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六十九 蘇秦列傳第九

사기 권69

소진 열전 제9-4

因東說齊宣王[一]曰:

「齊南有泰山,東有琅邪,

西有清河,[二]北有勃海,

北所謂四塞之國也。

그리하여 다음은 동쪽으로 가서 제선왕에게 말했다.

“제나라는 남쪽에 태산, 동쪽에 낭야가 있고

서쪽에 청하, 북쪽에 발해가 있습니다.

이른바 이것이야말로 사면이 다 요새지인 나라입니다.

齊地方二千餘里,帶甲數十萬,粟如丘山。

三軍之良,五家之兵,[三]

進如鋒矢,[四]戰如雷霆,解如風雨。

제나라의 토지는 사방 2천여 리,

무장 병력 수십만, 양곡은 산더미 같고

삼군의 정예와 오가의 병은

빠르기가 화살 같고, 싸움을 하기는 우뢰와 같고,

흩어버리기는 풍우와 같이 빠릅니다.

卽有軍役,未嘗倍泰山,

絕清河,涉勃海也。[五]

臨菑之中七萬戶,

군역의 징발이 있어도

일찍이 태산을 등지고

청하를 건너고 발해를 넘어

임치의 안에 7만 호가 있습니다.

臣竊度之,不下戶三男子,三七二十一萬,

不待發於遠縣,而臨菑之卒固已二十一萬矣。

신이 가만히 헤아려보아도

대체로 쳐도 한 집에 평균 세 사람의 남자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21만이 됩니다.

멀리 떨어진 현에서 징병을 기다리지 않아도

임치의 병졸만 이미 20만 명입니다.

臨菑甚富而實,其民無不吹竽鼓瑟,

彈琴擊筑,[六]鬪雞走狗,六博[七]蹋鞠[八]者。

임치는 매우 부유하고 비옥한 토지라

주민들은 피리를 불고 큰거문고를 퉁기고

거문고를 타며 축을 두드리고

닭싸움과 개의 경주,

또는 윷놀이 공차기 등을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臨菑之塗,車轂擊,

人肩摩,連衽成帷,

임치의 도로는 번잡하고

수렛대가 서로 부짖치며

사람의 어깨와 어깨가 서로 닿고

옷깃이 이어지면 마치 장막을 친 것 같고

舉袂成幕,揮汗成雨,

家殷人足,志高氣揚。

치마가 날리면 마치 천막 같고

땀을 뿌리면 비가 오는 것 같습니다.

집집이 번창하고 사람마다 유족하고

기개와 뜻이 높습니다.

夫以大王之賢與齊之彊,天下莫能當。

今乃西面而事秦,臣竊為大王羞之。

대왕의 현명함과 제나라의 굳센 힘으로 당하면

천하에 대항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서쪽을 향하여 진나라를 섬기려 하는 것은

신이 가만히 생각할 때 대왕을 위해서 부끄러워집니다.

注[一]索隱世本名辟彊,威王之子也。

注[二]正義貝州。

注[三]索隱按:高誘注戰國策云「五家五國也」。

注[四]索隱按;戰國策作「疾如錐矢」。高誘曰「錐矢,小矢,喻徑疾也」。呂

氏春秋曰「所貴錐矢者,為應聲而至」。正義齊軍之進,若鋒芒之刀,良弓之矢,

用之有進而無退。

注[五]正義言臨淄自足也。絕,涉,皆度也。勃海,滄州也。齊有軍役,不用

度河取二部。

注[六]正義筑似琴而大,頭圓,五弦,擊之不鼓。

注[七]索隱按:王逸注楚詞云「博,著也。行六,故曰六博」。

注[八]集解劉向別錄曰:「鞠者,傳言黃帝所作,或曰起戰國之時。蹋鞠,兵

勢也,所以練武士,知有材也,皆因嬉戲而講練之。」蹋,徒獵反。鞠,求六

反。索隱上徒臘反,下居六反。別錄注云:「蹴踘,促六反。蹴亦蹋也。」

崔豹云:「起黃帝時,習兵之埶。」

「且夫韓、魏之所以重畏秦者,

為與秦接境壤界也。

兵出而相當,不出十日而

戰勝存亡之機決矣。

한나라와 위나라가 진나라를 겁내는 것은

진나라와 경계를 접하기 때문인데

출병하여 서로 대전하면 열흘 일 못되어

승패존망의 기틀이 결정될 것입니다.

