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제414- 손님 못 알아보는 기생 (紅杏辨客)

서울에 오씨 성을 가진

한 조관(朝官)이 있었다.

일찍이 돈을 가지고

지방을 여행하여,

마침 공산(公山 : 공주)에 이르렀다.

 

산천 경개와 풍물 습속을 살피며

여러 날 묵는 동안,

고을에서 이름난

홍행(紅杏)이라는

기생을 사귀어

깊은 정이 들었다.

 

이렇게 열흘 남짓 함께 살면서

즐거운 세월을 보내고 작별할 때,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이 아쉬워

차마 떠나지 못하고 안타까워했다.

 

그 후로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씨는 금부(禁府)

경력(經歷) 자리에 오르니,

옛날의 의리를 생각해서

좋은 말을 타고 공산으로 내려갔다.

 

이에 관장이 맞이하여

위로 잔치를 열어 주었는데,

그 자리에는 몇 년 전

깊은 정을 맺었던

기생 홍행도 있었다.

 

술잔이 몇 차례 도는 동안에도

홍행은 오씨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니,

곧 그가 붙잡고 바라보면서 물었다.

"아무리 세월이 무심하다지만,

너는 그렇게도 정들었던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그러자 홍행은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 말했다.

"귀하신 손님께서는

어찌 이리도 기롱함이 심하신지요?

 

기생이란 비록

동쪽 집에서 밥을 먹고

서쪽 집에 가서 잠을 자며,

장씨의 아내가 되었다가

이씨의 부인이 되기도 하지만,

한번 정 주고 사랑을 맺은 손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귀하신 손님 같은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너는 정말

나를 모르겠단 말이냐?

내 이름을 한번 더듬어

기억해 보도록 해라.“

 

이에 홍행이 머리를 숙이고

깊이 생각하다가

그래도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자,

 

오씨는 이별이 슬퍼서

그리도 울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재차 추궁하니,

마침내 홍행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웃으면서 대답하는 것이었다.

 

"혹시 몇 년 전에 만났던

박번(朴蕃) 나리가 아니신지요?

소녀의 기억이 맞겠지요?'

이 말에 주위 사람들이

한바탕 크게 웃었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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