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iFQs-4-8cAs 

 

 

https://www.youtube.com/watch?v=FrVUp48HRgk 

 

 

https://www.youtube.com/watch?v=KQnQYA2pq88 

 

 

 

https://ko.wikipedia.org/wiki/%EA%B3%B6%EC%9E%90%EC%99%88

 

곶자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곶자왈(Jeju Gotjawal)은 숲을 뜻하는 제주어 ‘곶’과 가시덤불을 뜻하는 ‘자왈’을 합쳐 만든 글자로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져 요철(凹凸)지형이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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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자왈(Jeju Gotjawal)은 숲을 뜻하는 제주어 ‘곶’과 가시덤불을 뜻하는 ‘자왈’을 합쳐 만든 글자로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져 요철(凹凸)지형이 만들어지면서 나무, 덩굴식물 등이 뒤섞여 원시림의 숲을 이룬 곳을 이르는 제주 고유어이다.[1]

 

 

 

 

https://www.youtube.com/watch?v=IhJ1rcHDTuQ 

 

 

 

 

https://www.youtube.com/watch?v=33gzvAwupMw 

 

 

https://www.youtube.com/watch?v=jf9q4kntSUg 

 

 

https://www.youtube.com/watch?v=mXg8C3xVJe0 

"혼저옵서예"는 "어서오세요"란 뜻

 

 

 

https://www.youtube.com/watch?v=qSEQTyPmA7I 

 

 

https://kydong77.tistory.com/7483

 

연자방아 -성읍민속마을

말방아 or 연자방아 제주는 말이 많았으니 말방아겠지만 농촌에서는 장틀목 끝에 소를 메우거나 사람이 돌렸다. 알돌(바닥돌)과 웃돌(맷돌)로 구성되었는데, 둥글고 판판한 커다란 석판이 알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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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7484

 

성읍민속마을

동백나무에서 동박새가 우네요 http://www.freeegg.com/flash/player/channelPlayer.swf?id=368613&channelID=ky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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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YsQFDBsWsu8 

 

 

https://kydong77.tistory.com/18087

 

추사 김정희 선생 유배지/서귀포

금란지교 (金蘭之交) 지란지교 (芝蘭之交) 추사 김정희(1786-1856) 초의 의순(1786-1866) 집앞에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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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18044

 

추사 김정희, 세한도 발문

집앞에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이라 적었다. 제사를 번역하면, "세한도를 우선 이상적은 감상하시게. 완당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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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의 혼인지의 토굴은 입구 하나에다 토굴 안에다 전방과 좌우에 3개의 공간을 마련했으니, 

제주시의 삼성혈이 토굴 입구가 3개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

혼인지는 제주 탐라국의 건국 시조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신이 수렵생활을 하며 지내다가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를 만나 합동혼례를 올린 연못과 거주지인 토굴(土堀), 최근 축조한 三公主追遠祠가 있는데, 추원사까지 수국길이 조성되어 있어 새로운 관광지로 각광받는다.

참고로 그 유래가 동일한 제주시의 삼성혈부터 소개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C%84%B1%ED%98%88

 

삼성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성혈(三姓穴)은 제주시의 제주 칼 호텔과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사이의 송림 가운데에 위치한 3개의 구멍이다.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모흥혈'이라고도 한다. 탐라국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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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혈(三姓穴)은 제주시의 제주 칼 호텔과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사이의 송림 가운데에 위치한 3개의 구멍이다.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모흥혈'이라고도 한다. 탐라국 개국의 전설이 있는 유명한 곳이다. 태고 시대에 양을나(良乙那)·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의 3신이 이 세 웅덩이에서 태어나 사자(使者)가 데려온 3처녀를 배필로 맞아 살면서 탐라국을 세워 제주도의 개조가 되었다 한다. 현재도 3웅덩이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사당(祠堂)·비석이 있다. 1526년 제주목사 이수동이 양·고·부씨의 후손들에게 혈제를 지내게 하면서 치제가 시작되었다. 1698년 삼을나묘를, 1827년 전사청을, 1849년 숭보당을 세웠다.

 

 

 

김종직, 毛羅歌

 

https://blog.daum.net/domountain/17955917

 

주진촌(朱陳村) - 백거이(白居易)

산과바다 白居易 詩 HOME              주진촌(朱陳村) - 백거이(白居易)              주진촌 徐州古豊縣(서주고풍현) : 서주의 고풍현에 有村曰朱陳(유촌왈주진) : 마을 하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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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daum.net/lee1716508/13452933

 

주진촌시(朱陳村詩)

주진촌시(朱陳村詩)                             백낙천(白樂天) 고을이 멀어 관官의 일이 적고 사는 곳이 깊숙해 풍속이 순후하네 재물이 있어도 장사를 하지 않고 장정이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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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촌시(朱陳村詩)

