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 9년 기해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여 친선을 맺었다. 왕이 순시차 평양에 가셨는데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왕에게 아뢰기를,“왜인이 그 영토에 가득 들어 와서 성과 못을 파괴하고 노객(신라인)을 왜의 백성으로 삼고자 합니다.”라고 고하며 호태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호태왕은 그들의 충성을 동정하여 사절을 다시 보내 그 요청을 허락하셨다.
영락 10년 경자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남거성을 경유하여 신라성에 들어가니 그 안에 왜인이 가득했는데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물러갔다. □□□□□□□ 왜의 뒤로 돌아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까지 이르러 계속하여 성을 함락하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이에 안라인 수병으로 하여금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또 신라성, 신성을 함락시키니 왜구가 크게 궤멸되었다. 성안사람 [이하 원문 16자 결]열아홉, 왜적을 모두 물리치고 안라인 수병에게 맡기어 안돈시켰다.
영락 1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 왕사가 □□와 합전하여 적군을 섬멸하여 모두 없애시고, 노획한 갑옷이 1만 벌이나 되고 군수물자와 장비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누성, 우유성, □성, □□□□□□성을 격파했다.
능묘를 지키는 연호(가구)는 매구여의 백성 중에서 국연이 두 집, 간연이 세 집이요, 동해고는 국연이 세 집, 간연이 다섯 집이요, 돈성의 백성은 네 집이 모두 간연이요, 우성은 한 집이 간연, 비리성은 두 집이 국연, 평양성 백성은 국연 한 집, 간연이 열 집, 자연은 두 집이 간연, 배루 사람은 국연이 한 집, 간연이 마흔세 집, 양곡은 두 집이 간연, 양성은 두 집이 간연, 안부련은 스물두 집이 간연, 개곡은 세 집이 간연, 신성은 세 집이 간연, 남소성은 한 집이 국연이다.
새로 들어온 한예로 사수성은 국연 하나, 간연 하나, 모루성은 두 집이 간연, 두비압잠한은 다섯 집이 간연, 구모객두는 두 집이 간연, 구저한은 한 집이 간연, 사조성의 한예는 국연 셋, 간연 스물하나, 고모야라성은 한 집이 간연, 경고성은 국연 하나, 간연 셋, 객현한은 한 집이 간연, 아단성과 잡진성은 모두 열 집이 간연, 파노성의 한은 아홉 집이 간연이다.
구모로성은 네 집이 간연, 각모로성은 두 집이 간연, 모수성은 세 집이 간연, 간저리성은 국연 둘, 간연 셋, 미추성은 국연 하나, 간연 일곱, 야리성은 세 집이 간연, 두노성은 국연 하나, 간연 둘, 오리성은 국연 둘, 간연 여덟, 수추성은 국연 둘, 간연 다섯, 백잔 남쪽에 한은 국연 하나, 간연 다섯, 대산한성은 여섯 집이 간연이다.
농매성은 국연 하나, 간연 일곱, 윤노성은 국연 둘, 간연 스물둘, 고모루성은 국연 둘, 간연 여덟, 전성은 국연 하나, 간연 여덟, 미성은 여섯 집이 간연, 취자성은 다섯 집이 간연, 삼양성은 스물네 집이 간연, 산나성은 한 집이 국연, 나단성은 한 집이 간연, 구모성은 한 집이 간연, 어리성은 여덟 집이 간연, 비리성은 세집이 간연, 세성은 세집이 간연이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생전에 말씀하시기를“조왕과 선왕께서는 다만 멀고 가까운 곳의 여러 지방에 사는 구민(본토인)만을 뽑아 무덤을 지키며 소재를 맡기었으나, 나는 구민들이 차차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약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무덤을 편히 수호할 자들은, 내가 직접 돌아다니며 데리고 온 한족이나 예족이니 그들에게 수호하고 소재하는 일을 맡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하신 대로 한족과 예족 이백이십 집을 데려 오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법을 잘 모를 것을 염려하여 다시 구민 일백열 집을 데려왔다. 새로 온 사람과 전부터 있던 사람을 합하면 수호하는 집수는 국연이 삼십 집, 간연이 삼백 집, 모두 합하여 삼백삽십 집이다
상조 선왕 이래로 능묘 위에 비석을 세우지 않아서 무덤을 지키는 가호들이 잘못하는 사태가 생기게 되었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선조왕의 무덤 위에 모두 비석을 세우서그 가호들로 하여금 잘못하는 일이 없게 하였다. 또 제도를 제정하여 무덤을 수호하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이후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게 하고, 아무리 부유한 사람일지도 마음대로 사 가지 못하게 하셨다. 만일 법령을 위반하고 파는 자는 형벌에 처하고, 사는 자도 법을 마련하여 그로 하여금 무덤을 수호하게 하셨다.
광개토왕(廣開土王, 374년 ~ 413년, 재위: 391년 ~ 413년은 고구려의 제19대 군주이다. 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安)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의 시호가 전해진다.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好太王)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광개토대왕비에 관해서는 운영자가 아래 포스트에 백과사전의 것을 자세히 소개한 바 있습니다.
한국사에서 위대한 왕 두 분을 꼽는다면 운영자는 세종대왕과 광개토대왕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인이라면 문화와 영토의 관점에서 두 분의 은공을 잊을 수 없는 일이지요.
4면 돌기둥에 빼꼭히 적은 비문을 반복해서 찍으며 거기 도취되었던 게 사실입니다. 호로구루의 돌벽과 주위의 임진강도 아름다웠지만.
주지하다싶이 3년상을 마친 뒤 설치한 이 비석의 의미가 너무나 중차대하므로 일제도 중국 침략기에 지네 영토였음을 증거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비문 글자를 고쳐 탁본까지 떴으며, 중국에서도 남침전략상 비문을 조작하였으며, 조작 시비를 차단하고 고조선과 발해의 역사를 지우기 위한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2000년대 들어서 비석 주위를 유리창으로 막아 지네 학자외의 일반인의 관람을 차단하고 금지하였다. 아래 그림에 독립기념관 것과 탁본을 소개합니다.
석 장의 4면 탁본은 동일한 것입니다.
지명이 아름다워 찾은 연천의 아우라지는 얕은 흐름이었지만 두 물이 어울어지는 곳을 뜻하는 우리 고유어로 짐작됩니다. 한자로는 양수리(兩水里)가 되겠네요. 한강을 이루는 양수리의 광활함에는 비할 바 아니지만.
정선아라리에 나오는 노래 가사와 뗏목이 운송수단이었던 시절의 고달프나 행복했던 시절을 상상해 봅니다. 삶의 애환을 녹여낸 민요의 가사는 해학도 잊지 않고 집어 넣습니다. 아래에 정선아우라지 동영상도 유튜브에서 찾아 올립니다.
신묘년조 논란은 영락 6년(396년) 기사 바로 앞에 실린 다음의 기록에서 시작된 논란이다. 이 부분의 내용은 신묘년(391년)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영락 6년(396년)부터 17년(407년)까지 사이에 이루어진 남진정책의 명분과 성과를 집약 기술한 집약문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