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八十五

呂不韋列傳第二十五 

려불위 열전 제25-4

秦王十年十月,免相國呂不韋。

及齊人茅焦說秦王,

秦王乃迎太后於雍,歸復咸陽,[一]

而出文信侯就國河南。

진왕 10년 11월(기원전 237년),

여불위를 상국의 자리에서 면직시켰다.

제나라 사람 모초(茅焦)의 간언을 듣고

진왕이 그 모후를 옹에서 맞이하여 함양으로 데려왔으나

문신후는 하남의 봉국에 부임하도록 했다.

注[一]集解徐廣曰:「入南宮。」

歲餘,諸侯賓客使者相望於道,請文信侯。

秦王恐其為變,乃賜文信侯書曰:

그리고 1년이 지나자, 제후와 빈객들이 보낸 사자들이

진나라로 통하는 길을 열을 지어 오고가면서 문신후를 뵙기를 청하곤 했다.

진왕이 문신후로 인해 변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서신을 한 장 써서 보냈다.

「君何功於秦?秦封君河南,食十萬戶。

君何親於秦?號稱仲父。其與家屬徙處蜀!」

"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을 세웠기에 하남에 10만 호의 식읍을 봉국으로 주었고,

그대가 진나라 종실과 무슨 인척관계가 있기에 중부(仲父)라는 호칭을 받은 것이오.

그대는 가솔들을 이끌고 촉군으로 옮겨 살도록 하시오. "

呂不韋自度稍侵,恐誅,乃飲酖而死。[一]

秦王所加怒呂不韋、嫪毐皆已死,

乃皆復歸嫪毐舍人遷蜀者。

여불위는 자기의 지위가 시간이 갈수록 깎여지는 것을 보고

혹시라도 진왕에게 살해되지나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여불위와 노애로 인해 분노했던 진왕은 두 사람이 모두 죽자

촉군으로 보내 살게 했던 노애의 문하 사인들을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 살 수 있도록 했다.

注[一]集解徐廣曰:「十二年。」駰案:皇覽曰「呂不韋冢在河南洛陽北邙道西

大冢是也。民傳言呂母冢。不韋妻先葬,故其冢名『呂母』也」。

始皇十九年,太后薨,謚為帝太后,[一]

與莊襄王會葬陽。[二]

시황 19년 기원전 228년, 태후가 죽자

시호를 제태후(帝太后)라 짓고 장양왕이 묻혔던 채양(茝陽)에 합장했다.

注[一]索隱王劭云「秦不用謚法,此蓋號耳」,其義亦當然也。始皇稱皇帝之後,

故其母號為帝太后,豈謂誄列生時之行乎!

注[二]集解徐廣曰:「一作『芷陽』。」

太史公曰:

태사공이 말한다.

不韋及嫪毐貴,封號文信侯。[一]

비천한 출신의 여불위와 노애는 신분이 귀하게 되어

문신후라는 봉호를 받았다.

人之告嫪毐,毐聞之。

秦王驗左右,未發。

 어떤 사람이 노애를 고변했으나 노애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왕은 좌우의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上之雍郊,毐恐禍起,乃與黨謀,

矯太后璽發卒以反蘄年宮。[二]

 진왕이 옹성(雍城)의 교외에 당도하자

노애는 화가 자기의 몸에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같은 당의 무리들과 모의하고

태후의 옥쇄를 위조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년궁(蘄年宮)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發吏攻毐,毐敗亡走,

追斬之好畤,[三]遂滅其宗。

진왕이 관리들에게 군사를 주어 노애를 공격하게 하자

노애는 싸움에서 지고 도주했다.

호치(好畤)에서 노애를 잡아 참수하고 노애의 종족을 멸족시켰다.

而呂不韋由此絀矣。

그래서 여불위는 그 사건에 연루되어 축출된 것이다.

孔子之所謂「聞」者,其呂子乎?[四]

공자가 말한 바 있는 '명성만 쫓는 사람'이 바로 여불위가 아니었겠는가?

注[一]索隱按:文信侯,不韋封也。嫪毐封長信侯。上文已言不韋封,此贊中

言嫪毐得寵貴由不韋耳,今此合作「長信侯」也。

注[二]正義蘄年宮在岐州城西故城內。

注[三]索隱地理志扶風有好畤縣也。

注[四]集解論語曰:「夫聞也者,色取仁而行違,居之不疑,在邦必聞,在家必

聞。」馬融曰:「此言佞人也。」

【索隱述贊】不韋釣奇,委質子楚。華陽立嗣,邯鄲獻女。及封河南,乃號仲

父。徙蜀懲謗,懸金作語。籌策既成,富貴斯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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