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제416- 영남 무인 김씨 (嶺南有金姓者)

영남에 김씨 성을 가진

젊은이가 있었는데,

몸집이 크고 힘이 셌으며

활쏘기에도 매우 뛰어났다.

 

이 젊은이는 무예를 익혀

장차 훌륭한 무인이 되고자 결심하고,

무과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길을 나섰다.

그런데 일행과 떨어져 가다가

그만 김씨는 길을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엉뚱한 데로 가다보니

한 골짜기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해는 저물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에 민가를 찾아가니

여러 채의 집들이 있는데,

그 중에 커다란 기와집이 보여

그 집 사랑채로 다가가

주인을 부르니,

적막감이 돌면서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두 번 세 번을 계속 부르고

두드려도 소식이 없자,

김씨는 집안을 둘러보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중문에 이르니,

십육칠 세쯤 되어 보이는

한 처녀가 나오는데

얼굴이 매우 잘 생겼고

단아해 보였으나,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이에 처녀가 어떻게 왔느냐고 묻자

김씨는,

"사랑방을 빌려

하룻밤 머물다 가게

해주시길 청합니다."

하고 사정을 하니,

처녀는 별 말 없이

김씨를 맞아 사랑방으로 안내했다.

 

게다가 처녀는

손수 저녁까지 지어

밥상을 차려 주니,

비록 고기 반찬은 없었으나

음식이 정결하고 맛이 있었다.

 

이에 김씨는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나자

왜 이리 큰 집에 처녀 혼자 있으며,

남자들은 어디로 갔는지가 궁금했다.

 

게다가 과연 이 처녀가

사람인지 귀신인지조차

아리송하게 생각되어,

다잡아 물어 보려고 결심하는 차에

처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녀는 본시 선비 집안의 딸로

집안 살림이 매우 넉넉하여,

이 근처의 토지가

모두 우리의 땅이었지요.

근처의 작은 집들도

모두 우리집 종들이 사는 곳입니다.

부모님은 소녀를 기르면서

매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종들 중에

아주 사나운 자가 있어

힘이 세고 성격이 거칠어

아무도 상대할 수 없었는데,

그가 흑심을 품고 소녀를 탐내

소녀의 부모를 차례로 죽였습니다.“

 

이렇게 말한 처녀는

울음을 터뜨리더니,

곧이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 영악한 종은

부모를 섬기던

나머지 종들도 모두 죽이고,

마침내 처녀를 겁탈하려 하자

처녀는 종을 속여서,

 

"이렇게 된 마당에

제가 어찌 거역을 하겠습니까?

부모님 상복이라도 벗은 뒤에

혼인을 하겠으니

그 때까지 참아 주십시오."

라고 말하니,

 

종은 이제 모든 일은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매일 들러서 감시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처녀는 몇 번이나

죽을 생각을 했지만,

이대로 가버리면

부모님 원수도 갚을 수 없고,

또 원통한 사정을

풀지 못하는 것도 한스러워

복수할 기회만 엿보며

살아왔다고 했다.

 

게다가 처녀는 자신이 직접

그 흉악한 종을 죽이려고

여러 가지 방도를 생각해 봤지만

자력으로는 불가능했고,

 

간혹 친척들이

방문하는 일이 있어도

그 종이 감시를 하고

해치기 때문에,

더 이상 찾아오는

사람들도 없다면서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오늘 손님께서 오셨으니,

어떻게 이 원한을

풀어 줄 수가 없겠는지요?

이제는 화가 골수에 사무치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여

말로 못할 지경입니다."

이러고는 눈물을 비 오듯 쏟으며

오열하는 것이었다.

 

이에 김씨는 의협심이 끓어올라

분을 참지 못하면서 말했다.

"내 그 놈을 잡아 죽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닙니다.

내게 맡기십시오.

내 당장 그 놈을 처치해

원수를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주먹을 쥐어 보이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은 김씨도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 종이 무척 강한 듯하여

두려운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용기 있고 의협심이 강한

무인으로 자처하면서

그대로 물러서기가 싫었던 것이었다.

 

이에 처녀는 기뻐하면서,

평소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손님, 소녀의 말을 잘 들으십시오.

이 골짜기로 들어오는 입구에

매우 깊은 연못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기서

골짜기 밖으로 나가거나

들어오려면

반드시 그 연못을 빙 돌아

산길을 걸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길이지요.

만일 수영에 능한 사람이라면,

연못의 오목한 곳으로

수영해 갈 경우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건널 수가 있습니다.

 

저 간악한 종은

말을 타고 다니지 않고,

항상 그렇게

수영을 해서 건너다닌답니다.

 

그러니 이 쪽 숲속에 숨어 있다가

수영을 하며 오가는 것을

활로 쏘아죽이거나,

또는 수영으로

힘이 빠졌을 때를 노려

죽이면 될 듯합니다.

제 생각은 그러하오니

계책을 잘 세워 보소서."

 

김씨는 처녀의 말을 듣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린 처녀가 그렇게 까지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에

머리가 숙여졌던 것이다.

 

이에 김씨도

그것이 상책이라 여기고,

자신은 활을 잘 쏘기 때문에

숲속에 숨어 있다가

수영을 하여 뭍으로 올라가서

방심하고 몸을 쭉 펴는 순간,

화살로 등을 명중시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곧 김씨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날이 미처 새기 전에 집을 나가서,

그 종이 수영을 해서

건너온다는 쪽 언덕 숲속으로 갔다.

그리고는 좋은 장소를 가려

엎드린 채 숨어 있었다.

 

이윽고 날이 밝으니

그 악독한 종이 처녀의 집으로 왔다.

