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六十九 蘇秦列傳第九

사기 권69

소진 열전 제9-1

  蘇秦者,東周雒陽人也。〔一〕

東事師於齊,而習之於鬼谷先生。〔二〕

소진은 동주의 낙양 사람이다

동쪽 제나라에 가서 스승을 구하여 귀곡선생에게 배웠다

〔一〕索隱蘇秦字季子,蓋蘇忿生之後,己姓也。譙周云:「秦兄弟五人,秦最少。兄代,代弟厲及辟、鵠,並為游說之士。」此下云「秦弟代,代弟厲」也。正義戰國策云:「蘇秦,雒陽乘軒里人也。」藝文志云蘇子三十一篇,在縱橫流。敬王以子朝之亂從王城東遷雒陽故城,乃號東周,以王城為西周。  

 〔二〕集解徐廣曰:「潁川陽城有鬼谷,蓋是其人所居,因為號。」駰案:風俗通義曰「鬼谷先生,六國時從橫家」。索隱按:鬼谷,地名也。扶風池陽、潁川陽城並有鬼谷墟,蓋是其人所居,因為號。又樂壹注鬼谷子書云「蘇秦欲神祕其道,故假名鬼谷」。  

 出游數歲,大困而歸。〔一〕

방랑하기 몇 년만에 매우 곤궁해서 향리로 돌아왔다.

兄弟嫂妹妻妾竊皆笑之,曰:

「周人之俗,治產業,力工商,

逐什二以為務。

今子釋本而事口舌,困,不亦宜乎!」

형제, 형수, 누이, 처첩 등이 모두 가만히 조소하여 말하기를,

“주나라 관습에는 전지를 경작하거나 공업 상업에 힘써

2할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의무인데

그는 그 본업을 버리고 다만 혀 끝의 의논에 힘썼다.

곤궁한 것도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蘇秦聞之而慚,自傷,

乃閉室不出,出其書遍觀〔二〕之。

소진은 이 소리를 듣고 마음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스스로 마음상해서

방문을 닫고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기의 장서를 꺼내어 두루 훑어보고 말했다.

曰:「夫士業已屈首受書,〔三〕

而不能以取尊榮,雖多亦奚以為!」

“사내로서 남에게 머리를 숙여 학문을 하면서

아무런 영달도 못한다고 해서야

아무리 독서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於是得周書陰符,伏而讀之。

期年,以出揣摩,〔四〕

그 중에서 <주서>의 ‘음부’를 찾아

책상에 엎드려 열심히 읽었다.

1년쯤 되어서 <췌마술>을 터득하고 말했다.

曰:「此可以說當世之君矣。」

求說周顯王。

“이것이면 당대의 군주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

먼저 주나라 현왕을 설득하고자 했다.

顯王左右素習知蘇秦,

皆少之。〔五〕弗信。

현왕의 측근에 있는 자가 본래 소진을 잘 알았으므로

모두들 그를 무시하고 믿지 않았다.

  〔一〕索隱按:戰國策此語在說秦王之後。

  〔二〕索隱音遍官二音。按:謂盡觀覽其書也。

  〔三〕索隱按:謂士之立操。業者,素也,本也。言本已屈首低頭,受書於師也。

  〔四〕集解戰國策曰:「乃發書,陳篋數十,得太公陰符之謀,伏而誦之,簡練以為揣摩。讀書欲睡,引錐自刺其股,血流至踵。曰:「安有說人主不能出其金玉錦繡,取卿相之尊者乎?」期年,揣摩成。」鬼谷子有揣摩篇也。索隱戰國策云「得太公陰符之謀」,則陰符是太公之兵符也。揣音初委反,摩音姥何反。鄒誕本作「揣靡」,靡讀亦為摩。王劭云「揣情、摩意是鬼谷之二章名,非為一篇也」。高誘曰「揣,定也。摩,合也。定諸侯使讎其術,以成六國之從也」。江邃曰「揣人主之情,摩而近之」,其意當矣。

  〔五〕索隱謂王之左右素慣習知秦浮說,多不中當世,而以為蘇秦智識淺,故云「少之」。劉氏云:「少謂輕之也。」

乃西至秦。

秦孝公卒。說惠王曰:

그리하여 서쪽 진나라에 이르렀다.

