(기여랑려어간사언) : 그 나머지는 간사한 자들에게 어지럽게 흩어져 버린다.


且府無餘儲
(차부무여저) : 또 관청에서는 여분의 저축이 없어

有事則一年或再賦
(유사칙일년혹재부) : 일만 있으면 한 해에도 두 번씩이나 조세를 부과하는데,

而守宰之憑以箕斂

(이수재지빙이기렴) : 지방의 수령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칼질하듯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는 것

亦罔有紀極
(역망유기극) : 또한 끝이 없었다.

故民之愁怨
(고민지수원) : 그런 까닭에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

有甚王氏之季

(유심왕씨지계) : 고려 말보다 더 심한 상태였다.

 

호민을 두려워하고 전철을 고쳐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上之人恬不知畏
(상지인념불지외) : 그런데도 윗사람들이 태평스레 두려워할 줄 모르니

以我國無豪民也
(이아국무호민야) : 우리 나라에는 호민이 없기 때문이다.

不幸而如甄萱弓裔者出
(불행이여견훤) : 불행하게도 견훤이나 궁예 같은 자가 나와서

奮其白挺
(분기백정) : 백성을 빼앗아 일어난다면

則愁怨之民
(칙수원지민) : 근심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安保其不往從而祈梁六合之

(안보기불왕종이기량륙합지변):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증하겠는가?

可跼足須也(가국족수야)

: 기주·양주에서와 같은 천지를 뒤엎는 변란은 발을 구부리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爲民牧者
(위민목자) :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灼知可畏之形
(작지가외지형) : 두려워해야 할 만한 형세를 명확하게 알아서

與更其弦轍
(여경기현철) :전철 (前轍)을 고친다면,

則猶可及已

(즉유가급이) : 여전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주]한 인물의 특징적 성격을 클로즈업시키되, 그의 전생애를 균형 있게 서술하는 작업은 지난한 일이다. 웹사이트에서 이 기준에 가까운 글 한 편을 골라 수록한다.

http://k-special.com/go3/%C7%E3%B1%D5.htm

<시대의 아침을 연 영원한 자유인 허균>

세 번의 장원급제... 그러나 조선왕조의 기피인물 제1호

명문가 집안의 3남 3녀의 막내

*許 曄─ 筬⋅封(荷谷)⋅楚姬(蘭雪軒,1563-1589)⋅筠(蛟山,1569-1618)

*封 이하 삼남매는 江陵 金氏 소생.


허균은 선조 2년인 1569년, 허엽의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허균의 집안은 당대의 명문가로, 아버지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으며 대사간과 경상도 관찰사 등의 고위직을 거쳤다. 허엽은 조광조의 복권을 상소하다 벼슬에서 쫓겨난 적이 있을 정도로 정치적 소신이 뚜렷했던 선비였다.


큰형인 허성 역시 마찬가지. 그는 이조, 예조 판서를 거쳤으며 당파를 초월해 정치적 견해를 편 인물로 유명하다. 허성은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바 있다. 이때 통신사였던 동인 김성일과 서인 황윤길이 전쟁 가능성의 유무를 두고 엇갈린 주장을 편 것은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다. 허성은 그 때 그가 속했던 당파가 동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가능성이 없다는 자기 파벌의 부사 김성일의 의견과 달리 그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서인 당파의 정사 황윤길의 주장에 동조하는 등 국익 우선의 정치 노선을 걸었다.


셋째형 허봉은 이조좌랑을 지냈고 아버지를 이어 동인의 우두머리로 있다 유배당한 뒤 요절한 당대의 명사였다. 이들 형제보다 후대에 이름이 더 높은 이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누이 허난설헌. 조선시대 최고 여류시인으로 중국에서까지 그의 시집이 발간됐다. 중국에 전해진 허난설헌의 시는 당시 중국 여류시인들 사이에 그의 시의 스타일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허균은 양반사회의 기피인물


이런 당대 최고 명문가의 막내로 태어났지만 허균은 50년의 인생사를 험하게 걸었다. 1597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2월 병조좌랑에 제수되면서 화려하게 관문에 들어서는 듯했다. 그러나 그해 5월 황해도사로 부임한 지 일곱달만인 12월에 바로 파직당했다. 허균이 서울의 창기들을 관아 별실에 끌어들여 놀아나고, 무뢰배들을 들여놓는다 하여 탄핵당한 것이다.

이후 그는 역모죄로 처형당할 때까지 열 번이나 관직에서 쫓겨나는 수난을 겪었다. 조선조의 관료들 중 그만큼 파직과 복직을 반복한 이도 없을 것이다. 파직의 이유는 대체로 행실이 사음(邪淫)하다는 것으로, 사헌부나 사간원 등에서 그를 탄핵하는 일이 많았다. 당대의 관료사회와는 천성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두 번이나 관직에 임명되자마자 사간원 등의 탄핵에 의해 바로 면직됐던 것을 보면 당시의 양반사회에서 그를 얼마나 기피했는지 알 수 있다.

열 번 파직에 열 번 복직


그가 사족들의 왕따 속에 10번을 넘는 파직을 당했으면서도 다시 10번의 복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문장과 외교 등에서 보인 탁월한 실력 때문이었다. 허균은 1606년 중국 사신을 맞는 원접사 유근의 종사관으로 임명되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중국 사신인 주지번은 명의 3학사 중 1인으로, 접대하는 이가 보통의 학식을 가지고는 응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사관으로 간 허균이 유불선은 물론이고 고서에도 통달해 주지번을 감탄시켜 실력을 새삼 인정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중국 사신을 자주 영접하면서 허균은 우리나라 역대 최고 시를 모은 <국조시선>과 누이 허난설헌의 시집, 그리고 자신의 미완성 문집 <성소부부고>를 주지번에게 주어 중국에도 우리 시가 소개되게 한 바 있다.

