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감이란 지금 사람들의 태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미와 작은 비둘기가 큰 붕새를 비웃었던 것과 같은 일이다.

- 장자(잡편) ; 제23편 경상초[9]-

 

古之人,

고지인, 옛사람 중에

其知有所至矣.

기지유소지의. 그의 지혜가 지극한 경지에 도달했던 이가 있었다.

惡乎至?

오호지? 어디까지 지극하고 하니,

有以爲未始有物者,

유이위미시유물자, 그의 경지는, 첫째로 처음부터 물건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至矣, 盡矣,

지의, 진의, 이는 지극하고 완전한 경지여서

弗可以加矣.

불가이가의. 여기에 더 보탤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其次以爲有物矣,

기차이위유물의, 그 다음으로는 물건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將以生爲喪也,

장이생위상야, 삶과 죽음을 같은 것으로 보고,

以死爲反也,

이사위반야, 죽음을 되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是以分已.

시이분이. 그러나 이것은 이것과 저것의 분별이 이미 생긴 것이다.

其次曰始无有,

기차왈시무유, 그 다음이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뒤에 삶이 있게 되었고,

旣而有生,

기이유생, 기존의 삶도

生俄而死.

생아이사. 삶은 곧 죽게 된다는 것이다.

以无有爲首,

이무유위수, 무를 머리로 삼고,

以生爲體,

이생위체, 삶을 몸뚱이로 삼고

以死爲尻,

이사위고, 죽음을 꼬리로 삼는 것이다.

孰知有无死生之一守者,

숙지유무사생지일수자, 있고 없는 것과 죽음과 삶이 한결같은 도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吾與之爲友.

오여지위우. 자기는 그 사람과 벗이 되겠다는 것이다.

是三者雖異,

시삼자수이, 이 셋은 비록 차이는 있지만

公族也.

공족야. 같은 족속이라 할 수 있다.

昭景也,

소경야, 초나라 왕족인 소씨와 경씨는 성이 다르고

著戴也,

저대야, 사는 곳과

甲氏也,

갑씨야, 집안과

著封也,

저봉야, 봉해진 지명이

非一也.

비일야. 다르기는 하지만 다 같은 왕족이 아닌가?

有生, 坱也,

유생, 앙야, 살고 있다는 것은 먼지가 묻어 있다는 것과 같다.

披然曰移是.

피연왈이시. 어지러이 바람에 불리는 것을 옮겨감이라 한다.

嘗言移是, .

상언이시, 옮겨감이란

非所言也

비소언야. 말로써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雖然, 不可知者也.

수연, 불가지자야. 비록 이렇게 말은 하지만 알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臘者之有膍胲,

랍자지유비해, 납제에는 내장과 발톱까지 붙어 있는 소를 제물로 쓰는데,

可散而

가산이 먹지 못할 것들을 떼어버릴 수도 있지만

不可散也.

불가산야. 완전한 소가 못되기 때문에 떼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觀室者周於寢廟,

관실자주어침묘, 집을 구경하는 사람은 정전과 조당을 두루 보았다 해도

又適其偃焉,

우적기언언, 그 집의 변소까지 가 보아야 집을 완전히 구경한 것이 된다.

爲是擧移是.

위시거이시. 이 때문에 옮겨감에 대해서도 들어 논하는 것이다.

請常言移是.

청상언이시. 옮겨감에 대해 다시 논하여 보면,

是以生爲本,

시이생위본, 그것은 자기 삶을 근본으로 삼고

以知爲師,

이지위사, 자기 지혜를 스승으로 모시기 때문에

因以乘是非.

인이승시비. 시비를 따지게 되고

果有名實,

과유명실, 결과적으로 명분과 내용이 있게 되는 것이다.

因以己爲質,

인이기위질, 그래서 자기를 위주로 하여

使人以爲己節,

사인이위기절, 남들로 하여금 자기의 명분을 따르게 하려 들게 되는 것이다.

因以死償節.

인이사상절. 그 때문에 죽음으로 명분을 보상하게 되는 것이다.

若然者,

약연자, 이런 사람은

以用爲知,

이용위지, 유용한 것을 슬기롭다 하고,

以不用爲愚,

이불용위우, 무용한 것은 어리석다고 한다.

以徹爲名,

이철위명, 뜻이 통하는 것을 명예롭다고 하고,

以窮爲辱.

이궁위욕. 궁지에 몰리는 것을 치욕이라 한다.

移是, 今之人也,

이시, 금지인야, 옮겨감이란 지금 사람들의 태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是蜩與學鳩同於同也.

시조여학구동어동야 이것은 매미와 작은 비둘기가 큰 붕새를 비웃었던 것과 같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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