韓、魏戰而勝秦,

則兵半折,四境不守;

戰而不勝,則國已危亡隨其後。

한나라와 위나라가 진나라와 싸우면 설령 이긴다고 하여도

병력의 절반이 꺾기고

나라의 사면의 경계는 지킬 수 없습니다.

만약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면

나라는 위험하고 마침내 멸망이 뒤따릅니다.

是故韓、魏之所以重與秦戰,

而輕為之臣也。

이런 까닭에 한나라와 위나라는 진나라와 싸움을 경계하고

가벼이 진나라를 신하의 예로 섬기려고 합니다.

今秦之攻齊則不然。

倍韓、魏之地,過衛陽晉之道,[一]

徑乎亢父之險,[二]

이제 진나라가 제나라를 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와 위나라를 배후에 돌려놓고

위나라의 양진 험한 길을 통과하고

항보의 험한 땅을 횡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車不得方軌,[三]騎不得比行,

百人守險,千人不敢過也。

게다가 수레는 두 채를 나란히 세워서 갈 수가 없으며

말도 두 필이 나란히 갈 수 없으므로

백 사람이 험한 땅을 이용하여 지키면

천 명의 군사로서도 돌파할 수 없습니다.

秦雖欲深入,則狼顧,[四]

恐韓、魏之議其後也。

是故恫疑[五]虛猲,[六]

驕矜而不敢進,[七]

則秦之不能害齊亦明矣。

진나라는 깊이 침입하고 싶어도 뒤를 돌아보게 되고

한나라 위나라가 배후에서 공격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그러므로 진나라는 다만 겁내고 의심하여 허세로만 위협하고

교만하게 힘자랑만 할 뿐 감히 진격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즉 진나라가 제나라를 해하지 못할 것은 명백합니다.

注[一]集解徐廣曰:「魏哀王十六年,秦拔魏蒲、陽晉、封陵。」索隱按:陽

晉,魏邑也。魏系家「哀王十六年,秦拔魏蒲阪、陽晉、封陵」是也。劉氏云

「陽晉,地名,蓋適齊之道,%國之西南也」。正義言秦伐齊,背韓、魏地而與

齊戰。徐說陽晉非也,乃是晉陽耳。%地曹、濮等州也。杜預云「曹,%下邑

也」。陽晉故城在曹州乘氏縣西北三十七里。

注[二]索隱亢音剛,又苦浪反。地理志縣名,屬梁國也。正義故縣在兗州任城

縣南五十一里。

注[三]正義言不得兩車並行。

注[四]正義狼性怯,走常還顧。

注[五]索隱上音通,一音洞。恐懼也。

注[六]集解呼葛反。索隱猲,本一作「喝」,並呼葛反。高誘曰:「虛猲,喘息

懼貌也。」劉氏云:「秦自疑懼,不敢

進兵,虛作恐怯之詞,以脅韓、魏也。」

注[七]正義言秦雖至亢父,猶恐懼狼顧,虛作喝罵,驕溢矜誇,不敢進伐齊明

矣。

「夫不深料秦之無柰齊何,

而欲西面而事之,是羣臣之計過也。

이와 같이 진나라가 제나라를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서

서쪽을 향하여 진나라를 섬기려고 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신하들의 생각이 그릇된 것입니다.

今無臣事秦之名而 有彊國之實,

臣是故願大王少留意計之。」

이제부터는 신하로서 진나라를 섬기는 오명 없이

나라를 튼튼히 할 수 있는 참된 이익이 있습니다.

신은 이런 까닭으로

대왕께서 이런 점에 유의하여 이해를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

齊王曰:

「寡人不敏,僻遠守海,

窮道東境之國也,未嘗得聞餘教。

今足下以趙王詔詔之,敬以國從。」

제왕이 말했다.

“과인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멀리 오지인 바다를 지키고

동쪽의 변두리 땅에 있어서

여태까지 말씀을 들을 수 없었소.

이제 그대로부터 조왕의 충고를 들었으니

삼가 나라를 들어 그 의견에 따르리다.”

乃西南說楚威王[一]曰:

「楚,天下之彊國也;王,天下之賢王也。

西有黔中、[二]巫郡,[三]

東有夏州、[四]海陽,[五]

南有洞庭、[六]蒼梧,[七]

北有陘塞、郇陽,[八]

다시 서남쪽 초위왕에게 말했다.

초나라는 천하의 강국이며

임금은 천하의 현명한 왕입니다.

