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삼국유사 소재 향가 14수 중 <모죽지랑가>와 <도천수관음가>를 끝으로 유사 소재 향가 부분 고찰을 마치려 한다. 전자는 죽지랑이 남의 농장 부역에 매인 몸인 걸 보면 삼국통일 후 50년이 지나면서 화랑의 역할이 감소한 화랑쇠퇴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악덕 고용주 익선에 대한 징계는 타당하나 모량리 출신 전체에 연좌죄를 적용하여 나쁜 선례를 남겼다.

<도천수관음가>는 눈먼 5세 아이에게 향가를 부르게 하여 눈뜬 설화를 배경으로 한다. 향가 주술성의 위력이 아직도 건재함을 보여준다. 작자는 희명(希明)이다.

 

참고로 지적해 둘 것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명이 시호처럼 그의 행적과 일치한다. 표훈, 충담, 월명, 융천사... 행적을 남긴 후 이름임이 자명하다.

 

1.모죽지랑가

慕竹旨郞歌 -득오실

孝昭王代 竹旨郞

 

◇孝昭王代 竹旨郞(亦作竹曼 亦名智官)

第三十二代孝昭王代 竹曼郞之徒有得烏(一云谷)級干.

제32대 효소왕대에 죽만랑(죽지랑)이라는 무리 가운데에 득오(득곡)급간이 있었다.

隸名於風流黃卷. 追日仕進 隔旬日不見.

풍류황권에 이름을 올려놓고 날마다 사진(仕進)하더니 순일(旬日)동안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郞喚其母 問“爾子何在?”

죽만랑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물었다.,

"그대의 아들은 어디에 있는가?"

母曰“幢典牟梁益宣阿干 以我子差富山城倉直 馳去行急 未暇告辭於郞.”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당진 모량부의 익선아간이 내 아들을 부산성의 창직(倉直)으로 임명을 하였습니다. 빨리 가느라고 미쳐 인사를 못하였을 것입니다."

郞曰“汝子若私事適彼 則不須尋訪. 今以公事進去 須歸享矣.”

죽만랑이 말하였다.

"그대의 아들이 사사로이 그 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도 없지만, 공사로 갔다니 마땅히 찾아가서 대접을 해야겠소."

乃以舌餠一合酒一缸 卒左人(鄕云皆叱知 言奴僕也)而行.

이에 설병(舌餠) 한 그릇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좌인(우리말에 개질지라고 하니 곧 노복을 말함이다.)을 거느리고 가니

郞徒百三十七人 亦具儀侍從

낭의 무리 백 삼십 칠인이 예의를 갖추고 따랐다.

到富山城. 問閽人

부산성에 도착하여 문지기에게 물었다.

“得烏失奚在?”

"득오실이 어디에 있느냐?"

人曰“今在益宣田 隨例赴役.”

문지기가 대답하였다.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을 하고 있습니다."

 

郞歸田 以所將酒餠饗之.

낭이 밭으로 찾아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배불리 먹이고

請暇於益宣 將欲偕還. 益宣固禁不許.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익선은 허락을 하지 아니하였다.

時有使侃珍管收推火郡 能節租三十石 輸送城中.

그때 사리(使吏)간진이 추화군 능절의 조(租) 30석을 거두어 성중으로 수송하다가

美郞之重士風味 鄙益宣暗塞不通

낭이 선비를 중히 여기는 풍미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변통성 없음을 비루하게 여겨,

乃以所領三十石 贈益宣助請 猶不許.

가지고 가던 조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득오실을 보내주도록 청하였다. 그래도 허락을 하지 않았다.

又以珍節舍知騎馬鞍具貽之. 乃許.

또 진절 사지의 말안장을 주니 그 때야 비로소 허락을 하였다.

朝廷花主聞之 遣使取益宣 將洗浴其垢醜

조정의 화주가 이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 추하고 더러움을 씻어주려고 하니

宣逃隱. 掠其長子而去.

익선이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대신 그의 장자를 잡아갔다.

時仲冬極寒之日 浴洗於城內池中 仍合凍死.

때는 엄동의 몹시 차가운 날이었으므로 성내의 연못에서 목욕을 시켰는데 이내 얼어죽었다.

大王聞之 勅牟梁里人從官者 竝合黜遣

대왕이 이를 듣고 명하기를,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을 한 사람은 모두 쫓아보내어

更不接公署 不著黑衣

다시는 관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검은 못을 입게 하였으며

若爲僧者 不合入鐘鼓寺中.

