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八十四

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

굴원가생열전 제24

24-2.가의열전 04

後歲餘,賈生徵見。

孝文帝方受釐,[一]坐宣室。[二]

그후 1년여 뒤에 가생은 왕의 부름을 받고 알현했다.

효문제는 제사 음복을 받고 선실(宣室)에 있었다.

上因感鬼神事,而問鬼神之本。

왕은 귀신의 일에 느낀 바 있어

귀신의 근본에 대해 질문했다.

注[一]集解徐廣曰:「祭祀福胙也。」駰案:如淳曰「漢唯祭天地五畤,皇帝不

自行,祠還致福」。釐音僖。

注[二]集解蘇林曰:「未央前正室。」索隱三輔故事云:「宣室在未央殿北。」

應劭云:「釐,祭餘肉也。音僖。」

賈生因具道所以然之狀。至夜半,文帝前席。

가생이 그 상태를 말하는 가운데

밤중에 이르렀고

문제(文帝)는 앞으로 다가앉았다.

既罷,曰:

「吾久不見賈生,自以為過之,今不及也。」

이야기를 마치자 문제가 말했다.

“내가 오랫동안 가생을 보지 못하여

스스로 가생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미치지 못하는구나.”

居頃之,拜賈生為梁懷王太傅。[三]

얼마 후에 가생을 양 회왕의 태부로 임명했다.

注[三]索隱梁懷王名楫,文帝子。

梁懷王,文帝之少子,

愛,而好書,故令賈生傅之。

양나라 회왕은 문제의 소자로

문제의 사랑을 받았고 글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가생을 태부로 삼았다.

文帝復封淮南厲王子四人皆為列侯。

賈生諫,以為患之興自此起矣。

문제는 회남 여왕의 아들 4인을 모두 열후로 삼았다.

가생은 환난이 여기에서 일어난다고 간(諫)하였다.

賈生數上疏,言諸侯或連數郡,

非古之制,可稍削之。文帝不聽。

가생은 여러 차례 상소했다.

제후가 여러 군을 연병하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니니 이를 줄여나가야 한다고 했으나

문제는 듣지 않았다.

居數年,懷王騎,墮馬而死,[一]無後。

賈生自傷為傅無狀,哭泣歲餘,亦死。

수년 후 회왕은 말을 타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후사가 없었다.

가생은 태부로 해놓은 일이 없음을 상심하고

한 해 남짓 곡읍하다가 또한 죽었다.

注[一]集解徐廣曰:「文帝十一年。」

賈生之死時年三十三矣。

及孝文崩,孝武皇帝立,

舉賈生之孫二人至郡守,

가생이 죽을 때의 나이는 33세였다.

효문제가 죽고 효무황제가 서게 되었을 때

가생의 손자 두 사람이 기용되어 군수에 이르렀다.

而賈嘉最好學,世其家,與余通書。

가가(賈嘉)는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 대를 이었는데

나와도 편지 왕복이 있었다.

至孝昭時,列為九卿。

효소제 때에 이르러 구경(九卿)의 반열에 참여했다.

太史公曰:

余讀離騷﹑天問﹑招魂﹑哀郢,悲其志。

適長沙,觀屈原所自沈淵,[一]

未嘗不垂涕,想見其為人。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離騷﹑ 天問 ﹑招魂 ﹑哀郢 등의 초사를 읽고 굴원의 뜻을 슬퍼했다.

또 장사에 가서 굴원이 스스로 빠져죽은 못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사람됨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注[一]索隱按:荊州記云「長沙羅縣,北帶汨水。去縣四十里是原自沈處,北岸有廟也」。

及見賈生弔之,

又怪屈原以彼其材,游諸侯,

何國不容,而自令若是。

가생이 굴원을 조상한 글을 볼 적에,

또 굴원이 그만한 재질로 제후들을 유세하였다면

어느 나라엔들 용납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스스로 이 같은 최후를 맞은 것을 괴이히 여겼다.

讀服烏賦,同死生,輕去就,

又爽[二]然自失矣。

<복조부>를 읽어보니

죽고 사는 것을 같은 것으로 보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가볍게 여겼다.

또 가슴이 텅 비는 것 같아 멍하니 자신을 잊었다.

注[二]集解徐廣曰:「一本作『奭』。」

【索隱述贊】屈平行正,以事懷王。瑾瑜比潔,日月爭光。忠而見放,讒者益

章。賦騷見志,懷沙自傷。百年之後,空悲弔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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