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怨歌- 信忠

신충괘관

信忠掛冠 -신충이 속세를 떠나다

-삼국유사 '피은'

[은자주]삼국유사 ‘피은’에는 신충과 영재가 말년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충괘관과 영재우적이 그것이다. 전자에는 원한의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걸어 두었더니 멀쩡하던 잣나무가 시들어 욕망을 성취한 이야기여서 신라인들의 언어의 주술성에 대한 신뢰를 읽을 수 있다. 앞에서 본 서동요의 증험도 입증되었지만, 융천사의 혜성가는 두 개의 해가 출현하는 혼란을 막고 쪽발이 침략자들까지 물리친 주술성에서 왕좌를 차지한다. <영재우적>에서 도적떼를 감동시켜 승려로 만든 아이디어는 <홍길동전>이나 <허생전>의 선편(先鞭)이 되었다. 세 작품을 함께 읽어 본다.


孝成王潛邸時

효성왕이 동굴 시절에,

與賢師信忠 圍碁於宮庭栢樹下. 嘗謂曰

어진 선비 신충과 더불어 대궐 뜰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며 하루는 말했다.

「他日若忘卿 有如栢樹.」

“뒷날에 만약 내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

信忠興拜.

신충은 일어나서 절을 했다.

隔數月 王卽位賞功臣. 忘忠而不第之.

그 후 몇 달 뒤, 효성왕이 즉위하여 공신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잊고 공신록 명단에 넣지 않았다.

忠怨而作歌 帖於栢樹 樹忽黃悴.

이에 신충이 원망스런 노래를 지어 이를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갑자기 누렇게 시들었다.

王怪使審之 得歌獻之.

왕이 이상히 여겨 살펴보게 했더니 노래를 가져다 바쳤다.

大驚曰

왕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萬機鞅掌 幾忘乎角弓.」 *鞅앙:가슴걸이, 배때끈, 원망하다.

“정무가 바빠 하마터면 각궁(角弓)을 잊을 뻔 했구나.”

乃召之 賜爵祿 栢樹乃蘇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잣나무는 되살아났다.

歌曰,


物-叱-好支-栢-史

秋-察-尸-不冬-爾-屋-攴-墮-米

汝-於-多支-行-齊-敎 -因-隱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月-羅-理-影 -攴-古-理-因-淵-之-叱

行-尸-浪 阿-叱-沙矣-以-攴-如-攴

皃史-沙-叱-望-阿-乃

世-理-都 之-叱-逸-烏-隱-苐-也


믈흿* 자시 “한참 무성한 잣[栢]이

가살 안달 이우러 디매 가을에 아니 이울어지매

너 엇뎨 니저 이신 너를 어찌 잊어? “ 하시던

울월던 나치 겨샤온대 우럴던 얼굴이 계시온데.

닰그림제 녯 모샛 달 그림자가 예 못[淵]의

녈 믌결 애와티듯 가는 물결 원망하듯

즛사 바라나 모습이야 바라보나

누리도 아쳐론 뎨여 누리도 싫은지고!

後句亡

*[은자주] 9-10구 망실됨. 10구체 향가로 분류함.


由是寵現於兩朝.

이로써 신충은 효성왕, 경덕왕 두 왕조에 은총을 입었다.

景德王(王卽孝成之弟也)二十二年癸卯

경덕왕 22년 계묘(763)에

忠與二友相約 掛冠入南岳.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에 들어갔다.

落髮爲沙門 爲王創斷俗寺居焉.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再徵不就,

왕이 두 번을 불렀으나 그 곳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그 곳에서 살았다.

願終身丘壑 以奉福大王. 王許之.

평생을 구학(丘壑)에서 마치며 대왕의 복을 빌기를 원했으므로 왕은 이를 허락했다.

留眞在金堂後壁是也.

임금의 진영을 모셔 두었는데 금당 뒷벽에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南有村名俗休 今訛云小花里.

