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앞에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이라 적었다.
제사를 번역하면, "세한도를 우선 이상적은 감상하시게. 완당 김정희"
그림을 해석하면, 내 마음은 벗님들 덕분에 한겨울에도 춥지 않아! 오두막이야 썰렁하지만.
https://www.youtube.com/watch?v=Jyx9oAoq54E&t=150s
Jose Carreras, Placido Domingo, Luciano Pavarotti
https://www.youtube.com/watch?v=0mGoYySWw_0
https://kydong77.tistory.com/21236
https://blog.naver.com/bhjang3/140036533615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歲寒圖 跋文) 원문과 번역문.
藕船是賞 阮堂
- 우선(藕船) 이상적에게 주다. 완당
지난 해(1843, 헌종9)에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부쳐주었고, 금년에 또 우경(藕畊)이 지은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을 부쳐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세상에서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만리 먼 길에서 구입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입수한 것이지, 한때에 해 낸 일이 아니다. (……하략……)
이하의 편지 내용은 위 포스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도병훈, 추사 적거지와 세한도
1840년 6월, 추사는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수행하여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기가 되었던 연행燕行을 30년 만에 다시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동년 8월 하순, 안동김씨 세력의 음모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면서 명문가 자제로서 승승장구하던 추사의 삶은 하루아침에 파탄에 이른다.
당시 충남 예산의 집에 머물던 추사는 의금부 금부도사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호송된다. 이후 추사는 6차례나 모진 고문을 당하고, 또한 곤장 36대를 맞을 정도로 참담한 수모와 고초를 겪었다.
1840년 9월 초, 추사는 친구의 도움으로 목숨만을 건진 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기약 없는 제주 유배 길을 떠났다.
1840년 9월 말, 추사는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 화북으로 건너갔다. 80리길을 더 들어가 서귀포시 대정읍 송계순의 집에 도착했다. 바람이 세고 춥고 험난한 지역이었다. 추사는 얼마 후 다시 강도순의 집 사랑채에 짐을 풀었지만 집 주위에 탱자나무로 가시 울타리를 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였다.
설상가상으로 유배당하던 해에 해배에 대한 희망의 끈이었던 절친한 친구 김유근이, 또 1842년엔 부인 예안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추사의 유배 생활은 당시 그가 남긴 수많은 서간에 잘 드러나듯, 기가 막히는 억울함에다 숱한 풍토병과 눈병에 시달렸으며, 겨울에는 한풍이 여름에는 무더위와 높은 습도로 고난과 역경의 삶을 연명해야 했다.
유배기간동안 제자인 소치 허련과 역관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適 184-1865), 친구인 초의선사가 제주를 찾아왔지만 세상은 추사를 잊어갔다. 추사는 책과 서화, 제주의 유생들을 가르치는 일로 ‘푸른 바다와 긴 하늘 같이 한이 끝이 없는’ 유배생활의 고독과 시름을 달랬다.
이처럼 유배지에서 외롭게 삶을 살아가는 추사에게 그나마 큰 위안은 책을 보는 것이었다. 이상적은 중국에 여러 번 드나 든 역관으로서 귀한 중국책들을 구하여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그의 변함없는 마음에 답하고자 1844년 59세의 추사는 서간지를 펼쳐 놓고 붓을 들었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이 세한도다.