진효공은 이미 죽은 뒤여서

새로 임금이 된 혜왕을 설득해 말했다.

「秦四塞之國,被山帶渭,

東有關河,〔一〕西有漢中,

南有巴蜀,北有代馬,〔二〕此天府也。〔三〕

“진나라는 사방이 요새지로 된 나라로서

산에 둘러싸이고 위수가 띠처럼 이어졌고,

동에 함곡관과 황하가 있고, 서에 한중이 있고,

남에 파·촉이 있고, 북에 대마가 있어,

천연의 보고입니다.

以秦士民之眾,兵法之教,

可以吞天下,稱帝而治。」

진나라 사민(士民)의 많음과

병법을 가르침으로써

천하를 병탄하고

황제 칭호를 일컬을 수 있을 것입니다.”

秦王曰:

「毛羽未成,不可以高蜚;

文理未明,不可以并兼。」

진왕이 대답했다.

“새도 털이 나서 자라기까지는 높이 날지 못하오.

우리 나라도 문교와 정치가 밝아지기까지는

다른 나라를 병합하는 따위는 생각조차 못할 일이오.”

方誅商鞅,疾辯士,弗用。

진나라에서는 이 무렵 상앙을 죽이고

세객들을 미워하던 시기였으므로

소진을 등용하지 않았다.

  〔一〕正義東有黃河,有函谷、蒲津、龍門、合河等關;南山及武關、嶢關;西有大隴山及隴山關、大震、烏蘭等關;北有黃河南塞:是四塞之國,被山帶渭(又)〔以〕為界。地里。江(渭)〔謂〕岷江,〔西從〕渭州隴山之西南流入蜀,東至荊陽入海也。河謂黃河,從同州小積石山東北流,至勝州即南流,至華州又東北流,經魏、滄等州入海。各是萬里已下。

〔二〕索隱按:謂代郡馬邑也。地理志代郡又有馬城縣。一云代馬,謂代郡兼有胡馬之利。

 [三〕索隱按:周禮春官有天府。鄭玄曰:「府,物所藏。言天,尊此所藏若天府然。」

乃東之趙。

趙肅侯令其弟成為相,號奉陽君。

奉陽君弗說之。

그리하여 동쪽 조나라로 갔다.

조숙후는 아우 성을 재상으로 삼아

이를 봉양군이라 하였는데

봉양군은 소진을 환영하지 않았다.

去游燕,歲餘而後得見。

거기서 또 조나라를 떠나 연나라에 유세하고

1년이 지나서야 겨우 알현이 허락되었다.

說燕文侯[一]曰:

「燕東有朝鮮﹑[二]遼東,北有林胡樓煩,[三]﹑

西有雲中﹑九原,[四]南有嘑沱﹑易水,[五]

연문후에게 말했다.

“연나라는 동쪽에 조선과 요동,

북에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에 호타와 역수가 흐릅니다.

地方二千餘里,帶甲數十萬,

車六百乘,騎六千匹,粟支數年。[六]

토지는 사방 2천여 리이고

무장 병력 수십만,

전차 6백 승, 군마 6천 필,

군량은 몇 년을 지내기가 족합니다.

南有碣石﹑[七]鴈門之饒,[八]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남에 갈석과 안문의 풍성함을 끼고

북에는 대추와 밤 수확이 있어서

백성의 전지 농사가 아니더라도 대추와 밤으로 자급이 되니

천연의 보고라고 하겠습니다.

