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八十四

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

굴원가생열전 제24

1.굴원열전 02

屈平既絀,

其後秦欲伐齊,齊與楚從親,〔一〕

굴원이 배척되어 왕과 사이가 소원해진 뒤에

진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제나라가 초나라와 우호관계를 수립하여 합종을 맺었다.

注[一]正義上足松反。

惠王患之,乃令張儀詳去秦,厚幣委質事楚,曰:

진혜왕(秦惠王)이 이를 근심하여

장의를 초나라에 보내 후한 예물을 바치게 하고

위질(委質)의 예를 행하여 초나라를 섬기겠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秦甚憎齊,齊與楚從親,

楚誠能絕齊,秦願獻商、於之地六百里。」

“ 우리 진나라는 제나라에 많은 원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는 초나라와 우호관계를 수립하여 합종을 맺고 있습니다.

만일 초나라가 진실로 제나라와 절교를 한다면

우리 진나라는 상오(商於)의 600리 땅을 할양하겠습니다.”

楚懷王貪而信張儀,

遂絕齊,使使如秦受地。張儀詐之曰:

초회왕은 욕심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장의의 말을 믿고

제나라와의 동맹을 파기한 후에

사자를 진나라에 보내 상오의 땅 600리를 받아오게 했다.

그러나 장의가 사술을 부려 말했다.

「儀與王約六里,不聞六百里。」

“ 이 장의가 초왕과 주기로 한 땅은 6리이지

600리를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楚使怒去,歸告懷王。

懷王怒,大興師伐秦。

秦發兵擊之,

초나라 사자가 화를 내며 돌아와 회왕에게 보고했다.

분노한 회왕이 대군을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자

진나라도 군사를 보내 반격했다.

大破楚師於丹、淅,〔二〕斬首八萬,

虜楚將屈,[三]遂取楚之漢中地。[四]

초군을 단수(丹水)와 석수(淅水)에서 대파한 진군은

그 군사 8만의 목을 베었으며

초장 굴개(屈丐)를 포로로 잡고

마침내 초나라의 한중(漢中) 땅을 점령했다.

注[二]索隱二水名。謂於丹水之北,淅水之南。丹水﹑淅水皆縣名,在弘農,

所謂丹陽﹑淅。正義丹陽,今枝江故城。

注[三]索隱屈,姓。,名,音蓋也。

注[四]索隱徐廣曰:「楚懷王十六年,張儀來相;十七年,秦敗屈。」正義梁州。

懷王乃悉發國中兵 以深入擊秦,

戰於藍田。

회왕이 다시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진나라 땅 깊숙이 쳐들어가

남전(藍田)에서 진군과 교전에 들어갔다.

魏聞之,襲楚至鄧。[五],

楚兵懼自秦歸。

이에 위나라가 알고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기습하여 등(鄧)에 이르렀다.

이를 두려워한 초군은 할 수 없이 진나라로부터 회군했다.

注[五]索隱按:此鄧在漢水之北,故鄧侯城也。

而齊竟怒不救楚,楚大困。

합종을 파기한 초나라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제나라는

초나라에 구원군을 보내지 않아

이로써 초나라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明年,秦割漢中地 與楚以和。楚王曰:

「不願得地,願得張儀 而甘心焉。」

다음 해에 진나라가 한중의 땅을 떼어 초나라에 돌려주겠다며

강화를 청해왔다. 이에 초회왕이 진나라 사자에게 말했다.

“ 내가 바라는 것은 한중의 땅이 아니오.

내가 장의만 얻는다면 그것으로써 매우 만족하겠소.”

張儀聞,乃曰:

「以一儀而當漢中地,臣請往如楚。」

장의가 그 말을 전해 듣고 말했다.

“ 이 장의 한 사람으로 한중의 땅을 감당할 수 있다면,

제가 초나라에 들어가겠습니다.”

如楚,又因厚幣用事者臣靳尚,

이윽고 장의가 초나라에 당도하여

많은 뇌물을 초나라의 권신 근상(靳尙)에게 바쳤다.

