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八十五

呂不韋列傳第二十五 

려불위 열전 제25-3

秦昭王五十六年,薨,太子安國君立為王,

華陽夫人為王后,子楚為太子。

趙亦奉子楚夫人及子政歸秦。

진소왕 56년(기원전 251년),

소왕이 죽고 태자 안국군이 왕위에 오르고

화양부인은 왕비가 자초는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조나라가 자초의 부인과 아들 정을 찾아 진나라에 보냈다.

秦王立一年,薨,謚為孝文王。

太子子楚代立,是為莊襄王。

진왕은 왕위에 오른지 1년 만에 죽었다.

시호는 효문왕(孝文王)이다.

태자 자초가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가 장양왕(莊襄王)이다.

莊襄王所母[一]華陽后為華陽太后,

真母夏姬尊以為夏太后。

莊襄王元年,以呂不韋為丞相,[二]

封為文信侯,食河南雒陽[三]十萬戶

장양왕의 어머니인 화양왕비는 화양태후가 되고,

장양왕의 친모 하희(夏姬)는 하태후로 높여졌다.

장양왕 원년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해

하남의 낙양 10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다.

注[一]索隱劉氏本作「所生母」,「生」衍字也。今檢諸本並無「生」字。

注[二]索隱下文「尊為相國」。案:百官表曰「皆秦官,金印紫綬,掌承天子助

理萬機。秦置左右,高帝置一,後又更名相國,哀帝時更名大司徒」。

注[三]索隱戰國策曰「食藍田十二縣」。而秦本紀莊襄王元年初置三川郡,地理

志高祖更名河南。此秦代而曰「河南」者,史記後作,據漢郡而言之耳。

莊襄王位三年,薨,太子政立為王,[一]

尊呂不韋為相國,號稱「仲父」。[二]

秦王年少,太后時時竊私通呂不韋。

不韋家僮萬人。

장양왕이 재위 3년 만에 죽고

태자 정이 왕의 자리를 이었다.

진왕 정은 여불위를 상국으로 올리고

중보(仲父) 즉 작은아버지라고 불렀다.

진왕은 아직 나이가 어렸음으로 태후는 아무도 몰래 여불위를 불러 정을 통했다.

불위의 집에는 가동만 만 명이 넘었다.

注[一]集解徐廣曰:「時年十三。」

注[二]正義仲,中也,次父也。蓋效齊桓公以管仲為仲父。

當是時,魏有信陵君,[一]楚有春申君,

趙有平原君,齊有孟嘗君,[二]

皆下士喜賓客以相傾。

당시 위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 초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

조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 제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있었는데

모두 빈객을 모으기를 좋아하여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呂不韋以秦之彊,羞不如,

亦招致士,厚遇之,至食客三千人。

여불위는 진나라는 강대국임으로

그들보다 빈객들을 많이 모으지 못한다면 수치라고 여겨

그 역시 선비들을 초빙하여 대우를 매우 후하게 하여

3천 명이 넘는 식객들을 모았다.

是時諸侯多辯士,如荀卿之徒,著書布天下。

그때 많은 변사들이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유세를 하고 있었는데

순경(荀卿)도 그 중 한 사람으로써 책을 저술하여 세상에 반포하고 있었다.

呂不韋乃使其客人人著所聞,

集論以為八覽﹑六論﹑十二紀,二十餘萬言。[三]

여불위는 즉시 그의 빈객들을 시켜

당시 다른 사람들이 저술한 책들을 모아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 등의 20여 만자로 된 책을 편찬했다.

以為備天地萬物古今之事,

號曰呂氏春秋。

이로써 천지만물과 고금의 일들을 모두 기록했다고 하며

그 책 이름을 여씨춘추(呂氏春秋)1)라고 명명했다.

布咸陽[四]市門,懸千金其上,

延諸侯游士賓客有能增損一字者予千金。

함양성 시중의 조문 위에 천금을 걸어놓고 공포하기를

제후들이나 각 나라의 유세객이나 빈객들 중에서

이 책에 한 자라도 글을 더하거나 감할 수 있다면 천금을 상금으로 주겠다고 했다.

注[一]正義年表云秦昭王五十六年,平原君卒;始皇四年,信陵君死;始皇九

年,李園殺春申君。孟嘗君當秦昭王二十四年已後而卒,最早。

注[二]索隱按:王劭云「孟嘗﹑春申死已久」。據表及傳,孟嘗﹑平原死稍在前。

信陵將五國兵攻秦河外,正當在莊襄王時,不韋已為相。又春申與不韋並時,

各相向十餘年,不得言死之久矣。

注[三]索隱八覽者,有始﹑孝行﹑慎大﹑先識﹑審分﹑審應﹑離俗﹑時君也。

六論者,開春﹑慎行﹑貴直﹑不苟﹑以順﹑士容也。十二紀者,記十二月也,

其書有孟春等紀。二十餘萬言,二十六卷也。

注[四]索隱地理志右扶風渭城縣,故咸陽,高帝更名新城,景帝更名渭城。案:

咸訓皆,其地在渭水之北,北阪之南,

水北曰陽,山南亦曰陽,皆在二者之陽也。

始皇帝益壯,太后淫不止。

呂不韋恐覺禍及己,乃私求大陰人嫪毐以為舍人,

時縱倡樂,使毐以其陰關桐輪而行,[一]

令太后聞之,以啗太后。

시황제가 장성했음에도 태후는 음행을 그만두지 않았다.