서쪽에 금중과 무군

동쪽에 하주와 해양이 있고

남쪽에 동정과 창오가 있고

북쪽에 양새와 순양이 있으며

地方五千餘里,帶甲百萬,

車千乘,騎萬匹,粟支十年。

此霸王之資也。

토지는 사방 5천여 리에 무장 병력 백만,

병거 천 승, 기마 만 필,

곡식은 10년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패왕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입니다

夫以楚之彊與王之賢,天下莫能當也。

今乃欲西面而事秦,則諸侯莫不西面而

朝於章臺之下矣。

초나라는 강한 세력과 더불어 임금이 현명하니

천하에서 초나라에 대항할 자가 없는데

이제 서쪽을 향하여 진나라를 섬긴다고 하면

제후들도 서쪽을 향해

함양의 장대궁에 조회하지 않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注[一]索隱威王名商,宣王之子。

注[二]集解徐廣曰:「今之武陵也。」正義今朗州,楚黔中郡,其故城在辰州西

二十里,皆盤瓠後也。

注[三]集解徐廣曰:「巫郡者,南郡之西界。」正義巫郡,夔州巫山縣是。

注[四]集解徐廣曰:「楚考烈王元年,秦取夏州。」駰案:左傳「楚莊王伐陳,

鄉取一人焉以歸,謂之夏州」。而注者不說夏州所在。車胤撰桓溫集云:「夏口

城上數里有洲,名夏州。」「東有夏州」謂此也。索隱裴駰據左氏及車胤說夏州,

其文甚明,而劉伯莊以為夏州侯之本國,亦未為得也。正義大江中州也。夏水

口在荊州江陵縣

東南二十五里。

注[五]索隱按:地理志無海陽。劉氏云「楚之東境」。

注[六]索隱今之青草湖是也,在岳州界也。

注[七]索隱地名。地理志有蒼梧郡。正義蒼梧山在道州南。

注[八]集解徐廣曰:「春秋曰『遂伐楚,次于陘』。楚威王十一年,魏敗楚陘山。

析縣有鈞水,或者郇陽今之順陽乎?一本『北有汾、陘之塞』也。」索隱陘山

在楚北境,威王十一年,魏敗楚陘山是也。郇音荀。北有郇陽,其地當在汝南、

潁川之界。檢地理志及太康地記,北境並無郇邑。郇邑在河東,晉地。計郇陽

當是新陽,聲相近字變耳。汝南有新陽縣,應劭云「在新水之陽」,猶豳邑變為

栒,亦當然也。徐氏云「郇陽當是慎陽」,蓋其疏也。正義陘山在鄭州新鄭縣西

南三十里。順陽故城在鄭州穰縣西百四十里。

「秦之所害莫如楚,楚彊則秦弱,

秦彊則楚弱,其勢不兩立。

진나라는 방해물로서 초나를 제일로 꼽습니다

초나라가 강하면 진나라는 약해지고

진나라가 강하면 초나라는 약해지니

그 세력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故為大王計,莫如從親以孤秦。

그러므로 대왕을 위해 일을 생각해 보건대

여섯 나라가 서로 화친하여

진나라를 고립하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수는 없습니다

大王不從*[親]*,秦必起兩軍,

一軍出武關,一軍下黔中,

則鄢郢動矣。[一]

대왕께서 화친하지 않으시면

진나라는 반드시 수륙의 군사를 일으켜

한 군사는 무관으로 나가고

한 군사는 금중으로 내려가므로

언과 영은 동요할 것입니다.

注[一]集解徐廣曰:「今南郡宜城。」正義鄢鄉故城在襄州率道縣南九里。安郢

城在荊州江陵縣東北六里。秦兵出武關,則臨鄢矣;兵下黔中,則臨郢矣。

「臣聞治之其未亂也,為之其未有也。

患至而后憂之,則無及已。

故願大王蚤孰計之。

신은 듣건대,

‘흩트러지기 전에 다스리고

일어나기 전에 수습한다.’는 말이 있는데

화를 만나서 걱정한다는 것은

손이 늦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일찍이 이 일을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大王誠能聽臣,

臣請令山東之國奉四時之獻,

以承大王之明詔,委社稷,

奉宗廟,練士厲兵,在大王之所用之。

만약에 대왕께서 진실로 나의 말에 따르신다면

나는 산동의 제후로 하여금 사철로 공물을 바쳐

대왕의 밝은 가르침을 신봉하게 하고

국가를 위탁하고 종묘에 봉사하고 병정을 훈련 격려하기를

대왕의 뜻대로 되게 하렵니다.

