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이 현미경과 적외선, X선 촬영 및 형광분석법 등으로 조사해 보니 초상화는 원래 완성작이었으며 오랜 세월이 경과하면서 퇴화된 부분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생략된 것으로 여겨왔던 귀는 희미하지만 붉은 선으로 표현됐고 옷깃과 옷주름도 분명히 존재했다. 정밀하게 채색까지 된 사실도 밝혀졌다. 다만 무슨 이유로 선과 채색이 지워졌는지, 어떻게 얼굴만 보존될 수 있는지는 규명하지 못했다.
첫째, 내의원 관직을 얻은 1571년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까지이다. 이 21년 동안 허준은 내의(內醫)로서 크게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최고의 지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1590년(선조 23) 허준은 왕세자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 정3품의 품계를 받았다. 이 품계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규정한 서자 출신인 허준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정3품의 한계를 깰 정도의 큰 상이었다.
둘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승하하던 1608년(선조 41) 때까지이다. 허준이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하여 생사를 같이함으로써 그는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1596년(선조 29) 왕세자의 난치병을 고친 공으로 중인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 중 하나인 동반(東班)에 적을 올렸다. 1604년(선조 37)에는 임진왜란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허준은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정되는 한편, 그는 본관인 양천(陽川)의 읍호(邑號)를 받아 양평군(陽平君)이 되었다. 이와 함께 품계도 승진하여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1606년(선조 39) 선조의 중환을 호전시킨 공으로, 선조는 그에게 조선 최고의 품계인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주고자 했으나, 사간원·사헌부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셋째, 1608년(선조 41)부터 그가 죽던 해인 1615년(광해 7)까지이다. 이 7년은 시련기로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쫓겨나고 먼 곳으로 귀향을 가는 등 불운이 있었고, 귀양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권세가 없는 평범한 내의로 지내다 고요하게 삶을 마쳤다. 1608년(선조 41) 선조가 병으로 죽자, 그것이 수의(首醫)인 그의 잘못이라는 탄핵을 받아 허준은 삭탈관직 되는 한편, 의주 유배형이 처해졌다. 그의 유배는 1년 8개월이 지난 1609년(광해 1)에 풀렸으며, 6년 후인 1615년(광해 7) 세상을 떴다. 사후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추증했다.
의관 허준의 출세는 조선의 역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격의 연속이었다. 이는 그의 의술 솜씨와 우직한 충성이 빚어낸 성취였다. 이와 함께 이를 질시한 양반계급의 불만도 작지 않았다. ‘양반에게 굽실거리지 않으며, 임금의 은총을 믿고 교만스럽다.’는 세평(世評)도 존재했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까지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선조를 호종하여 그의 건강을 돌본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6년 왕세자 광해군의 병을 맡게되어 이를 고친 공로로 허준은 정2품하계 자헌대부로 가자되고 김응탁(金應鐸)·정예남(鄭禮男)은 승급되었다. 이어 허준은 정2품상계 정헌대부와 중추부의 정2품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그가 정헌대부에 오르자 즉시 삼사의 간원들이 나서서 탄핵, 의관들의 가자를 취소할 것을 청했으나 선조가 "공로가 있는 자들이다"라고 하여 듣지 않았다.
1595년(선조 28년) 왕이 별전편방에 나와 침치료를 시술하였다. 이때 내의원(약방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림) 도제조 김응남, 제조 홍진, 부제조 오억령 등이 참여하였다. 1596년 이후 허준은 유의 정작(鄭碏)과 태의 양예수·김응택·이명원(李明源)·정예남 등과 편국을 설치하고 의서를 편찬, 요점을 잡아가는 시점에 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져 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선조가 허준을 다시 불러 허준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를 만들라고 하면서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며 참고하도록 조치했다.
