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六十九 蘇秦列傳第九

사기 권69

소진 열전 제9-7

久之,秦召燕王,燕王欲往,

蘇代約燕王曰:

그 뒤에 오랜만에 진나라가 연왕을 초대하였다.

연왕은 거기에 가려고 하였는데

소대는 연왕을 만류하여 말했다.

「楚得枳[一]而國亡,[二]齊得宋而國亡,[三]

齊﹑楚不得以有枳﹑宋而事秦者,何也?

“초나라는 지현을 얻은 까닭에 나라가 망하고

제나라는 송나라를 얻은 까닭에 망하였습니다.

제나라와 초나라 두 나라가 지와 송을 보유하면서

진나라를 섬기지 못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則有功者,秦之深讎也。

秦取天下,非行義也,暴也。

秦之行暴,正告天下。[四]

공업이 있는 자는

진나라에게는 원한 깊은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진나라가 천하를 취하는 것은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고 폭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진나라가 폭력을 행사할 때는

버젓이 천하에 경고합니다.

注[一]集解徐廣曰:「巴郡有枳縣。」正義枳,支是反,今涪州城。在秦,枳縣

在江南。

注[二]集解徐廣曰:「燕昭王三十三年,秦拔楚鄢、西陵。」正義按:西陵在黃

州。

注[三]正義年表云齊湣王三十八年,滅宋。四十年,五國共擊湣王,王走莒。

注[四]索隱正告謂顯然而告天下也。

「告楚曰:

『蜀地之甲,乘船浮於汶,[一]

乘夏水[二]而下江,五日而至郢。

초나라에 고하기를

‘촉의 땅 갑병이 배를 타고 문수에 떠서

하수를 타고 강수를 내려가면

닷새면 초나라 서울 영에 도착하리라.

漢中之甲,乘船出於巴,[三]

乘夏水而下漢,四日而至五渚。[四]

한중의 갑병이 배를 타고 파수에 나와

하수를 타고 한수를 내려가면

나흘에 오저에 도착하리라.

寡人積甲宛東下隨,[五]智者不及謀,

勇土不及怒,寡人如射隼矣。[六]

王乃欲待天下之攻函谷,不亦遠乎!』

과인이 군사를 완에서 실어 동쪽 수로 내려가면

어떤 슬기 있는 자도 계략을 쓸 겨를이 없고

어떤 용사도 성낼 틈이 없기가

과인이 새매를 쏘는 것과 같은데

왕은 천하의 제후가 함곡관을 치고

진나라를 토벌하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아득한 일이 아닌가.’합니다.

楚王為是故,十七年事秦。

초왕은 이 때문에

17년간 진나라를 섬겼습니다.

注[一]集解眉貧反。索隱音旻。江所出之岷山也。

注[二]索隱夏音暇。謂夏潦之水盛長時也。

注[三]索隱巴,水名,與漢水近。正義巴嶺山在梁州南一百九十里。周地志云:

「南渡老子水,登巴嶺山。南回*(記)*大江。此南是古巴國,因以名山。」

注[四]集解戰國策曰「秦與荊人戰,大破荊,襲郢,取洞庭、五渚」。然則五渚

在洞庭。索隱按:五渚,五處洲渚也,劉氏以為宛鄧之閒,臨漢水,不得在洞

庭。或說五渚五湖,益與劉說不同也。

注[五]索隱宛縣之東而下隨邑。

注[六]索隱按:易曰「射隼于高墉之上,獲之,無不利」。秦王言我今伐楚,必

當捷獲也。正義隼若今之鶻。

「秦正告韓曰:

『我起乎少曲,[一]一日而斷大行。[二]

我起乎宜陽而觸平陽,[三]二日而莫不盡繇。[四]

我離兩周而觸鄭,五日而國舉。』[五]

또 진나라는 바로 한나라에 경고하여 말했다.

‘우리 편이 소곡으로부터 출병하면

하루에 태행의 산길을 차단하리라.

우리 편이 의양으로부터 출병하여 한나라의 평양을 찌르면

이틀에 한나라는 동요하지 않는 곳이 없으리라.

우리 편이 양주를 통과하여 정나라를 찌르면

닷새에 한나라는 멸망하리라.’하였습니다.