大王誠能用臣之愚計,

則韓、魏、齊、燕、趙、衛之妙音美人

必充後宮,燕、代橐駝良馬必實外廄。

대왕께서 진실로 저의 계책을 따르시면

한·위·제·연·조·의 제국의 미묘한 음악과 미인은

임금의 후궁에 가득차고

연·대의 낙타와 양마는

반드시 대궐 밖의 마굿간에 가득 넘칠 것입니다.

故從合則楚王,衡成則秦帝。

今釋霸王之業,而有事人之名,

臣竊為大王不取也。

합종이 성공하면 초나라가 천하의 패자가 되고

연횡이 성공하면 진나라가 천하의 황제가 됩니다.

이제 임금께서 패업와 왕업을 버리고

남의 신하되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계책을 취하는 것은

신이 생각하기에 대왕을 위해서 제가 취할 수 없는 일입니다.

「夫秦,虎狼之國也,

有吞天下之心。秦,天下之仇讎也。

대체로 진나라는 호랑이의 나라로서

천하를 병합할 야심을 품었습니다.

진나라는 천하의 원수입니다.

衡人皆欲割諸侯之地以事秦,

此所謂 養仇而奉讎者也。

연횡론자는 모두 제후의 토지를 쪼개어

진나라에 바치려고 하나

이것은 이른바 ‘원수를 길러 원수에 봉사한다.’는 것입니다.

夫為人臣,割其主之地

以外交彊虎狼之秦,

以侵天下,卒有秦患,不顧其禍。

무릇 남의 신하된 자가

임금의 토지를 쪼개어

호랑이인 외국 진나라와 교제하고

나아가서 천하를 침략하게 하여

마침내 진나라의 화를 생기게 하여 생기는

재앙도 돌이켜 생각해 봄이 없습니다.

夫外挾彊秦之威 以內劫其主,

以求割地,大逆不忠,無過此者。

밖으로 진나라의 위력을 빌리고 안으로 임금을 위협하여

토지를 쪼개 주기를 원한다는 것은

대역불충도 이보다 지나친 것은 없을 것입니다.

故從親 則諸侯割地 以事楚,

衡合 則楚割地 以事秦,

此兩策者相去遠矣,二者大王何居焉?

그러므로 만일 합종이 성립되면

제후는 토지를 바쳐 초나를 섬기고

연횡이 성립되면

초나라는 토지를 바쳐 진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방책의 거리는 아주 대단히 먼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대왕께서는 어느 것을 취하려고 하십니까?

故敝邑趙王使臣效愚計,

奉明約,在大王詔之。」

이제 우리 나라의 조왕은 사신에게 계교를 일러 주어

대왕과 분명한 약정을 맺으려고 하니

대왕의 생각을 듣고자 합니다.”

楚王曰:

「寡人之國西與秦接境,

秦有舉巴蜀并漢中之心。

秦,虎狼之國,不可親也。

초왕이 말했다.

“과인의 나라는 서쪽이 진나라와 경계를 접했소.

진나라는 파·촉을 취하고 한중을 병합하려는 야심이 있어

진나라는 호랑이와 여우의 나라이므로 친해질 수 없고,

而韓、魏迫於秦患,不可與深謀,

與深謀恐反人 以入於秦,

故謀未發而 國已危矣。

한나라와 위나라는 진나라의 환란에 직면했으므로

함께 깊이 의논을 할 수도 없소.

의논을 한다 할지라도 배신하고

진나라에 가서 붙을 염려가 있고

그러므로 계교를 내기 전에

국가는 이미 위험해집니다.

寡人自料 以楚當秦,不見勝也;

內與羣臣謀,不足恃也。

과인 스스로 생각하건대

초나라만으로 진나라에 대항해서

초나라가 이길 수는 없고,

안으로 여러 신하의 계교가 있다 하더라도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寡人臥不安席,食不甘味,

心搖搖然如縣旌而 無所終薄。[一]

과인은 자리에 누워도 마음이 편하지 않고

음식을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동요하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과 같아서

도저히 안장할 수 없었습니다.

今主君欲一天下,收諸侯,

存危國,寡人謹奉社稷以從。」

이제 그대가 세상 여론을 통일하여

제후를 모아 합해서

우리 나라를 구하고자 한다면

과인은 삼가 나라를 들어서 그대 의견을 따르리다.”