만약 중이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勅史上偘珍(註,使侃珍)子孫爲枰定戶孫 標異之.

칙사가 간진의 자손을 올려서 평정호손으로 삼고 특별히 표창하였다.

時园測法師是海東高德 以牟梁里人 故不授僧職.

이 때 원측법사가 해동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인 까닭으로 승직을 주지 않았다.

初述宗公爲朔州部督使 將歸理所.

처음에 술종공(죽지랑의 아버지)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그의 임지로 부임하러 가려하는데,

時三韓兵亂 以騎兵三千護送之.

이때에 삼한(三韓)의 병란이 있었으므로 기병 삼천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하였다.

行至竹旨嶺 有一居士 平理其嶺路.

행렬이 죽지령에 이르자 한 거사가 길을 잘 닦고 있었다.

公見之歎美. 居士亦善公之威勢赫甚 相感於心.

공이 그것을 보고 매우 탄미하자 거사 또한 공의 위세가 매우 놀라운 것을 보고 존대하게 되어 서로가 마음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公赴州理 隔一朔

공이 고을의 임소에 부임한 지 한 달이 되었다.

夢見居士入于房中

꿈에 거사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室家同夢 驚怪尤甚.

아내도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더욱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翌日使人問其居士安否.

다음날 사람을 보내어 그 거사의 안부를 물었다.

人曰“居士死有日矣.”

사람들이 말하였다.

"거사가 죽은지 며칠이 되었습니다."

使來還告其死 與夢同日矣.

사자가 돌아와서 그 사실을 고하니 그 날이 꿈꾸었던 날과 같은지라,

公曰“殆居士誕於吾家爾.”

공이 말하였다.

"아마 거사가 우리집에 태어날 것 같소"

更發卒修葬於嶺上北峯.

다시 군사를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造石彌勒一軀 安於塚前.

돌로 미륵불 한 분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우게 하였다.

妻氏自夢之日有娠旣誕 因名竹旨.

공의 아내는 꿈을 꾼 날부터 태기가 있더니 아이를 낳았는데 이런 이유로 죽지라 이름지었다.

壯而出仕 與庾信公爲副帥 統三韓.

이 죽지랑이 커서 벼슬을 하게 되니 유신공을 따라 부수(副帥)가 되어 삼국을 통일하였다.

眞德․太宗․文武․神文四代爲冢宰 安定闕邦.

진덕, 태종, 문무, 신문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이 나라를 안정시켰다.

初得烏谷 慕郞而作歌曰,

처음에 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어 부르니 다음과 같다.

 

去-隱-春-皆-理-米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皃-史-年-數-就-音-墮 -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慕 -理-尸-心 -未 行-乎-尸-道-尸

蓬-次-叱-巷 -中-宿-尸-夜-音-有-叱-下-是

 

간봄 그리매/: 간 봄 그리워

모든것아 우리 시름/ : 모든 것이 서러이 시름하는데

아름 나토샤온/: 아름다움 나타내신

즈시 살쭘 디니져 얼굴에/ : 주름살이 지려 하옵니다.

눈 돌칠 사이에/ :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맛보압디 지소리/: 만나뵙기를 어떻게 만드리.

郎이여,그릴마아매 녀올길/: 죽지랑이여, 그리는 마음의 가는 길

다봊마살애 잘밤 이시리./: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까.



 

◇慕竹旨郞歌 해설

󰋬32대 효소왕(재위692-702)대 득오실[谷]

󰋬죽지랑보다 큰 세력을 지닌 益善은 권력을 이용해 탐욕을 채우는 지배층의 횡포를 보여줌. 문무왕 다음 다음 대인 효소왕 때는 통일달성기의 고매한 이상은 무너지고 지배층의 횡포가 자행되자 이에 항거하여 이 노래를 지음.

󰋬(3-4구)“전각을 밝히시온 모습 해 갈수록 헐어가도다”로 해석하기도.(김완진)

전각:정치 무대상징. 죽지랑이 편 국민통합의 이상정치는 사라짐.

󰋬(5구)눈 돌칠 : 눈앞의 잘못된 세태를 부정하는 말.

󰋬(10구)다봊마을[굴헝;구렁]: 작자가 겪고 있는 험한 시련.





'고전문학 > 향가 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부촌장 신화  (0) 2008.08.27
희명(希明),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  (0) 2008.08.27
려요 처용가  (0) 2008.08.24
처용가 -처용  (1) 2008.08.24
혜성가 -융천사  (0) 2008.08.2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