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六十八 商君列傳第八사기 권68 상군열전 제8-3

 

令既具,未布,恐民之不信,

새 법령은 이미 제정되었으나 아직 공포 하지 않았다.

백성이 신임을 하지 않을까 염려한 까닭이었다.

 

已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募民有能徙置北門者予十金。

그리하여 높이가 세 발 되는 나무를 성중 장판의 남문에다 세우고 글을 써 알리기를,

“이 나무를 북문에다 옮겨 놓는 자에게는 10금을 준다.”고 사람을 모집하였다.

 

民怪之,莫敢徙。復曰「能徙者予五十金」。

그러나 백성들은 이상하게 여기고 감히 옮기려는 자가 없었으므로 다시 알리기를

“이 나무를 북문에다 옮기는 자에게는 50금을 준다.”고 하였다.

 

有一人徙之,輒予五十金,以明不欺。卒下令。

어떤 자가 이것을 옮겼으므로 바로 50금을 주어서 그리하여 백성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마침내 법령을 공포하였다.

 

令行於民期年,秦民之國都言初令〔一〕之不便者以千數。

그러나 이 법령이 시행되자 1년 동안에 진나라 백성으로 도성에 몰려와서

세 법령이 불편한 것을 고하는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於是太子犯法。衛鞅曰:「法之不行,自上犯之。」將法太子。

그런 중에 태자가 법을 범하였다.

상앙은 이르기를, “법이 잘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 있는 자부터 법을 범하기 때문이다.”하고 태자를 처벌하려 하였다.

 

太子,君嗣也,不可施刑,刑其傅公子虔,黥其師公孫賈。

태자는 임금의 후사라 형벌에 처할 수는 없다하여

그의 사부인 공자 ‘건’을 처벌하고 스승인 공손고를 경형에 처하였다.

 

明日,秦人皆趨令。〔二〕行之十年,秦民大說,道不拾遺,山無盜賊,家給人足。

다음날부터 진나라 백성들은 모두 법을 따랐다.

법을 시행한 지 10년에 진나라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고 길바닥에 떨어진 물건도 줍는 사람이 없었다.

산중에는 도둑이 없어졌고 집집마다 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다 만족하였다.

 

民勇於公戰,怯於私鬥,鄉邑大治。秦民初言令不便者有來言令便者,

백성은 전쟁에 용감하였고 개인의 싸움에는 힘을 쓰지 않았으며 국내의 행정은 잘 다스려졌다.

일찍이 법령의 불편을 말한 자로서 이번에는 법령의 편리함을 말하러 온 자가 있었다.

 

衛鞅曰「此皆亂化之民也」,盡遷之於邊城。其後民莫敢議令。

상앙은 이르기를, “이런 자 역시 다 선도 감화를 어지럽히는 백성이다.”하여 모두 변방의 성으로 쫓아 버렸다.

그 뒤로는 감히 법령을 이러니저러니 말하는 자가 없었다.   

 

〔一〕索隱謂鞅新變之法令為「初令」。   

〔二〕索隱趨音七踰反。趨者,向也,附也。

 

於是以鞅為大良造。

〔一〕將兵圍魏安邑,降之。

이러한 공으로 상앙은 대량조에 올랐다.

그런 연후에 상앙은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 안읍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았다.

 

居三年,作為築冀闕〔二〕宮庭於咸陽,秦自雍徙都之。

3년 뒤에 함양에 누문·궁전·정원을 이룩하고 진나라는 ‘옹’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而令民父子兄弟同室內息者為禁。而集小(都)鄉邑聚為縣,置令、丞,凡三十一縣。

백성들에게 영을 내려 부자 형제가 세대를 공동으로 하는 것을 금하고 또 소읍과 취락을 모아 현을 만들고 현을 다스리는 관리로 영·승을 두었다. 모두 31현이 있었다.

 

為田開阡陌封疆,〔三〕而賦稅平。平斗桶〔四〕權衡丈尺。

전지의 경계를 개방하여 경작을 자유로이 하고 부역과 세남을 공평히 하고 도량형을 동일하게 하였다.

 

行之四年,公子虔復犯約,劓之。

4년 뒤에 공자 건이 또 법령을 범했으므로 코를 베는 형벌을 내렸다.

 

居五年,秦人富彊,天子致胙〔五〕於孝公,諸侯畢賀。

5년 뒤에는 진나라가 부강하여졌으므로 주나라 천자는 효공에게 조육을 하사하고 제후는 모두 이를 경하하였다.   