韓氏以為然,故事秦。

한씨는 이것을 그렇다고 수긍하여

그 때문에 진나라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注[一]索隱地名,近宜陽也。正義在懷州河陽縣西北,解在范睢傳。

注[二]正義太行山羊腸阪道,北過韓上黨也。

注[三]正義宜陽、平陽皆韓大都也,隔河也。

注[四]索隱音搖。搖,動也。

注[五]索隱離,如字。謂屯兵以罹二周也,而乃觸擊于鄭,故五日國舉。舉猶

拔也。正義離,歷也。歷二周而東觸新鄭州,韓國都拔矣。

「秦正告魏曰:

『我舉安邑,塞女戟,[一]韓氏太原卷。[二]

또 진나라는 바로 위나라에 경고하여 말했다.

“우리편이 안읍을 함락하고

여극의 길을 막으면

한씨의 태원은 멍석말이가 되리라.

我下軹道,南陽,封冀,[三]包兩周。[四]

乘夏水,浮輕舟,彊弩在前,錟[五]戈在後,

決滎口,魏無大梁;[六]

우리 편이 지도·남양·봉기로 내려가서

양주를 포위하여

여름철 강물에 가벼운 배를 띄워

전방에 강노를 후방에 담극을 갖추어

형택의 들머리를 깨뜨리면

위나라의 국도 대량을 칠 수 있으리라.

決白馬之口,魏無外黃、濟陽;[七]

決宿胥之口,[八]魏無虛、頓丘。[九]

陸攻則擊河內,水攻則滅大梁。』

또 백마진의 들머리를 깨뜨리면

위가 외황과 제양을 없애고

숙서진의 들머리를 치면

위가 허·둔구를 없애리라

육지로 공격하면 하내를 치고

물길로 치면 대량을 쳐 없애리라.’

魏氏以為然,故事秦。

위씨는 이 말을 수긍하고

그 때문에 진나라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注[一]索隱女戟,地名,蓋在太行山之西。

注[二]索隱劉氏卷音軌免反也。按:舉安邑,塞女戟,及至韓氏之韓國宜陽也。

太原者,魏地不至太原,亦無別名太原者,蓋「太」衍字也。原當為「京」。京

及卷皆屬滎陽,是魏境。又下軹道是河內軹縣,言「道」者,亦衍字。徐廣云

「霸陵有軹道亭」,非魏之境,其疏謬如此。正義卷,軌免反。劉伯莊云:「太

原當為太行。卷猶斷絕。」

注[三]集解徐廣曰:「霸陵有軹道亭,河東皮氏有冀亭也。」索隱按:魏之南陽

河內也。封,封陵也。冀,冀邑。

皆在魏境,故徐廣云「河東皮氏縣有冀亭」。

注[四]集解徐廣曰:「張儀曰『下河東,取成皋』也。」正義兩周,王城及鞏。

注[五]集解徐廣曰:「由反。」正義劉伯莊云:「音四廉反,利也。」

注[六]索隱滎澤之口與今汴河口通,其水深,可以灌大梁,故云「無大梁」也。

注[七]索隱白馬河津在東郡,決其流以灌外黃及濟陽。正義故黃城在曹州考城

縣東二十四里。濟陽故城在曹州朐縣西南三十五里。

注[八]集解徐廣曰:「紀年云魏救山塞集胥口。」索隱按:紀年作「胥」,蓋亦

津之名,今其地不知所在也。正義淇水出%州淇縣界之淇口,東至黎陽入河。

魏志云:「武帝於清淇口東因宿胥故瀆開白溝,道清淇二水入焉。」

注[九]集解徐廣曰:「秦始皇五年,取魏酸棗,燕虛、長平。」索隱虛,邑名,

地與酸棗相近。正義虛謂殷墟,今相州所理是。頓丘故城在魏州頓兵縣東北二

十里。括地志云:「二國地時屬魏。」

「秦欲攻安邑,恐齊救之,

則以宋委於齊。曰:

진나라는 위나라의 안읍을 치려고 하는데

제나라가 위나라를 도울 것을 염려하고

제나라에 송나라의 처지를 맡겨서 말했다.

『宋王無道,為木人以(寫)[象]寡人,射其面。

寡人地絕兵遠,不能攻也。

王苟能破宋有之,寡人如自得之。』

‘송왕은 무도한 임금으로서

과인의 용모를 본뜬 허수아비를 만들어

그 얼굴을 쏘아 대며 기뻐한다.

과인이 군사를 출동하려고 해도 거리가 멀어서

공격할 수 없다.

만약 임금께서 송나라를 깨뜨리고 그 땅을 빼앗아 가지면

바로 과인이 빼뺏아 가진 것과 같은 것이 되리라.’