                             백낙천(白樂天)

 

고을이 멀어 관(官)의 일이 적고

사는 곳이 깊숙해 풍속이 순후하네

재물이 있어도 장사를 하지 않고

장정이 있어도 군대에 가지 않네

집집마다 농사일을 하면서

머리가 희도록 밖으로 나가지 않네

살아서는 주진촌 사람이요

죽어서도 주진촌 흙이 되네

밭 가운데 있는 노인과 어린이들

서로 쳐다보며 어찌 그리 즐거운가

한 마을에 오직 두 성씨가 살아

대대로 서로 혼안을 한다네

친척은 서로서로 모여서 살고

노인과 젊은이가 함게 노닌다네

황계와 백주(白週)로

열흘이 멀다 하고 모여 즐기네

살아서는 멀리 이별하는 일 없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이웃에서 고르네

죽어서도 먼 곳에 장사하지 않아

옹기종기 무덤들이 마을을 둘렀네

이미 삶과 죽음이 편안하고

몸도 마음도 괴롭히지 않네

이런 까닭에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때로는 현손을 보는 사람도 있다네

 

첫째는 중국고사를 살펴보면 당나라 중원 땅에 주(朱)씨 성을 가진 사람들과 진(陳)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마을에 수백호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공동묘지도 함께 사용하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해도 서로 다툼 없이 살아가는 우애(友愛)가 대단한 군자(君子)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을 일컬어 주진촌(朱陳村)이라 하였다. 이들 중 주씨성을 가진 아들과 진씨성을 가진 딸이 한마을에서 혼인(婚姻)을 하게 되었는데 주씨 성을 가진 아들의 이름이 사(査)이고, 진씨 성을 가진 딸의 이름이 돈(頓)이였다. 그래서 사돈(査頓)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하는 고사이다. 

당나라 천재시인 백거이(호 낙천) 선생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고 주진촌을 방문하여 보니 과연 현인군자(賢人君子)들이 사는 곳이라 감탄하여 장문(長文)의 5언 고시형 시(詩) 주진촌시를 지어 오늘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GPfQWh9xk8 

 

 

 

 

진입로 표지석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9D%98%EC%A0%9C%EB%AC%B8

 

조의제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조선 시대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 1431년 ~ 1492년)이 지은 제사문으로 항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회왕 즉, 초 의제를 추모하는 글이다. 왕위를 항우에게 찬탈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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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 김종직의 부관참시 원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503

 

조의제문(弔義帝文)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종직이 1457년(세조 3)에 밀성(密城)에서 경산(京山)으로 가는 길에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다가 꿈에 의제(초나라 懷王)를 만났는데 여기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조문(弔文)을 지었다고 한다.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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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제문 (弔義帝文)

정축 10월 어느 날

나는 밀성[3] 으로부터 경산[4] 으로 향하여

답계역에서 숙박하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 회왕인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5]에게 살해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그래서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이르기를

“회왕은 남초 사람이요,

나는 동이 사람으로

지역간 서로 떨어진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만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또한 천 년이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로움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어찌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것을 알 수 없으니 마침내 글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사물의 법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와 오상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오랑캐라서 인색한 바 아니니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오랑캐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한다

옛날 조룡[6] 이 아각을 가지고 노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어라

비록 전유와 추애일지라도 어찌 보전하겠는가

그물 벗을 생각에 급급했으니

당시 육국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과 짝이 되었다오.

항량(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군의 자손으로

어호(魚狐)를 쪼치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랐어라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도다.

건부(乾符)를 쥐고 임금이 됨이여

천하에는 진실로 미씨보다 큰 것이 없었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에 들어가게 함이여

역시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았다.

양흔낭탐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평정하였구나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오호라!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이여

나는 왕에게 더욱 두렵게 여겼어라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나

빈의 산이 우뚝하여 하늘에 닿음에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을 향하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구나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른다.

천지가 장구한들 한이 어찌 다할까

넋은 지금도 표탕하다.

내 마음이 금석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구나

자양의 노필을 따라감이여

생각이 초조하여 흠흠하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옵컨데 영령은 와서 제사음식을 받으소서.

 

허균의 재 풍자

교산 허균은 점필재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꼰 것을 두고 김종직론이라는 글을 통해 조롱한다. 허균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주시(酒詩)를 기술했던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그 밑에서) 벼슬을 했다면 그 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화란을 당했던 것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의 간사하고 교활했던 것에 화내서 사람의 손을 빌어다가 명백하게 살륙한 것이 아닐는지?"라고 비꼬았다.

