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세한도

 

 

집앞의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이라 적었다.

제사를 번역하면, "세한도를 우선 이상적은 감상하시게. 완당 김정희"

그림을 해석하면, 내 마음은 벗님들 덕분에 한겨울에도 춥지 않아! 오두막이야 썰렁하지만.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 원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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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 원문- 번역문.

발문이 적힌 세한도. 발문을 자른 세한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歲寒圖 跋文) 원문- 번역문. 번역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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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세한도 발문

집앞에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이라 적었다. 제사를 번역하면, "세한도를 우선 이상적은 감상하시게. 완당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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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명화가이자 추사의 제자였던 이한철[1]이 그린 초상화. 보물 547호.
이름
김정희(金正喜)
본관
경주 김씨 상촌공파[2]
출생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3]
사망
1856년(철종 7) 10월 10일 (70세)
경기도 과천현 동면 주암동리 과지초당[4]
원춘(元春)
완당(阮堂)·추사(秋史) 등[5]

 

https://namu.wiki/w/%EA%B9%80%EC%A0%95%ED%9D%AC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 항목

 

2. 생애

1786년(정조 10년)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큰아버지 김노영이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양되었다.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지 24개월(혹은 1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

젖을 떼자마자 붓을 가지고 놀았는데 부친 김노경이 붓을 빼앗으려 하자 사력을 다해 붓을 쥐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릴 정도로 붓에 애착이 강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주변에서는 훗날 명필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7세 때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 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이 보고는 명필이라고 칭찬했다는 영재로 그의 영특한 재능을 보고 감탄한 박제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정조 때 집안 친척들이 많이 죽었지만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아버지가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채제공과 관련된 야사가 있는데 정치적 반대파라 평상시에 말도 섞지 않던 채제공이 자신의 집에 온 것에 놀라서 김정희의 아버지가 연유를 물으니 체재공은 김정희의 글을 보고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오. 허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하고 예언했다고 한다. 예언이 적중하기라도 했을까? 김정희는 부모를 일찍 잃고 아내들과도 사별하며 고문당하고 귀양을 2번이나 가는 등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어머니를 결혼 직후인 16살(1801년)에 잃고 20살 때 아내, 계모, 스승 박제가도 잃었다. 3년상 후 순조 9년(1809) 생원시에 장원 급제한다. 1810년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 군관으로 따라갔다. 60일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최고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6] 이후 벼슬에 나오지 않으면서 <실사구시론>과 같은 책을 썼으며 1816년 무학대사나 고려 태조 왕건의 비로 알려졌던 북한산 비봉의 비를 신라 시대의 진흥왕 순수비라고 고증했던 선대 학자들의 고증이 올바름을 확실하게 했다.[7] 그리고 또다른 순수비인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도 머나먼 개마고원에 있어서 직접 찾아가 수습하지는 못했지만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지인에게 부탁해 깨진 것을 수습하고 원위치를 부탁, 비각을 세우고 현판을 만들어 보내는 등 황초령비의 보존에도 김정희의 공이 컸다.

순조 19년(1819)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병조참판에까지 올랐는데 순조 27년(1827)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인 19세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되었다. 하지만 순조 30년(1830) 효명세자가 죽자 안동 김씨인 김우명이 탄핵하여 파면되고 아버지는 귀양을 갔다. 아마도 김우명이 공주목 비인현감으로 있을 때 파직된 일로 앙갚음을 한 듯하다. 김정희는 아버지의 복귀를 위해 명성을 떨치던 중임에도 직접 격쟁을 하기도 했다. 순조가 죽던 해에 복귀되어 아버지와 함께 조정으로 돌아온다. 순조는 귀양을 보낼 때도 '조정에서 나오는 말이 쫓아내라 몰아내라 이딴 거밖에 없구나.'하는 투로 말했다. 안동 김씨 기세에 눌렸지 순조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헌종 1년(1835)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복귀해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8] 하지만 관직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는데 복귀한지 5년이 지나 헌종 6년(1840) 윤상도의 옥에 관련되어 고초를 겪었다.[9] 이때 김정희는 고문을 심하게 받아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친구인 우의정 조인영이 '추사를 살려달라.'는 상소를 올린 덕분에 죽음을 면한 대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8년간 유배당하는데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라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지 "저번에 보내온 음식들은 태반이 썩었다. 좋은 음식 좀 보내라."하고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먼 제주도까지 보내야 했으니 음식이 제대로 도착하는게 이상하다. 설상가상으로 재혼한 부인도 헌종 8년(1842) 11월에 죽었다. 부인이 병들었다는 소식에 김정희는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편지를 썼을 때는 이미 부인이 죽은 뒤였다. 2달이 지나 뒤늦게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정희는 슬퍼하며 '내생에 다시 부부가 되어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죽어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알게 하고 싶다.'는 애절한 를 쓰기도 하였다. 유배 기간에 추사체를 만들었는데 2014년 1월 28일 방영된 KBS 다큐공감에서 위의 일화가 소개되었다. # 당시 김정희가 먹었을 음식인 강조밥(좁쌀만으로 지은 밥)과 생된장을 백종원이 직접 먹어보는데 거칠고 먹기 힘든 음식이라는 반응이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대립 사이에서 일종의 중간 관리자 역을 하던 영의정 권돈인과도 친했는데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로 철종 2년(1851) 같이 파직되어[10] 함경도 북청부로 유배를 갔다. 67살 늙은 나이였는데 유배 기간 동안 고대 석기를 연구했다. 「석노가」(石砮歌)에서 그는 귀신의 조화로 보던 돌도끼나 돌화살촉을 생활 도구이자 무기임을 밝혀내고 토성 유적과 갈라서 보자고 주장했다.[11]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철종 3년(1852) 겨울에야 풀려났다. 이로써 3년+8년+1년으로 도합 12년 유배.