1600년(선조 33년) 정2품 지중추부사를 겸직하던 수의(실직으로서 내의원의 최고서열) 양예수가 병사함에 따라 허준이 내의원 최선임자로 수의가 되었다. 1604년임진왜란 당시 어가 호종의 공로로 호성공신 3등에 오르게 되고, 이때 의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정1품 양평부원군에 올랐으나, 대간들의 반대로 인해 종1품 양평군(陽平君)ㅑ려ㅑ 강격되었다. 군(君)은 왕의 서자나 당상(堂上)의 위계에게 주어지는 부군(府君)의 관작을 말한다. 종1품상계인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가 1606년 이어 왕실의 병을 다스린 공로로 정1품하계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가자되었으나, 보국숭록대부는 당상관의 문관이 받는 위계라는 이유로 또 한 번 대간들의 반대를 불러 백지화되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어야 된다는 여론이 강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며 무마시켰다.
1608년음력 2월 선조가 병세가 급박하다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종래의 예에 따라 조정 신하들의 갖가지 책임 추궁을 당한 끝에 결국 3월 17일 파직당하고 공암(孔巖)으로 문외출송되었다. 문외출송(門外黜送)이란 유배의 일종으로, 죄를 지은 사람을 한성부의 사대문 밖, 곧 지방으로 추방하는 형벌이었다. 광해군은 허준을 빠른 시일내에 복귀시키려 하였으나 삼사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허준은 이런 와중에도 이미 1596년부터 왕명으로 편찬하고 있던 1610년(광해군 2년) 당시의 모든 의학 지식을 망라한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을 15년여의 연구 끝에 편술을 계속, 1609년11월 22일광해군이 석방 명령을 내릴 때까지도 계속 집필하였다.
《동의보감》은 조선 한방 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는 일본과 청나라에서도 간행될 만큼 높이 평가되었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다.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친 이후 그 해 음력 11월 22일(양력 1611년1월 5일) 귀양이 풀리고 신원(伸冤)되어 내의원에 복직하였다. 그 뒤 허준은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의서 수리 등을 맡다가, 1615년음력 8월 17일(양력 10월 9일)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다른 설에는 일본인 쓰기무라(三木榮)의 《조선의사연표 (朝鮮醫事年表)》 p.337에는 허준이 1615년 8월 17일에 사망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1615년11월 광해군은 허준의 관작을 그의 생전에 보류되었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 하계) 양평부원군으로 추증하였다.
초의선사(1786~1866)는 무안 출신으로 속가에서 성은 장씨였고 법명은 의순(意恂)이며 초의(草衣)는 호이다.
대흥사의 13대 종사의 한 사람인 대선사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 불린다.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일이 인연이 되어 6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했다. 그 후 각지로 다니며 운수행각 하다가 대흥사 10대 강사인 완호윤우(琓虎尹佑)스님의 법을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얻었다.
초의선사는 불문에 몸담고 있었으나 그 테두리에 그치지 않고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을 섭렵하며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다.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만이 선이 아니었으며 현실의 일상생활과 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차(茶)와 선(禪)을 하나로 보아 「동다송」에서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초의스님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茶) 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차의 진예(塵穢, 더러운 티끌 먼지)없는 정기(精氣)를 마시거늘 어찌 큰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겠는가(榛穢除盡精氣入, 大道得成何遠哉)!"라고 하였다. 스님에게는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詩)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詩)와 선(禪)이 둘이 아니었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을 짓고 40여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不二禪)의 오묘한 진리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기도 하였다. 한국의 다경이라 불리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우리의 차를 예찬하고 다도의 멋을 전하였으며, 범패와 원예 및 서예뿐만 아니라,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등에도 능하였다.
적의 연합군 내부에 심각한 내분이 발생했을 때, 조용히 그 혼란이 극에 달하기를 기다린다. 적의 내부의 투쟁이 격화되면 적의 연합군은 붕괴를 자초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서 비롯되는 유리한 형세를 면밀히 관찰하여 행동으로 옮길 준비를 한다.
제10계. 소리장도(笑裏藏刀) : 웃음속에 칼날을 품다.
적으로 하여금 우릴 믿게 안심시킨 후 비밀리에 일을 도모한다.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후 행동하며 변화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 부드러운 외형에 강한 내면을 숨기는 것이다.