'칠서의 옥'사건과 허균의 변화


원접사의 종사관 업무를 인상적으로 마친 뒤 삼척부사, 공주목사,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잠깐씩 지냈던 그가 본격적인 중앙관료로서 정치생활을 하게 된 계기는 1613년 일어났던 '칠서의 옥(계축옥사)'이었다. '칠서의 옥'이란 서양갑, 박응서 등 일곱 명의 서자들이 역모를 꾀하는 과정에서 자금 마련을 위해 은상을 털다 잡힌 사건.

광해군 때의 모략가이자 실력자였던 이이첨은 이 사건 가담자였던 박응서를 이용하여, 7인의 서자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거사를 꾸몄다는 진술을 조작해내고 대형 '공안사건'인 옥사를 일으킨 것이 바로 계축옥사였다. 계축옥사를 통해 영창대군과 그의 장인 김제남 등이 사형되는 등 이 사건으로 이이첨 계열의 대북파는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허균이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은 이들 7서와 막역한 사이었던 데 있었다. 이들과 친분도 깊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모반 계획에 동조, 격문을 지어 주기도 했다. 이런 사실이 드러날 경우 그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은 뻔한 일이었다.


역사는 이때 허균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생전 벼슬을 구한 적이 없던 그가 이이첨에게 아부하여 벼슬을 얻었다고 기록했다. 중앙정치에 별로 개입하지 않았던 이전의 허균과 달리 이 시기 허균은 이이첨에 이은 대북파의 2인자로서 '인목대비 폐위'를 적극 주장하는 등 당시 선비들이 혐오해 마지 않던 이이첨 세력의 행동대장 격인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허균은 호조참의, 좌승지, 형조판서, 좌참찬에 오르는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역모죄로 몰린 허균


그러나 1618년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허균은 역모죄에 몰린다. 남대문에 '인민을 구하려고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대장군 정 아무개가 온다' 는 내용의 흉서가 붙은 사건에 허균이 연루된 것이다. 이 사건은 허균이 인목대비를 폐하기 위한 정치조작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것이란 설과 허균이 진짜 역모를 꾀하다 초기에 진압된 것이라는 등 설이 분분하다. 그러나 진실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어쨌든 혹독한 고문에 못이긴 허균의 측근들이 역모 사실을 인정해 허균은 재판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사지가 찢겨나가는 능지처참을 당하고, 허씨 일가는 멸문의 화를 입어 산산이 흩어졌다. 그 이후 조선 왕조가 망할 때까지 300년간 허균의 이름은 감히 입에 담지 못할 금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홍길동전>은 조선 후기 폭정에 시달리던 민중들에게 해방의 꿈을 키우는 이야기로 사랑받으며 한반도 곳곳에서 살아남았다. 홍길동에 대한 민중들의 애정에 힘입어 오늘날까지 허균의 행적이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저서로는 <성소부부고> <국조시산> <홍길동전> <학산초담>이 있는데, 조선 후기 300년간의 금서로서 식자층 사이에 은밀히 읽혀졌다고 한다.


허균년보[허균선양사업회 제공]

허균(許筠)(1569-1618, 선조 2 - 광해군 10)

1세(1569, 선조2년) : 허균은 1569년 11월 3일 기사년 병자월 임신일 계묘시에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2세(1580, 선조13년) : 허균의 부친 허엽이 이 해 상주 객관에서 별세하였다.
17세(1585, 선조18년) : 초시에 급제. 김대섭의 차녀와 결혼.
21세(1589, 선조22년) : 생원시에 급제.

24세(1592, 선조25년) : 임진왜란 피난 중 부인이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 외가 애일당

뒤산 이름을 따서 교산이 라는 호를 쓰게 되었다.

25세(1593, 선조26년) : 최초 시평론집 『학산초담』을 지었다.
26세(1594, 선조27년) : 정시을과 급제 하였다.
28세(1596, 선조29년) : 강릉부사 정구와 함께 『강릉지』를 엮었다.
29세(1597, 선조30년) :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 하였다.
35세(1603, 선조36년) : 대관령에서 행해지는 산신제를 보고 『대령산신 찬병서』를 지었다.
36세(1604, 선조37년) :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고 수안군수가 되었다.

38세(1606, 선조39년) : 『난설헌집』을 주지번에게 줌. 『난설헌집』은 그녀가 죽고 나서

18년 뒤에 비로소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39세(1607, 선조40년) : 삼척부사, 공주목사 역임, 『국조시산』을 편찬.
43세(1611, 광해군3년) : 문집『성소부부고』64권 엮었다.
44세(1612, 광해군4년) : 최초 한글소설 『홍길동전』지음(허경진 교수 이이화씨 추정)
46세(1614, 광해군6년) : 호조참의, 천추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47세(1615, 광해군7년) : 문신정시에서 1등을 하고 정2품 가정대부에 올랐으며 동지겸

진주부사가 되어 중국에사신으로 다녀옴.

48세(1616, 광해군8년) : 정2품 형조판서가 되었다.
49세(1617, 광해군9년) : 정2품 좌참찬에 오름.

 50세(1618, 광해군10년) : 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을 모함하였다. 4월 7일에 허균이

상소를 올렸으나 좌목을 알리는 결안도 없이 음 8월 24일 그의 심복들과 함께 서시(西市)에서

책형당해 생을 마감하였다.

傳소설 5편;

「손곡산인전」, 「엄처사전」, 「남궁선생전」, 「장생전」, 「장산인전」

저서

《홍길동전(洪吉童傳)》,《교산시화(蛟山詩話)》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성수시화(惺叟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도문대작(屠門大爵)》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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