已得安邑,塞女戟,

因以破宋為齊罪。[一]

그런데 이미 안읍을 얻고 여극을 막아서

목적을 달성하자 진나라는 송나라를 깨뜨린 것을

제나라의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

注[一]索隱秦令齊滅宋,仍以破宋為齊之罪名。

「秦欲攻韓,恐天下救之,

則以齊委於天下。曰:

진나라가 또 한나라를 채려고 하는데

천하가 제수가 한나라를 도울 것을 염려하여

제후에게 제나라의 처지를 맡겨 말했다.

『齊王四與寡人約,四欺寡人,

必率天下以攻寡人者三。

有齊無秦,有秦無齊,

必伐之,必亡之。』

‘제왕은 과인과 네 번 약정하고

네 번 다 과인을 기만했으며

천하제후를 이끌고 과인을 치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

제나라가 있으면 진나라가 망하고

진나라가 있으면 제나라는 망할 것이다.

반드시 제나라를 치고

반드시 제나라를 멸망시키기 바란다.’

已得宜陽、少曲,致藺、*[離]*石,

因以破齊為天下罪。

그런데 한나라의 의양과 소곡을 얻고

이·석을 공격해 목적을 달성하자

진나라는 제나라를 깨뜨린 죄를 천하 제후의 죄로 만들었습니다.

「秦欲攻魏重楚,[一]則以南陽委於楚。曰:[二]

또 진나라가 위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초나를 염려하여 한나라의 옛 땅 남양을 초나라에 맡기고 말했다.

『寡人固與韓且絕矣。

殘均陵,塞鄳阨,[三]

苟利於楚,寡人如自有之。』

‘과인은 본디부터 한나라와 교제를 끊으려고 하였다.

만약 초나라가 한나라의 균릉을 장악하고

맹의 요새지를 막아서

그것이 초나라의 이익이 된다면

과인 스스로 가지는 것과 같이 기쁜 일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魏弃與國而合於秦,因以塞鄳阨為楚罪。

이 때문에 위나라가 가까운 한나라를 버리고 진나라에 합류하자

진나라는 맹의 요새지 막은 것을 초나라의 잘못으로 돌렸습니다.

注[一]索隱重猶附也,尊也。正義畏楚救魏。

注[二]正義南陽鄧州地,本韓地也。韓先事秦,今楚取南陽,故言「與韓且絕

矣」。

注[三]集解鄳音盲。徐廣曰:「鄳,江夏鄳縣。均,一作『灼』。」索隱均陵在

南陽,蓋今之均州。黽音盲,縣名,在江夏。正義均州故城在隨州西南五十里,

蓋均陵也。又申州羅山縣本漢鄳縣。申州有平清關,蓋古鄳縣之塞。

「兵困於林中,[一]重燕、趙,

以膠東委於燕,以濟西委於趙。

진나라의 군사는 위나라를 쳐 임중에서 고전하였는데

연나라와 조나라가 적에게 붙을까를 염려해

교동을 연나라에 맡기고

제서를 조나라에 맡겼습니다.

已得講於魏,[二]至公子延,[三]

因犀首屬行[四]而攻趙。

그런데 위나랑와 화친을 맺자

위나라 공자 연을 이르게 하고

서수에게 행군을 위촉하여 조나라를 공격케 하였습니다.

注[一]集解徐廣曰:「河南苑陵有林鄉。」

注[二]索隱講,和也,解也。秦與魏和也。

注[三]索隱至當為「質」,謂以公子延為質也。

注[四]索隱犀首、公孫衍本魏將,因之以屬軍行。行音胡郎反,謂連兵相續也。

「兵傷於譙石,而遇敗於陽馬,[一]

而重魏,則以葉、蔡委於魏。

진나라 군사는 조나라의 초석에서 깨어지고

양마에서 패정을 당하였는데

조나라를 염려하여

섭·채를 위나라에 맡겼습니다.

已得講於趙,則劫魏,*[魏]*不為割。

困則使太后弟穰侯為和,

嬴則兼欺舅與母。[二]

그런데 조나라와 화친을 맺자

위나라를 협박하여

위나라는 섭·채를 떼어 주지 않았습니다.

져서 궁하면 태후의 아우 양후를 보내어 화평을 맺고

이기면 구와 어머니를 함께 속였습니다.