북청부에서 돌아온 뒤 김정희는 과거 아버지가 과천에 마련해둔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머물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71살되던 철종 7년(1856)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가 1856년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했다고 하는데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은 봉은사의 판전 현판으로 세상을 떠나기 4일 전에 쓴 글이라고 한다. 김정희가 얼마나 작품에 열정적이었던지 평생 동안 벼루 열 개에 구멍을 내고 붓 천 자루를 닳게 했다고 한다.[12]

 

 

 

https://www.youtube.com/watch?v=iS1dQDPxTo8 

 

https://www.youtube.com/watch?v=IlzHVJP5Qqg&t=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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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史 金正喜, 歲寒圖와 그 발문& 예산 추사고택

집앞에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이라 적었다. 제사를 번역하면, "세한도를 우선 이상적은 감상하시게. 완당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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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 유배지/서귀포

금란지교 (金蘭之交) 지란지교 (芝蘭之交) 추사 김정희(1786-1856) 초의 의순(1786-1866) 집앞에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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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mas(크리스마스)의 뜻은 "그리스도를 위한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Christ(구세주)와 mass(예배)의 합성어

https://www.youtube.com/watch?v=Jyx9oAoq54E&t=60s 

 

https://www.youtube.com/watch?v=0mGoYySWw_0 

 

https://www.youtube.com/watch?v=UPRrqigHtq0 

 

 

https://kydong77.tistory.com/20839

 

성읍민속마을/ 서귀포 추사유배지& 세한도 발문

https://www.youtube.com/watch?v=33gzvAwupMw https://www.youtube.com/watch?v=jf9q4kntSUg https://www.youtube.com/watch?v=mXg8C3xVJe0 "혼저옵서예"는 "어서오세요"란 뜻 https://www.youtube.com/w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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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5iPUvhIR1uc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D%98%B8

 

한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같은 이름을 가진 중국 후한 말의 무장에 대해서는 한호 (후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석봉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12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에 대해서는 한효섭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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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 서체의 특징 및 평가

 
한호의 증류여장서첩

한호는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혔으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뛰어난 평필가들의 필법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 등에 모두 뛰어나게 되었다. 석봉 서체의 특징은 그가 조송설(趙松雪)체를 쓰면서도 자기 독특한 체풍(體風)을 세운 데 있다. 그렇게 한호는 그때까지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깨뜨리고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여 석봉류의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만들어냈다.

엄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은 〈필담(筆談)〉에서 석봉의 글씨를 가리켜 “성난 사자가 바위를 갉아내고, 목마른 천리마가 내로 달리는 것같이 힘차다.”라고 했으며, 명나라 한림 주지번(朱之番)은 “석봉의 글씨는 능히 왕우군(王右軍)·안진경(顔眞卿)과 어깨를 겨눌 만하다.”라고 하였다.

선조도 그의 대자(大字)를 보고 “기(奇)하고 장(壯))하기 한량없는 글씨”라고 찬탄하면서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 집에 연회를 베풀었다. 이어 선조는 한벽(閑僻)한 고을 군수에 임명하면서 “필법을 후세에 전하게 하고자 하니 권태로울 때는 구태여 쓰지 마라. 게을리도 말고 서둘지도 마라.”라고 타일렀으며, 선조 친필로 〈醉裡乾坤 筆奪造化(취리건곤 필탈조화)〉의 8자를 써 주었다.

그는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조선 초기의 4대 서가(四大書家)로 꼽힌다. 또한 한호의 글씨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친필 진본이 거의 없으나 석봉서법이라든가 석봉천자문과 같은 책이 모간본으로 전해지고 있어 그의 흔적들 더듬어 보게 한다. 그러나 그의 글씨로 비문이 많이 남아 있어 탁본으로 유행하고 있다.

작시(作詩)에 능한 차천로, 작문에 능한 최립과 함께 송도삼절로 불린다.

 

내가 좋아하는 이 해녀 조각품은 없어진 듯함. 모형 돼지도 치우고.

 

https://www.youtube.com/watch?v=mXg8C3xVJ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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