남쪽으로 속휴라는 마을이 있는데 현재는 와전되어 소화리라 한다.

(按三和尙傳 有信忠奉聖寺. 與此相混. 然計其神文之世 距景德已百餘年. 況神文與信忠 乃宿世之事 則非此信忠明矣. 宜詳之.)


又別記云

또 별기에는 이렇게 전한다.

景德王代 有直長李俊(高僧傳作李純) 早曾發願

경덕왕 때에 직장 이준이 일찍이 발원하기를,

年至知命 須出家創佛寺.

나이 50이 되면 모름지기 출가하여 절을 창건하리라고 했는데,

天寶七年戊子 年登五十矣.

천보7년(748) 무자년에 나이 50이 되자

改創槽淵小寺爲大刹 名斷俗寺.

조연소사를 고쳐 지어 큰 절로 만들고 이름을 단속사라 했다.

身亦削髮 法名孔宏長老.

자신도 또한 머리를 깎고 법명을 공굉장로라 하고

住寺二十年乃卒.

절에 거주한 지 20년에 세상을 떠났다.

與前三國史所載不同 兩存之闕疑.

이 기록은 앞의 삼국사에 실린 것과 같지 않으나, 두 가지 설을 실음으로 의심하는 점을 덜고자 한다.

讚曰,

功名未已鬢先霜 공명을 다하기 전에 귀밑머리 먼저 희어지네.

君寵雖多百歲忙 군왕의 총애야 많지만 죽음의 길 바쁘구나.

隔岸有山頻入夢 강 건너 저 산이 자주 꿈 속에 뵈니

逝將香火祝吾皇 가서 향불 피우며 우리 임금 축원하리.


[참고]

[姜吉云역]宮庭栢歌:(梁,怨歌)

빛깔이-좋은-잣

;빛깔이 좋은 싱싱한 잣나무가

가을-아니-가까와-떨어지매

;가을이 가깝지 아니하여서 잎이 떨어지매

너-어찌-가고자-하시므로

:임금님이“네 어찌 떠나가고자 하는가?”하셨으므로,

우러르던-낯-변하신-것이구나/또는 겨울이여

:고마운 정리를 잊지 못해 우러르던 그 환한 얼굴이 변하셨구나.

달님이-그림자-여린

:달님의 그림자가 생생하게 비친

소에의-출렁거리는-물결-가장자리의

:깊은 못에서, 출렁거리는 물결가의

모래-일듯이(=도태되듯이)모습이야

:모래가 도태되듯이 [임금님 얼굴이 조금씩 못해져 가니] 모습이야

바라보나 세상도 -한탄스럽구나

:바라보지마는 애가 씌어서 세상도 한탄스럽구나

後句亡


[강길운역 현대어역]

빛깔이 좋은 싱싱한 잣나무가

가을이 가깝지 아니하여서 잎이 떨어지매

임금님이 “네 어찌 떠나가고자 하는가?” 하셨으므로,

정리를 잊지 못해 우러르던 그 환한 얼굴이 변하셨구나.

달님의 그림자가 생생하게 비친

깊은 못에서, 출렁거리는 물결가의

모래가 도태되듯이 [임금님 얼굴이 조금씩 못해져 가니] 모습이야

바라보지마는 애가 씌어서 세상도 한탄스럽구나


13.怨歌 해설

󰋬34대 효성왕(재위 737-742) 33대 성덕왕의 둘째아들. 즉위에 신충도 도움을 준 듯함.

󰋬信忠: 진골 귀족으로 효성왕 3년에 집사부의 책임자인 중시가 되고, 경덕왕 16년(757)에는 상대등의 지위에 오름. 양대에 걸친 왕당파. 경덕왕 16년에는 한자식 지명으로 교체하는 개혁 단행. 향가의 주술적 힘을 개인 영달의 수단으로 변질됨. 능란한 처세가.