注[一]索隱按:譙石、陽馬並趙地名,非縣邑也。

注[二]索隱按:嬴猶勝也。舅,穰侯魏也。母,太后也。

「適燕者[一]曰『以膠東』,

適趙者曰『以濟西』,

適魏者曰『以葉、蔡』,

適楚者曰『以塞鄳阨』,

適齊者曰『以宋』,

연나라를 꾸짖는 데는 이르기를 ‘요동으로써 하고

조나라를 꾸짖는 데는 제서로써 하고

위나라를 꾸짖는 데는 섭·채로써 하고

초나라를 꾸짖는 데는 맹의 요새지 막은 일로써 하고

제나라를 꾸짖는 데는 송나라로써 하였다.

此必令言如循環,用兵如刺蜚,

母不能制,舅不能約。

이는 반드시 진나라가 열국을 꾸짖기를 고리와 같이 하였고

군사를 움직이기를 부초를 베어 자르는 것과 같이 하여

어머니도 이를 제지치 못하고

양후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注[一]索隱適音宅。適者,責也。下同。

「龍賈之戰,[一]岸門之戰,[二]封陵之戰,[三]

高商之戰,[四]趙莊之戰,[五]

秦之所殺三晉之民數百萬,

今其生者皆死秦之孤也。

위나라 용고의 싸움, 한나라와의 숭문의 싸움,

위나라와의 봉릉의 싸움, 고상의 싸움,

조나라 조장의 싸움에서

진나라가 죽인 3진의 백성은 수백만에 달하고

지금 살아 있는 자는

모두 진나라의 손에 죽음을 당한 자의 고아들입니다.

西河之外,上雒之地,

三川晉國之禍,三晉之半,

秦禍如此其大也。[六]

而燕、趙之秦者,[七]

皆以爭事秦說其主,此臣之所大患也。」

서하 밖, 상락의 땅·

삼천·진국의 전쟁 피해는 3진의 반을 차지합니다.

진나라의 화가 이렇도록 큰데도

진나라로 가는 연나라와 조나라 두 나라의 우세자는

모두 다투어 임금에게 진나라를 섬길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크게 근심하는 바입니다.”

注[一]集解魏襄王五年,秦敗我龍賈軍。

注[二]集解韓宣惠王十九年,秦大破我岸門。

注[三]集解魏哀王十六年,秦敗我封陵。

注[四]集解此戰事不見。

注[五]集解趙肅侯二十二年,趙莊與秦戰敗,秦殺趙莊河西。

注[六]索隱以言西河之外,上雒之地及三川晉國,皆是秦與魏戰之處,秦兵禍

敗我三晉之半,是秦禍如此其大者乎。

注[七]索隱燕、趙之人往秦者,謂游說之士也。

燕昭王不行。蘇代復重於燕。

연소왕은 진나라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고

소대는 다시 연나라에서 중용되었다.

燕使約諸侯從親如蘇秦時,或從或不,

而天下由此宗蘇氏之從約。

代、厲皆以壽死,名顯諸侯。

연나라는 제후에게 소진의 때와 같이

합종의 약정을 맺도록 권하였다.

제후 중의 어떤 자는 따르고 어떤 자는 따르지 않았으나

천하는 이로 해서 소씨의 합종의 약정을 중시하였다

소대와 소려는 다 타고난 수명을 제대로 살다가 죽었고

그 이름은 제후에 드러났다.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蘇秦兄弟三人,[一]皆游說諸侯以顯名,

其術長於權變。而蘇秦被反閒以死,

天下共笑之,諱學其術。

소진의 형제 셋은 모두 제후에게 유세하여 이름을 드러냈다.

그 술책은 권모와 변화에 능했는데

소진은 반간의 명분으로 죽음을 당하였고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이를 비웃었으며

그 술책을 배우기를 꺼려하였다.

然世言蘇秦多異,

異時事有類之者 皆附之蘇秦。

夫蘇秦起閭閻,連六國從親,

此其智有過人者。

그러나 항간에는 소진의 이설이 많다.

아마 다른 시대의 그 비슷한 사건들을

다 소진에게 끌어다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소진이 민간에서 몸을 일으켜

6국을 합종하게 한 것은

이는 그 지혜가 범상한 사람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吾故列其行事,次其時序,

毋令獨蒙惡聲焉。

그러므로 나는 그가 한 일을 기록하여

때의 전후를 간추려

오직 그만 악평을 입게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注[一]索隱按:譙允南以為蘇氏兄弟五人,更有蘇辟、蘇鵠,典略亦同其說。

按:蘇氏譜云然。

【索隱述贊】季子周人,師事鬼谷。揣摩既就,陰符伏讀。合從離衡,佩印者

六。天王除道,家人扶服。賢哉代、厲,繼榮黨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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