세한도를 전해 받고 감격한 주1) 이상적은 그해 10월 동지사 이정응(李晸應) 일행을 수행하여 연경으로 가서 이듬해 1845년 정월 22날 그의 벗인 오찬(吳贊)의 장원에서 벌어진 잔치에 초대 받는다. 이 자리에는 오찬 ․ 장요손 등 옹방강(*추사가 아버지를 수행하여 연경에 갔을 때 만난 금석학의 스승)의 제자 17명이 참석을 하였는데, 이상적이 세한도를 꺼내 보이자, 이들은 깊은 감동과 함께 제(題)와 찬시를 쓴다. 주2)
주1)이상적이 세한도를 전해 받고 추사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려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어찌 이런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감개가 절절하셨단 말입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나 이권을 좇지 않고 스스로 초연히 세상의 풍조를 벗어났겠습니까? 다만 보잘것없는 제 마음이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그런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책은 마치 문신을 새긴 야만인이 선비들의 장보관(章甫冠)을 쓴 것 같아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정치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저절로 청량(淸凉)세계에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서 장황을 한 다음 친구들에게 구경을 시키고 제영을 부탁할까 합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림을 구경한 사람들이 제가 정말로 속물에서 벗어나 권세와 이권 밖에서 초연하다고 생각할까 하는 것입니다.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치 않은 일입니다.(이 글은 박철상 지음, 세한도, 문학동네, 2010, 183~184쪽에서 인용함)
주2)현존하는 세한도는 청나라 학자 16인의 제찬, 또는 제영題詠과 함께 길이 약 13m의 긴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 이 장권의 세한도 두루마리는 이상적이 죽고 그의 제자였던 이병선과 김준학,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의 소유가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민규식은 경성제대 중국철학교수 후지츠카 지카시에게 세한도를 팔게 된다. (……하략……)
[참고] 세한도 발문의 중심문장의 원문과 추사선생의 해설을 좀 더 자세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孔子曰
공자왈, 공자가 『논어』 「자한」편에 에 이르기를,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오랜 세월) 후에 시드는 것을 안다고 하였네.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송백시관사시이부조자,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은 것이라서,
歲寒以前一松栢也
세한이전일송백야,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한 결 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요,
歲寒以後一松栢也
세한이후일송백야,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 결 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이지만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성인특칭지어세한지후, 성인은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에 이를 일컬었네..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금군지어아 유전이무가언 유후이무손언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함에 유배전이라고 해서 더 잘한 것도 없고, 유배 후라고 해서 더 못한 것도 없네.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연유전지군 무가칭 유후지군 역가견칭어성인야야
그러나 유배 오기 전의 그대는 특별히 칭찬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유배온 뒤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성인지특칭 비도위후조지정조경절이이
성인이 특별히 언급한 것은 단지 늦게 시드는 곧은 지조와 굳은 절개 때문만이 아니라,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역유소감발어세한지시자야
또한 날씨가 추울 때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일세.
위의 번역 글은 강관식의 추사의 그의 시대(돌베개, 2002) 213~214쪽의 번역을 바탕으로 도병훈님이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이다. ‘후조後凋’에 대한 해석은 말 그대로 하면 ‘늦게 시든다’이지만, 전체 문맥상 흔히 ‘늘 푸름’ 또는 ‘시들지 않는다’고 해석하며, ‘시드는 것을 뒤로 한다’는 해석도 있다. ‘(오랜 세월) 뒤에 시든다’고 해석한 것은, 원래 한자 문명권에서는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의 개념이 없다는 세계관에 기인한다. 소나무도 언제까지 푸를 수는 없고 다만 살아 있는 동안 푸름이 지속되므로 공자도 ‘후조’라 했다는 것이다.
김정희[金正喜]
1786년(정조 10) ~ 1856년(철종 7)조선 말기의 문신·실학자·서화가. 금석학자. 왕희지 필법에도 능숙함.
호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노(果老),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정희 [金正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세한도' 그림에서 네 그루의 소나무와 초막의 상징에 대한 갑론을박도 있으나 소나무는 물론 염량세태에도 변함 없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위리안치된 추사 자신을 찾아주던 제자인 이상적, 소치 허련과 친구인 초의선사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세한도 그림에서 네 그루의 소나무와 초막의 상징에 대한 갑론을박도 있으나 소나무는 물론 염량세태에도 변함 없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위리안치된 추사 자신을 찾아주던 제자인 이상적, 소치 허련과 친구인 초의선사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조선 후기에 금속학을 개척하며 9년간의 제주 유배시절에도 서예로 자신을 가다듬으며 언제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불굴의 위인이셨다.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추구한 흔적은 그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호를 바꿔간 데서도 증명된다.
이상적(李尙迪)
1804년(순조 4) ~ 1865년(고종 2)
호 우선(藕船)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혜길(惠吉), 호는 우선(藕船). 한어역관(漢語譯官)집안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연직(李延稷)이다. 김정희(金正喜)의 문인이다.
Christmas(크리스마스)의 뜻은 "그리스도를 위한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Christ(구세주)와 mass(예배)의 합성어
https://www.youtube.com/watch?v=UPRrqigHtq0
레미드 구루몽 - 낙엽
https://www.youtube.com/watch?v=3h6nRVD5iNQ
*시몬, 네 귀에 좋다고 낙엽 밟지 마! 낙엽은 아직 아프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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