 

김종직론(金宗直論) - 교산 허균

천하에 이록(利祿)이나 취하고 자신의 명망을 훔치는 자가 있는데, 세상에서 군자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걸 믿을 것인가? 나는 믿지 못한다고 말하겠다.왜 그게 믿어지지 않을까? 자기 것으로 해버리거나 훔친다면, 비록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에서 나왔더라도 거짓 짓임을 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록과 명망이겠는가. 이미 이록을 취하였고 명망을 훔쳐서 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의 영화와 녹봉을 누린다면, 정말로 자기의 지혜를 다하고 온 마음을 기울여 자기의 직분으로 당연히 할 일에 맞도록 하여야 그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보완할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영화와 녹봉은 나의 뜻이 아니다.” 하면서, 능청스럽게 한갓 그 수레를 붉게 꾸미고 그 인끈을 붉게 하면서 일생을 마친다면, 그의 죄악은 죽음을 당해도 용서받지 못하리라.
김종직은 근세에 이른바 대유(大儒)다. 젊은 시절에는 벼슬하려고도 않더니, 세조(世祖)가 과거에 응시하도록 다그치니 부득이해서 과거에 올랐으며, 또한 시종(侍從)의 직책에 드나들더니 벼슬이 높아졌다. 그러면서는 모친이 늙었으므로 억지로 벼슬한다고 일컬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천수(天壽)를 다하고 세상을 마쳤으나, 오히려 벼슬을 그만두지 않았었다. 그의 문인(門人) 김굉필(金宏弼)이 더러 그가 시정책을 건의하지 않음을 간(諫)하면, 이어서, "벼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건의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김종직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록을 취하고 명망을 훔치며 능청스럽게 한갓 수레를 붉게 하고 인끈을 붉게 한다고 말해지는 바의 사람이었다.
계유정란(癸酉靖亂)을 당하여, 김종직은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 무리들처럼 녹을 먹던 사람이 아니었고, 김시습(金時習)처럼 평소에 은택(恩澤)을 입었던 것도 없었다. 다만 시골의 변변찮은 한 선비여서 옛 임금 단종(端宗)을 위하여 죽어야 할 의리도 없었으니, 그가 벼슬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 본래 위선이었다. 비록 위선이었지만 이미 뜻을 세웠다면, 임금이 아무리 다그치더라도 죽기를 맹세하고 가지 않았어야 옳았다. 그런데 화(禍)를 두려워하여 억지로 나온 것처럼 하였다. 이미 과거에 합격해서는 붓을 귀에 얹고 임금의 말을 기록했으며, 사책(史策)을 끼고 고운 털자리에 엎드리기도 하였다. 또 고을을 맡아서 그의 어머니를 봉양했으니, 그가 이록을 취했던 것은 정도를 넘었었다. 또 명호(名號)를 훔치고 싶어 남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어버이가 있다. 그러나 끝내는 서산(西山)의 뜻을 지키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의 복제(服制)를 벗고도 응교(應敎) 벼슬을 받았었고, 10년 동안에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뛰어올랐다. 그만 쉴 만도 하나 오히려 더 탐내며 떠나가지 않았다. 책임을 완수치 못하면서 직책상 당연히 해야 할 것도 하지 않다가, 문인(門人)이 그 점을 지적해 주면 모면하려고 꾸며대는 말로써 대답하였다. 이게 과연 군자라고 여길 만한가? 이런 속임수는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지금까지 계속하여 그 사람을 칭찬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일까? 내가 가만히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았더니, 가학(家學)을 주워모으고 문장 공부를 해서 스스로 발신(發身)했던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하고 마음은 교활하여 그의 명망을 높이려고 한 세상 사람을 용동(聳動)시켰고, 임금의 들음을 미혹되게 하여 이록을 훔치는 바탕으로 삼았다. 이미 그러한 꾀를 부렸지만 자기의 재능을 헤아리니 백성을 편하게 하고 구제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하고는 자신의 졸렬을 감추는 수단으로 하였으니 그것 또한 공교로웠다.
그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주시(酒詩)를 기술했던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이 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화란을 당했던 것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의 간사하고 교활했던 것에 화내서 사람의 손을 빌어다가 명백하게 살륙한 것이 아닐는지?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의 형적(形迹)은 살펴보지 않고, 괜스레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치켜 올려 대유(大儒)로 여기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때문에 특별히 나타내어 기록한다.

허균의 풍자는 당대의 논란거리가 되어 정조 때까지 허균의 서적이 불온서적으로 몰리는 원인이 된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3994

 

홍길동전(洪吉童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길동전」은 16세기 이후 빈번해지던 농민봉기와 그것을 주도했던 인간상에 대한 구비전승을 근간으로 하고, 그 현실적 패배와 좌절을 승리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민중의 꿈을 충족시키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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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은 작품 경향, 사회의식, 역사의식에 있어서 「금오신화」에서 마련된 현실주의적 경향, 강렬한 사회 비판적 성격, 진보적인 역사의식을 이어받아, 후대의 연암소설(燕巖小說)과 판소리계 소설 등의 작품으로 넘겨주는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소설사적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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