󰋬(5-6구)[김완진]다라리 그르메 다린 못갓/ 녈 믌겨랏 몰애로다;

달이 그림자 내린 연못 가 지나가는 물결에 대한 모래로다.

[서재극](5-8구)다리 얼히고 다사란 모tot 녈 믈 끔사 애해다히

즛사ㅅ 라나 누리도 즛론뎨야;

달이 비치고 잠잠한 못에 지나는 물결 언덕을 할퀴듯

모습이야 바라나 누리도 짓달리는구나.(세상 인심 함부로 달리는구나)

󰋬5-6구:달의 모습은 변함이 없건만 자신의 처지는 물결 언덕을 할퀴듯 괴롭고.

󰋬주술에 바탕을 둔 서정성을 갖춤

[주] "뜰 앞의 잣나무"란 말 자체가 불가의 유명한 화두다. 불교의 진리는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에 이심전심의 화두를 사용한다. 참고로 여기에 소개한다.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http://cafe.naver.com/bulyu/1639


어느 수행승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뜰 앞의 잣나무니라."
수행승이 질문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에서 조사는 중국선의 창시자인 달마 대사를 가리키며, 서쪽은 인도가 중국의 서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인도를 가리킨 말이다. 따라서 수행승이 물은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는 바로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뜻은 무엇인가라는 말로, 불교의 근본정신이나 선의 진수를 물을 때 쓰는 말이다.
요컨대 그 수행승은 달마가 무슨 생각을 갖고 멀리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왔는지를 조주에게 물은 것이다. 그런데 조주 화상은 질문의 내용과는 전혀 엉뚱하게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한 것이다.
조주 화상이 거주하던 관음원 경내에는 커다란 잣나무가 있어서 백림사(柏林寺)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때마침 수행승이 묻자 조주의 뇌리에는 번득 잣나무가 떠올랐다. 때문에 그대로 잣나무라고 대답한 것 뿐이다. 잣나무가 아니라 소나무나 복숭아나무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잣나무'자체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단순히 잣나무에만 집착한다면 이 공안은 물론 선의 참뜻도 이해하지 못한다.
관산(關山) 국사는 조주 선사의 '뜰 앞의 잣나무'에 대해 "잣나무의 얘기에 도적의 낌새(賊機)가 있다."고 평했다. 이 말은 '뜰 앞의 잣나무'에는 도적과 같은 두려운 작용이 있다는 뜻이다. 즉 인간이 갖고 있는 망상이나 집착심을 남김없이 뺏고야 말겠다는 무서운 대 도적의 살아 있는 책략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관산 국사가 입적하고 나서 대략 300년 뒤인 명대(明代)의 고승 은원(隱元) 선사가 관산 국사가 머물던 묘심사에 들러 "개산 법어(開山 法語:한 파를 창시하면서 내리는 법어)가 있느냐?"고 물었다. 묘심사의 수좌가 없다고 대답하자 은원 선사는 "그렇다면 일파를 개산한 것이라 할 수 없다."고 힐난했다. 그러자 그 수좌(大疑 화상)는 스승 우당(愚堂) 국사와 상의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개산할 때 법어는 없었지만 '뜰 앞의 잣나무 얘기에 도적의 낌새가 있다'고 한 한마디는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은원 선사는 어쩔 줄 몰라 두려워하면서 "이 한마디가 백천만의 어록보다 낫다."고 찬탄하고서 물러갔다고 한다.
'뜰 앞의 잣나무'는 문자나 언어적 설명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서 실제로 참구(參究)하는 것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다.
'어떠한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묻자 우문 선사는 '마른 똥막대기'라 했고 동산 선사는 '삼 세 근'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잣나무와 마찬가지로 그 사물들 자체에는 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체의 망상분별을 씻어 내고 '뜰 앞의 잣나무' 자체가 되어야 비로소 조주 선사의 참뜻은 물론 선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無門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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