注[一]索隱說音稅,下並同。燕文侯,史失名。

注[二]索隱潮仙二音,水名。

注[三]索隱地理志樓煩屬鴈門郡。正義二胡國名,朔﹑嵐已北。

注[四]索隱按:地理志雲中﹑九原二郡名。秦曰九原,漢武帝改曰五原郡。正

義二郡並在勝州也。雲中郡城在榆林縣東北四十里。九原郡城在榆林縣西界。

注[五]集解周禮曰:「正北曰并州,其川沱。」鄭玄曰:「沱出鹵城。」索

隱按:滹,水名,并州之川也,音呼沱。又地理志鹵城,縣名,屬代郡。滹

河自縣東至參合,又東至文安入海也。正義沱出代州繁畤縣,東

南流經五臺山北,東南流過定州,流入海。易水出易州易縣,東流過幽州歸義

縣,東與呼沱河合也。

注[六]索隱按:戰國策「車七百乘,粟支十年」。

注[七]索隱*(戰國策)*碣石山在常山九門縣。地理志大碣石山在右北平驪城縣

西南。

注[八]正義鴈門山在代,燕西門。

「夫安樂無事,

不見覆軍殺將,無過燕者。

안락 무사하여

전화(戰禍)를 입지 않기로는

연나라보다 더 나은 나라가 없습니다.

大王知其所以然乎?

夫燕之所以不犯寇被甲兵者,

以趙之為蔽其南也。

왜 무사한가는 대왕도 잘 아시겠지요?

연나라가 외적에 침범되지 않고 전화를 입지 않은 것은

조나라가 연나라의 장벽이 되어 남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秦趙五戰,秦再勝而趙三勝。

진과 조는 다섯 번 싸워서

진이 2번 이기고 조가 3번 이겼습니다.

秦趙相斃,而王以全燕制其後,

此燕之所以不犯寇也。

이 때문에 진나라와 조나라 두 나라는 함께 쓰러졌으므로

임금께서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독자적으로 그 후방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연나라가 외적을 침범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且夫秦之攻燕也,踰雲中﹑九原,

過代﹑上谷,彌地數千里,

雖得燕城,秦計固不能守也。

대체로 진나라가 연나라를 치는 데는

설중과 구원을 넘어

대와 상곡을 통과하지 않으면 아니 되며

그 길은 몇 천리나 됩니다.

설령 연나라의 성읍을 얻더라도

진나라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습니다.

秦之不能害燕亦明矣。

그러고 보면 진나라가

연나라를 침범하지 못하는 까닭도 역시 명백합니다.

今趙之攻燕也,發號出令,不至十日

而數十萬之軍軍於東垣矣。[一]

渡嘑沱,涉易水,

不至四五日而距國都矣。

그런데 조나라가 연나라를 친다고 하면

호령을 낸 지 열흘이 못되어

몇 십만의 군사가 동원에 진을 치고

호타하를 건너 역수를 넘어

4,5일이 못되어 연나라 국도에 도달합니다.

故曰秦之攻燕也,戰於千里之外;

趙之攻燕也,戰於百里之內。

그러므로 이르기를

‘진나라는 연나라를 치는데

천리 밖에서 싸우고

조나라는 연나라를 치는데

백 리 안에서 싸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夫不憂百里之患 而重千里之外,

計無過於此者。

是故願大王與趙從親,

天下為一,則燕國必無患矣。」

도대체 백 리 밖의 적을 걱정하지 않고

천 리 밖의 적을 중요시하다니

이처럼 그릇된 계책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조나라와 합종으로써 친하여

천하 제후와 일체가 된다면

연나라에는 반드시 우환이 없을 것입니다.”

注[一]索隱地理志高帝改曰真定也。正義趙之東邑,在恆州真定縣南八里,故

常山城是也。

文侯曰:

「子言則可,然吾國小,

西迫彊趙,[一]南近齊,[二]齊﹑趙彊國也。

子必欲合從以安燕,寡人請以國從。」

문후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소.

그러나 나의 나라는 작아서

서쪽은 강한 조나라에 압박을 당하고

남쪽은 제나라 땅에 가깝습니다.

제나라와 조나라는 다 강국이므로

그대가 반드시 합종하여 연나라를 편안히 하고자 한다면

과인은 나라를 들어 그대의 말에 따르리다.”하였다.

注[一]正義貝﹑冀﹑深﹑趙四州,七國時屬趙,即燕西界。

注[二]正義河北博﹑滄﹑德三州,齊地北境,與燕相接,隔黃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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