제11계. 이대도강(李代桃僵) : 오얏나무가 복숭아나무대신 말라죽다.
운세는 반드시 기울기 마련이니, 작은 것을 희생시켜 전체의 이로움을 구해야 한다. →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제12계. 순수견양(順手牽羊) : 기회를 틈타 양을 슬쩍 끌고 가다.
적의 미세한 틈이라도 받드시 장악해야 하며, 조그만 이익이라도 반드시 얻도록 해야 한다.
공전계(攻戰計) : 제13계∼제18계
제13계. 타초경사(打草驚蛇) : 풀을 베어 뱀을 놀라게 하다.
적에게 어떤 의심이 생기면 반드시 가서 살펴보아야 한다. 자세한 정찰 후에 비로소 행동해야 한다. 반복하여 정찰해야만이 적의 숨겨진 음모를 발견할 수 있다.
제14계. 차시환혼(借屍還魂) :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시체를 빌려 부활하다.
강한 자는 이용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약한 자는 도움이 필요하니, 이용할 수 없는 것을 빌어서 이용한다. 내가 약한 자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가 나에게 구한다.
제15계. 조호리산(調虎離山) : 범을 산 속에서 유인해내다.
자연조건이 적에게 불리해지기를 기다리고 기만으로 그를 유혹한다. 적이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을 공격하도록 유혹한다.
제16계. 욕금고종(欲擒姑縱) :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풀어주다.
적을 지나치게 몰아세우면 적이 도리어 맹렬하게 반격한다. 적을 달아나게 놓아두면 그 기세가 꺾일 것이다. 적을 쫓되 다급하게 쫓지 않고, 적의 힘을 고갈시키고 전투의지를 쇠약하게 만들어 적을 분산시킨 후 사로잡아야 한다. 그러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적을 진압할 수 있다. 즉 공격을 주도면밀하게 지연시킴으로써 적을 스스로 자멸하게 만드는 것이다.
제17계. 포전인옥(抛磚引玉) : 돌을 던져서 구슬을 얻다.
지극히 유사한 것으로 적을 미혹시킨다음 공격한다.
제18계. 금적금왕(擒賊擒王) : 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는다.
적의 주력을 궤멸시키고, 그 괴수를 사로잡아 적을 와해시킨다. 용도 물을 떠나게 되면 어쩔 도리가 없게 된다.
혼전계(混戰計) : 제19계∼제24계
제19계. 부저추신(釜底抽薪) : 솥 밑에 타고 있는 장작을 꺼내 끓어오르는 것을 막다.
강한 적을 만났을 때는 정면으로 공격하지 말고 가장 약한 곳을 찾아내 공략하라. 이것이 부드러운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제20계. 혼수모어(混水摸魚) : 흐린 물에서 고기를 잡다.
적의 내부가 혼란한 틈을 타서, 그 약자를 당신의 편에 끌어들여라. 그러면 적은 자멸하게 될 것이다.
제21계. 금선탈각(金蟬脫殼) : 매미가 허물을 벗듯 감쪽같이 몸을 빼 도망하다.
적이 행동하지 못하도록, 진지의 원형을 보존하고 군대가 여전히 주둔하고 있는 것처럼 하라. 그러면 적이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제22계. 관문착적(關門捉賊) : 문을 닫아 걸고 도적을 잡다.
세력이 약한 소규모의 적에 대해서는 포위하여 멸망시켜야 한다. 퇴각하게 놓아두면 섬멸하는 데 불리하다.
제23계. 원교근공(遠交近攻) :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다.
멀리 있는 적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적을 공격하는 편이 유리하다. 멀리 있는 적과는 정치적 주장이 다를지라도 잠시 연합하라.
제24계. 가도벌괵(假道伐虢) : 기회를 빌미로 세력을 확장시키다.
두 개의 강대국 틈에 끼인 소국이 적의 위협을 받게 되면 즉시 군대를 보내 구해줌으로써 영향력을 확장시켜야 한다.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단지 말만 앞세우면 신뢰받을 수 없다.