그리고 집안을 둘러보며

자세히 살핀 뒤 처녀를 향해 물었다.

 

"사람들 얘기를 들으니

어젯밤 누가 집에 왔다고 하던데,

누가 왔었느냐?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느냐?“

 

이에 처녀는

종이 김씨를 직접 보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어 안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둘러댔다.

"어젯밤 외가로 오빠 되는 분이

부모님 문상을 못했다고 왔다가,

나 혼자 집에 있으니

그 밤에 돌아갔답니다."

 

그러자 종은 안심을 하고,

밖에 나갈 일이 있다면서

집을 나섰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늘 건너다니던 곳으로 가서는

사면을 둘러본 다음

옷을 벗어 손에 쥐고

물로 뛰어들어 헤엄을 치는데,

마치 물오리처럼 미끄러져

순식간에 건너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건너편 언덕에 닿자

기어 올라가서

옷을 입으려고

허리를 쭉 펴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김씨가 화살을 쏘았다.

 

이에 종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뒤로 돌아서서

물속으로 몸을 던져,

등에 화살이 꽂힌 채

이쪽으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갈 때와는 달리

그렇게 빨리 헤엄을 치지는 못했다.

이 때 김씨는 다시 활을 겨누고,

헤엄을 쳐오는

종의 머리를 향해 힘껏 쏘았다.

 

이에 화살은 정확히 그 이마에 꽂혔고,

마침내 종은 힘을 잃고

사지를 쭉 뻗으며

몸이 뒤집힌 채

물 위에 둥둥 떠올랐다.

 

종의 죽음을 확인한

김씨가 집으로 돌아오니,

처녀는 마루 위 대들보에

비단 수건을 걸어

고리를 만들어 놓고,

만약 김씨가

종을 죽이는 데 실패하면

목을 매달아 목숨을 끊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씨가 들어오니

처녀는 잡고 있던

비단 수건을 내려놓고,

뛰어 내려와 통곡을 하며 말했다.

 

"지극한 원한을 풀고

그 아픔을 씻게 되었으니,

태산 같은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하겠습니까?

 

소녀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님이지만,

소녀를 살려 준 사람은 당신이옵니다.

이제 소녀의 몸은

당신이 준 것이오니,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이에 김씨는 일이 잘 되어

정말 기쁘다고 하면서

이렇게 처녀를 위로했다.

"내가 이 일을 완수한 것은

모두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 의기(義氣)가 발휘되어,

악독한 종의 머리를

화살이 꿰뚫은 것뿐이지요.

그러니 처녀는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스스로 복을 구해

행복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제 할 일이 많아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러면서 사는 곳이며

이름도 말하지 않은 채

그대로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과거를 보고

당당히 급제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김씨 주위에는

출세한 사람이 없고,

게다가 영남 시골 출신 인지라

끌어 줄 사람이 없어,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채

10여 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김씨가 떠나고 나자

처녀는 비로소 친척을 찾아가

그 동안의 일을 알렸다.

이에 친척들이 와서

죽은 종의 배를 갈라

그 간을 맛본 뒤에,

돌아가신 부모의 제사를 모셨다.

 

그런 다음

부모의 산소를 마련하고

다시 장례를 치렀다.

이어서 처녀는 악독한 종을 따르던

종들을 모두 처치하고,

집안을 바로 잡았다.

 

이러는 동안 처녀는

나이를 먹어 혼인이 늦어졌는데,

마침 한 친척의 주선으로

부인이 죽은

어느 재상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재상은 정숙한

이 여인을 후실로 맞아

매우 사랑했으나,

여인은 늘 웃음을 잃고

뭔가 고민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루는 재상이 후실에게 물었다.

"나와 혼인한 후로 웃지도 않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니,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구려.

무슨 걱정이 있으면

어서 말해 보시오.“

 

이에 여인은 울면서

지난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이렇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소녀 살아 있을 때

그 은혜를 갚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소녀에게

어디 웃음이 있겠습니까?“

 

후실의 이야기를 들은 재상은

그 젊은이의 용기를 가상하게 여기고,

후실의 소원 또한

풀어 주어야겠기에

그 젊은이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때 마침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곧 재상이 병조판서가 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온 것이다.

 

이에 재상은,

병조판서가 어떤 무인을 찾아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소문을

영남 지방에 퍼뜨리게 했다.

 

그리고는 집안의

한 방에다 병풍을 치고

그 뒤에 후실을 앉혀 놓은 뒤,

영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무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후실에게 살펴보게 하는 것이었다.

 

이 때 재상은

영남에서 소문을 듣고 올라온

무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어느 해에 무과 시험을 보러

상경했느냐고 묻고,

올라오는 길에

특이한 일이 있었으면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이렇게 사람을 만나본 지

여러 날 만에,

앞서 그 일을 처리해 주었던

김씨가 올라와서 알현했다.

 

그리고 당시 사건을

자세히 이야기 하니,

병풍 뒤에서 듣고 있던 후실이

그 목소리를 금방 알아차렸다.

 

후실은 너무도

가슴에 맺힌 일이라,

그 모습이며 말씨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곧 후실은 병풍 뒤에서 달려 나와

김씨의 손을 꼭 잡으며,

"오라버니!

이제야 오라버니를 만나게 되었구려.

오라버니를 만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답니다.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을 듯합니다."

하면서 눈물을 비 오듯 쏟았다.

 

곧 재상은 김씨에게 감사를 표하고

관직을 마련해 주었으며,

자신의 동네에 집까지 얻어 주고

이웃으로 살면서 친척으로 대했다.

이후 김씨는

이름 있는 무관이 되었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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