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少年歎息而答曰:

이에 소년은 대답했다.

“不言姓名, 其意有在, 君欲强之, 則告之何難, 而所可道也, 言之長也.”

'성명을 말하지 아니함은 어떠한 뜻이 있어서 그러하온데, 당신이 구태여 알고자 할진대 가르쳐 드리는 것은 어려우리까마는, 그러나 말을 하자면 장황합니다.'

愀然不樂者久之, 乃曰:

수심 띄운 얼굴을 하고,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僕姓金, 年十歲, 能詩文, 有名學堂,

'나의 성은 김이라 하오며, 나이 십세에 시문(詩文)을 잘하여 학당(學堂)에서 유명하였고,

而年十四, 登進士第二科, 一時皆以金進士稱之.

나이 십사세에 진사 제이과에 오르니, 일시에 모든 사람들이 김진사라고 부릅니다.

僕以年少俠氣, 志意浩蕩, 不能自抑.

제가 나 어린 호협한 기상으로 마음이 호탕함을 능히 억누르지 못하고,

又以此女之故, 將父母之遺體, 竟作不孝之子,

또한 여인으로 하여 부모의 유체를 받들고서 마침내 불효의 자식이 되고 말았으니

天地間一罪人之名, 何用强知?

천지간 한 죄인의 이름을 억지로 알아서 무엇하리까?

此女之名雲英, 彼兩女之名, 一名緣珠, 一名宋玉, 皆故安平大君之宮人也.”

이 여인의 이름은 운영이오, 저 두 여인의 이름은 하나는 녹주요, 하나는 송옥이라 하는데, 다 옛날 안평대군의 궁인이었습니다.'

生曰: “言出而不盡, 則初不如不言之爲愈也.

'말을 하였다가 다하지 아니하면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은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安平盛時之事, 進士傷懷之由, 可得聞其詳乎?”

안평대군의 성시(盛時)의 일이며 진사가 상심하는 까닭을 자상히 들을 수 있겠소?'

進士顧雲英曰:

진사는 운영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星霜屢移, 日月已久, 其時之事, 汝能記憶否?”

'성상(星霜)이 여러 번 바뀌고 일월이 오래 되었으니, 그때의 일을 그대는 능히 기억하고 있소?'

雲英答曰:

운영이 대꾸했다.

“心中畜怨, 何日忘之? 妾試言之, 郞君在傍, 補其闕漏.”

'심중에 쌓여 있는 원한을 어느 날인들 잊으리까? 제가 이야기해 볼 것이오니. 낭군님이 옆에 있다가 빠지는 것이 있거든 덧붙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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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生與之揖, 因問曰:

유영은 그 소년과 인사하고 물었다.

“秀才何許人? 未卜其晝, 只卜其夜.”

'수재(秀才)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낮을 택하지 않고 밤을 택하였습니까?'

少年微哂曰: “古人云: 傾蓋若舊, 正謂此也.”

소년은 생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옛 사람이 말한 경개약구(傾蓋若舊)란 말은 바야흐로 우리를 두고 한 말이지요.'

[주]경개약구(傾蓋若舊);처음 만나 친함이 친구와 같다.

경개(傾蓋):수레를 멈추고 덮개를 기울인다는 뜻으로, 우연히 한 번 보고 서로 친해짐을 이르는 말. 공자가 길을 가다 정본(程本)을 만나 수레의 덮개를 젖히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相與鼎足而坐話.

세 사람은 가마솔밭처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女低聲呼兒, 則有二丫鬟, 自林中出來.

미인이 나지막한 소리로 아이를 부르니, 차환(시종 드는 계집 아이) 두 명이 숲 속에서 나왔다.

女謂其兒曰:

미인은 그 아이에게 말했다.

“今夕邂逅故人之處, 又逢不期之佳客,

'오늘 저녁 우연히 고인(故人)을 만났고, 또한 기약하지 않았던 반가운 손님을 만났으니,

今日之夜, 不可寂寞而虛度.

오늘밤은 쓸쓸히 헛되이 넘길 수 없구나.

汝可備酒饌, 兼持筆硯而來.”