〔一〕索隱即大上造也,秦之第十六爵名也。今云「良造」者,或後變其名耳。   

〔二〕索隱冀闕即魏闕也。冀,記也。出列教令,當記於此門闕。   

〔三〕正義南北曰阡,東西曰陌。按:謂驛塍也。疆音疆。封,聚土也;疆,界也:謂界上封記也。   

〔四〕集解鄭玄曰:「音勇,今之斛也。」索隱音統,量器名。   

〔五〕正義音左故反。

 

其明年,齊敗魏兵於馬陵,虜其太子申,殺將軍龐涓。

다음 해에 제나라는 위나라 군사를 마릉에서 깨뜨리고 위태자 신을 사로잡고 장군 방연을 죽였다

 

其明年,衛鞅說孝公曰:

이듬해에 상앙은 효공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秦之與魏,譬若人之有腹心疾,非魏并秦,秦即并魏。

“진과 위의 관계는 마치 사람의 뱃속에 질병이 있는 것과 같아서 위나라가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진나라가 위나라를 삼켜야 합니다.

 

何者?魏居領阨之西,〔一〕都安邑,與秦界河而獨擅山東之利。利則西侵秦,病則東收地。

왜냐하면 위나라는 험준한 산고개의 서편에 있어서 안읍에 도읍하고 진나라와 하수를 사이에 두고 산동의 이익을 독점하여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때는 서쪽의 진나라를 침략하고 피폐하면 동쪽의 땅을 침략하기 때문입니다.

今以君之賢聖,國賴以盛。而魏往年大破於齊,諸侯畔之,可因此時伐魏。

지금 임금의 현덕으로 우리 나라는 번영하고 있으나 위나라는 연전에 크게 제나라에게 패하였고 제후는 위나라를 배반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위나랄를 치기에 좋은 기회입니다.

魏不支秦,必東徙。東徙,秦據河山之固,東鄉以制諸侯,此帝王之業也。」

위나라는 진나라의 공격을 지탱하지 못하는 때는 반드시 동쪽으로 옮길 것입니다. 동쪽으로 옮기면 진나라는 산하자연의 요새지에 웅거하여 동쪽을 향해 제후를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제왕의 사업이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孝公以為然,使衛鞅將而伐魏。魏使公子卬將而擊之。

효공은 이치가 있는 말이라 생각하고 상앙을 장수로 하여 위나라를 치게 했다. 위나라도 공자 <앙>을 장수로 하여 진나라를 마주 치게 했다.

軍既相距,衛鞅遺魏將公子卬書曰:

양쪽 군사가 대전하였는데 상앙은 위공자 <앙>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吾始與公子驩,今俱為兩國將,不忍相攻,

‘나는 본래 공자와 절친한 사이로 이제 함게 양군의 장수로 갈라졌으나 서로 공격을 일삼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可與公子面相見,盟,樂飲而罷兵,以安秦魏。」

공자와 직접 회견하여 휴전을 맹세하고 즐거이 술을 마시며 진나라와 위나라의 평화를 의논하고 싶다.’고 하였다.

魏公子卬以為然。會盟已,飲,而衛鞅伏甲士而襲虜魏公子卬,因攻其軍,盡破之以歸秦。

위나라 공자 <앙>도 같은 생각으로 만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상앙은 무장한 군사를 복병케 하고 불의에 습격하여 공자 <앙>을 사로잡았고 승세를 타서 위군을 공격하여 모조리 적을 부수고 진으로 돌아왔다.

魏惠王兵數破於齊秦,國內空,日以削,恐,乃使使割河西之地獻於秦以和。

위혜왕은 자기 나라 군사가 자주 제나라와 진나라 두 나라에 패하여 국내의 재력과 병력이 공허해지고 국토가 하루하루 깎임을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서 하수 서쪽의 땅을 진나라에 바치고 화친을 꾀하였다.

而魏遂去安邑,徙都大梁。〔二〕梁惠王曰:「寡人恨不用公叔座之言也。」

그리하여 위나라는 마침내 국도 안읍을 버리고 대량으로 도읍을 옮겼다. 위혜왕은 이르기를, “나는 이제야 공숙좌의 진언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고 술회하였다.

衛鞅既破魏還,秦封之於、商〔三〕十五邑,號為商君。

상앙이 위나라를 치고 돌아오자 진나라는 상앙을 <상오>의 15읍에 봉하고 호를 내려 상군이라 하였다.  

〔一〕索隱蓋即安邑之東,山領險阨之地,即今蒲州之中條已東,連汾、晉之嶮嶝也。   

〔二〕索隱紀年曰:「梁惠王二十九年,秦衛鞅伐梁西鄙」,則徙大梁在惠王之二十九年也。正義從蒲州安邑徙汴州浚儀也。   

〔三〕集解徐廣曰:「弘農商縣也。」索隱於、商,二縣名,在弘農。紀年云秦封鞅在惠王三十年,與此文合。正義於、商在鄧州內鄉縣東七里,古於邑也。商洛縣在商州東八十九里,本商邑,周之商國。案:十五邑近此(三)〔二〕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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