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六十八 商君列傳第八사기 권68

상군열전 제8-5

 

後五月而秦孝公卒,太子立。公子虔之徒告商君欲反,發吏捕商君。

그 뒤 다섯 달이 되어 진효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했다.공자 <건> 일당이 상군은 모반을 꾀한다고 밀고하였으므로 관리를 보내어 상군을 잡으려고 하였다.

商君亡至關下,欲舍客舍。客人不知其是商君也,

상군은 달아나 관소 근방에까지 와서 객사에 들려고 하였다. 객사의 주인은 이 손이 상군임을 알지 못하고 말하였다

 

曰:「商君之法,舍人無驗者坐之。」

‘상군의 법률에는 여행증이 없는 손을 재우면 그 손과 연좌로 죄를 받습니다.

商君喟然歎曰:「嗟乎,為法之敝一至此哉!」去之魏。

상군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아, 신법의 폐단은 마침내 내 몸에까지 미쳤는가?”

진나라에서 도망하여 위나라로 갔다.

魏人怨其欺公子卬而破魏師,弗受。商君欲之他國。

위인은 상군이 공자 <앙>을 속이고 위나라 군대를 깨뜨린 것을 원망하여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군이 다른 나라로 가려고 하니

魏人曰:「商君,秦之賊。秦彊而賊入魏,弗歸,不可。」遂內秦。

위인이 이르기를, “상군은 진나라의 적이다. 진나라는 강국이니 위나라에 들어온 도적은 돌아오지 못하니 불가하다.”하고, 마침내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商君既復入秦,走商邑,〔一〕與其徒屬發邑兵北出擊鄭。〔二〕秦發兵攻商君,殺之於鄭黽池。

〔三〕상군은 다시 진나라로 들어가 상읍으로 달려가 도당과 함께 봉읍의 군사를 동원하여 북쪽 정나라를 쳤다.

진나라는 출병하여 상군을 치고 정나라의 <면지>에서 그를 죽였다.

秦惠王車裂商君以徇,曰:「莫如商鞅反者!」遂滅商君之家。

진혜왕은 그 시체를 거열형에 처해 백성들에게 돌려 보이며

“상앙과 같은 모반자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여 마침내 상군의 일족을 멸하였다.

 

 〔一〕索隱走音奏。走,向也。   〔二〕集解徐廣曰:「京兆鄭縣也。」索隱地理志京兆有鄭縣。秦本紀云「初縣杜、鄭」,按其地是鄭桓公友之所封。  〔三〕集解徐廣曰:「黽,或作「彭」。」索隱鄭黽池者,時黽池屬鄭故也。而徐廣云「黽或作彭」者,按鹽鐵論云「商君困於彭池」故也。黽音亡忍反。正義黽池去鄭三百里,蓋秦兵至鄭破商邑兵,而商君東走至黽,乃擒殺之。

 

太史公曰: 商君,其天資刻薄人也。

태사공은 말한다.

〔一〕상군은 천성이 각박한 사람이다.

跡其欲干孝公以帝王術,挾持浮說,非其質矣。

〔二〕그가 효공에게 등용을 청하기 위해 제왕의 처술을 설명한 자취를 찾아보건대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였던 것이니 그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且所因由嬖臣,及得用,刑公子虔,欺魏將卬,不師趙良之言,亦足發明商君之少恩矣。

더욱이 인도를 한 것은 총신이었는데 등용이 되자 곧 공자<건>을 처벌하고 위나라 장군 공자 <앙>을 속였으며

조량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 또한 상군이 각박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余嘗讀商君開塞耕戰書,與其人行事相類。

〔三〕나는 일찍이 상군의 저서 <개색>과 <경전>의 제편을 읽었는데 그 사상은 그 사람의 행위와 완전히 합치하였다.

卒受惡名於秦,有以也夫!

〔四〕 끝내 진나라에서 악명을 받았던 것도 까닭이 있도다. 

 

〔一〕索隱謂天資其人為刻薄之行。刻謂用刑深刻;薄謂棄仁義,不悃誠也。   

〔二〕索隱說音如字。浮說即虛說也。謂鞅得用,刑政深刻,又欺魏將,是其天資自有狙詐,則初為孝公論帝王之術,是浮說耳,非本性也。   

〔三〕索隱按商君書,開謂刑嚴峻則政化開,塞謂布恩賞則政化塞,其意本於嚴刑少恩。又為田開阡陌,及言斬敵首賜爵,是耕戰書也。   

〔四〕集解新序論曰:「秦孝公保崤函之固,以廣雍州之地,東并河西,北收上郡,國富兵彊,長雄諸侯,周室歸籍,四方來賀,為戰國霸君,秦遂以彊,六世而并諸侯,亦皆商君之謀也。夫商君極身無二慮,盡公不顧私,使民內急耕織之業以富國,外重戰伐之賞以勸戎士,法令必行,內不阿貴寵,外不偏疏遠,是以令行而禁止,法出而姦息。故雖書云「無偏無黨」,詩云「周道如砥,其直如矢」,司馬法之勵戎士,周后稷之勸農業,無以易此。此所以并諸侯也。故孫卿曰:「四世有勝,非幸也,數也。」然無信,諸侯畏而不親。夫霸君若齊桓、晉文者,桓不倍柯之盟,文不負原之期,而諸侯畏其彊而親信之,存亡繼絕,四方歸之,此管仲、舅犯之謀也。今商君倍公子卬之舊恩,棄交魏之明信,詐取三軍之眾,故諸侯畏其彊而不親信也。藉使孝公遇齊桓、晉文,得諸侯之統將,合諸侯之君,驅天下之兵以伐秦,秦則亡矣。天下無桓文之君,故秦得以兼諸侯。衛鞅始自以為知霸王之德,原其事不諭也。昔周召施善政,及其死也,後世思之,「蔽芾甘棠」之詩是也。嘗舍於樹下,後世思其德不忍伐其樹,況害其身乎!管仲奪伯氏邑三百戶,無怨言。今衛鞅內刻刀鋸之刑,外深鈇鉞之誅,步過六尺者有罰,棄灰於道者被刑,一日臨渭而論囚七百餘人,渭水盡赤,號哭之聲動於天地,畜怨積讎比於丘山,所逃莫之隱,所歸莫之容,身死車裂,滅族無姓,其去霸王之佐亦遠矣。然惠王殺之亦非也,可輔而用也。使衛鞅施寬平之法,加之以恩,申之以信,庶幾霸者之佐哉!」索隱新序是劉歆所撰,其中論商君,故裴氏引之。藉音胙,字合作「胙」,誤為「藉」耳。按:本紀「周歸文武胙於孝公者」是也。說苑云「秦法,棄灰於道者刑」,是其事也。 

「索隱述贊」

衛鞅入秦,景監是因。王道不用,霸術見親。政必改革,禮豈因循。既欺魏將,亦怨秦人。如何作法,逆旅不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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