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를 만난 건 이번 여행의 최대 수확이었다. 소제 끝에 소동파는 상념에 잠겨 웃고 서 있었다. 그는 이곳 지사가 되어 인공호수를 완성했지만, 필화(筆禍) 사건으로 죄를 얻어 적벽에 귀양가 읊은, 천 년전의 작품인<적벽부>를 다시 음미해 본다. 인생이란 부침(浮沈)이 있게 마련인가 보다. 일이 잘 풀린다고 까불댈 일도 아니고, 절망의 늪에 빠졌다고 자학할 일도 아니다. 사마천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세계적인 명저들은 거의 대부분 암흑과 절망 속에서 자신을 추스려 그것들과 싸워낸 궤적이고 말하자면 인간승리의 기록이다.

駕一葉之扁舟, 擧匏樽而相,

寄浮蝣於天地, 渺滄海之一.

哀吾生之須臾, 羨長江之無.

한 잎의 좁은 배를 타고서 술을 들어 서로 권하며,

하루살이 삶을 천지(天地)에 부치니

아득한 넓은 바다의 한 알갱이 좁쌀알이로다.

우리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긴 강(江)의 끝없음을 부럽게 여기노라.

 

에는 인생에 대한 명구 ‘일엽편주’, ‘하루살이 인생’, ‘창해일속’ 등이

쏟아져 나오고, 인생의 유한함을 장강의 무궁함과 대비시켜 가을 달밤의

비장함을 극대화시킨다. 인용문에는 없지만 "羽化而登仙"도 천하 명구지요.

 

客亦知夫水與月乎.

逝者如斯, 而未嘗也.

盈虛者如彼, 而卒莫消也,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能以一.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也.

而又何羨乎,

손도 저 물과 달을 아는가?

가는 것은 이와 같으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되 마침내 줄거나 불어남이 없으니,

변하는 데서 보면 천지(天地)도 한 순간일 수밖에 없으며,

변하지 않는 데서 보면 사물과 내가 다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요?

 

에서는 물과 달을 끌어다가 물은 흘러가지만 가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도 흐르고 있고, 달도 차고 기울지만 줄지도 불어나지도 않는다.

그런데 자연으로 태어난 우리네 인생은 워째서 한 번 가면 못 오는고?

이런 의문이 분위기를 지배한다.

나의 중학동기들이 만들어가는 문중사이트에도 자주 삼강 주막 사진도

올라오고 하지만 담론의 핵심은 강물에 있다.

공자님도 논어에서,

 

子ㅣ 在川上曰 逝者如斯夫인저 不舍晝夜로다[子罕16]  *舍(사):집, 머무는 곳.

[譯]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는 것은 이와 같도다. 주야에 쉬지 않는구나.”

[註]天地之化, 往者過, 來者續, 無一息之停, 乃道體之本然也.

(천지의 조화가 가는 것은 지나가고 오는 것은 계속되어

한 순간도 멈춤이 없으니 곧 도의 본체의 근본이 그러하다.)

라 하셨다.

헤르만 햇세가 소설<싣달타>에서 보여준 깨달음과 동질의 것일 것이다.

곧, 인생의 진리를 향한 참다운 삶은 “日日新又日新”에 있는데,

강물이 그 표본이 된다. 한 지점의 단면을 상상해 보라. 강물은 제3한강교

밑이 아니라도 흘러간다. 그런데 그 지점을 응시해 보면 물은 부단히 흐른다.

그것이 강물의 영원성이고 자연의 영원성이다. 무덤의 풀은 봄이 되면

다시 살아나지만 무덤의 주인공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거지요.

유덕화를 찍은 영화인가요? <天長地久> 다시 자구를 풀어서 조합하면 ‘天地長久’.

곧 자연의 영원성을 말하는 거라예.

 

그리하여 변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천지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불변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과 나는 영원하다.

그럴까요? 많이도 취했나 보군요. 취했는데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필름이 끊어졌는데요.

취한 사람의 답변은 하나입니다.

“나 안 취했어, 이거 놔!”

꼴깝떠는 인간들은 욕설을 퍼붓고 화까지 냅니다.

인생의 위대성은 주량으로 가늠하는 것처럼.

 

결론은 인생은 유한하지만 자연은 영원하다 입니다.

그런데 술김에 자연과 하나되었으니 자연과 더불어 영원할 수밖에요.

 

且夫天地之間, 物各有,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

耳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

取之無禁, 用之不,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子之所共樂,

또, 천지 사이에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나의 소유가 아니면 한 터럭이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에 뜨이면 빛을 이루어서,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조물주(造物主)의 다함이 없는 갈무리로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에서는 사물과 내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르러

바람은 소리가 되고, 달은 빛이 되어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다는 명구를 남기게 된다.

조물주의 무진장한 자연을 그대와 내가 함께 실컷 누리자는

돈 안 드는 작자의 인심에 아무도 손을 내젓지 못하는 경지로 인도한다.

아래 창에서 원용해 보았다.

http://blog.paran.com/kydong/2467713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