여불위는 태후와의 일이 발각되어 그 화가 자기에 미칠 것을 두려워

비밀리에 양물이 대단히 큰 노애(嫪毐)라는 사람을 찾아 사인으로 삼아

유흥장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노애로 하여금 그의 양물을 동으로 만든 수레바퀴를

가운데에 끼고 돌리는 묘기를 펼치도록 해서

고의로 태후의 귀에 들리도록 해서 유인했다.

太后聞,果欲私得之。

呂不韋乃進嫪毐,詐令人以腐罪[二]告之。

소문을 듣게 된 태후가 과연 비밀리에 노애를 찾았다.

여불위가 노애를 태후궁으로 들여보내면서

다시 사람을 시켜 그를 궁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고 고변하게 했다.

不韋又陰謂太后曰:

「可事詐腐,則得給事中。」

그리고는 여불위가 태후를 찾아가 은밀히 말했다.

" 거짓으로 궁형을 받게 한 다음 궁중의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곁에 두십시오. "

太后乃陰厚賜主腐者吏,詐論之,

拔其鬚眉為宦者,遂得侍太后。

태후가 은밀히 궁형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후한 재물을 하사하고

노애에게 궁형을 집행한 것처럼 꾸미고

그의 몸에 난 수염과 눈썹을 뽑아 내시로 만들고는

드디어 태후를 시중들게 했다.

太后私與通,絕愛之。

有身,太后恐人知之,

詐卜當避時,徙宮居雍。[三]

태후가 노애와 아무도 몰래 정을 통하기 시작하더니

노애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이윽고 임신하게 된 태후가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을 걱정한 나머지

점을 쳐 거짓 점괘를 만들어 좋지 않은 때를 피하기 위해

거처하는 곳을 옹(雍)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嫪毐常從,賞賜甚厚,

事皆決於嫪毐。

嫪毐家僮數千人,

諸客求宦為嫪毐舍人千餘人。

노애가 항상 태후를 시종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재물로 후하게 대했다.

태후의 일은 모두 노애의 손에서 처결되었다.

노애는 수천 명의 가동을 거느렸고

많은 사람들이 궁형을 받아

노애의 사인으로 일하고 싶다는 사람만도 천여 명이 넘었다.

注[一]正義以桐木為小車輪。

注[二]正義腐音輔,謂宮刑胥靡也。

注[三]正義雍故城在岐雍縣南七里,有秦都大鄭宮。

始皇七年,莊襄王母夏太后薨。

孝文王后曰華陽太后,與孝文王會葬壽陵。[一]

夏太后子莊襄王葬芷陽,[二]故夏太后獨別葬杜東,[三]曰

「東望吾子,西望吾夫。後百年,旁當有萬家邑」。[四]

시황 7년(기원전 240년), 장양왕의 생모 하태후가 죽었다.

효문왕후 화양태후가 효문왕과 같이 수릉(壽陵)에 합장되었고

하태후의 아들 장양왕은 지양(止揚)에 장사지냈음으로

하태후는 결국 혼자 두동(杜東) 묻히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보고 말했다.

" 동쪽으로는 아들이 서쪽으로는 남편을 바라 볼 수 있으니

수백 년 후에는 아마도 주위에 만호의 사람이 사는 성읍이 들어서게 되겠구나!"

注[一]正義秦孝文王陵在雍州萬年縣東北二十五里。

注[二]索隱芷音止。地理志京兆霸陵縣故芷陽。案:在長安東也。正義秦莊襄

陵在雍州新豐縣西南三十五里。始皇在北,故俗亦謂之「見子陵」。

注[三]索隱杜原之東也。正義夏太后陵在萬年縣東南二十五里。

注[四]索隱按:宣帝元康元年起杜陵。漢舊儀武、昭、宣三陵皆三萬戶,計去

此一百六十餘年也。

始皇九年,有告嫪毐實非宦者,常與太后私亂,

生子二人,皆匿之。與太后謀

曰「王即薨,以子為後」。[一]

시황 9년(서기 238년),

실제로 환관이 아닌 노애가 태후와 침식을 같이하여

아들 둘을 낳아 감추어 기르고 있으면서

태후와의 모의를 고변했다.

“만일 왕이 죽는다면

그 아들로 후계자로 삼으려 합니다.”

於是秦王下吏治,具得情實,事連相國呂不韋。

그래서 진왕이 관리에게 사실 여부를 조사하라고 명하자

그 고변이 사실임이 들어나고 상국 여불위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九月,夷嫪毐三族,殺太后所生兩子,而遂遷太后於雍。[二]

諸嫪毐舍人皆沒其家而遷之蜀。[三]

王欲誅相國,為其奉先王功大,及賓客辯士為游說者眾,

王不忍致法。

9월 노애의 삼족을 멸하고 태후의 소생 두 아들을 죽인 다음

태후를 옹에서 다른 곳으로 쫓아내어 연금시켰다.

노애의 수많은 사인들은 그 가족들과 함께 모두 촉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다.

진왕이 상국을 주살하려고 했으나 선왕을 받드는 공이 큰것을 생각해서

여불위의 빈객들과 변사들이 죽이면 안된다고 여러 대중들에게 유세했기 때문에

왕은 차마 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注[一]集解說苑曰:「毐與侍中左右貴臣博弈飲酒,醉,爭言而?,瞋目大叱曰:

『吾乃皇帝假父也,寠人子何敢乃與我亢!』所與?者走,行白始皇。」索隱

劉氏寠音其矩反。今俗本多作「屢」字,蓋相承錯耳,不近詞義。今按:說苑

作「寠子」,言輕諸侍中,以為窮寠家之子也。

注[二]索隱按:說苑云遷太后棫陽宮。地理志雍縣有棫陽宮,秦昭王所起也。

注[三]索隱家謂家產資物,並沒入官,人口則遷之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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