而設詭辯於懷王之寵姬鄭袖。

懷王竟聽鄭袖,復釋去張儀。

근상은 초왕의 총희 정수(鄭袖)로 하여금

궤변으로 초왕을 현혹시키게 했다.

초왕은 정수의 말에 미혹되어

장의를 석방하여 진나라에 돌아가게 했다.

是時屈平既疏,不復在位,使於齊,

이때 굴원은 이미 초왕과 사이가 소원하여

관직에 다시 오르지 못하고 있다가

제나라에 사자로 가 있었다.

顧反,諫懷王曰:

「何不殺張儀?」

이윽고 제나라에서 돌아온 굴원이 초왕에게 물었다.

“ 어째서 장의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懷王悔,追張儀不及。[一]

회왕이 후회하고

추격군을 보내 장의를 잡으려고 했으나

장의는 멀리 달아난 후였다.

注[一]索隱按:張儀傳無此語也。

其後諸侯共擊楚,大破之,殺其將唐眛。[一]

그 후에 제후들이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군을 크게 물리치고 그 대장 당매(唐眛)를 죽였다.

注[一]集解徐廣曰:「二十八年敗唐眛也。」正義眛,莫葛反。

時秦昭王與楚婚,欲與懷王會。懷王欲行,

진나라의 새로운 군주 소양왕(昭襄王)이 혼인을 맺어

양국이 우호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초회왕과 회합을 갖자고 했다.

屈平曰:

「秦虎狼之國,不可信,不如毋行。」[一]

注[一]索隱按:楚世家昭睢有此言,蓋二人同諫王,故彼此各隨錄之也。

이에 굴원이 회왕에게 말했다.

“ 진나라는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나라입니다.

결코 믿을 수 없으니 가시면 안 될 것입니다.”

懷王稚子子蘭勸王行:「柰何絕秦歡!」

懷王卒行。

그러나 회왕의 어린 아들 자란(子蘭)이

“ 어째서 진나라의 호의를 물리치시는 것입니까?”라고 말하자

결국은 회왕은 진왕을 만나러갔다.

入武關,秦伏兵絕其後,因留懷王,[二]

以求割地。

회왕이 무관을 통하여 진나라 땅에 들어가자

진나라가 군사를 매복시켜 그 퇴로를 끊고 회왕을 억류시켰다.

진나라는 회왕에게 초나라 땅을 떼어 할양하라고 강요했다.

注[二]集解徐廣曰:「三十年入秦。」

懷王怒,不聽。

亡走趙,趙不內。

復之秦,竟死於秦 而歸葬。

회왕이 노하여 진나라의 요청을 거절했다.

후에 회왕은 진나라에서 탈출하여 조나라로 도망쳤으나

진나라의 후환을 두려워한 조왕은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회왕은 다시 진나라에 끌려가

결국은 그곳에서 죽었다.

진나라는 회왕의 시신을 초나라에 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다.

長子頃襄王立,[一]以其弟子蘭為令尹。

楚人既咎子蘭 以勸懷王入秦而不反也。

회왕의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초왕의 자리에 오르고

그의 동생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이 되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환국하지 못한 것은

모두 자란의 잘못이라고 비난했다.

注[一]索隱名橫。

屈平既嫉之,

굴원도 자란이 행한 옛날 행위에 대해

매우 통탄스럽게 생각했다.

雖放流,睠顧楚國,

繫心懷王,不忘欲反,

冀幸君之一悟,

俗之一改也。

비록 몸은 이미 추방되었음에도

초나라를 그리워하고

초회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마음에

언젠가는 조정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도 왕이 어느 날 갑자기 깨우쳐서

나쁜 습속이 개량되기를 기대했다.

其存君興國而欲反覆之,

一篇之中三致志焉。

그는 왕을 모시고 나라를 부흥시켜

쇠퇴해 가는 국세를 역전시켜 보고자

한 편의 시 중에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하여 그 뜻을 전했다.

然終無可柰何,故不可以反,

卒以此見懷王之終不悟也。

그러나 마침내 그러한 노력도 모두 허사가 되고

진나라에 들어간 회왕은 돌아오지 못함으로 해서

결국 회왕은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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