於是六國從合 而并力焉。

蘇秦為從約長,并相六國。

이에 6국이 합종책을 취하여 힘을 같이 했다.

소진은 합종 동맹의 장이 되고

동시에 6국의 재상이 되었다.

北報趙王,乃行過雒陽,車騎輜重,

諸侯各發使送之甚衆,疑於王者。[一]

그래서 북쪽 조왕에게 복명하려고

도중에 낙양을 통과하는데

그의 거마와 짐은

제후로부터 사자를 시켜 보내온 물건으로 가득 차서

임금의 행차인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周顯王聞之恐懼,除道,使人郊勞。[二]

주나라 현왕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길가에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사자를 교외로 보내어 출영하고 위로하였다.

注[一]集解白洛反。

蘇秦之昆弟妻嫂

側目不敢仰視,俯伏侍取食。

소진의 형제 처족들은

눈을 내리뜨고 우러러 볼 수조차 없었으며

엎드려 기어서 식사 심부름을 하였다.

蘇秦笑謂其嫂曰:

「何前倨而後恭也?」

소진이 웃으며 형수에게 말했다.

“어째서 전에는 위세를 부리더니 이제는 이렇게도 공손하시오?”

嫂委蒲服,[三]以面掩地而謝曰:

「見季子位高金多也。」[四]

형수는 떨리는 듯 몸을 구부리고 엎드려서

얼굴을 땅에 대고 사과했다.

“계자님의 지위가 높고 재물이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蘇秦喟然歎曰:

「此一人之身,富貴則親戚畏懼之,

貧賤則輕易之,況衆人乎!

소진은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은 한 사람인데

부귀하면 친척도 우러러 보고

빈천하면 업신 여긴다.

하물며 남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且使我有雒陽負郭田二頃,[五]

吾豈能佩六國相印乎!」

만약에 나에게 낙양성 근처에 밭 두어 뙈기만 있었던들

오늘 여섯 나라 재상의 인수를 찰 수 있었겠는가?”

於是散千金以賜宗族朋友。

그리하여 천금을 흩어 일족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初,蘇秦之燕,貸人百錢為資,

乃得富貴,以百金償之。

徧報諸所嘗見德者。

일찍이 소진은 연나라에 갈 적에

남에게서 백전을 빌려 노자로 하였는데

부귀한 몸이 되자

백금으로써 보상하고,

또 일찍이 은혜를 입었던 모든 사람에게도 모두 보상을 하였다.

其從者有一人 獨未得報,

乃前自言。

그의 하인 중 한 사람이 아직 공로의 보상을 받지 못한 자가 있어

앞에 나와 스스로 그 사실을 말하였다.

蘇秦曰:

「我非忘子。子之與我至燕,

再三欲去我易水之上,

소진이 말했다.

“네 일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함께 연나라에 갔을 적에

너는 역수 근방에서 여러 번 나를 버리고 떠나려고 하였다

方是時,我困,故望子深,

是以後子 子今亦得矣

그때 나는 곤란하여

너를 깊이 원망했다

그런 까닭으로 너를 맨 나중으로 돌려놓았던 것인데

너에게도 이제는 공로의 보상을 주리라.”

注[一]索隱疑作「擬」讀。

注[二]集解儀禮曰:「賓至近郊,君使卿朝服用束帛勞。」

注[三]索隱委謂以面掩地而進,若行也。蒲服即匍匐,並音蒲仆。

注[四]集解譙周曰:「蘇秦字季子。」索隱按:其嫂呼小叔為季子耳,未必即其

字。允南即以為字,未之得也。

注[五]索隱負者,背也,枕也。近城之地,沃潤流澤,最為膏腴,故曰「負郭」

也。

蘇秦既約六國從親,歸趙,

趙肅侯封為武安君,乃投從約書於秦。[一]

秦兵不敢闚函谷關十五年。

소진은 이미 여섯 나라와 약정하여 합종을 맺고 조나라에 돌아왔다.

조수구는 소진에게 봉읍을 주어 무안군이라 이름하고

합종의 약정을 진나라에 통고하였다.

이 때문에 진나라 군사가 함곡관으로부터 중원을 넘보지 않기를

15년 동안이나 지속했다.

注[一]索隱乃設從約書。案:諸本作「投」。言設者,謂宣布其從約六國之事以

告於秦。若作「投」,亦為易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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