그러니 네가 가서 주찬(酒饌)을 준비하고, 아울러 붓과 벼루도 가지고 오너라.'

二丫鬟承命而往, 少旋而返, 飄然若飛鳥之往來.

두 차환은 명령을 받고 갔다가 잠시 후 돌아 왔는데 빠르기가 나는 새 오락가락 하는 것과 같았다.

琉璃樽盃, 紫霞之酒, 珍果奇饌, 皆非人世所有.

유리로 만든 술병과 술잔, 그리고 자하주(신선이 마시는 자줏빛의 술)와 진기한 안주 등은 모두 인간세상의 것은 아니더라.

酒三行, 女口新詞, 以勸其酒, 詞曰:

술이 삼순배 돌자, 미인이 새로운 노래를 부르며 술을 권했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重重深處別故人, 깊고 깊은 궁 안에서 고운 님 여의나니

天緣未盡見無因. 하늘의 연분 미진한데 뵈올 길 바이없네

幾番傷春繁花時, 꽃피는 봄날이면 몇 번이나 울었던가

爲雲爲雨夢非眞. 밤마다의 상봉은 꿈이었지 현실이 아니어라

消盡往事成塵後, 지난 일이 허물어져 티끌이 되었어도

空使今人淚滿巾. 부질없이 나로 하여 눈물짓게 하누나

歌竟, 欷歔飮泣, 珠淚滿面. 生異之, 起而拜曰:

노래를 마치고 나선 한숨을 '후유'쉬면서 느껴 우니, 구슬 같은 눈물이 얼굴을 덮었다. 유영은 이상히 여겨 일어나 절을 하고 말했다.

“僕雖非錦繡之腸, 早事儒業, 稍知文墨之事.

'내 비록 양가의 집에 태어난 몸은 아니오나, 일찍부터 문묵(文墨)에 종사하여 조금 문필(文筆)의 공을 알고 있거니와,

今聞此詞, 格調淸越, 而意思悲凉, 甚可怪也.

이제 그 가사를 들으니, 격조가 맑고 뛰어나시나, 시상이 슬프니 매우 괴이하구려.

今夜之會, 月色如晝, 淸風徐來, 猶足可賞, 而相對悲泣, 何哉?

오늘밤은 마침 월색이 낮과 같고 청풍이 솔솔 불어오니 이 좋은 밤을 즐길 만하거늘, 서로 마주 대하여 슬피 우는 건 어인 일이오.

一盃相屬, 情義已孚, 而姓名不言, 懷抱未展, 亦可疑也.”

술잔을 더함에 따라 정의가 깊어졌어도 성명을 서로 알지 못하고, 회포도 펴지 못하고 있으니 또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소. '

生先言己名而强之,

유영은 먼저 자기의 성명을 말하고 강요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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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靑坡士人柳泳, 飽聞此園之勝槪, 思欲一遊焉, 而衣裳藍縷. 容色埋沒, 自知爲遊客之取笑, 況將進而趑趄者久矣.

청파사인 유영은 이 동산의 경개를 실컷 듣고서 한 번 놀러가자고 벼렸지만 의상이 남루하고 용모가 남에게 못미쳐 유객들의 비웃음을 살 것을 알면서도 행차하려다가 주저한 지가 오래였다.

萬歷辛丑春三月旣望, 沽得濁醪一壺, 而旣乏童僕, 又無朋知,

만력(萬曆) 신축(辛丑,1601년) 춘삼월 16일에 탁주 한 병을 샀으나 동복도 없고 또한 친근한 벗도 없었다.

躬自佩酒, 獨入宮門, 則觀者相顧, 莫不指笑.

몸소 술병을 차고 홀로 궁문으로 들어가 보니, 구경 온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고 손가락질하면서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生慙而無聊, 乃入後園. 登高四望, 則新經兵燹之餘, 長安宮闕, 滿城華屋, 蕩然無有,

유생은 하도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다가 바로 후원으로 들어갔다. 높은데 올라서 사방을 보니, 새로 임진왜란을 갓 겪은 후라, 장안의 궁궐과 성안의 화려했던 집들은 탕연(蕩然)하였다.

壤垣破瓦, 廢井堆砌. 草樹茂密, 唯東廊數間, 蘬然獨存.

부서진 담도 깨어진 기와도, 묻혀진 우물도, 흙덩어리가 된 섬돌도 찾아볼 수 없었다. 풀과 나무만이 우거져 있었으며, 오직 동문 두어 칸만이 우뚝 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生步入西園, 泉石幽邃處,

유생은 천석(泉石)이 있는 그윽하고도 깊숙한 서원으로 들어가니,

則百草叢芊, 影落澄潭, 滿地落花, 人跡不到,

온갖 풀이 우거져서 그림자가 밝은 못에 떨어져 있었고, 땅 위에 가득히 떨어져 있는 꽃잎은 사람의 발길이 이르지 아니하며

微風一起, 香氣馥郁.

미풍이 일 적마다 향기가 코를 찔렀다.

生獨坐岩上, 乃咏東坡,

유생은 바위 위에 앉아 소동파가 지은

‘我上朝元春半老, 滿地落花無人掃’之句,

我上朝元春半老 아침에 일어나보니 봄은 거의 지나갔고

滿地落花無人掃 지천으로 널린 낙화 쓰는 이 없네.

라는 시구(詩句)를 읊었다.

輒解所佩酒, 盡飮之, 醉臥岩邊, 以石支頭.

문득 차고 있던 술병을 풀어서 다 마시고는 취하여 바윗가에 돌을 베고 누웠다.

俄而酒醒, 擡頭視之, 則遊人盡散,

잠시 후 술이 깨어 얼굴을 들어 살펴보니 유객은 다 흩어지고 없었다.

山月已吐, 烟籠柳眉, 風動花腮.

동산에는 달이 떠 있었고, 연기는 버들가지를 포근히 감쌌으며, 바람은 꽃잎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時聞一條軟語, 隨風而至.

그때 한 가닥 부드러운 말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生異之, 起而訪焉,

유영은 이상히 여겨 일어나서 찾아가 보았다.

則有一少年, 與絶色靑蛾, 斑荊對坐, 見生至, 欣然起迎.

한 소년이 절세(絶世) 미인(美人)과 마주 앉아 있다가 유영이 옴을 보고 흔연히 일어나서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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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壽聖宮, 卽安平大君舊宅也, 在長安城西仁旺山之下.

수성궁은 안평대군의 옛집으로 서울 서쪽 인왕산 밑에 자리잡았다.

山川秀麗, 龍盤虎踞,

산천이 수려하고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형상이었다.

社稷在其南, 慶福在其東. 仁旺一脈, 逶迤而下, 臨宮㞳起.

사직단은 그 남쪽에 있고 경복궁은 그 동쪽에 있다. 인왕산 줄기가 굽이져 내려오다 수성궁에 이르러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다.

雖不高峻, 而登臨俯覽, 則通衢市廛, 滿城第宅, 碁布星羅, 歷歷可指, 宛若絲列分派.

비록 험준하지는 않았으나 올라가 내려다보면 사통오달로 툭 터인 거리의 상점들과 성에 가득찬 집들은 바둑판이나 성좌처럼 벌여 있어 역력히 가리킬 수 있고, 완연함은 베틀의 날줄이 나누어 갈라진 듯했다.

東望則宮闕縹緲, 複道橫空, 雲烟積翠, 朝暮獻態, 眞所謂絶勝之地也.

동쪽을 바라보면 궁궐이 아득한데 복도가 공중에 비껴 있고, 구름과 안개는 비취빛으로 쌓여 아침 저녁으로 자태를 헌신하니 진실로 이른 바 절승의 경지였다.

一時酒徒射伴, 歌兒笛童, 騷人墨客, 三春花柳之節, 九秋楓菊之時, 則無日不遊於其上, 吟風咏月, 嘯翫忘歸.

당대의 술꾼들과 활꾼들, 노래하는 기녀와 피리부는 아이들, 시인 묵객들은 삼월의 꽃놀이 시기와 구월 단풍철이 되면 그 위에서 놀지 않는 날이 없었고 풍월을 읊조리고 풍악을 즐기느라 돌아가는 것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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